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 왕가
중앙정부 체제를 구축한 정복왕조
노르만 왕가의 문장
시기 1066년 ~ 1154년
외국어표기 The House of Norman, Norman dynasty
지역 잉글랜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노르만 왕통의 기원
노르만 왕가는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령과 1066년 노르만 정복 후 1154년 플랜태저넷 왕가 이전까지 잉글랜드를 지배한 가문이다. 시발점이 되는 롤로(재위 911년 ~ 927년)는 데인족으로 911년 샤를 3세로부터 노르망디 공작령을 얻었다. 같은 족속이었던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족과 프랑스에 정착한 데인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고, 잉글랜드의 데인족은 프랑스에 정착한 데인족을 프랑스인이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데인인이 문화적으로 허약한 잉글랜드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특색을 보존할 수 있었다면, 노르망디의 데인인은 프랑스화한 로마문명과 접촉해서 놀랄 만한 속도로 라틴 정신의 침투를 받게 되었다.
10세기 노르망디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용화되었다. 노르만인들은 대륙의 기사도 의식과 계급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군사적 방어의 목적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제가 발달했다. 노르망디 지역은 11세기까지 엄격한 질서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노르만 정복은 이러한 대륙의 문화가 노르만인들을 통해 잉글랜드로 유입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노르망디가 프랑스 왕에게 신하의 맹세를 한 공작이 지배하는 공국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정치는 프랑스의 정치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았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더욱 더 깊어졌다. 1066년 노르만 정복은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지배의 문을 열었고, 그 다음 왕조인 앙주 가의 정복(1153년 ~ 1154년)은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문화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 왕위계승 전쟁과 1066년 노르만 정복
고해왕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에드워드의 왕비 에디스의 남동생인 토그티그와 헤롤드 고드윈슨, 노르웨이 왕 해롤드 하드라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왕위 경쟁에 나섰다.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5일에 사망했을 때, 60명의 강력한 귀족들로 구성된 현인회의는 웨섹스 가문의 헤롤드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고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했다.
혈통상으로는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아들인 에드거 애델링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더 적당했지만 현인회의는 어린 에드거보다는 강력한 귀족 헤롤드를 왕으로 선택했다. 이에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이 진정한 후계자임을 자처했고, 노르망디의 제후들에게 보상을 약속하며 전쟁에 돌입하였다.
윌리엄은 헤롤드가 노르웨이 왕 하드라다와 남동생 토스티그의 연합군을 무찌른 후 힘이 빠져 있는 틈을 노려 헤롤드군을 살육했다. 이 전투를 통해 대륙 기병대의 우월성이 증명된 셈이다.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그림
노르만 왕가의 통치 : 봉건제의 기초 마련
정복왕 윌리엄은 앵글로 색슨의 마지막 왕인 고해왕 에드워드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인정받으며, 앵글로 색슨족의 저항 없이 잉글랜드를 지배하고자 했다. 윌리엄은 자신이 노르망디 출신의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참회왕 에드워드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대관식에서 고해왕 에드워드 통치기의 앵글로 색슨 법을 지키고 웨섹스 왕들의 전통에 따라 잉글랜드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결과 인민법정은 계속 관습법을 시행하였지만 사법권은 대륙의 관습에 따라 성속(聖俗)으로 분리하였다.
정복 초기에 그는 앵글로 색슨족의 제도와 업적을 융화하며 잉글랜드에서 세력을 잡으려고 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지배를 위해 앵글로 색슨의 제도를 계승하는 온건 정책을 취한 반면, 요크셔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원정으로 맞섰다. 한편 앵글로 색슨족의 저항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조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윌리엄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의 첫 번째 과제는 정복지 잉글랜드를 지배할 군대와 군대들이 머물 성을 축조하는 것이었고, 용병들을 모집하여 적은 수의 노르만 세력으로 잉글랜드의 정복을 가능케 하는 일이었다. 노르만족의 약탈과 탄압 때문에 앵글로 색슨족의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외세의 침입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윌리엄은 성을 계속해서 축조했고 용병을 필요로 했다. 용병을 유지하기 위해 또 계속해서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야 했다.
교회의 축성으로 정통적인 권위를 획득한 윌리엄은 제일 먼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지역과 인접한 지역을 자신에게 충성했던 대제후의 봉토로 모두 하사하였다. 이는 보상의 뜻 이외에도 켈트족의 소요에 의해 불안한 국경 지역을 완충지대로 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윌리엄은 대제후들이 봉토로 하사받은 영지를 그들의 봉신들에게 재분봉할 수 있게 조치함으로써 각각의 기사가 하나의 봉토를 안정적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봉건제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사법권을 정리한 윌리엄은 정치를 담당한 지배계층에서 잉글랜드인을 축출하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숙청작업은 아주 철저하게 진행되어 1086년 작성된 『둠즈데이 북(Domeseday Book)』을 보면 정복 후 20여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당시 앵글로 색슨 계통의 잉글랜드 귀족 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귀족은 단 2명에 불과했고, 윌리엄으로부터 토지를 수여받은 대제후 200여 명이 잉글랜드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다스렸다. 이들 대제후 200여 명은 대부분 노르만인으로서 정복왕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지도층을 정비한 윌리엄은 1070년경부터 교회의 주교와 수도원장을 노르만인으로 교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앵글로 색슨인을 주교나 수도원장에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인민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와 수도회마저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현인회의를 대체하는 조정(朝廷)을 도입했고, 유력한 노르만 제후들에게 각자의 신민에 대한 경찰재판권이 부여되었으며, 대제후에게는 교수대를 가질 수 있는 권리도 주었다. 그리고 1086년 윌리엄은 대제후들에게 분봉받은 봉신들을 소집하여 직속 주군에 대한 충성보다 왕인 자신에 대한 충성이 우선하는 충성서약을 하게 함으로써 11세기의 혼란스런 유럽 대륙에 비해 평화스럽고 질서 잡힌 왕국을 만들 수 있었다.
