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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bsburg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16~17세기 유럽 근대의 반()종교개혁의 선봉장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의 문장

 

외국어 표기 Habsburg(영어), Hapsburg(영어), Habsburgo de España

시기 1516~ 1700

지역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원과 몰락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경 슈바벤 남부 지방에 스타르스부르그 주교가 세운 성()에서 가문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돌프 1세 시기인 1273년부터 왕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291년 루돌프 왕의 사망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권력에서 멀어졌다가 1438년 알베르트의 즉위로 다시 합스부르크 왕가가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유일 왕가로 남겠다는 희망은 1740~ 1745년을 제외하고는 1806년 프란츠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기 2년 전인 1804,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나폴레옹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후 라인연방을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는 빈체제를 통해 4대 강국으로 인정받았으며, 1867년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을 건설하였다.

1908,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합병되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914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카를 1세 황제의 조카였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민족의 독립을 바라는 보스니아의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망명했다. 그는 공식 퇴위를 거부했지만 수백 년의 권력을 행사한 영광스러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예우를 받으며 1919년 출국당했고, 카를 1세 출국 후 오스트리아 의회는 공식적으로 그를 폐위시켰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2241일 포르투갈령인 마데이라 섬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왕가로서는 수명을 다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정복고를 주장하던 카를 1세의 아들인 오토 합스부르크 대공 역시 2011년 사망하였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명맥은 현재 오토의 아들인 카를 합스부르크가 잇고 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원과 몰락

 

카를로스 1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를로스 1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에 들어온 것은 그보다 먼저이다. 결혼을 통해 스페인을 통일한 카스티야 공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공국의 페르난도 왕을 가톨릭 공동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가톨릭 공동왕의 후손 중 성년으로 살아남은 후손은 후아나 라 로카가 유일했다. 스페인의 계승자가 될 후아나 라 로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미남왕펠리페 1세와 결혼하였다. 이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는 페르난도 왕과 후아나 라 로카, 펠리페 1세의 공동 왕위로 승계되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1세가 병으로 사망하자 단독으로 스페인을 다스리게 된 페르난도 왕은 딸 후아나 라 로카 대신 외손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1세를 계승자로 정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1516년 사망하였다. 스페인의 귀족들은 외국인 왕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했으나 카를로스 1세는 차례로 귀족과 공국의 충성서약을 받으며 1516314일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1세는 1518628, 유럽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전쟁 없이 친가와 외가의 상속만으로 엄청난 영토를 소유하게 된 카를로스 1세 덕분에 스페인은 유럽의 변방국가에서 하루아침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근대라는 시간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공간의 모순적인 두 축은 스페인 제국을 서서히 파열시키기 시작했다.

가톨릭을 수호할 임무를 갖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1세는 근대를 대표하는 종교개혁을 이끄는 루터파와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으로 타협하고 그 이듬해 퇴위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동생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에게 양위하고 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상속하였다.

카를로스 1세로부터 제왕교육을 받으며 자란 펠리페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의 온전한 스페인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던 선왕 카를로스 1세 시대의 영토보다 오히려 더 확장되었다. 선왕이 그랬듯이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보호자로서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또한 통치 면에서는 스스로 관료제의 정점에 올라 새로운 국가 제도를 스페인에 정착시키고자 했다. 그는 공공 행정을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이는 정치권력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따라 유럽을 떠돌아다닌 선왕 카를로스 2세 시기와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치세 말년이 되면서 관료제는 부패되고 느려졌으며, 제국의 서류더미 속에서 혼란에 빠진 채 국가 제도는 마비되어 갔다. 종교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펠리페 2세의 대외 정책 때문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맞선 무적함대의 전투, 이후 80년을 이어간 네덜란드 독립전쟁 등 큰 전쟁들이 촉발되었다. 서구 근대사의 거대한 흐름에 맞서려던 펠리페 2세의 노력은 필사적이었으나 역부족이었다.

펠리페 3세는 정치에 무관심했다. 스페인과 갈등관계에 있던 주요 국가들(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과 평화협정을 맺어 외부와의 충돌을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고자 했다. 그는 공적인 정치 시스템보다는 사적 권력인 레르마 총신에게 권력을 맡겼다. 레르마 총신과 그 일가들이 추진한 평화정책은 재정위기 속에서 지출 감축을 위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권력자들의 평화와 게으름을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펠리페 3세의 평화정책은 결국 온 유럽이 참전한 마지막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1618~ 1648)으로 깨지고 말았다.

