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금숙 - 여름
나기철 - 여름
나태주 - 쓸쓸한 여름
나태주 – 여름내 불씨 다독여
나태주 - 여름도 느긋이
나태주 – 여름 아침
나태주 – 여름의 일
나태주 - 초여름, 네 벗은
나희덕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남대희 – 여름 햇살
남원자 – 여름 소식
남원자 – 여름이 다가오면
남태식 – 여름에 들다
노정혜 – 물 좋아 여름 좋아
노정혜 – 여름
노정혜 – 여름 과일
노정혜 – 여름 숲
노정혜 – 여름 열정 좋아
노정혜 – 여름이 노크한다
노정혜 – 여름 친구
노정혜 – 여름휴가
도종환 – 여름 일기
도종환 - 여름 한철
도지현 – 소금 장수 여름나기
도지현 – 여름 단상(斷想)
도지현 – 여름 더위
도지현 - 여름 숲, 그곳을 거닐며
도지현 – 여름의 길목에서
도현영 – 그리웠던 여름이여
도현영 – 여름의 고통
도현영 – 여름의 비애
독운 - 여름
류근택 - 아파트 마을 여름 낙우송(落羽松)
류수안 – 늦여름
류인순 – 여름날 추억
류인순 - 여름 달구는 소리
류제희 – 여름 공화국
마경덕 – 지난여름은 치열하였다
마종기 - 여름 편지
목필균 – 담쟁이
목필균 – 여름 강가에서
목필균 – 장마
문병란 – 여름에게
문성해 – 여름 끝물
문익호 – 여름 숲
문장우 – 여름날
문장우 – 여름 사냥
문정희 – 보라색 여름 바지
문정희 - 초여름 숲처럼
문태준 - 그맘때에는
문태준 – 여름 밭
문태준 - 초여름의 노래
문태준 – 칠팔 월
민경대 – 무더운 여름
민경대 – 여름날 기대
민경대 – 여름날 방울 꽃송이
민경대 – 여름날 회의
박경리 – 그해 여름
박광현 – 여름이니까
박기숙 – 여름의 시작
박남숙 – 여름별 떠난 자리
박남숙 – 여름이 흔들린다
박동수 – 여름날의 연정
박라연 – 여름, 그 깜부기의 노래
박명숙 – 여름, 여름을 읽는다
박목철 – 여름 소묘(素描)
박미산 – 한여름 꿈의 장례식
박상종 – 한여름의 미소
박상희 – 여름 숲
박서영 –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박석수 – 여름 방학
박성숙 – 여름 한낮
박성우 – 바쁜 여름
박성한 - 여름 엽서
박시하 – 여름의 주검
박얼서 – 봄과 여름 펼친 콘서트
박얼서 – 여름 한낮
박연준 – 여름의 끝
박용하 – 미(美)
박은형 – 내게 있는 여름
박이현 – 성하와 같이
박인걸 – 그해 여름
박인걸 – 못 잊는 여름
박인걸 – 무더위
박인걸 – 여름 계곡
박인걸 – 여름 산
박인걸 – 여름 숲에서
박인걸 – 여름이 간다
박인걸 – 여름 풍경
박인걸 – 지나간 여름 이야기
박인걸 – 한여름
박인걸 – 한여름 숲에서
박인걸 – 한여름 풍경
박인섭 – 한여름 열병 가을 그리워하다
박잎 – 그 긴 여름을 꼬리에 달고
박재삼 - 한여름 새벽에
박재삼 – 혹서일기
박정미 – 여름
박정재 – 밀려오는 여름
박정재 – 어느 여름날의 산책
박정재 – 여름의 하루
박정재 – 여름이 오는 길
박정재 – 여름 호수에서
박종영 – 그해 여름은
박종영 – 여름, 개망초
박종영 – 여름에는
박주택 – 여름들
박진표 – 여름아 안녕
박진표 – 여름 어느 날
박진표 – 여름이 오는 소리
박진표 – 여름 풍경
박춘석 – 여름의 방에서 곧 어두워진다
박태강 – 여름 속 사계
박태원 – 여름날의 하루
박태원 – 여름 바다로의 비상
박태원 – 장마
박해람 – 사탕처럼 천천히 녹는 여름
박해옥 – 여름날의 팡파르
박현영 – 여름에 묻는다
박희자 – 비 오는 여름이면
박희자 – 여름이 간다
박희홍 – 땡볕 쏟아지는 날
박희홍 – 여름날의 단상
박희홍 – 한여름
배갑병 – 여름 꼬리
배귀선 – 여름나기
배수연 – 여름 비행
배수연 – 여름의 집
배한봉 – 여름의 귀
배혜경 – 여름과 가을의 만남
백석 – 하(夏)
백설부 – 여름날
백설부 – 여름 아침
백설부 – 여름에게
백설부 – 여름 한나절
백설부 – 여름 향기
백설부 – 지루한 여름
백승운 – 여름 한낮 텃밭
백우선 – 한여름
백원기 – 기억해야 할 여름
백원기 – 여름 고개
백원기 – 이런 여름
백은선 - 여름 시
백종오 – 가지 마 여름
변용환 – 여름
변종윤 – 가는 여름 끝에서
변종윤 – 여름이 오면
서규정 – 여름 한국화
서대범 – 여름이 말을 걸면
서덕준 - 도둑이 든 여름
서문인 - 설레는 초여름
서숙희 – 여름 우포를 읽다
서정숙 - 여름 낮
서정우 – 나무
서정윤 – 여름날 오후
서정홍 – 여름 한낮
석옥자 – 올해 여름
성명희 – 여름은 그렇게 갔다
성백군 – 여름 단풍
성백군 – 여름 보내기
성백군 – 여름 향기
성영희 – 여름 궁전
손병흥 – 여름나기
손병흥 – 여름날의 추억
손병흥 – 여름 설경(雪景)
손병흥 – 여름휴가
손석철 – 여름
손종일 – 한여름 날의 꿈
손택수 – 그해 여름의 방
손택수 – 바다로 간 이름
송남선 - 여름 냇가
송문문 – 만하(晩夏)
송수권 - 여름 낙조
송승언 – 여름
송영희 – 여름 연못
송정숙 – 여름
송정숙 - 여름날
송정숙 - 여름 편지
송태옥 – 뭉크의 여름
신경림 - 그 여름
신경림 - 여름날 – 마천에서
신동엽 – 여름 고개
신동엽 – 여름 이야기
신석종 – 장마철 표정
신성호 – 여름날의 추억
신성호 – 여름날이 좋다
신성호 – 여름이 간다
신성호 – 이 여름이 가는데
신영희 – 여름의 끝자락에서
신영희 – 올여름엔
신용목 – 소사나무 숲의 여름
신주연 – 여름
신창홍 – 여름 지다
신현식 - 장마철이면 난 행복하다
신혜정 – 여름이었다
심의운 – 그때 여름의 끝
심지향 – 여름 단풍
여름
나금숙
버스에서 내려
너의 집 앞으로 다가갈 때
외양간에서는 어미소가 선 채로 송아지를
막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가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송아지는
비척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더니
일어서서 겅중거렸다..
정오의 빛을 반사하는
갓 태어난 송아지의 털빛이란
암소의 다리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흘러 돌아나가고
여울에는 돌사과가
향내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허리까지 우거진 잡초들,
풀벌레들이 소리 높여 울다가
갑자기 그치는 적막 속에서
너와 입맞추기 위해
멈춰 섰다
미술관 소음 회화 앞에서
음향을 듣기 위해 단추를 누르듯이
모자를 한껏 젖히고.
강이 하늘에 걸리고
낮달이, 물고기들이 그 강을 건너고 있었다
여름
나기철
감나무 잎이 창을 덮어
건너 아파트 삼층 여자의 창이
안 보인다
감나무는 내 눈을
우리 집 안방으로 돌린다
쓸쓸한 여름
나태주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소리 땅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여름내 불씨 다독여
나태주
여름내 불씨 다독여 익혀온
너의 가슴
능금나무 가지 끝에 능금으로 매달아 놓고
고개 숙여 골목길 시무룩히 걷던
너의 옆얼굴,
모과나무 가지 끝에 모과덩이로 매달아 놓고
날더러 찾아가라
찾아가라, 그러시지만
빈 바구니 없어 나는
찾아가지 못하네
보고도 못 본 척 나는 꿈이 없어
담아가지 못하네.
네 가슴은
하늘 강물 소리 소롯이 들어와 잠든 능금.
내 옆얼굴은 그대로
깨물 수도 없는 하늘 나라의 모과
여름도 느긋이
나태주
볕 아래 매미 소리로
귀를 간지럽히는 여름이 오는구나
하늘에서도 몸에도 비가 내리는 여름이 오는구나
여름날 마치 잔잔한 파도 같이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느긋해지는데
아지랑이를 가지고 오는 여름도
느긋이 느긋이 다가오고 있는가 보다
여름 아침
나태주
꾀꼬리
잦아지는
한 목청에
또르르 말리는
가인 날의
살 더위
여름의 일
나태주
골목길에서 만난
낯선 아이한테서
인사를 받았다
안녕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하늘에서 구름에서
지나는 바람에서 울타리 꽃에서
인사를 한다
안녕!
문간 밖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순한 얼굴의 개에게도
인사를 한다
너도 안녕
여름의 일
나태주
안녕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하늘에게 구름에게
지나는 바람에게 울타리 꽃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
문간 밖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순한 얼굴의 개에게도
인사를 한다
너도 안녕
초여름, 네 벗은
나태주
초여름, 네 벗은 가는 팔을 보고 싶어라
초여름, 네 벗은 종아리를 보고 싶어라
긴 겨울 옷 속에 감추었던 팔과 종아리
신록 푸른 바람 속에서 보고 싶어라.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 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여름 햇살
남대희
개울물
아랫마을
마실가는데
여름 햇살
아장아장
따라나서다
징검다리
폴짝
건너뛰려다
개울물에
퐁당
빠져 버렸어
꼬르륵
거품 내며
잠수하다가
소금쟁이
발목 잡고
기어 나와요
보글보글
물거품 터질 때마다
톡톡톡톡
튀어나온
싱싱한 햇살
송사리 떼 화들짝
산그늘 숨고
개울물 갸울갸울
터진 웃음보
여름 소식
남원자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여름이 온다는 소식을 알리네
개구리가 개굴개굴 엄마 찾는 소리
서로 짝짓기 하려고 짝 찾아 큰 잎 벌려
아름답게 노래를 하네
까치도 참새들도 날아와서 깍깍 짹짹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꽃들도 아름다움을 뽐내듯 더욱 빛나네
학교에서는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고
방학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
이제는 방학이 너무 길다고 푸념한다
코로나19로 서로 친구를 그리워하므로
여름이 다가오면
남원자
싱그러운 초록 잎들이
너울너울 블루스 춤추고
바람과 함께 입을 맞춘다
개망초가 나 좀 봐요
함께 손잡고 놀자고
궁딩이 내밀고 유혹하네
금계 화가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춤을 추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능소화가 담장에 올라
떠난 임 그리워
목을 빼고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 두둥실
실개천에는 송사리 떼
개구리 개골개골 울어대는
아- 밤꽃이 필 때면 생각나는
정든 임 그리운 사랑이여
여름에 들다 - 촛불잔치
남태식
하필이면 밤이었어
꾀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오는 그믐이었어
달은 자고 별은 미처 일어나지 않았어
브레이크 없는 차를 달리다가 전봇대를 받았어
하필이면 내리막길이었어
엑셀은 애초부터 밟지 않았어 뒤로 가는 차였어
전봇대가 쓰러졌어 마을에 불이 한꺼번에 사라졌어
쓰러진 전봇대 넘어 촛불이 켜졌어
한 집 건너 촛불 두 집 건너 촛불이 켜졌어
이윽고 한 집 두 집 건너지도 않고 세 집 네 집 촛불이 켜졌어
마침내 온 마을이 촛불잔치 마당이 되었어
아버지는 이빨이 다 빠지셨지요
뒷동산에 올라 옛노래를 들으셨지요
옛노래가 끝나자 밤새 으르릉거리셨지요
으르릉 소리만으로도 지축을 뒤흔드셨지요
하필이면 낮이었어
예보된 대로 날은 매우 흐리고 큰 바람이 불었어
풀은 빨리 누웠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났어
브레이크 없는 차를 달리다가 전봇대를 받았어
하필이면 내리막길이었어
엑셀은 애초부터 밟지 않았어 뒤로 가는 차였어
전봇대가 쓰러졌어 마을에 불이 한꺼번에 사라졌어
쓰러진 전봇대 넘어 촛불이 켜졌어
한 집 건너 촛불 두 집 건너 촛불이 켜졌어
이윽고 한 집 두 집 건너지도 않고 세 집 네 집 촛불이 켜졌어
마침내 온 마을이 촛불잔치 마당이 되었어
아버지는 이빨이 다 빠지셨지요
뒷동산에 올라 옛노래를 들으셨지요
옛노래가 끝나자 낮내 으르릉거리셨지요
으르릉 소리만으로도 지축을 뒤흔드셨지요
* 2연의 2~3행은 김수영의 시‘풀’의 이미지를 빌림.
