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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철길, 간이역 2

도종환 저녁 열차

도지현 간이역

목필균 - 구둔역에서

문경기 반월역의 봄

문경기 순천역

문인수 모량역의 지층

문인수 부강역

문재학 - KTX

문재학 인생 열차

문재학 황혼 열차

문정희 - 도착

민경대 강릉의 기차를 기다리며

민경대 - 밤기차

민경대 흔들리는 기차에서 시 쓰기

민병도 - 정거장

박동수 간이역

박만식 압록역에서

박선경 - 기차

박성배 ()가 기차를 타다

박성우 - 기차

박영민 기차는 지우개를 들고 간다

박인걸 KTX 열차

박인걸 어느 역에서

박일만 노량진역

박종영 - 기차놀이

박진표 간이역

박철 - 당산역에서

박태강 비무장지대 녹슬은 기차

박해선 - 간이역

박해수 기차가 네 몸속에 들어갔다

배인안 간이역

백무산 기차를 기다리며

백무산 - 동해남부선

백원기 SRT 구경

백원기 겨울 기차

백원기 뒤로 가는 기차

백원기 밤에 떠나는 기차

백원기 완행열차

백원기 이별의 가을 역

백원기 추억 열차

백종오 가을 역

사윤수 경부선

서상만 물 위의 간이역 - 다도해

서수찬 호남행 비둘기호 열차

성배순 - 조치원역에서

손미 통근 기차

손병흥 기차역 풍경

손병흥 백두대간 협곡열차

손병흥 봉화 양원역

손병흥 정선 아리랑 열차

손병흥 환상선 눈꽃열차

손세실리아 기차를 놓치다

손현숙 비오는 날 기차를 탔다

송과니 기차가 오지 않을 때

송근주 기차를 타

송수권 목포역

신경림 - 간이역

신경림 귀성열차

신경림 기차

신경림 철길 - 울산에서

신경림 폐역(廢驛)

신동호 겨울 경춘선

신석종 기차를 타려고 합니다

신성호 간이 정거장

신성호 군산역에서

신현정 - 간이역

신형식 철길에 서면 그리움이 보인다

심의표 간이역 풍경

심재휘 기차 소리

심훈 - 기차

안도현 기차

안도현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안도현 밤 기차를 타고

안도현 - 철길

안시아 경인선 열차

안재동 너라는 종착역으로 달려야 할 나의 기차는

양해선 기차 여행

양해선 기찻길

엄원용 시골 기차를 타고

오경옥 - 오수역

오문경 멈추지 않는 열차

오문경 하얀 열차는 아프다

오성일 - 예산역

오세영 - 추전역

오애숙 마지막 열차 칸에서

오애숙 인생 열차

오애숙 인생 열차 칸에서

오유정 - 황등역

오인태 -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오정방 간이역

오정방 - 기차역사 주변엔 왜 코스모스가 많은가?

오탁번 기차

온기은 - 종착역

우대식 사라진 역

용혜원 - 철길

유소례 기차를 타고

유안진 - 간이역

유일하 기차 레일

윤갑수 봄을 싣고 달리는 기차

윤꽃님 기차역에서

윤석중 기찻길 옆 오막살이

윤수천 철길은 왜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가

윤용기 - 경춘선

윤용기 고향 향한 열차

윤용기 기차 속 풍경

윤용기 기차 카페

윤용기 달려라 철마

윤용기 서울역

윤의섭 가을을 찾아가는 기차

윤의섭 - 겨울의 기차 여행

윤의섭 새마을호 퇴역

윤의섭 - 서울역

윤의섭 정거장의 추억

윤의섭 추억의 완행열차

윤의섭 추억의 칙칙폭폭

윤의섭 해랑 관광열차

윤진화 기차

 

 

 

 

저녁 열차

도종환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이쪽에 앉아

기차가 지나가고 기적소리까지 다 들을 건너간 뒤에도

오랫동안 붉게 물들어 있는 저녁 하늘 바라보았지요

서로 몸을 기대고 앉아 바람 속에 머리칼을 날리다

잡고 있는 손을 식어가는 볼에 가만히 대어보다

누가 먼지인지 모르게 입술이 스치는

당신과의 아름다운 입맞춤을 생각했습니다

열차의 불빛 속에 실려 새벽까지 함께 가는

당신과의 따뜻한 연애를 꿈꾸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빈자리에 저녁 바람이 불고

머물 곳 찾지 못한 새들이 하늘 건너 날아가고

당신과 함께 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이 세상을

어둠이 짙어오는 이 세상의 하늘을 바라보다

혼자 돌아왔어요 자리가 많이 비어 있는

저녁 열차들이 몇 번 더 지나가고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시간의 쇠바퀴 소리

뒤로한 채 쓸쓸히 돌아왔어요

 

 

 

간이역

도지현

 

지친 몸 잠시 쉬어가려 했지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

그렇게 머무적거리다

남루한 모습 오늘 예까지 왔다

 

치열한 삶도 살아 봤고

좋은 인연 만나 사랑도 해 봤지

이제 가진 것 다 나눠주고

간이역 광장 한구석에 나신으로 섰다

 

언젠가 떠나겠거니

쉼 없이 기차는 스쳐 가지만

승차권 발부를 아니 해주니

아직 내 차례는 되지 않았나 보다

 

파리한 가슴에 초려 한 눈빛

생의 끝자락에서 다 내려놓고

새털이 된 마음 초연하게

나 태워갈 기차를 기다려 보는데

 

 

 

도고 도고역

류외향

 

거기 역이 있다 한다

지상의 끝에 있을 것 같은 역이

거기 있다 한다

 

열꽃이 미친 듯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더운 잠에 빠져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거나 지나친 줄도 모르거나

철로의 행선지를 도무지 알 수 없거나

열차를 탄 채 제가 승객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도고 도고역

그의 에 이끌리듯 내려선다 한다

내려서자마자 주춤 발을 물린다 한다

前生의 새벽이 회색 바람에 묶여 와글와글 몰려오고

열차 떠난 자리엔 철로만 남아

수억만 년을 요지부동 엎드려 있었다는

완강한 자세로 철로만 남아

내릴 수는 있어도 탈 수는 없는 도고 도고역

 

회색 바람을 타고

서릿발 툭툭 털어내며 한 남자 걸어와

잿빛 양복을 펄럭이며 꿈결처럼 걸어와

눈자위 붉게 빛내며

천년만년 같이 살자 말을 건넨다 한다

그 말 하 심상해서

한 남자 소맷자락을 잡고 따라가

눌러 살고 싶어진다고 한다

멀리 드문드문 더운 김을 뿜어내는 산야와

뒤돌아보면 긴 꼬리를 땅 속으로 뻗으며

요지부동 엎드려 있는 시간의 무덤들

약속도 없이 저 혼자 덜컹철컹

문을 열었다 닫는다 한다

 

거기 역이 있다 한다

의 기척에 무감해 천근만근 무거운

잠 속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을 때

그 역에 내릴 수 있다 한다

 

 

 

구둔역에서

목필균

 

마지막 기차를 떠나보내고

기찻길은 바람의 놀이터가 되었다

 

까까머리 단발머리 학생들

보따리장수 어버이들 태우고

긴 세월 수없이 오가던 구둔역에

중앙선 따라 요금표만 붙어있다

 

역장도 역무원도 없이

8877열차가 정물로 서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졌다

 

철길 따라 흘러가는 노래들

말줄임표가 아닌 마침표의 끝

구둔역엔 바람만 철길을 타고

흘러간다

 

 

 

반월역의 봄

문경기

 

산들바람 불어오는 승강장

기적소리에 아침이 열리고

산수유 꽃망울 머금은 햇살

정겨운 반월역에 내려 앉는다

 

달빛 잔상어린 반달마을

언덕너머 고목에 산까치 울어대면

열차는 반가운 소식을 실어오고

 

수리산 봉우리 돌아온 바람

진한 솔향기 한아름 실어와

연분홍 벚꽃길 스며드는데

 

열차가 떠나간 정거장엔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면서

기다리는 마음 은은하게 수놓아

그리움으로 승화하누나

 

계절이 익어서 꽃망울 열린 세상

향긋한 봄향기에 취해

화려한 꽃들이 흔들거리면

정겨운 반월역에 봄이 피어오른다

 

 

 

순천역

문경기

 

연향마을 은은한 연꽃 향기

바람결에 실려오고

순천만 정원 꽃들이 춤추면

멀리 기적소리 들려오네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 따라

고향 그리움 안고 달려온 하행열차

숨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한려수도 쪽빛 바다 푸른꿈 실어

희망품고 서울로 가야할 상행열차

긴 여정에 가슴 설렌다

 

갈등과 반목의 아픈 역사

동서화합 이루려는 경전선 선로에

따뜻한 정이 흐르면

 

삼산을 돌아온 이수의 물결

팔마의 전설을 실어와

죽도봉 연자루에 안개꽃으로 피는데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고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아름답고 정겨운 순천역

 

푸른 신호등 켜지자

초침과 시침의 속삭이는 시간속에

청명한 고운하늘 남겨두고

연꽃 향기 날리며 열차가 떠나가네

 

 

 

모량역의 지층

문인수

 

역무원도 두지 않은 시골 간이역은 하품 같다. 출찰구 옆 키가 껑충한 나무 기둥은 허리쯤에 투명 아크릴 집표함만 하나 달랑, 낮게 차고 있다. 그전 것 한 겹, 좀전 것 한 겹, 요새 것 또 한 겹, 도안이며 규격이며 지질이 각기 다른 기차표들이 시루떡처럼 한데 차곡차곡 쌓여 있다. 가만,

이게 도합 몇 년 치나 될까.

 

편도에 잠깐씩 묻은 손때도 결국 괄목할 만한 두께구나. 새로 난 길의 신판 절개지 앞에 선 것 같다.

내 머릿속에도 하긴 여러 가닥 기적소리가 무지개처럼 겹겹 휘어져 있을 것이다. 간혹 관정처럼 뚫고 들어가 보는, 빨대 꽂아 물게 되는 시절/시절/시절, 지난 시절은 이 모두 아름다운 잠이다

 

 

 

부강역

문인수

 

경부선 야간 완행열차,

무궁화호가 서는 작은 역마다

몇몇 사람이 내리고

역세권의 어둠은 얼른 그들을 받는다

 

객차를 꽉 메운 주말의 지친 표정들이 장시간

느리고 헐한 속도에 몸을 맡겼지만

목적지는 그러나

누구든 그 어디든 결코 변방이 아닐 것이다

 

이 무슨 역인가, 당신인들 함부로 지나치겠는지…… 지금

저들의 중요 대목이다.

저 광경, 바로 여기에 와 인생 전부가 벌어져

한껏 기쁘다

 

열두어살 딸아이와 함께 도착한

한 여자는

플랫폼까지 들어온, 커다랗게 웃는

남자의 마중을 받는다

 

 

 

KTX

문재학

 

어둠이 내려앉는

차가운 겨울

 

종점(부산)과 종점(서울)

연결하는 전기 열차

 

정확히 두 시간 오십칠 분

정시(定時)를 향해 달리는 KTX

 

세련된 모습은 바람을 가르고

어둠을 뚫는 굉음(轟音)

가로등 불빛을

빛의 선()으로 바꾸는

마법(魔法)의 속도(速度)

 

대지(大地)를 주름잡아

시간을 실어 나른다.

 

삶의 꿈을 안고 나선

화색(和色) 도는 승객들

생기(生氣) 있는 동력(動力)을 실감한다.

 

민족의 동맥(動脈)

번영(繁榮)의 빛이

그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인생 열차

문재학

 

황혼의 인생 열차를 타고

아쉬움으로 되돌아보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로

미련의 기적이 우네.

 

부귀영화(富貴榮華)라는 이름

내일이라는 희망의 열차를

몇 번이나 마음으로 갈아탔던가?

