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적대적 관계의 양국 지휘관

노르만의 윌리엄 대공

 

윌리엄의 부친인 로베르 대공은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의 둘째 아들로, 시골 처녀인 아를레트와의 동거상태에서 윌리엄을 낳았다. 먼저 윌리엄의 아버지인 로베르 대공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자. 로베르 대공은 둘째였지만 상속자인 형 라샤르 3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자 자연스레 공작령을 이어받게 되었다. 강력한 통치자의 자질을 갖고 있는 그는 '악마'란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봉신들의 복종을 차곡차곡 받아내면서 공작령을 튼튼히 하였다. 윌리엄의 기질이 바로 이런 아버지와 쏙 빼닮았다.

1031년 프랑스에서는 경건왕 로베르 2세가 죽자, 왕위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다. 노르망디를 봉토로 받은 프랑스 봉건영주이기도 한 로베르는 프랑스의 앙리 왕자를 편들어 다른 왕자를 지지하는 영주들에 대항하였다. 이후 앙리가 앙리 1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대가로 로베르는 파리 북쪽의 벡생 프랑세를 얻었다. 또 경건한 신앙인이기도 한 그는 당시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수도원개혁 및 교권정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게 되었는데, 1035년 예루살렘 순례에서 돌아오던 도중 갑작스레 병으로 죽었다. 로베르 대공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순례를 떠나기 전 자신의 대를 이을 자로 서자인 윌리엄을 지목해두었다. 그 결과 일곱 살이던 윌리엄은 별다른 진통 없이 자국 내 노르만 귀족들과 봉건군주였던 프랑스 왕 앙리 1세로부터 새로운 노르망디 대공으로 임명되었다.

윌리엄의 초기 통치는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자'라는 것이 항상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약점은 그를 강한 지도자로 만드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윌리엄은 15세가 된 1042년에 기사작위를 받고 자기 공국을 직접 다스리게 되면서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나타내게 되었다. 외형적으로 그는 표준보다 약간 큰 키인 5피트 8인치(1m 77정도)에 균형 잡힌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었기에 부정한 음식과 술은 절제했으며, 목소리는 거칠고 저음이었지만 언변 솜씨는 좋았다. 그는 1047년 프랑스 왕의 지원 하에 캉 남동부에 있는 발레뒨에서 자신에게 반대한 마지막 세력들을 격파한 후 명실 공히 그의 통치시대를 열게 되었다.

전투란 원래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기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칫하면 영토도 잃어버리고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이 전투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윌리엄은 이후 많은 전투를 하지만 항상 현지상황을 잘 고려하여 신중하게 전투를 치러나갔다. 윌리엄의 정복 과정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인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 길이 70m 51의 아마포에 수를 놓은 것)'에 묘사되어 있다시피, 헤이스팅스 전투에 앞서 그가 교황으로부터 전투의 정당성과 지원을 먼저 끌어내던 외교술이 그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또 윌리엄은 (봉건제도의 특성상 나타난) 성곽들을 공략하면서 성곽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최소한의 인명 손실로 많은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성곽 포위방법도 그만이 갖고 있는 노하우였다. 능선과 구릉에서 치러진 헤이스팅스 전투에는 해당사항이 적었지만 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그가 측근들을 통해 성곽을 잉글랜드 곳곳에 세운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 윌리엄은 정찰대의 가치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페번시에 착륙한 후 줄곧 헤럴드군의 위치와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정찰대의 역할 덕분이었다. 동시에 그에게 잔혹한 면이 있음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잉글랜드를 점령한 후 수년간 많은 반란을 접했지만, 그는 자신의 잔혹한 면을 십분 발휘하여 그러한 반란을 완전히 제압하고 그의 왕국을 제대로 열게 된 것이다.

 

 

잉글랜드의 헤럴드 2

 

고드윈의 둘째 아들이면서 생존 서열로는 첫째인 헤럴드가 왕위에 오르던 1066,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헤럴드의 어머니는 데인계 잉글랜드 왕이었던 크누트의 여동생 기샤(Gytha)이다. 여기서 그의 형제들의 이름이 모두 스칸디나비아 방식인 이유가 밝혀진다. 태피스트리의 묘사를 통해 전해진 그의 모습 중 특이한 것은 그의 콧수염인데, 이는 당시 잉글랜드의 최고 패션이 되었다고 한다.

군 지휘관으로서의 헤럴드의 전술은 1055년 웨일즈와 머시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익히 알려졌다. 그는 웨일즈 반란을 진압할 때 방어를 최우선책으로 생각하였다. 헤럴드는 반란군과의 접경 지역에 자신의 정예군을 두어 반란의 확산을 막았다. 점령되지 말아야 할 도읍(town) 주위에는 요새화된 자치구(burh)들을 조직하고, 그곳의 자치민들을 군사력으로 급조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이런 방어책은 반란군을 고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웨일즈와 동맹을 맺고 움직이는 머시아 반군들은 웨일즈 반군과 연계되지 못하면서 지리멸렬하였다.

이런 헤럴드의 전술은 1066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윌리엄의 노르만군이 상륙하기 쉬운 와이트 섬에 미리 군사력을 배치하여 노르만군을 기다린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방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술은 각본대로 진행될 때에만 큰 효과를 얻게 되며 그렇지 못한 경우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되기 십상이다. 헤이스팅스 전투에 앞서 헤럴드에게 딜레마로 다가온 토스티그와 동맹을 맺은 노르웨이의 호르로데의 칩입, 그리고 기후의 변덕스러움 등 모두가 그의 전술에 치명적 손실을 준 요인들이다.

헤럴드를 이야기할 때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저돌적이며 예민한 그의 기질이었다. 윌리엄은 헤럴드와 함께 한 브르타뉴 원정 때 이미 그의 기질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원정에서 헤럴드는 윌리엄이 치밀하게 계산하고 전투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무척 소심한 인물이라고 파악하였다. 이런 대립된 둘의 성격은 전투에서의 승패와도 깊은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다. 이 글의 후반부에 언급되겠지만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럴드의 마지막 실수는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 전술 때문이다. 사실 공격전술이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헤럴드의 경우가 유독 지적된 이유는 그 공격이 어떤 원칙하에 진행된 것이 아닌 자신의 혈기를 자제하지 못하고 시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