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혜자 – 대설
강가람 – 폭설의 저녁
강봉환 – 때늦은 폭설, 고뇌
강봉환 – 폭설 속 박새는
강윤미 - 폭설
강인호 - 함박눈
고은영 – 폭설
고은영 – 함박눈 내리는 날
고재종 - 대설
고창식 – 함박눈
고현영 - 함박눈
고형렬 – 사진리 대설
공광규 – 폭설
공광규 – 폭설 아침
공재룡 – 함박눈 내리는 날에
공재룡 – 함박눈 소리 없이 쌓인다
곽재구 – 큰 눈 내리는 날
구분옥 - 함박눈
권경업 – 폭설
권경업 – 함박꽃, 함박눈
권경희 – 함박눈이 내리면
권동기 – 함박눈에 취해버린 밤길
권순자 - 함박눈
권승주 – 함박눈 오는 날
권오범 - 폭설
권오범 - 함박눈
권옥희 – 함박눈 속에 눈을 맞추다
김경렬 - 대설
김경윤 – 대설(大雪) 후
김경주 – 폭설, 민박, 편지
김경희 - 대설
김광석 – 함박눈
김귀녀 – 함박눈이 내렸네
김금용 – 까만 폭설 속을
김길남 – 대설 주의보 속을 걸으며
김낙필 - 폭설
김남기 – 함박눈의 약속
김대식 – 함박눈
김덕성 - 함박눈
김덕성 – 함박눈 내리는 날
김덕성 – 함박눈이 오네
김명인 - 폭설
김미숙 – 함박눈이 내리는 날
김병근 – 함박눈
김삼주 - 폭설
김서곤 – 폭설
김수열 - 함박눈
김영근 – 대설에 눈을 기다리다
김영랑 - 함박눈
김은숙 – 폭설
김은식 – 내 안의 대설 특보
김이듬 - 함박눈
김일선 – 대설, 겨울 같지 않은 날
김정희 - 폭설
김종구 – 폭설 내리던 날
김종익 - 함박눈
김주은 – 폭설
김지헌 – 폭설
김지희 - 폭설
김해인 – 대설에 첫눈이 온다
김향숙 – 폭설
김현주 - 함박눈
김흥기 - 함박눈 오는 날엔 정동진행 기차를 탄다
나상국 - 대설
나상국 – 대설 주의보
나상국 - 폭설
도종환 – 폭설
류근 – 폭설
류제희 - 폭설
마종기 – 폭설
목원진 - 대설
문정희 – 한계령을 위한 연가
민영 – 대설(大雪)의 시(詩)
박가월 – 폭설
박경희 – 대설 주의보
박서혜 – 함박눈
박성우 – 나흘 폭설
박시인 – 함박눈
박유동 – 폭설
박이화 - 폭설
박인걸 – 폭설
박인걸 – 함박눈
박진성 - 폭설
박진표 – 오늘이 대설
박태강 – 폭설
박희홍 - 폭설
백봉기 - 폭설
백승학 – 함박눈이 내릴 때
백원기 – 눈 없는 대설
복효근 – 폭설 이후
대설
가혜자
한여름 현란한 광채로
세상을 유혹하다
자아 도취되어
교만하던 박쥐는
어디로 갔는가
그 울음소리
들리질 않고
쩌렁쩌렁
온 산을 호령하던
범들은 짝을 찾아
교미하여 새끼를 치니
눈 덮인 겨울 산은
행복에 겨운
범들의 보금자리라
눈 속에 싹 틔운 여주는 무엇을
잡으러 나왔는가
오톨도톨
도깨비방망이로
자라나서
당뇨 잡고 건강 잡고
여주 여주 나왔다네
눈 세상에 펼쳐지는
대설 이야기
풍년이 온다네
봄날이 온다네
폭설의 저녁
강가람
눈송이 몇 데리고
갈참나무숲을 찾던 공중이
지상 위에 몸을 뉘여 놓았어
구름과 철탑 사이
한 무리 새 떼를 내려놓던 공중이
가끔은 저렇게
새 떼처럼 내려앉고 싶은가 봐
팽팽하게 조여진 줄을 풀고
쉬고 싶을 때가 있나 봐
나무의 눈썹 끝에
엉덩짝을 내려놓은
무슬림의 흰 천 같은
저 고요는
공중의 이마와 콧날
심장인가 봐
이 저녁 당신과 나도
뼛속까지 투명해져서
저 환한 여백 속으로 날아가
공중의 시간이 되어보는 거야
물고기와 지렁이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높게 날아올라 보는 거야
달빛이 밤을 건너듯
바위의 물결무늬 사이로
중심을 통과하는 거야
그렇게 한 저녁을
하얗게 불타오른 뒤
관절을 툭툭 꺾고
물비린내 풍기며
녹아내리자
마음이 모두
물로 만들어진 것처럼
줄줄 흘려버리고
바람으로 남아
공중의 수심 깊은 것들을
손끝으로 쓰다듬어 보는 거야
때늦은 폭설 – 고뇌
강봉환
봄이 오려는지 며칠 동안 완연하더니
경칩을 하루 앞두고서 하늘도 무심하게
뻥 뚫리듯이 펑펑 부어대는 함박눈으로
갑작스레 하얗게 변해 버린 삼라만상이
눈바람까지 몰아쳐 시야를 가려버리고
움직이는 모든 것 또한 멈춰 서버리니
적막 속으로 푸욱 빠져들어 가버렸네
그래 퍼부어라, 퍼부어라 세상 끝까지
잠자는 듯 고통 없는 삶을 마감 하고서
지금 같은 하얀 세상처럼 될 수 있다면
또 다른 삶으로 이어갈 수도 있으련만
질곡(桎梏) 속에 고통 없는 삶도 있을까
이 한 세상 제발 고통마저 잠재워지게
한없이, 한없이 하얗게 퍼부어 버리게
폭설 속 박새는
강봉환
지독스런 폭설
잠시 멈칫하는가 싶어도 어느새 소복하게 쌓여
하늘이 뻥 뚫리듯, 언제까지나 내리려는지
하염없이 퍼부어 대는 눈 폭탄 세례
치워도, 치워도
돌아서면 어느새 쌓여버리는 눈 폭탄,
오늘 하루가 눈 치우기에 버거운 체
벌써 하루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만다.