험난한 인생선로 따라

 

쏟아지는 외로움 거느리고

아련한 추억속의

옛 그림자 찾아봐도

낯선 사람만 어둠처럼 내릴 뿐

 

종착역으로 달리는

급행열차 속으로

회한의 파도에 떠가는

덧없는 삶이

소리 없이 가슴을 적시고 있네

 

 

 

황혼 열차

문재학

 

삶의 빛을 안고

출발하는 인생열차

무정한 세월 속으로 달렸다.

 

눈부신 행복도

온갖 시련의 고통도

혼신(渾身)의 열정으로 녹였던

꿈같은 지난 세월

 

어느새

붉은 저녁노을이 반기는

아름다운 황혼(黃昏)이다.

 

아련한 그 시절. 그리운 추억

가슴 깊이 안고서

후회 없는 황혼의 깃발에

새로운 꿈을 담고 싶어라.

 

함께하는 소중한 이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고

스쳐 지나가는 세상사를

여유롭게 관조(觀照)하면서

 

 

 

도착

문정희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 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강릉의 기차를 기다리며

민경대

 

너는 가야 한다

먼 길을 떠나야 한다

밤의 기차가 많은 추억을 실어 나르고

나의 구겨진 삶의 언저리를 다시 펴서

그리운 시절은 이제 다 가고

겨울의 숲속에서 바람과 대화를 하며

기나긴 사연 속에 숙연한 우리들의 약속만은

이 기차가 함께 태워서 동해 푸른 바다에 넌지시 버리고

넥타이처럼 굽은 길을 펴서

환한 웃음으로 동해의 밝은 아침 설경을 바라보아야 한다

 

 

 

밤 기차

민경대

 

밤 기차를 타본 사람은 출렁이는 세상을 안다

밤 기차를 타보는 사람은 흔들린 세상에

흔들린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시간의 단추를 잡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밤늦은 시간에 기차를 타본 사람은

시간이 데려다준 시간의 틈 속에 꽃이피고 지는

순간을 촬영하는 영사기를 돌리는 그림자를 안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시 쓰기

민경대

 

참으로 재미있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시를 쓰는 일은

나는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을 해보는 것이

처음이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돈을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글을 써보아서

엉덩이가 흔들리고 발이 흔들리고

상체도 하체도 흔들리면서

글도 흔들리고 춤추는 시가 나온다

이 시대는 자고로 우리 조상이 상상못할 시속 100킬로 달리는 기차간에서

500원짜리 동전만 있으면 시를 쓴다는 사실을 저세상에서라도 알면

오구-죽음의 형식 대사처럼 한숨을 쉬며 이 세상에 다시 내려올 거다

내가 먹은 이 빵은 한여름 아프리카 어느 들에서

내가 목은 이 포도주는 어느 나무에서 열려서

내가 쓰는 이 시은 기차간에서 태어난 기차간이 고향인 시이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시간도 죽이면서 시를 쓰는 일은

밭을 가는 농부가 맨발로 밭을 가는 기분처럼 재미있다

12시가 넘는 시간에는 시간을 타고 기차에서

시를 쓰면서 시간을 버는 것은 무척 재미있다

나는 흔들리는 기차간에서 밤에 차창을 지나는 불빛을 보며

나의 손은 춤을 추고 나도 잠시 춤을 추며

시간 아니어도 좋은 기차간에서

세상의 한적한 어느 농촌 헛간에서 쓰는 시보다

운율이 잘 뒤틀어지면서 꽈배기 같은 시를 쓰거나

도나츠 같은 시를 쓰거나 혹은 형광등 불빛 같은 시를 쓰면서

종착역에서는 아무리 하고 싶은 말도 그만하고

그만 중지 할줄 아는 시가 수돗물처럼 나오는 이

밤의 시간에 나는 한 바탕은 언어의 춤사위에 넋을 잃고

기쁨에 넘쳐서 기쁨에 주체 못하고 시를 쓰다가

우리 목숨 다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그 지극한 점에서 멈추는

쉼표처럼 기차에서 시를 써본 시인은 그 호흡이 길고

그 호흡에 지상에서 산소가 희박하여 숨을 멈추듯

아주 힘들게 호흡하면서 흔들리는 기차간에서

글 써본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알 것이다

 

 

 

정거장

민병도

 

그때 거기서 내렸어야 했다는 것을

기차가 떠나기 전엔 눈치채지 못했네

창 너머 벚꽃에 취해, 오지 않는 시간에 묶여

 

그 때 거기서 내렸어야 옳았다는 것을

자리를 내줄 때까진 까맣게 알지 못했네

갱상도, 돌이 씹히는 사투리와 비 사이

 

그저 산다는 것은

달력에 밑줄 긋기

일테면 그것은 또

지나쳐서 되돌아가기

놓치고 되돌아보는 정거장은 더욱 환했네

 

 

 

간이역

박동수

 

점 하나 되어 급행과 특급열차가

괘도를 따라 지나가고 나면

시간을 만들어 낸다.

 

하얀 바탕의 세월 속에서

점 하나로 찍혀버린 간이역 인생

빠른 열차는 바람만 몰아가고

초봄의 나른한 빛에

기다림은 피곤을 느낀다.

 

점하나 되어

세월의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

열차가 서지 않은 간이역엔

느끼기 힘든 존재의

미풍만이 흐르고 있다

 

 

 

압록역에서

박만식

 

휘영청 뜬 거미줄

개찰구 건너 채마밭

대파 줄기마다 초록별 봉긋 뜬다

 

밤기차, 강과 들판이 담긴 차창은

나의 문학 자습서였다

 

 

 

기차

박선경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은 언제나 포물선을 그리지 천천히 내게서 달아나는 것 당신과 나의 만남이 둥글다는것의 일부 눈동자의 둥근 수평선처럼 더이상 쫓을 수 없는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유연하고 부드러운 외면 포물선이 간직한 낭떨어지 끝으로 언제나 기적소리는 내 눈앞에서 휘어지네 나는 캄캄한 뒷통수를 향해 필사적이지 모래바람 속을 더듬어 두 귀를 바짝 선로에 댄 채, 헐거워진 회전의 중심축으로부터 멀어지는,

 

또 한 번

베란다 화분에 심어놓은 다알리아꽃이 피었다지는 동안

당신을 향해 주머니 가득 꽂아둔 마른 잎사귀 같은 손을 떨구네.

 

 

 

()가 기차를 타다

박성배

 

시가 기차를 탑니다

무심한 쇳덩어리에

싹이 돋습니다.

 

말랐던 그리움이

소녀 손목의 파란 핏줄로 일어서고

도시 속에 묻혔던 추억이

담벼락 틈새의 꽃으로 드러납니다.

 

시가 기차를 탑니다

덜거덕거리는 몸부림을

다독거려 줍니다.

 

철로가 시간 속에 묻혀도

기억의 뜰을 날개 달고 달릴 겁니다

가끔은 시 한 수 읊으며

그리움을 나를 겁니다.

 

시가 기차를 탑니다

하여

세계에서 가장 긴 시인이 생겼습니다

 

 

 

기차

박성우

 

 

기차 지나간다

사내 덜컹거린다, 덜컹

덜컹거리다 제자리에 박히는 별, 무더기별

쏟아지는 그리움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사내가 길다란 악보를 걷는다 멀리

멀어져간 하모니카를 분다

혼자 걷는 어둠속

칸칸이 들어 있는 멜로디는 쓸쓸한 법

기억에서 꺼낸 음표들이

개망초를 흔든다

사내는 기다란 노래처럼 걷는다

기찻길만 긴 것은 아니다

 

 

 

기차는 지우개를 들고 간다

박영민

 

저 흘려 쓴 풍경들

어디서 많이 본 정든 필체 같아

너인 것만 같아

그러나 책장의 속력

두고두고 읽을 수 없다

어느 역 주변 두고 온,

체념마저 뺏기며 나는 살아가는가

떼어놓은 간격만큼

스쳐온 슬픔 커지는 것을

나는 운명의 잔머리라 취해간다

 

내가 너를 버린 게 아니다

너를 분실한 어디쯤 내 넋도 내려놓고

지정된 좌석에 으깨진 껍질뿐인

육체는 무료하기 짝 없다

거꾸로 열리는 어둠으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닫혀간다

찐 달걀 같은 팍팍한 생의 목 맥힘을

반쯤 남은 캔 맥주로

꾸역꾸역 넘기는 핑계 동안

출발지와 도착지로 인쇄된

한 구절 묘비명 같은

구겨진 표 한 장 들여다

봐라, 아무리 너를 가졌다 한들

기적은 처음 선로에서부터 멀어져간다

이 긴 봄밤도

붙잡고 싶은 순간 앞에선

무릎 꿇고 하찮게만 무너진다

 

 

 

KTX 열차

박인걸

 

서울에서 부산으로 달린다.

호젓한 날 우리 둘은 열차에 몸을 맡겼다.

미끄러지듯 한강을 건너

대낮에도 어둡게 살던 노량진을 스치며

눈 깜짝 할 사이 내 추억이 쌓인 안양을 벗어났다.

회고하면 나는 첫 울음을 울던 날에

운명 열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다.

동심(童心)의 들판은 꿈길이었지만

춘정의 시절부터 불안한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협궤를 빠져나가던 시절

넌덜머리나는 증세에 바닥을 뒹굴었고

빠르던 속력은 사막폭풍에 주춤거렸다.

캐스케이드 산맥을 넘어 화산 지대를 지나

스네이크 강 유역 협곡과 폭포의

아찔한 풍경에서 비장한 현기를 느꼈지만

위험을 무릅쓴 모험을 떠났기에

오히려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내가 탄 열차는 평평한 들판이 아니었다.

황폐한 거리, 막막한 벌판

지루한 고원을 밤낮없이 달릴 때면

복잡한 수학문제 앞에 겯질린 표정으로

삶의 극한 함수를 자주 고민했다.

해맑은 가을날 코스모스 핀 간이역에

잊지 못할 추억을 새겨놓고

가끔씩 그 추억을 꺼내 보지만

단종의 운명처럼 존망의 위태로움은

도처에 지뢰처럼 언제나 도사렸다.

저기 부산역이 보인다.

내 인생의 종착역도 어딘가에 있으리

 

 

 

어느 역에서

박인걸

 

내가 머물던 곳은 모두 역()이다.

봄날 도착한 역에는 진달래가 곱게 피었지만

여름에 지나던 역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잊을 수 없는 역은 겨울역이었다.

앙상한 플라다나스는 길가에서 떨었고

코트 깃을 세워도 바람은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얀 눈이 지운 철길에는

기다리던 열차가 오지 않았고

밤 열한 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침(時針)

가슴에 고인 불안을 작두우물처럼 퍼 올렸다.

어디론가 가야야 할 소녀는

차가운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성애 꽃 핀 유리창에 하얀 입김을 불었다.

내가 갈 곳은 귀향(歸鄕)이 아니라

반겨 줄 사람 없는 미지의 역이다.

거기서 다른 열차를 갈아타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야 한다.

곧 도착할 열차는 나를 싣고 떠나겠지만

새 세상을 찾아 나선 나는

항상 외로운 나그네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가을 역에 도착하고 싶다.

은행잎 융단이 두껍게 깔린 길을

갈색 바바리 깃을 바짝 올리고

아직 지지 않은 단풍잎의 환영을 받으며

내 발자국을 거기에 남기고 싶다.

열차 바퀴 마찰음이 자장가로 다가온다.