물 좋아 여름 좋아
노정혜
물 좋아 여름 좋아
물 너무 좋아
물 좋아 여름 좋아
개울 물 깨끗해
개울 물소리 청아해
수초들 시원하게 물마시고
바람에 산들 산들
물 좋아 여름 좋아
물 좋아 물 시원해
물 너무 좋아
물 물 너무 좋아
물 있어 여름 좋아
물 찾아 계곡으로 바다로
휴가길 이어진다
물 좋아 여름 좋아
사랑받아 좋아좋아
꽐꽐 시원하게 노래노래
물 좋아 여름 좋아
여름
노정혜
여름이 왔다
6월은 여름 아기
아기 걸음마
봄 같기도 하고
여름 같기도 하지
여름 아기 재롱도 부리다가
투정도 부린다. 비바람으로
한 발 한 발 힘센 장정이 되어
여름 어른 제 할 일이 태산이라
더위를 몰고 온다
더위는 어미의 마음
오곡이 쑥쑥 자란다
더워라. 견뎌라
오곡 과일이 풍성하게
하늘의 뜻
여름 어른 잘 모시고
행복한 여름을 만들어 보랴
여름 과일
노정혜
앗! 뜨거워라
참아야 한다
익혀 주리라
맛나게 새콤하게
누굴 위해 아파야 하나
우리의 운명이라
주는 것이 행복
아파야 맛난다
익혀라
우리는 참는다
아픔이 사명이라
산짐승 들새들도
나누어 주리라
더위 속에 영글어 가는 과일
과일은 행복하다
여름 숲
노정혜
여름 숲
짙어지는 녹음
바람 불면 무더위로 젖은 땀
확 날려 주네
계곡 물소리 졸졸 콸콸
새들 지지배배
숲길 걷노라면
몸도 마음도 청량해
숲으로 숲으로 가자
여름 열정 좋아
노정혜
봄은 가고 여름 왔다
봄 좋아 돌아가려니
길 없네
하늘 부르심 받고 가신 우리 부모
자식 보고 싶어
그리워도 그리워도
돌아올 길 없네
지금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길
내 아이들 길
나는 나는
산 들 계곡 물 아픔 기쁨 괴로움
어우러 진 그림 그린다
봄 가고 여름 왔네
생기로운 초록길
참 좋아
열정 떠거운 여름 좋아
여름아 떠거워라
가을 풍성하게
산새 들새 산짐승
배 불러 노래하는
열정 떠거운 여름 좋아
열정이 가을 곳간 배부르다
여름이 노크한다
노정혜
봄이 왔네
좋아라
함성이 하늘을 나르다
잠깐의 행복인데
떠나라고 바람이 분다
비 님도 합세하네
시간이 되면 떠날 것인데
여름이 안달하나 봐
바람에 나뭇잎이 춤을 춘다
뽐내고 싶은가 봐
여름이 문 앞에서 서성인다
여름 친구
노정혜
고목 나무 밑에서 노래하는 나
팔자 좋은 사람
찜통 더위도 고목나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 시원한 생기담아 불어준다
더워 더워
고목 나무는
지치고 피곤한 자 오라
쉬었다 가시오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확 뚫어 주리
수백 년 한자리에서
쉬어가라 쉬어가라
기다린다
고목 나무는 십년지기 우리 친구
우리 둘이 휴식처
한 십 년 더
고목나무와 친구 하면 좋겠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님 한 백 살 잘 살다 가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아픔 치료받았습니다
일백 세까지 고목 나무와 친구하고 싶습니다
고목 나무 닮아 가슴속까지 확 뚫어 주는 사람 되고 싶습니다
여름휴가
노정혜
태풍이
지나간 자리
신록이 짙다
청아한 잎새들이 반짝반짝
더위에 지친 자연이 쉬어가게
숲을 이룬다
산과 바다는 기다린다
하늘은 높고 푸르다
바다는 파도 소리 시원하고
숲속 계곡은 물소리 청아하다
태풍이 오염된 지구를 청소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산으로 바다로
휴가길 분주하다
여름 일기
도종환
제주 송악산은 휴식년에 들어가고
배들은 태풍을 피해 항구로 몰려와 몸을 묶고 있는데
내륙은 불볕이다
역병으로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자기도 격리되어 있다가
간신히 살아난 이의 편지를 읽다가
잠시 안경을 내리고 창 너머 구름을 보고 있는데
정문 앞에 누굴 죽이라고 소리치는 노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몰려와 있다
다 작고한 전직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끝마다 핏발을 세우고
종편이 붉은 글씨로 화면을 덮는 동안
나이 사십이 넘도록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연극인이 고시원에서 죽은 지 닷새 만에 발견되었다
한 달 평균 수입이 삼십만 원이라고 했다
고시원 주인 여자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소리쳤다
낡고 오래된 고시원 벽을 타고 오르던
덩굴식물은 말라죽은 지 오래되었고
채송화 몇 포기 시멘트 바닥 사이로
안간힘을 쓰며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날도 비는 오지 않았다
왜 거기 가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논은 갈라지고
감자 잎은 오그라드는 몸을 펴보려고 바둥대는데
무기력한 날들만이 반복되었다
난세에 믿을 만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민들은
아무 데나 대고 욕을 하고
울화를 풀 길 없는 젊은이들은 점점 사나워지는데
소서 지나 초복이 멀지 않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배롱나무가
진분홍 꽃을 피우고 있는 게 대견하다
경멸과 상극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도
꽃을 피워야겠다는 마음이 가상하다
여름 한 철
도종환
동백나무 묵은 잎 위에
새잎이 돋는 동안
아침 창가에서 시를 읽었다
난초잎이 가리키는 서쪽 산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로 세우지 못한 나랏일에 마음 흐렸다
백작약 뿌리를 다려 먹으며
견디는 여름 한 철
작달비 내리다 그친 뒤에도
오랜 해직 생활에 찾아온 병은
떠날 줄을 몰랐다
여름밤 깊고 깊어 근심도 깊은데
먼 마을의 등불도 흔들리다 이울고
띠구름 속에 떴다 지는 까마득한 별 하나
소금 장수 여름나기
도지현
길고도 긴 여름, 그리고 장마
고난의 세월
흐르는 땀 속에
시름과 함께 묻어나는 깊은 한숨
검은 구름이 밀려오면
까맣게
타 들어가는 가슴 가슴들
한 차례
비가 쏟아지면 암울해지는 현실
작열하는 태양이 미소 지으면
새로운 희망으로
하루를 열고
흐르는 땀이 가슴을 타고 내려도
살아 있다는 희망이 즐겁게 한다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소금 장수의 여름은
눈물도 있고
희망도 있는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계절
여름 단상(斷想)
도지현
1
지구의 온난화로
기후가 많이 변해버렸다
겨우내 추위를 인내하며
그리 봄을 기다렸건만
봄은 와서 살짝 맛만 보여주고
금방 더위가 밀려온다
이제 아열대로 변했나 보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더위에
하루에 한 번씩 오는 소나기
그걸 이젠 스콜이라 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로 힘든 상황
마스크로 더 더운 날씨에
올해 같은 더위는 숨이 탁탁 막힌다
2
이제 까마득한 옛일이다
마당에 평상을 펴놓고
모깃불 연기에 매운 눈을 비비며
할머니 무릎 베고 옛날얘기 들었지
우물에서 차게 식힌
수박 덩이 잘라 나눠 먹으며
사촌들과 까르르 웃으며
할머니 옆에 둘러앉았었지
까르르 웃는 것이 못마땅하신
할아버지의 장족 두드리는 소리
헛기침하시는 소리 무서워
웃는 소리는 평상 밑으로 숨어버렸어
지금 내가 할머니 연세가 되어
그 시절의 우련한 추억 속에서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할머니의 품속에 안기고 싶다
여름 더위
도지현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훌러덩 다 벗고 팬티 하나만 걸치고
수돗물에 목물해도 창피하지 않으니
사람 많은 계곡 휴양지에서도
마찬가지 아랫도리만 가리면 그만인데
여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죄인가
이 염천에 옷 하나 제대로 벗을 수 없으니
여름 숲, 그곳을 거닐며
도지현
잔잔한 설렘이다
여름의 숲에 들어오면
하나에서 열까지, 죄다.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마구마구 피어난다
이 풋풋하고 싱그러운 내음
살짝 휘감아 안아 주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다
함초롬히 젖은 풀잎으로
발목을 적셔주는 느낌이 좋아
눈을 감고 잠시 그 감촉을 뇌리에 새긴다
자연이 불러주는 합창으로
잠시 속세의 번뇌를 잊고
꿈의 세계를 거니는 듯한 황홀한 충격
정녕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았으면
여름의 길목에서
도지현
태양이 지표면에 내려와서
자글자글 지지기 시작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은 뜨거운 열기를 실었다
가슴은, 혈류를 타고 돌던
뜨거운 피로 하여 고동소리가
그 수위를 높여가더니
어느 순간에 빅뱅을 일으키는데
이제 포근하던 봄은 없다
빅뱅을 일으킨 입자 하나하나가
태양과 교합하더니
열꽃으로 변해 공기를 태워나간다
서서히 달구어진 대지는
그 세력을 넓혀 군소 집단을 형성해
계곡과 강과 바다를 정복하고
참을 수 없는 뜨거움
제압당한 공기는 계절을 변화시키는데
그리웠던 여름이여
도현영
그리웠던 내 님이 모진 풍파 이겨내고
이제 나서야 님 찾아왔구나
날 닮은 어여쁜 인형을 한 아름 안고
근접한 곳으로 이사 온 내 님이여
예전에 사자후 같은 성격은 어디로 가고
올망졸망처럼 자신감 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지
마음이 아리기만 하구나
바라만 보는 건 뒤로한 채 용기를 내 품어
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이거라
기나긴 세월을 그리워했건만
여름의 고통
도현영
햇빛 쨍쨍한 무더운 여름
온몸이 나른하여 삶의 의욕
떨어지는 무기력증
아름다운 꽃과 지저귀는 새소리
푸르름 가득한 행복한 이 세상을
구경할 계절인데
한여름 같은 달 셋이나
생일 축하 파티 축복받은
행사인데도 머리는 지끈거린다
정신은 휑하고 사물들은 흐릿하며
아스팔트는 춤을 추는지
취기 어린 마음 같고
할 일은 산더미로 쌓이고
시간은 부족하다면서도
하루 절반은 방콕하며 뒹굴뒹굴
밤낮없이 꿈속을
헤매인 듯한 무료한 삶
당신은 아마 모를거야
걱정 없이 웃고 살고 싶은데
가정주부 인생이
어디 편안함뿐이겠는가
무탈한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지
여름의 비애
도현영
청포도가 맛깔스럽게도
익어가는 7월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지는 장맛비
뜬금없이 헤엄치는
부지런한 개미는 갈 곳 헤매다
나무에 부딪혀 떠내려가고
눈 깜짝할 사이 줄행랑치는
눈치 빠른 쥐새끼 구멍에서
부르륵부르륵 거린다
물먹는 하마처럼
배가 볼록하게 나온 대지(大地)
시리고 아프다가 살점은 뿔뿔이 흩어져 먹구름만 원망한다
삶에 부지런한 신발 두 짝
빗물이 스며들어 작은 섬 하나 짓고
꾹꾹 눌린 발자국의 흔적
목적지 없이 떠돌다가
어디선가 정착해서
씨앗이라도 품으면 좋으련만
가슴에 파고드는 빗줄기
먹구름에 가려진
해님의 가슴 아픈 눈물이런가
여름
독운
여름은
젊음이다
젊음은
온통 뜨겁다
뜨겁게 타올라
까맣게 산화하는
태양의 흔적이다
차갑지 마라
불덩이가 되어 이글거려라
타닥 타닥 화력을 키워
절망 같은 어둠을 몰아내라
여름은
사랑이다
사랑은
온통 뜨겁다
뜨겁게 피었다가
장렬히 지는
정열의 흔적이다
꺼지지 마라
불덩이가 되어 불춤을 춰라
타닥 타닥 화력을 키워
절망 같은 마라의 강을 건너라
아파트 마을 여름 낙우송(落羽松)
류근택
갈색 단풍
깃털처럼 훨훨
대지에 쉼 청하더니
어느새
연둣빛 칠월 맞네
너와나 하나되려
낙우송
회색빛 도시
푸른 인연 만드네.
