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올 왕가
스코틀랜드의 수치
발리올 왕가 문장
외국어 표기 House of Balliol
시기 1292년 ~ 1296년
지역 스코틀랜드, 서유럽
발리올 왕가 존 왕의 즉위
존은 더럼 주의 바나드 성 영주 존 왕과 겔러웨이 영주 알란의 딸 데보길라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데보길라의 어머니는 윌리엄 1세의 조카였기 때문에 존은 외가 쪽으로 스코틀랜드 왕가와 먼 친척뻘이 되었다. 또한 어릴 때 형의 죽음으로 윌리엄 2세 통치 시절 왕으로부터 하사받았던 친가 소유의 모든 영지와 군사력을 상속받아 잉글랜드의 막강한 유지가 되었다.
이후 어머니로부터 스코틀랜드의 겔러웨이 영주권까지 물려받음으로써 존은 스코틀랜드 내외로 거대한 영향력을 손에 쥐었다. 그는 1281년 2월 9일경 서리 백작이었던 존 워렌느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었다.
알렉산더 3세의 갑작스런 죽음과 더불어 알렉산더의 직계 자손부터 외손녀였던 마거릿 여왕까지 모두 세상을 뜨자 스코틀랜드 왕좌는 공석으로 남았다. 존은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 내에서도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멀게나마 왕가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당시 왕위를 두고 경쟁했던 12가문 중 가장 유력한 왕위 후보자가 되었다. 당시 존 외에도 윌리엄 1세의 동생 데이비드 집안에는 애넌데일의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있었는데, 캐릭 백작과 손잡은 그는 겔러웨이 영주였던 존과 코민 영주의 경쟁 세력이었다.
스코틀랜드의 12가문 귀족들은 자국 내 내란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에게 차기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를 인물을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291년 5월 10일 노햄 성에는 에드워드 1세의 부름으로 스코틀랜드 12가문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의도와 달리 18개월에 걸쳐 논의된 스코틀랜드 왕위는 1292년 11월 30일 잉글랜드 왕에게 봉건 가신으로서 충성을 서약한 존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은 후대에 ‘대의(Great Cause)’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어렵게 쟁취한 스코틀랜드의 최고 통치권자의 권한은 잉글랜드 왕에게 다시 귀속되었다.
이후 존 왕과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두고 경쟁 구도에 있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손자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을 이끌며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왕가, 브루스 왕조를 탄생시킬 때까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속국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던 바녹번 전투에서 승리한 로버트 브루스, 즉 로버트 1세는 마침내 존 왕이 잉글랜드에게 치욕스럽게 내주었던 스코틀랜드의 자주권을 되찾았다. 존 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내어준 스코틀랜드의 자주통치권은 1328년 노샘프턴 조약이 체결되어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공식화되기까지 36년의 시간이 걸렸다.
발리올 왕가 존 왕의 폐위
존 왕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지만 그 권한과 영향력은 미비했다. 사실상 1286년 ~ 1291년까지 집권했던 이전 정부가 여전히 스코틀랜드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중요 사안들에 대한 결정권은 에드워드 1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 무렵, 북방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잉글랜드 영토를 공고히 하려던 에드워드 1세는 존 왕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전할 군사징집 명령을 내렸다. 에드워드 1세의 군사징집 요구는 1289년 ~ 1290년 마거릿 여왕과 에드워드 2세의 결혼 협약이 맺어질 당시 스코틀랜드 군사력에 대한 독립적 통제권을 인정한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존 왕은 프랑스와 일명 ‘올드 동맹(Auld Alliance)’ 협약을 맺고 에드워드 왕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또한 존 왕은 에드워드 왕에게 서약했던 가신으로서의 맹세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이는 스코틀랜드 왕을 마음대로 잉글랜드 법정에 소환했고, 잉글랜드에 있는 존 왕의 소유 영지와 물건들을 탈취했으며,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강제 구류시켰음을 그 근거로 삼았다. 이에 에드워드 왕은 크게 분노하여 잉글랜드 군대를 소집, 존 왕의 저항에 본격적으로 대응했다.