피곤에 지친 나그네는 꿈길을 걷는다

 

 

 

노량진역

박일만

 

철로 건너에서 끼쳐오는 물 냄새

한강을 헤엄쳐 온 물고기들 땀 냄새

강은 환승역이다

작은 물고기들 공중으로 떠오를 부레를 키워가는,

북적대는 흙냄새도 자욱하다

인생역전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고시원 사람들의 등허리에 피는 지느러미

취업의 공식을 풀다가 지친 눈빛으로

가득히 모여드는 포장마차 즐비한 골목길

세상 끝에서 모여 끝을 찾아가는

발걸음들 끊임없이 분주하다

눈물도 사치인 공간

낡은 빌딩 벽에 가득히 새겨 놓은 다짐들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냄새 많은 공간을 채워가는 작은 몸짓일지니

얼룩진 골목 일수록

머물다간 사람이 많다

한강을 바라보며 수없이 꿈틀대는 꿈들이 모여

현재에도

미래에도

오래된 냄새에 젖는

 

 

 

기차놀이

박종영

 

유년의 기억에서 생생한 기차놀이

그 힘찬 기적소리로 달려가면

둥둥 푸른 창공도 함께 흘러갑니다.

 

숨차게 오르막길을 달리다가

굵은 줄이 팽팽해지면 유연한 힘의 탄력으로

느슨하게 힘을 주어 끊어지지 않던 새끼줄,

그 시절 슬기로운 친구들의 지혜가

오늘, 영광의 길로 환합니다.

 

해마다 먼 산 뻐꾸기는 봄으로 날아들고

참꽃 붉은 빛깔도 봄으로 피어나는데,

강산은 변함없이 그대로 검게 탄 채

멈칫멈칫 뒷걸음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녹슨 바람이 허리를 감고 돌아

지금은 혼자의 기차놀이로 버거운 세상입니다.

훌쩍 커버린 소꿉장난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져서

달리고 싶어도 혼자여서 달릴 수 없는 기차놀이,

 

그 단단한 새끼줄을 잡았던 손은 이제 어른입니다.

아직 남은 세월의 오르막길을 거머쥐고

씩씩하게 달리고 싶은 외로운 손입니다

 

 

 

간이역

박진표

 

잠시 쉬어가자

조금 늦어도

내 영혼

내 그림자 안고

아파도

온전한 나로 살자

 

가는 길

그 길이 꽃길 아니어도

나에게 당당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

 

내 삶의

그 어딘가에서

잊혀지지 않는

고운 향기로

누군가의 가슴에 남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

 

바람도 우리의 삶도

가끔은 쉼이 필요한 것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작은 생명들의 노래 귀 기울이고

가끔은 쉬어가자

오고 가는 세월과 술 한잔 기울이며

 

 

 

당산역에서

박철

겨울새 날아간 자리에

봄꽃은 피고 지고

아직도 해 질 녘엔

쥐불 따라 논둑을 걷던 아이들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느냐 아우야

영등포 로터리 인간시장에 나가

누군가 빈손으로 되돌아오는 시각

떠나간 만큼 모여드는 이곳에선

오늘도 끝없는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에 기대어 창밖으로

흔들거리며

한강 물에 첨벙 마음을 던지는

단 한 사람 있다

깊숙이 달아나는 한 사람 있다

 

 

 

비무장지대 녹슬은 기차

박태강

 

사람의 발길 끊긴 곳

부서지고 녹슨 얼굴로

 

얼마나 외로웁고 달리고 싶어

아직까지

싹정이 뼛대만 잡고 기다리고 있느뇨

 

너의 주인도 이젠

백골이 진토 했을 텐데

무슨 미련 버리지 못하고

인적 끊긴 잡초 속에 울고 있느냐

 

남북을 시원스레 달리던 너

형제의 싸움이

너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

 

부끄러워 말 못 하고

가슴 아파 발 돌리는 사람

어디 하나 둘 이드냐

 

그것도 삶인데

뉘우치며 손잡고 너를 찾을지니

그때 네 말 하며 너를 마주 하리니

 

 

 

간이역

박해선

 

특급은 서지 않는 간이역

한껏 자란 코스모스 붉은빛이 곱다

지나치는 기차를 바라보다 놓아버린 하루

풀벌레 소리 함께 날이 저문다

나는 기차가 서도 타지 않을 나그네

해도 달도 별도 그림자도 없는 시간

역사의 긴 창문 틈으로

개미들도 다 집에 가는구나

개미들도

 

 

 

기차가 네 몸속에 들어갔다

박해수

 

기차가 푸른 산,

네 몸속에 들어갔다.

들소 뿔빛 노을 바다속

기차가 네 몸속에 들어 갔다

, , , , , ,

네 몸 부딪치는 소리

네 몸 흐르는 소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기차가 그리움 속에 박혔다

기차가 나그네 새에 찍혔다.

기차가 사랑나무에 걸렸다.

기차가 작별 속에 박혔다.

바람과 나무와 새와 별과

달과 별과 꽃과 세월을 안고

구름과 이별 눈물을 안고

나무와 우주와 하늘과 구름과 달

기차가 네 몸속에 정녕 깊이 들어 갔다.

새벽 어둠 보자기에 네 마음 둘러 쓰고

가도 가도 끝닿아 보이지 않는

네 마음을 따라 바람과 이승의 떠돌이별

별똥별처럼 떨어지다 네 마음속 깊이

이승과 네 마음의 끝을 안고

기차가 네 몸속으로들어 갔다

 

 

 

간이역

배인안

 

새벽안개 깔려있는

비 개인 프레트홈

오고 가는 정 싫고 떠난

멀어진 간이역

새벽 열차

 

어둠속 안개는

혼적 지운지 오래

저마다 희로 애락

가슴에 안고 돌아선

사람들

 

아침은 동쪽에 걸쳐

아직 오지 않아도

아스라이 두 가닥의 철길이

침묵을 지키네

 

 

 

기차를 기다리며

백무산

 

새마을호는 아주 빨리 온다

무궁화호는 빨리 온다

통일호는 늦게 온다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는 호화 도시역만 선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없는 사람만 탄다

 

새마을호는 작은 도시역을 비웃으며

통일호를 앞질러 달린다

무궁화호는 시골역을 비웃으며

비둘기호를 앞질러 달린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

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

 

 

 

동해남부선

백무산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네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 옆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오래 전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가도 못할 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저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고무공장에 일 다닌댔지

우산을 돌려주려 갔다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SRT 구경

백원기

 

대모산 오르려고

바쁘게 지나가던

지하철 3호선 수서역에

SRT 고속 철도 있다

 

지하 도시 터미널

드넓은 대합실에 앉아

타고 갈 승객인 양

환하게 네모진 전광판 앞에서

놓칠까 봐 출발 시간 바라본다

 

ktx 보다 빠르게 두 시간이면

부산도 가고 목포도 가는

경부선 열차 호남선 열차

밀려 나오고 밀려가는 승객이지만

오늘은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나

타고 싶어도 매표 하지 않은

구경꾼이기 때문이다

 

 

 

겨울 기차

백원기

 

시베리아 찬바람 안고

허연 입김 뿜으며 천천히 간다

 

달려가고 싶은 마음

두 손 모아 간절한데

아직도 먼 봄

 

얼어붙은 땅속 잠든 생명

부스스 깊은 잠 깨어나

거친 들판 가득

새싹으로 채울 것만 같은데

쌀쌀맞게 내려가는 수은주에

동장군만 호탕하게 웃는다

 

멈추지 않는 겨울 기차

고집스럽게 가지만

정해진 절기는 어쩌지 못하리

 

심술 기적소리 요란해도

다음 역은 봄

눈바람에 막혀

지척이 천 리 던 너와나

마음껏 웃으며 만나보세

 

 

 

뒤로 가는 기차

백원기

 

기억 저편 그리움 더듬던 기차

어둠에서 여명까지 달렸어도

흔적 없는 질주에 빈 레일

 

이별의 아픔 딛고

시린 겨울 속에 다다랐어도

돌아보면 가지 않고 제자리네

아니 그보다 더 뒤로 물러나

먼지 뿌연 기억 찾아가나 보다

 

외로운 시간이 나를 위로하는 끝자락

달려가고 사랑했어도

아쉬움만 남아

뒷걸음치던 기차 저 멀리 있네

 

짐짝처럼 꾸려서

사연 싣고 떠나던 기차

해 넘기는 겨울 밤 기적 소리

구슬프게 뒤로만 가고 있다

 

 

 

밤에 떠나는 기차

백원기

 

벼르고 벼르던 영취산

오늘 밤 떠나보련다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이산 저산 물드는 진달래

남도 땅 영취산 찾아가련다

 

새벽이 오기까지 기다리다

깜박 잠들어도

달리는 기차 마찰음 소리가

도그닥 도그닥 적막을 깨우며

이따금 내 귀에 들리고 있음을

기억해 줘요

 

소쩍소쩍 밤새 울고

가시지 않은 밤안개 속에서

붉게 물든 정열의 꽃잎이

온산을 휘덮을 때

나는 꽃물에 젖어

목메는 슬픔과 벅찬 기쁨으로

방황하고 있을 테요

 

 

 

완행열차

백원기

 

낮엔 된더위에 찌고

밤엔 열대야에 시달리는

어둡고 지루한 완행열차

 

급행으로 달리면 좋으련만

석탄불 때며 칙칙폭폭

정거장마다 쉬며

지루하게 달려간다

 

해를 가리던 구름 우산 접고

바람길 막던 두 팔을 내려

창문을 활짝 열어

비를 피해 달아나고 싶다

 

그윽한 국화꽃 향기에

여심(女心)은 머물러도

목쉰 기적 소리만 들려와

아직도 먼 가을 역이 그립다

 

 

 

이별의 가을 역

백원기

 

수많은 기억 품고 살다가

잘게 자른 상념의 조각으로

한없이 떨어뜨리는

사색의 나무 아래서

흩어진 은행잎에 편지를 쓴다

낙엽에 묻어둔 고독은 내년을 기약하고

추운 겨울 이겨내리라

 

겨울 역으로 떠나려는 기차

기적을 울린다

이제 곧 떠난다고

타고 갈 사람 어서 타라고

 

사람도 계절도

만났다 헤어진다 해도

반듯이 돌아온다는 약속

잊지 말자고 새끼손가락 건다

 

 

 

추억 열차

백원기

 

1

보일 때는 잠깐잠깐 이였지만

보이지 않으니 영원으로 가네

한 번 약속은 영원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가을 깊음

 

지난 것은 사라져갔지만

새롭게 보여주는 그리움의 긴 행렬

어두운 밤에 빛이었던 그대가

갈수록 선명해지는 늦가을

 

크레용으로 그린 것보다 더 예쁜

색색의 낙엽에서

보조개 빨갛던 그대 얼굴 생각나

추억의 흔적 하나씩 집으면

함께 했던 갈색의 강물

영원히 흘러가리

 

이제껏 머물던 가을을 떠나

겨울로 달려가는 추억 열차

기적 소리 구슬프고

지나갈 때 몰랐던 회한은 밀려와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네

 

 

2

기억 저편 그리움 더듬던 열차

어둠에서 여명까지

흔적 없는 질주에 빈 레일

 

석별의 아픔 간직한 채

오월은 왔지만

돌아보면 가지 않고 제자리

희미한 기억 찾나 보다

 

외로운 시간이 위로하는 계절

달려가고 사랑했어도

아쉬움만 가득해

뒷걸음치던 열차 저 멀리 있네

 

짐짝 같은 사연 싣고

떠나던 열차

잠들지 않는 봄밤 기적소리

구슬피 뒤로 가고 있다

 

 

 

가을 역

백종오

 

비구름 저쪽

운동장만 한 파랑 하늘이 보인다

산골학교 가을운동회 지켜주는

그곳 파랑 지붕일 거야

 

오빠 뭐해

비가 오네

작은 물결 거꾸로 출렁이고

늦은 장마에 살아남은 억새들

은색으로 살찌우는 그 강길에서

바람 피우고 있어

 

오빠

동해바다 가는 열차는?