폭설
기상 관측 사상 103년 만이라
아직도 하늘은 검버섯처럼 새까맣기만 한데
이제 멈췄으면 하는 바램 일 뿐,
들녘에 힘겨운 박새들마저,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 가시넝쿨 속으로
모이 찾아 쪼아 매달려 보지만, 미끌려
어느새 머리엔 흰 가루만 잔뜩 씌운 체
쉴 새 없이 날아도 허기[虛飢]를 채우진 못하네
폭설
강윤미
공기 속에 숨어 있던 눈이 숨바꼭질을 끝내고 왁자지껄
흩어졌다가 모인다, 폭설
놀이터에 모여 노는 아이들처럼 눈송이들은
서로를 껴안고 쓰다듬으며 내린다
누가 제일 빨리 내려갈까, 누가
바닥을 뭉치고 배신하고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오를까
내기하며 술래잡기하는
눈의 결정
폭설의 커튼을 열고 폭설 위를 걷는 사람들
폭설 속에 갇히면 세상은 가장 큰 담요를 덮은 듯
적요하다 가로등은 파스텔 빛으로 희미해지고
자동차들은 마리아나 해구에 갇힌 물고기처럼 침잠하다
잠잠하다
고립되는 것만큼 황홀한 것이 있을까
고립 아닌 것은 생각할 필요 없다
저녁 메뉴는 이제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이 남자와 저 남자 사이에서 거리 잴 것 없다
폭설의 유효기간 동안 사랑을 나누고
폭설을 탓하며 약속을 전복시키고 미래를 따돌릴 수 있다
고립으로 충분하고 고립으로 빛나고
고립으로 생각은 극진해진다
계절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며 폭설은 폭설의 끝을 향해 사라지고
폭설에 들키지 않으면 폭설은
어느 장소에서 다시 태어날 것
함박눈
강인호
유난히 눈이 많던 어느 해 겨울밤
눈길을 밟아 다녀간 도둑 있었다
흰 쌀을 흘리며 달아난 발자국이
광에서 사립문 밖으로 선명했다
뒤따라가려는 아버지 말리신 건
욕심 많다 소문 났던 할머니셨다
고맙게도 밤새도록 함박눈 내려
그 발자국을 모두 지워버렸었다
폭설
고은영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까
이 시간이면 환해야 할 창에 빛이 실종됐는지 어둡다
나는 방안에 불을 켜고 창문을 열었다
잿빛으로 충만한 지상에 온통 눈이다
아, 함박눈이 세상을 지우고 있다
문명의 흔적들이 앙상하게 뼈대만 드러낸 채
간신히 자기 형태를 지키느라 안간힘이다
커피를 내리고 향긋한 헤이즐럿에 취한 채
아침 시간을 내내 창가에 앉아있다
도심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무지하게 쌓이는 눈을 본 적이 몇 번이던가
살아 있는 것들이여
지금은 노래를 불러라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아무리 폭설이 쌓이고 또 쌓여도
우리가 살아 있음을
매몰되는 것들의 진지하고 아름다운 신음
나무들은 절명의 노래를 부른다
들어보게나
이대로 서서
우리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추상의 얼굴로
빙하기를 맞는 끔찍한 주검을 기다리거나
이 하얀 겨울의 심안에
발아하는 봄의 내음을 듣기도 하며
완벽한 삶을 기다릴 때도 있다네
내 영혼의 들창에 새해 벽두부터
세상을 탈환하는 눈의 함성들이 들려온다
눈의 무게에 눌린 나무들이 소스라치며
두텁게 내려앉은 눈덩이들을 후드득 털어내고 있다
눈은 폭설이 되어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주검은 저 흰 눈처럼 깨끗한 것일까
누군가 빨간 우산을 받쳐 들고
저 폭설의 새벽을 걷고
활처럼 펼쳐진 상록수 가지에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들이 등장하고
아, 아 도심은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출근길에 매몰된 출구를 찾아
종종거리며 삶을 타전하고 있다
함박눈 내리는 날
고은영
새벽을 틈타
건조한 대지의 자궁을 물들이며
소복이 눈이, 눈이 싸옇다
그리고 오후가 들면서
그 위로 다시 눈이 내린다
함박눈 송이송이
절망 같은 거리마다
음산한 도심의 황폐함을 감추며
행복의 환희처럼 눈이 내린다
동면한 곤충의
부끄러운 허물을 감추고
잠든 숲의 알몸에
수치를 씻겨내는 사랑의 말없음표
중심의 가장 깊은 곳
헐어 피폐했던 가슴
마모된 조각마다 쌓인 상처를 감싸며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이 묘한 이중의 고립된 행복
불현듯, 눈길을 헤치고
그리움에 사무치며
긴 시간 애절하게 기다리던
그리운 네가
소리도 없이 올 것 같은 날
피워 올리는 함박눈
흰 꽃송이 되어 내린다
대설
고재종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꺾는 것이다
또 한잔 꺾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함박눈
고창식
높고 높은 저 하늘은
멀고도 먼데,
흰 눈을 내리시네
꽃을 피시네
넓고 넓은 이 세상은
아득도 한데,
솜이불 내리시네
자릴 펴시네
깊고 깊은 산마을은
고요도 한데
자장갈 부르시네
아길 재시네
함박눈
고현영
함박눈이 왜 함박눈인 줄 알았네
함박함박 탐스럽게 내리더구먼
함박함박 소복이 내리더구먼
함박미소 절로 그려지더구먼
그대도 함박웃음 머금었제
사진리 대설(大雪)
고형렬
하아얀 눈이 마당을 여드레 내리고 나니
눈이 정말로 무서워졌다. 아흐레 만에 날이 드니
눈물이 나는 오후였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선처럼
해도 우물우물 빨리 서산으로 지려 하고
마을은 오랜만에 빨간 불빛들을 서로 볼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친구들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언제나 어둡고 높고 촌스럽기만 하던 설악산이
시진리하고는 바닷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산이
그날 처음으로 야산이 되는 것을 보았다
우리하고는 아무 일도 없는데 거만하게 하늘로 솟았던
산이 순하디순해져서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육백 미터 팔백 미터 산과 수백 미터 낭떠러지가
눈으로 평지가 된 것처럼 신지붕이 야트막하였다.
몇개의 봉우리만이 흐릿한 윤곽을 드러내고
산은 정말 별볼일없는 어촌일지라도 인가 쪽으로 다가왔다
뽀야니 떡가루를 뒤집어쓰고 잠든 눈 속에 내려앉아서
눈 주목 눈 측백 눈잣나무가 아주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모든 형상과 색이 파묻혀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세상은 사진리에서 그 끝까지 고요, 고요였다
공룡 청봉이라는 것들이 눈앞에서 잡힐 듯하였다
후우 세게 입김을 불면 날아가버릴 듯이 작아져서
마치 산은 사진리에서 멀리로 내려다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오후 이후 이때까지 설악이
그처럼 낮아지고 아름다운 적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해 지고도 한참을 설광 때문에 새벽 같았다
발간 등불과 후레쉬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마을
사진리는 그제서야 사람 사는 마을이 되었다
아흐레 동안 산이 눈 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날 내다본 동해는
무슨 일인지 물 속에 다니는 고기 소리가 날 듯이
맑게 개인 하늘 아래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눈도 한 송이 쌓이지 않고, 그만으로 흐르고 있었다
폭설
공광규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나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폭설 아침
공광규
부드러운 눈이
꼿꼿한 대나무를 모두 휘어놓았습니다
소나무 가지를 찢어놓고
강철로 만든 차를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크고 작은 지붕들을
폭 덮어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개 한 마리 함부로 짖지 않고
쥐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따악!
앞산에서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 한 번
고요가 모두를 이긴
폭설 아침입니다
함박눈 내리는 날에
공재룡
하얀 함박눈이 내리는 날은
그리워 타버린 까만 가슴에
아픔을 보듬어 주듯 쌓인다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며
등 보이며 임 떠나던 날에도
함박눈 소리 없이 내렸었다
한해가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기약 없이 떠난 철새 빈자리
그리움은 아린 가슴에 머문다
메마른 가지 함박눈 쌓이면
행여 인연 될지 모를 바람이
그대 떠난 길목을 서성거린다
함박눈 소리 없이 쌓인다.
공재룡
오빠 손에 자란 누이가
어느새 예쁜 여인 되어
시집가며 울던 산길에도
함박눈 소리 없이 쌓인다.
밤나무 숲 까치둥지에도
떠나던 누이의 두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에도
함박눈 소리 없이 쌓인다,
함박눈이 내리면 온다던
누이의 빈자리 바라보는
오빠의 따스한 가슴에도
함박눈 소리 없이 쌓인다
큰 눈 내리는 날
곽재구
한때
나는 눈이
사이비 혁명이 숨결을
닮았노라 생각했었다
긴긴 사랑의
한숨 소리도 아니고
마디마디 뼈 시린
고통의 눈빛도 아니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빛나는
백합의 골짜기는 더더욱 아니고
그럭저럭
상심한 강물을 따라 흐르다
상심한 강물 속에 저문 육신을 눕히는
하, 이 세상의
하찮은 그리움의 부스럼딱지
이거니 했다
그러했거니
동무여
오늘 밤은 네가 관장하는
이 세상 넓은 과수원 위에
이 세상 사람들이 채 알지 못하는
그리운 과일들의 이름을
새록새록 새겨다오
더 따뜻하게
더 순수하게
더 믿음직하게
온 세상을 뒤덮는
새하얀 약속의 불기둥을 보여다오
함박눈
구분옥
여름 내내
하늘 언저리 맴돌며
서걱거리던 그리움의 일면들이
우수수 떨어져나와 차가운
상념으로 폴폴 날리는가
설핏 지나간 가을 맑은 날
창백한 낮달에 부딪쳐 돌아온
한 움큼의 햇살이 잉태한 냉소
마침 만삭의 몸 풀어
하얗게 웃음 부스러기 흩뿌리는가
온기 거둔 메마른 입술에
뜨겁게 입 맞추고
돌아누워 이제는 편히 잠들 수 있는
지나간 사랑 위에
상념으로
폴폴
흩날리는가
폭설
권경업
어제와 내일로
이어지는 능선길
장막을 가리듯
함박눈 푸슬푸슬 퍼붓는 날
때늦은 라디오의 폭설 주의보
조난자 명단에 내가 끼이고
멈추지 않는 눈보라
하루 이틀 사흘
꿈길로만 길이 열려
움트는 봄 언덕, 찌르레기 소리
젖은 침낭 안에서 들린다
함박꽃, 함박눈
권경업
어느 핸가, 무제치기 위
내 깍지 무릎 위
네 귓볼 내음의 함박눈
한도 없이 쏟아졌다
늦유월이 하얗도록 쏟아졌다
올해는, 그대 없어
신갈나무 알몸이나 덮으라며
함박 꽃송이
웬 삼동(三冬)에, 펑펑
이리도 쏟아졌다
함박눈이 내리면
권경희
밤새 내린 함박눈으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목들은
차오르는 햇살에 눈이 부시고
창 너머 윤슬처럼 빛나는 설원으로
꼬깃꼬깃 접어둔 유년의 추억들은
비밀 서랍 안에서 뛰쳐나와 봉싯거린다
동산 위에 함박꽃을 피운 소나무
순백의 꽃가루를 산산이 흩날릴 제
동네 아이들은 동심원으로 뒹굴고
맑은 웃음소리 산새에 메아리쳤다
마을 앞 실개천 돌 틈 사이로
맑디맑은 동요가 흐르고
소복이 쌓인 징검다리 오르며
시린 발 동동 구르던 까밋한 아이들은
어디 별 아래서 함박꽃을 피울까
함박눈에 취해 버린 밤길
권동기
미칠 듯이 눈이 내립니다.
