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노트 왕국
아일랜드 중부의 강국
칸노트 왕국의 문장
외국어 표기 Kingdom of Connacht(영어)
시기 약 4세기 ~ 14세기 또는 15세기
지역 아일랜드
칸노트 왕국의 건국과 발전
칸노트는 아일랜드 중서부의 왕국이다. 칸노트 왕국은 오늘날의 마요, 슬라이고, 리트림, 골웨이, 로스코먼 지역에 걸쳐 있었고 왕국의 동부에는 샤넌 강이 흐른다. 칸노트 지역은 산이 많고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오랫동안 아일랜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다. 칸노트는 4세기 무렵 건국되어 천 년 가까이 존속하였다.
칸노트라는 이름은 콘막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콘막은 아일랜드 신화 속 인물인 메브 여왕의 아들이다. 칸노트의 왕 메브는 오늘날의 로스코먼 지역이자 당시 크루한을 근거지로 왕국을 통치했다. 여장부인 메브 여왕은 여러 명의 남편과 정부를 두었고, 그녀의 첫째 남편 알렐을 비롯해 다른 남편들은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칸노트의 왕위에 올랐다. 메브는 당시의 통념을 깨고 남편 못지않은 권세와 부를 누린 것으로 유명하다.
칸노트 통치 왕가의 역사는 브리언이라는 인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리언은 4~5세기 무렵 칸노트를 통치한 전설적인 왕이다. 브리언의 이복형제 중 니알이라는 왕도 아일랜드 역사의 전설적인 존재이다. 브리언 이후 칸노트의 통치 왕가는 오 브리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 브리언은 브리언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한편, 니알의 후손은 오 넬로 불렸다.
칸노트의 본격적인 가계도는 358년부터 366년까지 칸노트를 통치하고 아일랜드의 ‘대왕’(High King)으로 군림한 이오사이에서 시작했다. 칸노트는 5세기 초 가톨릭을 공식 인정했는데, 438년 사망한 두아흐는 칸노트 최초의 기독교인 왕이다. 칸노트의 통치 왕가는 973년 사망한 왕 콘코바르의 이름을 따 오 브리언에서 오 콘코바르로 이름을 바꾸었다.
칸노트의 전설적 인물, 메브 여왕
칸노트 왕국의 번영
칸노트의 흥망성쇠는 칸노트의 왕과 아일랜드 대왕의 관계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세기 초 칸노트는 플란 신나 대왕과의 동맹으로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플란의 뒤를 이은 니알 글룬덥과의 대립으로 왕국 북부가 크게 파괴되었다. 11세기에는 터렐라흐 오 브리언 대왕에게 칸노트의 왕 루어리 나 사데 비데가 폐위당했다. 터렐라흐의 후계자 미르헬타흐 오 브리언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11세기 후반에는 칸노트를 침공하였다.
타국 출신 대왕에 의해 운명이 좌지우지되던 칸노트는 직접 대왕을 배출하면서 비로소 전성기를 맞았다. 12세기 초 칸노트의 왕 터렐라흐 오 콘코바르는 미르헬타흐의 사망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아일랜드를 장악하고 대왕 자리에 올랐다. 터렐라흐는 경쟁 왕국을 분할 통치해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직접 격돌해 승리를 거둠으로써, 칸노트를 아일랜드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터렐라흐의 치세기 동안 칸노트가 거둔 가장 값진 승리는 1151년 쏘몬드의 왕 터렐라흐 오 브리언을 꺾은 것과 1154년 쳐들어온 함대를 맨 섬에서 무찌른 것이다. 국력 강화는 칸노트의 정신적 자산을 꽃피웠다. 터렐라흐의 지시로 아일랜드 제2의 도시 골웨이가 만들어졌고, ‘투암의 고(高) 십자가’ 등이 제작되었다. 이런 업적은 칸노트를 넘어 전 아일랜드의 문화적, 종교적 자산을 풍요롭게 했다.
