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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식(1967~ )

가까이 가려면 천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갈대

경청

고로쇠나무

공중변소에서

그대는 오지 않고

그저 살다

금연 포기

기차

깃발

나비를 추억함

나의 체중미달

난리도 아닌 고요

다시 해바라기

도요새에 관한 명상

두 사람

때수건이 열리는 물오리나무

떠나가는 새에게

망명지

매인 데가 없는 삶

모래시계

목과(木瓜)

몽상가

물결 무늬 사막

물방울은 빈도로써 모래를 뚫지 못한다

디드나이트 헤드나이트

미래 비전

바다 건너기

발레 극장

별이 불타는 밤에

비애

사막 가는 길

사막 건너기

사춘기

새벽 통증

세월이 흐른 뒤

속미인곡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신재생 알코올 에너지

아 아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어제가 가도 오늘은 오지 않고

어쩌다 종점

엄마는 출장 중

연좌(連坐)로 붉어지는 산

열하일기

오 오

완전무장

이 더러운 세상

이탈 이후

이탈한 자가 문득

인디언 기도문

일관성에 대하여

자유종 아래

중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차라리 어둠을 다오

참 시끄럽다

피맛골 빈대떡집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호라지 좆

홍은동 극동아파트의 오후 4시

홍수

황금빛 모서리

흔적

K(1965~1991)를 추억함

4월이 가기 전에

 

 

 

 

가까이 가려면 천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김중식

 

나는 놀란다

대학 선배에게 전화번호만 일러주었는데

매주 노동자신문이 배달되고 있다

아니 이럴 수가

신문 읽는 데 십 분밖에 안 걸릴 수가

책 소개란에서 [조직노선 3]을 보았을 때도

아니 그럴 수가

그런 책이 삼까지 나오다니

노동자신문이 일년 넘게 버티고 있다니

하기는, 내가 없어도 달은 뜰 것이다

나는 그만큼 멀리 있고

가까이 가려면 천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강 건너, 건너 건너에서 손짓하는 선배에게

미안하지만

면죄부를 사는 기분으로 구독료를 보내면서

선배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구독료가 아닐까 하는 의심

그렇구나

나는 첫 번째 강가에서 손만 씻고 돌아온 셈이다.

 

 

 

갈대

김중식

 

1

몸통 전체가 목구멍이므로 오장육부도 없는 놈이외다 흔들기 전에 흔들리고 바람이 불어오면 알아서 허리 휘는 비겁, 꺾으면 꺾이는 놈이외다 그러나 몸통 전체가 목구멍이므로 상(傷)할 속도 없이 악만 남은 놈이기도 하외다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발성법으로 집단 독백하는 놈이며 남도에서의 살육의 풍문을 듣고는 우우 야유를 보낸 적도 있지만 그땐 두려웠다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낮게 서걱였을 뿐이외다 쉰 목소리일 뿐이었다 내가 나를 어쩌지 못했을 뿐이외다 허(虛)했다 아아 허(虛)했을 뿐이외다

 

 

2

몸담은 곳은 백두산 유격대의 아지트도 못 되고 보길도 대숲 아래 탈속(脫俗)의 도피처도 못 되오. 다만 생(生)과 사(死)의 점이 지대, 운명의 갈림길처럼 질퍽거리는 수난의 땅이외다. 버림받은 땅, 언제나 질펀한 어머니의 살눈썹 같아서 밟힐수록, 짓밟힐수록 끈적끈적 들러붙는 땅이외다.

그러나 깊은 뿌리 못 내리외다. 우리 연대(年代)의 참극을 면하러 땅의 맨 가장자리로 도망쳐왔으므로, 안개 지대이므로, 밖에서 안을 보지 못하고 안에서 밖을 보지 못하므로 아니, 보지 않으려 하므로 물결이건 바람이건 툭툭 건드리고 지나가면 필요 이상 방관의 어깻짓을 하는 몸이므로.

그러나 이곳에서도 온갖 풍파(風波) 다 겪고 이곳은 적막강산 노을에서도 피비린내 나므로 이 몸은, 영지(領地)에서의 안주(安住)를 포기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외다 고로, 존재하외다 전율로서, 외곽에서.

 

 

3

바다가 불러도 바다에 간 적 없고 바다를 사랑한다면서도 깨어지는 파도가 되기를 두려워한 놈이외다 산을 사랑한다면서도 떨어지는 잎새가 되기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산이 움직여도 산에 들어간 적 없는 놈이외다 이런 놈이외다 붉은 산 푸른 바다 사이에서 고개 숙인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의지, 박약한.

 

 

 

경청

김중식

 

이와 같이 들었다 ;

나의 태생은 천해서

정충과 난자가 이룩한 버러지였으나

짐승을 벗어난 때는

내 귀가 그대 말씀에 쏠린 이후였다고

 

이와 같이 들었다

첫사랑은 환각의 춤이었다고 ;

아이스크림 떠먹은 스푼을 입술에 물고 오래 빨던

살아 있는 인형,

나의 넋은 첫 키스에 녹아버린 것이었다고

 

이와 같이 들었다

상처를 딛고 깊어진 영혼으로

나의 거짓말마저 슬퍼하면서

아프게 들어준 그대 ;

제 몸을 녹여 진주를 만들듯이

 

나의 짐승 가죽까지는 아니더라도 짐승 털을 뽑아 준 그대

세상을 비웃던 내가 고마운 세상을 느낀 때는

두 눈 똑바로 뜨고

그대 입술 보면서

귀를 연 순간이었다고

 

나는 들었다 ;

 

그대 입술을 포개기 전까지

나는 버러지 이하였다고

 

 

 

고로쇠나무

김중식

 

흉터투성이 옹이가 불초의 지조인 것은 지리산 다복 솔숲 풀덤불 살점 전부가 칼바람에 찢긴 이후 불초의 몸통이 조금 더 굵고 단단해졌기 때문이외다. 상처를 건드리면 고름이 줄줄 흐르외다 흐른다는 것은 멈추고 싶지 않다는 것이외다 눈빛처럼 흔들리는 잔가지, 그것이 불초의 지조인 것은 섬진강에 떠가는 잎사귀 하나가 안 보이는 물결 전체의 흐름을 예시(豫示)하는 까닭이외다

 

 

 

공중변소에서

김중식

 

나는 요즘 참을 수 없는 일이 없고

심지어 그 말까지 참을 수 있는

어른이다. 기다림 끝, 선생이다

나의 정체성은 곧 당신들의 고통!

최후, 최후까지 참을 수밖에 없는 당신들의 수고가

더 이상 나의 상처가 되지 않는

딱딱한 발바닥이다. 냄새나는

자리일수록 입맛 다시는

목구멍이다, 생활이다, 굵고

짧은 生에 대해 생활하는 순간 끙!

소리는 침묵이다. 놈들에 대하여

함만 주고 아무 말 못하면서

아무 말 못 해놓고 할 말 다 하는 사설이다. 세월아

놈들이 나를 얼마나 구겼기에 내가 이렇게 부드러워졌느냐,하는

정직한 자책은 아양이다. 가면이다

수염이다. 어느 날, 어른이다

은밀한 곳에서만 갑자기 털이 자라고

참아야 할 일들만 못 참는 척하는

못 참을 것들만 참고야 마는

변비다, 당신들과 놈들

양쪽이 모두 징그러워하는 기생충이다.

 

 

 

그대는 오지 않고

김중식

 

졸아붙어 바닥을 태우는 냄비처럼

살 수는 없는 일,

먼 길이 두려운 게 아니다

잃어버릴 게 많아서다

 

체질까지 바뀌어

더운 날엔 땀나고

올챙이배가 무덤 같아서

팔짱을 올려놓는 나른한 오후

 

2단 로켓이 점화되기 직전

허공에 부동자세로 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가면 가겠지만

대기권에 재진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혁명이 아니면 사치였던 청춘

뱃가죽에 불붙도록 식솔과 기어 온 생

돌아갈 곳 없어도 가고 싶은 데가 많아서

안 가본 데는 있어도 못 가본 덴 없었으나

독사 대가리 세워서 밀려오는 모래 쓰나미여,

바다는 또 어느 물 위에 떠 있는 것인가

듣도 보도 못한 물결이 옛 기슭을 기어오르고

두 눈은 침침해지고 뵈는 건 없는데

 

온다는 보장 없이 떠나는 건 나의 몫

신마저 버린 땅은 없으므로 풀잎은 노래한다

온몸을 떨었어도 그대 오지 않았듯이

더듬어 돌아올 길이 멀어지는 게 두려울 뿐.

