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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강대실 어느 여름날

강봉환 아름답던 지난 여름날이여

강은교 여름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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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다연 여름날의 잔상

 

 

 

어느 여름날

강대실

 

1

벗님네들 얼굴 한 번 볼 양으로

너릿재 새털같이 넘었지요

술 익는 냄새 좇아가다

농주 한 통 실었지요 도갓집에서

주춧돌 놓일 날 기다리는 계절

엉클어져 잔치 마당 한창이라

떡느릅나무 그늘 깔고 둘러앉아

마악 타는 목 축이려는데

건너 편 앞산 아는 시늉하여

어서 오라 손짓해 옆자리 내주고

건하게 들었지요 너나들이해가며

바람도 함께 취해 따다바리고

설움에 겨운 해 버얼거니 눕자

텃새들 시나브로 둥지에 모여들어

흥얼흥얼 어둑발 붙들고 넘었지요

어느 여름날 그 하루 햇살 좋던 날

 

 

2

갈맷빛 동산에

계절이 무르익고

심곡에 열린 가슴

맑은 물 지즐이니

한 마리

꽃나비 되어

시심에 젖는다.

갈매 치마 저고리

덧입은 시 동산

고운 님 노래에

만화가 찾아드니

바람도

시새워하다

시 향()에 취한다

 

 

 

아름답던 지난 여름날이여

강봉환

 

이제 가을 여정 속에

서서히 달아올랐던 여름 향기도

뜨거운 들녘의

풍요로움 만큼이나

들판의 푸른 곡식은 영글게 하고

가을의 감사함을

전하는 계절이네

땀의 소중함은 알알이 열매 맺어

우리네 어울림 되듯 풍요로운 이 가을

그대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음은

행복했던 여름의 향기

고이 거둬 접었나 보네

 

 

 

여름날 오후

강은교

 

어느 여름날 오후, 젖어 있으며 울퉁불퉁한 땅, 빵 한 개가 비에 젖고 있다

허리가 잘록한 개미 한 마리 빵을 살며시 쓰다듬어보더니 어디로인가 급히 간다

울타리 하나가 고개를 수그리고 빵을 들여다본다

비에 빵의 살이 풀어진다. 팥고물이 피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안개 뒤에서 태양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허리가 잘록한 개미 몇 마리 빵을 자르기 시작한다

어디서 들려오는 너의 소리……

울타리가 빵 위에 엎드린다, 젖어 있으며 울퉁불퉁한 땅, 질척이는 고름 사이로, 들여다보는 돌 하나

네가 빵 위에 넘어진다, 우리 모두 빵 위에 넘어진다, 멀리서 태양의 비명소리, 기적이 들려온다

여름날 오후

 

 

 

여름날 스케치

곽기용

 

산허리 끝자락에 구름옷 걸치고

열목어 노닐며 살찌우는

삼십여 리 길 구비구비마다

얼음창고 한 시절을 품었음일까 보다

 

인적 드문 깊은 골짜기에 바람꽃 여미고

구룡령 숨결 따라 모난 돌 구르고 굴리며

시절 인연들과 무더위 잡기 숨바꼭질로

땀 내음 저민 을수골

 

송사리 입질하듯

간지럽게 파고드는 가을 맛에 머물러

한가로이 불볕더위 삼켜버린

물비늘 반짝임에 취해

멍때림은 자리 잡고

 

끊임없는 여울목 들락임 소리

졸졸졸 속삭임 따라

세월의 틈바구니를 휘젓고 싶었던

노을 바람 한 자락 주워봅니다

 

 

 

여름, 어느 날

권복례

 

풍만한 가슴 아래로

홀라비꽃, 초롱꽃,

며느리밥풀꽃, 동자꽃

다 거느리고서

혼자 좋아서 실실

웃고 있는 여름 산

 

 

 

어느 여름날에

권승주

 

장대비가 몹시도 오던 날

내 마음에 쌓여 있는

우울한 낙엽을

쓸어가 버렸어요

 

오래 동안 하늘이

꿈틀대더니

얼굴을 찌푸리더니

 

너무도 더운 날

비가 내려

더위를 쓸어가 버렸어요

 

답답한 내 마음

시냇물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처럼 여유를 찾아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 타고

떠나고 있어요

 

나는 비를 사랑해요

터질 것 같은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그대이니까요

 

 

 

여름날

김광규

 

달리고 싶다

가시덤불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

기관총에 맞은 게릴라처럼

피를 뿜으며

굴르고 싶다

풀에 맺힌 이슬로 혀끝 적시고

새가 되어 계곡 깊숙이

날아 내리고 싶다

넘어지고 싶다

몰려오는 파도에 채여

깎이지 않는 바닷가

한낮의 햇볕 아래 무릎 꿇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고 싶다

바다 밑 깊은 골짜기에

그림자 드리우고

알몸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끈끈한 어둠의 숨결

무더운 수액 출렁이는 숲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쓰러져

잦아들어

땅속을 흐르고 싶다

 

 

 

어느 여름날에

김영자

 

