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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가는 길 1

감태준 아이들한테 가는 길

강건호 나 하나 가는 길에

강문숙 혼자 가는 길

강위덕 고려장 가는 길

강은교 집으로 가는 길

강현국 너에게로 가는 길

고명 아루샤 가는 길

고은영 네게로 가는 길은

고은영 - 미술관 가는 길(참회록)

공광규 향일암 가는 길

곽재규 와온(臥溫) 가는 길

곽효환 개심사 가는 길

국순정 너를 만나러 가는 길

권오범 그대 찾아가는 길

권오범 낙원으로 가는 길

권오범 북망산 가는 길

권혁웅 집으로 가는 길

기영석 구담봉 가는 길

김경인 사막으로 가는 길

김경희 너에게 가는 길

김경희 아침으로 가는 길

김경희 여름이 가는 길

김국현 외갓집 가는 길

김귀녀 봉정암으로 가는 길

김기월 저승 가는 길

김기전 -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

김길남 산으로 가는 길

김민소 슬픔으로 가는 길

김선우 도솔암 가는 길

김영남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

김소월 가는 길

김영남 선운산 도솔암 가는 길

김은숙 그대에게 가는 길

김재진 집으로 가는 길

김종제 능으로 가는 길

김종제 능금으로 가는 길

김종제 라싸로 가는 길

김종제 부석사 가는 길에

김종제 수타사 가는 길

김종제 안계 가는 길

김준태 도솔암 가는 길

김준태 함께 가는 길

김중식 사막 가는 길

김초혜 만나러 가는 길

김초혜 세상 가는 길

김해화 사랑은 함께 길을 가는 것

노향림 산천동 가는 길

도순태 사람에게 가는 길 장생포

도종환 당신과 가는 길

도종환 처음 가는 길

도종환 큰 산 가는 길

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도지현 낙엽의 가는 길

류근 박사로 가는 길

마경덕 성북동 가는 길

목필균 고도(古道)로 가는 길

목필균 내원암 가는 길

민경교 빈손으로 가는 길

민경대 광주 가는 길

민영 무릉 가는 길

박금숙 그대에게 가는 길

박성현 봉화 가는 길

박영희 아버지에게 가는 길

박용하 바다로 가는 서른세 번째 길

박인걸 철원 가는 길

박이현 꽃잎 가는 길

박정애 삼포 가는 길

박종영 길이 없어도 가는 길

박준 용산 가는 길

박진표 걸어가는 길

박태강 남한산성 가는 길

박형권 왕릉 가는 길

배영숙 그대에게 가는 실

배영옥 무량사 가는 길

백무산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

백무산 집으로 가는 길

 

 

 

아이들한테 가는 길

감태준

 

일곱 살 여덟 살, 나를 닮은 아이들이

역에 나가 우는 것은

내가 철길을 따라 너무 먼 도시로 온 탓이다

 

내가

도시를 더듬고 다니다가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잃어버린 탓이다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찾는다 해도

이젠 같이 놀아줄 수 없이 닳아빠진 얼굴을

나는 차마 내밀 수 없는 탓이다

 

안개 속에 묻히는 철길을 바라보며

또 어디 몇 군데

연탄재같이 부서지는 마음아

 

눈 오는 이 밤 따라

아이들이 더 서럽게 우는 것은

내가 저희들한테 돌아갈 기약마저도 없는 탓이다

 

 

 

나 하나 가는 길에

강건호

 

나 하나 가는 길에

아등바등 잘 살았다고

누구 하나 칭찬하지 않네

나 하나 가는 길에

싸늘한 안개만이 휘감더라

 

나 하나 가는 길에

누구 하나 동행 않네

미운 정, 고운 정

속정까지 다 주어도

나 하나 가는 길에 외로움만 앓더라

 

나 하나 가는 길에

가슴 아파도 홀로 가야 하고

괴로워도 혼자 가야 하네

서글퍼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려도

 

행복의 눈물겨움도 미움으로 지워버리고

그 길이 가시밭길이든

향기 잃은 불꽃 길이든

넘어서면 돌아오지 못할 그 길

은은한 국화 향만 곁을 맴도네

 

나 하나 가는 길

그 길에서

 

 

 

혼자 가는 길

강문숙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

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

거기 성급한 초저녁 별들 뛰어 내리다 마는지

 

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창을 여닫는지

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간다

 

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

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

혼자 가는 이 길,

 

누가 어둠을 탁탁 치며 걸어 오는지

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당기는지

 

 

 

고려장 가는 길

강위덕

 

등에 짊어진 멍에도 없이

광막한 황야를 끌고 코끼리가 걸어간다

70여 성상 켜켜이 쌓아 올린 갑각을 입고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이

물과 구름의 운행 따라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산 능선 따라 길게 뻗은 등지게에 업혀

운명의 등을 할퀴며

인간 세계의 눈길 닿지 않는 곳에

상아탑도 고스란하다고

무궁으로 이어지는 비밀한 상아탑 내려 놓으러 간다

눈물 섞인 피, 발밑으로 흘려내고

솟구치는 두려움으로 식은 땀 흐르는

계곡이 맞닿은 곳에서는 까칠한 영혼의 뒷면이 숨 쉬고 있는데

한 생이 그냥 스쳐 지나가고 계약도 없이 넘어질 때

육중한 몸 안에 아득한 여백이 생기고

몇 겹씩 겹쳐지는 스테이플러가 가라앉았다 떠오른다

그때마다 구름이 몸 안에서 눈 녹는 소리를 듣듯이

소나기가 이 산 저 산 그리며 지나가는 동안 어두움 속에서는

동그랗게 생긴 영원이란 받침대 위에

코끼리가 네 다리를 올려놓는다

 

 

 

집으로 가는 길

강은교

 

은행잎 한 장

집으로 가는 나를 불러세웠어

 

은행잎 한 장

멈칫멈칫 내게 손을 내밀었어

 

은행잎 한 장

내 손을 꽈악 잡았어

 

은행잎 한 장

내 손안에서 파삭 부스러졌어

 

노오란 피, 노오란 연기

 

가을바람 한 올이 바삐 지나가다가

멈추어 섰어

 

집으로 가는 길

 

 

 

너에게로 가는 길

강현국

 

너에게로 가는 길엔

자작나무 숲이 있고

그해 여름 숨겨 둔 은방울새 꿈이 있고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낮은 침묵의 초가(草家)가 있고

호롱불빛 애절한 추억이 있고

저문날 외로움의 끝까지 가서

한 사흘 묵고 싶은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미열로 번지는 눈물이 있고

왈칵 목 메이는 가랑잎 하나

맨발엔 못 박힌 불면이 있고

 

 

아루샤 가는 길

고명

 

이상하다 이 집,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만 같다

토방에 엎드려 게으르게 졸고 있는 누렁이와

벼슬을 치켜 들고 거만하게 마당을 거니는

장닭, 암팡진 엉덩이 흔들어대며

암내 슬슬 온 동네에 풍기는 씨암탉까지

 

낯익다, 생각날 듯 말 듯 기억의

저 편 빨래줄에 널어 논 허름한

빨래들이, 엄마 옷자락 뒤에 숨어

손가락을 빨며 빠꼼히 쳐다보는 흙강아지

동그란 눈이, 누구더라

누구더라 어디선가 꼭 본 얼굴

 

혹 내가,

살았던 집일까 아이도 낳아 기르며

털부숭이 어느 사내와 그냥 행복했을까

세렝게티 끝없는 평원에 붉게

노을이 내리는데

 

고개를 길게 빼어

내다본다 저녁연기 오르는

외딴집

 

저기 낯익은 흙마당 안쪽 어디, 봉숭아 채송화

수줍게 꽃잎 터뜨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누군가

내 잃어버린 이름을

자꾸 손짓하여 부르는 것만 같아서

 

 

 

네게로 가는 길은

고은영

 

가난한 내 영혼에 꿈의 돛을 달고

어둠을 노 젓는 그리움은

풀빛 닮은 향기로운 유혹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게으른 내 정서를 건드리고

떨리는 감성을 깨우는 길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설렘의 출렁이는 종이배를 타고

날 향한 그대 사랑 궁금하여

태풍의 눈을 찾아 상처를 무릅쓰는 일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한 줄기 바람 속 민들레 홀씨 되어

