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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Nassau-Weilburg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

 

네덜란드 왕가로부터 룩셈부르크를 독립시킨 대공작 가문

 

외국어 표기 House of Nassau-Weilburg(영어), Nassau-Weilburg

시기 1839~ 현재

별칭 룩셈부르크 대공가

지역 룩셈부르크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의 기원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는 독일 서부 프랑크푸르트 북쪽의 낫사우에 뿌리를 둔다. 우리말로는 일반적으로 '나사우'라 표기되지만 정확한 발음은 '낫사우'. 낫사우 가문의 시조는 11세기 말 인근을 지배하던 두도 폰 라우렌부르크 백작이며 서기 1000년에 낫사우 성채의 기반을 닦은 후 장남 루프레히트 1세가 건물을 증축해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그 아들 발르람 1세가 1154년 낫사우 백작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가문이 시작되었다. 1198년 발르람 사후 아들 하인리히 2세가 직위를 물려받았다가 1247년 사망하자 큰아들 발르람 2세와 작은아들 오토 1세가 공동 백작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형제간의 불화가 깊어져 1255년 가문 분리를 선언하고 발르람의 직계와 오토의 방계로 갈라졌다.

직계는 1344년 낫사우 백작 게를라흐 1세가 서거하면서 큰아들 요한 1세가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을 개창했다. 작은아들 아돌프 1세는 낫사우-비스바덴-이드슈타인 가문을 열었으나 18세기 초 다시 흡수되었다. 1429년에는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요한 3세가 낫사우-자르브뤼켄 백작으로 독립했으며 그곳에서 다시 1659년에 발르라트가 낫사우-우징엔 후작으로 독립했다. 1806년에는 낫사우-바일부르크와 낫사우-우징엔이 합쳐져 낫사우 공국이 출범했다. 1839년 낫사우 공작에 즉위한 아돌프는 1890년 룩셈부르크 통치권을 넘겨받아 대공작에 오르고 낫사우 공국은 사라진다.

한편 낫사우 가문의 방계는 오토 I세 이후 1303년 큰아들 요한이 낫사우-딜렌부르크 백작으로 독립했다. 작은아들 에미히 1세도 낫사우-하다마르 백작이 되었지만 두 가문은 1711년 병합되었다. 낫사우-딜렌부르크 가문에서는 1606년 요한 6세의 작은아들 요한 7세가 낫사우-지겐 백작으로 독립하고, 동생 에른스트 카지미르가 낫사우-디에츠 백작으로 독립해 나갔다. 이들 가문은 18세기 초 오란예-낫사우 공국으로 통합되었다.

오란예-낫사우 공국의 뿌리는 낫사우-딜렌부르크 가문에 닿아 있다. 후일 네덜란드 총독을 지낸 빌럼 1세가 1544년 샬롱-오랑주 가문의 사촌 르네의 사망으로 프랑스 남부 도시 오랑주 일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곳은 12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공작령보다 높은 지위의 오랑주 공국으로 승격된 이후 프랑스의 샬롱 가문이 다스려온 곳이었다. 빌럼 1세는 오랑주-낫사우-딜렌부르크에서 딜렌부르크를 떼어버리고 오란예-낫사우로 가문 이름을 바꾸었다. 오란예는 오랑주의 네덜란드식 발음이다. 같은 이름의 후손 빌럼 1세가 훗날 네덜란드 국왕이 된다.

낫사우 가문의 출발점이 되는 낫사우 성채

 

룩셈부르크 대공작 즉위와 가문 변경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 끝나면서 1815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빈 회의는 프랑스가 차지했던 영토를 각국으로 환원시켰다. 이때 네덜란드도 빌럼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연합 왕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대신에 왕가 소유의 오란예-낫사우 공국은 프로이센에게 양도되었고 대공국으로 승격된 룩셈부르크를 넘겨받았다. 빌럼 1세가 네덜란드 국왕과 룩셈부르크 대공작을 겸한 것이다. 이 자리는 빌럼 3세까지 이어졌으나 3명의 아들이 모두 요절하고 친척 중에도 남성 후손이 없어 결국 발덱-피르몬트 후작의 딸 엠마와의 재혼에서 얻은 빌헬미나 공주가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룩셈부르크는 반발했다. 낫사우 가문 계승법에 의거해 여성을 군주로 옹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하의 낫사우 가문은 1783발르람 1세의 직계와 오토 1세의 방계 중 어느 한쪽의 대가 끊기면 다른 쪽이 영지와 직위를 넘겨받는다는 내용의 가문 계승법을 확정했다. 6세기 살리족 때부터 내려온 '살리카 법전'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양쪽 모두에서 남성 후손이 절멸할 경우에는 마지막 계승권을 가졌던 남성과 가장 가까운 여성 후손이 물려받는다는 조항을 두었다.

네덜란드는 신성로마제국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이 규칙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빌헬미나가 여왕에 올랐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가문 계승법을 만들 당시 네덜란드가 아닌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으므로 여왕을 모실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방계 오란예-낫사우 가문이 아닌 직계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에서 후계자를 물색하게 되었고 1890년 낫사우 공작 아돌프가 선정되었다. 이때부터 룩셈부르크 대공작 직위는 지금까지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맡고 있다. 네덜란드 왕가와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같은 낫사우 가문이며 이제는 직계 낫사우-바일부르크가 룩셈부르크를, 방계 오란예-낫사우가 네덜란드를 각각 다스리게 된 것이다.