 

 

 

그저 살다

김중식

 

바람에 흩날리는 한 점 모래처럼

몸 벗고 행방불명된 뱀처럼

 

깨달음조차 끊은 곳에서

사막을 건너는 개미처럼

 

달 표면을 기더라도 숨 참고

살아내는 게 삶

 

멀리 가봐야 세상은 그러하나

삶은 또다시 새 삶

 

물배 채운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금연 포기

김중식

 

다리 꼰 조개가 숯불 위에서

처녀 역사(力士)처럼

지붕을 들어 올리고 있다.

속을 끓이고 있었다는 거다.

 

만년설 지구 지붕이

구름에 턱 괴고 모자 벗어 인사하는데

오랜만에 찾아오신 깨달음 하나

즉, 피는 것도 집착이지만 끊는 것도 집착!

뭔 삶을 그리 아메리칸 퀼트처럼 이어붙이시나!

열 달 끊은 담배를 이어피면서

그래, 집 사는 일만 포기하면 돼.

시인도 둘만 모이면 아파트 이야기를 하는 세상에서

그래, 침묵하면 돼.

 

에베레스트 가는 길 해발 오천오백 미터 베이스캠프

잠든 턱이 희미한 산소 속에서

조개구이처럼 쩍쩍 벌어지고 있다

입 안이 끓고 있었다는 듯이,

숨 쉬는 게 불무질이라는 듯이,

뭔 삶이 이리 숯불인지.

그래, 사는 일만 포기하면 돼.

끊은 일을 다시 끊어버리면 돼.

 

 

 

기차

김중식

 

너무 많은 사랑이 단풍잎 같은 차창(車窓)처럼 달려가네, 보내고 싶지 않아서 길어진 기차, 뒷걸음치면서 붉그락노르락 손 떠는 나의 사랑아, 불타오르던 사랑이 당신 속을 태웠으니, 나는 피할 수 없는 세상 속으로 떠나고 그대는 길을 잃었네, 당신은 내가 사막을 건널 때 끝까지 간직한 한 줌 소금, 깨물어 오래오래 머금을수록 다디단 사랑, 후회 없는 삶은 없고 덜 후회스런 삶이 있을 뿐, 아무 말 하지 말라고 말하는 당신, 안녕

 

 

 

김중식

 

병이 도져

섬 속의 섬으로 찾아드는 것은

피의 흐름이다

 

농심 새우깡을

배가 만든 바다의 이랑을 따라 파종하면

갈매기가 보리밭의 까마귀인 양

물결에 앉아 파먹는 강화(江華)

에서 삼산도(三山島) 가는 뱃길

갈매기의 일상 역시 비참이다

 

이규보의 묘에서 철종의 외가(外家)까지

걸어서 반나절 걸리는 것도

생(生)의 비참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 삶의 길이가

손톱 일주일 치 자라는 거리밖에 안 되어

첨성단에 올랐어도 속았다는 느낌

괴로운 길은 길다.

 

 

 

깃발

김중식

호곡 소리와 봉두난발 지랄 같은 청승 없이는, 뒤틀리지 않고는 한순간도 감당할 수 없다. 구겨지지 않는 그대들의 표정이야말로 돌, 망각의 이끼 낀 대가리들이다

적막할수록 풀 죽고 발악의, 엉망진창 뒤죽박죽의 고통 없이는 한순간도 감당할 수 없다. 상처받지 않는,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그대들의 양심이야말로 이 시대의 흉터, 불감증의 철갑 입은 옹골찬 옹이다.

 

 

 

김중식

 

사막에서는 장미 한 송이로

에버랜드 장미축제를 연다

지평선이 한 송이를 위한 꽃받침이다

 

사막의 해바라기는

태평양 핵 잠수함의 잠망경,

수평선이 한 송이를 위한 부력浮力이다

 

온몸을 가린 채 눈만 내놓은 여인의 눈빛은

빅뱅 직전의 밀도

터지고야 말 생화生花다

 

꽃 한 송이 보고 사막 건너온 벌 한 마리

일대일 대응으로

일생일대의 수태를 고지한다

 

 

 

나비를 추억함

김중식

 

그녀는 소시적부터 처세술에 모범을 보이신 몸이셨다

난세의 시인처럼

남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번데기

애벌레의 모습으로 은둔하여

쓰레기 같은 세상이

치근덕거리지 않도록 처신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또한 영웅에 가까운 몸이셨다

난생(卵生) 설화를 가졌고

미운 오리새끼들이 그냥 미운 오리 어미들로 돼버렸을 동안

관 크기의 어둡고 축축한 지하방에서

색(色)과 향기의 유혹을 참아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성인(聖人)에 가까운 몸이셨다

어느 날, 관 뚜껑을 박차고 나왔을 때

오 황금빛 날개

입 맞추는 자리마다 오

꽃이 피어나도다

꽃이 피어나도다

그것은 거의 부활, 기적의 변신

 

그때부터 그녀는 춘화도(春畵圖)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체중미달  

김중식 

 

바람에 흩날리는 꽃씨는

티끌과 알러지에 불과하다

짐승의 피에 빨대 꽂지 않은 모기는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

파리는 들러붙고

새벽부터 생계를 걱정하는 새의

넋이 가벼울 수 없다

창문 햇살을 타고 휴거하는 먼지들

그것마저 돌보시는 신께서도

더듬으시지, 너, 너희들, 자

꾸 市場이란 이름의 자유만 매매되는 시장에서

삼류시인의 시는 노래가 되지 못한다

노래하고 1달러 건네받은 뉴욕의 길거리 행위예술가가

10달러 주면 좆도 보여준다고 했지

한 발짝만 나아가려도 앞발이 허공에 뜨는

매인 개의 행동반경이 네 자유의 실평수

냄새로 허공을 짐작할 뿐

질문하지 않는다, 짖는다

국군은 이 나라의 부동산을 지키는 것인가

철새는 먹지 않고 대륙을 이동하는가

계룡산 정도령은 한반도의 아토피를 치료할 것인가

뼈가 비었는데

넋이 새만큼 무거워 날지 못한다.

 

 

 

난리도 아닌 고요

김중식

 

아무리 둘러보아도

새는 새고,

산은 산이다.

새소리도 산의 고요에 한몫하는

평일 저물녘 하산길.

 

실제상황이다.

산 전체가

비명(悲鳴)으로 연대(連帶)하고 있다.

난리 때 봉화가 그랬을까,

매 한 마리 떴을 때

무인도 갈매기가 통째로 이륙하듯

난리다.

난리도 아니다.

 

어미새들은 헬기 자세로 솟구치다

뒷덜미를 낚아채인 고양이처럼

횡으로 미끄러진다.

두 발 두 날개 온 깃털들이

강풍에 뒤집히는 순간의 우산 모양이다.

역방향의 긴장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새들은 목이 쉬고

산은 꿈쩍도 않는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나는 왜 이미 다리가 풀렸고

세상은 실제상황 속인지,

내려다보이는 서울 서북지역은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고요한지.

 

 

 

김중식

 

눈은 평등하게 내리니 골 깊은 경계엔 무게가 더하여

고생 끝에 무너지는 무게. 어둠 속에 무너지는 무게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알 수 없다.

눈은 내릴 뿐 내려 쌓일 뿐

그대 눈매, 어디까지 쌓이는지 알 수 없다.

산마다

고을마다 헤집어 볼 뿐,

그대 흩날리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침묵 속에 흩날려 갈 뿐.

 

눈에 무게가 있다는 것은, 그것은,

눈길을 걸으며 느낀다.

무너지는 것들은 쓸리는 무게가 있음을.

 

눈은 무너지지만 눈은 무너지며 느낀다.

무너지는 것들이여. 투명함이여,

12월의 투명함이여.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여,

눈은 흔들리며 온다. 흔들리며 온다. 흔들리며 내린다.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여.

아픔이여.

광막한 어둠 속에서 광막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대가 미처 다하지 못한 말 한마디여. 어둠이여.

미처 다하지 못한 그 말에 내릴까.

전(傳)하지 못한 그 말에 내릴까.

