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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기형도 노을

김경희 뛰는 노을

김남조 노을

김명인 너무 무거운 노을

김용택 노을

김지하 노을 무렵

나태주 노을

나호열 - 노을

도종환 저녁노을

류시경 장밋빛 노을

마종기 고속도로변 노을

문인수 저녁노을 속에 서면

박영교 부석사의 노을

박영희 로리타의 붉은 노을

박우상 - 노을

박정남 노을

박형준 저녁노을

박호영 - 석양의 강물을 바라보며

배용제 노을 속에 잠기다

배용제 - 놀이터에서의 한때

서상만 -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노을

서정윤 노을

서정윤 노을 그림자

서정윤 노을 소리

서정윤 노을을 보며

서정윤 노을의 노래

서정윤 노을 편지

서정윤 노을 풍경

손광세 - 저녁노을

송반달 노을 격포

송수권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송수권 저녁노을

신경림 노을 앞에서

신용목 노을 만 평

안도현 저물 무렵

용혜원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유종인 - 노을, 붙들렸다가는 노을

윤보영 - 노을

이상국 저녁노을

이성선 노을 무덤

이성선 미시령 노을

이승하 - 이승의 노을

이양우 노을빛 기도

이정록 노을 부동산

이해인 저녁노을

장석남 노을

전은영 - 노을

정일근 몰운대(沒雲臺) 저녁노을

정태춘 장서방네 노을

정희성 새벽노을

조병화 노을

조옥동 - 황혼

조은길 노을에 물들다

조재도 노을

채호기 해 질 녘

천양희 노을 시편

최승자 노을을 보며

최영철 노을

최윤경 갈대밭 노을에서

최윤경 - 노을

한승원 노을

허형만 석양

홍수희 황혼이 질 무렵

홍해리 - 노을

 

 

 

노을

기형도

 

하루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 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 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뛰는 노을

김경희

 

가난한 산()동네 아이들의

그림 스케치북 속에는

그중 많이 주홍색 크레파스가

묻어나지요

일찍 일어나라고 솟는 해

줄넘기로 놀아주는 해

멀리까지 혼자 질 줄 아는 해

또한 제일 친하게

김칫국 냄새 같은 것만

알몸으로 경험하기 때문이죠

매워, 매워

녹슨 안테나 밑이 자욱해

바람이 혀를 불고 갈 때

아이들은 그걸 보고

또 까르륵! ……

아버지가 들고 오는

거나한 저녁달이 보일 때까지

 

 

노을

김남조

 

1

봄 한철 사람 하나가

몹시 사랑스러웠음이

깊은 죄가 아니라면

여름과 가을, 가능하면 겨울에도

황홀한 어질머리

이대로 이대로

선주홍 염료알갱이들이

가룻발로 분해되어

온 하늘에 자욱하길 빌지니라

 

불빛 돋우려 말고

으스름 밝음이나마

오래오래 불 혀이길

빌지니라

 

 

2

번개 치는 일보다

오만 배쯤 무섭고 황홀하게

서녘 하늘에 가로누운

저 사람,

태고부터 오늘까지

살기 위해 피 말린 이들의

진홍 피알갱이를

얼마나 많이

구름 속의 물과 얼음으로 반죽하여

저런 선홍을 입었을꼬

 

 

3

상사병 닯은

몸살 후

어질어질 하늘 바라보니

이거야말로

천하 첫째될

심각한

짝사랑 상사병이

너무 멀리서

너무 멀리서

붉은 눈시울로

이 깊은 땅을

굽어본다

 

 

 

너무 무거운 노을

김명인

 

오늘의 배달은 끝났다

자전거를 방죽 위에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 한 반달 한 장

입에 물고 늙은 우체부처럼

늦 기러기 한 줄

노을 속으로 날고 있다

피멍든 사연이라 너무 무거워

구름 언저리에라도 잠시 얹어놓으려는가

채 배달되지 못한

망년의, 카드 한 장

 

노을

김용택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눈부시게,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지는 해 아래로 걸어가는

출렁이는 당신의 어깨에 지워진

사랑의 무게가

내 어깨에 어둠으로 얹혀옵니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사랑은,

사랑은

때로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더이다

 

 

 

노을 무렵

김지하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행길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보고 있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 참새, 붉은 구름, 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 머언 거리의 노래 소리

노래 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 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노을

나태주

 

1

방 안 가득

노래로 채우고

세상 가득

향기로 채우고

내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떠나 버린 사람아

그 이름조차 거두어 간 사람아

서쪽 하늘가에

핏빛으로 뒷모습만

은은히 보여 줄 줄이야

 

 

2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 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노을

나호열

 

어둠끼리 살 부딪쳐 돋아나는

이 세상 불빛은 어디서 오나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서해 바다 가득한 노을을

끌고 돌아오는

줄포항 목선 그물 속

살아서 퍼득거리는

화약냄새

 

 

 

저녁노을

도종환

 

눈이 그쳤는데 그는 이제 아프지 않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내 아팠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동안

