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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왕실 탄생의 개괄

유럽 왕실 탄생의 개괄

 

왕실 성립의 전제 조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유럽 왕실의 등장은 언제부터인가? 황제 중심의 정치체제를 기반으로 한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의 족장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로마 시가 점령당한 476년을 기점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로부터 2~3세기 동안 서유럽 전 지역은 어느 곳에서도 안정된 국가가 성립되지 못했고, 유럽 중북부에 걸쳐 부족단위로 생활하던 야만종족들의 선진문화권을 향한 대대적 이동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 야만종족들의 지리적 분포를 살펴보자. 먼저 로마문화를 가장 많이 흡수하면서 로마 본토와 가까이에 있는 종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켈트족의 일파로서 프랑스 땅 골에 정착한 탓에 ''족이라 부르며, 골의 라틴어 표기인 '갈리아'를 사용하여 '갈리아'족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음으로 갈리아족보다 지형적으로 더 위쪽에 분포되어 있는 종족들로서 갈리아족들에 의해 '게르만'으로 이름 붙여진 종족이 있다. 여기에는 고트족, 부르고뉴족, 반달족, 프랑크족, 색슨족 등이 속한다. 마지막으로 그들보다 더 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북 게르만' 또는 '바이킹' '노르만'이라 불린 게르만 일족이 분포되어 있다.

한편 이들 야만종족들의 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선진 로마문화를 흡수하여 자연적으로 국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5세기 이후의 유럽에서의 '국가'를 정의하자면, 일정한 영토와 그곳에 사는 일정한 주민들로 이루어져, 주권에 의한 통치조직을 지니고 있는 사회집단 또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특히 국가가 형성되던 초기 역사에서 '통치조직'의 의미가 왕과 그 집안인 왕실의 존재 여부와 밀접하다보니 '국가''왕국'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유럽 왕실의 등장은 반드시 유럽왕국의 존재 여부가 전제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국이 형성되었다고 왕실의 통치방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초기 유럽 왕실들은 당시 상황에 적합한 통치방식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봉토를 세운다는 뜻의 봉건제(feudalism)이다. 봉건제는 왕이나 왕실 귀족들이 영주에게 땅을 나눠주고 충성의 서약을 받는 계약관계이므로 서로가 어길 시, 맺어진 계약은 파기될 뿐 아니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된다. 결국 이를 막기 위해 왕실은 중재자가 필요했는데 당시 로마문화의 연결고리였던 기독교와 그 수장인 교황 그리고 교황청이 이런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제국 멸망 후 형성된 유럽 왕실은 자신들의 존재 여부와 '봉건제도' '로만가톨릭교 중심'이 밀접함을 인식했고, 점차 이들이 왕실의 정통성으로 내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왕실의 모체 : 프랑크 왕국

위의 왕실 성립의 조건들을 가장 먼저 수용하면서 첫 왕국의 모습을 드러낸 부족은 게르만의 한 종족인 프랑크족이었다. '프랑크'란 말의 뜻은 원래 '강인한 자' '용감한 자'를 의미했는데, 나중에는 '자유민'이란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3세기 말부터 로마에는 간혹 프랑크 해적 이야기가 나오곤 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는 프랑크족장 및 우두머리들을 잡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자들이 전사(戰士)인 로마 용병으로 활약하였기에 직·간접적으로 로마의 영향을 깊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가 망하자 이미 로마의 영향에 젖어 있던 프랑크족의 한 줄기인 투르네의 세일리족 지배자 클로비스는 15세에 족장이 된 후 481(또는 482)년에 주변 부족들과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494년경에는 갈리아 북부 전역에 이어 갈리아 남부의 서고트족 왕국마저 점령하면서 통일 프랑크 왕국의 모습을 만들었다. 이즈음 갈리아로마인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는 클로비스에게 이교도인 그이지만 로마인들의 공동체를 위해 일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서신을 보내었다.

당신은 순수하고 정직하게 호의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주교들을 존중하고 항상 그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즉시 당신의 영토는 번영할 것입니다.