눈은 내리지만, 어둠은 그것을 덮지 못한다. 흔들릴수록 덮지 못한다.

눈은 내리지만, 무너지지만.

그대 속삭임이 들리지 않지만, 그대 속삭임이 들리지 않지만

속삭이기 위하여 내리는 것처럼.

눈이 내린다

 

어차피, 흩날리기 위한 것인 양.

눈이 내린다

 

 

 

다시 해바라기

김중식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도요새에 관한 명상

김중식

 

먹고살기 어려운 거지만

시베리아에서 뉴질랜드까지

얼굴이 반쪽 되도록 태평양을 세로 지르는 도요새

먹고사는 게 최고 존엄 맞지만

멀리 가봐야 노동이고

높이 날아봐야 생계이므로

어지간하면 퍼질러 앉겠구만,

 

물과 뭍의 경계

드나드는 파도 틈새에서

하품하는 먹잇감을 노리는 도요새

평화는 생사가 갈린 이후 잠시 반짝이는 적막이다

 

먼 곳에도 다른 세상 없는데

새 대가리 일념으로 태평양을 종단하는 도요새

산다는 건 마지막이므로

살자,

살아보자,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니.

 

 

 

두 사람 - 인디언들의 결혼 축시

김중식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때수건이 열리는 물오리나무

김중식

자작나뭇과 물오리나무 이름표를 단 나무

꼭대기에 때수건이 장갑처럼 걸려 있다

옆 나무는 빠마를 하시는지

흰색 비니루 자동차 커버를 쓰고 있다

남자들은 등치기로 나무를 넘겨뜨릴 듯,

아파트 부녀회원은 복면 쓰고 종주먹을 치켜드는데

개를 사랑한다면 개 눈치의 1푼어치만 사람을 챙기라는 것;

산수(山水)가 우째 풍경이 아니라 풍속이다

그래, 나는 다음 생엔 사람 몸 받기 글렀지

짐승이 짐승으로 살아도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테지만

세상이 아니라 사는 게 더러운 것;

영혼이 피부 바깥을 뚫고 나온 적이 없어서

피부까지가 세상의 부피인 사람들,

몸 밖에도 세상이 있는 줄 모르는;

 

목 졸라 버린 맥주캔이 새끼 오리처럼

오리 배를 따라오는 인공 호수에서

쌍스러움과 성스러움이

하나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고속도로를 달릴 때 보았던 풍세(風世)

톨게이트로 빠져나가면 바람의 세상일까

새가 나보다 가볍다고는 말 못 하지만

자꾸 산 너머를 보게 되는데

껌 짝짝 씹는 여름 태양 아래

절벽에는 앉은뱅이꽃 피고

비봉 마애석가여래는

진즉 실족한 듯

나, 까칠해졌구나

살아남은 것들은 다 장壯한 것들,

건들지 말자

하루는 길지만 인생은 짧은 것이니.

 

 

 

떠나가는 새에게

김중식

 

솟구쳐라 世世生生 단박에 떠나려는

발목 가느다란 새여

날개에 쥐나면 떨어지지만

준비 운동이 길면 지친다 어서 솟구쳐라

왕국은 그들만의 왕국이고

그들만의 왕국은 적성에 맞지 않는 나라이므로

숨쉴 곳까지 오르면 고요함

지리산 천왕봉과 호남 평야가 먼지의 반의 반 높이

투명한 육체가 되면

살결과 거기서 숨 쉬는 꿈결조차 고요한 너의 왕국

極貧의 왕국

쉬지 못한 새여 쉬지 말고

날아라 새여

날개에 지나지 말고 발 디딜 곳 없는 곳까지 자발적으로

발목이 퇴화할 때까지.

 

 

 

김중식

 

1 - 파리떼

파리는 잘 안다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던 출신 성분과

알아서 기었던 전력(前歷)을

구더기 시절을

파리는 기억하고 있다

삶이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똥통에서 견디기 내지 버티기라는 것을

또는 반쯤 내지 완전히 썩은 태평성대에서

소시민의 명랑한 투정처럼 앵앵거리기라는 것을

파리는 잘 안다

 

 

2 - 사람 떼

수인선 두 칸짜리 협궤열차가 각각

좌우(左右)로 뒤뚱거리면

승객들은 저마다 상하(上下)로 오르내린다 잠들거나

조는 척하는 인물들 대다수는 삶에 지치거나

열차가 가는 대로 종착역까지 실려가기로 작정한 이들이지만

똑똑한 놈들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법이 없다

수인선 두 칸짜리 협궤열차가 각각

좌우(左右)로 뒤뚱거릴 때

가장 똑똑한 놈들이 가장 자주 두리번거린다

 

 

 

망명지

김중식

대륙 대척지의 잎새가 지면

아픔의 마을은 초여름인데도

마을 대표 씨름 선수의 입술이 튼다

낙엽이 뒹굴면 채식주의자가 복통으로 뒹군다

아픈 일엔 모두가 상처받아서

개도 눈물을 흘리고

아픔을 신호 보내는 한 물건도 없지만

해가 뜨면 마르는 이슬을 가여워해

새벽부터 상처받는다

상처받지 않는 때와 곳이 없다

옆고을 오일장에 갔다가 국밥 한 그릇에 팔천 원의 바가지를 써도

항의 않고 상처만 받아서

가슴을 쓸며 가만가만 오는 마을

지은 죄 없어도 죄 지은 자에 돌을 안 던지는 이유는

날으는 돌이 차마 아파하기 때문일 것

통증은 없는데 병이 재발했는지

아픈 설사가 새면

폭포수도 가뭄 드는

작은 마을.

 

 

 

매인 데가 없는 삶

김중식

 

사막 가는 길

모래 위의

모래를 구워 만든 문을 향하여

고행자가 버터플라이 영법으로 간다

입술에 흙을  묻히고 피묻은 이마를 드는

오체투지 고행자의 표정은

아프면서 기쁘다는 점에서

짐승의 체위로 강간당하는 영화속의

애마의 절정과 닮아있다

아니, 닮아야 말이 된다

제 삶을 방목시킨 유목민이

그래서 어쩌겠다는거지?

몸이 괴로운데 마음이 편할 리 있는가?

하면서 제 갈 길을 천천히 간다

매인 데가 없으므로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서도

수상쩍고 한편으로는 경건해져서

뒷짐 지고

 

 

 

모래시계

김중식

 

흑해 수평선이 역삼각형으로 좁아지다가

백사장에서 다시 치마폭처럼 넓어지는

석양의 모래시계 속에서

축척 1만분의 1

비율의 모래시계 여인이

한 줌 허리를 물결치며 걸어 나오는데

하체부터 파도에 녹아 내 곁을 스쳐갈 땐 입술만 남았습니다

 

모래로 만든 부처님이 자기 키를 줄이면서

오아시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중생아

지옥으로 새고 있는 모래야

내 입술이 뭘 말하고 있는지 똑똑히 봐라, 혀 차면서

 

 

 

목과(木瓜)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亡身)의 사랑이여!

 

 

 

몽상가

김중식

 

나비는 미녀(美女)만큼 우아하다

관념의 꿀을 맛보며 산보한다는 점에서

미녀(美女)보다 까다로운 미(美)이기는 해도

성욕에 사로잡힌 몸짓조차

세상은 그것을 매력이라 부를 만큼

나비는 '우아적 매력'이다

 

뚱뚱보 친구가 있었다

술을 마시면 별이 보인다 했고

그래서 별을 잡으려다

맨홀에 빠져 턱뼈가 완전히 빠졌다!

그 몸집이 맨홀에 통째로 빠진 것도

위대한, 관념의 승리이다

 

나비가 자신에 대해 집중할 땐

접시물에도 익사(溺死)한다

물에 비친 우아적 매력이여!

포충망이나 잠자리채가 덮쳐도

의연하다, 그까짓 것

더러워서 안 피한다

(나비 채집이 쉬운 일임을 아는 당신은

미녀(美女)를 낙태(落胎)시킨 적이 있다)

관념의 꿀을 맛보며 산책하는 나비가

미녀(美女)보다 불순한 미(美)임을 아는 당신은

나비의 날개를 잡았던 손으로 눈을 비볐다가

아무렴, 장님이 된 적이 있고 말고.