목마른 거친 동토에 싹을 틔우고

더위에 찌든 곤고함에

순수로 꽃피운 향기로 서성대다가

 

소망의 산비탈 나뭇잎새로

진종일 상큼한 바람이 되어

노래하는 기다림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여름날 흠뻑 젖는 소나기가 아니라

이슬비처럼 잔잔히 너를 적시고 싶은

침묵의 간절한 기도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네게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하다

생각만큼 가까이 다가서지지 않는

작은 아픔 물고 망설이다 쓸쓸해지는

너는 내게 너무나 보고픈 그리움이다

 

 

 

미술관 가는 길(참회록)

고은영

 

시간의 조류(潮流)

흘러가는 인생의 모든 필요여

한낮 껍데기를 벗고 이승의 터울을 넘으면

우린 언제나 빈손이라

우리가 걸어온 길만큼 쌓이던 외로움

깊어지는 시간 위에 경험했던

주검의 얼굴 얼굴들

 

고운 촛불로 타오를 어둠 밝힐 흔적을

너와 나, 찾아야 하리

우리 가슴에 환한 미소로 머물던

사랑의 본질을 찾아

나의 요구를 벗어던지고

빈 내를 저어 강나루 노을 앞에서

자연의 본체 앞에서

추악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아야 하리

 

언제 한번 진솔한 마음을 열고

감사로 황홀한 경지를 피력한 적 있던가

뼈아픈 기억을 되짚어 보라

언제 한번 사랑의 실체로 다가서

아픔을 끌어안고 진지한 가슴으로

눈물지었던 기억이 있던가

 

늘 인생은 미문 앞 비렁뱅이라

아름다운 시간을 걸어 나를 부인하고

영혼의 요구에 부합한 적 있던가

충혈된 미움을 끌어안고

온전히 나만 주장하던

미움의 초라한 우상 앞에서

 

바람에 날리는 돛의 갈기처럼

팔랑대는 우리 죄악의 머게여

수치와 탐욕을 주장하던

나의 존재를 이끌고

인생의 문을 닫고 영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 변명하며

무엇으로 애쓴 흔적을 찾을꼬

사랑하는 임의 미소가 눈이 부셔

어떤 눈물로 영혼을 씻을꼬

산처럼 쌓인 죄악과

인생의 도착과 절정만을 욕심 하던 수치 앞에

헌데처럼 다닥다닥 붙은 죄악의 빈곤한 영혼에

어떤 변명으로 낯을 붉힐꼬

 

 

 

향일암 가는 길

공광규

 

바위와 바위가 기댄 암문을 거쳐야

암자에 오를 수 있다

암문은 좁거나 낮아서

몸집이 크거나 짐이 많은 사람은

암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꼿꼿한 허리도 굽혀야 하고

머리를 푹 수그려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무릎걸음도 해야 한다

이렇게 겸손하게 올라가도

바위가 막아서고 사철나무가 막마서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야 한다

대웅전에서 해우소 가는 길도 그렇고

상관음전과 하관음전 가는 길도 그렇고

산식각 가는 길도 그렇다

이건 분명 부처님의 기획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우산을 접고

비를 다 맞으며 암문을 통과했다

빗방울이 나를 지나 활엽수를 밟고 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온 산이 뒤척이며

파도 소리 법음을 내고 있다

 

 

 

와온(臥溫) 가는 길

곽재구

 

보라색 눈물을 뒤집어쓴 한 그루 꽃나무*가 햇살에 드러난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궁항이라는 이름을 지닌 바닷가 마을의 언덕에는 한 뙈기 홍화꽃밭**이 있다

눈먼 늙은 쪽물쟁이가 우두커니 서 있던 갯길을 따라 걸어가면 비단으로 가리어진 호수가 나온다

* 멀구슬나무라고 불리며 초여름에 보라색 꽃이 온 나무에 핀다. 꽃이 진 뒤 작은 도토리 같은 열매가 앵두 열듯 열리는데 맛은 없다. 겨울이 되면 잎 진 가지에 황갈색 열매가 남는다. 눈이 온 산야를 덮으면 먹을 것이 없어진 산새들이 비로소 이 나무를 찾아와 열매를 먹는다. 남녘 산새들의 마지막 비상식량이 바로 멀구슬나무 열매다. 깊은 겨울 누군가를 끝내 기다려 식량이 되는 이 나무의 이미지는 사랑할 만한 것이다.

** 삼베나 비단에 분홍빛 염색을 할 때 쓰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할 때 연분홍의 근원이 바로 이 꽃이다. 김지하 시인은 천연 염색으로 빚어진 한국의 빛들을 꿈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홍화로 염색한 이 분홍빛이야말로 꿈결 중의 꿈결이라 할 것이다

 

 

 

개심사 가는 길

곽효환

 

구부러진 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개심사 범종각 보러 갔다

소나무 왕벚나무 배롱나무 줄지어

허리 굽힌 여윈 겨울 나무들 아래에서

떨쳐낼 수 없는 너를 보낸다

때로는 가파르고 때로는 좁은

호젓한 숲길에 햇살 비껴 들면

그림자가 같은 너를 보내고

그늘 깊은 가슴으로 돌계단을 오를 것이다

장방형 연못 가로지른 나무다리 건너

고졸한 대웅보전 앞을 서성이다

해 질 무렵 범종 소리 울리거든

굽고 휘고 옹이진 못난 것들의

밀어낼 수 없는 단단한 중심에

널 보낸 내 마음 홀로 들 것이다

 

오늘 밤늦게 빈 몸으로 터덜터덜

해탈문 밖을 나서는 이 보거든

나인 줄 알아라

 

 

 

너를 만나러 가는 길

국순정

 

오랜 그리움을 달래려

어제의 피로를 던져버리고

길을 나섰다

 

마음은 하늘을 날고

내 콧노래는 설렘을 앉고

너에게로 향한다

 

너의 향기가 코끝에서 느껴질 때쯤

하늘에서 폭 축이 터졌다

첫눈이다

 

너에게 주는 희망

나에게 주는 소망

우리에게 주는 열망

너를 보고 있는 내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대 찾아가는 길

권오범

 

그리움 다독이며 뒤척이다

천장에 그대 얼굴 아른거리면

오늘도 어제처럼

시공을 초월 합니다

 

발씨 익은 계단 건너뛰어

이층에 올라 문을 두드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육신을 빠져나온 영혼만으로는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이 되어 접지 못하는 밤의 여로

 

나비가 되어 창을 기웃거려보지만

내가 보이지 않는 듯

우두커니 창밖만 바라볼 뿐

기척 없는 야속함이여

 

창밖만 맴돌다

이렇게 쓸쓸히 돌아서고 나면

베갯잇이 흠뻑 젖습니다

 

 

 

낙원으로 가는 길(홀씨를 위하여)

권오범

 

맥문동들이 흑진주 목걸이 두르고

떠나는 가을 배웅하느라

시퍼렇게 도란대는 뒤란 석가산

바람이 갑자기 태어나 회오리치고 있다

 

생이 다해 절단난 잔디 검부러기들이

먼저 승천하려는 북새통에

허기져 누워있던 까만 비닐봉지가

엉겁결에 포식하고 기운 차려

교회 지붕 너머로 사라졌다

 

시절도 모른 채

철없는 불장난에 수태한 민들레

간절한 소망이

바람의 심사를 건드렸던 것인데

곁에 앉아있던 나는 왜 캄캄절벽이었을까

 

가벼운 것만 보면 헤살 놓고 싶은 바람이

그리하여 볼만장만할 수 없었던 것을

순식간에 꿈을 쏘아올린 민들레 가슴에

뭉툭한 빈 포신이 흐뭇하게 우주를 겨누고 있다

 

 

 

북망산 가는 길

권오범

 

부음 받고 불원천리 댓바람에 달려간

낯선 타향 영안실 문밖

스테인리스 재떨이 모래섬 수북이

물구나무선 꽁초들이 슬픔을 말해준다

 

하나님보다 더 찬란했던 가족의 태양이

생의 펌프질 멈춰

황망히 불을 댕긴 만수향 너머

생생한 미소만 바라보다 부복한 부평초

 

대물린 가난에게 발목 잡혀

너와 나 눈물마저 참고

굽이굽이 달려온 뒤안길에

솔래솔래 허비해 버린 불효의 세월이 섧다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 산천엔 황금물결 출렁이고

