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빙거 왕가
서유럽 프랑크 왕국의 초석
외국어 표기 Merovingian Dynasty(영어), Les Mérovingiens, Dynastie Mérovingienne
시기 481년 ~ 751년
별칭 Meroveus(라틴어: 메로베우스) 왕조(→ 현재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표준표기법)
Merowinger(독일어: 메로빙거) 왕조
지역 프랑크 왕국(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서부 독일 지역)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의 상황
생드니 수도원 성당에 있는 클로비스 무덤 횡와상
4세기 말 ~ 5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하고 있던 훈족의 압박을 받은 게르마니아 지역의 여러 부족들은 로마 국경이 취약해진 상황을 틈타 대규모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약탈과 서로마제국의 방어 능력 상실은 황제들로 하여금 이들과 동맹 관계를 맺게 하였다. 이는 서로마제국이 위협에 처했을 때 군대를 지원한다는 약속 하에 황제가 이들 부족에게 제국 각지에 각자의 법과 관습에 따라 생활을 영위할 지역을 부여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었다. 그 결과 5세기 전반기 내내 서로마제국 지역 곳곳에는 이들 게르만족들이 이주하여 제국 내 건립한 여러 왕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 끝에는 수에비 왕국이, 반도 남쪽에서 갈리아 남부까지에는 서고트 왕국이, 옛 카르타고 지역인 북부 아프리카에는 반달 왕국이 들어섰다.
이러한 동맹은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직접 서로마제국을 침입했을 때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였다. 하지만 훈족을 물리친 승장 아이티우스와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 사이의 갈등은 결국 20여 년에 걸친 유혈 낭자한 내분으로 이어졌고, 476년 황제 공위 상태에서 서로마제국은 소멸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에는 마지막 서로마황제를 몰아낸 오도아케르가 장악했으나 곧이어 동로마제국 황제의 승인 아래 동고트 왕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갈리아 북부 지역에는 로마 장군인 시아그리우스가 갈리아 북부 지역을 장악한 상황에서 그 동쪽으로 다양한 게르만족들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들 중 벨기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이들이 바로 프랑크족이었다.
5세기 말 유럽
메로빙거 왕조의 성립
메로빙거 가문은 프랑크족, 그중에서도 이미 5세기 초부터 로마제국의 동맹군으로 많은 활약을 펼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살리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 5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살리족 출신의 통합 프랑크족의 수장인 킬데리크는 463년 ~ 469년까지 로마제국을 위해 프랑크족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로마제국의 황위가 공석이 된 이후 킬데리크는 북부 갈리아를 장악한 시아그리우스와 대치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서고트 왕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동쪽의 작센 및 알라만족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후일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영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메로빙’이라는 명칭은 킬데리크의 아버지라고 이야기되는 전설적인 인물인 메로베(또는 메로빅, 메로베크)에서 유래한다. 현재 프랑스어 ‘메로뱅지앙’, 독일어 ‘메로빙거’는 모두 이 ‘메로베(크)’의 형용사형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킬데리크의 아들 클로비스 1세(481년 ~ 511년, 클로도비크) 시대에 프랑크족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486년경에 클로비스 1세는 시아그리우스에게 승리함으로써 북부 갈리아를 장악하였고, 496년에는 톨비악 전투를 통해 알라만족을 제압하고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507년에는 부이예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고트 왕국이 장악하고 있던 갈리아 남부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클로비스 1세는 현재의 프랑스를 비롯한 서부 독일 지역을 장악하여 프랑크 왕국을 서유럽의 강자로 급부상시켰으며, 이제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과 이탈리아를 장악한 동고트 왕국과 경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클로비스 1세는 왕비 클로틸다의 종교인 가톨릭교(아타나시우스파)를 받아들여 향후 서유럽에 가톨릭이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였다.
526년 유럽, 6세기 초 게르만 왕국들
프랑크 왕국의 성장과 분할상속
511년 클로비스가 사망한 후 왕국은 4명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상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이 왕국의 정치적 분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조가 지속되는 내내 분할상속된 프랑크 왕국은 분할과 통일의 두 가지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계승자들 사이의 공동 통치라는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계승자들에 의해 프랑크 왕국 전체가 분할되지만 계승자들 사이의 투쟁을 거쳐 분할된 지역들이 다시 통일되는 모습을 보인다. 즉 분할상속은 프랑크 왕국의 완전한 분열이나 파편화되지는 않았으며, 대외적으로도 인접한 다른 왕국들과의 경계에 의해 나름대로의 단일성을 유지해 나갔다.
이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정치적 투쟁과 군사적 충돌이 난무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왕국을 재통일한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수많은 대립황제들 사이의 분열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4세기 말까지 단일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로마제국의 경우와 유사하였다. 반대로 분할상속을 통해 서로 다른 왕국들로 완전히 분열된 이후의 카롤링거(카롤링, 카롤루스) 왕조의 프랑크 왕국은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클로비스의 사망 이후에도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서남쪽으로는 507년에 서고트 왕국이 장악했던 서남부 아퀴타니아를 확고하게 장악하였고, 동남쪽으로는 534년에 부르군트 왕국을 병합했다. 그리고 537년에는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프로방스를 획득하였다. 다고베르트 1세(629년 ~ 639년)가 수많은 분열과 부분적 통합을 거듭한 후에 왕국 전체를 다시 통일했지만, 그의 사망 이후 왕국은 크게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 세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정치사는 아퀴타니아를 장악한 아우스트라시아 왕과 부르군트(부르고뉴)를 장악한 네우스트리아 왕 사이의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정치 투쟁과 군사적 충돌은 분할상속된 각 지역 왕권들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왕국이 통합된 경우에도 왕권의 정치력 약화를 초래하여 중앙집권화를 저해하였다.