부르군트족 공주 출신인 왕비 클로틸데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클로비스는 이를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496, 클로비스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레마니족을 격파하기 위한 똘비악 전투를 앞두고 "전투에 승리하면 기독교를 믿겠다"고 맹세하기에 이르렀다. 클로비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했고 마침내 그의 맹세에 따라 랭스에서 세례식을 갖고 교회로부터 프랑크의 왕이자 갈리아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랭스에서의 클로비스의 모습을 그려놓은 미술작품을 보면 장발족인 프랑크 전통에 따라 머리와 수염은 길게 기른 상태였다. 또 오른쪽 어깨 앞을 호크로 잠그고,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망토에 수로 장식된 소매가 달린 자줏빛 튜닉을 걸쳤다. 마치 로마황제와 같은 위엄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이때부터 '로만가톨릭교 중심'이 유럽 왕실의 한 정통성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게르만족들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종파로 판정받고 추방당한 아리우스파를 믿고 있었지만 프랑크족은 그때까지 다신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프랑크가 클로비스 때에는 로마문화를 확실하게 받아들이자고 결심했고, 멸망한 로마제국이지만 그 제국이 정통으로 인정했던 아타나시우스파의 기독교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프랑크족은 로마제국이 인정했던 아타나시우스파 교리를 먼저 받아들인 점에서 아리우스파를 받아 들였던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 확실히 구별되었고, 동시에 랭스 주교는 물론 여타 가톨릭 성직자들과 갈리아에 잔존한 로마인들의 지원도 전폭적으로 얻게 되었다. 얼마 후, 프랑크의 클로비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혈통이 세습될 수 있는 왕실을 세우고,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인 '메로비치'를 따서 명명된 메로빙거 왕조를 열게 되었다.

한편 메로빙거 왕조에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게르만 종족은 전통적으로 자녀들에게 소유한 땅을 분배해주는 '분할상속제'가 있다. '분할상속제'란 게르만족들이 부족단위로 생활할 때는 기존의 땅을 나누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으로 확대·발전시켜나가는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왕국이 성립된 시점에 이 제도를 시행한다면 왕국이 분할되고 동시에 왕권 약화가 초래되는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이런 '분할상속제'가 클로비스 사후 네 명의 아들에 의해 시작되면서 겨우 통일된 프랑크 왕국은 와해의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왕국 내에는 여러 분국이 생기고, 분국의 왕들은 서로 잦은 싸움을 벌였기에 상대적으로 각 분국 내 호족들의 세력은 현저하게 강해졌다. 다시 말해서 정치상의 실권은 프랑크 왕국의 각 분국들 내의 호족 출신이며 왕실의 살림을 맡는 관직이었던 궁재(宮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중 카롤링거가()의 궁재인 카를 마르텔이 가장 눈에 띄었다. 마르텔은 732년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침입해 온 이슬람군을 격퇴하여 유럽가톨릭교 세계를 보호하였다. 비록 최근에 비판적 견해가 있긴 하지만, 이슬람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토지를 봉토로 주는 대신 병역의 의무를 요구했던 마르텔의 프랑크 군제개혁은 '봉건제도의 기원'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이로써 명성을 얻게 된 마르텔은 737년 이후부터 메로빙거 왕조의 실질적인 실권을 장악하여, 그의 아들 피핀이 카롤링거 왕조를 열게 되는 기반을 구축했다.

750년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사절 2명을 보내 편지로 "다스릴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왕을 모시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다. 교황은 "통치 능력이 있는 왕을 갖는 것이 나을 것이다. 로마 교황의 권위로써 그대에게 프랑크의 왕위를 허락하노라"라는 대답을 보냈다. 결국 당시 유명무실한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리히 3세는 폐위당하여 수도원으로 보내졌으며, 피핀은 75111월 수아송에서 보니파키우스 대주교와 몇몇 성직자들에 의해 피핀 3세로 추대되었다.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실권은 피핀을 중심으로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으며,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기독교 문화의 영역에 속하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통합했다. 그리고 그는 800년 성탄절에 로마교구장으로부터 값진 보석이 박힌 황제의 관을 받으면서 '서로마제국의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장을 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샤를마뉴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카롤링거 문예부흥'이라 불릴 만큼 문화부흥에 힘써 프랑크 왕국 최대의 전성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 비결은 궁정문화의 응용에 있었다. 당시 궁정은 다양한 교육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문이 좋은 집안의 자녀들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상태로 궁정에 들어와 왕에게 특별한 맹세를 하고 왕실의 식구가 되었고, 이들은 왕실의 여러 법도와 실질적인 행정 등을 익히면서 왕실과의 유대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므로 궁정문화가 '유럽 왕실 성장의 초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사실은 메로빙거 사회에 유행하던 장발풍습이 샤를마뉴가 간편한 단발머리를 하기 시작하자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머리처럼 수염도 단정하게 길렀는데 이도 당시 사회에서 그대로 따라했다. 이는 왕실의 영향력이 사회에 미치는 정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며, 그 출발점이 샤를마뉴 때부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왕실 전통의 단면을 볼 수 있는 화려하고 격식에 찬 왕실 식사예절도 이때 즈음 시작된 것이 아닐까? 사실 샤를마뉴 때에는 접시나 포크, 냅킨 등을 사용하지 않고 고작 둥근 사발을 이용하여 식사를 했다.