 

 

 

물결 무늬 사막

김중식

 

이 땅에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 전체가 물결이다

멀리서 바다였는데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소금 사막에 묻힌 미라는

만 년간 잘 잤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진다

우는 이유를 잊어야 할 때까지 우는 여자여

우리는 가끔 울어야 한다

우주가 좁도록 세포분열을 하는 아메바처럼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데 한가득 헤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건

가을 숲 불꽃놀이가 끝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봄에 꽃을 피우는 것

가장 깊은 상처의 도약

가장 뜨거웠던 입의 맞춤

할례당한 사막 고원에 핀 양귀비처럼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질지라도

봄에 할 일은

꽃을 피우는 것

 

 

 

물방울은 빈도로써 모래를 뚫지 못한다

김중식

 

죽음 하나하나가 베이스 캠프다

바람과 안개가 하루에도 열두 번

길을 만들고 또 지우므로 나그네는

모래 위의 낙타 뼈와

그보다 몇 걸음 앞에 놓인 사람 뼈를 보고

길잡이를 삼는다

그러므로 뼈는 별

죽음 하나하나가 生의 징검다리다

나그네는 마지막 징검다리의 몇 걸음 앞에다 자기 뼈를 남기고

그런 식으로 만리(萬里)를 가야

사막을 횡단하는 나그네 하나 생긴다

물방울이 빈도로써 바위를 뚫듯

만인(萬人)의 징검다리가 길 하나를 뚫었지만

아으, 바람과 안개

다시 만인분(萬人分)의 뼈를 남겨야 사람 하나 횡단시킬 수 있다

아니다 이번엔 사람이 먼저 죽고 낙타가 길을 건넜다

건넌 사람 아무도 없었으므로

사막엔 길이 없다 한없이

뼈는 별.

 

 

 

미드나이트 헤드나이트

김중식

 

다방 재떨이의 '오늘의 운세'를 보니까 "돈 낭비를 하지 마시오" 괘가 나온다거나 지하도 입구에서 즉석 복권을 긁어대거나 실내 야구장에서 만루 홈런을 치는 건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로 한 시간을 버티는 건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책에 손이 베여 피가 흐르고 창호지처럼 흡수했던 사상의 책을 팔아 약을 사 먹는 것 삶은 내게 그런 게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내게도 진리를 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진리는 책상보다는 길거리에, 안보다는 밖에 있었으므로 동굴과 우물에서 나오려 밧줄을 던졌지만 이미 썩어가는 밧줄이었다 나를 가두는 건 나 자신이지 껍질이 아니라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껍질 속에서 웅크려 몽상하기도 했고 신문에 매일 나오던 누구의 환한 이마에 바늘을 꽂으며 저주를 하거나 한 여인 덕분에 세상의 뒷면을 알아차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솜털 하나도 자유스럽지 못했다

나에게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리랑 고개 너머 정릉 정토사 처마 밑 고드름이 녹다가 녹아떨어지다가 모가지가 베여지면 아 그렇게 그날이 오면 죽은 것은 살고 산 것은 죽으리라 주문을 외고 푸닥거리를 했지만 그 시절은 물이 끓기 직전의 소란함이었을 뿐 총칼을 녹이거나 물을 수증기로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혹시, 만약, 오리라던 그날은 오지 않았고 세상은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서도 지금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 또한 없으리라는 암담함 때문에 내 자신이 변화되길 바랐다 체온이 3℃만 올라다오 나는 천재(天才)가 되거나 광인(狂人)이 되리라

내가 퍼부은 저주와 욕설은 부메랑이었다 내 머리가 잘려나가고 급한 김에 숨은 쥐의 머리를 이어붙였더니 말을 할 때마다 찍찍 소리가 새어나왔고 사람과 마주치면 도망을 가게 되었다 환란의 시대여 어서 진군하라 나로 하여금 대낮의 어두운 면을 발견케 하고 불행에 몸 담그는 기쁨을 만끽케 하라 나는 내 젊음을 감당하기 벅차다라기보다는 이 젊음이 지긋지긋하다 나에게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충청남도에서 충청북도로 신동엽의 금강(錦江)을 건널 때 나는 정지해 있고 외부는 시속 100마일 나에게 삶은 그렇게 안팎이 다른 게 아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예언자들이 꼬리에 물을 적시고 있었다 질주해오는 헤드라이트들이 연이어 내 눈을 쏘고 달아나는 바람에 나는 거듭 차선(車線)을 이탈할 뻔했다 불임(不姙)의 비유에 의하면 빛은 세상이 어두울수록 밝지만 세상은 어두운데 밝은 빛은 이제 성가시고 귀찮을 뿐이었다 나에게 삶은 그렇게 될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미래 비전

김중식

 

늙어갈 뿐 죽지는 않으므로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다.

세월을 이길 수 없으므로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은 일은 괴롭다.

 

아들딸아, 아빠가 요기까지밖에 못 왔다.

재수 없으면 백 살까지 살 텐데

변기에 붙어 소변을 버티는 파리처럼

쓸데없는 곳에 생 바치지 않으련다.

 

잘한 게 없으니

못난 걸 남기지 않으마.

물려줄 게 없다면, 그림자도 남기지 않으려 한다.

수목장이면 나무에게 미안하다만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국가는 빚내지 마라.

내 아들딸이 갚을 돈이다.

내 아들딸이 살아갈 세상은 싸우지 말고

아들딸, 너희가 천둥 번개처럼 살아라.

 

유리 스크린 깨고 튀어나오는

호랑이처럼

 

 

 

바다 건너기

김중식

 

풍 맞은 체위로 물속을 걷는다

장딴지 근육 파열 탓에

걸음마부터 시작한 재활 훈련

 

버터플라이 영법으로 수면을 때리는 딸아이의 어깨가

새싹 모양

돌고래 꼬리 같다

 

나비가 고래 등 타고 바다를 건너려는 듯

 

스스로 건너지 못하게 된다면, 여보

곡기 끊거나

까마귀 많던 산 중턱보다

바다로 갈 터이니

 

나의 고래여

물이 뭍보다 자유로울 때가 있으므로

 

태생이 파도 거품이었으므로

어차피 꺼질 목숨

생이 줄어도 어쩔 수 없으니

수면을 치며 솟구치는 고래야

 

바다를 건널 땐

낙타 배 때려 밤새 달려라.

 

 

 

발레 극장

김중식

 

지상에 대한 불만으로

최소한의 접지 부위에 수지침 놓으며

튀어오르는 발레리나

다랑어처럼

 

계단과 사다리 없이

공중으로 두세 걸음 올라가는 멀미

물수제비처럼

 

가슴을 밀어 공중 부양시키는 핸드폰 슬라이드

기마(騎馬) 체위처럼

 

미뜨러질 때만 무게를 놓은 삶

 

 

 

별이 불타는 밤에

김중식

 

해가 뜨고 있습니다

그대는 지는 해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대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그대 사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지옥 열불 속에서 삼년상을 지냅니다

 

저 세상과 다른 세상은 없었습니다

멀리서 그대를 잊지 못하다

하루 종일 나 자신 마저 잊었습니다

 

그대는 울었습니다

그러나 웃는 사람도 그대였습니다

나도 울다가 웃었습니다

 

해가 지는 사막을 걸었습니다

별은 오아시스에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바다에서 뜨는 해를 보고 있습니다

 

 

 

비애

김중식

 

1

세포 하나가 체포되자 조직이 일망타진되었다

부분은 전체를 포함한다

기관원의 미행은 권력을 포함한다

골목길은 막다른 운명을 포함한다

손금은 운명의 흐름을, 절차는 제도를 포함한다

창살 밖의 햇볕,콩밥은 그것과 농부의 찰진 땀을 포함한다

튀는 공은 벽을 포함한다

 

 

2.

폭음은 실연을 포함한다

여자의 입술은 여자의 전체인 성기를 포함한다

은유는 두 단어 이상의 경험과 의미를 포함하므로 애인의 오른쪽 검지 손톱은 보름달을 포함한다

보니,맛보니,들어보니,맡아보니,만져보니,생각해보니,처럼

시각은 안 보이는 감각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애인의 모자는 인연을 포함한다

 

 

3.

