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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혜(1943~ )

가난

가면

가을

가을의 시

가족

강 건너 봄이

개혁

겨울

겨울밤에

겸손과 오만

고요

고요에 기대어

고향

귀로

귀향

그는 세상에서

그대에게

그러나 그대

그리운 집

그리움

그리움을 위하여

근원

금자동아 은자동아 – 재면 재서에게

기다림

기도

길은 없어도

길을 가다가

길의 노래

깨어나는 아침

꿈길에서

꿈속에서

꽃은 피는데

나는 나의 죽음이다

나에게

낙원

남은 시간

내일의 노래

너와 함께

눈먼 날을 위하여

눈물 - 오라버니에게

님에게

달밤

담 하나 사이

답장

도가니탕과 효(孝)

독백
동무

동백꽃 그리움

들숨과 날숨 사이

또 다른 길

또 하나의 소리

마음 화상(火傷)

마지막 편지

만나러 가는 길

만월(滿月)

만족

매장(埋葬)

먼 길

멀고 먼 길

모성

모순

모순 속에서

무당

무소유

무시하게 하소서

무정한 세월

무제

문둥 북춤

문둥 탈춤

바다

바람이여

밤길

밤바다

방에 갇혀서

백자(白瓷)

벌레가 된 그대

변명(辨明)

변절

변화되는 빛

봄날은 가고

봄은 어디서 오나요

봄은 오는데

봄을 위하여

봄 편지

부자유친하고

불혹(不惑)

비밀

빈집에 누워

빈터

사고(思考)

사는 대로 살다가

사는 법

사랑

사랑굿

사랑법

산다는 것

산을 바라보며

삶은 기다림입니다

삶의 이랑

새 아침에

생명

생의 파도

서귀포에서

석양녘

선물

섣달 그믐밤

세상

세상 가는 길

세월

손자를 위하여

수녀의 길을 가는 제자에게

순리(順理)

시간을 마주 보며

시간을 위하여

시법(詩法)

시 쓰는 마음

시인의 길

신념

신부(神父)와 시인(詩人)

아버지

안부

야망

어깨

어느 시인의 죽음

어두움

어둔 사람

어떤 날

어떤 부부

어머니

어머니 희망대로

연가

연륜

오늘과 내일

오랜 동안

요양원 앞 식당 소묘

욕망

우리 모두

우화

이별

이별에게

인간의 길

인생

인연설

일기(日記)

일상

자신에 대하여

자화상

잠깐만 그대여

잠자는 사람

장수의 비극

저녁이 되어서야

저무는 길

적막한 저녁

점괘

제주에서

죽음

지식인의 메아리

진정한 나이

차(車) 시인(詩人)에게

참회

천심

첫눈

추석

친구에게

탄식

탐욕

편지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루살이

행복

행복과 불행

허깨비

허수아비

현대 시

환영(幻影)

황혼

황혼의 눈이 멀어

회포는 많아지고

희망

 

 

 

가난

김초혜

 

가난한 사람은

배부른 것만 생각하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

 

 

 

가면

김초혜

나는 알고 있다

가(可)와 불가(不可)를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나는 괴롭지 않다

가면을 쓰고 다니기에

가면에 가면을 덧쓰고 다니기에

나의 이중성을 들킬 염려가 없다

추잡한 굿에는 이골이 났다

깊은 밤 혼자가 되어서야

가면을 벗는다

아주 작아진 나를 본다

 

 

 

가을

김초혜

 

연골로만 채워졌는지

육신은

저절로 굽어있다

비 묻어

수없이 쓰러지던 세월도

푸른하늘속에 어리고

이제 가야하는데

가을은

길도 안 건너고

밤보다 더

어두웠던 낮을

그립다 한다

 

 

 

가을의 시

김초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이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가족

김초혜

남편은 아내를 빛내고

아내는 자식을 빛내고

자식은 어둠을 비춘다

 

 

 

강 건너 봄이

김초혜

한밤에 나는 아무도 몰래

저 강을 건널 것이다

언 물이 안 녹고 있어도

어떻게든 저 강을 건너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리라

고달픈 세월의 기슭에서 깨어나

누추한 몸과 마음 이기고

가슴을 터놓고

마주할 그대에게

꿈이 되기도 하면서

꽃이 되기도 하면서

한가로이 기대어 쉬리라

 

 

 

개혁

김초혜

 

다리가 부러진 채로

밤이고 낮이고 언제나 개혁이다

언론은 음행을 그치지 않으며 개혁하고

검찰은 범죄자를 두둔하며 개혁하고

정치인은 이 범죄의 시대를

유유하게 건너며 개혁하고

지식인은 파렴치한 침묵으로 개혁하고

우리는 스스로 속고 속이며 개혁한다

아. 아, 그래도 우리는 꿈을 꾼다

오늘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겨울

김초혜

 

적적한 잠결에

눈 내리는 밤

 

뼛속에

스며든 어둠

안으로

기운이 꺾인다

 

잘못 들어선 길

다시 돌아갈 수도 없이

멀리 왔구나

 

 

 

겨울밤에

김초혜

 

그리워 가고 오는 길은

죽음과 삶의 중간쯤일까

그대 생각하면

그 방 그대 감옥에

갇혀 버린다

길고 긴 날 속에서

내가 끌어 올린 허무는

그대 속에 있었다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이

모두 파괴된대도

그대와 내가

같은 멍에에 묶여 있다는 건

큰 위안이다

 

먼 곳에 머무르는 그리움이다

 

 

 

겸손과 오만

김초혜

 

언제나

남보다 앞서기를 좋아하고

계획한 일은 초과 달성해야 하고

완벽한 집념을 가진

까타로운 성미는

마침내

허리를 휘게 해

편한 걸음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한 달만 치료하면

바로잡을 수 있다고

조금치도 염려 말라는

지압사는

내 자만심이

허리를 휘게 한 것도 모르고

기를 넣어서 바로잡으면

힘있게 걸을 수 있다고

쉬이 약속합니다

그러나

지압사의 치료가 아니고

뿔을 세운 사람 속에서

내 뿔을 먼저 자르고

마음을 낮게 가져야

휘어진 허리를 펼 수 있기에

괴로워 설레입니다

 

 

 

고요

김초혜

 

사위가 텅 비었으나

그 속에 가득 찬 것 있으니

무엇이 부럽다 하겠소

 

큰 것 중에 가장 크고

작은 것 중에 가장 작은

평생을 구해도 못 구할

이 탐스런 꽃

 

 

 

고요에 기대어

김초혜

 

고단한 삶의 저녁때

지친 영혼을

즐거움으로 쉬게 하고

 

불가해한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게 하십시오

 

급한 물살에 떠밀려

희망의 기슭은

엄두도 못 내고

신발이 닳도록 걸었습니다

 

이제

삶을 옭아맸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떠날 때가 되어

 

허망한 실타래를 던져놓고

신발을 벗으려 합니다.

 

 

 

고향

김초혜

 

1

산 너머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어머니,

하고 부른다

 

 

2

언덕엔 살구꽃에

고요가 스며들고

밭두렁 위

어미 소는 아기 소를 달래고

바람에 새소리 흩어지고

하루 종일 기쁨을 누려도

탓하는 이 없는 곳

풀 줄기에다

들꽃을 꿰어 쥐고

개울을 팔짝 건너면

큰 느티나무

그 느티나무 아래

봄꿈에 젖어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영원히 거기 있어 주어요

어머니

 

 

 

 

귀로

김초혜

 

흙은 흙으로

바다는 바다로

너는 너로

나는 나로

이르는 곳을 알아

이르러야 하리

그 그치는 곳을 알아

그쳐야 하리

 

 

 

귀향

김초혜

 

돌아가리 돌아가리

고향으로 돌아가리

하룻밤 동안

흰눈 내려

세상을 모두 덮어 버리면

나를 덮어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늙으리

 

그동안 세상에 걸려

무던히도 넘어졌으니

모든 것 떨쳐 버리고

이내 돌아가 누으리

 

행여 그대 올까 몰라

괴로워도 견디며 지냈는데

남은 것은 남루한 오만뿐

나는 그대 밖에 있었어라

봄 밖에 있었어라

 

 

 

그는 세상에서

김초혜

 

지나간 날이 모두

꽃이 아니어도 좋아

더하고 덜함에

맞설 수 없어

평등이 아니라도 좋아

분노를 이겨낼 수 없어

편함에 길들여져도 좋아

옳은 일에 입을 봉하며

불의의 편에 서도 좋아

이것도 저것도 옳다 해서

세상을 어지럽혀도 좋아

다 같이 갈팡질팡

어두워져도 좋아

그러나 아니라오

그것은 아니라오

어둠 속에서도

진실은 숨 쉬고 있다오

 

 

 

그대에게

김초혜

그대여

세월은 쉽게

지나갔다

무심하게 나누었던

그대와의 웃음도

이제

그리움이 되었다

나 한 번도

그대 기슭에

내리지 않았어도

오늘도 나는

그대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대

김초혜

 

그대 마음

내가 가진 줄 모르고

그대가 이 마음

가진 줄 알았어라

돌아서며 만나자 아니 했지만

마음에 있는 말

다하기 어려워라

 

 

그리운 집

김초혜

 

그리운 집

사람으로 올 때

가지고 온 보따리에는

평범한 나날들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도달하여 지나가게 될

이정표도 있었다

밤과 낮이 있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절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 시작하자

그 자체가

하나의 집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방황하는 영혼을 쉬게 하는

집 속에는

태어남과 삶, 죽음과 매장

분노와 고통과 무지와 권태가

이웃하며 살고 있었다

사람이 이룬 최상의 것은

그래도 그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리움

김초혜

 

천둥소리 내 안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다 보면

 

그대

이마를 적시는

비가 되어

내릴 수도 있으리라

 

 

 

그리움을 위하여

김초혜

 

벚나무 가지가

담을 넘어

내 집 마당에

꽃그늘을 드리웠다

 

섬에 갇힌 내게

손을 내민다

그래, 꽃의 일생이

아깝지 않구나

 

 

 

근원

김초혜

 

세상의 맨끝자리

이쪽에도 비가 내리고

저쪽에도 바람이 분다

나를 태우고

너를 태울 불을

당겨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겁만 내며 산다

씩씩하게 세상일

이겨보았자

사람살이 모두 뜻같지는 않으리

매미는 여름을 알지만

겨울을 모른다지 않는가

 

 

 

금자동아 은자동아

김초혜

 

먼 길

아픈 밤

몇억만 리나 되는지

바람은 두꺼웠는데

떠난 웃음 되돌아와

너희를 하는 양

어느 것 하나

천국 아닌 게 없구나

 

 

 

기다림

김초혜

 

기다림

그대의 얼굴이 멀어진다

허무라고, 그대는

허무라고

불을 지르고 싶다

 

검게 탄

기쁨을 걷어내고

순수한 새벽을

안고 싶다

 

그대라는

미완성의 말 한마디에

부재(不在)나마 붙들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달아나고 싶어한다

그냥 내 속에서

늙고 싶다고 한다

 

 

 

기도

김초혜

거짓을 거듭하는 삶 속에서

옹졸한 궤변은 얼마였으며

조그만 이익에 눈이 흐려

자기 부끄러움과 남의 부끄러움을

혼동하기 일쑤였고

이생을 절재한다 하며

자기 관찰에 게을렀고

이것을 버린다 하고

저것으로 바꾸어 갖고서는

가난함을 먼저 배운 척도 했으며

말을 삼가고 마음을 지킨다 하며

어지러운 뜻을 품기도 했고

미움과 원망으로

원한과 악의 덫에 빠지기도 했으며

거짓을 진실로 알고

진실을 거짓으로 흘려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해서

끝낼 수도 없는 걸인을 어찌합니까

 

 

 

김초혜

 

억새꽃 희게 된

가을 저물녘

주인은 나그네 속에 있고

나그네는 주인 속에 있다

 

길다해도 지닐 수 있는 것

이 순간 뿐

 

그대는 나그네를 잊을 것이고

나그네도 그대를 잊을 것이니

 

 

 

길은 없어도

김초혜

 

어제와 똑같지를 않고

그렇다고 전연 딴 사람도 아닌

소녀가

하늘에 로프를 매고

서커스를 한다

 

달려라 매달려라

밤을 멎게 하라

늘어진 심장에

풍선을 달아 다오

왼통 잡념이사

떠나가거라

 

무지개가

외도(外道)를 한 하늘에

사슴 모가지를 흉내내는

소녀야

기도는 조금도

가까와지지 않는다

 

구리빛 허공에

장미꽃을 던진대도

이미 쾌락에서

차단된 지 오래다

 

지금

길은 없다.

 

 

 

길을 가다가

김초혜

 

달이 지도록

마음을

접어도 보고

펼쳐도 보지만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드는

평범한 행복을

담담히 잊으라 하네

 

꿈꿀 땐

꿈인 줄 몰라서

허둥댔고

 

깨어서도

꿈속에 있어

한 생애를 달래기

힘이 드네

 

 

 

길의 노래

김초혜

 

갈 곳이 정해진

여행은

놀이에 불과하리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는 길에서

 

갈 수 있는 길이

이 길 밖에 없을 때

 

가지 않을 길인데

가야 하는 길일 때

 

그때 길은 시작되리라

 

 

 

깨어나는 아침

김초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눈을 읽어버렷다

눈뜨고 못 보는 장님이었다

이리저리 부딪치며

위험한 어두움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바다 끝에 서 있는 듯

땅끝에 서 있는 듯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눈을 뜨고 보니

온몸은

구덩이가 되어 있었다

간신히 걸음마를 배워

어정버정

이 세상 저 세상 기웃거린다

나를 가로막는

나를 걷어내면서

 

 

 

김초혜

 

길을 헤매다가

문득 서보니

그대 집 앞이었네

오늘 같은 밤이

이 생에서 올 줄이야

 

한바탕 꿈인들 어떠랴

꿈꾼 것을

다시 꿈꾸며

 

세월에 지워진 얼굴을

떠올려 본다

 

 

 

꿈길에서

김초혜

들녘에 서서

구름이 이는 모습도 보고

꽃내음도 맡으며

쉬임 없이 뒤집혔던 세월을

삭이고 있다오

이제 와 생각하니

생각으로 헤아린 병이

제일 무서운 병이었소

먼 길 떠난 이여

어디메쯤에서

발길 돌려 다시 오시겠소

아득한 어둠에 비 내리니

남은 세월 아까워

봄은 더 멀다오

 

 

 

꿈속에서

김초혜

 

밤에는 아름다운 꿈으로

잠들게 하고

아침에는 끝없는 빛을 향해

일어나게 하소서

문을 열어놓고

가슴을 열어놓고

그대의 발걸음을 기다리며

꽃을 피우게 하소서

그리고 그대의 희망을

가슴에 품어 녹여

내 목숨 속에

그대가 되살아나게 하소서

 

 

 

꽃은 피는데

김초혜

 

다시는 이 봄에

못 오실 줄 알지만

꽃이 피니 행여나

어리석어라

 

육체 떠난

오라버니 영혼

내게로 와

시시때때로

살을 당기는 아픔

생각은 그리움이라.

 

 

 

김초혜

 

나는 나를 방해한다

내던지지도

팽개치지도 못하게 한다

나는 나의 친구이면서

다른 나다

나는 나를 분해한다

막상 가까이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은

나다

곪은 상처가 덧난다

어이없게도 나는

오지 않을 나를

기다린다

 

 

 

나는 나의 죽음이다

김초혜

 

세상을 욕심으로 보면

아귀다툼만 보이고

도사리고 보면

도사린 것뿐이고

구부리고 내려다보면

구부린 것만 보인다

누가 나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눈을 후벼 파

흘리는 눈물인데

그것도 안으로

자꾸 굴리면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오

관념과 헛지식

가득 찬 머리는

깊은 수렁 속에서

허우적이며

허우적이며

세상의 이치를

거꾸로 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소

 

 

 

 

나에게 

김초혜

 

나를 싫어하면서

내 속으로

들어오는 나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증오하며

결단력으로 

나를 떠날 것

어떤 의미도 두지 말 것

차라리 차가운 잠에

빠져 있게 할 것

낭떠러지에 

거꾸로 처박혀도

착각도 오류도 아니라고 믿을 것

그리고 속성대로

철저히 어리석어질 것

세상일에 눈을 감은 채

마음 놓고

어두워져 갈 것

 

 

 

낙원

김초혜

 

너도 없고

나도 없는 곳

 

그리고

추울 때는

더 춥고

더울 때는

더 더운 곳

 

고향 집 어머니

 

 

 

남은 시간

김초혜

 

바람에 휘어져도

부리지진 않는다

바로 서지 못해도

굽은 채로 하늘을 본다

사랑할 생명이 얼마인데

휘어지면 어떻고

굽은 채면 어떠랴

묶은 끈을 풀어버리고

더하여 가득 차게 하고

덜어 비어 있게 한다

 

 

 

내일의 노래

김초혜

 

세상의 속됨을 숭배하다가

뜻을 잃어

마음 어지럽히지 말고

아침부터 밤까지

맑은 기쁨이나

누리며 삽시다

 

어긋비긋한 세상일

가리려 말고

부질없다 던져 버린 채

모르는 듯

속아서 삽시다

 

그러나

단념과 단념 사이

가난한 소망 하나

가슴만은 마르지 않게

명징한 눈물

머물게 합시다

 

 

 

너와 함께

김초혜

우리가 함께했던 세월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

한줄기 바람도

그윽한 안개비도

우리의 목숨이 되었다

녹음이 우거져

그대 생각 깊어지면

얼굴을 가린 채

눈물 없이 울었다

먼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밤 끝에 또 밤이 와도

내가 

그대를 잊지 않는 한

어둠은 오지 않는다

 

 

 

김초혜

 

1

눈 오는 구석에 홀로 서

눈과 함께 녹아

그대 가슴에 내 모습을

새기고 싶다

 

눈발이 온 천지에 들듯

그대 부신 눈빛

온 마음에 들어와

 

이 마음의

고요를

휘젓고 가고

 

그리움은 갑절로 커져

빈 가슴에

되살아 오는

눈 온 날

 

스쳐 가는 바람 속에

잊을 수는 있대도

내가 소생할 데는

잃어진 당신이다.

 

 

2

그리워하나

서리 쌓인 밤

오래구나

멀리 추억하며

속절없이

쌓이는 눈만 바라본다

강물은 멀리 흐르고

가슴에 일렁이는

너의 그림자

눈은

낯선 기슭에서도

그리움이다

 

 

 

눈먼 날을 위하여

김초혜

 

그물을 당긴다

깃발을 꽂은 적도 없으면서

헛그물질만 한다

눈이 멀어서 창조된

나의 눈

아직은 그렇지만 아른거린다

 

 

 

눈물

김초혜

 

먼 길 가시도록

꽃비가 내리고

붉은 꽃비가 내리고

 

밭거름이 더뎌

아직도 가고 있는지

 

이승의 허망이 무거워

힘이 부치면

뜨거운 이 눈물

딛고 가시라

 

 

 

님에게

김초혜

 

당신의 도량에는 언제나

들은 듯하며 들을 수 없는

그 은밀한 속삭임으로 가득합니다.

 

당신의 주변에는 한사코

맡은 듯한데 맡을 수 없는

그 비밀한 내음새로 넘칩니다.

 

가슴속에 천년 흘러가는

자정의 물소리는

온갖 꿈을 모조리 실어가고 멀어집니다.

 

이제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해

꽃을 피워내는 저 산꽃들의

외로운 분향은

당신의 숲으로 나를 손짓합니다.

 

버리고 가는 아픔도 잊어버리는

당신은 평범하여 가장 비범할 밖에 없는

우러를수록 높게

높아만지는 영상.

 

당신은 원광의 역사를 떠받고

모두 빼앗긴 듯한 외로움 속에서도

劫(겁)을 달려와

끊임없는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달밤

김초혜

 

한 해에 한 번

운다는 바다가

오늘 밤

달과 함께 울고 있다

아마도

나를 대신

우는 모양이다

 

먼 데 있는

그대의

마음이 일렁이도록

밤새워 울 것 같다

 

 

 

담 하나 사이

김초혜

 

철거민촌 사람들은

주검처럼

여름을 산다

 

빌라촌 사람들은

여름을 쾌적하게 보낸다

 

철거민촌과 빌라촌은

담 하나 사이인데

 

 

 

답장

김초혜

 

'생각하면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깐요'

편지 받았다

마음이 육신 이외의

공간인 것을

어찌 쉬이 알았느냐

그래, 마음이 가까우면

거리가 사라지는 법이다

웃음을 넣어 보낸 너의 편지는

할머니를 하루 종일도 웃게 한다

 

 

 

도가니탕과 효(孝)

김초혜

 

어머니와 아들은

제일 비싼 도가니탕을 시켰다

늙은 어머니는 연신

아들의 뚝배기에

도가니를 건져 넣는다

더 먹어라

어머니 드세요

얼핏 아들의 얼굴에

울음의 그늘이 스친다

차차 익숙해질 거예요

조심해서 올라가거라

자주 오겠습니다

사랑과 불효의 무게가 같아서

서러운 어머니와 아들

 

 

 

독백

김초혜

 

시간은

우리를 실어다

망각의 강에 빠뜨린다

죽음의 고요까지도

하늘 끝으로 밀어버린다

누가

인생의 그리움을 깨워

그 속임수로

우리를 위로했는가

내일이라 하는

오늘을 딛고 보니

낡은 불면만

줄기차게 따라와

生을 무너뜨리고

삶의 이력은

위로는커녕

멍에가 되어

나를 잃게 한다.

