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계순 - 처서(處暑) - 작은 손
강기원 – 처서
고재종 - 외로움에 대하여
김상아 – 처서
김영수 - 처서(處暑)
김오민 - 처서
김용화 - 처서 무렵
김유석 – 처서(處暑)
김은아 - 처서
김인숙 – 처서
김춘수 - 처서 지나고
목필균 - 처서(處暑)를 지나며
문성해 - 처서(處暑)
문태준 – 처서
박기만 - 처서
박덕중 - 처서 무렵
박명숙 – 처서
박성룡 - 처서기(處暑記)
박얼서 – 처서(處暑)
박인걸 – 처서(處暑)
박인걸 – 처서 그즈음
박인걸 - 처서 무렵
박인걸 - 처서 소묘(素描)
박일만 – 처서(處暑)
박종영 – 처서 무렵
박준 – 처서(處暑)
박태일 – 처서
방윤후 - 처서 간이역
백원기 – 처서
서윤덕 – 처서
신경림 – 처서기(處暑記)
신대건 - 처서
신동성 – 처서 아침에
신승준 - 처서(處暑)가 지나고
양승준 - 처서
오보영 - 처서의 은혜
오애숙 - 처서가 지나가는 가을 길섶에서
오용구 – 처서(處暑)
윤경자 – 처서
윤보영 – 처서
윤보영 - 처서 커피
윤인구 - 처서(處暑)
이광범 - 처서
이기철 - 처서
이상원 - 처서 지나서
이종탁 - 하늘이 내려주신 처서(處暑)의 선물
이철수 - 처서(處暑)
장광규 - 처서(處暑)
장성우 - 처서(處暑)
장흥진 - 처서 무렵
정끝별 – 처서
정민기 - 처서 지나고
정양 - 처서
정이산 - 처서(處暑)를 기다리며
정이산 - 처서(處暑)를 넘어
정재영 – 처서 소묘
정찬열 - 처서(處暑) 날의 열망
조예린 - 처서
조정애 - 처서를 지나며
주명희 – 처서
최규영 – 처서 아침에
최길하 – 처서
한보경 - 처서가 지나간다
한성희 – 처서 시야
허림 – 처서
허명 - 처서(處暑) 언저리
허욱도 - 처서
허형만 - 처서
홍사성 – 처서(處暑)
홍신선 - 처서 부근에서
홍해리 – 처서
홍해리 – 처서 지나면
여름은 늙어 버렸고 – Herman Hesse
처서(處暑) - 작은 손
강계순
찌르릉 찌르릉 땅 울리면서 단근질하던 태양
숙지근하게 근육 풀고 물러앉자마자
한 소끔의 바람 옮겨와서 쏴아 뿌리고 가는
보이지 않는 작은 손
기습적으로 퍼붓던 여름 소나기 맞으면서
푸른 잎들 뒤에 숨어 숨 가쁘게 매달려 온
조그맣고 둥근 대추알들 문득
몸 반들반들 빛내고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가을꽃들
짧게 남은 날 위해 다시 천천히
허리 펴고 일어선다.
혹독한 여름 내내
이해하기 힘든 책과 씨름하면서
풀 죽어 끙끙대던 나도
이제 서늘히 일어서는 능선을 따라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처서
강기원
망초 꽃잎 속에 상제나비가 꽂혀 있다. 날개 달린 서표
당신이 서표를 건넸을 때 난 그것을 책에 꽂지 못하였다. 심장 속에 날개 접은 나비처럼 가만히 꽂혀 있는 서표. 나비인 줄 알았더니 차라리 단도다.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것은 서슴없이 찔러댄다. 약속을 환기시키듯, 조용히 그러나 엄하게 꾸짖듯. 때로,
그것은 당신의 손바닥처럼 차가운 심장을 쓰다듬기도 하나 보다. 처서의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면 겹쳐지는 서표의 서늘한 촉감. 곧 제 리듬을 되찾은 심장을 놓아주고 난 그만 단풍처럼 나른해진다.
가을의 부적 같은 상제나비
부적의 무늬는 망초 꽃술 마른 핏빛
부적의 위안과 경고
나비와 단도와 손바닥의 부적
사이에서 날들이 흘러간다. 저승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망초의 마음이 되어 나비를 바라본다. 망자의 발자국을 남겨놓고 쉬 떠나갈 상제나비의 마음은 외면한 채, 저도 아프리라, 아프리라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외로움에 대하여
고재종
들어봐, 저 처서절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 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 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 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뿜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은 야위어 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의 목 늘어나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처서
김상아
창가 문틈 사이
사반사반 울리는 피아노 음률의
웨딩마치에 맞춰 연미복 입은 채
나직이 밝고 오는
신랑의 발자국 소리
꽃향기 몰고 오는
분명, 어제와 다른
ㅂ ㅏ ㄹ ㅏㅁ
어제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뜨거움
오늘 아침,
불어오는 한 조각
라밴더 향기로 고요히 잠들다
꽃길 걸어온 그대에게
계단 밟고 올라 말간 손 건네며
주저 없이 말하리라
- 당신만 따라갑니다 -
처서(處暑)
김영수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선인들의 말이 묵향처럼 퍼지는 날
아낙들은 눅눅한 옷을 볕에 말리고
선비는 그늘에서 책을 말리는 처서
곡식들은 여름내 키를 키우다
멈추고 씨앗이 여무는 시간
어정 칠월 지나 건들 팔월은
처서에 장 벼 이삭 패듯
다가오는 가을이 마냥 부럽다
뙤약볕이 살갑게 내리쬐는 햇살 그리운 날
처서
김오민
후두둑
비가 내린다.
