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가서 아니 오는 아이들
가을 그리고 은빛의 잎
가을 그리고 지하상가
가을날 그리고 개울
가을, 눈물에 젖는
가을바람
가을밤과 어린 왕자들
가을, 백지 그림
가을 숲길
가을 스케치 한 장
가을 어디론가 떠나는
가을에게
가을을 벗는다
가을을 입는다
가을 잎
가을, 피카소의 물감 통
가을 화약 냄새
가을 혹은 유리알 하늘
개울가 그 집
거울 속 풍경
걸으면서 잠자는 버릇
겨울나무
겨울바람 그리고 마을버스
겨울밤이 눈에 묻히다
겨울 산 둘레길에서
겨울 정동진에서
계석리(癸石里)에게
계절이 초록 옷을 입을 때
고추잠자리
고층 아파트
공간 밖 공간
공간 밖 공간에도 봄이 살아난다
공중창고에서
과속 운행 중의 환상 하나
굴렁쇠와 아이
궤도 이탈 중
그대 향기
그리다 만 가을 한 장
그리다 만 삽화 한 컷
그림자의 뒷모습
그물
그해 여름 뱃고동 소리
그해 여름 숲속에서
기다림
기차가 온다
기차를 타고
길 위에서
길이 길을 버리다
길이 된 꽃잎
깊은 밤
꽃잎의 귀
꿈 혹은 풀밭
나뭇가지에 매 맞는 바람
나뭇잎이 시를 쓴다
나의 디지털 하늘
낚싯밥, 별
낮달을 보며
내부 수리 중
내일에게 주는 안부
눈
눈사람
눈 속의 여자
눈뜨는 잎사귀
눈물처럼 떨어지는
눈사람
눈 속의 여자
눈이 내린다
다리뿐인 햇빛
다시 또 절망에게
다시 열린 봄날에
단풍나무 아래서
디지털 길
따먹은 잡동사니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땡볕의 불주사
로봇과 가을
리모컨과 풍경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망원렌즈와 시라세니아 잎
머리를 감는다
몸살 앓는 하늘
물이 되는 꿈
바람과 바다
바람아
바람은 풀 등에 업혀 잔다
바람을 타고
바람의 반란
바람이 돌아온다
발끝으로 간다
발이 달린 사랑
발이 하는 독서
방안의 삶
백지 공간
벽 허물기
별은 내 눈에서 뜬다
봄꿈 1호
봄날 그리고 개울
봄 명주실 웃음
봄밤을 태우는 초롱꽃
봄비 그리고 새싹
봄비, 그리고 아이와 새총
봄비 속에서
봄 어지럼증
봄을 낳는 나무들
봄이 나를 읽는다
봄 편지
봄, 혹은 안개꽃
불, 길 끝에서 일어나는
불면증
불볕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비는
비 사이로 지나가는
비 사이로 찾아가는
비 속에서
비 속의 도시
비 오는 날의 삽화
비 온 뒤 풀밭
빗속의 바람
빠른 걸음으로
빨래
사는 재미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사랑 만들기
사랑법
사랑 연주(演奏)
사랑의 돌팔매
사랑 한 접시
산딸기나무
산에서
산이 여름을 묻고 나서
살 빼기
살아난 새
새
새가 되는 꿈
새벽
세상과 시
소나기와 빗금
소나무 아래서
술렁임
스쿨버스 타고 가는 아톰
스펙터클, 갓난아이
승화
시간들이 쌓이면
시간은 바쁘다
시체가 된 바람
쓰다 버린 길 하나
아이들과 디카폰
아이들과 장미
아, 저 노을
아직도 풍부하다
아침 뜰
아침상
아침 스냅 한 컷
아침 햇빛
안강(安康)
안개
안개꽃 마을
안개 속에서
어둠 건너 하얀 마을
어떤 겨울날
어떤 날의 경주
어떤 조짐
어제와 내일 사이
억새 또는 하얀 면도칼
얼어붙은 기차
얼음꽃
없는 시간의 반란
여름밤의 꿈
여름이 비에 젖고 있다
여름이 살아난다
연가풍(戀歌風)으로
열린 가슴으로
오늘도 지상의 미물
오늘 문득
오래된 영화관에서
와! 나는 어디로 가지
외과 의사는 투덜댑니다
외롭지 않게
용곡동 아리랑
움직임
웃음으로 채운 여백
위험한 외출
유비쿼터스
의자 한 채
인형의 방
일란성 잎사귀들
일점무구(一點無垢)
잊어버린 길
잔디밭의 아이들
전자파의 탐지
종이학
죽음은 살아서 돌아온다
지리산 바람 소리
진눈깨비 한 가락 찍다
짧은 만남
차표 없이 온 봄
창준의 독서법
척추로 눕히는
청소하는 날
청조, 우주 밖에서 다시 사는
초롱불 진달래
초록빛의 아이들
초봄의 귀밑머리
추수
추억에게 안녕
추억 한 잔
카메라처럼 서버를
컴퓨터와 아이
편지
푸른 땅을 걷는다
푸른 수혈
풀물의 그녀
하늘궁전
하늘 새
하늘에 말 걸기
하늘은 편지지
한낮이 켜져 있는 방
한 됫박의 웃음소리
한밤의 회오리바람
햇빛 속에서
호숫가에서
휴일 아침, 봄비
흙바람
흰옷 입은 나무들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김지향
강물이 눈썹까지 차오른
몸의 창문이 사방으로 밀리며
한 잎 한 잎 열렸다
물에 잠긴 몸의 부속품들이
송어 새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풀나풀 기어 나온다
엊그제 잠입한 매연 찌꺼기도
살살 녹아 나온다
마구잡이로 먹어 치운 공해물질이
소화도 안 된 채 밀려 나와 풀썩풀썩
강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사람의 눈이 해독할 거리쯤에선
손을 흔들며 나가는 물거품
눈썹까지 차오른 욕망을 말끔히 씻어내면
하얗게 피어서 떠오르는 빈 몸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꽃잎이다
나는.
가서 아니 오는 아이들
김지향
멀리 하늘 속에 발을 넣고
가녀린 길 하나 하얀 연기처럼 가물가물 가고 있다
밤새도록 별을 세며 별밭에 꿈을 심던 아이들
매화 다발처럼 하얗게 피어있는 하늘 길 옆구리
활짝 펴인 천사 날개옷 소매 자락을 따라
팔을 치켜들고 뱅뱅이를 돌던 아이들
늘어진 소매 자락 사이로 별떨기 몇 개비
밤새도록 뿜어내는 파란 빛을 받으려
소쿠리를 들고 별 싸라기를 따라가는
아이들 소쿠리 속엔 갓 태어난 파란 꿈이 담겨
하늘하늘 팔랑이는 머리 꼬랑이를 잡고 함께 달렸다
이 한 장의 긴 여름밤을 하늘에 띄워놓고
어디로 달려가서 아니 오는 아이들
길머리에 혼자 서 있는 초가지붕의 안테나가
떠나간 아이들을 기다리다 잠이 든다
가을 그리고 은빛의 잎
김지향
공터 옆구리 어린이 놀이터 옆구리
익은 땡감들이 수은등처럼 켜져 있다
가을 내 초록 잎 지는 소리 아래로
고개 내민 말라깽이 단풍나무가
그림엽서를 만들고 있다
모두 떠난 언덕 밑 경사로에는
줄지어 미끄러지던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멈춘
커브길이 까뭇까뭇 딱지를 덮고 누워있다
추적추적 짚신 소리 끌고 따라오던 장맛비도
멈추어 섰다
물 젖은 바람이 볼가 낸 언덕 너머 서쪽 하늘이
무거운 낮잠을 벗는다
널따란 발코니 창가에서 나는 서쪽 하늘에
펼쳐지는 우주의 단막극을 구경한다
우주에서 풀잎이 한 켤레씩 톡. 톡. 떨어질 때마다
내 머리엔 한 땀씩 은빛 잎이 심어진다
은빛 잎은 머리에서 초롱꽃이 되어
앉았다 누웠다 깊은 머리 속
호수로 내려간다
내가 타고 갈 은빛의 우주선 한 채
아직 마감공사 덜된 채
깊은 호수 버티칼을 열고 내다본다.
가을 그리고 지하상가
김지향
모자를 쓰고 가을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서울로 들어오는 교외선마다
샛노란 가을 잎을 한 궤짝씩 부려놓는다
거리의 노점에는 점박이 과일들이 눈에 채이고
그루터기만 남은 가을의 재를 버리러 나온
나는 소공동 거리를 걷는다
플라자 호텔을 돌아서
가을바람이 한 둘씩 빠져나가는
지하상가 계단을 내려간다
가장 먼저 가을을 벗은 마네킹양의
외국물 먹은 모피 슈트에
서민들의 발길이 멈췄다 가고
멈췄다 감을 반복한다
가을 내 눈총을 맞던 백수정 상자도
지하 분수대의 분수도 말라 있다
낯익은 상점에 들어가 우리 생활 사정과는 거리가 먼
정찰 표를 쥐었다 놓았다 하다가
문득 어릴 때 내 고장 인심이 그리워져
공연히 목이 마른 나는
말라붙은 분수대의 물 투정이나 하면서
뚜벅뚜벅 속 쓰린 귀가 길에 오른다
가을날 그리고 개울
김지향
멀리 갈밭에 얼굴을 넣고
둑길 하나 붉은 댕기처럼 나풀나풀 가고 있다
한낮 내내 오르내리며 미끄럼 타는 아이들 발길에
등덜미가 빤질빤질 닳아있는 둑길 옆구리
밑창이 드러난 개울 속 헤엄치는 올챙이를 따라
첨벙거리는 아이들 말아 올린 바지가랑이 사이로
물질경이 몇 잎 파란 손을 흔들고 있다
잠자리채를 들고 바람을 타고 가는
아이들 잠자리채 속엔 파란 하늘만 담겨
팔랑팔랑 오지랖에 가을을 넣고 달린다
이 한 장의 단조로운 풍경을 깔아놓고
가을날은 느릿느릿 가다가 저문다
가을, 눈물에 젖는
김지향
튕겨 나간 하늘이
군데군데 얼룩이 졌다
파삭한 가을 얼굴이
골목골목 포개 앉아 있다
나뭇잎이 떨어뜨린 눈물에
가을이 젖는다
하늘에 잎을 달아주며
하늘과 도킹하던 나무들
이젠 드러낸 알몸이 부끄러운지
어깻죽지를 움츠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 살이 덜 찬 열매를 따서
길가 좌판 위에 널어놓고 있다
짐수레마다 얼굴 붉히고 있는 열매들이
빤질빤질 눈물에 씻긴다
다 내어주고 몸 비운 가을이
뜨거웠던 시간들을 접어놓으며
영혼의 집으로 떠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중이다
나뭇잎을 신고 떠난 ‘시간’은
가서 돌아오지 않지만
눈물에 씻겨 살아난 가을은
내일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
가을바람
김지향
1
가을바람은
불씨를 하나 갖고 있다.
바람이 건드리는 풀잎마다
불이 켜지고
풀잎을 따는 가슴마다
불에 덴다
가을바람은 머리가 없고
가슴만 솟아나 있어
가을 가슴에 우리 가슴이 얹힐 때
우리는 없어져 버린다
세상은 온통 불덩이로 떠오르고.
2
바람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건너간다
풍선은 달의 품에 안겨 느긋하게 날아간다
풍선이 달의 닮은꼴이냐고 바람에게 물어본다
그때 달은 구름 속에 숨어버린다
바람이 풍선을 놓친 줄 모르고
달을 끌고 까불까불 산을 넘어간다
이윽고 달이 산 속에 몸을 숨기며 바람을 내버린다
하늘에서 쫓겨난 바람이 사과 송이를 풍선인 줄 알고
사과의 뺨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논다
사과 송이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다
가을바람은 눈이 멀어 분별력이 없다
자꾸자꾸 몸이 싸늘하게 식어갈 뿐
3
허공에 바람이 지나간다
새까만 가르마를 긋고 가는
서리 까마귀 날개가 기웃둥거린다
바람이 지난간다
허공에 구불텅구불텅 낙서를 그려놓은
구름이 삼나무 다발처럼 도르르 말린다
바람이 지나간다
구름 위에 한 롤씩 말린 검은 낙서 다발 아래
소나기가 지나간다
말갛게 씻긴 나뭇잎을
땅 위에 내려놓은 소나기 떼가
토닥토닥 나뭇잎과 구슬치기한다
문득 새살이 돋아난 허공
이마가 훤하다 사람의 머릿속도 한바탕
가을바람이 지나가면 새살이 돋는다
가을밤과 어린 왕자들
김지향
밤하늘이 대낮보다 밝습니다
별이 새끼를 낳는지
2. 4. 6으로 식구들을 늘려 갑니다
아이들은 나뭇가지 끝에 올라가
하늘에다 사닥다리를 놓았습니다
별은 아이들 머리 위에다
자꾸자꾸 싸라기를 뿌립니다
아이들은 팔을 쳐들고 높이높이 흔들어 봅니다
별은 아이들 손가락 사이로 잘도 미끄러져 갑니다
아이들은 디카폰에다 찰칵찰칵 저장하기 바쁩니다
문득 아이들은 사닥다리를 버리고
땅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별을 타고 어린 왕자가 내려올까 봐
힘을 다해 땅끝으로 달리기 합니다
밤새도록 달리기하는 아이들 손에서
달랑달랑 요령 소리가 납니다
아이들 디카폰엔 몇 꼭지의 어린 왕자가
활짝, 웃고 있습니다
가을, 백지 그림
김지향
논두렁 풀밭에 앉아서 밤내
가을 잎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손에 빗을 들고 가는 보름달이
문득 내 머리를 빗긴다
달 빗에 빗겨 나가는 가을 잎 몇 가락
버드나무 은행나무 가로수 가지 끝에
풍경화로 걸리는 내 머리칼
떨어지는 달빛이 찰찰 은가루를 뿌려
용곡동 무논에 거꾸로 걸어둔다
연속사격을 가하는 귀뚜라미 합창이
내 귀에 매달려 보글보글 동굴동굴 굴러간다
나는 손바닥에 떨어진 가을 잎에다
오래전에 밟고 간 추억을 내놓으라며 다그친다
귀뚜라미 소리 길게 꼬리를 끌며 논두렁을 거닌다
한바탕 서리가 놀다 간 논두렁
추억 속의 아이가 달려 나온다
하얀 달빛에 앉은 하얀 서리 위에 하얀 손가락으로
하얀 아이를 다독거린다
하얗게 씻긴 달빛이 내가 그린 하얀 추억을 밟고 간다
날이 샌다
가을 숲길
김지향
가을 숲길을 걷는다
눌렸던 나무의 숨결이 터져 나와
하늘까지 치뻗은 싱그러움으로
구정물은 끼어들 틈이 없구나
은방울을 굴리는 산새들의 휘파람 소리가
가슴에 낀 뗏자국을 씻어내는 숲속
가지마다 가을볕에 익어가는
나무 열매를 보며
가을 숲길을 걷는 사람의 가슴도
숨찬 젊음으로 출렁인다
가을 스케치 한 장
김지향
하늘 몸 전체가 수틀이 되었다 불 바늘을 쥔 햇빛이 쭈그리고 앉아
진종일 진다홍 단풍잎을 수놓고 있다 하늘 발치께에 사는 소슬바람은
하늘 층계를 밟고 내려와 성. 마태오 사원 뜰에 차가운 몸을 앉혔다
앞뒤로만 흔들거리는 등의자 위에 놓인 책, 한꺼번에 넘어가는 책장을
허리 구부러진 코스모스가 서로 팔짱을 걸고 머리 부딪치며 따라 읽느라 부산떤다
어디서 비둘기 두세 마리 깡충깡충 깨금발로 뛰어와서
노 수녀 손바닥에 담긴 열매 한 알 꺼내 물고 어디로 훌쩍 날아간다
까맣게 탄 이빨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이고 있는
머리칼 샛노란 옥수수밭 옆으로 성. 마태오사원 뜰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머뭇머뭇 발걸음을 멈추고 덜 씻은 때가 있는지
깨끗하게 영근 열매가 있는지 저마다 마음을 열고 또 열어본다
가을. 어디론가 떠나는
김지향
몸을 풀어주고 하늘 속으로 묻히는 홍시 위로
한 줄 울음을 깔아놓고 빨간 줄을 따라 비행기가 간다
하늘 끝자락으로 울고 가는 기러기 한 마리는
빨간 몸으로 떨어진 나뭇잎 하나 물고 사라진다
하늘 한 자락이 뭉턱 베어져 나간다
붉은 잉크를 엎질러 논 마띠스의 물감 속으로
들어가서는 무엇이 되어버리는지 뒤따라가는
눈동자도 물감 속에 구겨져 박힌다
가을엔 모두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 밖에
말의 실타래가 다 풀리고 나면 옷 벗는 소리도
멈춘 바다에 피만 남는다는 사실 밖에 떠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밖에 사람은 아는 것이 없다
가을에게
김지향
우리들의
17세기식 꿈이 숨 쉬는
저 마을 밖 통나무집에
황토빛 투구를 쓴
한 꼭지의 그림자가 들어선 뒤
푸른 벽마다 난로마다
은행잎 잎마다 사과알 알마다
푸름의 글자가 박힌 이름과 이름마다
왜 황토빛이 차지해 버리나
황토빛으로 뒹구는 사과 알 속살을
한 입 주워 깨문
우리들의 꿈도
순간, 황토빛으로 깨질 때
왜 하필 길고 먼 세월의 쓴맛만 씹히나
잃었던 사랑을 찾은 맛보다
서른여섯 해 둥지 속의 어둠의 맛
서른한 해 잘린 허리의 아픔의 맛
혹은 움켜쥔 허리춤으로 보릿고개를 넘던
배고픔의 맛
이웃의 슬픔을 돌아서서 눈감아 버리는
아, 사랑 없음의 맛
가을이여
세상의 모서리마다 그대 발이 닿는 곳마다
변색되고 침묵하는 이유를 말하라
저희끼리 저희 언어로 사랑하는 수수밭
수수 언어을 짓뭉개 버리는
그대 발을 한 번만 돌아다 보아라
세상 욕심을 다 비워 버려
가늘고 마른 허리의
코스모스를 만들어 낸 가을아
우리들의 17세기식 꿈도
저 가늘고 마른 허리가 되어야 하나,
가을을 벗는다
김지향
새파란 하늘이 흰옷을 입는다
가을 내 파란 하늘에서 헤엄치던
기러기 떼가 구름다리를 건너
제집으로 돌아간다
가을 내 빨간 소매 자락을 펄럭이던
단풍나무도 하얀 소매로 갈아입는다
이미 하얀 옷을 입은 나무들은
겨드랑이에 달랑달랑 새빨갛게 얼굴 붉힌
뾰루치들을 흔들고 있다
(문득 나도 겨드랑이를 더듬어 본다
빨간 뽀루치도 빨간 소매 자락도 흔적 없다)
탈곡기 소리 멈춘 벌판을 혼자 걸어간다
이미 텅 빈 벌판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가는
가을 뒤로 연소 불량의 하늬바람, 서리를 흩뿌리며
가까이 오는 눈발 한 장
(아직 땅에 닿지 못한 겨울의 발이 새하얀 우주에서
봄을 잉태한 생명의 씨앗을 조심조심 매만지는 사이)
성급한 땅이 먼저 목화솜 눈발을 입는다
겨울을 끌어당기며 옷깃을 여민다
가을을 입는다
김지향
책장을 넘기면 건물이 톡톡 일어선다
달팽이 한 마리 두 눈에 힘주며 기둥을 오른다
기둥에 실개천을 내며 풀섶을 찾는다
둥글게 실개천을 만든 달팽이 한 마리
기둥에 그려진 풀섶 속에 들앉는다
달팽이는 조용히 풀섶이 되어간다
내 카메라에 들앉은 풀빛 건물
창틈으로 스민 가을 잎이 무안해 한다
굴참나무 도토리 나무 너도밤나무
잎들이 창문 앞에 모여서 가을을 모의한다
들오다 나가버린 봄처럼 나뭇잎의 초록 옷만
벗겨 들고 나가버릴 속없는 허풍장이 가을을
풀어헤쳐 점검한다
내 카메라 안에서 가을을 입은 건물
가만히 들여다보면 초롱초롱 새빨간
열매들을 품어 안고 해죽해죽 웃고만 있다
가을 잎
김지향
가을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을잎은
온몸으로 뒹굴기 내기를 한다
온몸으로
나의 눈 속에 풍덩 빠져
박하 분 냄새로 살아난다
박하 분 냄새가
내 몸속까지 흘러들어
나의 영혼 전체가
박하 내로 떠오른다
밤의 기슭의 헛간
어둔 헛간의 어둔 가슴
그 좁은 고랑을 가만가만 비켜서
조금씩 뜨거워져 터지고 있는
가을 옆으로
옆으로 흘러간다
가을은 뜨거운 가슴뿐
손이 없으므로
가을 잎을 붙들지 못한다.
가을, 피카소의 물감 통
김지향
피카소가 하늘 이마에 왕방울 황소 눈을 매달았다
풀잎들이 손끝으로 황소 눈알이 머금고 있는 물감을 톡, 퉁긴다
뼈 채로 서 있는 나뭇가지에 왕방울 홍시가 열린다
하늘 이마 군데군데 얼룩처럼 빨간 칠을 한 홍시가 가을바람을 굴린다
나무들이 내는 뭉툭한 타악기 소리
가을을 밟고 가는 이들의 가슴에 자고 있던
추억의 씨가 목을 빼고 내다본다
하늘 가슴도 포물선처럼 숨차게 나부낀다
사방천지 피카소의 왕방울 눈이 댕그랑 댕그랑
황소 목에 걸린 방울 소리를 내며 가을이 깊어간다
깊어 가는 가을밤엔
맘껏 퍼내지 못한 채 단풍 드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해명이 안 되는 피카소의 황소 눈알을 떠 와서
보글보글 클래식과 재즈를 뒤섞어 끓인다
가을 화약 냄새
김지향
시간은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달려와서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부욱, 찢어낸다
흘린 부스러기들은 열린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여름 시체를 담은 서랍들이
화장터에 쌓인다
푸르렀던 시절을 가슴에 넣은
가을은 시체들을 화장한다
세상 납골당엔 빨간 불꽃들이 앉아 있다
화약 냄새를 안고
시간은 또 어디로 가고 있다.
가을 혹은 유리알 하늘
김지향
오늘은 하늘이 유리알을 닮았다
뼈 속까지 들여다보는 햇빛 아래 나와서
석간신문을 폈다
파삭하고 깔깔한 인심들이
글자마다 새까맣게 박혀
‘뭘 봐, 바보야 난 바빠’ 한다
거리의 어깨를 부딪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바쁘고
교외선은 칸마다
샛노란 가을 잎을 도심으로
실어 나르기 바쁘고
남대문 네거리 노점에는
벌써 모피 옷을 들고
손뼉을 치며 외치는 소리
공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여름내 집 앞 오동나무 높은 가지 끝에
매미채를 매달아 놓고
바보처럼 쳐다보기만 하던 나는
바쁘게 어깨를 떠미는 가을바람 앞에
어리둥절, 말을 잃는다
충무로 명동거리 쇼윈도마다 새 옷을
갈아입은 마네킹 아가씨들은
웃음을 다해 세금을 올리지만
유리알 하늘에게
웃음을 다해 자랑할 열매가 없는
나는 다만 어리둥절,
매미채만 바라본다
개울가 그 집
김지향
신발을 벗어들고 걸으면
발바닥이 간지러운 자갈밭
호롱불 가물거리는 외딴집까지는
몇 마장이 더 남아 있었다
한쪽 발을 들고 걸어도 양쪽 발이 아픈
개울가 공사장 한쪽 끝에 가물가물
꺼져가는 호롱불의 그 집은
아직도 있었다
지붕 서까래 밑에서
잘새알을 꺼내어
친구 시중드는 일이 재미있었던
그 아이는 오늘
부뚜막에 턱을 괴어 꿈으로 가고
새들은 서까래 밑으로 들락거리며
지붕 꼭대기에 북더기집을 만들었다
호롱불이 혼자 붙다가 만
방안 고요 위엔
무서움이 한 꺼풀 더 덮여
함께 자고 있었다
밤내 울다 성대를 다친 부엉이의
안개처럼 퍼지는 울음 사이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 집
잠을 깨우는 성. 누가 성당의
새벽 미사 올리는 소리만
먼저 간 주인의 혼을 부르며
개울가를 맴돌고 있을뿐
성대 잃은 부엉이 소리 혼자 버려두고
꿈속으로 먼저 간 그 남자(아이)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개울 속엔 옛 주인의 옷자락 젖는 소리
추적추적 흘러간다
아직도 발가락이 시린 개울가 그 집.
거울 속 풍경
김지향
흙이 하늘로 날아간 뒤
하늘에서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뻗은 뒤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낸 뒤
꽃잎이 땅으로 몸을 헐어낸 뒤
꽃잎이 땅으로 날아온 뒤
골목길에 떨어진 하늘 새 한 마리
하늘 새를 타고 그가 하늘로 떠난 뒤
집속 방속 벽 속 거울 속에 그가 살아있다
거울 속엔 발도 없이 걸어 들어간
어제의 사건들이 모두 살아있다
병정놀이가 땅뺏기놀이가 사냥놀이가
거울 속에 살아있다
살아있는 거울을 따먹고 하늘궁전으로 간
나는 하늘풍경을 마저 따먹는다
아, 거울 속은 내가 따먹은 내 눈 속이네
걸으면서 잠자는 버릇
김지향
나는 걸으면서 잠을 잔다
걸어도 오는 잠은 내쫓지 못한다
눈으론 실탄을 어깨에 멘 총잡이를 보면서
권총의 자동 방아쇠가 미사일이 되어
햇빛이 끝나는 우주 기슭을
뚫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불길이 노을처럼 곱게 타오르는 현장을
입을 딱 벌리고 감상한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걸었다
등 뒤에서 호르라기 소리가
등솔기를 때렸다
축 처진 금줄을 번쩍이는 검은 옷의
늙은 사나이의 어깨가
내 옆구리를 떠밀었다
사나이의 터진 목소리가 공기를 찢어댐을
촉감으로 만지면서 나는 또다시
아까 그 권총 사나이를 따라갔다
그는 불길 속에서 불쑥 튀어 오른
한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머리칼이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말 탄 병정들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쯧. 쯧. 쯧!
강한 느낌표를 발하며 급히
말머리를 막았다 그때였다
찌~익!하고 금속성 폭발음이
귓속에 깊게 깔렸다
또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내 뒤통수를 찢었다
순경 나으리가 달려왔다
나는 그때부터
걸으면서 잠자는 버릇을 내버렸다
아름다운 의식의 뒤죽박죽 장난도
끝내버렸다
겨울나무
김지향
나무가 언덕을 데리고 내 귀에 와서
두근두근 귀를 두드린다
언덕에 내가 나와 심어지고
달빛 한 꼬챙이가
내 발부리에 꽂힌다
내 발이 새파랗다
나무는 겨울나무는 천 개의 손으로도
내 발의 푸르름을 닦지 못하고
만 개의 눈으로도
내 푸름의 깊이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무는 겨울나무는 밤마다 나의
깊이를 재려
나의 귀에 와서
그 짧고 마른 손으로
두근두근
내 귀의 높은 층계를
깨뜨리려 한다
겨울바람 그리고 마을버스
김지향
빼 마른 플라타너스 사이에 서서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플라타너스 가지 위에서 비둘기 똥이 뚝, 떨어진다 내 머리 위에 얼어붙는다 쌩~ 바람이 하늘 문을 열고 “나 아직 살아있어” 양 팔을 쭈욱 뻗고 날아 나온다 얼어붙은 새똥이 바람에 올라탄다 플라타너스 푸석한 잎사귀가 몇 번 살려 달라 소리치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머리 위 떨어져나간 나뭇잎 사이사이를 허공의 물렁살이 채운다 나와 상관없는 다른 버스는 10분을 사이에 두고 기다림을 즐긴다 아직도 초록빛 버스는 16~2번을 달고 달려오지 않는다 (이 고속시대의 마을버스도 누구를 닮았는지?)
기다림에 지친 맞은편 나뭇가지에 앉은 바람이 팔을 휘저으며 다시 또 비행을 시작할 눈치다 서북쪽 방향으로 날개를 편다 내 뒤축을 이은 사람의 줄이 흐트러지고 꽁꽁 얼어붙은 내 외투 깃이 서북쪽으로 쏠린다 누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친다 머리칼이 마구 헝클어진 나에게 누구와 싸웠냐며 얼굴이 붉어진다“겨울바람은 세상도 뒤집어놓는다니까” 이제야 온 마을버스에서 내린 사내의 인사말이다
(아직도 시간을 길에다 쏟아붓고 발을 구르며 마음 졸여야 하는 이 고속시대?)
겨울밤이 눈에 묻히다
김지향
나는 밤내 눈에 젖는 겨울 한 컷 일기장에 그려 넣는다
이제 연거푸 토해낸다 포식한 하늘이 벨트를 풀고
너무 오랜 시간 받아먹은 사람의 아우성, 넋두리, 비명을
비비고 버무려 하얗게 바랜 속 깊은 응어리를 게워낸다
멍울멍울 맺힌 빛바랜 녹말 알갱이를 버티칼 밖으로 부어낸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오래오래 쏘아 올린 토혈이 이제 되쏟아져 내려도
스스로의 가슴에서 쌓인 가슴앓이가 뜯겨져나간 세포 조각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입을 열고 창가에 앉아
의미 없는 함박웃음을 밤내 눈 속에 묻는다
하늘에 가르마를 탄다 디지털로 가는 바람 갈기 한 줄
손에 든 면도칼로 웅크린 떠돌이별 수염을 깎으려지만
미리 모두 깎여 하얗게 빛 꺼진 별은 뜬눈 채 잠이 들었다
뼈만 남은 플라타너스가 하늘의 속앓이를 아는지 팔을 치켜든 채
하늘 심장에 바싹 귀를 대고 숨죽여 얼어 있다
하늘과 땅, 땅과 땅 경계를 넘나들며 조금씩
살을 헐어내고 있는 공기의 폐장도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퀘이사만이
끝나 가는 길고 긴 아날로그의 지상 삶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팽개치고 돌아설 시간의 속셈도 알고 있다
퀘이사가 알고 있는 시간이 한밤 우주를 붙들고 이제 잠을 씌우는지
이 간이역의 하얀 낙하산 속은 무거운 침묵만 깔려 있다
나는 밤내 일기장에서 나체로 있는 침묵 한 컷 집어먹는다.
