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주 – 섬진강변의 바위
강남주 – 흐르지 못한 강
강만 – 겨울 강
고영 – 겨울 강
고영민 – 겨울 강
곽재구 – 강
곽효환 – 겨울 강
구상 – 강(江)
구상 – 그리스도 폴의 강(江)
구연배 – 강과의 대화
구재기 – 겨울 강
권경업 – 겨울 강
권경업 – 낙동강
권달웅 – 가을 강
권수진 – 겨울, 섬진강
권순자 - 낙동강 연가
권오범 – 가을 강
권유경 – 낙동강
김경주 – 아우라지
김근이 가을 강
김낙필 – 섬진강 대전댁
김남조 – 겨울 강
김덕성 – 가을 강가에서
김명인 – 가을 강
김민홍 – 겨울 강
김선아 – 겨울 강
김선태 – 겨울 강에서
김세영 – 겨울 강
김시종 – 낙동강
김양수 – 그리움의 강
김영주 – 가슴에 흐르는 강
김용택 – 그 강에 가고 싶다
김용택 - 섬진강
김용택 – 섬진강의 봄 – 봄풀
김용호 - 낙동강
김정택 – 형산강 연가
김정호 - 촉석루 남강 속으로 간다
김지헌 – 겨울 강
김찬일 – 겨울 강의 나
김찬일 – 낙동강
김희경 – 겨울 강
나상국 – 겨울 강 두물머리
노금선 – 가을 강
도종환 – 겨울 강
도지현 – 겨울에 우는 강
류철 – 겨울 강
마종기 - 우화(寓話)의 강
문성해 – 그런 날은
문재학 – 비탄(悲嘆)의 강
문태준 – 겨울 강에서
민영 – 겨울 강에서
박광호 – 봄이 흐르는 강
박두열 – 남강
박두진 - 강(江)
박두진 – 팔월의 강
박상희 – 섬진강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태강 – 낙동강
서원동 – 겨울, 동강
손택수 – 강이 날아오른다
송정숙 – 섬진강가에서
신경림 - 강
신용목 - 섬진강에 말을 묻다
안도현 – 겨울 강가에서
안영준 – 강가에서
안태현 – 강
여림 -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오탁번 – 겨울 강
우원호 – 섬진강에 연어들이 돌아왔다
유종인 – 매듭 속의 강
유화 - 강
윤영초 – 강가의 연정(戀情)
윤정강 - 강물은
윤정강 - 강물은 흐르며 빛나고
윤정희 – 금강
이가림 – 가을 강
이강하 -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 – 섬진강
이기홍 – 임진강의 봄 풍경
이기호 – 임진강의 여름 풍경
이외수 – 강이 흐르리
이원문 – 가을 강
이육사 – 강(江) 건너간 노래
이은봉 – 섬진강
이종화 – 겨울 강
이채 – 겨울 강
이학주 – 아, 낙동강
이해인 – 강(江)
이향아 – 가을 강물 소리는
이홍섭 – 강은 전생을 기억할까
임재화 – 가을 강
임채우 - 섬진강에서
장원경 – 강
장유정 – 겨울 강
장유정 – 낙동강아
장은수 - 섬진강에서
장은수 – 섬진강으로 흐른다
전병조 – 겨울 강가에서
정군수 – 겨울 강
정세일 – 겨울 강가에서 겨울바람을 잡으며
정옥령 – 한강
정진규 – 도강록(渡江錄)
정태춘 – 북한강에서
정호승 – 겨울 강
정호승 – 겨울 강에서
조경희 – 겨울 강
조명래 - 섬진강
조민희 – 강
조한직 – 강
차성우 – 남강 길
채병용 – 낙동강
최동호 – 젊은 날의 겨울 강
최영욱 – 섬진강 블루스
최원정 – 겨울 강
최정신 – 섬진강
최정희 – 가을 강
최홍윤 – 저무는 가을 강가에서
하영순 – 세월의 강
하재봉 – 겨울 강
한상숙 – 겨울 강
한이나 – 겨울 강
허만하 – 섬진강 물가에서
허형만 – 강물이 아름다운 건
홍경훈 – 강가에 서서
홍수희 – 섬진강 편지
홍윤표 – 겨울 강변
황인숙 – 강
섬진강변의 바위
강남주
무정하다
내가 나이 들어 왔는데도
무표정하다
멱감고 나서도
변하지 않는 몸
떠나지도
더 가까이 오지도 않는
담담한 시간
변절하고
속이는 세상에서
거짓처럼 이렇게 침묵하다니
아하, 물만 흐르고
진실이 또 속이는 것 같다
흐르지 못하는 강(江)
강남주
1
탄생이 몸을 틀 때
그것은 천 길 만 길 흙 속의 아우성이었다.
어둠을 헤치고 빛을 향해 치솟을 때
그것은 출렁거리는 환희였다.
싱싱한 약동이었다.
그 박력 산간을 돌아
드넓은 아래쪽으로 향할 때
그것은 푸름 가득 실어 생명 넘치는 노래였다.
산이며 들이며
천하의 넉넉함을 다스리는
희망이었다.
정갈한 미래였다.
우주 가득히 넉넉함 가꾸고자
천지의 정령(精靈) 손짓해 불렀다.
더불어 춤추며
축제로 흘러,
흘러내리는 내일이었다.
2
산을 구비 돌아
들판을 가로질러
유장하리니 산하의 앞길.
뜻밖에 가로질러
앞길 자르며 만나게 된 것들
반 자연의 제방 또 제방
인공의 제방.
3
부자유의 협수로(峽水路)에 끌려들어
쇠붙이 톱니바퀴에 나뒹굴었다.
염색에 탈색되며
또 다른 아우성
검은 얼굴에 상처가 흘렀다.
박력은 안개 되어 풀려난다.
풀이 죽는다.
때묻은 모래 위에 떠 흐르는
기인 행렬
오만(傲慢)의 과학 그리고 기술
그 방자한 유린에
패잔병의 모습 되어 노래가 없다.
노을 빛은 어쩌자고 저렇게 무섭나
흐린 별이 하나씩
연기에 질식되어 사라지고 있다.
세상은 적막으로 빠져들 차비를 한다.
무서움에 얼굴빛이 질리고 있다.
4
목이 콱콱 막힌다.
긴 터널 지나며
시궁창 땟국에 얼죽음이 된다.
자유에 도달하기 전
앞서 찾아온 사지마비.
육신은 갈대에 걸리고
안간힘 하며 붙들던 뿌리마저도
허연 이를 내보이며
페스트 환자의 얼굴이 된다.
흐르는 것은
불모의 노래
그마저 잃어버린
우리들 미래의 꿈의 뼈 부스러기
그 부스러기의 흐느적거리는 흐름.
5
하구언 안에서 허우적이며 맴돈다.
유치장에 갇혀
폐수 마시고 죽은
물의 영혼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라앉아 원혼으로 쌓인다.
맑은 물의 입자(粒子)가
모래처럼 불행으로 엉겨붙어
몸을 비튼다.
탄생이 아니라,
죽음과 마주한 단말마의 몸짓.
들던 머리 처박을 때
전신을 빠져나가 버리는
생명의 박력
6
수려강산(秀麗江山) 어디로 갔나
장강의 역사 어디서 멎었나
철새는 오지 않고
어부는 낚시를 포기하고 -
맥박이 정지된 강.
피돌림이 멎으면
심장이 선다.
섭리는 흐르는 것이거늘
그것이 우주의 질서였거늘
그릇 깨듯 질서까지 깨뜨리는 망치
흐르지 못하는 강이 되어
소우주의 행로를 부수고 있다.
큰 우주로 먼저 그 인체가 멎고 있다.
지혜여, 지혜여
흐르지 못하는 강을 보며
지혜여, 지혜여
뭘 해야 하느냐.
천하의 경서는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느냐
겨울 강
강만
따뜻한 등불 하나 없다
겨울의 복판에 누워버린 강
가슴의 빈 공간에서
한떼의 청둥오리들이 몰려가
강을 쫀다
으스러지는 적막 위에
강이 쏟아내는
허무의 피
세상이 하얗게 젖는다
이 캄캄한 우주의 한 끝에서
만 년이 걸려도 닿지 못할 저 끝으로
꽃잎처럼 떠
나는 걷는다
겨울 강
고영
얼음 거울 위에 앉아
겨울새들은 자꾸 무엇을 파는가
부리가 닳는 줄도 모르고
거울 속에 박힌
제 날개를 꺼내려 함인가
바닥에 가라앉은 그림자를 깨우기 위해
연신 얼음을 친다
정(釘)을 친다
쩡쩡
거울이 운다, 물이 운다
새들의 그림자를 안고 괴로워하는
겨울 강
겨울 강
고영민
강은 얼음을 지치던
아이 하나를 통째로 삼킨다
꼭 다문 잎
얼음은 장벽처럼 두껍다
되새김으로 깊어지는 강
강은 아직도 아이를 먹고 있나
다물고 있지만 속으로
달게 우물거린다
얼음 밑
아이 얼굴의 잉어
아이 얼굴의 가물치
아이 얼굴의 모래무지
아이 얼굴의 세(細)모래
강물, 강물
강
곽재구
내 가슴 속
건너고 싶은 강
하나 있었네
오랜 싸움과 정처없는
사랑의 탄식들을 데불고
인도 물소처럼 첨벙첨벙
그 강 건너고 싶었네
들찔레꽃 향기를 좇아서
작은 나룻배처럼 흐르고 싶었네
흐르다가 세상 밖, 어느 숲 모퉁이에
서러운 등불 하나 걸어두고 싶었네
겨울 강
곽효환
바람도 얼어붙은 날
눈 쌓인 계곡과 벌판을 흐르는
겨울 강의 수심을 알고 싶다
저 중심에도
겨우내 크고 작은 눈발 분분히 날리고
날 선 혹한도 수없이 다녀갔으리라
멀리 외등 아래 흔들리는 강촌 마을
깊고 푸른 침묵에 들고
흘러 더 푸른 겨울 강의 물빛
강가의 늙은 느티나무 앙상한 가지에 걸려
비로소 흐느껴 운다
저 산맥 너머 어디선가 발원하여
쉼 없이 솟아오르는 맑은 슬픔
차마 얼지 못하고 흐르는 겨울 강
오늘 밤, 그 깊은 수심과 몸을 섞고 싶다
강(江)
구상
9
붉은 산굽이를 감돌아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소슬한 산정(山頂) 옹달샘 속에
한 방울의 이슬이 지각(地殼)을 뚫은
그 순간을 생각는다네
푸른 들판을 휘돌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침내 다다른 망망대해(茫茫大海)
넘실 파도에 흘러들어
억겁(億劫)의 시간을 뒤치고 있을
그 모습을 생각는다네
내 앞을 유연(悠然)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증화(蒸化)를 거듭한 윤회(輪廻)의 강이
인업(因業)의 허물을 벗은 나와
현존(現存)으로 이곳에 다시 만날
그날을 생각는다네
10
저 산골짜기 이 산골짜기에다
육신(肉身)의 허물을 벗어
흙 한 줌으로 남겨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渴願)과 오열(嗚咽)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막내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서
또다시 내가 찬미(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16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生成)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60 - 그리스도 폴의 강(江)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 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 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강과의 대화
구연배
당신을 띄워놓고
강과 대화하고 있어요.
흘러 흘러 바다까지 가야겠다고
다짐 돌 놓고
사랑 실은 종이배를
척후선처럼 띄워 보내고 있어요.
오늘 밤 당신 꿈에
비밀리 정박할지도 모르겠네요.
강이 끝나면
우리의 바다가 시작되겠지요
겨울 강
구재기
강물은 겉으로
제 자리에 머물 뿐이다
강물은, 또, 속으로
제 흐름을 지킬 뿐이다
살아 있는 슬픔아
결코 아픔을 보이지 말라
강물은 제 자리에서 흘러
제 가슴에 고이게 할 뿐이어니
겨울 강
권경업
1
너의 얼굴에 눈물이 마르고
가을이 간다
인연의 마지막 숨들을 거두어
긴 겨울을 준비하는 들판.
내밀히 죽음의 싹들을 틔우고
지난여름은
언제나 격렬했다
폭양의 흔적들 희미해지며
무모했음. 허나
살았음을 일깨우고
심연으로 심연으로
옷을 벗는 겨울 강
왜 불안했던가
얼굴 시리게 바람은
미열 앓던 기억들만 거느리고
왜 나는
늘 배반을 예감했던가
사는 일은
꿈을 꾸는 일이라고
너는 왜 말했던가
들판과 발정난 도시(都市) 사이에서
끝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며
겨우 당도한 겨울 강
관절들만 낡아가고
내륙 깊숙이 안개만 깊어진다
2
네가 얼어붙은 것은
머무르고 싶어서가 아니다
흘러가기 싫어서도 아니다
그저, 출렁이고 흔들리는
자신이 싫어서다
때론, 소리 낮춰 울던
여울목의 그 쓰라림을
바닥까지 말갛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때문이다
강물은 혼자 있을 때만 언다.