까무라칠 듯이 눈보라가 휘날립니다.
사무실 창문 틈으로 날아든
눈송이는 삭막한 편집실에 대한 반항으로
희디흰 꽃송이로 만개합니다
창밖의 눈보라는 마천루를 삼킬 듯이 내립니다
함성으로 이어진 퇴근의 문 꼬리는 터지고
선두지휘 하나 없음에도 포장마차에 걸터앉아
신들린 듯이 소주잔을 부딪칩니다.
가로등이 흰 천을 두르고 기쁨에 찬
하이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립니다
일심된 남녀직원들의 볼마다 홍조 빛에 그을린 듯
술잔 돌아가는 순간에도 함박눈이 뜨겁게 내립니다
거리마다 신음소리에 꾸벅이는 자동차 바퀴마다
흰 비단결은 무참히 짓밟히고 이리저리 튕겨도
술잔 속의 메아리는 꺼질 줄을 모릅니다.
함박눈에 취해버린 밤길에는
네온사인도 한몫 되어 춤을 춥니다.
늘어선 포장마차에는 인파들로 북적대며
쏟아지는 눈보라에 환호성을 터뜨립니다
미칠 듯이 눈이 내립니다
눈이 내립니다
함박눈
권순자
소리를 침묵으로 켜켜이 쌓은 사람이
세상을 떴지요
아픈 봄날을 입술 깨물며 견딘 사람이
복사꽃잎 붉은 잎들을 수없이 떨어뜨리고
떴지요
만지면 촉촉한 눈물이 차갑게 식어서
앙상한 내 손등에
어깨에 얹혀요
훠이훠이 단단해진 울음을
날려보내요
울음의 파문이 소용돌이치며
바람을 삼켜요
숙성된 소리들이
차가운 허공을 날아가요
적막한 소리들이 쏟아져 내려요
차갑고 따스한 소리들이 훨훨
옷자락 날리며
영혼을 달래는 춤사위를 벌여요
함박눈 오는 날
권승주
그대는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날
사립문을 열고 떠났어요
십일 자를 그려놓고
두 발자국에는
하얀 눈이 쌓이고
부엌에 놀던 강아지
살랑살랑 따라가며
짖어대던 소리에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고통스러운 슬픔을
함박눈 오는 날은
싫어요
그대는
내 사랑보다
도시의 불빛이
더 좋은가 봐요
기다립니다
함박눈 오는 날
둥지 찿아 올 거예요
함박눈 타고 천사처럼
하늘에서
내려올 거예요
폭설
권오범
1
겨우내 어영부영하던 기압골이
변방의 눈구름 끌고 와
선전포고도 없이
밤을 도와 거사를 일으켰다
침묵의 융단폭격으로
하얗게 점령해버린 틈 타
동장군마저 힘 빼물어
동맥혈전증에 걸린 경칩 아침
출산의 꿈에 젖어 땀을 뻘뻘 흘리다
처참하게 몰살된
애먼 비닐하우스들이 안타까워
햇귀가 결딴 난 등골 쓰다듬어 조의를 표할 뿐
평소 벌 떼 같이 오가던 저승사자들마저
약속의 생명선이 사라지자
일제히 꼬리를 사리고 우왕좌왕
충혈된 눈 부라린 채 아우성인 아스팔트
2
변방으로 떠돌던 서름한 성깔끼리 우연히 만나
잠시 못마땅했을 테지만
피할 수 없어 서로 끌어안고
잠시 몸 좀 풀었을 것을
차들에겐 기압골 오르가슴 분비물은 치명적이라서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채
만취한 듯
사지가 뒤틀려 비틀비틀
철석같이 믿었던 지하철마저 덩달아 정신 나가
이 처참한 북새통을 어쩌라고
더러더러 손 놓고 하는 말
바쁘면 다른 방편을 찾아보란다
하늘의 낌새를 감시하며 녹을 먹는 사람들은
오십 년만의 한풀이 사랑이라고 했다가
백 년만의 급습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희석해버린 하얀 세상
함박눈
권오범
이마가 검게 훈제된 송판 붴문 열고
여남은 걸음 돌아
감나무 아랫도리에 개숫물 철퍼덕
갈증 달래주던 엄니
나보다 나이가 많다던
고향 부뚜막 설거지통이
진저리치게 그리워
아까부터 겁나게 헤맨 상념 속
맞은편 짝 잘난 유리빌딩
어수선하게 지워지는 사이
유리창이 콧김과 정분나
은근슬쩍 낳아놓은 민화투 실루엣
그래 맞아, 언젠가 그런 날이 있었지
사소한 목단 열 끗 따먹고 행복에 젖어
꽃만큼이나 환하게 이 마음 헤집어놓고 떠난 너
그래, 잘 산다는 네 소식이려니
함박눈 속에 눈을 맞추다
권옥희
첫눈 치고는 함박눈이다
언제나 첫입맞춤은 벅차지만
사랑이 익으면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느낌도 강하다
서로 묻지 않아도 통하는 사람들
함박눈 속에 눈을 맞추다
눈꽃 속의 표본이 되어간다
대설
김경렬
고뇌의 천둥 타니 온 천지 백야일세
가난한 흥부 동네 마음 양식 채워주고
달빛에 모두 부자네 설원에 첫발 두렵네
천지간 월백 설백 세상이 동색일세
서생으로 나서 한 획 등한시했는데
화려한 노후 기댈까 그저 후회뿐인걸
대설(大雪) 후
김경윤
연사흘 내린 눈으로
땅끝 가는 길도 광주 가는 길도 모두 막혔다
그날의 눈은 계엄군보다 무섭게
모든 마을과 길목을 얼게 하고
지붕들과 들판을 덮고
잦은 정전으로 귀와 눈을 막아버렸다
섬으로 가는 배들도 닻을 내리고
청해다방의 석유난로는 붐비는 사람들의 훈김으로
심지를 낮추어도 좋았다
땅끝 여관에 든 장꾼들은 봇짐을 풀지 않았고
떠돌이 목수들도 연장 대신 화투패를 돌렸다
밤이 깊을수록 거칠어진 눈발 속에서
얼지 않는 바다만 밤새 뒤척였다
세상이 일순 흰 이불 속에 잠든
그 사흘간의 낮과 밤이 지나고
새로 맞은 아침은 갓난애기의 귓볼처럼 눈부셨다
참으로 황홀한 정지의 시간이었다
일생에 한 번은 꼭 이런 아침을 볼 일이다
폭설, 민박, 편지
김경주
1
주전자 속엔 파도 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를 만지고 있었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 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목단 이불을 다리에 말고
편지의 잠을 깨워나가기 시작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이 되었다
쓰다 만 편지들이 불행해져갔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운 것들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끼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끓기 시작하고
방 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핏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몸 속에 떠있는 눈들이
꿈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건가
눈발은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안 보인다는 홍석 곁에
아무도 모르는 무한을 그어주곤 하였다
2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새 ·나무· 별·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 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매일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 만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하자나 눈발에 푹푹 묻혀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다는 것을
대설
김경희
애타던 날들의
깃발은,
그래서
천만 번 흰 것을....
낙목의 시절
혼자 영글은 동백은,
그래서
죽도록 붉은 것을....
지치고
무성한 것들이여-
돌아와야만 해
돌아와야만 해
망향의 귀신이 되어
일흔 살이 되어
조국이 되어.