아돌프의 대공작 직위는 아들 기욤 4세에게 이어졌지만 딸만 여섯을 낳아 다시금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은 사촌동생인 메렌베르크 백작 게오르크 니콜라우스뿐이었다. 대공위를 다른 집안으로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한 기욤은 면밀한 조사를 명령했고 니콜라우스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다.

니콜라우스의 어머니는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딸 나탈리아인데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당시 낫사우 가문에서는 평민 어머니를 둔 귀족의 아들은 가문의 직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는 귀천상혼(貴淺相婚)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니콜라우스는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적통에서 배제되었고 결국 가문의 계승법을 수정, 큰딸 마리-아델라이드가 여대공작이 되었다.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은 현대 룩셈부르크의 역사에서 최초로 영토 내에서 태어난 군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주둔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호의적으로 대하였다가 1918년 전쟁 후 거센 하야 요구에 부딪혔다. 당시에는 독일 관세동맹에 가입해 있던 터라 저항이 곧 국가의 파탄으로 이어질까 우려해서 내린 결정이지만 이미 돌아선 민심은 갈수록 차가워졌고 결국 1919년 초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하야 찬성이 절반을 넘지 못해 투표는 부결됐지만 전국에서 시위의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결국 마리-아델라이드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동생 샤를로트에게 대공위를 넘기고 자발적으로 퇴임했다.

샤를로트 여대공작은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는 방향을 선택함으로써 입헌군주제를 유지시켰다. 2차 세계대전이 터져 피난을 떠났을 때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해 독립을 촉구하는 활동을 폈다. 덕분에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귀환했을 때 국민들의 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1945년에는 국제연합(UN)에 가입하는 등 외교 수완을 발휘해 주변국들의 원조를 받아 중립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후임 대공작은 아들 장이었다. 아버지가 부르봉 가문의 파르마 공자 펠릭스인 까닭에 낫사우-바일부르크가 아닌 부르봉-파르마를 성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부르봉-파르마 가문에서 계승 우선순위를 따지며 룩셈부르크 통치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장은 1986년 부계의 모든 계승권을 포기하되 낫사우-바일부르크를 부르봉-파르마의 분가로 등록시켜 분명히 선을 긋는 방법을 통해 장애물을 피해갔다.

국민소득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시켜온 장의 능력에 공감한 국민들은 결국 1995군주의 자녀는 룩셈부르크 대공자 또는 대공녀로 불리며 계승 우선권을 가진다는 조항을 삽입해 헌법을 개정했다. 덕분에 아들 앙리가 직위를 이어받아 2000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이로써 오란예-낫사우 가문이 처음 획득했던 룩셈부르크 대공작 직위는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으로 넘겨졌다가 다시 부르봉-파르마 가문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공식 명칭은 여전히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로 유지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부르봉-파르마의 분가로 등록된 가문이다.

오란예-낫사우 가문으로부터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넘겨받은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의 통치 방식

 

룩셈부르크는 1830년 대공국 승격과 함께 의회 민주주의 기반의 세습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초대 대공작을 겸했던 네덜란드 국왕 빌럼 1세 이후 군주의 권한은 더욱 확대되어 1868년 빌럼 3세 때는 내각 구성권뿐만 아니라 의회 해산권까지도 손에 쥐었다. 1890년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에게 대공위가 이양되면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 연합 왕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아돌프와 기욤 4세는 입헌군주로서의 권한을 충분히 누렸으나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작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굴복한 경험 때문에 국민적인 반대에 부딪혔고 1919년 결국 퇴임했다.

동생 샤를로트 여대공작은 군주 개인의 권력이 법률 위에 설 수 없다고 제한한 1919년의 개정 헌법을 승인했다. 이로써 대공작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다. 지금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간의 중재를 담당하는 상징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맡아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경제와 외교를 중점적으로 수행한다.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의 결혼 정책

 

낫사우 가문은 근대에 들어 해외 강대국의 왕실 또는 귀족층과 결혼함으로써 외교적 지위를 유지해왔다. 귀천상혼의 원칙 때문에 평민과의 결혼이 불가능한 문제도 있었다. 오란예-낫사우 왕가의 빌럼 1세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딸 빌헬미나와 결혼했고, 빌럼 2세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막냇동생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작과 부부가 되었다. 빌럼 3세도 독일 서남부 뷔르템베르크 국왕 빌헬름 1세의 딸 조피를 신부로 맞이했다.

이러한 성향은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도 마찬가지였다. 아돌프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조카 엘리자베타 미카일로브타와 결혼했고 재혼 때에야 독일 출신의 안할트 데사우 공녀 아델하이트 마리를 맞이했다. 기욤 4세는 포르투갈 국왕 미겔 1세의 작은딸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다. 마리 아델라이드 여대공작은 미혼으로 지냈으며 동생 샤를로트 여대공작은 이탈리아 부르봉-파르마 공 펠릭스를 남편으로 맞이했다. 장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 3세의 딸 조세핀 샤를로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현 대공작 앙리도 중세 스페인의 레온이카스티야 왕국의 후손이자 쿠바에 거주하던 마리아 테레사와 인연을 맺었다.

앙리 대공작

 

낫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의 종교 정책

오란예-낫사우 왕가의 세 국왕 겸 대공작 빌렘 1~3세는 칼뱅파 개신교에 속하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를 신봉했다.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 최초의 대공작 아돌프도 칼뱅파 개신교를 믿었지만 그 아들 기욤 4세는 보수적인 포르투갈 왕실 출신의 마리아 안나 왕비를 만나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유럽 지역의 왕조는 역사적으로 로마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해왔다는 왕비의 설득에 동의해 결국 개신교에서 개종했다. 이후로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로마가톨릭을 공식 종교로 신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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