빗방울을 몰고 온 바람이
이제
나를 떠다밀기도
잡아당기기도 한다.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창 앞의 토마토 잎새가
구름을 베고 누운 하늘을 보고 있다.
여릿여릿 말갛게 걷혀가는 서녘 하늘에
나를 헹구고
이제 내가
바람을 떠다밀기도 잡아당기기도 한다.
이것이 세상과의 힘 겨루기인가.
방충망 건너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내 모양새를 보고 있다.
여름이 채 가기 전에
가을이 제 먼저 찾아와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처서 무렵
김용화
매미 울음소리가 누리장나무 닁닁한
꽃내음 따라
오류동 산자락을 짓뭉개고 내려와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말복 지나 처서로 치닫는 길목은 해마다
야단법석이다
필생의 짝 찾아 한목숨을 사르고
가을의 초입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는
매미들,
푸른곰팡이 온몸에 덮어쓰고
소슬바람에 빈 껍질 표표히 날려 보내며
처서(處暑)
김유석
혼자 살다 가는 사람의 유품 같은 날이었다.
울음과 울음 사이 울음보다 긴 적요를 놓고 다음 생을 건너는 늦 매미 울음에
느릅나무 뜨겁던 그늘을 벗는 하오(下午)
가릴 것 하나 없이 편안한 외로움을 문간까지 열어놓고
쓰다만 유서 같은 텃밭 베고 든 홀어미 오수(午睡) 속
유난히 매운 끝물의 고추 빛을 묻히고
메밀잠자리 날면 다시 메밀을 심을 때
걷으면 한철 기어 이르던 곳 넝쿨째 끌려 와
몇 날을 식는 제 몸 지켜보는 노란 오이 꽃망울 하나,
한 번뿐인 생을 여러 번 다녀가는 듯한 날이었다.
처서
김은아
쇠뜨기는 하늘을 쓱쓱싹싹
부지런히 청소한다
바람 끝이 달라지는 계절
서늘한 공기가 데굴데굴 굴러간다
낮에는 뭉게구름이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갑자기 고요가 무너진다
창문 밖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 처연하다
가을의 깊이를 알리며 밤새 귀뚤귀뚤
고단한 한 생의 등줄기를
싸늘하게 끌고 가는 저 울음 뒤에
지나가 버린 바람처럼
울컥울컥 쏟아지는 마음 한 자락
누구를 울리는 애간장 녹이는 소리인가
애지중지했던 물건들도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모래알처럼
살다 보면 스스로 내려놓아야 할 때 있듯이
사람이 빈틈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팽팽한 삶인지
작은 시련에도 넘어지고
마음의 상처를 입으며 쉽게 찢겨진다
저 귀뚜라미는 밤새 누굴 찾아 우는가
바람과 함께 계절도 지나가고 있다
처서
김인숙
여명이기를 기다리니
눈이 아파온다
얼마쯤 지나 새벽 문이 열리고
만신창이가 되고팠던 나는
뿌우연 안개 속에
온몸을 맡겨 버렸다
허공을 향해
두 팔과 두 눈은 휘저어 지고
두 발은 덩실덩실 이슬 속에서 춤을 추었다
언젠가는
너를 향해 돌아가리
나를 찾으리
5월부터 준비된 벼는
입추를 지나 처서에 이르러 통통 알을 품고
발그레하다 못해 빨개진 고추
황홀함에 휘감기는 넋
발가벗은 몸뚱아리
쏟아지는 빗줄기 속 노천탕에서
온몸을 맛사지하며
삶을 만끽한다
처서 지나고
김춘수
처서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태산목(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처서(處暑)를 지나며
목필균
펄펄 끓던 여름을 앓고 나니
바람을 갈아대는 귀뚜라미 소리
환청처럼 들린다
한여름에 돌아가신 오라버니
슬픔이 엎드려 습기를 먹는다
벌초를 마친 부모님 묘소에
술 한 잔 올리며 절을 한다
칠순 고개 장남의 부음을 들은 부모님
하늘에서 안타까운 눈물 감추지 않고
굵은 눈물방울 툭툭 떨어뜨린다
매미 소리 사라지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이즈음
찬기 도는 하얀 이슬이
조롱조롱 가슴에 맺힌다
처서(處暑)
문성해
나는 오늘
가을볕 속으로 빨래가 물기를 털어 내는 걸 바라보면서
그러고도 내 습진을 내다 말릴 수 있게 넉넉함이 남아도는 이 볕이 좋고
헛헛한 위장 속으로 수제비를 같이 흘려 넣을 가난한 식구가 있어 좋고
볕이 처마를 오지게 지지는 오후가 되어서는
늙은 염소처럼 우물거릴 수 있는 햇고구마가 있어 좋고
오늘은 큰 놈에게 안경 해 줄 돈이 품에 넉넉히 있으니 더욱 좋고
그러고도 더 좋은 건
일생에서 가장 높고 맑은 날 중의 하나인 오늘이
아직도 이마 위에 두둑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처서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 소리 알은 채 벌처럼 시끄럽다
처서
박기만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정말 가을이 그립다
찌는 듯한 열기에 바람도 몸 풀고 갔으니
평생 기억에 남을 터
너무 그리 야속 타 할 일이 아니라 해도
처서라고 앞서나가 갈바람 맞이해본들
특별한 일 더 있을까마는
그래도
샛바람에 게 눈 감기듯 하며 세월 가느니
글 한 줄이라도 읽는 소리 그리워함이라
처서 무렵
박덕중
한여름
불칼 휘두르던 번개
하늘 무너질 듯 쾅 쾅 대던
천둥소리도
멀리 사라지고
가을의 언덕
태아를 위해
고개 숙여 묵상하는 오곡들
어머니 같은 마음
사랑 듬뿍 쏟아
태아의 속살 위해
하늘도 사랑 베풀어
황금빛 햇살
열매 속 물이 들 때
만삭이 된 들판
바람도 조심조심 스쳐 가고
어디서 망치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처서
박명숙
여름내
푹푹 젖은 마음을
가을볕에 말리니
선선한 바람이
내 마음에 들어와
가을을 부릅니다
가을은
이렇게 가슴으로부터
찾아오는가 봅니다
우리의 계절이
곱게 빛나기를
처서기(處暑記)
박성룡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렛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위 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어 있다가
저 우렛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 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처서(處暑)
박얼서
발톱 세우던 더위가
담장 밖 동태를 살핀다
입추를 지나온 군상들
바람의 서곡들만을 골라
세월의 길목 부릅떠가며
이십사절기를 센다
시간여행 벌판을 달렸어도
아직 때 이른 가을자리
저 너머 백로(白露)
좀 더 가까이
한달음에 내달려오도록
하늘길을 닦고 있다
처서(處暑)
박인걸
분꽃이 담장 아래 붉게 피어
긴 장마진 후 일광(日光)에 졸고
참매미 자지러지게 느티나무 숲을 흔든다.