선산에 옹기종기 모여 맞이해주는

앞서가신 조상님들 봉분 아래

굴삭기가 홰를 쳐, 솔 그늘 걷어낸 명당 자리

 

이승의 끈을 놓친 핏줄의 침묵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못다 한 효도의 몸부림 속에서

활화산처럼 터지는 대성통곡밖에는

 

 

 

집으로 가는 길

권혁웅

 

우리 집은 골목과 골목, 다시 골목과

골목을 지나쳐야 해 머리와 목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야 해

구불구불 늘어선 담장들을 걷다 보면

거대한 짐승의 내장을 지나치는 느낌이야

내가 소화되고 있다는 거

하루하루가 녹아서

내 뒤에 젖은 발자국을 만들고 있다는 거

집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내면(內面)이야 헐어버린 위벽을 훑어간 듯

담모퉁이에는 범퍼가 긁은 자국이 있어

나는 이탈리앙 베이커리에서 식빵,

방학 약국에서 겔포스, 버드나무 슈퍼에서

디스 플러스를 사가는 중이야

이미 골목과 골목에 관해서는 말했군

머리와 목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걷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군

골목과 골목은 길이 아니야 그건

집들이 비워놓은 울짱 바깥이야

내 안의 구멍으로 식빵과 겔포스,

담배 연기가 천천히 흘러가듯

나는 다시 골목과 골목을 지나치고 있어

저기가 내 집이야 나는 문을 닫고

양변기처럼 구부려 잠들 거야

 

 

 

구담봉 가는 길

기영석

 

고개 넘어 데크 계단 따라

닳아빠진 바위 틈새로

버팀목이 빤지르르 빛이 난다

 

수많은 상처뿐인 흔적은

긴 세월의 전설로 남겨지고

내 것인 양 익숙해진 바윗덩어리

 

주변 바위산과 호수의 경관

눈에 보이는 모두가 내 것인데

이만하면 되지 않겠는가

왜 그리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산은 나보고 이렇게 말했네

눈에 보이는 자연은 네 것이라고

파란 하늘 구름까지도

그냥 보고 즐기라고 말하네

 

나는

그래서 부자의 욕심은 진즉에 버렸네

자연은 내가 주인이니까

부러울 게 하나 없더라

 

철 따라 아름다운 구담봉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온 바위틈에

소나무와 곱게 핀 진달래가

그대로 잘 있는지 또 보고 싶구나

 

 

 

사막으로 가는 길

김경인

 

봄부터 몸속에서 물소리가 들려왔어요. 나는 아직 사막을 가지도 못했는데 걸을 때마다 물이 찰랑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귀가 부풀어 올라 자꾸 몸이 아팠어요. 어느 아침엔 플랑크톤이 식도를 타고 목구멍 아래까지 기어 올라왔어요. 나는 사막을 저벅저벅 걷고 싶은데 무릎을 거쳐 두 귀까지 물이 넘쳐 가라앉는 난파선처럼 자꾸만 비틀거렸어요. 가슴에 가만 손 얹으면 물속으로 가라앉는 쇄골이 느껴져요. 나는 아직 사막에 가지도 못했는데, 눅눅한 내 몸을 말리지도 못했는데, 손끝으로 물이 번져 만지는 것마다 온통 젖어오네요. 나는 아직 사막 위에 뜬 달을 보지도 못했는데 몸속 수문이 열려버렸나, 물은 눈까지 차올라 두 개의 눈동자가 밖으로 쓸려가네요. 나는 흰 모래 아래 누워 바삭바삭한 꿈을 꾸고 싶은데 몸속, 물고기들이 내 심장을 파먹어요. 온몸이 수초처럼 풀어진 나는 아직도 사막에 가지 못했는데

 

 

 

너에게 가는 길

김경희

 

맑은 샘물처럼 바람이

불고 흘러가는 길

보이지 않는 사랑

꿈결에 담는다

너에게

 

둘이 걸으며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들이여

그리움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나는

네에게

 

영혼조차 빛으로 들어

별똥별이 한참동안

눈에서 잠들다가

부르던 말

사랑

 

 

 

아침으로 가는 길

김경희

 

물줄기 따라

고요함이 흐르는 저 강물

꽃잎이 머무는 이유가 있다

 

그날도 스펀지처럼

질펀한 바닥을 향하여 움직이는

번뇌의 속성으로 보아

 

잡념들의 집결지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흐르고 있음을

 

다른 마음이

서로 어울리게 실타래를

만들어 주고 있다

 

 

 

여름이 가는 길

김경희

 

아이들 풀벌레 매미 소리

새가 날아 풍성한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각자 더위를 잊는 법도 터득한 채

나무와 숲은 더 가까이 길을 묻는다

 

입추가 계절을 겪게 되며 가을이 주는

아름다운 사랑 흠뻑 취해 보련다

 

 

 

외갓집 가는 길

김국현

 

간월* 골짜기 숨은 이야기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외갓집 가슴에 안고 잠든 엄마 품에서

아침 해가 떠올랐다

 

엄마 손 잡고 솔 향기 풍기는

붉은 황토 오솔길 걸으며

헐벗은 산 중턱 사방공사 한창인

몸뻬차림 아줌마와 구제복 아저씨들의 노래가 산천을 울린다

 

시냇물 흐르는 징검다리 건너

수정 같은 물가에 중테기 지름쟁이 꼬리 흔들고

엄마 손으로 떠준 물에서 풍기는

박하 향기로 목을 축이고

 

산에서 들로 물가로 걸으며

소담스럽게 핀 꽃들이

행인들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제비꽃으로 만든 반지를 보는 엄마의 입가엔

나비가 날았다

 

십여리 길 걸어온 아들 등에 업고

땀기 베인 자장가 들으며

초원에 흘러가는 넓고 푸른 강가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 간월 : 울산에 있는 지명

 

 

 

봉정암으로 가는 길

김귀녀

 

봉정암으로 가는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흙길 위엔

수많은 발자국 사연들 명상에 잠기며

심신을 깨운 흔적이 있다

 

이끼 낀 돌 짝 틈

꼿꼿하게 자리 잡은 돌단풍

한철을 자랑하며

꽃 피운 뒤

잎만 무성한 노루오줌

떡갈나무 숲에서 가을을 맞이한다

 

기름진 토양

숲속에선

각양각색 동생물들이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온 지상의 낙원이다

 

한 발짝 한 발자국

대지에 입맞추며 봉정암으로 가는 길

자연의 숨결과 나의 호흡이

태초의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저승 가는 길

김기월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이승 떠나 저승으로

길 떠나 부는 바람은

살갗을 에이어도

한 번은 왔다 간다기에 훌훌 벗어 버리고

이생에 빛을 밟고 어둠의 곳으로

넘어 넘어 나는 간다

저 고개 넘어가면 저승인가

이제는 그곳에 영혼을 쉬이고

황톳빛 흙에 떨어진 눈물을 꼭꼭 밟고

바람을 친구 삼아 가련다.

이승에 미련일랑 후회도 없이 내려놓고

훨훨 날아 그곳으로

나는 간다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

김기전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행복하기만 합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대를 알게

된 후로는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인답니다

 

그대를

만난 것은 나에겐

커다란 행운이고 기쁨입니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주세요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니까요

 

 

 

산으로 가는 길

김길남

 

맑은 태양을 머금은 3

어딘가 가까이서

다가오는 봄의 소리

멀리 아지랭이 가물거리고

소월의 진달래가

개화를 준비하면

누군가의 마음은

산 바람처럼 부푼다

 

도시의 소음과

단조로운 일과를 잠깐 떠나

멀고 가까운

산들이 손짓하는 대로

산으로 간다는 것은

하염없이 즐거움이

솟아나는 맛이러라

 

 

 

슬픔으로 가는 길

김민소

 

욕망을 비우려고 너에게 간다

사랑한 만큼 가슴 아렸던 이별이

기쁨보다 오래 머물렀던 아픔속에

눈물로 물들었던 젊은날의 초상

비틀대는 노숙자의 삶처럼

의지를 상실했던 나태함을 씻어내고

진실을 방치했던 어리석음을

이제 네 투명한 가슴에 묻으련다

정녕 만들고 싶지 않았던 길

어둠속에 더 찬란한 빛살이라고

고통속에 더 애틋한 삶이라고 믿기에

모든것을 비우고 알몸으로 가리라

첫날밤을 치루는 신부의 마음으로

갓 태어난 신생아의 영혼을 퍼 담아

미치도록 사랑하는 내 삶을 위해서

너에게 나를 아낌없이 바치련다

 

 

 

도솔암 가는 길

김선우

 

이상하다 이 길은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구부러져 있다

길을 따라 내 몸도 구부러져

두 다리에서 네 발로

온몸으로 길 위에 눕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비늘, 날랜 짐승 하나가

내 허리를 감치며 수풀로 사라지고

꿈이었을까

직립하던 슬픔은

스물아홉에 출가한 불혹의 누이가

내 전신을 스치며

동안거 든다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선운산 도솔암 가는 길

김영남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

난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

 

개울이 오묘한 그녀에게

소리가 나는 자갈길을 깔아주고

군데군데 돌무덤을 예쁘게 쌓겠네.