, 부와 권위의 척도라면 사발의 재질이 나무인지 아니면 구리 또는 은, 금인지 하는 차이뿐이었다. 심지어 왕도 필요에 따라서는 딱딱한 빵의 중앙부를 파내고 그곳에 고기 스튜를 넣어 칼로 찍어 먹거나 숟가락으로 파먹는 정도였다. 따라서 샤를마뉴 때가 왕실의 정통성이 체계를 잡아가는 시기임은 분명하지만 정통성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이르다는 점을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본격적인 왕실 식사예절은 15세기 르네상스시기에 가서야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샤를마뉴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통치 때에는 언급되지 않던 '분할상속제'가 다시 언급되면서, 베르됭 조약을 기점으로 843년에 제국은 동(((西)프랑크로 분열했다.

여기서 서로마제국은 고대 로마제국과 달리 프랑크 왕국의 내면에 존재하던 게르만 전통인 분할상속제의 영향을 받았고, 이로 인해 문화는 공유하되 각각의 지역적 특성은 살아 있는 여러 왕국의 왕실들이 등장한 것이다. 오늘날 유럽 왕실이 다양하면서도 일정한 부분에서는 공통점이 있음은 이런 전통 때문이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

왕국의 분열 조짐은 이미 샤를마뉴 생전, 자신의 가족사에서 엿보이고 있었다. 샤를마뉴는 네 명의 합법적인 아내를 취했고, 홀로 된 때에는 적어도 여섯 명의 첩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결혼 전 젊은 시절엔 '히밀트루데'란 동거녀도 있었다. 왕과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피핀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 교황 스테파느누스 2세가 그를 왕실의 적자 대열에 올려주었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재산을 분배할 때 다른 아들들의 반대로 그에게 영토를 주지 못했고, 피핀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까지 일으켰다가 수도원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샤를마뉴가 통치하고 있을 동안에도 이러할진대, 정황으로 보아 이미 왕국의 분열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샤를마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1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수도원을 보호하고 성직자를 정계에 등용하여 로만가톨릭교 문화의 발전을 꾀하였다. 이로써 경건왕(敬虔王)이라고도 불렸다. 루트비히는 부친인 샤를마뉴가 자신과 형제들에게 상속을 해줄 때 생긴 잡음을 염두에 두고,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 '제국칙령(Ordinatio imperii)'이란 제도를 발표했다. 이 칙령에 의해 루트비히는 장남 로타르에게 제국과 제위를 물려주기로 정하고, 그를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먼저 명한 후 교황 파스칼리스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게 했다.

이어서 루트비히는 '로마 헌법(Constitutio Romana)'을 발표해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음을 확인하고 교황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했다. 또 차남 피핀은 갈리아 남부 지역인 아키텐의 분국왕, 삼남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의 분국왕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루트비히가 추진한 정책은 왕비가 죽은 후 재혼하여 네 번째 아들인 샤를을 얻음으로써 문제가 발생했다. 왕은 샤를에게도 상속을 주려고 '제국칙령'을 수정하려 했는데, 기존의 세 아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왕에게 반항한 것이다.