삶이 죽음을 포함한다면 씨앗은 낙엽과 도끼를 포함한다

죽음이 삶을 포함한다면 송장은 왜

서 있지 못 하는가 송장끼리는 왜 물어뜯지 않는가

갈비뼈가 여자를 포함한다면 남자는 왜 갈비뼈의 부분 때문에 수면제를 모으는가

 

지운 흔적은 흔적을 포함한다

거북이 제 발자국을 꼬리로 지우며 모래밭을 건널때

발자국만 아는 사람은 거북을 잡을 수 없지만

꼬리도 아는 사람은 거북을 잡을 수 있다

발자국이 거북을 포함하지만 꼬리 또한 거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부분을 알면 속고 전체를 알면 속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다 시가 항상 속을 수밖에 없는 이유.

 

 

 

사막 가는 길

김중식

 

옛날, 구하던 것은 우물가 썩은 물에 있었다

하지만 서(西)쪽의 끝에서는

속쓰림에서도 한 구호(口號)가 들리는 듯

나의 난초는 천호동(千戶洞)에 있으리라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그렇듯

말라죽은 풀들이 뽑히고

그것들이 내 삶과 비슷할지라도

구하던 것은

해뜨기 전 세수를 마친 가시 난초에도 있는 것 같다

바람 불면 사라지는 길 위에서

육체 밖으로 드러난 엄지발가락이

삶이

가자는 대로 내딛다가

가시 난초에 찔리는 아픔

아프면서도 아픔에 취하는 아픔

야단법석이구나

삶은.

 

 

 

사막 건너기

김중식

 

회교 신정(神政) 국가의 소금사막을 지나다

살생(殺生)의 더위를 피해 들어간

오아시스 내 대상인(隊商人) 숙소

 

목탁 소리에 잠 깼는데

늪에 헛디딘 포교 스님이신가

백팔 번뇌하는 청춘의 딱따구리인가

 

나가보니 베란다 끝에 매달린 대나무 풍경(風磬),

그 안에 들어앉은 나무 수탉이

마른번개 맞은 거였네

 

불 탄 대숲을 쪼는 나무닭,

혁명 성지(聖地) 꼼(Qom)에서 코브라 대가리처럼 발기 상태로 미끄러져 오는 모래폭풍,

 

세상을 통째로 깨운다는 범종 소식은 뜬소문 같다

젊은 망막에 3D로 프린트했던 금빛 신기루,

영원할 줄 알았으나 점멸(點滅ㆍ漸滅)하는 반딧불이 사랑이여

 

여기는 아닌데 거기는 길까마는

갈 수 있을 때 떠나야 한다는 게

사막의 유일한 교통 신호다

 

뒤돌아보니

낙타를 묶어놓은 곳이

번개 맞아 부러지고 그을린 고목이었으나,

 

사막 지도를 흉부 X-레이 필름으로 보여주는

보름달.

 

 

 

사춘기

김중식

 

마흔 살에 무너지고 있다 시대착오적으로

나는 졌다 시집값은 종잇값인데

집값은 시멘트값이 아니어서

거품이 꺼지길 기다린 오기

주식 한번 안 해본 게 자랑이었는데

- 나는 졌다 변하지 않는 죄

마흔을 통과하는 형벌, 후회를 관통하는 형벌

로또 사서 몰래 번호를 맞춰보고 있다

 

마흔 살에 무너지고 있다 ‘무소유’에 감동하고 간디를 존경하는

전과 십수 범의 웃음 앞에서

자기가 짓지 않은 죄에 대해 괴로워하는 사람은 아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해야 하나 유권자가 소수가 아니므로 내가 소수라고

말해야 하나, 같은 책을 읽고 정반대의 삶이 가능한 오래된 현실에 대해

- 나는 졌다 변하지 않는 죄

세상이 변한 게 아니라 세상이

솔직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쓰고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해외 석박사 학위가 가짜인 국립대 무용원장

기사를 썼더니 월급 가압류에 민ㆍ형사 송사를 대법원과 고검까지 가고

그것도 모자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까지 가서도

그녀가 지고 내가 이겼는데

그녀는 건재하고 나는 지쳤다

사면 팔리는 게 변호사의 직업윤리인데

시인은 정의에 대해 절망하면서

재판비용 달라는 소송을 안 한다, 몇 푼 받겠다고

부자와 송사하는 짓을

시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 나는 졌다

재판비용 타내는 일을 우습게 알아서

신용카드 연체로 다른 카드도 못 쓰고 있다

 

마흔 살에 무너지고 있다 시대착오적으로

나는 졌다 아들아, 과외 정책사를 집필하면서

투항의 시를 쓰고 싶어졌단다 집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집이 없고 집 두 채

있는 사람은 집을 또 사는데 과외가 쭉 그래왔더구나 아무도

자녀를 득점기계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지만 남들이 하니까

모두 한다는구나 초등학교 4학년 영어 성적이

외고 입학 성적이고 부모의 경제력 순서라서

운동장에는 축구하는 아이가 없고 외국에 있고 고등학교도

시험 쳐서 들어가야 나라가 잘 산다는 논리를

초등학생도 순응하는 시대 앞에서

나는 졌다 돈이 독식하는

이따위 자본주의를 떠나는 꿈을 꾸고 있다

살 수 없는 게 있어야 살 수

있지 않겠냐 말릴 수는 없어도

거부할 위엄은 있어야지 않겠냐고 아빠는 생각하지만 아들아

훗날 내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 나는 졌다

 아들에게 영어와 피아노와 축구와 수영을 시키면서

거기 가야 친구랑 놀 수 있으니까, 내 자식 과외는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다

 

20년 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퇴행

내가 나를 믿지 못하므로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을 나의 미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를 꿈꾸었던

사춘기, 지내고 나면 누구나 통과한 전쟁, 욕망이

가자는 대로 저지르지도 못했던 비겁의 시절을 되풀이하는가

- 나는 졌다 다 변했다

아들아, 묻어가는 게 편할 뿐더러 옳기까지 하다고

내 입으로 말 못 할 뿐

 

 

 

새벽 통증

김중식

 

옆 침대 환자는 너무 오래 참은 것 같다

가래와 대변에서도

피가 섞여 나온다 한다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그에게

속마저 속을 긁는 새벽

 

사람의 말투엔 그 삶의 억양이 배어 있는 것 같다

식구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내가

배다른 형제자매의 아픔도 느끼는 시간

내 아픈 곳이 세계와 의사소통하려 한다

세계는 정녕 안녕하신가

과연 안녕해도 되는가

몸 전체로 지저귀며 솟구치는 새는

온몸으로 상처겠구려

지하 이층 영안실에서 천년을

지 몸 사르는 향

내음새

병 깊어져도

나는 너의 조용한 깊이를 모른다

 

 

 

세월이 흐른 뒤

김중식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흐른 세월을 오래 뒤돌아보니

 

바람 부는 세상에서

세상에 스치는 바람이 나의 집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흐른 세월을 오래 노래하리다

 

수초가 물결 속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이 노래 속에 집을 짓듯이

 

 

 

속미인곡

김중식

 

그대없는세상은없을것이다그대옆에있을때나를잊는다,세상에아무거나나아무데나는없으므로그대만있다면나는어디에서나주인공이다세상어딘가에서,그대너무아름다워만인의연인이다나의연인아,그대위해살았으나기실그대에의해살았노라,세상은그대에게있고,세월은그대로부터흘러나오나니,나,여기,쭉있어요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김중식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된다 돈 한 푼 없이 대낮에 귀가할 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안인데 거기보다도 우리 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 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 배달을 나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 타는 아가씨는 명순씨 홍등 유리방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은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소풍 갈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에다 쌍꺼풀 수술 자국이 터진 만두 같은 명순씨가 지저귀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 못 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강원 연탄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 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날 보고는 뒤돌아서서 내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대학씩이나 나온 녀석이 놀구 먹구 있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공장에서 날아오는 연탄 가루 때문에 우리 집 빨래가 햇빛 한 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발려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 다 하고 싸울 일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 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 정정은 아니고 없는 적을 만들어 창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

집으로 돌아서는 길목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 뒤에서 스타킹을 걷어 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존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번 없는 안동 김가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공원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 지인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 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 다니는데 철로의 영끝은 흙 속에 묻혀 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고까지만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며 화물 트럭과 맞부딪치면 여자처럼 드러눕는 기관차를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겉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서햐가 있고 더 멀리 가면 중국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인도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신재생 알코올 에너지

김중식

 

되는 일도 없지만

딱히 할 일도 없을 때

다른 세상으로 보내주는 마약

 

잠시 먼 곳으로 소풍 가서

시인은 방언을 하고

여인은 사슴 눈을 달고 나온다우

 

뼈와 뇌의 고단함을 달래는

실신(失神)의 물방울,

단군 이래 증가하는 재생 에너지에 한 표!