하얀 트렌치코트 소녀

호피 무늬 스카프만 만지작거리는

간이역에서

오늘도 화물열차만 시끄럽게 지나버리네

 

 

 

경부선

사윤수

 

나 어릴 때 아버지는 삼랑진 철도 보선소에서 근무했고

바람 난 아버지를 찾아 엄마와 삼랑진에 간 적 있고

삼랑진 기찻길 옆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닐 때 물을 대던 높고 큰 물탱크가 있고

 

어느 봄밤 밀양 강변에서

k와 연날리기를 한 적이 있고,

오월 상동역에서 만나 올갱이국을 사 먹고

해발 사백 미터 솔방 마을

그 가파른 마을 길 오르며 내가

갑자기 눈이 쏟아져 오늘 못 돌아가면 좋겠다고 하자

k가 그럼 살림을 차려야겠네요, 하고

조성기 단편소설 통도사 가는 길에 물금역이 나오고

물금(勿禁), 금하는 것이 없는 세계로 가려면

케이티엑스가 아닌 무궁화를 타야하고

경부선 하행 낙동강 따라

산등성이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겹쳐

강물은 산그림자 붙들어 매고

산그림자는 강물에 젖고

건널 수 없이 아득하고

 

가을엔

무궁화호 기관실 맨 앞자리 얻어 타고

시월을 헤치고 노을을 넘어

길 없는 레일 위에 햇빛이 부서지는*

그 먼 역까지 달려가고

마구마구 달려가고

 

* 은하철도 999

 

 

 

물 위의 간이역 - 다도해

서상만

 

여기 저기

 

누가 놓았을까

저 징검돌

 

행여, 바둑을 두던

()이 던진 포석(布石)인지

 

저것들이

물 위에 길을 놓았네

물 위에 지도가 없었다면

깊은 수심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네

 

바다의 정류장들,

 

물 위에 떠 있는 간이역이 있어

새는

먼 하늘을 갈 수 있네

 

 

 

호남행 비둘기호 열차

서수찬

 

갔다 온 데나 돌아갈 곳 모두

별반 다를 곳이 없는 행색들입니다

아니 더 보태 주고 오는 행색들입니다

마음은 벌써 헝클어지고

얼룩은 전부 다 닦을 생각을 안 합니다

모르는 사이들인데도

등 돌리지 않고

좌석을 마주보게 돌려놨습니다

터널을 셀 수 없을 만큼 드나들 듯이

목적지까지는 앞 사람들의 속을

몇 번을 관통해야 할 것입니다

저마다 불들이 다 꺼져 있을 법도 한데

희미하게나마

껌뻑거리는 불도 있지만

속마음에다 일제히 켜듭니다

그 불빛을 보고 한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안심하고 다녀옵니다

소금은 누구나 다 몇 됫박을

몸 어딘가에 가지고 있어서

삶은 계란처럼 딱딱한 껍질만

벗으면 되었습니다

갑자기 한쪽이 소란스러워 지더니

그쪽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고

설익었던지 살째로 벗겨집니다

거기다가 나머지 계란도 깹니다

체하지 말라고 기차 바퀴는 밤새도록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줍니다

 

 

 

조치원역에서

성배순

 

떠난다는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라고 외치며

아침 613, 어둠을 뚫고 기차가 들어온다.

뿌우웅 경적을 울리며 치익칙 역으로 돌아온다.

이번 역은 조치원, 조치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왼쪽 출구에 줄을 서자 애인이 귓속말을 한다.

역 주변의 출산율이 왜 높은지 아느냐고 농을 던진다.

613분 경적소리에 잠에서 깬 사람들이

그 시간에 다시 잠 들 수 있을까?

우리도 역 주변에 방 하나 얻어 볼까?

아침 햇빛 속으로 주먹만 한 연분홍 복숭아들

주렁주렁 제 모습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던 애인이

만져지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며 내 손을 쥔다.

한때는 별을 보려고 어둠을 기다린 적이 있다.

지금은 북극성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새로운 별이 북극성에 올랐다는 것도 안다.

북극성은 생각보다 밝지 않다는 것까지 안다.

기차에서 내려 조치원역 광장에 서보니 보인다.

낮에도 반짝이는 별이 있다는 것을.

태양은 언제나 저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는 것을

 

 

 

통근 기차

손미

 

승객 여러분 뼈를 깨끗이 씻고 탑승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육류비빔밥을 먹을 것입니다

길이 없는데, 길이 끊겼는데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기차는 달리며 피부와 묶입니다

누군가 기차를 잡고 앞으로 밉니다

우리는 출발합니다

살러 갑니다

내 머리를 잡고, 꿈틀거리지 좀 마세요

너무 무겁습니다

 

숨을 참으면 연해질 수 있습니다

지퍼를 닫고 더욱 부드러워질 때까지

핏물이 빠질 때까지

썰기 좋은 고기가 될 때까지

한 끼의 밥이 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아침 출발하고 있습니다

 

기내식은 육류비빔밥

이 속에 흔들리는 이빨들

제발 움직이지 마세요

너무 무섭습니다

 

 

 

기차역 풍경

손병흥

 

만남 헤어짐이 공존하는 소소한 풍경 속으로

반가움 아쉬움 그리움이 교차하는 낭만기차역

육신 기쁨 슬픔 설렘 안고서 떠나보는 기차여행

 

그 옛날 굴곡의 세월처럼 굽이길 쭉 뻗은 직선철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을 스쳐가며 다가서던 풍광들이

생경스런 일상이 되어 눈앞에 펼쳐 보여준 또 다른 장면

 

연신 생애 빗질하듯 눈에 들어오는 차창 밖 아롱진 자연

절로 미소 지어 보이게끔 추억 싣고 달리는 두근거림으로

모처럼 하늘빛 흐린 날에 행복 열차타고서 달려가는 여행길

 

 

 

백두대간 협곡열차

손병흥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라는

역무원의 시비(詩碑)

정감 어리게 세워져 있어

기념 촬영의 명소인 그곳

국내에서도 가장 작은 역

 

백두대간 능선 속살을 따라

열차가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경북 봉화군 분천역에서부터

양원 승부와 철암역 구간을

하루에 3차례만 왕복을 하는

기암괴석 주변 경치 감상 위한

관람 전용 협곡 열차를 타고서

체험해 보는 개방형 관광열차

 

디젤기관차와 객차 3량으로

달랑 총 158석에 불과하여도

1호찬 일반객실 2호차는 카페

3호차 천장에는 별자릴 표시한

멋진 형광 스티커가 붙어져 있어

30여 곳의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오감으로도 즐길 수 있는 시골 풍경

 

무더운 여름철엔 선풍기가 돌아가고

추운 겨울철엔 목탄 난로가 열을 내는

환경친화적으로 제작 되어져 있지만

객차엔 화장실마저도 없는 협곡 열차

 

 

 

봉화 양원역

손병흥

 

깎아 지른 절벽으로 골짜기가 둘러쳐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산골에 있는 기차역

 

철로 따라서 승부역까지 걸어 다녔다던

오지 중의 오지로도 손꼽히는 깊숙한 마을

 

그런 불편 해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이 손수 지었다던 간이역 탄생일화

 

영화로도 제작 되었던 양원역 주변 풍경

국내 최초 민자 역사인 낙동강 세평 하늘길

 

 

 

정선 아리랑열차

손병흥

 

장거리 열차로서는 최초로

개방형의 전망 창이 설치되어

모든 좌석에서 가능한 경치 관람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태백선을 지나

정선선 경유한 뒤에 아우라 지역까지

긴 구간 운행하는 정선 아리랑 유랑열차

 

놀랍고도 뛰어남과 모험 등을 의미하는

한국의 전통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끔

호차별과 연계별 스토리 테마가 있는 디자인

 

승무원이 열차 내에서 음악방송도 하는 여행상품

탑승 기념 인증과 사연 소개와 추억 만들기의 이벤트

태양의 후예촬영지 삼탄아트마인을 경유하는 여행

 

강원도에서도 대표적인 산골 중에서 오지 산골이자

해발고도가 높아 겨울에는 춥고 눈도 많이 오는 지역

오래전 탄광촌이 개발될 적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

 

 

 

환상선 눈꽃 열차

손병흥

 

추억들이 눈처럼 소복소복하게 쌓여만 가는

눈꽃 만발한 설산 찾는 낭만적인 겨울 나들이

매서운 눈길 운전마저 피할 수 있는 기차 여행

 

달랑 객차 두 량이 전부인 낡은 정선선의 기찻길

강원도 심심산골 눈밭을 헤치며 달리는 여유 낭만

움츠렸던 마음 일상조차 물리쳐버린 넘쳐나는 활력

눈꽃 그윽한 산간지방 둘러보는 환상적인 눈꽃 열차

 

해마다 12월 말에서 다음 해 2월까지만 운행하고 있는

서울역 제천역 추전역 승부역 풍기역 다시 제천역 거쳐

눈이 황홀하도록 한 바퀴 돌아온다고 해서 환상선이라는

자유자재로 두메산골 심산유곡 헤집으며 달리는 환상 열차

 

 

 

기차를 놓치다

손세실리아

 

골판지 깔고 입주한지 얼마 안 되는

말수 없고 어깨 심히 휜 사내를 향해

눈곱이 다층으로 따개비를 이룬

맛이 살짝 간

나 어린 계집의 수작이 한창 물올랐다

농익은 구애가 사내의 귓불에 가닿자

속없는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새벽, 영등포역

 

지하도에 내몰린 딱한 사내와

쫓겨난 비렁뱅이 계집이 눈 맞았는데

기어들어 녹슨 나사 조였다 풀

지상의 쪽방 한 칸 없구나

달뜨고 애태우다

제풀에 지쳐 잠든 사내 품에

갈라지고 엉킨 염색모 파묻은

계집도 따라 잠이 들고

 

살 한 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를 훔쳐보다가

첫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고단한 이마를 짚고 일어서는

희붐한 빛,

저 철없는 아침

 

 

 

비 오는 날 기차를 탔다

손현숙

 

여기서부터 거기까지는 아주 먼 길

오늘은 비

 

차표를 끊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땅속으로 한참을 미끄러지면

잡아먹을 듯 레일 위를 달려오는 초고속열차

마법의 문을 통과 하듯

나는 두근두근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무성영화 필름 돌아가듯

 

여러 장면들이 차창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아난다

공장굴뚝과 연기와 전봇대와 추수를 끝낸 논바닥과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와 외딴길들이 시간의 뒷모습처럼 빠르게 스친다

 

여기가 어디더라

가도 가도 너는 참 멀기만 하다

 

이별이 바퀴를 달고 굴러 굴러 간다

미안하다

목구멍에 뭉글뭉글 덩어리째 걸려 받아 넘기지 못한 말

꿈속에서도 돌아가는 길 찾지 못했다

어디까지 왔니

황홀해라, 적막이 폭죽처럼 터지는 것이리니

 

거기도 비와?

나는 우산 없이 기차를 탔다

 

 

 

기차가 오지 않을 때

송과니

 

아니다. 향한, 매일 개화(開花)는 집착이 아니다.

갔음과 다시 올 것임 사이

그 여백이 아름다운 철길 위에서

달의 본명은 그리움,

그리움의 개명은 기차

어제 다음날 하루 전까지

달은 휘파람 불면 나타나는 하나의 음표였다.

그러나 철길은 연주를 멈추었다.

침목이 된 발자국들.

자갈이 된 빠진 발톱들.

사랑이 자기를 초대해 주지 않아서

스스로 초대되어 사랑에게로 기차는 길 떠났기

때문이다

너는 가는 손에 하나의 외길 꼭 쥔 것이고,

나는 다른 하나의 외길

오는 손에 모름지기 움켜쥔 것이구나.

그러므로 음표 하나로 빈 철길 연주하기 위해

달이 뜰 것이다. 여백 속으로

초대된 불. 여백에 붙은 불.