아침이면 노란 새소리로 풀꽃들을 깨우고

낮에는 이깔나무 잎으로 하늘을 경작하다가

천마봉 노을로 저녁밥을 짓겠네

 

가을이 되면 물론 나는

삽쌀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며

쓸쓸한 상상을 나뭇가지 끝까지 펼치겠지만

모두 떠나버린 겨울에는 그녀를 더 쓸쓸하게 하겠지?

그러나 난 그녀를 끝까지 지키는 장사송(長沙松)으로 눈을 얹고

진흥굴 앞에서 한겨울을 품위 있게 나겠네

설혹 그녀에게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위에 저렇게 귀여운 암자를

옥동자처럼 낳고 살 것이네

 

 

 

그대에게 가는 길

김은숙

 

하늘 끝 부서지는 바람이거나

저린 숨으로 내려앉는 낮은 가락이거나

서늘한 가슴 바닥

협곡 휘도는 바람울음 종일 윙윙거리거나

그대여

저무는 시린 들녘

쓸쓸한 한 잎 추억으로 저미어오거나

마른 노래 몇마디 눈물바람 데리고 와

불현듯 참혹한 슬픔의 강으로 가라앉아도

그대 소중한 이름 하나

이 가슴 굽이치는 빛으로 살아

그대에게 가는 길 짚어 볼 수 있다면

그대 사는 하늘로 뻗는

그리움의 산

깊게 깊게 조용히 강물로도 흘러

그대 따스한 이름으로 한 몸 온전히 덮으며

푸근한 하늘로 끌어안고 싶네

 

 

 

집으로 가는 길

김종제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참새는 왜 날아갈까?

떨어지는 구름을 줍기 위해 언덕을 넘던

아이들은 왜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오나?

밤이 되면 바람은 왜 목소리가 커지나?

보고 싶은 사람보다 왜

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고

헤어지기 싫은 연인들은 왜 헤어져야 하나?

이별이란 말엔 왜 안타까움이 묻어 있나?

작별인사 한번 없었는데

사람들은 왜 가고 오지 않나?

가을 하늘은 까닭 없이 왜 파랗기만 하나?

기차에 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나?

먹었는데도 밥은 왜 자꾸자꾸 먹어야 하나?

우린 지금 어디로 가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앞만 보고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는 어디까지 구를까?

 

 

 

능으로 가는 길

김종제

 

서쪽으로 가는 길에

능의 집이 있어

오래 닫혔던 문이 열렸다

서어나무 아래 솔숲 지나면

무덤 속으로 가는 길이다

미로의 여러 갈래 길이라

무덤이 많다

그 속에 묻힌 것들도 많다

오월 맞은 햇살 피할 그늘도 있고

맨발로 걸어와 부르튼 마음

적셔줄 시냇물도 있고

밖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고

안의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도 있고

그속의 집이 따뜻할 것 같다

층층 사다리의 심해라

어서 오라고 무덤에 꽃 피고

반갑다고 무덤에 새 지저귀고

같이 놀자고 무덤에 나비 날아온다

무거운 등짐의 나도

기꺼이 능 옆에 묻었다

당신과 무덤까지 가고 싶어서

손으로 발로

내가 묻힐 명당 하나 판다

혼자서 이만큼 올라왔으니

당신 오기를 기다렸다가

저 깊은 무덤 속으로 같이 내려가

환하게 불 피우며 살고 싶은 것이다

흙으로 방 하나 만들어 누워서

하루 종일 눈 마주치며 살자고

오늘도 능으로 가는 길이다

 

 

 

능금으로 가는 길

김종제

 

낯선 별

얼굴 모르는 이에게

나무 한 그루 얻어 심어놓고

잎도 꽃도 잊어버리고 지낸지

몇 날일까

가지도 뿌리도 잃어버리고 지낸지

몇 해일까

몸도 정신도 빼앗겨버리고 지낸지

몇 겁일까

어두컴컴한 밤

먼 별에서

열매 열렸다는 기별로 반짝거린다

아직은 어린 능금이란다

곧 붉게 익을 사랑이란다

반쪽을 나눠 먹으면

한 세상 거뜬하게 보낼 수 있을

변치않는 마음이란다

능금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고

새벽까지 불 밝혀주는

별을 향해 한참을 걸어가는데

과수원 원두막 앉아있는 당신

붉게 익은 능금을 들고 있는 당신

반으로 가른 능금을 내게 건네준 당신

평생을 걸어가 얻어야 할

능금 같은 당신

 

 

 

라싸로 가는 길

김종제

 

내 마음속에

오래된 길이 있어

라싸로 가는 중이다

포탈라 하늘궁전을 찾아

히말라야를 넘어가는 중이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달라이 라마가 살았다는

조캉 사원까지 오체투지 중이다

온몸을 바닥에 부비며

불을 찾아 순례하는 중이다

길은 문득 끊기고

벼랑 아래 총 쏘는 소리 들리고

독립을 외치는 돌들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다

신과 대결하듯

날카로운 쇠붙이의 무기가

또 다른 불을 붐어내고 있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그 오래된 라싸로 가는 길에

불과 불이 부딪히고 있다

말라붙은 용왕담 연못에

비명 같은 피가 흥건히 고여 있고

오래된 미래로 가는 길이

숭례문처럼 타오르고 있다

불시에 사라져버린 문

라싸로 가는 길이 닫혔다

나도 쿵, 하고 닫혔다

 

 

 

부석사 가는 길에

김종제

 

부석사 가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꽃

오늘 나는 마침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릉도원 비인간에 닿은 것이다

살아서 흰 장삼 입은 의상과

자주빛 치맛자락의 선묘로

이루지 못한 언약이 있었으니

죽어 무량수전 앞에서

자백紫白의 목련 두 그루로

같이 피고 지자고 하였던 것이다

목숨 낳고 끊어지는 것은

한 순간의 찰라라고 하지만

선묘가 던진 바위와

의상이 꽂아놓은 지팡이는

그 오랜 시간을 돌려놓고 있는데

누군가 꿈길같이 눈 감겨놓고

끌고온 나의 발길이

멈추어 서는 곳이 부석사다

저 아랫 마을

속세에 헛 디뎌 굴러떨어질까

눈이 번쩍 뜨인다

꽃 실컷 보았으니

가는 길에 비 올 줄 알았다

오늘 안으로 꽃 다 지고 가겠다는

전별이다

부석浮石만 선비화禪扉花만 남기고

저들 세상으로 돌려보내겠다고

금기를 어기며 뒤돌아보니

부석사, 빗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수타사 가는 길

김종제

 

수타사 가는 어디에

불태워버린 집 있다고

불혹을 한참 넘긴 저 사내가

홍천에 발을 디뎠다

그날처럼 하늘이 흐리더니

후두둑 빗방울이 세차다

정수리에 물 부딪히는 소리

세상 녹일만큼 몸이 뜨거워서

탁발로 바랑 메고 돌아다니며

산에 들에 불을 질렀다

사내가 돌아왔다, 비바람이 되어서

폭풍우로 변신하여 찾아왔다

사내가 쥐고 있는 목탁

그 구멍 속으로 한 바가지

물 떨어지는 소리

벼락이었다, 폭포였다

불타버린 저 징그러운 육신이

빗줄기에 차갑게 식었다

축축하게 젖어 진흙이 된 저 사내

재만 남았다 저 사내

아득한 나락을 향해 떨어지는

사내의 비명 소리, 풍덩

물 한가운데 빠졌다

사내에게 돌 던지는 소리, 첨벙

물 바닥에 가라앉았다

수타사 가는 길이 질퍽하다

사내가 지껄이는 소리 듣느라

귀가 멍멍하다

 