겨울 산 둘레 길에서
김지향
겨울 아침 산을 오른다
어젯밤에 내린 눈이 아직
나뭇가지를 베고 꿈속을 헤매고 있다
동쪽 하늘에 붉은 물감을 엎지르고
당황한 해가 나뭇가지에 얼굴을 문지른다
부스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나뭇가지에
몇 남은 눈송이가 매달려 그네를 타고 논다
산 아래 하나둘 꺼지는 가로등 뒤에 숨은
마을이 주춤주춤 어깨를 드러내고
겨울 까치 몇 마리 날려 보낸다
어떤 소식을 안고 돌아올까 궁금한 나는
하늘에 닿지 못한 절뚝발이 낙오 까치
한 마리도 마저 날려 보낸다
둘레 길을 오르면서 하늘의 신호음을 기다리는
산 사람들을 보며 문득 하늘에서 내려올
안부가 궁금해진 나는 황급히 귀를 열고
귀를 감싼 목도리도 벗는다
풍년의 예고편인 겨울눈이 눈을 껌벅이며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몸집이 커진 눈송이는 내 머리칼을 미끄럼 타며
둘레 길에 차곡차곡 쌓인다
잠에서 마악 깨어난 강아지들은
산을 향해 한바탕 소리를 날려 보낸다
돌아오는 내 발밑에서 뽀드득 뽀드득
물레를 잣는 겨울눈이 천근으로 쳐진
마음의 응어리를 산뜻하게 씻어내린다
겨울 아침 산행은 둘레길이 맛깔스럽다
겨울 정동진에서
김지향
그해 겨울 나는 새벽 바닷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간과 시간 사이 서너 꼭지의 남자와 여자가 안개를 신고 희미하게 서성거렸다 동쪽 산꼭대기에 박힌 한 여자의 눈이 비명을 질렀다 ‘모래시계가 얼어붙었다’ 여자의 어깨 위로 한 뼘쯤 더 긴 남자의 고개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동쪽 산마루 밑에서 볼그레한 저고리만 벗어 올릴 뿐 해는 아직 머리칼 한 올 보여주지 않았다 성미 급한 남자가 둑 위에 얼어붙은 돌멩이를 차 던지다 그 자리에서 깨금발로 뛰었다 엄숙하고 신비한 우주의 송신음을 기다리듯 나는 오그라든 목으로 우주의 옆구리에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둑 위의 남자가 와~와~와~ 소리 질렀다 멀리 발치께의 수평선이 빨갛게 끓어올랐다 점점 몸 부피를 넓혀갔다 문득 바다 배꼽에서 새빨간 홍시가 물너울에 스르륵 말리고 있었다 나도 겁결에 돌멩이를 던졌다 홍시는 얼룩도 지지 않고 활짝 웃고 있는 커다란 장미 다발로 피어올랐다 바로 내 이마 위로 뜨끔거리는 빛이 흐르고 온몸이 얼음에서 풀려났다 얼음이 빠져나간 여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모두 주저앉았다 해는 점점 작아지면서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 달고 부지런히 공간 밖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해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아침 공기를 부수고 반짝이는 검은 몸을 뽐내며 넓고 희뿌연 공간 한가운데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자는 둑 목에 기침 소리를 질러 넣으며 정신 나간 사람들 정신의 복판을 가로질러 기차가 달려들고 있었다.
계석리(癸石里)에게
김지향
세상 돌다 헛디딘 다리 하나 들고
네에게 가고 싶다
거기 사람이 찾아내지 않은
주인 없는 별이 소나기처럼 무너져내려
사락사락 밟히는
빛살 홀로 사는 그곳
사람에게 찢겨
마음 고픈 사람아
그대도 가면 빛을 밟을 수 있어!
있어, 있어, 희망을 싸 들고 가보라
세상을 쓰러뜨린 바람이
살찐 회오리로 뭉칠 때 회오리 사이로
번쩍, 칼날처럼 치솟는 빛
돌담에 기대어 눈 감고 있으면
둘 셋씩 팔짱 끼고 달려오는 빛들과
환하게 벗어진 이마의 땅,
이마 위로 높게 열린 하늘 속
파란 사파이어 건널목
건너가면 시간도 뒹굴어 뒤통수만 보이는
견고한 절망 생산자도 덩달아
절망을 단산하는 그곳,
밤도 새벽도 없는 빛투성이 낮천지가
희망, 희망, 희망,
귓속말로 입을 오물거리며 나온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이 없이도
생애가 빛나는 그곳
내딛는 발가락마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빛에
씻기는 그곳
세상에게 살 베어
마음 아픈 사람아
잠자지 않아도 눈이 아프지 않은 그 곳
새파란 나뭇가지에 앉아 보라
저절로 푸른 물오른 온몸에서
술렁술렁 파도 소리 일어나리라
오염된 지느러미 씻기는 소리, 소리,
쉬지 않으리
(세상 돌다 헛디딘 다리 하나 들고
빛뿐인 그곳으로 가고 싶다)
계절이 초록 옷을 입을 때
김지향
초록 옷 입은 계절이
초록 바람을 먹고
펄럭펄럭 옷깃을 펄럭일 때
우리는 참 싱그러운 초록이 된다
숲들이 옷깃을 펄럭일 때마다
사람은 온통 초록 물감통에 빠져
초록 숲이 된다
초록 숲이 된 우리의 가슴에
휘파람새가 숨어들어
몸 전체를 연주한다
휘파람새가 우리 몸을 연주할 동안은
사람의 눈흘김도 게걸음도 거치른
거치른 말솜씨도 일시에 화해로운 노래가 된다
초록 노래로 흐른다
고추잠자리
김지향
쪽빛 하늘 멀리 날아가는 잠자리비행기
뒤꽁무니가 불꽃을 낳는다
쉬지 않고 따라가는 가을바람이
톡 톡 따 먹는다
빨갛게 몸이 굽힌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 때마다
차르르 떨어지는 고추잠자리
잠자리채를 들고 아이들이 달려간다
잠자리채가 두들길 때마다
채마밭 고춧대에서 간당간당 요령을 흔들며
새빨갛게 얼굴 붉힌 고추가 자지러진다
아이들은 멍청히 서서 빈 잠자리채만 쳐다볼 뿐
고층 아파트
김지향
담쟁이도 미끄러지고만 고층 아파트
터질 듯 볼록볼록한 품을 안고 기다란 키로 버티고 서서
아침이면 술술 풀리는 연줄처럼 구겨 넣은 내장 다 풀어내고
밤이면 빠짐없이 되감아 넣는 아파트
그 품속엔 어떤 생이 출렁이고 있는지 밖에선 깜박이는 창유리만 보일 뿐
때때로 요란한 소리로 몸을 띄운 비행기가 머리 위를 짓뭉개지만
(내다보는 사람의 귓바퀴만 찢기고 말지만)
아파트 눈썹 하나 긁지 못한 비행기 하늘 저 쪽으로 튕겨 올라가면서
아파트의 불 눈에 넌지시 읽힌다
팽팽한 하늘이 여전히 황금 엽서를 펼쳐놓고
화살 없는 활시위로 빛을 쏘아대고 있지만
하늘빛의 쇼올을 두르고 날마다 우주 속에 머리를 넣어
세계 별들의 집회에서 보내오는 초음속의 송신음을 듣고 있는
아파트가 깊은 잠에 빠질 땐 요술 지팡이의 어린 왕자가
머리를 톡톡 치며 깨운다 어린 왕자의 요술 지팡이를
어서 빨리 읽어 보라고
공간 밖 공간
김지향
휙 휙 시간이 달아난다 어디로 가는 거지
궁금한 나는 시간의 손을 끌어 잡는다
잽싸게 뿌리치고 달아나는 비밀 같은 시간
나는 온 힘을 모아 시간의 꽁지를 끌어당긴다
시간은 공간 밖 공간의 레일 위로 훌쩍 몸을 빼 돌린다
나도 잽싸게 마우스를 잡고 공간 밖 공간의 나라로
함께 동댕이쳐 진다
이미 이사 온 사람들로 배불뚝이 된 공간 밖 세상
초만원의 공간마다 금이 찍 찌익 나 있다
누가 만들어 공간 밖 공간의 개찰구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는지
한꺼번에 밧줄 같은 길들이 살아나 얽히고
한꺼번에 박음질이 잘 된 방들이 환하게 불을 켜
어린 복제인간들의 눈을 밝혀주고
한꺼번에 닮은꼴의 아이들이 지상엔 없는 속력을 만들어
까불까불 콩새 꼬리 같은 서버를 타고 둥둥 떠다니고
한꺼번에 구문이 안 맞는 낯선 말들을 만들어
사방천지 아무데나 낭자하게 팡 팡 쏟아놓는다
남은 지상 사람들아,
공간 밖 공간을 쳐다봐라
새로 돋은 새 풀처럼 톡 톡 머리들이 튀어나와 있지!
겉옷을 벗어둔 지상은 이미 눈동자 빠진 허공일 뿐
내일이면 없어질 구멍 뚫린 항아리일 뿐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수명 다한 낡은 잡기장 같은
지상을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하며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린다
또다시 생기발랄한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공간 밖 공간에도 봄이 살아난다
김지향
어제는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를 마구잡이로 들락거린 세상 소리를 마셨다
오늘은 모두가 한꺼번에 세상 소리로 뒤엉켜 고속 메일이 되어 온 세상에 흩어진다
삶을 짜서 널어놓은 빨랫줄 밑에서 뚝 뚝 떨어지는 삶의 옹아리를 받아먹은 씨앗들을 마우스에 담아 나는 수평선 저쪽 가물거리는 안개나라에 보낸다
안개는 없어지고 파란 풀밭이 태어난다
풀밭 속에서 살살 풀리는 햇살을 등에 업고 새파란 바람을 받아먹는 병아리 떼, 놋쇠 자물통 아이디를 훔쳐 열고 쫓아 나온 성급한 노란 병아리 몇 개비 꽃 대궁에 끼워져 서로 팔짱을 걸고 노란 꽃으로 피어난다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 줄다리기하는 고속 안테나 위에서 누가 먼저 정보를 빼앗나 싸움판을 벌이는 마우스의 숨 가쁜 속력을 타고 금빛 날개를 파닥거리는 본적도 없는 낯선 메일들이 내게도 와락 달려든다
가장 먼저 받은 이름 없는 메일을 연다 날개를 편 봄이 내려선 공간 밖 공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 뜰 잔디밭에 쫑 쫑 쫑 뛰어가는 방금 마악 배꼽 떨어진 봄을 한입 가득 따 넣은 메일, 나는 숨차게 따라가며 봄 꼭지를 톡 따고 빠뜨린 꼭지도 톡 딴다.
세상은 온통 샛노란 물감통에 빠져 진저리를 친다.
공중창고에서
김지향
공중창고에 갇히면 나가지 못함
활주로가 녹이 슬어?
아니 시체로 귀환할까 봐?
삼십 년 전에도 그랬었지
공중을 도려내 보이는 분화구마다
지상의 배기가스가 터져 나오고
군데군데 열려있는 공기통은
뚱뚱 부어 손톱자국도 남지 않았지
우리는 소리쳤지
밟을 때 마다 딱딱 발이 맞힌다고
공중에 갇혀서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복막염 앓는 공기를 살려내라고
전능자에게 비명을 쏘아올렸지
우주공간을 빙빙 돌며
전능자가 있을 끝과 끝을
두 주먹으로 땅, 땅, 두들겼지
그로부터 대 심판 날 인줄 알고 사는 우리
오늘도 심판 날 인줄 아는 우리
복막염 공기는 때때로 배에서 산성비를 뽑아내고
비닐 주머니도 없는 우리는
거짓말장이, 사기꾼! 하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치지만
공기가 살아난다고
전능자가 손을 내밀리라고
믿었던 우리는 오늘도 우리 자신의
희망에게 배반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시체로 귀환하지 않고
활주로가 떨어져 나간
공중창고에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고 있음
과속 운행 중의 환상 하나
김지향
(어느 날 그곳으로 전송된 나는
뼈뿐인 산호 줄기들이 하늘로 줄기차게
뻗어 있는 미래관에서 컴퓨터가 찍어낸
뻣뻣한 키다리 복사 인간을 보았다)
내 몸이 갑자기 메밀묵처럼 으스러진 날
몸속 의식 속 영혼이 시한폭탄처럼 터져
그곳으로 날아갔다
과거 속에서 자란 키를 이끌고
과거 속에서 먹은 나이를 이끌고
과거 속에서 내지른 소리를 이끌고
과거 속에서 흘린 눈물을 이끌고
과거 속에서 날린 웃음을 이끌고
눈물 속에 잠긴 사랑을
웃음 속에 묻힌 젊음을
내 영혼의 카메라에 잡힌 모든
기억의 입자들을 움켜쥐고
지독하게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공기 열차를 타고 하늘도 안 보이는 블랙홀
지독하게 아득한 그 미래 터널을 뚫고 나갔다
빛이 소나기로 퍼부어 하얀 백지가 된
세계, 거리엔 검은 먼지가 나불거리지 않는
대리석 베란다엔 빛으로 키운 보석 꽃들이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눈 시리게 낯선
세계, 키다리 뻣뻣한 다리의 복사 인간들이
재빨리 찍어내는 연습지의 세계
아직 시간이 안 된, 함부로 벗긴 장면들을
한 장 한 장 눈으로 겪으며 바로
실습장으로 뛰어들 순간
나는 생각에 잠겼다
만일 내가 돌아가지 않을 때
의식의 입자들이 제각기 흩어져
제 갈 길로 갔다가
다시 몸으로 모여들지 않을 때
나는 몸만 과거 세기에 두고
영혼 홀로 미래 세기에서
무섭게 위험한 속력의 PC통신을 타고
복사 인간 속을 들락거리며
영영 돌아서지 않는 분리된 삶을
새로 시작해야 할까
눈앞이 너무 부셔 아찔한 찰나
나는 과속 운행 중인 환상에서 그만
찰칵 빠져 나왔다
아, 신나는 날이었다.
굴렁쇠와 아이
김지향
안녕!
바람도 한옆으로 밀쳐 세워놓고
쨍쨍한 햇빛 속을 날마다 보는
아이 하나 손을 파랗게 흔들며 간다
처음엔
숨죽인 운동장 머리에
삐뚤삐뚤 서투른 팽이치기처럼
바퀴가 푸득거렸다
아이의 새파란 손가락에 걸린 새파란 시간이
밀쳐놓은 바람을 흔들어 운동장 전체를 띄웠다
와~와~와~ 운동장으로 뛰어든
사람의, 빌딩의, 공장의, 창문의, 손뼉 소리가
귀먹은 시간의 귀속까지 요동쳤다
중간엔
팔딱이는 운동장 심장부를 뛰는
아이보다 큰 덩치의 굴렁쇠에 성미 급한
젊은 시간이 고무줄처럼 튕겨 올라붙었다
올라붙은 시간이 심술을 부렸다
검은 보자기를 공중에 펼쳐 햇빛을 걷어냈다
공중은 문득 뚜껑 열린 물병이 되었다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소나기로 몸 바꾸는 순간
굴렁쇠에 무너지는 보드불럭 담장이 걸리고
굴렁쇠에 쓰러지는 공장 굴뚝이 걸리고
굴렁쇠에 달려가는 사물의 아우성이 걸리고
굴렁쇠에 흙탕물을 몰아오는 바람 갈퀴가 걸리고…
나중엔
손을 흔드는 아이의 손등이
주름 깊은 어둠덩이를 밀고
노을 감긴 운동장 하복부를 마악 돌아
얽힌 실타래를 온몸으로 풀어내듯
은빛의 시간을 나부끼며 느긋하게 간다
내가 나를 밀고 나간다 운동장 밖으로
안녕!
궤도이탈 중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마디 문을 열어놓고
바람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렀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삶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 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구겨 넣으며
터널 같은 세상 한 비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가는 중이다
그대 향기
김지향
상수리 나뭇잎에
우레 소리를 몰고 와 바람이 앉는다
상수리나무는 깊은 잠을 버리고
엷은 안개를 게우며 일어난다
그림자도 같이 어둠도 같이
바람 속으로 숨는
상수리밭은 소용돌이치는 소리의 강이 된다
세력 있는 강의 소용돌이 틈에서
더욱 싱그럽게 더욱 뜨겁게
그대 향기 그대 노래
오늘은 분수로 솟아올라라
솟아올라 어둠을 지워버려라
그리다 만 가을 한 장
김지향
까슬까슬 빛이 바스러지는 가을엔 바람도 빌딩 꼭지에 꽁지를 내려놓고 쉰다
몸이 싸늘한 바람을 기다리는 나무마다 지름길로 온 따끈거리는
햇볕의 불 주사에 따끔따끔 이마가 빨갛게 익는다
고루 박힌 이빨을 죄다 내놓고 노랗게 웃는
옥수수 머리칼도 붉게 볶여 곱슬거린다
도토리 키 재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꿈치를 쳐들고 있는 고추밭,
진다홍 손가락을 대롱거리는 탱탱한 고추 송이에 탁, 탁, 날개를 치며
고추잠자리 떼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건너편 사과밭 사과나무엔 공들여 키운 아기의 발그레한 뺨을
쓰다듬는 거치른 손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제 곧 가을 공간을 청소할 싸늘한 바람이 몸을 일으켜
그리다 만 삽화 한 장 걷어내 화덕으로, 곳간으로 보낼
키를 들고 총총히 달려올 차례만 남았다
그리다 만 삽화 한 컷
김지향
호수를 본다
물속엔 내일도 모레도 연속극처럼 찾아올 것이다
오늘은 지나가다 오늘의 뒷축이 물속에 빠져 주저앉았다
나와 앉은키가 나란한 시간도
눈 부라리며 마주 앉았다
호반에 쪼그리고 있는 개망초꽃 한 줌
물 위엔 다리 걸쳐 논 부러진 노 같은 외로움
햇빛으로 부러진 데를 주사 맞고 나면
곧 일어설 것 같이 퍼득이는 싱그러움이
내면을 드러낸 말간 살결의 호수를 덮는다
헐리다만 산자락엔 나온 지 오래된
벌겋게 익은 햇살이 흙에 묻혀 떠나지 못하는
쨍쨍한 한낮
땀 흘리는 숲속에서
물끄러미 낚싯대에 눈을 꽂은
풀죽은 사람 위로 산새 두셋
미끄러져 내려와
이슬 같은 웃음 방울을 떨구어 준다
통·통·튀어 오르는 구슬 두셋
물속엔 사람 그림자가 늘어난다
낚싯대에 하루 전체를 매단 단골손님과
반나절만 드리운 뜨내기가
서로 힐끔힐끔 눈싸움하는 동안
연거푸 송사리 떼가 찌를 뱉어내는 동안
들것에 실려 가는 맥빠진 외로움처럼
흙 속에 묻혀 있던 햇살이
후닥닥, 일어나 신발도 벗은 채
발가락만 남은 오늘에게 업혀
호수 너머 아랫마을로 첨벙첨벙 건너간다
한낮은 복병처럼 숲속 골짝으로 숨으러 가고.
그림자의 뒷모습
김지향
그때
알 수 없는 한 그림자와
마주 서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나는 그에게 자꾸 끌려가고 있었다
그림자는 밤에만 다녔다
그림자가 자고 있을 때
아침이 오지만 그림자는 자지 않으므로
아침은 창 밖에 서 있었다
밤은 가고 또 와도
그림자는 죽지 않았다
무성하게 머리털까지 자라나
내 키를 덮었다
나는 그림자의 갈퀴에 쓸려 내려갔다
앗질앗질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려
마침내 밑바닥에 닿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날카로운 한 줄의 빛이
새들어와
그림자를 쏘았다
머리털 갈퀴도 수염도 쏘았다
아, 나는 죽음을 이끌고 나가는
그림자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이겨 버렸다
비로소
나의 창안엔 아침이 왔다
그물
김지향
내 손톱 속에서 빛나는 수만 개의
그물이 나와
수만 개의 금빛 손가락을 펴고
얼굴이 터져 떨어지는 해를 받친다
만 리 밖을 달려 나가 땅끝을 다 휘젓고
발병이 나서 고개를 떨구며 돌아와
쏟아지는 바람
바람의 조각 수염이 내 그물에 와서 걸린다
흐름이 끝난 시간을 붙들어매고
사방에 펴 걸었던 치마폭을 걷어
끝난 난간에 뛰어내리는 하늘을
땅의 끝난 데에 나와 기다리던
그물이 받는다
모든 깨진 얼굴은 그물로 꿰매고
끝난 모든 것은 서로 붙잡아 그물로 잇는다
세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술렁임을 누르고 천천히 가라앉아 간다
그 해 여름밤의 뱃고동 소리
김지향
그 해 여름밤 강을 품고 앉은 섬이
나를 낚시터에 앉혀놓았다
시간도 바람도 잠이 든 하늘과 강 사이
웅성거리는 서너 채 그림자만 떠다니고 있었다
건너편 강 끝에 머리를 넣고 물만 마시던
낚싯대가 문득 파르르 몸을 떨었다
‘물었다 물었어’ 웅성거리던 소리 중 한 토막이
잠든 공기를 부-욱 찢었다
소리 위로 한 소절 굵고 기운찬 뱃고동 소리가
길게 물결 위로 줄을 그었다
화들짝 놀라 깬 바람이 한 바퀴
강의 등덜미를 휘몰고 달렸다
물속에 푹 빠진 찌가 깨금발로 뛰었다
언제나처럼 웅장한 우주의 송신음이나 기다리듯
나는 지긋이 귓바퀴를 모으고 졸고 있는 무덤이 되었다
바로 그 때 돌아오는 유람선이
다시 한번 강바닥에 뚜우- 고동소리를 질러 넣었다
우주선을 탄 듯 무지개 빛 불빛 사이로
손을 흔드는 물체들이 깔깔거렸다
문득 유람선 배꼽에서 커다란 지뢰 덩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물너울을 일으키며 자객처럼 불쑥 치솟은
고래, 머리가 뱃전을 들이받았다
유람선이 팽이가 되어 강 위로 팽그르르 돌았다
몽땅 하늘로 원격 전송되는 줄 알고
아찔, 정신을 잃은 나,
이윽고 잠잠한 강가 나는 예순 몇 마디로 무늬 진
낚싯대만 낚아들고 꿈밖으로 동댕이쳐져 있었다
그해 여름 숲속에서
김지향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 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부으며
탬버린이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 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 바퀴를 굴린다
숲속은 온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 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기다림
김지향
기약하고 떠난 뒤 아니올 동안
꽃밭엔 잡초만이 우거져 있네
그 후론 날마다 아니 피는 꽃이여
행여나 오늘은 맺혀지려나
보내고 한세월을 방황할 동안
창문엔 달빛조차 오지를 않네
그 후론 날마다 아니 여는 창이여
행여나 오늘은 열려지려나
싸움하고 떠난 뒤 아니 올 동안
식탁엔 라면만이 불어 터져 있네
그 후론 날마다 배가 고픈 내 신세
행여나 오늘은 돌아오려나
보내고 한세월을 방황할 동안
침실엔 어느 누구 오지를 않네
그 후론 날마다 꾸리꾸리 냄새나
행여나 오늘은 풀어보려나
기차가 온다
김지향
그해 겨울 나는 정동진 새벽 바닷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간과 시간 사이 서너 꼭지의 남자와 여자가 안개를 신고 희미하게 서성거렸다 동쪽 산꼭대기에 박힌 한 여자의 눈이 비명을 질렀다 ‘모래시계가 얼어붙었다’ 여자의 어깨 위로 한 뼘쯤 더 긴 남자의 고개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동쪽 산마루 밑에서 볼그레한 저고리만 벗어 올릴 뿐 해는 아직 머리칼 한 올 보여주지 않았다 성미 급한 남자가 둑 위에 얼어붙은 돌멩이를 차 던지다 그 자리에서 깨금발로 뛰었다 엄숙하고 신비한 우주의 송신음을 기다리듯 나는 오그라든 목으로 우주의 옆구리에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둑 위의 남자가 와~와~와~ 소리 질렀다 멀리 발치께의 수평선이 빨갛게 끓어올랐다 점점 몸 부피를 넓혀갔다 문득 바다 배꼽에서 새빨간 모닥불이 물너울에 스르륵 말리고 있었다 나도 겁결에 돌멩이를 던졌다 모닥불은 얼룩도 지지 않고 활짝 웃고 있는 장미 다발로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바로 내 이마 위로 뜨끔거리는 빛이 흐르고 온몸이 얼음에서 풀려났다 얼음이 빠져나간 여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모두 주저앉았다 해는 점점 작아지면서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 달고 부지런히 공간 밖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해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아침 공기를 부수고 햇살을 쪼개며 희뿌연 공간 한가운데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자는 둑 목에 찢어지는 기침 소리를 질러 넣으며 정신 나간 사람들 정신의 복판을 가로질러 기차가 와락 달려들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김지향
내가 탄 급행열차는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열차에서 눈이
사물 1.2.3을 먹는다
햇빛은 덩그렇게 나를 켜고 따라온다
가로수가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열차는 가만히 서서 가로수를 파먹는다
개망초꽃이 밟히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쳐 궁둥이로 들어와 이마로 나간다
열차는 서서 창문으로 스르륵 뭉개버린다
무리 소나무가 누렇게 뜬 어깨쭉지를 디밀어본다
열차는 서서 발통으로 깔아뭉갠다
밭이랑이 줄을 그으며 달려들었다 짓뭉개진다
논바닥이 찰랑찰랑 물장구를 치며 들어왔다
열차 눈에 물 먹이고 지워진다
지우개를 달고 서 있는 열차를 타고 내 눈은
사물 1.2.3을 먹고도 눈물 한 방울 내놓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 벗어두고 눈만 기차를 타고
다 뭉개진 금수강산을 보러 가다니!
길 위에서
김지향
오늘도 시간은 낯선 길을 찾아간다
연일 나의 팔다리에 노끈을 묶어
일회용의 디지털 속으로 끌고 간다
(들어가서 보면 “낯설게“는 사실무근이지만)
그곳에도 내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황사 바람 떼 몰려다니고
그곳에도 내 가슴을 막아서는
강철 무지개 급강하하고
그곳에도 내 귀를 짓밟는
차량의 발 기성을 부리고
일방통행 길 위에서
재생 불능의 디지털 비가
디지털 시간에게 끌려가며 구부린 허리
툭, 툭. 부러져 내리고 있다
길이 길을 버리다
김지향
현관을 나선다
길이 길의 몸속에 내 발을 꽂아준다
“빨리 내 몸을 밟고 건너가 봐, 시간이 없어‘
길이 선심을 쓰듯 내 발을 밀어 던진다
나는 길에 튕겨진다
발이 큰 나는 길에 담겨지지 않는다
되튕겨져 나와 나는 길을 구경한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길머리가 없어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한다
반복에 반복을 해도 길머리는 살아 나오지 않는다
‘이런, 길이 길을 버리다니!’
나도 길을 버린다
길이 나를 버리기 전에
길이 만들어놓은 난삽한 길을 먼저 버린 나는
튕겨져 나와 길 밖에서 길 밖을 꿰뚫어 본다
갈래 갈래로 땅이 쪼개지고 있다
땅은 쪼개지는 대로 길이 된다
길 밖의 길로 내가 가고 있다
오만 개의 내가 오만 개의 길로 가고 있다
잔뜩 몸을 부풀린 짐차는 짐차의 길로 정면 돌파하고
잔뜩 몸을 움츠린 승용차는 승용차의 길로 정면 돌진하고
나는 내가 만든 나의 길로 정면통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오욕칠정의 나의 분신들은 지금 어디로
빙글빙글 우회할지
아찔, 현기증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길이 된 꽃잎
김지향
꽃샘바람이 얼굴을 가리고 도둑처럼 쳐들어온다
꽃은 제 몸을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꽁꽁 묶었지만
찢어진 비망록처럼 부욱, 찢겨진다
나무는 제 몸에서 걸어 나간 꽃을 보며
뚝,뚝 눈물을 떨군다
무거운 고요가 눈물 위에 떨어진다
옷깃 속에 목을 접어 넣은 사람들은
나무의 눈물로 돋아난 새 풀을 못 본 채
마구 짓밟고 간다
신명이 난 바람이 입에 면도칼을 달고
뾰족뾰족 밖으로 내민 꽃의 희망을
줄을 긋듯 주루룩 삭발시킨다
봄들어 속력을 내는 시간을 따라
나무는 꽃잎을 연거푸 토해내고
바람은 연거푸 면도칼로 꽃머리를 부러뜨린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후레지아
부러져 길이 된 꽃의 희망을
한 아름 품어 안고 나는 한바탕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열전을 벌인다
깊은 밤
김지향
별이 꽃밭에 떨어졌다 나는
꽃밭을 한 삽 떠서 마당 가운데
던져 넣었다 마당 전체를 빛이 들고 있다
나는 빛을 손바닥에 퍼 담았다 새나가지 않도록
주먹을 꼭 쥐고 어둠을 넘어와 내 책상 꽃병에 꽂았다
빛은 꽂히지 않았다 꽃밭에도 빛은 한 개도 뜨지 않았다
시간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어둠 속으로 힘껏 떠나간다
사람도 떠나가고 아파트도 떠나가고 길도 가로수도
모두 어둠 속으로 떠나간다 꿈을 담는 그릇은
꿈들을 털어내고 낡아가는 헌것 채 한 개비씩
어둠에게 끌려간다 시간은 죽어가는 헌것들을
어둠에게 넘기느라 죽을 시간도 없다고
투덜댄다 투덜대며 죽어간다
(새로 피어날 내일의 스펙터클 꿈을 새로 만들며)
방문을 닫은 깊은 밤이 내 가슴속 우주에도 가득 깔렸다
꽃잎의 귀
김지향
꽃밭이 있는 고층 아파트 발코니로 이사 온
매 발톱 꽃나무 몇 날은 기가 빠진 듯 졸다
오늘 문득 높은 공기를 맛본 듯
고개를 쳐들고 팔팔 일어나고 있다
쫑긋쫑긋 귀를 세우고 사람 쪽으로
목을 내밀어 흐드러진 세상 소리를 연거푸 퍼먹는다
너무 많은 세상 소리를 뼈째로 허겁지겁 집어삼킨다
말이 내뱉는 가시를 소금물로 알고 들이킨 꽃의 귓불엔
오늘 아침 유리 조각들이 매 발톱처럼 뾰족뾰족 매달려 있네
꿈 혹은 풀밭
김지향
해꼬리를 잡고
삼백몇 날을 걸어도
보이지 않네
어딘가에 펼쳐져 있을
꿈에만 나타난 풀밭
빛살이 반질거리는 풀밭
장다리꽃이 안개밭으로 뜬
머리 위 풍경처럼 걸려서
가늘가늘 숨죽이고
날개만 떨던 바람이
내 목으로 알싸한 꽃물을
내려보내던 풀밭
숯 많은 풀잎의 귀밑머리 자르며
하늘하늘 살 비비며 마구 짓이기며
바람이 능멸을 해도
아픈 표정 하나 없이
포근한 가슴 열어주던 풀밭
꿈 깨고 나면
보이지 않네
육체를 벗은 꿈에만
가벼운 발이
담장 위로 치뻗은 풀의 머리를
으깨고 가는 꿈에만
어머니처럼 껴안아 주던 풀밭,
나는 먼 훗날에도 피어날
삶의 꽃씨 한 톨 심어놓고
발병 나게 찾아갔지만 어느 날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잠 깨고 나니 갈 수 없네
꿈마저 잃어버린 나는
오늘 대문을 박차고 나가서
지상의 길을 종일토록 헤맨다
휘청휘청 내 키가 꼬부라져 접히도록
달려가는 시간의 뒤통수도 보이지 않도록
삼백몇 날을 헤매고 다녀도
꿈에 본 풀밭은 나오지 않네
때때로 잡동사니 화물차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발에 먼지만 진흙처럼 쌓여가는
금지구역이 많은 널따란 철조망 속
내 발이 닿는 곳마다
철조망이 옭아매는 그런 땅만 있네
아, 지상의 삶은 철조망과 진흙
바로 그것이네
길모퉁이 저 혼자
웃다 울다 하는
외톨이 꽃 한 송이의 외로움도
나만 같은
이 삶 속에선
풀밭은 안 보이고
진흙밭에 깊이 박혀
빠지지 않는 내 발자국의 아픔만이
지나간 시간의 증인이 되네
나뭇가지에 매 맞는 바람
김지향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어젯밤까지
바람을 따라가던 나는 말했다
바람은 곁에서 힘없이 부러져 있지만
나뭇가지가 바람을 멀리 내쫓고 있지만
나뭇가지엔 불끈불끈 불뚝 힘이 출렁이고 있지만
바람이 나뭇가지를 낚아채어
홀랑, 몸 벗겨 부끄럽게 한다고 어젯밤까지
나는 분명히 말했다
봄이 되면
바람이 달려와서 나뭇가지에
꽃으로 매달린다고
바람꽃이 봄을 피운다고
바람이 아무리 속삭여 주어도
나와도 같이
믿어주지 않는 나뭇가지가
오늘 보니
바람을 마구 때려 패대기치고 있네
패대기 한 번에
봄꽃 한 주먹씩 피어나고 있네
바람은 오늘 종일 나뭇가지에 매맞고 있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
나는 오늘부터 믿기로 했다.)