3
얼음장에 묻은 가슴
쓰라린 기억으로 머무르지 마라
삶이란,
흔들리며 출렁이며 흘러가는 것
흘러가며 더러는 아파하는 것
새벽안개 피는 여울목, 때로는
소리 낮춰 울먹이기도 하는
우수(雨水)에 젖은 강이
언 몸을 깨트리며 간다
4
조개골
쌓인 눈 위로 오솔길 돋으면
흐르고, 흘러가고 싶다
아직은 시린 그대 품에
풍덩 뛰어들어 함께 가고 싶다
가다가 다리쉼 할 어느 강나루
꽃그늘 한가한 주막 평상
곡차 몇 사발 청하고
그대 잔에 복사꽃 띄워, 권커니 자커니
쉬 가는 봄날을 노래하리니
정처 없을 물길
나를 품고 가달라며 졸라대지만
일없다 휘휘 손 저어
붙잡고 부여잡는 산자락 뿌리치고
물굽이 돌아보는 것도 잠시
그대 해맑은 모습으로 떠나겠지만
5
그리움 흘러 흘러
강이 된다면
그 강 배 저어 다가가련만
흘러도 흘러도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기에
얼어붙은 제 몸에, 쩡쩡
칼금 그으며 저리도 운다
낙동강
권경업
핏재 아래 모여
태백 장성 옆으로 돌아
검게 검게
막장의 고난으로 흐르던 강
청량산 육육봉
강상(江上)에 띄워
당초밭 모서리 망연자실하던
우리 할머니 눈물
말없이 실어 갔던 강
병든 금호강
방직공 염색공의 가슴앓이 소리
강심(江心)에 가득 품고
현풍 남지 삼랑진 나루 돌아
끝내는 구포둑에서
사상공단 보성 벌교 가이내의
고무풀 같은 설움
한숨 속에 역류하던 강
내 숙부님들 통곡의 피 흐르던 강
이제는 사라진
을숙도 똥다리 아래
속 깊이 소리 없이 흐느끼어도
바다로 흐르지 못하는 강
* 핏재 : 태백산에서 강릉으로 가는 35번 국도가 지나는 백두대간의 고개. 낙동강의 발원지에 해당.
* 청량산 : 봉화와 안동의 경계에 위치한 산. 낙동강이 산자락을 지나간다
가을 강
권달웅
가을 강은 슬프네
사납게 위험수위를 알리다가
낮아진 가을 강은 고요하네
떠난 사람의 마음처럼
여기저기 단풍을 띄우며
꿈꾸는 가을 강은 쓸쓸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네
많은 사람들을 잃고
집과 논밭까지 잃어버린
상처와 공허를 이기기 위해
높게 쌓아올린 강둑에는
어느새 개망초가 피고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하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하는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강물 굽이굽이를
눈물 어린 눈으로 따라가면
도꼬마리 까만 열매가
악착같이 달라붙네
악착같이 따라오네
겨울, 섬진강
권수진
똑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소름이 이빨처럼 돋아나는
그대 눈물 속에 잠시 발을 담근 적 있다
꽁꽁 얼어붙은 강물은 차가웠다
태양 주변을 서성이듯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밤하늘의 별들이 서광처럼 빛났다
강은 깊을수록 말이 없고, 강의 가장자리
여울목만 세차게 울어 젖혔다
당신의 눈물에 더 이상 속지 않기로 다짐했다
다시 화창한 봄날을 펼쳐 놓고
말 못할 사연 지긋지긋할 정도로 썼다
건널 수 없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린 바람이 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꽃을 심어야 할 그 자리에 꽂은 칼은
선홍빛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아파도 모르는 척 무덤덤하게
강 건너 저편에 서 있는 그대를 바라보았다
도도한 강물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구름이 바람처럼 떠도는 이유를 잘 모른다
한때, 외투를 벗어도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
낙동강 연가
권순자
운하를 파서 너, 내 꿈 수몰시키려는 거지
밤마다 별 담고 흐르는 내 노래 빼앗으려는 거지
흘러 내 품에 고이 안기려는 계곡의 꿈 앗으려는 거지
황금맛에 눈도 귀도 노래져 이 청정 물도 노란 금으로 보이는 거지
흰 마음 열어 새들 앉히던 나무, 꺾이고 꺾여 푸르게 흔들던 손 사라지고
발목 꺾인 자리 나는 자꾸 가라앉고 바닥에 처박히는 산천어들
내 젖줄 물고 사는 물고기들 유영하다 아가미에 구름이 들지도 몰라
늪을 잃은 물새들 방황도 노을 속으로 묻혀가고
착한 사람들 정처 없이 기름처럼 운하를 따라 떠돌는지도 몰라
유람선이 뱉어내는 기름과 오수를 내가 견뎌낼 수 있을는지 몰라
내장이 오그라들고 빛도 닿지 않는 몸 깊숙이 울렁이는 구토증으로
밤마다 하얗게 혼절할지도 몰라 넋들이 수면에 풀어놓은 흔적이
천천히 비늘 벗고 하늘로 올라가는 어두운 밤, 산 넘고 넘어 수 백리 물길
고단하게 돌며 가슴팍 누르는 화물선 힘겹게 들어 올릴 수 있을는지 몰라
내가 이렇게 하소연해도
넌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지도 몰라
가을 강
권오범
시월의 소슬한 입김에
건강했던 초목들 병색이 완연하자
모두가 제 잘못인 양
밤새 자반뒤집기했나 보다
신열 같은 안개 속에서
머리 산발한 채 밤샘한 수양버들이
까칠해져 서성대는 강둑
코스모스꽃들도 더러 쑥대머리로 파마했다
햇귀 머금고 혈색이 돌자
철새들 앉을 자리 다림질하느라
굽이굽이 몸 추슬러
침묵으로 써내려 가는 저 너그러운 역사
낮에 온몸으로 끌어안은 미완성 수채화
얼룩이 더 번질까 봐 엎치락뒤치락
습관적인 밤 가슴앓이 눈치챈 듯
갈대들이 머리 풀고 오슬오슬 흐느끼고 있다
낙동강
권유경
낙동강은
자갈밭 코스모스 길 따라 사람들 사는 곳으로
전답을 키우며 살아 있는 것들의 목을 추기며
육백 리 노래 속을 만나고 합치면서 더 큰 그리움 속으로
다시 칠백 리를 구비 돌아 평화로운 흐름으로
오리 알 자라 알 붕어 알 가물치 알 종달새 알
은빛 모래 완만한 흐름의 마을과 마을
넘치고 때론 마르며 질퍽한 늪 만들며 구비 구비 갈대 키워 새떼 날던 하늘
저녁놀 그림자 따라가는 마을의 마음 그렇게 속으로도 흘렀다
돌다리 나무다리 나룻배 줄배 건넌 저쪽 마을 사과가 익어가도
지난날 미루나무 숲 치렁치렁 줄 서 있었다
도리원 탑리 화원을 고령교 지나 김해 을숙도를 거쳐 남해로 가는 동안 발목 빠지는 모래 구릉 노란 참외 무진장 땅콩밭 뚝 옆 억머구리 잡으러 배부른 배암이 자국 남기며 슬슬 기었다 억수로 비 내리는 강변엔 떠내려가는 걱정들로 범람하고 불어나는 걱정이 희망처럼 줄기찼다 논둑과 논둑 건너뛰는 잉어 떼 손으로 잡지 못해 뜰채로 기다리다 끝내 발바닥 밟히는 붕어 새끼의 매끄러운 감촉만 느끼곤 했다
세월 따라 아이들 크고 떠나도 늙어서 산 속 집으로 가기까지는 부모님전 상서 끝 이만 총총 편지를 받는 낮은 언덕 가득한 들국화가 누님 마음 같았던 그런 기슭 적셔 돌아 내려오며 길게 불빛 어리는 저녁 물길 바뀐 벼랑 밑 늪엔 불만 덩어리 같은 이무기 밤새 울었다 아직도 용이 못 된 이무기는 어릴 적 꿈을 물고 놓아주질 않는다 세월 흐르고
낙동강 천삼백 리 세월의 꿈 도처에 널려진 오리알
새로 생긴 콘크리트 다리 밑으로 물 말라 그리움도 덩달아 말라붙었다
미군이 노을 쪽으로 산탄총을 쏘아도 까맣게 돌아오던 철새 떼 갈대밭 위로 뭉게구름 키우던 하늘은…… 돌아올 철새 떼 기다린다 낙동강은 좁아진 강폭 흐름 낮고 얕은 물 위에도 구름 띄운다
2
낙동강 흘러 바다와 만나는 을숙도 부근 강물 빛 보았습니까
공중의 그 많은 철새 떼 보았습니까
바다와 만나는 마감의 지점에서 드디어 강은 안도했을까요
강은 바다 품에 안긴 것일까요
바다는 강을 끌어안아 주었을까요
목 놓아 울어버리지나 않았을까요
아우라지
김경주
강은 마른 먹처럼 얼어 있습니다
갈대가 쏟는 그늘들이 바람에 옮겨붙어 사방이 어두워져 갑니다 물이 밖으로 내놓는 그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또한 저녁입니다 그런 저녁을 견뎌야 한다면 나는 몇 번의 겨울을 밀물로 보낸 뗏목의 눈으로 강물 속에 두 손을 담그고 앉아 있겠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밤이면 빛은 얼마나 먼 별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인가요
그런 밤이면 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잠든 새들은 검은 이를 갈고 오랜 비행을 마친 인간은 깨어나 조용히 기체(機體)를 떨고 있습니다
별 속의 가장 깊은 시간을 데리고 날아와 빛은 사람의 눈에 물듭니다 그 빛이 내 눈까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음악의 생은 또한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 가요 외로운 사람은 눈을 감고 걷고, 눈이 외로운 사람은 강물에 그 눈의 음音을 숨겨야 하는 밤입니다
멀리 산중의 나무에 붙은 백색의 얼음들이 외성처럼 천천히 빛을 뿜습니다 그러나 오래전 불빛에 등을 돌려버린 짐승들은 바람이 얼어붙은 눈으로 내 이쪽에서 저쪽까지 울고 지금 나에게 참여하는 영혼은 물밑의 어두운 돌들을 나르는 강물, 당신의 눈을 나르던 수많은 밤입니다
바람에 어두운 물소리가 실려 옵니다 바람 속으로 물속의 어둠이 번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바람 속엔 누군가 묽은 얼굴을 하고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가을 강
김근이
아이야
가을이 한끝 짙어 가는 구나
이 가을을 바라 볼 때는
마음 가득히
그리움을 깔고 그려 보아라
그러면 가을은
외진 길에서 만나는
코스모스 꽃잎만큼 이나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 올 것이다
저녘 햇살에
익어가는 당풍 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호들갑을 떨면서 날리는
하늘 자락은
왜 저리도 슬픈 색깔일까
저 하늘 끝자락을 잡고
돌아가던
소녀의 뒷모습을
코스모스 꽃잎위에 내려놓는
이가을은
아무래도
우리네 마음속으로
흘러드는 강물인가
그 강물을 따라
나는 지금도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구나
섬진강 대전댁
김낙필
섬진강 장돌뱅이 최아무개가
세상을 버렸다
강은 말없이 흐르고
대전댁은 혼자 울었다
외로운 사람끼리
하동읍에서 만나
하동구례 화계장터 노래방에서
챔버린을 흔들고
청학동 대숲 바람소리처럼
사랑하다 헤어졌다
최아무개는
벽제 승화원에서 한줌 재가되고
하동포구 흘러드는 물가로
영영 돌아가질 못했다
대전댁은 섬진강가에서
삼박사일을 목 놓아 울고
최아무개 육신은 93분 만에 영혼마저 태우고
벽제 화장터 높은 굴뚝 위로
연기되어 날아갔다
피붙이 살붙이에 버림받은 영혼
지금쯤 섬진강가 대전댁 곁에
서성거릴께다
먹점골 매실농장 토방에서
재첩국 끓이며 쏟아지는 별을 줍다가
아라리난장 장똘뱅이가 소원이라던
최아무개와 대전댁
외로운 영혼들
더 이상 아프지 말기를
소원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아 그렇게 가는거야
먼저 가는 이 남은 이가 태워주고
남은 이 또 그렇게 먼지 되고
가는 이는 가고 남은 이는 잊고
섬진강은 말없이 흐르고
지금은
대전댁 혼자
슬프고 외롭게 울고
겨울 강
김남조
겨울 강은 결빙으로
가슴 닫은 지 오래,
강면엔 얼음이불이
이음새 없이 한 자락으로 덮이고
누군가
빙설의 전 중량을
어깨에 둘러멘 분
숨어 계시어
강산 아픈 곳에
진맥의 손을 얹으심을
정녕
누구신가 누구신가
깊이 심장을 감추셔도
그분 인기척 알듯싶어
밤에도 잠자지 않으시는
초능력의 깊은 사랑
알 듯만 싶어
하여
그 앞에 굴복하여
평생의 어른으로 섬기고 싶은
신비한 그분의