기차가 싣고 가는 저녁노을 속으로

새 두 마리 날아들었다

새의 날갯죽지 사이로 구름의 물결 일렁이는

어깨 푸르른 산과 언덕들

새가 물어온 것일까

기차 안 가득히 꽃이파리들

설레이고 있었다

무더위 속에 두고 온

깃털 같은 쓸쓸한 힘들이 흘러서

연꽃을 피워내는 강가

물결의 무늬를 이루며 따스한

햇살이 모이는 곳으로

기차는 여행을 떠나고 있다

창가에서

새 두 마리 꽃이파리 쪼아대로 있다

 

 

 

여름날의 비애

김재덕

 

잦은 비에 시달리고

몽글거리는 열대야까지

예기치 못한 고통이다

 

그늘 밑에 숨겨놓은

보물 하나 꺼내기도 전에

사랑꾼 쩌렁쩌렁하다

 

굶주린 밉상까지

심술보다운 빨대 짓으로

살갗 두두룩 붓다 보니

 

이 꼴 저 꼴 망설일 것 없이

흰동백꽃 보고픈 대로

순간 이동 가능할지 궁금해진다

 

갈색 변화를 꾀하다가

사색의 계절을 준비하겠지만

사랑하겠다던 속 시끄러운 놈

사랑은 해봤을까

 

 

 

여름날 이른

나태주

 

여름날 이른 아침 거닐어 보는 숲길에는

후덥지근한 나무들의 몸 비린내 쓰거운 풀 비린내

, 저들도 지난밤 잠을 설쳤나 보구나.

힘겨운 오늘 하루 등짐장수 떠나나 보구나

 

 

 

여름날의 기도

문병란

 

여름은 육체의 게절

아직 기도하기에는 햇볕이 너무 뜨겁습니다

내 청춘은 먼 항구에서

한낮의 태양을 겨루어

그 꿈과 사랑을 연습 중이고

아직 주인이 없는 술잔에는

빨간 입술이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멀리 멀리 떠났던 마음들

등불 밑으로 돌아오지 않고

별똥별이 흐르는 밤

젊은이들은 그 연인들 곁에서

빨간 산딸기의 향기를 음미하고 있습니다

여름은 기도하기에는 이른 시간

개똥벌레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곳에서

나의 소년은 이방인의 눈망울에 초롱을 켜고

이 아침 나의 새벽위엔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는 시간입니다

주여, 흩어지는 발자국들 널려 있는

먼 방랑의 해변에서

나의 야생녀는 바다로 뛰어들고

아직도 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다림이 끝나지 않은

사향 박하의 뒤안길에서

한 마리 꽃뱀이 혀를 날름거릴 때

나는 돌멩이를 던집니다

자꼬 자꼬 유성이 남으로 흐르는 밤

나는 아직도 아득한 꿈속에서

해바라기의 목을 조릅니다

 

 

 

여름날 기대

민경대

 

오늘은 큰 그림 속에 우리는 방울처럼 출렁거리며

기다린 삶 속에 희망의 소리 듣고

맑은 사람들의 서성거림 속에

나도 방울 소리 들으며

이것은 하나의 기대 속에 큰 소리 듣는다

 

 

 

여름날 회의

민경대

 

모든 회의는

사실은 회의를 낳는다

모든 암닭이 알을 낳듯이

모든 회의는

회의를 낳는다

회의는 회의를 낳는다

오늘도 회의를 하나 낳는다

어제의 고통속에 엉망 징찬이 된 회의속에서

오늘 회의는 어느 조용한 산장에서

푸른 적삼을 입고 푸른 수의처럼

회의가 회의를 낳는다는 원칙을

나는 오늘 참으로 깊은 골짜기에서

너무나 어둡고 고통스러운 스님 목탁같은 소리속에

회의는 진행 할것 같지 않아

한 여름 날 더위속에

시 한편을 건지고 그냥 닭알같은 시 한편을 쓰고 싶어

선풍기밑에 앉아 있으나

시는 시가 아니고 그냥 회의가 회의가 아닌

뒤죽박죽 같은 호박꽃 같은 시간에 장미 송이를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참으로 밝은 미소만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검은 그림자가 검은 마술 같은 시간을 만든다

 

 

 

비 개인 여름날

박광호

 

먹구름 물러가니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 피어나고

-언 산 능선엔 그리움 젖어든다

 

가뭄의 단비에 몸을 씻은

녹색 짙은 산숲에선

비들기 구구 울고

모든 농작물은 키를 높이며

열매를 부풀인다

 

공원엔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즐기고

쓰레기 줍는 공공근로자는

유모차의 아이에게 손을 흔든다

 

여름의 더위가 무덥기도 하련만

자연과 삶의 이런 모습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여름날의 성당

박광호

 

뜨거운 태양 등으로 가리고

십자가 높이 치켜든

언덕위의 성당

 

무거운 짐 진 자들 다 오라하시네

네가 쉴 곳이 이곳인 즉

내가 너를 품어 안으리

그 음성 들리네

 

세파에 물 키고

숨 막히는 이 고통을

쫓아가 다 고하고 싶네

 

한낮 뙤약볕의 신열을 식히기엔

아름드리 느티나무

짙은 그늘이 좋겠으나

아픈 마음 달래기엔

십자가 그늘이 좋으리

 

 

 

여름날의 꿈

박명숙

 

주룩주룩

비만 내렸던 것 같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도 많았다

해바라기의 눈물도 보았다

눅눅하고 불쾌지수가 높았던

여름밤의 악몽

 