내 안에 저녁노을처럼 번지는 통증을 그는 알까

그리움 때문에 아프다는 걸

그리움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그리움은 혼자 남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눈은 내리다 그쳤는데

눈발처럼 쏟아지던 그리움은

허공을 헤매다 내 곁에 내린다 아프다

 

 

 

장밋빛 노을

류시경

 

하늘도 사랑을 하면

타는 속마음 숨길 수 없나 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마지막은 상처로 남는 사랑을 만나면

지붕 되어 품어온 온 세상 앞에서

붉은 눈물 흥건히 보이는 건

하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오늘의 쓰라림 오늘에 고이 묻고

아쉬움이라고는 없는 듯

돌아서며 처연히 침묵하고픈 건

하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속살 터뜨리는 피눈물이 흘러도

아픔마저 생의 아름다움으로 믿으며

내일로 향한 통로를 묵묵히 걸어가는

내 사랑법도 어느덧 하늘을

닮아가나 보다

 

 

 

고속도로변 노을

마종기

 

왼쪽으로 한동안 크고 넓은 노을이 타고 있었어

달리는 차에 가득 담기는 진한 핏빛의 무게

그 노을이 목소리를 내며 내 몸을 감았어

온몸의 그늘이 더워지는 어지럽고 난처한 힘

늦가을 나목의 긴 손들은 여기저기서 천천히

연기와 냄새만 남기는 낙엽을 어루만지며

멀리 떠나간 이나 잊힌 이름들을 찾고 있었어

 

그러니까 나는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거야

그날의 노을이 왼쪽에서 다시 나를 붙잡으면

평생 가보지 못한 길이라고 급히 방향을 돌리고

길들어지지 않은 몸만 들고 오라고 말해야겠네

나를 이끌고 가던 방향은 더 이상 상관이 없다

녹슨 고속도로는 고개 숙인 채 차들을 외면하고

멀리 보이는 낯선 건물들은 차게 식어간다

 

우주는 한 개뿐이라고 믿었던 시대가 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 아끼는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이제는 피곤한 뼛속에

다 숨어서 살 뿐, 아무도 찾지 않는 저녁의 집

삶의 이름이 아픔이란 것을 몰랐던 탓일까.

고속도로의 복잡한 매듭이 느슨히 풀어진다

남은 저녁이 노을의 끝을 잡고 달리고 있다

 

 

 

저녁노을 속에 서면

문인수

 

저녁노을 속에 서면 머리카락이 탄다.

타관에서 오래 나이만 먹었나니

검불 타는 냄새가 난다.

까까머리 까까머리

해만 지면 자꾸 불러들이던 어머니.

저녁연기 풀어올리던 굴뚝 생각이 난다

 

 

 

부석사의 노을

박영교

 

무량수전(無量壽殿) 댓돌에 앉아

푸른 내일 바라보면

벽화(壁畫)가 걸어 나와 귀엣말을 걸어온다

온몸 다

쭈그러드는 몸살 앓는 오랜 미소

 

바람개비 돌아가는

언덕배기 앉아보면

때 묻은 사람 냄새 씻어도 다시 들고,

휘어진

추녀를 보며 걸어온 길 돌아뵌다

 

지우면 살아나고

살아나서 또 흩어지는

돌계단 하나 하나가 무덤처럼 엎드려 있어

돌옷 핀

석탑 이야기 물소리에 그늘이 진다

 

()을 심고 떠난 사람

()을 업고 돌아오리

뜨는 해 노을이 되면 내 삶도 막불지피고

따끈한

온돌방에 앉아 자서전을 쓰고 싶다

 

 

 

로리타의 붉은 노을

박영희

 

귀로 듣는 건 팔 할이나

입으로 말하는 건 삼 할이 고작인

시어머니 핀잔에 눈시울 붉어지는

여자, 이 말은 하네

겨울은 싫어요. 필리핀에 없는 겨울은 너무 추워요

필리핀 북부 루손 마운틴주를 떠나온 뒤

십 년 다 지나도록

고향에 가지 못했네 입이 있어서 말은 하나

그 말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와

몸부터 섞은 여자, 버림받을까 두려워

아이부터 낳았다네

여자는 한숨 돌렸고

시어머니는 한시름 놓았다네

두려움에 떨며 낳은 남매에게

엄마랑 사진 한 장 찍을래? 하였더니

딸은 뒷걸음치고 엄마 닮은 아들은 몸을 숨겨버리네

여자의 눈시울 또 붉어지네

 

 

 

노을

박우상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대 눈빛을 보면

전해지는 시린 마음 깊게 잠긴 목소리

옅은 그 미소는 긴 하루를 보여주네

지친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애써 웃는 거 다 알아 난 항상 이 자리예요

어김없이 찾아올 보랏빛 노을처럼

비록 내 품이 좁더라도 안아줄게요

그대 없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빈자리

차오르는 공허함 몰아치는 빗소리

거친 바람에도 넓은 그늘이 되어주네

어떤 아픔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애써 웃는 거 다 알아 난 항상 이 자리예요

어김없이 찾아올 보랏빛 노을처럼

비록 내 품이 좁더라도 안아줄게요

안녕 내가 안아줄게요 편히 쉬어요

 

 

 

노을

박정남

 

가슴을 열어 젖힌 저 노을이

수심(愁心) 몇 개 구름도 흘리면서

하늘 한 켠에다 참았던

붉은 마음을

쏟아 놓는다.