 

 

 

동무

김초혜

 

거울이 보면

늙음이 보이는데

그대와 만나면

늙은 모습

서로 잊고서

젊음을 나눈다

 

 

 

동백꽃 그리움

김초혜

 

떨어져 누운 꽃은

나무의 꽃을 보고

나무의 꽃은

떨어져 누운 꽃를 본다

그대는 내가 되어라

나는 그대가 되리

 

 

 

들숨과 날숨 사이

김초혜

 

눈물 속에

눈물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그리움으로

다할 수 없어

그리움이랴

 

저승새야 저승새야

인명이 천명이라 해도

 

단 한 번의

들숨과 날숨 사이

죽음을 어찌한단 말이냐

 

 

 

또 다른 길

김초혜

 

너의 용서가

작별임을 안다

면죄부를 생각마라

분노와 권태로

혼합시킨 저주를

거두어들이지 마라

그러면 길은 끝난다

넘어진 나는

일어설 생각도 않는다

눈물과 눈물은

너에게서 표류되는 것을

막았지만

나의 역할은

또 다른 너를 창조한다

 

 

 

또 다른 길이 열려도

김초혜

 

어두운 길이

등을 굽히고

나를 가로막고 있다

뛰어넘으려 하면

일어서서

장애물이 된다

장애물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놔주지 않는다 해도

피할 수 없는 길이기에

무심한 듯

이 길로 지나야 한다

어디에서 요행이

불쑥 나타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라 해도

이 길밖에 없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소리

김초혜

 

나는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죽는 것과 태어나는 것을

왔다가 떠나가는 것을

 

목적도 역할도 알 수 없이

안으로 향하여 나가고

밖으로 나가 들어오는

의문부호를

 

한 몸인 현실과 허무를

현실을 물리치면 현실에 빠지고

허무를 잊으려면 허무에 잠기어

갈수록 멀어지는

지극한 이치가 무엇인지를

 

헛디디며 비틀거려도

텅 비게 할 수만 있다면

 

 

 

 

마음 화상

김초혜

 

그대가

그림 속의 불에

손을 데었다 하면

나는 금세

3도 화상을 입는다

 

마음의 마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상을 입는다

 

 

 

마지막 편지

김초혜

 

완성될 줄 모르는 편지는

너에게 도달되지 않고

공간에 머무르면서

우체국으로 접수될 줄 모른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쓰지도 말자면서 돌아서는 법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연습하지만

정작으로 돌아서야 할 시간에는

변두리만 돌다가 다시 돌아서 버리는 건망증

필생에 한 번 혼자서만 좋아하고

잊어야 하는 삶의 징벌 쓰기도 하여라

 

 

 

만나러 가는 길

김초혜

 

시인은 세상의 모든 울음을

우는 사림이다

억울하게 누명 쓴 이의

억울함도 울고

병들어 아픈 사람의

아픔도 울고

자식 잃은 에미의

울음도 울고

사별의 아픔을 겪는 이의

그리움도 운다

심지어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죄인의

고통도 운다

시인은 우는 사람이다

울음의 기록이 시다.

 

 

 

만월(滿月)

김초혜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

 

만 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도

한마음으로

달은 뜬다

 

오늘 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 생각으로 섞인다

 

 

 

만족

김초혜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잊고

온갖 세상 다 버리고

집을 떠나서

어떤 친한 것도 없을 때

그때

삶의 괴로움을 떠날까

 

 

 

김초혜

 

말이란 하찮은 것인데

한마디 말에 집착하여

 

하늘이 뒤집히고

땅을 뒤엎는 일이라고

끄달리면 무엇하오

 

말에 속아

여기까지 왔고

 

말로 인해

가슴에 독한 기운

품기도 했었소

 

부질없는 세월 동안

구부러진 말 뾰족한 말

 

말만 무성하여

이리 찢고 저리 찢기어

온전키 어려웠어도

 

말속의 말은

나를 찾는 지름길이기도 했다오.

 

 

 

매장(埋葬)

김초혜

 

잘 알던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 되어

내게 들어와

말을 바꾸며

서 있을 때

나는 그를 감당 못 해

불덩이만 삼킨다

그동안 우리의 시간은

무엇이었나

생을 죽음으로 실어가는

시간들이었나

그대는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죽음의 현존을 지니고 있었나

나는 그대를 죽음으로

소유하고 싶지 않아

쓸쓸하다

 

 

먼 길

김초혜

 

 

길을 떠나기 전에

묻고 싶었으나

길을

떠난 후였고

길을 걸을 때

묻고 싶었으나

숨이 가빴다

지금

길이 없기에

길을 잃지 않는다.

 

 

멀고 먼 길

김초혜

 

오 하느님

나이는 먹었어도

늙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햇살은 발 끝에 기울었는데

내 몸이나 구하고

굽은 마음 어쩌지 못해

얼굴을 숨기기도 합니다

몸 안에 가득 들여놓은 꽃은

붉은 조화 나부랭이였습니다

어찌

고요를 보았다 하겠습니까.

 

 

 

모성

김초혜

 

어머니는

자식의 바늘에

만 번을 찔려도

찔린 줄도 모른다

아버지는

한 번만 찔려도

숨겨 둔

바늘쌈을 찾는다.

 

 

 

모순

김초혜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오장육부는

무너지고 사그러지고 흩어지는데

무엇을

더 바라 기다리는가

생각건대

지나간 일

낱낱이 잘못이니

아무 데고 집착 없이

마음의 기슭이나

무너뜨립시다

 

 

 

모순 속에서

김초혜

 

한세상 살아가며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물러앉아

세상의 인심만 탓하다가

내가 그 인심인 것을 알고

미워하던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소.

 

한세상 살면서

진실을 진실로 말하고

거짓을 거짓으로 말하기

무에 어려워

남부끄러움보다 

스스로 부끄러움에 살을 붉혔소

이 추운 겨울밤에

 

 

 

무당

김초혜

 

1

나는 여수(女囚)로 죽었습니다

죽어서 살았습니다

 

증언이 타는

생생한 이마에

부풀은 자국은

징역입니다

사는 표식입니다

부호로 만든 바람입니다

 

복통도 없고 소용도 없고

질문도 없고 언어도 없고

관객도 없고 주제도 없고

출발도 없고 도착도 없고

움직임도 없고 핵도 없고

 

나의 것도 너의 것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똑같이 고통의

근원임을 알고 난 뒤.

 

 

2

치마폭에

운명을 몰아

춤을 춥니다

 

가슴 속에 젖은 실꾸리를

풀어내어

불붙이어

허공에 짖는 집입니다

 

초사흘 달도 불러내고

형체 없는 얼굴도 끌어내고

갇힌 혼도 불러

타인의 한(恨)을 소작(小作)하는

바람입니다

 

몸뚱이에서 순간에

몇 개의 손이

몇십 개의 발이

돋아납니다

 

굴러가는 일월을 상관없이

살풀이가

시작됩니다

 

감은 눈도 떠지고

막힌 피도 흐릅니다

옷을 벗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3

머리맡을 도는

불칼을 휘날려

굴형에 갇힌

사랑을 풀어낸다

 

내색도 못하고

혼자서만 사랑한

꽃빛 사주(四柱)

 

상여로 나가는

살도 녹이는

그런 피가 되어서

 

비로소

달여 태운

재가 되어서

 

바람에 날려

가겠다 하면

잊어도 다는

못 잊을 그대여

 

일백 년의

일백 년을

물이 되어 보시지요.

 

 

4

나는

간밤에

빈 가슴으로

산을 울리고

물살에 불이 일게 했다

 

정지한 사지(四枝)를

붉게 타오르게 했다

 

어려운 말로

중얼거리는

병(病)을 모두 깨워서

역사가 되게 했다

 

저속(低俗)에 녹아

물도 아니고

피도 아닌 게 되어

세상에 서면

늘상

되풀이로의 시작이다.

 

 

5

온몸이 모두 꽃빛으로

몇천의 불이 켜지더니

 

그 몇천의 자리에서

그 수효만큼이나

병(病)이 자라납니다

 

그 병(病)에 새로 소멸(消滅)이 움터

노상 앓던 약속은

부재(不在)가 되고

 

납(鉛)의 무게로

누르던 허탈은

무질서를 낳았습니다

 

춤이 될 수도 없는

무너진 춤 속에서

고삐 논 중심은

뿌리가 흔들려

실성(失性)의 여자가 되라고 합니다.

 

 

 

무소유

김초혜

 

목숨이 나가면

결국은

썩은 고깃덩어리

 

살과 피는

남김없이

불에 태워지고

 

뼈는 먼지가 되어

이승과 저승의

구별을 잊는다

 

 

 

무시하게 하소서

김초혜​

 

의지하지 않고

무시하게 하소서

마음으로 오든

몸으로 오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언제고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무시하게 하소서

마침내

나 자신까지도

무시하게 하소서

 

 

 

무정한 세월

김초혜

 

파도 소리에

잠이 깨었다

달이

저 혼자 밝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저물 줄 알았는데

무정한 세월

 

 

 

무제

김초혜

분노를 따르면

나를 어기게 되고

성냄을 버리면

나를 이기게 된다

스스로

단속하고 길들여

몸의 형상을 만들면

꽃다움을 이룬다

 

 

 

문둥 북춤

김초혜

 

1

덩기덕 덩더 더러러

덩―덩 덩더 쿵―더

 

사랑이 되지 않는

살을 가지고

달래어도 멀어지지 않는

거부의 몸

 

감각이 식어간

팔과 다리는

있는지 있었는지

뭉클리어 오그라들고

 

울고 있는 서로가

우는 것인지도 모르게

닳아진 그림자는

헐렁거리고

 

자는 살을 다시 데워

첫자리로 되돌려 달라고

신시(神市)를 향해

 

 

2

눈물이 생겨나는 구덕만

크게 파 놓고

햇살은 모질게도

살점 몇 개를

더 휩쓸어 갔다.

 

시간은 살 속으로

비집고 들어

얼굴의 윤곽을 녹이려 하고

달과 이슬도

독이 되어

나를 호리고 마는구나.

 

바람과 맞서도 부서지는

번갰불이 스쳐 간 몸뚱이

 

아픔도 즐거움이던 때를

되돌리고라고 허물어져도

얼어붙은 불꽃

타오르고 싶다

신(神)의 지팡이를 다오.

 

 

3

마음속에 살던 새가 날아가 버린 것은

다시 새가 날아올 수 있다는 것이라고 믿었다

 

부재가 확인된 지금도 새가 홰를치며

숨을 트고 있는 중이라고 우기고 싶다

 

새를 안고 새가 자라는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나는 어디에 없나

없는 것 속에서 있는 나는 무엇의 연습품인가

 

새가 깃을 치러 오지 않는 살은 흙이라 해도 되는데

한 줌도 안 되는 흙이라 해도 좋은데

나는 왜 노래를 잊지 못하는가.

 

 

4

초록을 잊어가는

피와 피 사이

아픔이 도져 오기를

 

천둥을 만드는

살과 살 사이

피가 배어나는

살을 갖기를

 

환희가 절단나고

눈물도 숨어 버린

빛이 잠든

살 속에서도

기갈만은 주시길

 

누군지도 잊은

내 피를

땅 곁에

있게 하기를

 

살과 피를 잊은

무감각보다는

천벌도 무섭잖은

아픔을 주시길

 

 

5

덩기덕 덩더 더러러

살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게 해다오

덩=덩 덩더 쿵-더

 

덩기덕 덩더 더러러

형가(刑架)에 못 박힌 모습이

덩-덩 덩더 쿵-더

눈을 감으면 눈시울 속에 있네

 

덩기덕 덩더 더러러

꿈은 인광(燐光)처럼 얼고

덩-덩 덩더 쿵-더

죄업(罪業)의 의미를 깨버리지 못하네

 

덩기덕 덩더 더러러

잊음과 고통이

덩-덩 덩더 쿵-더

주렁주렁 달린 설움을 달래듯

아직도 울 수는 있다네

 

덩기덕 덩더 더러러

새빨간 피 한 옴큼 나오지 않는

살을 가졌대도

덩-덩 덩더 쿵-더

푸른색은 푸르게 보이고

덩기덕 덩더 더러러

빨간색은 빨갛게 보이는

덩-덩 덩더 쿵-더

눈만은 아직도 꽃밭이라네

눈만은 지금도 눈물밭이라네

 

 

7

배부른 이는 형식을 가지고

배고픈 이는 내용을 취하고

버리지 않고서는

새가 될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버려야 한다

 

유일한 건강이 병인 체

병처(病處)를 잊고

짓무른 몸으로

오관(五官)을 열며

갈라진 땅에서

맑은 즐거움을

퍼내야 한다

 

만상(萬象)이었던

생명을 기억해내

곪은 손발의 관절에

최후의 둥근 불을

의무로 켠다

 

 

8

달을 보면 달에

머리칼이 감겨지고

별을 보면 별에

머리칼이 감겨진다

사람의 눈에 숨으나

내 속에 숨을 수는 없어

주제를 찾아

그물을 슨다

절대로 해에게는 감겨지지 못하는

목숨의 넌출

생명을 봉(封) 해 버리고

죽음마저도 봉해 버린

부정(否定) 의 혈관

분실된 살점이

다시 열 손가락의

살점이고 싶어

살점으로 사는 죽음을

죽음으로 사는 살점으로.

 

 

 

문둥 탈춤

김초혜

 

1

쿵기덕 쿵더 더러러

쿵―쿵 쿵더 덩―더

 

차라리

가슴에 수부룩한

봉인(封印)을 뜯지요

마지막 믿을 수 있는

포기가 받아들여진다

 

시간을 살려낸다고

잃었던 감각을

여기 와 머물게 하고

허위의 처방은

심지째 뽑아 버린다

 

빛이라고 가져온

자존심은 부채일 뿐

별것도 아닌

쉬운 것이고

샅샅이 헐었던 몸 구석에서

보이지 않던 얼굴이

한정을 깨뜨려

태어나고 싶어 한다.

 

 

2

살아 있음으로

몰래 변장을 했지만

너의 모습은

나의 벌받은 모습이다

 

가죽만 살아 숨쉬는 나는

살아 있듯 죽어 있고

겉만 죽은 너는

피를 설레게 하는

그리움인 것을

 

닳아져 나가고

흐려져 뒹굴어도

절름절름

잊을 수 없는 웃음은

돌아와 내 속에 살고

 

생명이 먼지 되어 흐르는

아픔은

넓은 원을 그리며

바람이 되고

나로써 가득 찬 기도는

살기 위해 죽는

누가 그린 악몽인가.

 

 

3

한 마리의 새로 태어나자

눈물로 자라는 육신은 눈물밖에 키우지 못한다

옷을 벗어 버리고 빛나는 가면일랑 재가 되게 하자

내일은 오늘을 침식시키고

꿈인 줄 알면서 버리지 못하는 꿈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서성대기만 한다

모른 척해도 모두 알고 있는 비밀이 무너질지라도

당황하거나 겁내지 말자

겁이 많아 가두어 놓고 격리시킨

영혼을 울게 하더라도

 

 

4

의욕의 나무가

뽑힌 자리에

생살이 돋을 리 없는

무상(無常)이다

 

진정제를 마신 모양

몸은 잔잔히 가라앉고

가장 악화된

나를 보며

나에게서

돌아눕는다

 

부서지고

부러진

최후의 빛,

굴러다니는 빛 한 줄

잡지 못하고

 

수천의 화살을 맞고도

다시 일어서는

심한 출혈

본성(本性)의 버릇

 

쥘 손도 없으면서

웃음만 눈부시게

당신과 잡고 싶다

 

 

5

쿵기덕 쿵더 더러러

현실적 시간의 허무와 영광을

쿵-쿵 쿵더 덩-더

풀고 헤치고 끄르고 이으며

 

쿵기덕 쿵더 더러러

새로 열릴 리 없는 빛의 무리는

쿵-쿵 쿵더 덩-더

운명의 감각을 해방시키고

 

쿵기덕 쿵더 더러러

망각에의 속죄가 되게 하여

쿵-쿵, 쿵더 덩-더

갈라진 삭신의 무질서를 녹이는

음조(音調)를 낳게 하네

 

쿵기덕 쿵더 더러러

무심(無心)과 무관심의 방법을 알게 하시고

쿵-쿵 쿵더 더러러

만성(慢性)된 상처를

추상(抽象)으로만 남게 하소서

 

쿵기덕 쿵더 더러러

추상으로 남은 몸을 텅 비게 하시고

쿵 쿵 쿵더 더러러

신성(神性)으로 얽힌

목숨으로만 채우게 하소서

 

 

 

바다

김초혜

 

창을 열면

바다 소리 새 소리

바다와 함께 밀려드니

어떤 일이

이 마음에

그늘을 지으랴

 

 

 

바람이여

김초혜

 

그만 고삐를 놓자

나의 비밀한 부분은

어두운 아침과

불행한 침묵뿐이다

심장의 수선거림은

사람살이를 노곤하게 하고

떨고 서 있어도

추운 줄 모른다

꿈에 네가 오는 날은

오관을 풀어놓는다

인생이 한순간인 것을

뒤늦게 안다

 

 

 

밤길

김초혜

 

어리석으려면

아주 어리석어야지

아는 것이 모르는 것만 못하니

밤길이

더 멀기만 하오

 

 

 

밤바다

김초혜

 

 

부서지는 것이

어디

너뿐이랴

 

부서져

파도가 못 되어

울고 섰노라.

 

 

 

방에 갇혀서

김초혜

 

길바닥에

혼자 서 있다

도망갈 길이 없다

누구와도

바꾸어 치를 수 없는

누수(漏水)

방황일 때

그가 내민 손도

방황이었다

 

 

 

백자(白瓷)

김초혜

 

빛으로 충만한

그대 이마에

맑은 피는 고여 흐르고

 

속눈섭 깊은 숲으로

금빛 광채 나는 길이 열리네

 

소망으로 참아낸 밤하늘에

꽃은 피고

은실의 실오락지에 흐르는

삼천 년 역사

그 흰 꽃엔

식은 피 덥히는 눈물이

등불 되어

환히 켜져 있네.

 

 

 

벌레가 된 그대

김초혜

 

 

부탄 벌레는 무엇이든

등에 진다

더는 얹을 수 없는 것도 모른 채

허공도 등에 진다

지고 또 지고

마침내

잠이 되어

짐 속에 갇힌다.

 

 

 

변명(辨明)

김초혜

 

1

어렸을 적 접어서 띄운

수많은 종이배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서 오네

 

무지갯빛 조개와

능금나무 실한 열매를 싣고

금실의 돛을 달고 떠나간 배가

오므라든 목숨만을 싣고 왔네

 

고리를 풀어놓은

만발한 절망

돌아온 슬픈 안정

 

오늘도 무거운 잠에 빠져

행방을 잃고

돌아오지 않는 배를

백발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산다네

 

 

2

바람이 매화 가지를

꺾었다 마십시오

 

매화 가지가 꺾이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음의 덮개가

열리고 닫히는 것은

귀신도 

못 봤습니다

 

 

3

침묵은 저항이다

침묵은 고함이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아

못 들은 것이다

 

치졸한 변명에

길들여졌습니다

침묵은 비굴함이었습니다

침묵은 치욕이었습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비나 와야 침묵이

변명이 됩니다

 

 

 

변절

김초혜

 

이보시오

이보시오

차라리 무릎을 꺾지 말고

몸을 땅에 풀어버리시오

이제 다 왔는데

주저앉아 무너지면 어쩌시겠소

그만큼 적막했던 그대가

무엇을 견디지 못해

다리를 자르려 하오

등 만드는 사람은

등을 다루어야 하오

 

 

 

변화되는 빛

김초혜

 

뼈마디는

살아온 세월이 무거워

무너졌으니

오는 세월은

간편한 행장으로

맞게 하소서

 

열심히 나를

숨겼다고 하지만

얼굴은 숨긴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이제라도

껍질을 깨고 나와

자신을 기만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깊고 깊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오

 

 

 

김초혜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인생

한 번에 무너지는

자운영 꽃밭보다는

매일 무너지는

자운영 꽃밭을

 

 

 

봄날은 가고

김초혜

 

꽃이 진 자리

다시 꽃 피어도

세상이 멈춘 듯

고요도 드릴 데가 없어라

 

천지사방에 너의 입김이

이렇게 뜨거운데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일

그것이 꿈이 되었다니

 

속수무책으로

봄날은 갔다

 

 

 

봄은 어디서 오나요

김초혜

 

봄은

어디서 오느냐고 묻는

두 돌이 막 지난

재면아

그래, 봄은

네게서 온단다

 

 

 

봄은 오는데

김초혜

 

삶의 보람이 죽음이 아니라고

빛을 그려보지만

매일 죽는 봄밤

꽃이 피니

더욱 늙는다

그리운 이여

 

 

 

봄을 위하여

김초혜

 

오래 머물기 어려우면

한나절 머무십시오

 

생명에 의해

생명은 밀려가지만

 

개울에

꽃물이 흐르는 건

겨울의

눈 때문입니다

 

어리는 봄물 속에

아직도 서성이는 그대

 

 

 

봄 편지

김초혜

 

너를 본다

얼굴이 부서져

흔들리고 있는

너를 만난다

그물을 던져서

건져올린 그대

그대는 적막이구나

네가 떠났어도

나는 나를 떠날 수 없다

너를 어둡게 할 수 없어

나는 너로 산다.

 

 

 

부자유친하고

김초혜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면

웃음이 떠날 날이 없고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

엄숙함이 떠날 날이 없다.

 

 

 

불혹(不惑)

김초혜

 

살아온 불혹

키에 담아 추려 보니

남는 것은 부끄러움뿐

 

보옥으로 감출 일

하나도 없고

작으면서 크고 크면서 작게

절름이며 넘어온 마흔 고개

 

눈 속에 눈이 있고

귓속에 귀가 있어

나를 불러 앉히고

뒷모습 깨끗이 하라고

타이르는 연륜

 

텅 비우고 맑게 해

스스로 닦은 거울

간직해야 되는

수식이 떠나는 나이

 

십 년쯤 후

키에 담아 추려

남은 것은 남루뿐이라고

부끄럽잖게 웃고 싶음.