 

한 글자까지가 신의 선물,

사랑조차 두 글자,

사랑조차 사람이 하기 나름

 

일 끝나면

새도 아닌데 날아다닐 시간

취해서 읽은 시가 아름다우므로 또 마신다우

 

사랑은 살아 있다는 것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지만,

술은 살고 있다는 것을 잊게 해준다우

 

 

 

아 아

김중식.

 

자다가도 일어나 술을 마시는 이유는

경의선의 코스모스에서 치명적인

냄새를 맡았기 때문.

최초의 착란,

그 순간 지진이 있었고

붉은 태양의 시간이 흐른 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던 그이가

세상 단 한 사람만을 미워하게 되었기 때문.

잊기에는 생이 짧다는 것을.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김중식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

그 이후로 한 여인은 한 사내의 전 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순간이라는 걸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생겼다

세계는 한없이 길고 어두웠으나

잠깐씩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웃을 때는 입이 찢어지고

울 때는 눈이 퉁퉁 붓던 한 사내

그러나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표정의 억양이 무너지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졌다.

과연 일부러,

도대체 일부러 한 여인이 한 사내의 세계를 무너뜨렸겠는가

자기도 어쩔 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그런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으리

한 사내는 한 여인을 용서하였으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죽음을 직시하게 되는가.

 

이제 한 사내는 한 여인의 창가에 있다

닫힌 세계는 그 스스로 열어보이기 전까지는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한 사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웅얼웅얼 거리며

혼자서

한 여인과의 모든 대화를 끝냈다

깜짝 놀라 공기총 방아쇠를 당겼다

한 여인의 첫인상이.

 

 

 

어제가 가도 오늘은 오지 않고

김중식

 

- 가라는 대로 가면, 화살표를 따라가면 부고(訃告)의 담벼락과 전봇대를 따라가면 초상집이었다.

 

초대받아 가는 길, 숲속에서 한 친구가 늦여름 굶어죽었다 죄로부터 가벼워지고 싶다,라고 나무 밑동에 손톱 글씨를 새겨놓았다 푸른 숲 자기 죄를 모르면서 턱없이 구타당한 뒤 자기 대가리를 산산조각 박살낸 군대 친구는 울고 싶은데 울지도 못하게 한다,라고 수첩 일기를 적었다 늦여름, 숲속에 숨어서 울다가 들켜서 더 맞았다고 편지를 보내왔으며 제발 목숨만 살려만 주면 죽어지내겠다고 샛별서점 주인은 남산 대공분실에서 서약서 쓰고 귀가하자마자 앓았다 눈에서 샛별이 떨어졌다 아프게 살 용기없는 자 죽을 것, 이라고 누이는 위험 수위의 한강물 위로 떠올랐으며 가난한 시인이 심야에 먹은 것을 토하다 숨막혀 죽었다 신림극장 앞 몇몇이 용병 교육 반대를 외치며 분산 자살할 때 절대 다수는 전방 입소하러 망우리 공동 묘지로 교련복 입고 사열 종대로 자진 집합했다 거부하던 죽음보다 개죽음이 있을까 우리 삼촌은 월남에서 일부의 손톱과 머리카락만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한다, 석가 탄신일, 분수대 뒷건물, 신은 자살했다 세상은 공포였으므로 무더기로 태어난 아이들은 막무가내 발버둥쳤다 세상을 향한 첫마디는 절규였다 우는 것이 숨쉬는 것이었다 통곡하는, 통곡하는 것이 숨쉬는 것이었다 초대받아 가는 길 그 옆 숲속에서 한 친구가 숨쉬지 않다가 숨막혀 죽던 날 분수대 뒷건물, 총구 앞에서 쓰러져준 그들의 떼죽음은 자살이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은 사람들이 죽고 나자 어제가 가도 오늘은 오지 않았다 죄는 가벼워지지 않았다.

 

 

 

어쩌다 종점

김중식

 

가보지 않은 길이 새로운 길은 아니었다

‘살다’를 길게 발음하면 ‘떠난다’는 뜻이 되고

헤매다 보면 종점이었다

 

암전 후 조명 들어왔을 때

어쩌다 여기지?

잘못 표시한 동선(動線)인가?

 

눈 둘 곳 없는 눈길로 세상 아닌 곳에서 거처를 찾았다

미끄러질 때만 무게를 놓는 삶

영원과 같은 찰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살다’를 길게 발음하면 ‘떠난다’는 뜻이므로

초(秒) 단위를 아껴 떠나시기를

‘시인’도 빨리 발음하면 ‘신’이 되므로.

 

 

 

엄마는 출장 중

김중식

 

또 석 달가량 집을 비우신단다

산 사람 목에 거미줄 치란 법은 없는 모양이군, 나는 생각했다

집 앞이 집 앞이니만큼

질펀한 데서 허부적거리다가 저녁에 들어오니

그저께 밥상보 위의 흰 종이

 

머리라도 자주 빗어넘기고

술 한잔도 두세 번에 나누어 마시거라

엄마 씀.

잠은 좀 집에서 자고

                

아무리 이래도 저래도

한세상 한평생이라는 각오를 했지만

내 삶이 점차 생활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한량 생활도 사는 건 사는 건데 이건 아닌 것 같고

치욕 없이 밥벌이할 수 있으리요마는 나는 이제 밥벌이 앞에서

성(性)고문이라도 당할 용의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밥상 앞에서

먹고 사는 일처럼

끊을 수 있는 인연이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감기 들면 몸살을 앓으시는 어머니

아! 한가하면 딴생각 드는 법

또 석 달가량 나는 자유다, 라고 외치자꾸나, 내 젊음에 후회는 없다, 라고

그런데 냉장고에 양념 된 돼지불고기가 있어서 그만

엄마, 소리만 새어나왔다.

 

 

 

연좌(連坐)로 붉어지는 산

김중식

달래

연좌(連坐)로

진달래진

달래진달래

벼랑절벽에서

진달래진달래진

달래진달래진달래

꽃샘 추위가 인동忍冬하는 풀잎 하나의 쌰대기를 후리고 지나가자

뼈만 앙상한 진달래의 손톱에 버짐 핀다

위험한 곳에서만 비뚜로, 위험하게 피어나는 진달래

연좌(連坐)로 붉어지는 산(山)

진달래

 

 

 

열하일기

김중식

                        1984년

서(西)에서 동(東)으로 건너는 길은

새벽부터 아침까지 특히 붐빈다

새남터의 절두(切頭)와 한 시대의 방언과

정자가 난자에게 쇄도하듯

우리를 눈멀게 하는

달마가 혓바닥으로 눈동자를 닦고 응시하던

첨단의 길이다

동(東)에서 서(西)로 건너는 길은

자기 영토에서 혁명에 실패한

불우한 운명들이 망명 가는 길로서

황혼 이후 미어터진다

지하(地下)에서 지상(地上)으로 가는 건데도

내려간다고 말해진다

남(南)에서 북(北)으로 건너는 길은

진즉 사용되지 않는다, 이미

똑똑한 이들이 다 넘어갔기 때문이다

모두가 똑똑했는데, 똑똑했으므로

퀭한 눈동자만 섬뜩한

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북(北)에서 남(南)으로 건너는 길은

이성을 돌파한 욕망의 탄탄대로이다

의사 일가족이 따뜻하다고 말했듯

불현듯 재벌이 된 1세(一世)들과

불현듯 후계자가 된 2세(二世)들이 산다

                        1992년

한강 철교를 건널 때

나는 십년 가까이 西에서 東으로 다니고 있다

첨단의 길이었는데

이제는 미로(迷路)다

절두와 배부름이 공존한다

고난과 안락이 한 풍경 안에 있다

솔직히, 아 말하자면

신기루가 보인다

자동차와 집들이 이발소 그림처럼

차창에 붙박혀 있다

한강 철교를 건널 때

폭격처럼 자욱한 강변의 욕망

앉아서 도강渡江하고 싶다.

 

 

 

오 오

김중식

 

오오 어쩔 수 없음이여!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음이여!

그 밖에 무엇이 있을 수 있으며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아 짝사랑이여!