익은 과일들을 너무 오래 간직한 탓에

온 산과 들에 향기 터뜨리고

이내 고요히 아주 검붉게 썩어 간다.

어둔 숲으로 과일들은 떨어지며

저 산 능선에다 다시 곱게 눈썹 그리며

여인은 땅에 눕는다

아직 검붉은 노을인 여인은 뒤척이는

바다를 감고

검은 눈을 빤히 눈뜨고

사과알의 검은 씨앗으로

세계의 정열을 한곳으로 모아

차차 붉은 햇무리 이글이글 끓어오르나니

밤새도록

 

 

 

저녁노을

박형준

 

알 속에서 이미 날개를 편 새

 

 

 

석양의 강물을 바라보며

박호영

 

흘러간 과거가

저처럼 빛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석양이 드러누운 강물

그 강물 위에서

웃음도 빛이 나고

눈물도 빛이 난다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긴 강물과

저물어도 아름다운 석양

 

그곳에선 슬픔도 기쁨도

다만 빛이 될 뿐이다

 

 

 

노을 속에 잠기다

배용제

 

파장동 횡단보도에 서 있는 저물녘

어쩌면 나는

유린당한 착란의 풍경

불이 꺼진 유리창 속에서만 어른거린다.

내 눈동자 속에서 한 무리의 새 떼가 솟구친다

이마에서 흘러나온 붉은 타르 같은 칠로 덕지덕지 번져가는 허공

벌써 뼈를 이룬 것들은 대지에 우뚝 검게 서고

모든 빛은 나의 내부로 들어와 죽는다

 

나는 어쩌면 유리창에 낀 먼지의 얼룩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이면지처럼 창백한 여자의 얼굴을 지나

구멍가게 시멘트 벽의 부서지는 모서리를 지나

불붙는 문들과 화려한 구멍들을 지나

돌아보면 도시는 모래의 유적

돌이켜보면 나는

저 아득한 고생대(古生代) 노을 속을 떠돌다

잠을 잘 때만 부스럭거리며 내 정체를 드러냈었지

 

나는 모래의 태반에서 기어 나온 몸

어쩌면, 정말 어쩌면

몇 번인가 뒤집힌 지층의 풍경, 불붙은 모래 먼지의 착란

속에서 한 어여쁜 아이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노을 속에 잠기다 잠깐 뒤돌아보면

 

 

 

놀이터에서의 한때

배용제

 

창백한 노을이 지고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놀이터에서 잠시,

놀다 정신없이 돌아간 아이들과

하루 분의 햇빛을 생각한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 벤치를 견디는 노인과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일어서는 부인들

어두운 쪽으로만 기우는 늙은 나무의 그림자

고딕으로 견뎌온 풍경들을 바라본다.

돌발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몇 마리 새가

바람의 경계를 넘어갈 때

 

살아서 어두워지는 것들도

어둡게 살아내야 하는 것들도

제각기 뿔뿔이 꿈의 그네를 흔들어야 할 시간,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물음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노을

서상만

 

덩구덩 북소리가 섞여 있다, 가죽회초리에 뚜들겨 맞아

게거품 물고 바다는 미쳐서

갈기갈기 제 옷을 찢어발겨 흔든다

한 무리 눈알 부릅뜬 소 떼 울고 간 저녁바다 물결 위에

시뻘건 노을이 엎질러져 뉘엿댄다

수만 번 불러도 말 못하는 것이 되어 끝없이 흘러가는

저 피 묻은 서쪽하늘

 

또 날이 저문다, 푸른 묘등 위로 길이 저문다

수평선 멀리 굼실대는 돛배 하나, 또 다른 저녁을 향해

한 점 먹물로 번진

겁 없는 목숨들의 징징거림도 보인다

 

가끔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차갑게 식었다가, 바람에

스스로 제 몸을 밝히는 먼 불국의 목어처럼

간기에 젖어 눈멀어버린

백발의 파랑을 치다가 어느 뭍으로 스며들어

하얀 소금꽃이 되고 싶은,

덩구 덩덩 북소리 들리면

바라만 보아도 찔끔찔끔 눈물 나는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 바다

 

 

 

노을

서정윤

 

누군가 삶을 마감하는가 보다

하늘에는 붉은 꽃이 가득하다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모습

흰 날개의 천사가

손잡고 올라가는 영혼이 있나 보다

유난히 찬란한 노을이다

 

 

 

노을 그림자

서정윤

 

그리하여 나는 그 슬픈 노래를 불렀다

노을 뒤에 희미해진 나무 그림자

함께 보낸 시간들이 별의 꿈으로 총총해지고

절망은 어둠과 더불어 나를 위로하고 있다

 