저 한 송이 개화가 기적을 울릴 것이다

내일 다음날 하루 전에

갔으나 다시 올 것임으로 비어 있는 철길

위에서 내 음표는 휘파람 불며 기차 기다린다

 

 

 

기차를 타

송근주

 

기차를 타

오랜만에 승차권을 사고

기차를 타

바뀌었어 모든 게

난 당황을 했지

처음엔 내가 모르니까

세상이 방법을 바꾸고 있었어

편리하게

사람을 쓰지 않고

기계 장치에 모든 걸 맡기고 있는 거야

나는 줄을 섰어

기계에 익숙하지 않아

사람이 내주는 승차표를 받길

내가 바라고 있는 거구

기차를 타

 

 

 

목포역

송수권

 

호남선 끝자락

내 마음 오지에 묻은 한 장의 낙엽

목포역은 늘 그런 곳이었다

몸으로는 더 갈 수 없는 곳 바다 끝

눈을 들어 마음의 끝 오지가 떠오르곤 했다

푸른 파도가 몰려오고

멸치 떼와 갈치 떼가 자글자글

울음 우는 곳

이따금 상어 떼가 몰려와

물 밑의 캄캄한 조각달을 삼켜보다

되돌아가는 곳

그곳에 가 마음 내려놓고

뼈를 묻고 싶은 날이 있었다

 

 

 

간이역

신경림

 

배낭 하나 메고

협궤철도 간이역에 내리다

물이 썰어 바다는 먼데도

몸에 엉키는 갯비린내

비늘이며 내장으로 질척이는 수산시장

손님 뜸한 목로 찾아 앉으니

처녀적 점령군 따라 집 떠났다는

황해도 아줌마는 갈수록 한만 늘어

대낮부터 사연이 길다

갈매기가 울고

뱃고동이 울고

긴 장화로 다리를 감은

뱃사람들은 때도 시도 없이 술이 취해

유행가 가락으로 울고

배낭 다시 들쳐메고 차에 오르면

폭 좁은 기차는 마차처럼 기우뚱대고

차창으로 개펄이 긴

서해바다 가을이 내다보인다

 

 

 

귀성열차

신경림

 

눈 위에 주름 귀밑에 물사마귀

다들 한결같이 낯설지가 않다

아저씨 워데까지 가신대유

한강만 넘으면 초면끼리 주고받는

맥주보다 달빛에 먼저 취한다

그 저수지에서 불거지 참 많이 잡혔지유

찻간에 가득한 고향의 풀냄새

달빛에서는 귀뚜라미 울음도 들린다

아직 대목장이 제법 크게 슨대면서유

쫓기고 시달린 삶이 꼭 꿈결 같아

터진 손이 조금도 쓰리지 않고

감도 꽤 붉었겠지유 인제

이 하루의 행복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도 적지 않으리

여봐유 방앗간집 할머니 아니슈

돌려세우면 처음 보는 시골 늙은 아낙

선물 보따리가 달빛 속을 달려가고

너무 똑같아 실례했슈

모두들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낯선 데가 하나도 없는 귀성열차

 

 

 

기차

신경림

 

꼴뚜기젓 장수도 타고 땅 장수도 탔다

곰배팔이도 대머리도 탔다

작업복도 고무신도 하이힐도 탔다

서로 먹고사는 얘기도 하고

아들 며느리에 딸 자랑 사위 자랑도 한다

지루하면 빙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끝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투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차창 밖에 천둥 번개가 치면

이마를 맞대고 함께 걱정을 한다

한 사람이 내리고 또 한 사람이 내리고......

잘 가라 인사하면서도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들 가는 곳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냥 그렇게 차에 실려 간다

다들 같은 쪽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철길 - 울산에서

신경림

 

내 형제들의 피를 빨고

땀을 짜서 놓은 철길을 타고 가서

구경하는 금강산은 아름다울까

내 친구들의 졸라맨 허리와

앙상한 갈비뼈를 짓밟은 발들과 나란히

밟아보는 북녘 들판은 부드러울까

내 이웃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피묻은 붉은 손에 이끌려

잡아보는 동포들의 손은 따스할까

 

 

 

폐역(廢驛)

신경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초저녁

여인숙 입구에 새빨간 새알 전등

급행열차가 쉴 새 없이 간다

완행도 간간이 덜컹대며 지나다가

생각난 듯 기적을 울리지만

복덕방에 앉아 졸고 있는

귀먹은 퇴직 역장은 듣지 못한다

멀리서 화통방아 돌아가는 소리

장이 서던 때도 있었나 보다

거멓게 썩은 덧문이 닫힌 송방 앞

빗물 먹은 불빛에 맨드라미가 빨갛다

늙은 개가 비실대며 빗속을 간다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없다

 

 

 

겨울 경춘선

신동호

 

막차. 겨울은 뼛속까지 밀고 들어왔다. 사랑이 고통이라면 다른 고통쯤은 다 잊고도 남았다. 시간이 가까워오면 조금씩 대화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말줄임표도 사라져갔다. 우리들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을까, 새벽을 기다리며 가난한 대합실의 작은 온기를 나누었을까. 사랑은?

종착역. 끝이 없는 여행은 없다. 없기에 슬프고, 없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혁명은 억지로 봄을 부르지만 겨울아, 왜 사랑은 눈꽃처럼 네 안에서만 피어나는 것이냐.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는 아직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길 끝에 종종 길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건널목. 철로를 따라 우리가 가는 길은 일방적이고 무겁다. 차단기를 내리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가난하고 느린 발걸음들을 가로막았다는 걸 자주 잊었다. 사랑도 혁명도 차단기를 내린 채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위도와 경도가 만나는 지점을 지나쳐왔다. 눈은 쌓이지 못하고 그렇게 흩어져 갔다

 

 

 

기차를 타려고 합니다

신석종

 

모르겠습니다

익히 알고 살았던 것들이

어려워집니다

 

어느 계절에 불을 피워야

당신이, 시린 두 손을 내밀고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그 불을 쬐고 싶어하는지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던

내 고향 첫차와 막차의 구분도

이젠 제대로 못하겠더이다

 

느릿느릿 흐르는 동강, 그 옆

옛 기와지붕으로 된 영월역에서

차표를 끊었다가 되물리고 하는

촌스런 짓을 되풀이하는 걸

 

역 대합실 밴치에 앉아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하나두 창피하지 않더이다

 

전반적으루다가, 내가

쌩다지로 늙어가나 봅니다

그대가 밉기도 합니다

 

 

 

간이 정거장

신성호

 

시골의 좁다란 신작로 길가엔

언제 피었는지 코스모스꽃이 방긋 웃는

조그마한 시골길의 간이 정거장

 

시간마다 시골 버스가

이 조그마한 간이 정거장에 온다

 

이 정거장엔 담뱃불을 연신 빨아대는

꼬부랑 할머니가 차를 기다리시고

 

아직도 뻐스가 올 시간이 멀었는데도

차가 달려올 그 길을 눈이 아프도록

눈길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네

 

머언 친정집엔 아니 갈 테고

객지 가신 할아버지 찾아감도 아닐 테고

잘 산다는 자식 찾아가는 길도 아닌 것 같고

 

귀엽고 재롱 많은 손주 녀석을 위해

맛있는 것 사주려고 가시는지

주름진 그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지만

 

꼬부랑 그 모습이 내 어머니 모습인 양

바라보는 반가움도 잠시 잠깐이 되고

 

나의 두 볼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내 마음의 한구석을 흠뻑 적셔 버렸네

 

한 번은 꼭 가야 할 인생길인데

시골의 조그만 간이 정거장 같은 인생길

 

조금 늦게 가고

조금 빠르게 가는 것이 무슨 대수랴

 

이제 막 도착한 텅 빈 버스를 타고

늘상 가던 그 길을 따라

오늘도 버스는 가버렸구나

 

버스 떠난 텅 빈 간이 정거장엔

가을을 재촉하는 가을비만이

온종일 서성이고 있구나

 

 

 

군산역에서

신성호

 

새만금 넓은 바다 위에

꿈꾸던 첫사랑의 노래는

 

푸른 파도를 타고

군산항 부두가에 닺을 내린다

 

뱃고동 소리에 춤추는

바다 갈매기는 신이 나고

 

푸른물 출렁이는 금강 하구둑에서

오똑 솟은 오봉산을 바라보니

 

힘차게 달려가는 열차소리에

산기슭 노닐던 산노루도 내달린다

 

가슴 아픈 이별도 있다만은

못 견디게 그리운 만남도 있으려니

 

언제나 변함없는 그 사랑으로

오늘도 희망찬 군산역이어라

 

 

 

간이역

신현정

 

, 그곳에서 배회한다 맨드라미가 빛나는 그곳에서 개가 빛나는 그곳에서

흘레가 빛나는 그곳에서 배회한다 신문지가 빛나는 그곳에서 새우깡이 빛나는 그곳에서

벤치가 빛나는 그곳에서 배회한다 굴렁쇠가 빛나는 그곳에서 아이가 빛나는 그곳에서

호각이 빛나는 그곳에서 배회한다

삶은 계란이 빛나는 그곳에서 사이다병이 빛나는 그곳에서 손이 빛나는 그곳에서

, 급행은 보내고 완행을 타려고 한다

 

 

 

철길에 서면 그리움이 보인다

신형식

 

아직도 아른거리는 것들을

모두 추억으로 만들고 마는 철길에 서면

그리움은 종착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지

사람들이 오고 가던 세상 한 가운데서

기적 소리는 아직도 그리 서성이고

다 쓰러져 가는 역전앞 가게에서

박카스 한 병 사서 들이키고 나면

보인다. 그제야 그리움이 보인다

없다. 분명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기억은 그 옛날 그대로인데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리움이다

어쩌면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손잡을 타이밍을 못 맞춘 것이 그리움이다.

이제는 가고 오지 않는 비둘기호와 통일호,

그리고 기타 소리를 생각하는 것이 그리움이다.

빈 병 속에서 울다, 울다 떠나버리는 바람처럼

간이역, 누군가 서 있어야 할 그곳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그리움이다

다 비우고

그렇게 서 있는 것이 그리움이다

 

철길에 서면 보인다.

녹슨 것은

다 그리움이다

 

 

 

간이역 풍경

심의표

 

인적 드문 시골 간이역

적막감 도는 대합실

중년의 한 여성

온종일 벤치에 기대앉아

누굴 기다리고 있는가

 

오가는 사람도

쉬어가는 열차도

끊긴지 벌써 오래인데

언제까지 외로이 앉아

애태우며 있으려는가

 

열차 지나갈 때마다

신호의 깃발 펄럭이고

풀랫트 홈 줄지어 선 가로등은

말없이 졸고 있는데.

