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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Wessex

웨섹스 왕가

 

잉글랜드 통일 국가 출현의 초석을 마련한 왕가

 

웨섹스 왕조의 문장

 

외국어 표기 House of Wessex(영어)

시기 519~ 10세기 초반

지역 잉글랜드

 

웨섹스 왕조의 기원

 

4~6세기경에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따라 잉글랜드에 들어온 앵글로색슨족 중 체르딕과 킨릭 등은 남부 해안을 통해 들어와 템스강 상류에 거주했다는 설화가 있다. 체르딕 일파는 웨섹스 왕국을 건설, 와이트섬을 점령하고 마운트 바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에 관한 사료는 매우 드물다. 8세기에 노섬브리아의 수도사 비드가 쓴 영국민의 교회사9세기 말 알프레드 대왕의 치세가 기록되기 시작한 앵글로색슨 연대기정도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웨섹스 왕조는 먼저 주도권을 잡은 캔트 왕국 및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머시아 왕국과 영토 확장 경쟁 관계를 이루며 점차 서쪽으로 세력을 확대해갔다.

 

그리스도교 수용과 웨섹스 왕국의 발전

 

잉글랜드에 침입했을 무렵 앵글로색슨족은 게르만적 특질을 많이 지니고 있었던 야만인들로서, 약탈과 살인과 겁탈 등을 자행했다. 그들은 호전적인 전사들로서 오로지 영웅적 행동과 주군에 대한 충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주군에 대한 충성 맹세와 전쟁의 승리, 주군의 전리품 수여를 통해 세력관계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통일 국가의 형성을 요원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7~9세기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앵글로색슨족의 일곱 개 왕국이 브레트왈다, 즉 앵글로색슨 왕국의 군소 왕들로부터 공납과 충성을 맹세 받는 한 명의 유력한 왕을 중심으로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웨섹스 왕조에도 9세기 초 즉위하여 머시아를 정복하고 서리, 서섹스, 캔트, 에섹스 등의 주도권을 확보하여 브레트왈다로 인정받았던 강력한 왕 에그버트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지배권은 아직 확고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침입을 막아낼 강력한 군주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이교도 왕들은 6~7세기 무렵 각기 다른 경로에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잉글랜드에서의 통일 국가 형성은 좀 더 수월해졌다. 그리스도교가 제공하는 사회적 규율과 비폭력, 상속권 확립, 국왕의 권위에 대한 순종 등의 가르침은 군주의 권위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웨섹스 왕국은 켄월 왕부터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교를 수용했다.

로마 교회의 영향에 따라 웨섹스 왕국에 주교와 주교구 등 통일된 교회 조직이 세워졌다. 평화왕 에드가나 고해왕 에드워드 등은 수도원을 건립하는 일에 힘썼다. 왕과 교회는 밀접한 유대관계를 통해 상호 권위를 유지하는 데 협력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점차 강력한 중앙정부의 출현에 접근해갔다.

머시아 왕국의 전성기 때의 영토

 

머시아 왕국의 발전과 웨섹스 왕국의 관계 모색

 

노섬브리아 왕국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7세기 전반에 이어 8세기 무렵에는 머시아 왕국의 세력이 절정기에 이르렀다. 머시아 왕국의 펜다 왕은 노섬브리아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오스왈드를 굴복시키고 노섬브리아를 수중에 넣었으며 점차 영토를 확장해갔다.

이 시기에 머시아 왕 펜다가 굴복시켰던 노섬브리아의 오스왈드의 대자 키네길스, 펜다의 딸과 결혼했다가 왕비를 내쳐 펜다로부터 추방당한 켄월을 제외한 웨섹스의 왕들은 대체로 머시아 왕국과 맞서지 않고 그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머시아 왕국은 그 대가로 웨섹스 왕국에 통치권을 크게 행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머시아 왕국의 번성기에 웨섹스 왕국은 비교적 독립성을 인정받으며 영토를 관리할 수 있었다.