숨겨둔 어느 가슴의 불이 스러지고

비로소 나는 자유를 느꼈다

밤늦게 날아다니는 새의 날개로

꿈 속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살아야 했던 이유들조차

(마음에서부터 해방시킨다)

강을 건너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이 어둠을 가리지도 못하고

내 삶은 아직도 흔들리는 거기에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노을의 눈빛

생겼다간 사라지는

 

 

 

노을 소리

서정윤

 

소리가 유리컵에 고이면

아무도 소리를 가질 수 없고

혹은

우리가 유리컵이 되어

보이지 않는 소리로 출렁이면

그 하늘엔

빛으로 가득하다

 

무게없이 내리누르는

우리의 생은, 항상

얕은 구름

저녁마다 얼굴을 붉히면

은은한 빛을 따라 어느새

유리컴은 타오르는 황혼으로

우리들 가슴 아득한 곳을 적시고

눈길 아프게 느끼는 노을소리

누구도

소리를 슬프게 하지 않은 채

어딘가에서 생명이 날아올라

별을 반짝이고

어느덧 소리는 별이 되고

우리는 밤하늘이 되어

그 소리를 담고 있다

가슴 아득한 곳에

 

 

노을을 보며

서정윤

 

슬픔은 언제나

나를 보고 웃고 있다

고개를 돌리고 태연히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연이어 울리는 외로움의 소리

하늘 가득한 노을이

그 여름의 마지막을 알리고

내 의식의 허전함 위에

흐르는 노을의 뒷모습으로

모든 가진 것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고개를 든다

 

보이는 것을 가짐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가질 수 잇따고 생각하던

나뭇가지 끝에 머무를 수 없는 바람처럼

이제는

가지지 않음으로

내 속에 영원히 지킬 수 있다

 

 

 

노을의 노래

서정윤

 

내 그리운 하늘은 어디에 있나

그대 쓸쓸한 그림자와 함께

떠돌던 날들, 그 아득한

지쳐 바람처럼 떠나지 못하는

언제까지라도 이 고통은 계속되고

그만 벗어버리고 싶은 얼굴

내가 보듬어야 할 하늘은

늘상 바람과 함께 흔들리고

웃음과 다투어 온 날들

함께 할 수 있는 외로움

뭔가 깨뜨리고 싶은 날

부질없는 사랑은

안보이는 곳에서 꽃으로 피고

내 마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생명은 언제나 그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눈물로 보여지는 나는 아니다

 

 

 

노을 편지

서정윤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전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이렇게 노을에다 그립니다.

사랑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국,사랑할 수 밖에

다른 어떤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삶이기에

내 몸과 맘을 태워

이 저녁 밝혀 드립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게

두려울지라도

목숨 붙어 있는 지금은

그대에게 내 사랑

전하고 싶어요.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에

익숙하지 못하기에

붉은 노을 한 편에 적어

그대의 창에 보냅니다

 

 

 

노을 편지

서정윤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전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이렇게 노을에다 그립니다.

사랑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국, 사랑할 수밖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삶이기에

내 몸과 맘을 태워

이 저녁 밝혀 드립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게

두려울지라도

목숨 붙어 있는 지금은

그대에게 내 사랑

전하고 싶어요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에

익숙하지 못하기에

붉은 노을 한 편에 적어

그대의 창에 보냅니다

 

 

노을 풍경

서정윤

 

1

바람이 지나가며

노을의 발자국을 밟는다

긴 노래의 언덕에 서서

인간의 모습으로 지친

나의 자리

 

돌아가야 할

모습은 너무 멀리 있는데

그림자 길게 끄을려

힘들게 지키고 있다

 

풀릴 것 같지 않은, 우리의

목숨줄은 또 얼마나 질긴지,

안타까움 없이

지워질 수 있는 내 삶의 흔적이라면

잠들어 있는 황혼의

기울어 가는 풍경화,

내 남루한 사랑의 빛깔인지

 

 

2

어두운 곳에서 시작하여

어두운 것으로 끝나는

지친 영혼

닮은 얼굴들끼리 만나

나를 주장하며

넘어지는 산을 본다

 

그리움의 시간,

오직 홀로이고 싶고

그 외로움을 기어이

견디지 못하는

남들과 같은 내 그림자의 얼굴

 

가고 싶은,

잊고 싶은 것 웃으며

오늘도

어둠은 나타난다

 

 

 

 

저녁노을

손광세

 

비 맞아 떨어진

벚나무 단풍

책 속에 고이고이

끼워 두었지만

나 몰래 빠져나간

그 고운 빛깔

누이야,

저 하늘에

걸려 있구나

 

 

 

노을 격포

송반달

 

물거품 별처럼 이는

노을 궁() 격포 해변에서

웃는 눈물방울 보네

저 한 송이 석양화(夕陽花) 앞에서

떠나온 여인은 소리 지르고

고래등 같은 섬 노을 분만하는

인어는 자장자장 하네.

