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도테 왕가
국왕의 정치불간섭을 명문화한 입헌군주국
베르나도테 왕가의 문장에는 스웨덴 정통 왕가인 바사 왕가의 문장이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독수리는 나폴레옹 1세를, 다리 그림은 폰테 코르보를 나타내는 문장이다.
외국어 표기 House of Bernadotte(영어), Bernadotteska ätten
시기 1818년 2월 5일 ~ 현재
지역 스웨덴
나폴레옹 1세 휘하의 장군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가를 열다
왕세자 칼 요한
스웨덴에서는 1772년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한 구스타프 3세가 1792년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 구스타프 아돌프 4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1809년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1100년대부터 스웨덴이 지배해 왔던 핀란드를 러시아에 빼앗기면서 구스타프 아돌프 4세는 혁명군의 쿠데타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그의 삼촌인 칼 13세가 새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칼 13세는 병약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모두 출생 후 며칠 만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스웨덴의 홀슈타인-곳토르프 왕가는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스웨덴 국회(4계급 신분제의회)는 덴마크 아우구스텐보리 공국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왕자를 칼 아우구스트라는 이름으로 왕세자로 결정하고 칼 13세를 압박하여 입양하게 하였다. 그러나 칼 아우구스트는 왕세자로 옹립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고, 당시 미혼이었기 때문에 후사가 없었다. 이로써 홀슈타인-곳토르프 왕가의 명맥이 끊기게 되자 스웨덴은 왕위 승계자를 물색해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왕세자 칼 아우구스트가 사망하자 구스타프 아돌프 4세를 폐위시킨 혁명세력들은 구스타프 아돌프 4세의 아들 구스타프 왕자가 왕위 계승을 통해 절대왕정의 복고를 도모할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따라 칼 13세를 종용하여 칼 아우구스트의 형 프레데릭 크리스티안 2세를 후계자로 옹립하도록 하였다. 한편 당시 덴마크의 왕이었던 프레데릭 6세는 스웨덴의 왕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 군부 지도자들과 일부 세력은 당시의 상황에서 나폴레옹 1세가 수긍할 수 있으면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을 왕위 승계자로 옹립하기를 원했으며, 나폴레옹 1세 휘하의 용맹무쌍한 장군이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라고 믿고 있었다. 1804년 프랑스 황제에 등극한 나폴레옹 1세는 그 당시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약했던 칼 13세는 혁명세력의 요구에 따라 프레데릭 크리스티안 2세를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나폴레옹 1세의 동의를 구하고자 두 명의 사신을 프랑스로 보냈다. 동일한 임무를 띤 두 명의 사신을 보낸 것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신 중 한명이었던 칼 오토 뫼르네르는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으로 나폴레옹 1세 휘하의 장군들을 접촉하기 시작했으며, 가장 용감한 장군이었던 장 밥티스테 베르나도테를 만나 스웨덴 왕위 승계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다. 베르나도테 장군은 이미 1804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원수 칭호를 받았고, 동시에 이태리의 폰테 코르보 공으로 임명되었다.
베르나도테 장군은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해 나폴레옹 1세에게 의견을 구했으나 나폴레옹 1세는 흔쾌히 승낙도, 적극적인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베르나도테 장군은 뫼르네르에게 스웨덴의 왕위 승계자로 결정되면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하였다. 뫼르네르는 기쁜 마음으로 스웨덴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전했으나, 칼 13세와 내각은 왕명을 거스르고 자의적인 판단으로 뫼르네르가 저지른 일에 대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칼 13세는 즉각 뫼르네르를 체포하고 구금하였다.
뫼르네르가 구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도테 장군의 스웨덴 왕위 승계에 대한 여론은 점점 호의적으로 변해 갔다. 1809년 러시아에게 굴복하고 핀란드를 할양해야 했던 스웨덴의 군부는 핀란드를 되찾을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군인을 왕위 승계자로 원했으며, 베르나도테 장군은 1806년 뤼벡 전투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군에 대해 자비를 베푼 바 있어 군부는 그를 더 신뢰했다.
