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스문명과 메소아메리카문명의 교량
잉카문명 이전의 남아메리카 문명들(1)
몬테 베르데
칠레 남부의 침엽수림 지대인 몬테 베르데(Monte Verde, 푸른 산)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시대 인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약 1만 3,000년 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9,000년 전후에는 칠레의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석기가 발견되었고, 기원전 7,000~6,000년경에는 신석기시대가 페루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기원전 5,000년경 칠레 북쪽 해안에서 '친초로 문화'라는 매우 발전된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는데, 미라를 만든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이미 계급사회를 이루며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기원전 5,000년경 페루 지역에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사냥과 채취로 살던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을 기르고 씨앗을 심으면서 개인 또는 공동의 재산을 소유하며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지역에서 부족들이 거주지를 정해서 살아갔다.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차빈, 파라카스, 비쿠스, 푸카라, 살리나르, 티아우나코, 우아리 같은 문명이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새로운 지평 - 차빈
메소아메리카에서 제일 먼저 발생한 문명이 올멕 문명이라면, 남아메리카에서는 차빈 문명이다. 이 문명은 기원전 850년경 페루의 북쪽 치클라요 해안과 카하마르카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이카 골짜기에서 아야쿠초에 걸쳐서 발전했다. 이는 페루의 산악지방과 해안지방의 약 3분의 2 정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기 때문에, 차빈 문명은 페루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문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차빈'이라는 말은 페루 북부 안데스산맥에 있는 대표적인 유적 '차빈데완타르'에서 유래했다. 차빈 문명은 고지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해발 3,000미터 대의 산악지대에서 살 수 없는 열대지방의 고양잇과 동물, 악어, 뱀이 그들의 조각이나 토기 등에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존 강 유역 주민들과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건설한 신전의 회랑 한 모퉁이에 송곳니를 드러낸 인간과 재규어의 모습을 띤 신이 등장하는데, 이는 올멕 문명과의 유사성도 나타내고 있다.
차빈 문명이 비록 문화의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잉카문명을 비롯한 그 어느 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비해서 그 수준은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원전 400년경에 이 차빈 문명은 쇠퇴했지만, 그 후 1,500년 동안 차빈 문명의 상징 및 예술성은 남아메리카 각지에서 발생된 여러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차빈데완타르.
이 유적지는 수도 리마에서 400킬로미터 떨어진 표고 3,400미터의 고원도시 와라스(Huaras) 인근에 기원전 850년경에 건설된 것이다. 신전들은 고지대 골짜기에 둥근 반지하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조각이나 토기의 장식에는 재규어·독수리·뱀이 의인화되어 있다.
기원전 500년경에서 서기 1539년경까지 콜롬비아 북부지역에 살았던 치브차족('무이스카족'이라고도 한다)은, 여러 가문의 지도자가 사제와 함께 부족을 이루고 각 부족의 대표인 카시케(cacique)들이 모여 5개의 독립된 동맹체를 결성했다. 이 동맹체가 결성되면서 최고 통치자, 귀족, 장인, 노예 등의 신분계층이 형성되고 재산의 사유화 등이 생겨났다. 치브차족은 최고 지도자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자매(이모)의 아들이 계승했고, 자매가 아들이 없다면 그 남자 형제(외삼촌)가 통치권을 계승하는 식의 모계중심의 세습제를 따랐다.
치브차 문명은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중미지역 및 남미 대부분의 지역과 물물교환을 했다. 이들은 역시 메소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여러 신을 숭배했다. 그들은 최고신인 치미니차구아가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라 할 수 있는 해와 달의 신을 낳았고, 남자는 흙으로, 여자는 식물로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인신공양도 행해졌는데 그 대상에는 아이나 어른도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가 대부분이었다.
모체 문명
모체 문명은 현재의 페루 북부 트루히요 시 근처에 있는 모체 강에서 유래했다. 모체 문명은 옥수수와 물고기, 조공을 바치러 온 사람들, 멋진 가마를 타고 단상에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고 하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귀족, 자수로 수놓은 갑옷을 입은 장수, 사냥꾼,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흥겨워하는 사람들과 그 옆에서 상품을 벌여놓은 상인 등 일상생활의 모습을 뛰어난 사실주의 감각으로 도자기에 표현했다.
트루히요에는 해의 신전과 달의 신전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태양과 달을 숭배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계단식 피라미드형으로 된 태양의 신전은 가로 228미터, 세로 136미터, 높이 18미터에 1억 3,000만 개의 흙벽돌로 축조되어 있고, 달의 신전은 가로 80미터, 세로 60미터, 높이 21미터의 규모다. 모체족은 또한 순장의 풍습이 있었는데, 일반 사람의 경우에는 도자기를 함께 묻었지만, 통치자가 죽으면 그의 부인, 제사장, 병사, 개, 야마까지 산 채로 묻었다.
이렇게 발달했던 모체 문명은 그 시작도 명확하지 않지만 멸망의 원인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서기 600년경 페루 해안의 엘니뇨 현상으로 인한 홍수 피해 때문에 모체족이 해안지역에서 내륙으로 이동했지만 여전히 홍수 피해가 그치지 않아서, 이제 신들이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던 도시를 불태워버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