모퉁이마다 괴물 같은 장마가

훑고 간 삶의 터를 짓밟아 놓고

상처투성인 우리는 또

잡초처럼 일어선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미의 사랑은 쟁쟁거리며

도심 속에서 아우성치고

여름의 끝자락에

살아있는 것들의 희망이

꿈꾸기 시작하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 그렇게 남은 계절을 건너며

상처 위에 딱딱해진 딱지는

떨어져 새살이 돋아 아물고

삶의 의미를 한 자락 배울 때쯤

여름날의 꿈은 저물고

 

시나브로 가을바람의 기척에

향기가 번지고 부푼 희망의

씨앗을 맺겠지

 

 

 

어느 여름날 아침에

박양진

 

, 새로 태어나야만 하는 정신은

불멸을 마시려 하는 목마른 새

 

그러나 존재는

하나 속에서 모든 것을 받는다오

 

모호했던 언어들이 베일을 벗고

투명하게 빛나는 아침

 

환상과 정신이 결합하며

그 놀라운 미소를 보내올 때

 

세상의 비밀들은

우리의 감각과 다정히 어울리네.

 

보다 크고, 보다 작은 완성에로 향하는

물음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피어나는 꽃들의 웃음

 

존재로부터 오는 감동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부적이 되고

고귀한 영혼들

우리의 마음을 더욱 빛나게 하네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서

순간들은 영원으로서 흐르고 또 흐르는 것

어느 우물에나 생명수의 맥박은 뜀뛰고

존재의 내면에선

감미로운 풍경들이 열려져 가네

 

 

 

여름날 이 하루

박영춘

 

짧은 밤 긴 여름날

감꽃은 가뭇없이 지고

애감 도사리는 왜

지레 따라 떨어지는가

 

살아가기 힘 든 양

변하는 환경에 고개 내졌다

여름날 이 하루 밤이면

잠마저 찾아오지 않는구나

 

적응하기 어려워

살아가며

변해가는 무질서 속에서

사랑해야 하는 일까지도

변해야 하는 때

닥쳐오는구나

 

애감꼬투리

빗물에 떠내려가는

여름날 이 매미

옷 갈아입을 날 잊었는가

 

질 꽃은 지고

필 꽃은 피고

올 꽃은 오리라 믿으면서도

바뀐 암수 열매를 포기하는

예측 까다로운 변화 속에서

아니지 아니야

고개 저어 봐야 무엇 하는가

 

여름날 이 하루도

어제 본 꽃

오늘 보이지 않는데

 

 

 

어느 여름 날

박인걸

 

매미 소리 청청한 오후

풋풋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아무 근심도 없이 풀밭을 휘저으며

고운 소녀와 함께 마냥 즐거웠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총상 입은 나무들이 싸매지 못해 아파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박격포탄에도

우리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아직 못다 자란 소년의 눈에는

여름 햇살에 피어나는 산나리꽃과

손잡은 소녀는 한 쌍이었다.

인생의 사계절을 읽지 못한 나는

시간의 속도를 읽지 못했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였을 때는

세상이 아름답던 눈에 안개가 끼었다.

그 시절 여름과 지금의 여름에

작열하는 햇살과 푸른 숲은 같지만

내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늦가을에

땀이 흐르는 무더위에도 마음은 서늘하다

 

 

 

한여름날

박효찬

 

그녀 입술에

빨간 립스틱의 그리움은

장미꽃 넝쿨 사이 묻어두고

유난히 큰 안경알이 낯섦은

세월이 흔적인가 

꿀벌들 윙윙 쫓던

여왕벌은

텃밭 배추 꽃잎에 앉아

아름다움과 도도한 모습 찾으러

윙 윙 

관능적임은 고상한 척

아름다움은 주름살로 변해버린

여왕벌아

이젠

초야에 묻혀

장독대 항아리 속 된장만큼이나

구수한 이야기 풀어놓으며

친구들과 함께

저물어가는 석양을 맞이하자

 

 

 

어지러운 여름날

박희홍

 

태양을 향해 날던

이카로스의 날개

달콤하게 녹아

불꽃처럼 피어오른

아지랑이 되어

 

남실대는 파도에 빠져

흔적 찾을 수 없다

 

용기인지 만용인지

욕심 다스리지 못해

되풀이되는 비극

신의 마음도 여린지

다스리지 못하나 보다

 

 

 

여름날

백설부

 

따가운 햇살 한가운데

섬처럼 서 있는

창백한 슬픈 사람들

 

여름숲의 울창함으로

격정을 인내하고

 

지금은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그리울 뿐임을

 

얄팍한 시간들이

차가운 향기로 날린다

 

삶의 언저리에서

바람 끝자락이라도

질척거리며 잡고 싶다

 

여름날은 왜 이리

허기가 지는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인다

 

 

 

여름날의 추억

변종윤

 

하늘엔 뭉게구름 정답게 뜀박질한다

높이 떠올라 먹이를 구하는 독수리

지상엔 삶의 울음소리

귓전에 맴돌고

 

모두가 인간의 탈을 쓴 늑대처럼

정을 버린 잔혹한 인간이 되어

서로가 헐뜯고 도울 줄 모르는 세상에

 

하나 남은 자연의 숲에서

푸르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유월의 여름을 만났다

 

 

 

도둑이 든 여름

서덕준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 올 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그 여름날의 삽화

서재남

 

저 빗속을 걸어 거기 가면 아직 있을까

힘겨운 사랑 서로 가슴에 묻던

간이역 플랫트 홈

빨간 사르비아 꽃

쓸쓸히 오늘도 비에 젖고 있을까

세월이 이만큼 흘러갔는데

설마 아직 거기 있을까

잿빛 하늘 낮게 드리운 포구

버려진 木船 한 척

오늘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까

이제는 아득한 기억 속

당신의 얼굴은 거의 다 지워지고 없다.