게다가 베르나도테 장군은 1798년 한때 나폴레옹 1세의 약혼자였으며, 후에 나폴레옹 1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처제가 된 데지레 클라리와 결혼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1세와는 결혼을 통해 친척이 되어 있었다. 당시 유럽의 황제로 군림하던 나폴레옹 1세와의 이러한 관계로 인해 만일 베르나도테 장군이 스웨덴의 왕위를 승계한다면 프랑스와의 호의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베르나도테 장군은 이미 11세가 된 아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스웨덴 국회는 1810년 8월 21일 프레데릭 크리스티안 2세의 왕위 승계를 없던 일로 하고 나폴레옹 1세 휘하의 장군 장 밥티스테 베르나도테를 칼 13세를 이을 스웨덴의 왕위 승계자로 확정지었다. 다음 달에는 베르나도테 장군의 11세된 아들 오스카르를 왕세자를 이을 왕위 승계자로 결정하였다.
1810년 9월 30일, 파리를 떠난 베르나도테 장군은 10월 19일 덴마크 헬싱요르의 스웨덴 영사관에 도착하였으며, 가톨릭에서 개신교로의 개종 절차를 마무리하였다. 다음 날 베르나도테 장군은 드디어 스웨덴의 땅 헬싱보리에 도착했으며, 스웨덴 남부의 주요 도시들을 거쳐 11월 2일 스톡홀름에 도착하였다. 11월 5일 칼 13세는 베르나도테 장군을 왕세자로 입양하면서 칼 요한이라는 스웨덴식 이름을 부여하였다.
왕세자 칼 요한은 병약했던 칼 13세를 대신하여 섭정 왕자로서 국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스웨덴이 원했던 핀란드의 회복보다는 덴마크를 압박하여 노르웨이를 손에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칼 요한은 1813년 패색이 짙어가던 프랑스에 등을 돌리고 한때 주군이었던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혁혁한 전과를 올린 대가로 1814년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할양받았다. 그는 저항하는 노르웨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에 굴복시켰으며, 1814년 11월 4일 칼 13세는 스웨덴의 왕이면서 동시에 칼 2세라는 왕명으로 노르웨이의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이 시작되었다.
칼 요한 14세
1818년 2월 5일 칼 13세가 서거하면서 홀슈타인-곳토르프 왕가는 막을 내렸다. 왕세자 칼 요한이 칼 요한 14세로 스웨덴의 왕위에, 칼 요한 3세로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면서 스웨덴의 베르나도테 왕가가 시작되었다. 베르나도테 왕가는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이 해체되고 노르웨이가 독립한 1905년까지 노르웨이의 왕을 겸하였다.
스웨덴에서 새롭게 문을 연 베르나도테 왕가는 북유럽의 변방 국가로 전락한 스웨덴의 왕가로서 시대적 흐름이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면서 왕권의 점진적 약화를 수용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1800년대의 혼란기와 1900년대의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격랑의 시기를 거쳐왔다.
베르나도테 왕가 출범 이후의 역사적 전개
나폴레옹 휘하의 베르나도테 장군이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결정된 1810년은 유럽대륙이 나폴레옹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시기였다. 이미 1809년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할양하면서 국가적 대재앙을 겪은 스웨덴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다. 스웨덴 왕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나폴레옹 1세 휘하의 장군 베르나도테를 왕위 계승자로 결정한 것은 이미 유럽 북방의 군소국가로 전락한 스웨덴이 열강들의 각축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전략의 일환이었다.
노련한 외교 및 군사 전략가였던 왕세자 칼 요한은 스웨덴 정치권과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던 러시아로부터의 핀란드 회복보다는 러시아 및 유럽열강들의 양해하에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할양받는 것이었다. 스웨덴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주군이었던 나폴레옹 1세에 등을 돌리기까지 했던 왕세자 칼 요한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결과 결국 1814년 열강들로부터 덴마크가 지배하고 있던 노르웨이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노르웨이의 반발을 무마하고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을 성사시켰다. 1818년 스웨덴 왕위에 오른 칼 요한 14세는 예의 노련한 외교술과 국제정치에 대한 통찰력으로 스웨덴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칼 요한 14세의 뒤를 이어 오스카르 1세가 1844년 3월 8일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가의 두 번째 왕위에 올랐다. 다양하고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던 오스카르 1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자유주의 노선을 신봉하여 스웨덴의 민주주의 발전과 노르웨이의 자주성 확립에 기여하는 한편 수많은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적 개혁을 주도하였다. 스칸디나비아 3국의 연합체 구성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오스카르 1세는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틀어졌던 덴마크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1848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하자 덴마크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스카르 1세가 주창했던 스칸디나비아 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간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1859년 7월 8일 오스카르 1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칼 15세는 부왕의 숙원이었던 스칸디나비아 3국 동맹을 실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에 대한 지원이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권의 관심은 4계급 신분제 국회를 양원제로 전환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칼 15세는 왕권의 제약을 체감하면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개혁조치를 성공시킨 자유주의자이기도 하였다. 미술과 문학에 심취했던 칼 15세는 로비사 왕비를 먼저 보내고 후사가 없이 4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다한 불운한 국왕이었다.