지붕을 오르던 나팔꽃은
아침 햇살에 고개를 숙인 후 입을 다물고
뙤약볕에 괴로운 잠자리는
어느 장대 끝에 앉아 독백을 즐긴다.
조명처럼 쏟아지는 늦여름 햇살은
지친 아스팔트를 엿가락처럼 녹인다.
지독한 코로나가 무장 공비처럼 출몰해도
금년 여름 늦더위는 레코드처럼 재현된다.
다만 성장하는 것과 늙어가는 것들 사이에
노인은 왜 점점 수척해 가는지
끝물 포도송이처럼 스스로 왜소함을 느낀다.
중천의 태양은 용광로보다 더 이글거리고
푸른 숲은 파도 되어 출렁이는데
기력이 쇠한 한 노인은
힘없는 부채질로 외로움을 쫓는다.
오토매틱 승용차들은 쏜살같이 질주하고
공항 여객기들은 추진력을 받아 하늘을 뚫는데
연식(年式)이 오래된 무릎에서는
앉고 일어설 때 힘줄이 당긴다.
아! 금년 처서(處暑)는 노인에게는
또 하나의 두려운 약봉지를 주려나 보다
처서 그즈음
박인걸
달맞이꽃 달 맞으면
북두칠성은 토라져 산을 넘고
넘쳐흐르는 은하수에
뜨거운 별들이 뛰어들던
가슴 설레던 처서 그즈음
달그림자를 함께 밟으며
별빛에 잠기던 우리
마주 잡았던 손을 놓으면
이내 그리움이 출렁이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금세 눈시울이 촉촉해지던
메밀꽃 달빛처럼
은은히 비춰주던 길을
단둘이 애틋하게 길게 걸으며
별처럼 소곤대던 목소리
다시 한번 우리 함께
걷던 길에서 마주 보며
은하수에 배를 띄우고
먼 여행을 떠날 수 없을까
오늘따라 은하수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다
처서(處暑) 무렵
박인걸
지난밤 내린 비는
서늘한 바람을 싣고 왔고
코스모스꽃을 활짝 피우며
가을은 풀밭 위를 걷는다.
귀뚜라미 소리 애달프고
풀벌레 노래는 숨이 가쁘다
잠자리 장대 끝에서 사색에 잠겼고
철새도 먼 길 갈 연습을 한다.
들에는 엇비슷한 잡초들이
올망졸망한 열매를 입에 물고
뿌듯한 듯 하늘을 쳐다보며
낮 햇살에 씨앗을 익힌다.
그토록 짙푸르던 숲에도
노란 바람이 잎을 적시고
계절은 시계 바늘처럼
가을을 불러들인다.
처서는 존재감을 살리려
한낮엔 까마귀 머리를 벗기지만
산을 넘는 저녁 햇살이
서글픈 여운을 길게 남긴다
처서 소묘(素描)
박인걸
낮달 선명한 하늘에
햇살도 기가 꺾이고
느티나무 짙은 그늘에는
엷은 한기가 맴돈다.
귀뚜라미 처량하고
풀벌레 울음 애절한데
곱게 분장한 코스모스는
그리움을 가득물고 있다.