눈물뿐이던 그 날의

가슴앓이는 다 나았을까

까마득히 잊혀졌을 나의 이름

어쩌면 아직도 지우지 못한 건 아닐까

 

 

 

여름날의 추억

손병흥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아래 파도치는 검푸른 바다

짙어진 들판이나 정감어린 산자락마저 푸름 드리운

 

훌쩍 키가 커버린 옥수수 밭 서성이는 햇살 따라

가마솥에서 막 삶아낸 먹음직스런 햇감자에 끌리듯

 

새벽녘 지저귀는 새소리 물소리에 일찍 잠을 깨버린

다시금 그 시절 그리며 잔잔한 미소 떠올려보는 시절

 

괜스레 뭉그적거리는 호젓함으로 전망이 좋은 아침나절

말없이 공허해진 초록빛 고개 떨군 허기진 삶의 사슬조차

 

모처럼 그 옛날 회상해본 사랑 가득한 입가 잔잔한 미소

멈추지 않는 눈길 그 자리에 더욱 싱그러움이 가득한 계절

 

모깃불 피워 논 앞마당 고요한 달빛아래 깊은 사색에 잠긴

머물고 싶은 울밑에선 봉숭아꽃처럼 정겨움 묻어나던 장독대

 

 

 

여름날

송정숙

 

여름 날 눈물이 배달되었다

별들이 죽어간

서울 하늘을 대신하여

아름다움을 못 보는

눈먼 이들을 대신하여

잎새 사이로 울어 되던 새들에 눈물

죽어 가는 가슴 적셔주라고

 

 

 

소나기 지나간 여름날

송진권

 

길마다 미꾸라지 올챙이 박실박실 기어나왔지

뻐끔뻐끔 입을 벌린 채 튀어나왔지

소나기에 섞여 내려온 피라미 붕어 새끼

길가 웅덩이에서 놀았지

험상궂은 산은 안개를 쓰고

서리서리 열두발 늘인 용을 놀게 했지

해와 달이 한 하늘에서 놀고

명암이 음양이 한자리에서

지지고 볶고 놀았지

사내와 계집이

사람과 짐승이 한 하늘에서 놀았지

애초에 구분된 것도 없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한 말을 하고

하늘이고 땅이고 따악 맞붙어서

우물이며 산골작 도랑마다 용이 오르고

남에서는 주작이 북에서는 현묘가 놀았지

꼭 오늘만 같았지

길바닥 웅덩이마다 물고기가 뛰어오르고

산천초목 다 눈을 번히 뜨고

굼실굼실 승천하는 용을 보았지

무지갯빛 꼬리의 봉황이 날아다니는 걸 보았지

 

 

 

여름날의 회상

송태봉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니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작은 조각달

높은 하늘 저 멀리 떠 있던 별들이

그 옆으로 슬며시 내려와 앉았다

 

선명한 하늘에

지친 듯 멈춰 떠 있는 작은 구름 두어 점

구름이 가던 길을 멈추니

숲속 작은 나무와 풀벌레도 따라 움직임을 멈춘다

 

초대하지 않았지만 문득 찾아온 고독이란 감정

보랏빛 노을처럼 아련한 감상이고 싶지만

그것은 절실하게 느껴지는 아픔이었고

목이 쉬어라 외쳐 떨쳐버리고 싶은 슬픔이 되어버린다

 

 

 

여름날 마천에서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청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한 여름날의 원두막

신대건

 

샛터말 길쪽, 밭 가장자리 한 가운데, 터 잡은 원두막 망루 위

서리꾼들 접근을 막으려는, 할배의 구수한 옛날 이야기는

요란한 매미 소리 자장가 되어, 낮잠으로 빠져가네.

때론, 땡볕 속 고단한 농삿일로, 땀방울 삭힐 새 없어

잠시 쉬어가는 가벼운 일탈의 여유로운 쉼터.

 

밭고랑 가로 막고 풀잎 뜯는 송아지들, 서리하려는 내 맘 알아차린 듯

큰 눈 부라리고 콧바람 몰아쉬며, 음매~ 큰 울음소리에 할배 깰랴?

할배의 노다지 참외밭, 내 밭 인 양, 잽싼 포복으로 기고·넘고 뒹굴러

온몸 땀범벅 인 채, 콩닥거리는 가슴 쓸어안고, 가쁜 숨 죽어가며

살곰살곰 서리하여 친구들에게 인심(?) 쏠라치면,

 

우리들 무리 속, 입 싼 친구 있기에 아뿔싸 뒤탈이 생겨,

어느새, 원두막 망루 위에 쭈그리고 앉은 짱구 할배,

장죽대로 재떨이 두드리며,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에 서리꾼들 혼비백산.

