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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秋分)

권오범 - 가을 단상

김덕성 - 가을엔 사랑이 익는다

김명인 추분의 코스모스를 노래함

김설희 - 추분

나유성 - 추분

나희덕 - 추분이 지나고

류병구 - 참을 수 없는 기다림, 가을

류외향 - 추분을 지나는 낙엽은

목필균 - 가을 느낌표

목필균 - 하늘은 청명한데 그녀는

미림(美林) - 가을 길 추분(秋分)

박영란 - 추분

박용래 구절초(九節草)

박인걸 - 구룡령(九龍嶺)

박종영 - 언제부터 외로운가

박종영 - 즐거운 풍경

서상만 - 추분

솔밭에송담 - 추분(秋分)날에

안국훈 - 추분 감자

오태수 추분날에

윤보영 - 추분 커피

윤의섭 추분(秋分)

이도연 - 추분

이동순 - 여치

이해우 - 9월이 오면

장광규 - 추분(秋分)

정민기 - 추분

정민기 - 추분이 오셨습니다

정양 - 추분

정찬열 - 추분(秋分)

최복준 가을 소나타 - 선홍빛 단상

 

 

 

가을 단상

권오범

 

찰떡같던 햇볕

추분이 다가오자

서름서름 미끄러져

구조조정으로 술렁이는 산골짝

이미 생명수 꼭지는 잠갔을 테고

바람마저 하루가 다르게

밥맛없이 굴어

이파리들이 우두망찰하고 있다

허공을 힘차게 가르던

말매미들 사랑 타령도

벼들의 황금빛 묵념으로

볼 장 다 본 지 오래

세월 만난 코스모스

하늘 떠받들고

떼 지어 곤댓짓하자

거미 치밀어 딴전인 수양버들

 

 

 

가을엔 사랑이 익는다

김덕성

 

여름이 지나

기다리던 가을이

바람에 실려 오더니

벌써 추분이 지나

가을 기운이 완연하여

풍요롭다

가을이 오니

내 마음엔

어느새 넉넉하고

부드러워지고

내 가슴엔

사랑이

탐스럽게 익어가니

이 얼마나 좋은 계절인가

가을이여!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어다오

 

 

 

코스모스를 노래함

김명인

 

길섶에 뿌려놓은 코스모스 여름 내내

초록 줄기를 뻗더니

길가에 추분의 꽃대들을 잔뜩 세웠다

아침나절에 내려놓는 햇살 제법 선선해졌지만

아직도 한 무더기 무더위가 짓누르는 한낮,

코스모스가 이룩한 생산은 수백 수천

꽃송이를 일시에 피워낸 것인데

오늘은 우주의 깃털 바람 그 꽃밭에다

하늘하늘 투명한 햇살의 율동 가득 풀어놓고 있다

알맞게 온 색색의 꽃잎들이 결을 맞춘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지구가

코스모스 잎 위에서 저마다의 이륙을 준비한다

 

 

추분

김설희

 

붉은 고추의 기원은 햇볕의 중심이 생긴 수십 억 년 전의 일이지

적도를 가로지르는 볕의 심장이 달아오르며 뿜어내는 열기

그 무엇도 구울 수 있겠지

계절에 매달린 잎과 열매

열일곱, 스무 살의 피를 들끓게 하지

파도에 밀려온 모래알을 어스러지지 않게 굽지

승냥이와 주인의 이어진 긴 끈을 익혀 인연이라 하지

칸나 얼굴에 핏물 색 스카프를 두른 것도 한여름의 이름이지

되풀이하며 오래 익은 것들은 하나의 이름이 되지

가령, 조약돌 썰물 꽃잎 담장 조카 편지...

이런 이름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볕이 활짝 필 때

마당이고 언덕이고 철길이고 사방으로 발을 뻗치지

새파란 고추는 그 볕의 옷을 끌어 덮으러 자꾸 늦잠을 청하지

그러면 발끝 혈관부터 데우고 몸을 슬슬 달아오르게 하겠지

그러다 가을이 저만치서 짧은 해를 물고 걸어오는 소리 들리면

흙냄새 고인 배춧잎에 어린 메뚜기 두어 마리 앉혀놓고

잇몸이 잘 여문 고추밭에 돌아앉은 여름의 뒷모습

 

 

 

추분

나유성

 

오랜만에

당신이 아름답게

보이는 걸 보니

몹시 외로운가 봅니다

 

저울 위에

당신을 향한

마음을 얹어보니

사랑과 미움이 수평입니다

 

이 밤 지나면

원하던 원치 않든

한쪽으로 기울어지겠지요.