그러나 838년에 차남 피핀이 갑자기 죽자 자연스럽게 '제국칙령'은 수정되었고, 바이에른과 그 부근 지역은 삼남 루트비히에게, 그 나머지 부분을 둘로 나눠 동쪽은 로타르에게, 서쪽은 샤를에게 각각 돌아갔다. 또 루트비히는 로타르에게 황제 칭호는 허락하였지만 자신에게 반항한 죄를 물어 '제국칙령'에 준하여 주어졌던 다른 왕자들에 대한 종주권은 박탈하였다. 이런 그의 조처가 앞으로의 제국의 분리를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루트비히 1세가 프랑크 왕국을 약체화시킨 데 한몫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루트비히 1세가 생을 마감하자, 잠재해 있던 칙령 문제는 곧 왕자들 사이의 내란으로 발전되었다. 내란의 결과는 베르됭에서 왕국의 삼분을 약정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끝이 났다. 이 조약에 의해 로타르는 이탈리아와 중프랑크 왕국(부르군트·라인 마스 지방) 및 황제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루트비히는 동프랑크 왕국(라인 강 동쪽), 샤를은 서프랑크 왕국(론 강, 손 강)을 나눠 갖게 되었다. 그중 로타르는 이후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왕위와 영지를 넘겨준 후 프륌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 생을 마치게 된다.

한편 중부 지역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던 로타링겐(로렌)을 물려받은 로타르 2(수도원에 들어간 로타르 1세의 아들)가 자식이 없자, 삼촌인 동프랑크의 루트비히와 서프랑크의 샤를은 서로 만나서, 만약 조카인 로타르 2세가 죽으면 로타링겐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막상 조카가 죽었을 때, 샤를은 루트비히와의 약속을 어기고 로타링겐을 독단적으로 합병하였다. 이런 이유로 870년 루트비히와 샤를은 다시 싸우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메르센(네덜란드, 아헨 북서)에서 타협이 이루어져 로타링겐의 동쪽은 루트비히의 동프랑크, 서쪽은 샤를의 서프랑크가 차지하였다.

위에 언급된 몇 차례 분할정책을 통해서, 샤를마뉴 대제 때 부활한 서로마제국은 몇몇 분리왕국들의 성립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그중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이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왕국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왕실만큼은 샤를마뉴의 혈통 아래 단일 카롤링거 왕조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실 : 카페 왕조의 출현

870년의 메르센 조약으로, 중부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던 로타링겐이 동·서프랑크 왕국에 분할되었으며, 이로써 후일의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영토적 기초가 거의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프랑크의 경우, 북쪽 바이킹족의 침략이 잦아지고 봉건제도가 점차 정착되면서 지방 호족의 세력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카롤링거 왕조의 왕실 혈통들의 통치력은 쇠퇴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갈리아 혈통의 지방 호족인 파리백() 외드가 침략이 잦은 바이킹(서프랑크에서는 노르만인이라 부름)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비()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으로는 처음 서프랑크 왕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외드가 통치하는 동안 바이킹의 침략은 더욱 극성을 부렸고, 카롤링거 왕조의 지배권이 단절되는 것을 견제하려는 카롤링거 왕실 혈통들의 도전도 있어, 왕국 내에는 끝없는 분쟁이 지속되었다.

외드 왕이 죽자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면서도 너무 어려 그동안 배제되었던 샤를이 '단순왕' 샤를 3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외드의 동생 로베르는 비록 샤를을 왕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자신이 왕 이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베르는 911년 샤르트르에서 바이킹족을 물리치고, 그 해 말 생클레르쉬르레프트에서 조약이 체결되도록 주선했다. 이로써 그의 권력은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노르망디 지역은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그의 부하들이 통치하고, 그 대신 롤로는 가톨릭교를 받아들이고 샤를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봉신이 되었다. 이는 그동안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중세 봉건제도의 현실적인 출발점이 되었고, '로만가톨릭 중심'과 함께 유럽 왕실의 또 하나의 정통성이 성립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이 지역으로 출몰하는 바이킹들은 노르만인 롤로에 의해 차단될 수 있었다.

