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벨기에의 신설 왕조
외국어 표기 Saxe-Coburg and Gotha(영어), Sachsen-Coburg und Gotha
시기 1830년 ~ 현재
별칭 벨기에 왕가
지역 벨기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기원
레오폴 1세의 초상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는 독일과 폴란드의 여러 군주를 배출한 베틴 가문에 속하는 분파다. 베틴 가문은 10세기에 독일 중북부의 리스가우 지역을 다스리던 디트리히 1세를 시조로 하며 서기 1000년 즈음에 인근의 슬라브족 성채를 차지해 베틴 성이라 이름 지었다. 15세기에 독일 북동부를 다스리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가 서거하면서 큰아들 에른스트 중심의 직계와 작은아들 알베르트 중심의 방계로 가문이 분리되었다. 이들이 다스리던 땅은 작센 지역이었으므로 모든 가문은 작센(Sachsen [영]Saxe)이라는 명칭을 제일 앞에 붙인다.
독일어로 에르네스티너라 불리는 직계는 중부와 서부로 진출했으며 작센을 앞에 붙인 코부르크, 잘펠트, 알텐부르크, 고타, 바이마르, 아이제나흐, 예나, 아이젠베르크, 룀힐트 등 여러 공국으로 나뉘었다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현재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작센-마이닝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셋만 남았다. 영국, 벨기에, 불가리아 왕실도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에 속한다.
방계 알베르티너는 동부로 진출해서 16~19세기에 마이센을 중심으로 선제후들을 배출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왕실을 이루었다. 현재는 작센-차이츠, 작센-메르세부르크, 작센-바이센펠스의 셋이 남았다.
19세기에 들어선 1826년에는 직계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이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국을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고타를 넘겨받는 대신 잘펠트 지역을 작센-마이닝엔 가문으로 넘겨주면서 최종적으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 탄생했다. 초대 공작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가문의 큰아들 에른스트 1세가 맡았다. 그 동생이 벨기에 초대 국왕에 오른 레오폴 1세다.
벨기에의 탄생과 위기
벨기에의 왕가를 이룬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원래 독일 중동부를 터전으로 삼았다. 북대서양 연안의 야트막한 지형은 역사 내내 '저지대'라 불렸는데 북부 저지대가 네덜란드, 남부 저지대가 벨기에에 해당한다. 이들은 14세기까지 자치 체제를 유지하다 이후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고 1815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 연합 왕국으로 통합 독립했다.
비록 연합 왕국으로 독립은 했지만 그러나 북부와 남부는 언어, 문화, 종교가 판이하게 달랐다. 남부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로마 가톨릭을 신봉했고 북부는 네덜란드어를 쓰며 개신교를 믿었다. 정치, 경제, 언어, 문화, 종교 등 모든 부분에서 대립이 발생했고 결국 1830년 브뤼셀에서 소요가 발생해 네덜란드 남부가 '벨기에'로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한 벨기에 역시 자체적으로도 분열이 있었다. 남쪽은 프랑스어권, 북쪽은 네덜란드어권, 동쪽은 독일어권이어서 독립 이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국가 명칭도 '벨기에(네덜란드어)', '벨지크(프랑스어)', '벨기엔(독일어)' 등으로 사용 언어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 혼란이 끊이지 않자 벨기에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내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 외교권을 획득하기 위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어느 지역에서 국왕을 추대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다시금 반목이 시작되었다. 결국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타 지역의 귀족을 초대해 국왕으로 옹립하자는 의견이었다.
조사 끝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독일인 레오폴트 1세가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독일인이지만 영국군 소속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으며 벨기에의 독립에 우호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1816년 영국 국왕 조지 4세의 딸 샬럿과 혼인을 했다가 사별을 했고 1830년에는 신생 독립국 그리스의 국왕으로 초빙받기도 했으므로 정통성에 대한 검증은 완료된 상태였다. 1832년 벨기에 국왕으로 즉위한 레오폴트 1세는 공용어인 프랑스어 발음 따라 '레오폴 I세'로 불렸다.
아들 레오폴 2세 때부터는 해외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다. 1885년 아프리카 중부에 '콩고 자유국'이라는 중립 국가를 세워 열강들의 인정을 받았지만 자유무역지대 유지라는 조건을 어기고 착취를 하기 시작했다. 레오폴 2세는 고무나무 수액 채취를 위해 지역민들에게 노예 수준의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고무 테러'라 불리는 이 과정에서 최소 800만 명에서 많게는 2천만 명에 이르는 콩고 주민들이 사라졌고 수많은 어린이들의 손목이 잘렸다. 폭정이 외부에 알려지자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비난이 쏟아졌고 1908년 '벨기에령 콩고'로 명칭이 바뀌면서 온정주의가 적용되었다. 이듬해 서거한 레오폴 2세는 장례식장에서조차 국민들의 야유와 비난을 받았고 후사도 없어 조카 알베르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알베르 1세는 국민 통합을 위해 즉위식 때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 반복 선서를 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에 밀려 영토의 대부분을 내주어야 했다. 저항을 멈추지 않은 알베르 1세는 1918년 브뤼셀을 수복했고 대부분의 땅을 되찾았다.