 

그대를 진실로 진실로 그리워하므로

휴식(休息)도, 우회(迂廻)도, 표절도, 꾸밈도 없이 그리워하므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눈빛으로 그대 눈빛 마주하리다

 

마주하리다 한여름에도 떨리는 신열(身熱)로

그대가 원치 않을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무심(無心)으로

오오 세상에서 오직 그대만이 날 모른다 할지라도

 

그대가 슬프면 내 슬픔의 밑바닥도 솟구쳐 범람하리다

아가씨여, 내 사랑을 눈치챈다면

나 이외의 어떤 누구와의 사랑도 시시하기 짝이 없으리다 아아 짝사랑이여!

 

 

 

완전무장 

김중식 

 

낙타는 전생(煎生)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육신의 정상(頂上)에

고통의 비계살을 지고 다닌다

전생(煎生)부터 세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안 봐도 안다는 듯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오아시스에 몸을 담가 물이 넘쳐 흘러도

낙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는다

전생(煎生)부터 지 수고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통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가능한 한 가느다란 장딴지를 달고 다닌다

짐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짐이 더욱 쌓여 고개가 푹 숙여질수록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

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

과적(過積)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최후로 덧보태진, 그까짓, 비단 한 필 때문이라는 듯

고꾸라져도 되는 걸 낙타는

이 악물고 무너져버린다

죽어서도 

관(棺) 속에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간다.

 

 

 

이 더러운 세상

김중식

 

세상일이 헛돌아

한 번쯤 등질 수는 있겠으나

가서 왜 안 나오는 걸까

나는 사막보다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혹했다

 

살 곳이 아닌 데서 사는 것은

가까이 오지 마!

건드리지 말라는 뜻 같아서

멀리서 지켜본 공작새 일가(一家)

 

가시덤불에서 찾아낸,

공복을 채울 수 없는 벌레 한 마리를

새끼 입에 넣어주는데

먹고 산다는 건 한 끼 한 끼가 빅뱅이다

 

못 볼 꼴을 봐도 백 번을 목격하는 공작새

하나가 아프면 백 개의 눈깔이 다 아프다

더러운 세상을 피해 다녔으나

더러운 세상을 버릴 수 없는.

 

 

 

이탈 이후

김중식

 

1

중심이 있었을 땐 敵이 분명했었으나 이제는 활처럼 긴장해도 겨냥할 표적이 없다

그러나 타협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빗방울을 퉁퉁 튕겨보낸다 박살낸다 그러다가

이게 아닌데, 이미 몸 적신 주제에 이게 아닌데 중얼거리다가 매 맞기로 결심한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우박도 내리자

두들겨 매 맞아야 몸이 편할 것 같다며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어찌해야 기억을 지울 수 있느냐 나는 왜 뻔뻔스러워지지 못하느냐 울부짖으며

 

2

우산도 뒤집어지면

비에 젖네

젖은 우산에 내리는 비는

쌓이네

 

비여

사무친 이를 적시지 마라

비참의 방둑이 무너지네

객혈을 하네

 

흐르는 건 흐를 뿐

흐르면

상처의 바닥이 아플 뿐

참을 수 있으나

 

흐르다가 뒤돌아보면

젖은 남자의 피가 쌓이네

쌓이네

잊고 싶어서 못 잊은, 시뻘건, 순결.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인디언 기도문

김중식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 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러 하여금 깨끗한 손, 똑 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혼이 부끄럼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일관성에 대하여

김중식

 

시대가 깃털처럼 가비야운데

날개 달린 것들이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가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는 썩은 수박에도 주둥이를 꽂나니

 

있는 곳에서 있는 것을 먹으려면

쓰레기더미에 기생할 때가 있나니

먹고 산다는 것이 결국 기생한다는 것이 아니냐

남들이 버린 열정과 시든 꽃도 거기에 다 있나니

 

나비는 파리보다도 가비얍다

매 행동마다 필사적인 파리에 비하면

깊이도 없이 난해한 나비다

높이도 없이 현란한 나비다

 

나는 장자가 나비 꿈을 꾸는 꿈을 꾸었다

자리를 뜨자마자 순결이 되는 나비

발을 터는 순간 결백이 증명되는 나비

내가 나비보다 무거울 이치가 없다.

 

 

 

자유종 아래

김중식

 

가죽나무 타고 넘어 들어갔던 서대문형무소

왜식 목조건물 사형장은 나의 놀이터였지

도르래에서 밧줄을 끌어 내려 목에 걸었지

축하해, 젊음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화환(花環)

목의 때와 살갗과 육즙으로 엮은 비린 동아줄

미친 시대가 하필 우리의 전성기였으므로

돌아버리지 않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던

속으로 화상 입은 청춘이었으므로

유언이래야 "할 말 없다"는 것이었지, 개로

태어나더라도 늙은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짖지 않는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덜컹

발판을 열면 다리가 뜨고 혀가 나오겠지

죽을죄는 없고 죽일 벌만 있을 뿐, 발아래

컴컴한 식욕을 날름거리는 콘크리트 지하실

나는 뛰어들었지, 귀 막고 입 다물며

나는 뛰어들었지, 다시는 젊지 말자고

 

 

 

중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김중식

 

오입하고 싶겠지

분수는 하늘을 찌르고 싶겠지

새싹과 자유와 미친 놈과 그 놈의 애인인 미친년의 피는 치솟고 싶겠지

월경하고 싶겠지 한치 더 높이!

절정의 황홀감에 중독된 것처럼

하늘을 기어오르고 싶겠지만 박 차오를수록 엄청난

추락의 가속도가 기다리고 있겠지

해마다 표출되는 역량도 봄이 지나면 거세되듯

치솟는 것은 허벅지만 적실 뿐이겠지

꽃잎이 그렇고

예를 들어 발광하는 애비

거품을 뿜어 올리며 갈탄 난로를 끌어안던 열정도

제정신 차렸을 땐 잘 구워진 살밖에 남지 않았

음을

허연살을 뜯어내며 깨닫 듯

운명과 싸우는 짓은 순간의 환희와 평생의 상처라

치속는 것들은 알고 있겠지

발광하던 애비는 이후로 잠만 잔다는 걸

중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걸

분수는 잘 알고 있겠지

알면서 솟구치는 미친 피의 운명을

 

 

 

차라리 어둠을 다오

김중식

 

애당초 적응하기 힘든 세상이다

매미 울음은 노래의 비등점, 순교 같다.

아득아득 지상(地上)으로 기어 나온 일에 대한 자책 같고

이미 저질러버린,

물릴 수 없는,

그리하여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투의, 갓난아기의

발버둥 같다.

자기 목숨을 인질로 한 한탕주의 같다.

날개가 찢어질 때까지

목젖이 터질 때까지 온몸이 비틀어질 때까지

울어젖히는 매미 울음은

애당초 적응할 수 없는 세상으로 기어 나온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같다.

그러지 않고야 어찌

7년 공화국 시절을 암중모색하며 거듭 껍데기 벗던 매미가

어설픈 녹(錄) 그늘 틈에서 그토록 쉽게 자포자기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니 파도야?

바다 저편에서 바득바득 밀려온

게거품 문 파도야.

 

 

 

참 시끄럽다

김중식

 

개나리 피었는데 또 폭설!

한 계절이 그냥 가지 않는다

뒤끝이 좀 있어

숲을 걸으면 풀벌레 소리 잦아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북새판 된다

말 한마디로 조용해질 세상이 아니다

그래, 아무리 살아봐야 가을은 익숙해지지 않지

안개 속으로 내려온 양떼구름

세상과 어긋나 자꾸 헛디디게 되지

 

이 산 저 산 적막강산

다들 잠든 척하지만 속으로는 바쁜 거야

좀 지나 봐, 우글우글할 테니

 

 

 

피맛골 빈대떡집

김중식

 

물럿거라!

뒷걸음질로 물러나라는 게 아니라

길 밖으로 비켜나란 뜻이다

 

자전거 타고 노닐 때

비둘기가 공중부양 못 한 채

겁 지 겁 허

전족 신은 오리처럼 불러나는데

 

비켜나세요! 뒷걸음질 치지 말고!