 

 

 

추분이 지나고

나희덕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를 보여줄 수 없지만

그가 있다는 것도 보여줄 수가 없군요

물이 증발한 종이 위의 얼룩

어둠이 등뼈에 불을 붙이고

등줄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눅눅한 생각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벽을 어지럽히는 그을음

금이 간 거울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재채기처럼 쏟아지는 기억

시간을 갉아먹는 몇 개의 바늘

이제 밤이 길어지리라는 것을 알아요

어둠이 등뼈를 다 태울 때까지

낮도 밤도 없이 길고 긴 잠을 잘 수 있었으면

밤이 지나고

독수리가 간을 쪼러 다시 찾아오겠지만

 

 

 

참을 수 없는 기다림, 가을

류병구

 

전혀 예상치 못했다

모처럼 말간 추석 하늘이

돌연

양재천 여울목에 투신했다는 소문

입소문은 금세 꼬리를 물었다

흰 구름의 격렬한 빗금 붓질도

예사롭지 않았다

볏내음 진한 추분 전후,

하늘도 변신하면 저런 모습이구나

가을 색깔을 실감해 보려는

의도적인 시도였을까

놀란 개천, 경기(驚氣)하듯 파문이 일었다

뒤집힌 쪽빛 하늘 일으켜 세우는 동안

물속에 머리 박은 능수버들에

조용히 가을물이 들기 시작했다

 

 

 

추분을 지나는 낙엽은

류외향

 

추분을 지나는 낙엽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추고 있는가

저리도 즐겁게 무덤으로 몰려가는 낙엽이

열어 놓은 길 위로

거듭되는 안개,

사람은 마음의 가장 엷은 쪽이 안개에 젖는다

추분을 지나는 사람의 마음은

한 그루 나무를 톱질한다

시간의 순라꾼들이 밑동을 차며 지나가고

잘 단장된 장례 행렬이

흙을 실어 간다

마음이 가라는 쪽이 어딜까

마지막으로 빈 나뭇가지가

조금 뒤척인다

차가운 날이 시작되고

새들의 목발질 소리,

허공의 두꺼운 웃음소리

들으며 조금씩 흔들리고

조금씩 젖으며

약속하지 않은 곳으로 간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바람이 슬쩍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다

 

 

 

가을 느낌표

목필균

 

옷깃을 여미며

길을 떠난다

 

추억의 갈림길은

햇살의 농도를 낮춰가고

늘어진 허리 곧게 세우며

허수아비처럼 들판에 선다

 

누렇게 익어가는 논 옆에

채마밭 무는 근육을 키우고

밑동 잘린 고춧대에

익어가는 끝물 고추

 

높이 올라선 하늘

무리 져 흔들리는 코스모스

앞으로 내게

몇 번의 가을이 왔다가

스러져 갈까

 

흥건하게

젖어드는 가슴이

맥놀이 한다.

 

 

 

하늘은 청명한데 그녀는

목필균

 

마스크를 쓴 채로 추분이 지나자

여름을 앓고 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데

 

문득 전해 온 그녀의 소식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갔단다

 

올려다본 하늘에 길이 열렸는지

아득히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인다

속도감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속도가 그 속도일까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울려다 보지만

그녀가 올라선 그 곳에선

내려다보면 내가 있을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없다는

윤회의 수레바퀴는

약속 없이 오는 이승에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순서는 예고 없이 속도를 내나보다

 

어떤 일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문득 날아온 그녀 소식에

가슴으로 여울진 물결에 종이배를 띄운다

마음만 오가다가 잊혀질 종이배

 

 

 

가을 길 추분(秋分)

美林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밤은 깊어가고

낮의 길이 짧아진다는 알림일

 

한발 두발 가을로

짧은 가을빛 향기여라

창밖에 들려오는 가을의 노래

 

여름 가고 가을이

확연한 가을 변화의 길

귀뚜라미 풀벌레 구성진 가을

 

오곡백과 추수 계절

가을빛 풍요의 천고마비

흐르는 하늘빛 깊어가는 가을

 

 

 

추분

박영란

 

추분을 지나면서 밤의 길이

낮의 길이보다 길어지기 시작

날마다 한결같은 시간이 흐르고

몸살 나면 물만 마시고 잠만 자는

그 어떤 사랑보다 지독한 자기애

 

구절초와 쑥부쟁이

가을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날씨가 서늘할수록 더욱 진한

구별하기 힘든 비슷한 색깔과 향기

봄꽃과 달리 소박한 눈길 마음이 가는

 

노랗게 피는 산국이나 감국보다

기운을 복 돋아주는 하얀 구절초

가을이 깊어가면 하루가 다르게 소리

높이는 풀숲에 들려오는 풀벌레 귀뚜라미

이슬 굴러가는 듯 맑은 찌릿찌릿한 소리들.