 

 

안계 가는 길

김종제

 

아니다 아니다

이 길 아니다 라고 하시며

재 하나 넘어갈 때마다

목을 좌우로 돌리시며

아버지 너무 멀리 돌아왔으니

안계 찾아가는 길이

그리 쉽지 않으리라고

고개를 자꾸 흔드시는 아버지

길가의 억새들도

따라서 목을 흔들고 있다

다인 지나서 안계 가는 길이

안개 자욱한 길을

헤치고 가야 하는 것이리라

남루한 생의 겉옷을 들춰내고

반추해야 할 과거가 두려운 것일까

어느새 미로가 되어버린 아버지

안계로 가는 길은

당신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는

뜻 아닌가

아니다 아니다

내가 찾아낸 아버지가

이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몸

이 차가운 쇳조각 같은 정신 아니다

아니다 라며 고개를 젓는다

불시에 폭우 쏟아져

아버지 앞 강물이 넘쳐 흐른다

갑작스런 폭설 소식에

아버지 뒷산이 무너져내린다

 

 

 

도솔암 가는 길

김준태

 

미황사 대웅전

목탁 소리 사라지고

앞마당 한 켠

잿빛 법의 한 자락

실바람 한끝

슬어 안고 떠난다

 

뜨락에 멈춰 서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산 벚나무 힘껏

기지개 켜며

꽃망울 하나씩 준비하는데

 

청람 빛 산죽들

양손 벌리고

산허리 보슬비 모아

은 주렴 만드는 시간

 

딱따구리

날카로운 부리 세워

집 짓는 시간

 

 

 

함께 가는 길

김준태

 

사람들은 저마다

멀리멀리 가는 길이 있습니다

더러는 찔레꽃이 흐드러진 길

더러는 바람꽃이 너울대는 길

더러는 죽고 싶도록 아름다운 길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울며 쓰러지며 그리워하며

멀리멀리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여 우리 사람들이여

우리들은 혼자서 혼자서 간다지만

노래와 울음 소리 속으로 바라보면

결국 우리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함께 만나고 함께 보듬고 가는 것입니다

 

 

 

사막 가는 길

김중식

 

옛날, 구하던 우물가 썩은 물에 있었다 하지만

(西)쪽의 끝에서는

속쓰림에서도 한 구호(口號)가 들리는 듯

나의 난초는 천호동(千戶洞)에 있으리라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그렇듯

말라죽은 풀들이 뽑히고

그것들이 내 삶과 비슷할지라도

구하던 것은

해뜨기 전 세수를 마친 가시난초에도 있는 것 같다

바람 불면 사라지는 길 위에서

육체 밖으로 드러난 엄지발가락이

삶이

가자는 대로 내딛다가

가시 난초에 찔리는 아픔

아프면서도 아픔에 취하는 아픔

야단법석이구나

삶은

 

 

 

만나러 가는 길

김초혜

시인은 세상의 모든 울음을

우는 사람이다

억울하게 누명 쓴 이의

억울함도 울고

병들어 아픈 사람의

아픔도 울고

자식 잃은 에미의

울음도 울고

사별의 아픔을 겪는 이의

그리움도 운다

심지어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죄인의

고통도 운다

시인은 우는 사람이다

울음의 기록이 시다

 

 

 

세상 가는 길

김초혜

 

생명의 새벽이

어둠이라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

오고 간

이 길

 

처음에

끝을 얻지 못할 줄

어찌 압니까

 

삶의 피안에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마음으로부터

사로잡힌 마음

끌어내려고

 

언제나 제자리걸음

그렇게

이 세상을 오고 갑니다

 

 

 

사랑은 함께 길을 가는 것

김해화

 

형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장난일 줄 알았다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해쌓드만

미안하다 그래서 장난으로 대답했다

형 나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야

함께 길을 가는 것

나란히 손을 잡고 갈 수도 있지만

남남인 듯 나뉘어 갈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만큼 앞서 가고 뒤따라갈 수도 있고

그러나 마음은 함께 길을 가는 것

내 사랑이 그러함으로

길 위의 사랑이라……

나는 고개 푹 수그리고

울었다 형 나 많이 외로워

영근아 지금 너 가는 길 얼마나 외로우냐

친구들 등에 업혀

병원에 가 누웠다는 소식 뒤로 자주 비 내렸다

진창이 된 공사장 엿새 만에 일 나가 철근 세우는데

너 길 떠났다고 김청미가 전화했더라

자꾸 눈물나더라 일하다가

고개 푹 수그리고 울었다

내가 길을 바꾸지 못했으니

니가 건너지 못한 길은 나도 못 건너겠지

그래도 사랑은 함께 길을 가는 것

사랑한다 영근아

오늘은 가버린 너를 보러 서울 가야 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자꾸 늦어진다

 

 

 

홀로 가는 길

남화용

 

나는 떠나고 싶다

이름 모를 머나먼 곳에

아무런 약속 없이

떠나고픈 마음 따라

나는 가고 싶다

나는 떠나가야 해

가슴에 그리움 갖고서

이제는 두 번 다시

가슴 아픔 없을 곳에

나는 떠나야 해

나를 떠나간 님의 마음처럼

그렇게 떠날 수는 없지만

다시 돌아온단 말 없이

차마 떠나가리라

사랑도 이별도

모두가 지난 얘긴 걸

지나간 날들 묻어두고 떠나가야지

나를 떠나간 님의 마음처럼

그렇게 떠날 수는 없지만

다시 돌아온단 말 없이

차마 떠나가리라

사랑도 이별도

모두가 지난 일인 걸

지나간 날들 묻어두고 떠나가야지

 

 

 

산천동 가는 길

노향림

 

하늘 가까운 산동네

엉덩이 붉은 언덕이 낮게 엎드렸다

대낮에도 깊고 어두운 골목길 양옆에

털썩털썩 주저앉은 단독주택 납작 지붕들

문패가 없어 좋다

덮을 것 없어 반 자짜리 창문들이

눈알이 빨갛도록 운,

퉁퉁 분 일몰을 등지고

하릴없이 저마다 정남향으로 돌앉아 있다

행상이 무작정 비집고 들어와도 아랑곳없다.

누군가 까마득한 허공을

그예 장대로 속 깊이 파헤쳐놓아

투두둑 투두둑 투두둑

종일 낱낱이 배때기 터지며 떨어지는 밤송이들

알맹이 빠져나간 빈 껍질들이 가시투성이

두개골로 남았다

누렇고 붉고 성근 우표딱지를 이마에 매단 가을이

이 난장의 굿판을

하늘의 일처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섰다

 

 

 

사람에게 가는 길 장생포

도순태

 

햇살이 뜨겁던 날 장생포에 갔다.

고래가 사라진 장생포에는 붉은 햇살이

흔적만 남은 고래막 외벽에 황량하게 내렸다.

 

옛 분주함도 허름한 옷같이

세월의 뒤안길에서 깨어진

유치창처럼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이층 다방 사진 속에는

오래 전 고래 한 마리

혼자 물마시며 빈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붕이 낮은 우체국에서 엽서를 샀다.

언젠가 돌아 올 고래를 기다리며 서 있는

장생포 방파제가 슬퍼 보인다고,

 

기다림은 늘 그늘진

기다림을 만든다고

어젯밤 내 꿈에 찾아온 그에게

 

비릿한 바다내음 같은

이야기를 실어 보냈다.

 

돌아서 뽑은 자판기 커피의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질 때 눈물이 났다.

 

똬리를 튼 한 마리 뱀장어

가슴에 넣고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 그도 나도 있었다.

 

혼자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는

그 처럼 누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슴에 묻고 산다.