칸노트의 전성기는 12세기 중후반까지 계속되었다. 터렐라흐의 아들 루어리 오 콘코바르는 아버지에게 칸노트의 왕좌와 대왕의 지위를 함께 승계하였다. 대왕에 오른 루어리는 1168년 아일랜드 중부의 탈튼에서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는 칸노트의 번영과 루어리의 입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정점으로 치닫던 칸노트는 루어리의 치세기를 겪으면서 서서히 하향세를 맞았다.
칸노트의 약화는 잉글랜드에서 온 노르만인의 아일랜드 상륙으로부터 야기되었다. 1169년 아일랜드 렌스터의 왕 디아마트의 요청으로 아일랜드에 당도한 노르만 군대는 전 아일랜드를 급속히 잠식했다. 칸노트는 갑자기 나타난 적과 1169년부터 6년 동안 혈투를 벌였다. 전쟁에 능한 노르만 군대를 맞아 루어리는 결국 항복하고 1175년 헨리 2세와 ‘윈저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루어리는 평화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전 아일랜드에 대한 헨리 2세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대왕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로써 아일랜드 최강국으로서 칸노트의 위상은 떨어지고, 아일랜드의 최강자 지위는 칸노트의 왕이 아닌 잉글랜드 왕의 차지가 되었다. 때문에 루어리는 아일랜드 역사상 실권을 쥐었던 마지막 대왕으로 여겨진다. 헨리 2세의 아일랜드 정복은 칸노트의 몰락과 함께 아일랜드의 몰락을 함께 가져왔다.
콩 사원에 새겨진 루어리의 조각상
칸노트 왕국의 몰락
13세기 초 전후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는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다. 1189년부터 1224년까지 칸노트를 다스린 카할 크로베르그는 잉글랜드의 존 왕을 아일랜드의 지배자로 인정하는 대신, 평화를 보장받았다. 카할 크로베르그의 아들 애드는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노르만 기사에게 살해당했다. 일국의 왕이 일개 기사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은 당시 잉글랜드 세력이 아일랜드로 얼마나 빨리 잠식했는지 극명히 보여준다.
1235년 노르만 영주 모리스 피츠제럴드는 칸노트와 잉글랜드의 평화협정을 위반하고 칸노트를 대규모로 침공했다. 노르만 군대는 칸노트 서쪽의 샤넌 강을 넘어 왕국의 심장부로 진격했는데, 펠리미는 이것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펠리미는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으나 이미 칸노트가 초토화된 후였다. 승리한 노르만인들은 칸노트의 왕 펠리미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영토를 서로 나눠 가졌다.
그러나 칸노트가 노르만인들에게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1249년 8월 15일 칸노트는 아덴리에서 노르만 세력 축출을 위한 일전을 벌였다. 칸노트의 군대는 아덴리를 포위했으나 노르만 영주 조던에게 격퇴 당했고, 이후 아덴리는 칸노트와 잉글랜드가 충돌하는 장이 되었다.
14세기는 아일랜드의 주권이 심각한 위협을 받던 시기이다. 잉글랜드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아일랜드의 왕들은 스코틀랜드에 지원 요청을 했다. 칸노트의 왕 펠리미 막 애다도 이들 중 한 명이다. 스코틀랜드의 왕이던 로버트 브루스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는 이 요구에 응해 아일랜드에 들어왔고, 1316년 5월 1일 아일랜드의 ‘대왕’으로 즉위했다. 같은 해 8월 10일 ‘제2차 아덴리 전투’가 발발했다. 제2차 전투는 1차에 비해 규모가 컸다.
잉글랜드 군대는 리차드 드 버밍엄, 리차드 드 버고라는 두 명의 리차드가 이끌었고, 아일랜드 군대는 칸노트를 비롯해 쏘몬드, 브레프니, 이 매네로 이루어진 연합군이었다. 결과는 아일랜드 연합군의 참패였다. 이 전투에서 사망한 아일랜드의 왕과 귀족은 칸노트의 왕 펠리미 막 애다를 포함해 총 56명이었다.
펠리미가 죽은 후, 칸노트를 300년 이상 지배해온 오 콘코바르 왕가는 오 콘코바르 루아, 오 콘코바르 돈, 오 콘코바르 슬라이고 3개의 가문으로 분화되었다. 이중 왕권을 잡은 가문은 오 콘코바르 돈이었다. 14세기 칸노트는 아덴리 전투의 대패와 왕가의 분화를 거치며 점점 내리막길을 걸었다.