 

 

 

구절초(九節草)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달여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춧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추분)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구룡령(九龍嶺)

박인걸

 

명개(明開)에서 갈천(葛川)으로 가는

일천오십팔 미터의 고갯길을

추분(秋分) 무렵의 어느 날 나는

잘 다듬어진 포장도로 위로 내 달려

() 마루에 차를 세웠다.

구름 위로 솟은 오대산 비로봉에는

신비한 낮 구름이 감싸고

하늘과 맞닿은 설악산 대청봉은

손이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산허리를 맴도는 안개는

지나가는 길손을 전설 속에 가두고

통마람이 계곡의 원시림은

자연인이 되고픈 유혹을 자아낸다.

아름드리 고목에는

천년 이끼들이 누더기가 되고

딱따구리 구멍 파는 소리는

아련한 추억들을 이끌어내고 있다.

노변(路邊)에 야생화 햇살에 웃고

아직 단풍은 차비(差備)를 차리는데

옷깃을 파고드는 령() 바람은

벌써 겨울 초입에 선 느낌이다.

도시 극장에서 감상하는 영화 열편보다

오늘 하루가 더 행복하다.

남루함이 전혀 없는 자연(自然)에서

자아(自我)의 본질을 확인해서다.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득 담은 차는

산도(山道)를 따라 양양(梁陽)으로 달린다.

 

 

 

언제부터 외로운가

박종영

 

꼭 이맘때,

그러니까 처서 물 지나고 백로 절기 지나,

추분이 되면 선선한 초가을 바람으로

먹먹해지는 가슴은 무엇이냐?

앙금 없이 걸러내는 마음 하나 갖고 싶어

이토록 참고 견뎌온 시절인데,

오죽이나 못났으면 그 흔한 쑥부쟁이

한 아름 모두 빼앗기고

슬금슬금 물러나는 꼴이라니,

구차하게 흔들리는 억새꽃 비웃음이

절로 나를 슬프게 한다.

눈치껏 산에 올라 외로움 타는 물푸레나무

알몸 만지는 자유가 있어서 좋고,

옹달샘 가까이 가면 시원한 물 한 모금

누가 먼저 마시고 갔는지 몹시 궁금하다.

산 아래 끝자락,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폭의 풍경으로 궁구는 낙엽,

그 우직한 생명의 무덤을 쌓고 있는 가을은

언제부터 외로운가?

 

 

 

즐거운 풍경

박종영

 

추분 지나고 나면 초가을 소슬한 바람불어

산구절초 꽃잎이 한 겹씩 얇아지고

희미한 어둠의 무게로 열리는 새벽이면

이슬이 꽃 위에 내려앉으며

꽃들에게 귀띔을 한다,

여름내 수고한 산을 위하여 더욱 예뻐지라고,

땅거미가 어슬어슬 찾아들고

적막한 절 마당에는 고요가 엎드려

스님의 염불 소리에 사뭇 경건하게 명상에 들고

3층 석탑 아래 이끼긴

천년의 부도가 푸른 기운으로

무례하게 백팔기도 소복 여인의 치마를 들춘다

쑥스러운 여인, 눈 흘기며 피워내는 웃음꽃이 정겨운데,

이를 시샘하는 추녀 끝 풍경이

붉게 물드는 저녁을 흔들어 깨우고,

아랑곳없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의젓한

절 마당 푸른 나무들의 말 없는 결속이 부럽다.

 

 

 

추분

서상만

 

이제는 갈 곳이 없어

해는 황도(黃道)를 지나고

밤이 길어 우는 가을

먼바다 고래 울음소리보다

더 파란 달이 뜨는

이 밤은

외딴섬 맥반놀이처럼 서럽다

먼 산엔 벌써 눈발 치는 듯

늦귀로 듣는 풀벌레 소리

오만 날라리 상판들이

적선이나 놓고 가듯

곡절도 없는 극치의 떼 울음

떼 울음을 울고 있으니

 

 

 

추분(秋分)날에

솔밭에

 