아주 가끔은, 참외밭 지나노라면, 할배는 개구리참외 던져 주시며,

고얀 놈! -참 웃으시는 너털웃음의 거래가 생각납니다

 

 

 

여름날의 유희

안영준

 

주룩주룩

쉼 없이 밤새 내린 비는

아침이 오기 전

시치미떼고 사라졌다

 

모른 척 능글맞게

동산을 올라 중천에 떠

세상을 밝히는 해는

환한 미소로 내려다본다

 

땅속에 묻혀

숨죽인 매미는 억울한 듯

악을 쓰고 소리 내어

격하게 운다

 

고추잠자리 된장잠자리

누가 보든 말든

앞마당에서

쌍쌍 파티에 여념이 없다

 

 

 

한여름날의 추억

안익호

 

빠알간 태양아래

너털웃음 웃고가는

날 뒤로하며

흘리던 눈물 한 방울

뽀얀 먼지 덧씌워진

가로수 끝자락 넘어

살며시 보이던 파아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들

미루나무 그늘 아래

풀어헤쳐진 가슴

마냥 설레는 사랑으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었던

그날의 추억이...

갑자기 쏟아진

한낮의 소낙비에

바보 같은 웃음으로

멋적음을 달랬다

 

 

 

여름날의 난타

안행덕

 

타다닥 장대비, 두 팔 들어 휘몰아친다

굵고 둥글게 가슴을 때리는 선율

드럼채처럼 세상을 두드리는 저 투명한 손

두드림의 손끝에서 슬픈 영혼 하나 만났을까

 

후두둑 떨어지는 저 간절한 눈물

넓은 연잎도 작은 풀잎도 공손히 받는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아픔을 아는지

연못 속의 개구리도 목청을 높인다

 

연초록 바람의 지휘봉이 절정이다

한바탕 난타를 즐기던 장대비

서로서로 위로하듯 모여 흐르는 물소리

막 내리는 무대아래 관중의 박수 소리다

 

 

 

여름날의 시골 풍경

윤갑수

 

녹음(綠陰)이 짙어가는 한여름

우거진 숲속엔 푸른 나뭇잎들

하늘을 가리고 햇살을 먹는다.

 

콩밭 길섶 우뚝 솟은 미루나무,

해가 기울면 축 늘어진 그림자

그늘 집을 짓고 더위를 피해노는

아이들 놀이터가 되어준다.

 

밭일 끝낸 엄마들 웃음소리에

애들은 엄마를 부르며 달려간다,

해는 산마루 끝자락에 매달려

황혼(黃昏)빛으로 익어갈 때

엄마 등에 업힌 애는 금세

새근거린다.

 

여름날 우리네 삶의 풍경(風景)

시골엔 아직도 정감(情感)이 물든다

 

 

 

여름날의 풀꽃

윤갑수

 

가뭄에 허덕이다 널브러진 풀잎들

물벼락 맞은 대지는 고된 날들을

씻기우듯 가슴에 쌓인 설움을 떨군다.

 

아침햇살에 그만 주눅이 들어

가슴 저미우던 한 여름날의 초원

 

날갠 뒤 들녘엔 앞 다퉈 대나무

자라듯 삐쭉삐쭉 하늘 향해 예쁜

미솔 짓는다.

 

한 여름날 망초 꽃들이 밤하늘을

수놓은 작은 별처럼 세상에

잔별이 되어 하늘거리고

 

살랑 이는 바람에 여우별이 된

행운의 크로버 꽃이 긴 목 내밀어

하얀 얼굴 드리우니 임의 눈길

그대 마음에 머무네

 

 

 

한여름날이 지나고

윤갑수

 

수 백 년 동안 고향을 지켜온

수호목인 버드나무 그늘에선

어르신과 매미가 노닐고 있다.

임 찾는 매미들 합창 소리 무더움을

다독이듯 애처롭게 울어대고

축 늘어진 잎사귀는 바람에 놀라

흐느적거리며 살랑거린다.

 

절정으로 치닫는 한 여름날

뜨거운 열기는 길목을 서성이다

지나가는 조각구름을 둘러메고

돌아오지 않은 먼 길을 향한다.

 

저 산 너머 선선한 바람이 불어

맛깔스러운 시큼달콤한 열매들이

속살을 키워갈 때 매미 울음소리

지나간 자리엔 가을이 성큼

다가와 앉아 있다

 

 

 

뜨거운 여름날

윤민순

 

뜨겁다

뜨거워야 핀다지요

여름날들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심은 이겨내라는 단단한 쌀알 같아

여름날의 시원한 생수는 단맛을 녹이는 따뜻함이죠

 

더욱 뜨거워야 해

옛 추억의 그대를 감상하며

뜨거운 흔적의 등에 담고 있었기에

기억의 솔향 불어온 지금이지요

 

편리함의 지금

시원한 향기는 새들의 날갯짓으로

떠나는 말 뜨거워야 단단한 마음이지요

 

 

 

여름 날 숲속의 산장

이기호

 

박석고개 넘어 금마루

모퉁이 돌아 산장의 빈집 두 채

그곳 내가 머물고 갈 둥지가 있다

 

땀 내 몸 적시고 까치는 반긴다

여름 기운으로 물 올랐나

잣나무 숲에는 잣 주렁주렁

앞다투어 자랑을 늘어놓는다.

