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소만(小滿)

 

김남식 소만(小滿)

나희덕 - 소만(小滿)

서정주 - 기다림

안영희 - 소만

윤한로 - 소만(小滿)

이영도 - 보릿고개

전동균 - 소만(小滿)

정찬열 - 소만(小滿) 앞에서

조정 - 소만(小滿)

최소영 - 소만(小滿)

하재일 - 소만 小滿

 

 

소만(小滿)

김남식

 

이끼 핀 생아양아(生我養我) 천명(天命)에 뿌리 두고

자라는 맵시 모양 초복(初夏) () 소박하여

조그만 생명력에도 차오르는 몸부림.

 

 

 

소만(小滿)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은 빈 것도 같게

조금은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기다림

서정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인제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소만(小滿)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 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거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소만

안영희

 

홍천 가는 국도 아래

남실남실 물이 찬 논배미들과

이내 모내기로 실려 나갈 못자리들이

눈에 묻어올 듯 초록이네

모내기 날 고모집의 툇마루

다져 올린 고봉밥과 간 고등어 한 토막씩이 올라앉은

감자조림의 밥상이, 걷어붙인 일꾼들의 종아리와

햇목화 빛 햇빛이 보이네

지금은 폐가가 된 집,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들의 충만한 생의 풍경들이

부시게 깃을 쳐대고 있네

저녁이 오면

저 물찬 논배미마다 개구리들이 영원처럼, 영원처럼

울겠지

뭐 하자고 찾아왔는지 저어만큼서 바라만 보다가 가던

소년들이 있었던 열일곱, 그 저녁들처럼

소만(小滿),

믿을 수 없이 차오른 이 물의 절기는 얼마나 많이

죽은 자리들을 다시 채우려나

 

- 갑시다, 거기!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헛되이 녹슨 빗장 젖히는 소리

약속 방기한 동안 그 가슴자리 되돌릴 수 없는

천수답(天水畓)이 되어있는 줄도 모르고,

 

 

 

소만(小滿)

윤한로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보릿고개

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소만(小滿)

전동균

 

아침부터 화난 대걸레가 탕탕 때리든 말든

배꼽티 여학생들 몰려와 줄담배를 피우든 말든

늘 도서관 입구에 서 있는 겹벚나무

그냥 여기 있는 것만으로 좋다는 표정으로

조금씩 늦게 어긋난 톱니 이파리를 내밀지만

날개에 날개 돋듯 차오르는 꽃잎들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어

너두 참…… 부러진 가지에 입을 맞추자

순간, 삼킬 듯 빗줄기를 쏟아내던

순간, 달빛을 우산처럼 펼치던

저 늙은 나무가 오늘은

휘어진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

가장 높은 가지 끝에서 확 트인 세상을 보고 있다

멀리멀리 흘러가는 초록 물결 휘파람을 불고 있다

나는 속은 거라, 속고 있는 거라

혼자 견디며 후회한 만큼, 꼭 그만큼

제 속을 빠져나온 그늘 아래 다리를 쭉 펴고

캔맥주 한잔 들이켜고 있다

잠깐 발가락이 공처럼 부푸는

낮잠도 한숨,

 

 

 

소만(小滿) 앞에서

정찬열

 

이팝꽃, 산벚꽃 꽃비 되어 나리니

울적한 마음 봄비가 흥건히 적시고

어느새 아카시아 꽃잎 지고 오동 꽃피니

꿀벌을 유혹하는 발걸음 닿게 하는 밤꽃

 

라일락 향기에 쑥꾹새 슬픈 소리에

오월의 장미꽃은 한사코 눈길 잡는다

고르지 못한 날씨의 변덕일까?

자동차 앞 유리에 노랗게 그린 그림

꿀벌들의 잔혹사 앞에 반갑게만 보인다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밭의 향연

한낮의 불볕더위에 양산 받친 여인네

그늘 찾아 떠나는 만보기의 바쁜 울림

붉다 못해 검붉은 가시도친 장미꽃 향기

 

2년 만에 마스크를 벗고 가는 나들길

떼를 쓰듯 떼죽 꽃 마른 냇가 웅덩이에

떠나지 못한 먼먼 여행길의 농성

가뭄에 떠나지 못해 시달림이 안타깝다

 

 

 

소만(小滿)

조정

 

어머니 저는 벌써 비파나무 그늘에 와 있는걸요

귀 없는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부르는 노래

 

하늘은 이파리 사이에 비파 열매 두세 개 놓은 상()

아침 먹고 백옥같이 삶아 널은 베갯잇이 날아가

나무 그늘에 앉았다

 

아가, 어느 골짝이냐

 

책상에 놓인 교복 단추 하나 쥐고 안 가본 데 없이 가봤다

사람 묻었다고 수군거려진 자리 다녀온 날이면

힘껏 당겨 묶어서 겨드랑이 해진 빨랫줄에

피 묻은 길을 빨아 널었다

 

많이 다쳤드냐?

선불에 끄슬러 초록 물방울같이 비빈 풋보리 알을

열무지 담는 내 입에 톡 털어 넣어주던

너에게

이 열무로 지 담아

저 이쁜 비파들 편에 들려 보낼까?

 

아아, 길에는 혀 붉은 개가 나올 시간이다

달리는 차에 새끼를 잃은 개는 달리는 차를 붙들지 못하고

날마다 길을 핥아

제 신음을 적시러 온단다

 

아래는 먼 포구에 갔다

흰 텐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문 열어라 물아

문 좀 열어다오 물아

어미들은 물가에 허리를 접고 웅얼거렸으나

바다는

천남성 꽃잎처럼 냉랭했다

 

해식애(海蝕崖)를 돌아 동거차 선착장 찾아온 딸 하나

제 품에서 건져

쾌속정에 태워 보내줄 뿐이었다

헬리콥터는 프로펠러가 꺾인 채 날아가고

허공에 금이 가고

날카로운 비명이 폭우처럼 새어나갔다

 

등이 아프다

누가 내 곁에서 자기 시작했다

돌절구를 지고

입 다문 지 오래된 물속을 자맥질하는 잠

해초 냄새나는 아이들이 밤새 몸 안을 사무쳤다

 

어디로 가야 너를 찾으끄나

 

뜰 안에는 비파가 노랑노랑연두연두 익어간다

슬픔을 일습 흠 없이 갖추어 입은

배 한 척이

집에 가득하다

 

 

 

소만(小滿)

최소영

 

보리 이삭 익어가는 여름의 문턱에서

햇살은 찬란하고 만물이 가득 차오르면

연일 울어대는 산 부엉이 소리 처연하다

 

불두화 처절하게 떨어져 내리는 날

꽃상추 씀바귀 잎줄기 뻗어 올라오고

밀보리 고요히 농익어 가는 여름 한 철

 

쌀쌀한 바람은 봄과 여름의 경계를 지우고

어린 죽순 밀어 올리는 대나무 죽추(竹秋)

누렇게 뜨며 하직을 고하고 있다

 

 

 

소만(小滿)

하재일

 

사랑하다 서로 헤어질 때

거머리에게 물린 반점이라도

가슴속에 남아 있을까

이별에 취한 상처가 그만 황홀하여

돌돌 몸을 말고 각자 물속으로 사라진 뒤

당신들은 이내 몸이 가려워 진저리치다

 

빛의 그늘 속 꽃 진 자리를

밤낮으로 어루만질 수나 있을까

힘든 모내기를 끝낸 후,

논물은 이제 갈수록 깊어만 가리니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