나뭇잎이 시를 쓴다
김지향
고장 난 시간이 가을 속에 멈춰 섰다
세상의 휴게소는 만원을 이루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나는 갓길로 내쫓겼다
길은 바퀴 없이도 잘 굴러 간다
내 앞에 스르륵 미끄러져 온 길이
가득 담은 나뭇잎의 붓끝으로 빨간 시를 쓴다
한 자국도 옮기지 못하는 창백한 내 발등에
마음 아린 나뭇잎이 쯧. 쯧. 쯧. 혀를 차며
나뭇잎 사이사이 초롱꽃처럼 달랑거리는
수은등을 끌어와 불빛 같은 시를 붓는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온 우주에 시를 쓴다
하늘에다 땅에다 사람의 몸에다
빨간 시를 쓴다)
블랙홀에서 불어온 먼지바람에도
돌담 위에도 터널 속에도 주렁주렁
시가 익어간다
사람들은 숨차게 뛰어온 삶의 굴레를 벗어
가을의 가지에 걸어놓고
가을 내 시를 읽다가 스스로 시가 되어버린다
(높이 올라간 인간들의 투정을 미리 알아챈
눈치 빠른 하늘도 마침내 가슴을 열고
비명 같은 삿대질의 시위로 찢기고 찢겨
뚝, 뚝 핏방울의 시를 떨어뜨리며)
시간은 멀지 않아 바퀴를 돌린다고 송신해 온다
나의 디지털 하늘
김지향
디지털 버턴을 쥐고 나는 손이 붙어 있는지
더듬어 본다
너무 가벼워 날아간 줄만 알고 나는
나에게 육체가 있느냐고
물어본다
육체가 가벼울 때
나무의 날개 사이로 보인다
하늘이 살이 붓지도 않고 양옆으로
열림이 환히 보인다
그때 하늘이 먹은
새들이 꽃씨를 물고 팔랑팔랑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나뭇잎이 열매를 매달고 동글동글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바람이 물결 무늬 주름진 치마폭을 펄럭이며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햇살이 치마끈을 풀어 땅에 수정 기둥을 세우며 나온다
날아 나온 몸 바뀐 존재들은 가벼운 육체로
땅의 안 바뀐 존재들과 하나의 허리띠에 묶여
하나가 된다
나의 디지털 하늘은 이제 배가 푹 꺼져
땅에 내려와 누웠다
우주가 일직선으로 길게 깔려버리는.
낚싯밥, 별
김지향
둑도 없는 하늘 위에서
누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지
해만 뜨면 하늘 바다에 가득한 별들을
남김없이 낚아낸다 밤이면 강물에 뜨는 별들은
한밤이 되기 전에 미리 하늘 낚싯밥이 되지만
진화되다 만 가로등도 힘껏 어둠을 살라 먹고
박제품처럼 나무 가지에 목을 걸치고
비취빛을 토하는 별로 뜨지만
살라 먹은 어둠이 위장으로 내려가기 바쁘게
낚싯밥이 되고 말지만
뜨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은
언제나 가슴 방만 채우고 앉아있어
낚싯밥이 될 걱정은 없다
사람은 해가 별에게 가기 전에
별이 해에게 가기 전에
낚싯밥이 되어버리는 먼 그리움의
거리만 알면 된다
낮달을 보며
김지향
길을 가다 문득
하늘만 쳐다본 날
가물가물 점 같은 새가
까맣게 떠서
말간 낮달을 끌고 가더니
하얀 몸의 낮달이
진종일 불에 타는 고통으로
이지러지며 혈관이 터지더니
밤이면 진홍빛의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몸이 타는 고통의 낮달을 보며
그때서야 나는 후닥딱,
너에게 준 아픔을 깨달았다
나도 혈관이 터져 진흙이 될 때까지
지켜볼 하나님의 불눈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늘 내 피곤을 털어낼
원두막 그 뽕나무 집을 찾아
길을 가다 문득
하늘 기슭으로 끌려간 반쪽뿐인
낮달을 보며 뜨끔거리는
바늘 꽂는 아픔
예삿일이 아니다
(영혼은 육체가 없이도 아픔을 알데
하나님의 분신임도 뚜렷이 알데)
길도 중간 부위를 넘어선 때에야
빼마른 낮달이 태양의 덤불을
빠져나지 못하듯
나의 우주도 하나님의 손바닥임이
유리알처럼 보이데
내부 수리 중
김지향
오늘도 나는 리모컨으로 세상을 연다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켜는 먼지
사이로 키를 일으킨 빌딩들이
마음 놓고 꺼낸 내장을 말리고 있다
내장 속에 숨어있던 정적들이
한 소쿠리씩 쏟아진다
정적 밑에 가만히 엎드렸다 툭, 툭,
불거지는 것들이 투명유리 속처럼 보인다
부서진 욕정 부스러기, 배배꼬인 야망 찌꺼기
햇빛의 주사바늘 밑에서 와글와글 끓고 있다
나는 얼른 리모컨으로 빌딩을 꺼버린다
그림자까지 모두 삭제하고
재빨리 장면이 바뀐다
좁다란 블록담 옆으로 측백나무가
길을 끌고 파랗게 간다
돌아보지 않고 가는 길옆으로
자잘한 꽃나무들을 안고 손을 흔드는
해바라기 긴 허리도 리모컨 눈의 조리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다시 또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빌딩 지붕 위로 길이 떠서 올라간다
피가 하얗게 씻긴 길을 끌고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득히 좁아진 길 끝 거기는 어느 세상일까
아, 쪽문이 보인다
사람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멈추어 있구나
지금 마악 도착한 진공 포장지에 싼
한 사람의 손발에선
아직도 야생마 같은 피가
포장지 밖으로 지고 있구나
나는 다시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장면이 바뀌지 않는다
리모컨도 들어가 보지 않은 길 끝 세상,
“내부 수리 중”이란 쪽지가
커다랗게 나부끼고 있을 뿐
사람들은 길 끝에서 하얗게 기다리고 있다
내일에게 주는 안부
김지향
어디 사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이름에게
나는 안부를 보낸다
해마다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
내일에게
내일이면 늦어 오늘 나는
일년치의 안부를 한꺼번에 날려보낸다
이번엔 머리꼭지라도 좀
드러내 보라고
내일 뒤 어디에 숨어있을 내일에게까지
두 손으로 안부를 불어 보내면서
안부가 가서 닿는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망원렌즈 먼지를 닦아내고
뒤꿈치의 돌베개를 곧추 돋우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내일에게
뜨거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들끝에다 바람귀에다
입을 대고
내일의 이름을 불러댄다
목청껏 목청껏 불러댄다
그러나 내일은 어딘가에 들앉아
내 목소리를 묘사하며 웃고만 있겠지
내가 잠잘 때 그도 잠을
내가 죄로 배부를 때 그도 죄를
내가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도 거짓말을
흉내 내겠지
그런 내일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진실임이 알려질 때까지
내가 내일의 사랑을
무식하게 신앙하는 환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나는 주소불명의 내일에게
오늘 일 년 치의 안녕 안녕을
한 무더기 띄워 보낸다
그래, 그렇고말고
내일이여, 안녕!
눈
김지향
작은 제 몸속에
몇 갑절의 큰 몸을 넣고 있다니!
작은 몸속에 앉아 있는
우주의 볼에 돋은 사마귀 같은
내가 그려 넣은 종이비행기
지금 마악 산 너머 하늘 길을 넘고 있음을
말문 막힌 나는 보고만 있다
큰 몸이 보지 못하는 작은 몸
그게 바로 내 눈동자라니!
눈사람
김지향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눈 속의 여자
김지향
표정도 없이 하늘이 웃는다
좌악 열린 하늘 입에서
소금 알갱이가 내린다
한 여자가 하늘 웃음 속으로 삭제된다
삭제되었다 나온 그 여자가 눈을 깜박일 때 마다
눈썹에서 해묵은 때가 지워진다
소금 가루가 덮어버린 그 여자의 머리가
낮게 내려온 하늘 살이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손잡은 하얀 우주를
그 여자의 실티 같은 머리칼이 금을 긋는다
하얀 소금 알갱이에 묻힌 여자의
하얗게 씻긴 가슴 속 우주엔
하늘 살을 보내준 이의 눈동자도 담긴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백지의 우주로 재생된다
눈뜨는 잎사귀
김지향
모서리가 살아난 장독대 옆구리
황금 날개 바람이 앉아 있다
날개는 이내 열리고 바람은 날고 있다
귀를 세워 설치던 진눈깨비는
귀가 잘려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깁고 있던 먹구름도
팔짱을 끼고 제집으로 돌아서고
채소 빛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비어 있는 마당 열 두 군데를
새로 와서 채우는 열두 빛 햇살
지구 밖의 봄 돋는 소리도 몰고 와
초록빛 비늘을 뿌린다
황금 실을 뿜어낸다
동면 속에 접어든 오동나무는
꿈을 털고 일어서고
장독대 질항아리도
이마를 쳐들고 깨어난다
엎드렸던 내 의식은 눈썹을 내밀어
저 창밖의 파도 치는 초록물감 속을
눈뜨는 잎사귀가 되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눈물처럼 떨어지는
김지향
하늘엔 시린 눈이 사라졌다
팔팔 살아서 끓는 정기 쏟아붓던
그 눈,
이젠 어디로 가고 없다
하늘은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 가슴 뿐
멍청히 떠서 휘모는 폭우에도 귀우뚱거린다
하늘 가슴에 대고
마구잡이로 쏘아 올린 사람들의 돌팔매
녹도 슬지 않고 이제껏 쩌렁쩌렁 박혀있으니
이제껏 분수처럼 치솟는 돌팔매
피투성이 가슴으로 맞고 있으니
어쩌나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의 깊은 물음 던지는 듯
돌팔매 박힐 때마다
빗물처럼 주루룩, 떨어지는 눈물을
사람들은 그게 사랑인 줄
하늘의 가없는 사랑인 줄 모른다
눈사람
김지향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 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바람 소리를 만들고 있다
눈 속의 여자
김지향
표정도 없이 하늘이 웃는다
좌악 열린 하늘 입에서
소금 알갱이가 내린다
한 여자가 하늘 웃음 속으로 삭제된다
삭제되었다 나온 그 여자가 눈을 깜박일 때 마다
눈썹에서 해묵은 때가 지워진다
소금 가루가 덮어버린 그 여자의 머리가
낮게 내려온 하늘 살이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손잡은 하얀 우주를
그 여자의 실티 같은 머리칼이 금을 긋는다
하얀 소금 알갱이에 묻힌 여자의
하얗게 씻긴 가슴 속 우주엔
하늘 살을 보내준 이의 눈동자도 담긴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백지의 우주로 재생된다
눈이 내린다
김지향
눈이 내린다
꿈을 잃어버린 가슴마다
소중한 향수처럼
머리 숙여 기다리는
순백의 소망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사랑을 잃어버린 가슴마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너와 나 막힌 담을 허무는
무구의 은총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모두 다 떠나버린 빈 가슴마다
채우는 친리의 말씀처럼
허물을 용서하고 돌아와
하나가 되는
눈부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린다
다리뿐인 햇빛
김지향
나는 발코니 쪽문에서
총알을 날렸다 갈퀴를 세우고 뛰어가던
강이 퐁, 퐁, 퐁, 장파열을 일으켰다
가닥가닥 실타래처럼 잘려 나가는
물의 살결들
둑 너머 둑으로 물의 실타래는 마음 놓고
퍼져나갔다
둑을 마구 넘어갔다
바둑돌들이 빠진 둑
이마가 뜯겨나갔다
(둑 밖으로 쫓겨나온 물고기들이 눈을 뜨고 잔다
주사바늘을 손톱처럼 세운 햇빛이 물고기에게
불주사를 놨다 까맣게 타버린 물고기들에게
햇빛은 연속사격을 가했다)
나는 햇빛의 뷸꽃 사격이 나를 겨냥한 줄도 모르고
또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햇빛을 관통했다 1초 동안
내 눈에 튀어든 빛 가루가 까맣게 눈을 태웠다
까만 눈을 끌고 간 블랙홀, 1초의 어지러움 너머
빛 부신 은빛 나라가 반짝였다 1초 동안
강물을 뚫고 햇빛을 뚫어야 보이는 하얀 나라!
햇빛은 수평도 수직도 아닌
땅도 나라도 없는 빼 마르고 기다란
다리만 촘촘하다
다리에 구멍을 내도 금방 아물어버리는 그
물렁살이 은빛의 하얀 나라를 감추고 있다니!
다시 또 절망에게
김지향
오늘도 길은 낯선 곳으로 뚫고 간다
시간은 날마다
내 발에 노끈을 묶어 낯선 길로 끌고 가지만
(낯선 시간에 희망을 걸고) 나는 따라가지만
그곳도 똑같은 세상이구나
절망아, 그곳에도 황사 바람 몰아부치고
산성비 쏟아지는 진펄이구나
우회선도 없는 일차 선로 중앙부에 접어든
내 발은 위험과 손잡고
점점 거세게 몰아부치는 황사 바람에
키가 다 구겨져서
점점 거칠게 퍼부어대는 산성비에
살갗이 닳아 떨어져서
쓰러졌다 일어남을 반복하며
오늘도 길에게 코가 꿰인 내 발이
따라가며 이제 그만 불시착이라도 하고 싶다
시간의 노끈이 내 발을 놓아주기를,
삶과 죽음이 폭파되어 한 세계로
어우러지기를 꿈꾸며
누군가에게 들키면 지상에선
영영 소각되어 버릴 위태로운 꿈을 몰래 꾸며
세상을 깨뜨렸다 일으키는 의식운동을 되풀이한다
절망아, 내가 너무 두려움 없이
낯선 길을, 낯선 시간을 사랑했나 봐
깨끗한 그곳인줄 알았던
내 믿음이 배반당한 삶(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절망아, 네게 길들여진 삶
나는 그 삶의 주인일까
삶이 나의 주인일까
아직도 석연치 않은 물음을 안고
오늘도 나와 삶은 낯선 시간 속으로 가고 있다.
다시 열린 봄날에
김지향
활짝 열린 봄 속으로 들어선다
겨우내 외롭던 꽃밭이 식구들로 가득하다
빵긋거리는 노랑 빨강 하양 뺨들을 다독이며
*창준의 손을 잡은 나는
꽃으로 피던 시절을 생각하며 걷는다
아이의 손에는 빨간 꽃이 내 손에는 하얀 꽃이 복사된다
지난겨울 떨군 꽃의 눈물이
다시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린 세대와 낡은 세대가 서로 다른 생각 속에
꽃들을 복사한다
시간은 그 시간이 아닌데 꽃들은 왜
그 꽃이지? 하고 아이가 물어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이의 말은 왜? 왜?로부터 시작하고
길어지는 나의 대답엔 귀를 닫아버린다
대답에 궁색한 나는 아이가 스스로 알아갈
길만 안내해준다
아이는 얼마 안가 혼자서 봄 속을 달려갈 것이다
단풍나무 아래서
김지향
머리칼 끝마다 호롱불을 켠
단풍나무 사이로
나는 얼굴을 붉히며 걸어간다
불에 데인 부리를 털며
산새 두세 마리
녹슨 손풍금 건반 위로 내려간다
도. 레. 미. 파. 솔
손풍금이 떨구는 통통한 유리구슬을
주워 먹는다
내가 붉힌 얼굴 사이 사이로
속살이 다 찬 호수가 움직임을 그치고 있다
숨도 안 쉬는 호수 속에
내 얼굴이 하나 커다랗게 떠 있다
아직도 한 구석이 빈 어둔 동굴
어디서 뛰어든 당돌한
사슴 한 마리는
재가 되고 있는 단풍잎을 비켜서서
유난히 높은 코를 반짝이며
내 얼굴에 와 포개진다
디지털 길
김지향
클릭 한 번으로 까불까불 까불며
길이 나온다
뒤로는 가지 않는 길이
온몸을 드러낸 채 출렁거린다
길은 가득 담긴 발가락들에게
치뻗은 화살표대로 가라
가라 빨리 가라 명령한다
화살표 끝에 얹혀있는
산발한 빛과 깨알 같은 기호를 업고
길은 초침보다 빨리 새 길을 낳는다
새 길은 때도 없이 홀딱,
세상을 먹어 치운다
이미 다 문드러져 끝만 남은 세상
끝만 남은 발가락의 사람들은
길이 된 기호 속으로 밀려들어가
침묵에 갇혀있는 꿈을 집어 들지만
금방 소화불량증에 걸려 나뒹군다
화살표의 빛을 헤쳐 본다
드러난 길섶,
마악 알에서 나온 새가
입을 열고 먹이를 기다리지만
나가서 길을 잃어버린 어미 새
돌아옴을 잊어버렸는지?
잠깐만 한눈팔아도 저절로
다른 세상으로 태어나버리는 마술 같은 길
길로 들어서면 뒤로 갈수 없다
뒤꿈치에 비어져 나온 길은
재빨리 역사 속으로 지워져버린다
앞으로만 가는 디지털, 디지털,
머리가 없는 사람들에겐
길은 자꾸 위태위태해진다.
따먹은 잡동사니
김지향
오늘도 안 가본 길을 걷는다
(낯설게 달려오는 세상
따먹고 싶은 나는 방에 갇히지 못한다)
나는 날마다 휴대폰으로
세상을 따 먹는다
온갖 잡동사니를 물어오는
휴대폰 머리꼭지의 머리카락
그에겐 하늘 내장도 저장되어 있다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따먹고 싶어
산꼭대기 상상봉으로 발을 끌어 올렸다
가만히 누워서 하늘의 혈관을 찾고 있을
그 때 그 하늘을
내가 백발백중의 투창질로 구멍을 냈다
휴대폰이 하늘 풍선 한 자락을 움켜쥐고
풍선 배꼽을 탕 ,탕, 탕, 우그러뜨렸다
한쪽 귀퉁이가 먼저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휴대폰 머리칼이 먹어치운 하늘이
휴대폰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너무 많은 하늘의 영양소들이 엉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패대기치고 있다
별은 별끼리의 도킹으로 부화가 되는지
휴대폰 입으로 별싸라기가 새나와
온몸에 아이섀도우를 칠해 놓고
삐리리- 삐리리- 부딪는 마찰음으로
내 청각신경을 괴롭힌다
한 요리사가 허드레 잡동사니 날것들을
냄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며 볶아대는 소리
냄비를 굴릴 때마다 휴대폰 온몸이
난잡하게 뒤틀린다 뒤틀리는 휴대폰
아, 알고 보니 내 속이네 내 속을 뒤집어 놓고 있네
나는 사람일까 물체일까
무엇이든 꿀꺽 삼키기만 하면 소화가 되어버리니!
따먹은 하늘의 잡동사니
내일은 또 무엇이 되어 태어날지?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김지향
열 손가락을 부채살처럼 펴고
컴퓨터 키보드를 한꺼번에 눌렀다
잠시 엷은 주름 사이
그림자뿐인 유리집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녀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임도 없이
습관적으로 머리꼭지를 드밀어넣었다
유리집에 잠입한 그녀는
간첩처럼 귀를 세우고 몰래 벽에 걸려 엿본다
정물 하나 없는 움직임들이 무리무리 지나간다
나뭇잎 널브러진 키 낮은 산들이 지나가고
이마 훤한 지붕들이 지나가고
강아지 떼가 고양이 떼가 돼지 떼가 지나가고
먼지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해묵은 미해결 건수가 지나가고
지나가는 건수들은 모두 줄을 서듯 입에
앞의 꼬리를 물고 물고 물고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형상을 가진 사물들은
모두 발도 없이 유리집 사이버 속으로 들어간다
인터넷 A가 인터넷 B와 인터넷 B가 인터넷 C와
불똥을 퉁기며 번개처럼 접속된다
온 우주가 인터넷 속에서 한 개
점이 되어 그녀 두뇌 속으로 도랑물처럼
기어들어 간다
나는 삐걱거리는 두뇌로
가끔은 형이상 속으로 증발되고 싶다.
땡볕의 불주사
김지향
날마다 몸속을 검색해 내는
환한 몸 속 서버가 오늘은 땡볕에 검색 당한다
불 바늘을 쥔 땡볕이 몸속 서버에 불 주사를 놓으며
헐거워진 마음을 거머쥐고 톡 톡 두들긴다
어서 몸에 불을 심어라 심어라 다잡으며
사막 한 채로 주저앉아 있는 연소 불량의 몸속을
땡볕으로 마저 태우려는 여름 한복판
온 내면의 입을 모두 열어놓고 뚜껑 열린 시한폭탄
한 묶음 감춘 땡볕의 불쏘시개가 처들어온다
순간, 우주 속으로 떠오른 내 몸 수 세기의 삼라만상을 한꺼번에 읽는다
1초의 속독법을 익히느라 오관 전체를 활짝 여는 찰나,
깊이 박힌 몸속 모래 산이 우주 창고로 날아 가버린
오늘 땅에 발을 딛고 서서 나는
새 독서법으로 새 삶을 읽어가는 중이다
로봇과 가을
김지향
여름이 시들시들 시들 때
나는 내가 키우는 로봇을 풀어놓았다
파닥파닥 팔을 부딪치며 보듬고 있던 모닥불을
옆의 옆 앞의 앞 나무 겨드랑이에 쏟아 부었다
부글부글 끓는 나무 가슴팍에서 불길이 척추 위로 치뻗었다
로봇에게 지고 만 여름이 꼬리를 스르륵 감추었다
나무 겨드랑이엔 불똥 같은 뾰루지가 입을 뽀르통, 내밀었다
찻길 너머 산속, 키 낮은 풀밭에서도
로봇이 화약통을 엎질렀다
온 산이 빨갛게 성이 났다
찔레꽃 덤불도 엉겅퀴도 단풍나무도
낯익은 얼굴들이 새빨갛게 불이 났다
당분간 시간은 가을에게 발목 잡혀 산속 깊이 주저앉았지만
불길 속을 혼자 달려가는 불덩이 로봇, 멈출 줄 모르는
나의 로봇,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온몸에 화약통을 달아준 나는
나의 서투른 고집 같은 시행착오를 후회하지만.
리모컨과 풍경
김지향
휴일
심심한 저녁때
나는 창가에서 잠자는 리모콘을 깨운다
리모컨의 뇌세포는 나보다 훨씬 개수가 많은지
나보다 먼저 내 생각을 알고 있다
리모컨이 창밖의 창을 열어제낀다
깊숙이 집어넣은 내 눈에 들어온 사람들
가라앉은 몸속에 다 저문 삶을 꼬깃꼬깃
접어 넣고 앉아 있다
사람을 지나 창밖으로 몸을 누인
강변북로로 간다
멀리 다림질이 잘된 빌딩 머리에
홍시 같은 햇덩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몸이 뭉개지고 있다
빌딩 목으로 넘어가는 다리 짧은 시간이
원추형으로 으깨진 핏덩이 몸을 끌어간다
꼴깍, 나의 리모컨 조리개가
전기 고압선에 얽혀 뇌세포 한 둘쯤 죽어버렸는지
강변 한쪽 풍경이 지워졌다 한쪽 구석은 접혀졌다
접혀진 풍경 옆구리 버티고 선 다리 사이
또 한개 다리가 강을 건너뛰고 있다
눈에 안약을 넣은 수은등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강변북로의 삶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접혀진 풍경을 펴본다
뒤로 밀쳐진 사람들이 나온다
어둠이 되고 있는 사람의 의미 있는 아픔들이 내다본다
방금 빌딩 목울대로 넘어간 햇덩이의 각혈처럼
(바깥 풍경만 보는 이들은 아무도 접혀진 삶의 아픔을 모르지만)
눈치 빠른 나의 리모컨은 아직 자지도 않지만
남은 다른 쪽의 풍경을 다음 휴일로 넘겨버린다
깊은 밑바닥이 드러날 땐 얼른 조리개를 꺼버리는
리모컨, 나보다 지능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김지향
소나기 온 밤 집 없는 도둑고양이, 어둔 헛간에서 내 신경을 긁어댔다 나는 노트북을 들고 깜깜한 어둠 속을 잠입했다 순간, 차량의 전조등 같은 사파이어가 잽싸게 내 눈에 발을 넣었다 나를 신어볼 눈치였다 나도 잽싸게 인터넷 사이트를 열었다 고양이 눈동자가 왜 사파이어인지 인터넷 만물박사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만물박사를 깨우는 사이 사파이어는 한바탕 잠든 공기를 뒤흔들어놓고 뒷구멍으로 내뺐다
창밖엔 소나기에 섞여 번개가 몇 차례 창문에 불똥을 갈겼다 어둠에 잠겨있던 나는 문득 고양이가 가엾어졌다 (번개에 명중되었을지도 모를 집 없는 도둑 고양이!) 요 며칠 툭, 부러뜨려 놓았던 여린 감정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감정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인터넷 속에서 ‘마음’의 소재지를 찾아보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부에 누워있는 내장 속속들이 잎사귀를 들춰보며 조직검사하듯 사이트와 사이트를 한 잎 한 잎 열어제쳤다 (처음에 ‘마음‘은 무엇이 어떻게 짜깁기 되었을까?)
창밖은 벌써 뿌연 새벽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번개가 창문에 불꽃을 질렀다 언뜻 언뜻 눈을 껌벅이는 벽걸이가 나체를 드러내고 나를 놓아준 어둠이 창밖으로 발을 옮기는, 하늘엔 간간이 꼬리뿐인 전기 코드가 빗금을 긋고 간다 바로 그때 잃어버린 고양이가 야~웅, 자기의 건재함을 알려왔다 아, 그렇군! 잃어버린 생각을 돌려준 고양이, 우레 속에 야영한 그가 반가웠다 이 반갑다는 ‘마음‘이 또 어디에 감춰져 있을까 생각 속에 있을까 생각은 늘 잡동사니로 가득한 머릿속에 있지만.
망원렌즈와 시라세니아 잎
김지향
길과 강 사이가 붙어 있다
붙어 있는 틈새를 뒤로 빼내며
키를 쑤욱 뽑아 올린
하얀 머리의 아파트 발코니가
주춤 뒷짐 지고 서 있다
아파트 머리를 뒤로 밀며 강으로 눈을 내민 망원렌즈는
강물을 복사뼈에 걸치고 바삐 가는 시간을 붙잡느라 부산떤다
낮에는 하늘에 이마 내걸고 오지랖에 하늘 말을 받아 담는
밤에는 강변에 귀를 던져 허드레 폐지 같은 사람의 말들을
귀로 주워 먹는 아직 나이 어린 S아파트
몇 덩이 정적 같은 그의 내부가 궁금한 나의 망원렌즈는
아름다운 정적 내부로 몸 전체를 밀어 넣었다
종일 팔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시라세니아 잎사귀
그가 렌즈의 몸 전체를 움켜쥐었다 앗찔,
혼신의 눈을 모으고 뚫어보는 렌즈 사면이 꽉 막혔다
궁금증의 내부, 아래 위 사방에서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뛰어가며 부딪는 운동장이 되었다
몇 포기 남지 않은 머리칼이 소름처럼 윗마을로 치켜서고
심장 박동 소리가 심지 닳은 호롱불로 가물거리지만
아직 맑은 영혼으로 암호 같은 출구를 찾으며
나의 망원렌즈는 강변 S아파트 내부의
정적을 깨뜨리는 그 시라세니아 잎 속에서
아직은 살아 있다.