거칠게 부대끼며
생존의 몸부림으로
치열한 계절을 넘어온
野草들이 숭고하지만
이미 끝난 게임
점점 기우는 분위기
백로(白露)가 저만치서 기다린다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라
처서(處暑)
박일만
풀씨를 쪼던 새들이 무리 지어 하늘로 솟구친다
계절 내내 들끓던 들판에 김이 오른다
기차가 하얀 창을 빛내며 길게 질러간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몇몇 사람들이 초병처럼 들판에 박혀있다
가랑잎이 반짝였는가 싶더니
뿌연 안개가 높은 나뭇가지 위로 한 발짝 물러나 앉는다
아버지 몸에서 냄새가 나던 날이 있었다
낱알을 꿈꾸는 마당에 새떼 다시 날아와 쪼아대다가 처마 밑으로 잦아든다
저린 무릎을 받친 감나무가 서릿발을 견딜 채비를 한다
신작로 쪽으로 마음을 켜둔 집에서는 인기척을 하얗게 피워댄다
맺히는 것들이 더욱 안으로 문을 닫아걸며 제 살붙이들을 단속한다
내 몸에서 처음 냄새가 나는 계절이다
처서 무렵
박종영
대장간 풀무질에 번득이는
불꽃이 아니더라도
가슴 데우는 늦더위에
손바닥 부채로 불러들이는 서늘한 바람
처서 지나고 나면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에도 누그러질 거라 믿었던
초가을 볕은 아직도
까마귀 대가리에서 번들거리고
푸른 논배미 장리 벼는
올올히 배부른 이삭 배고 서서
스적스적 윤기를 더해가고
만물*에 논 구석 돌아치며 뽑아내는
아득한 들소리 밀려오면
덩실덩실 허드렛일꾼 어깨춤이
절로 풍년이네
* 만물(농업) : 그해의 벼농사에서 마지막으로 논의 김을 매는 일
처서(處暑)
박준
앞집에 살던 염장이는
평소 도장을 파면서 생계를 이어 가다
사람이 죽어야 집 밖으로 나왔다
죽은 사람이 입던 옷들을 가져와
지붕에 빨아 너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날에는
속옷이며 광목 셔츠 같은 것들이
우리가 살던 집 마당으로 날아 들어왔다
마루로 나와 앉은 당신과 나는
희고 붉고 검고 하던 그 옷들의 색을
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
처서
박태일
아부지 이제 가입시더
술을 껴입은 채 쓰러진 아버지
아버지 쓰러뜨린 무슨 짐을 제가 다 질 듯
소년 상주가 운다
비죽비죽 비가 솔잎을 씹으니
나무마다 쓰린 날
앞물 뒷물 다 비운 채
닻을 내린 산등성
영락 공원묘지
저승에서 밟을 영원한 낙이란 어떤 것인가
아부지 이제 가입시더
갈 데도 없을 듯한 이승
찬 바닥을 쪼고 있는
까치 두 마리.
처서 간이역
방윤후
화물열차가 매미 떼창으로 지나간다
흔들리는 나무들,
한밤의 득음에 귀를 씻는다
달은 우화했다
구름 사이에서 허물을 벗고 차올랐다
레일에도 짝이 있어 떠날 수 있듯
절박한 기차는 끝없이 질주했으리라
바람결을 부비는 차창이 환하다
한 쌍의 전신주가 양옆으로 소실점을 베풀고 있다
한 량의 시를 쓰고 한 량의 그림을 그리는 간이역
거기에 그리움을 짙게 드리우는 일
부단한 서정이다
100데시벨의 고독도
다섯 번째 허물을 벗기까지 얼마나 쓸쓸했을까
맴- 맴- 맴---매애애애앰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처서
백원기
아침 기온 선선해
창밖을 내다보니
청명한 하늘에
온도계 눈금 하나 내려갔다
달력을 보니 처서
더위 식고 일교차 크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어젯밤 천둥번개 요란해
차단기가 내려가고
칠흑 같은 어둠 오싹했다
쫓기는 여름이 마지막 소낙비를
울분 터트리며 땅이 꺼져라
힘껏 퍼부었나 봐
그래도 세월이 하 수상하니
모기 입도 삐뚜러 진다는 처서
물러서지 않기를 바라고
계절은 오고 가기에
가을 오면 겨울도 멀지 않으니
손님인 듯 살아야 해
처서
서윤덕
소슬바람 뒤로
여름이 숨는다
방긋 웃는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며
우리 함께 웃으니
풀숲에
귀뚜라미도
귀뜰 귀뜰
노래 부른다
처서기(處暑記)
신경림
여름 들어 나는 찾아갈 친구도 없게 되었다
삭월세로 든 시장 뒤 반찬가게 문간방은
아침부터 찌는 것처럼 무덥고 종일
아내가 뜨개질을 하러 나가 비운 방을 지키며
나는 내가 미치지 않는 것이 희한했다
때로 다 큰 쥔집 딸을 잡고
객적은 농짓거리로 핀퉁이를 맞다가
허기가 오면 미장원 앞에 참외를 놓고 파는
동향 사람을 찾아가 우두커니 앉았기도 했다
우리는 곧잘 고향의 벼 농사 걱정을 하고
떨어지기만 하는 소값 걱정을 하다가도
처서가 오기 전에 어디 공사장을 찾아
이 지겨운 서울을 뜨자고 벼러댔다
허나 봉지 쌀을 안고 들어오는 아내의
초췌하고 고달픈 얼굴은 내 기운을 꺾었다
고향 근처에 수리조합이 생긴다는 소문이었지만
아내의 등에 업혀 잠이 든 어린 것은
백일이 지났는데도 좀체 웃지 않았다
처서는 또 그냥 지나가 버려 동향 사람은
군고구마 장사를 벌일 채비로 분주했다
처서
신대건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天水畓) 농부에겐 물줄기는 생명선(生命線)
실 낫 같은 물 흐름에 상투 잡고 물꼬 싸움
구름 몰려 소나기 쏟아지면 싸움은 없던 일되고
논 밭둑길 따라 물줄기 트려는 콧노래 소리
여름철 발가벗은 개구쟁이 물수제비 뜨고
족대·그물 풀 섶에 대고 물고기 모는 첨부든 소리
거추장스런 의관 벗어 버리고 개울물에 몸 담근 채
천렵할 불쏘시개 들고 음풍농월(吟風弄月)에 화햇술 한 잔
아낙들 우물가는 길흉(吉凶)을 점치는 소문의 진원지
물 옹백이 두드리며 시집살이 설움 달래고
초승달 이지러질 때까지 풀 먹인 모시 적삼 손질하며
호롱불 꺼질 새라 너풀너풀 춤추는 다듬이 소리
처서 아침에
신동성