 

 

 

비밀

김초혜

 

나를 조심하십시오

무엇보다 조심할 것은 나입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사람입니다

나에게서 이상을

발견하려 하지 마십시오

나는 누구와 진실한 우정도

나눌 수 없이

아주 독선적인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너그러워 보이지만

감추어진 내면에는

오만과 편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내 얼굴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때까지

이건 비밀입니다

 

 

 

빈집에 누워

김초혜

 

지난 허물 부끄럽다고

어물거리다가

새로운 허물에

쉽게 얽혀드니

나라는 게

그토록 미궁인가

 

 

 

빈터

김초혜

 

당신의 눈이 감기우던 날부터

형틀은 목에 감기우고

이내 어둠은 열리고 말았네

 

마음을 거두고

떠난 자리에

못다 준 사랑이 잇어

목련이 피어나도

잘못한 양 기다리겠네

다시는 못 돌아오는 그 눈을

 

겁에 떨던 사랑은

어지러운 내 눈을 가끔씩은 속였지만

하루를 스무 폭이나 서른 폭쯤 길게 해

즐거운 나를 있게 했네

 

잡으려 하면 사라지는

그날의 생각은

고죄(告罪)가 되고

나래를 접고 쉬려고 하네

 

황혼처럼

어디든지에 계신 분

그러나 이 무의식한

두 손이여

 

 

 

사고(思考)

김초혜

 

나는 졸고 있다

깨어 있는 것이

진화인 줄 알면서

어제도 졸았고

오늘도 졸고 있다

생각의 발전을 꿈꾸면서

 

 

 

사는 대로 살다가

김초혜

 

나의 친구여

그대 홀로 될까

염려치 마오

곁에 있던 이들이

홀로 있다 떠나는 것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아왔소

한데 얼려 살던 세월을

잡아 두려 마오

기쁘면 기쁨이

멍에가 되기도 하고

괴로우면 괴로움이

보상이 되기도 했지 않소

세상에 사글세 들어

설살다 가는 날

때 절은 세상살이

모든 걱정까지 다 두고

우리 빈 배로 떠갑시다

 

 

 

사는 법

김초혜

 

세상을 살면서

이것저것

많은 무기를 갖추게 되었지만

나는 이것을 쓸 줄 모른다

무기는 무기로만 있을 뿐

무엇을 거머잡지도

버티지도 못한다.

실체가 없는 세상을 떠돌면서

욕심만

나를 묶는다.

문득 솟구치는 구역질

오늘 이

구역질이

너무나 실감 난다.

 

 

 

사랑​

김초혜​

 

1

소리를 내면 깊은 강이 될 수 없다

 

 

2

소리 없이 와서

흔적도 없이 갔건만

남은 세월은

눈물이다

 

무쇠바퀴 돌아간

마음 위에

그대 감아 버린 가슴은

울음으로 녹아 있고

 

서로 먼 마음 되어

비껴 지나도

그대 마음 넘나드는

물새가 되고

 

물과 물이 섞이듯

섞인 마음을

나눠 갖지 못하면서

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굿

김초혜

 

1

그대 내게 오지 않음은

만남이 싫어 아니라

떠남을

두려워함인 것을 압니다.​

 

나의 눈물이 당신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감추어두는

숨은 뜻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화염(火焰) 때문임을 압니다.

 

곁에 있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그립고 사는

사랑의 혹법(酷法)을 압니다.

 

두 마음이 맞비치어

모든 것 되어도

갖고 싶어 갖지 않는

사랑의 보(褓)를 묶을 줄 압니다.

 

2

우리도 섞어서

울리어 보자

이지러진 마음일랑

홀로 버리고

울릴 듯한 울릴 듯한

징이나 되어서

마음껏 그대나

그리워하자

 

그대 보려는

발돋움으로

돌이 되어도

용솟음으로

엉클어지는

숨결이 되자

 

시작도 끝도 없이

천역살로 온 그대

헤어지기도 하면서

만나기도 하면서

끝까지 이렇게 걸어가 보자.

 

3

잊어버리자 해도

여러해살이 종기처럼

전신 발열을 일으키는

시들지 않는

나의 전체

 

그대 허락지 않은 땅에

피로 거른 눈물로

꽃을 피우는

헛된 영혼의 나들이

 

너는 나의 칼

원하면 원할수록

치사량(致死量)의 피가 흐르고

가면 가는 만큼

물러서는 그대

살아 못하면

죽어 하리라는

순백으 눈물도 되는

나의 가엾음.

 

4

나는 너에게

누가 알면 큰일 나는

겹도록 감추어둔

비밀이고 싶다.

 

종일을 숨어

그대 생각해도

마음 한 금 건드리지 못하고

가난하고 약해지는

뚝뚝 눈물이 되는 버릇.

 

남은 살 몇 점

더 태워

삐인 발목 절룩이며

울고 섰는데

거울 앞에 서지 않는

너의 피곤한 미학

 

그대

살을 부비는

절대한 그리움은

주저 못 할지라도

가거든 아니오기를.

 

5

모른 채하는

사람 옆에서

목숨 하나

진실히 울고 있다

 

보이지 않음인지

못 본 체했음인지

시침을 떼도

끝이 없는 빛줄기를

지울 길 없어

 

마음을 달래어

허울로 온 것을

밀어도 다가서려는

진실이라 믿으마

 

얼굴도 심장도 없네

성한 모습 무너진 것

부끄런 줄 모르고

어쩌다 선연한 눈물이라

 

당신이 찾을 때까지는

먼 등불로

비밀한 늑골 하나

숨이 차도

모른 채 있으마.

 

6

제가 저를 괴롭히는

마음이라는 것

목도 조이고

혀도 되어서

죄의 큰 그물을 엮어

뿌리를 먼저

삭게 한다

 

자르고 베어도

잊힐 리야 없을

그대 향한

나의 마음

어둠인 듯 감추었다가

흔들림 없게

크게 빛내이고 싶다

 

태울 듯 불 붙을 듯

멍에 멘 마음에

그대 넘나들지 마시고

더러 생각나거들랑

가다가 멈추어 서서

못 잊는 내 허물

탓하지나 마시라.

 

7

갇히어도 가리

열락(悅樂)인 너에게

내 생의 제일로

깨끗한 날

수식 대신

걸망한 누더기 걸치고

외쪽발인 체

단숨에 달아가리

 

집착 않고

이별 없이

서로 비쳐

함께 적시는

둥지 만들리

 

허공에 피어

열매 맺지 않고

한 발자국도 오지 않으며

내게 무너져 오는

혹시나 그대.

 

8

그대 만남이

어두운 시간의

빛이었다면

 

나만 혼자 알고 있는

그대 마음을

가슴에 묻어서

등불 만들고

 

불멸로 지은

오막집

옳은 듯 빗나간 듯

기둥 세우고

 

부러진 축(軸)을

가질 수도

버리지도 못해

무릎을 꿇으며

연습은 고만.

 

9

내가 먼저 사랑한 사람

먼저 잊게 해주오

 

목까지 자란 그리움을

거짓말처럼 잘라낸 후

이제 남루를 벗고 싶으오

 

그대 도리질의 이유는

헤아려도 추측할 길 없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리라면

없어져 그리움이고 싶으오

 

끝내 분할이 안 되어

내 몫이 없을

불꽃이라면

뼈가 운대도

비겨 잊으리다

 

그대여

기침과 심술은 그만

하나의 별만을 빛나게 할

꽃등(燈)을 켜들고

남몰래 숨어서

몇천 겁(天劫)을.

 

10

내 한숨 바람 되어

그대 목에 감기어 들면

그게 난 줄 알아

모른 채 비켜 주요

 

살을 베어 살을

벌지 못하듯

물이 피가 될 리 없겠지마는

잊은 마음 전혀 없어

바람이려오

 

몇천 년을 살려고

그대 나의

기쁨이어서는

아니 되오

 

허리 묶인

홍사(紅絲) 풀어내고

나도 그대의

꽃이 되고 싶으오

 

돌을 심어 싹이 나도

아니 오시겠오

바람 불면

멀어 있는

달로 오시게.

 

11

그대

물음표투성이의

가슴을 가르고 들어가

생 빛 한 줄기

찾으려 했네

 

얼굴도 눈도 없이

허공만 숨어 사는

그대 몸 전체에서

거듭되는 어제를 지켜보며

동행할 빛을 잃었네

 

몇 번이나 헛짚은 그대

흠집이 많은 얼굴을

망설임 없이 물리치며

새로 낯설어지네

 

난파된 목숨 짐짓 가지고

돌아서면

돌아오는 그대

문득 궁금해지면

분장하지 말고 오게.

 

12

빗장을 풀어

한 꿈을 모조리 내보내고

나를 동여매던 벌(罰)을 풀고

빛처럼 살아보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연분이 있거들랑

태워 버리고

풀어졌던 살들을

돌아오게 하여

현(絃)을 울리게 하자

 

부러진 허리를

곧추세우고

죽었던 살을 깨워

뿌리를 돋게 하자

 

일제히 깨어난 빛이

허공에 걸린

불붙은 머리칼을

베어 버릴 것이다

 

피멍을 닦아내고

늑골에 고인

자멸(自滅)을 지져내며

푸른 살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사는 거다.

 

13

서로 잊으려

켜지 않는 불

 

잡혀지지 않는 것

붙잡지 않으면서

어쩌려고

얼굴엔

얼룩을 짓나

 

하나의 눈짓을

다른 눈짓으로

베어 내려는

눈부신 어지럼증

 

가난한 울음 말고

조그만 웃음 되어

그대

마음에 뜨는

달이고 싶다.

 

14

날을 수 없는

날개를 가지고

날개인 줄 알고

그대에게 간다

 

마음은 마르고

말라서 갈라진 채로

허물어지며 있어도

그대 웃음이 비치면

대번에

물이 흐른다

 

평탄을 버려

거친 길이 열린

되풀이의 길

나를 잃으며

네게 가야 되는

시험엔

눈물이란 답이.

 

15

그대 소유하지 않은 것

소유하려는 데에

피곤은 가혹해지고

 

집착 없는

집착의 징조가

의식하지 않는

무의식의 흐느낌이

아파서

깨지는 거울

 

네게 가까이 가려면

불 속에서 떨고

얼음 속에 불타야 하고

그대에게 가지 않으면

천지도 생겨나

만월(滿月)로 뜰 수가 있고.

 

16

불 속에서 태워지면서

고독마저 없어지고

행할 것과

행해서는 안 될 것이

어떤 건지도

어둡게 되고

 

끝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시작되는

아린 사랑을

도로 불 속에 던지며

화상으로 완성되는

어리석음이게 하소서.

 

17

가장 큰 모습은

형태가 없듯

보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참 많이 어디에나

있는 그대

발돋움은

비뚤어진 길인데

생각만으로도

바로 서지 못하는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딘가

 

18

점을 쳐 괘를 푸니

욕심 따라 성급히

서둘지 말고

마음을 정히 닦아

푸닥거리나 하라 한다

 

오늘 하루 마음대로

너를 사랑해

만남 지옥 헤어짐 지옥

질끈 묶어서

모든 지옥

구석구석 잊어나 보란다

 

불 갖추고 못 한 사랑

장생불사 오만 잡귀야

귀신놀음은 고만

간도 피도 다 말리고

말릴 게 없어

말릴 게 없어

형벌하며 하는 말

푸닥거리나 하라한다.

 

19

피어서는 안 될 꽃이

피는 것은 눈물이오

그대 의해 피워지는

꽃이라면 갈증이오

 

모순을 증거 할 수 없어

병들고 잠들다가

내가 나를 견뎌내

이제야 그대가 보이오

 

목마른 내게

불만 주는데도

모순은 반짝임처럼

사랑이 되오

 

땅은 땅밖에 모르듯이

다른 형상의 모습 말고

그대 내 詩가 되어

남아 있어야 하오.

 

20

가면서 남긴

너의 목소리

칭칭 나를 동여매도

끄르지 않고

남겨두는 뜻은

뼈를 울리고

살을 울려

언 땅에 나를 묻은

너를 만나기 위해

 

결박을 조여

누구도 풀 수 없이

꽁꽁 묶이인

이대로

하늘 밖으로

가고 싶은 뜻은

네가 없고 내가 상실되어

마음대로 소생하며

네게 이르기 위해.

 

21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 쓰러지고

다시 네 앞에 일어나

쓰러지고

불시에 불구(不具)가 되어

눈물이사

그대 내 살 속에

풀어 놓은 징벌

 

우리 목숨의 분량은

얼마나 남았나

건강한 매무새로

모두 퍼낸 다음

떠밀리는 물결이 아니게

꽃배를 타고 싶다

 

다감(多感)을 사루어 버린

지금은 작별의 때

새롭게 감기는

밧줄을 끊고

출항을 하련다

 

떠나보내며

어쩌면 외로울지 모르는

나의 그대여

날으는 새가 되어

그때 만나자.

 

22

너는 나의 그물이다

내 자신이 잘 보일 때

무섭고 겁날 때는

빛 낡은

의지도 걸리고

곤비(困憊)함도 걸린다

 

나는 너의

가난한 부분이다

무슨 설레임이

우리 둘 사이를

가난하게 만들었나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입도 없는 채

 

너는 나의 변증법이다

포박된 줄을 끊으면

사랑도 되고

미움도 되고

단단한 미지수도 되면서

끝내

의문부로 남는다

 

나는 너의 영혼이다

뼈가 흙이 되고

살이 물이 되어

의지가 흐려져도

너의 눈에

깨끗한 꽃으로

다시 맑아 흐르마.

 

23

남겨 놓은

가능성은

아픔이오

 

움직이지도

잠자지도 않는

녹슬은 생명은

그날부터

생떼로

사랑 목록을

소매하오

 

당신을 얻은

허무 있기 전

마법의 입김은

걷히어지고

서투르지만

돌을 기르며

견뎌내고 있오.

 

24

나는 너를

언제나 오역(誤譯)한다

혀를 감아 버리고

말을 잊고 싶다

 

지침(指針)을 뽑아내고

너는 언제부터

나의 무게가

되었느냐

 

벌(罰)을 상(賞)으로

선택하여

겪어내면서

갈망한다

 

누구도

예감(豫感)할 수 없는

어려운 악보를 준

그대를.

 

25

너와 내가 합쳐서

하나의 별이 되자

아무도 못 보게

억만 광년 빛으로

반짝거림이 되자

 

입이 메어지도록

고통이 들어차도

변덕 부림 없이

나뉘인 육신을

서로 잡아 주자

 

제일로 가까운

첫 번째의 별에

집을 짓고 맹목을 심어

태양도 여기에선

휘어지게 하자

 

아무 것도 못 아는

무재주를 사랑하며

차 있으나 넘쳐 흐르지 않는

순한 불이 되자.

 

26

내겐 절단이

너에겐 획득이 되어

나만 다리를 절며 간다

약발도 안 들어

불칙하게 말라가는

수족(手足)엔 관심도 없이

나의 외과의(外科醫)는

처방전에

남의 눈에 뜨이지만 않으면

감쪽같다고

써 주었다

한쪽 발이 짧아

절름거리면

다른 쪽을 맞추어 놓고

맞추어진 다리가 짧아지면

달아나며 따라와

시술을 자꾸만 뒤집어 보지만

마침내는

서지 못하는 다리를 준

너는 나의 외과의(外科醫).

 

27

충실한 얼굴이었던

어제가

바람에 날리는

넘마 되었고

 

억지를 부려 보아도

마음은 칼날을

닮지 못해

부어오르는 고통

 

하늘도 진(盡)해 버릴

변덕스런 마음은

감정이 홈 속에 숨어

톱니를 만들고

 

노여워짐이

무가치함임을 알고

불투성이가 되어

녹아내린다.

 

28

분칠한 그대 얼굴에

분칠하지 않은 내 얼굴이

포개질 때

꿈인 듯 가졌던 그대를

잃을까 겁나

허물어진 날

나의 주제(主題)가 되어

거짓으로라도 감추어다오

그대 지닌 허물을

 

쓴 것도 쓴 줄 모르고

거절도 거절로 모른 채

반(半)은 타며

반은 식으며

전폐된 의지를 깨우지 못하는

나는 너의 어릿광대

그대 역겹게 하는

어리석은 불꽃을

용납치 않으며

진실을 허위로 바꾸어

잊지 못해 떠나 본다.

 

29

손금에 나타난

사주팔자엔

아무 사연

어떤 까닭도 없건만

젖은 형틀을 메고

가파른 길을 간다

 

흐르게 두어라

뛰다가 서면

넘어지듯이

막으면 넘치는

사랑법을

흐르게 두자

 

내가 울어 보낸

핏물 하나

그대 가슴에

질척이는 눈물 말고

별이 되어

빛나고 싶다.

 

30

바다는 비를

다시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흙은

물을 마시어도

물이 아니어듯

눈먼 영혼을 가진 그대여

나의 헌납을

속박 없이 받으시라

 

나의 오감(五感)은

그대에게 가는 빛을

막지 못하고

수렁에 빠져도

새롭게 접목되며

너로 가득차고 싶다

무엇으로 바꾸지 않을

나의 오욕(汚辱)을

아름답게 견뎌내며

묶인 채 자전(自轉)하리라.

 

31

멀어서 있는 그대

그대는

시작이고 끝이다

끝과 시작은

언제나 내게 머물러

일어서게 하고

허물어지게 하고

그대

나를 위해 울어준다면

해도 지지 않고

달도 뜨지 않는다

눈(目)도 아니고 혀도 아닌

너의 암시는

내게 악성(惡性)만 자라게 해

하루에 밤을 두 번 있게 한다

새벽이 두 번 있는

하루를 기다리며

사랑 없이 사랑하리라.

 

32

이제 마음을 얘기하지 않으리

사랑으로 사랑을 벗어나고

미움으로 미움을 벗어나리

죽어 묻히는 날까지

그대 떠난다 해도

마음속에 살게 하리

끝없는 불꽃이 되어

재까지 태우며

던졌던 생명을 거두어

천천히 빛나게 하리

갈망하지 않고 꿈꾸면서

혼자서 가져보는 그대

고운 병 만들어 앓으며

짖궂은 그대 허위

벗기지 않으리.

 

33

나만 흐르고

너는 흐르지 않아도

나는 흘러서

네가 있는 곳으로 간다

 

흐르다 만나지는

아무 데서나

빛을 키워 되얻는

너의 모습

 

생각이 어지러우면

너를 놓아 버리고

생각이 자면

네게 가까이 가

몇 개의 바다를

가슴에 포갠다.

 

34

생명의 중간쯤에서

낯선 죄를 만나게 되었다

혀가 겹쳐져서

말을 발견하지 못하고

친근하나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너를 본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인 너

복합체의 성정을 지닌 네가

전과 달라야 되는데

다름이 없어

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피차에 아주

낯설은 사람이 되자

 

서로를 위한 것이

서로에게

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죽은 흙이 되자.

 

35

백 개의 뼈마디를

여섯 개의 내장을

열고 보아도

물(物)로만 있는 것

모르는 것 아니어도

어찌하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고

부어도 넘치지 않는

너로 하여 느는 괴롬

해결되지 않는

사슬은 매어

무엇하리

 

원근(遠近)을 잊는

너와 나의 사이에

바람이 불어도

혼백은 섞이어

해를 향해 솟기도 하고

달을 향해 숨기도 하리니.

 

36

구름에 가려도

제 빛인 하늘

먼지에 흐려도

맑은 그대

서로 비워

환한 우리

시들지 않게 두자

그르다 해서

치우지 말고

옳다 해서

애쓰지 않으며

안에 있는 울음과

밖에 있는 웃음이

다르다 해서

조바심도 말며

이쪽에 있어야

저쪽이 보이듯

멀어 있으며

종내 못 잊는

우리가 되자

 

37

꿈속에서는

현실과 만나

울어버리고

현실에서는

꿈을 만나

미망(迷忘)에 속고

 

무엇도 될 수 없는

속수무책을 피해

돛도 없이

돛대도 없이

거꾸로 가라앉아

멀리 갈수록

네게 이르고

 

살아 있음과

죽음의

구별이 없을

백 년 뒤에나

무상의 기쁨으로

함께 빛나자.

 

38

그대, 어디로 가는가

어둠에서도 빛을 나눌

다사로움 마련했으니

정화(淨化)의 불 속에서

새로 태어납시다

 

엇갈려 감겨 있는

여러 생각 풀어 버리고

만나면 우리

백치가 됩시다

 

눈물은 물리고

탈 바꾸어

아무 데서나

서로 향해 오는

등불이 됩시다

 

속된 일에

고달프지 말고

많이씩 우둔하면서

세속 밖의

꿈을 꿉시다.

 

39

네게 줄수록

내게 더 많이

쌓이는 불

불은 불로 끄고

물을 물로 막고

나도 없고

너도 없게

그대의 모습으로

나를 지운다

 

네가 보낸

꽃보다 타는 눈짓은

몸체의 바퀴를

떨어져 나가게 하고

하늘의 뜻이라

죄를 기르며

나를 달랜다.

 

40

물이어라

 

이룬 것 없는 듯

이루는

 

너를 잠기게 할 수 있고

네 속에 들 수 있는

 

죽어도 딴 마음

가질 줄 모르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머물게 하는

 

나를 잃지 않으면

너를 붙잡아 둘 수 있는

 

물이어라.

 

41

하늘에

해가 하나이듯

물 흐르는 도리에

두 가지가 없어라

 

그대로가 하나이어

마음에

두 길을 내지 못하고

짧은 생명에 갇히어

내 영혼은 울어라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채

어지러움을 견디며

세월을 돌려 놓아도

눈면 돌 속에

아득히 있는 그대.

 

42

얼굴을 돌려도

그림자는 남듯

그대 떠난대도

그리움 되일어

날마다 반기오

 

멀어지지도

다가오지도 않으며

한숨과 웃음을 지니고

가던 길로

돌아오는 그대

 

죽음은

몸과 마음을 갈라놓지만

그대와 나

죽음도 건너

뿌리 없어도

꽃을 피우리.