1395년 4월 29일 오 콘코바르 돈 왕가의 초대 왕 터렐라흐는 워터포드에서 리차드 2세에게 공식적으로 항복 선언을 했다. 항복의 대가로 터렐라흐는 다른 두 왕가를 밀어내고, 칸노트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주권을 팔아 왕권을 산 것으로 반발이 심했다. 1406년 12월 9일 터렐라흐는 오 콘코바르 루어 가문의 카할 두에게 살해되었다. 이처럼 15세기 칸노트는 분화된 왕가 사이의 내분으로 국력을 소모했다.
15세기 전반에 걸쳐 칸노트 왕국은 점점 유명무실해졌다. 3개의 오 콘코바르 가문은 오로지 그들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영토를 지키는 데만 관심 있었다. 그들은 땅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그들의 지위, 권한, 심지어 왕의 직위까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칸노트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아일랜드의 오랜 통치 왕가인 오 넬과 오 브리언 왕가도 마찬가지로 통치자의 지위에서 내려오는 수순을 밟았다.
그리하여 1474년 사망한 펠리미 강카흐 오 콘코바르는 칸노트의 사실상 마지막 왕으로 평가받는다. 혹자는 1585년 사망한 디아마트를 마지막 왕으로 보기도 한다. 디아마트가 칸노트 땅에서 사법권을 마지막으로 행사했기 때문이다. 1570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피튼 경이 칸노트로 부임해 잉글랜드 법에 따른 사법권을 행사함으로써, 오 콘코바르 왕가는 모든 실권을 상실하고 칸노트 왕국의 역사도 완전히 막을 내린다.
칸노트 왕국의 유산
칸노트는 종교적으로 많은 유산들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아일랜드의 대왕으로 군림한 터렐라흐의 공이 컸다. 1123년 무렵 터렐라흐의 지시로 만들어진 ‘콩의 십자가’(Cross of Cong)는 끝이 뾰족하고 장식이 굉장히 화려한 아일랜드식의 가톨릭 십자가로, 1112년 가톨릭의 수도인 로마에서 온 ‘성 십자가’를 보관하고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은 이 십자가가 보관되었던 콩 성당(Cong Abbey)에서 왔다.
1123년 무렵 터렐라흐의 지시로 제작된 ‘콩의 십자가’ 아일랜드 국립박물관 소장
터렐라흐의 지시로 제작된 ‘투암의 고(高) 십자가’
중세 유럽 공예술의 걸작 중 하나로 알려진 ‘콩의 십자가’는 오늘날 더블린의 아일랜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터렐라흐의 또 다른 종교적 업적은 ‘투암의 고(高) 십자가’이다. 고 십자가는 중세 아일랜드와 영국 특유의 건축물로, 장식이 화려하고 돌로 만들어졌으며 높고 거대하다. 터렐라흐는 투암의 성당에 처음으로 대주교가 임명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고 십자가 제작을 지시한다.
카할 크로베르그의 명령으로 건설된 발린투베르 성당의 오늘날 모습
발린투베르 성당과 녹모이 성당은 12세기 말 칸노트를 지배하면서 총 12개의 성당을 세운 카할 크로베르그의 작품이다. 발린투베르 성당은 아일랜드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고딕 양식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일랜드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건축물이다. 그리고 1253년 펠리미의 지시로 로스코먼에 도미니크회 수도원이 세워졌다.
펠리미의 명령으로 세워진 로스코먼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의 오늘날 모습
오늘날 칸노트라는 이름은 과거 칸노트 왕국이 있던 지역의 주를 일컫는다. 현재 칸노트의 주요 지역은 아일랜드 제2의 도시로 불리는 골웨이이다. 골웨이는 칸노트 왕국의 대표적 유산 중 하나로, 터렐라흐가 1124년 샤넌 강 어귀를 중심으로 돌다리를 건설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성을 축조하고 항구를 건설해 탄생한 도시이다.
오늘날의 칸노트를 상징하는 깃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