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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rbon Dynasty

부르봉 왕가

 

절대주의와 혁명

 

외국어 표기 Bourbon Dynasty(영어), Les Bourbons, Dynastie de Bourbon

시기 1589~ 1792, 1815~ 1848

별칭 카페 왕조 방계

지역 프랑스

 

부르봉 왕조 초기: 절대주의를 향하여

 

앙리 4세 초상화

프란스 푸르뷔스 작, 1610

 

부르봉 왕조는 1589년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3세가 남성 후사를 두지 못하고 사망하자 다시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 가문의 나바라 왕 앙리 3(프랑스 왕 앙리 4)에게 왕위 계승권이 돌아가면서 시작되었다. 즉 앙리 4세는 부계로 거슬러 올라가면 루이 9세의 막내아들이었던 로베르였으며, 따라서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4세기에 정착된 왕위 계승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참혹했던 종교전쟁을 거친 후 왕위에 오른 앙리 4(1553~ 1610, 재위 1589~ 1610)는 종교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왕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스스로는 개신교도들의 수장이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개신교도들이 자신들의 지역에서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이후 왕국의 통합과 질서 회복을 통해 프랑스인들의 삶을 다시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갈등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1610년 앙리 4세는 한 극단적인 광신도의 손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앙리 4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루이 13(1601~ 1643, 재위 1610~ 1643)는 친 합스부르크적인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과 정치적 개입들을 타파하면서 추기경 리슐리외와 함께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대내적으로 지방의 대귀족들과 개신교도 공동체들을 제압하고, 대외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면서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반을 닦았다.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은 크게 보면 앙리 4세의 목적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앙리 4세가 화해와 관용으로 왕국을 통일시키려 했다면 이들은 강력한 절대주의 왕권을 토대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는 종교보다는 국가가 우선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으며, 실제로 루이 13세 시기에 프랑스는 대내적인 개신교 탄압과 달리 대외적으로는 30년 전쟁 당시 신성로마제국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루이 14(1638~ 1715, 재위 1643~ 1715) 치세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어렸을 때 겪은 프롱드 난은 루이 14세로 하여금 지방 귀족들을 확실하게 제압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야 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도록 했다. 리슐리외의 뒤를 이은 마자랭의 재상정치가 그의 사망으로 끝나자 루이 14세는 1661년에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1680년대 초까지 재무대신 콜베르의 활약으로 국가재정이 넉넉해지자 루이 14세는 수많은 전쟁을 벌여 승리를 통해 프랑스의 영광을 과시하고자 했고,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여 지방 귀족들을 중앙집권적인 왕권에 길들이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루이 14세가 이끄는 베르사유 궁은 유럽 내 모든 군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모범이 되었다. 하지만 1683년 콜베르가 사망한 이후 자신의 영광에 도취된 루이 14세는 무리한 전쟁들을 감행하여 재정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게다가 1685년에는 낭트 칙령을 철폐하여 개신교도인 유능한 상공업 인재들을 프랑스에서 축출하였다. 이후 흉작과 기근으로 왕국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고, 이는 18세기 내내 프랑스 왕정을 괴롭힌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프랑스의 영토 확장

1552년 앙리 2세 치세-1789년 프랑스 혁명

 

절대왕정의 몰락과 혁명

 

루이 14세의 증손자로 왕위에 오른 루이 15(1710~ 1774, 재위 1715~ 1774)와 또 그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루이 16(1754~ 1793, 재위 1774~ 1792)의 치세는 루이 13세와 루이 14세가 추구한 절대왕정의 모순에서 유래한 각종 문제들이 심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1723년부터 친정을 시작한 루이 15세는 초기에는 플뢰리와 같은 유능한 재상의 활약으로 재정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국정 운영에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고등법원은 물론 민중들의 반감과 불신을 초래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무익한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전개된 7년 전쟁에서는 영국에 크게 패배하여 아메리카와 인도의 식민지를 상실하여 재정은 더욱 악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는 루이 16세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왕이 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근본적인 재정 문제를 극복하기란 힘들었다. 그 또한 7년 전쟁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하려는 시도에서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하였으나 막대한 재정만 탕진했을 뿐 별다른 소득을 취하지 못했다.