 

43

오늘은 강물이

무슨 일로

한밤내

울고 있는가

 

흔들리며

웅얼웅얼

어떤 추억을

우는 것인가

 

달도 쉬어가고

그리움도 쉬어가는

월유봉(月留峯)에

분꽃은 수줍은데

 

건드리면

눈물이 될

마음을 안고

그대에게

가야 하리

불이 꺼져도.

 

44

그대 길 떠나면

나는 길이 되고

밤으로 그대 오면

나는 달이 되리

 

빈자리 마련하고

충족에 있기보다

남루만 가지려

목숨 빛나는데

 

그대 내게

중심 없는 혼란 주어

시간 밖에서

시간 안에서

마음이 잃어지면

 

가로놓인

설운 산을 무너뜨리고

아무래도 나는

떠나야 할까 보다.

 

45

그대 바람이어도

흔들리지 않으려

내가 될 수 없는 나를

안으로 숨겼건만

 

내게로 오면

빛이 되는

그대

넉넉한 웃음소리

 

가까이 와도

멀기만 더한

먼데 있는 그대를

가득 울고 있는데

 

어리석음으로

다하지 못한

어리석은 이

못 떠나면 어이하리오.

 

46

얼굴 속의 얼굴을 보여다오

백 번을 거듭나도

그대 하나

태우지 못해

숨어 우는 뜻

어찌하랴

 

세속도 어기고

진실도 버리며

사정없이 추운

나의 눈먼 이치가

어찌 그대 허물이랴

 

매일의 죽음 속에서

살아나는 나의 꽃은

그대 얼룩지게 하지만

어둠에선

어둠만 살 듯

사랑에선

사랑만 남음에랴.

 

47

불타 버려도

옮겨붙어

다시 타서

차마 못 타도

 

불이 되어

불로 태워

사루어 주고

 

물이 되어

물로 식혀

씻어 주시고

 

물에도 젖지 않는

뿌리를 내리시고

불에도 뜨겁잖은

근거를 주시어

 

잊어질 때까지

모습을 상하지 않게 해

형체를 지키어

잠들어 꿈꾸게 하소서.

 

48

다르다 하면

하나로 되고

같다고 보면

거리가 있어지는

그대

누구시오

 

가까이 있을 땐

가까와 못 가고

멀리 있을 땐

멀어 못 가

맘 졸이며

그대신가 기다리고

 

잊지도 않고

구하지도 못하며

네 속에 네가 숨어도

내 속에 내가 숨어도

감추어지지 않는

사랑이란 말

차마 쓰기 어려워

더디게 울어 보내오.

 

49

입으로 보내고

마음으로 놓지 못하는

괴로움의 덩이

 

네게 가는 마음

머무르거나

그치지 않고

버려질 모습으로

녹고 있고

 

사랑도 저를 먼저 해치고

미움도 저를 먼저 해치니

그대 건너

다시는 미혹하지 않으리

 

오래지 않아

돌아가리니

몸을 헐고

마음은 떠나가고

잠깐 머무는데

무엇을 울게 하리.

 

50

높게 멀고

담을 쳐도

나는

불어나며

넘쳐

네게 이른다

 

얽어 묶어도

만나는 갈리는 줄

알고 알아도

 

놓아 버리고

풀어가고

벗어나지 못해

흔들리며

멀미를 한다

 

생명으로도

지우지 못할

너의 모습

꼭 한 번

마음대로 젖게 하라

 

51

내 모양을

내가 부수고

마음의 때 씻어내

뜻을 풀어

괴로움과 멀게 하소서

 

어리석음에 얽혀

어두움에 들어도

세상 습관을 잊으며

하루라도

마음을 쉬게 하소서

 

내게서 자란 꽃순이

그대 밝히는

해가 된다면

허(虛)해도

불을 품은 채 잊게 하소서

 

어제는 연기로

날려 보내고

거듭

몸살을 앓으며

새로운 나를 낳게 하소서.

 

52

그대에게 가는 길이

저승에서도

더 먼 길인 걸

모르는 것 아니어요

 

들키지 않을

눈짓만

넉넉한 그대 이마에

얹어 놓고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둡고

험해도

노래할 테요

 

일찌기 가졌던 것

모두 버리고

타지 않으며

그대 곁에 머무를 것이어요.

 

53

그대 있기에

이 봄을

버릴 수가 없으니

꽃도 아파라

 

살이 아파하는 소리

뼈가 못 들은 채

이대도록 반나절

갈피를 못 잡고

 

나 못 들은 체

그대 못 들은 체

눈물도 가두고

기쁨도 가두고

 

잊어버리자

허리 꺾어

내려 누르는

이 머언 뜻을.

 

54

더운대로 추운대로

새순을

피우는

그대 또 그대

 

물되어 간 나를

불되어 간 나를

용서라하

그대여

 

이대로 말라서

물이 되지 않는 살을

타다가 이대로

불이 되지 않는 뼈를

그대여

무정(無情)하게 흐르게 하라

 

돌아서 가건

돌아와 서건

모르는 채 그대여

그렇게 맑아라.

 

55

몸이 있어

병이 있듯

그대 있기에

설움 있네

 

물을 묶지 못하는

그때나 이제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못한

이 마음

끝끝내 못 묶어

일렁이노니

 

참말로 사랑 아니거든

서지도

오지도 말며

저만치 뒤에서

잡아나 주어

구김 없이 흐르도록

도와주소서.

 

56

그대에게 얽매이면

두려움 일어

마음 태우거늘

그대에게서 벗어나면

잠시라도

기쁨 있어

번뇌의 불꽃 스러지네

진심도 괴로움도 끊고

이제는

그리움도

만나지 않으며

마음을 굴리어

하늘을 닮으면

못난 생각

잠깐도 나지 않아

고통에서 고통으로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리.

 

57

잊었노라 함은

잊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벗어났다 함은

결박을 말하는 것이리

 

바람의 발을 붙들어도

그대 붙들 수 없어

무너져도

못 무너지는 마음

어찌해

애닯지 아니하리

 

미혹이 진실인 줄 알아

한 생각 잘못하면

모든 것 떠나가니

뿌리를 파내어

서로를 버리는 일

마땅이 없이 하리.

 

58

낮에도 밤에도

줄어드는 목숨이지만

마음으로 삭이면

죽은 나무에서도

꽃이 핀다

 

서로 갈려

떠나가도

햇빛으로

다시 피어

어둠에서 밝음으로 흐르고

 

그대 변하는

형상 따라

이 마음

움직이는 것 아니니

매어 묶지 않아도 되리

 

세상에 살면서

세상일에

묻히지 않으면

바다 속에서

흙도 디딜 수 있으리.

 

59

달은 날마다

둥들어

다시 이지러지고

 

한 달 내

제 마음 길들이며

편해진 심사

이렇듯 어두운

어질병을 일으키고

 

서른 밤 변해도

둥글어지듯

아픔으로

어리석음으로

얼기설기 얼어도

그대 불로 켜지는

그리움이리.

 

60

그대 곁

머물 데 없어도

마음의 집착

덜어내면

세상 가득

걸림 없어

그대 곁에

이를 수 있으리

 

아픔의 형태가

다른 모습으로

커와도

세상과 다른 쪽으로

돌아누워

제일로 맑은 넋

자랑하며

서로 새로워지리

 

61

낡은 피 다 버리고

네게 간 나를

붙들어 둘 수 없어

떠날 수 없는 그대

 

다음에 만날 때면

그대여

어둠 속 그늘로 오지 말고

빛에서 빛으로 오시게

 

눈물 속에 되흐르는

그대 말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강물로 흘러 주게

 

잊을 수 없어

아무래도 못 견뎌

물로 흘러가거든

그대여

한 번만 넘치어 보게.

 

62

놓아 버림 후에

가까와지는

그대

 

그대 모습

뚜렷이 볼 수 없음은

눈물에

믿음이 없어서이고

 

나의 내부(內部)

끝없는 곳에

끝없이 있는 그대

 

떠돌던 생명은

한 줄기 눈물로

새롭게 맑아지고

 

몇백만의 몇백만의 시간을

돌아서게 두어도

눈물로

다시 오는 그대.

 

63

밤이 되어면

꿈에 만나자

마음과 뜻으로

모든 허망 안 보며

물 없는 데서

물을 내라 해도

좋은 얼굴이 되자

 

내 허물에

네가 더럽혀져도

편안히 받아들이면

어떠한 마음이

그것을 분별하랴

 

부릴수록 느는 것

욕심만이 아니듯

미워하면 미움 늘어

낯설어지니

서로는 빛이 되어

맹목에 살자.

 

64

형상도 빛깔도 없는

헛된 모습에 묻혔던

나를 무엇으로든

가리고 싶으오

 

그대 공간(空間)을

여행하던 빛을

모조리 꺾어

햇빛 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마에 묻은

허물을

씻을 길 없어

꿈을 끊노니

 

뜻밖의 하늘로

내게 와

상실에서

건져내 주오.

 

65

다툼도

허물도 없이

 

친하지도

소홀하지도 않으며

 

막지도

비키지도 않고

 

밝지도

눈부시지도 않게

 

웃음도

기르지 않고

 

울어

달이 되지도 않으며

 

돌같이

아무렇게나

그대 곁에 구르리.

 

66

마실 수 있는 이에게서

물을 빼앗고

마시지 못할 이에게

물을 주는 것은

오를 수 없는 하늘을

오르게 하려는 벌(罰)

 

볕으로도

줄지 않고

바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바다처럼

무슨 설움으로도

바뀌지 않는 마음

 

이루어냄에도

허물어짐에도

아서라

마음 쓰지 말고

모두 두고 가는 물처럼

그렇게 흐르리.

 

67

불꽃 속에

들어가는

악(惡)이 되어도

먼데 사람 아닌

거기

있고 싶다

 

좋은 얼굴 헐리고

낯빛은 시들어도

본래의 모습 아닌

어리석음 이대로

물러나 뉘우치고

아플지라도

 

그대 눈 속에

내 눈을 심고

그대 울음 속에

내 울음 심어

안으로 안으로 상해도

그대

받아들이는

이것이 무엇인가.

 

68

내 수치를

아는 것도

 

나를 피하려

비켜서는 것도

 

나를 조금도

숨길 수 없는 것도

 

의지의 문을

부수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 것도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는 것도

 

한 덩이 무덤인

나입니다

 

최초로

그늘 속에

햇빛으로

서신 이

그것만 당신입니다.

 

69

하루 낮의 기쁨인들 어떠리

꽃 피울 수 없어

씨앗을 기르지 않는

서러운 그대

 

꽃 꺾어 머리에 이고

나 몰라라

그대에게 가

하루만 보름달이면 어떠리

 

그대 배경으로

조금은 남은 향기

씻기어지지 말라고

더 어리석어지면 어떠리

 

작은 흐름을 내어

천리에 이르는

물을 이루어

그대 얽매지 않으려 해도

 

무릎을 꿇으며

멀어가는 그대를

무슨 용서로

섬길 수 있으리.

 

70

등불과 어둠은

같은 빛이라

등불이듯

어둠이듯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등불로 잠들고

어둠으로 깨어나도

가슴을 딛고

달아나는 그대를

붙잡지 못하는

아직도 시린

맨손이어라

깊고 무거운

사슬로

묶이어 간

그대가

오늘 아침

이 길로 온다 해도

맞을 수 없는

빈손이어라.

 

71

왼쪽 가슴에 물을 내고

오른쪽 가슴에 불을 내어

고요를 갖는 것은

거절로써 나를 구하는

그대를

성내지 않기 위함입니다

 

불어나는 어둠을 막아

빛살로 지켜준대도

고단하게 울고 있는

나의 단순함은

그대의

복잡성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머무르는 권태가

기쁨에 섞여들지 못하고

떠도는 것은

찾아지지 않을 것을

찾으려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72

불 속에

두 손을 넣고

나를 넓혀

그의 모습을

지워 주소서

 

지운다 그렇대도

나의 외로움

그대

눈빛으로

가라앉혀 주시고

 

오래 새롭게

만나기 위해

높으게 사는 목숨

이어지고

이어가게 하여 주시어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더불어

빛나는 노래

부르게 하소서.

 

73

반드시 이루어지리

괴로움에 결박된 마음

저절로 풀리고

고운 것 더러운 것

모두 거두어

푸르게 흐르게 하리

 

묶인

손목이 저리어와도

스스로 부른 괴롬

새로 또 지어

꽃다움 이루어

스러져도 좋으리

 

세상일 버리고

마음으로도

원하지 않으며

하늘을 바라지 못한다 해도

귀나 밝혀

바람 소리 들으며 살리.

 

74

봄이 오면

첫 불을 밝히는

꽃을 아는가

그대여

 

꽃에 묻힌

그대 모습

그릴 길 없어

짐 풀고 싶을 때

 

기쁨도 슬픔도

내 몫이 아니던

날은 지나

푸른빛 울리고

 

서로 갈고 닦기에

새로운

봄은

꽃이어라.

 

75

그대 아니 오는데

눈부신 빛이면

무얼 하리

 

이제 짐 풀고 앉아

마음으로 지은 죄

붉은 눈물로 받으리

 

한 번만

마주 보려고

헛된 열망 여러 번

 

어둠을 피해 서며

죄 아니게

사랑하는 이

 

그대 내 뜻과 같았음을

뒷날 깨닫는대도

어찌 원망 없이

그대 맞을 수 있으리.

 

76

생(生)과 죽음의 사이에서

꿈을 꾸었소

흔들리면서

엇갈리면서

꿈과 꿈 사이에서

꿈으로 굳혀지고

귀먹고

눈멀어

말을 잃어도

깨어나지 않고

그대에게 이르기

바랐었지만

보다 높은 꿈속에서

그대

되찾기 위해

미움과 고움

버리고

넓게 빛나려 하오

 

77

나를 낳게 하라

무엇을 더

허락할 수도 없이

절명한 생명

그대 속에서

죽어간 시간은

빛으로도

깨쳐지지 않고

가슴은

숨길수록 아픈

변명에

에이는데

하늘도 허리 굽힌

나의 진실을

무작정 무겁다고

돌아선 그대

 

78

땅이 눈을 뜨자

하늘을 섬겼듯

아이와 같이

무조건이게 하소서

 

의식하지 않으면

죽음도 오지 않듯

그대 얻으려 않으면

잃지 않아도 되고

 

가장 겁났던 것

쏟아 버리고

괴로움도 쉬게 하여

확실한 밝음이게 하소서.

 

79

마음으로 생긴 세상

마음으로 머무르며

마음따라 기쁨 내니

마음에 의지한

비좁은 몸은

마음을 접으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어

저절로 허공이 되고

마음과 마음 아닌 것

하나 되지 못하니

이루고

무너짐을

탓하지 말고

마음 안에 있었던 것

모두 부수어

마음 밖으로 밀어내리.

 

80

달은 깨끗하고

해는 빛나고

그대는

하나를 지켜

고요하라

 

그대와 나

해와 햇빛이게

달과 달빛이게

끝간 데 없는

기쁨이어라

 

한 생각도

어지러움 없이

목숨 더함 얻어

기쁨에 섞이니

그대는

하늘 중의 하늘이어라

 

81

불로도

태워지지 않고

물로도

잠기지 않는

허공보다

높이 있는 그대

빛의 으뜸으로

밝음이 되어

마음의

바탕이 되어주오

그리움도 번뇌도

걸러냈으나

온종일 생각해도

즐겁고

싫지 않은 그대

돌무더기

서러워도

그대 바래 살려오.

 

82

떠난다 하면

미련 생기고

잊자 하면

그리움 깊어지니

떠난다

잊는다는

마음 버리고

 

그대가

파낸 뿌리

묻어

올리는

흙이 된다면

사랑이 풀이어

괴로움 떠나리.

 

83

아무 구함도 없는

밝은

섬이 되리

 

조그만 죄

심장에 가두어두고

무거운 고통과

움직임 없는

절망이 와도

그대에게

정직하고 싶어라

 

그대와의

세월은

아픔으로 쌓여 있고

 

그대 덜

사랑할 수 있다면

빛의 그물에 누워

봄만 머무는

섬이 되리니

 

84

해도

달도

어둡고

그대도

나도

오늘은 모두

어둠으로 들어

어둠이

어둠 위로 밀리고

배에

스며드는 어둠

퍼내어도

뱃머리를 돌려도

변하지 않는 건

고뇌뿐

어찌해도

어둠이여

용서하도록

용서받도록

도와주소서.

 

85

어려울 것도

쉬울 것도 없이

너그러워지는

마음은

외홀로 흐르고

 

말하기 싫어

말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서

모르지는 않는 그대

 

말 안에 없는 말

말 밖에 있는 말

모두 안다 해도

어둠에 빛일 수는 없는 그대

 

빛을 못 보고

어둠만 본다 해도

새로운 시간을 걸고

지금은

무심(無心)이어야 하는

때.

 

86

기쁘지 않게 오고

서럽지 않게 가며

꿈속에 머무는

그대

 

하늘은 잴 수 있어도

그대 마음

헤아릴 수 없어

잠들어도

우는 나를

어찌하란 말이냐

 

병을 안고

죽음 오듯

목숨이 무너져도

네게 흐르는

나를

멈출 길 없으니

 

뜨지 마라

달아

나의 이 설움

끝날 때까지.

 

87

고통이 기쁨

가져온다면

금빛 시간

기다리며

그대가 건네준

괴로움

달다 받으리

 

많이도 데었던

아픔도 잊고

달이 차면

남몰래

넘어오는 그리움

서로 가졌던 것

버리기 아까워

노상

달만 탓하오.

 

88

봄을 보채

무너지는 꿈

일어나지 못하는

잠이고 싶다

 

새 한 마리

마음 낚아

날개짓도

닿을 수 없는

달 속으로 날은 후

 

나는 보이지 않고

하늘과 땅

가득하게

너만 있었다.

 

89

그리는 사람 있어

얼굴은 빛나

꽃과 같고

 

어리석고 미련해

얼굴빛 잃어

근심에 얽히네

 

하늘과 땅이

닫히어

바다가 끓어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으로

불무더기 잊으며

 

얽힘에서 벗어나

괴로움과

즐거움 함께하리.

 

90

백 년의 인연을

벌(罰)로 받아

눈물이

되었음에

 

꿈만 가졌던

가난한 마음에

달은

눈물만 되고

 

그대

휘파람 소리

하늘 열어

천지에 꽃이더니

 

이제는

거꾸로

시간을 끊어

나를 묶었네.

 

91

불에 달군

돌을

쥐어 주고

데지 말라는

그대

 

뜻대로 생긴

마음이기에

잊으려

외로이 타도

 

그대 마음

비출 길 없어

헛된 생각 안고

꿈길로 드니

 

비워 두면

맑은 모습으로

그때 가리라.

 

92

그대 원하는

형상대로 될 수 없고

내 형상대로

그대 만들 수 없네

 

넓어지던 원이

중심을 놓고

없어진 후

악몽에서 시달리고

깨어나

그대 무정한

눈빛과 만나네

 

마음속

부끄러움

벗어나지 못해

그대

떠날 수 없는

계속되는 이별이네.

 

93

화염(火焰)의

옷을 벗을 수도

벗길 수도 없어

태워지면서

형극(荊棘)의

길로 든다

살들이

타고 남은 재

영혼을

맑게 하고

그대만이

벗길 수 있는

이 옷은

타지도

낡지도 않고

나를 태운다

 

94

목숨은

빨리 흘러

잡기 어려운데

분별 있는

나이에 이르러도

사소한 일에

끼어

문득 작아집니다

가로막힌 것

건너야 할 것 없어도

그대 가까이

말라는 것

하늘 뜻이라 여기고

그대 뜻 속에

헛됨 없이

이 날을 삽니다.

 

95

그대는

 

달빛으로 번지는

하늘이어라

기왓장에 어리는

시월의 빛이어라

 

꿈도 휘저어 보고

빛도 휘저어 보는

하늘을 떠도는 새

그대를 운다

 

몸은 하늘에 두고

그림자는 땅에 두어

그 망연함

만난다 해도

변하면 변하는 것이 아닌

서로 지켜

길어 올리는

내일이 되자.

 

96

봄이 올 때는

봄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겨울이 오면

겨울로

데려다 놓는

그대

 

땅을 벗어나

살 수 없듯

그대 눈에

하늘을

두르고 있는 한

 

해가 지지 않아도

해가 뜨지 않아도

그대는

나의 고요한 중심.

 

97

한때는

봄으로 머문

그대였는데

오늘은

가을빛으로

내게 와

쓸쓸함만 더해주는

그대

 

​고통은 아무 때나

나를 깨워

그대 하늘 끝

울며 건너는

새가 되라 하는데

 

​그대는 바르고

나는 어리석어

기울어진 하늘

이 세상 끝낼

그때에 

단 한 번

그대 이름 부르리

 

98

그대는

눈에 머무는

푸른 하늘 꿈으로도 오고

꽃 위에

빛을 더해

환희로도 온다

 

목숨이 바뀔 듯

무섭던 미움도

어느새

가라앉아

맑게 흐르고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무른 목숨

웃음으로 바꾸고

돌아앉아

울음이 되고.

 

99

그대는 내게

흐르지 않는

시간 있어

서로

나뉘어

어둠을 돈다 해도

다시

만나게 되리

 

지난날

잘못을

고쳐 살 수 없어도

끊임없이

나를 지우며

그대

뜻하는 길로 가노니

낮과 밤을

엇갈리게 해

평소의 바램

이루어지게 하소서.

 

100

더러는

지나치고

못 미치기는 하나

천성이

그런 것은

아니었음에

심지 속에

그대 지니고

새로이

머물고 싶어라

 

깊고도 머언

소중한 이여

그대에게서 비롯하여

그대에게 마치는

아픔일진대

그대

물로 흘러

돌아오지 않아도

구석구석 어디나

그대 곁이네.