그때, 모래 젖 물고 칭얼대는

거품들 떠밀어 탁아하고

바다의 풍성함에

연연하는 바람에 사로잡혀

파도의 두상들 금관 쓰고 너울춤 추는데

모여드는 해변엔 반짝이는

거품과 거품뿐이네

날마다 잉태하고 날마다 분만하는

그 마음

몹시 슬퍼서 웃는 눈물 속으로

연한 연미복 입은 금성이

석양화 꽃마차에 노을공주를

태워 떠나네. 그리고

눈물방울 속에서 달이 뜨고 마네

별들은 자장자장 반짝여라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송수권

내 마음속 기러기 몇 마리 날아 서해로 간다 그곳은 진펄밭 위의 겨울 강물이 따뜻한 곳, 아내가 차를 몰아주고 내소사 앞에서 모항 고갯길을 넘고, 작당마을 고갯길을 내려섰을 때, 후끈한 저녁노을 속에 그 기러기 떼 아직도 노을 딛고 차창 밖을 날고 있었다 끼룩끼룩 찬 울음이 아니라 이렇듯 따뜻한 울음을 이 지상(地上)에서 나는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 오늘 나는 격포에 이사 간다 책 몇 권, 솥단지 밥그릇, 국그릇 한 벌 등에 지고 너희 울음 따라간다 큰 울음 속에 작은 울음, 잠시면 저 노을 속에 묻힐 아무렇게나 차 속에 널어놓은 수저통에서 자꾸만 숟가락들이 비명을 지른다 이 수저통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고, 나는 그동안 얼마나 세상을 향해 요란한 소리를 냈던가 아아, 수저통에 마지막 비치는 저녁노을, 침묵 같은 울음 따라간다. 너희들이 발 디뎌 내려앉을 곳, 나는 안다 그곳은 이승의 십승지(十勝地), 외변산(外邊山), 내변산(內邊山)이 몇 마리의 기러기로 떠서 차창 밖을 날아 마지막 날개를 접은 곳, 너희 깃털이 지상(地上)의 이불을 덮은 곳, 나는 오늘 인생을 연()꽃같이 접어 격포에 이사 간다 너희 띠뜻한 울음 속에 큰 병() 하나를 마미 밥통 속에 숨기고 따뜻한 울음 받으며 간다

 

 

 

저녁노을 - 다시 변산반도에서

송수권

 

저것은 백일홍 꽃망울만한 노을이 아니라

마약(痲藥) 같은 노을이다.

서해 뻘밭 가에 와 저무는 꽃 노을 속에

눈물을 흘려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땅의 시인(詩人)이 아니다.

십 리 뻘밭 그 끝 너머

띠를 두른 수평선 그 너머

저 손수건 한 장만한 노을,

깜빡

 

 

 

노을 앞에서

신경림

 

노파가 술을 거르고 있다

굵은 삼베옷에 노을이 묻어 있다

나뭇잎 깔린 마당에 어른대는 긴 그림자

기침 소리, 밭은기침 소리들

두런두런 자욱한 설레임

 

모두들 어데로 가려는 걸까

 

 

 

노을 만 평

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저물 무렵

안도현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 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 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노을, 붙들렸다가는 노을

유종인

 

하루 취하기에는 초저녁부터 그렇더군

벌써 실패한 사랑이 찾아오더군

이쯤 세상의 문이란 문들은 모두

두근거리는 불안의 심장이더군

 

흔들리지 않고서야 길이 가지를 치겠나

가지를 친 길목에

미친 듯 몸부림치는 버드나무 한 그루에

바람은 추운 굿춤을 추다 가더군

 

오늘 마음 주지 않은 당신은

어제 나를 버렸겠지만

내일 황토 봉분으로 우두커니 노을 앞에

남기도 남겠지만

 

가다가 뒤돌아보는 눈길이

너무 눈부셔

캄캄하게 저녁의 구멍만 커지는

 

당신도 하루마다 노을에게 목덜미를 잡히는

말하는 비석, 하루마다

비문(碑文)이 달라지는 가슴 나와 같더군

 

 

 

노을

윤보영

 

나는 아직

내 가슴을 태우던

노을을 기억합니다

그대 마음에서 옮겨붙어

타들어 가던

 

 

 

저녁노을

이상국

 

주먹만 한 감자 찐 옥수수 오이 가지 강낭콩이랑

고추 된장 쇠비름 몇 단 함지박 채워 이고

어머니는 해수욕장 간다

울긋불긋한 차일 아래

허여멀건 살들이 미어터지는데

면서기 군서기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호루라기 분다

파래 미역 뜯으러 친정집 드나들 듯하던

십 리 길도 안 되는 내 집 앞바다인데

돈 주고 샀다며

벌거숭이 관리인이 함지박 걷어차고

터 잡은 장사꾼들이 눈을 부라린다

불볕 아래 쇠처럼 달아오른 모래밭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쫓겨 다니다가

땀 전 어머니 얼굴에는 하얀 소금꽃 맺혔는데

빈 함지박 털어 이고 오는 저녁 하늘에

벌거벗은 놀이 폈다

 