함박눈
김광석
가로등 불빛 사이로
은은하게
함박눈이 소복소복
자연이 주는 선물이
사랑 잃은 나무에
상고대 피어
겨울꽃 어여뻐라
어머니 영혼 함박눈 되어
하얗게 하얗게
백옥같은 따뜻함이
그리움으로 내려오니
평화의 땅에
축복을 내리시어
서로 사랑으로
온 누리에
행복 충만하소서
함박눈이 내렸네
김귀녀
눈이 오지 않는다고
어젯밤
투덜대며 깊은 잠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함박눈이 내렸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까르르 웃던
순결했던 하얀 마음
창밖 앙상한 벚나무 가지사이
소복이 내렸네
아무도 탐낼 수 없었던
새하얀 슬픔
바람결 따라
이리저리 흩날린 몸부림 흔적
오롯이 남았네
천천히, 하얀 길에
살금살금
설레는 발자국 살며시 남기며
회색 눈발 사이로
조심스레 다가올
그리운 님 기다린다
까만 폭설 속을
김금용
눈발은 늘 따뜻하려니 했어요
오후 세 시의 하늘이 폭설로 새까맣게
덮히는 건 마법의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새해 새날 한가운데서
종로 2가 한복판에서
눈보라 그 쏟아지는 분노 속에서
길 잃고 차량들 뒤엉키는 혼돈 속에서
내 길의 절망을 보고 말았지만
붙잡아 일으키는 손길은 없었어요
그 흔한 핸드폰 하나 울리지 않고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사랑하는 이들은 어디서 몸을 숨기고
지붕 낮은 처마 밑으로
미처 고드름 되지 못하고 흘러 떨어지는
슬픔의 바다
킬킬거리며 도깨비춤 추는 걸까요
발밑에서 미끄러지는 약속을
내 안의 부정으로부터 되잡아 일으키며
까만 폭설 속을 계속 걸어가야 할까요
다시 햇살 나오고
풍성한 설국 하얗게 열릴 거라고
아직 따뜻한 내 가슴 안에 품고 걸어가야 할까요
대설 주의보 속을 걸으며
김길남
서울에 눈이 펑펑 쏟아집니다
기상 관측을 새로 시작한 1937년 이후 최고의 기록으로
서울에 25.8cm라는 많은 양의 눈이 내렸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옛날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20여 년 전 요맘때의 일입니다
나랑 친구는 지리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화엄사를 지나 오르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는
지리산 일대에 대설 주의보가 내려졌다는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코재 근처에 다달으니 제법 많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노고단 근처에 이르니 어두어둑 밤이 찾아옵니다
이곳에서 옛날 선교사들의 별장터로 옮겨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관리사무소에 들르면 폭설에 입산통제라고 가던 길을
막을 것이 분명하여 그곳을 모른 채 통과하여 임걸령을 지나고
삼도봉, 연하천을 지나 벽소령 근처를 지나는데
앞서간 발자국들은 하나도 없고 쌓인 눈은 허벅지까지 찹니다
선비샘에 이르러 눈 쌓인 산행이 이리 힘듦을 느낍니다
산행을 접고 판초 우의를 큰 나무들을 지탱하여
비박 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밤새 소록소록 눈이 계속 옵니다 조금씩 두려움이 왔습니다
기인 밤이 가고 하얀 눈 속에서도 칠흑 같은 여명이 옵니다
장비들을 다시 챙기고 출발을 서두릅니다
덕평봉을 오르는데 셀 수 없는 설벽에서의 추락으로 땀이 비 오듯 합니다
세석평전에 올라 두껍게 쌓인 적설량으로 천왕봉으로의 진군을 포기합니다
동남쪽 거림마을과 길상사를 향해 하산길을 재촉합니다
눈길을 걸을 수 없어 설영(눈 수영)을 합니다
내리막길이라 파묻히지 않고 서서히 잘도 내려갑니다
길상사 부근에 도착하여 평온을 회복합니다
입었던 옷들이 물속에 빠졌다 나온 듯 물쩍 거립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억척스러운 모험(?) 산행으로
그 옛 그곳을 같이 오르던 그 친구는 지금 내 곁에 없습니다
오늘 눈이 퍼엉 펑 쏟아지고 있는 북한산 길을 오르면서
그때 그 시절의 추억들을 뱉아 그려 봅니다
폭설(爆雪)
김낙필
미시령에 눈이 내려서
용대리 사람들이 고립됐단다.
허리춤까지 눈이내려 대문도 못열고
집안에 꽁꽁 갇혀있단다
놀이온 서울 친구는 집에도 못가고
산나물이나 무쳐먹으며
방구석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단다
그들은 걱정이 태산 같다는데
나는 왜 그네들이 샘나 죽겠을까
소나무가지가 쩍쩍 갈라지듯 쌓인 눈천지
나무도 산도 개울도, 집도 자동차도
천하 흰백 일색
눈에 선하다
친구에게 전활 걸었다.
"야! 용대리에 눈이 1m가 넘게왔대.."
"백담사가 부르는데 가봐야하질 않겠니?"
"어떻하지?.. 자꾸 오라는데.."
친구 왈(曰)..
"미친놈! 십이선녀탕 눈구경 다녀온지
달포도 안됐는데 또 가냐?"
"백담사가 널 왜 부르는데?"
나 왈(曰)..
"몰라?..자꾸 오라네.."
미시령 휴게소에 갇혀
발 동동구르는 그사람들이 왜 이렇게 부러울까..
아.. 눈꽃세상..
가고 싶다..
"친구야! 가보자..."
함박눈의 약속
김남기
흰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거리를
하얀 세상으로 만들고
희망을 선물하며
소복이 내리고 있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희망이 넘치는 세상
삶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평화를
약속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억압이 일상화되지 않고
가진 자들을 대변하지 않고
대다수 약자들을 위해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흰 눈이 우리 가슴을
깨끗하고 맑게 만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없는
희망이 넘치는 세상을 위해
함박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다
함박눈
김대식
아직도
낙엽에 눈물 담을 추억이 남았더냐
아직도
구절초 한 묶음에
아련한 그리움을 담을 향수가 있더냐
찬바람 된서리에도
사라지지 않은
이슬이 맺혔더냐
모두를 하얗게
겹겹으로 덮어버리고
그렇게 철석같이 잊기로 하고선
또 함박 같은 그리움만 쏟아 대느냐
함박눈
김덕성
반가움에
떨리는 두 손으로 감싸주려 하면
요술쟁이처럼
번번이 사르르 살아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솜털 같은
예쁜
내 사랑
뺨에 스치는 사랑의 온기
포근포근
선율처럼 흘러오는
내 사랑아
먼 길을 떠나
말없이 춤추듯 기쁘게 내리는 너
하얀 얼굴이
너무 맑고 아름답구나
하얀 웃음으로 다가오는
사랑스러운
내 사랑아
함박눈 내리는 날
김덕성
1
나그네 같은 생애
솜처럼 보드러운 함박눈에서
하얀 마음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파란 솔잎 위에 핀 하이얀 눈꽃에서
새로운 꿈을 얻었습니다
비록 향은 없고
아쉬울 만큼 생은 길지 않지만
혼신을 다해 임에게 바친 눈길에서
성스러운 사랑을 배웠습니다
고독으로 잠든 영혼
비실비실 나약해진 생애
개성을 드러낸 듯싶은 눈사람에게서
난 산 생명임을 깨닫고
하이얀 인생을 찾았습니다
2
하얀 눈이 내린다
수정같이 맑은 함박눈
소복 쌓여 온 누리가 은세계를 이루며
옛 이야기와 함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이야기가 담아져 내리며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그런데 동네엔 아이들이 없다
우리네 같으면 벌써 눈싸움이 벌어졌고