머리를 감는다
김지향
모가 닳은 마당 가운데
땅 뿌리를 모아 잡고 있는
풀 의자 그 위에
지난겨울 죽은 향나무 그늘과
새로 이사 온 유자나무 그늘이
의좋게 앉아 하늘의 깊이를 재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 두 번이나
다녀간 들비둘기 두 마리도
종종걸음으로 찾아들어
새로 난 새풀을 쪼으고 있다
촛불을 켜 든 일곱빛 햇살과
일곱 빛 무지개가 내려와
마당 빈칸을 채우고 있다
이 충만한 마당의 생기가
일제히 푸른 하늘 깊은 데로 투신하는 날
아이들은 새옷을 입혀
짙푸른 풀잎상에 마주 앉히고
나는 풀내 나는 얼음물로
머리를 감는다
몸살 앓는 하늘
김지향
간밤 내
깔깔, 봉오리 웃는 소리만 났다
아침에
하늘이 한 뼘도 남지 않았다
봄 내
하늘은 가득 찬 꽃잎으로 몸살을 앓는다
해는 어디에 있는지
진종일 빨간 명주실만 내려보낸다
물이 되는 꿈
김지향
눈을 뜨면 가슴은 없어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없어지고
찢어대는 세상을 향해
펑펑 가슴이 피를 게우지만
사정없이 세상의 바람칼이 찍어내려
없어지는 건 가슴뿐이고
세상에서 가슴으로 건너뛰는
도도한 바람의 회초리가
지나가기만 하면 가슴은
숯빛이 되지만
우리는 회초리의 끝에 붙은
숯빛이라도 좀 벗겨졌으면 하지만
벗겨졌으면 하는 희망도
함께 숯빛이 되었다
숯덩이에 파묻힌
가슴 가슴도 숯덩이를 나눠 먹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늘 속으로 떠오르는
꿈을 꾸었다
하늘 속에 떠오른 가슴이
세상 숯덩이를 닦아낼 비가 되어
세상을 빛낼 은빛의 물이 되어
좍--좍 내린다면
세상의 귀가 하얗게 씻겨
스치는 만상의 눈썹이 빛나겠지만
꿈은 꿈일 뿐
깨고 나면
가슴은 펑펑 피를 게우며
날마다 찢어져 없어지고
바람과 바다
김지향
어젯밤 새도록 바람의 회초리에 매 맞은 바다
아침에 보니 눈꺼풀이 잔뜩 부어올랐다
바람은 바다에게 품고 있는 잡동사니를 내놓으라며
아침에도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바다는 무엇이든 잘도 삼켜버린다
배속에 넣고 있는
우럭 미역 명태 조개 물지렁이 고래 수달 바다쥐빠귀 불가사리
그들의 어린 것까지 바다가 삼킨 잡동사니들은 헤일 수도 없다
잡동사니도 바다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보물이 되어버린다
바람은 때때로 바다에게 보물을 토해내라며
크게 소리치며 바다 몸통을 돌려가며 패대기친다
살이 뜯긴 바다 가슴이 오늘 보니 움집처럼 패였다
바다 뼈가 다 드러나도 품고 있는 보물들은 나올 기미가
서푼 어치도 안 보인다
(잡동사니들은 바다 깊은 가슴 안에서
찰삭찰삭 물장구를 치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문득 바람 배를 가르며 전조등을 켠 유람선 한 채
발을 멈추고 바다 가슴이 보내주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 바람도 함께 서서 잠잠히 듣다가
신명이 났는지 어깨춤을 추며 크게크게 박수를 보낸다
바람은 바다 보물에 쏟은 끈질긴 욕심을 툭, 끊고
유람선을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없다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바다는 지금 오케스트라 연주로
한창 뜨겁게 끓고 있다
바람아
김지향
저무는 세종로 바닥에서
꽃들은 가루로 뭉게져버린다
사람의 가슴에 일어선 비둘기도
죽어 먼지가 되어버린다
구름 밖으로 달아나는 풍선 꼬리를 따라
천 개의 눈이 달리는
아이들의 다리 사이로 어지럽게 내왕하는
매연, 소음, 의사당의 아우성,
높이뛰기 경주에 열을 낸 물가고
그 저울대의 발치에서
이제 실티만 한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아
그대 희고 날카로운 손바닥으로
우리 꽃을 가루내고 우리 정신을 축내는
저 삼불공해(三不公害)
그 악의 혹을 처내어 보라
그대 전신의 능력으로
뿌리까지 내려가서
일일이 간추려 쓸어내고
한 번만 다시 살아날
참사랑의 참 꽃을 피게 해 보라
바람아
바람은 풀 등에 업혀 잔다
김지향
풀밭 속에서 풀밭을 본다
덜 푸른 풀밭이 짙푸른 풀밭을 이고
그네를 타고 논다
멀리 바다 건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가로등도 풀물이 들어 파랗게 살아난다
이 아침을 가로지르는 녹두 새 몇 마리
하늘에 닿지 못한 낙오 공기를 흔들어 깨운다
오늘은 어떤 안부가 날아올까
하늘의 신호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저마다 반짝이는 눈으로 귀를 열고
하늘의 지시를 귀로 받아 적느라 부산 떤다
가슴을 열고 오지랖 귀퉁이에 끼적여 넣는
부스러기 말들은 오랜 소망의 낙수는 아닐는지
오래전에 하늘로 띄운 꿈의 답신은 아닐는지
(사람들이 몰래 다지는 피멍 든 약속처럼
바다 건너 마을의 가로등도 먼 날 어느 별이
흘린 상처의 열매인지 아침내 파랗게 눈 뜨고 있다)
풀밭의 풀들은 아침부터 위안의 노래를 퍼 올린다
풀의 깊은 가슴을 열고 말총벌, 모시나비, 풍뎅이, 베짱이들이
톡, 톡, 톡, 초롱꽃, 팬지, 제비꽃, 씀바귀, 붓꽃, 과꽃, 매발톱,
잡히는 대로 머리끄덩이를 끌어내 풀밭 가득 펼쳐놓는다
하늘의 발치까지 갔다가 낙마한 절뚝발이 낙오바람은
하늘가는 휠체어가 올 때까지 풀이 자아내는 푸른 노래를
타고 만발한 꽃밭 속 풀등에 업혀서 숨죽여 잔다
바람을 타고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마다 지퍼를 열어놓고
바람의 멱살을 휘어잡고 바람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 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생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 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집어넣으며
터널 같은 세상 한 바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 간다.
바람의 반란
김지향
바람이 일어선다
나뭇잎이 나부끼는 가지에서 뚝 끊어져
서쪽 하늘 뺨에 걸려 이빨을 갈고
햇살은 동쪽 산 이마에서 발을 옮기지 못한다
바람이 일어선다
해가 빛을 잃고 구름 뒤에서 물구나무로 벌을 서고
아까부터 바람이 하늘 밖에 세워둔
비가 슬슬 바람의 눈치를 보며 뛰쳐나와
수직으로 빗금을 그으며
땅에 부딪힌다 몸이 으깨진다
바람이 일어선다
땅이 키우는 풀머리가 부러지고
풀머리 밑으로 처박혀 죽은 비로
땅이 지워져 버린다
조금씩 비의 시체에
파먹혀 지워지는 땅을 보는 바람
아직 심장이 멎지 않은 땅에 크게 숨을 불어넣는다
(땅이 없이는 바람의 스펙타클도 허사임을 깨우치고 땅
전체에 엎질러 놓은 반란을 한 장 한 장 걷어내기로 했음)
바람이 일어선다
풀잎과 땅을 움켜쥔 주먹을 풀고
땅의 가슴에 박힌 대못의 상처를 치료 하기로
바람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
바람이 돌아온다
김지향
달빛이 허연 뼈를 뽑아들고
길모퉁이에 비켜 서 있다
흰옷 입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밤을 썰어내는 톱질소리를 내며
구멍 뚫린 공간을 빠져 나간다
시간을 쏠아 먹는 좀 벌레가
발소리를 이고 땅 밖을 기어간다
귀가 게우는 개구리 소리를
둑 모가지에 걸어두고
품팔이 갔던 바람이 돌아온다
조용하다
달이 툭, 땅 가득 떨어질 뿐
흰옷 입은 나무들의 눈이 깨져
사방에 흰빛을 뿌릴 뿐
바람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발끝으로 간다
김지향
사람은 가고 없는 강변 의자에는 눈송이가 몇 앉아
옛날이야기 속으로 가고 있다 눈송이 몇이서 걸어가는
시간의 자국마다 소복소복 모여앉아 여럿이 되고 무리가 되어
입 열린 호주머니에서 옛날이야기를 풀풀 꺼내놓고 앉아있다
한참 후엔
의자 혼자 남겨두고 서로 손을 잡은 눈송이가 무리무리
사람의 머리를 올라타고 부지런히 가고 있다
눈이 오는 날은 잠자는 세상이 깰까 봐 시간도 까치발로 뛰어간다
눈을 머리에 얹은 두세 사람은
팔짱을 끼고 지나간 날의 가슴에서 자고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무겁게 껴입은 이 시대 사건들 위에 겹쳐놓고 구시렁거리며
발끝으로 가다가 무릎으로 가고 있다
(사건의 중간 부위에 빠지면 무릎까지 파묻힌 몸을
빼낼 줄도 모르고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
그것이 무덤인 줄은 빠진 뒤에야 깨닫는다.)
발이 달린 사랑
김지향
사랑은 가슴에서 산다
가슴에서 사는 사랑이
베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알맹이가 없음
하고 나는 손을 쳐든다
혼자서 이렇게,
나의 실험대에 올라온 사랑을
현미경으로 뚫어보았다
사랑, 그 자유분방주의자는
거침없이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제 갈 길로 갈
궁리에 빠져있었다
서로 다른 머리 발 손이
한 덩치로 얽혔을 뿐
틈틈이 발은 손, 손은 발을 배어낸다
그렇지, 그날도
한쪽 발이 베어져 나갔었지
베어낸 자리엔 재빨리 구멍이 들어앉았지
구멍은 자기의 부피를 키우려고
나머지 사랑 지체도 내쫓으려 했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사랑발이 잘려 나간 빈칸을
나는 구멍이 차지하지 말게 하려고
떨며떨며 한쪽이 기우뚱한 가슴으로
사랑 발을 붙잡아오려고 찾아 나섰지
세상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사건 사이
어둠 사이 시기 질투 분쟁 사이
어디에 내 사랑의 발은 걷고 있나
일곱 번씩 일흔 번도 용서해주며
사랑발이 제 맘대로 잘려 나간
무례를 용서해 주며
아, 일곱 번째 용서함
바로 그때였다
나의 사랑 발은
세상 구석 어느 개골창에 빠져
어둠 그것이 되어 있었다
발톱 한 귀퉁이에도 제 모습이
남아있지 않게,
나는 이 사실을
사랑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오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랑 발을 집어 들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돌아다 본 사람들은
그게 이전부터
어둠이라고 우겨댔다
내 가슴에서 배어져나간
사랑의 발임을 믿지 않는 동안
실은 그게 나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버린 나의 발임을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않고
나를 보며 웃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채고 소스라쳤다
얇은 바람 이빨에도
삭둑삭둑 잘려지는 보드라운 잎사귀
사랑아,
집을 나가면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는
그러므로 되돌아올 줄도 모르는
눈썰미 없는 사랑아~
하고 나는 골목 어귀에서
지는 해를 붙잡고
찾아낸 사랑의 발을
그 어둠을 씼는다
발이 하는 독서
김지향
현관문을 나선다 열린 봄의 입 속에 활짝 펴진 책장을 밟고 간다 덜컥, 발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책장이 있다 다리를 홀쳐맨 삐죽한 책갈피 속엔 나보다 훨씬 늦게 나온 버들가지 휜 허리를 뚫고 바람꽃처럼 팔랑거리는 연두 빛 손톱, 내 발이 읽는다 발의 속독이 끝나기 전에 깨난 생목숨이 봄바람의 목도리를 내 발에 걸친다 내 발은 새 풀잎의 생목숨을 얼른 읽는다 내 느린 발의 읽기가 끝나기 전에 겹치기로 굴러오는 은방울 소리 소리는 소리를 업고 소리의 팔랑개비 속으로 들어가 내 발을 굴린다 발의 귀가 새끼제비를 읽는다 발의 속력이 소리를 다 읽기도 전에 등 뒤에 버려둔 시냇물 한 토막, 마악 풀기 시작한 몸 전체를 들고 졸졸졸 실타래로 따라온다 연거푸 풀려나는 시냇물의 몸을 읽지못해 첨벙거리는 뒤꿈치를 한 사발 떠서 높이 던진다 나는 곧추 수직선을 그으며 물살에 박힌다 사방으로 튀는 물살 몇 점 물고 떠오르는 물새 한 쌍, 말갛게 씻긴 하늘치마에 까만 무늬를 수놓는다 앉은뱅이 장다리꽃이 활짝 면사포를 벗고나와 어서 읽으라고 젖은 내 발을 끌어안고 해죽이 웃는다 산모롱이 큰 길가 뒷짐지고 서 있는 고층 아파트에 이마 부딪쳐 서쪽으로 몸을 돌리는 햇덩이 새빨간 오지랖을 다 풀어 헤치기 전에 어서 읽어라 읽어라 다잡는다
한꺼번에 다 읽지 못한 책장을 덮으며 (한꺼번에 비어져 나온 욕망도 잘라내며) 눈을 감는 내 발, 나에게 나를 들키고 나니 오늘은 숨겨놓을 신비가 없구나
방안의 삶
김지향
잘 익은 봄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깨끗이 세탁된 볕이 만 리로 뻗은 오늘
사람은 모두 볕이 차단된 방에서
컴퓨터 몸을 만지며 쏟아져 나오는 깨알 글자의
바둑알 부딪는 소리에 빠져들어 있다
컴퓨터 바둑알 소리로 팽팽한 방에서
헤엄치는 사람의 눈과 손은
바깥세상의 산과 들이 게우는 생선
비늘 같은
생기와 햇볕을 모두 만진다 그리고 지워버린다
바깥 기억들이 점점 지워지는
컴퓨터가 사람 몸 속에 들앉은
방안의 삶
지난 세대에겐 낯익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잘 맞춰 입어야 할 컴퓨터 삶의
한가운데 와 있으니
이젠 컴퓨터 생리에 길들여져야 할밖에
시간과 손잡은 컴퓨터의 속력이 불편하다고
컴퓨터 생리가 너무 빡빡해
시간 밖 세계로 궤도 이탈하고 싶다고
그녀는 투덜대지만
자꾸 뒤로 밀리는 그녀 두뇌가
궤도 이탈을 연기해 낼지?
궤도 이탈을 위해 눈을 접고
활짝 날개를 펴 볼지?
창밖 잘 익은 봄 거리가 그녀를 맞으려고
깨끗이 세탁된 볕을 깔아놓고 있지만.
백지 공간
김지향
어제까지 거뭇하게 그을린 길이
새하얀 살에 금을 내고 간다
창밖엔 꽁꽁 얼어붙은 허드레 세상이
속살을 내놓고 앉아있다
빳빳한 허공을 붙들고
척추를 연거푸 눕히는 눈발을 베며
한 줄로 줄서기 하는 갈가마귀 떼
허공에 대롱대롱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다
쉬지 않고 오는 눈발에 매 맞는
가로수 하얀 바지가랑이 사이
자꾸 뒤로 미끄럼 타는 차량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는 구세기 세상
누더기 소리들을 깔아뭉개는 중이다
별똥별도 숨어버린 밤
백지로 채워진 공간에 남은
한물간 세상도 죽어 있다
내일 새 세기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햇빛은 날을 펴 놓지 않아도 된다.
벽 허물기
김지향
바람도 빗겨 간 가슴 넓은 산줄기를 안고
안개가 명주실 치마폭을 말아 올리는 중이다
햇살이 아득히 먼 발아래서 자꾸 바스라진다
새파란 가슴을 드러낸 산줄기들 바람에 쓸린
기러기 한 두름 안아드리고 있다
방금 마악 허공 위의 하늘을 찢으며
치솟은 우주선 한 채,
우주선을 타고도 세상을 내다보는 사람들 손엔
손가락만 한 디카 폰 하나씩 들려있다
디카폰은 잽싸게 구름 살을 헤집고
옆으로 지나가는 세상 풍경에 드르륵
밑줄을 그으며 풍경 눈알에다 새겨 넣은 의미를
몽땅 베껴 낸다
우주선이 우주정거장에 발을 내릴 땐
우주에서 발사하는
발통 없이도 시간을 잘 굴리는 비행접시 몇 채
세상 창공으로 떠난다
바람 소리만 걸려있는 지상 정거장에는
수많은 어린 왕자들이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키를 휘청이며 별을 찾고 있다.
(세상에서 하늘 위의 하늘로 오가는 사람들 일찌감치
육체에서 육체 위의 육체로도 들락거리고 있었네)
별은 내 눈에서 뜬다
김지향
내가 만지는 사물마다 머리 조아리며 굴리는
쟁·쟁한 은방울의 합창
별은 내 눈에서 뜬다는 발신음 한 소절을
또렷하게 열린 내 귀가 또박또박 주워먹는다
지난날 하늘의 셀로판지에 반점으로 돋던 별
그가 이제 보니 내 가슴에 새파란 피멍으로
푸욱, 박혀 알을 낳는지 삽시간에
나의 우주가 청보석 복사기가 되었네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가슴의 블랙홀 벽에 낳은 알을 주욱 -
널어놓는지?)
오늘은 내가 별에게 신발을 신겨준다
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에게서
새로 그린 삽화 한 장 튕겨나가듯
단숨에 블랙홀 요새를 철거해버리고
고속 디지털 안테나를 타고 뛰쳐 나가네
(하늘도 하늘의 하늘도 아닌
내가 눈을 얹는 거기에 작은 우주같은
내 별은 수도 없이 내 눈에서 뜨지만)
별아, 이제는 해산의 아픔도 없는
별아,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자주 몸 바꾸는
별아, 내가 목청껏 불러도 빙글빙글 바뀌는
성대로 나를 어지럽게만 하는
별아, 이제는 그만 내 눈에서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
봄 꿈 1호
김지향
하늘에 쌓인 비,
올이 풀렸다
터진 실밥이 날리다가
와르르 치마폭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땅 위의 무덤 같은 내 초막을 덮쳤다
집 전체를 차지하고도 배가 고픈
비가
사방으로 갈기를 뻗어
떠내려 오는 비명을 걷어 삼키고도 배가 고픈
비가
등줄기를 치켜들고 바람이 되어 달린다
비켜, 비켜, 소리 지르며 넘어지는
집 기둥을 잡고 버티던 나는
기둥과 함께 나둥그러져
머리에 대못으로 박히는 비의 부리를
두 주먹으로 짓 으깼지만
머리칼 하나 남기지 않고
벌초나 하듯 싸악, 쓸어 쥐며
비가 땅끝으로 가는 중이다
삶의 필름이 말끔히 씻겨
백지가 된 나는
땅끝의 풍경을 백지에 주워 담아
새 필름으로 땅 끝에서
하늘가는 삶을 새로 시작하려다가
깨고 보니 애석함뿐인
황홀한 봄꿈이었다.
봄날 그리고 개울
김지향
멀리 쑥밭에 얼굴을 넣고
둑길 하나 푸른 댕기처럼 나풀나풀 가고 있다
진종일 오르내리며 미끄럼 타는 아이들 발길에
등덜미가 빤질하게 닳아있는 둑길 옆구리
밑창이 드러난 개울 속
헤엄치는 올챙이를 따라
첨벙거리는 아이들 말아 올린
바짓가랑이 사이로
물질경이 몇 잎 파란 손을 흔들고 있다
잠자리채를 들고 바람을 타고 가는
아이들 잠자리채 속엔 파란 하늘만 담겨
팔랑팔랑 오지랖에 바람을 넣고 달린다
이 한 장의 단조로운 풍경을 깔아놓고
봄날은 느릿느릿 가다가 저문다
봄 명주실 웃음
김지향
오늘 문득 실바람이 세상을 열어젖힌다
실바람 손에 든 초록 칩을 나뭇가지 겨드랑이마다
꼭꼭 묻는다 나무 겨드랑이엔 초록 손톱이 돋아나고
손톱 밑에선 뽀르통 내민 새 입술을 열어
진달래 개나리 초롱꽃 뻐꾹채 노루귀 제비꽃
줄줄이 명주실 웃음을 좌악 널어놓는다
실바람 요술 지팡이에 올라탄 나비 몇 마리
몇 됫박씩 꽃가루를 흩뿌리며 세상의 몸에 봄을 입힌다
깔 깔 깔 세상은 종일 명주실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 웃음을 따라 날아온 제비도 명주실 웃음을 날개에 태워
우주 밖으로 날아가느라 부산 떤다
나는 종일 봄 웃음을 퍼먹으며
한 발 더 진화한 세상 속에 서 있다
봄밤을 태우는 초롱꽃
김지향
키를 꼬부려 한껏 품고 있던 불씨를 드디어 내놓은 나무들
나무들이 오지랖읕 열 때마다 뭉텅 뭉텅 불무더기가 나온다
곁에 섰던 바람이 체머리를 흔들며 뛰어간다
바람이 뛰어가며 체머리를 흔들 때마다
불씨도 사방으로 퉁겨간다
겨우내 곤히 자던 강이 입을 크게 열고 물줄기를 쏘아 올린다
바람이 펴놓은 하늘로 치솟은 물줄기 초롱꽃으로 내려온다
바람이 강둑으로 몸을 누인다
따라가던 길도 옆으로 초롱꽃을 끼어 차고 드러눕는다
바람도 진화하는지 길 없는 길을 메어치며 쏙쏙 초롱 혀를 날름거리지만
사람들은 초롱불에 데이지도 않고 와~와~ 소리만 지르며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봄밤도 불길처럼 마음을 태우던 아픔도 불꽃에 타다 잠든다
타지도 않은 나는 봄 문턱을 빠져나와 초롱불 곁에 멍청히 서서
불꽃을 휘날리는 뜨거운 바람만 자꾸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봄비 그리고 새싹
김지향
공간 밖 공간에서 자물쇠 망가진 분수가
허름한 지상의 버티칼을 열어 제치고
자꾸 몸을 헐어내고 있다
미안한 듯 고개를 수그리며
어머니 몸을 뚫고 제멋대로 솟아 나와
환한 세상 구경을 하고 있는
앙증스런 손가락들이
땅의 얼굴을 곰보로 구겨놓고
팔랑개비처럼 팔랑팔랑 흔들어대며
자꾸 물을 부어주는 아버지 안녕!
공간 밖 공간에다 대고 고개를 꾸벅거린다
하룻밤 사이 수만 장의 파란
그림엽서를 땅끝까지 펼쳐놓은 아이들.
봄비, 그리고 아이와 새총
김지향
전깃줄에 미끄럼 타는 물방울을
발가락으로 구슬치기하는 제비 두세 마리
발코니 창문에서 한쪽 눈에 눈씨를 모은
아이는 새총 개머리판 고무줄을 힘껏 당겼다
땅! 전깃줄이 한번 휘청거리고 구멍 뚫린 제비의
발가락 너머 은반지처럼 뽀얀 하늘이
똥그랗게 앉아있다
(어제는 제비가 전깃줄을 떠나 공간 밖 공간으로
절뚝이며 넘어가고
오늘은 바람도 몸을 숨긴 명주 커튼 친 하늘에
없는 제비의 피 묻은 발자국만 꾹꾹, 찍혀있다
- 너는 알지?)
봄비 속에서
김지향
돌담 위에서
나무등걸에서
방울방울 푸른 물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방울엔 갈고리가 있어
풀들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길게 목이 뽑혀져 나온 풀꽃들이
부끄러워 바위틈에 얼굴을 파묻는다
풀꽃들의 얼굴은 숨을수록 더욱 불거져 나오고
벌써 이마가 반짝이는 쑥잎이
나무 등걸에 쑥물을 들이고 있다
회양나무 쭈그렸던 허리도 벌떡 일어나
머리를 씻고 종아리를 씻고
부리가 새파란 새끼 제비를 태우고 있다
빗물 쫑, 쫑, 떨어진 자리마다
깨끗한 얼굴, 깨끗한 세상
꽃분홍 꽃밭에선
꽃분홍 꽃망울들 불꽃놀이하고
불티 송이송이
산과 들에
멀리멀리 뛰어간다
아, 불꽃 뛰어가는 송이 속에
나는 또 왜 섞여 있나
화끈화끈 가슴이 달아
나이도 줄줄 흘려 버리면서
새로 피는 꽃이
처음 있는 꽃이 되려고
뛰어가니
어쩌나
봄 어지럼증
김지향
축대 밑으로
꽁지 빠진 찬바람의
머리칼이 마저 빠져나갔다
햇볕에 성긴 머리털 몇 개
흔들며 연분홍 부리의 풋병아리들이
짧은 종아리를 내놓았다
골목에서
제기차기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아이들이 골목을 찢어놓는 소리
뒤로
창문만 열고 내다본 나는
가슴에 오래 꽂아두고 싶은
일기장처럼
유년의 한때에 눈이
꽂힌다
깜짝깜짝 놀라 뛰는 관자놀이로
저기압에 눌린 머릿속
어지럼증이 다시 도진다
(어느새 나도
아이들의 발치께로 떠밀린
원경이 되었구나)
봄을 낳는 나무들
김지향
후미진 골짜기
흰 보선 신은 채
볼록볼록 배를 안고
기도하는 나무들
남녘땅 익은 바람이 건너와
톡, 톡, 건드릴 때마다
꽃송이 하나씩 낳는다
아프고도 괴로운 겨울을
만석의 몸으로 버티더니
아직도 머리엔 흰 비녀 꽂은 채
줄줄이 꽃송이 낳기 바쁜 나무들
(산기슭마다 나무들의 아픔이
빨갛게 피었네)
저 터진 꽃송이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을 꺼내 보며
가슴에 햇덩이 하나씩 품어
꽃송이의 삶에게 열기를 보낸다
후미진 골짜기
산꿩이 홰를 치며
목청을 뽑는 긴 봄날
창 열고 내다보면
아직은 맵싸한 산 이마
절반은 안개에 싸여있네
봄이 나를 읽는다
김지향
누군가 세상 버티칼을 열어 제친다
봄이 아장 아장 걸어온다
나무도 없는 빌딩 꼭지에 만지면 사그라질 황금빛이 쿡, 주저앉는다
황금빛 속에 가라앉은 빌딩이 얼뜨기 내 눈을 읽는다
누군가 평퍼줌하게 눕혀놓은 평지에 발을 넣고 있는 나무들이
돌돌 말린 들판을 쫘악 펴 놓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노랑 물감을
군데군데 뿌리는 중이다
버스에서 뛰어내린 바람 한 소절이 방금 나온 개나리 목을 뽑아내
온 들판에 노란 바다를 깔아놓는다 촐랑촐랑 노랑물의 항아리들이
내 눈을 읽는다
누군가 불을 낸 하늘 기슭 불긋불긋 몸 태운 조개구름이
천천히 걸어가다 잠깐 멈추어 입 다문 채 할 말이 많은
내 눈을 멍청히 읽는다
개나리 목이 창 안을 기웃거리다 푹 빠진
모니터 폴더 속에 숨었다 나왔다 하며 언 몸을 풀어내는
키보드 커서가 내 눈에 담긴 개나리 말을 읽는다
누군가 이끌고 가는 병정놀이 행진처럼 발소리 맞추어 가다 서다
하는 자판기가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내 눈을 읽는다
이제 내 눈은 기계음도 바람소리도 아닌 합성음의 추상어로
아지랑이 같은 감탄사를 마구 뿜어내고 있다
봄 편지
김지향
들 끝에서
조그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내 눈이 주워 먹었다
내 눈엔 뾰족뾰족
샛노란 개나리가 돋아났다
개나리는 시간마다
2*4*6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작년에 져버린
들 밖의 봄이
세상 속에 가득 깔렸다
나비는 봄의 배달부였다
봄, 혹은 안개꽃
김지향
봄눈이 초록 물을 떨구며 나르고
알싸한 바람이 초록 물에 젖으며
투정을 부리고
안개꽃이 머리를 흔들며
자꾸 구겨져 내리는 망사 손수건을
털어내기 바쁘고
창밖과 창안은 서로 다른 안개꽃들이
안개를 피우며 머리만 빼 들고
물방울처럼 흘러 다니고
(창밖 세상은 안개꽃 부딪침 또는
뒤엉킴일 뿐)
열아홉 사춘기 때
맨 처음 감춰두었던 안개꽃 사랑을
더듬더듬 찾아낼 수 있을지
바람의 그 낡고 거친 손이
붙잡으면 이내 사그라지는
안개 같은 처음 사랑,
왜 하필 헝클어진 머리칼로
봄눈 속에 목을 빼고 있는지
봄눈이 초록 눈물로 내리는 창밖
몸 풀린 바람이 큰 손바닥을 펴고
새하얀 볼에 깜박이는 안개꽃 푸른 눈망울을
(그때 잃은 처음 사랑인 줄 알고)
싸악 쓸어 가버리네)
불, 길 끝에서 일어나는
김지향
땅을 덮고 있는
한 장의 죽음을 걷어내고 나면
땅껍질을 떠밀고 나오는 새파란 불
도깨비불처럼 사방팔방
옮겨붙기 바쁘다
밧줄에 묶여 얼음이 된 목선도
갯버들 언 손에 잡혀 먼지가 된 꿈도
지워진 둑길에 떨어져 돌이 된 별무리도
봄 불에 모오두우 몸 풀려
달리는 말갈기가 되었다
세상 곳곳에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나는
빛 한 모금
오랜 기다림으로 목마른 사람들의
폐혈관을 열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몸에 빛살이 뛰어가는 봄
새파랗게 잎이 돋은 사람들의 눈에서
줄줄이 꽃이 태어난다
속살을 열고 어지럽게 터져나온 꽃불이
웅크리고 자는 거리를 깨운다
오늘은 꽃의 꽁무니에
무단가출 꼬리표가 붙지 않았다
땅은 온통 빛 도가니
하늘마저 내려와 불을 질렀다
눈싸움을 벌였던
어제의 적의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불면증
김지향
밤새 길이 혼자 길을 걷는다
길을 신고 가던 수많은 발을 내려놓은 밤엔
불빛만 태우고 길이 혼자 걷는다
한참 걷다 보면 옆구리에서 자꾸 찢겨나가는
길이 또 길을 신고 혼자 걷는다
길이 길을 이고 걷는다
길 위의 길로 또 길이 혼자 걷는다
깊은 밤엔 어둠만 태우고
하늘을 신고 길이 걷는다
머리 위엔 어둠을 걷어내는 빛이
꽃 덤불을 이룬 봉화들이
길이 되고 있는
하늘 밖의 길 밖의 길로
길이 혼자 끝도 없이 걷는다
불볕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김지향
지퍼를 채운다
세상을 핏대선 이빨로 짓씹다
스스로 난자당한 몸이 마구잡이로 쏟아놓은
피에 누워버린 불덩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거두어
산에서 뛰어내린 저기압의 바람이
넓은 치마폭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한끝만 들면 줄을 끗듯 줄줄이 들리는
불덩이 줄기 세포
거기서 함께 타다 빠져나온 나뭇잎 한 장이
아, 시원해, 닫힌 지퍼를 꼭꼭 눌러둔다
바람이 몇 분 사이 세상 한 바퀴 돌아온다
끌어모아 온 모지라진 싸라기 불볕 몇 오라기도
풀잎들이 체머리를 흔들며 마저 내쫓아 버린다
풀밭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고추잠자리가 뛰어간다
불에 덴 풀 대궁 상처에서 터진 농집 처럼 물이 흐른다
풀 대궁이 한 눈 파는 사이 코스모스 훤칠한 키가
찰싹, 꽃송이를 꺼내놓고 뒷짐 지고 벙긋벙긋 웃는다
비는
김지향
비는 하나씩 불안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인습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속력을 벗어 던졌어
비는.