오스카르 2세는 1872년 9월 맏형 칼 15세에 이어 즉위한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가의 네 번째 국왕이다. 오스카르 2세의 재위 기간 중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이 해체되고,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보수주의자였던 오스카르 2세는 보수주의적 정책을 시도하였으며 약화된 왕권의 회복에도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정치적 화두는 의회민주주의의 정착이었기 때문에 오스카르 2세의 보수주의적이고 전제주의적인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즉위한 1870년대의 스웨덴에서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되던 시기였다.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으며, 동시에 계몽의 시기였던 오스카르 2세의 재위 기간을 종종 ‘오스카르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스카르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구스타프 5세가 1907년 12월 8일 베르나도테 왕가의 다섯 번째 왕위에 올랐다. 구스타프 5세는 재위 기간 중 양차 대전을 치르면서 혼돈과 격동의 시기에 오로지 스웨덴 국민의 안녕과 스웨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반러-친독 외교노선은 수차례에 걸쳐 내각과의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스웨덴은 구스타프 5세와 내각의 공조 아래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구스타프 5세의 재위 기간 중인 1932년 페르 알빈 한손의 사민당 내각이 들어서면서 스웨덴 복지제도의 기본 이념인 ‘국민의 집’의 근간이 마련되었으며, 구스타프 5세는 스웨덴 국민들로부터 ‘국민의 집의 국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걷히고 유럽의 재건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1950년 10월 29일 구스타프 5세에 이어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베르나도테 왕가의 여섯 번째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되었으며, 평화의 시기에 재위했던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는 상황에 따라 진솔하고 노련하게 대처하여 국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구스타프 아돌프 6세는 아마추어를 넘어서는 수준의 고고학자였으며, 첫 부인과 사별 후 재혼해야 했고, 첫 번째 왕자를 항공기 사고로 잃은 불운한 가장이기도 했다.
1973년 9월 15일 칼 구스타프 16세가 조부 구스타프 아돌프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현재까지 재위하고 있다. 칼 구스타프 16세가 즉위한 다음 해 스웨덴 국회는 그동안 미루어 왔던 정부조직법을 통과시켜 국왕의 모든 정치적 권한을 박탈하였다. 헌법에 의해 정치적 행위와 의사 표시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세계 최초의 국왕으로서, 칼 구스타프 16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가의 국왕 중 최초로 평민과 결혼하였으며, 왕세녀 빅토리아 공주를 비롯한 그의 세 자녀 모두 평민과 결혼하였다. 스웨덴 국회는 또한 1980년 왕위 계승법을 개정하여 남녀 관계없이 장자우선 승계의 원칙을 적용하는 유럽 최초의 절대 장자계승제를 도입하고 이를 소급적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칼 필립 왕자의 왕위 승계는 무효화되었고, 누나인 빅토리아 공주가 칼 구스타프 16세의 뒤를 이을 왕세녀로 결정되었다.
칼 구스타프 16세는 2015년 현재 69세로 42년 가까이 재위하고 있으며, 왕세녀 빅토리아 공주는 38세이다. 칼 구스타프 16세의 장기 재위에 대한 국민들의 지루함과 식상함이 왕세녀 빅토리아에 대한 높은 대중적 지지도와 맞물리면서 스웨덴에서는 칼 구스타프 16세의 조기 양위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일부 여론은 칼 구스타프 16세 역시 일반 국민들과 같이 65세에 정년퇴임하고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이미 2012년에 65세의 나이를 넘겼다. 일부 여론조사에 의하면 스웨덴 국민의 40~50% 정도가 칼 구스타프 16세의 조기 양위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입헌군주제의 폐지를 요구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있긴 하지만 스웨덴 왕실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는 70% 정도로서 대체적으로 보아 스웨덴의 국왕은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세녀 빅토리아 공주의 결혼식 행사
왕세녀 빅토리아와 다니엘 왕자는 2010년 6월 19일 결혼하였다. 왕세녀 부처가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에 축하 인파에게 손을 흔들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