표현 못할 인기척을
나는 역력히
알 듯만 싶어
가을 강가에서
김덕성
불어오는 갈바람에
낙엽이 휘날리며 떠나는 강가
갑자기 울적해 진다
조금도 머물러 주지 않고
야속하게 시공은 아쉬움 남기며
강물은 희비를 안은 채
물 길 따라 흘러간다
행복한 순간들
슬픔으로 눈물을 흘린 사연들
가슴 아파했던 나날들을
새 물길로 보낸 사랑
모난 돌에 부딪혀
모래알이 된 지난 수많은 시간
지금 그리움으로 찾아 온 사랑도
인생의 강물 되어 흘러가고
하늘엔 노을이 내리고
가을 강(江)
김명인
살아서 마주 보는 일조차 부끄러워도 이 시절
저 불같은 여름을 걷어 서늘한 사랑으로
가을 강물 되어 소리죽여 흐르기로 하자
지나온 곳 아직도 천둥 치는 벌판 속 서서 우는 꽃
달빛 난장(亂杖) 산굽이 돌아 저기 저 벼랑
폭포 지며 부서지는 우레 소리 들린다
없는 사람 죽어서 불 밝힌 형형한 하늘 아래로
흘러가면 그 별빛에도 오래 젖게 되나니
살아서 마주잡는 손 떨려도 이 가을
끊을 수 없는 강물 하나로 흐르기로 하자
더욱 모진 날 온다 해도
겨울 강
김민홍
이젠 떠나야 하리
바람 불 때마다
뼈만 남아 잠시
흔들리는 겨울 강
묵묵히,
묵묵함도 버리고
어둡게 파묻던
네 얼굴도 버리고
내가 껴안은
시간의 고리들도 풀고
드디어 돌아갈 길마저 지우고
고립되어야 하리
겨울 강
김선아
거두절미의 자세가 저것일까. 세상사 밑바닥 혼자 견디는 겨울 강을, 꽝꽝 얼어 혹독한 빙판에 이마 도장 무릎 도장 새겨넣듯 오직 한 가지 자세로 드문드문 놓아준 억새 방석마저 밀쳐놓고, 천만 개의 손으로 잔등을 엎어주려 다가서는 함박눈마저 거절하고, 삶의 급물살에서 빠져나와 숨소리도 납작 엎드린 겨울 강을, 어서 몸 일으키라고 잡아끄는 북풍의 가슴 깃도 끝끝내 털어내는 저 겨울 강의 시린 어깨를, 본다. 따순 물 한 숟갈 떠 넣어주려 무릎 세우다 어둠 속에 주저앉는 저녁노을의 눈꼬리도 가만가만, 눈물 마를 때까지 본다
겨울 강에서
김선태
1
소리가 죽고 있었다
소리가 죽어
거스름 없는 강물로 흐르고 있었다
꿈도 얼어붙고 있었다
꿈도 얼어붙어
깊이 모를 바닥에 잠들고 있었다
그러나,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린 겨울의
어제 그리고 오늘의 한복판을
강물은 엎드려 숨쉬는 침묵이었다
강물은 길게 누워 뒤척이는 아픔이었다
2
하류로 흐르는 물위에 캄캄한 하늘
이름 모를 풀잎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몸져누운 강의 하류를 다독이며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따라와 하얗게 부서지던 진실이 있었다
강 기슭엔 아직 버릴 수 없는 꿈들이
어깨동무하며 뛰놀고 있었다
일어서면 넘어지는 절망과
넘어지면 다시 겨운 허리를 펴는 어깨 위
무수히 쌓이는 비명이 있었다
3
어두워 가는 저녁 강물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쓰다 버린 말들이 하얗게 빠져 죽고 있었다
낮게 엎드린 강 건너 마을의 불빛들이
제각기 물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강어귀로 숨죽여 건너오고 있었다
무서운 공허로 출렁이는 갈대밭을 헤치며
쓸쓸한 노래를 부르는 바람 소리
오랜 상처의 세월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밤 깊어 눈발은 더욱 거칠어지고
어디선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이따금씩
이를 악문 얼음장들이 깨어지는 소릴
강둑에 마른 풀잎들이
일제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4
슬픔이 밀려와
또 다른 슬픔과 만나 수런대는 하류의 다리 아래
핏줄이 하나이듯
하나의 슬픔을 이루어 흘러갈 수 없을까
상류와 하류가 만나지 못하는 강
미움이 미움으로 되돌아 강둑에 부서지고
사랑이 사랑으로 얼싸안고 출렁이지 못하는 저
겨울 강의 캄캄한 자유와 사랑
그러나 손을 내밀어 강심을 더듬어 보면
돌연 내성(內省)의 깊이로 눈 떠 있는 강
하여, 나는 볼 것이다
거대한 슬픔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오늘도 숨죽이며 흐르는 저 겨울 강이
봄이 오면 어떤 모습으로 넘쳐흐르는가를
넘쳐흘러 결빙의 대지를 적시는가를
겨울 강
김세영
강물은 속으로 흐른다
무성하게 출렁이는
바람의 치마 밑으로
때로는 춤추며
달려가던 날들을 기억하면서
앙상하게 얼어붙은
바람의 고샅 밑으로
때로는 포복하며
웅크리고 걸어가면서
등허리의 긴 상처를
달빛으로 꿰맬 때만
살얼음 덮인 알몸을 보일뿐
얼음 비늘의 황톳빛 잉어들이
바다의 도마 위에 지친 몸을 누이고
파도의 칼날이 잘게 다져서
바닷물 속으로 녹아들 때까지
낙동강
김시종
낙동강이 몸살을 앓고 있다.
국민 소득을 100$를 10000$로 뻥튀기 하느라,
과로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국민 소득에 동그라미가 불어나도,
강(江)의 행복은 증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던 지난날엔
강이 살아 있었지만,
요사이 비만증으로 강이 죽어가고 있다
지난날 가멸하던 어족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흡혈귀, 거머리 딸 들이 우글거린다
빈사의 강은 활로를 찾아,
오늘도 힘겹게 흐르고 있다
강을 되살릴 메시아는 없는가?
답답한 마음에 강은 되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흐른다
그리움의 강(江)
김양수
생각을 곱씹다가 움켜쥔 사진 한 장
은밀한 눈빛이 노을로 타오를 때
회한은 가슴을 적시며 시나브로 울먹인다.
겨울밤에 부엉이의 자지러진 울음이
달빛에서 뽑아낸 새하얀 말씀으로
가지 끝 닿지 않는 곳에 살포시 걸려 있다.
별빛이 날[刀]을 세우고 가슴을 후벼 파면
그 깊이 넓이만큼 그리움은 강이 되어
그 사람 살가운 눈빛이 아스라이 출렁인다.
시(詩) 한 편 사랑 절절 조용히 읊조리며
발끝으로 올라서서 무게를 달아보니
사랑해 눈금이 말을 하네 그대 향한 노래여
가슴에 흐르는 강
김영주
흐르는 긴 시간에서도
떠올리며
목매게 부르고 싶은
너의 이름 하나
편지를 보내려고 하니
많은 사연도
그 시절은 어려워
전해줄 길이 없었지
세월이 흐르며
가슴으로 점점
부르는 사연은
눈에 고이는 눈물뿐이었지
흐르는 강 바라보며
하늘 아래 떠오르는
너의 생각은
가슴으로 흘러갔나 봐
이제라도 찾아
소식을 전하려 해도
너의 아픔이 될까
그 사연은 가슴으로 흐르지
그 강에 가고 싶다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말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섬진강
김용택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개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2
저렇게도 불빛들이 살아나는구나
생솔 연기 눈물 글썽이며
검은 치마폭 같은 산자락에
몇 가옥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불빛은 살아나며
산은 눈뜨는구나
어둘수록 눈 비벼 부릅뜬 눈빛만 남아
섬진강물 위에 불송이로 뜨는구나
밤마다 산은 어둠을 베어 내리고
누이는 매운 눈 비벼 불빛 살려내며
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은
강물에 가져다 버린다.
누이야 시린 물소리는 더욱 시리게
아침이 올 때까지
너의 허리에 두껍게 감기는구나.
이른 아침 어느새
너는 물동이로 얼음을 깨고
물을 퍼오는구나
아무도 모르게
하나 남은 불송이를
물동이에 띄우고
하얀 서릿발을 밟으며
너는 강물을 길어오는구나
참으로 그날이 와
우리 다 모여 굴뚝마다 연기 나고
첫날밤 불을 끌 때까지는,
스스로 허리띠를 풀 때까지는
너의 싸움은, 너의 정절은
임을 향해 굳구나
3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 깊이 잦아드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익어 정들었으리.
더 키워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섬진강의 봄 - 봄풀
김용택
섬진강이 흐르는 앞산 뒷산 계곡 사이에 안개가 가득 피어났다
안개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키가 커 보이고 산들은 우람하게 솟아 있다
점심 때쯤 안개가 활짝 개고 햇살이 곱게 쏟아진다
어떤 아이들은 운동장 가득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 속에 앉아 놀고
어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함을 지른다
아이들의 고함 소리는 날아 오르는 새처럼 하늘로 치솟는다
산천엔 봄빛이 완연하다
강 건너 마을 뒷산 여기저기 밭에 흙들이 있는 힘을 다해 봄볕을 받아 빛이 난다
환한 밭에 검은 거름이 드문드문 놓여 있다
먼 데서 보는 저 거름더미는 이 봄날 얼마나 정다운가
학교 뒤에 농부 할아버지가 밭에 나와 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신다
포슬포슬한 밭 흙이 농부의 투박한 발길에 차여 먼지가 풀풀 날린다
먼지들이 햇살 속에 희뿌연하다
밭 두렁에 풀들이 푸른빛으로 빛난다
햇볕 속에서 자기 색을 찾아가는 풀들이 나날이 다르다
운동장을 걸어가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인다
학교 옆 마을에 사시는 저 할머니 농부 부부가 운동장을 왔다 갔다 하면 봄이다
농부 할아버지는 이제 가을 끝까지 굽은 등에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집으로 밭으로 오가실 것이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서너 번은 오가신다
햇살이 너무 좋아 밖으로 나간다
운동장을 이리저리 걸어다닌다
냉기가 가신 보드라운 흙의 촉감이 찌르르 전신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햇살이 등에 따사롭다. 햇살을 한 짐 짊어진다
나도 나무들처럼 물이 올랐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푸르러져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떤 곳을 건드려
탱탱한 꽃망울이 부풀고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났으면 좋겠다
화단 여기저기에 이름만 들어도 다정한
꽃다지, 광대살이, 냉이, 원추리, 머위, 제비꽃, 양지꽃, 돌나물,
꽃마리, 토끼풀, 봄맞이, 미나리, 쑥들이 수없이 돋아난다
작년 풀은 노랗게 죽고 새 풀은 파랗다
낙동강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칠백 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너 함께 길이길이 살 약속을
오목조목 산비탈에 깃발처럼 세웠다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 요람이었더냐
너는 얼마나 그리운 자장가였더냐
앞집 영이와 풀싸움하던 그 언덕에는
언제나 우리들의 끔을 재우던
황혼의 보금자리가 비좁게 따뜻하였고
툇마루처럼 올라다니던
동리 어구 - 전설의 할무니
세 아람이나 되는 은행나무엔
우리들의 콧물이 마를 사이도 없었다
형산강 연가
김정택
노을 진 강물결은 고요로
다가오고
스잔한 바람결에 금계국
수를 놓아