어쨌든 재정 문제의 해결 방안은 왕국 내 가장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면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성직자 및 귀족과 같은 특권계층에게 과세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개혁안들에 대해 번번이 폭군에 의한 전횡이라 평가하고 왕권을 제약하고자 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왕국의 대표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재정 문제 앞에서는 무책임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다른 한편으로는 결단력 없고 유약하기 그지없는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두 왕들의 성격에도 기인하였다. 국정의 중심이 되지 못한 취약한 왕권 아래에서 개혁안은 왕국 전체의 필수불가결한 결단이라기보다는 특정 정치 파벌이 다른 정치 파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해석되기 쉬웠다.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178955일의 총신분회의는 결국 특권계층의 기대와 달리 프랑스 대혁명으로 발전했다. 여전히 결단력이 없고 유약했던 루이 16세는 정국을 장악하지 못한 채 상황을 회피하고자 했다. 루이 16세는 프랑스를 떠나 혁명에 적대적인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려다 국경 근처 바렌에서 체포되었고, 이는 결국 1792년의 왕정 폐지와 1793년 그에 대한 사형 집행으로 이어졌다.

이후로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공화정이 탄생하였으나 다시 1799년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나폴레옹은 황제의 직위에 올라 제정을 선포하였다. 이제 남은 부르봉 왕가의 혈육들인 루이 16세의 두 동생, 즉 루이 스타니슬라스 자비에(루이 18)와 샤를 필리프(샤를 10) 및 부르봉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필리프(루이-필리프 1)는 프랑스를 떠나 기나긴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왕정복고와 시민 왕

 

1813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18156월 워털루 전투까지 이어진 드라마틱한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랑스에는 다시 왕정이 들어섰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이전 상태로 유럽의 질서를 되돌리기 위한 빈체제의 결의에 따라 프랑스에는 망명 중이었던 부르봉 왕조가 귀국하여 복고왕정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다고 해서 혁명을 거친 프랑스가 구체제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프랑스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이를 깨달은 루이 18(1755~ 1824, 재위 1815~ 1824)는 비교적 온건하게 입헌군주정의 틀에 맞춰 프랑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루이 16세 당시에도 왕보다 더 한 왕당파라는 소리를 들은 샤를 10세는 이미 즉위 전부터 극단주의적인 왕당파 세력들을 규합하여 왕국 곳곳에서 이른바 백색 테러1)를 일삼았다. 1824년에 왕위에 오른 샤를 10(1757~ 1836, 재위 1824~ 1830)는 본격적으로 절대주의 왕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고, 이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8307월 혁명에 의해 샤를 10세는 다시 한 번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고, 혁명 세력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동조했던 부르봉 왕조 방계가문 출신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를 새로운 입헌군주정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시민왕으로 즉위한 루이-필리프 1(1773~ 1850, 재위 1830~ 1848)는 초기에는 입헌군주정의 틀에 맞게 국정을 잘 운영하였다. 왕족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적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익숙했던 루이-필리프 1세는 루이 18세나 샤를 10세처럼 시대착오적인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의회와 국왕 참사회의 결정들을 존중하였다.

그렇지만 국가 전체로 본다면 대부분의 인민들이 막대한 부를 소유한 소수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즉 혈통을 재산이 대체하고,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자들만이 거액의 세금을 내고 참정권과 선거권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일으킨 18482월 혁명을 끝으로 루이-필리프 1세마저도 퇴위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부르봉 왕가에 의한 프랑스 지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987년부터 시작되어 861년 동안 이어진 카페 왕조 지배의 종말이기도 했다.

루이-필리프 1세의 초상화

프란츠 나버 윈터할터 작, 1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