눈사람을 만들며 야단법석일 텐데
정서가 메말라가는 세대에
아이들에겐 즐겁고 좋은 시간이 될 텐데
아쉽다
눈이 내리는데 너무 고즈넉하다
그 어린 시절이
그립다
함박눈이 오네
김덕성
솜털을 만지는 듯
포근함으로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하얀 하늘 바탕에서
고운 티 없는 소녀처럼
하얀 눈꽃 송이가 내게 다가온다
하늘하늘 날갯짓하며
하얀 미소로
내 입술에 입맞춤하니
내 사랑 그녀의 입술일세
기다림에 지쳤던 나
내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 차
숨이 막힐 듯한데
하늘도 대지도
눈사람이 된 나도
내 영혼까지도 순백으로 덮으니
복스러운 함박눈일세
폭설
김명인
눈 몇 낱이 금세 폭설을 데리고 온다
저녁이 저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얼른 그 눈을 받아 지붕이며 길바닥에 펼쳐놓는다
지금은 한 해 천년이 후딱 지나가는
겨울 저녁 이른 한때,
천년만큼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얹혔다가
골목 끝으로 내려서 바삐 사라진다
나는 무연히 서서 한 염소가 삼키는 종이쪽인 듯
금세 흐려지는 저들 눈 발짝들 눈으로 주워 담는다
빨리 오시는 눈이나 늦게 오는 눈이
한결같이 큰 꽃 한 송이로 눈꽃 세상 피워낼 때
비로소 불을 켜도 좋은 밤, 그 꽃술 되려고
서걱거리는 얼음 속에 가등들 내걸린다, 바알갛게
이는 여기서도 뒤늦은 사랑이 와서 기웃대므로
더 아득한 곳까지 그리움 지펴지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밤은 등피처럼 얇아지고
오래 세워둔 내 마음의 발전소를 시큰거리려니
그 캄캄함이 외려 따뜻한 순백을 켜드는 걸,
세상은 한결 새벽으로 기울어져 저 눈발
오래 어루만져 이튿날 아침 햇살 속으로 내보내리라
한 힘이 수만 흰 염소떼 몰고 왔다가
평원 자욱하게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김미숙
이불 한 자락으로
허물마저 덮을 수 있다면
식은땀 흘리는 이마 서로 짚어주며
밤잠 설친들 어쩌랴
함박눈
김병근
하늘 빗장 건
회색 공간 성긴 함박눈
이 세상 먼지 같은
검은 욕심 검은 욕망 위로
새하얗게 새하얗게
덮을 듯이 질타(叱咤)하듯
너풀 너풀
살풀이춤을 춘다
폭설
김삼주
기다림이 깊어가자
폭설이 내렸다
길은 막히고
바람만이 자유로운데
유리창마저 성에로 얼어붙은 겨울 이 한밤
흙이여
무녀져 내리는 나의 꿈이여
너는 어디에서
불씨 같은 심장으로
웅크리고만 있는가
폭설
김서곤
구름도 흐느끼는 운두령 깊은 밤에
흰 치마 펄럭이니 동백꽃 지려는가
월광도 시름에 젖어 고개 돌려 우는구나
바람도 자고 가는 한 많은 고갯마루
임 오실 춘삼월은 쉬 넘어 찾아올까
영산홍 꽃잎 따다가 병풍 세워 두려한다
함박눈
김수열
게으른 눈 좀 보소
솔 송이 한 말 이고
소박이 담겼네
늘어진 솔잎
허리 휨도 저리 좋아
하얀 이
드러내 웃고 있네
이웃 좋아 벗 좋아
저리 웃고 있네
눈곱 때고 오셔도
늦지 않은 걸
저리도 소박이 오셨는고
대설에 눈을 기다리다
김영근
그대 기다리듯
대설에 눈을 기다리고
그대 그리워하듯
대설에 눈을 그리워하고
그대 사랑하듯
대설에 눈을 사랑하네
많은 눈이 내린다한들
대설인데 그 누가 뭐라 하리
그대 기다리고
그대 그리워한들
그 누가 뭐라 하리
겨울 내내 내리는 눈보다도
그대를 더 많이 사랑하는데
함박눈
김영랑
바람이 부는 대로 찾아가오리
흘린 듯 기약하신 님이시기로
행여나 행여나 귀를 종금이
어리석다 하심은 너무로구려
문풍지 설움에 몸이 저리어
내리는 함박눈 가슴 헤어져
헛보람 헛보람 몰랐으료만
날더러 어리석단 나무로구료
폭설
김은숙
1
첫눈은 무장 무장* 쌓여서
빈 들녘은 그대 이름으로 숨죽인다
무장 무장 또 흩날리는 저 춤들 뜨거운데
열리지 않는 길들은 가로눕는다
* 무장 : 갈수록 더.
2
어쩌자고 저 눈 무장무장 내려
먼 곳의 마음 맥없이 길을 잃느냐
저물녘 폭설의 이 아득함
고요만 짙어지는 내 시간의 두덩
고개 푹 꺾이는 등줄기 서늘한데
두 무릎 싸안는 기억은 들 집이 없다
내 안의 대설 특보
김은식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낯선 거리를 이유도 없이 펑펑 쏘다니었소
발자취는 끝 간 데 없이
내 흔적을 미행하듯 찍고 또 찍는
일상의 발자국들
오늘은 그만,
따라오지 마라
혼자 걷고 싶은 날이거늘
하늘은 온통 잿빛에 홀연한 나는
내 그림자마저 벗어두고 길을 나섰나니
해도 달도 눈을 감고 모르는 채
눈만 펑펑 내리는 날
그동안 함께 했던 이들과
못다 했던 일들과도 작별을 고하리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날은
이미 이별한 이들에겐
아득하게 더 멀어질 오늘을 용서해다오
지금은 하늘도 요량이 없고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흰 눈만 펑펑 내리는데
미로 같은 세상을 하얗게 덮은
한 치 앞도 분간 없는 눈보라 속에서
여직 방황하던 세상 보는 눈을
이제 다시 뜬들 뭣하리
나는 아득한 자유의 종소리 언덕 너머로
걷고 또 걷고 쓰러지고
비로소, 그 많았던 기회의 오늘 중
대설을 기해
펑펑 눈 되어 넘어서 가리
함박눈
김이듬
눈이 와, 여긴 함박눈이야
네 목소리를 듣고
별안간 난
한 번도 함박눈을 맞아보지 못한 걸 알았어
평범한 기쁨을 떠나 있는 것 같아
엄청난 사태로부터도
늙은 시인에게서 사랑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말을 들을 때처럼 싱거운 얘기지
눈을 감고 눈을 상상해
폭설이 난무하는 언덕에 서 있어
두 팔을 벌려야 해
입을 쫙 벌린 채 눈덩이를 받아먹어
함박눈은 솜사탕만 할 거야
네게 한 번이라도 함박눈이 되었으면 좋겠어
눈발이 거세지고 조금씩 나는 파묻혀가고 있어
난 하얀 구릉이 되어 솜사탕처럼 녹아가네
눈은 죽은 비라고 루쉰이 그랬나?
네 얼굴에 내가 내리면
코가 찡하겠니?
나를 연신 핥으며 달콤해 아 달콤해 속살일 거니?
나를 베개 하고 나를 안겠지
우린 잠시 젖은 후 흘러갈 거야
너무 싱거운 거 같아 망설인다면
삽으로 떠서 길가로 던지겠지
*너무 젖어도 안 되고,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내리는
지금 밖에 내리는 저 눈정도면 사랑하기에 딱 좋은 량일라나,
사랑도 눈도 너무 많아 질척거리게 되면 삽으로 떠져서 길가로 버려지는 걸...
사랑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말을 시인이 했다면,
시인이라고 다 열렬한 사랑 한번쯤 하다가 생을 마감할꺼라고 여기는 일은 하지 않겠지,
사실 시인이 그렇게 뜨겁기만한 사람들은 아니야, 수은주 아래보다 더 차거운 사람들도 있는거지,
사람들처럼... 눈이 온다
대설, 겨울 같지 않은 날
김일선
12월 초순의 대설은
겨울 같지 않은 이른 봄날 같다
따사로운 엷은 햇살이
벌거벗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
앙상하게 얹히어 있는 까치집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철나무 틈새를 뚫고 휘감아 올라
양지쪽을 점령했던 넝쿨들도
파삭파삭 말라 비틀어 죽었고
늘푸른나무 잎사귀도 윤기 없이 매달려 있다
거무스름한 북쪽 하늘 위엔
희끔한 눈을 이고 앉은 무등산이
대설이면서 지붕엔 눈을 안 내리느냐고
스쳐 가는 흰 구름을 흘겨본다
크고 작은 온갖 흰 구름들은
동쪽 산모롱이에 모두 한데 모여
건너편 파란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파란 바탕 위에 그어진 비행기구름이
너무도 곱다고 감탄하면서
폭설
김정희
저것 좀 봐
지금
무량(無量)의 혼령들이 오고 있어
버선발로
적막강산을 건너는 중이야
눈 속에서 가만히 눈을 열어 봐
수만 겹의 고요가
허공을 밟으며
나를 밟으며
오지
저 아득한
눈먼
행렬
폭설(暴雪) 내리던 날
김종구
...그리하여
폭설(瀑說) 내리던 날...