임 향한 발자국마다 그리움만
사무치네
풍우에 다칠세라 곱게도
품은 연정
검푸른 강물 위에 깊은 정
띄워놓고
보고 또 뒤돌아봐도 임 모습은
간 곳 없네
왜가리 떠난 자리 적막이
찾아들면
황량한 갈대숲에 물새 울음
구슬퍼라
옥녀봉 석양을 잡고 임 소식을
물어본다
용광로 높은 굴뚝 영일만
불 밝히고
불타는 쇳물 속에 청춘도
녹았구나
열정적 삶의 이야기 형산강아
알고 있나
촉석루 남강 속으로 간다
김정호
봄비 갠 퇴근길
촉석루 돌담 위에 넋을 두고 앉아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본다
때마침 강을 맨발로 건너는 소소리바람
엇박자로 환을 치다
비명으로 되돌아 나오고
천수교 위 자동차 불빛
가오리연 되어 공중제비 하다
예민한 촉수 되어 강물을 더듬는다
성문 안 왕벚나무 아래 연인
그대 만난 설레임으로
가로등 불빛 등 뒤에 가두고
서로의 뿌리를 찾아 나선다
그 모습 여러워 얼굴 붉어진 촉석루
빛바랜 수채화처럼 흐느적거리며
남강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후, 사방은 고요다
겨울 강
김지헌
눈앞이 흐려지고
병든 아버지의 육신이
묘지 뒤로 사라진다
말없이 다가와
침묵으로 사라진
아버지의 옷자락
겨울 강은
여위어 반쪽이 된
그 분 모습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절절한 그리움
겨울 강의 나
김찬일
겨울로 가는 그 강가 걸어갔을 때
물새 울음에 섞인 내 생애 지난날
겨울강으로 흘러가는 것이
눈에 보였네
목말랐던 사랑도 갈꽃처럼 하얗게
흔들리던 꿈도
강 안개였음을 그 날 알았네
십리 갈밭에 서서 보면
멀리 저 멀리 걸어 온 길들이
노을에 물들어 지워지고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강물 소리에 젖어 겨울 강으로
흘러가는 나를 보았네
낙동강(洛東江)
김찬일
우거진 갈잎 긴 바람에 서걱이는
사문진 나루 낙동강 초여름
들풀 아름다운 둑방길 텃밭에
열무꽃 만발하였다
다리 밑 강물 흐르는 낮은 소리
어머니, 저 소리가 무서워요
저를 등에 업고 잠재우려고
어비야 어비야 하던 어머니 사랑이
쉬지 않고 흐르는
저 강물 소리가 무서워요
모래톱 사이에서 먹이 뒤적이던
쇠백로도 날아오르고
강변에 무성한 강아지풀 한 줌 뜯어
저 가슴에 심어놓고
강물 따라 흘러가신 어머니
어비야 하며 흐르는
저 낙동강은
어머니의 강
겨울 강
김희경
쉽게 무너질 수는 없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져도 좋았을 친구여
칼바람에 빛나던 자존
그건 성역이었다
너의 비명은 내 뼈마디를 흔들고
너의 눈물은 내 살을 적신다
언제까지나 꿈쩍 않으리라던
예감은 빗나갔다
어쩌면 예고된 불청객의 방문을
그처럼 쉽사리 맞아들릴 줄 알았더면
애초에 널 사랑하지도 않았으리
너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않았으리
그러나 이제
헐거워진 몸 추스리며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까닭을
너는 밝혀야 하리 분명히
겨울 강 두물머리
나상국
한 무리의 행락객 철새 떼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발자국마저도 휑한 두물머리
사백 년의 나이에도
거칠게 불타오른 느티나무의 열정
한 잎 나뭇잎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모로 두러 누운 색바랜 풀들이
너을 너을 춤추던 쓸쓸한 강둑
강한 비바람이 몰려왔다가
스스로 몸을 낮추어
한 바퀴 돌아보고
에둘러 떠나간 두물머리
노만 덩그러니 남겨진 배 한 척
사공 잃은 황포돛배
새벽 안개에 갇혀
쨍쨍 강 울음소리에
머리채를 낚아채인 듯
무릎 꿇는다
금강산 골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북한강
태백산 검룡소를 힘차게 박차고 발원한 남한강
처녀 총각 만나듯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깊은 포옹으로 한 몸이 되어 흐른다
가을 강
노금선
조약돌 투명한 가을 강에
나를 씻는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영혼의 때 씻어버리면
물보다 더 맑은 세상 보이고
풀빛 기쁨 넘친다
겸손치 못하고
절제하지 못한 채 살아온
오만과 방종 다 씻어내고
텅 비어 더 없이 깨끗한
가을 강
내 영혼 어디쯤에도
이렇게 맑은 강 흐르고 있을까
겨울 강
도종환
얼어붙은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얼음 속에 갇힌 빈 배같은 그대를 남겨 두고
나는 아직 살아 있어서 굽이굽이 강길을 걷는다
그대와 함께 걷던 이 길이 언제 끝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어
새벽의 바다에 이르렀음을 끝까지 믿기로 한다
내가 이 길에서 끝내 쓰러진 뒤에라도
얼음이 풀리면 그대 빈 배만으로도 내게 와다오
햇살같은 넋 하나 남겼다 그대 뱃전을 붙들고 가거나
언 눈물 몇 올 강가에 두었다 그대 물살과 함께 가리라
겨울에 우는 강
도지현
어쩜 내 마음과 저리 같을까
용광로를 들이 대도
절대로 녹지 않을
내 가슴과 꼭 닮아 애달프다
얼음 아래서 쩡쩡하고 울리는
강이 통곡하는 소리
저 세상 가신 울엄마
하관할 때 내가 저리 울었지
얼음에 얼비치는 잿빛 하늘
흐린 내 눈빛과 같아
차마 돌아서지 못하고
저문 강가에서 서성인다
서성이던 발길 멈춘 곳에
누군가가 매어 놓은 조각배 한 척
그대로 얼어 붙어 있어
오갈데 없이 외로운 나와 같은데
겨울 강(江)
류철
그리움 흘러 흘러
강이 된다면
그 강 배 저어 다가가련만
흘러도 흘러도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기에
얼어붙은 제 몸에, 쩡쩡
칼금 그으며 저리도 운다
울음을 목구멍으로 자꾸만 삼키다
내 가슴에 큰 강이 생겼다
우화(寓話)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그런 날은
문성해
한솥밥을 오래 먹다 보니
강을 따라 억새 잎들이 물결을 닮아간다
버드나무 줄기도 물결처럼 휘늘어질 때가 많다
억센 짐승의 갈기들이 사납게 흩날리는 날
강물도 저녁을 굶은 짐승처럼 크르릉거리고
그런 날은
버드나무 줄기들도 어여 가자 가자며 제 몸에다 힘껏 채찍질을
해댄다
그런 날은
어느새 물결 위에 크고 작은 산맥들이 솟고
산맥을 넘는 말발굽 소리가 허공을 울리는 것도 같다
그런 날은
어느 결엔가 강물이 물 뿌리까지 벌떡 일어나
물결을 닮은 이웃들을 다 데리고
성큼성큼 살아서는 당도할 수 없는 곳으로 갈 것 같아서
나는 강물 속에서 죽은 아이들을 다 보는 것처럼 무서워진다
태양이 사막 위에 살갗을 새겨놓듯
난생처음 물결 위에 밀리는 바람의 얼굴을 보는
그런 날은
천기를 엿본 듯 막막하게 두려워진다
그런 산맥들을 묻고 강물이 벽처럼 밋밋하게 흐르는 새벽
억새들도 미친 춤을 허리춤에 묻고 잠잠하고
세월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죽은 붕어의 가슴살 같은 것들을
묻고
담담하게 흐르는 강의 주름들이
어느새 내 이마에도 흐르기 시작했으니
나도 어느결에 벌써 흘려보내고도 찾지 않은 것투성이니
그 사실을 주저리주저리 엮지 않는 것도 강물을 닮아가는 길이니
비탄(悲嘆)의 강
문재학
감미로운 분홍빛 수(繡)를 놓던
보석 같은 청춘의 봄날은
꿈인 양 아득히 흘러가고
슬픈 운명에 무너진 사랑
쓰라린 이별
비탄의 강을 건너간
애틋한 임의 그림자만
무정세월 속에 떠가네.
속삭이는 밤바람이 유혹하는
어둠의 장막에
아른아른
고운 님 하얀 미소의 향기가
그리움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운 그 시절 그 행복이
가슴앓이가 되어
애달픈 비탄의 강을
하염없이 휩싸고 도네
겨울 강에서
문태준
슬픔은 슬픔이어도 강 어부가 얼음낚시를 하려 얼음에 뚫어놓은 모란꽃만 한 구멍 같았으면 그대 가슴속에도 몸이 투명한 빙어 떼가 노는가
얼음 구멍 아래
치마 한감 거리 빛 속
반짝이는 빛이었구나 빛의 한 마리 몸이었구나,
찬 없는 밥을 삼키던 누이는
머릿수건 올려 찬물 한 동일 이고 돌아오던 키 작은 내 누이는
겨울 강에서
민영
찬바람이 불어도 아이들은
강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
부모는 오래전에 집을 떠났고
아이들은 조부모와 함께 산다
할아버지는 길에서 휴지를 줍고
할머니는 가게 앞에 놓인 박스를 주워
고물상에 갖다주고 쌀을 산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도
아이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따금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얘들아, 뭘 하고 있니, 집에 안 가고?
소리치지만 아이들은 유리창에 불 켜진
아파트만 멍하니 바라보며
집으로 갈 엄두를 내지 않는다
누가 저 아이들을 돌려보낼 수 있겠느냐
눅눅하고 쓸쓸한 지하 단칸 셋방에
지켜보던 나그네 마음이 심란하기만 하다
봄이 흐르는 강
박광호
산정(山頂)에 올라 남한강 굽어보니
옥색 비단 구비 구비 펼쳐 놓은 위로
구름꽃 유유히 흐르고
봄은 일러 머-언 발치 소백산은
하얀 고깔을 쓰고 장삼 자락 휘날리듯
줄기줄기 봄 춤을 춘다
강여울엔 춘광이 현란하고
굽이도는 물줄기 따라
뗏목꾼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강벽에 메아리쳐오는 듯
그 세월 얼마인가
강은 무심하되
바라보는 이내 가슴 속엔
추억어린 유년의 강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남강
박두열
지리산 골짜기 서러움 토해내
진양호 품속에 고요히 잠을 자다
배 건너 대나무 숲 진주성 촉석루
이천 년 쌓인 설움 살풀이로 풀어낸다
한 평 남짓 위암(危巖) 바위 사공 따라 건너가서
가련한 몸 곧추세워 왜장 몸 깍지 끼고
꽃신 먼저 띄워놓고 뒤따라 뛰어드니
소스란히 놀란 왜군 주인 잃은 개꼴이라
깎아놓은 절벽 아래 뒤벼리 험한 물길
상평벌 목화밭에 비단길 깔아놓고
진주교 교각마다 논개 반지 걸려있어
의암(義巖)바위 세월 속에 사공 없이 건너가네
강(江)
박두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갯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 떠내려 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눌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쭉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핏무늬길 바다로 간다
* 유유: 다 잡아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냄.
* 수장: 시체를 물 속에 장사함.
* 얼룽대는: 같거나 다른 빛깔로 된 줄이나 점이 규칙적으로 무늬져 얼른거리다.
* 울대(뼈) : 조류의 발성 기관, 울타리를 만드는 데 세우는 기둥 같은 대
팔월의 강
박두진
8월의 강이 손뼉 친다. 8월의 강이 몸부림친다
8월의 강이 고민한다
8월의 강이 침잠한다
강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흘림을, 죽음들을
기억한다
어제의 분노와, 비원과, 배반을 가슴 지닌
배암과 이리의
갈라진 혓바닥과 피 묻은 이빨들을 기억한다
강은 저 은하계 찬란한 태양계의
아득한 이데아를
황금빛 승화를 기억한다
그 승리를, 도달을, 모두의 성취를 위하여
어제를 오늘에게, 오늘을 내일에게 위탁한다
강은 8월의 강은 유유하고 왕성하다.
