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단-무샤트 왕가
몰도바 공국의 자존감을 드높인 왕가
쉬테판 첼 마레 시절의 보그단-무샤트 가문의 문장
외국어 표기 House of Bogdan-Mușat(영어), Dinastia Mușatinilor
시기 약 1300년 ~ 1600년대
지역 루마니아 북동부 몰도바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간략한 역사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시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헝가리의 자치 지방에 불과했던 몰도바 공국을 독립국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보그단 1세(재위 1363년 ~ 1367년)를 시조로 보기도 하고, ‘쉬테판 무샤트’로 불리는 코스테아 무샤트를 시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코스테아 무샤트는 보그단 1세의 딸인 무샤타 마르가레타와 결혼한 후 페트루 2세와 로만 1세를 낳았다. 이중 로만 1세는 외삼촌 격인 라츠쿠1)의 딸 아나스타시아와 결혼하여 몰도바 공국의 전성기를 누린 왕 알렉산드루 첼 분을 낳았다. 알렉산드루 첼 분 이후에는 그의 직계 후손들이 대대로 몰도바 공국의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렇기에 일부 학자들은 알렉산드루 첼 분을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실질적인 시조로 보기도 한다.
보그단 1세의 직계 아들들이 계속 왕위를 이었다면 이 왕가의 이름은 보그단 왕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그단 1세의 직계 아들들이 아닌 딸들의 남편들이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딸들 중에 가장 언니이며, 후대 왕들의 직계 선조인 무샤타 마르가레타의 이름을 따서 무샤트 왕가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보그단 1세는 몰도바 공국의 실질적인 건국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몰도바의 건국 시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전설상이나 민간에서는 마라무레쉬 출신의 드라고쉬를 몰도바의 건국자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고쉬 왕은 사실 헝가리 왕의 신하에 불과했다. 드라고쉬는 헝가리의 왕 루이스 1세가 카르파치 산맥 너머, 동쪽 국경의 방어를 위해 몰도바 지방의 제후로 삼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 사스 왕 역시 헝가리 왕의 신하였다.
후에 마라무레쉬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보그단 1세가 사스 왕과 그의 아들인 발크를 몰아내고 몰도바의 왕이 되면서, 몰도바는 헝가리의 지방자치에서 벗어나 독립된 공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헝가리 왕도 몰도바의 보그단 1세를 한 국가의 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 몰도바 공국의 왕위는 보그단 1세의 후손들이 계승하게 되었다. 이들은 때론 헝가리나 폴란드의 왕들과 조공계약을 맺고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지만, 제후국이 아니라 형제국의 입장에서였다.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전성기는 알렉산드루 첼 분, 쉬테판 첼 마레, 페트루 라레쉬 등이 활약하던 1400년대 초부터 1500년대 중반까지였다. 쉬테판 첼 마레는 1457년에서 1504년까지 무려 47년 동안이나 몰도바 공국을 통치하면서 헝가리, 오스만 튀르크, 폴란드 등 강력한 이웃 제국들의 무수한 침입을 막아낸 루마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한 명이다. 쉬테판 첼 마레와 그의 아들 페트루 라레쉬는 재위 기간 중 많은 수도원과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그들이 부코비나 지역에 세운 수도원들 중 쉬테판 첼 마레가 세운 퍼트러우치 교회와 보로네츠 수도원, 페트루 라레쉬가 세운 몰도비처 수도원과 프로보타 수도원은 외벽의 아름다운 프레스코화 덕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1500년대 말기부터는 모빌러 가문 출신들이 몰도바 공국의 왕이 되기도 하였고, 발라히아 공국의 왕들이 몰도바 공국의 왕좌를 겸하는 일도 빈번해지면서 보그단-무샤트 왕가는 역사 속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마지막 왕인 라두 일리아쉬(재위 1704년)가 자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한 후 이 왕가는 몰도바의 역사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왕위 계승
전통적으로 동방정교 신앙을 가졌던 몰도바 공국에서는 왕좌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신성한 자리라 여겼다. 왕의 직계 아들뿐 아니라 왕의 형제, 왕의 서자, 왕의 조카, 왕의 삼촌 등 왕가의 피를 나눈 모든 남자에게 왕위 계승권자의 자격이 주어졌다. 따라서 형제 공국이었던 발라히아와 마찬가지로, 몰도바의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선출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지켜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왕위를 놓고 때로는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암투가 벌어지거나 외세를 끌어들여 왕위를 찬탈하는 사태도 수없이 반복되었다. 32년을 재위한 알렉산드루 첼 분 왕이나 47년을 재위한 쉬테판 첼 마레 왕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안팎을 친족끼리 서로 왕위를 뺏고 뺏기면서 등극과 퇴위를 반복한 경우도 많았다. 일례로, 1432년 알렉산드루 첼 분의 서거 직후에 그의 둘째 아들인 일리아쉬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불과 일 년 만에 자신의 동생인 쉬테판 2세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일리아쉬가 폴란드 왕의 도움으로 쉬테판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재등극하였다. 하지만 그 일 년 후에, 이번에는 쉬테판 2세가 발라히아 공국의 왕 블라드 드라쿨의 도움으로 일리아쉬를 강제 퇴위시키고 왕위를 되찾았다. 일리아쉬는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반(反)오스만 튀르크 정책을 펴나갔고, 쉬테판 2세는 발라히아 공국과 협력하여 폴란드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려는 정책을 취했다. 이 사례 말고도 왕가의 친족들이 서로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 세력들을 규합하거나 외세의 도움을 통해 왕위를 차지하였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결혼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왕들은 같은 왕실 출신이거나 외국의 왕가 또는 대귀족의 딸들과만 혼인을 할 수 있었으며, 공식적으로 세 명의 정실부인을 얻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세 번째 부인까지는 동방정교회 신부들의 집전 하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번째 부인부터는 교회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정실부인의 자녀가 아닐지라도 왕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는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보그단-무샤트 왕가의 공주들은 대부분이 폴란드 왕실, 발라히아의 왕실, 헝가리 왕실, 오스만 튀르크 왕실 등의 정실부인이 되거나 후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쉬테판 첼 마레의 고모인 바실리사 무샤트는 발라히아 공국의 블라드 2세 드라쿨과 결혼하여 블라드 체페쉬와 라두 첼 프루모스를 낳았다. 이런 혈연관계로 인해 발라히아의 블라드 체페쉬는 쉬테판 첼 마레가 몰도바의 왕이 되는 것을 돕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