 

때 이른 나들이 청솔모는

빗장 풀고 곡간 문 열어놓고

들랑날랑 북새통이다

 

빈집 뜨란 잡초 우거져있으니

새들 다람쥐 청솔 모가

한바탕 공연한다 동물들의 놀이턴가

 

 

 

어느 여름날의 꿈

이대준

 

코뚜레 줄 길게 늘어뜨린 누렁이 암소

앞마당 두엄자리 아래 철퍼덕 앉아

아침에 먹었던 쇠죽을 느릿느릿 새김질 한다

게으른 앞동산 꿩들은 이제야 시장기가 돌아 퍼득드득 동네로 날아든다

 

나는 가을 들판이 누렇게 핀 쇠잔등에 검정 고무신 한 가득 진흙 퍼다 발라놓고

장독에서 메주콩 한줌 꺼내 진흙 속에 듬성듬성 꽂아둔다

장끼 녀석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누렁이에게 아는 척을 하면서

콩알 하나 콕 찍어 빼 먹는다

 

간지럽다 암소가 파리를 쫒듯 꼬리를 흔들면

꼬리에 달아놓은 빨래방망이 꽝- 꿩 머리를 후려쳐 버린다

마루에서 지켜보던 나는 싱글벙글 기절한 꿩을 주웠다

 

 

 

여름날의 꽃이여

이복란

 

우지 마라

숲이여

나무여

새여, 귀뚜라미여,... 그대여,

여름날의 꽃이여

갈바람 아니 머문다고

향기조차 시들겠느냐

꽃 피고 지는 이유

땅이 알고

하늘만이 아는 것을

꽃진 자리 자고 나면

다시,

새 날인 것을

애쓰지 마라

귀뚜라미여, 새여, 나무여, 숲이여

꽃이여

꽃이여

 

 

 

여름날의 로망

이세복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회색빛 빌딩 사이에

에어컨 실외기가 화병 나겠다

 

스트레스로 몸살 앓다가

검댕이 숯처럼 타버릴 것 같은 가슴들

늘 푸른 광야를 달려 바다를 동경하겠지

 

모래톱 쌓인 바다

하얀 물거품에 발 담그고

서핑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일 터

 

카라반을 끌고 다니며

불빛 하나둘 켜지는 텐트들

부러울 만큼 즐기는 게 인상적이었다

 

붉은 주홍빛으로 물드는 노을과

어둑한 별빛을 바라보며

못다 한 이야기는 모닥불 속에서

풀벌레 소리랑 익어갈 거야

 

 

 

어느 여름날

이승희

 

구름이 연신내역을 지나가다말고 가만히 내 방을 들여다본다

 

고요한 물처럼

막막한 마음을 오래도록 밀어온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 멀리 왔다는 말

쓰러질 곳을 찾지 못해

비가 되지 못한 바람같은 거라고

우체국 소인처럼 찍힌다

 

오래도록 서 있는 구름의 끝으로 내 마음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넌 왜 버려진거니

내가 이마를 짚어주던 그리운 것들은 모두 구름이 되었다

 

푸르른 것은 그것뿐이었던 어느 여름날

 

 

 

여름날

이시영

 

동쪽 하늘이

발그레한 걸 보니

거기서

누가

무지개 꿈을 꾸고 있나 봐

 

 

 

여름날

장유정

 

푸른 거탑들 연일 쑥쑥 쑥

하늘 위로 치솟으며

여름을 부른다

 

매미는 제짝을 찾아 구애 송을 부르고

뜨거운 뙤약볕 연일인데

푸른 숲속은 천국이다

 

시원한 바람 향기

가슴 안기고

한 발자국 뗄 적마다

나무의 싱그러움 그리고 푸른 물빛

비색 옛 도공들이

청자에 새긴 물빛

하늘 물빛 푸른 비색 새겨놓다

여름날 흐르는 물빛 속에

님들의 옛 향기가

 

 

 

한여름날의 오후

전선희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

계절에 충실한 8월의 오후

 

여름날의 주인공 매미조차

가만있어도 땀이 난다며

소릴 지르고

 

여름날의 엑스트라 잠자리는

뜨거운 온도에 더는 어지러워

날지 못하겠다며 하소연하는데

 

여름날의 꽃 해바라기는

이 까짓것 하며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해를 바라보네

 

아직은 뜨거운 여름

시원한 바람과 나무그늘이 그리워

내 안의 그대를 그리는 한여름날의 오후

 

 

 

여름날 우화(寓話)

정공채

 

화려한 들판에서 찬란한 해바라기

목을 끌고 집안으로 든다.

- 해바라기야 그저 집으로 들자

한여름 땡볕에 노랗게 자랑하지 말고

머리 숙여야 할 날 아직 모르니?

내 말 듣고 이제쯤 외화(外華)는 거두자

한여름철에 집으로 갈 줄을 알자.

해바라기야 빛나는 그리움 누군들 없었을까

잘 생긴 둥근, 원숙(圓熟)

키도 큰 해바라기야

울 너머 담 너머로 집 뜨락에 있어도

너는 활짝 보인다

처참한 꼴 되기 앞서 나의 해바라기

이제는 집에 들자 어서.