1296년 4월 27일 스코틀랜드 군대는 던바 성에서 잉글랜드의 서리 백작이 이끌던 군대에 처참히 패배했다. 패배 직후 존 왕은 북동쪽으로 달아났지만 얼마 가지 못해 몬트로즈에서 에드워드 왕에게 붙잡혔다. 3일 뒤, 존 왕은 브레친에서 왕위를 내려놓았고 자신의 무능함으로 인해 봉건 군주인 에드워드 왕에게 반역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스코틀랜드 왕의 모든 권한을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겨주었다. 퇴위 당시 존 왕은 왕의 예복을 걸치지 못한 채 아무런 무기도 소지하지 않고 무력하게 흰 지팡이만 들고 있었다. 이를 두고 후대 역사가들은 존을 ‘벌거숭이 왕’이라 칭했다. 이후 1306년 로버트 브루스가 스코틀랜드를 재건하기까지 10여 년간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공석으로 비어 있었다.
벌거벗은 옷과 부러진 홀에 초점을 둔 존 왕의 초상화 (1562년 작)
발리올 왕가의 윌리엄 월리스 왕
존 왕이 잉글랜드에 가신의 의무를 다하며 허수아비 왕권을 지키는 동안 스코틀랜드에는 ‘평민의 왕’이라 불리던 윌리엄 월리스가 있었다. 1274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앤드류 머리 경과 함께 1297년 9월 벌어진 스털링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무찌르는 등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또한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존 왕이 저지른 실책에 대해서는 비난했지만, 포로로 잡혀간 그를 귀환시켜 달라고 에드워드 1세에게 계속 요청했다. 1298년 7월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그는 국민의 승인과 지지를 기반으로 스코틀랜드의 총독으로서 맹활약했다. 패배 이후 프랑스로 도망쳤던 그는 1305년 8월 글래스고 부근에서 잡혀 런던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전설이자 영웅으로서 온 국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타국에서 유난히 잔인하게 처형당한 그의 말로는 비극 그 자체였다. 1305년 8월 23일 나체로 처형장까지 끌려간 월리스는 런던의 모든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사형 집행은 월리스의 목을 매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밧줄을 목에 감아 숨이 멎어가는 고통을 모조리 느끼도록 했고, 숨이 끊기기 직전 끌어내어 성기를 자르고, 몸통을 갈라 장기를 꺼내는 등 온갖 잔인한 수법이 그의 처형에 동원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사지가 찢긴 그의 몸통을 스코틀랜드 쪽에 여봐란듯이 걸어둠으로써 스코틀랜드 독립군에게 경고를 보냈다. 생에서 죽음까지 역동적이고 다사다난했던 그의 삶은 현대에 이르러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의 소재가 되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발리올 왕가 에드워드 발리올의 반란
존 왕의 장남 에드워드 발리올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한 로버트 1세가 서거하자 그 혼란한 틈을 타 잉글랜드 왕의 원조를 등에 업고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로버트 1세 서거 당시 왕위 후계자였던 데이비드 2세는 다섯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더글라스 경과 랜돌프 경 등 후견인이 그를 보필했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에드워드 발리올은 자신이 존 왕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3대 섭정 마의 백작을 물리치고 1332년 9월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3개월이 채 못 되어 그는 데이비드 2세 충신들의 급습으로 애넌 전투에서 대패하고 잉글랜드로 도망쳤다. 이후 1333년 할리던 전투에서 아치볼트 경이 또다시 잉글랜드 군대에 패배하면서 에드워드 발리올은 스코틀랜드 왕좌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버지 존 왕이 그랬던 것처럼 잉글랜드 세력에 힘입어 얻은 왕권인 만큼 잉글랜드에 스코틀랜드 통치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스코틀랜드 내에서 아무런 권력 기반이 없었던 그는 1336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1341년 데이비드 2세가 오랜 섭정기를 깨고 스스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게 되자 더 이상 왕권을 노릴 수 없게 되었다. 1367년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로써 2대에 걸친 발리올 왕조는 스코틀랜드를 제대로 통치해본 적도 없이, 독립심이 투철한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속국으로 전락시킨 왕조라는 오명을 짊어진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