지상으로 솟은 뿌리
수분 가득
줄기 타고 잎으로
낙우송
사랑 전하네
나뭇가지 사이
새들 재잘거림
보드라운 잎새
푸름 더해 이 여름
내일 보듬네
늦여름
류수안
지나간 어느 시절엔
이화중선이라던가 혹은
박초향이라 불렸을 계집 하나
평상에 앉아 부른다 열녀 춘향 수절가를
이승 사내
저승 사내
평상 아래 불러들여
쪽 뻗은 가리마
파르한 눈매의 계집
때 절은 보퉁이 장단 맞춰
노을 깔고 앉아 부른다
열녀 춘향 수절가를
고가
안마당
돌이끼 붉어가는 저녁
여름날 추억
류인순
여름 산책길에 만난
소낙비에 온몸 적시니
초록빛 추억이 눈앞에서
배시시 웃고 서 있네
굴러가는 쇠똥에도 깔깔대던
장대비 내리던 하굣길에
눈짓 하나로 우산 접어 넣고
온몸 물에 빠진 생쥐 꼴 되어
종달새처럼 재잘대던
긴 머리 소녀들 깔깔 웃음이
하분하분 빗속을 떠다닌다
긴 세월 달려온
황금빛 노을 앞에서도
초록빛 추억 하나 똑 따서
가슴에 살포시 안으면
세월 뒤안길에 잠자던
오색 무지개 다시 뜰까
진초록 추억이
빈 가슴에
자박자박 내리는 날엔
친구들아 쇠똥 보러 가자꾸나
여름 달구는 소리
류인순
칠월이 바람까지 익히며
한여름 달구던 날
십이 층 방충망에 붙은
매미 한 마리
시끄럽게 울어댄다
그 울음 멈추게 하려고
손뼉 치려다 말았다
그래, 그냥 봐주기로 하자
짧은 삶 생의 환희 노래하는 것인데
목마른 사랑에 뜨겁게 우는 것인데
금쪽같은 하루해가 또 지난다고
절박하게 구애하는 것인데
여름 공화국
류제희
날을 벼른다. 긴 겨울 창고 속에 방치됐던
칼날, 부식된 일상의 관념을 깨버리고
눈부시게 날을 세운다.
바람 자는 한낮, 풀잎들 긴장한다.
눈 깜짝할 사이
당당하던 꽃대들이 잘려나간다.
(사오월 독버섯으로 피어나던 세력을 딛고)
부정의 비리에 무성하게 뿌리 내린 잡풀들
뎅강뎅강 목이 나간다. 칠월 한복판에서
퍼붓는 햇볕 아래 절망의 이파리들
형체 없이 시들고
산그늘 길게 접힌 텃밭에서
망초꽃 하얗게 자지러진다
묵은 논배미 너머로
언뜻언뜻 개벽 세상이 보인다
지난여름은 치열하였다
마경덕
매미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수세미는 아침마다 노란 꽃을 수십 개씩 피웠다. 해가 지면 시들어버릴 꽃들이 기를 쓰고 피었다. 대부분 실속 없는 수꽃이었다. 먼 곳에서 호박벌이 날아왔지만 목을 뽑고 암꽃을 기다린 수꽃들은 해를 따라 지고 말았다. 능소화도 질세라 줄기를 밀어올렸다. 엎치락뒤치락 자리싸움을 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수세미는 능소화를 제압했다. 넓은 이파리를 펼쳐 햇빛을 가로채던 수세미는 기어이 능소화를 덮어버렸다. 그늘에 든 능소화는 틈을 노리고 치솟더니 가지 끝에 주홍빛 꽃송이를 매달아 그늘 사이로 내밀었다. 첩의 입술 같은 붉은 꽃이 속엣말을 수세미 발등으로 쏟아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세등등 이파리만 무성한 수세미는 옥탑 지붕까지 기어오르더니 바지랑대를 휘감기 시작했다. 빨래를 널러간 나는 수세미의 덩굴손을 풀고 고개를 돌려 세웠다. 녀석이 방향을 틀어 다시 왔던 길을 기어가고 있었다. 싸움에서 등을 보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었다. 목을 조일 듯 달려들던 넝쿨이 돌아서자 살구나무도 적이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른 봄 재빨리 꽃을 털어내더니 어느 틈에 어린살구를 잔뜩 품고 있었다.
비가 내리자 텃밭에서 뽑혀나간 달개비가 살아났다. 빗물에 입술을 적시더니 뿌리를 드러낸 채 보랏빛 꽃을 매달았다. 말라가던 잎이 물기를 머금고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식물에게 비는 단순히 물이 아닌 피와 다름없었다. 버려진 잡초가 수혈을 하듯 비를 맞고 있었다.
첫 열매를 품었던 모과나무도 끝까지 모과를 놓치지 않았다. 모과나무가 여름 내내 집중한 건 모과 한 알이었다. 첫 태에 맺힌 주먹만한 모과 하나가 그 나무의 전부였다. 새끼를 품은 어미는 비바람도 두렵지 않았다. 낙과는 곧 낙태였다.
몇 번의 비바람에 앞산이 부풀어 오르고 산빛이 짙어졌다. 그사이 신축 중이던 건너편 아파트가 산의 이마까지 기어올랐다. 래미안, 우성, 주공, 그린우성, 현대…하나 둘 생겨난 고층건물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앞산에서 날아오던 산새들, 새똥에 묻어온 풀씨들이 고물고물 태어났다. 까마중 익모초 제비꽃 민들레 애기똥풀… 그 작은 목숨들을 보며 생명이라는 말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내가 아끼던 풍경들이 차츰 지워지고 있었지만 여름은 더욱 치열하여 가지에 오종종 들러붙은 무화과는 자고 나면 불쑥 튀어 올랐다. ‘불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자고 나면 마치 유리공이 유리대롱을 불듯 볼록볼록 솟았다. 혹부리 영감처럼 다닥다닥 혹을 매다느라고 무화과나무는 한눈 팔 겨를이 없었다. 푸른 갈기를 휘날리던 한여름이 투레질을 하며 건너갈 때 밤새 무화과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제 속에 품은 꽃이 벙글고 있었다. 끝내 숨길 수 없는 꽃잎 때문에 무화과는 쩍쩍 가슴이 벌어졌다. 몸 깊이 숨겨둔 붉은 꽃잎이 불거져 나올 때쯤 직박구리 부부도 몇 차례 다녀갔다. 참새 떼의 짓인지 직박구리 짓인지 말랑한 무화과는 꼭지만 남아 있었다. 무화과를 먹는 것은 꽃을 먹는 것. 단물 든 대추는 쳐다보지도 않던 새들이 꽃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비에 젖은 골목은 더 깊어졌다. 하수구는 입을 벌리고 오물오물 물줄기를 받아 삼켰다. 젖은 벽에 곰팡이가 피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눅눅한 지하방을 떠나지 않았다. 우기는 지루하고 따분했다. 집이 없는 비둘기들도 전선(電線)에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빗소리만 오가는 음산한 골목, 길바닥에 버려진 우산이 처량했다. 우산살이 꺾여 엉거주춤 날개를 늘어뜨린 병든 새 같았다. 우산에게도 날개가 있었다니
골목엔 몇 마리의 비둘기가 살았지만 아무도 비둘기에게 집을 내주지 않았다. 둥지를 틀만 한 공간은 라면상자로 틀어막아 한 뼘 깃들 곳이 없었다. 빗속에 웅크린 새들의 날개가 무거워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날개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새들을 받아 안던 허공도 속수무책 젖고 있었다.
비가 그치자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자라던 민들레가 때늦게 노란 꽃 한 송이를 들어올렸다. 흙 한줌 없는 바닥을 붙잡고 가녀린 꽃대궁을 끙끙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발을 멈추고 바라보는 순간, 골목이 환해졌다. 둘러보니 바랭이 명아주도 가까이 살고 있었다. 모두 딱딱한 바닥을 붙잡고 있었다. 새들이 사라진 전선에는 수정 같은 물방울꽃이 물구나무로 매달려 있었다. 골목은 여러 목숨을 품었다.
불볕이 이어지고 방심하는 사이 화분이 마르고 나뭇잎이 타들어갔다. 폐지를 줍는 노인의 리어카가 골목에서 사라지고 대낮에 반지하가 털렸다. 가스배관을 타고 삼층까지 올라간 남자도 있었다. 찬바람이 불도록 빈집을 털던 좀도둑은 잡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창문을 닫아걸고 출근했지만 창문은 서랍 같은 것이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자 방을 세놓는다는 종이도 대문에 나붙고 푸들을 찾아주면 사례금을 주겠다는 전단지도 전봇대에 붙었다.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은 여름이 다가도록 건널목에 걸려있었다. 삼복이 지나자 지병에 시달리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나왔다.