그날
떨어지던 모체 이후
마음을 비비는 순간
보다 생활을 엮는 시간으로
꿈을 꿰는 감동
보다 시계를 보는 형안으로
헤엄치는 머리 속 둔주
보다 만지는 손가락의 감각으로
놓여나는 신경의
분자.
잠이 들었어 비는
하나씩 풀리는
잠이 들었어 비는
하나씩 끝내는
잠이 들었어 여기
비의
평강.
비 사이로 지나가는
김지향
비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하늘 귀퉁이에 걸어놓은 사람들의 눈물 항아리가
일시에 넘쳐난 듯 얼키고 헝클어져 비는
비를 신고 달려간다
폭포보다 더 폭포 같은 바람이
세상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 뒤에서
그물을 들고 세월을 건져 담는 사람의 귀엔
자꾸 바이올린 소리만 담긴다
바위를 치고 가는 바람 속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건져낸 사람의 가슴엔
뼈 속으로 흐르는 세월의 울음소리
폭우를 휩쓸고 가는 바람 같은 세월이 우는 소리
그 소리가 우리들 가슴에서 나는지 우리는 모두 가만히
가슴에 귀를 대고 들어볼 일이다
심장이 뛰는 소리 사이로 우리가 버린 등대 같은
그 세월의 얼굴이 동동 떠오름을 알리라
비 사이로 찾아가는
김지향
어제와 내일 사이엔
얼어붙은 비가 빡빡하게 들어서 있다
공간을 붙들고 서 있는 비 사이로
바스러진 시간들을 홈질해 본다
듬성듬성 기워진 시간들이
흘러가는 스크린을 올라탄다
스크린 앞머리에 칩을 꽂아본다
타박머리 아이들이 냇가에서 물장구를 친다
윗마을 운동장에선 덜 핀 해바라기들이 제기차기를 한다
풍금 소리가 들고 있는 아랫마을 예배당에선
날개옷 속에서 장다리꽃들이 손을 모으고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들녘에선 출렁이는 풍선꼬리를 따라
빳빳한 다리의 개나리들이 달리기를 한다
비를 걷어내면 환히 떠오르는 눈 시린 풍경들
너머 풀려있는 스크린 끝 짬에 칩을 꽂아본다
수직으로 얼어붙은 비를 부수고 힘차게 치솟는
비행접시 한 채씩 연이어 열리고 있는 내일 안에
까까머리들을 태우고 짙푸른 우주 속으로 잠적해간다
어제와 내일은 멀고 먼 끝과 끝이지만
실 티 같은 시간의 칩이 촘촘히 이어준다
비 속에서
김지향
어둠을 쬐면 눈이 앓는다 눈에 자꾸
구정물이 고인다 낮에도 눈엔 빛이
켜지지 않는다 비가 져다 나르는 어둠이
여기 저기 전염되기 시작한다
눈을 뜨지 말아야 하지만 감고 있는
눈 속에도 검은 비가 파고 들어오므로
낮을 재빨리 빠져나가야 하지만 낮의 터널은
밤보다 길고 멀므로 비에 닦여 나가는
빛꼬리를 붙잡아야 하지만
세상을 병들게하는 그 무식한 어둠이
조금은 끌려나갔는지 눈을 반쯤만 뜨고
내다본다 뜬 반쪽 갈피의 눈이 찢겨졌다 쯧쯧
쯧 --- 아직 멀었군! 낮엔 눈을 아주 감아
버리려는 이 결단 위에 검은 빗물이
도장을 찍었다
새파란 아침은 정말 멀리 내쫓기고 만듯이
비 속의 도시
김지향
땅에 닿으면 몸이 바스러지는
수만 개의 거미줄에
빌딩 숲이 젖는다
끝도 없이 내리는 거미줄 속에서
불쑥불쑥 키를 일으키는 빌딩들
머리 꼭지를 허공에 박으려다
주루룩 퍼져 앉는다
도시는 비 속에 자란다?
목이 마를 때 아무 데서나 퍼마시던
달빛도 걷히고 없는 오늘의 도시
검은 늪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도시의
거미줄 속에서
한 묶음 연골의 바람처럼
사람들은 삭아간다
이제 도시는
여행 가방 입을 잠그듯
검은 늪의 품을 채우고
활활 타는 불가마의 블랙홀로
싸악 빨려 들어가
무한 방목의 검은 빗줄기 속에서
다 젖은 휴지가 될
차례만 남았을까.
비 오는 날의 삽화
김지향
창문은 눈이다
눈 밖엔 다 쓰고 버린 폐지 같은 시간들이
떠다닌다
철길 너머 찻길엔 갈잎 소리를 내다 붓는
비속을 동 동 발을 굴리며 엎어진 차량들
옆으로 젖은 뻘에 눌려 불쑥불쑥 입이 나온
풀들이 축 쳐진 머리칼로
진종일 지분거리는 산성비를 패대기치고 있다
찻길을 멀리 비켜선 고층 아파트
창문들도 헤쳐 놓은 오지랖을 오므리며
뛰어와 머리 부딪는 비를 내쫓고 있다
건너 마을의 보석 밭을 가려버린 빗줄기 아래
온몸을 열고 있는 강기슭엔
다 헤진 추억을 꺼내 쓰는 유람선 한 채
온 힘으로 불을 밝히며 기진한 팔다리로
한 장의 편지를 물 위에 띄우고 있다
창문에 붙어 선 사람들은
새 소식을 찾는 듯 두근거리는 눈으로
멀리 가물거리는 불투명 속
물살이 보듬고 있는 말 없는
편지를 헤쳐보는 중이다.
비 온 뒤 풀밭
김지향
시간들이 나를 팽개치고 앞질러 가더니
뜰 앞 풀뿌리를 키웠나 봐
비 온 뒤 창문을 열고 보니
뜰 앞이 새파래졌다
시간이 풀의 세포 속에 스며들면
풀잎의 키도 시간처럼 빨리 자라나 봐
비 온 뒤 봄 아침
풀밭이 잘 닦인 거울이 되었다
거울이 되어 사람의 가슴도 비춘다
그러므로 풀밭에서는
사람의 속도 투명해진다
아직 아무 발자국도(시간의 발자국 말고는)
지나가지 않은 풀의 가슴에
사람 가슴의 흙탕물이 퉁겨갈까 봐
바라보기가 미안하다
비가 이제 그만 짓밟았으면 싶다
풀의 눈물이 될까 봐 마음 아리므로
빗속의 바람
김지향
그 여자의
가슴의 빈터에서 비가 내리고
그 여자의
속눈썹이 잰걸음질 친다
비가 일으켜 세운 그 여자의
머리칼이 어둠 속으로 넘어지고
어둠 속을 걷는 침묵의 발소리 곁으로
그 여자의
사랑이 사라지는 뒷모습이 깔린다
사랑의 뒷모습에 묻어있는
하늘을 비우는 비 소리
비가 익는 냄새
비의 냄새를 보내주는
짧은 바람의 발이 섞여 있다
빈 가슴을 비로 채우는 바람은 살이 쪄 가고
바람살을 안고 돌아오는 그 여자
굵은 총알이 꽂히는 검은 강을 본다
비의 총알에 심장이 뚫리는
자기 혼을 본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비로 메워져 있다
빠른 걸음으로
김지향
창 너머 또 창만 있다
창밖엔 햇빛을 신고
몇 장의 삶을 깔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환히 내다보인다
멀리 지붕 너머 허공을 안고 있는 밤나무 숲,
밤나무 숲에서 자꾸 솟구쳐 뛰어가는 은방울 소리
우리 집 창문에도 걸려 방울방울 소리를 흘린다
소리의 날개 한 자락 베어내 가슴에 담는다
햇빛이 곱슬머리처럼 창틀에 와서 꼬부라지면
혼자서도 가슴에서 은방울 소리 자아올리는
나는 햇볕에 타다만 추억의 두루마리 끝자락을 펴며
어딘가에 남아있을
성냥개비를 찾아본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창 너머 빠른 걸음으로 날아가는
시간의 발자국이 추억의 두루마리를
마저 쓸어가 버린다
멍청한 나는 창안에 갇힌다.
빨래
김지향
방바닥에 눌어 붙어
집안의 열기를 삭히고 있는
저 장님의 홍역은
담 너머 주인을 찾아 달래어 보낸다
벽장 속 장롱 벽에 발려서
집안의 웃음을 훔쳐가는
귀머거리 백일해는
산 너머 온 샛바람의 푸른 칼로
한 귀 한 귀 뜯어내 보낸다
아이들 겉옷 속에 들어와
집안의 생기를 뭉개고 있는
벙어리 감기는
저 햇빛의 눈살로 찔러
물살 빠른 강물에 풀어 보낸다
이 집나간 삼대 맹아가
또다시 돌아올까 겁이 난
나는 밤낮이 다른 물가에 앉아
한눈도 팔지 않고
빨래를 한다
사는 재미
김지향
내가 사는 단층집
안마당 한 귀퉁이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반들반들
해꼬리와 어울려 앉아 있었다
그 장독 속에
손을 넣어 공통성을 뽑아내는
나는
간장.고추장.열무김치.파김치 쪽으로
후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세상 번뇌를 젖히고
하얀 속살 일부를 드러낸 접시들이
잇달아 손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끓고 있는
남비 속의 도.레.미
아이들의 장난감 피아노 음계와
마주치는 쪽으로
청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단층집
대청 위에 앉아 오색 물감을 짓이기고 있는
작고 큰 키의 꽃분들이
짝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
그 속에 눈을 넣어
나는
집의 평화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히 빛 속에 나와 인사하는
벽걸이의 순수와 만나는 쪽으로
시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김지향
그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만
빛나는 이름
사람의 무리가
그대 살을
할퀴고 꼬집고 짓누르고
팔매질을 해도
사람의 손만 낡아질 뿐
그대 이름자 하나
낡지 않음
하고 우리들은 감탄한다
그대가 지나간 자리엔
반드시 자국이 남고
그대가 멈추었던 자리엔
반드시 바람이 불어
기쁘다가 슬프게 패이고
슬프다가 아픔이 여울지는
이름
그 이름이
가슴에서 살 땐
솜사탕으로 녹아내리지만
가슴을 떠날 땐
예리한 칼날이 된다
그렇지, 그대는
자유주의자 아니 자존주의자이므로
틀 속에 묶이면 자존심이 상하는 자
틀 밖에 놓아두면
보다 더 묶임을 원하는 자
그대를 집어 들면
혀가 마르거나
기가 질려 마음이 타버리거나
한다고 우리는 때때로 탄복한다
그렇지, 사랑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
실은 사랑이 슬픔 속에 자라지만
기쁨 속에 자란다고 진술 한다
실은 사랑이 아픔 속에 끝나지만
새 기쁨을 싹틔운다고 자술한다
사랑의 끝남은 미움이지만
실은 끝남이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사랑은 사랑은 끝없이 자백 한다.
사랑 만들기
김지향
3
나무가 날마다
칼을 갑니다
칼은 끝이 날카로와야 칼이지만
나무가 가는 칼은 끝이 뭉툭합니다
뭉툭한 칼을 만들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배로 숨을 쉬었습니다
배에 모인 숨은 가장 견고한
연장을 만들므로
가장 견고한 연장은
뭉툭한 칼끝이므로
뭉툭한 칼끝은 바람을 베므로
뭉툭한 칼에 베인
두 쪽난 바람은
또 다시 하나가 되므로
다시 또 하나가 되는 건
사랑이므로
그대여
사랑 만들기에 참여한 그대
날카로운 칼끝을 감추고
뭉툭한 날을 빚어보아라
비로소 사랑의 참맛을 알리라
사랑이 사랑이
가슴에서 은방울을 굴리리라
나머지는 후렴으로
되풀이하면 될 일
4
타버린 잿더미도 버리지 않음
잿더미에서 타는 불은
마지막 움직임의 뒷꼭지가
드러나 보임
타버린 잿더미의 불은
가장 절절한 울음을 건너서
다음 삶의 예고편을 보여줌
나는 잿더미를 버리지 않음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삶의 찌꺼기를 거르는 불꽃을 보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집약된 생애의 이력서를 보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서로 찾는 목소리의 떨림을 듣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가장 순결한 피를 구르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가
그대
잿더미의 아우성은 가슴 전체를 연다
허기 속을 헤매며
자기의 허기도 못 보는 눈
그대
날로 날카로워만 가는 눈
잿더미의 진실을 빠뜨리고
시간의 끝짬만 보는 눈
뜨고 있어도 잠든 눈이여
내다 버린 잿더미 밑에
숨어있는 사랑을 찾아봐라
그대 눈 그대 손이
우리와 영원히 아름답게
포개짐을 알리라
5
마침표를 찍고
돌아설 때에야
흔들리는 마음
마음의 지시로
입을 잠근 열쇠를
강물에 던져넣은 뒤에야
떠오르는 말
말의 지시로
기억의 문을 닫아건 뒤에야
'나 여기 있어!'
손을 쳐들고
생략된 부호처럼
나서는 눈
참 부신 빛살로 떠오르는 눈
마음의 밑바닥에서
강물의 밑바닥에서
기억의 밑바닥에서
흙 위에 담장 위에
거리에 빌딩 꼭지에
허공 속에 시간 속에
돋아있다 원망처럼
내 혼이 닿는 곳마다
잘못 찍은 마침표를
허무는 몸짓으로
빗물로 떠서 출렁이는 눈
그림으로 박혀서 초롱이는 눈
불길로 치솟아 타오르는 눈
눈을 덮어버릴 강철 보자기가 없는
나는 불혹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만날 수밖에
너 불치의 병
사랑아
6
잃어버린 푸른 빛 한 오라기
건져 내려고
이미 빛을 삼켜버린
가슴을 두들기며
찾아도 찾아도 모자라는
땅의 넓이만큼
넓은 가슴 어디서
솟구쳐 올 약속도 없는
사랑 하나 기다려
24시간 전체를
기다림이 되어
흔들리는 첨단적 세상
모퉁이에 나뒹구는 뜨거운 햇빛을
지워버린 차거운 눈이 되어
사랑을 그 신선한 빛을
찾아서
두근거리며 나는
오늘도 가슴을 밀고 나올 감동의
그 트럼펫을 지켜본다
18
아직은 꽃빛의 목소리로 부른다
사랑
부르고 불러도 바래지 않은 이름
사랑
부르고 부르면 피가 되는 이름
사랑
어느 해
흰 벌판 한 모퉁이
혼자 푸른 포플러 가지 끝
높이 높이 걸어놓고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이름
시간이 벌판 모서리를 베어 먹은
오늘에야
잊어버린 발자국을 짚으며
찾으러 가는 목소리
포플러는 오늘 외롭지 않아
사랑 몸 전체를
두부모 자르듯 잘라 팔았어
주소도 받지 않고 팔아버렸어
아, 피 흘리는 내 목소리여
속임수 쓰는 저 포플러
성큼성큼 가지에서 내려와
마주 오는 건 메아리
맨발로 쪼르르
내 목에 감기는 메아리!
아직은 꽃빛 목소리로
다시 시작할밖에
19
날은 저물고
구름도 안개도 어둠에 잠길 때
우리 집 등 넝쿨엔
얼굴도 안 보이는 가을이 걸린다
낮보다 긴 밤이 지는 새벽
너는 벌써 발소리도 없이
내 창문을 밀지만
새벽은 참 짧아
다시 또 날은 새고 날은 저물고
기계보다 빨리 달려가는
이 시대
너와 어울려
이력서를 써 내려갈 시간은 없어
밤에만 살을 벗어놓고
영혼 홀로 빠져나가
밤새 헤맸지
사랑아
너는 그때 어디 있었니
사랑도 어둠에 갇혀 안 보이는
이 시대
저문 날 눈이 혼자
세상 문을 열고 나와
무한공간 네 뒤를 따라가
참말 참말
사랑을 청소할
바로 그때를 기다려
너는 나와
숨바꼭질을 하니
날은 저물고
구름도 안개도 어둠에 잠길 때
우리 집 창문엔
어둠에 젖어 안 보이는
사랑 그림자만 걸리고
24
갈꽃이 서걱이는 갈밭이다
앞섶에 찬물을 뿌리는
가을바람을 가르며
꼿꼿이 돌아서 간 그대
차가운 발이
스칠 때마다
갈꽃은 일렬로 쓰러지고
쓰러진 꽃은 다시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지 않음을
그대 꼿꼿한 목이 보지 못했지
슬픔이란 이름으로 쓰러진 갈꽃
아직도 쓰러지기만 한다면
이 가을 갈밭을 걷는 사람의 눈시울엔
어떤 빛깔이 감길까
그러나 슬픔의 끝은 기쁨이므로
그대 찬물 바른 발길이 끝날 때
꼿꼿한 목 속에 숨어
타고 있던 불길이
열린 가슴의 문으로 쏟아져 나와
가을을 태우며
이제 돌아서 온다
우리 믿음은 바로 사랑이므로
쓰러진 갈꽃은
기쁨이란 이름으로 일어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
이 가을 갈밭은
넘치는 사랑의 강이 되어 펄럭인다
49
방은 메말라 있었다
핏대를 올리는 시간의 하복부에서
눈에 화살을 꽂은 우리는
컴퓨터에 그날의 일기를 맡기고
세상 삶이 얹힌
책상을 맞대고 앉아
서로 다른 생각에 금을 그으며
가갸거겨 떠들어대던 입씨름도
이제 지쳐 하나씩 떠나고
가슴을 빳빳이 다림질하던
성급한 분노만 남아
방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50
나가 보면 바람 속에
꽃잎의 울음이 깔린다
울음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남은 잎사귀의 구멍 뚫린 가슴들이
바람이 된 울음을 쓸어 담는다
피지 못한 그대들은
우리 머리 위 세상에서 피니
우리가 고개를 들면
피어있는 그대 몸을 볼 수 있니
낫을 댈수록 칡넝쿨처럼 강해지던
그대 쪽빛 의지
없는 듯 살아서 견디던
그 의지의 순수는
어디에 벗어두고
이제 바람이 되어
울음이 되어 떠나가니
사랑아
나가 보면 바람 속에
더욱 크게 울리는 그대 울음소리뿐
세상은 죽었다
사랑법
김지향
바람이 풀잎을 사랑하듯
풀잎처럼 밟히는 자를 높이신
그분을 나는 사랑한다
태초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랑 법을 드러내 보인 자를 사랑한다
천민의 천한 발을 씻긴
그 사랑을 내가 사랑한다
없음을 있음으로 증명하기 위해
오신 이를 사랑할 줄 아는 자를
나는 끝내 사랑한다
사랑 연주(演奏)
김지향
잠 속에서도
나는 피아노가 키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다
내 머리 절반을 뜯고
방울방울 떨어져 굴러간
그대를
머리 아닌 손이 잡으려다
놓쳐버린 채
십 년이 지나고 또 십 년이 지나갔다
어제 문득 강변로의 잠을 깨우다가
내 한쪽 눈이
잃어버린 그대를 잡았다
그는 내 머리 아닌 가슴으로
방울방울 살아나
피아노 건반을 타고
내려와
내 몸 전체를 연주했다
사랑의 돌팔매
김지향
그날 창문을 뚫고
창문 뒤편으로 빠져나간
그대 돌팔매
방심한 방안의 우리 심장도 못 맞추고
우리 머리칼 하나 못 맞추고
한 알 티도 없는
하늘나라 보좌에 곤두 박혔으므로
넘치는 힘을 휘날리며 곤두 박혔으므로
어김없이 되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우리는 눈을 떴었지
우리가 눈을 뜰 때
눈 속 모닥불도 환히 눈을 뜨고
멀지 않아 우리 심장을 다시 겨눌
그 돌팔매를 찾아보았지
그때였어
하늘 보좌에 곤두 박힌 돌팔매가
커다란 사랑의 불새로 오고 있잖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로 태어난
불새 한 마리
파란 하늘에서 불꽃놀이 하다가
나직이 나직이 돌아오고 있잖아
그래, 그것이었어
사랑의 불새로 돌아옴, 바로 그것,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고 꿈이다
창문을 열고
크게 팔을 벌려 끌어안아야 할
우리의 희망이다
하늘 문도 연 하나님의 용서다
사랑 한 접시
김지향
그날 하늘에서 차랑차랑 말씀을 타고
사랑이 연줄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사랑을 따서
달아놓고 쳐다볼 서까래를 찾았다
서까레는 이미 옛날로 가고 없었다
사랑을 걸어놓고 뚫어볼 소쿠리를 찾았다
소쿠리는 이미 고향으로 가고 없었다
사랑을 엮어놓고 만져볼 벽걸이를 찾았다
벽걸이는 처음부터 벽에 붙어있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따서 입 속에 걸었다
먹은 사랑이 입으로 되나올까 봐
가슴 밑 깊숙이 갈무리했다
가슴 속에서 빛을 빛내며 커가는 사랑
그때 삼킨 사랑 한 접시로
나는 오늘 푸르른 동산 알차게 익은
사랑의 열매를 보며 탄탄한 내일 속에 산다
산딸기나무
김지향
내 유년의 언덕
저절로 왔다 저절로 가버린
산딸기 넝쿨이 지금도 내 기억의 모퉁이
다 몽그라진 사진 한 컷으로 걸려있다
산딸기나무는 사람이 찾아올 때만
웅크린 독수리처럼 온몸이 갈고리가 된다
구부린 등줄기에 내민 안테나를 깜박이며
누군가를 찾아내려는 듯 새빨간 불을 켠 채
(기억의 저편에서 자꾸 벨소리를 떨구는
빨간 신호등을 켠 산딸기나무
때때로 위급한 신호음을 보내온다)
나는 그때마다 생각이 뚫어논 틈새로 들어가 본다
내가 사랑했던 그 아이도 가끔 그 아이가 뚫어논
틈새로 내려와서 유년의 언덕에서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이며 놀다 가고
뜨내기 등산객들도 와서 발에 박힌 못을
빼놓고 가는
이제는 푸석한 얼굴의 산딸기나무
등산길 옆으로 안테나를 벗어 눕혀놓고
촘촘히 박힌 눈 같은 열매를 온 힘을 다해
반짝이는 산딸기나무
이제 곧 찾아올
고속도로 시멘트 밑으로 생목숨이 엎질러지기 전
그 알싸한 고통을 열매로 뽑아낸 그의 삶을 배우러
나는 때때로 생각의 틈새로 들어가
긴 잠을 잘 때가 있다.
산에서
김지향
산이 안개를 버린다
버려진 안개 너머로
시간은 또다시 떠내려가고
떠내려가는 시간 위로
해는 얼굴을 붉히며 떠내려오고
푸른 바람을 안은
산 잎사귀의 커다란 손이
내 눈을 덮는다
빨갛게 볶인 해의 머리칼도
여기서는 잎사귀 밑으로 쏟아져 구겨지고
땅에 숨은 어둠은 쫓겨나
멀리 뽑혀져 나간 하늘 밖에서 머뭇거린다
풀어 놓은 새들은 머리끝에서 도. 레. 미를 부르고
머릿속의 해묵은 멍울도 풀 바람을 타고 삭아간다
안개를 버린 산의 투명 속에선
누구나 한점 허물도 감추지 못한다
일점흑(一點黑)도 감추지 못하는
산 잎사귀가 되려고
잎사귀의 누이라도 되려고
나는 몸속 속속들이 햇빛을 켜달고
산으로 간다
산이 여름을 묻고 나서
김지향
가을은 두 손으로
여름의 시체를 들고
산으로 간다
산마다 비명에 간 여름을
슬퍼하는 새들의 울음소리
산을 흔들고 있는 새빨간 울음소리
밑바닥에 관을 내려놓고
울음소리로 뚜껑을 덮고
가을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놓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은 여름의 묘지 곁에서
잡초를 불태워야 할 일이 남았다
이윽고 가을이 잡초에 불을 붙인다
불은 온 산에 널리 퍼지고
드디어 세상의 나무들도 불태운다
세상은 지금 가을 불로 빨갛게
단풍 드는 중이다
살 빼기
김지향
그날 구름이 우주의 주름 속에 들어간 뒤
몸을 드러낸 땡볕이 땅을 지지다 틈새를 만들었다
눈을 뜨지 못하는 가로수들은 팔을 치켜든 채
치뻗은 발톱으로 틈새 밑으로만 파 들어간다
불볕이 세상 살을 태우는 동안 사람들은
가로수 꼭대기에 집을 세우고 햇살은 부러지지 않는
알루미늄 그물이 되어 세상 살을 채 치고 있다
땅에서 연거푸 올라가는 금속 연기가 우주의 배꼽
블랙홀 틈새에 고였다 금속물로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금속 먼지 가루 물을 들이키며
수명 다한 돌판 세상의 살가죽만 두들긴다
어디 숨통 트일 길이 있는지 어디 수명 연장할 길이 있는지
눈 크게 부릅뜨고 찾는 사람들을 세상은 점점 입 크게 벌린
틈새로 연거푸 밀어 넣는다
벌써 사람 절반이 새나간 세상 틈새
모두 다 새나가면 세상은 몇 그램이나 살이 빠질까
살아난 새
김지향
오랜만에 광화문 모퉁이에서
그 때 죽은 새를 만났습니다
하얀 대낮의 햇빛으로 지워져
없어져버린 비둘기
붉은 부리는 붉은 비를 물었고
날갯죽지도 반쯤 빛에 찔려 있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차량의 발에 짓밟혔다고
곁에 있던 참새 한 마리가 일러 주었습니다
그 때 나는 저 문명의 발에 잘린 날갯죽지를
문명 밖의 흙으로 싸매주었습니다
오늘 문득 발을 멈춘 비각 앞 모퉁이
졸며 걷는 내 머리 위에서
구구구 구구구 구구구
그 때 죽은 비둘기가 한 장의 바람을 씌워줍니다
새파란 하늘에 하얗게 떠서
다 구겨져 가고 있는 나를 잡아 펴 줍니다
이제 내가 어둑한 지하도를
팔랑팔랑 웃음을 날리며 꼿꼿이 서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새
김지향
다음 날 눈 뜰 새를
나는 보고 있다
아직 망원 렌즈 집게에도
잡히지 않는 머리, 발, 부리,
마음 텅 비운 날의
아주 작아진 사람의 가슴에만 와서
어리는 새
지금은
둥지 안에 누워
푸른 힘줄이 자고 있지만
문득 잠 깨어
파랗게 펼쳐놓을
새 하늘 새 땅을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새는 날지 않아도
하늘이 스스로 날아가는 세상
새는 걷지 않아도
땅이 스스로 걸어가는 세상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을
푸르름만 깔려있는 세상을 보여줄
하늘위의 하늘에서
찾아올 그분의 새를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죄 지은 부끄러움을 씻어버리고
가슴의 피울음을 잊어버리고
못다 한 세상의 말들을 잘라버리고
그렇지, 그래,
모두 끊어버린
아주 가난한 사람의 영혼에만
와서 앉을 새를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새가 되는 꿈
김지향
나는 자주 새가 되어 하늘 한 자락 물고 오는
꿈을 꾼다
높은 바위 아래 깊은 바다 위로 포물선을 띄우는
폭포를 건너서 동글동글 날아가는 불티 같은 생을 끌고
타고 남은 꽁지 하나 적실 하늘 물 항아리를 찾아
까마득히 날아 오른다
끓는 태양의 분화구를 비켜
사람의 육안이 끝나는 우주 밖 거기
우주를 둘러싼 끓는 바다 거기
그분이 뿌려주는 이슬 담은 항아리
그 새파란 하늘마음 한 뿌리 안고 내려온다
나는 꿈마다 그분의 하사품인 물 항아리에
남은 생을 적시며 적시며 파랗게 살아난다
새벽
김지향
길 끝,
산은 그림자를 배 속에 거둬들이고
지퍼로 잠그는 중이다
머리 푼 바람 갈기도 치렁거리는
머리채를 바싹 잘라내면
고슴도치로 웅크린 바람의 실눈
끝으로 환히 돋아오르는 새벽
빈 가슴 하나 들여놓을
문이
마악 열리는 땅의 머리맡에
부챗살로 편
하늘의 손이 노르스름한
빛을 부려놓는 중이다
세상과 시
김지향
세상은 시다
발코니 창문을 내다보면 반듯반듯한 찻길이 직사각형의 몸매를 끌고 반듯하게 가다가 허리 구부린 하늘 다리쯤에서 세상 밖으로 지워진다 찻길에는 서로 다른 장방형의 차량들이 제각기 제 모양의 성질 있는 눈을 달고 또 다시 하늘 다리 밑에서 지워 진다 내 눈 옆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콤퍼스 다리를 돌리면 원추형의 몸통 위에 뾰족 십자가 안테나를 얹어놓고 사방에 빛을 뿌리고 있는 교회가 거대한 몸통의 아파트와 눈싸움을 하고 있다 그 옆과 옆으로 서로 팔걸이로 몸을 기대고 있는 북구풍 빌라와 오피스텔 멀리 뒤편 모과나무 울타리 속에 몸을 숨긴 앉은뱅이 주택들이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소곤소곤 도시의 다성악을 이야기 하고 있다 모양이 각기 다른 명찰을 달고 앉아 있는 건물들 지퍼를 열어보면 차곡차곡 세월에 절인 핏빛 삶을 담은 생수 같은 시가 불쑥 솟아나온다 나는 날마다 삶의 시를 구경하며 살아서 솟구치는 생것의 시를 만져보며 떠나가는 시간의 손에 한 잎씩 쥐어 보낸다 얼마나 많은 시를 얼마나 많은 시간 속으로 보냈는지 아직 계산은 안 했지만 새로운 날들은 또 다시 새로운 시를 보여줄 것이다
세상은 시를 품고 있는 시의 창고이다
소나기와 빗금
김지향
하늘에 불빛이 빗금을 긋고 지나간다
뒤따라 빗줄기가 빗금을 지우며 달려간다
지상엔 우산들이 뱅글뱅글 바람과 숨바꼭질한다
이윽고 우산 밑으로 숨은 바람을 사람의 종아리가
힘껏 감고 간다
지상으로 내려온 빗줄기가 우산들을 빼앗아
도도하게 굴러가는 시냇물에 태워 보낸다
홀랑, 비에게 넘겨준 우산을 멀리 보내며
후들후들 젖은 사람들의 종아리가 한나절 내
지상의 빗금으로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사람의 몸은 처음부터 지상의 빗금이었나?
