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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산

강영일 여름 산

고명 여름 산

김덕성 여름 산에 오르다

김재진 한여름 산행

김정구 여름 산

박인걸 여름 산

반기룡 여름 산

오정방 여름 산

유명숙 여름 산에 오르면

이성복 여름 산

이수익 여름 산

이정웅 여름 산길

이향아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화은 여름 산에서

임영조 여름 산행

장석남 여름 산

전홍준 여름 산

정철훈 여름 산

 

 

 

여름 산

강영일

 

당신의 주름진 무명 치마 닮은 여름 산은

폭염 속 진통 끝에 가을을 낳고 있었다

밤새 열병 난 아이처럼 식은땀 몇 줄기

뻐꾸기 우는 무논에 내리쏟고

세월의 열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교회당 꼭대기처럼 높기만 한 하늘 모퉁이

속 허연 달덩이 하나 박처럼 걸어 놓고

수줍음 타는 낙엽 하나 살포시 주워

색 고운 화전으로 부쳐 내고 있었다

 

 

 

여름 산

고명

 

아침나절 내린 비가 질척하게 고여 있는 숲길

나무들의 젖은 몸에서

짙은 페로몬 냄새가 풍겨나고 있다

짐승의 거친 숨소리 울음으로 풀어내며

흐트러진 머리칼 푸르게 출렁이고 있다

한낮의 잠 속으로 노곤하게 빠져드는

알몸의 여자처럼

 

 

 

여름 산에 오르다

김덕성

 

곁에만 있어도

흐뭇하고 시원한

볼수록 다정다감한 그대 품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하늘에게 포근히 감싸여

땅을 품은 채

우거진 숲을 이루어 놓으며

산사람들을 포근히

넓은 가슴으로 품고 사랑해 주는

사랑하는 그대

 

아름답고 강인한 마음으로

늠름한 자태로

무언의 사랑을 베푸는

온정어린 넓고 장엄한 그대

사랑과 소망을 주는 그대가 좋아

그대 앞에 섰노라

 

 

 

한여름 산행

김재진

 

무채색 모자를 지긋이 눌러쓰고

굽어진 나무 지팡이 챙겨 들고

한여름이 깊어진 산중을 오릅니다

 

초립에 지팡이 타닥타닥 두들겨서

산 벗들에게 그간에 안부를 전하고

드세진 가시덤불과 거미줄을 피해서

창이 긴 모자가 제법 위안을 줍니다

 

폭염에 장맛비가 한 차례 지나선지

여름 숲은 짙은 푸르름이 더해지고

목마른 계곡물도 수량이 풍부해져

빗장 걸어둔 흥겨운 노래를 퍼 내립니다

 

햇살 바라기인 보랏빛 도라지꽃은

풋풋한 첫사랑의 아련함을 연상케 하고

흰 노란빛 싹 대 불쑥 이 올리는 영지는

불로초에 강렬함을 선사합니다

 

하산길에 마주친 날다람쥐와는

겸연쩍은 눈인사를 건네고

개울가 너럭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맺힌 땀내를 씻노라니

 

살랑살랑 불어오는 하늬바람 결에

나른해진 시야는 지그시 담겨

흐르는 개울가에 세상 시름 놓았더니

산 벗들도 떼창으로 반깁니다

 

 

 

여름 산

김정구

 

뜨거웠던 해는 지금 어디에 있나

두터운 그늘에 숨어 사는 나는

외로울수록 예민해지는 짐승이 된다

고도를 높여 갈수록

가늘어는 핏줄과 얇아지는 껍질들

빼곡한 기억의 덫을 피해 문득

오르기를 멈추었을 때

소스라치며 몸을 떠는 알몸의 산을 보았다

찢겨나간 가지에 맺혀 눈부신 수액

피 흘리는 상처 아래로

산 벌레 한 마리 열매처럼 진다

산 벌레의 피는

왜 늘 푸른가

 

 

 

여름 산

박인걸

 

떡갈나무 우람하고

산 벚나무 비탈에 늠름하네

상수리나무 청청하고

소나무 향기 진동하네

 