새벽녘 동쪽 하늘 그믐달

삼각산 산마루를 노랗게 비춘다

추분의 기운이 산야를 휘감아

소슬바람 불어 살갗 차가운데

어둠은 여명에 쫓겨 혼비백산

흔적 없이 걷히어 하늘 푸르고

지평선 뚫은 붉은 해 발돋움에

하얀 햇살 천지를 밝혀온다

장중하게 뻗은 산줄기

태초 이래 꿋꿋이 자리 지키고

명당 찾아 자리 잡은 산사들도

수백 년 세월 담아 묵은 향취 풍긴다

여릿여릿하던 오월 신록도

계절을 품고 초록빛 짙어져

가지마다 잎사귀 무게 힘겨운데

검은 머리 소년 백발 되듯

무서리 내릴 즈음 저 잎사귀

오색 색소 뿜어 만산홍엽일 제

심란한 추남추녀(秋男秋女)

속가슴 붉게 물들이리!

 

 

 

추분 감자

안국훈

 

하지 감자 나오기 전

작은 방에 방치하던 감자 한 상자

푸른 싹이 한 치 넘게 자라

시들고 독기 품은 듯 먹지 않고

텃밭 한 편에 심었다

 

혹시나 싹이 빼곡하게 나더니

여름 장마에 줄기가 썩어

그 자리에 들깨 모종을 심었다

바쁜 일상 때문일까

감자의 존재 잊고 있었다

 

두 달 넘게 신경 쓰지 못하니

풀밭 세상이 된 지라

할 수 없이 풀과 들깨 뽑자

방울토마토만 한 감자 따라 나오고

기어이 씨감자 하나 빙그레 웃고 있어라

 

 

 

추분날에

오태수

 

백로와 한로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 않고

오로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중심 꼭 잡고 있으니

갈 것은 떠나가고 올 것은 돌아오고 숨을 것은 숨으니

소슬바람 불어오고 가을이 영글어가는 오늘이네

 

낮과 밤의 길이가 서로 똑같은 날이라 하니

너와 나의 사랑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늘 오늘 같은 날만 되고 쉬 식지 않은 열망 불타고

늘 그리움 쉬 저버리지 않은 애틋한 마음 맺히길

 

하얀 이슬이 빛나는 아침이면 밤새도록 서성이며

남기고 간 너를 가만가만 되짚듯이 떠올려 본다

하얀 서리가 맺히는 날이 오기 전에 그대 가슴 그리움만 맺히고

갈 햇살에 그리움만 빛나는 애틋한 사랑이 영글어 갔으면

 

제비는 떠난다고 저렇게 인정사정없이 먹이 사냥 여념 없고

찬 서리 내린다고 저 알곡들 여물어가는 소리 들리온데

임은 어디에서 저 소리를 듣고 있을지 가을이 익어가는 추분 날

 

삭풍 부는 겨울이 저기 오기 전에 울 사랑 저울질 말아야지

 

 

 

추분 커피

윤보영

 

오늘은 내가

공식적으로

커피 마시는 날!

 

오늘이 지나면

낮보다 밤이 더 길어지고

그리움도 따라 늘어나고

 

늘어난 그리움으로

가을타지 않게

부드러운 커피를 마셔주는 날!

 

 

 

추분(秋分)

윤의섭

 

춘분과 2분 하여

남은 반년 시작하는

추분이라네

우렛소리가 그치고

벌레가 흙으로

창을 막으며

땅 위의 물이

마르기

시작하네

고개 숙인 벼 이삭

수확을 하고 나면

들녘 허공에

찬이슬만 내리네

 

 

 

추분

이도연

 

동쪽 하늘

붉은 빛이 타오르는가

빛은 창 넘어 일직선으로

달려 들어와

아침이 눈부시다

벌써 추분이라나!

해와 달이

여름과 겨울이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다

현재까지 무승부

해와 달의 길이가 같은 날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첫걸음

추분이 가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치

이동순

 

추분 지나자

여치들은 자꾸 방으로 들어온다

밤에 불을 켜고

잠시 방문을 열어두면

방안은 온통 여치로 가득하다

벽으로 기어 올라간 놈들은 연둣빛 반점처럼 붙어 있다

제 몸보다 더 긴 그 특유의 더듬이로

불안한 미래를 더듬다가

누가 저를 보는 것을 눈치챈

여치는 그 자리에서 죽은 듯이 보행을 멈추고 있다

내가 시를 쓸 때

이놈들은 그 특유의 쉰 목소리로 내 옆에서 운다

이럴 때 여치의 모습은 참 측은하다

나는 여치를 본다

여치는 가을에 쫓겨 방안으로까지 떠밀려온 것이다

가을이 문 앞에서 서성이며

놓친 여치를 서운한 표정으로 흘끔거리고 있다

, 이 밤도 깊었구나

바람이 차가우니 방문을 닫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방 안의 여치와 더불어

이 가을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다

 