친구와 밤늦도록
더러운 세상 술잔에 채워 마시고
하얀 눈 위에 새겨진 내 발자국이
문득, 불쌍하게 여겨질 때
내가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눈이 내 발자국을 오히려 감싸 안으며
그래, 참아라
그래, 참아라 눈은 내리고
둥글둥글 살지 못해
가운데가 오목한 발자국, 허기져
둥글지 못한 발자국을 덮어주며
그래, 용서해라
그래, 용서해라 눈은 내려
한없이 들려오는 그분들의 말씀들이
어느덧 나를 덮어
그날의 폭설(瀑說)을 잊혀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함박눈
김종익
눈이 내린다
밤안개처럼 스며드는
천상의 그리움
하얀 옷 입고
마을로 내려오는
생강나무 가지에
추억을 걸어놓는다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 입구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포옹하고
또 하나 신화를 잉태한다
폭설
김주은
로또 복권
해발 1,860m에 비견되는 카타르시스
평화로운 미래가
시원한 풍광과 깎아지른 빌딩 귀로 넘나든다
창 밖 백색지대 나비 눈꽃
황폐한 빙벽에 숨어버린 불씨
구원의 유일한 출구
누구나 원하지만
육일간의 사투
길잃은 낯선 방문객의 경우처럼
끈질기게 착각하는 공허한 미래, 우물 속의 심은아 귀신 떼
아아, 올겨울 오른편 마지막 자궁
감히 어리석은 돼지에 비견되는 사각 진주
제 2의 버유다 산악 지대여,
철없는 위험한 사랑이여,
이제 벗어나야 한다
꽝-
허공의 호러 폭설, 휘날리다
폭설
김지헌
당신, 당신이 오셨으면 …
기다린다 겨울 오후
들짐승이 휩쓸고 간 묵정밭에는
얼어 터진 몇 알의 감자 삐죽삐죽 발을 내밀고
뿌리가 깊지 못한 풀들이
저마다 전생의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텅 빈 들판에 언뜻언뜻 보이는 건
무수한 시간의 삽질 속을 견뎌 오던
겨울나무 뿌리의 금속성 언어들
문득 삽짝 밖 어디선가
삽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
눈,
폭설이다
철 아닌 때 발령되는 한겨울의
공습경보
폭설
김지희
그때 메말랐던 내 눈을 당신 눈빛으로 적셔 주었지
그랬었지. 내 불 꺼진 손바닥에 끼워준 털장갑,
기쁘고 슬픈 표정까지
모두 당신 따스한 눈빛으로 만들어졌지
눈보라가 야수처럼 울부짖는 저녁
거리는 눈으로 차 있고
당신 더운 숨소리, 그 온기 가득한 손길도 얼어붙은
십이월
마른 가지에 걸린 앙상한 계절 저쪽에서
당신 얼굴을 보았어
수은등 불빛도 얼어붙은 길 위로
어둠이 따라오는 소리
내 심장이 물보라 되어 떨어져 내릴 듯
세상 천 개의 추위를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당신의 가슴
한 슬픔을 무너뜨리는 깊은 바람소리
하, 저 눈보라
불꽃보다 선명한 입술, 부드러운 눈빛 모두가
당신 심장마저도 얼어
희뿌연 눈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서로 뜨겁게 언 손 감싼 물방울 된다면
폭설처럼 늙어가는 길목마다
하얀 꽃송이 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거야
얼어붙은 거리 지나
안개꽃 닮은 당신 천 개의 눈빛으로 내 심장 덮을 거야
대설에 첫눈이 온다
김해인
돋보기 너머로 첫눈이 내린다
대설치레는 꾸어다 가도 한다는 날
싸래기처럼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니
덮어버려야 할 하 많은 세상사를
보다 못한 하늘이 덮어주시려나 보다
씻을 것이 쌓이면 비가 오고
덮을 것이 많으면 눈이 온다더니
그래 그렇게 하늘은 무심하지 않은가 보다
하늘에 그물이 얼마나 크고 촘촘하기에
그물코도
그물눈도
하늘에 그물은 보이지를 않건만
그물 그 사이로 내리는 눈발은
얼개미를 빠져나온 싸래기 눈이다
눈이 온다
싸래기가 쌓여 간다
햅쌀 이듯 너무나 하얀
그리움이 되어 내 마음도 하얗게 덮어 온다
폭설
김향숙
꽃나비는 꿈이었을까
눈 내리는 배경은 태초부터였을까
뒷산 소나무들
눈사태 막고 선 허리가 휘고
힘에 부친 가지들 부러지는 소리
숲에 들어 눈에 홀린 사람의 이야기처럼
커다란 창문 앞에 선 채
나는 고립되었다
봄으로부터
함박눈
김현주
지금 하늘은
땅에게 열렬한 구애를 하는 중
조심스레 입을 맞추더니
이제 기어코 하늘은
땅의 속으로 들어가는 중
그칠 줄 모르는
저 질펀한 통정
하얗게 부신 오르가즘
땅 위 모든 것들 눈 감아도
몸이 달아오른 사내와 계집
서로의 몸을 감는,
아이들과 누렁이만
신나서 뛰어다니는 황홀경 속
우리가 부르는 봄은
다 저들이 피워 낸 사랑
폭설
김현태
덮어진 세상
차 위에
건물 위에
하늘 꽃 천사가 불시착합니다
그대에게 갈 수 있는 길조차
길을 잃고
하늘과 땅의 경계도 모호해집니다
추락하는 꽃들이 쌓이기까지
자그마한 고것들이
스크럼 짜고
차가운 맨땅에 먼저 누웠을 것을 생각하니
내 사랑 너무나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귀밑머리에 흰머리가
필 때쯤에야
내 사랑도 그대 가슴에 쌓여 가련지
그대 생각하며 바라본
덮어진 세상, 제법 늙었습니다
함박눈 오는 날엔 정동진행 기차를 탄다
김흥기
함박눈 오는 날엔
정동진행 기차를 탄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가
함박눈처럼 부를 때
그곳으로 가야 한다
소나무 침엽 사이로
모래 틈 사이사이로
내 그리움처럼 쌓일 때
정동진역사 낡은 창가에서
함박눈 나리는 저녁 플랫폼 바라보면
흑백필름처럼 아련한 나레티지(naratage)
잊었던 추억이 눈물로 흐리기 전에
막기차가 영화처럼 떠나기 전에
우리는 약속처럼 가야 한다
함박눈 오는 정동진역으로
대설
나상국
남한강 기슭을 헤매던
칼바람이
북서풍에 휩쓸려
탄금대 아래
남한강 시-퍼런 강물 속으로
떨어져 나리고
때 없이 오락가락 하던
조각구름도
비늘처럼 부서져
황쏘가리 등에 업혀
빠르게 빠르게
거친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남한강 시퍼런 바람....
여주 신록사 절벽 난간에
기대어 잠시 머물던
햇살도 산산이 조각으로 부서져
강물의 비늘이 되어
강물을 박차고 오른다
동안거에든
노스님의 검정색
털고무신 아래
하얗게 하얗게 부서져
겹겹이 쌓이고 쌓이어
끊지 못한 연들이
발목을 잡고 수북이 덮는 밤
남한강 댓바람 울음소리
산등선을 타고 올라
놀란 산 까치가 날아든
광화문 사거리
산 까치의 깃털이
무더기로 부서져 나려
거대한 빌딩 숲의
검은 그림자를
이불처럼 하얗게 하얗게
덮고 또 덮는다
대설 주의보
나상국
절름발이 해가
지친 모습이 역력한 걸음으로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턱에 걸린 거친 숨 토해내며
절뚝절뚝 산 능선을
기어오르고 있다
해 떨어진 바다
밀물처럼 밀려든 어둠을 틈타
내려앉는 저것은
헐벗고 굶주린
지구를 구출하러 온
게릴라 침투조의
하얀 낙하산 부대
검은 지구를
하얗게 하얗게 점령해 간다
폭설
나상국
1
하늘이 미쳤나 보다
지랄병에 염병이라고 하더니
짝사랑도 모자라 상사병이 깊어
해가 되는 줄도 모르고
밴댕이 속까지 몽땅
며칠 밤낮 가리지 않고
잠시 쉼도 없이
다 쏟아놓는구나
높은 코를 어루만지더니
두 개의 봉오리를 지나
호수 깊숙이
저러다가 말겠지
내심 기다려 보아도
브레이크가 파열되었는지
지치지도 않는지
이성을 잃은 것인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게
하늘이 저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2
어린 시절
그때는
눈이 참말로 많이 왔다
어둠이 내리고
낮부터 내린 눈
좀처럼 멈출 기색이 없고
참새 방울새 직박구리 숨어든
다락방에서 내려다본
뒤란의 검은 대밭
하얗게 어둠을 지우며
함박눈이 걱정으로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오죽도 알아서 허리를 숙이고
바람도 숨어버린 밤
처마 밑까지 쌓인 폭설
그칠 줄 모르고 쌓이고
또 쌓이며 내렸다
하얗게 단절된
눈 속 조급한 마음의
터널을 뚫으며
잠들지 못한
안부의 길을 낸다
폭설
도종환
1
때 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려 나갔지오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2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 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 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속
빈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 없이 자라는 새 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폭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 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 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폭설
류제희
개 짖는 소리 눈 속에 파묻힌다
몸속 어디에선가, 백설의 길들이
자꾸 무너져 내린다
산짐승 속 뜨겁게 품어 안은 뒷산
생솔가지 탁, 탁
어둠의 관절을 꺾고 있다
폭설
마종기
무엇이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가
깊은 산속에서 만난 눈사태
앞이 보이지 않게 한정 없이 내리는 꽃잎.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보다 조용하다
온몸에 눈 덮고 잠이 드는 나무들.