소나무 아래서
김지향
잎을 건드리기도 전에 푸른 물살
출렁이는 소나무
눈 맞춤 한 번에도 눈뿌리가 새파래진다
요령 소리 풀어 놓은 솔방울 속엔
깜박이는 솔 씨가 까맣게 익어있다
산새 한 마리
솔 씨를 쪼아 물고 까불까불한 꽁지로
하늘 가슴에 길게 수직선 한 줄 남기고
잠적해 간다
솔잎이 치켜세운 바늘 손톱으로
공기를 부욱. 찢어낸 하늘 전신에서
깨진 물 항아리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늘의 물을 키대로 들이켠 소나무
오늘 보니
풀잎보다 생생한 푸르고 또 푸른
물뿌리개가 되었네
술렁임
김지향
뜰 밖에 잠 깬 한 그루 실버들
군살을 깨물고 새 손이
새 눈을 열어
소금에 절여진 세상 바다를
살펴보고 있다
기척을 기다리는 외딴 폐강에서도
그 겨울 횡포에 풀 죽은 팔을
맥 짚어보면서
송어 새끼들이 바깥나들이를
서두르는 중이다
하늘엔 한 줄 눈붉은 실구름이
앞산 이마를 가르고
들새 몇 쌍이 새 씨를 물고
물 뿌린 햇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무단가출한 복술강아지
등에 실려 두 돌 지난 개구장이
소금 끼 먹어 술렁이는
세상 소식을 듣고 있다
톱질소리가 일어서는 아침 뜰 밖엔
조용한 침잠은 없다
스쿨버스 타고 가는 아톰
김지향
키다리 아파트 머리 위로 걷는 연분홍 하늘이
손톱처럼 뾰족뾰족 비어져 나온
가로수 새잎에 바람을 보내준다
가로수 가지에 팔을 걸친 바람 팔 사이로
발소리를 죽이며 미끄러져 와 닿는
자그만 유치원 버스
열린 문 안으로 까르르 부셔지며 엉긴
아이들 소리가 말랑말랑 만져진다
아이들 소리 사이로 창준*의 목소리가 발보다
한 음계 먼저 뛰어 들어간다
파랑 가방을 등에 지고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 안녕! 을 확인한 뒤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두들기며 노래를 타고 간다
창 밖 플라타너스에 박혀있는 새순을 노래로 만지작거리며
나무엔 파란 송곳도 있다며 쫑알거린다
아직 찬기를 싣고 와 나뭇가지와 줄넘기하는 바람의 복사뼈를
노래로 매만지며 안녕, 아톰! 손을 마주 흔든다
제법 몇 개의 마디로 노래를 굴린다
고개를 돌려 친구들을 돌아보다 심심한 ‘창준’은
다시 창밖 지나가는 차량에 엄마 차, 아빠 차
이름표를 붙이며 오선지 길에 어긋난 음표로 아-톰
먼 하늘 살을 헤집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마음대로
미끄럼 타는 새끼제비에게 입으로 숨을 불어주며 아-톰
아직 빛을 다 찾아 입지 못한 먼 산에게는 어서 빨리
빨간 옷을 입으라며 쫑긋쫑긋 입을 모아 한 옥타브 높은 아-톰
책가방 속엔 우주 소년 ‘아톰’이 잘 있는지 몇 번씩 열어보고
손으로 다독이며 아-톰, 아-톰 안녕! 을 잊지 않는다
아직 창준과 아톰이 하나라는 사실 밖에 모르는,
동그라미만 잘 그리는 세돌 지난 개구쟁이
오늘부터 유치원으로 아톰을 새로 그리러 간다
* 네 돌 지난 시인의 첫 손자
스펙터클, 갓난아이
김지향
밤새 예고편을 거둬 넣은
나무들이 펼쳐놓은 스펙터클
푸른 터널이 덤불을 만들었다
지난밤 머리맡 둑길에서 버들가지들이
감추었던 아이들을 내놓느라
푸른 혈관 출렁이는 소리 내 귀에 쏟아붓더니
오늘 아침 창문엔 청청한 초록 지도를 그려놓았네
앞뒤로 딱지처럼 붙어 앉은 아이들이
뚝 뚝, 진초록 물감을 흩뿌리며
사람들의 감탄사를 받아 적는 중이다
지금 마악 달아오른 햇볕처럼 뜨거운 산고를 치른
관악산 치맛자락에 조롱조롱 매달린 새파란 아이들
땡볕 같은 산고 끝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사방천지 더 푸르고 활기찬 스펙터클을 펼치려 서둔다
천방지축 손발을 내젓는 갓난아이의 몸부림을 자꾸
감추는 엄마의 염려를 아이는 먼 훗날에나 헤아리게 될까
승화
김지향
당신이 벗기는 면사포 창문
밖에선 처녀가 들고 있는 물 주전자
뿌려지는 물방울
아래 싱싱한 꽃송이의
머금은 총명을
두 눈이 따고 있는
아침
한때.
요람을 타고
나의 아침은
창 밖의 왕국 당신의
청결한 꽃 속을
가면서 승화할 수 있었지
화창한 꽃밭의
건강한
세계.
창가에서
당신이 던져버린
오물의 고양이를
담고 저만치 가고 있는
노파의 노폐물
바구니 투신하던
나의 신경쇠약을
생각했지
그리고
이야기했지
생각하지
않을 광채를 가리던
지난번의
비.
시간들이 쌓이면
김지향
가을에게 닿지 않으려고
질끈 눈 감고 뛰었던 그 단내 나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이미 가을에 닿았네
삶은 쌓이고 쌓이면 가을이 되네
다릿목에 앉아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리던 그날부터
내가 모운 기다림도 사랑도 눈물도
이미 가을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네
빛과 어둠 사이를 오르내림이 쌓이고 쌓여
지름길과 에움길이 쌓이고 쌓여
돌밭과 가시밭길이 쌓이고 쌓여 계곡이 되듯
계곡 같은 가을에 왔네
이제 계곡에서 내려가면 어디로 가지?
나를 따라오던 재생 불능의 시간들은
살이 다 긁힌 채 어느 개찰구에서 잠이 들지?
시간은 바쁘다
김지향
시간은 하루분의 파일을 열어놓고
하늘 한 필 얹어 놓는다
하늘 배꼽에서 바람처럼 엎질러진 생 공기가
사방으로 몸을 찢어 뿌린다
공기가 몸을 찢을 때마다 풀씨 같은
산, 들, 강이 머리를 드러낸다
산에는 숲들이 들에는 풀꽃들이 강에는 물고기들이
눈썹을 흔들며 수만 개의 기호로 일어난다
기호는 서로 몸을 부딪치며 굴곡 심한
보도블록 바닥을 갈아엎는다
떨어져 나뒹구는 낙오 기호 몇 개비
모지라진 발통 채 앰뷸런스에 실려 나간다
입주자 오지 않는 빈 문서엔
재빨리 시간의 손이 공기를 불러 온다
새로 불려온 공기는 팽팽한 배불뚝이 임부다
새로 태어난 새파란 새 우주로
빈 자리를 채워 넣기 바쁜 시간은
좀처럼 죽을 시간도 없다
시체가 된 바람
김지향
여름은 탱탱 살이 쪄 있다
하늘 문 뒤에 몸을 감추고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던 바람이
여름 들자 제철 만난 장미 덩굴처럼
확 피어버린다
여름내 땅의 불뚝 팔이 바람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이리저리 패대기를 치고 허공을 산책하는 억세 손도
바람을 낚아채어 길들이기 하고 허공의 껍질을 쪼는 뱁새 떼도
바람의 손등을 깨물어보고 허공에 육교를 놓는 구름 다발을
걷어가는 나무의 손가락도 바람 볼때기를 때려보고
길을 끌고 가는 차량의 바퀴살도 바람의 발을 깔아뭉개 보고
창안에서 풍경을 읽어가던 컴퓨터도 몸살 난 바람 몸 전체를 번쩍 들어
컴퓨터 올가미에 구겨 넣어보지만
멍이 시퍼렇게 든 바람은 기를 쓰고 피어서 뒹굴기만 한다
성난 하늘이 소리를 지를 때, 그때서야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바람
화살처럼 달리다 고층빌딩 턱에 부딪혀 몸이 으스러진다
사람들은 발에 차이는 바람의 시체를 툭 툭 차 던질 때쯤
하늘은 지뢰밭이 된다
여기서 팡, 저기서 팡, 우르르 팡, 팡, 팡,
번쩍거리는 불똥을 터뜨리며 하늘 우물이 열린다
이윽고 퍼붓는 소나기에 떠내려가는 바람의 시체를 지뢰 눈을 켠
하늘이 고개 끄덕이며 읽고 있다
쓰다 버린 길 하나
김지향
풀 섶에 목덜미 묻힌 길 홀로
옆구리 터진 휴지통처럼 엎어져 있다
머리숱 다 지도록 바람 소리 같은 소리 꾸러미 굴러다니더니
오늘 보니 자국만 흘려두고 소리는 가고 없다
언저리 칡넝쿨이 멋쩍은 사랑가처럼
거드름 피우며 얽혀주고 있을 뿐
(세상은 밀려 나간 시간 저편 꿈들은, 살아있어도
퍼다 버리는 거름지게인가.)
아이들과 디카폰
김지향
에스컬레이트가 하늘로 갑니다
아이들은 손가락만한 디카폰 하나씩 들고
연거푸 하늘과 땅을 베낍니다
에스컬레이트가 보다 높이
땅 위에서 고공으로 뜹니다
아이들은 와와와- 소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바람, 강, 나무, 아파트. 자동차, 사람, 코스모스
마구잡이로 저장합니다
문득 에스컬레이트가 하늘을 버리고
땅에 배를 깔고 드러눕습니다
하루가 푸짐한 아이들은 디카폰 가득 채운
풍경을 들여다 봅니다
새까만 잠자리 눈알 두개만 반짝 뜨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장미
김지향
아이들이 나를 잡고 이따금
장미밭을 간다
장미는 불을 켠 얼굴을 일으키고
멈추어 선 내 눈 속을
아이들은 소리를 날리며
꽃의 미끄름대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소리는 내 살의 바람을 빨아내며
불바다를 가로질러 내 귀를 때리고
그리고 이미 귀의 절반이 떨어진
풍경을 깨고
달아나 하늘이 되어버린다
하늘에서 물음표가 되어
다시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머리 위의 물음표
장미는 몸의 불을 풀어
아이들 눈을 뚫고 들어가
아이들 키만 한 선생님이 된다
나는 장미밭의 불꽃 속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불꽃 속에서
타는 하늘이 되어버린다
아, 저 노을
김지향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
산 가슴을 열고 들어서면
불가마 솥에서 갓 건져낸
화기가 확 치미는 나뭇잎
그 속에 감추었다 불거져 나온 열매들
달아오른 두 뺨을 반짝이고 있다
찌푸린 이맛살을 펴 주려고
들여놓은 발목이 멈칫 놀란다
두근두근 뜀박질하는 관자놀이로
열매 한 알 따 낸다
한 주먹 움켜쥐면 손바닥이 탄다
얼른 입속으로 삼킨다
나를 내버린 시간이 홀딱 넘어간다
뜨거운 시간의 실밥이 지글지글
마음을 태운다
나는 오지랖을 감싸 쥐고 눈을 감는다
마음대로 뒤얽혀 타는
시간의 실밥을 잡아가둔
마음의 문이 철컥 닫힌다
문밖엔 몇 벌의 어둠이 밀려와 감긴다
나는 다시 또 뜀박질하는
관자놀이로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조심조심 뚫어본다
어둠의 살 속이 환히 보인다
아직 채 어둠이 되지 못한
노을이 어둠의 속살로 깔려 있다
(아, 저 노을!
내게도 아직 노을이 남았는가)
노을에게 감긴 시간의 실타래를 세어본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내가 삼킨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을
두 쪽으로 접고 또 접은
미리 다 본 것 같은 시간의
꼭지를 세어본다
어둠을 털어버리면
훨씬 줄어들 꼭지를.
아직도 풍부하다
김지향
대한민국 하늘은 아직도 풍부하다
끝도 폭도 안 보이는 햇빛에 들려서
금빛 불꽃이 때도 없이 타고 있는 하늘
불꽃 사이로 구름이 지나가고
올이 가늘고 굵은 빗줄기가 지나가고
비를 먹은 별똥별이 지나가고
몇 말의 바람도 지나간다
대한민국 하늘에 눈을 꽂아두고
마음 태우는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별을 지키는 또 한 개의 별처럼
시간이 하얗게 마를 때까지
씨앗이 풍부한 대한민국 하늘로만
치켜뜬 눈씨를 보내고 있다
가슴이 풍만한 하늘은 황금빛 말고도
아직 개봉되지 않은 살아있는
자동판매기들이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차렷 자세로 버티고 서서
하늘 배꼽에서 뜨고 지는 별똥만 응시하다니!
따가운 응시를 피하고 싶은 대한민국 하늘은
오늘도 공기 열차, 비행접시, 우주왕복선 칩을 품어 안고
끝도 없이 황금빛을 줄줄이 쏟아붓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 으뜸가는 대한민국 하늘을 사랑한다
아침 뜰
김지향
뜰이 일어 앉는다
바람이 눈뜨는
탱자나무 가지가 가볍게 홰를 친다
어제 가을이 퇴원한 아침 뜰에는
다시 먼지들이 부스스 걸어 나오고
떨어져 누운 마지막 나뭇잎이
서리를 털고 있다
바람을 깔고 앉아
두 아이는 황금빛 동화를 풀어 논
황금빛 그림책에 황금 햇살 몇 개를
마저 잡아넣고 있다
우유 컵을 들고 망설이는 내 등 뒤로
교과서 같은 아버지의 옆얼굴이 들어난다
아침 신문이 펄럭이는 뜰 밖에는
다시 쓰러질 거짓말들이 꼬리를 치고
어제저녁 퇴원한 가을의 잔해들을
방금 첫차로 내린 겨울의 손이
쓸고 있다
아침상
김지향
된장찌개 사이사이
신선한 바람의 김을 뿜는 쑥국 사이
초롱한 말들이 뛰어다니는 동화 속
아이들의 숨소리
그래 이거다
어디서나 덜미잡는 시간의 손아귀와
생활의 올가미에 갇힌 마음을
이 아침
꿰뚫는 한 줄기 빛 보라
바깥세상의 오뇌를
바깥 생활의 인종을
놓치게 하는
참 맛의 한 때를
김을 뿜는 쑥국 사이사이
아침상에 얹어놓은
아이들의 숨소리
그래, 이거다
참!
아침 스냅 한 컷
김지향
서정마을 아침
추녀 끝에 밤새 매달려 자던 뱁새 몇 마리
드르륵 미끄러진다
햇빛을 따먹으러 하늘로 치솟는다
방금 하늘은 명주실 한 필을 흘려버렸다
온몸이 빛으로 태어난 서정마을 아침
머리에 조금 남은 이슬을 털고
아침은 팔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켠다
나지막한 산이 아침을 받아먹는다
산도 입을 열고 새파란 새 몇 마리 날려보낸다
포르릉--새들은 햇빛 속을 헤엄친다
햇빛 립스틱 바른 새들이 살짝 이슬 문 나뭇잎을 퉁기며 간다
마악 배꼽을 굴리기 시작한 하늘을 두들기며
까불까불 리듬을 차며 갈잎을 따서 물고 간다
일찍 나온 운동선수 몇은 운동화룰 벗어든 채
멍청히 서서 쳐다본다
아침 햇빛
김지향
비늘을 털고 살아나는 말들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와 앉는다
창밖의 허리 굽은 느티나무 팔뚝에
목이 트인 서리까마귀 빨간 목청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간밤에 싸움을 걸던 검은 오뇌의 줄기,
쇠 방울로 등솔기를 때리고 재빨리
머릿속에 뿌리내린 그 어둔 줄기를
뜯어내 버리고
나는 손가락을 펴들고 금가루를 뿌리는
햇빛의 머리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리엔 선잠 깨어 연지 찍은 가랑잎을
초롱초롱 유치원 아이들 소리가 뒤덮고 있다
무거운 시대를 메고
세상 깊이를 재고 있는 그대들의
처진 어깨 위로
황금빛 꽃비가 된 가을이
뚝, 떨어져 아침 햇빛 속에
나부끼고 있다
안강(安康)
김지향
소리를 풀어놓은
저 들녘
정을 빻아 뿌리는
눈보라를
잠재우고
하늘 끝 치닫는
광란의 떼바람을
잠재우고
적요로운 산기슭
몸을 뜯는 낙엽의
애소곡哀訴曲을
잠재우고
깊푸른 강심의
풀어헤친 머리채를
잠재우고
달빛을 안은 외틀어진
갈잎을
잠재우고
가을밤 적막을 울고 가는
외기러기를
잠재우고
머리만 돌아온
귀환병의 무덤을
잠그고
유령들로 포식한 도시의
골동품상을
잠그고
목숨을 으깨는 뭇 공장의
연통구를
잠그고
협심증을 돋키우는
저 기계 소리를
잠그고
붕붕대는 마음들을
흔드는 요정의 분무기를
잠그고
높고 깊은 고비의
등반을 끝낸
지금은
커다란 사랑으로
찰랑한 가슴
안개
김지향
네가 날아간 빈 공간은 복통이 났다
하늘이 뒤흔들려 눈물 같은 살비늘이
주루룩 내렸다
비늘을 받아먹은 땅
입이 벌어진 틈으로 올라오는 안개,
모락모락 안개는 올라와
내 눈을 가렸으면 좋겠다
몽롱한 안개처럼 너를 잊었으면
좋겠다
안개꽃 마을
김지향
교외선에서 내려
한참동안 발소리를 죽이며 가야
보이는 마을,
푹 꺼진 산 아래
올빼미 눈알로 매달려
비가 오는 밤에라야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안개꽃 같은 마을
그 마을에 오늘 밤 나는
꿈을 타고 가서
빗줄기를 열고 들어섰다
거미줄로 얽힌 안개를 걷어내고
숨을 죽인 내 발자국이 놓일 때마다
으스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한 구석에 나둥그러진 그네 위엔
다 망가진 해골이 자불다 깨어나고
해골의 주인들은 핏자국이 번진 셔츠로
마당에 나와 탈춤놀이를 하고 있었다
- 허허, 이 땅의 사람들은 다 내게로 와야 해
- 내가 너희들을 먹여주니까
- 나로 말할라치면 이 땅의 주인이거든
- 너희들의 운명은 내 손 안에 있거든
모가지를 비틀리며
이름 없는 일년생 풀꽃들은
한바탕 탈춤이 벌어질 때마다
쥐어진 머리채를 흔들어댔다
이빨 사이론 뚝, 뚝, 피를 흘리며
삶을, 나라를, 정치를, 욕망을, 미래를,
이빨에 끼우고 와작와작 씹어댈수록
터져 나오는 일그러진 웃음을
마당에 깔면서 춤을 추는 탈춤패의
헛웃음을 받아먹고 배를 채운
일년생 풀꽃들의 허기를
나는 분명히 만져볼 수 있었다
탈춤패의 핏자국이 내 발에까지
옮아 붙는 이상한 마을
풀꽃의 신세로 갇히기 전에
어서 빠져나야 하는
자꾸 가위 눌리는 갑갑한 마을
아, 나는 혼신으로 소리를 질렀다
- 놓아 줘 가야 해, 이건 지옥이야
- 거짓말이야. 허깨비 정치꾼의 장난이야
- 이제 좀 가면을 벗어봐, 약자의 피를 짜는
이 음흉한 야망의 악당들!
그때에야 나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안개 속에서
김지향
그녀는 밤마다
귀 떨어진 달빛 속을 달리고 있었어
잘려 나간 들 끝에
한 발이 매달려 있었어
넘어지는 산의 뼈에
가슴 한쪽이 깔리고 있었어
살을 깎는 바다 물너울에
한 발목이 잡히고 있었어
풀잎을 뒤집는 한 무더기 소낙비를
두 눈에 주워담고 있었어
하늘을 흔드는 밤 우레를
두 손바닥으로 잡고 있었어
소름을 일으켜 세우는 까마귀 울음에
등골이 붙들리고 있었어
나무들을 눕히는 회오리에
머리칼이 휘말리고 있었어
살을 태우는 장작불 속을
그녀는 밤마다 온몸으로 달리고 있었어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고
죽음을 품은 안개를 건너갔어
드디어 그녀는 이겨버렸어
어둠 건너 하얀 마을
김지향
저어새가 물을 쪼다 솟아오른다
팽팽한 공기가 퐁, 뚫린다
놀라 깬 하늘이
노끈처럼 툭 끊겨 올라간다 아득히
미쳐 하늘에 발을 넣지 못한 바람은
서로 부딪혀 깨진다
바람 조각들이 땅에 떨어진다 가득히
하얀 길 하얀 사람 하얀 호수
채집해 놓은 하얀 빛을
바늘을 쥔 햇살이 박음질한다 촘촘히
호숫가 꽃밭 속 예배당 아래
말씀으로 씻긴 하얀 마을 하나
저 꽃을 밟지 않고도
이 어둠을 건너서 갈수 있을까
어떻게!
어떤 겨울날
김지향
1
하늘 몸이 흔들린다
바람살은 실티처럼 찢겨져
흰 피를 뿌리며 앞산 머리 뒤로 숨는다
눈치 없는 해가 바람의 실티 사이로
어리둥절하다 만다
다시 하늘 몸이 흔들린다
펄럭펄럭 하늘로 떠오른 전깃줄이
툭, 끊어진다
몸을 감춘 바람이 전깃줄에 휘감겨
줄 끊어진 낙하산으로 내려앉는다
온 땅이 내는 소리를 뒤덮는다
겨울 한낮
세상은 높낮이를 지운 하얀 몸으로 길게
한 줄로 조용조용 얼어붙는
2
연거푸 하늘은 솜뭉치를 토해낸다
솜뭉치는 얼음이 되느라 부산 떤다
지상의 생것들은 몸 전체를 솜뭉치에 구겨 넣는다
(겨울은 시체들을 품고 있는 공동묘지인가
스스로가 만든 묘지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겨울은 휴식을 즐기는 평화주의자인가)
아래위로 새하얀 머리칼을 나부끼며 바람이 뛰어 든다
바람의 머리칼 위로 실구름 같은 그림자를 접고 새하얀
하늘 새떼 솜뭉치 틈새로 하늘에 갈아 앉는다
겨울은 바람의 센 머리칼과 하늘 새의 실구름 날개가
가로 새로 짜깁기로 여는 흰빛의 그림 한 폭
펼쳐놓고 다문 입술에 붓을 끼운 행위예술인가
어떤 날의 경주
김지향
바람이
다 몽그라진 갈퀴를 세우고
빼마른 다리로 허공에서 뛰어내린다
사람들은 소름을 쓸며 도망간다
번쩍번쩍 금빛을 뿌리는 뇌성이 길을 열어준다
한 꼭지의 구경꾼도 없는 길엔
허리 구부린 가로수잎만 까르르 무너진다
뇌성보다 앞선
시퍼런 칼날을 휘날리며 번개가
머리 위에서 바람과 칼싸움을 한다
경주가 끝날 때쯤 댕그렁 아랫도리만 남은
바람이 가로수 뒤로 아랫도리를 감춘다
힘껏 달아나며 온 땅에 얼룩처럼 눈발을 늘어놓은
바람 아래 떨어진 나뭇잎 밑에서
내 발만 희끗희끗 배를 깐 겨울을 신고 달린다.