 

 

9월이 오면

이해우

 

깊은 밤 하얀 이슬 내려

가을꽃 목축여주고

해가 추분점에 올라

하지처럼 밤낮이 키를 잰다

 

산그늘 서둘러 내리는

짧은 햇살에 노처녀 고개 숙이고

둥근 가을 달밤에 보람 찾는

인정 깊은 사랑을 꿈꾸게 한다

 

속 깊은 결실 이루어

풍요는 허리띠 풀어주고

하늘에 흰 구름 높이 떠돌며

산자락에 알록달록 신방 꾸미니

 

어디선가 불러주는 9월의 노래에

강아지 살찌는 소리 들린다

 

 

 

추분(秋分)

장광규

 

자꾸 높아만 가는

하늘은

날마다 젊어지고

불볕더위를 이긴

들판의 벼 이삭

황금빛으로 여물어가며

머리 숙여 공손히 절을 하고

억세게만 보이는 밤송이

살며시 입 벌리며 미소 짓고

아침저녁으론 가을 기분

한낮은 아직도 여름 날씨

차차 밤이 길어만 가고

더위를 식혀준 가로수

노란 손수건 준비하며

초록 양산 접으려 하고

달 밝은 밤

좋은 계절을 알리는

귀뚜라미 밤새워 노래하고

 

 

 

추분

정민기

 

아리따운 추분이 연못에 목을 축일 때가 있다

그 뒤로 머뭇거리다가 사뿐사뿐 가을비가 다가왔다

추분은 가을비를 다 맞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건너다보니 세상에도 비를 맞고 있는 무한한 마음,

오랫동안 갈팡질팡하다가도 울지 않았던 가슴이어라!

마음 상해도 괜찮다고 착함을 덜어주었다

 

기다리던 밤이 왔는데도

가을비 소리가 처량하게 들린다

어제 우리가 손잡고 사랑을 약속하던

그 자리에도 차갑게 비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가을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그립다, 시를 쓰다가

감미로운 오르골 음악에 취해

그대로 엎드려 잠들어보면

그대 그림자가 창가의 비처럼 어슬렁거린다

 

 

 

추분이 오셨습니다

정민기

 

코스모스를 옆구리에

애인의 팔처럼 끼고 추분이 오셨습니다

순간 우렛소리 온데간데없고

벌레가 숨바꼭질하자고 숨어 있습니다

낮과 밤의 길이는 사이좋게

나란하다가 점점 밤이 깊어만 갑니다

논밭은 무르익어 추수할 때가 되고

코스모스 핀 하늘을 고추잠자리가

모자이크하느라 분주하게 날아다닙니다

긴긴밤, 별이 반짝반짝 흐르고 있습니다

 

 

 

추분

정양

 

밤이 길어진다고

세월은 이 세상에

또 금을 긋는다

다시는 다시는 하면서

가슴에 금 그을수록

밤은 또

얼마나 길어지던가

다시는 다시는 하면서

금 그을수록

돌이킬 수 없는 밤이 길어서

잠은 이렇게 짧아지나 보다

 

 

추분(秋分)

정찬열

 

가을 하늘

채색하는

높아진 하늘에는

가을로

접어든 백로와

찬 이슬 맺히는 한로(寒露) 사이

낮과 밤을

키 맞대는 추분인 어제

땅거미 자리 펴고 귀뚜라미 울어댄다.

 

 

 

가을 소나타 - 선홍빛 단상

최복준

 

백로 지나 추분으로 가는 들녘

불그레 수줍음을 더해가는 고추

볼 주름 깊게 팬 노부부가

내걸고 말리는

고추를 본다.

노부부 이마 땀방울로 맺히던 땀방울은

빨간 뱃살 속으로 숨어든 것일까

볼록하게 살찐 아랫배는

노란 알갱이들로 빼곡하고

초록의 겉옷을 벗어버린 알몸은

빛이다.

고추, 선홍빛을 생각했다

선혈이 낭자한 복부

맨살이 붙잡고 있는 것은

주사기 바늘처럼 내리꽂히던

한여름 뙤약볕이었을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땡볕을 삭혀온 것들은 모두

백로(白露)를 맞으면 선홍빛인 것을

광합성의 기억을 더듬어

연록에 숨어든 제 빛깔을 찾아가는 것

뻘겋게, 시뻘겋게

구릿빛 노부부 얼굴을 닮아가는 고추

눈물, 콧물로 안기는

선홍빛

맵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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