 

기다림에 지친 바다 앞에서

다 젖은 내 안으로

고래 한 마리 살아 꿈틀거리며 돌아왔다

 

 

 

당신과 가는 길

도종환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을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 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처음 가는 길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했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큰 산 가는 길

도종환

 

큰산으로 가는 길에는 깊은 물이 있다

물은 큰산을 품어 더욱 깊어지고

산은 물을 따라 내려가 더욱 맑아진다

마음이 크다는 것은 마음이 깊다는 것이다

마음이 깊다는 것은 마음이 맑다는 것이다

 

 

 

해인으로 가는 길

도종환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다

지난 몇 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돌아가는 길이 낯설지는 않다

해인에서 거두어 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

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

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다

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

아니 본래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거기 미래의 나까지

바닷물에 다 비친 다음에야 화엄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지친 육신을 바랑 옆에 내려놓고

바다의 그림자가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다

지금은 바닥이 다 드러난 물줄기처럼 삭막해져 있지만

언젠가 해인의 고요한 암자 곁을 흘러

화엄의 바다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

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

 

 

 

낙엽의 가는 길

도지현

 

아름답던 시절을 뒤로하고

모든 이에게 공덕을 행했으니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나려 한다

 

가사와 장삼을 벗어 놓고

나신이 되어 길 위에 서고 보니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을까

마음을 다 비우고 해탈하니

나신으로 서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

 

이제 누가 뭐라고 하든

귀에 들리지도 않고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세상에서 제일 편한 내가 된다

 

벗어 놓은 옷은

다음에 올 수행자의 자양분이 되고

영혼은 날아가 수미산*에 들어가니

속세와의 인연도, 번뇌도 사라지는데

 

* 수미산 : 불교의 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거대한 산

 

 

 

박사로 가는 길

류근

 

교수가 될 어림도 미래도 없으면서

학교라도 안 가면 술집 귀신이나 될 터인데 싶어

또 비틀비틀 박사 들으러 간다

강의실에 앉으면 비로소 숙취가 좀 헹궈지는 것이

타고난 박사 체질인가 싶어 싱겁다가도

남몰래 창밖 구름과 잎사귀나 훔쳐보고 있는 퇴행을 보면

, 갈데없는 바깥 체질이구나 싶어 곧 안심이 된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느라

정거장이 지나가고 작년의 나무가 더 자라고

담쟁이가 진짜로 담을 넘는 소식에 멈춰 있지 못하였다

남편 있는 여자와 옛날 애인들의 소식이 간간이 그리웠을 뿐

술집 너머의 연애 같은 것에 등록금을 납부할 수 없었다

박사가 깊어질수록 뼛속의 시가 가벼워져서

나는 자주 강물까지 날아가 내 하얀 발목을 베고 눕고

누워서 어떤 전생을 배신해 버릴까 궁구하였다

돌이켜보면 과거가 깨끗한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몇 번의 나쁜 전생이 나를 여기까지 엎질러놓았을 뿐이라는 걸

에필로그처럼 읽는 날은 즐거웠다 뻔한 것은

얼마나 느리고 안락한가 남자가 원해서 거기 털을 밀어주었다는

남쪽 후배가 내미는 술잔은 따뜻하고 나는 사막과

머리 두 개 달린 염소와 주인 잃은 소녀가 통정하는 소설을

박사로 가는 길에 깔아두면 좋을 거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박사는 멀고 내 구두엔 편지를 박지 않았으니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열망과 맹목 같은 것도 쉽게 전생이 되고

가슴을 흔드는 구름과 잎사귀는 늘 바깥에 있고

나는 이제 99천 년째 마지막 학기

술집 건너 다시 비틀거리는 내생 저쪽에

박사로 가는 길이 뻔히 보인다

 

 

 

성북동 가는 길

마경덕

 

이 동네의 주인은 높은 담이다

세콤이나 캡스를 달고 낯선 방문자를 가려낸다. 드디어 담도 사람처럼 생각을 갖게 된 것. 생각이 늘어나자 불안이 담을 쌓고 문을 걸었다. 처럼 우뚝한, 담은 이제 벽이다. 벽은 골목길 야채를 파는 리어카와 떨이를 외치던 생선장수를 밀어내고 제 키보다 높은 지붕을 끌어내렸다. 벽뿐인 동네는 벽끼리 논다. 벽끼리 금을 긋고 등을 지고 건너편 벽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컹컹, 개 짖는 소리만 벽을 타고 넘는다. 담 높은 집의 힘센 개들은 오줌을 갈기며 골목을 쏘다니는 똥개처럼 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높아서 더 불안한, 거만한 벽은 끝까지 벽만 보여준다

 

 

 

고도(古道)로 가는 길

목필균

 

 

 

옛길을 갑니다

당신이 떠난 길 찾아갑니다

가르침 따라

가물가물 기억 더듬으며

한 발 한 발 따라갑니다

 

눈 어둡고 목마르고

긴 여정 쓰디쓴 눈물 삼키며

당신이 가신 길 찾아

가시덤불 헤치며 갑니다

 

보이는 것 그대로 진실인지

지혜로움은 늘 뒤늦게 깨닫고

깨닫고 나면 한 걸음

열리는 고도의 길

 

법문은 짧고 갈 길은

어둡고 멀기만 합니다

 

내 모습은 사라지고

무아(無我)로 돌아서는 길목

텅 빈 공() 속에

다시 내가 보인다는데

 

가다가 돌아보고 다시 가려니

눈 어두워서 가지 못하고

지팡이 같은 경문만 읽는데

게으름만 자꾸 피어오릅니다

 

 

 

내원암 가는 길

목필균

 

수락산 내원암 가는 길

숨이 차다

 

가파른 바위에 박혀있는 계단

비척거리는 마음 한 자락

바로잡아 몸을 세운다

 

돌계단 올라설 때마다

생각이 달아나고

생각이 다시 들어설 무렵

돌계단은 더 가파르게

앞으로 다가선다

 

숨이 목까지 차오를 때야

들어서는 천수경 독경소리

정구업진언

정구업진언

정구업진언

 

천년 묵언수행 중인

미륵 부처님이

치맛자락 여미시며

내려다본다

 

 

 

빈손으로 가는 길

민경교

 

나는 이제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배냇저고리에 기저귀보다

좀 더 큰 옷으로 몸을 가려줄 사람만 있다면

나 빈손으로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거운 욕심을 지고

하루하루를 버겁게 오르기만 하던 산

이제 벗어버리고 내려가야만 한다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져도 좋고

굴러떨어져도 좋다

내 어깨가 새털 같으니 찍힐 일도 없고

상처 입을 일도 없지 않겠는가

 

서서 못 가면 양손으로

땅을 짚어가며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온 삶의 길을 뒤돌아

이제 빈손으로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광주 가는 길

민경대

 

어두운 골목길을 손을 잡고 여울물을 건너듯이

광주 가는 길은 5시간 동안 별빛도 숨은 밤에

달맞이꽃을 보고 아래로 남으로 하강하는 도르레를 타고

쉽게 가려고 미끄러질 듯 가나

버극거리는 자동차 타이어에 검은 형광등은

어제의 눈먼 자가 외치는 소리를 감고

밤의 골목에 색연필 들고

내일 낮에 밝게 켜질 전등에 달 소케트를 손질하며

전류를 고압이 아닌 저압의 전류를 송전하여

전구 촉의 텅스텐이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전기 볼트를 올리고

이제 손을 잡고 스위치를 켤려고 하고 있디

교차하는 생각들을 보듬고 혹은 때아닌 항아리에 불을 잔뜩 넣고

그 물이 튕겨져 땅바닥에 쏫아지지 않게 기도를 하고 있다

깊어 가는 겨울밤에 호호 손을 비비며 군밤 같은 솔곳한 이야기들이

창밖을 나가고 싶어 밖으로 노크를 한다

 

 

 

무릉 가는 길

민영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해야 한다

가까운 길이 있고 먼뎃길이 있다

어디로 가든 처마끝에

등불 달린 주막은 하나지만

가는 사람에 따라서 길은

다른 경관을 보여준다

보아라 길손이여,

길은 고달프고 골짜기보다 험하다

눈 덮인 산정에는 안개 속에 벼랑이

어둠이 깔린 숲에서는

성깔 거친 짐승들이 울고 있다

길은 어느 곳이나 위험 천만

길 잃은 그대여 어디로 가려 하느냐?

그럼에도 나는 권한다

두 다리에 힘 주고 걸어가라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찾아가라고

길은 두려움 모르는 자를 두려워한다고

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고

...... 한데, 어디에 있지?