머시아 왕국이 글로체스터셔와 옥스퍼드셔의 북부를 지배할 동안 웨섹스는 템스 강과 에이번 강 이상 북진하지 않았다. 또한 관할 구역의 심장부인 햄프셔, 버크셔 등의 행정구역 체계를 정착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로써 이들 행정구역은 오늘날까지 잉글랜드 전역의 지방행정 체계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머시아 왕국 전성기에 웨섹스 왕국은 독립성을 존중받으며 행정구역 체계도 정비할 수 있었다.

브리스톨 성당 벽화에 새겨진 알프레드 대왕

 

바이킹의 침략과 알프레드 대왕

 

8세기의 에그버트 왕은 머시아 왕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위대한 브레트왈다로 인정받았다. 그 무렵 이미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략이 시작되었다. 851, 엄청난 바이킹의 군대가 350대의 배를 타고 템스 강 어귀에 도착했다. 바이킹은 머시아 군대를 무찌르고 웨섹스도 침공했다. 그러나 에그버트 왕의 아들 에델울프의 격파로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이는 잠시 유보된 것일 뿐, 바이킹의 침공은 8~9세기 무렵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에델울프의 네 아들은 차례로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에델울프의 네 번째 아들 알프레드 대왕은 절체절명의 시기에 가장 적합한 군주였다. 그는 형 에델레드와 함께 바이킹을 몇 번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실패로 한때 웨섹스를 지키기 위해 데인족 바이킹에게 금전을 지불하며 타협하기도 했다.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서머셋의 늪지로 몰려 피신하기까지 하면서 알프레드 대왕은 데인족을 막아낼 효과적인 전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몇 달 뒤, 그는 군대를 모아 에딩톤 전투에서 데인족을 격파했고 점차 웨섹스에서 이스트 앵글리아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알프레드 대왕은 군 조직을 개편하고 큰 배를 건조하여 해군의 위상을 높여나갔다.

한편 평화의 시기에는 파괴된 앵글로색슨족의 문명을 재건하고 법률을 정비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을 복구하고 학문을 진흥했으며 앵글로색슨 연대기편찬을 장려했다. 알프레드 대왕의 사후 후손들은 선조의 위업을 이어받아 데인족의 침략을 막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 결과, 에델스탄(재위 924~ 939) 왕 재위 때 잉글랜드 북쪽이 웨섹스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0세기 후반에는 웨섹스 왕조의 주도하에 잉글랜드 통일 왕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웨섹스 왕가의 몰락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들은 비교적 선대왕의 과업을 잘 완수했다. 그러나 평화왕 에드가의 아들 에델레드(재위 979~1016) 이후 웨섹스 왕조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델레드는 준비되지 않은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무능한 왕이었다. 그는 평화의 대가로 데인족에게 소위 데인겔드라는 것을 지불했는데, 이는 농민들에게 토지에 대한 세금의 형태로 부과되어 큰 부담을 지웠다.

11세기 초 덴마크 왕 스웨인이 잉글랜드 전역을 침공하자 에델레드는 노르망디로 피신했고, 스웨인은 웨섹스 왕국의 왕이 되었다. 1014년 스웨인 사망 후 에델레드는 다시 복위했으나 그가 죽은 후 왕위는 스웨인의 아들 크누트(재위 1016~ 1035)에게 넘어갔다.

이방인 크누트는 데인인과 앵글로색슨인을 융합하는 정책을 썼다. 그는 교회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재위 기간 동안 웨섹스 왕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의 서거 이후 왕권은 다시 혼란을 거듭한 끝에 헤롤드 고드윈선(재위 1066~ 1066)에게 넘어갔다.

이에 반발한 노르망디 공 윌리엄(재위 1066~ 1087)의 반란으로 왕위를 둘러싼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왕위에 오른 프랑스 왕 필리프 1세가 윌리엄에게 협조하고 로마 교황마저 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면서 윌리엄은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헤롤드가 제거되고 정복왕 윌리엄이 왕위에 오르면서, 웨섹스 왕조는 외국 왕조의 시대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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