어떤 조짐
김지향
비가 내린다 길이 젖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기어 나온 길이
한꺼번에 알몸을 드러낸다
나뭇잎이 비의 매를 맞으며 길 밖으로 튕겨 나가고
전봇대 위에 몸을 오므리고 매달려 있는
제비 한 마리는 연거푸 젖은 날개를 털며 떨고 있다
지렛대처럼 수직으로 서서 몸을 헐어내고 있는
빗속으로 동동 떠다니는 옥색, 감색, 파랑, 초록의
우산 몇이서 길을 얼룩덜룩 짜깁기한다
골목 어귀에서 맨머리로 뛰쳐나와 벗겨진 신발을 안고
다시 골목어귀로 되돌아가는 아이들은
와라 와라....동 동.... 빗속에 골목을 띄운다
골목 끝에서 혀를 내민 포도 위에 배를 깐 차량들은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더듬더듬 서행의 꼬리를 물고 기다린다
담 모퉁이 뜯기다만 공터처럼 구멍 뚫린 그녀의 가슴엔
조금도 줄지 않는 빗줄기가 한 양푼씩 더 보태지고 있다
가슴 깊이 묻어 둔 응어리에 칠십 년의 세월이 더 얹혀
새까맣게 굳은 콩알 몇 개 이제 서서히 풀려 내린다
폭우로 내린다
마악 장마가 시작될 조짐이다
어제와 내일 사이
김지향
어제는 지붕 서까래 아래 참새가 곤한 잠을 눕혔다
밤새 후끈거리는 바람이 서까래를 들락거리며
참새의 잠을 헝클어놓았다 참새는 새끼들을 거느리고
허공에 까맣게 점을 찍으며 허공 밖으로 날아가고
까맣게 타버린 어제는 도마뱀 꼬리처럼
잘린 꼬리를 두고 사라졌다
꼬리 잘려 넘어온 갈 곳 없는 어제의 꼬리위에
시간은 또다시 둥지를 튼다
다시 햇볕을 쏟아부어 날을 빚는다
달랑달랑 미루나무 잎이 종을 치는 서까래 너머
대밭 너머 키 낮은 뒷산 사철 푸른 솔숲에
멈추어있는 햇볕이 바람에 쓸려 옆으로 길게
퍼졌다 오므렸다 온몸운동 한다
(북적대던 삶의 건수들은
가닥가닥 채 썰고 버무려
실타래처럼 뒤얽힌다
날것 채로 지붕 밑에 들어가 묻혀버린다
지붕 위로는 심심한 시간이 후끈거리는 바람에
몸 전체가 익어간다)
까맣게 타버린 시간을 물고 참새가 날아간 하늘 서쪽은 마침내
온몸 운동하던 해가 마지막으로 가서 닿는 그늘 깊은 산기슭
댕기 머리 속으로 오늘이 쏙 내려가면 동강 난 꼬리를 잡고
내일은 또다시 돋아 오른다
시간은 연속극처럼 날을 만들어낸다
억새 또는 하얀 면도칼
김지향
억새는 머리칼로 허공을 면도질 한다
울퉁불퉁 등 굽은 허공을 가지런히 깎고 나서
허공 아래 웅크린 사람의 검은 욕망도 깎아낸다
달려오는 바람의 안테나에 붙들리지 않는 날은
구부린 허리 밑 가슴을 닫아건 호수의 비밀을 훔쳐내
출렁이는 슬픔으로 온몸을 씻는다
억년을 씻고 또 씻어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가슴의 억새
하늘에다 가슴 문 열어놓고 호수의 슬픔을 송신하려지만
바람은 갈고리를 쏘아 억새의 머리채를
땅으로 끌어 내린다
억새는 달린다 날마다 달린다
바람을 피해 하늘 밖을 달린다
수북하게 자동판매기가 열린 우주
가득히 풀어 놓은 머리칼로
우주의 영양분을 몽땅 들이마신다
사람들은 억새 곁을 지나면서
호수한테 물려받은 슬픔을 또 물려받지만
억새는 사람의 생각을 모두 열어보고
꽁꽁 깊이 묶어 놓은 생각 하나하나 줄을 그으며
풀어 헤쳐 나간다
(넓은 치맛자락으로는
죄 없이 쫓기는 이들을 숨겨주기도
예리한 이빨의 면도칼로는
죄지은 이들의 죄 붙은 손가락을
잘라내기도 하는)
하얀 가슴의 억새,
또는 은빛의 면도칼
얼어붙은 기차
김지향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플랫폼엔 장승같은 사람들이 떨리는 어깨를 감싸고 붙어 앉아 있다
잿빛 공간을 받친 얼어붙은 지렛대나무 뻐석 마른 가지에 앉은 바람이
갈기를 뻗어 잿빛을 흔들다 말다 한다
외투 깃에 목을 파묻고 멀리 물러앉은 들판에 눈을 던져본다
둑 밑 논밭은 아직 오지 않는 봄을 묻어놓은 파삭한 흙살이 숨을 죽이고 있다
나는 얼어붙은 기차를 기다린다
아직 봄은 오지 않는다
얼어붙은 논바닥을 흔들어 본다
여름에 거기 있었던 풀들을 읽는다
메뚜기의 애벌레도 펄떡 뛰어오른다
논바닥 갈라진 틈새로 미꾸라지도 퍼덕거린다
퍼덕거리고 펄떡여도 내 손엔 잡히지 않는다
머리로만 읽는다
나는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공기를 자르고 얼음처럼 산뜻한 뒷맛을 깔아놓은 바람에 휘몰린다
기차 같은 바람에 얹혀 간다
세상은 여러 갈래의 길로 가지만 바람은 한길로만 간다
한 길이 내 속에 길을 내고 달린다
나는 한눈도 팔지 않고 한 길로만 달린다
여러 갈래로 풀리지 않은 한 길에 옥죄인 오늘까지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얼음꽃
김지향
소금인 줄 알고 소쿠리를 받친다
소금 빛 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나뭇가지가 내려놓은 겨울새 두세 마리
모지라진 부리로
어정어정 목을 축이고 간다
산자락마다 망사 커튼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겨울은 느긋하게 앉아 세상을 구경한다
코발트 빛 하늘도 간데없고
하늘에서 밤늦도록 눈을 껌벅이던 수은등도
간데없고 마중 나와 어깨를 들썩이던
젊은 날의 추억도 간데없고
어디서 뛰쳐나온 산발한 바람 떼가 저희끼리
혈기를 부리며 싸움판을 벌이는 이 겨울밤
뒷산의 얼음꽃만 하얗게 까무러치며
하르르 무너지고 있다
없는 시간의 현주소
김지향
시간은 없다
쥐었다고 생각하면
이미 빠지고 없다
달아나는 길목에다 그물을 쳐도
그물 구멍으로 철철 새나버린다
멍청한 나만 땅바닥에 떨어져 있을 뿐
시간은 생각도 꿈도 사랑도 없다
동댕이치고 달아나기만 한다
나는 나와 함께 떨어져 뒹구는
과거라는 그림을 들여다보며
과거에서 흘러나는 바람 소리라도
잡으려고
과거의 꺼풀을 벗긴다
아, 시간이 살던 집이 보인다
입도 없이 발가락만 가지고
말도 없이 긴 허리만 가지고
폈다 구부렸다 하던
집이 보인다
그 집에서 시간은
노동판 시대를 낳고
물 먹인 시대를 낳고
닭장차 시대를 낳고
또 무슨 시대를 낳으려고
껍질만 벗어놓고 줄줄이 달려가고 없다
정신이 없으므로 상상력이 없는
꿈이 없으므로 의식이 없는
아픔이 없으므로 진실이 없는
시대를 낳고 또 낳아
물어뜯는 개들에게나 내주려고
여름밤의 꿈
김지향
그곳으로 가는 비행선을 기다린다
일찍 나온 별들이 한 롤씩 몸을 풀어
하늘 위의 하늘로 다리를 놓는다
바람이 자나간다 별떨기 다리 위로
낯선 미이라의 얼굴들을 태우고
여름밤이 달음박질 하는 꿈이 펼쳐진다
빗줄기가 다리 위에 몸을 누인다
별떨기 다리 위에 얹어놓은 무지개꿈이 지워진다
하늘이 까맣게 저문다
문득 지워진 꿈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복잡한 도시 아파트 창문 안에 몸을 가둔
나의 빈 가슴으로 잃어버린 여름밤의 꿈이 돌아온다
여름이 비에 젖고 있다
김지향
해가 하늘 밖으로 나와도
해에게 업혀있는 구름은 마르지도 않고 비를 만든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온다
비는 하늘 마개를 열어 놓은 채 연거푸 내려온다
나무 아래 불법 침입한 나는 나무 잎사귀를 머리에 씌운다
비는 나무 잎사귀도 패대기쳐 눕혀버린다
나무, 바람, 공기, 사람을 몽땅 물 항아리 속에 집어넣고
비에게 얹혀있는 어둠도 물 항아리 속에 집어넣고
사람 몸속에 들앉은 가슴도 물 항아리 속에 집어넣고
비는 혼자 귀밑머리 하나도 젖지 않고
여름 속으로 유유히 흘러들어간다
여름이 마구잡이로 비에 젖고 있다
여름이 살아난다
김지향
매미가 운다 나무 속에서 나무 밖으로 운다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소리는
어디에 있는지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 잎사귀들이 반짝거린다
온몸이 흔들린다 바람이 슬그머니 기지개를 켠다
하늘과 땅 경계가 흔들린다
경계에서 나온 새 떼가 날아간다
하늘 끝으로 지워진다
구름이 치마폭을 펄럭인다
문득 껑충껑충 뛰어가는 바람이 등에 구름을 업고 날개를 친다
한두 개비 떨어지던 비가 하늘과 땅을 허리띠로 동여맨다
경계가 지워진다
비속으로 열린 서랍 같은 전철이 검은 빗금을 남기며 수평으로 흘러간다
전철 속에서 매미가 운다
가다가 멈춘 전철에서 수세미처럼 비어져 나온 사람들의 발끝에서 매미가 운다
빨간 신호등을 짓뭉갠 차량이 매미소리를 매달고 달아난다
차량의 거친 발통을 붙잡고 흔들리는 파도를 타고 가는
교통순경의 입에서 매미가 운다
매미는 나무 밖에서 운다
작년에 죽은 여름이 왁자지껄, 살아난다
연가풍(戀歌風)으로
김지향
한 목소리가 달려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돌아보았다 조금 늦게
목소리는 토막토막 달아나고 있었다
다시 목소리는 한 몸으로 돌아와
한 음계 높이 올라갔다
나는 다시 돌아보았다
조금 더 늦게
노란 안개가 내 무릎을 적시고 있었다
안개 속을 헤엄치며
보일 듯 말 듯
더 높은 음계로 올라가며 나를 부르는 그를
나는 붙잡으려 피를 쏟았다
그는 이미 공중에 떠올라
금빛 연가풍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 연가는 왜 잡히지 않나
2분의 1
내 목숨이 지날 동안
언제나 노란 안개 속에서
허우적이고 있었던
나에게
열린 가슴으로
김지향
몸이 풀린 빗물이 세상 한 바퀴 돌고 간 뒤
얼어붙은 대지가 일시에 녹아나고 있다
둑 앞의 샛강도 언 발이 녹아
일어나 둑길을 따라 달음질하고
멀리 밀려난 침엽수 이마에선
얼어붙은 먼지 꽃이 녹아 내린다
하늘엔 환한 해가 활짝 솟아나
금빛 웃음을 온 누리에 부어주고
숨차게 달려온 훈풍이 잠자는 만상을 깨운다
새 아침 사물들도 일제히 잠에서 깨어나
환한 금빛웃음을 초롱꽃처럼 켜 달고
온 누리를 흔들어 깨운다
지난겨울 얼어붙었던 우리 가슴에도 주님의
아름다운 화해의 말씀처럼 금빛 웃음이 들어와
넘치는 사랑의 강으로 출렁인다
하나 되는 드넓은 화해의 강을 이룬다
오늘도 지상의 미물
김지향
눈길의 한계를 벗어난 하늘 꼭지에서
얼룩진 하늘 가슴을 뚫고
새나는 새파란 빛을
나는 감은 눈 속으로 본다
하늘 꼭지 위에 살고 있는 그 분이
날마다 빛을 새로 만드는지
세상 어둠 속에서 허우적일 때마다
살아있는 날쌘 빛 한 꼬챙이가
획, 연줄처럼 내 머리 끝을 감는다
흔들리는 하늘의 셀로판지가 찢어지고
하늘 기슭에서 숨을 몰아쉬며
생 바람이 달려온다
머리 위까지 내려온 연줄을 붙잡으려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지만
눈을 뜨고 나면
팽팽한 바람의 배를 가르고
한 치도 떠오르지 못한
나는 오늘도 지상의 미물
오늘 문득
김지향
산기슭
몇 겹의 누더기에 들앉은 나무속에서
사그락사그락 옷 벗어내는 소리 샌다
뼈를 싸고도는 물소리 옆으로
파르스름한 비단 필 스치는 소리
겨우내 얼어붙었던 피톨이
나무의 정수리를 뚫고 풀려나는 소리 뒤로
하늘 변두리를 맴돌던 바람 한 소절
나무의 정수리에 떨어지더니
오늘 문득
빨갛게 꽃잎을 흔들고 있네
오래된 영화관에서
김지향
입을 연 스크랩. 북을 걸어 들어간다
칡넝쿨 줄기가 질서 있게 엉클린 세상
깨알 같은 나라 이름에다 발을 담아본다
신기지 않는 길이 살아서 사방으로 뛰어 간다
다시 콤파스 다리를 넣어본다
평생을 가도 닿지 못할 길이 콤파스 다리 안에 갇힌다
콤파스 발에 밟혀서 퍼덕이는 길 끝
철문을 열고 들어서 본다
연기 자욱한 살타는 냄새가 아직도 남아있는,
나치 병정이 보초 서 있는 그 가스실 아궁이가
시뻘건 불기둥을 물고 있다
다시 걸어도 히틀러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시간을 쏟아내는 분무기의 입이 닫히기까지는
뒤로 밀리며 커지는 그 철문의 궁둥이
철문에 묶여있는 시간을 풀어 보내며
나는 빠뜨린 유태인 마을을 군데군데 그려 넣으며
밑 빠진 항아리처럼 새나는 눈물도 닦아내며
가슴에 돋은 소름을 안은 채 다시는 안 보려고
시린 눈을 꾸욱 감고 총 총 총
스크랩북을 걸어 나온다
와! 나는 어디로 가지
김지향
만지면 금방 손이 데이는
불의 혀를 내민 네펜세스 꽃술
사방천지 널어놓은 향기의 그물속으로
일렬종대로 밀려드는 곤충떼가
초고속으로 사라져 들어간다
밀물처럼 밀려들어간 곤충들이
살에 찰삭 달라붙는 꽃잎의
무진장 사랑에 주눅들었는지
한 꼭지도 되돌아오지 않는
비밀처럼 숨은 동굴속에서 깨지는 비명소리
깊은 밤 깊은 밀실에서 소름을 씌우며
치밀어 솟네
와! 나는 어디로 가지?
우주의 옆구리 송곳처럼 불쑥 솟은
네펜세스 꽃잎 한 접시
독기의 그물이 온 우주를 감싸쥐고 있으니!
* 네펜세스 : 보르네오섬에서 자라며, 꽃잎의 지독한 향기로 곤충을 잡아먹는 독초의 일종.
외과 의사는 투덜댑니다
김지향
비를 쓴 빌딩의 잠을 뚫고
한 길이 외과의사의 안경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빌딩 아래 들어서도 비는 비껴가지 않습니다
속이 볼록한 도수 높은 안경으로
외과 의사는 빌딩 숲을 모으고 있습니다
빌딩은 초현실의 모자를 씌워
외과의사를 거꾸로 눕혀버립니다
한 쪽 눈이 감겨버린 외과의사는
비속으로 나와 눈을 씻어봅니다
외과의사의 눈에 와서
비는 눈물이 되어버립니다
눈물나무 잎사귀가 나와서
빌딩 숲속을 거닐고 있습니다
비스듬히 누우려는 퉁퉁 살이 불은
빌딩을 안고 꺼져가는 작은 길을
외과의사는 외과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자꾸자꾸 눈물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눈물을 받쳐 쓰고
외과의사 앞을 돌아다니는
이미 정신이 없어져버린
사람들의 잘못 걷는 걸음걸이도
외과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투덜댑니다
잘못 자란 사람들의 잘못된 마음씨도
외과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투덜댑니다
외과의사의 눈물은 잎사귀를 흔들며
투덜댑니다
투덜댑니다
외롭지 않게
김지향
강설의 추적을 끝내고
탄우 속 야영을 끝내고
선고 받은 혹한기를 끝내고
소음을
버리고 패기를
버리고 회한을
버리고 버리고
잔촉이 마저 붙기 전에
초록이 마저 떨리기 전에
감성이 마저 쓸리기 전에
순정의 여인으로
사랑에 첫눈 뜬
싱그러움으로 헌신하는
아름다움으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게
황혼까진
아직
몇
발자국
용곡동 아리랑
김지향
1
널따란 논밭엔 무엇이 살까
살짝살짝 접힌 논두렁을 펴 본다
풀섶이 달빛 속에 들앉아 새근새근 자고 있다
논두렁은 아직도 쓰지 않은 풀섶 들을 안고
내 발에게 오지랖을 열어주며 아리랑이나 부르잔다
앞뒤로 둘러리 선 엔리치타워 놀이터에선
아이들 팔다리가 왁자지껄 줄넘기를 하고
드물게 아이들 틈에 낀 어른들은 먼 하늘 끝으로
높낮이도 안 맞는 아리랑을 하모니카에 담아 띄우며
말아 올린 바짓가랑이로 막춤을 춘다
일 막이 끝나고 하모니카 소리가 밀어올린
달을 등 뒤에 둔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금방 하늘로 간 하모니카 소리가 톡,톡, 창문을 두드린다
하늘 치마를 펄럭이던 그 줄넘기가 내 눈에 자꾸 커턴을 친다
이 막이 마악 저물어 꿈으로 간 나는 용곡동 널따란 논두렁에
빳빳이 서 있는 바람이 된다
2
처음 보는 '흥 타령'이 터미널 개찰구로
빠져나와 넓은 광장에 엎질러졌다
검은 띠를 허리에 질끈 두른 흰 바지들이
꽹과리 소리를 몇 됫박씩 쏟아 붓는다
가을바람이 어깨춤을 추는 틈새로
물오른 단풍나무 같은 장년들이 벅구 춤을 추고
휘모는 북채를 따라 밀양 아리랑을 광장에 쏟아붓는다
빈틈없이 둘러선 방청객 손들은 지리박 박자로
손뼉을 치느라 손을 놓아버린 아이도 잊어버린다
아침부터 한밤까지 늘어선 차들은 길게 꼬리가 물려
몇 트럭의 시간을 천안 삼거리 흥타령이 살라먹어도
찾아낼 길이 없다
차 안에 갇힌 나는 머릿속이 열려
우글거리던 잡생각들이 차창 밖으로 주루룩 쏟아진다
생각의 벨트가 풀린 나는 자꾸 행선지가 가물가물 멀어진다
천안 흥타령 축제에 막힌 가을밤 보름달도 치켜든 북채에 꽂혀
한밤 내 하늘 복판에서 자불고 있다
움직임
김지향
가을 마당에 떨어져 퍼지는
아침 바람 한 움큼이
하늘 복판에 팽개쳐져 죽은
세상의 피를 건져낸다
건져내어 뛰어가다 주저앉은
시간의 추에 얹는다
시계 바늘이 살아난다
돌이 되다만 생물의 눈썹이
다시 풀려나와
드러낸 뾰족뼈를
몸속으로 접어넣고 태연하게
도망가고 도망 오는 움직임을 만든다
다시 세상은 움직인다
마당 옆구리에 코스모스가 일어나고
살아난 들판엔 들국화도 깨어난다
웃음으로 채운 여백
김지향
오늘의 여백에 웃음 하고 썼다
여백이 웃음으로 꽉 차버린다
여백의
풀밭에선 까르르
나무 꼭지에선 와라와라
푸른 노래를 만들고 나서
하얗게 바랜 집안 공간을 채운다
공간이 빈틈없이 파랗게 살아나
여백이 빈틈없이 웃음으로 채워져
깨어나는 새 삶의 입구가 웃음이 된다
나는 본다
내 몸 안에서 발신되는
미세한 총천연색의 전파가
어둠을 죽이고 나온 빛에 들려
활짝 열린 웃음으로 바뀌고 있음을.
위험한 외출
김지향
나는 오늘도 육체의 집을 떠나 잠시
자유로운 외출을 한다
욕망의 누더기를 모두 쏟아버리고
(공간의 문을 여는 열쇠만 가지고)
육체의 문을 나서면
흰빛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하얀 길이 되어 깔린다
한 벌의 세상 끝자락 옷섶을 열면
바람도 수직으로만 일어나고
수직으로 열린 백지의 공간으로
화살 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의 발이 보인다
시간의 등을 타고 달리는
내 머리 위 낮게 뜬 해가
내 머리에 탁, 탁 못질을 하고
내 머리에 숭, 숭 구멍을 내고
내 머리에 쏴 – 쏴 - 빛을 쏟아 넣는다
잎사귀 하나도 정물이 되지 않는
모두가 빛에 들려서 날아다니는 공간
나도 한 송이 물 마른 잎사귀로 날으다가
완전 자유의 무차원 속으로
완전 자유로워 지려는 순간
나는 또 팽팽한
나의 육체에게 멱살을 잡혀
(아직도 내 심장 일부는 빛에 꿰뚫려)
지상으로 추락한다
나의 육체는 나에게 속삭인다
"위험한 외출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해."
유비쿼터스
김지향
1 - 자동 지우개
하늘에 지우개가 지나간다
먼지가 닦인다
지우개가 지나간다 하늘에
거울이 절벽처럼 걸린다 거울 속엔
끈 달린 새빨간 홍시가 토닥토닥 불꽃놀이 한다
지우개가 지나간다 불꽃 속에
자전거를 탄 아이 하나 손가락만한 핸드폰으로
반짝 스치는 총알처럼 불꽃을 쏜다
하늘 가득 마띠스의 물감통이 엎질러진다
아이의 휴대폰엔 지우개만 찍혀있다
2 - 자동 길
입들이 길의 입에 손을 넣어 스위치를 끌어당긴다
길의 두루마리가 책장처럼 좌 악, 펴인다 소리들이 깔린다
소리들을 올라탄 한 두름의 입. 입들을 싣고
길의 지느러미가 출렁이는 공기를 헤엄쳐나간다
(이젠 길 스스로가 세상을 떠메고 간다)
입들은 길이 구불텅, 고개를 넘을 때마다
와~와~ 와~ 길게 소리를 흘리며
아파트 머리 위에 펼쳐진 책 밖의 책을 읽는다
몇 줄의 기러기가 구불구불 써 놓은 가을 편지도
눈씨 모아 힘껏 읽으며 하늘에 이마를 넣으려 발돋움 한다
길이 출렁거리는 공기에 얹힐 때 마다 입들은
꺼내보지 못한 소리도 모두 꺼내어
대롱거리는 꿈을 크게 크게 읽는다
너무 많은 소리를 먹어 숨을 몰아쉬는 길에 올라 탄
입들의 복통 앓는 욕망을 산꼭대기에선 공기의 입이 먹어 버린다
세상 한 바퀴 돌아 다시 또 자동 집으로 내려와서는
잠시 소리들을 게워놓고 지느러미를 품속에 접어 넣는 길
자동 길도 길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는 가지 않는지
내 휴대폰 안으로 들어와 내 손에 들려 있네
머리 위엔 또 한 개 새하얀 길이 하늘 속에 가만히
꼬리를 넣고 누워 있지만
4 - 여자와 자동 집
집이 좌. 우. 앞. 뒤로 몸을 움직인다
입으로 명령하는 대로만 움직인다
오늘은 집이 발을 내밀어 걸어 나간다
집안에서 사는 여자가 시장을 본다
여자는 집 안에서 둘래길 산책을 하고
집안에서 번지점프로 낙동강을 건너뛰고
집안에서 고향 집을 다녀온다
여자는 집안에서 오페라극장으로 출입을 하고
집안에서 직장 출퇴근을 하고
집안에서 영화 구경을 한다
여자는 심심하면 입으로 명령만 한다
더 심심하면 집을 차곡차곡 접어 들고
하늘 위의 그 하늘로 가서
자동 집을 펼쳐놓을 궁리를 한다
의자 한 채
김지향
그림자를 늘어뜨린 의자가
빈 집이 되어 빈 집 속에 서 있다
잘 살펴보면 가시나무에 걸린 한 쪽 어깨가
땅으로 축, 처져있다
빈집 속을 기웃거리는 내 눈을
머리칼을 풀어헤친 어둠이 갈퀴를 내밀어
굵은 노끈의 그물처럼 나꿔챈다
나는 그때 어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뒤로 나자빠진다
혼자 서 있던 의자도 쿵, 나둥그러진다
자던 먼지들이 벌떡 일어나 바들 바들 손을 떨며
나에게 덤벼든다
들판의 중간쯤에서 옆으로 새나간 길로
새참 먹을 시간만큼만 가면 의자 혼자 사는 마을이 있다
무성한 탱자나무 가시에 늘 어깨가 걸려있는
그 집의 마당엔 문어발을 뻗어 잡히는 사물마다
덥석덥석 감아넣는 웅덩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앉아 있다
군데군데 군사를 거느린 웅덩이는 사람의 발을 움켜 머리칼까지
몽땅 말아삼키는 50년대식 낡은 시간들이 종아리에 감긴다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야생초들도 눈에 불을 켜고 서 있다
눈에서 튀어나온 실핏줄이 50년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을까
날마다 어디서 보내오는 신호음을 온몸으로 받아적기만 하는
손을 치켜든 빈 의자 한 채, 언제 웅덩이가 삼켜버릴지 모르는
인형의 방
김지향
작은 꽃들이 놀고 있는
작은 방
탁자 위에는
두세 치 키의 유리곽들이 뱅글뱅글
제 그늘 밑으로 돌고 있었다
키다리 난장이 인형 남매가
살아있는 머리채로
유리곽에 엉겨 붙은 어둠을 쓸어내고 있었다
그 살아있는 머리칼 속에서
생귤내가 나는 생빛 몇 줌을 집어낸 나는
눈 코 입 귀가 한판에 뚫려
열린 내 정신의 문으로
참 삶의 맛을
불어넣고 있었다
방의 꺼풀을 벗기고
팔팔 뛰는 금붕어들이
물의 오색 무늬를 건져 들고 와서
어둠 밖으로 튕겨져 나온
내 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너머 공터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의 팔팔한 재잘거림
저 살아있는 바람 소리 속에서
피가 뛰는 생명을 뽑아든 나는
뭇 신경의 문을 열고
참 사는 맛을
잡아넣고 있었다
작은 꽃들이 내다보는
작은 방
한 구석에 크레용을 들고 쪼그리고 있는
얼굴 맑은 나비들이
머뭇거리던 어둠이 물러간 헌 벽을
연초록으로 깁고 있었다
작은 꽃들이 새 시대를 이고 나와
숨어버린 헌 시대의 방석에 앉아 있는
내 풍금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방 청소를 끝낸 인형 남매가
열어놓은 낯익은 구멍으로
유년의 문을 열고
참 삶의 맛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일란성 잎사귀들
김지향
해가 긴 혓바닥으로 천천히
땅의 몸 전체를 핥아간다
땅의 입에 박힌 대못이 빠진다
헐거워진 땅에
누워서 잠만 자던 바람이 벌떡 일어나
발을 넣는다
멍청히 서서 하늘만 쳐다보던
나뭇가지 신경이 꼿꼿이 일어선다
가지에 붙어 귀를 쫑긋거리던
잎이 푸른 물을 뚝, 뚝, 흘린다
(새파란 세상, 일제히 움직임을 시작한)
사람의 몸에 열꽃이 돋는다
몸 일부에서
햇덩이 같은 욕망의 잎들이 피어난다
욕망의 잎사귀는 해가
제 혀를 거둬들여도
일란성 새끼들을 연거푸 복제해 낸다.
일점무구(一點無垢)
김지향
내 안에서 바람이 부숴지고 있다
열 겹의 부끄러움이
열 겹의 옷을 챙겨 쫓겨 나가고 있다
방금 나의 안으로 들어오던 먼지도
입구에서 발이 굳어 시들고
며칠째 살 구석을 뒤적이던
습한 한 목소리도 문 쪽으로 가고 있다
나를 붙들고 있던
이 몇 개의 움직임을 비우면
나는 아직 조금 남은 동정(童貞)으로
저 햇빛 속에 나와 있는
일점무구,
일점무구 속에 어울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그 오욕(五慾)을 털고
훌쩍 일어난다
아, 가볍다
잊어버린 길
김지향
오늘은 길이 멀어져 간다
마음 안을 한 바퀴 도는데
수십 년이 걸리더니
수십 년이 초 시간의 흔적만 남겨놓고
길은 이제 떠나간다
내 안에서 구불텅거릴 땐
생나무 타는 냄새를 풍기더니
타는 생나무 냄새가 몸 밖으로 퍼져 나오더니
가깝고도 불편한 관계로 마음 베어내더니
이제 떠나가는 네 뒷모습을 본다
(수십 개의 길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복면을 한 한 꼬챙이의 길은 자꾸 뒤돌아보는,
내 요소를 너무 많이 끌고 가는지
삶 전체가 무너져내리듯 아찔하는)
길이 가서 닿는 모퉁이에선
하늘이 열리고 스르륵, 별이 미끄러진다
별도 삶이 있는가
별도 궤도 이탈을 희망하는가
나도 이제 그만 내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어
궤도 하나씩 잊어버리기로 했다
살점이 내린 뼈를 잊어버리고
심장이 녹은 가슴을 잊어버리고
동공이 빠진 눈을 잊어버리고
휴지처럼 낡아서 가버리면
아니 오는 길도 잊어버린다
치열하게 잊어버린다.
잔디밭의 아이들
김지향
풀 기둥을 열고 보는 눈이 큰 잔디밭에
구슬로 뛰어가는 맨발의 아이들이
초록실을 뱉아 놓은 풀바람을 몰아 타고
파릇파릇 파도가 되어 빈 땅을 채운다
구름의 문을 열고
한줄기 비가 된 내가
깡마른 육교 위를 지나갈 때
그때
빗속을 뛰어드는 저 아이들을 곁눈질하며
어른들은 화려한 거짓말을 받쳐 쓰고
비를 피해 달아났지
달아나다 다시 어둠을 앞세우고
수천 마리 메뚜기떼를 몰아오는
캄캄한 거짓말이 되었지
어른들의 캄캄한 거짓말 속에서
수천 번
헝클어지던 내가 오늘은
저 파도가 일어나는
초록 눈의 잔디밭에 파릇파릇
맨발의 아이들이 되고 있다
전자파의 탐지
김지향
내 눈은 끝도 없이 치근대는
전자파를 감추고 있다
전자파는 먼 데서도 그의 내부 구석구석을
손이 닿지 않는 몸의 세포 속까지 탐지해낸다
그의 심장 밑바닥에 잠자던 추억이
목에 푸른 힘줄을 세워 쳐들고 나옴을
그 추억 한 잎씩 베어져 나감을
베어져 나간 자리에 새 추억의 싹이
나고 있음을 탐지해낸다
어느 날 문득
몸 전체를 열고 나가
우주 안밖을 유영하며
하늘 위의 하늘에서 전송되는 말씀을
전 생애를 부어 지상에 뿌리는
순결한 우슬초의 그 영혼도 탐지해낸다
그러나 전자파는
맘대로 육체를 뚫고 나가 하늘 한 바퀴 돌며
그의 영혼을 우주 밖으로 분산시켜놓고
귀환하는 나의 입자들이 당돌한 육체 조립 술로
그와 나를 바꿔치기하는 이 위험한 장난기를
왜 탐지해내지 않는지?
종이학
김지향
발코니 쪽문을 열고
내가 빚은 종이학 몇 마리 내보냈다
조여 맨 벨트를 풀고 핵가족이 된 학들은
먹어도 먹어도 다시 돋아나는 공기로 배를 채우며
하늘 높이 흩어졌다
하늘 바다를 받치고 있는 햇살의 수정그물을 끊고
잔등이 한번 반짝 빛을 내더니
모두는 일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느 첫 새벽
이슬 위에 지친 다리를 얹어놓고
아직 덜 깬 잠에 기대앉은 먼지만 시커먼
열등 새 한 마리
불이 붙은 첫차의 눈에 붙잡혔다
새는 차량이 뿜어내는 기세등등한 기계음에 놀라
날개를 몇 번 삐걱거렸다
한달음에 달려간 나는 새를 보듬어 안고
다친 날개를 실로 싸매주었다
새는 푸른 물감통인 하늘 가슴을 향해
연기 같은 빗금 한 줄 남겨놓고
푸드득 푸드득 종적을 감추었다
발코니 쪽문을 떠난 종이학 몇 마리
떨어진 열등 새까지도 어서어서 제 발로 날아서
문 닫히기 전 하늘의 비밀궁전에 들어가
생명을 주는 전능자의 품에 안겼으면 좋겠다
죽음은 살아서 돌아온다
김지향
너는 언제부터 나의 두려움이 되었니
발 앞에서 절벽이 무너진다
눈 옆에서 고목 뿌리가 뽑힌다
이마 위에서 공기 알갱이가 쏟아진다
무너지고 뽑히고 쏟아지는 그림이
심장 절반을 깔고 앉는다
긴 목 긴 다리 긴 팔뚝으로
너는 나를 무너뜨리고 뽑아내고 쏟아내는 폭력으로
지나온 길을 슬쩍 지워버린다
나의 디카 폰에도 안 잡히는 정체불명의 너에게
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만 한 번도 답전이 없는
너는 멀쩡하게 살아서 내 손을 잡는다
너는 언제부터 나의 그림자가 되었니
오늘은 얼어붙은 하늘 난간에서 미끄러지는 요술쟁이가 된다
어디든 닿는 곳은 많아도 자신에겐 닿지 않는 변신술의 귀재
긴 팔 긴 다리의 경주자 1초에 우주 끝을 돌아오는 투명 로봇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하늘마루에서 땅 밑으로
발이 닿기만 하면 죽음을 흘리는, 겨울엔 너무 자주 흘려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지만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는
너를 나는 뒤꿈치만 스쳐도 왜 몸이 으스러지도록 두려운지
이 겨울을 끌고 어둠의 계곡으로 가지만
너는 침묵에만 닿을 뿐 죽음인 너에겐 닿지 않는다
네 손아귀에 쥐어지는 살아있는 사물 모두는
죽음에게 넘겨주고 너는 혼자 살아서 유유히
돌아온다 나의 그림자로
지리산 바람 소리
김지향
지리산 중턱을 오른다
올라갈수록 깊어지는 계곡이
살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을 꺼내놓는다
파란 손을 팔랑이며 찔레나무 가지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오래된 노송나무는 거느린 새 식구들과
팔짱을 걸고 영토 넓히기를 서두르는 중이다
사철 얼굴 붉은 단풍나무는 부끄러운 듯
땅으로 고개 숙이며 마중 나와 서 있다
솔방울 같은 열매를 머리에 인 구상나무는
활짝 팔을 펴 하늘을 안고 있다
식구를 늘이지 못한
굴참나무 개암나무 도장 나무들 사이로 들락거리는
휘파람새가 진종일 구슬이 뛰어가는 휘파람으로
계곡의 정적을 깨우고 있다
나무들의 발치께에 드문드문 밥풀처럼 흩어져 있는
산꽃들 머리 위로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가면
한나절 햇볕도 들어왔다 바스러져 날아가 버리는,
절로 따라 들어온 시간도 나뭇가지에 걸려 퍼덕거리다
죽어버리는 뱀사골 중턱에선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 같은
징 소리 같은 물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떠돌다 간다
오랜 기억 속에 맴도는 젊은 혼령들이 아직도 저승에 가지 못해
깊은 계곡 중턱에 앉아 그때의 울음을 울고 있는지
한 곡조 원혼가가 무겁게 날고 있다
억새 소리도 같이 우렛소리도 같이 무거운 발걸음을 남겨두고
이쯤에서 하산하는 지리산 바람 소리.
진눈깨비 한 가락 찍다
김지향
억새밭엔 억새는 없고 얽힌 머리칼들이 성이 나 있다
자지도 않고 한눈도 팔지 않고 기가 펄펄 살아서
무더기무더기 스크럼을 짜고 팔목을 잡아끌며
아래위 옆으로 도리질을 하고 있다
온 들판에 마른 몸을 들어낸 채 달려가는
칼바람에 철철 살이 훑이고 있다
(사람들의 카메라 속에선 거꾸로 서서
살살 눈웃음을 치고 있어 한 움큼 말아 쥔
내 손이 부드러워진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한잠 자고 난 밤
내 카메라 눈이 한 눈도 감기지 않은 밤
카메라 눈에 빗금을 긋고 기다란
진눈깨비 한가락 지나간 밤
카메라를 접어 넣기 아까운 밤
밤을 가로질러 진눈깨비 몇 줄기 열차처럼 지나간다
우주의 손이 진눈깨비 창고를 놓쳐버렸는지!