늠름하게 의지한다. 손뼉을 치며 깃발을 날리며, 오직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한다
섬진강
박상희
지리산 남부
협곡으로 지나
경남 전남 경계를 이루며
너 혼자 넉넉히
광양만으로 흐르니
반쯤 속살 드러낸 강모래는
여인의 살결 같이 곱구나
은빛 유유한 너에게
어느새 마음을 다 던지고
이화에 순백한 환호 받으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도
너 날 밀어내지 않으니
어느새 일몰 물에 비춰
숨긴 마음만 바쁘구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겄네
낙동강
박태강
태초로 부터
수많은 삶의 애환을 간직하고
말없이 흐르는
민족의 대동맥 낙동강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역사를
몸으로 안으며
정좌한 영원한 젖줄 낙동강
반도의 남북으로
봄 갈 여름 겨울
한결같이 민족의 가슴에
아름을 제공하는 너
더 큰 발걸음
더 큰 포부로 다시 움직여
우리 삶의
진정한 동반자로 다시 오리라
겨울, 동강
서원동
문산나루 질퍽한 삼들
어라연 휘돌아 돌며 숨차 헐떡거리다
얼음짱 되어 문득 발걸음 멈춰 선곳
겨울 동강은
지친 몸 기대 술 곳초차 없이
삭막하다
산잠승들 뛰놀던 협곡 사이로
자갈톱 스쳐온 찬바람만
길게 한숨소리 내뿜고 있다
아무도 없다
앙상하고 고즈넉하다
응고된 피딱지인 듯
여기저기 나뒹구는 녹슨 깡통들
넝마 되어 펄럭대는 폐비닐 조각들
우리 모두의 마음 속
숨겨진 상처 마냥 한없이 삐걱거릴 뿐
겨울 동강은
이빨 빠진 늙은이가 뜯어먹다 남긴
풀빵처럼 곳곳에서 찐득거린다
강이 날아 오른다
손택수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이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돌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이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 떼가 강을 들어 올린다 천 마리 만 마리 천리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섬진강가에서
송정숙
그리워하면
그대 맘에 닿을까마는
어둔 밤도 붙잡고 마는 그대 숨결
역으로 달려 나가 첫차를 타고
그리운 마음 풀어 매화꽃 피우다
강(江)
신경림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섬진강에 말을 묻다*
신용목
찔레 가시에 찔려도 찔레꽃 한 송이 피지 않는다
몸은 묵은장을 가둔 단지처럼
오래 마음을 가두어 강 앞에 서게 한다
흐르지 마라
해가 저문다
석양이 유약을 발라 금빛 강물에 마음을 굽는다
던져진 어둠 한 단에 손을 묶여
뒷걸음질 호송되는 산과 나무들
멀쩡히 멎은 몸은 금 간 흐름이었다
물 건너 찔레꽃 하얀 꽃잎이 소복처럼 저녁을 다 울어도
목쉰 줄배 한 척 띄우지 못한다
*녀석의 뼈를 가루약처럼 흐름에 풀어버렸던 날. 우리는 가까운 밥집에 들어 고봉밥을 폈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가에서
안영준
흰 분 칠한 구름이
해님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하트를 그리면서
덩실덩실 더덩실
둥실둥실 두둥실
강강술래 한다
더위에 지쳤는지
어느새 내려와
강물에 몸 담그니
누워있던 강물이
벌떡 일어나
큰기침 한 번 한다
목욕하던 구름은
크게 놀라서
한숨 몰아쉬는데
도망치듯 쫓겨온
해님도 기겁하고
구름 등에 올라타고
비호같이 하늘 오른다
강(江)
안태현
강은 흐른다
흐름에 메임이 있고
메임에 춤을 춘다
시뻘건 혀를 낼름이는
악귀(惡鬼)의 존재(存在)로서
삼켜버린 구름의 나열(羅列)들
나열(羅列)들의 속삭임
푸른 그윽한 논리(論理)로
별을 헤아리던 그 추억(追億)의 옛일
옛일은 다시 귀환(歸還)하여
검은 두터운 옷을 입고
주렁주렁 걸어 놓은 눈들의 숫자를 센다
휘몰아치는 숨 가뿐 시간의 촉각(觸覺)
벌름벌름 입 맛을 다시는 악귀(惡鬼)의 춤을
숨 가쁘게 먹어 대고
밤의 그저 그 자리에서
동그란 얼굴을 드리우고
착각(錯覺)인지 모를
구름 자리로 돌아간다
저벅저벅
문, 앞에서 기다리는
얼굴들을 찾아 문을 나서는
외로운 그림자에 섞여
분사(噴射)하는 광채(光彩)에 눈이 부시다
아아, 광영(光榮)이여
굽이굽이 흐르는 굴곡(屈曲)의 애환(哀歡)이여
또, 꿈의 모습이여
무지개 훨훨 날아
꽃, 피움에 자리에 멈춰 설 때
별은 가슴, 가슴을 찾아
외로운 불빛 찾아
기원(祈願)을 내밀고
천사의 고운 춤에 푸른 노을 고개 숙이메
노래는 바람 따라 아우라 깊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환호성(歡呼聲)
회한(悔恨)이여
흐르는 고혹(蠱惑)한 눈물자리여
별은
지금도 꿈속이다
고요 속에 웅얼거리며
한층 다가선
강은, 포용(包容) 된
회유(誨諭)에 자리에서 포효(咆哮)한다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여림
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강기슭에서 등을 말리는 오래된 폐선과
담장이 허물어져 내린 민박집들 사이로
하모니카 같은 기차가 젊은 날의 유적들처럼
비음 섞인 기적을 울리며 지나는 새벽
나는 한 떼의 눈발을 이끌고 강가로 나가
깊은 강심으로 소주 몇 잔을 떨구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섬세한 강의 뿌리
이 세상 뿌리 없는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물 위를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보았다
따뜻하게 안겨오는 강의 온기 속으로
수척한 물결은 저를 깨우며 또 흐르고
손바닥을 적시고 가는 투명한 강의 수화,
너도...... 살고 싶은 게로구나
깃털에 쌓인 눈발을 털어내며 물결 위로 초승달
보다 더 얇게 물수제비 뜨며 달려나가는 철새들
어둠 속에서 알처럼 둥근 해를 부화시키고 있었다
겨울 강
오탁번
겨울 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매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섬진강에 연어들이 돌아왔다
우원호
수십 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남해안의 연어들이
섬진강에 돌아왔다
선사시대(先史時代) 이전부터
섬진강에 존재했던
그들이다
그런 연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고향을 찾지 않은 것은
인간들이 미운 때문이다
무차별의 남획과 댐건설로
수로(水路)를 막은 것은
인간들의 잘못이다
고향 잃고 태평양 드넓은 未知의 바다를 떠돌면서
선조들의 고향으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을까?
수십 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남해안의 연어들이
섬진강에 돌이왔다
먼 옛날의 조상들의
그 강물이 그리워
세월의 여울과 폭포를 뛰어넘어
모천(母川)으로 회귀(回歸)했다
매듭 속의 강
유종인
강가 잔디밭에 앉아
뜨개질하는 여자가 있네
봄을 좀더 촘촘히 엮으려는 바느질처럼
겨울은
바늘에 머릿기름을 묻히듯
잔디밭 여기저기 연초록 코바늘 싹이
꽂히듯 솟아 있네
한 코 한 코 엮어가는 스웨트는
허공이
마음먹고 모여든 털실 앞에
제 빈 몸을 터줬기 때문이네
돌 속에 꽃을 뜨개질해 넣고 싶던
저 여자, 가슴 속의 남자를
짰다가 풀고 짰다가 풀길 수백 번
겨우 벙어리장갑 한 짝으로 다다른 늦겨울이네
풀리지 않는 일들을
격자무늬처럼 매듭짓다 보면
한 매듭 속에 들어왔다 나간 강물의
소용돌이는 차마 소중하고 아득하여
이 강물 저 강물 보이지 않게 손잡으며
만다라의 넉넉한 바다 옷 한 벌 짤 수 있을 것이네
눈물로 소금을 짠 여자의 한낮이
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림자 옷을
겨우내 메마른 금잔디에게 떠 입히네
강
유화
1
꽝꽝 언 빙판도
언젠가 풀려서 온다는 걸
깊은 사랑의 물결은
중앙부터 풀리고
잔잔한 물결은
가장자리부터 꽃을 피우니
빛나는 어울림의 사랑,
아- 우리는 너무 빨리
이별을 감행했었고
나는 너무 오래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와
눈물을 보고 있다
봄이 왔다고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볼 수 있을까
사실 보면서도
그 이유 어떤지 잘 몰라
2
생의 모든 것이
아침에 눈 떴다
잠깐 생각에 잠기고
저녁 일몰이지
오늘은 그대여
저녁 강가에
노을이 물들면
오라. 뜨거웁게 와
어둠을 꼭 안고
알 수 없는 생,
깊디 깊은 영혼으로
잠들어 가자
강가의 연정(戀情)
윤영초
별이 내리는 강가에
홀로 깨어 있는 강물은
너를 마주보는 것처럼
은빛으로 출렁인다
나는 저만치
나무 밑동 이에 앉아
따스한 너의 눈빛 같은
강물에 하염없이 흔들렸다
갈 숲에 소곤거림이
확인 할 수 없는
갈대의 몸부림인가
너의 손길처럼
강물은 부드럽게 흐르는데
밀려오는 혼자만의
고독 같은 너의 사랑을
미워할 수 없고 너와의
사랑을 확인할 수가 없다
강물은
윤정강
흐르는 물안에 세월이 산다
산그림자도 출렁이며 누워있고
숨을 거두는 해도 물안에 안겨 흐느끼는데
멀리 서 있는 겹으로 쌓은 인연
북적되는 세월을 누비며 물속에서 꿈틀거린다
강물은 품이 넓은 지구를 닮았다
수초 일렁이는 저녁 산그림자 다가와
그리움 마주하면
산노을 빛 눈부신 해질녁
출렁이는 물결처럼
넓은 품 견디며 만들어지는 여울
강물의 잔잔한 뒤척임은
도시를 껴안고 흔들리며 채우는 시간들
세월은 노을 앞에 누워 있다
강물은 흐르며 빛나고
윤정강
무리 지어 달려오는 물여울의
잔잔한 숨소리 들으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물빛에 눈이 부신다
그림자로 서 있던 자국마다
애절한 버거움도
강물 위에 빛이 되어
그리움 짙어지고
밀려오는 물결의 가장자리
강물의 숨소리 들리 듯
행복으로 즐거웠던
아름답고 긴 그리웁던 나날
강물은 흐르며 빛나고
고이 접어 감추어 둔 사랑 한 아름
서두르지 말고 인내하며
우리 내일을 기다리자
금강
윤정희
은물결 살랑살랑
금물결 살랑살랑
향수의 고향
금강의 물줄기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주름 잡힌 치마 입고
살랑살랑 바람결에
내 마음마저
고요히 실바람을
무심히 내려다본
금강의 물줄기
예쁘게도 줄지어
유유히 흐르고 있네
어디까지 가려나
바다까지 가려나
가려거든
내 마음까지 가져가지
가을 강
이가림
가랑잎 하나가
화엄사 한 채를 싣고
먼 가람으로 떠난 뒤
서늘한기러기 울음
후두득 떨어져
물거울 위를
점자 (點字)인 양 구른다
노을 타는단풍밭
보랏빛 이내에 묻히고
깊은 하늘의 이마에 걸린
가버린 누이의 눈썹
그 그늘에 이슬들
아롱아롱 맺힌다
가랑잎 하나가
가을의 끝한줌 허무를 싣고
먼 어둠으로 떠난 뒤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 - 섬진강
이강하
자전거 타고 달리는 소년과 소녀
이마 위로 바람이 갈라진다
꽃잎 벗어던진 열매들이
자유에 든 것처럼
있고 없음이
필요 없는
자전거 페달의 가벼움은
혈육을 돌리고
친구를 돌리고
아픈 역사를 돌리고, 또
누군가를 절실히 돌리고 싶어한다
접힌 주름 그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진종일, 나는
섬진강 구석구석을 돌린다
묵상에서 돋아난 신록,
소년들과 소녀들이 자꾸 늘어나는
내일이면 탱자나무도
하하 웃으며 달리기를 시작할 것이다
굽이굽이 덜컹거렸던 우리,
은어 떼는 더 성숙해질 것이다
오봉산과 구름이 맞닿는
그 틈과 틈 사이로 장미꽃 번지듯
임진강의 봄 풍경
이기호
임진강 물은
화엄황혼*이어라
노을을 담고 흐르는 물
황금빛의 물결
일렁흔들거린다
임진강 물에
새들 날아들고 노닐다
기꺼울 듯 기꺼울* 듯
평화롭기 그지*없더구나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온갖 고난의 혼적
철조망은 녹슬고 있다
기러기 떼*는
하늘을 가로 지르다
기럭기럭
기러기 울음소리*
고향이 기룬 게지
임진강의 봄 풍경
아름다움이어라
* 화엄황혼 :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화엄에 비유한 말.
* 기꺼울 : 속마음이 벅차오르도록 기쁘다.
* 그지 : 한량, 또는 끝.
* 기러기울음 소리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기러기의 울음소리로 비유한 말.
* 기러기 떼 : 고향 그리워하는 애달픈 심정을 비유한 말.
임진강의 여름 풍경
이기호
오작오작*거리는 인간 밀림* 속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
잠시 잊고 옥안*을 떠나보자
물새들의 천국 어부의 배타고
떠나가면 강바람이 시원하다
물결 따라 미끄러지듯 가까이 다가가니
옥야천리*의 강변 부귀재천*이었다
여기저기서 물고기 폴짝폴짝
널뛰기로 노닐고 찍찍 찍찍 물새들의 소리
잠방거리는* 소리
이리저리 하나 둘 셋 넷 모여들다
앵돌아서 가는 율동 평화롭기 만하다
날은 저물고 어둠이 치밀어드니
일연감색*의 저녁노을 산장을 밝힌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운
물고기의 천국 새들의 천국
동식물의 천국 임진강의 여름 풍경
신비롭기만 하다
* 오작오작 : 여럿이 한데 몰려 복잡거리는 모양.
* 인간 밀림 : 사람이 밀접해 사는 것을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에 비유한 말.
* 옥안 : ‘책상’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 옥야처리 : 끝없이 넓게 펼쳐지는 기름진들.
* 부귀재천 : 부귀는 하늘의 뜻에 달려있어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뜻.
* 잠방거리는 : 새 따위가 물에 발을 담갔다 뺏다 하는 소리.