 

101

그대 내린

벌이

화를 불러도

고통은

나를 깨우는 길

 

미움은

한 덩이씩

아침 쪽으로 뒹굴어

은은한

그리움이 되고

 

어둠을 넘어

그대여

내게 오라

새로운 해를

밀어 올리자

 

102

살기 싫은 날에는

기억하고

되새길 것 없이

자다가 깨어나

더 깊은

잠 속으로 든다

해에 향할 건가

해가 올 것인가

궁리하지 말고

영혼 안에

외로운 불

가까이 당겨

우리 함께 빌자

그림자 몸을 떠나도

그리워 살자고.

 

103

어두운 밤에도

푸른 하늘인 그대

 

얼핏

눈물일 것 같으면

고개 돌려

그 마음

딴데로 옮기고

 

마음은

그림자로만

채우라고

작아야

커다란 것을

가질 수 있다며

바람 속에

먼 밤을 울게 하는

그대.

 

104

천 번 부르면

죽은 넋도

돌아온다 하는데

 

메아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굳어

첩첩 겹겹

산을 만들고

 

그대 까닭에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허공은

 

깨어나기 어려운

가여운

잠이었네.

 

105

그대

멀어 가도

그리움은

다감도 하여라

 

일부러

지은 마음 아니고

억지로

잊어지는 것 아니니

허물없는 웃음

나누자더니

 

그대와 나

나뉘어

땅에 묻혀도

그대는

詩와 함께

다시 살리라.

 

106

내게 있는

조그만 눈

남의

어리석음은 깨우며

이 마음은

지키지 못하는

덧없음이네

 

인과(因果)의

그물에 얽혀

그대 벗어날 곳 찾아

절름거려도

감긴 마음

풀리지 않고

 

진실을 꾸며도

거짓을 꾸며도

백 년 살 것 아닌데

한 사람

따뜻이 하기

어찌 그리 힘드오.

 

107

바다의 흐름

변치 않듯

그 마음

내게 머무는 줄

모르는 듯 안다네

 

새가

바람에 의지해

날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지만

땅 위를

벗어난 일 없듯

나도 그대의

 

오늘은

세상에서 묻은 먼지

모두 두고

햇빛보다

더 밝은

웃음으로 오시게.

 

108

나를

고집하여

생긴

병입니다

 

그림자만 걷는

이 길은

멀어

끝없는 길입니다

 

뜻하는 길로

가지지도 않고

가로질러

갈 수 없는

 

얼굴이

자신에게

안 보이는

길입니다.

 

109

그대와 내게

괴로움이 없다면

어디에

마음을

기댈 수 있나

 

괴롬에

깊이 머물면

성내는 마음

견뎌지고

무엇이나 빛이 되리

 

비록

괴로움의 끝에

설 수 있다 해도

기쁨을

두려워

꺼릴 줄 아는

몽매함

가졌어라.

 

110

하루에도

몇 번씩

그대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죽음은

다 죽어 보았오

 

죽을

죽음이 없어도

다시 죽기 위해

안 끝나는

죽음을 시작하려오

 

돌아설 수 있을 때

돌아설 것을

그대를

나처럼 여긴 후부터

먼 날음을 위해

날지 못할

날개를 준비하고 있다오.

 

111

그곳이 어디든

무심(無沈)한 곳으로

나는 가고 싶네

 

세상살이로

흐려진 눈

밀어버리고

 

혼자서 무어라

지껄인대도

들어 줄 이 없는

적막에 싸여

 

그대를

조금씩 단념하면서

적막을 보태어

살다가 보면

설움도 나를

놓아주리니.

 

112

그대를

이기는 일은

평온함으로

돌아가는 일

견딜 수 없음을

견디는 일

참다운 크기로

그대를

볼 때까지

고쳐 일어서며

병(病)으로

나를 지탱하는 일

새로

태어나는

아침을 기다리며

아직도

울 수 있는 것을

마음의

기쁨으로 여기는 일.

 

113

만났다

말없이 헤어져도

기쁨을 주는

그대

 

그대와 걷는

길에

산과 언덕이 많아도

고통은

단 하나

소망의 길

 

더는

꺼질 일이 없을

불을 들고서

 

쓸쓸함도

슬픔도

고적한

웃음으로

견디어내리.

 

114

나를 멀리 보내면

지킬 것 없어도

깨끗함

그대로

그대의 마음에

머물 수 있으리

 

세상 괴롬 끝내고

마지막

누울

그때까지

스스로 만든 감옥

종내

허물기 어려우리

 

병 중에 큰 병인

덧없음이

사정없이

나를 울게 해도

구원 없는

괴로움

잃어지지 않게 하리

 

115

그대 웃음에

되비치어

내 웃음 빛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한

그대와 나의

약속이어라

 

조그마한 기쁨

사소한 슬픔을

그대에게

전하고 싶음은

그대의 중심을

내가 앓기 때문이리

 

넘치는 침묵도

많아진 말도

마음 속 마음을

나타낼 수 없는

부끄러운

진실 때문이어라.

 

116

봄이 와도

오나마나

꽃이 되도록

흐른 눈물

아리기만

아려라

 

잊힐 수도

잊을 수도 없어

부대끼지만

고통 속에서도

점점

밝아오는 그대

 

그대와 나

한길에

들 수 없어도

버리는 일에

뜻을 세워

밝음을 가졌어라.

 

117

그대 목소리에

가두어지기

시작했을 때

아침은

저녁이 되기 시작했다

 

고통을 둘러메고

불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

보상은

허물뿐이었다

 

생명을 쏟아부어

죽음에 이르러도

그날을

만날 수 있다면

하루로 십년을

다할 수 있으리라.

 

118

가을빛 속에

가득한 

그대 목소리

설움으로 

엉기어 

멀어져 가네

 

괴로움도 

기쁨도 

그리움만 자라게 해

아픈 마음

세상에 

들키고 말았어라

 

모든 걸

또 감추고

눈감고 서도

그대를 

벗지 못해

아득하여라. 

 

119

그대의

보이는 마음 아닌

보이지 않는 마음과

동행하며

빛 속에

홀로보다

어둠 속에 같이 하리

 

기쁨에

넘침으로

어둠을 삭이며

새로운

하늘을 여는

그대는

나의

먼 위안.

 

120

사랑 얻기 전에

마음으로 돌아간

사랑이리

 

갈수록

어긋나

무너지는 길

그대 보내고

나는 남아서

사랑을 슬픔으로

견디어내리

 

그리움도 어두워지면

마음도 쉼을 얻어

이제도 이후도

아무 것 아니게

그대와 홀로 하리.

 

121

어리석은

의심은

저를 얽어 해치니

눈이 어두워져

그대 보지 못하리

 

서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 해도

고통도

마음으로 이루었으니

 

그 마음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

그대와 나

한마음이어

안 보이는 때문이리.

 

122

말없이 지낸다고

울고 있지 않은 건

아니오

 

생각만으로

눈물이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요히

멀어져가오

 

미움이 살 수 없는

그대 마음속의

무정(無情)을 헤아리며

이제야 알 것 같소

청정한 그늘 속을

걷게 하는 그대 뜻을

 

123

좋으리라 생각했던

내일이

더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속된 마음

모두 버리고

그대를 떠나

저물어가오

 

살면서 죽고 싶은

죽어도 살고 싶은

모순을 넘나들며

어질머리로

그대를 울어도

 

한 세월

그대는 나를 돌아 부는

바람이었소

남몰래 흐느끼는

머언 바람이었소.

 

124

우리의

오늘의 이별이

먼 만남이래도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닌 것을

 

사랑은 사랑으로 서럽고

사랑으로 기뻐도

흙이 되어 떠날 것을

바람 되어 만날 것을

 

그대의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이

내게 기대어와도

그리움은 영원인 것을

 

125

그대 만나고 싶은 날은

혼자서 내 길을 간다

못내 떨치고

돌아서지 않을

그리움으로 간다

 

사랑의 무덤 속에서

그대에게 입힌 상처

병으로 내게 와

봄비에 젖고

 

백년도 못 가는

고작 칠십의 생애

깊은 시름 안고

떠돌아야 하는가

 

126

그대는

죽음을 몰아왔고

죽음은

행방불명이 된

자아를

살아나게 하였네

 

마침내

그대는

솟아오르는 나를

불꽃으로 얼게 해

비밀의 눈물이

되게 하였네

 

나보다

더한 것은 없는데

나를 버리고도

충만하면

그대는

온전한

기쁨이었네

 

127

마음 깊숙이

들여다보지 말자

밀리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마음은

어쩌지 못해도

우리는

때때로

멈춰서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의

간격을

확인하고

그 간격을

걸머지고

그리움을 넘어

아무도

건너지 못할

맑은 하늘을 건너자.

 

128

해도

기울지 않고

달도

지지 않는

빛의 섬으로 가리

 

무너지는

모래성도

쌓지 않으며

내용없는

기다림도

물리치면서

 

고요하게

빛나는

아침이 와도

서리 속에

섰던 날을

꽃과 아니 바꾸리

 

129

목발만

짚지 않았지

사실은

절름발이오

 

무너지기는 쉬웠어도

다시

일어서기 어려워

무릎은 녹아내리오

 

가까스로

견뎌온 해가

이지러질 수

없다 해도

 

노여움을 삭이며

먼 곳을 끌어당겨

빛날 때 맞추어

떠나려 하오.

 

130

세상 세상이

녹아 없어진 것 아니어라

잊지 못해도

잊은 체

잠깐 동안이어라

 

흔들리게 말아라

맑은 마음만

그대와 나

잘 다루어내리니

빛을 이루어

밝음을

일으켜 세우게 하라

 

그리움은

덜어내 숨기고

의심 없는 곳에서

주고받지 않는 것

제일이어라

 

131

언젠가는

알뜰한

목숨도

떠나가는데

그대 비록

내게서 멀어 갔어도

괴롬에

마음을 태우지는 않으려오

 

잘 삭이면

웃음 되고

못 삭이면

울음 되는

세상에 흔한 이치

간절하게

생각하며

욕심 벗어 버린걸

후회하지 않으려오.

 

132

허둥거리지도 말고

거짓된 마음도

내지 말고

나를 허물어뜨리며

새벽이 오면

그 새벽 속에서

스스로 태어나게 하소서

 

나와 다른

그대를

용납하도록

지난날은 잊고

신선한 가슴을

기슭 삼아

생각은 언제나

새해 아침에

매어두게 하소서

 

133

넘어뜨린다고

넘어지거든

넘어지거라

 

나았다

도지는

병이라면

깊이 병들게 하라

 

제 욕심에 얽혀

허물벗기

어려워도

무상(無常)에

머물게 하라

 

고통의 근본

버리게 되어

목숨 받은 일

고달퍼 않으리니.

 

134

생각하니

세상의 일

분별로 이루어지는데

그대 옆

분별로는

머물 수 없으리

 

해 가리는 빛

세상에 없는데

어찌해

즐거운 성품

아주 버리게 하오

 

고통에 머물러도

싫은 줄 모르는

딱한 마음

허물덩이로 커지는데

허공 끝에 있는

그대여.

 

135

버리고

찾는 것

모두가

덧없음이라

끝내는

무심(無心)으로

돌아선 그대

 

깊은 가슴

열어 밝혀도

지난 시간

되찾을 수 없어

멀고 괴롬인 것을

 

어찌하면

편안하겠소

돌 위에

무릎꿇어

모두

버리는 뜻

견디려 하오.

 

136

해는

새로운데

나는

그대 기억 속의

사람이오

 

다니거나

머물러로

간 데마다

따라와

해가 되고

달이 되는

그대

 

스스로

잊을 때까지

고요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137

긴 견딤의

굴욕을

버리고

일어나라

일어나라

 

멈칫멈칫

망설이며

돌아서지 말고

속마음 풀어

거절의 의미를

보여다오

 

어둠이

마음 사이로

내려오며

허물고 있다

무너지고 있다.

 

138

우는 듯

웃는 듯

가을 하늘

별이 되자

 

고통 많고

즐거움 적어도

돌을 키우던

믿음인데

 

내색 한번 아니하는

그림자도

맑은 그대

 

길은 없어도

세상에 없는

우리가 되자.

 

139

백 년도

못 가는 길에

그대

앞서지도 말고

뒤에 있지도 말며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기로 하오

 

욕심은

괴로움이라

마음

좁고 작아져

생명을 줄여도

 

그대여

우리

해지면

편안히 쉬고

다시

아침 해 돋으면

서로를

빛나게 합시다.

 

140

미망에 빠져

허망으로 시드는

남은 목숨

두렵지 않은데

 

막힐 줄 알면서도

가던 길

멈추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하는

어지러움

 

그대 어지러움에

실리면

옳고 그른 것

흐려져

천명(天命)에

따르는 길

모르게 되오.

 

141

어찌하면

있음과 없음을

같은 것으로

지닐 수 있으리

 

어둔 마음

끊어 버리고

어둠을

나와도

어둠 속이어라

 

목숨 쉬지 못하듯

그대 생각

쉬임 없어

천성마저

다치고

 

그대

떠남은

변화의 흐름일 뿐

있는 그대로

있음인 것을.

 

142

물은 물을 이기고

불은 불을

이길 수 있어도

나를 이기지 못해

그대 이길 수 없어라

 

깨어나

찾을 수 없는

꿈은

꾸지 않으려

욕심에 물들다가

놀라 깨어나오

 

여러 세상 중에

그대와의 세상

제일로

어려웠어도

고통도

고요히 견뎌냈어라.

 

143

낮에는 해가 되고

밤에는 달이 되어

나의 그늘을

비추어

서럼을 더 넓게 하는

그대

 

세상 걱정 많아

외롬을 깊게 해도

그대

의중의 빛

마음에 일어

밝게 비치니

 

어제의

의심 벗고

오늘은

곤한 마음

쉬게 하소서.

 

144

내 죽음의

빛나는

대상이었던

그대여

 

이 가슴의

많은 무덤을

시간이 다시

살려낸다 해도

 

마음대로

앓지도 못하고

감추어 놓은

상처를

 

자꾸

덧나게만 말고

순간이어도

아무려 주오.

 

145

세상일이

꿈과 같음을 알아

실없던 일

다 떠나보내고

어두움 없이

지낸다 해도

그대가 흔들면

흔들리고

멈추게 하면

멈추어 서는 까닭을

나는 모르오

마음으로

그대 놓아 버린 지

오래이면서

달 밝아도

울어버리는

이 그리움을

나는 모르오.

 

146

그대의 거짓은

그대의 거짓을

진실이게 하고

 

나의 진실은

나의 진실을

거짓이게 한다

 

진실 속에서의

거짓과

거짓 속에서의

진실의 차이는

 

그대 나 되어가고

나 그대 되어가는

거짓을 닮은

진실일 뿐이고

진실을 닮은

거짓일 뿐.

 

147

나날이

나는 죽어도

그대는

백번이고 태어나라

 

목숨보다 값진

죽음이

또 무덤을 만들어도

건성으로

웃어 넘기는

그대

 

부질없이 꿈꾸던

불행을 마무리 짓고

배웅도 없이

그대를 떠난다.

 

148

물이 흐르듯

그대에게

가는 마음

겹으로 흐르는데

 

눈으로

눈을 보고

마음으로

마음을 보아도

 

말로 할 수 없는

말의

말 없음 표시로

맑은 허무를

그대에게 보내며

 

새로운 고뇌도

태연하게 감싸 안을

따뜻한 능력을

나는 갖고 싶으오.

 

149

하루 내내

강가에 앉아

흐르는 물만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대 기슭에

이르고 말았네

 

모든 사람 중에

그대를 택하게 한

그대 때문에

얼굴에 눈도 입도

다 지워져

숨 쉬는 것조차

괴로와도

 

그대 강가에 이르면

나도 없이

나를 쏟아

흐르고 마네.

 

150

나는 압니다

남모르게

울게 하는

그대 뜻을

 

귀 막고 가는

어두운

그대 마음속

그늘을

나는 압니다

 

눈물이어서

눈물에 젖는

눈부신 잘못을

나는 압니다

 

무덤에 불과한

그대와의 세월이지만

이 세상 끝에선

슬픔도 고통도

그리움일 줄

나는 압니다.

 

151

그대 앞에 서면

나를 의식 못 하고

그대 그늘 속에

들어가 쉰다

 

노래도 버리고

두 영혼이

이룩하지 못한 꿈을

고통한다

 

단지 그대 까닭에

하루도 죽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목숨

그대 있어도

혼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운다는 것이다

 

152

그대 마음을 열어

내 마음을

적시어 주오

 

만남의

다른 의미가

나를 울게 해도

밤마다

내 가슴을 건너는

그대

 

어제는 쓰러지고

오늘은 일어서는

삶의 골짜기

깊기만 한데

차라리

넋이 되어

그대 따르고 싶은

이 무상 어이하리오.

 

153

그대 돌아가라

세상을 떠난

행복으로

그리움 잊었으니

 

웃음도

흉내 내어 보고

그대 변덕스러움도

눈감아 보지만

저녁 그늘만

밀어다 주는 그대

 

그대 있고

나 있음도

잠시뿐

덧없는 서로는

잊혀질 것을

그대여

얼굴 바꾸지 말고

그대로 떠나주오.

 

154

그대를 긍정하면

나를 긍정하게 되고

그대를 부정하면

나도 부정하게 되오

 

그대 말 한마디로

가슴에 넘쳐날

기쁨

모르지 않으면서

눈물도

되돌리는 그대

 

나의 눈물이

그대 속에서

죽어 흐르는

물방울이 아니게

그대 가슴에

눈물로 묻어주오

 

155

혼란 속에서

하루를 보내며

멍에와 엮어진

그대와의 고리를

풀 수 없어 우노라

 

둥글다 하면

둥근 줄 알았던

그대의 의지는

나의 의지였는데

절망은

나만의 절망이라니

 

뒤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으려

서둘러

잠으로 들고 싶어라.

 

156

나 자신에게

풀려나도록

방황하는 영혼이여

나를 버려다오

 

삶을

아름답게 하는

추억은 두고

더는

서럽게 말고

그대 떠나주오

 

생명이 숨 가빠

눈물로 살던 때를

마무리 지으려 하니

부질없어

허망하기 이를 데 없으나

부디 잘 가오.

 

157

기쁨이나

확신이 없대도

우리는

하나의 슬픔으로

족하지 않소

 

공연히

고통을 키워

괴롭히고

괴로와하는 것

고만둡시다

 

해 뜨고

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노여움 앞에서도

서로를

눈물로 밝힙시다

 

158

오늘부터 나는

그대를 몰라보게 될 것 같습니다

사방에서

그대 목소리 들려도

못 듣게 될 것 같습니다

그대는

나의 누구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나를

고단하게 둘 수 없어

나로 돌아섭니다

내가 떠난 뒤

그대의 어두운 한숨이

내 가슴에 돌아와

그대가 살아나도

나는 죽을 수 없어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읍니다

그대는 어둠 속

어둠이기에.

 

159

오늘은

그대를 만나

울고 싶다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대와

돌아설 수 없는

그대를

 

울만큼 울면

떠날 줄 알았떤 울음은

온몸에 실려지고

그대를 생각하면

또 울음이 된다

 

매일매일

나를 운 지 십수 년

저세상 것까지

이 세상에서

다 울어버린대도

눈물은 또 그리움일 것인가.

 

160

그 길이 먼 길인 줄 모르고

그대 찾아 나섰던

그날부터

아프면 아픈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리움을 동여매고

다소곳이

새날을 기다립니다

발목이 시리도록

눈이 쌓여도

그대 바라고 서서

내가 갖고 싶은 만큼만

내 것인 그대

울지 않고서

어찌 그대 가슴에

질 수 있으랴.

 

161

많은 날 중의

마지막이 될 날

그리움을 지워버리듯

그대를 반기리다

 

너무 작아서

끝내

그대 눈에

보이지 않았어도

 

그대 웃음

내 어둠을 빛내고

그대 마음 끝에

내가 있대도

 

꿈보다 아름다울

뒷세상 생각하며

이 세상일은

잊기로 하리다.

 

162

나의 실종을

그대 가슴에

남겨두고

떠나는 날

 

내가 가엾어

내가 우는

내 상여 행렬의

맨 끝에서

 

어두운

결백으로

울어버릴

그대여

 

그리움에 더는

괴롭지 않을

세상으로 가며

그대를 그대에게

되돌려 주려오.

 

163

그대와 보낸

세월은

짧기만 한데

그대 기다리는

하루는

길기만 하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얼굴로

돌아와

내게

절을 하고 섰는

그대

 

인사도 없이

떠나려든

내 손을 잡아주오

그대 손을 놓고

편안히 떠나려오.