밤은 깊어만 가는데

 

 

 

기차 소리

심재휘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먼 곳에서 강을 건너는 기차 소리

밤의 들풀을 사납게 흔들며

마을의 낮은 지붕 위를

으르렁거리며 달려왔을 날들의 소리

 

오무린 자귀나무 잎사귀 잎사귀에서,

제 그림자를 버리고 골목 끝으로 사라져가던

슬픈 뒷모습에서도,

슬쩍 슬쩍 기우는 보름달처럼

가늘게 새어나오던 기차 소리

 

세상의 모든 기차가 끊어진 시간에

먼 곳에서 강을 건너는

, 기차소리

 

희미한 그 소리 잃어버리고 잠들까 봐 전전긍긍하는 밤,

기차는 긴 터널을 나와 난데없이 나타난 바닷속으로

폭설을 헤치며 달려 깊고 어두운 숲속으로

오늘도 자꾸만 멀어지는데

 

 

 

기차

심훈

 

깊은 밤, 캄캄한 하늘에

길게 우는 저 기적 소리

어디로서 오는 차인지,

그는 몰라도

만나서 웃거나 보내고 울거나

나는 몰라도

간신히 얻은 고운 임의 꿈을

행여 깨우지나 말아라

 

 

 

기차

안도현

 

삼례역에서 기차가 운다, 뿡뿡, 하고 운다, 우는 것은 기차인데

울음을 멀리까지 번지게 하는 것은 철길이다, 늙은 철길이다

 

저 늙은 것의 등뼈를 타고 사과 궤짝과 포탄을 실어 나른 적 있다

허나, 벌겋게 달아오른 기관실을 남쪽 바닷물에 처박고 식혀보지 못했다

 

곡성이며 여수 따위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반하지 못했으므로

단 한 번도 탈선해 보지 못했으므로 기차는 저렇게 서서 우는 것이다

 

철길이란,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 자국으로 꿰매 놓은 것

 

그 어떤 바깥의 혁명도 기차를 구하지 못했다

철길을 끌고 다니는 동안 서글픈 적재량이 늘었을 뿐

 

그리하여 끌고 다닌 모든 길이 기차의 감옥이었다고

독방이었다고,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도 저도 녹슬었다고

 

기차는 검은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기어이

철길에 아랫배를 바짝 대고 녹물을 울컥, 쏟아 낸다

 

 

 

밤 기차를 타고

안도현

 

산모퉁이를 돌면서 기차는

쓴약 같은 기적소리로 울고 있었다

유리창에 눈발이 잠깐 비치는가 했더니

이내 눈송이와 어둠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껴안고 나뒹굴며 싸우는 폭설이었다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

철길 옆 낮은 처마 아래 불빛 하나뿐

저기 잠 못 든 이가 처녀라면

기적소리 멀어지면 더욱 쓸쓸해서

밤새도록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철길(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안도현

 

혼자 가는 길 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앞서거나도 뒤서지도 말고 이렇게

서로 그리워하는 만큼 닿을 수 있는

거리가 거리가 있는 우리

혼자 가는 길 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다투거나 싸우지도 말고

이렇게 서로 그리워하는 만큼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이 있는 우리

나란히 떠나가리 늘 이름 부르며 살아가리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그날까지 그날까지

 

 

 

경인선 열차

안시아

 

모든 길이 추월이다

하늘도 일찌감치 눈꺼풀을 내린 채 깜깜하게 속력을 내고 있다

네가 관통한 자리 여태 쓰러져 있듯,

철로가 제 몸을 쓰러뜨려야 열차는 길을 갈 수 있다

목적지 없이 내게 올라타는 넌 언제나 무임 승차다

요금을 지불하고도 나는 늘, 입석처럼 네 안을 서성거린다

손잡이를 잡고도 위태롭다

네게로 가는 길, 아까부터 빗줄기가 창가에 모로 눕는다

꼿꼿하다가도 이내 저들끼리 부대끼며 하나로 흐른다

나는 알 수 없는 그 접점,

내 사랑은 늘 속도위반이었고 추월선 하나씩 그려 넣곤 했다

네게로 가는 모든 길은 추월이다 너에게로의 도태다

 

 

 

너라는 종착역으로 달려야 할 나의 기차는

안재동

 

너라는 종착역으로 달려야 할

나의 기차는,

 

어느 간이역에 멈추어

써늘한 늦가을 비를 흠뻑 맞으며

떨고 있는 나의 기차는,

 

붉은 낙엽에 파묻혀가는

레일 위에서 오늘도,

기다림과 그리움의 두 발로

엉거주춤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어느샌가

바퀴들은 벌겋게 녹슬고

기관마저 고장난 채

육중한 검은 철마는 아무 말 없이,

쿵쿵거리는

내 심장의 박동을 삼키며

제 허기만을 채우고 있다.

 

하늘 끝까지 닿도록 요란하게

푸른 기적을 울리며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철길을

철그렁거리며 달려야 할

나의 기차는

 

 

 

기차 여행

양해선

 

산비탈이 기차를 삼킨다

순간, 어둠 속에 묻혀버리는 세상

멍멍하다가 전화는 끊기고

펀득거리는 유리창 밖 저만치

연거푸 스쳐 가는 한 여인의 얼굴,

뱀허물 같은 지난날들

훌훌 벗어 굴속에 던져버리고

속 비치는 알몸으로 뛰쳐나와

산 너머 세상을 휘감고 돌아가는 동안

서산마루엔 검은 이리 한 마리

홍시 하나를 덥석 베어 물고 있다,

감물이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기차는 뒤척이며 덜컹거렸고

갈바람에 갈꽃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려던 참에 전화가 끊겼다

보고 싶다고 말한다는 것이

보고 있다는 말로 새어 나갔을 때도

전화는 끊겼고, 그럴 때마다

기차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산허리를 꿰뚫고 내지른다

 

 

 

기찻길

양해선

 

아무런 말도 없이

스쳐 가는 바람이라도

나란히 있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가까이 가고파도

다가설 수 없고

애써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마주 보며

함께 가는 길

돌아서서 보면

한 치 오차도 없이 달려온 길

 

서로 바라볼 수 있어

행복했고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먼 훗날, 소실점 끝에서라도

한 점이 될 수 있어

설레는 가슴이

이렇게 뜨거울 수가 없다

 

 

 

시골 기차를 타고

엄원용

 

멀리 지평선 너머로 붉은 노을이 진다

차창 밖으로 작은 집들이 스쳐 지나가고,

어느 집에는 벌써 저녁 등불이 켜졌다

 

잘 있거라 집들아. 마당가에 심어진 나무들아

붉은 칸나야, 길가에 핀 코스모스야

너는 남고 나는 떠난다

이별은 항상 영원한 양 서럽고

마음은 항상 그곳에 두고 떠난다

 

인생은 항상 떠나는 것

영원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집도 나무도 꽃들도 스치는 바람도

저 높은 초저녁 별들까지 언젠가는 떠난다

 

나는 3등 열차 창가에 턱을 고이고 앉아

스치고 지나가는 풍광에 눈을 뗄 줄 모른다

기차는 무정하게 저녁 들판을 달리고,

나는 혼자 레일 위에 추억을 깔며 달린다

 

 

 

오수역

오경옥

 

대정리를 벗어나 용정리를 거쳐

오수천이 흐르는 둑길을 걸어가면

왁자지껄하게 오일장이 열리는 오수시장,

더운 시장골목을 벗어나면

우체통을 벗 삼은 오수역 광장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

따스하게 어깨를 두른 벤치가 마냥 정겹다

또 다른 기다림이 있는 곳으로 푸른 발을 뗄 오수사람들

어머니가 챙겨준 보따리에 손이 모자라다

고향과 가족과 나이를 묻는 동향인들

나름대로의 가뿐 호흡이 허름한 역사 안에 꽃피어

정을 향으로 풀어놓는다

더러는 간절한 바람들이

반가운 만남과 슬픈 헤어짐으로 흩어져갈 삶의 교차로

전라선 무궁화호 완행열차가 기적을 울리면

하늘거리며 작아지는 얼굴들이

철길 따라 만개한 코스모스로 서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는 내 젊은 날의 오수역

 

 

 

멈추지 않는 열차

오문경

 

협궤열차가 비탈의 협곡을 내달린다

기나긴 터널을 지났는가 하면

열차는 또 다른 터널 속에 있고

 

갈 길은 멀어 캄캄한데

아슬아슬한 절벽 너머로 거친 파도가 휘몰려온다

 

파도가 묻는다네,

꽃이 그냥 꽃인 줄 아느냐

 

아산(我山)을 오르며, 내려가며 무엇을 보았는가. 그대는

말문 막혀 핀 꽃은 보았는지

 

꽃도 꽃을 넘어서야 영원히 피는 것

산이 산을 넘어야 여여산(如如山) 되나니

 

나지막이 들려오는 기적소리

내 잠을 깨우네 호접몽(胡蝶夢)*

 

, 열차여! 여기 뜨거운 가슴 열어

함께 건너야 할 바다가 있다. 평화의 바다

 

탁 트인 바다가 그냥 된 줄로 아느냐

제 한 몸 던진 실개천, 모이고 모여 이루나니

 

작은 귀로 큰소리 담을 순 없나니

큰 귀, 열어두어야 들리는 광음(光音)

 

귀 기울여 들어보라 저 가녀린 신음소리

마른땅 허옇게 젖어드는 궤적소리

 

흩어지는 파도 소리는 설움에 북받쳐 운다네

굳은살을 뽑아라,굳은 살!

뒤엉킨 분열과 갈등의

 

푸른 열차는 달리고 있다. 오늘도

 

* 호접몽(胡蝶夢) :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

 

 

 

하얀 열차는 아프다

오문경

 

빗길, 아슬아슬 용지행 마지막 전철에 오른다

 

무수한 중독의 하얀 꼬리표를 달고

지워지지 않을 상처만 끌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죽었다간 다시 깨어나는

텅 빈 열차의 머리통 지끈거려온다

 

죽어가는 뇌세포를 다그친다. 알코올이, 페북이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에 갇혀

 

어느덧, 노란 정지선 앞에 서 있는 중독열차

 

투명창 넘어로 엊그제 먹다 쏟은 머얼건 탕국 같은

빗물, 줄기줄기 쏟아져 내린다

 

몇 정거장째 타는 승객이라곤 하나 없는

열차 문은 열렸다 닫혔다 냉기만 더하고

 

이윽고, 키 큰 중년 여인이 탄다. 잠시 휘청거리나 싶더니

건너편 빈 모퉁이로 다가가 철퍼덕 주저앉는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 괸 다리로

시퍼런 중독이 흘러내린다

아니, 지독한 감옥에 갇혀있다

 

알코올일까,

도박, 게임, 핸드폰일까

그래, 주객을 바꿔 차버린 황금중독

 

중독은 중독을 불러 세우고

잠간이라도 그놈의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뻐걱거리는 열차

 

하얀열차는 아프다

 

진창에 빠진 채,

덜컹거리는 열차의 기침소리 무거운 밤

 

서두만 긁적이다 덮어버린

어쭙잖은 내 시작 노트마냥 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예산역

오성일

 

서천 가는 밤

흐릿한 기차간에 보퉁이 몇 개

 

예산의 삽교의 홍성의 광천의 대천의 웅천의 서천의

늙은 어미들의

 

느릿느릿 작은 눈 깜빡이며

무언가를 걱정하다

 

간간

보퉁이를 고쳐 안는

 

무릎에 포개진

마른 손 몇 개

 

 

 

추전역

오세영

 

세속도시를 버리고

등고선을 좇아 높이 높이 올라왔나니

활엽수림대(闊葉樹林帶)를 지나서 침엽수림대(針葉樹林帶)를 지나서

숨가쁘게 달려온 한 생

드디어

하늘의 문턱을 넘는다.

이번의 정차 역은 하늘역

잊지 말고 내리자.

아차 놓치면 다시 돌아가는 지상은

슬픈 열대(熱帶),

 

내 여기 오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가. 추전역

허공에

무지개를 하나 끌어와 다리를 놓고

구름밭을 다져 레일을 깔았나니

한 생이 가는 길은 여로(旅路)

하늘 가는 티켓 하나 덜렁 사서

야간 열차에 오른다.