벨기에는 그 아들 레오폴 3세 때 다시 한 번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처음에는 저항 노선을 걸었지만 결국 레오폴 3세는 항복을 선언했고 국민들은 분노했다. 독일군에 의해 1945년 오스트리아로 추방된 왕실 가족은 1945년 전쟁이 끝났음에도 귀국할 수 없었고 1950년 국민투표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후에야 벨기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벨기에는 전쟁 이후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냈지만 1993년 알베르 2세가 즉위하면서 다시금 분열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북부와 남부의 갈등과 반목이 해결되지 못하고 결국 서로를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연방제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의 3개 언어 공동체와 남부, 북부, 수도권의 3개 지역자치단체 등 6개 조직이 동등한 자격을 갖는 연방국가로 거듭났다. 1830년 독립 이후 160년 넘게 단일 국가를 유지해왔지만 정치적으로 통합시키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벨기에 왕실의 첫째 목표는 지역 갈등 해소를 통한 국민 통합이다. 1999년 알베르 2세는 벨기에 귀족 집안의 마틸드와 결혼식을 올리고 안트베르펜과 헨트를 비롯한 벨기에 전역의 도시를 방문했다. '환희의 입성'이라 불리는 이 행사는 전통적으로 도시 국가들이 기쁜 마음으로 성문을 열어 통치자를 맞이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시작은 14세기부터였지만 19세기에 즉위한 벨기에 왕실로서는 1918년 알베르 1세의 방문 이후 82년 만에 다시 거행한 행사였다.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결혼과 종교 정책
작센-코부르크-고타 계열의 벨기에 왕가는 다른 나라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외교력을 유지해왔다. 초대 국왕 레오폴 1세는 즉위 전 영국의 샬럿 공주와 결혼 후 사별을 했다가 즉위 직후 프랑스의 루이즈 마리 공주와 재혼했다. 결혼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려는 레오폴 1세의 전략은 자신의 가문을 영국 왕실과 연결시킨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친형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아들 알베르트를 하노버 왕가 출신의 영국 여왕 빅토리아에게 소개함으로써 결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
아들 에드워드 7세와 손자 조지 5세도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바람에 조지 5세는 왕가의 명칭을 윈저(Windsor)로 바꾸었고 이후 조지 6세와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도 윈저 왕가로 표기된다.
레오폴 2세도 오스트리아 대공의 마리 헨리에테와 결혼했고, 이어 알베르 1세도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여공작 엘리자베트와 부부가 되었다. 레오폴 3세는 스톡홀름 방문 중에 스웨덴 국왕의 조카 아스트리드를 만나 그 해 결혼식을 치렀다. 보두앵 국왕도 스페인 카사 리에라 백작의 딸 파비올라와 결혼했고, 그 동생 알베르 2세도 이탈리아 방문 때 과르디아 롬바르다 공작의 딸 파올라에 반해 청혼을 했다. 국내에서 신부를 찾은 것은 벨기에 우데켐-아코즈 백작의 장녀 마틸드와 결혼한 현 국왕 필립이 유일하다.
왕실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로마 가톨릭이다. 레오폴 3세의 부인 아스트리드 공주도 개신교 출신이었으나 결혼 후 남편에 맞춰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주로 남부 프랑스어권이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고, 북부 네덜란드어권은 개신교를 믿거나 자유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에 종교 편향적인 발언을 했다가는 비난과 항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레오폴 1세 때부터 국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가톨릭당과 자유당의 알력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2013년 안트베르펀을 방문한 필립 국왕
대중문화 속 왕가의 모습
책과 영화를 통해 소개된 벨기에 왕가의 이야기 중 대다수는 레오폴 2세가 저지른 콩고 학살을 다루고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지은 세계 최고의 추리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 경은 레오폴 국왕이 서거한 1909년 『콩고의 범죄(The Crime of the Congo)』를 펴내 식민지의 잔혹한 현실을 고발했다. 그보다 앞선 1899년에는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가 콩고 강 유역을 직접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소설 『어둠의 심장부(Heart of Darkness)』 3부작을 썼다.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으며 교과서에 실린 사례도 많았다. 최근 출시된 게임 '파 크라이 2(Far Cry 2)', '스펙 옵스(Spec Ops: The Line)', '빅토리아 2(Victoria 2)'도 콘래드의 작품을 소재로 삼고 있다.
미국의 역사소설가 애덤 호크실드는 어린 시절 『어둠의 심장부』를 감명 깊게 읽고 1998년 『레오폴드 국왕의 유령』을 펴냈다. 원고를 받아본 10곳의 출판사 중 9곳이 거절한 끝에 출간된 이 책은 의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금까지 6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마크 린턴 역사 상(Mark Lynton History Prize)과 더프 쿠퍼 상(Duff Cooper Prize)도 받아 문학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이 책의 제목은 1914년 미국 시인 베이철 린지가 쓴 '콩고'라는 시에서 따왔다. 레오폴 국왕이 콩고에서 저지른 학살과 신체절단의 잔혹함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들어보라 레오폴 국왕의 영혼이 외치는 소리를
손을 못 쓰게 된 이들이 지옥에서 화형을 집행한다
들어보라 악마들이 낄낄대며 내뱉는 소리를
지옥 바닥에서 레오폴의 양손을 절단한다.
호크실드의 소설은 2006년 미국에서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03년에는 영국 BBC가 TV용 다큐멘터리 영화 '콩고 : 백색의 왕, 적색의 고무, 흑색의 죽음(Congo: White King, Red Rubber, Black Death)'을 방영했다. 1시간 50분 분량의 이 작품은 현재 유튜브에도 공개되어 있다. 이외에도 현재(2015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해리 벨라폰테 감독이 콩고 사건을 소재로 미니시리즈 제작을 준비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1960년 보두앵 국왕이 콩고의 독립을 허락하는 과정도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1997년에는 영국의 소설가 로넌 베네트가 아일랜드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치적 혼란을 묘사한 '파국주의자(The Catastrophist)'를 발표했다. 1998년에는 미국의 소설가 바바라 킹솔버가 독립 직전의 콩고로 이주한 미국 선교사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 '포이즌우드의 성경(The Poisonwood Bible)'을 펴내 격찬을 받았다.
애덤 호크실드의 1998년 작 『레오폴드 국왕의 영혼』, 바바라 킹솔버의 1998년 작 『포이즌우드의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