삼복더위 끝자락에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뜨거운 여름이 시들해 질 무렵
시원치 않았는지
장마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을을 바라보는
초목의 긴장 속에
단비라고 말할 수 없는 슬픈 현실
초록빛 흐려질 무렵
하늘의 몸부림이 가르쳐 주는
계절의 아픔일 것이다
곧
가을이 내려앉는다
처서(處暑)가 지나고
신승준
차가워진 강물을 따라
대지(大地)는 식어가고
감나무 위에서
마지막 앙탈을 부리던 매미도
곧 모래시계 허물어지듯
흙먼지 속으로 그 잔해(殘骸)를 묻으리라
지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폭염(暴炎)을 견디어낸 곡식(穀食)은
이제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들판을 가로지르는 찬 공기를 맞으며,
한 해의 결실로 여물어간다
매미가 앉았던 감나무 가지 사이로
합장(合掌)한 농부의 키 작은 모습이
바람에 따라 어른거린다
처서
양승준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얼핏 잠이 들었네
뭉게구름 번져가는 늦은 오후,
이따금 매미 소리가 오수를 방해하기도 했지만
새벽까지 읽은 한시(漢詩)들로
내 영혼은 정갈하였네
어쩌면 그리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갖추었는지
내 여생도 그렇게 간결했으면 좋겠네
어느덧 저녁이 오고
바람의 갈피마다 조금씩 묻어나는 가을
돌아보니 구절초 하얀 꽃잎이
그 배경의 중심이 되고 있었네
처서의 은혜
오보영
너로 인해 비로소 나를
더위에 묻혀 자칫 잃어버릴 뻔한 날
찾을 수 있었단다
단비
네가 흡족히 내려주어
달아오른 열기도 식히게 되고
선선한 바람결도 몰고 왔으니
넌 내게 은인이란다
난 네가 나를 나 되도록
기꺼이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련다
처서가 지나가는 가을 길섶에서
오애숙
(여름 보내는 길섶에 앉아서)
말복과 광복절 겹쳐 이례적인 까닭인지
장마 막바지에 다다라 붙볕 더위 열대야
처서까지 이어져 숨통 조이게한 이 여름
처서(處暑)란 더위 처분한다는 뜻으로
가을에 접어든다면 열대야도 사라질터
제아무리 푹푹찌는 폭염 덮친다고 해도
더위의 주 원흉인 습도 가라앉힐 절기로
선선한 갈 맞이로 오감으로 다가오는 건
전해오는 말처럼이나 하늘에선 뭉게구름
타고 오고 땅에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와
귀뚜라미 애끓는 소리에 귀곧춰 보고픈데
7월 말까지 장마전선에 8월초 느닷없이
물폭풍에 혼비백산의 숨막히던 일들이
가을 바람에 숨고르 쉴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 갖게 하는 처서로 인해 쉽얻고픈데
결코 흥겹게 베짱이처럼 휘파람의 노래
부를 수 없는 건 아직 코로나19 기승으로
올가을 처량할까 염려의 깃발 휘날려요
처서(處暑)
오용구
가을이 온다고 입추가 첨병으로 앞장서 오니
마지막 여름의 피크로
까마귀 대가리가 타서 머리 벗겨진다는
처서가 극성을 부리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구나.
계절도 저 할 일을 다 하려 하고
저무는 태양도
하루를 다하며 아름답게 갈무리하는데
우리네 인생
어찌 저무는 황혼인들 두 손 놓고 바라만 보랴
무성한 여름
머지않아 초록빛에 산천은 울 굿 불 굿 물들어
곱디고운 색동옷 입었다가
솜이불 덮고 한잠 자고 나면 또 다른 새해가 밝아오겠지
처서
윤경자
귀뚜라미 토독 톡
하늘 구름 두둥실
또랑또랑
강아지풀
질경이도 납작
성급한 벚나무
노랑 물감
투욱 툭
밤나무 밑 도사리
공연히 기웃기웃
어정 칠월
건들 팔월
처서
윤보영
처서다
더위가 사라진 자리
시원한 풀벌레 소리가
대신 들어온다.
그리움을 긁어
보고 싶은 사람
더 보고 싶게 만들면서.
처서 커피
윤보영
가을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
오늘이
가을로 들어서는 처서다.
가을이 되었으니
사랑을 해야겠다
부드러운 커피로
내 안의 그대라도 불러서
사랑을 해야겠다.
처서(處暑)
윤인구
간밤 꿈자리를 정리해본다
밤새 쫓아다닌 물고기는
가물치였나 누치였나
식탁 모서리에는
아슬아슬하게 물컵이 놓여있다
진밥을 다 먹도록
물컵을 옮겨야겠다고 생각만 하고있다
푹푹 골난 소리를 지르며
바쁜 척 보리차는 끓고 있다
발가락으로 식탁 밑 신문을 읽는다
강남아파트 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때렸다고
조금 열려있는 화장실에는
아직도 누군가 무엇인지 하고 있다
제법 서늘해진 늦은 아침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있는
티슈화장지 한 장을 뽑아서
창을 열고 훨훨 날려보낸다
푸른 창공으로 날아간
화장지의 꿈은 얼마나 순결한지
철 늦은 매미 울음소리
창문을 비집고 들어서고 있다
처서
이광범
처마에 걸리는 바람은
땅으로 온다
산사의 풍경소리 수분 들어와 서글픔 달래고
갈 길 잃어 중심 흐트러지는 공명의 분해
신선이 나무 그늘에 앉아 다관을 치켜들었나
물 부어지듯 내 귓속으로 든다
산새의 휘파람 소리 무심을 흔들고
애를 찌른다
수풀의 잎새에 바람의 눈물이 걸린다
찬 기운에 허공은 이미 목이 메이고
이른 아침에 해를 가리는 안개의 음모
이별은 나직한 설움
차곡차곡 쌓이는 아쉬움에
심장은 누름돌이듯 짓눌리고 있다
전율은 이렇게 시작되는가
전류 흐르는 감전의 떨림이 인다
계절은 윤회의 은밀한 임무
이른 아침은
반짝이는 유리알처럼 눈동자에 낯설게 들어선다
아
처서다
처서
이기철
발 시린 벌레들이 신발을 사러 간다.