둠즈데이 북
둠즈데이 북의 한 페이지 (워윅셔 지방)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잉글랜드 정복 20년 후 1086년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을 기록한 『둠즈데이 북』의 편찬에 의해서다. 1086년 윌리엄은 자신과 대영주들이 잉글랜드에서 소유한 부를 파악하기 위해 각 주에 조사관을 파견하여 토지의 소유자와 경작자, 토지의 면적과 가치, 가축과 쟁기의 수 등 장원의 실태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이 조사는 너무도 철저하게 시행되어서 한 하이드(hide 60~120에이커), 소 한 마리, 심지어 돼지 한 마리조차 조사에서 누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둠즈데이 북』을 통해서 국왕은 장원의 일 년 수입을 계산하고 이것을 토대로 영주들에게 봉건제 의무를 부과할 수 있었다.
윌리엄 1세는 『둠즈데이 북』의 기록을 통해 앵글로 색슨 시대의 토지 귀족들을 축출하고 노르만 귀족 사회의 지배구조를 달성할 수 있었다. 약 4,000~5,000명의 앵글로 색슨인들이 그들의 토지를 빼앗겼다. 토지 총수입의 절반가량이 새로 부상한 노르만 영주들에게 돌아갔으며 4분의 1은 왕실로, 4분의 1은 교회와 고위 성직자에게 돌아갔다. 1만 명에 달하는 왕족과 고위 성직자들, 노르만 영주들이 150만에서 200만에 이르는 앵글로 색슨인들은 지배하게 된 것이다.
노르만의 정복은 잉글랜드의 거의 모든 자유민들을 농노의 신분으로 전락시켰다. 농노는 장원의 토지에 매여 있고 매주 3일의 주 부역은 물론 특별 부역의 의무도 졌다. 매년 일정한 현물 공납과 영주가 임의로 부과하는 타이유를 지불하고, 딸이 결혼하면 혼인세를 내고, 보유지를 이어받는 상속세도 물어야 했다.
그들은 농사가 잘되면 밀과 보리로 연명하고 흉년이 들면 굶주림에 허덕였다. 노르만이 정복하면서 노예들의 지위가 상승하여 농노가 되었는데 노르만인들은 노예보다는 농노가 더 이용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둠즈데이 북 시대는 소수 지배층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지배한 사회구조라고 볼 수 있다.
노르만 왕가의 정치적 안정
윌리엄과 그의 제후들은 잉글랜드 정복이란 거창한 사업의 동업자였다. 그들은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잉글랜드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협력하였다.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에도 색슨족의 반란이나 데인족의 침략을 몹시 경계하였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윌리엄이 귀족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의 우려와는 달리 색슨족의 반란이나 데인족의 침입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오랜만에 평화스런 시기를 맞이하였다. 정복왕 윌리엄은 21년 동안 준엄하고도 효율적인 수단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윌리엄 2세가 사냥 중에 의심쩍은 죽음을 당한 후 바로 왕위에 오른 헨리 1세는 학식이 풍부했고 법률적 조예도 깊었다. 귀족들의 반란을 평정한 헨리 1세의 치세는 평화로웠으며 이 태평 시대를 통해 왕국을 정비하였다. 그는 탁월한 법률가로 왕의 법정은 대단한 발전을 이루며 봉건 법정을 많이 개선했고 왕국의 중앙행정기구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졌다.
노르만 왕조의 세 왕인 정복왕 윌리엄, 윌리엄 루푸스, 헨리 1세는 질서를 확립했고 교회와 군주 양쪽이 만족할 만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국가재정의 조직화와 사법제도의 개혁을 완수했다. 왕이 보장한 평화는 이전 왕가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군주제도의 최고의 영광이었고 이 업적이 15세기 군주제도의 승리를 보장하게 되었다.
무정부 상태와 마지막 후손들
헨리 1세의 적자인 윌리엄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오는 길에 난파사고로 사망하자 비탄에 빠진 헨리 1세는 자신의 딸인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는 귀족들의 신하로서의 맹세를 받는 데 성공하지만 마틸다를 제프리 앙주 백작과 재혼시키자 많은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헨리 1세 사후 19년간 지속된 무정부 상태는 잉글랜드인들에게 강력하고 공정한 정부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런던 시민과 일부 귀족들은 정복왕의 외손자인 스티븐파와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파로 양분되었다. 스티븐은 선량하기는 했으나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유약한 군주였다.
신과 천사들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정의가 자취를 감추고 있던 잉글랜드에서는 이 사태를 타개할 열렬한 열망이 있었다. 1152년 부친이 사망한 후 앙주 백작이 된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가 아들을 잃고 상심한 스티븐과 합의를 한 뒤,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자 헨리는 헨리 2세로 등극하여 플랜태저넷 왕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