한편 샤를 왕은 이런 로베르의 능력을 견제하려 했고, 결국 둘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수아송 부근의 전투에서 샤를왕은 로베르의 추종자인 백작 에르베르의 포로가 되었는데, 정작 로베르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로써 갈리아족 출신이며 로베르의 사위인 라울이 서프랑크 왕에 뽑혀 수아송에서 왕관을 썼다. 라울은 외드나 로베르와 달리 처음에는 많은 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에르베르 백작은 라울의 주요 지지자였지만 다른 귀족들이 라울에 대한 지지가 약함을 파악하자 자신의 수중에 있는 샤를 왕을 빌미로 라울에게서 많은 이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샤를 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에르베르 백작을 비롯한 라울을 반대하는 세력의 힘은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라울의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이렇듯 라울은 우여곡절 끝에 왕권의 정통성을 겨우 정립하였는데, 그 시점에 불행히도 그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라울이 죽자 로베르 1세의 아들이자 외드 왕과 형제인 위그 르 그랑(Hugh le Grand)이 서프랑크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 왕(프랑스의 라울, 잉글랜드의 애설스탠, 독일의 오토)과 인척관계를 맺었었거나 또는 맺고 있었으며, 방대한 영토를 소유한 대영주였으므로, 쉽게 왕권을 맡을 수 있는 위치와 역량을 고루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그는 자신이 왕이 되기보다 왕의 배후에서 조종하기를 더 좋아했기에 폐위된 샤를 3세의 아들을 루이 4세로 내세웠다. 샤를 3세가 에르베르 백작에게 붙들려 감옥에 있던 동안 그의 어머니의 고향인 잉글랜드로 피신하여 머물던 루이는 뜻밖에 위그의 천거로 서프랑크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

한편, 루이 4세는 위그가 생각한 꼭두각시 군주가 아니었으며 위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리에서 랑으로 옮겨가 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루이의 재위 기간 내내 위그는 정치적으로 그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루이가 위그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자 정치적 분쟁은 수그러들게 되었고 위그는 다시 왕의 물망에 올랐다. 세간에서는 루이 때문에 곤욕을 치른 그이기에 이번에는 그가 직접 통치할 것이라고들 믿었다. 그러나 이런 추리는 빗나가고, 위그는 루이 4세의 어린 아들 로테르를 왕위에 앉혔다. 그렇지만 서프랑크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위그였음은 당시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위그의 그늘 아래 왕으로 올라선 루이 4세의 맏아들 로테르, 그리고 그를 이은 루이 5세의 불안정한 통치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종말을 불러들였다. 987년 루이 5세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자, 위그 르 그랑의 아들인 위그 카페는 아버지처럼 왕의 배후에서 조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프랑크 왕국에서 독립된 프랑스 왕국의 첫 왕실인 카페 왕조(987~1328)의 시작이다. 왕위에 오른 위그 카페는 여러 반란세력을 물리치면서 국가의 기반을 다져, 프랑스 왕실이 유럽 왕실의 한 축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독일(신성로마제국) 왕실 : 작센왕조의 출현

동프랑크 왕국도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영토적 기초가 대부분 이루어졌다. 동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의 전통적인 부족으로서 독립성이 강한 프랑켄·작센·알라마넨·바이에른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로 인해 루트비히의 카롤링거 왕실 혈통은 불안하게 출발하였다. 다행히 루트비히가 오랜 기간을 통치하게 되어서 동프랑크 왕국은 정치적 안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9세기 말 바이킹과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루트비히를 이은 왕들이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심지어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면서 동프랑크의 운명은 끝을 맞게 되었다. 이제 카롤링거가의 혈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왕위를 이어갈 최선의 방법은 동프랑크 내 4개 지방 게르만 부족이 회의를 해서 왕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방법이 채택되어 프랑켄 부족 대공이 콘라트 1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멸망하고, 여러 게르만 부족의 연합체 형식으로 새로운 왕국이 탄생하였다.

기대했던 콘라트 1세의 치세는 당대로 끝나고 이어서 작센 부족 대공인 하인리히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통치에 임하여 마자르인·바이킹·슬라브인 등 이민족의 침입을 격퇴시키면서 동프랑크 왕국이 해체된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하였다. 특히 그는 새로운 왕국의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인리히는 왕국 내 연합체인 여러 부족들이 각각의 독립성이 강함을 알기 때문에 이를 누르고 통일왕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은 오직 봉건제도를 통해 부족 권력자들을 제후에 봉하여 집권화하는 것뿐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인리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작센가의 오토 1세는 하인리히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왕권에 대항하는 부족세력을 억압하고 국왕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톨릭교회를 이용하였다. 당시 왕국 내부의 교회와 수도원은 실세가 있는 부족들의 침략을 받고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오토 1세는 이를 잘 간파하고 일단 교회의 호감을 사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부족들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고, 일부 왕실 토지를 교회 소속으로 돌려주었으며, 교회 자체적으로 수익사업을 할 수 있도록 조처해주었다. 또 왕실의 자제나 가신(家臣)을 주교, 대수도원장 등 고급 성직자의 지위에 취임시켜 국왕의 집안과 교회를 결합시켰다.