여름은 그늘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늘은 내 몫이 아니어서 여전히 삶은 치열하였다. 전철에 가방을 두고 내린지 얼마 후 아끼던 지갑을 택시에 놓고 내렸다. 가방과 지갑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의 침묵
마종기
그 여름철 혼자 미주의 서북쪽을 여행하면서
다코다 주에 들어선 것을 알자마자 길을 잃었다
길은 있었지만 사람이나 집이 보이지 않았다
대낮의 하늘 아래 메밀밭만 천지를 덮고 있었다
메밀밭 시야의 마지막에 잘 익은 뭉게구름이 있었다
구름이 메밀을 키우고 있었던 건지, 그냥 동거를 했던 것인지
사방이 너무 조용해 몸도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내 생의 전말같이 무엇에 홀려 헤매고 있었던 것일까
소리 없이 나를 친 바람 한 줄을 사람인 줄 착각했었다
오랫동안 침묵한 공기는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무도 없이 무게만 쌓인 드넓은 곳은 무서움이라는 것
그래도 모든 풍경은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이라는 것
그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무슨 남자냐고 메밀이 물었다
그날 간신히 말없는 벌판을 아무렇게나 헤집고 떠나온 후
구름은 다음 날 밤에도 메밀밭을 껴안고 잠들었던 것인지
잠자는 한여름의 극진한 사랑은 침묵만 지켜내는 것인지
나중에 여러 곳에서 늙어버린 메밀을 만나 공손히 물어도
그 여름의 황홀한 뭉게구름도,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면벽한 고행 속에 그 흔한 약속만 매만지고 있었다
여름 편지
마종기
무모한 여름이여.
꽃들은 여기저기서
책임도 지지 못할
임신을 하고,
풀도, 나무도, 나도
여름이면 도둑처럼
지붕 위로 올라갔었다.
지붕 위의 하늘은
몇 개쯤이던가.
애매한 맹세를 은근히
사방에 흘리면서
날개 빠른 새가 되어
사방을 들뜨게 했다.
아, 정말 들뜨게 했다.
모든 약속이 아름답게
향기처럼 우리를 울렸다.
궁색한 여름이여.
우리가 믿은 하늘은
구름처럼 희고
트럼펫 소리는 높고 낮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잤다.
잠 속에 내린 소낙비가
여름을 적시고
피부에 남은 물기가
차갑게 외면할 때까지
우리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파랑새도 굴뚝새도
돌아가야 할 길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해부터
늙기 시작했다.
담쟁이
목필균
누구냐
내 마음의 벽을 잡고 올라서는 너는
7월 태풍, 모진 비바람 속에도
허공을 잡고 올라서는 집착의 뿌리
아득히 떠내려간 내 젊음의 강물
쉼 없이 쌓여진 바람벽을 기어오르는
무성한 그리움의 잎새
어느새 시퍼렇게 물든 흔들림으로
마음을 점령해가는 네 따뜻한 손길
여름 강가에서
목필균
어제 내린 폭우로 쓸려온 온갖 시름들
밤새 가라앉히려니 그 마음 오죽 했을까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 때문에
밤새 뒤척인 부석부석한 얼굴
애써 감추고
아침밥 지어주시던 어머니처럼
탁류로 넘치던 물길에
은빛 빛살 꽂으며 이른 새벽
해를 품고 흐르는 네게
첨벙 발을 담근 산자락이 흔들린다
흔들리긴 해도 떠내려가지 않은 정으로
끊임없이 제 얼굴 닦고 있는 강
그 깊은 품속으로 한여름이 실려 가고 있다
장마
목필균
굵은 비가 내린다.
언제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가
지하방(地下房) 창가에 흐른다
그렇지 않아도 눅눅한 방에
칠순으로 향하는 마른 육신이
고단한 몸을 담고 있는데
비는 칭얼칭얼 치마꼬리를 잡는다
온종일 고층아파트 계단 쓸어내리던
무릎관절 오지게 부어오르는 밤을
살만한 자식들 손길 마다하고
홀로 지켜내는 유씨 할머니.
낮에도 어두운 그곳을
햇볕 속에서도 축축한 그곳을
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
여름에게
문병란
내가 지치고 피로했을 때
여름이여, 너는 머언 항구에서 돌아와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와 같은 그리움으로
피로에 지친 내 육신을 두들겨
천둥 번개로 내 영혼을 일깨우며
그대 불멸의 뜨거운 입술로
내 빈 갈망의 목마른 잔에
그대 소나기의 연정 가득 채워다오
그리고 여름이여, 창백한 도시의 빛깔을
푸른 바다의 물감으로 새로이 칠하고
지치고 창백한 일상의 언어들에
장밋빛 생기를 부어 주는 사육제의 시간
넘치는 바다의 글라스에
냉 맥주보다 시원한
우윳빛 새벽의 나체를 포옹하게 해다오.
지금은 오전 일곱 시
제도와 의무를 반란하는 새벽
시민 조세 지역을 탈출하는 한 사내의
우범 가능성 위험한 금요일을 위하여
바다로 향한 국도의 끝에 서서
이글거리는 7월의 태양에 입 맞추게 해다오
대지는 오랜 갈망의 커다란 술잔
쩍쩍 금이 간 긴 가뭄의 논바닥에
천둥 번개 소나기의 격정으로 두들겨
오래 막힌 봇물들 둑을 넘게 하고
여름이여, 그대는 부끄러운 입술처럼 다가와서
예절을 지운 곳에 사랑을 창조하고
허위와 위선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
우리들의 고독한 체온을
탐스런 복숭아, 깨물고만 싶은
싱그러운 포도의 액으로 빚어다오
왈츠를 연주하는 파도는
해변을 피아노 삼아
4분의 3박자로 휘파람을 불며 깨어지고
갈매기는 외로운 무용수
아찔한 파도타기
신명 나는 날갯짓은
여름이여, 내 연인처럼 와서
어느 날 새벽 장밋빛 꿈을 찢으며
문명을 거부하는 야성의 손길로
원시림의 오솔길로 인도해다오
너의 억센 팔에 안겨
뱃사람처럼 껄껄 웃으며
고래의 길로 가는 7월 어느 날
원시림으로 가는 새벽 위에서
그대의 싱싱한 가슴을 포옹하게 해다오
감람빛 바다의 입술에 입 맞추게 해다오
오오 내 사랑하는 여름이여
여름 끝물
문성해
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
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
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닌다
얽은 자두를 먹던 어미는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치고
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
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
여름 숲
문익호
쏴아 쏴아
시원한 소낙비,
더위에 지친 여름 숲 적신다
반가움에
나뭇잎 찰랑거리고
하얀 함성 내지르는 계곡물
나도 영롱한 빗방울 향해 손을 내민다
가만히 들어보는 숲 소리
숨은 그림 같은 친구들
비 그치니 온갖 새들 노래하고
하나하나 흉내 내본다
찌빗찌빗 보보보보
빠빠라삐아 삐앗삐앗
개성 있는 새소리에 터지는 웃음
문득
온갖 새소리에는
아우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 없는 숲 친구들 함께하니 이렇게 편안한가
어스름에 호롱 반딧불 켜고
우리도 편안한 숲 친구 되어 여름날
문장우
따가운 햇살 펄펄 끓는
가마솥더위에 내가 서 있다
해님이 말간 얼굴 내밀어도
그 햇살 앞에 찡그리는 나의 얼굴
입술이 타고
혀뿌리 감아 당기는
붉은 속살의 아픔
목마른 여름날
의미 없이 진종일 배회하는 마음
갈라진 입술 달싹이며
아직 끝나지 않는
피곤한 하루의 행로
다스리지 못한 지친 육신은
껍질 떼어내듯 무더운 고독 앞에
소리내어 웃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한 줄기 맞이하고 싶은 간절함
마음의 눈길은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에 빗장 풀고
무더위 씻어 버리고 싶고
날마다 들숨처럼 마시는
싱그러운 바람 앞에 서 있고 싶다본다
여름 사냥
문장우
더위에 맞서
씽씽 금호강으로 달린다
삼복의 더위 꽁 꽁 묶어
자전거 뒤에 달고
청포도 향기 따라 달린다
강변 환상리 쉼터에서
과일 한 잎 넣고
반야월 시장 들러 시원한 잔치국수에
고추 된장에 찍어 맛에 취하고 나니
여름 볕의 따가움 온몸에 감긴다
화랑교 아양교 지나니
강둑에 노란 들꽃들이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넘실대며 춤을 추는
강물들이 나를 반긴다
씽씽 달리다
숨 고르며 생수 한 움큼 마시고서
길가 수줍게 퍼어난
접시꽃과 눈 맞추니
여름은 벌써
내 맘에 가득하다
보라색 여름 바지
문정희
여름 다 지나고 선선한 초가을 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보라색 여름 바지 하나 사 들고 돌아오며
벌써 바람처럼 숭숭 차가운 후회가
뼛속으로 스미어 옴을 느낀다
왜 나는 모든 것을 저지른 후에야 아는가
만져보고 난 후에야 뜨겁다고 깨닫는가
늘 화상을 입는가
사람들이 이미 겨울을 준비할 때
여름의 잔해에 가슴을 태우고
사랑을 떠나보낸 후에야 사랑에 빠져
한 생애를 가슴 치고 사는가
내 키보다 턱없이 긴 바짓단을 줄이며
내 어리석음을 가위로 잘라내며
애써 따스한 입김을 불어 넣어 본다
누구나 정해진 궤도를 가는 건 아니지
돌발과 우연이 인생이기도 해
그러나 어느 가을날 하루가
더운 사랑으로 다시 뒤집힐 수 있을까
이 보라색 바지를 위해
무릎 아래까지 흰 별들이 총총 나 있는
보라색 여름 바지를 입고 서서
홀로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다
숭숭 기어드는 차가운 바람 소리를 듣는다
초여름 숲처럼
문정희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 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맘때에는
문태준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 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금강(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여름 밭
문태준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 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 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 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초여름의 노래
문태준
오늘은 만물이 초여름 속에 있다
초여름의 미풍이 지나간다
햇살은 초여름을 나눠준다
나는 셔츠 차림으로 미풍을 따라간다
미풍은 수양버들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미풍은 풀밭의 염소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살구나무 아래엔 노랗고 신 초여름이 몇 알 떨어져 있고