 

164

나날이

나는 죽어도

그대는

백번이고 태어나라

 

목숨보다 값진

죽음이

또 무덤을 만들어도

건성으로

웃어넘기는

그대

 

부질없어 꿈꾸던

불행을 마무리 짓고

배웅도 없이

그대를 떠난다

 

165

물이 흐르듯

그대에게

가는 마음

겹으로 흐르는데

 

눈으로

눈을 보고

마음으로

마음을 보아도

 

말로 할 수 없는

말의

말 없는 표시로

맑은 허무를

그대에게 보내며

 

새로운 고뇌도

태연하게 감싸 안을

따뜻한 능력을

나는 갖고 싶으로

 

166

나는 압니다

남 모르게

울게 하는

그대 뜻을

 

귀 막고 가는

어두운

그대 마음속

그늘을‘나는 압니다

 

눈물이어서

눈물에 잘못을

나는 압니다

 

무덤에 불과한

그대와의 세월이지만

이 세상 끝에선

슬픔도 고통도

그리움일 줄

나는 압니다

 

167

그대 앞에 서면

나를 의식 못 하고

그대 그늘 속에

들어가

쉰다

 

노래도 버리고

두 영혼이

이룩하지 못한 꿈을

고통한다

 

단지 그대 까닭에

하루도 죽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목숨

그대 있어도

혼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운다는 것이다

 

168

그대 마음을 열어

내 마음을

적시어주오

만남의

다른 의미가

나를 울게 해도

밤마다

내 가슴을 건너는

그대

어제는 쓰러지고

오늘은 일어서는

삶의 골짜기

깊기만 한데

차라리

넋이 되어

그대 따르고 싶은

이 무상 어이하리오

 

169

그대 돌아가라

세상을 떠난

행복으로

그리움 잊었으니

 

웃음도

흉내 내어 보고

그대 변덕스러움도

눈감아 보지만

저녁 그늘만

밀어다주는 그대

 

그대 있고

나 있음도

잠시뿐

덧없는 서로는

잊혀질 것을

그대여

얼굴 바꾸지 말고

그대로 떠나주오

 

170

그대를 긍정하면

나를 긍정하게 되고

그대를 부정하면

나도 부정하게 되오

 

그대 말 한 마디로

가슴에 넘쳐날

기쁨

모르지 않으면서

눈물도

되돌리는 그대

 

나의 눈물이

그대 속에서

죽어 흐르는

물방울이 아니게

그대 가슴에

눈물로 묻어주오

 

171

혼란 속에서

하루를 보내며

멍에와 엮어진

그대와의 고리를

풀 수 없어 우노라

 

둥글다 하면

둥근 줄 알았던

그대의 의지는

나의 의지였는데

절망을

나만의 절망이라니

 

뒤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으려

서둘러

잠으로 들고 싶어라

 

172

나 자신에게

풀려나도록

방황하는 영혼이여

나를 버려다오

 

삶을

아름답게 하는

추억은 두고

더는

서럽게 말고

그대 떠나주오

 

생명이 숨 가빠

눈물로 살던 날을

마무리 지으려 하니

부질없어

허망하기 이를 데 없으나

부디 잘 가오

 

173

기쁨이나

확신이 없대도

우리는

하나의 슬픔으로

족하지 않소

 

공연히

고통을 키워

괴롭히고

괴로워하는 것

그만 둡시다

 

해 뜨고

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노여움 앞에서도

서로를

눈물로 밝힙시다

 

174

오늘은

그대를 만나

울고 싶다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대와

돌아설 수 없는

그대를

 

울 만큼 울면

떠날 줄 알았던 울음은

온몸에 실려지고

그대를 생각하면

또 울음이 된다

 

매일 매일

나를 운 지 십수 년

저세상 것까지

이 세상에서

다 울어버린 대도

눈물은 또 그리움일 것인다

 

175

오늘부터 나는 그대를

몰라보게 될 것 같습니다

사방에서

그대 목소리 들려도

못 듣게 될 것 같습니다

그대는

나의 누구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나를

고단하게 둘 수 없어

나를 돌아섭니다

네가 떠난 뒤

그대의

어두운 한숨이

내 가슴에 돌아와

그대가 살아나도

나는 죽을 수 없어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176

이 벌판 쓸쓸해도

꽃은 필 때 피고

질 때 져서

한해가

또 가고 있소

 

고달픈 다리를 잠시 쉬고

눈물 어린 세월을

짚어보다가

깊은 밤의 외로움에

목메이오

 

어떤 괴로움도

웃음으로 되돌리는

시간에 감사하며

빈 마음 되어

새해를 열려오

 

177

많지 않은 날이

오래인 것 같고

오래인 날이

순간인 것 같아

나를

눈물이게 하는 사람

 

소식 없어

만나지 않아도

순한 목숨으로

언제나

동행인 사람

 

많은 날

많은 생각으로 괴로워도

고난에

약해지지 않고

다시 아침으로

일어서게 하는

사람

 

178

목적 없이 만났는데

도달해야 할 곳이 있으면

이 무상 어이하리

 

어차피

어두운 한 세상

물거품 뭉친데

간 세월도

오는 세월도

잊기로 하오

 

마음 가운데

그리움 두루 있어도

그대라는

형태마저 버리고

떠나왔는데

 

한 걸음 멈추고

돌아서 보니

그대는 그리움이오

 

179

그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그대 안에 있어도

우리는

마주 설 힘이 없어

밖으로 헤매어 다닌다

 

더러

노한 마음 일면

이리 풀고 저리 풀으며

살도 태우고

뼈도 태우며

서로의 적막에 잠긴다

 

그대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몇천 년도

몇만 년도 아닌데

오늘은 세상일 제쳐놓고

그대 안에 가득한 바다에서

눈부신 파도로

넘실거리고 싶다

 

180

그 길이

먼 길인 줄 모르고

그대 찾아 나섰던

그날부터

아프면 아픈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리움 동여메고

다소곳이

새날을 기다립니다

발목이 시리도록

눈이 쌓여도

그대 바라고 서서

내가 갖고 싶은 만큼만

내 것인 그대

울지 않고서

어찌 그대 가슴에

질 수 있으랴

 

181

많은 날 중의

마지막이 될 날

그리움을 지워버리듯

그대를 반기리다

너무 작아서

끝내

그대 눈에

보이지 않았어도

그대 웃음

내 어둠을 빛내고

그대 마음 끝에

내가 있대도

꿈보다 아름다울

뒷세상 생각하며

이 세상일은

잊기로 하리다

 

 

182

나의 실종을

그대 가슴에

남겨두고

떠나는 날

 

내가 가엾어

내가 우는

내 상여 행렬의

맨 끝에서

 

어두운

결백으로

울어버릴

그대여

 

그리움에 더는

괴롭지 않은

세상으로 가며

그대를 그대에게

되돌려 주려오.

 

183 

그대와 보낸

세월은

짧기만 한데

그대 기다리는

하루는

길기만 하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얼굴로

돌아와

내게

절을 하고 섰는

그대

 

인사도 없이

떠나려든

내 손을 잡아주오

그대 손을 놓고

편안히 떠나려오.

 

 

 

사랑법

김초혜

 

더러는 지나치고 못 미치기도 하나

천성이 그런 것은 아니었음에

심지 속에 그대 지니고

새로이 머물고 싶어라

깊고도 머언 소중한 이여

그대에게서 비롯하여

그대에서 마치는 아픔일진대

그대 물로 흘러가 돌아오지 않아도

구석구석 어디나 그대 곁이네

 

 

 

산다는 것      

김초혜

 

아무것도 아닙니다.

침묵도 말도

아무것 아닙니다

어둠에 묻혔던

말들이 살아난다 해도

봄은 헛돌아가고 있어요

어차피 잠자면서나

꿈꿀 세상인데

진실의 은유면 어때요

진실의 위조면 또 어때요

진실의 구체성은 금방 지워져 버립디다

어떤 변모든

진화라 생각합시다.

 

 

 

산을 바라보며

김초혜

 

산은 자신 속에서

기뻐하고

그 속에 머물러 넉넉하다

 

누구에 의해

무너지지도 않으며

변하지도 않으며

제 생각대로 산다

 

노하지도 웃지도 않으며

집착도 기대감도 없이

깊고 푸르다

 

더 나아 보이려

욕심부려 애쓰지 않고

분수를 알아

절망도 모르는 채

고통과 기쁨을

하나로 안는다

 

산이 산속에 살듯

내가 내 속에 산다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그 사람이 되겠지.

 

 

 

김초혜

 

땅과

햇볕과

거름과

거기에 인연이 어울려

봄이 온다.

인연이 지어져

겨울이 간다.

 

 

 

삶은 기다림입니다

김초혜

 

우리의 삶은 한량(閑良)없는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그 망연(茫然)함과 불투명함이 인생이라고 철학적 명제(命題)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다림에는 초조(焦操)나 불평 대신 자제와 수긍이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기다림을 향하여 그저 막연하게 시간을 보낸다면 세월을 허송하는 것이 되겠지만

힘을 기르면서 기다린다면, 자기가 원하는 기다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 서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앞에 서게 되면 교만해지기 쉽고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만은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고, 자만은 자기의 능력을 정지시킵니다.

교만과 자만은 우리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위험이고 함정입니다.

 

언제나 남보다 뒤에 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뒤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겸손이고 여유입니다.

 

삶은 노력하는 방황이면서 노력하는 기다림입니다.

노력하는 인생에게 실패는 없음을 확신하며, 한 번 살아 볼만한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그 보람을 찾아 우리는 오늘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닐런지요.

 

 

 

삶의 이랑

김초혜

 

매일 조금씩 떠난다

꾸릴 짐도 없고

길 떠날 채비도 간단하다

삶의 매듭으로 묶인

무의미함만이

끈질기게 동행을 한다

꽃을 피운 적도 있고

노래를 지워본 적도 있지만

지금은

감정의 격랑이 일지 않는다

오랜 고뇌 저편에

상실의 우울증으로 있던

그대를 버려두고

오늘도 나는 혼자서

땅끝으로 더 멀리

조금씩 조금씩 떠나고 있다

 

 

 

새 아침에

김초혜

 

새해에는

모든 기쁨

남에게서 구하게 말고

내게서 구하게 하시고

괴로움과 고통

번갈아 귀찮게 해도

몸을 거두고

마음을 이겨

기쁨이 되어 살게 하소서

구석지고 어두워

절망까지 절망한 이에게도

자기 생명 속에 있는

새벽을 알게 하시고

우리들이

인생에 던진

서투른 그물에도

고운 모습만 남게 하소서

 

 

 

생(生)의 파도

김초혜

 

구속했다가 풀어놓았다가

기쁨을 주었다가 슬픔을 주었다가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가

다시 던져지는 생의 파도에서

나는 굽이치지 못하고 부서지며 산다

 

삶과 죽음을 번갈아 지우며

어둠을 깨우고 눈물을 깨우고 의식을 깨우며

스스로 넉넉하다가도

생의 한복판에 서면

외로운 혼란이 나를 붉게 울린다

 

 

 

생명

김초혜

 

아침

빛나는 햇빛을 바라볼 수 있는데

어찌 잊으라 하십니까

저녁 노을이

아직 남았는데

어찌 잊으라 하십니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가을이 가고 봄이 오는데

어찌 잊으라 하십니까

 

 

 

서귀포에서

김초혜

 

할 일도 잊고서

온종일

바다만 보았다

그대 마음속 생각을

그대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석양녘

김초혜

 

오래 전에 나는

나를 혼돈 속에 얼버무렸습니다

그래서 나의 허깨비는

산 사람들 사이에서 살지 못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러 다닙니다

오늘도

억지로 죽은 체하는

그대를 찾아가

냉기로 삶을 덥히던

젊은 날을 생각하자 했습니다

외로운 그대안에 갇힌

친구여

그렇게 고요함만 좋아하다가

고요함에 묻히면 안돼요

어서 일어나

지는 해를 봅시다

지는 해도 둥글다는 걸

 

 

 

선물

김초혜

 

이른 봄, 숲 속의 새의 노래가

음계 이상으로 들리는 것은

내 마음에 음악의 샘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대 목소리가 때때로 들리는 것은

내 마음에 그대가 살고 있는 때문이지요

 

내가 아직도 젊어 있는 것은

젊은 그대와 내가 젊은 채로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난 삶이 보관해 놓은

햇빛 같은 선물입니다

 

 

 

섣달 그믐밤

김초혜

 

혼자 가도

수선스런 사람이 있고

 

여럿이 가도

그 모습이

호젓한 사람이 있다

 

삶을

터럭처럼 여기며

 

속리와

결탁하지 않고

깊게 세상을 건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이 밤에

만나고 싶다

 

 

 

세상

김초혜

 

잘린 손가락들이

하나둘씩

잘린 채로 모여서

추위를 녹이고 있다

이제 무심(無心)이어라

밤과 낮은

천 날 만 날

어디서 갈린다더냐

어쩔 수 없이

어쩔 수도 없이

사람은 사람 안에서 고독하다

 

 

 

세상 가는 길

김초혜

 

생명의 새벽이

어둠이라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

오고 간

이 길

처음에

끝을 얻지 못할 줄

어찌 압니까

삶의 피안에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마음으로부터

사로잡힌 마음

끌어내려고

언제나 제자리걸음

그렇게

이 세상을 오고 갑니다.

 

 

 

세월

김초혜

 

그대가 존재하는 까닭은 오래되었다

나의 어디에나 그대는 있다

오래되어 쓰지 못하는 만년필에도 있고

쓰임새가 없어 버려진 손수건에도 있고

 

책갈피에 넣어둔 냉이꽃에도 있다

그대와 일상언어로 주고받던 웃음에도 있고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에도 있고

싹트는 소리가 들리는 봄밤에도 있다

달그림자에 꽃그늘이 아름다운 밤에도 있고

눈이 내려 쌓이는 밤에도 있고

한밤중 잠들어도 그대는 온다

삶의 마지막 순간

의식 없는 의식 속에도

그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와 내가 없다면

해가 진들

달이 뜬들

무슨 소용이랴.

 

 

 

손자를 위하여

김초혜

 

하루에  삼천 번을 만난대도

어찌 반갑지 않으랴

웃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참으로  눈부셔라

 

봄  다음에도

봄만 오게 하는 아이야

잎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만개해

 

앞으로 오는

100년 내내 봄 이거라

 

 

 

수녀의 길을 가는 제자에게

김초혜

 

네 속에 있는 것을

네 속에서 찾아내어

머리에 두르고

내게 왔을 때

선뜻 지었던

반가운 마음

서툴게 거두어야 했다

 

온전히 죽고 또 죽어야

진정한 수도자가 된다는 말은

죽지 않기 위해

속되어져 사는 나를

아득히 덮어 버렸다

 

먼 길을 가는 너를

홀로 보내고

저문 하늘 내다보니

어리는 눈물 속에

꽃으로 떠난

너만 가득했다

 

 

 

순리(順理) - 며느리에게

김초혜

 

시집을 가는 것은

여자의 시작이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사람의 시작이라

얽혀 가면 길이고

막혀 통하지 않으면

길이 아니어라

 

 

 

시간을 마주 보며

김초혜

 

서두르지 마라

그리고 저버리지도 마라

심장으 피가

약하게 뛴다 해도

아직은

울음과 웃음이

쉬이 넘나들지 않느냐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손짓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모을 수도 있지 않느냐

모든 움직임 속에 있는 고요가

작은 불씨가고 믿자

무엇을 애태우는가

본디

사람의 일이란

어그러짐만 많은 것인데

 

 

시간을 위하여

김초혜 

 

슬플 때는 슬픔에 잠기어

슬픔을 잊습니다

적막할 때는 적막에 들어

적막을 잊습니다

몸살의 뜨거움에 타던 생각도

잊어버리자 앓은 신열도

아득하게 빛나던 추억도

고요한 숨결 속에서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삶의 긴 길에서 허리가 구부러지고

마음의 끈이 끊어져

나날이 어두워져 가도

시간은 모두가 보석입니다

 

 

 

시법(詩法)

김초혜

 

아직 다치지 않은

마음이 있다

하늘 높은

상념도 있다

새로운 뇌수(腦髓)가 솟아나

빛과 음(音)을

붙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파기하지 않고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

끼어 있다

 

 

 

시 쓰는 마음

김초혜

 

깨끗한 마음이

진정한 시(詩)인 것을

 

가면을 쓰고 앉아

진리를 밝히겠다 하고

역사를 바로 보겠다 하고

두 겹 세 겹

가면만 두꺼웠지

 

배고픈 이와 함께라고

목마른 이와 함께라고

철가면만 두꺼웠지

 

남의 등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나는 내 등이

없는 줄만 알았지

 

 

 

시인의 길

김초혜

 

굶주리면서도

배가 부른

이 길은

길 없는 길이

길이 되는

배부른 길입니다

 

 

 

신념

김초혜

 

봄에 부린 욕심

거두지 못하고

가을이 되었소

 

마음속의 불은

흐린 마음 사르지 못하고

목숨의 불씨만 태워 버리오

 

살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고

관절에 비가 내려도

봄 같은 기쁨 있었는데

 

지금은

새소리도 강물 소리도 마음을 슬프게 하오

 

어렵구려

소박한 데 머물러

세상 기웃거리지 않기

 

 

 

신부(神父)와 시인(詩人)

김초혜

 

사랑을 철저한 구속이라

알고 있는 시인과

사랑은 온전한 자유라고

말하는 신부가 있었네

집을 떠나야 사는

신부와 시인이

마주 앉았지만

시인은 신부가 못 되어 슬프고

신부는 시인이 가없이

봄꽃을 나누자 하네

 

 

 

아버지

김초혜

 

오늘과 내일을

속수무책으로

남기고 떠나가신

저희들은

스스로 심지가 되어

아버지가 살다 가신

서른여섯 해를

다 넘었습니다

당신보다

오래 남아

처세에 능했던 이도

명예로웠던 이도

부귀를 누리던 이도

빛을 벗어나

하나하나

어두워 갔습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슬픔입니다

 

 

 

안부

김초혜

 

강을 사이에 두고

꽃잎을 띄우네

 

​잘 있으면 된다고

잘 있다고

 

​이때가 꽃이 필 때라고

오늘도 봄은 가고 있다고

 

무엇이리

말하지 않은 그 말

 

 

 

야망

김초혜

 

너무 굶어도

구역질이 나고

너무 먹어도

구역질이 난다

평생을 구하여도

덧없기는 한가지

눈멀고

귀멀고

벙어리 되어

기쁨에도

괴로움에도 속지 않으며

남은 세월

아끼며 사는 거다

 

 

 

어깨

김초혜

 

어머니의 어깨는

기대고 기대어도

포근한 어깨

아버지의 어깨는

기대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어깨

 

 

 

어느 시인의 죽음

김초혜

 

사실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얼굴을 잃어버린 지 오래여서

숨은 쉬나 목숨을 없다

겉모습만 번듯한 이성은

언제나 변명에만 급급했고

나를 무너뜨리는 어떤 것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허망의 덫을 걷어내고

어떤 식으로건 나를 몰아내

나를 찾으려 했지만

나는 오래전에 어디로 떠났는지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조형적으로만 남아 있는 건가

 

 

 

어두움

김초혜

 

나는 언젠가

내 존재의 틀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갇히게 되었다

날마다 굳어지는

틀 속에 잠겨

나는 어둠이 되었다

인식의 문을 열려고

목을 눌러도

다문 입 감춘 혀는

껍데기에 들어박혀

비린내를 풍기며

미리 죽어 있었다

 

 

 

어둔 사람

김초혜

 

이 몸을 어디에 쓰나

눈에는 눈꼽이

코에는 코가

입에는 온갖 더러움 가득하여

함부로 건드리면

악취만 새어나온다

이 몸을 무엇에 쓰나

생각해야 생각이 있고

의식해야 의식이 있는

빈 껍질인데

무엇을 믿으랴

 

 

 

어떤 날

김초혜

 

서귀포 앞바다

어두운 물결에

눈발이 섞이면

동백은 가득 붉어라

어긋난 세상일

밀어 넣고

슬펐던 날의 기쁨도 보고

기쁨 속 슬픔도 헤아려보며

하늘에 기대어

하루를 접는다

 

 

 

어떤 부부

김초혜

 

되돌아보니

오던 길이 40년 길

아득해도

꿈만 같구나

아직도 늪에서

허우적거려도

지난날은

순간순간

행복이구나

 

 

 

어머니

김초혜

 

1

한 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2

우리를 살찌우던

당신의 가난한

피와 살은

삭고 부서져

허물어지고

 

한 생에

가시에 묶여 살아도

넘어지는 곳마다 따라와

자식만을 위해

서러운 어머니

 

세상과

어울리기 힘든 날에도

당신의 마음으로

이 마음 씻어

고스란히

이루어냅니다

 

 

3

엎어지고

두려워도

편히 잠들고 깨서

즐거운

새 날이 되게 하시던

어머니

무덤에

볼을 대고

귀기울이면

아직도 이별 못한

덜 삭은

뼈의 울림소리

 

당신이 잃어버린 날을

되살려내며

세상에서

제일로

고요한 웃음

그 웃음에 실리어

살고 있습니다

 

 

4

겨울 가고

봄은 와도

텅 비인

한나절

 

거친 삼베 옷에

흙덩이 베고

홀로 누운

어머니

 

새 살로 돋아난

무덤의 들꽃

울면 울음이 되고

웃으면 웃음이 되어 주고

 

언 가슴

매어놓고

그곳에서는

봄으로 지내소서

 

 

5

앉지도 

눕지도 않고

한평생

서서 지내던 어머니

 

당신 살에

머물러 있는

눈물은

흐리고 햇볕나고

춥고 더운 것을

다스리는

해입니다

 

해를 싣고 떠나신 지

일년 삼백육십일이

스무 번은 지났어도

다숩던

당신의 가슴이

아파 웁니다

 

 

6

빈천도

고단하지 않은

당신의 의지는

미운 것 고운 것

삭임질하여

웃음으로 피우고

 

작은 몸뚱이

힘에 부쳐도

가녀린 허리

닳지 않은 살로

우리의

담이 되어주고

 

인생의 무게

그날그날

첫날처럼

자식 앞에선

가볍게 지는 어머니

 

 

7

하늘과 땅은

갈라져 있어도

같이 있듯

저승에 계신

어머니는

자식의 가슴에서

이승을

함께 하시고

아플 일

아니어도

아프고

아파도

아프지 않은 마음

저가

어미 되어 알고

깊이 웁니다

 

 

8

안 감기는 눈

감으시고

감은 체

떠난 어머니

골수가 흐르게

아파와도

약으로 나을 병

아니라시며

약없이

천명으로

견디신 어머니

 

어머니 떠난신 후

생명 안에서

죽음을

 

죽음 안에서

생명을

풀어가며 삽니다

 

 

9

뇌출혈이라는 의사의 진단

정신을 놓으신 초췌한 모습

눈이 내리는 병원의 숲

그렁 고이는 눈물

 

새벽은

아직도 혼수상태

나리꽃처럼

잠든 베드

 

세상이 뒤집히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내가 아는 건

혈압, 체온, 맥박

그리고 호흡

 

밤이 지나도 지나도

물이 오르는

뒤늦은 효도

 

117호 병실에 가득찬

그늘진 얼굴

흐느끼는 다리

 

[혈압이 얼마죠]

[120에 70입니다]

간호사의 한마디는

간사스럽게도

평정을 준다

 