이슬이 물의 뼈를 불러들인다.
햇빛 아니고는 아무도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
곧 밤이 감춰둔 초록 잠옷이 고요를 입고 걸어 나오리라
어두우면 모든 곡선들이 직선이 되리라
고요 속에서 여름은 게 떠날 채비를 마치리라
여름은 기원전의 나라처럼 최색의 추억으로 남으리라
그러면 그 자리에 우리가 못 만난 서리의 제국이 창궐하리라
처서 지나서
이상원
어제는 이미 없고 빈 그 공간을
잠자리, 볼 붉은 채 무심히 떠 있다
햇살은 하얀 포말
가벼이 날갯짓에 부서지고
떠나가는 것들의 집은 어디인가
입술을 닫고 나무들
그리움에 젖어 있다
말하지 않는 그의
말들이 날개 끝에 반짝여, 오늘은
자꾸만 옛날을 뒤따라가는
저문 날이 보인다
하늘이 내려주신 처서(處暑)의 선물
이종탁
거의 두 달 동안의 지루한 불볕더위
대지는 기근의 애원을 기원한 기억
제발, 단비를 내려주라고 기도했었다.
날마다 쳐다보는 무정한 하늘이었건만
이제야 소식을 전해 들었던 반응이고
반가운 선물은 처서(處暑)에 내린 빗물이다.
금방이라도 시들어 사라질 듯한 생물마저
약 비를 맞는 만물(萬物)은 생기를 되찾고
한풀 꺾인 기온에 만남도 생동감이 넘친다
처서(處暑)
이철수
대장간 쇳물같이 펄펄 끓던 피
다 흘려보낸 한 고비다
푸른 하늘을 겨누던, 창검같이
뾰족한 풀들이 서녘을 향해 머리를 풀고
괄괄한 먹매미 떼 울음계곡 지나
서늘한 내 나이
치열한 한 생애가 수레 가득 실려
태양의 집을 다녀간 자리
한 겹 바람의 옷을 벗은 풀섶
이슬 눈이 맑고
행인처럼 지나는 구름의 발아래
푸른 산빛이 멀다
처서(處暑)
장광규
구름 깨끗이 쓸어낸 하늘
잠자리 몇 마리 여유롭게 날고
사람의 발걸음 가벼워 보이는데
햇볕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나뭇잎 저렇게 변해갈까
처서(處暑)
장성우
쓰르라미 등에 업혀
뭉게구름 가을 문턱
더위 흐르는 물결 하늘 날린다
장마 눅눅해진 옷 꺼내
선비 햇볕 책 함께 말렸다는데
선선한 처서 바람 오감 불어오고
농사 한철 한가하게
무더위 어정거려 흐르고
바람 건들거리며 팔월 보낸다
처서 지나며 벼 이삭 패고
한 해 농사 풍흉 결정 가름 길
일어나는 태풍 변화가 흐르는데
거센 태양 앞마당
붉게 익어가는 대추
가을 오고 있음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다.
처서 무렵
장흥진
예고 없이 날아든 천상(天上)의 전파
베갯머리 한숨으로는
저 청아한 암호를 풀 길 없어
맨발로 문밖을 나선다
밤이 깊어도
별빛 전파는 계속 흘러
반짝반짝
길 위에 쌓이는
금모래 은모래
출렁이는 달빛 물결
유영하는 나무들
내 마음이 덩달아 출렁거리자
달빛보다 한 뼘 더 출렁거리자
비로소 읽히는 천상(天上)의 시 한 편
처서
정끝별
천변 오동 가지에
맞댄 두 꽁무니를
포갠 두 날개로 가리고
사랑을 나누는 저녁 매미
단 하루
단 한 사람
단 한 번의 인생을 용서하며
제 노래에 제 귀가 타들어 가며
벗은 옷자락을 걸어놓은
팔월도 저문 그믐
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
처서 지나고
정민기
처서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정말 가을이 왔는지 알았습니다
하나, 그녀가 먼저 왔습니다
벤치에 앉아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시린 하늘이 눈물로 채워졌습니다
그녀는 단풍처럼 예뻤습니다
올망졸망 들꽃처럼
귀여운 것 같기도 합니다
가을은 시인의 계절이라고 했던가요
네, 시인에게 사랑이 오는 가을입니다
그녀를 꼭 닮은 계절입니다
모든 것이 익어가고 그녀도 익어갑니다
멀리 기차가 레일을 타고
한 권의 가을을 펼쳐 듭니다
처서
정양
냇물이 한결 차갑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뒤돌아보는 일 없이
어제도 이렇게 흘러갔었다
흘러가서 아주아주 소식 없는 것들아
흘러가는 게 영영 사라지는 몸부림인걸
흘러오는 냇물은 미처 모르나 보다
처서(處暑)를 기다리며
정이산
태풍 '레끼마'가 지나가니
불볕더위가 시나브로 식어져서
오랜만에 구름 낀 하늘을 보고
소나기까지 갑자기 내린다.
팔월 초에 입추(立秋)가 지나니
한낮에는 아직 매미들이 울지만
계절 변화는 막지 못하여
귀뚜라미도 찾아와 노래한다.
예로부터 한민족에게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말하듯이
가을 들녘에 풍년이 들어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야 벼가 나오듯
세상은 역경을 이겨내야 성숙해진다.