꽃 진 자리마다

맺힌 열매 알알이 영글고

보랏빛 싸리꽃

무리 지어 파도치네

 

참매미 높은 가지에서

숨넘어가게 자지러지고

자주 보던 청솔모 한 마리

제 혼자 곡예 부리네

 

산이 좋아 산에 오면

산은 나를 가지 말라 하네

한여름 청록 숲은

산길에 나를 주저앉히네

 

 

 

여름 산

반기룡

 

울울창창 숲속엔

녹음이 빗살무늬처럼 펼쳐지고

 

다람쥐 청설모

갈지자 행보하며

가는 길을 안내한다

 

아버지처럼 둥근 눈 뜨고

바라보는 듯한 여름 산은

나약한 인성을 담금질하고

허약한 의지를 풀무질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여름 색깔과 풍광에 도취 되어

자연의 오동통한 살 속에 빠져들고

오대산 정상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여름 산

오정방

 

더위를 피해 모두들 물을 찾아

바닷가로 강변으로 나갈 적에

바람을 맞으러

여름 산을 찾아가 보라

시원한 나무 그늘도 좋거니와

계곡을 흐르는 정겨운 물소리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가락

흥에 겨워 능선에 올라서면

확 트인 시야와 더불어 맞게 될

산능에서의 산바람에

더위는 도적처럼 달아나고

마침내

여름 산의 풍치에 도취되리라

여름 산의 묘미를 만끽하리라

 

 

 

여름 산에 오르면

유명숙

 

장맛비에

흠뻑 젖은 여름 산

촉촉이 젖은 등산로에

짙은 풀냄새 피어나고

맑은 물 넘치는 계곡은

숲속 야외 수영장이다

절경을 이룬 수목(樹木) 사이로

그림인 듯 펼쳐진 풍경

심로(心路)에 묻으며

한나절 지나도록

헤어나지 못하고

그리운 이라도 기다리는지

뽀얗게 운무 덮인

산등성이에

땅거미 밀려 와

어둠을 부르면

못내 아쉬운 마음

놓아두고 돌아서는 발길

차마 잊혀지지 않아

산허리 돌아돌아

그림자라도 남기고 가야겠네

 

 

 

여름 산

이성복

 

여름 산은 솟아오른다

열기와 금속의 투명한 옷자락을 끌어 올리며 솟아오른다

발등에 못 안 박힌 것들은 다 솟아오른다

저기 비행기가 수술 톱처럼 하늘을 끊어낸다

은빛 날개가 곤두선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이번 여름엔 꼭 다녀와야겠다고

그 여자는 잠자는 벌레를 밟았다

모르고 밟았다 부서지면서 물 같은 피가 솟아올랐다

내가 거듭 밟았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나는 속으로 욕했다

따지고 보면 욕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마큼 당신과 관계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내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백 사람 중에 하나가 병들어 아프면 당신도 아프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부질없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여름 산은 솟아오른다

여름 산은 땀 흘리지 않는다 힘쓰지 않는다

여름 산 여름 산 여름 산 우리는 그늘에서 콜라를 마셨다

콜라를 마시며 불란서를 생각하고 울었다 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시멘트 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 오르는 여인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리는 흉내를 냈다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척했다

여름 산은 솟아오른다

한숨 쉬지 않고 솟아오른다 반짝임과 몽롱함을 뿌리며 솟아오른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 잡힌 손에서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살려줘요!

여름 산은 무겁게 솟아오른다

솟아오르지 않는다 솟아오르는 모습만 보여준다

여름 산 여름 산 여름 산 먼지, 매연, 악취로 부서지는

여름 산 여름 산

여름 산

 

 

 

여름 산

이수익

 

여름 산은

내 어릴 적 바라본

젊었던 아버지

푸르고 힘찬 육체가

능선을 이루며

누워, 편안히 휴식하고 있다

내가 곁에서 웃고 울고 소리 질러도

부딪치며 기어올라도

그저 귀여운 듯, 미소 지으며

가만히 바라보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나는

어린 짐승처럼

한낱 여리디여린 생명체일 뿐이었다

지금

짙푸른 여름 산엔

야생의 산짐승과 날것들이 푸드득거리고

녹음을 먹은 깊은 계곡에선 물소리가

한창이지만

젊은 아버지 같은 여름 산은

능선이 구비 치듯

크고 건장한 육체로 누워

산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몸짓들엔 꿈쩍도 않는다.