, 태백준령(太白峻嶺),

그 빛나는 태양 아래 문을 연

천제단(天祭壇) 입구의 그 추전역

 

 

 

마지막 열차 칸에서

오애숙

 

삶이란 누군가에겐 회오리 바람같으나

누군가 어떤 이에겐 봄바람 같다지만

인생의 여울목에선 거거서 거기랍니다

 

나그네 인생 녘에서 어디서 왔는가 알아

일찌감치 하늘향기 슬은 맘의 기쁨으로

주변 돌아 본다는 건 가장 멋진 일입니다

 

그 누군가가 그렇게도 올곧게 잡아 주나

제 고집 꺽지 못해 고수하는 우매자들은

공수래 공수거 인생인 걸 알지 못하네요

 

~ 삶의 과정 달라도 마지막 고지에서

하늘 향그런 희망 날개 붙잡고 산다고 하면

내 님과 더불어 본향에서 휘파람 불겠지요

 

 

 

인생 열차

오애숙

 

실비가 들판에 시나브로 내리더니

밤사이 갈맷빛 물감을 뿌려놓았다

 

애오라지 숨결로 숨죽여 들었던 필드가

생글생글 웃음꽃 피워 아침에 무지개길 열 때

눈이 햇살에 눈부신 초록빛 바다를 집어내었다

 

맑은 날씨인데 피죽바람이 불더니 여우비가 내린다

비가 걷힌 후 정오 지나 오롯이 들판을 거닐 때

반사작용이 가파르게 비탈진 가풀막 앞에서 앙당그린다

 

조요히 희로애락이 갈바람에 스미진 곳에서 회 돌아서니

해그림자 밑에서 네 박자’*가 오롯이 가슴에 스며든다

 

* 네 박자 : 가수 송대관 씨가 부른 노래 제목

 

 

 

인생 열차 칸에서

오애숙

 

때가 되면

봄을 보내고 여름맞이하듯

그 작열했던 여름 보내고 갈맞이 하나

분주한 이 마음 갈바람 사이에 서걱입니다

 

때가 되면

젊은 한 때에는 결실에 춤 추며

노랫가락에 장단 맞추었던 때가 있어

가을이 행복해 즐거웠었다고 회도라 보나

 

인생이 항상

그리되는 것 아니라는 걸 잘 알아

흙탕물 안되려고 안간힘쓰고 있는 것은

넘어져도 일어나 질주하려고 앞만 봅니다

 

때가 지나

인생의 봄 영영의 전차 타고 갔으나

영원한 생 날개 쳐 오기에 인생 열차 칸에서

하늘빛 향그러움 가슴에 박제시켜 가고자 합니다

 

 

 

황등역

오유정

 

희미해진 불빛, 역 근처 석공의 망치 소리에 호남선 열차가 탄력을 받는다. 기적과 망치의 버무려진 소리들이 역사(驛舍) 처마끝에 매달리다 스르르 사라진다

먼지를 뒤집어쓴 맨드라미가 돌 쪼는 소리에 먼지를 털던, 맞이방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손에 망울망울 새 소식이 들려 있기도 하던, 꽃샘추위가 찾아오면 더욱 누렇게 마을을 바라보던, 돌 틈을 비집고 나오는 파릇한 싹을 찾기도 하던, 침목과 침묵 사이, 기적소리의 파편들이 선로와 화단 사이로 잘게 구르던, 자갈들이 잠시 불빛을 당겨 몸을 달구어 보기도 하던, 열차가 한차례 지나가면 역무원이 작은 철문을 닫고 차근차근 역사(驛舍) 근처를 살피던, 조금은 둔한 손가락으로 일지를 적어 두던, 살뜰한 마음이 구석구석에 쌓이던, 마른 가지가 빛바랜 소리를 내어 가느다랗게 떨면 사람들 몇 맞이방으로 만남을 위해 찾아들던, 핏기 잃은 손을 맞잡은 사람들이 누런 말 들을 주고받던,

낡은 기적 소리 따라 옛 기억들이 천천히 자라는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오인태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레일이 사람의 가슴에도 있는 것임을

그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 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 기차는 모를 것이다

 

 

 

간이역

오정방

 

간이역 좋은 풍광

드없는 절경인데

 

무심한 급행열차

앞만 보고 달리누나

 

인생도

저와 같거늘

쉬어감이 어떠리

 

 

 

기차 역사 주변엔 왜 코스모스가 많은가?

오정방

 

유달리 기차 역사(驛舍) 주변에

코스모스가 많은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하니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더라구

 

떠나가는 사람 환송해 주려고

찾아오는 사람 환영해 주려고

지나치는 사람 인사해 주려고

바라보는 사람 사랑해 주려고

형형색색 제각기 피어나서

마냥 몸을 흔들고 있었던 게야

 

 

 

기차

오탁번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 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 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 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울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종착역

온기은

 

사랑의 향기 가득한

화원에서도

가시울타리를 넘어야 하는 아픔이

따르기도 하여

생의 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가끔 외로움에

비상등이 켜지기도 하는가

 

울타리 안에는

꽃향기 가득한

아름다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삶의 문들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찌르는 고통에 신음하며

 

잠시 멈춤 선에서

머뭇거리면서도

미련한 탓인지

 

창자까지 다 게워 내는

쓰디쓴 고통을 맛보고 나서야

사랑의 기차를 타고

행복의 종착역에 도착하는가 보다

 

 

 

사라진 역

우대식

 

카스테라 봉지를 뜯던 여자가 있었다

주홍빛 망에 담긴 계란이 빛나던 시절

허기진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먹고 있었다

역에서 사람들은 나누어 먹는 연습을 했던 것

부자들은 역을 줄였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역을 폐쇄했다

나누어 먹는 연습을 할 곳이 사라졌다

 

 

 

철길

용혜원

 

친구야, 생각해 보게나

철길 말일세

두 개의 선이 나란히 가고 있지

가끔씩 받침대를 두고 말일세

다정한 연인들 같다고나 할까?

수많은 돌들은 그들이 남긴 이야기고 말일세

그 철길 위로 열심히 달리는 기차를

생각해 보게나

두 선로는 만날 수 없네

그러나 가는 길은 똑같지

어느 쪽도 기울어져서는 안 되지

거리 간격이 언제나 똑같지 않았나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을 보게나

친구야

우리의 우정은 철로일세

물론 자네가 열차가 되고 싶다면

할 수 없네. 그러나 열차는 한 번 지나가지만

철길은 언제나 남는 것이 아닌가?

열차가 떠나면 언제나 아쉬움만 남지

친구야, 우리의 길을 가세

철길이 놓이는 곳에는 길이 열리지 않나

 

 

 

기차를 타고

유소례

 

기차를 타는 짜릿한 설렘 속에

동시대를 살아온 친구와

그 험난했던 시절을 새김질해 보는 여행

 

폐장에 묵은 때 쏟아내고

저 창공의 흠 없는 숨을 마시며

엉클어진 지난날들

곱게 사려 늑골에 묻어 놓자

 

대전 익산 전주...

시간 속으로 낯익은 간이역이

향수를 주렁주렁 매달고 지나간다

 

남원에 들어서다

고향집 화단엔 봉선화뿐이었지

어머니만 아시는 비밀의 꽃,

가슴을 도려내듯 그리움 한 뭉치 걸러낸다

 

아른아른 기억을 흔드는 낡은 골목 길에

소녀 하나 나를 닮았구나

방학이 되면 모여 참새떼 같던 어린 시절

야생화 같던 순박한 향내 맡고파 찾아가는 길

지금은

지금은 다 누구의 별이 되었을까

 

 

 

간이역

유안진

 

시력 나쁜 눈길은 못 봐서 지나치고

약삭빠른 발은 볼품없다 지나친다마는

쉰 고개를 넘어오신 부르튼 맨발이여

얼마나 고단하신가

불개미 한 마리도 안 밟으려 애쓰느라

가벼운 사잇길도 힘겨웠던 삐걱정갱이

절룩걸음이여 그대 기다려 나는 있다

인정의 간드레불 끄지 않는다

물러앉은 3등 인생 졸음 겨운 하품질로

쉬파리 떼 왱왱거리는 고향의 푸념질로

거친 두 손 뒷짐 진

등 굽은 고향으로

 

 

 

기차 레일

유일하

 

우린 항상

거리를 두지

 

달려도

달려도

같이 갈수 없는 길

 

바라만

보는 길 인가봐!

 

그래도 우린 좋아

 

넌 날 의지하고

난 널 의지하니까

 

우린 항상

나란히 가지

 

지구 끝

어디에도

외롭지 않아

 

너 가 있는 곳엔

꼭 내가 있지

 

그래서 고통도

우릴 밟고 지나가나봐!

 

미끄러지듯 서서히

고통이 무뎌지면

지면을 떠나겠지

 

갈 때도

나란히 눕자

 

 

 

봄을 싣고 달리는 기차

윤갑수

 

긴 잠자던 봄의 새싹들이

바람에 놀라 파릇이 눈을 뜬다

아지랑이 너울대는 언덕 위

염소 한 마리 햇살 바라기에

망중한이다

 

쉼 없이 오물오물 거리며

되새김질하는 아련한 추억들

하얗게 퇴색된 젊음을 지우려

바람처럼 휘이익 지나간다

 

칙칙폭폭 봄을 싣고 달리는

기차 굉음 소리가 촉촉이 적신

가슴에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기차역에서

윤꽃님

 

사람들이 오고 간다

나가고 들어오고, 들어오고 또 나간다

점과 점들이 선이 되고

선과 선들이 무한대로 꿈틀거린다

 

캐나다 민박집 앵카는

크로아티아 이민자인 정 많은 그 칠순 할머니는

내가 떠나오는 여름마다 눈물 글썽이며 말하곤 했지

사람들은 왔다가 가는구나

 

모국어와 외국어처럼 내 두뇌를 오가는

기차는 도착하고 출발하고, 출발하고 또 도착한다

눈물방울의 점을 아는 자만이

기차의 선을 이해할 수 있다

모국어의 뉘앙스를 잘 아는 자만이

외국어의 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왕래발착 동사를 배우던 중학교 시절

어떤 애가 내게 왔다가 갔다

그 후로도 칠 년이던가, 팔 년이던가

빈번하게, 아니 지금도 빈도부사처럼

그 애가 한 말들이, 내가 못다 감지한 표현들이

늦게, 너무나도 뒤늦게 내게 왔다가 간다

 

복병처럼 곳곳에 숨어있다 나를 덮치는

과거완료의 끈질긴 기억들

기차역에 오면 더욱 문법적으로 대열을 가다듬고

지렁이처럼 꿈틀대곤 한다

많은 사람들, 사물들, 그만큼 많은 말들과 이미지들

그러나 어순도 없이 뒤죽박죽 왔다가 간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발차시간과 도착시간을 알리는 전광판 아래서

상행선과 하행선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분류하는

저 명멸하는 불빛을 보며

지금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의 무게로 무거워진 기차가 도착했다

그대가 도착했다, 고 그것은 내게 설명한다

그 설명을 듣자마자 내 온 몸과 마음

곳곳에 암기되어 있던 종합 기억이

일제히 한 시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아이고, 아이고우셨던가

앵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존과 밀은 뭐라고 하며 울까?

그대가 돌아오면 나는 뭐라고 하며 울까?

돌아, 오니까 웃을까?

 

한 순간 애틋하게 눈물 글썽이며

손을 흔들었던 그대가 다시 온다

점이 되어 선이 되어

꿈틀대는 무한대의 사랑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그때 포착한 이미지를

중학교 때 외웠던 영어단어처럼 정확히 기억한다

 

환영과 작별이 오고가는 역 대합실

나의 눈이 그대를 찾아 전광판처럼 빛난다

새벽에 잠 못이루던 그리움이 함께 반짝인다

그리움은 눈물

흐르지 못하고 눈에 고이는 눈물이다

잠시 눈물 비치는 순간의 움직임이다

만남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그대가 내게로 걸어온다

새로운 내가 그대에게로 걸어간다

우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대 내게 온전히 오고 있는가

나 그대에게 온전히 가고 있는가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뒤늦지 않게?

나는 길게 묻고 또 묻는다

 

기차가 인생을 비유하는 흔한 이미지인 것처럼

점과 선은 시점을 설명하는 쉬운 이미지였다

미래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윤석중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 폭 칙칙 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 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 폭 칙칙 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철길은 왜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가

윤수천

 

철길은 서로 만나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열차를 보내기 위해서는

철길은 서로 만나서는 안 된다

슬프지만 이대로 견딜 수밖에 없다

 

철길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만나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슬프지만 철길처럼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경춘선

윤용기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2개의 철로가

2시간여 남짓 열차는 달린다.