작은 연못은 고요한 수면처럼 눈을 감고 초여름을 음미한다
초여름은 변성기의 소년처럼 자란다
하늘은 나무의 그늘을 펼치고
하늘은 잠자리의 날개를 펼친다
잠자리는 산 쪽으로 날아간다
나는 잠자리의 리듬을 또 따라간다
초여름 속에서 너의 이름을 부르니
너는 메아리가 되어
점점 깊어지는 내 골짜기에 산다
칠팔 월
문태준
여름은 흐르는 물가가 좋아 그 곳서 살아라
우는 천둥을, 줄렁줄렁하는 천둥을 그득그득 지고 가는 구름
누운 수풀 더미 위를 축축한 배를 밀며 가는 물뱀
몸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불은 계곡물
새는 안개 자욱한 보슬비 속을 날아 물버들가지 위엘 앉는다
물안개 더미같이, 물렁물렁한 어떤 것이 지나가느니
상중(喪中)에 있는 내게도 오늘 지나가느니
여름은 목 뒤에 크고 묵직한 물주머니를 차고 살아라
무더운 여름
민경대
무더운 여름 생각들이 벌판에
아무런 생각 없이 웃음을 웃고 밤을 지나고
꿈을 나물로 삼고 밤 그늘에 누워 혹은 철로에 누워
자장가 같은 소리를 들으며
너는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지 못하고
구름 속에 보이는 발자욱이 빗자욱에 지워진다
팔랑개비로 하늘에 바람 일으켜
더더욱 회오리바람은 내 연구실 창가에서
놓여있지도 않은 화분이 토네이도 위력의 풍력에 넘어진다
여름날 기대
민경대
오늘은 큰 그림 속에 우리는 방울처럼 출렁거리며
기다린 삶 속에 희망의 소리 듣고
맑은 사람들의 서성거림 속에
나도 방울 소리 들으며
이것은 하나의 기대 속에 큰 소리 듣는다
여름날 방울 꽃송이
민경대
솔향 강릉에서 만난 사람
거북이 등처럼 따딱한 그의 모습에서
이제는 토끼털같은 부르러움도 보이는
내가 붙여준 만물박사 cure all
우린 15년 이상 나이테를 같이 키운 동지
오늘도 강릉에 가면 만나는 우리는 인연의 끈으로
여름 바람타고 연을 날리는
나의 오두막집에 가끔 문득 찾아 오는
즈그시 눈으로 세상을 다 아는 지혜
전도서에 말을 어기고 살았던
나의 인생 후반부를 아는 사람
지금도 함께 어께 겨누며 시간을 본다
오늘은 나에게 김장순 시집을 보인다
나의 시가 33번에서 95번의 시인이다
그녀의 시 한편 본다
고은 시인이 임영로 164번길에 소나무 심을 때
같이 있던 나의 산초같은 사람
나의 1000인보에 글자 심으며
부채 하나 들고 여름을 선사하며
아이스크림 입에 넣고
시 한자 적어보니
이것이 오가는 인생이 아닌가
인정이 흐르른 그의 사무실에서
시원한 여름 나절
언어로 몸짓으로 사람을 그리는
두 사람이 모이면 사람 인(人)이 된다
수 많은 언어가 하나로 집약할 때
우연한 일처럼 사랑도 스며들고
이 아침에 식사를 하러 오라고 한다
선풍기를 돌아가고
나는 차를 몰고 아침 식사하러 간다
최실장 그래도 온정처럼 느껴 지는
이제는 그 사람
여름 날은 가고
그는 한 송이 들국화처럼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차를 몰고 혜성처럼 달려간다
오늘도 따스한 눈길속에 세월을 아는 친구
최실장 그을 위해 한 편의 시를 쓰고
우리의 우정도 커가는 나이테로 남으리라
굵은 선으로 지도를 경계하듯
경계선을 풀어진 낵타이처럼
우리는 진실한 언어로 여름을 난다
그에게 보이는 여름날 하늘 나에게는 벌써 겨울 하늘이다
최실장은 무게가 느껴지는 동정 156400원을 바꾸어
나의 시집을 산다
은행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의 제자 권현형 시인의 송향강릉 봄호에서 만나다
지나간 시절이 이제는 흑백 사진처럼 보인다
여름날 회의
민경대
모든 회의는
사실은 회의를 낳는다
모든 암닭이 알을 낳듯이
모든 회의는
회의를 낳는다
회의는 회의를 낳는다
오늘도 회의를 하나 낳는다
어제의 고통 속에 엉망징찬이 된 회의 속에서
오늘 회의는 어느 조용한 산장에서
푸른 적삼을 입고 푸른 수의처럼
회의가 회의를 낳는다는 원칙을
나는 오늘 참으로 깊은 골짜기에서
너무나 어둡고 고통스러운 스님 목탁 같은 소리 속에
회의는 진행할 것 같지 않아
한 여름날 더위 속에
시 한 편을 건지고 그냥 닭알 같은 시 한 편을 쓰고 싶어
선풍기 밑에 앉아 있으나
시는 시가 아니고 그냥 회의가 회의가 아닌
뒤죽박죽 같은 호박꽃 같은 시간에 장미 송이를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참으로 밝은 미소만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검은 그림자가 검은 마술 같은 시간을 만든다
그해 여름
박경리
1
분홍빛 내리닫이 입고
딸에게 친구들에게
손 흔들며 작별하고
수술실에 들어갔었던 그해 여름
눈을 떴을 때
하루 사이
세계지도같이 기미가 쓴
딸의 얼굴이 보였다
글 쓰는 굴레 벗어버리고
고뇌와 분노의 굴레 벗어버리고
미움과 절망도 다 벗어버리고
그해 여름은 불행하지 않았다.
2
생각해 보니
가슴에 수술을 받은 것은
열아홉 해 전이엇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
선풍기 소리가 쉴 새 없던 팔월
병실이 술렁였다
병원이 온통 술렁였다
북쪽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헤어졌던 내 동포가 온다고
신문은 폭풍같이
눈앞에서 퍼덕거렸다
3
내 딸이
병실에 쟈스민 향을 피워 주었다
옥잠화 몇 송이도 꺾어다 주었다
열아홉 해 전 여름날
잃어버린 한쪽 가슴
상처 달래려 했던가
향기 높은 옥잠화
붕대 사이에 끼워 두었다
치료실 시멘트 바닥에
시들은 옥잠화 떨어졌을 때
의사 보기 민망하여
얼굴 붉혔다
꽃과 향기와 피
북쪽 손님들 돌아가고
세상은 온통 허무했다
잃어버린 한쪽 내 가슴
여름이니까
박광현
날씨가 찜통더위면
어때요
여름 한 철인걸요
여름이니까
그러려니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밤새 울어대는 매미가
밉더라도
땅속 7년간의 한을 토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 울어라 실컷
하는 생각이 들 거에요
그렇게 울어도 7일밖에 못 운다잖아요
여름의 시작
박기숙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구나!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아니면 폭포수 나무 그늘로 가서
이태백의 시나 읊어 볼까?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시원한 마음으로 달 타령이나 불러 볼까?
역시 여름은 청춘이 불타는 시원한 바다가 좋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이요 사랑의 계절이다.
우리 모두 청춘을 불사르고 은빛 파도가
넘실대는 푸른 바다로
여름의 시작을 향하여
사랑의 파도를 타러가자.
여름 너는 시작 되었구나.
불가마 같은 뜨거운 여름날
불타는 너의 작열하는 정열의 태양을
나는 사랑 하며
오늘도 또 걸어가고 있다
여름별 떠난 자리
박남숙
정점을 찍고 돌아서는 여름별
뜨겁게 스쳐 간 상흔들이
들녘 논두렁에 누워 허기진 마음 밭
감성의 붓끝에 멈춘 기억을 소환합니다
아직은 음력 7월 매미의 노랫가락이
쟁반 위를 맴돌다 냇물에 발을 담그고
바람에 실려 온 가을향기에 손을 뻗어옵니다
계절이 먹어버린 여름은
어느새 긴 옷깃 여미게 만들고
언덕을 제집인 양 하늘거리는 살사리꽃
꽃에 걸린 잠자리 날개를 잠시 접고 있습니다
가을이 다소곳이 다가와
꽃잠 자던 붉은 꽃 등에 지고
우아한 꽃무릇 구월을 펼쳐 보며
그리운 임의 숨결 한 땀 한 땀 수놓아 갑니다
여름이 흔들린다
박남숙
붉은 향기 그윽하게
임 그리움에 햇살 등에 꽂고
종달새 둥지 튼 돌담을 탐하는 능소화
마당 가득 풀어놓은
유월의 푸르름과 수국의 보랏빛은
가슴 깊이 숨은 당신이라 믿어본다
가난을 끌어안고 기왓장 넘어
장독대의 울부짖음을 알지 못했던
유년의 내 모습은 하늘에 뿌려놓은 백일홍 같다
에움길 돌아 배웅하는 바람결같이
흔들려 피는 뙤약볕의 망초꽃같이
나도 덩달아 꽃같이 피는 행복을 수 놓는다
아주 가끔은
한 떨기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피고 싶다
여름날의 연정
박동수
푸른 사랑을 하고 싶다
뜨겁게 불어오는 하늬바람 속을
당신과 뜨거워 못 견디는
진한 초록의 사랑을 하고 싶다.
가슴속으로 줄기차게 내리는
여름날 소나기 빗줄기처럼
당신과 끝없는
줄기찬 사랑을 하고 싶다
낙엽이 지는 가을
붉게 타버린 세월의 낙엽 사이로
떨어지는 날 있을지라도
한 계절만이라도
불타는 사랑을 하고 싶다
여름, 그 깜부기의 노래
박라연
톡톡 여물어 곡식이 되지 못하고
여윈 보리 모가지 그 비좁은 대롱 속에
애달픈 소설이 될 수도
교훈이 될 수도 없는 이야기를 삭이다가
이슬처럼 방울방울 튀어 오르는 노래
그런 노래가 되게 하고 싶었지요
제 몸이 조금씩 썩어가도 깜부기
그 못난 몸에서 흘러나올 아름다운 노래를 위해
치유를 거부하는 모진 목숨
죽어가는 검은 얼굴을 애처롭게 보아주는
종달새는 혹시 없었을까요?
내 슬픈 눈을 기억하는 친구여 형벌이여
늪에서 늪으로 더 눅눅한 늪으로 가는
저 좀 높이
하늘까지 들어 올려주세요
죽은 몸으로도 숨죽여 노래하는
여름 그 깜부기의 노래를
가만히 한번 들어보아 주세요
여름, 여름을 읽는다
박명숙
여름 문이 열리면
태양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파란 바람 살랑이며 출렁이는 파도가
귓가에 속삭이듯 나를 부른다
하늘 밑
청보리밭이 누렇게 익어가고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면
여름 향기가 달콤하게 차오르고
담쟁이가 여름을 만나
푸르게 푸르게 펼쳐 놓은 벽화를 보라
말없이 하늘을 향해 촉수를 세우고
안간힘을 키우며 담을 넘는다
한차례 시원한 소나기를 만나
무더운 여름을 식혀주기도 하고
자연이 견디는 것처럼
여름은 무르익는 삶의 향기를 채운다
여름이면
열대야, 불야성에 잠 못 이루는 밤도
추억거리가 될 여름 이야기로
빛바랜 추억이 되어 아름답게 마주하겠지
이겨내야 한다
그 혹독한 여름의 심장에
지르는 아우성을 들어야 한다
뜨거운 태양을 즐기는
감자가 영글고 옥수수가 익어가고
배롱나무꽃, 무궁화, 자귀 꽃이
활짝 웃고 있는 나무의 일기를 읽으며
여름날의 푸른 철학을 배운다
혹독한 여름을 이겨내고
풍요로운 삶을 허락하는 계절이 오면
순종하는 자연처럼
긍정의 바람을 일으키고
지혜로운 삶의 여름을 읽는다
여름은
작은 미생물까지도 소리 내 읽어
또 다른 전진을 꿈꾸게 한다
여름 소묘(素描)
박목철
부채도 여름이 버겁다는데
선풍기라고
지친 날개 헉헉, 이열치열(以熱治熱)하라 하고
장마 지겹다더니
이글거리는 태양에 변덕 부리듯
나뭇잎 기가 죽어 고개 숙였다
정자나무 그늘에
매미 소리 자장가 삼아
오수(午睡) 즐기던 전설이 그리워
타임머신이라도 타야 할까 싶다
병아리 떼 재잘거림 잦아든
텅 빈 학교 운동장 매미 소리만 자지러지고
도시의 소란함 몽땅 옮겨간 해변가
파도 소리도 할 말을 잠시 잊었다
혀 빼물고 헉헉거리는 견공(犬公)들
여름나기 어렵다 한탄하는데
사람은?