아름다운 것은 조용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간단하다
아직 잠들지 못한 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는가
폭설을 핑계 삼아 기대고 다가서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게 서로를 만지는 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큰 눈꽃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용한 것이 무서워진다
저녁이 내리는 우리들이 무서워진다
대설(大雪)
목원진
온난화라 떠들썩한데
모르는 것 아니나 급기야
날려 쌓여든 눈송이 송이는
무엇 할 거 없이 새하얗게 덮이었다.
되풀이하는 계절 이야기
조금 기온이 올랐다 하여 야단
흰 세상 보고 곱게 보이나 걷는데
달리는데 내 사정 불편타 소리 소리
하얀 눈 녹아 물이 되는 생명수인데
누리는 며칠을 못 참아 왁자지껄 한다
어느 학자는 남극이 눈이
많아 녹아 바다 높이 올리면
수몰되는 나라, 탄산가스 때문이라
온 세계 정치가들 머리 짜고 있는데
하늘이 보아 너무 우스워 듬뿍 내렸나
다른 학자는 요즈음 다른 설을 주장함은
태양 맞는 시간 길어 일어나는 현상이라 한다
온 우주 지구 자연의 섭리는
원래 정하여져 있는 것이거늘
세 치밖에 안 되는 혀 나름이며
위정자 모이면 땔감 줄이자 하니
발전도상의 나라들은 딴청을 하면서
부자나라 응분의 부담 갖고 하시오 한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대설(大雪)의 시
민영
온 세상에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
저 건너 용마산 꼭대기에도
하얀 눈이 쌓였다. 그 모습이 마치
산 위에 하늘못이 있는 장백산 같다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 전에
일본 놈 순사한테 두들겨 맞고
말없이 흐느껴 울던 불쌍한 아버지가
지금도 그 산 밑에 유연히 흐르는
해란강 언덕 위에 누워 있다
북녘에서 불어오는 시베리아 바람이
하늘 높이 눈송이를 말아 올리자
그 땅에서 잠든 흰옷 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두 팔 높이 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제 대설이 지나면 섣달그믐,
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에
기러기들이 편대 비행을 하며 남쪽으로 날아가고
저 멀리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 해가 불끈 솟아오를 것이다
폭설
박가월
내가 찾아간 발자국도
폭설에 묻혀버린 인멸의 길이다
너를 적막강산에 두고 찾지 않았다고
야속하다 곱씹으며 원망하겠지
너를 찾다 네 아버지 고견을 듣고
아픈 너의 산사 앞에 서성인 내 마음에
눈물도 고드름으로 굳었다
눈이 녹는 삼월이면 산사 앞뜰에
석설(石雪)이 된 발자국을 보고
내가 산사를 돌고 돌았다는 것을 알리라
그땐 나는 이미 심경은 정리되고
네가 알지 못한 외딴섬에서
녹아버린 눈처럼 그리움조차 지웠으리
대설 주의보
박경희
서해안 일대 대설 주의보에
백양사 넘어가는 양고살재를 막아버린 눈이
나뭇가지를 북으로 돌려놓았다
쭉, 찢어지는 참나무의 기합이
바람 찬 대천항의 맞바람만 하겠느냐만
돌아가는 바람 자락 건드리는 가지의 애달픔은
항구 끄트머리에 서 있는
등대의 불빛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눈 수북이 쌓여 들어와
방구들 지고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내 몸이 북쪽으로 바짝 오그라지고
웃풍 센 방 안 입김만 서늘하다
밖에 고라니가 다니는지
멧돼지가 다니는지
개가 짖어대도
사타구니에 두 손 꽂고
등대의 불빛처럼
깜박이는 두 눈
산이 배가 되어 북으로 간다
함박눈
박서혜
밤새 눈이 쌓여
우리집 마당도 눈밭이고
마당 건너
쌍둥이네 고추밭도 눈밭이다
겨우내 뽑지 않고 버려둔
고춧대 사이로
고라니 한 마리 슬쩍 보인다
오랫동안 고개 묻고 있더니
시선을 느꼈는지
겅중 일어나
산 쪽으로 재빨리 사라진다
쨍쨍한 햇살에
쌓인 눈 반짝이는데
눈은 녹지 않는다
눈으로 경계가 없어진 논들,
오후 산책으로
쌓인 눈에 발자국 찍으며
논둑길을 걸어 나가는데
내 인기척에
먹이 놓친 고라니 한 마리
또 겅중 겅중
재빨리 달아난다
내가 배가 고프다
눈 속에 발자국 두고
찻길을 건너려는데
찻길에 덩치 큰 고라니 한 마리
누워 계신다
그는 이제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나흘 폭설
박성우
폭설이다
버스는 나흘째 오지 않고
자두나무 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
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없이 느긋하다
간혹 빈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는 발길도
점방에 담배 사러 나가던 발길도
이장선거 끝난 마을회관에 신발 한 켤레씩을 보탠다
무를 쳐 넣고 끓이는 닭국 냄새 가득한 방에는
벌써 윷판이 벌어졌고 이른 낮술도 한자리 차고 앉았다
허나, 절절 끓는 마을회관방엔 먼 또래도 없어
잠깐 끼어보는 것조차 머쓱하고 어렵다 나는
젖은 털신을 탈탈 털어 신고 다시 빈집에 든다
아까 낸 눈길조차 금새 지워지는 마당,
동치미국물을 마시다 쓸고 치직거리는
라디오를 물리게 듣다가 쓴다 이따금
눈보라도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간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내던
싸리나무와 조릿대와 조무래기 뽕나무는
되레 눈썹머리까지 폭설을 당겨 덮고 누웠다
하얀 어둠도 눈발 따라 푹푹 쌓이는 저녁
이번엔 내가 먼저, 긴긴 폭설 밤을 산마을에 가둔다
흰 무채처럼 쏟아지는 찬 외로움도 예외일 순 없다
함박눈
박시인
오늘
아침에 깨어났어요.
자그만 눈으로 지켜보면서
하늘엔 차가운 눈이 떨어 지내요
나의 마음은 함박눈과 함께
그대의 마음에 가까이 가네요
난 어느새 꿈을 이루네요
날 잡아주세요
함박눈처럼
폭설(暴雪)
박유동
금년은 경인년 백호랑이해라 하네
용맹과 위엄을 떨치더냐
새해 벽두부터 폭설을 퍼붓네
산에 들에 마을에 강에 길에
평펑 함박눈이 펑펑
온 세상천지가 새하얗게 휘덮었네
작년 한 해 소의 굼뜬 발자국도 지워버리고
노란 황사도 말끔히 시처가고
인풀렛 공포의 독균도 깊이 묻어버리고
몸싸움하는 국회 의사당 지붕도 덮어버렸네
지난 한 해 힘들고 어려웠던 일 다 잊으란다
슬펐고 억울한 일도 다 잊으란다
오직 청신한 대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백포 같은 하얀 눈 위에 새 발자국을 찍으란다
새 발자국 찍고 새 길로 걸어가란다
폭설
박이화
밤새 보태고
또 보태어 쓰고도 아직
못다 한 말들은 폭설처럼 그칠 줄 모릅니다
우리, 그리움에 첩첩이 막혀
더 갈 데 없는 곳까지 가 볼까요?
슬픔에 푹푹 빠져 헤매다
함께 눈사태로 묻혀버릴까요?
나 참 바보 같은 여자지요?
눈 오는 먼 나라 그 닿을 수 없는 주소로
이 글을 쓰는 난 정말 바보지요?
끝없이 맴도는 발자국처럼
눈발 어지럽게 쏟아지는 한 길가
빨갛게 발 시린 우체통이
아직 그 자리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군요
한편에선 쿨룩이며 숨 가쁘게 달려온 제설차가
눈길을 거두어 위급히 병원 쪽으로 사라집니다
아, 그렇군요
내 그리움도 이렇게 마냥
응달에 쌓아두어선 안 되는 거군요
아직 남은 추위 속에
위험한 빙판이 될 수 있겠군요
슬픔에 몸 둘 바 몰라
저 어둔 허공 속 지치도록 떠도는 눈발처럼
나, 당신 기억 속에 쌓이지 말았어야 했군요
그러나,
그러나 그 사랑이 전부이고 다인 나에게는
해마다 어디로든 추운 겨울은 오고
큰 눈 도무지 그치지를 않네요
폭설
박인걸
100년 만에 큰 눈이
서울에 내린다는 뉴스를 들으며
하염없이 쏟아지는 소낙눈이 마냥 즐겁다
현대 문명의 오만함을
납작하게 눌러서도 아니고
사납게 달리던 자동차들을
설설 기어가게 해서도 아니다
심층 저변에 억눌러 놓았던
동심의 용암이 분출하기 시작해서다
산촌을 뒤덮은 새 하얀 눈은
사람들 마음까지 염색을 했고
살구꽃보다 더 고운 눈송이는
죽은 나무에 까지 꽃을 피웠다.