짧은 만남
김지향
창밖을 본다
눈이 내린다
어디서 왔는지 꽁꽁 몸이 언 바람들이
큰 소리로 싸움질하는 사이로
안개처럼 눈발이 모여
서로 팔짱 걸고 날아다닌다
나뭇가지에도 땅 위에도
내려앉지 못하는 눈이,
깍지 끼고 서로 잡아당기는 눈이
내 눈앞에서만 얽혀서 안개가 되는지
달린 날개를 떼버려도
내려앉지 않는 눈,
나는 가슴을 열어놓았지만
글썽이는 눈물도
열린 가슴으로 새나가지만
(외로움을 끌어낼 불이 되지 못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눈이 먼저 알고 있는지)
수만 개의 눈이 한 덩이로 몰려
가슴 밖에서
수만 개의 눈물이 되어간다
(창문의 안과 밖
짧은 만남을, 그 아린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차표 없이 온 봄
김지향
차표 없이도 불쏘시개 한 장으로 개찰구를
빠져나온 봄 한 덩이 마중 나온 뾰루지 같은
봉오리들에게 화덕 한 통씩 안겨준다
봉오리들은 일심으로 화덕에 불을 붙인다
지나가는 바람 한 필 끊어와 살 살 살 화덕
앞에서 밤 내 부침개를 뒤집는다
해가 하늘 기슭에 얼굴을 내민 뒤에야
뒤집힌 자기 몸을 본다
불침번으로 지켜준 나무에게 손을 흔들며
빵긋, 봉오리를 깨고 나온 진달래
만산에 활짝 불을 피운 봄 아침
녹 쓴 추억은 뒤로 밀리는, 햇살이 똑 똑
부러지는 빳빳한 젊음을 산새들도 아직은
어리둥절 구경만 한다
창준*의 독서법
김지향
창준은 아장아장 걸어서 꽃한테 간다 샛노란 유채꽃 한 잎 꼬아 쥐고 있네 하며 손가락으로 읽는다 노랑물이 든 손가락이 꼬랑이를 쳐들고 있는 노랑나비 망사 천 날개를 읽는다 구겨진 날개를 말끔히 펴서 읽는다
머리 위 연분홍 물감으로 얼룩진 바람 한 소절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바람 손을 손가락으로 낚아채어 있네 로 짧게 숨을 끊으며 읽는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뜬 ‘창준‘은 다시 물 항아리를 품고 있는 하늘 가슴을 통 통 두들기며 빙글빙글 몸을 굴리는 까치 한 마리 있네 의 총으로 쏘아 읽는다
창준의 머리 뒤로 이제 갓 깬 말라깽이 나무들을 품고 긴 다리를 모으며 빳빳이 서 있는 산 아래 붉은 살을 다 풀어주고 잠적해 가는 햇빛을 잘라 산 목덜미에 붉은 타이로 걸어주는 창준은 있네 있네 검지 손가락으로 다급하게 읽는다 하루 종일 읽고 또 읽는다.
* 창준 ~ 두 돌 지난 시인의 첫 손자
초록빛의 아이들
김지향
활짝 열린 고궁의 하늘은 아이들 얼굴로 꽉 차 있다
새파란 마술지팡이의 바람이 내 발 앞에 와서
눈이 큰 풀밭을 부려놓는다
풀밭 속에 솜구름 같은 함성이 동 동 떠다닌다
함성을 앞지르는 아이들의 맨발도
풀물이 올라 초록빛이 된다
초록빛 아이들 속에 들어간 나는
아이들 키 만 한 물음표에 빠진다
아이들의 샛별 같은 물음표를 내 귀에 주워 담으면서
나는 문득 경이의 눈을 뜬다
아이들의 입에서 줄지어 나오는 종달새의 지저귐
하늘까지 퉁기는 그 의문부에 깔려 아찔, 나는 말을 잃는다
보랏빛 내 정신의 나이를 키질해보면서 부끄러움을 타는 나,
아, 나는 어디쯤에 와 있을까
새삼 얼굴을 씻고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무겁게 껴입은 나이를 한 겹 한 겹 벗어 던진다
척추를 눕히는
김지향
어제까지 거뭇하게 그을린 길이
새하얀 살에 금을 내고 간다
창밖엔 꽁꽁 얼어붙은 허드레 세상이
속살을 내놓고 앉아 있다
빳빳한 허공을 붙들고
척추를 연거푸 눕히는 눈발을 베며
한 줄로 줄서기 하는 갈가마귀 떼
허공에 대롱대롱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다
쉬지 않고 오는 눈발에 매 맞는
가로수 하얀 바지가랑이 사이
자꾸 뒤로 미끄럼 타는 차량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는 구세기 세상
누더기 소리들을 깔아뭉개는 중이다
별똥별도 숨어버린 밤
백지로 채워진 공간에 남은
한물간 세상도 죽어 있다
내일 새 세기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햇빛은 날을 펴 놓지 않아도 된다.
청소하는 날
김지향
허공에 비를 갖다댄다
오른뺨 왼뺨 돌려가며
바람이 허공을 긁어낸다
해가 반짝 눈을 뜨다가 배경으로 나앉는다
몇 묶음의 비를 움켜쥔 바람이 우주로 올라간다
쏴 – 쏴 - 먼지가 쏟아지는 블랙홀
온몸이 비가 된 바람이 마주 버티고 선다
바람이 내준 길로 먼지에 갇혀있던
우주선이 떠난다 제비처럼 미끄러지며
지상 정거장으로 귀환한다
허공에 안 보이던 길이 햇빛을 데리고
지상으로 온다 드디어 환한 세상
나도 마음에 난 길을 닦는다
마음의 잎사귀에 앉은 해묵은 딱지를 뜯어낸다
세상을 통째 갖고 싶었던 허욕이 알갱이 채 떨어진다
나에게 안 보이던 내가 유리 속처럼 보인다
이제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봐도 되겠다
청조, 우주 밖에서 다시 사는
김지향
뒤돌아보면 달려갈 길 다 갔는지
아픈 세월들이 잠시 발을 멈추고
신발을 벗어 털고 있네
보이네 얇은 망사 울타리 너머
힘겹게 엮어 논 휑한 허공에
힘겹게 달려온 세상 선수들이
먼저 가려고 신발도 벗어들고
새치기로 달려가더니 어느새
훌쩍, 뛰어넘은 울타리
망사천 밖에서 환히 보이네
기쁨과 슬픔이 덩어리로 찌들은
옷가지 벗어 청정한 물에 씻어 말리며
피범벅으로 얼킨 발가락 치료하는
삶을 마친 선수들,
울 밖 시간을 깡그리 잊어버린
망각 훈련에 익숙해진 선수들이
나이를 한 올 한 올 뽑아내고
초록잎 수액을 약 방울처럼 뿌려 넣고 있네
다시는 늙음과 그리움과 고통과 슬픔을
겪지 않을 풀빛 청조로
하늘 너머 우주 전체에 집 짓고
넓게 편 날개로 헤엄쳐 다닐
가장 깨끗한 생명으로 다시 살
세계가 영원처럼
그렇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네
이제 점점 가까이 보이네
보이네
초롱불 진달래
김지향
삭둑삭둑 키를 잘라낼 땐
피 한 방울 안 나던 진달래
오늘 아침 창문을 열고 보니
꽃분홍 선혈을 뒤집어쓰고 있네
조금씩 가지를 쳐낼 땐
신음소리 한마디 안 내던 진달래
오늘 아침 물주다 보니
빨갛게 켜든 초롱불 속에
마디마디 아픔이 웅크린
눈물을 감추고 있네
초롱불 한 잎 한 잎 만지작거리다
돌아선 나의 등 뒤에서
진달래 아픈 비명 소리가
딸, 딸, 딸, 신발을 끄을며 따라오네
초봄의 귀밑머리
김지향
방금 머리 내민 봄
햇빛을 만져본다
빛꼬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풀밭에 뒹군다
햇빛의 발이 콩.콩,콩,
자국을 찍는 풀잎마다
연두빛 얼굴이 된다
봄의 빛은 발이 간지럽다
(손으로 움켜잡으면
몸이 가루 되어 먼지처럼 날리지만)
햇빛이 빗금을 그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죽어버린다
아지랑이 뒤에 머리를 숨긴
풀이 쏘옥. 쏙 혀를 내민다
보들한 바람에
파란 혀를 날름대는 풀
초봄의 귀밑머리가 내 뺨에서
파르랗게 나팔댄다.
추수
김지향
그 열병을 끝내는
허약이 오기 전의
생기로
머리 위를 감도는
돌풍이 말아가기 전의
긴장으로
떨어져 잊혀지는
열등생이 되기 전의
충만으로
열대성 기후를 떠나는
외로운 운행이 시작되기 전의
성숙으로.
마침내
도강하는 사랑의 손이
잡은 열매
추억에게 안녕
김지향
사랑, 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절망처럼 암담했던 시대가
내 눈썹 끝
내 가슴 귀퉁이에 일어선다
절망의 시대 너머
기억의 갈피에서
이미 형체도 사그라진 사랑이
존재함! 하고 손을 치켜든다
호롱불보다 밝은 촛불 밑에서도
도저히 안 보이는
먼지가 한 줄 파르르 기억 밖으로 날아갈 뿐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한 잎의 무지개가
내 옷깃 속엔 언제 들어왔나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빛나지 않은 괴로움 한 줌 만들어내며
때론 빛바랜 학이 되어
눈을 깜박거리며
미래에게 주는 나의 안부를 질투하며
나를 거쳐 간 시간에게도
안부를 보내주기 바라며
위험한 감각과 빈틈없는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그래, 나의 기억 안에서만
완벽하게 빛나고자 하는
추억에게도 안녕.
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절망처럼 암담했던 시대가
불빛보다 더 밝게
살아남을 본다 분명히.
추억 한 잔
김지향
꿈 통에 대못을 박고
다시는 열지 않기로 했다.
나의 이 굳은 결의 앞에
기억의 스크린이
책장처럼 넘어간다.
스크린 한 토막 뚝, 잘라내어
가슴의 가마솥에 넣고 천천히 끓인다.
허름한 삶 한 자락이
조청처럼 졸아들어
추억 한 잔으로 남았다
한 잔 속에 가라앉아 타고있는
비릿한 추억의 눈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꿈 통에 박힌 대못이 크게 확대되어 왔다
성급한 나의 결의를
저항이나 하듯이.
카메라처럼 서버를
김지향
세상 껍질을 깎는다
나이 많아 뭉툭해진 칼자루가 빠진다
갱 속처럼 어둔 담장을 넘는다
자동 길들이 사방으로 튕겨간다
길 위에 얹힌 얼굴 감춘 사람들의
몸속 깊이 묻힌 욕망을 헤적여본다
뭉툭한 칼자루가 또 빠진다
깊은 어둠을 검색할 땐
바람꽃처럼 떨어지는 칼자루의 서버,
마우스를 패대기쳤다 다시 집어든다
길 껍질이 벗겨지고 놀라 뛰는
사람 몸이 두서없이 도망치며 숨는다
달맞이꽃, 해바라기꽃, 후레지아꽃, 별, 달,
인조등이 뒤섞여 빙글빙글 도킹하는 어울림
한가운데 카메라처럼 서버를 댄다
총천연색 스펙터클 한 장이 찰칵, 넘어간다
직립으로 웅크린 굴곡 많은 세상
온몸으로 적어나가다 손가락 마디마다
닳아 망가진 마우스, 아무리 두들겨도 뭉툭한 자루뿐
무작정 휘둘러도 자루 빠진 내 뭉툭한 칼로는
욕망을 잉태한 임부처럼 배만 나온 세상의 몸,
꽁꽁 끌어 잠근 자물통이 한 눈금도 깎이지 않네. 왜?
컴퓨터와 아이
김지향
고층 아파트 발코니에서
아이 하나 찻길을 보고 있다
줄자 같은 길에 발이 묶여
줄줄이 끌려가고 끌려오는 차량들이
먼지를 싣고 와서 찻길 가득히 부려놓는다
찻길이 먼지를 모두 삼킬 동안 지켜본
아이는 창밖으로 빨대를 내밀고
비눗방울 총을 쏘았다
아이의 풍경이 깨졌다
안개 같은 물방울이 동그란 하늘을 만들었다
아이의 하늘 속 바람이 몰려와
놀라 빠진 가로수 머리칼을 쓸어갔다
벌거숭이 세상이 되었다
햇빛이 톡, 톡, 바스러지고
공기가 퐁, 퐁, 구멍이 난 찻길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아이가
구멍 속으로 세상을 본다 그때
문득 차량들이 튀어나와 찻길을 베어 먹으며
또 다시 먼지를 깔아놓는다
뿌옇게 먼지 옷을 입은 세상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실망한 아이는
컴퓨터를 열고 뚫린 공기의 구멍 속으로
손을 내밀어 살아난 차량 하나하나
인터넷 감옥 속에 마구 잡아넣는다
인터넷 찻길엔 차량들이 살아나지 않았다
편지
김지향
마당귀에 조금은
도는 그네를 타고 햇빛이 누워 있다
그네는 바로 멎고 햇빛은 달아난다
엎드렸던 바람이 머리를 쳐들면
먼 데 강이 넘어지는 소리가 걸어온다
기둥에 남은 온기마저 삭아지고
한쌍의 고양이가 죽은 듯 얼어 있다
이내 뜨던 별도
햇빛을 뒤따라 땅속으로 내려가고
둘러보아도 기척 하나 없는 내 곁에
다시 와 머무는 그날의 그림자
마당귀에 머리 든 바람이
멎은 그네를 흔들어도 침묵처럼
비어 있는 이 어웅한 때
이승엔 없는 너에게 나는
약속도 없는 편지를 쓴다.
푸른 땅을 걷는다
김지향
푸른 물이 든 푸른 땅을 걷는다
나의 실눈으로 들어오는
숲들의 잎과 잎이
안개도 구름도 걷힌 얼굴로
밝게 웃는다
안개도 구름도 없는 얼굴 아래로
아이들이 솔방울처럼 굴러간다
고궁의 5월은
땅도 사람도 7활이 풀빛이다
세상의 잡음이 들어와 보지 못하고
매연도 먼지도 따라와 앉지 못하는
아이들의 새파란 눈 속으로
커다란 호수를 몰고 애기 바람이 달려온다
바람이 조그맣게 담겨있는 호수 속엔
내 유년의 얼굴이 돋아나
자꾸자꾸 아이들 얼굴에 겹쳐 눕는다
아이들 입속에서 새소리가 뛰어나와
내 해묵은 머릿속 체증을 씻어내린다
아~ 하고 오랜만에 질러보는 함성
어느새 나도 푸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푸른 수혈
김지향
한낮 공중에 목매단 봄을 딴다
철없는 손이 놓아버린 꿈
빨간 봄을 베어 문다
공기의 배가 펄럭인다
꽃잎이 차르르 흐른다
피다 만 봉오리까지
온통 내 몸에 붉은 피를 수혈한다
힘줄이 파랗게 돋으라진다
새파란 잎이 화들짝, 몸을 열고 나온다
여름이 세상을 덥석, 깔고 앉는다
풀물의 그녀
김지향
바다 밑 수렁 뚜껑을 열고
길고 긴 해꼬리가 내려갑니다
풀물투성이가 된 그녀는
풀물을 섞으면서
세상 쪽으로 나아갑니다
세상과 입씨름도 끝내고
침방울을 닦으면서
아직은 새파란 눈에
빛도 물소리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
공중을 짓밟은 우레소리를 타고 나와
세상의 심장에 방아쇠를 겨누는
저녁 까마귀 떼를 보아도
깜빡 잃어버린 정신을
못 찾는
그 사람을 만나러
그 사람의 눈에
풀물을 먹이러
슬픔이 조금 빗겨선 밤엔
풀물의 그녀 홀로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늘궁전
김지향
바람은 밤마다 과일 따러 하늘궁전으로 간다
하늘궁전은 태초부터 과일밭이다
넓은 가슴 가득 찬 과일별 한 알 한 알이 하늘의 눈이다
하늘눈이 지상의 풍경을, 사람의 마음을, 계절의 변화를 날마다 찍는다
하늘궁전에 걸린 투명유리 사진을 보고
오늘은 차례를 알아차린 가을이 지체 없이 성큼 뛰어내린다
나이를 알 수 없는 가을이 칼을 찬 바람 뒤에 숨어서
한물간 계산기를 들고 공원 벤치에 걸터앉아
손을 흔드는 나무들의 지상 삶을 계산해 본다
밤마다 몰래 카메라로 하늘궁전 하늘 눈과 교신하는 나무의 여윈 손가락을,
하늘로 돌아가기 전 미리 알아보고 싶은 어미의 마음을 가을이 알까
바람칼이 스칠 때마다 헌 포장지처럼 찢겨나간
못다 쏟은 나무들의 사랑을 하늘궁전 메일에 쓴다
바람칼이 스칠 때마다 헌 포장지처럼 찢겨나간 분신을 하늘로 보내면서
참다 터진 어미 나무의 말을 피로 쓴다
‘부활 때 만나자, 잊지 않으마’ 로는 채워지지 않는
나무의 아픔을 가을 내 쓰고 또 쓴다
떠나면서 듣는 ‘엄마’라는 비명을 비명의 메아리를
밟고 다니는 가을은 메아리의 아픔을 알까
마당 넓은 하늘궁전에서 ‘만. 나. 자’ 마디마다 목이 멘다
가을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가슴 전체를 적시는 눈물
하늘궁전의 하늘 눈도 감기는 눈물
눈물 속에 사는 가을은 눈물을 모른다.
하늘 새
김지향
새벽에 안개가 접어놓고 떠난 하늘을
켜켜히 열어보아야 어젯밤에 벗어놓은
하늘 새의 깃털이 보인다
하늘 새의 뒤꿈치에서 흘러나온 별똥별이
하늘 이불을 끌고 하늘 위 하늘로 간다
눈을 감으면 자세히 보인다
연소 불량의 시간들이 쌓여있는 구름층도 보인다
젊은이들은 저 구름 한 장 베어 들고 눈을 감는다
못다 쏟은 열정을 마지막 태울 불꽃으로 돋아 오른다
마악 앞산 위에 눈썹을 내민 하늘 새가
온 우주에 빛을 부려놓고
하늘 위의 하늘로 헤엄쳐 간다
하늘에 말 걸기
김지향
잠시 소나기 그치고 번쩍이는 번개만 달리고 있다
겁 많은 사람들은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문의 열쇠를 찾는다
나는 번개가 인화된 창문의 그림자 앞에 마음 문을 연다
다급히 마음에 신발을 신긴다
갈 곳을 찾다 번개가 불꽃을 꽂는 전깃줄에 내 눈만 꽂는다
전깃줄이 불자동차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어댄다
빳빳이 신경을 세우고 있는 플라타너스 가지가 땅에 이마를 찧는다
놀라 뛰는 플라타너스 눈은 어디다 흘렸는지 몸만 사정없이 흔든다
나도 눈을 하늘의 불자동차에 넣어두고 이마는 창문 밑에 패대기친다
하늘이 빨갛게 불이 났는데 다시 또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는 하늘 불을 끄지도 못한다
하늘은 눈 하나로 세상 전체를 밝히 본다
나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는 소리로 이제 그만! 하고 거푸 소리 질러 본다
내 소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 몇만 리를 걸어야 하늘마음에 닿을까
(태초의 적요 속에서 처음 태동한 하늘마음)
그 마음을 하늘은 끝도 없이 땅으로 보냈지만
하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다급하게 오늘에서야 하늘에 말을 걸어본다
대답 없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자동차 소리
하늘 말을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소리가 인화된 창문에 엎어져 눈을 감싸고
한밤 내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하늘은 편지지
김지향
나는 날마다 하늘 편지지에 편지를 쓴다
내 새파란 사연을 평생토록 쪼아 먹은
하늘 살갗이 파랗게 잉크물이 들었다
하늘치마가 출렁출렁 나부낄 땐
내가 쓴 푸른 고통이
다 헤진 휴지 같은 사랑이
푸르른 희망으로 각색된 답장 한 묶음이 되어
종이 비행접시처럼 날아온다
하늘은 푸른 씨를 모종하지 않아도
편지 받는 사람의 가슴마다는 푸른 싹이 돋는다
푸른 잎이 팔랑이는 창마다
하늘 편지지에 한밤 내 쓰고 받은 답신
한 장의 꿈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다
(때론 임자 없는 신발처럼 떨어져 나뒹구는
편지도 있다)
나는 때때로 찾아가는 옛집의
팽나무 살갗에 오늘 열매처럼 오돌오돌 돋아난
푸른 희망의 글귀 몇 점 먼지에 덮여
자고만 있는 종이 비행접시 한 장 읽는다
저 네거리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에 삿대질만 하던
그가 하늘로 수납된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하늘은 가끔 송신에 답신 없는 사람은)
그 날로 벽난로 끄듯 말끔히 회수해감을 읽는다
오랜 세월 내 귓바퀴를 돌며
고막을 씹던 바람의 푸른 송신음
접혀진 하늘 한 귀퉁이가 발신처임을
이제야 이제야 읽는다.
한낮이 켜져 있는 방
김지향
왜 안에서 밖으로 공기가 밀려 내리는지
왜 안에서 공기가 자꾸 생겨나는지
알 수 없었다
둥근 벽엔 자잘한 개똥벌레가 되다가
불똥이 되어 어지럽게 날으다가 저절로
없어지는 하얀
방울 무늬가 붙어 있었다
밀리는 공기 안쪽에 폐만 커다란
사람의 키에 따라 졸아들기도 늘어나기도 하는
고무의자가 팔다리 내려놓고 자고 있었다
의자를 힐끔힐끔 눈 흘기며 그는
파랗게 성난 글자를 문신처럼 찍어내는
컴퓨터 속에 들어가
누가 창 밖에서 원격조종 안테나를 꽂아 놓고
보아주기를 희망하며
뛰어가는 글자의 행간을 자주 뒤적거렸다.
언제나 단순한, 백색 공간을 더욱 백색이게 하는
형광등이 눈을 크게 뜨고
도토리처럼 굴러떨어지는 글자를
글자의 몸 구석구석을 비춰주고 있었다
새파란 힘줄까지 투명하게 드러나는
글자
그들은 탁본이 아닌 자동 팔다리였다
밖에선 글자의 자동 팔다리에
사람들의 시신경이 꽂혀 있는 듯
안테나 파장이 한 번 흔들렸다
(그의 생각일 뿐이지만)
하늘이 가로 누운 옥상의 다락방
가끔 엘리베이터가 날아오르는
날개짓 소리 목청 높이 울었지만
인기척은 다락방을 지나쳐 갔다
(사람들은 왜 지나쳐버릴까)
컴퓨터가 숨을 멈추고 잠만 잘 때도
방 안은 구석구석 빛으로 가득찼다
햇빛이 오지 않아도
녹슨 공기가 없는 새파란 방
전기 검침원이 공기를 빼내가도
글자에서 자동으로 공기가 생겨나
빛을 복제해 내는 방
안에서 밖으로 공기를 내보내는 방
언제나 환한 한낮이 켜져 있는 방
혼자서 그의 두뇌를 키우는 컴퓨터를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희망하는
그의 다락방
그 방이 오늘도 거기에 있을까.
한 됫박의 웃음소리
김지향
내가 사는 구로 동 고층 아파트, 아직은
칼끝을 내민 겨울바람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파트가 떨지 않으면 앞뒤 공기가 떨어준다
아파트 앞뒤 세상은 늘 꽉 차 있다 꽉 찬 세상을 향해
날마다 한 두름의 남자와 여자가 뛰어가고 뛰어 온다
아파트 앞뒤를 오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똑 같이 기억하지 못한다
맞은쪽 대각선 전방에는 나이를 잊은 남자와 여자가 모여
건강 체조하는 집이 있다
건강을 다지는 사람들로 구로구 노인정에는
나이 많은 젊은이들로 공간을 채운다
이런 때 나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창준*의 미끄럼틀에 매달려 삶을 채운다
나는 숲이 무성하지는 않지만 늦게 얻은 열매 한 알,
열매 한 알의 무게가 열매 한 알의 웃음소리가 내 세계를 채운다
멋있다! 며 장난감 기차를 들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창준의 재롱이 집안 전체를 흔들어놓는 한 됫박의 웃음소리
내민 겨울바람의 칼끝도 스스로 무안해 하는 따뜻한 우리 집
* 창준 : 김지향의 첫 손자
한밤의 회오리바람
김지향
마른 풀잎을 잡고 바람이 일어선다
풀잎들의 발이 내 머리 문턱을 밟고 있다
사람의 눈이 들어가지 못하는 문
한가운데서 바람은 흰 말이 되어 달린다
흰 말은 땅 위에 회오리를 뿌리고
내 머릿속을 한밤내 들끓게 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 한쪽 벌판에선
밤이 지는 소리가 일렁인다
이윽고 나를 동여맨 회오리가 풀린다
땅의 귀도 돌아와 주저앉는다
문밖은 잠이 들고
문밖의 잠은 바람을 덮고
저 길의 쉰 기침 소리도 덮는다
잠 사이로 허물어진 어둠이 빠져나가고
어둠에 빨려든 나는
아득한 흰빛 속으로 끌려간다
나는 흰빛의 손에 잡혀서
사방의 흰 벽 속에 갇힌다
아, 흰 벽 속에 말라붙어있는 나를
잠에 물린 바람이 밟고 있다
햇빛 속에서
김지향
햇빛이 내려 앉는다
내가 버린 하늘에
마른 안개가 넘어지고
구름도 몽그라져 일어나지 못하고
그러나
바람은 숨어서 올라가고
(땅 위엔 햇빛이 차고
햇빛을 키우는 심장이 차고
심장을 깨우는 사랑도 차고)
땅의 이 싱글한 충만함 속을
누군가 내려와서
내 손등을 덮는다
그림자도
한 점의 목소리도
눈도 코도
손톱에 패일 살도
다 털어버린 내 눈 속
깊이 일어서는 한 사랑을
내가 떨림 속에서 붙들게 하고
그리고 내 머리 끝에서 터져
햇빛이 되어버리는 그대
그대는 열 두번 죽어도
내 땅의 햇빛이다
호숫가에서
김지향
집 앞의 호수에 담긴
가을의 옆얼굴을 들여다본다
흠집 하나 없는 거울 알이다
거울 속엔
털이 다 벗어진
숭어 몇이서
흩어져 있는 풍금 소리를 모으고 있다
여름을 떠메고 돌아서는 시간의 손이
붉은 물감을 뿌려 놓고 간 뒤로
한쪽 뺨이 붉은 사과알이 내려와
데굴데굴 덜 찬 속살을 내비치고
한쪽 가슴이 붉은 나뭇잎은
가슴의 붉은 물을 씻어 놓고 있다
붉은 물감으로 생기를 얻은
집 앞의 거울 알은
나의 마음속까지 뚫고 들어가
때가 좀 끼인 마음 구석 구석을 비추어
어디서 혼자 우는 비를 피한
죄를 드러내고
늘 해가 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다 풀린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
굵다란 회초리로
내 시든 종아리를 때리고 있다
나는 다시 물이 오른 종아리로
가슴을 떨면서
해묵은 헌 죄를 다 털어내고 털어내고
마침내 그 호수 속 생기로 돌아간다
휴일 아침, 봄비
김지향
봄이 입을 열고 꽃잎을 마구 토해낸다
꽃잎 먹은 봄비가 동 동 동 꽃잎을 져 나르다가
이 아침엔 빳빳이 서서 손뼉만 친다
하늘에 땅에 열꽃을 띄우는 진달래 옆구리
살이 튼 돌 틈엔 아직도 늦잠 든
노르께한 토끼풀이 꼬부라져 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한 주먹씩 꽃물을 먹여주며
흔들고 있는 진달래 치맛귀를 스치는 자전거 요령 소리
휴일 아침,
근린공원 일대엔 무단가출한 로봇 자전거 가족들이
동글동글 줄을 지어 돌며 한 두름씩 꽃잎을 싣고
오래된 내 유년의 꿈 밭을 달리는 중이다
하늘 한 귀퉁이 희미하게 몸을 드러낸 무지개도
드러누울 공간이 없는지 아침 내내 허리 구부리고 서서
로봇 자전거 달리기에 일심으로 손뼉을 쳐 준다
지금은 환히 열린 봄
다시 입 다물 날이 멀지 않은
흙바람
김지향
눈을 찌르는 바람 속을
눈을 뜨고 간다
좁다란 시골길엔 바람뿐이다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의 손에
흙이 묻었다
흙이 묻은 어깨로
청솔가지 연기에 묻히는 일은
신명나는 일이다
거짓과 다툼과 비밀과 눈물
그런 것이 없는 곳엔
어둠도 없다
어둠이 없는 흙바람을
서말이나 퍼 마시고
아삼한 초갓집을 더듬으며
나는 정신을 잃는다
방앗고에 넣고 찧던 그 바람,
맨발의 아이들이 신고 다니던
그 바람을
지금 내가 밟고 서서 정신을 잃는다
거짓과 비밀로 몸이 무거워진 이에겐
밟히지 않는 그 바람
밟혀서 사는 사람만의 발이 되는
그 바람
도시의 큰 기침소리에 풀이 죽은
사람만이 반가운 그 바람
그 바람 속으로 내 정신은
풀어져 들어간다
나는 없어져 버린다
흰옷 입은 나무들
김지향
새파란 하늘이 흰옷을 입는다
파란 하늘에서 헤엄치던
기러기 떼가 구름다리를 건너
제집으로 돌아온다
빨간 소매 자락을 펄럭이던
단풍나무도 하얀 소매로 갈아 입는다
이미 하얀 옷을 입은 나무들은
겨드랑이에 달랑달랑 새빨갛게 얼굴 붉힌
뾰루치들을 흔들고 잇다
(문득 나도 겨드랑이를 더듬어 본다
빨간 뽀루치도 빨간 소매 자락도 흔적 없다)
탈곡기 소리 멈춘 벌판을 혼자 걸어간다
텅 빈 벌판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가는 바람 뒤로
연소 불량의 하늬바람, 서리를 흩뿌리며
가까이 오는 눈발 한 장
(아직 땅에 닿지 못한 겨울의 발이 새하얀 우주에서
봄을 잉태한 생명의 씨앗을 조심조심 매만지는 사이)
성급한 땅이 먼저 목화솜 눈발을 입는다
겨울을 끌어당기며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