아무리 혼자 된 지 오래여도 낡은

바가지에 쌀 퍼담아 밥 짓는다

내마음 모르니?

질박한 채로 피어서 웃자꾸나

성화(聲華) 따위 어디 쓰겠니.

하일장천(夏日長天) 아래 남들이 안보는 외딴

집안에서 해바라기야

장대비를 피해 나는 된장도 끓이고 있다.

목이 끌려 왔어도 찬란한 해바라기야

나직이 피고 있는 호박꽃 엎드려도 밝지

 

 

 

여름날의 해

정민기

 

여름날의 해는 그해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처럼 살을 너무 많이 덜어 놓는다

저 햇살, 너무도 많이 빠지는 살

거저 주어도 안 먹는 가난을 실컷 먹었다

고집스럽게도 꾸역꾸역 먹고 마셨던

가난이란 가난은 모두 짊어지고 살았다

긴긴 고도를 잃어버리고 곤두박질치는 세월

동그라미를 그리며 원 없이 떨어지는 깃털

파닥파닥, 비린 생선보다도 더 비리기만 했다

꽃밭의 모자이크처럼 날아다니는 나비 떼,

여름 한때의 한차례 소나기를 다 맞은 듯

내게는 추억이란 추억은 추호도 없는 것 같다

살을 놓쳐버린 해는 어쩌지 못해 이글거리고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뙤약볕을 내려놓는다

공중에 해의 살 조각이 흩어지는 작은 생각

다가오는 가을에는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뜨거운 이 적막을 버리고 단풍처럼 물들어

조각구름 띄엄띄엄 추억 건너가게 하고 싶다

타오르며 복종하는 해처럼 이글이글한

지난날의 기억 모두 높이 솟아오르고 있다

나무 아래에서 뉘엿뉘엿 지는 생각 본다

 

 

 

여름날

정종목

 

숲이었으면

연못이었으면 차라리 늪이었으면

진창 속 숨은 꿈틀거림으로

흐물 흐물

썩어

융융한 소용돌이 뚫고

한여름 푸른 꽃대 올라왔으면

수련 이 한 켜 한 켜

눈부신 꽃잎 펼치고

네 자궁 속에 웅크린

혼곤한 잠이었으면

 

 

 

여름날의 향수

정형근

 

여름이 오면

초록의 향기가 머무는 숲속

졸졸 물소리 여울지는 산촌

그리운 내 고향으로 가고 싶다

아침이면 종달새 소리 들리는 그곳으로

배낭을 둘러메고 떠나고 싶은 밤

차이콥스키를 듣고

피카소를 이해하고

칵테일을 좋아하는 친구와

화이트와인 한두 잔 마시며

순수함 속으로 빠져들고 싶어라

진한 고독을 좋아하는 여인과

진솔한 마음속 대화 둘만의

순수한 세월을 나누고 싶어라

마주 보며 어쭙잖은 시 나부랭이

한 편을 놓고 흥얼흥얼 읊조리고 싶어라

무한의 구도를 위해 남도로 떠나는

형극(荊棘)의 순례길로 떠나기에 어울리는 나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발걸음이 소중하겠지

그래서 그날을 못 잊어서 하겠지

그리고 그날도 서서히 잊혀지리라

다시 돌아오는 외로운 나와 너에

동행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지

떠나야 한다. 또 다른 순간을 위하여

슬퍼하지 않고 고독하지도 않고

외롭게 방황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누구라도

여름이 도망가기 전에 녹색 그늘에 안겨

내 붉은 심장에 울음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실컷 울고 싶다

유월의 하늘이 푸른 날 솔바람은

날 일으켜 세우며 어서 떠나라 하네

 

 

 

여름날

조태일

 

햇살, 눈 시리도록 쏟아진다

초목들, 질세라 몸 비틀어

진초록 한껏 뿜는다

햇살, 하이얀 눈물

따갑게 떨구어

초목들, 하염없이 몸 젖는다

창문을 열어라

찌든 마음도 열어라

방마다 웅성거린다

마음마다 마른 강물 뒤척인다

푸른 목소리 푸른 메아리

이파리마다 웅얼거린다

 

 

 

어느 여름날

최순명

 

돌담길 푸른 잎 속에

호박꽃 활짝 웃고

 

돌 사이 돌나물

아장아장 햇살 맞으면

수돗가에 마실 나온

늦은 잠 참개구리

 

마중물한 바가지

펌프가 먹어 가면

쏟아지는 청정의 물

 

' 옜다.''