지도에도 없는 꽃밭

무릉(武陵)

 

 

2

 

 

 

 

그대에게 가는 길

박금숙

 

새벽 기차를 타고

그대에게 갑니다

굳이 반겨주지 않아도

그대 등 뒤에 비춰진

햇살 한 자락

볼 수 있으면 됩니다

 

산 같고 강물 같은 그대

말없이 멀어졌던 들녘에는

희뿌연 안개가

어젯밤 뒤척이던

빗장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겹겹이 쌓인 산 따라

세월만큼 자란 나무들,

이제 보내지 못해

무수히 매달고 있던 편지들을

곱게 물들여 어디론가

전송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기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비켜난 철로 밖으로

들꽃처럼 피고 지던 그리움이

한 움큼씩 다가옵니다

 

이 길 돌아올 즈음이면

저 안개 속에 숨어있는

알 수 없는 풍경들도

그리움 몇 조각 덜어낸

밝고 투명한 길을 열어주겠지요?

 

 

 

봉화 가는 길

박성현

 

1

빈 항아리에 바람이 스친 것처럼 그 표정이 밝았다

둥근 벽을 퉁기며 진동하는 바람은 그 근원을 모른다

또한 끝을 알 수 없으니 헛꽃에 불과할 뿐이다

동치미를 한입에 마신 탓에 이가 시렸다

박 씨는 나무못을 깎으면서 날카로운 쪽을 창으로 겨누었다

창밖의 겨울 속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

언 흙 위에 서리가 내려 박히는

그리하여 속으로만 불이 번져 뜨겁게 타들어 가는 겨울

각각의 달빛은 두 개의 그림자에서 다시 솟아올랐다

박 씨는 가물어가는 목에 탁주 한 사발을 퍼붓고

나무못을 거두어 품에 넣는다

빈 항아리에 다시 바람이 찼다

 

 

2

소한이 지나고 큰 눈이 내렸다

사위는 백색으로 들끓고 있었다

날이 저물자 아랫동네 정 영감이 불쑥 문을 열었다

겨울에 죽은 자들은 이 산을 넘지 못한다

비린 청어구이와 탁주를 나눠 먹는 동안 박 씨는 정 영감을 어림잡았다

부처님이 계시는 절이나, 사람을 뉘는 관이나 찬바람 막기는 마찬가지네

박 씨는 모든 집이 관이고, 또 모든 관이 집이라고 말한다

 

오동나무 결을 고른다

톱이 닿는 자리마다 오동나무는 살을 선뜻 내 준다

허연 톱밥이 발등에 쏟아진다

폭이 넓어 완만하게 쓰러진 것은 아래에 단단히 두고

경사가 급한 것은 결을 따라 세운다

오동나무에 쇠를 박아서는 안 되네

 

죽은 기운이 산 기운을 파고들 때 나무 등골에 붙은 숨은 멎는 것이네

정 영감은 탁주 몇 사발에 취한 듯 몸을 불끈거렸다

박 씨는 혀를 끌끌 찼다. 암만 숨이 거둬진 몸이라도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이네. 정 영감은 누울 자리를 보다가

문득 붉은 이를 보이며 환히 웃기 시작했다

 

 

3

오동나무는 단단하게 아물었다

오를 때마다 어깨가 이울었지만, 산을 넘어야 자리가 있다

무순이 가지런히 솟아 있는 밭이랑에 날벌레가 분주했다

산그림자는 길게 늘어졌지만, 길은 더디게 났다

얼큰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서둘러 발을 디뎠다

마음이 먼저 산을 넘었으므로

 

비탈길은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가쁜 숨을 쉬었다

산은 사람들의 이마 위로 높은 바람을 흘려보냈다

오늘 안으로는 길을 낼 수 있을까

이가 닳은 괭이를 만지듯 천천히 오동나무 이음매를 살폈다

늦은 봄이 얇고 긴 숨을 내쉬었다

상여를 멘 사람들이 발을 옮기다말고 산등성에서 멈췄다

 

갑자기 청어구이가 먹고 싶었으나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가는 길

박영희

 

가고 싶지 않았으나

나는 빈손을 내밀러 가야 했다

아버지가 오라 하지 않아도

그 집엔 언제고

엄마보다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를 낳았다는 아버지는

늘 분내나는 그 여자 곁에 있었다

살갑게 구는데도 정들지 않던,

봐도 봐도 낯이 설던 그 여자 앞에

궁핍한 손 쫙 펴 보이면 여자는

열두 살 내 빈손에 일용할 양식과

겨울날의 햇살과

비웃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걸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어떨 땐 달뜬 얼굴로

어떨 때는 폭폭 한숨을 내쉬며

밥을 지으셨다

어머니는 매번 나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그 길,

아버지에게 가는 길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언제고 눈물이 났다

 

 

 

꽃잎 가는 길

박이현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길

걸어가 보자

 

잠시 꿈이었고

기쁨이었다고

말하지 말자

 

낙화 자유로우니

연민에 들지도 말자

 

꽃잎 받으며 빈 지난해 소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서운해 하지도 말자

 

우리의 날이 흩어진다고

애석해 하지도 말자

 

마음 다해 기도문을 외우고 나면

꽃잎처럼 위안이 내려온다

 

다시 올 봄이 있고

계절 내내 피어나는 꽃잎 있으니

허박한 은자(隱者)로나 남을 일이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 번째 길

박용하

 

굴참나무 숲 너머 자작나무숲이 아름다운 날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태풍이 그 나무 속에 있다

나는 길 위에 있고 파도는 길 밑의 길까지 밀려온다

나는 태양을 향해 걷고

태양은 내가 걷지 않는 길까지도 걷는다

그것을 음악이라 이름 부르면 삶은 깊어진다

바다로 가는 길 위에는 단지 세 그루의 나무만 서 있다

나무에 영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영혼에도

나무 세 그루는 서 있다

이 길 위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대가 이 세상 한구석에 골목처럼 접혀 있어도

구석은 이미 보석과 같다

나는 길 위에 있고 길은 내 밑의 사랑 위에 있다

태양의 빛이 끝나는 길 위에는 달빛의 길 또한 흐르고 있고

수평선이 하늘로 빠지는 다섯번째 둔덕에서 부는 휘파람은 스산하다

그대 내가 읽었던 소설은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이다

그 소설은 내가 숲으로 가는 열한번째 길 바깥에서이다

사람이 가장 나중에 사랑해야 할 것이

여자라고 씌어 있던 소설은 적요하다

길 위에서는 돌을 사랑하고 돌을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읽고

일곱번째 바람이 부는 저녁 그 돌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 돌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 강물의 창문은 하늘을 위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대를 위한 것이다

바람이 알맞게 불고 봄 저녁이었고

포구에는 배가 불빛에 지치고 있었다

자작나무숲 너머 사람이 아름다운 저녁이 있고

그 숲을 지나 지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있는 자전거가 아름다운 날이다

나는 바다로 가는 길 위에 있고

그대는 내가 가는 길 끝에 있다

나는 그 길을 가장 낮은 천국으로 가는 첫번째 길이라고 이름 불렀다

 

 

 

철원 가는 길

박인걸

 

갈수록 산은 가파르고

시야는 점점 좁아지는데

진눈깨비 흩날리는 차 창밖으로

어릴 적 추억이 전봇대처럼 스쳐간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함석집

장작불 타는 굴뚝 연기가

한 집 두 집 피어오르고

외양간 황소도 편히 쉬는 날

부침개 지지던 어머니 손길이 그립다

 

드넓은 벌판으로 달리고 싶은데

눈 쌓인 마당을 신나게 쓸며

꼬리치는 바둑이와 뒹굴다

군불에 고구마도 구워먹고 싶은데

 

옆집 살던 분이와

처마 밑에서 정겹게 마주 보다

두 손을 맞잡고 눈길을 걷고 있는데

추억을 끊는 버스의 정차(停車)

무장한 초병이 버스를 가로막는다

 

 

 

삼포 가는 길

박정애

 