 

10

가시울을

껴안듯 살아도

피었다 이우르는

꽃을 보아도

조용한 그 모습

 

하얀 가리마에

홀로 새긴

슬픔이 고였대도

정녕

임종이어야 합니까

 

촛불을 켜도

비인 방

반가운 이 와도

비인 집

 

어머니

참말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까

 

바늘쌈에 

아직도 

바늘은 꽃혔는데

머리를 풀어라

머리를 풀고 곡을 하란다

 

 

11

꿈에

울고난 새벽

가슴에 묻히

어머니 무덤에

무슨 꽃이 피었던가

 

뒷산골에

부엉이 울다 가면

그 산에 가득한

어머니 얼굴

 

현(絃)이 끊기고

말았던가

하늘빛이

변했던가

 

꽃필 날

다시 없을

뿌리가 뒤집힌

나무들은

생명이 병보다

더 아프단다

 

 

12

어머니는 무덤에 계시면서도

농 속에도 계시고

부엌이나 장독대

시장 구석구석

어물전에도 계시어

손끝에 묻은

생활의 때를

빛내 주신다

 

어둑해 오는 봄날 저녁

상긋한 산나물에서도

숱한 이야기는 살아나

살이랑마다

접어 논 아픔이

펼쳐지고

살면서 멀어질 줄 알았던

베쪽 같이 해쓱한

마지막 모습은

이승과 저승에 다리를 놓는다

 

퍼덕이는 외로움 물고

젖은 구름을 타고

떠난 어머니

살 익는 입김에

가슴 메여

뒤채이다 나면

남겨두신 정(情)에 운

꾼이었다

 

 

13

홀로 삭이어

보내신 일월(日月)

마디마다 고여오는

피멍든

그리움에

 

천추(天秋)의

길목에 서서

울고 계시던

어머니

 

차곡차곡 접어둔

옷갈피 사이에

하얗게 바래진

당신의 멍에

 

임 없던 빈 자리에

묻어둔 고통이

싸늘한 체온되어

임종입니다

 

 

 

14

무덤의 습기가

가슴을 적시었대도

어머니

아직은 눈을 감지 마셔요

 

목숨의 불꽃을

끄고 가시던 삼월

가슴에 힌 댕기 들여놓고

비 되어 오늘까지

눈물입니다

 

꽃밭처럼 필 웃음도

한숨으로 삼키시고

혼자서

작게 움츠러들던

어머니

 

다정한 그 목소리

바람 되어 들림일까

바람 부는 날에는

더욱 못 잊는

이 아픔

 

지금

어메도 아베도 다 가고

설움은 버릇이 되었어도

서로가 아파하고

사랑하는 것은

 

 

15

오늘은 추석입니다 어머니

뜨거운 목소리를 남긴 채

홑적삼만 입고 가신

우리 어머니

첫애기 안고 와서

이렇게 웁니다

 

이 들녘은 다 비었습니다

인생은 한번 노래하고

한번 꿈꾸는 것이라고

아무것에도

감동되지 않던 마음인데

풋풋한 밤 대추가

가슴을 칩니다

유언 대신 두고 가신

저고리섶에 꽂혔던

바늘에 찔려

나온 피

거기 

문득 뜨락에 와 계신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내 가슴가에서

헤매던 그 손이

잠이 깨어도

잠이 들어도

꿈을 꾸게 합니다

 

내 가슴가에서

헤매던 그 손이

잠이 깨어도

잠이 들어도

꿈을 꾸게 합니다

 

어머니

오늘은 추석입니다

 

 

16

충청북도 괴산

깊은 산골에

무슨

고요가

이리도

아프답니까

 

당신이

원하던 것

이루어내

달려와봐도

닫혀진 무덤

열리지 않고

 

자식의 가슴에서

어머니

오늘

하루 낮이라도

행복으로

묶어주소서

 

 

17

배고파하고

추워하고

힘겨워하는 건

불효가

아닌 줄 알았어라

 

한숨을

짓는 것도

아픈 티를

내는 것도

달고 쓴 맛을

가리는 것도

불효인 줄 몰랐어라

 

거친 것을 먹고

굵은 베옷을 입고

고통만 더하면

불효가

끝나는 줄 알았어라

 

 

18

모자람도

흠도

깨달아

알 때까지

감탄도

나무람도

없던 어머니

 

잊고 싶은 것은

아픈

불효 아니고

저입니다 어머니

 

흐린 소견

알려드리러

무덤에서

어머니 어머니

 

 

19

참는 괴로움을

즐기시는 어머니

세상에 그런 일

어찌 있으랴

 

불효가 다시는

얼씬 못하게

뿌리를 뽑아

당신을 빛내려는 날

어둠 속에서

밝아 오십시요

 

당신의

몸과 생각

자식에게 주고도

자식에게 의지하면

눈물로 흔들린다고

의지함을

버리신 어머니

괴로움이 없다는 말씀은

즐거움도 끝이라는 걸

이제 와

알게 되었습니다

 

 

20

온갖 괴로움

그 몸에 모였어도

밀어내어

마음에

근심하는 일

없으신

어머니

 

살이 아프고

뼈가 틀어지는

세속적인 갈등을

어찌

덧없음으로 보셨습니까

 

만족할 때 없어

괴로움에 얽히다가

당신의 말씀

떠올리며

마음의 속된 이익에

부끄럽습니다

 

 

21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모두 참으시던

어머니

 

괴로운 일도

혼자서 풀고

혼자서 묶으며

당신의

육신은 헐리어지고

 

평생에

구차하고 비굴한 일

없으시지 않으련만

 

꽃 뒤에 숨어서

빈 기쁨으로

작은 웃음을 짓던

어머니 

 

 

22

긴 한숨 거두시고

가신 그날로

이십년 나날이

한숨입니다

 

웃음소리  있는

세상보다

어둠의 끝

그곳이 편안해

햇빛을 끌고

그곳으로 가시었소

 

무덤 앞에 서서

당신의 허물인

나를 울며

 

갈 곳 없어도

돌아섭니다

 

 

23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모진 일은

하지 말라시던

어머니

 

자식을 사랑하되

결점을 알아

나무람 주셨고

나무람 하되

장점을 알아

대견하다

꽃피워 주시던 어머니

 

오십사 년 지탱하신

생명을 미련 없이 벗으시고

자식의 가슴에서

길게 사시는

우리 어머니

 

 

24

무언 일이건

때가 있고

끝이 있는데

불효엔 끝이 없어

느껴웁니다

 

꽃필 적엔

덧나는 그리움

꿈에라도 만나지면

아프게 

사무칠세라

 

어머니 가신 곳

헤어짐과 만남의

설움 없어

마음을 쉬게 하고

 

고달픔 저절로 풀리어

고요하기

하늘보다 위인 곳이건만

오고 가는 것

어렵기에

남은 삶을 어이하리

 

 

25

어머니 곁일 땐

해의 밝기가

더하였고

떠나시니

달의 밝기가

더하오

 

서리땅 밟으며

살아도

시름으로

가슴 조이지

않으셨고

 

속된 세상 괴롬

외면하며

가난하게 웃던

차마 모를

어머니 마음

어디서 다시 만나랴

 

 

26

떠나신 후

세상의 행복을

구하기도 싫고

얻기도 싫었습니다

 

진실의 웃음도

괴로웠고

행복함에도

슬픈 생각만

더해왔습니다

세속의 소망도

잿더미되고

고통마저도

무상(無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제 뿌리를

뒤집어

비틀거리며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27

무슨 일이든

다하여도

다함은 없어

 

마음대로

성내고

하고 싶은 것

즐겨도

괴로움은 있기 마련

 

자신을 다스려

고요한

즐거움을 지키라는

어머니

 

자식 사랑하듯

세상 일

거두어 잡고

한갖되이

근원을 닦으시는 어머니..

 

어찌해 

괴로움 벗어나려 하지 않고

괴롬으로써 벗어나려 하십니까

 

 

28

태에 들어서

지금까지

서툴러서 괴로운 자식노릇이오만

어머니 있어

즐거운 집

 

눈이 멀어도

겁나지 않고

세상이 멈추어도

두렵지 않아

봄날같이 생에 취해

우루루 몰려오는

행복을 봅니다

 

미움도

싫음도

모르시지 않으련만

어제나 오늘이나

한날같이

사람의 도리에

순응하는 어머니

 

 

29

듣고 배워도

안 배운만 못하면

배움이 욕이 되고

 

내 속 짚어

남의 속이라고

마음의 눈을

열어주던

어머니

 

작은 마음으로

삶을 지키는 일

생활로 보이며

 

당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은

어먼

 

당신의 

따듯한 손목

다시 잡고 싶어라

 

 

30

세상을 낳고

사랑을 낳아서

그 속에 자식을 낳아

기르신 당신이어라

 

당신은

고통으로 아픈 가슴 아닌

사랑으로 아픈 가슴

지녔어라

 

자식의 번민은

눈치 채이지 않게

당신의 가슴에

품어 삭였어라

 

기쁨과 슬픔을 달리해본 적이 없기에

자식일엔

두려움 또한

없으셨어라

 

 

31

고향 떠난 자식

꿈꾸며 그리워도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소망이기 바래

저무는 황혼에 서서

자식을 지키시는

어머니

 

당신의 희망이

고통속에 묻혀버려도

맑은 그늘 속

얼굴빛

언제나 고왔어라

 

어머니

당신이

삼켜버린

고통의 무게

얼마입니까

 

불효는 저희를

주저앉혀

일어서지 못하게 해도

고달픈 눈을 감고

어머니의

꿈속으로 갑니다

 

 

32

자식을 즐기는

어머니 사랑

자식의 가슴에

물로 새겨지고

어머니를 그리는

자식의 사랑

어머니의 가슴에

불로 타면서

주고 받음이 아니게

줌으로써

섞이게 한다

숨어 있으나

영원한 근원

어둠도

빛도

묽게 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다

 

 

33

다른 이의 몸을

아끼면

좋은

빛속에 살고

 

내 몸을

아끼면

어둠 속에서 산다던

어머니

 

다른 이의 몸

아끼기

어려운 줄

내 몸을 아끼며

알게 되었어도

 

당신의 말씀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꽃으로 핍니다

 

 

34

헤어져

흐려지지 않는

정이 없는데

잊는다 생각는다

구별 없이

오래도록

다하지 않는 것 있어라

 

자식의 것이라면

더러움도

당신의 것이라

덮어 숨기고

자식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태웠기에

달다 삼키지 않고

쓰다 뱉지 않으며

키우고 깨우는 일

마땅하다 건너셨네

 

 

35

낳아

기르고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희생이라고

생각지 않아

더 큰 사랑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아

눈멀고

귀먹게 한 사랑

 

일년에 하루라도

불효라 이름하여

무거운 사라

부려 놓으소서

 

 

36

고운 옷보다는

덕을 쌓으라던

당신의 소박함이

뿌리를 내려

화려함은

부끄럽습니다

 

사치하면

검소해지기 어려우니

검소함 몸에 익혀

쓸데없는 꾸밈

벗으라던 말씀

지금도 들립니다

 

사람으로 쓰이지 못하면

부모에게 누가 되니

자기를 이겨내

몸과 목숨

헛되이 말라는 말씀

저를 겹으로 두릅니다

 

 

37

이승과 저승을

합할 수 없어도

어머니는

이승의 반쯤으로

나를 지키고

나는

저승 가까이

어머니 곁입니다

 

살아 계시나

않으나

생각키 나름

나를 두르는

당신의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어

본성을 편케 합니다

 

 

38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입이 어늘한 사람

더 믿으시고

 

지식을 알고

세상을 아는 것도

중하지만

참을 줄 아는 것이

제일이니

심성을 구부릴 줄

알라 하시고

 

내보이는 정(情)보다

간직한 정이

더 깊은 것이라고

그늘이 빛인 것도

알게 하셨네

 

 

39

필경엔

어버이 될 줄

어이 알았으랴

 

원하옵건대

지난 세상

있었던 일

모두 버리고

다시

자식으로

태어나기를

 

지극한

마음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지는데

비길 데 없는

괴롬

 

의지없이

제 갈길 보지 못해

허둥댑니다

 

 

40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날리며도

불효에 묶이면

울게 됩니다

 

가면

오지 않은

사람의 목숨

모르지 않았어도

허물로 지내다가

금가버린

당신의 육신을

허물었습니다

 

어떠한 뉘우침도

고통을 멈추게 와서 못하고

불효는

당신의 눈물입니다

 

 

41

밤이면

꿈속에

자주 오십시오

꿈 속에 오시었다

행여

발길이 돌려지지 않을까

오다가 가십니까

제 빛대로

살기 어려운

분분한 세상

켜켜이 쌓인 적막

달래주러 오십시오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면

당신의 모습

겹쳐와

나를 지웁니다

웃음 속 눈물이

모여서 흐르며

자꾸 나를 지웁니다

 

 

42

더울세라

추울세라

자식 걱정 어이하고

그리 바삐 떠나셨오

 

서리 내리면 얼음 어는

쉬운 이치 무에 어려워

떠나신 후 비로소

불효에 웁니다

 

하루는

그 하루를 무너지게 해도

침묵으로

주시는 말씀 저를

일어서게 합니다

 

 

43

형제와

우애롭지 못하며

어찌

친구와는 사귈 수 있느냐고

먼 데 사람

가까이하려 말고

가까운 형제와

구순하게 지내라던

말씀 그리워

 

우애하고자 해도

그 형제 흩어져

못 미침이니

불효와 버금가는 괴롬

삶을 아프게 하고

 

한몸에서 나뉘인 형제

정의 깊기로 하자면

더 무엇 있으리

 

너와 같은 너를

너와 같은 나를

어머니는 한 몸으로

사랑하시는데 

 

 

44

번민에 잠겨도

오직 어머니 계시기에

긴 밤도 짧게

순결한 잠을 가졌어라

 

빛나며 흐르는

당신의 눈물은

고달픈 꿈이 주어져도

영원한 생을 있게 했어라

 

사랑과 미움의

구별을 잃어

모자란 자식이

무안을 느낄까

일부러 돌아앉아

못 본 체하였어라

 

고생스럽기 더할 수 없어도

일생 속에 홀로 앉아

행복은 나누고

슬픔은 혼자 가진

어머니를

자식은 울어라

 

 

45

어느 때 한번

음식으로 정성껏

모시지 못했고

잠자리 편안케

해드리지 못했으며

더구나 그 뜻

따르지 못했어라

 

당신의 가슴에

있는 기운(氣運)

거슬려서는 안 되는 줄

그 기운 식은 후에

알게 되었고

 

소용없이 슬픔만 깊고

제사만 지극해도

엎드린 자식을

일으키시는

 

어머니, 어머니

 

 

46

목숨이

끝나는 건 아니면서

떠나신 날 부터

몸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서 자식에게

괴로움 주지 않으려

감정을 감추며

조심스레 사셨는데도

당신은

괴로우만 길게 합니다

 

슬퍼하고 그리는 마음

무엇을 다시

할 수 없어도

불효만

더하고 키워서

한 세상을

건넙니다

 

 

47

세상의 일

욕심대로 되지 않으니

욕심을 줄이라는

말씀

 

애써 하려 해도

안 되는 것 있고

저절로 두어도

되는 일은 된다고

 

모든 허물은

제가 지어

제가 입는 것이니

그것에 매이지 말고

 

스스로 억제하는 힘

기르라는 당신의 뜻

따르기 어려워라

 

 

48

배움은 있으나

덕이 없는 사람보다

비록 배움 없대도

덕이 있는 사람

귀히 여기셨고

 

재간이 있는 이보다

무뚝뚝해도

한결같은 이

가까이 하셨고

 

자식이 밖으로

떠돌때는

끌어당겨

안으러 밝혀주시고

 

오랜 고통도

잠깐의 기쁨으로

흡족해하시던 어머니

온마음 다해도

아득하여

도달할 수 없어라

 

 

49

매를 들고

성내고

미워하는 일

뒤로 하고

우선은

가르쳤어라

 

가르침이 없는

사랑은 

자식을 

자라지 못하게 함을 알아

뜻을 받아주지 않으면서

허물은 눈감아주셨어라

 

남과 다투었을 땐

자식이 옳은 줄 알아도

두둔하지 않으시고

아서라

다투지 마라

서로 흠을 만들지 말고

되도록 유순하라 하였어라

 

 

50

빛 중에

해가 으뜸이듯이

사람 중에

어머니 제일이시네

 

학문을 많이

익힌 건 아니지만

사람의 법도(法道)

잘 다루시었고

 

의학을 몰라

의술은 아니어도

자식의 병

신통으로 다스리시고

 

당신의 병은

깊어도

앓지 않으시고

작은 몸 어디에

그런 힘

숨어 있답니까

 

 

51

저승길이 멀다 해

어머니 가실 곳이

저승인 줄 몰랐오

 

세월이 긴 줄 알아

몸도 마음도 잊어

무심하였더니

 

아침에 웃으시던 모습

저녁나절 걷우시고

북망산 그 길로

누굴 만나러

홀로 가시었오

 

해를 넘겨 어둠 와도

달을 지워 날 밝아도

흙으로 다지고

떼를 입혀 막아도

들립니다 그 목소리

 

달은 져서 어두워도

하늘에 있듯

가슴에

무덤을 안고서

 

어허 어허이 어허 어허이

 

 

52

오백 리 떨어진 고향이

세월이 갈수록

더 가깝습니다

 

봄에 안겨

자식을 안고

누워있는 어머니

 

스무 해를 당신 앞에

무릅 꿇어 울어도

불효는 불어나기만 하고

 

덮힐세라 가슴 죄며

울고 덮은 흙무덤인데

오늘은 떼를 밟으며

긴 봄날을 보냅니다

 

 

 

어머니 희망대로

김초혜

 

초하루 보름

한 달에 몇 번씩 제사를 드리고

몽뚱이를 땅에 뒹굴어 울어도

어머니는

잠깐도 오시지 않는다

몸을 마친 그날부터

자애롭기만 했던 어머니는

웃지도 않으시고

‘어머니 희망대로’ 살라는

화두만 주신다

 

 

 

연가[戀歌]

김초혜

 

그리울땐

눈을 감으면

별이 되어

떠난 사람이 온다.

 

서로 목숨이었던 때의

빛으로

가슴을 부빈다.

 

자살도 한 번 못해보고

삼킨 죽음도

상처의 증거도

선뜻 보일 용기도 없어

감탄사로만 숨을 쉰다.

 

그가 간 날부터

발목엔 고리가 채워지고

돌아서는  연습만 하다가

진통하는 구천

 

달을 봐도

울지 말고

비었던 가슴에

넘치도록

몸살을 앓게 하자.

 

피범벅으로 삭여진

암시로

빈 터전에

갈대꽃이라도 피우자.

 

오늘은 절명가(絶命歌) 대신

하늘이 들어앉는

가슴을 연습하자.

 

 

 

연륜

김초혜

 

그로부터

즐거움과 괴로움을

집착과 분노를

어리석음과 지혜를 알았습니다

마음을 접고

욕심을 물리쳐도

미처 이르지 못하는 길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가

다 기울어져서야

쉽게 작은 데서 얻어지는

편안함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오늘과 내일

김초혜

 

피가 미지근하게 되었나

세상이 미지근하다

마음이 끊어진 모양이다

내가 나를 낳아

내가 만든 그물에

내가 걸려 허우적이면서도

또 다른 그물을 만들어

내게 자꾸 던진다

얼마나 살 것 같고

얼마나 사랑할 수 있어

어두운 이세상이

더 어두워지도록

어둡도록 그물만 짰는가

얻고자 했던 모든 것이

나를 얽어매는 사슬인데

세상 사는 동안 알게 될까 몰라

도대체 이것이 무슨 놀음인지

 

 

 

오랜 동안

김초혜

 

가까운 것도

먼 것도

무한 속으로 돌려보내고

무심히 혼자 앉아 있다

무심은 기쁨이라고

두 손 잡고

앉았는데도

고요가 불편하다니

 

 

 

요양원 앞 식당 소묘

김초혜

 

어머니와 아들은

제일 비싼 도가니탕을 시켰다

늙은 어머니는 연신

아들의 뚝배기에

도가니를 건져 넣는다

더 먹어라

어머니 드세요

얼핏 아들의 얼굴에

울음의 그늘이 스친다

차차 익숙해질 거예요

조심해서 올라가거라

자주 오겠습니다

사랑과 불효의 무게가 같아서

서러운 어머니와 아들.

 

 

 

욕망

김초혜

 

활시위를 당깁니다

집중할수록

하늘과 땅이 어긋납니다

과녁을 바꾸니

시들은 가슴에

싹이 돋습니다

 

 

 

우리 모두

김초혜

 

둥둥둥둥 북을 울려라

세상은 온통

귀먹은 사람들인데

북을 울려라

듣고 외면한대도

북을 울려

귀를 뚫어보자

정의를 난폭함으로

열정을 다혈질로

둔갑 추락시키는

기술자들에게도

북채를 쥐어 주자

마치 양심처럼

시대의 오류에 걸려 넘어졌어도

일어나게 하자

어떤 시작으로라도

우리 함께

깨어 일어나자

 

 

 

우화

김초혜

 

두 개의 길 위에서

시간 속에 가두어지면

죽음의 길이 보이고

내 속에 시간을 가두면

살아 있는데

결과에 미리 근심을 두어

순간마다 죽임인 이가 있고

순간순간이 삶인 이가 있어라

 

 

 

이별

김초혜

 

그대 죽음의 순간에

흙이 되고

 

나도 그 흙

어디쯤

나무가 되어도 좋고

꽃을 괴이는

돌덩이어도 좋으리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자연의 순리에

 

그대

분별을 끊고 떠났지만

분별을 끊지 못하는

이 눈물을 어찌하려오

 

 

 

이별에게

김초혜

 

밤새도록

달빛이

목련꽃 가지를

휘어 놓았구나

 

꽃이 졌는가 했더니

그대

떠나는 날이다

 

 

 

인간의 길

김초혜

 

세상에 와서 졌던 짐

아쉬움 없이 부려 버리고

아주 편히 쉬십시다

소낙비 한 차례 내리고 난

엄청난 그 짐도

한 점 먼지였군요

지금은

지금은

그 겁나던 파도도

바람도

내 중심에 실려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인생

김초혜 

 

길을 떠나기 전에

묻고 싶었으나

길을 떠난 후였고

길을 걸을 때

묻고 싶었으나

숨이 가빴습니다

지금

길이 없기에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인연설

김초혜

 

어제 그대에게

머물렀던 바람이

 

오늘은 내게 불어와

 

일천 겹 그리움의

파도를 이룬다

 

 

 

일기(日記)

김초혜

 

1

숨어서 잡니다

모습을 아는 이가 있으면 절명하듯 잡니다.