사랑을 싣고 추억을 싣고서

 

차창가 멀리 내다보이는 우뚝 솟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을 끼고서

산은 높고 물은 맑아 좋다

 

산을 넘고 터널을 지나

물 좋고 인심 좋은 호반의 도시

춘천을 향해 열차는 긴 기적을 내뿜는다.

사랑을 싣고 그리움을 싣고서

 

 

 

고향 향한 열차

윤용기

 

1

두툼한 겨울 흰옷을 입은 산은

따뜻하기도 하겠다.

그리움을 실은 고향 향한 열차는

못 다한 정 가슴에 담아두고 달립니다.

 

금방 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은

내 마음을 닮은 걸까요?

새마을호 열차 먼저 보낸다고 4분간 정차시간이 왜 이리 긴가?

조치원 역 컨테이너 하치장 왜이리 많이 쌓였는가?

 

삶의 끝은 어디메냐?

이 열차의 종착역은 어디메냐?

 

님 없는 고향 길 허접 하기만 하누나

다른 세상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왜관 철교 아래 흐르는 낙동강 물 고향으로 흘러가네.

고향 향한 열차는 님의 형상 못 찾고 가슴 에이는 그리움만 한없이 사무칩니다.

 

 

2

빛 부신 하늘가에

손짓하는 산하

새 옷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늘 보아 온 하늘이지만

유난히 싱그러운

가을 빛 머무는

향기를 담아

긴 기적의 여적에

고향을 부른다.

 

산천은 의구하되

내 님은 간 곳 없고

무심한 구름만이 떠도는데

화산처럼 쏟아내는 그리움을

실오라기 뽑아내 듯

토해내는 디젤기관차의 연기처럼

나풀나풀 뿜어 올린다

 

 

 

기차 속 풍경

윤용기

 

휴가 끝 월요일이라 그런가

좌석은 없고 모두 입석만 남았다.

무슨 사연 이고 지고 부산으로 향할까

소곤소곤 주고받는 객실 속 대화는

너무도 다정하게 느껴진다.

 

서울 사는 아들집에 다녀가는 노부부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가는 연인들

아이들과 친정에 가는 아주머니

우리네 삶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쪽에서 따르릉 핸드폰 소리가 들린다.

경상도 사투리에 목소리가 커진다.

홍익회 아저씨는 "맥주요, 귤이요" 하며 지나간다.

 

차창 밖 풍경들이 너무도 산뜻하다.

며칠동안 많은 비로 묶은 때가 쓸려 가서 그런가 보다.

뭉게 구름 두둥실

이제는 비가 다 온 모양이다.

어느 새 부산 행 열차는

수원역임을 알리는 승무원의 방송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이제 나는 내려야 한다. 내 보금자리를 찾아서 ........ .

5시간의 긴 여정을 떠나는 뭇 사람들을 뒤로하고서

 

 

 

기차 까페

윤용기

 

들커덩 들커덩 들어와 앉았다.

보통리 저수지 옆 기차 까페

얼음 낚시 즐기는 한량들

숨죽이며 숨죽이며 누굴 기다리고 있네.

 

조용한 음악이 내려 깔리고

옛 기차 여행의 추억을 담아

기차 까페에 앉아

향기 나는 차 한 잔을 나누며

옛 추억을 더듬어 보네

 

 

 

달려라 철마

윤용기

 

56년 만에 녹슨 철길을 다시 이어 달리는 철마

말이 없이 지켜 온 56년의 세월을

너는 잘 알겠지

1951612일 이후 56년 만에 이어진

경의선 철마

개성 역을 오가며 그간의 설움을 씻어다오

 

금강산역에서 남한의 제진역까지

오는 데 57년의 세월을 삼켰다

역사적인 남북 열차 시험 운행

시험 운행이 아니라 남과 북의 마음을 실어 나르는

진정한 가교의 역할을 하여라.

 

남과 북의 이산의 아픔이여

뚫린 철길처럼

~

저 북녘의 하늘 끝까지 자유의 물결 이어가라

조선 반도 평화의 품으로 돌아오라

 

달려라 철마야

저 조선 반도 북녘을 지나 만주로, 시베리아로

저 넓디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라

대한의 기상이여!

지난 아픔 훌훌 털어 버리고 나아가자

저 세계로

 

 

 

서울역

윤용기

 

부산, 목포, 광주, 여수, 장항

저 남도 땅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모여든다.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시골의 내음을 한 보따리 들고 온다.

 

언제나 떠나는 사람 오는 사람

북적이는 서울역

 

밤은 깊어 네온 불빛은 졸고 있는데

목포행 마지막 열차가

긴 기적을 울린다.

 

숱한 사연을 가방에 넣고

보따리에 싸서

이별과 만남의 서울역

 

긴 기적소리에 이별의 한숨을

만남의 기쁨을

뒤로 한 채 열차는 떠나간다

 

 

 

가을을 찾아가는 기차

윤의섭

 

하얀 이슬이

나뭇잎에 달리고

아침 햇빛이

이슬마다 영롱하다

 

마을 앞을 지나는

기차 바퀴 소리가

시원시원 경쾌하다

 

밤나무 아람이 떨어지기 전에

빨간 고추를 햇살에 말리고

추수에 바쁜 농가에는

대나무가 소복소복 둘러있다

 

설겅설겅하는

황금 들 역을 지나고

멀리 야산이 드문드문

차창 밖으로 아련하게 스친다

 

인생의 수채화를 그려 보는

가을 기찻 길

추억과 희망의 물감으로

마음의 여백에 색칠해 본다

 

 

 

겨울의 기차 여행

윤의섭

 

눈이 내리는 산에는

소나무 가지가 내려지고

차창 밖에는 설경이

시원시원 스쳐 간다

 

심산 속으로 빨려들 듯

터널을 관통하고

기암 계곡의 바위들이

설모(雪帽)를 겸손하게 쓰고 있다

 

동해를 조망하니

눈부신 태양이 창파를 치고

내 마음속으로

또 하나의 나를 안겨 주었다

 

 

 

새마을호 퇴역

윤의섭

 

대지를 누빈 열차 새마을호 50

산천도 지켜봤고 유수도 따라왔네

천리길 반나절 서울에서 놀랐고 부산에서 놀랬네

 

1$ 무역 재화 부산항으로 인천항으로

10억 유동 인구 소통의 동력으로

장한 업적 이뤄 보석같이 빛났네

 

차창의 이중 유리 처음 구경거리였고

좌석마다 재떨이 애연 愛煙의 시대

카펫 carpet 객실이란 추억도 있네

 

북향의 대륙으로 꿈을 잉태한 체

고속철도시대 KTX 탄생시켜

선진국 자존심 배턴 baton을 넘겨줬네

 

 

 

서울역

윤의섭

 

흰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서울역에서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떠나는 그 사람

신만이 아는 슬픈 추억을 가슴에 안고

차창에 스쳐 가는 한강 철교가 운다

 

가슴에 품은 비원 悲願은 아직도 멀고

초원의 훈풍 지나 거친 언덕 추풍령

터널 속을 지나는 융융 融融한 기운

휙휙 지나온 기차 소리만 들리네

 

터널을 나서자 태양이 빛나고

왜 환의 한이 맺힌 땅 삼한이더냐

여기가 부산이냐 목포이더냐

불러 보고 싶은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

 

 

 

정거장의 추억

윤의섭

 

무엇인가 보따리를 들고

기차에서 내린 시골 정거장

타향에서 겪은 애환의 보따리

고향냄새에 가슴이 설레네

 

시골에 없는 좋은 옷 사서 입고

몸치장을 한 것이 속으로 걸리지만

성공과 실패담 차내의 풍경 떠올리며

역경의 간난신고 다시 생각하네

 

 

 

추억의 완행열차

윤의섭

 

부드러운 곡선의 그림 같은 야산들

감나무 둘러친 시골집이 옹기종기

느림의 가을풍경 완행열차 지나가네

 

명산도 지나고 강물도 건너가고

터널을 나온 후에 산록이 푸른데

창공의 화폭에는 흰 구름 쫓아오네

 

저 멀리 서산에 황혼이 빛나니

인생길 쉬어가듯 간이역을 지나고

저녁의 새들이 숲속으로 떨어지네

 

 

 

추억의 칙칙폭폭

윤의섭

 

칙칙 폭폭 칙칙 폭폭

햐얀 증기 옆으로 힘차게 뿜어내고

커다란 쇠바퀴가 덜컹덜컹 굴러간다

 

연통에서 구름 연기 길게 그려 가고

산모퉁이 돌아가며 기적 소리 울린다

 

마을 앞을 지나면 아이들이 따라오고

가슴을 설레며 꿈을 키웠지

 

추억이 서려 있는 기차 소리

KTX 차창에다 손가락 그림 그려본다

 

 

 

해랑 관광열차

윤의섭

 

KTX 기술의 최고봉

해랑열차가 달린다

서부선 동부선 관광열차가 달린다

 

서울역 플랫폼에서

코발트색 봉황 문양 해랑(海浪)

매끄러운 동체가 미끄러지듯이 떠난다

 

페어 그라스 창밖이

환상으로 흐르는

서울시내를 조용히 빠저 나간다

 

명승에 하차하면

전속 버스 갈아타고

보트 운행 탐사코스 신나는 여정

 

점심의 특산 요리

커피 한잔 쉬는 사이

다음 행선지로 달리는 신나는 해랑열차

 

파도치듯 펄럭이는

들판을 지난 후에

저녁의 남도 명승 토종 끼 만끽한다

 

서울 부산 순천 동해로

전국 명승 유랑하며

총명을 솟게 하는 호텔 안식의 해랑 열차여

 

 

 

기차

윤진화

 

내 까만 머리카락을 타고 기차가 떠나요. 열이 오른 휘슬 주전차처럼 휘파람을 불여 달리는 기차. 지구에서 이름 없는 별까지 달리는 기차. 사실, 목적지도 없어요. 이름 없는 별까지, 라고 아무렇게나 읊조린 걸 사과할게요.

편도뿐인 이 기차에 어떤 노인이 먼저 타고 있었죠. 텅텅 빈 열차, 좌석에 앉지 않고 좁은 통로에 서 있던 노인은 화석처럼 굳었죠. 하지만 그가 담배를 질겅 씹어댈 때마다 비싼 엽궐련 향이 나서 좋았어요. 그의 등에는 업을 이어 만든 통발이 업혀 있었어요.

그 안에는 꼬리를 퍼덕이는 인어 한 마리. 여편네라는 인어는 수천 년이나 늙지 않았대요, 사람을 홀리는 눈과 목소리를 내었죠. '다시는 내리지 못하리, 누구도 내리지 못하리,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나는 시집살이를 견디는 여자처럼 다른 곳에 시선을 주어야 했어요. 기차가 인동 넝쿨 꽃잎이 흐르는 곳에 닿았을 때, 인어의 노래가 창을 타고 뱀처럼 넘어갈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한 그루 물푸레나무.

노인은 그 나무를 '이그드라실'이라 했어요. 이그드라실, 이그드라실, 우주의 나무, 이그드라실..... 영겁을 벗은 나무의 속살은 모든 업의 끝이라 했죠. 노인이 굳은 다리를 움직였어요. 안쪽에서 잠긴 문을 열고 기차 밖으로 인어를 내 던졌어요.

자장이 없는 시간을 휘젓는 인어의 노래가 고약하게 풍겼어요.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른 노래 '안녕? 안녕! 몇 번을 꿈꾸어도 변하지 않을 사람. 이젠 안녕......' 내 다리에는 조금씩 비늘이 돋아요, 빈 통발을 든 노인은 웃으며 다가서구요.

 

아무런 고통 없이 손에 넣은,

누구도 주체하지 못하는 낯선 시간을 달려가는 기차.

여기서 그만 내리고 싶어요. 하지만 안녕..... 짧은 기적을 울리며,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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