30년 전쟁에서 스페인은 남아 있는 마지막 부를 쏟아부었으나 전쟁의 주도권을 잃기 시작하면서 결정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3세의 무능으로 통화정책은 실패했고, 이로 인한 재정위기가 닥치면서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종교정책도 실패하였다.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이슬람교도였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 30만 명을 추방하였는데 이는 상그레 림피에사’(종교적 순혈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종교 동화정책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펠리페 4세는 이전의 레르마 총신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총신과 함께 정치를 이끌었다. 펠리페 4세와 총신인 올리바레스 백작은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통해 전쟁 중심의 대외 정책 동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재정지출 감소를 위해 평화 중심의 대외 정책을 추구한 선왕 펠리페 3세 시기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연합군제와 그란 메모리알 프로그램 등은 동시대 중앙집권 경향의 유럽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지방자치의 경향이 강했던 스페인에서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바르셀로나와 포르투갈은 분리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포르투갈은 결국 펠리페 4세 사망 3년 후인 카를로스 2세 시기에 독립을 쟁취했다. 펠리페 3세 시기에 스페인과 휴전했던 네덜란드 역시 전쟁을 재개하여 80년간의 독립전쟁을 끝내고 스페인에서 독립하였다.

30년 전쟁 역시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도권을 다시 획득할 것을 걱정한 강대국 프랑스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스페인은 패전국이 되었다. 특히 30년 전쟁의 패배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은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도 이 패배를 재앙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펠리페 4세는 펠리페 2세 전통의 새로운 버전이었으나 스페인의 국력이 펠리페 2세 시기보다 훨씬 더 약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을 잃고, 영국과 프랑스에 패해 유럽의 주도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다.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그는 왕위를 물려줄 후세가 없었기 때문에 향후 스페인의 왕위계승은 유럽 왕실들의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카를로스 2세가 맞이했던 두 왕비와 그가 치른 두 차례의 퇴마술조차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스페인 왕위계승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의 치세 기간 내내 여느 때보다 치열했던 궁중 음모와 암투 역시 현재의 권력보다는 카를로스 2세 사후인 미래의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카를로스 2세 시기에 스페인의 구조적인 위기가 정점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 스페인은 경제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폭넓은 지방자치의 허용으로 당대에 카탈루냐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장 훌륭한 왕으로 꼽혔던 것을 보면 카를로스 2세가 통치능력이 없었다는 기존의 통념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카를로스 2세 시기의 수많은 총신 중 탁월했던 이는 오로페사 공작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 연대를 통해 스페인을 외부세력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오로페사 백작의 개혁 시도는 스페인 밖의 거대한 두 가문의 막후 조종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필리프의 대결은 필리프 파의 승리로 끝났다. 카를로스 2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두 가지 선택지에서 국익 측면에서 차악인 필리프를 고르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끝나고 부르봉 왕가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십자군 전쟁과 세속 전쟁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이 유럽 동부의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이었다면, 스페인의 십자군 전쟁은 이베리아반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이었다. 유럽은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중세의 두 기둥인 가톨릭과 봉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곧 다가올 근대를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1492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십자군 전쟁인 재정복 운동에서 승리하면서 중세적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스페인에 새로운 왕으로 부임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유럽에서 한물간 유행인 가톨릭 십자군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종교개혁을 통해 새로 쏟아져 나온 개신교도들이 카를로스 1세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들의 주적이었다.

루터파와의 전쟁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1세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해 루터를 출석시켰고, 자기비판을 강요했으나 루터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루터는 신앙의 근거가 교회나 공의회가 아니라 성경이라고 공언함으로써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오스만 튀르크의 유럽침공 때문에 1526년 슈파이어 국회에서 일시적으로 루터파를 인정했던 카를로스 1세는 1529년 다시 루터파를 금지했다.

여기에서 개신교도들은 항의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프로테스탄트는 루터파 외에도 가톨릭교도가 아닌 새로운 기독교를 의미하게 되었다. 개신교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자 카를로스 1세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을 맺고 루터파 세력과의 공존을 확인했다.

아버지인 카를로스 1세로부터 엄격한 제왕교육을 받은 펠리페 2세 역시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선왕처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스페인 중심의 정치적 관심을 갖고 있었던 펠리페 2세는 종종 르네상스 황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대체로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종교정책을 고수했다. 특히 종교가 우선이다로 요약되는 펠리페 2세의 대내외 정책은 정치 혼란과 재정 혼란을 야기하곤 했다.