 

 

노을 무덤

이성선

 

아내여 내가 죽거든

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

언덕 위 풀잎에 뉘여

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

이불처럼 나를 덮어다오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보게 하라

 

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

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

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

피 묻은 놀이나 한 장 내려

덮어 두었노라고

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

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미시령 노을

이성선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이승의 노을

이승하

잠시 일손을 멈추고

어머니를 보았다 색 바랜 몸뻬를

바다 어느 쪽에선가

한평생 쉬어 본 적 없는 바람의 무리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팔자에 없는 저마다의 생업

당신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때때로 고개를 들어 멀거니 바라볼 뿐

긴 수평선-- 잠이 들 무렵까지

끓어오르던 개흙을 맨발로 서신 채

땀방울이 모여 이루어진 바다

뒷주머니 젖은 수건도 흔들흔들 집으로 향하고

소금에 절여져 썩지 않을 꿈을 던져

각박한 이승의 노을을 거둔 뒤에

 

 

 

노을빛 기도

이양우

 

고개를 넘어가는 노을 빛은

빛의 가난을 용서합니다.

용서하기 힘든 용서를

무욕의 손으로 씻어냅니다.

 

노을 빛은 천천히

그러나 초연한 저 켠의 나래들을

뒷걸음질로 반추하며

비움의 철칙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노을 앞에서는

증오의 활시위도 꺾어집니다.

가장 강한 자의 오만도 용서합니다.

핍박과 배반의 수레를 쉬게 합니다.

 

노을은 잿빛 하늘이 아닙니다.

평화의 하늘입니다.

노을은 괴로움의 하늘이 아닙니다.

행복의 하늘입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오해를 거두어야합니다.

그대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가둡니다.

 

그대는 나의 스승입니다.

나를 깨우쳐 주었음이니

그대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사슬을 풀어내는

작은 기도말입니다

 

 

 

노을 부동산

이정록

 

빚을 내서라도 서해 쪽에 투자해야 한다고 다들 경을 읽어대드만 그놈의 독경이 신통력을 발휘혔는지 내 쇠귀가 번쩍 뜨이더라구 아따 내 머릿속으로 갈매기 울음이 그득 쳐들어오더란 말이여 그래 암내 맡은 황소처럼 한달음에 달려가서 개펄 수십만 평을 땅땅 등기해버렸는디 순식간에 몇배는 띄드만. 망둥이가 제아무리 높이 뛴다 해도 서해 땅값만큼 솟구치겄나? 나무하고 땅은 거저 큰다더니 을마나 신나던지 부동산경 집필자를 대동하고 냅다 서해로 내려갔지 그런디 갈 때마다 바닷물이 남실거려 코쭝배기도 볼 수 없는 기라 안되겠다 싶어 통닭 열 마리와 맥주 다섯 짝을 싣고 내려가 물때를 알어봤지 근디 말이여 조금사리에도 말뚝 몇개 박응께 금세 바닷물이 들이닥치는 기라 에라 엿이나 먹어라! 하고는 거기 토박이인 개불하고 낙지들을 꼬드겨서 노을경작을 하게 된 것이여 요번 봄에 가봤더니 말이여 이젠 땅이든 노을이든 팔아먹기 글렀더구먼 글쎄 말이여 내가 박아놓은 말뚝에다 그물을 쳐놓았더래니께 하여튼 서해 지나다가 불뚝불뚝 솟은 말뚝을 보면 그게 다 내가 박아놓은 것잉께 맘껏 잡아먹으라구 코끼리 허벅지든 하마 등허리든 진흙 마싸지가 그만이랑께 몇삽 떠가고 말이여 노을은 내가 그중 아끼는 것잉께 볼따구니 불콰할 정도만 바르는 거 잊지 말구 참! 바닷물 들이치면 말이여 무조건 중국 자랑 좀 해줘 바닷물이 그쪽으루다 몽창 몰려가게 말이여

 

 

 

저녁노을

이해인

 

있잖니 꼭 그맘때

산 위에 오르면

있잖니 꼭 그맘때

바닷가에 나가면

활활 타는 저녁노을

그 노을을 어떻게

그대로 그릴 수가 있겠니

 

한 번이라도 만져 보고 싶은

한 번이라도 입어보고 싶은

주홍의 치마폭 물결을

어떻게 그릴 수가 있겠니

 

혼자 보기 아까와

언니를 부르러 간 사이

몰래 숨어버리고 만 그 노을을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니

 

그러나 나는

나에게도 노을을 주고

너에게도 노을을 준다

 

우리의 꿈은 노을처럼 곱게

타올라야 하지 않겠니

때가 되면 조용히

숨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노을

장석남

 

하나,

 

아주아주 옛날의

시퍼런 하늘 속에

목단씨를 한주먹 쥐고

또 당신의 손을 한줌 쥐고

이 부딪히며 가서

목단 가꾸고

손 가꾸어

아지랑이 속을 헤엄치듯

한 세상 살아가서

 

 