''으후, 시원타 '’

 

어머니 손에

등을 맡기면 흐뭇한 마음

 

맞아,

난 널 기다린 게 아니라

어머니 손길을

기다렸던 거야

 

한여름 더위 극성을 떨어도

얼음 같은 등목이면

여기가 천국이네

 

마루에 점심밥은

감자로 호박잎, 된장 싸고

돌나물에 밥도 비비면

 

매미 소리 정다운

풍족한 하루 속에

내일의 바람이 분다

 

 

 

여름날의 사랑

최순명

 

덮다

후덥지근한 날

 

선풍기 앞에

망부석 같이 앉아 있는

이 뜨거움은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 그리움 때문일까

 

가물어진 논바닥

물 스며들 듯

마셔도 마셔도 끝없는

이 목마름은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그대 사랑의 깊이 같다

 

 

 

여름날의 추억

최영복

 

우리 뛰어놀던 그해 여름 바닷가에는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바람결에 흩어지고 있을 때

우리 모습은 더는 없었다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춤을 추듯

 

밀려온 지난날의 추억들

홀로 남은 외로운 가슴속을

헤집으며 파고들 때 나는 빠져나갈

길을 잃어버렸다

 

그해 무더웠던 여름날 뜨거웠던 사랑

그리고 이별의 순간들이

어수선한 기억 속에

표류하다 서서히 찢겨나간 난파선처럼

상처에 얼룩진 혼돈의 세월

 

오늘도 누구 한 사람

반겨주지 않는 쓸쓸한 바닷가에는

우리 함께 걸었던 그해 여름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의 오후

최영희

 

2006년 어느 여름날 오후

브람스작, 항가리 무곡 3번이

KBS 고향악단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잔잔히 흘러 나오고

아직 평화로운 풀벌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멀리 우뚝 솟은 깃대 위에는

조국의 깃발

하늘은 아직 무겁고

7월은 깊기만 하다

가슴이 뜨거웠던 예전의 친구들이여

우리 무엇을 그토록 사랑 했을까

지금 창밖에는

하늘을 지나던 새

나뭇잎에 알 수 없는 언어로 미래를 새기고

머리 속엔 혼돈의 바람이 스스로를 어지럽히고 있다

가끔은 흰구름과 검은 구름이 부딪는 천둥소리

, 오늘

누구라 저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여름날의 사랑

최영희

 

발가벗은 채 백사장에 누워

온 몸으로, 온 몸으로

사랑할 걸 그랬지

해바라기처럼

하늘만 바라보며 가슴만 태웠는지

가을이 되고서야

물들어 가는 나뭇잎을 보고서야

당신의 뜨거웠던 사랑의 의미를 알았지

한줄기 퍼부어대던 소낙비도 식히지 못했던

우리들,

여름날의 사랑

날마다 피고지던 나팔 꽃 넝쿨을 접으며 배인

상처를 보고서야

여름날 우리들의 뜨거웠던 사랑이 지나간

서늘함을 보았지

 

 

 

여름날의 오후

최해춘

 

바람은 저 능선 너머로

구름 그림자 길게 몰고

옥수수대 사이로

느릿느릿 스쳐 지나는 오후.

 

삶의 끝자락을

등걸에 부비며

자지러지는 매미 소리만

여름의 채취를 쉰 내 나게 달군다.

 

청마루 앞 댓돌처럼

하염없이 사맆문만 지키고 있는 날

오시는 손님 누구인지 몰라

앞산 넘어 불어 오는 녹색 바람에

살팍한 가슴을 열어 버린다.

 

지나는 길손 지친 걸음 모셔다

우물 터 물 한모금

정갈한 상으로 나누고 싶어도

한 낮의 오후는

가위눌린 아이처럼 속 울음만 삼킨 채

댓돌 앞 빈 마당에 적막만을 태운다

 

 

 

여름날

허향숙

 

플랫폼 벤치에서

할머니 두 분이 도란도란

말씀을 나눈다

하나님이 요즘 불을 너무

많이 지피고 계시네

그러게 말야

우린 사명대사처럼

도력도 없는데 말이지

라며 웃는다

땡볕 이고도 풋풋하게 핀

연꽃들 같다

 

 

 

여름날 - 성모 마리아

허형만

 

제가 당신의 그림자 끝에서도

평화와 안식을 꿈꿀 수 있음은

먼길 부르튼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천둥 치고 벼락 치는

그토록 긴긴 세월 속에서도

푸른 바람과 넉넉한 기쁨으로

이 여름을 지탱할 수 있음은

제가 당신의 서러움까지도

고이 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당신 가까이에 있고

당신은 저로부터 멀리 계시나

눈빛만으로도 손길만으로도

눈물겨운 사랑을 전할 수 있음은

참으로 더없는 행복입니다

 

 

 

여름날

홍대복

 

길게 내리쬐는 무더운 햇볕

시원한 나무 그늘

요란한 풀벌레

매미 소리 여름을 불태운다

 

나뭇가지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

예쁜 꽃잎 흔들고

자연과의 조화로

무거운 기지개 활짝 켠다

 

여름을 뒤덮은 젊음의 열기

정열을 불태우며

무더운 여름날의 추억도

낭만에 젖어

조금씩 조금씩 식어만 간다

 

 

 

여름날의 잔상

황다연

 

농익은 가을 산이

수채화를 그려놓고

유혹의 손길 뻗어 오니

누군들 거부하랴

 

낮게 흐르는 개울물과

어우러진 산새의 음률은

여름 내내 새겨온

시간 속 흔적에

화음을 맞추며 들썩인다

 

설익은 잎새

숭숭 가슴 뚫린 삶 내려놓고

갈바람에 흔들리다

허허로운 몸짓으로 낙하하는

신비로운 춤사위

 

듬성듬성 무리 지어

천연염으로 펼쳐 놓은 오색 물결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의 작품일까

 

생명의 에너지 사그라들 때까지

빗장 풀고 쉼 하는 여름날의 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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