네 차례의 국가파산의 원인은 대부분 영국, 네덜란드, 오스만 튀르크와의 종교 전쟁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펠리페 2세의 부인이었던 가톨릭의 메리 여왕이 죽은 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였다. 그녀는 영국의 종교를 개신교로 바꾸었으며,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라는 펠리페 2세의 요구를 여왕은 거절했다. 결국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의 퇴위를 목적으로 1588년 무적함대를 보냈지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로도 두 번 더 영국에 무적함대를 보냈지만 영불해협의 기상악화 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칼뱅주의 신도들이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의 식민지 네덜란드는, 총독의 폭정과 종교재판 때문에 전국적인 소요 끝에 1568년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은 이후 80년간 이어졌는데, 17세기 초 자본주의 체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스페인에게 부담이 되었다. 한편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튀르크가 베네치아 공화국을 공격하자 교황청에서는 펠리페 2세에게 성전에 참여할 것을 부탁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교황청, 베네치아, 제노바와 연합해 신성동맹을 결성하고 1571, 지중해 최대 해전이었던 레판토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유럽에서 오스만 튀르크라는 위협적인 요소가 사라졌다.

평화정책을 펼쳤던 펠리페 3세는 영국과 1604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독립전쟁을 선언한 네덜란드와는 스페인 국고의 반 이상을 탕진한 후에야 1609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펠리페 3세가 퇴위하는 1621년까지 12년간 평화를 지속했다. 그러나 평화정책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3세는 1618년 발발한 30년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처음 보는 대규모의 국제전이자 마지막이 될 종교 전쟁이었다. 보헤미아의 신교도와 이를 탄압하려는 오스트리아의 종교 분쟁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독일을 무대로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이 개신교 편으로 참전하였으며, 스페인은 스피뇰라 장군이 전쟁 초기 잇단 승리를 거두며 고무되었다. 그러나 30년 전쟁은 펠리페 4세 시기에 프랑스가 개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펠리페 4세는 평화정책을 지향했던 펠리페 3세 시대 대신 호전적인 펠리페 2세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다. 펠리페 4세의 대외 정책은 권력을 되찾고 지난날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30년 전쟁을 이어갔고, 네덜란드와의 휴전 연장없이 전쟁을 재개했다. 스페인의 대외 팽창정책의 재개는 결과적으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안겨주었다.

선왕 시절에 시작된 네덜란드와의 휴전이 종료되자 펠리페 4세는 네덜란드와 다시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자 협상을 결렬시키고 전쟁을 재개했다. 전쟁 초기 펠리페 4세는 브레다 등의 요충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1635년 프랑스가 30년 전쟁에 참전하면서 네덜란드와의 전쟁도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선왕 때인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에서 1631년 최초로 개신교 군대인 스웨덴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가톨릭 동맹은 뇌르틀링겐에서 1634년 스웨덴 군대를 패퇴시키면서 승리의 추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맹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자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동맹이 우세해지자 유럽의 주도권을 프랑스가 장악하기 위해서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1639년의 두나스 패배, 1642년 로크루 패배, 1647년 랑스 패배로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패배는 명확해졌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사되어 스위스가 독립하고 칼뱅파 등 종교적 관용이 가능해졌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네덜란드를 잃었으며, 유럽의 세속통치권을 행사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은 300개가 넘는 작은 주권국 연합체로 전락했다. 또한 마지막 대규모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전국이 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4세는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한 스페인 버전의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펠리페 4세의 뒤를 잇는 카를로스 2세의 스페인 영토를 천천히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상속으로 대규모 영토를 획득한 채 시작되었다. 유럽 내에서는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도발하지 않았지만 보유하고 있던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카를로스 1세는 3단계의 제국정책을 실시했다. 스페인의 정복자인 코르테스는 1519년 아즈텍 제국을 점령하였고, 정복자 피사로는 1533년 잉카제국을 점령했다.

이 신대륙 점령은 이단 세력에 맞서기 위한 전쟁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엄청난 금과 은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1540년 카를로스 1세는 내 스페인 영지가 아니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그는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는 여섯 차례의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은 대를 이어 펠리페 2세와 앙리 2세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펠리페 2세는 1580년 포르투갈을 병합하였으며, 그 덕분에 아시아의 일부 국가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평화의 왕펠리페 3세 재위 초기,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반()스페인 정책을 펴자 스페인은 프랑스와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1610년 앙리 4세가 사망하자 양국의 긴장은 겹사돈 혼인으로 해소되었다. 영국과의 관계도 초기에는 적대적이었으나 선왕 펠리페 2세와 앙숙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1604년 사망하고 제임스 1세가 집권하면서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이탈리아의 독립 시도도 1617년 평화조약으로 정리되었다.