,

 

어머니사온 새 신

좀 작은 듯하여도 그냥 신고

풀밭길 가듯

돌자갈길 생각 않고 그냥그냥 웃어가듯

우리 마음의 캄캄절벽도 꽃대처럼 그냥그냥 커 올라가

노을 하늘을 피우듯

 

 

,

 

종소리

종소리

 

하관(下棺)

 

 

 

노을

전은영

 

바이올린을 켜십시오

나의 창가에서

타오르던 오늘

상기된 볼

붉은 빛 속에

가만히 감추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해 주십시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주십시오

곧 다가올

달빛 함께

가벼운 춤 출 수 있게

고운 선율로

복숭아 빛 그대 볼

감싸 안게 다가오십시오

 

떠나버린 한낮의 뜨거움을

새악시 외씨버선처럼

조심스레 산등성이에 걸어 놓고

또다시 돌아올

아스라한 새벽 빛 맞으러

길 떠날 수 있게

사뿐한 사랑으로

그대 내게 오십시오

 

 

 

몰운대(沒雲臺)* 저녁노을

정일근

 

몰운대의 저녁을 보지 않고

내게 사랑에 대해 말하지 마라

멀리 태백산 피재에서 시작된

한 방울의 물이 낙동강을 만들어

길고 긴 물길 남해로 돌아갈 때

강의 팔짱을 끼고 부창부수 함께 흘러온

우리 산줄기 낙동정맥(洛東正脈)

부산 남자처럼 작별을 하는 몰운대

강이 흘리는 이별의 눈물이 뜨거워져

구름이 안개로 부서지며 쓰러지고

산은 마침표처럼 침묵하며 바라볼 뿐인데

웅녀(熊女) 같은 땅의 강과

환웅(桓雄) 같은 하늘의 산이 나누는

아뜩한 별사를 읽지 못하고는, 감히

가벼운 세 치 혀로 사랑 타령은 하지 마라

몰운대 저녁노을이 다대포를 덮을 때

강과 산의 작별을 가슴 치며 바라보다

바다가 먼저 붉게 울어, 하늘의 눈시울이

덩달아 붉어지는 것도 보지 못한다면

사랑 때문에 울어본 적 있었냐고

그런 어둔 눈으로 내게 묻지도 마라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경승지며, 370km 낙동정맥 산줄기의 끝자락

 

 

 

장서방네 노을

정태춘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

먼 산에는 단풍 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 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비 바람에 거친 세월도 님의 품에 묻고

여러 십 년을 한결 같이 늘 바라고 기다리오

기다리다 맺힌 한은 무엇으로 풀으요

저문 언덕에 해도 지면 밤벌레나 될까요

어찌하리, 어찌하리 버림 받은 그 긴 세월

동구 아래 저녁 마을엔 연기만 피어나는데

, 모두 떠나가 버리고

해 지는 고향으로 돌아올 줄 모르네

솔밭 길로 야산 너머로 갯바람은 불고

님의 얼굴 노을 빛에 취한 듯이 붉은데

굽은 허리 곧추세우고 뒷짐 지고 서면

바람에 부푼 황포 돛대 오늘 다시 보오리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되돌리기 비나이다

가슴 치고 통곡해도 속절 없는 그 세월을

, 모두 떠나가 버리고

기다리는 님에게로 돌아올 줄 모르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노을빛이 들고

꼬부라진 동구 길엔 풀벌레만 우는데

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

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 속에 깃드는데

저녁해의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

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 속에 깃드는데

저녁해의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

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 속에 깃드는데

 

\

새벽노을

정희성

 

어제 못다 운 사람이

성산포에 앉아 있나 보다

따라 울다 못 떠난 사람이

이리 붉은 눈시울로 같이 오나 보다

세상 사람들 억울한 일 한 가지씩 토해 놓아

성산포 오늘 많이 아프다

 

 

 

노을

조병화

 

해는 온 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황혼

조옥동

 

온종일 건너온 고해를

피안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는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수평선 위에

바닷새 한 마리

불타고 있다

 

하루의 제물을 바치고 있다

 

 

 

노을에 물들다

조은길

 

오래 미루던 삭은 어금니를 뽑았다

한쪽 볼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다

서녘 하늘이 뜯어 먹히는

짐승처럼 핏빛이다 나는

엄마 무릎에서 젖니를 뽑던 날처럼

아 하고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이 새빨갛게 젖어 있다

오 저건 피다 생을 되돌리고 싶어

온몸으로 투쟁한 태양의 유서다

검은 까마귀 떼 빙글빙글 맴도는

미친 화가의 그림이다 그가 보낸

밤에 도착한 편지다

한때는 저 순간을 6월의

붉은 장미 꽃밭이라 생각했다 처음으로

내게 장미를 꺾어 주던 사람

지금쯤 그 사람도 저 빛깔로 물이 들고 있을까

혼자 저녁밥 먹기 정말 싫어

꽃바구니를 만드느라 손이 할머니가 돼버린

친구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달려왔다

 

 

노을

조재도

 