열기에 피어오르는 욕망 아지랑이 되어 가물대고
날개 없는 겨드랑이만 여름이 무겁다 한탄한다
한여름 꿈의 장례식
박미산
한여름이다
잠에 자물쇠를 채웠나보다, 그녀는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데도 눈을 뜨지 않는다
눈을 뜨지 않는 게 아니라 눈동자를 버린 거다
여기저기 매달린 링거병을 따라
그녀의 눈동자를 찾으러 간다
초록빛 당근을 키우던 꿈도
탐스럽게 매달던 포도알 꿈도
색색의 실로 토끼의 귀를 짜던 꿈도
고양이 눈을 그려 넣던 꿈도
호미도 대바늘도 코바늘도 다 버린,
그녀와 나를 이어주었던 배꼽에 얼굴을 묻는다
급박하게 숨 쉬던 그녀
매미의 복화술사 같은 숨소리가 잦아든다
텅 빈 동공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무기력하게 얼어붙는다, 한여름인데도
13층 병실에서 밖을 내려다본다
가로수, 자동차, 오토바이, 십자가,
자전거, 사람들이 뒤섞여 이승의 험한 길들을 자유롭게 건너가고 있다
한여름의 미소
박상종
여름 산빛 바다 빛 어우러지고
산등성이 갯바위 위에 얹어
손발 물에 담가 시원한 가슴
실바람 나풀거리고
초록빛 해초 바위
나란히 춤추며 일렁이는
저기 무리 지어 어울리는
듬성듬성 보이는
작은 물고기 떼
여울져 가는 한 시절에
미소가 화사하게 머리에
아른거리고 있을 때
그 한여름에 미소가
다시 떠오르는 저 산기슭에
붉은 태양처럼
반사하여 서서히 바다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는
저녁노을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한번 올까 되새기다
돌아가는 시나브로
다시 세월 딛고 또 다른
삶을 기다리고
넌지시 남 시선 애태우는
눈에 뜨인 시야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
기약 없는 손을 내밀어
그렇게 다시는 오지 않을 미소로
너스레웃음 살며시 머금고
돌아가는 초록빛 여울
여름 숲
박상희
넉넉히 거친 바람 숨겨
초록의 향으로 돌려주렴
따가운 햇살
몰래 숨어 쉬어가도
모른 채 덮어주렴
지친 나그네 덥썩 주저앉아
세월 보따리 풀어놓거든
초록으로 다독다독 감싸주렴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박서영
담벼락 밑에 웅크리고 앉은 노숙자의 발끝에서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붉은 장미꽃 그늘 아래 발끝을 모으고 앉아 있는 고양이는
공기의 도축을 이미 알아차렸다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운명은 토막난 장미의 거친 숨결
첫 번째 죽음의 매혹을 기록하는 일이다
육체의 그림자를 분리하기 위하여 바람은 한동안 끌끙거렸다
냄새와 울음이 동시에 바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담벼락을 스쳐 지나온 사람
기록들을 정리할 때 그곳에 두고 온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내 그림자는 아직도 나에게 오고 있는 중이다
노숙자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태어나고 있었다
발뒤꿈치엔 둥근 파문이 화석처럼 굳어진 지 오래고
그는 담벼락 밑에 앉아 햇볕을 쬐는 시체
나는 공기의 도축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그 풍경을 빠져나왔다
시체의 마음 속으로 장미꽃잎 하나가 침몰하고 있다
담벼락 위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아챈 눈빛
여름 저녁의 입구에 조등처럼 별 몇 개가 반짝반짝
나는 아직 당신을 외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여름 방학
박석수
<아이스케키!>를 목놓아 울어도
아이들은 외갓집으로 원두막으로
혹은 멱감으러들 떠나고
텅 빈 동네 입구에는
햇살 속을 기어 다니는 고요가 보였다
십릿길을 더 들어가
나는 방학 숙제로 여름의
곡식을 채집하며 다녔다
해 질 녘, 집에 돌아와
오이, 마늘, 고추를 피곤처럼 풀어 놓으면
어머님은 오이채에 보리밥을
눈물로 비벼주셨고
어린 동생과 나는 맛있게 먹으며
이따 밤에 반딧불을 잡으러 가기로
약속하였다
여름 한낮
박성숙
꽃무늬 양산을 펼쳐 들고
여자가 간다
학명도 없는 꽃이
활짝 팔에 돋는다
하늘하늘 몸을 흔든다
따갑게 내리쏟는 빛줄기
꽃무늬에 부딪혀 양산 살에
매달리다 자꾸 흘러 무거워진
햇살은 여자의 종아리로
흘러내린다
스타킹을 적시는 빛줄기
움직일 때마다 일렁일렁
여자의 얼굴로 들이친다
손수건을 꺼내 닦아내는
한여름 뙤약볕
꽃말로 걸어가는
여자 위로 비가
햇살비가
내린다
바쁜 여름
박성우
상추 열댓 장 뜯고
열무 두어 포기 뽑아다 씻어
늦은 아침을 먹었다
사람이나 손수레만
건너다닐 수 있는
작은 다리에 걸터앉아
냇물과 먼 산을 바라보았다
발아래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는 세찼고
굽이 너머에 있는
먼 산은 멀리 있어 고요했다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는 하늘은 넓었고
산바람이 보들보들
불어오는 골짝은 좁았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밭고랑 풀은 수북해지고
산등성이 그늘은 짙어지겠지
서둘러 해야 할 일과
어지간히 늦춰도 좋을 일을
하릴없이 구분해보다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왜가리를 올려다보았다
여름 엽서
박성한
은행나무 잎사귀 푸른 날에
도서관을 찾습니다
시간을 핑계로 읽지 못한 책들이
마음을 읽어주는 오후,
창밖에는 산그늘이 드리웠지요
서가에 주저앉아 글을 읽습니다
낡은 책장들 틈에서
눈빛이 깊은 詩를 생각했지요
가끔씩 어두운 회랑을 지나온
발자국 소리가 환하게 울립니다
창밖 노을은 붉게 물들었을까요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여름의 주검
박시하
한 주검을 통해
여름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리 울음소리만큼 분명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유일한 여름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이상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노란 뱀이 벗어 놓은 허물 같은
반투명한 사실에 대한
그 여름에 세계는
저녁의 거울처럼 두렵고
훌륭한 죽음이 되어갔습니다
봄과 여름 펼친 콘서트
박얼서
숲속에 들자 뫼의 함성이다
타악을 책임진 청설모 발자국들이
바스락 거리며 무대를 뒤흔든다
산등성을 타고 오르던 초록군(軍)들이
돌비알에 가위 눌리는 순간
잎새들이 명주바람에 가락을 싣고
일제히 합주를 시작한다
키작고 숫저운 풀잎 손들이
현의 음률을 잘게 찢어놓으면 관악기는
다보록하게 흥을 쌓기 시작한다
얼비친 계곡물 졸음 든 한낮
이산 저산 흥겨운 메아리
오케스트라 경쾌한 선율에 발 담근 채
지그시 두 눈을 내리 감는다
세월에 부대껴온 성장통의 신음도
설움 한 바탕 토해낸 빗방울 소음마저도
까다롭다는 지휘봉 저 끝머리에선
꿈꾸는 새싹들의 배움터일 뿐이다
만고풍상 고령의 느티나무라도
지휘봉 몸짓 저 한 마디에
맥없는 잔 기침이라도 내뱉어야 할 판
임시 거처로 머무르던 홀씨가
외따로운 길을 나서며
날갯짓 화음으로 신세를 갚는다
어린 시절을 기억해낸 노송 하모니카가
콘트라베이스 전나무 맨 끝 뒷자리를 비집으며
저음 속으로 넌지시 끼어들고 있다
여름 한낮
박얼서
잘 여문 옥수숫대가 덩실댄다고
제철 만난 듯 건들거리는 모습
넌 사촌뻘인 수수깡대로구나
여름의 끝
박연준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미(美)
박용하
삶이
한 번뿐이듯
죽움도
한 번뿐이다.
단 한 번 태어난
죽음
기릴 일이다.
연못에서는
잉어가
수면을 깨며
날개를 젓는다
여름이 가고 있다
내게 있는 여름
박은형
저녁이 음악과 겹치는 지점에서 주로 잘 무르는 체질이다. 갈등의 입자를 여러 번 고쳐 썼다
찐 호박잎과 깻잎에 나를 데리고 다니던 재래종 여름이 남아 있다. 잠시 다녀가는 소나기에 새의 항문처럼 재빨리 오그리던 마른 흙냄새 같은 것이다
딸아이는 내 그때보다 주섬주섬 일찍 어른을 배우기라도 한 듯이 머리 색깔을 바꾸고 혼자 공항을 찾아갔다. 잠자리 돋는 공중을 여러 번 올려다보는데 석양이 눈빛을 엎질러 내 등에다 덧댄다. 문밖에 버티던 덩치 좋은 몸을 반쯤 털어 내는 여름. 그리고 해 떨어지는 쪽으로 불쑥 고이려 드는 내 오래된 버릇들
치자꽃 흰 가지를 꺾어 더 늘여 놓는다. 혼자라는 녹슨 버릇
저녁과 섞이려는 낮의 끄트머리가 수도원 입구처럼 낭만적이다. 어쩌자는 건지 눈이 자꾸 머들거린다. 물끄러미 서서 좁아지는 타인들. 물 가장자리를 찾아가 신발을 벗는다. 젖지 않은 돌들이 따뜻하다. 물에서 만들어진 딱딱한 검정들 여기 남아 있지 않을 것들로 생이 넘친다. 거절당하지 않아서 멀리 가는 여름처럼. 내 안의 딱딱한 검정들처럼. 나를 자주 헛딛는 나 혼자처럼
성하와 같이
박이현
비 오는 밤
매미 우네요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그 말 하기가
그리도 어려워
이 빗 속을 나섰나요
땅 속으로 부터 온
익숙한 어두움
밤인들 어떠오
아픈 이름 하나
깊이 간직하려면
낮은 너무나 짧지요
매아미 음음
매아미 음
오래 울어
버려진 울음까지 주워가야지요
그해 여름
박인걸
포위된 빌딩 숲에서
세월의 감각마저 잃었던 날
숨 가쁘게 우는 매미 소리에
잠든 추억이 기지개를 켠다.
고향 언덕에 싸리꽃 흐드러지고
산딸기 대추처럼 익을 때면
앞집 마을 누이는
산나리꽃보다 어여쁘고
연정 달아오른 소년은
여름 밤잠을 설치고
어쩌다 마주치면 날이면
부끄러워 얼굴을 돌리고
꾀꼬리 짝을 짓는데
봉선화꽃 짙어만 가는데
그립다 말 못하면서
속으로만 애태우던 그해 여름
못 잊는 여름
박인걸
붉은 햇살이 마을을 달궈도
밭고랑에 엎드린 마을 아낙네
아기 업은 옥수수도 땀을 흘리고
빳빳하던 볏 잎도 힘을 잃는다.
동네 개들 몰려다니다
긴 혀 빼내 물고 그늘을 찾고
매미도 한껏 노래 부르다
지쳐서 어디론가 깊이 숨었다.