세상은 온통 솜이불이 펴지고
구름 위를 뒹구는 듯 나는 행복했었다
함께 뛰놀던 누렁이와
눈싸움하던 단발머리 시골 소녀
잉걸불에 익던 꿀고구마 향기
저녁밥 짓던 굴뚝 연기
인적도 뚝 끊긴 고즈넉한 마을
내 어찌 그것을 잊을 소냐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첫날 밤만큼이나 설레고
옛 친구한테서 전화라도 올 것 같아
행복한 피가 가슴을 흔든다
함박눈
박인걸
1
창문을 여니
나비처럼 날아내리는 눈이
아무 데나 내려앉아
하얀 세상을 만듭니다.
어머니가 깁던
카시미론 솜이불 보다
더 포근한 온기가
가슴까지 덥혀 옵니다.
눈을 바라보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은
그동안 걸어온 길이
너무 추웠나 봅니다.
나처럼 추운 사람과
경치 좋은 찻집에 앉아
지나온 이야기들을
오순도순 나누고 싶습니다.
털장갑을 끼고
하얀 눈을 흠뻑 맞으며
목적지 없는 길을 걸어도
마냥 행복할 것만 같습니다
2
오늘은 눈이 내린다는
방송 예보를 들으며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
동심의 설국(雪國)을 꿈꾼다.
들춰내기에 분주하고
파헤치느라 정신없는 세상
상처는 깊어만 가고
가슴마다 깊은 골이 파여
한숨은 신음으로 변하고
고통은 원한에 사무쳐
증오의 비수를 품고
복수의 칼날을 세우는 세상
낭만의 풍경은 자취를 감추고
창피한 허물로 얼룩져
황폐와 절망으로 가득한 땅을
하얀 눈으로 뒤덮었으면
일시적 위장일지라도
곧 녹아내릴지라도
어머니 손처럼 쓰러 덮는
작은 허물도 감춰주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해주는
고요와 평온으로 충만했으면
위궤양처럼 헐어버린 가슴
거칠게 꿰맨 수술 자국같이
드러내기조차 창피한 모습까지
긍휼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포근하게 덮어주었으면
소리 없이 많이 내려주었으면
3
아스팔트에 눈이 내린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잊었던 젊은 날의 추억을
고스란히 재연(再演)하고 있다.
초련(初戀)의 소녀와
심(甚)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함박눈을 맞으며 걸을 때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하얗게 내리는 눈송이는
순수(純粹)보다 더 진실하여
내 마음을 눈꽃에 섞어
소녀의 가슴에 퍼부었다.
지난날의 그 소녀는
어디선가 함박눈을 맞으며
주름 가득한 눈빛으로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가슴 한편에 쌓아두었던
결실하지 못한 애련(哀戀)이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악성(惡性) 아토피처럼 돋는다
폭설
박진성
연일 폭설이었다
반지하 방 낮은 창 너머
고향에서 온 부음(訃音)처럼 눈이 내렸다
할머니, 할머니, 꽃상여 속에서 덜덜 떨던 복숭아뼈는
열매를 잉태하시어…
할머니는 말라 가는 작은 화분이었다
손으로 툭 치면 방안 가득
눈발처럼 날리던 향기.
내한(耐寒)이 약한 식물은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대도
살아나지 못했다
빈터에는 아이들 몇 뛰어다니고,
눈이 내리다 말고 한없이
공중에서 떨었다
나무의 뿌리 깊이 창문 열고 눈[雪]을 만지면
오 년 전 죽은 할머니 복숭아뼈 열매 맺어
함박눈이 덮쳐왔다
아이가 온 힘을 다해 눈뭉치를 던졌다
오늘이 대설
박진표
큰눈이 오면
풍년이 든다는데
장난꾸러기 바람이
시샘을 부려
하이얀 흰눈 잠시들려 갑니다
배꺼질라 보릿고개 엊그제 같은데
농자천하지대본
우리네 농부님들 시름만 깊어가는
대설의 밤은 떠날 채비 합니다
부디
열심히 땀흘린 그 땀의 댓가는
위정자여 굽이 살피소서
광화문의 함성 커져가는데
아직도 그 이유 모르시나요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으로 들으세요
싸우지들 마시고 가슴으로 느끼세요
대설인 오늘
큰 눈이 아닌 성난 민심의 소리가
흰눈처럼 쏟아집니다
하얀 눈아 펑펑 쏟아져라
폭설
박태강
1
나무는 눈꽃으로 무겁고
모두가 하얗게 변했다
강은 추위에 유리판 되었고
산은 하얗게 꽁꽁 얼었다
짐승은 먹이를 잃었고
사람들 눈속에서 해를 본다
인적 끊긴 산촌
모두 두더지 모냥 숨어
하얀 연기만 모락 모락
삶을 알리는 종소리 되어 퍼진다
전화 전기 끊어지고
가는 이 오는 이 없고
눈 속에서 짐승 아우성이 들리고
참다 참다 먹이달라 찾아든다
2
들에는 하얀 이불
겨울 호수의 부드러운 비단 펼침
나무엔 눈꽃 피었는데
그래도 펑펑 소리 없이 내린다
수북이 쌓인 눈앞에
너무나 작은
인간의 힘
보잘것없어 발을 묶어 버려
약삭빠른 사람들
보잘것없는 힘으로 가다
미약한
인간 한계를 느끼고
인간이 자랑하는 자동차
도로마다 뒤엉켜
맥없이
무너지는 작은 힘
너의 위대함
가슴으로 파고들어
미혹한
인간의 한계 스스로 느끼며
너의 아름다움
위대한 위력에
사람의 보잘것없음이
더욱 너를 돋보이게 하네
폭설(暴雪)
박희홍
핀다 핀다고 하더니
뒤늦게 피면서
어쩌자고
넌더리 나게 피었니
네가 막
피려고 할 때는
기쁘고 맘 설렜건만
만개(滿開)하고 보니
마비 대란 지옥 등등의
곡哭소리 나는
험한 말이 쏟아져도
넌 생각 없어 보이고
웃음보다 씁쓸함이
앞장서니
어찌해야 쓰겠니
어안이 벙벙하다
폭설
백봉기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고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과
만나고 싶은 사람을
하룻밤이 지나서야
길은 뚫리고, 나는
가던 길을 가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지만
다시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면
기억하게 되리라
뜨거운 국밥 한 그릇에 몸이 녹아
긴 꿈을 꾸며 잠들었던 그 밤을
함박눈이 내릴 때
백승학
살다 보면 바람마저
얼어붙고 곱던 햇살들도
어느 먼 곳에만 머물러서
실낱같은 가슴으로는
숨죽여 울 수조차 없는 날이 많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립던 사람아
그날 그렇게 숨죽여 울지도 못하다가
곱은 손가락으로 생채기 난 꿈들을
온종일 꿰매다가
어두워지는 골목 저 끝에 구부정한 어깨로 걸어나가
추억도
사랑도
눈물도 얼어붙은 하늘에 대고
뭐라고 하셨길래
만 길 허공 저 끝에서부터 얼어붙은
길들을 녹이며
지나온 생애인 듯 멀고 먼 시선 위로
오늘
함박눈이 내립니까
함박눈은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이
이토록 포근합니까
눈 없는 대설
백원기
큰 눈이 온다는 대설
달력이 장난했는지
눈 씻고 봐도 눈이 없다
이른 새벽부터 꽁꽁 묶고 덮고
싸매주었다
철갑을 두른 듯 무거운 옷에
빠꼼하게 눈만 내놓고
뒤뚱거리며 걷는다
불을 지펴서 맞서려는
굳건한 방어심리 였지만
상대 없는 대결에 맥이 빠진다
사람은 워낙 약삭빨라서
당일치기로 살려 하지만
자연의 위대한 섭리는
예습의 삶 살기를 당부한다
폭설 이후
복효근
첫눈인데도 폭설로 내려서
내 사는 이곳의 안부를 묻는 문자가 왔다
마을 앞산과 뒷산에 더러 설해목이 생겼을 뿐
아무 일 없노라고 답 문자를 보냈다
눈이 녹은 오늘 오후 마을 길을 걷다가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닫는다
우듬지가 부러진 저 아름드리 소나무들에게는
한목숨 오가는 일이었을 터
솔잎 하나만 떨어져도 산빛이 줄어들* 터인데
산천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면
섣부른 내 답 문자를 뒤늦게 수정한다
이번 폭설에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
* 두보의 「곡강(曲江)」에서 "一片花飛減却春'을 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