* 일연감색 : 한가지로 물든 감빛 노을
강이 흐르리
이외수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낱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멎어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아,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가을 강
이원문
찾아온 강 언덕
강바람에 여름은시원 했는데
가을 강의 가을 바람은
왜 이리 쓸쓸하기만한 것인지
씨앗 매달고 늘어진 풀
퇴색 되는 나뭇잎들
이 가을 더 깊으면 단풍들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억새꽃 피어 바람에 눕고
잃어도 얻어도 강물에 녹은 세월
누구의 시간을 저 강물이 빼앗았나
흐르는 강물 위 건너는 구름 산 넘고
인생 띄워 바라보니 거스르지 못한다
강물에 마음 섞어 바라보는 강
석양의 이 인생 나 어디에 데려 왔나
강(江) 건너간 노래
이육사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내 강(江)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江) 건너갔소
강(江) 건너 하늘 끝에 사막(沙漠)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아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불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沙漠)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데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江) 건너갔소
섬진강
이은봉
누가 일러 강이라 했나
골짜기를 적시며
출렁출렁 걸어가는 초록빛 물길
발목 걷고 휘적휘적 걷다 보면
산언덕마다 이슬 젖은 수유꽃 내음
꿀벌들 잉잉대는 매화꽃 내음
여울목에 몸 섞으며
하얗게 반짝이고 있지
(더런 노랑부리 할미새들 부는 봄바람에 쫓겨
둥글게 원 그리며 날기도 하지)
발목 부어 잠시 주저앉는 물길
물길은 강으로 불려지기보단
지친 제 몸 감추며
그냥 이렇게 주저앉아 쉬는 것이 좋지
눈 들어 세상 바라보면
마을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람들 슬픈 이야기
물길은 너무 아파 싫지
오래도록 눈 딱 감고
내내 별꽃처럼 풋풋한 서정이고 싶지
만개한 산벚꽃으로 흐드러지고 싶지
겨울 강
이종화
이 밤도 하얗게
돌아누운 달빛
얼어붙은 발등에
떠나지 못한 갈대들의
마른 한숨 소리
지나가던 바람은
제가 뭔데
모든 것을 차갑게
질책하는지
지나가는 기러기 떼
흉을 보나
빙판 위에 미끄러지네
하얀 울음소리만
겨울 강
이채
시간이 물처럼 흐르고 흘러
이제 차가운 겨울강이 되었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추위는 몸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나는 것이라고
겨울 강은 제 가슴도 보이지 않고
저 강물 소리없이 깊어가듯
당신과 나도 그렇게 꿈을 꾸며
하루 하루 깊어가는 것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만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시린 시간이 흐르고 흘러
강바람 따뜻한 날
한 마리 새가 분명 날아 올 것이라고
뜨거운 눈물과
차가운 눈물을 모두 제 가슴에 가두고
겨울 강은 유달리 말이 없다
아! 낙동강
이학주
아! 낙동강
태산준령 굽이 돌고 들판 세로 누벼
굽이굽이 머나먼 길 1,300리
거침없이 달려온 겨레의 강 낙동아
너는 푸른 영남의 풍요로운 젖줄
함백산 봉우리에 떨어진 빗방울
흐르고 모이고 뭉쳐 흘러흘러
큰 줄기 작은 줄기 다 끌어 안아들여
낮은 자세로 임하는 너의 겸손함이며
막아서면 돌아가는 유연함이며
산 굽이돌아 물 굽이돌아
숨 가쁘게 달려온 배달(倍達)의 강아
유구 수만 년 쉬임없이 굽이돌아
안동 하회(河回)마을
물 찬 제비처럼 휘감아 돌리고
상주(尙州)벌 경천대(擎天臺) 천하 절경 빚었구나
전란(戰亂) 3년은 혈루(血淚) 흐르던 고난의 역사
다부동(多富洞) 강심(江心)에 얼마나 많은 원혼을 묻었던가
이제 맑은 물줄기에 고혼(孤魂)은 깊이 잠들고
설움도 미움도 씻어내린 포근한 품 안
아! 자애(慈愛)로운 낙동강아
너는 영원한 영남의 어머니
강(江)
이해인
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입니다
가을 강물 소리는
이향아
이제는 나도 철이 드나봅니다,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는 치맛귀를 붙잡고
이대로 그만 가라앉거라, 가라앉거라
타일러쌓고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일어나
모처럼 핏줄도 돌아보게 합니다
함께 살다 흩어지면 사촌이 되고
다시 가다 길을 잃어 남남이 되는,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지금은 내왕이 끊긴 일가친척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고 가면 바다가 벼랑처럼 있어
거기 함께 떨어져 만난다고 하지만
죽어서 가는 천당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가을 강물을 보면 문득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머니.
즐펀히 너브러진 물줄기가 심장으로 다가와
땀으로 눈물로 이슬 맺는 은혜
가을 강가에 서서
나는 모처럼
과묵한 해그림자 갈대 그늘을
따라가면서
잠겨들면서
내 목숨 좁은 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강은 전생을 기억할까
이홍섭
어디 마음 둘 데 없을 때
쪼그려 앉아
흘러가는 강물이나 바라보는 것은
강이 자신의 전생을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마음 둘 데 없다는 것은
지금 내가 현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두 발로 서 가는 사람에게나
외발로 서 있는 나무 밑에 가 울고 있겠지
쪼그려 앉아
얼굴에 물때가 끼일 때까지 앉아 있는 것은
강의 전생에 위로받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심하게 흘러가는 저 강물에 위로받을 수 있을까
큰 홍수가 나면 알지
강물은 자신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 달려가고
길을 막으면 그 자리에서
한 생을 걸고 범람한다는 것을,
강이 휘어 흐르는 것은
다 전생이 아프기 때문일 거야
어디 마음 둘 데 없더라도
해 질 무렵에는 강가에 나가지 마, 강의 전생이
아니 너의 전생이
붉은 노을 속에 눈 뜨는 것을
차마 보지는 마
가을 강(江)
임재화
인적 하나 없는 가을 강가에서
멀리 서산에 뉘엿뉘엿해 저물고
붉은 노을도 이미 그 빛이 바랬다.
이제 어스름 어둠이 내려앉아서
겨우 서너 채 있는 쓸쓸한 강촌
집집이 하나둘 등불을 밝힐 때
지나던 인적마저도 끊긴 강가에서
소슬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에 실려
자욱한 물안개만 말없이 다가온다
섬진강에서
임채우
가정역 앞 두게세월교 앉은뱅이 다리 위에서
우리는 봄비로 세안한 강안이
흩날리는 산안개에 얼굴을 훔치며
설핏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환한 매화무덤을
꿈결인 양 바라보며
봄비가 내려앉는 다리 아래
낮게낮게 흐느끼는 강물을 바라보며
내가 뛰어내려 강물에 몸을 섞으면
데면스럽게 굴지 않고 나룻배 태워
저 건너로 건네줄 듯
낮게낮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내 몸의 오수를
진저리치며 강물에 보탰것다
죽은 것들 여태 그 모습 허물지 않고
봄이라 신생이여 여린 속잎 솟아나는 강가에
세월 다리 아래 강물은 속절없이 흐르고
연둣빛 보리피리 한 소절에도
강은 먹빛 번지는 바위 위 고니처럼 무심도하여
이윽고 각자의 강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느 햇볕 쨍한 유년의 은어떼를 좇기도 하고
아지랑이 백사장 그 금빛 햇살에 눈부시다가
금닛빨 야매꾼 심씨의 투망에 끌려 나오던 여울의 살떨림
어느 구비던가 문둥이 처자의 피 묻은 홑치마
탯줄을 이빨로 질겅질겅 씹으며 강물에 흘려보낸 그 피울음이여
용서해라, 친구여
그대가 바라보는 이 봄의 찬란함을
길 아래 매화는 강물에 제 그림자를 비추고
길 위의 매화는 산 그림자를 사모함을
그대는 흩날리는 산안개 꽃 비치는 강물로 그리겠지만
나는 이 환장할 봄날을
두게세월교 상판만큼이나 덕지덕지한 나의 남루를
내 핏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섬진과 만나고 있다
이곳에 와 닿은 여정이 범상치 않음을
나로 미루어 그대들을 본다
아, 강물은 흐르는데
꽃비는 여울지는데
환장할 이 봄날을 어이할거나, 어이할거나
강
장원경
아직 강을
잘 모르고 있을 때
어느날 당신은
한 마리 큰 뱀으로 다가와
내 목을 칭칭 감았지
수십 년 동안
전라도 여수 땅
당신의 그 차거운 손안
같은 온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눈을 떴을 때
천 개의 하천이 모인 강물은
흰 파도 부서지며 그래도 흐르고
그 서러움 속에
다만 남은 것은 너와 나
남은 것이 아니라
갈 곳 없는 빈 것뿐인
우리들
겨울 강
장유정
여명을 뚫고 피어나는 불꽃
태양이여 솟아라 붉게 물들이고
번쩍이는 물빛을 보라
마음 한 가득 가슴 열린다
뜨거운 심장이 열리고
바라보는 찬란한 빛 빛이여
물 위에 떨 때면
용솟음쳐 오른다
두 팔 뻗은 나목의 가지마다
겨울을 맞는다
아침의 나래 빛이여
찬란하여라
동녘이여 넓은 대지여
어머니 품속이여
만물을 포용하네
낙동강아
장유정
용화산 푸른 나무
낙동강 끼고
물결 따라 흘러가고
배 띄워 나가 볼까
푸른 물결 700리 강
애 한 서린 강아
피로 얼룩진 강
6.25 전쟁
지금은 말끔히 다듬어지고
역사는 말없이 지킨다
한 많은 역사를 뒤로한 채
오늘을 산다 번영의 길로
섬진강에서
장은수
강가에 몸이 묶여
혼자서 주인을 기다리는
고기잡이배 위에
아침을 내려놓는다
바다와 강이 접하는
하동 섬진강에는
강물이 바다로 흘렀다가
바닷물이 밀려왔다
고기 떼는 놀던 자리가 혼란스럽고
동작이 뜬 재첩은 입과 코를 막고
강바닥 모래 속에 몸을 박고
피신하는 법에 익숙해졌다
흐르는 강이 늘 온유하고
잔잔한 것은 아니지만
황토빛으로
말없이 거슬러 흘러가는가
섬진강으로 흐른다
장은수
가을날 붉은 사랑이
성삼재를 넘어오다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멈춰 섰다
첫 키스 나누던
오솔길도 없고
그대의 노랫소리 들리지 않는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도
하늘과 땅 사이 어드메에
사랑이 남아 있는 것인가
나무는 옷자락이
핏물로 얼룩져도
먼 산만 바라보는데
지리산이 우- 우-
울음 우는 소리에
계곡물이 멈춰 섰다가
추억은 섬진강으로 흐른다
겨울 강가에서
전병조
1
겨울강가에 서면
빛이 가난하여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
썰매를 탄다
은어의 날개 위에 반짝이는
불임(不姙)의 삶,
프리즘을 통하여 복제된
시작과 중간과 끝이 보이지 않는
안달난 일상들이
자꾸만 미끄러지며 썰매를 탄다
어젯밤 꿈이 현실적 전망으로 바뀌고저
오늘로 이월시킨 이 손때 묻은 하루
허리가 휘어지고 거품이 굳도록애 휘저어도
내일이 없는 이 천막같은 하루
라면을 끓이다가
문득 불어오는 찬바람에
두 손을 데어버린
먹다남은 일상들이
뱃머리를 중심으로
팽그르르 맴을 돈다
2
이별이란
그리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바람 속에 흩어지는 먼지의 일상일 뿐
너 멀리 보내고 항시 가슴 아파했던 것은
그리움이 아니라
한 조각 굳어진 체념의 눈물이었다
날마다 침몰하며 침묵하는 강물 속으로
조용히 떠오르는 하늘
한 줌 그물에 여과된 채 망각의 바다로 흐르지만
만남도 헤어짐도
한낱 눈발되어 흩어지는 저
잿빛의 하늘 아래
노을보다도 짙게
바다보다도 낮게 출렁이며 가라앉은
겨울 강가
한 토막 흑싸리며
한 조각 댓닢같은 일상들이
모닥불을 피워올린다
허연 동천(冬天)에
너 녹아 어서 빨리 내 몸을 띄우라고
물먹은 모닥불을 피워올린다
3
달 밝은 밤에
미류나무 사잇길을 돌아
불어오던 바람이
강바닥을 미끄럼질하고
싸리비로 빗질을 하듯
할퀴고 간 강물의 자리에
우리네 일상이 굳는다
불빛을 중심으로
파랗게 달무리 진
뻥 뚫린 가난
지나간 봄날의 함성들이 산 채로 매장되어
못다한 젊음의 원혼들이 통째로 화장되어
떠나버린 구천(九天)의
허이연 뼛가루로 날리다가,
기어이 울어버린 통천(痛天)의
시퍼런 달무리로 날리다가
마침내 얼어붙은
마흔다섯의 희미한 각오들이
단단한 참나무를 타고앉아
조각난 일상들을 낚시질 한다
구멍 난 양심들을 낚시질 한다
4
하얀 불빛 속으로
어둠 더욱 빛나고
노을빛 짙게 술 취한 사람들
성에 낀 일상 위로
낚싯줄을 드리운다
돈셈의 명예와
권력의 수레바퀴에 상처받은
힘이 있어도 힘이 없는 사람들
겨울강가에 모여앉아
강물을 마름질한다
물경(勿驚),
한 치 표밭을 노리는 소주병들이
군데군데 강가를 어지럽히고
칼라풀한 팜플릿에 찍혀진 얼굴들이
기호 1번, 기호 2번으로 모닥불 속에 타들어간다