까치발 딛고 서서 아스라이 내다보면 천년의 저 탑신(塔神)너머 호박빛 노을, 나지막한 지붕, 버젓이 열린 부엌문 틈, 다홍빛 불꽃, 사내는 잎나무 그러넣어 아궁이에 불 지피고 허리 구부슴히 솥의 물 가셔내는 아낙, 사내와 아낙의 도른도른 말소리

뭉싯뭉싯 김 오르는 부엌을 향해

시장기 새김질하는 암소의 입김

 

 

 

해 질 녘

채호기

 

따뜻하게 구워진 공기의 색깔들

멋지게 이륙하는 저녁의 시선

빌딩 창문에 불시착한

구름의 표정들

발갛게 부어오른 암술과

꽃잎처럼 벙글어지는 하늘

태양이 한 마리 곤충처럼 밝게 뒹구는

해 질 녘, 세상은 한 송이 꽃의 내부

 

 

 

노을 시편

천양희

 

강 끝에 서서 서쪽으로 드는 노을을 봅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오래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붉어질 때 두고 간 시들이

생각났습니다 피로 써라 그러면…… 생각은

새 떼처럼 떠오르고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어 마른 풀 몇개 분질렀습니다

피가 곧 정신이니…… 노을이 피로 쓴 시 같아

노을 두어 편 빌려 머리에서 가슴까지

길게 썼습니다 길다고 다 길이겠습니까

그때 하늘이 더 붉어졌습니다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라…… 내 속으로 노을 뒤편이 드나들었습니다

쓰기 위해 써버린 많은 글자들 이름들

붉게 물듭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노을을 보며

최승자

 

살아 있는 나날의, 소금에

절여지는 취기 같은 저 갈증

누군가의 망막에 증기처럼 번져 오르는 통증

하지만 그래도 난 아냐, 난 못 해

전라도인지 조지아인지

어디서 또 아픈 일몰이 시작되고

, , 저 붉은 노을 좀 봐

죽을동 살동 온 유리창에 피칠을 하며

누군가 나 대신 죽어가고 있잖아

심혈을 기울여 해가 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내 할 일은 그대 마저 다 죽고 난 뒤

흰 장갑 끼고

싸늘하게 빛나며

그대의 죽음에 비로소 입장하는 것뿐

 

 

 

노을

최영철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갈대밭 노을에서

최윤경

 

서로가 하나인 듯

하나가 서로인 듯

사운대는 갈대밭 걸으며

오늘 하루쯤 넉넉하게

너의 어깨에 나를 기대고

천천히 걸어보면 어떠리

가시 돋친 혀

보드랍게 갈아내고

날선 말들

말랑하게 녹여보면 어떠리

원두막 간이 쉼터에

노을막걸리 발그레 물들어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취해가는

해 질 녘 갈대밭에 사랑이 온다

서로를 꺾지 않고

서로에게 맘껏 휘어주는

오늘 같은 오늘이 매일이면 어떠리

 

 

 

노을

최윤경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를 곱게 물들이는 일

세월과 함께 그윽하게 익어가는 일

동그마니 다듬어진 시간의 조약돌

뜨겁게 굴려보는 일

모자라는 꿈들 잉걸로 엮어

꽃씨 불씨 타오르도록

나를 온통 피우는 일

 

* 잉걸 = 불잉걸 : 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덩이

 

 

 

낙조(落照)

평보

 

바다 넘어

무엇이 있는가?

안식을 찾아 가는 해

하늘을 불살라

누구에게 보이려는가?

 

노을빛에 기대에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은파의 빛이

소멸될까 조바심 한다

 

지친 나그네

놀랜 가슴 가다듬고

한 세상 머무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그대 젊음을 노래

하려든

지는 해 설어워 말라

 

 

 

노을

한승원

가버린 사랑 때문에 오늘 하루 내내 슬픔과 울분 못 견디고 혀와 입술 깨물어 뜯어 머금었던 피 뿜어놓았구나

 

 

 

석양

허형만

 

바닷가 횟집 유리창 너머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

 

 

 

황혼이 질 무렵

홍수희

 

석양을 보면

떠나고 싶다

 

이름 석 자 내 이름은 벗어버리고

의자에 앉았으면 앉았던 그 모습으로

언덕 위에 섰으면 서 있던 그 모습대로

바람이 불어오면 나부끼던 머리카락 그대로 두고

 

항상 꿈보다 더 깊은 꿈속에서

나를 부르던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걸어가면 계속하여 걸어가면 닿을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그곳이 있어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황혼이 질 무렵

홍수희

 

석양을 보면

떠나고 싶다

 

이름 석 자 내 이름은 벗어버리고

의자에 앉았으면 앉았던 그 모습으로

언덕 위에 섰으면 서 있던 그 모습대로

바람이 불어오면 나부끼던 머리카락 그대로 두고

 

항상 꿈보다 더 깊은 꿈속에서

나를 부르던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걸어가면 계속하여 걸어가면 닿을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그곳이 있어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노을

홍해리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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