프르제미슬 왕가
보헤미아 공국에서 보헤미아 왕국으로
프르제미슬 왕조의 문장
외국어 표기 The Přemyslids(영어), Přemyslovci
시기 867년 ~ 1306년
별칭 보헤미아 왕국
지역 체코의 보헤미아
프르제미슬 왕조 : 공국에서 왕국으로
보헤미아에 슬라브인들이 정착한 것은 대략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였다. 일부에서는 보헤미아가 7세기에 이 지역에 결성된 사모제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헤미아라는 용어는 슬라브인들이 정착하기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 정착했었던 켈트족의 일파인 보이족에서 유래하며, 보헤미아는 보이족의 땅이라는 의미였다.
9세기 초반 샤를마뉴 이후 프랑크 왕국이 보헤미아를 차지했지만, 9세기 중반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모라비아 공국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모라비아의 모이미르와 스바토플룩은 동프랑크 루트비히와의 협상을 통해 보헤미아에서 모라비아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모라비아는 프랑크와 헝가리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세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 880년 프르제미슬 가문의 보르지보이가 보헤미아를 차지하면서 독자적인 공국이 되었다.
보헤미아의 첫 번째 군주인 보르지보이 사후 보헤미아는 잠시 모라비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보르지보이의 아들인 스티피흐네프가 동프랑크 아르눌프와의 동맹을 통해 보헤미아를 되찾았다. 또한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 오토 대제와 연합한 프르제미슬 가문이 헝가리를 격퇴하면서, 헝가리에 의해 멸망된 모라비아 서쪽 부분도 차지했다.
프르제미슬 가문이 왕조로, 보헤미아가 공국에서 왕국으로 올라서기까지는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쳤다. 우선 브라티슬라프 2세 시기(1085년 ~ 1092년)와 블라디슬라프 2세가 치세 중이었던 1140년에서 1172년까지는 당대에 한정된 한시적 왕국으로 인정되었다. 그 후 1212년 오타카르 1세 시기에 와서야 시실리 금인 칙서를 통해 비로소 세습 왕국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보헤미아 왕국은 870년 보르지보이 1세부터 1212년까지의 공국 시기와 1212년 이후 왕국 시기로 구분된다.
오타카르 1세 시기에는 많은 독일인들이 보헤미아 왕국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당시 오타카르 1세는 독일과 보헤미아 왕국 사이의 국경 지대 개발을 위해 이들의 이주를 적극 장려했고, 이 지역의 광산 개발과 수공업 발전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이때 스트르지브로, 쿠트나호라, 하블리치쿠프 브로드, 이흘라바와 같은 도시가 개발되었는데, 오타카르는 새로이 개발한 광산, 수공업 지역으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여 왕국의 안정과 발전은 물론 외부로의 팽창을 지속할 수 있었다.
철과 황금의 시대
오타카르 1세의 아들 바츨라프 1세 시기에는 보헤미아의 외교, 안보의 기본 방향이 좀 더 공세적으로 전환되었다. 바츨라프 1세는 아들인 모라비아 후작 오타카르 2세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보헤미아의 영향권에 넣어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를 알프스에서 시작해 아드리아 해까지 확장했다.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의 왕위는 물론 오스트리아 공작으로 고지대 오스트리아와 저지대 오스트리아, 스트리아 일부를 차지했고, 전쟁을 통해 스트리아 전체와 카린티아 대부분, 카르니올라 일부를 정복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몸집을 키우고 아울러 경제적 풍요를 이루어낸 오타카르 2세는 이로 인해 ‘철과 황금의 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타카르 2세는 크레센뷔른 전투를 통해 헝가리를 격파했고, 프러시아 이교도를 물리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쾨니히스부르크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가 현재의 칼리닌그라드이다.
그러나 1273년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성장했고, 국내의 귀족 반란이 이어지면서 오타카르 2세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결국 마치펠트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그가 정복했던 여러 지역들이 보헤미아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철과 황금의 왕으로 중부 유럽 최강의 군주로 군림했던 오타카르가 사라지면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성장해 나갔다. 오타카르 2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2세는 북동쪽으로 관심을 돌려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들인 바츨라프 3세를 헝가리와 폴란드의 왕으로 앉혔다. 바츨라프 3세 시기 보헤미아는 헝가리에서 발트 해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며 대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처럼 보헤미아가 13세기 영토 확장과 경제적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리한 국제정세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지중해 문제에 몰두하고 있던 관계로 보헤미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1220년부터 1242년까지의 몽골 침입으로 제국의 관심은 보헤미아가 아니라 전선이 형성된 폴란드와 헝가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보헤미아 왕국 시기에는 독일로부터 많은 이주민을 받아들이면서 국경 지대의 산림과 광산을 개발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수공업을 발전시켰는데, 보헤미아의 왕들은 여기에서 얻은 막대한 부로 내정의 안정은 물론 외부로의 팽창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바츨라프 3세가 암살당하면서 프르제미슬 왕조는 무너졌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1세와 바츨라프 2세의 사위였던 인드르지흐가 짧은 기간 동안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310년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얀이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보헤미아에서 프르제미슬 왕조는 사라지고 룩셈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