저기 가는 저 나비도

허(虛)

겁(怯)

물러서는 게 아니라

비켜나면 될 일을

 

물럿거라! 할 때

종로 피맛골에서 빈대떡을 먹는 이것이

세월을 허송(虛送)하면서

막걸리 주전자처럼 찌그러지는 지혜!

 

늙어서도 손 놓지 못하는 게 성욕뿐인가

나는 내 애비의 빗나간 흔적이고

아들은 나를 빗나간 증거려니, 하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김중식

 

1

바퀴벌레를 손바닥으로 내리친 뒤 아미타불! 좋은 몸 받아라! 합장하는 것은, 벌레의 극락행을 기도함이 아님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은 자기의 꼬리를 문 뱀처럼 다만 입의 즐거움을 위해서이고 넌 죄도 모르느냐!

사랑한다면서 왜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실연도 여러 국면을 입의 즐거움으로 해석한 결과임

당신은 혹시 여성 혐오 증세가 있지 않습니까? 질문 또한 자기의 주의주장을 겸손하게 확인하는 절차일 뿐

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지나치면서, 그러나 고개는 끄덕이면서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구상한다

대화란 서로가 귀를 틀어막은 채 서로의 등뒤에 있는 벽에 대고 고함치는 행위임

 

2

늑대는 교미 장면을 들키면 상대가 힘셀지라도 끝까지 쫓아가서 물어죽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익명의 폭력과 실명의 폭력이 교미하는 장면을 엿보았기 때문에 그대의 영혼이 물어뜯겼다고 우기지마

그대가 앞치락뒤치락할 때마다 自然이 무너졌다 솟구쳤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 그대가 외롭건 슬프건 저 구름은 지 맘대로 흐르다가 멎는 것임

열등한 자가 비유를 쓴다 비유를 쓰면서 자신의 無力과 무식에 대해 속으로는 얼마나 울화통을 터뜨리는지

얼마나 자신을 달래는지 그대는 아는가 나의 자살시도가 그대에게는 해프닝으로 해치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대와 나 사이엔 국경이 있다는 사실, 말이 안 통하므로 더 이상의 진지함이 없다

 

말이 안 통해서 술을 먹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기 싫고 술을 먹으면 집으로 안 들어간다

말이 안 통해서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

말이 안 통해서 우리는 상처 없는 아픔과 절망 없는 고통을 하고 싶어 한다.

 

 

 

호라지 좆

김중식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저 날뛰는 세월에 대책 없이 꽃피우다 들켜버린 놈이고 대놓고 물건 흔드는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 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남는 놈들 앞에서 내 가시로 내 대가리 찍어서 반쯤 죽을 만큼만 얼굴 붉히는 이 짓은 또한 얼마나 당당하며 변절의 첩첩 산성(山城) 속에서 나의 노출증은 얼마나 순결한 할례냐 정당방위냐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면죄를 구걸하는 고백(告白)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홍수

김중식

둘레 전체가 입구이지만

출구는 외길의 북망산, 사막은

들어가기는 쉽지만 나오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탄생 혹은 홍수, 호흡은

쉼 없는 저주 또는 물고문, 지붕이

안테나와 속도가 그 위에

욕망과 전염병이

강안(江岸)을 확장하며 떠내려간다 사람이

익사하고 더러는 더 일찍 익사하는 곳

건져지고 싶다

아니, 홍수가 대세(大勢)라면

나보다 괴로운 것 많나니

많은 쪽에 휩쓸리고 싶다.

 

 

 

홍은동 극동아파트의 오후 4시

김중식

 

암자다. 새벽 4시 같은

불안한 영원이다.

 

누구도 모르는 유령의 시간이다.

없이 사는,

없는 것처럼 사는,

지는 해에 광합성 하는,

풍(風) 맞은 이들의 재활원이다.

우째 사는 일이

마른 낙엽 밟히는 소리를 내나,

두 손을 떠는 게

자기 음악에 취한 지휘자 모습이지만

줄 인형처럼 성긴 관절과 근육

바스락거리는 것은 몸이 김샜다는 물증

실외에서 실내화를

질질 끄는 소리뿐.

씽씽카라도 한대 오가면 곧 사라질,

구르는 바퀴에 걸리적거린 적 없는

시간의 암자

스스로를 비켜주는 이슬.

 

 

 

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대가(代價)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솟구칠 때마다

금 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흑점(黑點)에서 클로즈업으로 날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의

피안(彼岸)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밑의 벌레를 놓치는 원시(遠視)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비상(飛翔)만 보인다

 

 

 

K(1965~1991)를 추억함

김중식

 

바보

 

굵고 딱딱한 팔뚝/ 팔씨름에서 진 적 없고

깊고 딴딴한 팔뚝/ 말씨름에서 진 적 없으나

그의 애인-그녀에게는/ 이긴 적 없는 바보

 

 

집념

 

사랑합니다/ 고백하기 전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름답군요/ 감탄하기 전부터 그녀는 아름다웠으며

알게 되어 기쁩니다/ 인사하기 전부터

매우 잘/ 알고 있었음을……

 

 

이름

 

1학년 2학기 그녀의 이름은 유진희

2학년 2학기 불문과 여학생 회장 유진희

3학년 2학기 인문대 여학생 회장 유진희

4학년 1학기 제적된 뒤 주민등록증 이름 최경렬

 

 

잔재

 

-넌 갈수록 어눌해지는구나

그런데 네 어눌엔 힘이 있어

-난 단순해져야만 해

그동안 난 너무 복잡했으니까

-강한 것은 단순하겠지?

-내일부터 공장(工場)에 들어가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니?

-이력서 내러 갔었는데

날 전혀 의심하지 않았어

-아니야, 넌 이뻐

 

 

시인

 

국문과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는 박사였다

시에 관한 한 철학이 있었으니 말이다

뭉클해야 해 뭉클

시인은 神 없는 광신자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들고 다니는 시집을 보며는 알 수 있는데

어느 날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

최후 진술을 할 때는 모든 시집을 태운 뒤였다

시는 과학의 좀벌레야

시인은 혁명을 배반해

정말이지 그는 시에 관한 한

박사였다

 

 

파혼

 

사상이 틀리면 연애할 수 없습니다

연애도 사상 의지입니다

낙관적인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식민지 치하에서

비관적인 사상은 비극입니다

동지 둘이 증인이 되어 약혼을 한 뒤

경춘선을 타고 약혼 여행

이박 삼일 후 그는 입대했고

두번째 휴가를 나와서 귀대 날짜를 어겼다

운동을 포기했습니다---그녀의 말

그는 매일 편지를 썼다---사상은 삶의 일부입니다

아니 그런 거 필요 없어 널 사랑한다 말이야

 

 

그 후

 

그는 물 위를 걷고 싶어 했다

매일 아침 냇가에 나가 연습했다

넉 달 후

그는 물 위를 걷고 있었다

때는 겨울, 위를 걷고 있었다

또한 그는 사물을 응시했다

나중엔 태양을 쏘아보았다

두 시간의 눈싸움 끝에

태양이 서편으로 숨어버렸다

그는 이겼다

때는 겨울, 그의 눈이 멀어버린 것이었다

 

 

유언

 

의지를 가진 자 홀로 불행하므로

내려올 산(山), 아예 오르지 않는다

 

 

 

4월이 가기 전에

김중식

 

4월이 가기 전에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가

 

서글픈 무슨 일이 있었는가,

 

4월이 가기 전에

나뭇잎파리는 푸른 하늘 위에 흔들리고

새잎이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나뭇가지 위를 끊임없이 흩날리고 있는데

한 방울의 눈물이 푸른 하늘에 멍들어 있는데

4월이 가기 전에

 

너는 사랑을 하는가

 

가슴 아픈 가슴 아픈 푸른 하늘 같은 퍼런 사랑을

너는 사랑을 하는가

사랑을 기억하는가

4월이 가기 전에

기억하여야 할 것들은 길가 멀리에서 잃어버린 채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은 기억의 묘비명에 흩어져 있는데

묘비의 글자들은 이슬비처럼 아른거리며 마음속으로 불어오는데

4월이 가기 전에, 울어야 할 것들은 울어

울어 4월을 보내는 것

사람들은 길가에 늘어서서 흘러가는 바람과 시간들을 바라만 보고 있네

 

4월이 가기 전에

 

4월이 가기 전에, 무엇이 있어

나뭇잎파리가 흩날리고 있는가

무슨 기억이 잇어

나뭇잎파리가 흩날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