인터넷, 인터넷처럼 얽혀진 도시의 구조와
정치적 권력의 모순들로부터 상처입은
힘이 있어도 힘이 없는 사람들
강 건너 어둠에 떨고 있는 하얀 불빛 속으로
길고 긴 낚싯줄을 던져 올린다
5
물안개처럼
오늘도 날은 저물었다
어린 날 그리도 힘들게 쓰여지던 일기장처럼
오늘도 또박또박 연필로 쓰여진 하루
기약 없는 일상 속에서
날마다 부딧히는
끊고 자르고 맺고 다시 또 풀어야만 하는
이 색 바랜 일기장의 하루
잔잔한 강물 위에
노을이 지면
메마른 가지 위에
바람이 불면
하나로 둘로
혹은 셋으로
불빛을 찾아 모여드는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겨울강가에 천막을 두르고
술잔을 기울인다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어린 시절에 대하여 작별을 고하지 않는
초라한 도시의 꿈 많은 사람들
6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초저녁 어설픈 햇살을 받아
더욱 차갑게 들판을 물들이고
그동안 앓았던 응달 쪽
두터운 불신의 부스럼 딱정이들도
녹는 듯 다시금 날카로운 바람되어 되살아나는데
장독에 어른대는 저녁의 노을처럼
새악시 옷깃에 묻어나는
아찔한 분홍처럼
항시 현실의 문턱에 넘어지는
삶에의 일상적 몽매에 발목을 잡혀버려
넘어지며 일어서고
일어서며 또다시 쓰러지는 갈대의 하루
오늘도 바람에 밀리는 물살에 흔들리며
먼 빛 물결로 다가오는 섬들의 모습을 그리다가
쓸쓸한 거품의 꿈만을 간직한 채
조용히 잠이 드는 갈대의 하루
어스럼 어둠이 찾아드는 겨울강가에
물소리 바람 소리
집을 찾는 철새의 날갯짓 소리
파도처럼 바스라지는 갈대숲 속
부스스 댓닢 부딧히는 소리 들려온다
7
석양에 노을이 질 때
나무는 무얼 생각할까
감원열풍에 밀려나
마침내 한 폭의 풍경화로 굳어버린
저기 일상의 강물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 숙인 한 그루 겨울나무는
지금 무얼 생각할까
알 수 없는 계절의 느낌 속으로
눈물이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초라한 이성의 잔해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드는 하늘
숨이 막힐 듯
대기마저 쨍하고 얼어버린 이 겨울의 한 가운데 서서
나무는 지금 무얼 생각할까
계절의 느낌을
사람보다 먼저 알고
사람보다도 먼저 옷을 벗는
겨울나무를 바라다보면서
우리는 모두
철없는 늦깍이 로맨티스트들이다
석양에 노을이 비낄 때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일탈한 일상의 부조리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어둠 속 빛나는 거품경제의 얼음을 깨트리고
물고기와 한판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앙상한 사람의 겨울나무들
8
눈물이 맺힌다 목이 메어
사슴이 뛰어 놀던 자리
그들에게 목마른 추억들은 없다
슬픔의 시곗줄에 앙금진 시간들
피곤한 날갯짓 고이 접어
먼 들녘의 황금빛 이슬로 아롱질 때
태양은 오늘 하루 얼마나 눈부시게 빛났는가
그대
슬픔의 이슬을 받아먹고
아픔의 비늘들로 온몸을 부풀리며
불어라,
고통의 즐거움을 바람과 함께하는
저 적막의 강가에서
그러나 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자꾸만 굵어지며 넘쳐나는 이 방랑의 자연스러움
고양이가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고 빙글빙글 맴을 돌듯
하나의 원 안에서 자꾸만 미끌어지는 오늘의 일기예보
미로같이 얽혀진 시간의 길목에서
강물은
죽은 생선의 눈을 한채 미래에의 길을 묻고 있다
오늘도 별들은 여전히 어둠에 빛날거고
사람들은 별을 보며 저마다의 행복을 꿈꾸겠지
하지만 갈 곳도 없고 매일 곳도 없는 나는
오늘도 어디서 긴 날밤을 지새야 하나
햇살이 없어도 저절로 빛을 내는 어둠 속 이슬처럼
어떤 아름다운 상처 하나 남몰래 간직 한채
조용히 꿈을 꾸는 저 여명의 겨울강가에서
9
들리느냐 지금
내가 저만큼의 거리를 두고
돌을 던지면
풍덩, 나의 영혼이 너에게로 잠수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느냐 지금
네 꽁꽁 언 추억의 일기장 속으로
하나씩 파문을 이루며 파고드는
내 사랑의 돌팔매 소리가
들리느냐 지금
조금씩 조금씩 똬리를 틀어가며
너에게로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낮은 포복으로만 낮은 포복으로만 다가가는
내 사랑의 숨죽인 탱크소리가
네 심장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쿵쾅거리며 날뛰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느냐 지금
나는 지금
네 강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와 있다
타다 남은 장작은 숯불로 사그라든다
사그라들면서 더욱 뜨거운 열기로 나는 너에게 남는다
작은 숨소리마저 꽁꽁 얼어버린 이
차가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너에게 도대체 어떠한 의미로
사랑을 불태우는가
네 영혼의 귀퉁이에
한줌 잿더미로 사라져야 할
내 무량한 기다림의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가
봄이 오면
하나로 흐를 것들
하나로 흘러서
결국은 연초록 강물이 되어 흩어질 것들
무엇을 못잊어 나는 지금 이 겨울강가에 서 있는가
무엇이 그리워 나는 밤마다 너에게 모닥불을 지피는가
네 심장의 깊은 곳,
철새도 가고 없는 이 적막한
겨울 강가에서
겨울 강
정군수
검푸른 가슴을 열어놓고
겨울밤을 기다리는 강물은
차가움이 아니다
파도가 사나울수록 깊어지는 강물
검은 밤이 물어뜯는 시간에도
갈대숲의 얼음을 밀치고
겨울철새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겨울강물은 사나움이 아니다
강둑을 몰아치는 바람
차가울수록 철새의 발가락
피 더욱 맑아져
더워지는 가슴이
철새들이 뿌려놓은 겨울이야기들을
모으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숨죽이며 흐르는 저 겨울강이
봄이 오면 어떤 모습으로 넘쳐흐르는가를
넘쳐흘러 결빙의 대지를 적시는가를
겨울 강가에서 겨울바람을 잡으며
정세일
겨울이 만든 강얼음위에 네모나게
얼음을 잘라 그 위에 사다리를 놓습니다
차거운 물속에다 그믈을 쳐놓고
삼촌이 대나무 삼지창으로
강 바닥에 엎드려있는 겨울강을 잡고 있습니다
큰 나무로 돌을 살짝 옆으로 비키면
고기들이 물위로 떠올라 옵니다
대나무에 동그랗게 철사를 말아 만든
뜰채로 고기를 잡아 노란 양동이에 넣습니다
잡혀지는 고기는 노란양동이속에 퍼뜩거립니다
양동이속이 너무좁아 고기들이 업어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동그랗게 모여서서 겨울강을 잡는 구경을 합니다
겨울 을 잡는 것은 기나긴 겨울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한강
정옥령
난 네가 그리웠었다
내 아이들의 유년의 추억이 있는 곳
그 추억의 끝에 지금 내가 서 있다
너의 향기를 품고서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너를 밀어 넣는다
너의 숨결을
넌 아무런 말 없이 내 곁을 스치고 지났겠지만
난 너를 마주 보며 내 아이들의 삶을, 미래를 바라보아야만 했었다
너의 가지들을 보면서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너처럼 너는 유유히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구나
내 추억의 끝자락을 꺼낼 사이도 없이
나는 너를 다시금 품는다
내가 지고 가야 할 내 노년의 삶을 너와 나누고 싶어서
너에게 기대어 내 긴 머리칼을 드리우고 싶어서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너를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도강록(渡江錄)
정진규
한강은 내게 언제나 <정진근>이다 정진근은 6·25 때 의용군 나간 내 맏형의 이름 아직도 나는 이 상징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지워버린 이름. 10년은 기다리다 아버지가 실종신고를 해버린 이름 나는 아직도 이 상징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한강은 내게 언제나 한 권 일어판 산세이또 영어 콘사이스다 정 · 진 · 근, 첫 페이지에 찍혀 있는 붉은 목도장, 내겐 아직도 이 한 권이 가장 소중한 나의 희귀본이다 나는 아직도 이 상징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끊어진 다리, 어머니와 나는 깊은 밤 쪽배를 탔다 서울로 잠행했다 강을 건넜다 의용군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해방촌 형의 하숙집까지 찾아갔다 용산중학교 6학년 정진근, 형의 육필이 적혀져 있는 그걸 한 권, 그 방에서 나는 들고 왔다 여기까지 왔다 50년을 왔다
나는 그렇게 언제나 강을 건넌다 산세이또 영어 콘사이스 한 권으로 한강을 건넌다 끊어진 다리, 한강에 다리는 없다 언제나 그렇게 건너고 있다 한 척 쪽배가 언제나 찌걱거리고 있다 기침도 못한다 아직도 나는 이 상징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북한강에서
정태춘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겨울 강
정호승
꽝꽝 언 겨울 강이
왜 밤마다 쩡쩡 울음소리를 내는지
너희는 아느냐
별들도 잠들지 못하고
왜 끝내는 겨울 강을 따라 울고야 마는지
너희는 아느냐
산 채로 인간의 초고추장에 듬뿍 찍혀 먹힌
어린 빙어들이 너무 불쌍해
겨울 강이 참다 참다 끝내는
터트린 울음인 줄을
겨울 강에서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 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다소곳한 귀일 뿐
겨울 강
조경희
강 건너 멀리 할아버지 묏등
어둠에 밀려 갈앉는다
섬과 섬사이를 흐르는 강
부푸는 강심을 바라만 보다가
아버지 마른 갈대처럼
뿌리째 흔들리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쉼 없이 흐르기만 하는 강은
문득 그 흐름을 늦춰 겨울바람을 부른다
결결이 부드런 강물의 살결에 별빛처럼 스미는 바람
바람의 촉수는 천천히 물의 표피를 경직시킨다
층층이 살 에이는 아픔을 속으로 굳히면서
스스로 제 몸을 여는 강
바람을 끌어안는다
몸 속 깊이 바람을 받아들일수록
아픔은 맑고 투명해져
수정처럼 빛난다
고통의 끝 강 이쪽으로부터 저쪽 끝으로
은빛카펫을 깔며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 뒤
정오의 태양이 환한 조명을 뿌리면
울 아버지 아쿠아 엉덩방아 찧는 어린 딸을 일으켜 세우고
꽝꽝 언 얼음을 지치며 지치며
기인 겨울 강을 건넌다
섬진강
조명래
섬진강은 3도(三道)를 끼고 흐른다
경계를 긋는 선의 강이다
신라와 백제 경상도와 전라도를 갈라놓은 선이었다
유구한 세월
산자락을 깎아내고 다듬어 모를 없애고 각을 지웠다
이 강이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계백의 기상이 산 여울을 때리고
동학의 절규와 성화의 북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왜구들의 음흉한 밀어 소리도 들린다
섬진강은 인내하는 강이다
섬진강은 완만한 강 곽으로 펼쳐 흐른다
때론 갈대숲으로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때론 사토 속으로 숨는다
바다와의 해후를 위한 설레임 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하는 강이다
섬진강은 두꺼비처럼
느림의 미학으로 흐르는 강이다
강
조민희
너와 나 사이 강이 있어
이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고
말하지 마라
눈으로는 가려졌지만
가슴으로 보아라
물밑으로 이어진 태고부터의
인연인 것을
변명하지 말아라
머리는 흐르는 강물은 볼 수 있으나
가슴이 없어 묵언의 뜻을 알 수 없다
머리로 울지 말고
가슴으로 울어보아라
그리고 모든 것 끌어안고 묵묵히 흐르는
강을 보아라
강
조한직
저
강이
너무 넓고 너무 깊다
강 건너엔
기다림이
길게 누워있는데
사랑이 멍울져
울고 있는데
강이 너무 넓고 깊다
강인지
바다인지
때로는 강 같기도
때로는 바다 같기도 해
건널 수 없는 저 강물 언제 마를까
넓고 깊은 코로나19
팬데믹의 강
남강 길
차성우
노을 지는 강물 따라
푸른 바람 불어오고
아름다운 그대 얼굴 즐거이 웃으면
내 마음 끝없이 달려가는 길
물결 같은 나뭇잎 햇살 사이로
반짝이는 그대 얼굴 바라보며 가는 길
어느 날 그대, 말 없이 떠나면
이 길이 쓸쓸하리
날 가고 해 가서 그대 없으면
진주 남강 둑길에 나 홀로 외로우리
낙동강
채병용
금빛으로 물든 벼가 고개 숙이고
기러기 떼 석양 속에 선회할 때
금관가야 사람들 강변에 자리 깔아
농주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네
신라, 고려, 조선으로
땅과 고을 간판 바뀌어도
논을 갈아 볍씨 심고
김매기, 모내기, 추수하는 세월은 같아.