처서(處暑)를 넘어
정이산
처서(處暑) 초저녁 밤에
창가에 귀뚜라미 소리
쓰르르~ 쓰르르~
귀가 아프게 시끄럽다.
성큼 가을이 왔다.
잠을 잘 수 없게 하던
열대야(熱帶夜)는 물러가고
서늘함을 느낄 수 있다.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을 돌고 있기에
쉼 없이 계절이 변하고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무더위 같은 독재자(獨裁者)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자유로운 세상이 오니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한다.
여름은 천천히 지나가듯이
역경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처서 소묘
정재영
불명열의 전염병으로
길바닥에 널브러진
여름의
골 삭아진 뼛골 위를
너무 속에 숨어있던
감염되지 않았던 바람이
슬그머니 다가와 건드려 보더니
아직도 놀란 가슴에
휭 도망쳐 버린다.
처서(處暑) 날의 열망
정찬열
붙잡지 못한 여름
가을로
접어드는 입추의 여름
지구의 온난화로
푹푹 찌는 무더위가 맹위를 떨친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는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끝내는 열대야(熱帶 夜)를 몰고 온다.
절기마저
잃어버린 뜨거운 여름은
영그는 곡식이야 더없이 좋겠지만
한낮의 열기에 맥이 풀린다.
뜨거운 열기를
흡수해야 하는 대지는 좁아지고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에
늘어가는 아스팔트 도로
살기는 좋아지나
건물에서 품어내는
에어컨 열기는
절기마저 붙잡고 회유를 한다.
정유년의 늦더위
찌는 듯 무더위에 행여 하는 날
고추잠자리 날갯짓에 흠모(欽慕) 되는 가을
처서
조예린
삼복절 그 무덥던 갈증도 삭고
가슴을 쌓는 추회(追悔) 그루 백향목
아련한 피 향기에 내가 취하여
하롱하롱 이승은 구만 리 저 밖
밀 오는 처섯바람 선들하여도
배앓이 덮은 처네 걷어버리고
홀로 듣는 바람 소리 깊어 가는 밤
뒷산 대숲에는 설움도 자고
마전 삼베 옷고름엔 눈물도 말라
님 생각 한시름도 이제 잊음만
고고한 저 달빛도 그만 참음만……
처서를 지나며
조정애
비가 오는 오후
나는 잠시 낯선 동네에
내 나이처럼 낡은
친구 베르나를 세우고
운전석에 앉아 딸을 기다리네
차창 너머로 길이 보이고
고요한 길을 지나는
자전거도 리어카나 트럭도
비를 피해 천막을 덮었고
여행 가방을 끄는 여인도
우산으로 비를 가렸네
우리네 인생처럼 깊이 가려진 곳으로
비는 마구 쏟아지는데
또 누군가는
힘든 팔월로 한바탕 울었나 보네
차창이 온통 눈물자국이네
경희궁 3가길로
무거운 그림 가방 두 개를 걸치고
박꽃 같은 딸이 나오리라
열대야 한달을 견뎌내는 저 침묵으로
장애자와 노약자와 초목들을 위해
비는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씻어 내리네
그때 남자 노인이 비를 맞으며
천천히 성자처럼 걸어
내 옆을 지나 커브 길로 사라지네
폭염을 뚫고 비는 오는데
차창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나는 딸에게 건넬 은혜의 말을 생각하네.
처서
주명희
뭉게구름 타고서 오시는 분
한줄기 시원한 바람에 매미들도
어느샌가 짧은 생을 마감하고
귀뚜라미 등에 업혀서 오시는 분
모기들도 입이 비뚤어져 울며 돌아갔네
목구멍 타들어 가는 뙤약볕의 기억을
해맑은 아가의 까르르 웃음에
출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어미처럼
단번에 잊게 주시는 분
마음 넉넉해지는 계절
그 분이 오시네
처서 아침에
최규영
열대야에 시달릴 적에는
산다는 게 으레 그러려니 했다
새벽녘 으스스한 기운이
천하에 철 바뀌는 소식을 전하면
한해살이풀들의 처지가 애달프구나
상강이 두어 달밖에 안 남았다지?
긴소매 셔츠가 생각나는 건
그래도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서다
처서
최길하
풀벌레는 또 찾아와
무너진 돌담을 빌려달란다.
울움의 오두막을 한 칸 지어서
지나가는 한 철 설움을 말려 입고 간다고.
처서가 지나간다
한보경
처서는
한 번도 서른을 만나지 못했고
처서는
언제나 서른의 얼굴을 갖지 못했고
처서는
잠시도 서른의 심장으로 뛰지 못했다
낡아가는 운동화
풀어진 끈을 고쳐 매고
서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처서가 지나간다
서른의 뒷모습만 사랑하던
처서가
깊어진 병처럼 지나간다
처서의 흐린 심장에서
서른이 흘리고 간
치마끈 풀어지는 소리가 난다
처서 시야
한성희
여름 잎이 무성하여 성묘길이 보이지 않는다 넝쿨을 쳐내자 새소리가 초록에 부딪히며 날아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울음이 번진다
잎사귀들이 울음을 둘러싸는 것을 본다 푸른빛을 지그시 누르고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무덤덤한 숲의 시선들, 눈빛을 감추고 있다
웃자란 풀들이 막걸리 몇 잔을 들이대자 푸른 기색을 물리치고 맥없이 땅바닥으로 쓰러진다
어두웠던 봉분이 나뭇가지 사이로 아득하게 뚫린다 와불처럼 바닥에 몸을 말고 있는 초옥(草屋) 하나를 본다
잎사귀에 뭉쳐있던 쪽창만 한 시야를 베어낸다
처서
허림
누가 먼저 울었을까
연봉*이 매미 울음으로 술렁인다
안개를 밀어내는 햇살이
산책로 푸른 잎사귀마다 반짝이고
짧은 생을 울음으로 다 녹여내려는 듯
매미의 울음이 뒤섞이는 숲
여기서도 울어보고 저기서도 울어보고
들리시나요 나의 사랑이
들었나요 나의 사랑을
서로 찾는 나와 당신
이승에 주어진 울음은 희미해져 가고
생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는데
사랑이란 오랜 상처를 쓰다듬으며
저 울음 받아낼 당신은
어느 길목의 귀를 열고 있을까
* 연봉 : 돌나물과 식물
처서(處暑) 언저리
허명
젖무덤
열어젖힌
고즈넉한 가을 녘
산 아래 노을은
못내 아쉬운 선홍빛 아픔
간밤에 여문 가을이 낮달 내어걸다.