이렇게 자국 내 가톨릭교회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인 오토 1세는 로마교황과의 유대도 염두에 두었다. 왜냐하면 샤를마뉴가 교황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서로마황제 관을 쓰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에게도 이런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그런데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사실은 오토의 희망이었던 '교황의 요청'이 그의 생전에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당시 교황 요한 12세는 교황을 괴롭히던 현지의 귀족을 토벌하고 자신을 구해줄 것을 오토에게 요청해 왔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오토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교황의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였고, 이로 인해 962년에 교황의 주도 하에 로마에서 황제의 관을 쓰게 되었다. 이로써 카롤링거 왕조가 다시 일으킨 서로마제국에 이어 작센가에서 '신성로마제국'을 출현시켰으며, 이때부터 역대 독일국왕은 황제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신성로마제국을 연 작센 집안은 오토 2·3세로 직계상속하면서 프랑스와 함께 유럽 왕실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웨섹스 왕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프랑크 왕국이라는 한 뿌리 속에서 프랑스와 독일왕국이 갈라져 나와 각각의 왕실을 성립했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잉글랜드 왕실은 어떠한가? 다른 두 왕실처럼 왕실 성립의 공통조건을 갖추고 있었던가? 다시 말해 단일왕국으로서의 존재 여부, 그리고 유럽 왕실의 정통성인 '봉건제도''로만가톨릭교 중심'이 충족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잉글랜드에서는 단일왕국의 존재 여부가 쉽게 파악된다. 브리튼 섬의 중남부를 통합하여 단일왕국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앵글로색슨계 웨섹스 왕국의 앨프레드 대왕 때이다. 이때 국가 성립의 조건인 영토와 국민 그리고 통치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졌다. 특히 일곱 개 왕국이 하나의 단일왕국이 된 상황에서 앨프레드 자신을 에그버트로부터 시작된 8대 브레트왈다(Bretwaldas)라고 불렀던 것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비드의 <영국교회사>에 의하면 브레트왈다란 게르만의 일곱 개 왕국의 왕들이 차례로 모든 왕국을 짧게나마 대표, 통치하는 통합왕을 일컫는다.

그런데 하나의 왕국이 된 상황에서 앨프레드가 브레트왈다로 불린 것은 그가 실질적인 통치자임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잉글랜드 왕실의 성립까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데인족(영국에서 덴마크 지역의 바이킹을 부르는 말)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대단하였는데, 이런 모든 조건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앨프레드와 그 집안은 잉글랜드 왕실 성립의 주역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앨프레드 혈통의 왕실이 이후의 잉글랜드 및 영국 왕실을 대표한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앵글로색슨계 왕실의 전통을 보면, 왕은 고귀한 가문에서 나왔지만 위테나게모트(Witenagemot)라 불린 국가 평의회에서 선출되었기에 왕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이는 게르만 부족 전통이 남아 있는 것으로 프랑스의 카페왕조나 독일의 작센왕조 이전 프랑크왕국 정도의 수준에 머문 것이었다.

이런 정치체제 하에서는 앨프레드와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했을 때에는 왕의 혈통이 한동안 이어지겠지만 혹여 그 혈통에 문제가 생기면 위테나게모트는 즉시 왕실의 미래를 위해 개입하게 될 것이다. 사실 1016년 데인족의 재침입으로 앨프레드의 혈통인 에드먼드 2세가 살해되자 위테나게모트는 왕국의 존속을 위해 과감히 데인계인 크누트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따라서 앨프레드로 시작된 앵글로색슨계 단일왕국이 형성한 왕실이 진정한 영국 왕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명실상부한 영국 왕실의 탄생은 언제부터인가? 유럽 왕실의 탄생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프랑스나 독일왕실의 정통성인 '봉건제도''로만가톨릭교'에 편입했을 때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왕실의 일부인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대공이 브리튼 섬을 정복하려 시도한 1066'헤이스팅스 전투'야말로 영국 왕실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가 있다. 지금부터 위의 추정을 증명하고자 '헤이스팅스' 전투에 관한 몇몇 연구서들의 공통부분을 정리하면서 이 전투를 중심으로 한 전·후시기의 역사를 재구성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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