옛 상주 고을 낙양땅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 천 리 길
노란 물감으로 채색된 정물화 한점
기러기 떼 앞다투며 입에 물고 날아가네
중절모 하나, 그 정물화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이,
강둑길에 핀 코스모스 한 송이
저도 끼워달라며 방긋방긋 웃는다
젊은 날의 겨울 강 -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최동호
겨울 강은 모든 것을 튕겨버린다고
서운케 일기장에 썼던 것은 잘못이다
겨울 강이 추울수록 두껍게 얼어붙은 것은
제 몸속에 품고 있는 피라미 새끼와 물풀과 작은
돌멩이들을 세찬 바람으로부터 감싸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겨울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몰랐다
강가에서 튕겨져 나오는 돌멩이만 바라보던 젊은 날에는
쾅쾅 얼어붙은 겨울 강의 살 속을 흐르는
따뜻한 사랑의 숨소리 나 정말 알지 못했다
섬진강 블루스
최영욱
다들 미친 사내라 했다
불그죽죽 꽃물이 드는 19번 국도를
산발한 머리 늙수그레한 걸망을 짊어지고
낭창한 노래 해맑은 웃음을 흘리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사내
(한때 저 사내도 치열하게 오르려했던 목표는 있었겠지
강처럼 흐르지 못하고, 무엇이 막혔던 걸까?)
오늘도 다 저문 길 위에서 거침없이
뱉어내는 저 도도(道道)한 웃음
도(道) 다 통했을 것만 같은 꽃 같은 웃음을 베어 물고
낭창낭창한 가락을 섬진강 위로 흩는다.
해거름 강위로 얹히는 노을마냥
사내의 웃음이, 노래가, 강 위로 환하다
얼굴 가득 꽃 같은 웃음 베어 물고
늙수그레한 걸망을 취모검(吹毛劒)처럼
둘러메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사내
더러는 팔자 좋은 놈이라고도 했다
겨울 강
최원정
쪽빛 하늘이 얼비치는
저 차운 곳에
헤일 수 없는 마음 토해 놓으면
몽그락몽그락
피어오르는 물안개 사이로
알싸한 그리움만 더해가는
가슴 시린 강
섬진강
최정신
삼월, 게으른 눈발이
뒷걸음질 멈짓
진주 지나 하동포구
평사리 사십리 한 물목
첫 연은 매화라 쓰고
둘 연은 산수라 쓰고
삼 연은 대숲이라 쓰는데
여백을 동백이 채운다
윤슬이 받아 적는
꽃타래 헝클어진 시를 언제 다 읽고 가라고
봄빛 하양 긴 날을 그리 읊는가
자꾸만 쓰지 마라
그토록 시울 깊은 절경의 시를,
천근 카르마는 어디쯤 부려야 하나
천릿길 더듬어 물 주렴 사연 따위 너에겐 소용치 않은 줄 알았더니
그짝 설움이 더 깊다니
수양버들 잇바디가 물색을 닮았음은
저도 강 따라 흐르고 싶나니
어쩌랴 흐르기는 너나 나나
한결,
화개장터 목로에
벚굴 한 점, 막걸리 한 모금,
너는 젖고 나는 취한다
구례, 소(沼) 깊은 계곡 거슬러 화엄에 들면
백매도 흑매도 한 오백 년 늙는다니
기리운 마음은 내 몫,
기어코 하룻밤 저승살이 온 듯 머물러 주마
가을 강
최정희
푸른 하늘 가로지르는 바람아
단풍잎 타는 향기에
노을 빛이 출렁인다
왜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가
그대 마음 왜 움츠러드는 걸까
죄지은 어린양처럼
어디선가 들려 오는 날벼락 소리
못이 박히도록 귀에 익은
저 아우성
순한 가슴 찢어지는
가을 강이 처량하여라
아 부끄러워라
가을 하늘이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맑음이
왜 슬퍼지는지
저무는 가을 강가에서
최홍윤
강물이 흐느끼고
희끈희끈한 갈대 꽃이 노년같이 흔들린다
저물어 간다는 것은
낡아지고 늙어간다는 것 같아 서글프다
가을밤, 고요의 천지
누가 죽어가고 있는지
어느 골짜기에서인지 방정맞은
개 짖는 소리만 숨넘어갈 듯하다
가물거리는 별빛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강바람
내 한평생의 뉘우침은
고기 비늘처럼 비릿하고
너무 쓸쓸한 것도 괴롭다
두 무릎을 감싸고 앉아
저무는 강가에서 혼자임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세월의 강
하영순
한 아이가 있었지
지리산 맑은 물 흘러흘러
진주 남강
사시사철 흘러 하얀 모래밭에
뚜구집을 짓던 아이
바람 따라 물길 따라 훌쩍 떠나버린 아이
미루나무 줄선 강 언덕에
연보라색 머플러 바람에 띄워
푸른 꿈을 날리던
곱슬머리에 눈이 큰 아이
세월의 물레로 명주실 뽑아낸
해넘이 길 언덕바지에
추억의 씨앗은 싹이 트는데
그 아이는
그 아이는
흔적조차 없다
겨울 강
하재봉
해가 진 뒤 그대는
바람의 손을 잡고 안개 속으로 말달려가고
나무 그늘 아래 빈 몸으로 앉아 있는 내 귓가에선
무수히 작은 눈물로 부서지는 강물 소리
겨울 강물 소리
저물녘엔 강안의 갈대숲마저 깊숙이 가라앉히는
바라보면 즈믄 달이 알알이 맺혀 있는 것을
강이 처음 시작한다는 설산의 상류에서
내 천상의 도끼날로 모질게 마음 가다듬고
붉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어
물어 던지우니
허리에 구름 두르고 삼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석 달 열흘 가부좌 틀고 기다려도
도무지 잠들지 않던 그대의 산에서
그대의 강으로 채 피다 만 눈꽃 같은
내 사랑이 흘러간다
맑은 살결 부비며 아프게
산 밑둥이를 적시기도 하는, 지난 가을
그대 손끝에서 영글던 즈믄 달도 데불고
세상의 눈물 위를 지나 보이지 않는 꿈 곁도 지나
어디서 다다를지 흐르는 어둠 위에
나는 또 무엇을 버려야 하나
오늘도 그대는 안개 덮인 강 저편에 나가 있고
나는 발목에 피 먹은 이슬 적시며
갈대숲 걸어 걸어 이렇게
눈먼 강물 앞에 다시 섰다
겨울 강
한상숙
어머니의 치마자락 붙들고
철부지는 굶주렸던 욕심을 채우려
떼를 쓰고 있었다
마음처럼 해 줄수 없었던
부모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얼음처럼 단단한 응어리 안고 자랐다
깊이 숨어있던 그리움 피어오르고
옷속으로 찬바람 스며들어
소름이 돋는 겨울
단단하게 감추어진 사랑속으로
어머니의 강이 흐르고
아버지의 강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얼음장 밑으로 강이 흐르는 것을
확인으로 알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어른이 된 후로 느낌으로 알 수가 있었다
겨울 강
한이나
저 강의 쪼개짐이 정선 길 같다
쩡,쩡,쩡, 큰 울음이
얼음 한복판에 꾸 불 길을 낸다
느린 세마치 장단을 늘였다 줄였다
정선 아라리 길 길게 풀려 나간다
얼음장 밑으로 밑으로 물소리
삶의 막장 긴장하여 애 터지는 소리
겨울 강이 울며 정선 길 간다
섬진강 물가에서
허만하
1
유리컵에
물을 따른다
물에는 목마름이 녹아있다.
2
섬진강 하구 한가운데 뽀글뽀글 거품이 이는 것을 본다. 바다를 향하여 먼길을 찾아온 물과 역류하는 바닷물이 서로 부딪치는 계면에서 하루에 두 번씩 태어나는 거품. 녹아 있는 소금의 농도가 다른 두 물이 자기의 염분을 지키려는 정신의 표현이다. 주행방향이 서로 다른 두 물길이 만드는 하나의 이름 섬진강.
3
수면에서 고개를 내밀고 줄지어 움직이는 세 마리 수달을 보았다. 어떤 사막도 물처럼 목마를 수 없다
강물이 아름다운 건
허형만
강물이 아름다운 건
아직도 내가
서러움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월도 어느 햇살 여린 날
무심하게 무심하게 강가에 앉아
나의 그늘진 삶의 껍질
깨듯 살얼음 깨고
발 담그니 퍼져오는 그
순수함
강물이 아름다운 건
아직도 내가
먼 길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강가에 서서
홍경훈
세상에 눈물이란 눈물 죄다 모여
강을 이루었구나
세상에 한이란 한 모두 모여
여울도 만들었구나
태고적 부터 흘러온 강
수많은 생명들을 가슴에 품고
슬픔의 사연들 마음 속속들이 묻으며
말없이 오늘도 흘러가네
어이 하랴?
이제 떠나가면 사해(四海)의 물결 속에
되돌릴 수 없는 아득한 길을
쌓이고 쌓인 마음속 응어리는
풀 수 없는 아픔으로 간직하고 가는가
바람처럼 스며오는 아쉬움도
여운(餘韻)만을 남기고 떠나가는가?
차마 떨쳐 버리지 못해 아파하는 네 마음
어찌 모르리. 가련 하구나.
한 세월 그토록 바라던 소망,
통일 민족의 대화합(和合)도 보지 못한 채
다시 기약할 수 없는 먼 길을 보내는 이 마음
이 마음도 서글퍼라
그러나 네가 그래왔듯 대대로
이어져야 할 강은 민족의 생명줄이자
선인들의 얼도 깃들어 있으므로
맑은 혼(魂)과 건강함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헐고 뜯고 준설하고 보를 설치 하는 등
한 어처구니(MB)가 벌인 일들로
큰 상처를 입은 건강하던 강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수많은 생명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예전의 발랄함도 잃었구나.
아프구나 찢어지는 이마음도,
개발이란 명목아래 다시 있어서 안 되는
큰 상처 남겨 안타까운 마음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하리
자연의 순리를 떠나버린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없고 결코 미덕(美德)이라 할 수 없으니
언제까지 내실을 읽지 못한 눈앞에 이익만을 추구하랴
우리가 지켜 가야 할 이 강
다시는 원칙을 잃은 무분별한 개발의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되리
우리의 의식 속에 주시의 눈길도 잊어서는
안 되리
섬진강 편지
홍수희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섬진강에 와서 울었다
땡볕 아래
꽃길도 지쳐 지쳐
흐느적 휘청일 때에
단숨에 달려와 바라보는
애잔한 섬진강의 잔물결이여
사랑이
어찌 저절로 되겠는가
상처마저 축복의 붕대로
감싸주어야 하리
다시는 추억도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오래 오래 너를 위해
기도하리라
섬진강에 와서
나는 울었다
겨울 강변
홍윤표
산 숲 우거진 겨울 강을 내려본다
허기진 욕심을 묻고 인적없는
빈 마음으로 강변을 걷는다
지난날에 추억을 회상하는 나는 병신
나이 들수록 죽어가리라는
생각은 한 점 없는데, 가을처럼
퇴색되는 얼굴빛은 지난날의 추억뿐이다
안녕이란 말을 쉽사리 하지 말자
안녕은 다시 돌아올 기약을 약속할 수 없는
만남을 위안이 아닐까
나이 들어 욕심을 내면 무얼 하나
죽어가면서 가지고갈 기운도 양기도 없는데
찬찬하게 챙기던 사람도 형체 없이
다 녹아 내린 강변에서 나를 찾는다고 버둥거려도
기죽을 수 없는 삶의 정체를 엎고
가던 길 잃어 창창蒼蒼하게 나부끼는
겨울강가를 걸으며 단전 된 열기를 올리며
가을낙엽 쌓인 강변에 앉아
인간사 지위 속에 높고 낮음이 없는
행복감을 떠올려야 했다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이인성의 소설 제목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