그저 한두 번 눈을 떴다

감았다, 할 뿐이다

 

 

 

여름 산길

이정웅

 

부서지는 그 길

여러 방향 헤매 가다

돌아왔다

한 티끌 남지 않는

겨울엔

잘 몰랐었는데

채색 짙은 숲길에 홀려

여름 내내 할 일 없이

돌아다녔다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향아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

죽는다는 것은

호사스런 저 산자락을 베고 눕는 일

갈증에 울먹이던 저잣거리

두 발목 잡아끄는 수렁을 지나

연기처럼 구둘장을 벗어나는 일

연기처럼 긴 머리채 헤뜨리고서

벙어리 저 들녘을 내려다보는 일

삐비새 원추리꽃 훨훨한 구름

비로소 나도

무념의 한 칸 마루 정자를 짓는 일

멀리 여름 산

고매한 눈길을 쫓아가노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여름 산에서

이화은

 

그날

여름 산에서의 우리들

입맞춤은 그냥

푸르고 푸르렀다

명아주 이파리 두 장

포개지듯 포개어 더

이슬 젖은 잎사귀

이마로 떨어지는

한 줄 금 햇살로 반짝

시간을 말려내고

뻐꾹새 울음소리 한가득

입안에 고여 우리도

입을 열면 그렇게

울음 울 것만 같았다

 

 

 

여름 산행

임영조

 

더위 먹은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내가 여름 산에 당도하니

산은 막 달 찬 임부였다

간밤에 내린 비로 됫물 막 끝낸

서늘하고 향긋한 몸내

흘리듯 계곡으로 몸 들이민다

(그럼 이내 섹시한 허리 꿈틀

아무나 덥석 받아줄 줄 알았지?)

그러나 여름 산은 내색이 없다

까닭 없이 변심한 애인처럼

표정 참 냉랭하고 무겁다

(이 머쓱한 화상을 어디다 감추지?)

예라, 웃통을 홀랑 벗고 내가 눕는다

누워서 산을 받는 이 쾌감!

왜 몰랐을꼬? 이 손쉬운 열락을

이다음 나 세상 뜰 패도

옳거니, 무릎 치듯 문득 떠나리

내내 기척 없던 매미들

쑤왈쑤왈 범어로 염불하는

저 아래 으슥한 숲속

조루증의 사내들 대여섯이

식은땀 뻘뻘 개고기를 뜯는다

나무아미타불! 비호같이 내려가

모조리 산채로 어흥 관세음보살

여름 한낮 꿈이 비리다

 

 

 

여름 산

장석남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 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린다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여름 산

전홍준

 

시청으로 몰려가는 민주시민처럼

먹구름이 훑고 지나가자

졸고 있던 봄 산은

불알 요령 소리 나게

진한 녹색 물감을 풀어 염색을 한다

시비하지 마라

산적도

동학의 잔당도

북쪽의 패잔병에게도

황진이처럼

치마끈을 풀어주는 이유를

 

 

 

여름 산

정철훈

 

지금 와 생각하니 수많은 죽음들은 스스럼없이 나를 통과했다

그들은 초연히 인연을 끊었던 것인데 그걸 왜 몰랐을까

그들처럼 나도 연을 매듭짓고 날아오를 수 있을지

죽은 할머니, 죽은 외할아버지, 죽은 시인들

그때는 그들의 죽음을 단지 늙어서라고 치부했다

간암으로 간 처삼촌, 스무 살 흰 뼈로 산에 뿌려진 조카,

지금은 땅에 묻힌 수많은 당대의 얼굴들

나는 그들의 죽음을 단지 병 때문으로

세상에서 얻은 병 때문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꿈이 푸른 잎새 되어 흔들리고 나는 속으로 눈물짓는데

그러나 홀로 수풀 우거진 여름 산을 오르다 문득

내가 지나쳤던 그들의 검은 영혼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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