동네 철부지들 고운 냇물에
개구리 개헤엄마냥 즐겁고
저녁 하늘 맴돌던 잠자리 쫓아
분주하게 오가던 제비 떼들아
모깃불 솔솔 타오를 때면
데친 호박잎 쌈에 입이 터지고
어둠이 내려앉는 너른 들판에
반딧불이 껌벅이던 한여름 밤
멍석 위에 누운 푸른 아이는
은하수 위에 꿈을 가득 싣고서
밤새 노 젓는 반달을 따라
도회지 하늘 위를 그리워했다.
뒤뜰에 서 있던 오디나무야
이맘때면 곱게 피던 접시꽃아
달리아꽃처럼 웃던 소녀야
이제는 곰삭은 옛 추억으로
복잡한 기계 소리 고막을 긋고
내뿜는 열기에 숨이 막힐 때면
도회지 삶에 지친 나그네는
그 시절 여름을 못 잊어한다
무더위
박인걸
당신의 뜨거운 포옹에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무장해제당하고 말았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두 팔은 힘이 쭉 빠지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멈출 것만 같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그대 사랑의 에너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처럼 번져나간다.
잔디밭이라도
어느 그늘진 곳이라도
아무 말 없이 드러누울 테니
그대 맘대로 하시라
여름 계곡
박인걸
개울물 골짜기 굽이치는 벽류
숲길 검은 이끼 그윽한 운치
산등성 뭉게구름 한가한 휴식
뻐꾸기 산울림 기나긴 여운
돌아치던 바람 낮잠 자는 정오
쏟아지는 햇볕 돋아나는 새순
바위틈 잡초 무성한 숲길
풀벌레 사운 대는 호젓한 여름
산기슭 야생화 수줍은 미소
애끓는 서러움 핏빛 칡꽃
상처 없이 피었다 지는 원추리
삶의 무게 태산 같던 중압감
일시에 벗어버린 통쾌한 가슴
여름 계곡 납량(納涼)피서
아늑한 고요 가라앉는 마음
잃어버린 본성 일거에 회복되다
여름 산
박인걸
떡갈나무 우람하고
산 벚나무 비탈에 늠름하네
상수리나무 청청하고
소나무 향기 진동하네
꽃 진 자리마다
맺힌 열매 알알이 영글고
보랏빛 싸리꽃
무리 지어 파도치네
참매미 높은 가지에서
숨넘어가게 자지러지고
자주 보던 청솔모 한 마리
제 혼자 곡예 부리네
산이 좋아 산에 오면
산은 나를 가지 말라 하네
한여름 청록 숲은
산길에 나를 주저앉히네
여름 숲에서
박인걸
당신의 기운이 충만한
칠월의 숲속에서
아담의 이비인후의
루하흐를 경험합니다
참 솔이 내뿜는
살균의 효능이나
떡갈나무 잎의
피톤치드가 아닙니다
정수(淨水)된 공기와
아침 같은 고요가
찬란한 햇살과 섞여
한껏 채워지는 편안함보다
더 충만한 생명의 신비가
오염된 영혼을 감싸며
무성(無聲)의 광선으로
세속의 욕망을 녹입니다.
누구도 채워줄 수 없고
이끌 수 없는 힘이
숲속을 걷는 나의 온몸을
강력하게 포옹합니다
여름이 간다
박인걸
귀뚜라미 구슬프게 새벽부터 울고
늦 호박 꽃잎에 주름이 깊다
한낮 내리꽂던 햇살도 풀이 죽었고
매미들만 아직 자지러지게 운다
능소화 끝물도 맥없이 땅에 뒹굴고
배롱나무꽃 피었던 길이 허무하다
일에 미친 도시는 꽃이 지는지도 모른다
차들은 앞만 보고 달리고
간판은 대낮에도 불을 켜고 이목을 끈다
길거리를 왕래하는 자들은
일에 매달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빌딩 안에 갇힌 자들은 비틀거릴 뿐이다
밤알이 가시 송이에서 익어가고
고개 숙인 벼이삭은 참새 습격을 받으며
길가 코스모스가 가을 춤을 추는데
콘크리트만 밟는 사람들은
생명 없는 냄새만 짙게 풍길 뿐이다
새벽이슬은 여름을 지우고
바람은 가을을 열심히 퍼 나른다
내가 걸어간 오솔길에도
여름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혀있다.
여름은 꾸물거리며 더디 간다 했더니
가을바람이 찾아와 새벽 창문을 닫는다
지루했는데 여름이 가니 막상 아쉽다
여름 풍경
박인걸
여름 풀밭위로
개망초 꽃 파도처럼 일렁이고
약탕기 한약 달이듯
섞인 풀꽃 향기 진동한다
밀은 이미 익었고
감자도 영근 알을 토해낸다.
강낭콩 넝쿨 처마까지 뻗고
옥수수 볼기가 통통하다
여름 한낮은 화덕이고
빳빳하던 미루나무도 지쳤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에
산새들은 놀라 달아난다
땀방울이 등솔기로
도랑물처럼 흐를 때면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동해 바다가 마냥 그립다
지나간 여름 이야기
박인걸
구부정한 떡 느릅나무 한 그루
동네 어귀에 세워두고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온 지
어언 반백 년 뒤돌아보니
곰삭은 옛 추억이 영화처럼 스친다.
폭죽처럼 내리던 진달래 살구꽃
자주 감자꽃 파도처럼 일렁이고
보랏빛 콩꽃이 웃을 때면
산 까치들은 식구가 늘어만 간다.
소낙비 대책 없이 책가방을 적셔도
우산 없이 걷던 멀기만 한 버덩 길
가슴이 터질 듯 한여름 숲으로
정겨운 풀벌레들의 노래
저녁녘 앞산에 노을이 들면
황금빛 단풍에 까무러치고
붉은 수수가 고개를 숙일 때면
고추잠자리도 종적을 감추던
첫눈이 내리던 그 날에는
어릴 적 헤어진 소녀를 찾아
먼먼 길이라도 단단히 맘먹고
어디라도 찾아 떠나고 싶었던
또다시 그 동네 여름은 오고
하얀 개망초 그리움에 젓고
노오란 달맞이꽃 서러움에 지고
보랏빛 싸리꽃 흔들릴 때면
흐르던 은하수도 꼬리를 감춘다.
동구 밖 느릅나무는 잘 있으려나
지나간 이야기는 끝이 없는데
한여름
박인걸
한여름 고향 길섶에
산딸기가 작은 누나
유두처럼 여물고
여름 다가도록
짝 못 찾은 참 매미
숨이 넘어간다
열아홉 순정 같은
곱게 핀 산나리 꽃
뒤꿈치 들고 임 기다리나
구름도 한가로운
어머니 품 같은 산촌마을
마냥 평화롭다
한여름 숲에서
박인걸
상수리나무 어우러진 숲에는
뻐꾸기 뚜엣이 긴 여운을 남기고
산나리꽃 외로이 핀 산등성에는
뭉게구름 한가롭게 떠 있다
짙은 색깔의 잎 새들 사이로
여름 햇살이 간신히 비껴들고
지향 없이 달려온 골바람도
여름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이파리 빈틈없이 채워진 숲에는
포만감과 자긍심이 충만하고
싱그러운 생풀들의 짙은 향기가
향수 원액(原額)보다 농농하다
젊은 시절의 활화산 같던 내 꿈은
물푸레나무 진액보다 더 끈적였고
뜨겁게 달구던 청춘의 사랑은
쪽 동백나무 잎보다 더 푸르렀다
숲은 사춘기처럼 풋풋한데
노인은 병든 잎처럼 시들어가니
불끈불끈 일어서는 나뭇가지 아래서
고독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한여름 풍경
박인걸
어젯밤 내린 비에
나무들마다 샤워를 하고
싱그럽게 춤을 춘다
한여름엔 나도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
짙은 향기를 내 뿜는다.
숲속을 헤젓는
산새들의 고운 음색도
싫지 않은 앙상블이다
보랏빛 꽃을 피운 칡넝쿨과
하늘로 솟아오르는
산 나무들의 경쟁도 치열하고
건너편 숲에서 들려오는
매미의 숨넘어가는 절규도
여름에만 듣는 노래다
한여름은 온통
생명 있는 것들로 충만해
산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한여름 열병 가을 그리워하다
박인섭
비가 와서 그럴꺼야
가슴에 멍이 심해지고
머리가 어지럽고
잠도 오지 않고
예민한 신경들도
여름 태양 아래 무명초처럼
늘어져 있으니
한여름이야 늘 힘겨운 거니까
조금 아플 뿐이고
조금 우울할 뿐이고
조금 보고 싶을 뿐이야
비가 지나면 좋아 질꺼야
걷다가 뛰다가 넘어지다가
조금씩만 버리고 사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그래도 열병이 남아 있으면
가을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향긋한 들판의 추수 이야기를 생각하면 웃음이 날 거 같아
깊지 않은 시냇가의 연어 떼를 생각하면 친구가 그리 울 거 같아
낮게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를 생각하면 어릴 적 코스모스가 기억날 거 같아
가을바람에 떠다니는 낙엽을 생각하면 바다가 보일 거 같아
한여름이야 늘 열병이 있기 마련이니까
조금 아픈 건 누구나 견뎌내는 거야
그 긴 여름을 꼬리에 달고
박잎
붉은 개가 되고 싶다고 했다
곰팡이 항구 거미줄
곰팡이 항구 거미줄
부슬부슬 비 오는 날 그는 토막말을 중얼거렸다 사십 세의 밤 항구, 능소화가 길게 그늘을 늘이며 떨어졌었다 나는 활어를 바라보며 백열등 밑을 서성거렸다 변두리 길을 걷다 한 번쯤 싱싱한 물고기 등이 되고 싶은 날 묵호항에 홀로 가곤 했다 그는 긴 여름날엔 개가 되고 싶다고 했다 컹컹, 컹컹 붉은 털 날리며 세상 끝까지 질주하고 싶다 했다 흐릿한 공기가 낯설었다
칼 들개 휠더린
칼 들개 휠더린
한여름 새벽에
박재삼
이십오평(二十五坪)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三十) 몇 도(度)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혹서일기
박재삼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여름
박정미
쏟아지는 햇살에
무더위를 만나고
세찬 비를 만나며
곡식이 익어 갈 때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논두렁길 오가며
개울물에 발 담그고
햇살에 그을린 까만 손으로
순희 영희 모여 앉아
소꿉놀이 공기놀이에
하루해가 저물었지
아득히 먼 곳 추억 속에서
내 이름 불러주던
친구들의 정겨운 목소리가
그리운 여름입니다
밀려오는 여름
박정재
여름이 밀려온다.
숲의 파도가 밀려온다.
세상에는 빈틈이 없어지고
진록의 물결만이 출렁인다.
아카시아 꽃의 흰 물결
사랑 찾아 허둥대는 장미
짝 찾는 산새의 절규만이
여름의 한 끝을 잡고 있다
멀리 바라보는 노안에는
그리움의 그림자만 길어지고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도
풀숲의 파도에 뱃길이 막혔다
어느 여름날의 산책
박정재
접시꽃이 지고
또 장미꽃도 지고
메꽃이 얼굴 내미는
어느 여름날
고향이 그리워
해바리기꽃이 만개한
어느 마을에 갔다
들길을 따라 핀
야생화들이 반기고
길게 고개 내민 잡초가
고개 숙여 반긴다
그 옛날 어릴 적
내가 자라던 고향의 맛
물씬 풍기는 그곳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여름의 하루
박정재
햇살은 뜨거웠습니다.
시원한 바람도 뜨거운 햇살을
막지 못했습니다
옷깃을 활짝 열어젖히고
흐르는 땀을 동무 삼아
삶의 신음을 껴안았습니다.