메로빙거 왕조 시기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가 프랑크 왕국을 다른 게르만 왕국들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정학적 이점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클로비스 1세가 지중해 지역에 어떠한 세력도 형성하고 있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먼저 클로비스 1세의 프랑크 왕국은 6세기 전반기 동안 진행된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지중해 재정복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옛 로마제국을 복원하려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3년과 553년에 각각 반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이들 부족과 달리 프랑크족은 멀리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로비스 1세는 늘 새로운 인적 구성원들을 자신들의 원거주지로부터 공급받으면서 이주 지역에 큰 어려움 없이 정착할 수 있었다.
메로빙거 왕가의 통치 방식
군사적 정복을 통해 설립된 메로빙거 왕조는 여타의 다른 게르만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왕국에 체계적인 중앙 및 지방 통치제도를 구비할 역량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통치는 충성 관계를 맺고 있는 왕과 부하 지휘관들 사이의 인적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에게 토지를 비롯한 각종 재물들을 분배하였고 이를 통해 다시 이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권이 지닌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 사이의 구분은 매우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왕 개인과 관련된 모든 일들은 바로 직접적으로 왕국의 일들로 연결되었다. 즉 왕과 신하 사이의 개인적 신뢰 문제는 바로 왕국의 통치 문제가 되었고, 왕 개인의 재산이 바로 왕국 재정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는 이후의 카롤링거 왕조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법과 제도에 따른 통치보다는 구체적이고도 가변적인 후견-피후견 관계에 입각한 통치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마제국 소멸 이후 문자 문화 또한 급격히 후퇴해 있는 상황에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주로 성직자에 국한되었고, 왕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 엘리트들에게서도 문자 해독력은 극히 미미하였다. 각종 문서가 아닌 왕과 신하들 사이의 전우애와 직접적인 대면이 국왕의 통치를 시행하는 주요 원동력이었다. 문자 문화의 쇠퇴는 법치의 쇠퇴와 맞물렸다. 제국 전역에 적용되던 보편적 법으로서의 로마법은 오직 동로마제국에서만 유지 가능하였다.
다른 게르만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프랑크 왕국 내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은 존재할 수 없었고 단지 각 부족별로, 그것도 로마 문화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지닌 부족을 중심으로 로마법을 모방하여 부족 법을 서툴게나마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클로비스 1세는 살리 프랑크법을 성문화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부족 법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얼마나 법에 입각한 통치가 이루어졌는지는 의심스러울 뿐이다.
중앙정부격인 왕의 궁정에 체계적인 관직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또한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관직으로는 무기와 말 관리를 담당하는 관직, 문서를 작성하고 발송하는 관직,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 등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전반적인 궁정의 일을 관장하는 궁정 재상이 있었다. 특히 후자는 왕조 후반으로 갈수록 실질적인 왕국의 실력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지방에는 왕의 신뢰를 받은 자들이 방백(comites, comte)이라는 명칭으로 파견되어 왕을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이들에게는 보수 대신 지역 영지가 주어졌는데 8세기 이후 왕권이 점차 약화되어 가면서 이 영지들은 점차 지방 귀족들의 사적인 재산으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은 지역 권력들과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소집하여 전쟁이나 사냥을 시행하거나 각종 잔치들을 벌여야 했다.
피핀누스 가문의 성장과 메로빙거 왕조의 몰락
다고베르트 1세 이후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 사이에 전개된 치열한 투쟁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였고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로빙거 왕가가 아닌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는 바로 아우스트라시아 궁정 재상직을 세습해 나가기 시작한 페팽(피피누스) 가문이었다. 페팽 가문은 뫼즈 강변 하구를 중심으로 막대한 토지와 사병(私兵), 수도원 등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허수아비로 전락한 왕을 고립시키고 왕실 재정을 조금씩 장악해 나갔다.
페팽 2세(645년 ~ 714년)는 679년 자신의 경쟁자인 네우스트리아 궁재 에브로인을 꺾은 후 다시 전 지역을 통일한 메로빙거 왕들 치세에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714년 그의 아들 샤를 마르텔(카롤루스 마르텔)이 궁재직을 세습하였다. 용맹한 무장이기도 했던 그는 732년 푸아티에 인근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북진하던 이슬람군을 격퇴함으로써 명성을 드높였다.
741년 샤를 마르텔이 사망하자 다시 그의 아들인 페팽 3세가 궁재직을 계승하였는데, 이때 마침 왕위는 737년 ~ 743년 사이 공위 상태에 있었다. 743년 킬데리크 3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모든 권력은 페팽 3세에 집중되어 있었다. 급기야 751년 11월 페팽 3세는 킬데리크 3세를 폐위시킨 후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교황 자카리아스(741년 ~ 752년)의 동의하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에서 메로빙거 왕조는 막을 내리고 페펭 가문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 왕조의 이름은 페팽 3세의 아버지 또는 아들의 이름을 따라 카롤링거라고 지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