펠리페 4세 시기, 30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스페인은 카탈루냐 문제로 프랑스와 11년간 더 전쟁을 이어갔다. 1654년 발렝시엔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프랑스의 평화 제의를 거부했다. 영국과 연합한 프랑스는 1655년 자메이카를 점령하고 두나스와 뒹케르크의 승리로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결국 스페인은 1659년 피레네 평화조약에 서명하였고, 유럽에서 스페인의 주도권은 공식적으로 소멸한 것과 다름없었다.

펠리페 4세 시기의 또 다른 세속적 성격의 전쟁은 포르투갈 독립전쟁이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과거 식민지가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 점령당하고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고 군수물자가 징발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스페인은 1663년 아메익살에서 패배하였으며, 펠리페 4세가 사망한 1665년 비야비시오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결국 카를로스 2세가 집권한 지 3년 후인 1668년 리스본 조약으로 독립을 이루어냈다.

카를로스 2

 

카를로스 2세 시기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전성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스페인은 주로 프랑스의 침입을 받았다. 국토 반환 전쟁으로 시작된 프랑스와의 전쟁은 1668년 아헨 조약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후로도 1673년의 전쟁과 1678년의 니메가 평화조약으로 스페인은 프랑슈콩테, 부르고뉴, 발렝시엥, 부쉥, 캉브레, 이에프로 등을 잃었다. 루이 14세는 1683, 니메가 조약 불이행을 문제 삼아 코르트레이크, 딕스뮈드를 점령했으며, 1684년에는 요충지인 룩셈부르크도 점령했다.

카를로스 2세는 1684년 프랑스와 레겐스부르크 휴전조약을 맺었으나 루이 14세는 1689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여 지중해, 안티야, 캄포르돈, 우르헬 등을 점령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합스부르크 동맹을 조직하여 1697년까지 프랑스와 세 번의 전쟁을 치렀으나 결국 1697920일 프랑스와의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라이스윅 협정을 맺었다. 카를로스 2세 시기 프랑스와 맺은 네 번의 협정 모두는 프랑스가 승리한 후에 맺은 평화협정이었다. 결국 카를로스 2세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왕위계승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로 넘어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 정책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계승자로 아들만 인정했고, 그중에서도 적자만 인정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권력과 영토는 계승자만이 유일하게 상속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특히 권력이 다른 가문과 분할되지 않도록 족내혼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혼인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카를로스 1세의 배우자는 포르투갈의 이사벨이었다. 이사벨은 스페인을 통일한 가톨릭 공동왕의 셋째 딸인 마리아, 즉 카를로스의 이모인 마리아의 딸이었다. 펠리페 2세의 경우는 더 드라마틱하다. 그의 왕비는 총 4명이었는데 첫 번째 부인인 포르투갈의 마리아는 고모의 딸이었고, 두 번째 부인인 영국의 메리 여왕은 가톨릭 공동왕의 넷째 딸인 카탈리나의 딸이었다. 세 번째 부인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타는 자신의 아들 돈 카를로스의 약혼자였으며, 네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안나는 자신의 여동생 마리아와 작은아버지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2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펠리페 3세의 왕비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였는데, 그녀는 작은할아버지 페르난도 1세의 손녀딸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대공 카를 2세의 딸이었는데 카를 2세의 형이 막시밀리안 2세였다. 펠리페 3세의 첫째 딸인 안 도트리슈는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결혼했으며, 셋째 딸인 아나 마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했다.

펠리페 4세는 두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첫 번째 부인이 부르봉의 이사벨이었다. 카를로스 1세의 동생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가 그녀의 어머니였다. 자식들은 모두 요절하였고 막내딸인 마리아 테레사만 살아남아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했다. 두 번째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여동생인 아나 마리아의 딸이었다. 따라서 루이 14세의 어머니는 펠리페 3세의 딸이자 펠리페 4세의 누나였으며, 루이 14세의 부인인 마리아 테레사는 펠리페 4세의 딸이었다.

카를로스 2세의 첫 번째 부인은 오를레앙의 마리아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이며, 그는 펠리페 4세의 누나인 안도트리슈의 아들이었다. 두 번째 부인은 네오부르고의 마리아나였는데, 카를로스 2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네오부르고의 마리아나의 큰 형부인 레오폴트 1세의 누나였다.

이렇게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정략혼으로 이용해 세력을 넓히기보다는 자신들끼리의 족내혼을 선호하였다. 족내혼은 열성유전자를 유전하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특징인 긴 얼굴, 긴 목, 주걱턱, 합죽이 입은 대를 거듭하면서 더욱더 강조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카를로스 2세의 경우 심한 주걱턱에 부정교합 때문에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였고, 스프나 물 등의 액체류는 제대로 삼키지 못해 밑으로 흘러버리곤 했다.