미포 지나 구덕포 청사포

손만 닿아도 툭 터질 것 같은 수평선너머

11시발 막차는 하얀 레일을 두고 떠났어요

달리는 산 달리는 마을을 지나

동백꽃 피는 달맞이고개 솔바람 흐르듯

그렇게 떠난 애인 돌아오지 않아요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는

다시 오지 않아요

사람 사는 일이 그런 것처럼

세월 가면 있던 것도 없던 것처럼 잊혀질

그 모든 것들이 이 길로 갔지요

언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저 일목요연(一目瞭然)한 물의 논리 전개를 따라

그렇게 떠났어요

사라지는 것들은 추억을 남기고

그리움으로도 남지요

포개어 꼰 일상의 가부좌 풀고 달려가면

마음도 꽃잎처럼 바람에 날려 보내면

바람을 밟고 나무처럼 서 있을

눈군가를 만날 것 같은

누군가가 나를 기다릴 것 같은

설렘으로 출렁이는 바다

갈매기소리 맑은 삼포길 가면

솔바람이 되었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햇살 환한 꽃이 되지요

 

 

 

길이 없어도 가는 길

박종영

 

길이 없어도 가는 길

오늘은 뒤늦게 부모님 만나러 산소에 간다

거기엔 마음 안으로 열리는 길이 있어서다

 

꽃샘추위 이겨낸 잔디도 보러 간다

여름 기운 업고 얼마나 촘촘히 앉아있는지도

상석 옆 건너심은 봄 동백 한 그루,

반질반질한 열매 몇 개나 달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오늘은 나를 나무라며 가는 길이라

강산에 묻고 온 세월 다독여

이승과 저승, 궁극의 갈림길에 서서

어느 길을 밟고 싶은지 좁은 생각 중에

 

금방이라도 그리운 목소리 들릴 것 같아

귀를 막고 들어보는 절정의 시간에서

수천수만 절벽 아래로부터

내가 허우적대는 소리 들리고,

순간 화들짝 놀라 나를 흔들어 깨운다

 

몸을 낮추고 내 길을 찾았을 때,

산소 모퉁이 배롱나무 너머 빙긋이 웃고 있는 이

그는 누구인가

 

 

 

용산 가는 길

박준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걸어가는 길

박진표

 

서로에게

따스한 가슴 내어주고

저만치 울고 있는 추억

뜨겁게 안아 살아야 할 우리

흐르는 물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버리고 비워가며

우리 베풀며 채워가자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

섬기는 마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갖자

나를 찾아 떠나는

주어진 우리들 삶의 여정

광야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한 송이 꽃을 심으며 그대여 행복하라

차곡차곡 마음을 쌓으며 내어주고

저마다 가슴의 아픈 가시를 뽑으며

울고 있는 상처 매만져 사랑이란 이름으로 품자

누구나 홀로 가는 길

시련이란 상처조차 밉지 않음은

내가 살아있다는 그 이유 하나

그래서 시리도록 행복하고 행복하다

가슴에서 저 하늘로 자라는 꿈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뚜벅뚜벅

눈을 감고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걷는다

 

 

 

남한산성 가는 길

박태강

 

꼬불꼬불 뱀같이

돌고 돌아 오르는 산 도로

옛처럼

남한산성 가는 길

 

굽어굽어 가는 길은

삶을 배우고 깨달음이 있는

참고 보고 느끼고

오르는 멋을 아는 여유로운 길

 

직선의 길은

언제나 평지를 가로 질러

조급함에서 생각을 뺏는

단숨에 달려와 재미없는 길

 

조급함은 여유를 잃고

여유 없음은 삶의 뜻을 잃어

무엇 때문에 왜 가는지

쪼달려 가는 뜻을 잊어 버리는 것

 

뱀처럼 가는 길

정의 길이요

삶의 길이요

여유와 운치의 길이요.

 

가르마 같은 바른길

쪼달림의 길이요

조급함의 길

멋이 없는 사막의 길이다

 

조급함보다 여유로움

바른길보다 돌아감이

즐거웁고 삶이 움트는

남한산성 오르는 길

 

 

 

왕릉 가는 길

박형권

 

각진 사내 네 명이 난전에 쭈그리고 앉아 순대국밥을 먹는다 저민 인생 같은 돼지 창자가 김을 피워 올리고 넙데데한 사발로 막걸리 한잔씩 돌려 마신다 구멍 난 밀가루 자루처럼 눈이 흩날려 해작거려 놓은 막걸리 사발이 팥빙수처럼 솟는다 함부로 내돌렸던 사내들의 귀두부처럼 솟는다 오늘 하루 일당을 반으로 깎아 내리는 눈이어서 숏타임을 뛴 것처럼 수전증이 도진다 이렇게 폭포수로 쏟아지는 눈 속에서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조차 잘 생각나지 않는다 새우젓 내가 나는 그녀들의 앙가슴은 이미 잊었지만 순대국밥의 묽은 국물에 새우젓 털어 넣는 것은 여전히 잊지 않았다 툭툭 썬 돼지 내장이 가리전하지 않은 것처럼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사내들은 아름다운 것들과는 오래 전에 이별하였고 돼지 간을 씹으며 간경화를 치유한다 사내들이 가야 파장할 터인데 눈이 이렇게 젊은 계집들의 오줌발처럼 내리면 순대할미는 나비를 잡는지 손을 들어 허공을 젓는다 사내들이 돼지허파의 바람 맛을 삼키는 사이 빈 그릇에 다시 하얗고 둥그스름한 무덤들이 생겨난다 이런 무덤이라면 사내들은 들어가서 곤히 잠들고 싶다 오천오백 원에 술 한 잔 곁들인 길 위의 휴식에게도 하얀 무령왕릉 한 채씩 분양되는 이런 날에는 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바꾸어 보았지만 늘 그 자리에서 눈밥을 먹게 되는 사내들의 왕릉 가는 길

 

 

 

그대에게 가는 길

배영숙

 

삶이 어려울수록

간절해지는 한 사람

 

화인(火印) 같은 말 한마디

아직도 생생한데

 

이성을 역류하며

좇아가는 가슴살

 

그대에게 가는 물살은

여전히 그리움으로 출렁인다

 

닻도 없어

나침반도 없어

 

표류하다

깊어지는 상처마저

 

그대가 주는

아픈 행복인 것을

 

 

 

무량사 가는 길

배영옥

 

무량사 팻말 아래 화살표는 보신탕집을 가리키고 있다

한 팻말에 절 이름과 보신탕집 이름이 사이좋게 합방하고 있다

도량 건너에는 오리전문점과 암소갈비집도 있다

일종의 묵계 아래 성업 중인,

개들이 꼬리를 말고 당도하는 저곳에서

향냄새를 말끔히 지운 사람들이 질근질근 살코기를 씹어댄다

하릴없이 화살표를 따라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무량사와 보신탕집까지의 백여 미터 거리

그 짧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독경 소리보다 개 짖는 소리에 번번이 마음을 빼앗긴다

죽은 부처에게 바치는 오체투지도

지복을 달래는 향공양도

제 육신마저 흔쾌히 연옥의 불길에 던져버린

견공들의 성불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저 화살표가 안내하는 곳이 소신공양의 정토인가

무량사 가는 길이 까마득하다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

백무산

 

그대에게 가는 길은 봄날 꽃길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좋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이어도 좋다

비바람 폭풍 벼랑길이어도 좋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그대는 그곳에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이어도 좋다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이어도 좋다

왁자한 저자거리 진흙길이라도 좋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꽃을 들고도 가겠다

창검을 들고도 가겠다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

모든 길을 열어두겠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일 수 없다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집으로 가는 길

백무산

 

한적한 노인요양병원 앞 들길에는

언제나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발을 끌고 손목을 떨고 목발을 짚고 산책 운동을 나온 그들은

여기서 마감하리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휠체어를 끌고 안간힘으로 부지깽이처럼 마른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껏 한걸음 한걸음 그들의 소원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 소원대로 내일이면 몇은 보이지 않습니다

간절히 가고 싶었던 그 집에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집으로 가서 어머니 품에 잠들고 싶습니다

어머니 모습으로 나타내신 건 어둠입니다

따듯한 가슴과 밝은 빛을 낳으신 건 어둠입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이란 다시 낳아주는 일입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매일매일 낳아주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먹이고 용서하고 씻기고 가르치는 일은

다시 낳아주는 일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가면 어머니가 다시 낳아주실 것입니다

용서하듯이 다시 낳아주실 것입니다

집이 비었으면 고요히 불평 없이 나를 비우고

나를 지우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둠을 잃지 말아요

저녁이면 어머니가 돌아오십니다

어둠을 잃어버리면 허무와 두려움이 우리를 먹어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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