가을을 앓는다
처서
허욱도
아스팔트도 녹여버릴 듯한 폭염 속에서
여름이 영글어가는
어느 한 여름밤
성숙한 계절을 담아
술잔을 주고받는 속닥한 만남
술잔이 부딪치는
습기 한 모금 머금지 않은 맑은소리
계절이 만나는 순수한 그 소리에
뒤틀린 마음으로 기승을 부리던
막바지 무더위도
한풀 꺾인 듯
여름의 끄트머리를 잡고
꿈틀거리는 가을을 두드리는 날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처서
허형만
날벌레 낮게 낮게 난다
순식간에 날이 흐리고
앞산 중턱 소나무
검은 구름에 갇혔다
푸드덕, 지상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가
세찬 바람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
천상의 모든 생명들이
서둘러 흙으로 돌아오고 있구나
처서(處暑)
홍사성
기승을 부리던 노염(老炎)도
한풀 꺾였다
여름내 날뛰던 모기는
턱이 빠졌다
흰 구름 끊어진 곳마다
높아진 푸른 산
먼 길 나그네
또 한 굽이 넘어간다
처서 부근에서
홍신선
처서 지나 멀쩡한 푸나무들 안에서
누가 자동 펌프라도 끄는지
밤낮으로 푸르르 푸, 르, 르 시동 꺼지는 소리 들린다
일대에는 휘발하는 목숨들의 통랑한 냄새 진동한다
전원 플러그 뽑고 샘물 바닥 깊이
머리통 쑤셔 박고 쿨럭쿨럭 마지막 물켜는
흡입구 호스 그것도 사려 얹고
여름내 퍼 돌리던 심장 속 양수기 철거한다
길 넘게 올렸던 수액들도 화물 승강기 덜컹대며 내려가듯
물 도관을 되돌아 내려간다
고장 난 부속들과 반벨*같은 독약들도 몇 푸대씩 싣고
처서 부근에서
주춤주춤 내려간다
늙음이란 하루하루 지하로 철수하는 일
폐허인 내면을 폐쇄하는 일
그렇다 더 멀고 험한 길 준비에
제 몸 깊이 살아온 시간을 거두어들이는
풀과 나무들
건설 현장 화물 승강기처럼 늦여름을
밤낮으로 무릎 관절 밑으로 실어내리고 있다
그 노역에 등 벗겨진 둑 밑의 항가새 하나
눈알만 유난히 붉은 날
* 반벨 : 제초제의 일종
처서
홍해리
풀벌레 소리 투명하여
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귀 기울여 보니
무소유란 소유한 것이 없음이 아니라
무라는 가장 큰 것을 소유함이니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인 것처럼
유와 무는 하나다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속도 절도 내 귀에 들릴 리 있겠는가
속절없는 일이다
투명한 것은 칠흑이라서
그냥 귀에 가득 차는 것이니
들어서도 들리지 않는 허공일 뿐
소리 없는 노래였다
그것이 바로 무소유였다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중)
처서 지나면
홍해리
처서 지나면
물빛도 물빛이지만
다가서는 산빛이나 햇빛은 또 어떤가.
강가 고추밭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르고
무논의 벼도 바람으로 꼿꼿이 섰다
이제는 고갤 숙이기 위하여
맨정신으로 울기 위하여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반짝반짝 재재재재
몸을 재끼면서
그리움도 한 움큼 안고
쓸쓸함도 한 움큼 안고
사랑이란 늘 허기가 져! 하며
물결마다 어깨동무를 한다
다리 밑 소용돌이에 물새 몇 마리
물속에 흔들리는 구름장 몇 점
가자! 가자! 부추기는 바람 소리에
흘러가는 물결이여 세월이여.
처서 지나면
모든 生이 무겁고 가벼운
이 마음의 끝.
여름은 늙어 버렸고
Herman Hesse
여름은 늙고 지쳤다.
무지막지한 두 손을 늘어뜨린 채
텅 빈 눈으로 경작지를 바라본다.
이젠 끝난 것이다.
여름은 자신의 불꽃을 흩뿌렸다.
자신의 꽃들을 모두 태워 버렸다.
모든 게 그와 같다.
결국 우리는 지친 채 뒤돌아보고
오들오들 떨며 빈손에 입김을 분다.
일찍이 행운이 있었는지,
업적이 있었는지 의심한다.
우리의 삶은 아득한 과거 속에 있다.
우리가 읽었던 동화처럼 빛이 바랜 채.
여름은 일찍이 봄을 때려죽이고
자신이 더 젊고 더 힘세다고 생각했다.
이제 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내어
웃는다. 요즘 들어 여름은 완전히 다른
쾌락을 계획 중이다.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바닥에 쓰러져 창백한
두 손을 차디찬 죽음에 맡기고
더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스르르 잠이 든다
죽는다…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