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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jislavljevic Dynasty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

 

두클랴 왕국의 건설

 

두클랴의 성인, 블라디미르

 

외국어 표기 Vojislavljevic Dynasty(영어), Војислављевићи

시기 1034~ 1186

지역 두클랴, 세르비아

 

두클랴의 영토

 

1100년경 보딘 통치 시절의 두클랴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가 통치했던 두클랴의 영토가 어디서 어디까지였는지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두클랴는 크게 3개 지역(내륙 지방, 호수 인근 지방, 연안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략적으로 트라부니야 쪽으로는 리산으로부터 피바 강의 수원까지 뻗어 있었으며, 동북 쪽으로는 라쉬카와 경계를 이루고, 비잔틴 방향으로는 림 강의 수원지부터 프로클레티예 산을 거쳐 보야나 강 어귀까지 다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11세기에 스카다르, 울찐, 부드바 및 코토르가 두클랴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도시들은 10세기 까지만 해도 로마인이 대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후 점점 슬라브인의 인구가 늘어나 10세기부터 슬라브적 특성을 띠게 되었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라데타이, 노비그라드 및 론토도클라와 국경 요새(스바치, , 사파, 사르다, 드리바스트, 발레즈)들도 두클랴의 영토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몬테네그로 영토와 대부분 일치한다.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의 통치

 

아르혼트 페타르의 도장

 

10세기 중반까지 두클랴 통치자들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아르혼트 디오클리예'로 알려진 페타르의 이름만이 직위와 함께 납으로 만들어진 도장에 그리스어로 새겨져 전해진다. 두클랴 통치자들에 대한 기록은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좀 더 많아진다. 요반 블라디미르(970~ 1016)는 크라인스카 성모 교회 근처의 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활동한 두클랴의 군주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황제 사무일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잔틴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블라디미르의 대외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무일로는 998년경 두클랴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사무일로에 의해 생포된 블라디미르는 프레스파로 압송됐다. 정복 지역에서 자신의 지배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사무일로는 곧 블라디미르를 자신의 딸 코사라와 결혼시키고는 두클랴로 돌려보냈다. 두클랴로 돌아온 블라디미르는 권좌에 복귀했음은 물론 드라츠 지방의 일부도 얻어 통치할 수 있었다.

요반 블라디슬라브의 사망 후 두클랴를 통치하려던 삼촌 드라고미르가 트라부니아에서 군대와 함께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코토르인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1018). 드라고미르의 죽음 후 두클랴는 20여 년간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두클랴의 역사가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은 스테판 보이슬라브(1031~ 1044)가 두클랴의 통치자가 되면서부터였다. 스테판 보이슬라브는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1025) 후 비잔틴 세력이 쇠퇴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비잔틴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의 선봉에 섰다. 1차 봉기는 1035년 일어났으나 비잔틴의 세력이 여전히 강해 봉기에 실패했으며 보이슬라브는 생포되어 짜리그라드에 압송되었다. 하지만 보이슬라브는 1036년 짜리그라드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두클랴로 돌아왔으며 곧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였다. 1042년 비잔틴의 공격을 맞은 보이슬라브는 비잔틴 군대를 격파하고 최초의 독립 두클랴국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스테판 보이슬라브의 아들 미하일로(1050~ 1081)는 비잔틴제국과 선린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며 동시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 교황으로부터 1077년 왕관을 얻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두클랴국의 전성기를 이끈 보딘 왕

 

보이슬라브가 사망하자(1081) 그의 아들 보딘(1081~ 1099)이 뒤를 물려받았다. 보이슬라블례비치 가의 두클랴는 보딘 통치 시절 최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이후 권력 다툼으로 인해 쇠퇴기에 들어갔다. 보딘 시절 대립교황 클리멘트 3세는 바르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켰다(1089). 바르 교구의 대주교구로의 승격은 보딘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이는 거꾸로 로마 교황의 두클랴에 대한 영향력 강화와도 연결되었다. 보딘 치하의 두클랴는 라쉬카, 보스니아, 드레비녜 및 훔 지역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1099년 보딘이 사망하자 보딘의 자식과 형제들 그리고 다른 영주들 간에 서로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권력 투쟁은 1170년대 라쉬카의 스테판 네마냐에 의해 완전히 병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의 의의

 

1078년 교황이 보이슬라브에게 왕이라 호칭한 편지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가 다스린 두클랴의 군주는 처음에는 크네즈(, )라는 칭호를, 1077년 이후에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의 시조로 간주되는 요반 블라디미르는 세르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이 일이 전례가 되어 이후 네마니치 가의 대부분의 군주들이 사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두클랴의 왕위 상속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가족 간에 국가 영토를 나누어 통치하고 최고 통치권은 왕이 가졌다. 말하자면 국가를 통치 가문의 사적 재산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네마니치 왕가에도 이어졌다. 왕위계승자가 자라면 '젊은 왕'으로 선포하고 국가 경영에 참여토록 하는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의 한계

 

두클랴는 콘스탄틴 보딘이 죽고 나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졌다. 12세기에는 군주의 통치 능력이 아니라 영주의 지지를 획득하거나 외세의 지지를 확보한 사람들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던 까닭에 국가 혼란을 재촉하는 면이 있었다. 또한 두클랴의 수도 역시 한 곳에 정해지지 않고 왕이 바뀌면 수도가 바뀌는 그러한 형편이었다. 요반 블라디미르의 궁은 크라인스카 성모 교회 근처의 크라이나 지역에, 보이슬라브의 궁은 프라프라트나에 있었다. 반면 미하일로의 궁은 프라프라트나, 보딘의 궁은 코토르에 있었다.

11세기 프라프라트나의 위치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의 문장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의 문장은 빨간 바탕의 방패를 황금색의 띠가 위에서 아래로 사선을 그으면서 가로지르는 모양이다. 빨간색과 노란색은 용맹함과 관대함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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