 

스페인 문화의 황금 세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시기를 문화적으로는 황금세기라고 일컫는다. 문학과 회화 등 모든 영역에서 천재적 예술 창작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학가들이 꼽은 가장 훌륭한 문학작품인 돈키호테가 출판된 시기도, 미술관장들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인 <라스 메니나스>가 세상에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문화는 지배 이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재생산된다. 특히 역사는 어떤 방식이든 문자를 통해 세계를 재현한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시기는 인쇄술이 보급되고 문자 해독률이 이례적으로 60%가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문학과 연극이 왕과 가톨릭이라는 지배 이념을 반영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대중문화의 집단성은 문화적 동질성을 강화시켰고, 이념적 정체성을 체험시켜 주었다.

엘 그레코, 성의 박탈

 

당시 가톨릭 신비주의는 가톨릭의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이단에 빠지지 않으면서 진부한 일상(선행, 의무)에서 벗어나 신에게 더 가까워졌다. 직접적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프로테스탄티즘과 동일했다. 그래서 교회의 신비주의는 일반 민중의 가슴에 직접적인 경험과 체험을 통해 내적인 신앙심을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킴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을 대치하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신비주의 시인인 산타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다른 적절한 비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한다.” 따라서 대표적인 신비주의 시인인 산타 테레사나 산 후안 데 라 쿠르스의 시는 매우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상징을 갖고 있었다. 당대의 대중 연애시와 비견될 정도였다.

스페인의 연극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을 은폐하고 제국을 공고화하는 선전 수단으로 크게 활용되었다. 스페인 바로크 연극의 완성자인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역시 <성체신비극>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연극으로 재현했다. 그들이 작품에서 드러내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지배층의 이익과 체제 순응적인 이념을 유포했다. 신부이자 종교재판소의 관리였던 로페 데 베가는 2,200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왕권의 신비화와 영웅화를 이끌어내면서도 연극을 궁궐에서 민중으로 접근시켰다.

매너리즘의 대표적인 화가 엘 그레코는 정신성을 표현하여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로서는 추상예술에 가까운 그림으로 가톨릭 엘리트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이후 한동안 잊혀졌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반()종교개혁 시기의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신앙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 미술의 가장 뛰어난 컬러리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엘 그레코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은 이후 스페인 바로크 화가에게도 전수되었다. 예수회 창시자인 로욜라는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시각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했는데, 이러한 경향이 스페인 바로크 미술에 잘 드러나고 있다. 리베라, 수르바란, 무리요의 그림은 신성을 나타내는 빛으로 눈에 물기가 어린 천상의 황홀감을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인 카르바조의 사실주의를 넘어 표현하고 있다.

스페인 음악의 황금 세기는 르네상스 시기에 펼쳐졌다.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르네상스 시대 종교음악의 완성자이며, 프란시스코 게레로는 신비주의적인 음악으로, 그리고 크리스토발 데 모랄레스는 국제적인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돈키호테1, 초판

 

그러나 한편으로 문화는 세속화의 반영이기도 했다. 당시 스페인의 세속문화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광대한 영토에서 영향받은 것들이 많았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르네상스, 바로크 문화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수입되곤 했다. 유럽의 소설은 스페인에서 태어난 장르라는 지적도 있는데, 근대소설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악자소설 중 그의 삶과 불행(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는 근대 풍속소설의 효시로 꼽히며,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인 라셀레스티나(La Celestina)는 근대적 사실주의 소설의 원형으로 주목받는다.

케베도는 바로크적 과장이 내용, 즉 풍자로 나타난 시인으로 볼 수 있으며, 티르소 데 몰리나는 펠리페 4세를 모델로 삼아, 오늘날 바람둥이의 원형인 돈 후안(펠리페 4세의 서자)을 주인공으로 한 세계적인 소설을 쓰기도 했다. 특히 16051부가, 16152부가 출판된 돈키호테는 작가 세르반테스 자신이 제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관료, 즉 세리 출신이었고, 작가 자신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해서 팔 하나를 잃기도 했다. 돈키호테는 근대성을 대표하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작품에 드러내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종교화도 그렸으나 처음부터 일상에서 소재를 구했으며, 그의 작품에는 술 취한 농민이나 노파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받으며 현대에도 회화뿐 아니라 기호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탈구조주의 등에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아 논쟁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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