비밀을 지키듯 잡니다

일어나서 뛰어도 잠 속입니다

화살은 녹아서 눈물이 되었습니다.

아파서 아픈 것인 줄 모르던 과오는

불을 끄지 못한 채 깨어서 잡니다.

 

 

2

앞날을 물들일 피가 맹물이 되었다는

마지막 말은 해방으로 가지 않고

불매듭이 되어 문짝이란 문짝에

모조리 날개를 달고 푸득이고 있습니다.

살아서 죽은 시간을

물감으로 칠해 놓고

시작(始作)에 발을 걸어도

부어 터진 무감각은

박제된 아침만을 밝히고 있습니다.

 

 

3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는 듯 일어나

달아나는 나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끓는 피는 열꽃을 피우고

벙어리를 만듭니다.

주소를 뒤적여 나를 찾아도

빈 하늘에 걸리는 손짓,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순전하게 타오르는 손짓입니다.

 

 

4

변명으로 끝나는 변명이 아니게

돌아앉아 주시지요.

백지를 닦아 말갛게 비워 두고

쓸쓸히 사는 이를 영겁으로

기다릴 수 있다고 약속해 주시지요.

바람으로 서도

더 청정한 바람으로

소망하게 하시지요.

 

 

5

열 개의 해를 먹은 아이가

고스란히 해 되어

깜깜한 밤중을 열라고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참말이지 그 새파란 눈동자에

빛으로만 들앉고 싶어

울렁이는 피의 만세를 봅니다

부끄럼을 뜨겁게 하는

생활에 묻어나는 너의 종소리

차마 아니 피어날까 나의 종소리

 

 

6

흙과 섞이어 자연으로 누울

내가 보이는데

흔적을 구하려는 옳지 않음이

옳음처럼 나를 결박합니다

띠를 두른 흙냄새가

목을 감아도

묶어서 던져 버리지 못하는

오늘은 옳지 않음의 반복입니다

 

 

7​

깨어남과 잠든 것이

흙과 꽃의 가름임을

한마음에 두게 되었습니다

꽃 속에 누운 얻음이

얻음이 아니고

산속에 누운 잃음이

잃음이 아닙니다

자랑이던 것이 상처가 되어

빈터에 걸려 있습니다

빛 아닌 빛이 빛이라면

구하던 만큼 버리고 싶습니다

 

 

8

잠시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변신을 바란 적이 없는데

바람이 붑니다

벌레로 태어납니다

벌레의 다리만으로 족합니다

공으로 되어 굴러다니는 것도 보입니다

인과(因果)를 무시한 채

마음이 묶입니다

웃으면 웃음에 맞게 펼쳐지던

생색을 거두어 갔습니다

얻을 수 있을 때

얻은 것도 화살입니다

많은 것과의 헤어짐만이 과실(果實)입니다

 

 

9

허락의 때가 있었습니다

뜻 속엔 빛이 있었고

의심도 확신이었습니다

허공이 비좁던 수목(樹木)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가슴이 숨어 버린 걸 알았습니다

비좁은 소견은

조락(凋落)한 시간들을 흔들었습니다

집중적으로 응고된 부분이

소화(消化)를 거부합니다

다시 와 불타는 소생이

노역(勞役)인 것을 예감하지 못하였습니다

 

 

10

거울을 보면 안 보이던

얼굴이 보입니다

바다를 측량하라는

새로운 음모도 보이고

그것이 희롱이라는

몸부림도 보이고

물에다 불을 붙일 수도 있다고

숨을 가쁘게 합니다

원하기만 하면

되고 싶을 때 될 수 있다고

음모는 또 다른 음모를 소작(小作)합니다

그러나 무의식을 꾀어내면

포기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초월을 가진 얼굴도

볼 수가 있습니다

낯설은 얼굴입니다

음모에 불을 댕기고도 싶습니다

 

 

 

일상

김초혜

 

은은한 차 향기

쓸쓸하나 아름다운 일몰

담 밑에

무심히 핀 과꽃

우연찮게 듣게 되는

가을 노래

간간히 내리는 비

마음으로 주고받은 꿈

그러나

고요 속에 지고 있는 삶

기억 한 자락

하루를 보내다

 

 

 

자신에 대하여

김초혜

 

나는 틀렸다

내 잘못이다

너를 그렇게 한 것은 나였다

너는 언제나 옳았다

나를 지고 가려고

너를 짊어진 것은 아니다

이것을 저것을 가려본댔자

나를 살리는

문만 닫혀 버린다

나를 지우면

온 세상이 내가 된다

 

 

 

자화상

김초혜

 

오늘은 오늘에 빠져버렸고

내일은 내일에 허덕일 것이다

결박을 풀고

집을 떠나려 하나

벗을 것을 벗지 못하는

거렁뱅이라 

 

 

 

잠깐만 그대여

김초혜

 

무슨 일로

그대는

무거운 몸을 짊어지고

무게만 탓하는가

 

몸은 풀어져

녹고 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비칠거릴 텐가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는데

아직도

햇볕의

여분 탓이라고 할 텐가

 

 

 

잠자는 사람

김초혜

 

행동으로 하는 것이나

말로 하는 것이나

침묵을 지키는 것이나

뜻만 같으면

같은 것인 줄 알았어라

 

두려움 때문에 지킨

침묵은

침묵이 아니고

동조인 것도 알았어라

 

죽으면 살고

죽이면 죽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살아서 죽어 있는

오욕이어라

 

 

 

장수의 비극

김초혜

 

이제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오고 있을 것이다

사랑할 힘도 미워할 힘도

모두 삭아서

텅빈 눈으로

하늘만 바라볼 것이다

 

 

 

저녁이 되어서야

김초혜  

                    

어떻게 사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안일에 매여

나를 묶기에 덧없었고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에

언제나 깨어 있다고

자기 확신이 반복에만

눈멀어 지내었고

            

어둠인 이 세상을

등지고 비켜 서서

나만 소중해

저물지 않는 한세상만을 꿈꾸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서야

현실을 바로 보면

변화되는 자기를 만날 수 있다는

눈물 어린

가슴을 알게 되었네

 

 

 

저무는 길

김초혜

 

길이 기다리고 있을 때

속된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쓰러진 길을 일으켜 세울

엄두도 못 내고

빈 껍질만 남은 길을

절뚝절뚝 걷고 있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이 얼치기 길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

허름해진 마음은

고적하기만 한데

어느덧

어둑어둑 날이 지다니

 

 

 

적막한 저녁

김초혜

 

1

내가 무너져

끝도 없는 진흙 창을 헤매도

다그치지 말고

비판도 삼가고

그냥 넘겨주십시오

웃음이 풀어져 희죽거리면

먼저 희죽거려 주고

울음이 헤퍼져도

못 본 체 해 주시지요

 

그렇다고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골수에 묻은

어두운 눈물도 있고

내 속에서 끓이는

증오도 있습니다

그건 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작 두려운 건

에너지가 자꾸 죽음 쪽으로만

기우는 것입니다

제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리 겁날 건 없지만

그곳에 이른

나의 여러 모습들이

나를 무섭게 합니다

 

 

2

일어나고

머물고

변해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날마다 애쓰고 이룬 것이

날마다 쌓은 고통이라면

무엇에

미련을 두겠습니까

 

오르막길에도 쉬지 않으려

내리막길에도 실족하지 않으려

건너뛰기도 외면한 채

덧없는 세월의 고개

넘어서 왔는데

봄바람 마주하고 서니

자연의 뜻이 쓸쓸해

마음 둘 곳 모릅니다

 

 

 

점괘

김초혜

 

물이 땅을

건널 수 있다는

땅도 물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거짓말을 자꾸

믿고 싶어진다

사주쟁이가 말한

점괘에

마음껏 속고 싶다

 

 

 

제주에서

김초혜

 

자려고 누우니

바다가 먼저

잠자리에 들어

잠을 깨운다

파도는 거세도

바다는 유유하다고

 

 

 

죽음

김초혜

 

나를 떠나

멀리 있는 것이리

 

남들 속에 있지만

내 것은 아닌 것이리

 

내가 남이 되면

그 남 속에 있는 것이리

 

 

 

지식인의 메아리

김초혜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서로 베낀 듯이 닮은

이 시대의 지식인

가증을 표출하지 마라

비굴과 이기심을 감추어라

절망과 수치심으로 길들여진

무력하고 가슴이 차가운

이 시대의 지식인

 

너도 바보다

너도 바보다

 

 

 

진정한 나이

김초혜

 

나이와 사이가 좋아지니까

사소한 것도 아름답다

 

나이를 못 따라가면

후회와 탄식이 쌓이고

 

너무 앞질러 가면

길잡이를 잃는다

 

 

 

차(車) 시인(詩人)에게

김초혜

 

돌아보지 맙시다

개의치도 맙시다

하찮은 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들의 망상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얼마나 통속입니까

형상화가 안 됐다 하면

또 어떻습니까

화살을 빗쏘면

쏜 사람에게 날아갑니다

손된 세상

편가름이 심해도

간절하고 지극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마음을 고이 모두어서

우주를 만듭시다

주인은 그들이 아니고

나입니다

그 주인을 섬깁시다

 

 

 

참회

김초혜

 

종이를 찢었습니다

시(詩) 쓰던 종이와 함께

나도 찢어졋습니다

오늘 전의 모든 일은

지워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천심

김초혜

 

꽃이 아가에게

말을 거는지

아가는

꽃밭에만 가자 한다

아가는 꽃과

마음이 맞는지

꽃밭에 가면

울다가도 웃는다

 

 

 

첫눈

김초혜

 

구름이 낮아지더니

눈이 내린다

 

과거는 현재로 오고

현재는 

과거로 돌아선다

 

허름한 세월에

어두운 저녁에

고요하게 내리는

 

하늘이 땅에

내려앉아서

쉬어가려나 보다

 

눈이 내리면

갈 길이

다른 사람과도

함께 걷고 싶다

 

 

 

추석

김초혜

 

오늘은 추석입니다 어머니

뜨거운 목소리를 남긴 채

홑적삼만 입고 가신 우리 어머니

첫애기 안고 와서 이렇게 웁니다

 

이 들녘은 다 비었습니다

인생은 한 번 노래하고 꿈꾸는 것이라고

아무것에도 감동되지 않던 마음인데

풋풋한 밤 대추가

가슴을 칩니다

 

나날이 창 앞에 오시는 성싶어

빗장을 지치지 않고 보내어도

가슴에 와 맺히는 건

모진 바람뿐입니다

 

유언 대신 두고 가신

저고리 섶에 꽂혔던

바늘에 찔려 파온 피

거기 문득 뜨락에 와 계신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내 가슴 가에서 헤매던 그 손이

잠이 깨어도 잠이 들어도

꿈을 꾸게 합니다

 

어머니 오늘은 추석입니다

 

 

 

친구에게

김초혜

 

1

묶이운 몸이 싫어지면

이 바닷가에 와서

뜬구름처럼

한가로이

지내다 가오

 

거친 세월에

바람만 얽혀 있다고

적막해하지 말고

된서리 내리기 전

한번 다녀가시오

 

기쁨도

이기지 못할

나이가 되었으니

길게

바라지 맙시다

 

 

2

세상에 무서운 것이

그리도 많다는 것은

세상에 얽매여 사는 거라고

그대는 말했지

 

마음만을 붙안고

살지 못하는

나를

그대는 가여워 성내지만

 

이보오 친구여

체면으로 겉을 가리고

안으로 얼굴을 감추는

그런 염치는 아닌 듯하니

 

해 저물 때마다

허둥대는

거름 무더기인 이 사람

행여 뿌리치지는 말아주오

 

 

 

탄식

김초혜

 

나는 출렁거린다

바람이 없어도

일렁일렁 게울질이다

 

멀미 길을 걸어서

걸어서 출렁거리며

공동묘지에 이름다

 

자만심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나는 누구도 아니고

누구이기도 원치 않는다

 

거기 내 무덤에 앉아

삭고 삭은 서러움

피 어린 눈물

모두 쏟아내면서

아니어라 그것도 아니어라

 

어허야 상사디야

어허야 상사디야

 

 

 

탐욕

김초혜

 

무심코 그리면

날아가는 새의

숨소리도 그리고

떠난 자리

그 허공까지 그리는데

잘 그리려 하면

날아가는 새인지

앉아 있는 새인지

눈앞이 흐린다.

 

 

 

 

편지

김초혜

 

1

먼저 핀 꽃도

나중 핀 꽃도

모두 다 지는 꽃이라

 

그대가 어제 피운 꽃 한 송이

오늘은 내게 와서 지고 있다

 

 

2

금년 삼백육십오 일도

비껴 지나가는 햇빛을

잡으려 맙시다

 

봄에 기러기 울고

여름에 된서리 내려도

설움으로 살지도 말고

소망으로 부대끼지도 맙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의 세상살이

얼마이겠소 

 

아프던 일 잠시 잊고

눈부신 한낮의 마음을 봅시다

 

그래도 봄이 오면

추억 속에선

진달래가 

분홍빛으로 피어날 것이오.

 

 

3

꽃빛이 너무도 환해

어둠이 무색했던 4월도 가고

강이 나직나직 맑아드는 걸 보니

가을인가 보오

일만 생각의 회환이

강물에 울렁이오

지금 몸 일궈내

꽃을 피울 수는 없어도

참고 견딤은 전보다 수월해져

엔간한 일에는 성을 내지 않는다오

부끄러운 일 멀리 하고

만족해야 하는 생활을 습관하다 보니

육체에 갇혔던 마음도

숨을 틔우는 것 같소

여보게, 세월을 묶을 수는 없으니

더는 미루지 말고

햇빛 비치는 동안 우리 만납시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김초혜

 

1

나는

사랑을

조금씩 섞어

역사를 죽이는

검은 증인이올시다

그대들 죽은 눈을

외면하고

그대들의 피로

치장한

그러면서

그대들에게

풀려나기를 바라 온

죽은 꽃을 꺾는

절개 없는

육신이올시다

 

 

2

죽음을 피한 삶 위에서

죽은 이들을 노래하는

뉘우침은

또 얼마나 헛된 것인가

 

양심에 들볶여

너의 넋을

내가 입고

비로소 너의 죽음을

흉내 내는

떠다니는 모습

 

무릎이 뒤틀리는

절망 속에서

가망 없는

다리 하나가

땅을 헛디뎌

솔깃한 곳에 놓여진대도

나는 내게

관을 씌우련다

 

 

3

나는 보았다

그대 묻힌 곳에

피어난 꽃무덤을

 

무덤에 얼굴을 대면

아직도 뛰고 있는

그대의 젊음을

 

어두워져 가던

시대의 앞장에서

얼어붙은 어둠을

불타오르게 한 것은

그대의 피였다

 

역사 속에 남긴

뚜렷한 흔적이

망월동에서

커가고 있는데

보잘것없는 한숨을

노래라 지으며

무릎을 꿇는 것이

고작이었다

 

 

 

4

양심을 깨운

너의 절규가

내 피 속을 흐르네

 

비굴을 깨운

너의 외침이

내 가슴속을 뚫는데

 

안정의 수건을 쓴

머리를 들 수가 없어

 

살아 있다는

죄밖에 없다고

용서받기 위해

쓰는 시는 아니라고

 

내게서

나를 밀어내려는

나의 뒤얽힌 억지를

아, 어찌하리오

 

 

5

하늘도 두려워하는 죽음으로

땅을 흔들고 간

죽음 또 죽음

그 죽음 끌어안고

한굴레 한멍에에 매어져 가리다

그대여 이제

죽음을 이긴

분노를 이기고

피 묻은 시간도 출렁이는 탄식도

그대로 묻어버리고

죽어 영광은 아니지만

묘지는 빛이라고

망월동은 들끓는 민중운동의 피바다라고

마침내

가슴을 펄럭이며

깃발로 일어나주오.

 

 

6

세상은 무너져도

그대는 영원하고

나는 나의 목을

높이 매달아놓고

그대의 너그러움으로

그대에게서

풀려 나려 한다

더러운 육신을

모두 토해 버린다 해도

그대 그림자 하나

따르지 못하고

웃으며 일어서는

그대들

무덤을 볼 때까지

가슴을 갈기갈기

깃발을 만들련다

 

 

7

그대들 피는

우리를 비추느 ㄴ거울이어라

눈물의 멍울처럼

꽃이 핀 망월동에서

꽃불이 되어 떠난

그대들 망혼을 가득 안고

멀리 저물어가는

민주주의를 본다

눈먼 것

귀먹은 것

벙어리 세상에

이 땅 어디가

망월동이 아니랴

땅 내음이

따스해지기도 전에

되풀이하여

우리는

민주주의를 낭비하고 있다

 

 

8

모든 것이 변하고

우리는 사라져 가고

기억은 희미해질지 모르나

그대들

꽃무덤은 해마다

다시 피어나리

 

어둠에는

어둠으로

칼에는 칼로

맞서던

그대들 죽음

 

죽임을 당한 순간에도

옳다 한 것은

바꾸지 아니하였으니

폭도를 아름답다고

우리는 운다

 

 

9

그대 있는 곳만

무덤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무덤이다

그대 무덤은 우리의 심장이다

무덤 속에서 울지 않는

그대를 본대도

우리의 삶이 소망일 수는 없다

비틀거리며 넘어져온 세월이 아파도

열 해의 열 번을

죽는다 해도

죽음일 수 없는

우리의 삶이 있을 뿐이다.

 

 

10

이 세상을 어긴 것들이

어지러이 사람을 죽이고 해쳐

우리 모두 두려워 떨며

숨고 도망가고 달아날 때

맞고 찔리어

골수가 흘러도

죽음을 향해 가며

죽어서도 학생 운동 하자던

목소리, 목소리

가슴을 부순다

더는 흐를 피도 없이

목숨이 끊기어서 넘어질 때

그제야 우리는

엉거주춤 앉아서

일 년 열두 달이 오월이라니

아아, 5월은 잔인한 달

 

 

 

하루살이

김초혜

 

해는 일찍 솟고

꽃은 더디게 피고

하루가 아득해

제 기력이 하루인 줄 모르고

일찍 뜨는

달만

헛되다 울었을까

 

 

 

행복

김초혜

 

아침 해

몸통을 비집고 들어와

내 마음을 간지르네

햇빛 그 귀함에

새삼 취하네

 

 

 

행복과 불행

김초혜

 

지난날의 행복은

오늘을

불행하게 하고

지난날의 불행은

오늘을 행복하게 한다

 

 

허깨비

김초혜

 

캄캄한 밤중에

코끼리의 머리만 만져 본 이가

코끼리의 코만 더듬어 본 그가

코끼리의 다리만 보둠어 본 이가

코끼리의 배만 만져 본 이가

코끼리는 꼭 이러하다고

서로 헐뜯고 다투고 있네

그래 코끼리는 네가 본 그대로다

무서운 덫에 빠져 사는

그대 그리고 나

 

 

 

허수아비

김초혜

 

남의 죽음을 보면

미망에 붙들려

살아온 삶이

갑자기 고단해진다

 

구부러진 등 쪼글거리는 입

존재로서의

처절한 죽음 앞에

절체절명의 시간은 가고

 

세상의 둘레에서

때이른 졸음에 몰린다

 

 

 

현대 시

김초혜

 

자기도 뜻을 모르고

남은 더 모르게 쓴다

시가 울고 있다

 

 

 

환영(幻影)

김초혜

 

얼굴조차 잊었다

생각수록 더욱 멀어질 뿐

빈 얼굴만

세월에 걸려 있다

 

바람이 불고

들끓는 아픔이

일상을 몰아치면

거울 속에 하늘

그게 당신이다

 

눈먼 사람같이

귀먹은 사람처럼

내게 오는 가능성

돌아와 모른 체

빗겨 지난다

 

그의 기억은

젊은 나이로

살게 한다

육순이 지난대도

당신의 가슴에

피어나는 꽃이다.

 

 

 

황혼

김초혜

 

빨리 흐르라고

떠밀지 않아도

 

낙엽 한 잎 띄우고

 

강물은

사정없이 흐른다

 

 

 

황혼의 눈이 멀어

김초혜

 

짐을 모두 부렸다고

생각하였어라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렸다고 믿었어라

 

그러나

절망과 무서움

부끄러움과 두려움

슬픔과 즐거움은

짐이 아닌 줄 알았어라

 

나를 있게 했던

나를 생각하게 했던

지금 내 안에 있는

그도 짐이었어라

 

바람 불고 구름이 일어나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도

설부린 짐은

나를

삶의 파도에 떠밀었어라

 

 

 

회포는 많아지고

김초혜

 

새는 구만리를 올라야

날개 밭에

바람을 품어

장천을 난다는데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는

날개 밑에

아내라도

머금기는 해보았는가

 

 

 

희망

김초혜

 

바라만 보아도

서로 친해지던

얼굴이 멀어진다

허무라고 그대는

허무라고

불을 지르고 싶다

 

검게 탄

기쁨을 걷어내고

순수한 새벽을

맞고 싶다

 

그대라는

미완성의 말 한마디에

부재나마 붙들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달아나고 싶다

 

그냥 내 속에서

덧없이 살고 싶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