우거진 수림의 손짓을
오늘처럼 고마움을 느낀 것은
기억 속에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늘의 터널은 천국을 가는 길
겯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몸속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무더운 여름의 기승도
만선의 가을 돛단배의 파도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가고 나면
떠나간 여름의 즐거웠던 추억이
밉지 않은 기억 속에
여름의 더위를 생각하겠지요
여름이 오는 길
박정재
진달래가 뵈지 않고
철쭉과 영산홍이 시들고
모란이 벌린 입을 닫으면
봄은 작별 인사를 한다
은빛 모자 쓴 가로수
길섶에 길게 늘어서서
여름으로 가는 길을 열면
여름이 손을 흔들며 온다
장미꽃이 미소를 짓고
넓은 꽃밭을 차지하면
여름은 점점 익어가고
길손들은 그늘을 찾는다
여름이 지나가는 길
하얀 머리 이팜나무가
은빛 등불을 끄는 날
여름은 발길을 멈춘다
여름 호수에서
박정재
무더운 여름
호수도 무더운 듯
바람을 기다리는구나
무더운 여름
호수 주변의 숲은
그늘 만들기에 바쁘구나
더위를 피해
호수를 찾아왔지만
나무 그늘이 더 좋구나
그늘에 앉아서
실바람에 춤추는
호수의 물결을 보니
무더위도 식혀지는구나
그해 여름은
박종영
그해 여름은,
푸른 하늘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아릿한 7월이 뭉게구름 솔솔 끌어내려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겨드랑이 속으로 숭숭 들락거리는
처서 바람이 섬뜩하게 달라붙을 때도,
탱탱한 8월의 한 톨 푸른 대추가
입안 가득 가을을 채워주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황금빛 들판에서
남루한 옷 걸치고도 즐거워하는,
허수아비 그 빛바랜 주름살이
우리의 서러운 강물이었기에
지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승리임을 안다
여름, 개망초
박종영
너, 살아오면서
푸대접으로 서러워한 적
한두 번이던가
무디고 습습한 바람 스쳐갈 때마다
키 큰 몸뚱이 흔들리며
서러움 툭툭 부서지던 개망초,
그래도 노란꽃 소리없이 피워내고
간결한 향기 시샘하는 여름 한나절,
어느 무서운 낫질에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너, 계란꽃이여,
내 살아온 날의 서러움으로
오늘,
네 허리 붙들고 부끄럽구나
여름에는
박종영
진한 여름이 피어납니다.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노랗게 아니면 파랗게 여름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한적한 밭 귀퉁이에 도라지가 푸른 빛깔 하늘 옷을 입고
줄기마다 다섯 개의 각을 이루며 피는 꽃
파스름한 웃음이 마음에 수를 놓습니다
언덕배기엔 햇살 속을 걸어온 자귀나무가
다정스레 부챗살 꽃술을 포개고
밤이 되자 비밀스레 별빛을 모아
일손 지친 부부의 방에 사랑을 넣어줍니다
여름의 꽃 개망초는 푸대접에 한이 되는 듯,
꽃진 자리 추스려 후덥한 바람을 밀어냅니다
그 옛날 여름이면 식은 보리밥 찬물에 말아
풋고추 집 된장에 찍어 먹던 가난은 가고
이제 평화로운 시절 모두가 얼싸안고 살아가는데
세상 가장 황홀한 빛깔로 으스대는 나무들의 뿌리에
여름은 늘 푸름의 의무를 다그치는 절기라
오늘은 비와 바람의 기억으로 다정한 들꽃 이름
막힘없이 불러보는 것으로도 행운입니다
여름들
박주택
내가 아파야 비로소 내가 된다
내가 아파야 비로소 별이 되고 강이 된다
햇빛 아래서 나무의 긴 지느러미는 반짝이고
덧문을 열고 차를 마시는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가 해변이다, 안면도 혹은 청산도쯤
갈매기는 날고 그 갈매기를 통하여 해변은
다시 태어난다, 저 치솟은 건물들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멀게 만드는가
입술을 찾아서 네거리를 지나는 낮은 노래들 아래
매미가 추방을 두려워하며 울 때 나무는 거만하게
매미 소리를 덮는다, 여름의 수염들, 허공들
수직을 향해 치솟은 미각들, 나는
나의 문집에 여름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추방이 두려운 매미처럼 소유라
부르는 모든 것들에 탑을 쌓고 싶었다, 기억하는가
네거리를 돌아간 여름의 옷자락에는 온갖 소유의
주석이 붙어 있다. 내가 아프니, 나를 열어줘, 햇빛 아래서
상자들은 칭얼거리고 한 세대의 수염이 끝나
끝내 따라 부르지 못하는 노래들은
허공에 긴 뿔을 세운다
여름아 안녕
박진표
매미야 안녕
고추잠자리
코스모스
황금 들녘
허수아비
높고 푸른 하늘아
어서 오렴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심술쟁이 여름아
자연의 섭리 따라
떠날 준비하는구나
네가 있어
오시는 가을이
포동포동 살이 찌고
달님의 함박웃음
넉넉한 한가위
곱게곱게 만들어 주겠지
순리대로 순응하며
불평과 투정 없이
그렇게 흐르며
지혜롭고 낮아지는
우리가 되자
사실
너의 심술로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어
이제 떠난다 하니
아쉬움도 있지만
내년에 다시 만나니
그래도 웃으며 보내마
내년에 만날 때는
심술 적게 부리고
골고루 단비 내려
행복한 농심 만들어 주렴
조금 아쉬울 때
그리움 남겨 놓고
이쁘게 떠나거라
여름아 안녕
우리 서로
그리운 그리움 되자
우리 서로
잊지못할 추억이 되자
여름 어느 날
박진표
내 앞에
사랑하는
내가
앉아 있습니다
조금은
지쳐보이는
내가
나를 바라봅니다
돌아보면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많은 일들이
이별하고 만나며
사라지고 다가왔습니다
가끔은
넘어져 상처도 입고
때로는
아파하며
소리 없이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 나를
보듬고 안아준 사람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 이었습니다
원망도 투정도
고통도 아픔도
친구처럼 따라다닌 외로움도
속으로 삭여가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슬처럼 세상에 와
바람같이 떠나는
미워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중한
우리들의 삶 입니다
나는
들꽃처럼 살아도
삭풍이 불어도
향기 품은 꽃잎처럼
순간순간 하루를
천년같이 마지막처럼
삶의 노래 부르며
보고프고 그리운
가슴시린
그런 따스한 추억으로
그리 그렇게 살고픕니다
싱그런 초록의 노래로 말입니다
여름이 오는 소리
박진표
삶에 지친
등이 굽은 하루가
꼬부랑 할멈 되어
고단한 몸 쉴 곳을 찿는
같은 오늘이지만
어제였고 또 내일이 될 오늘
자유로운 바람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허기진 영혼이 먼지처럼 떠돌 때
그곳에도 희망은 피고 있겠지
가는 4월이 아쉬워
라일락 향기가 앙탈을 부린다
바람이 전해주는
가까이 오고 있는
여름의 발자국 소리가
벌써부터 등과 이마에
땀을 타고 내린다
급한 여름이
벌써 와 투정을 한다
여름 풍경
박진표
매미의
애타는 울음소리
뜨거운 여름
태양을 잠들게 하고
이마에 맺힌
농부의 정직한 땀방울
익어가는 여름
농심의
건강한 꽃을 피운다
떠도는 구름은
파도 춤추는
여름바다 깨워
축제의 파티를 열고
여름은
여름은
빠알간 수박처럼
빨갛게 익어간다
길가의 어린 코스모스
빨간 고추 잠자리
가을을 재촉하고
허수아비 노래하는
7월의 끝자락 여름은
노랗게
노랗게
푸른 옷 갈아입고
조금씩
조금씩
물들어 간다
여름은 어디에 있나
박춘석
봉투 속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씨앗을 어디에다 심어서 꽃을 피울까?
나에게 일이란 때에 맞춰 꽃밭에 꽃을 심는 일
누군가 비닐하우스는 신이 사라진 없는 계절이라고 한다
그곳은 증거가 인멸된 투명한 꽃이 무더기로 핀다고 한다
여름도 내겐 없는 계절이긴 매한가지라고 하니
두 개의 씨앗이 꽃이 피는 때를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한다
여름이 꽃을 피우는 힘을 가졌다면 꽃을 심는 나는 신의 힘을 가졌을 거라고 한다
어쩌면 미래, 내가 찾는 여름과 내가 피울 꽃은 바위처럼 견고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마을을 찾아가듯 영원한 꽃, 영원한 여름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액자 속 같은 내일과 조금 작은 액자 속 같은 모래 속에
심을 꽃씨를 미지의 꽃으로 분류해야겠다
봉투 속 숨겨둔 비밀이 꽃을 말할 때까지가
여름을 찾는 일이고 꽃의 때를 찾는 일일 것이다
아직 동어반복 속에 살고 있다.
내 몫의 여름을 만나지 못한 나는
날마다 겸손해지고 있다.
아들과 딸 딱 두 송이 꽃을 피울
여름이 필요한 나는
여름 속 사계
박태강
치악산 곧음재 골짝
원시림 늘어선 푸르른 향기
물 타고 흐르면서 부른다
곧음재 아래 해발 550m에
여름에 사계를 함께 느끼는
부곡리 마을
아침이면 물안개 피어 자욱하고
낮이면 무서운 여름 햇살
밤이면 장작불 피워 캠프파이어
겨울 향수 느끼는 곳
평상에 누워 하늘 보면
수많은 여름 자리 별들이 속삭이고
흐르는 개울물 소리
옛 정취 일으켜
폭포 가진 깊은 용소
푸른 하늘 품었고
어름치가 떼 지어 춤을 춘다
노오란 나리꽃 이름 모를 붉은 꽃
그늘에서 고개 들고 구경하는
이곳이 무릉도원 아니런가
여름날의 하루
박태원
산속을 빗어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속에 발을 담구고
수박 한입 베어 무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윗도리를 벗어 놓고
다이빙하는 아이들
빙빙 돌아 솟는 물이
사이다로 착각 되어지고
발을 동동 걷고 물속에 들어가
고디를 주우며 누운 거울을 보니
물속에 미인이 나를 봅니다
석양에 사람보다 긴 그림자는
하루해의 아쉬움을 남기고
갈 길을 재촉하는 나에게
눈길 주는 돌 하나 주워
수석될까 하여 이쪽저쪽 바라봅니다
여름 바다로의 비상
박태원
바다로
나가보자
일상생활의
모든 나래
고이 접어둔채
인생의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
인생의 무게로 느껴질때
우리의 시름을
파도에 던지고
모래위에 동심의 추억을
낯선곳에서
하루해가 저물어가고
지평선에 그림자 길어져
저녁 놀이 붉게 타 오를때
소라껍질 주워 연가를 불러보자
갈매기의 날개짓이 우릴부른다
오늘은 그리운 바다로의
일탈이다
장마
박태원
계곡을 휘감아 돌아
바쁘게 길을 재촉하는 너
무엇이 그리도 좋아
덩실덩실 춤을 추며
흔한 눈인사도 나누지 않고 떠나가는가
며칠 전만 해도 너를 기다렸는데
이젠 너를 보내고 싶다
네가 짓궂은 짓 안 하고
고이 머물러 주는 것 고마운 일
하지만
구름 속에 해바라기 얼굴을
기다리는 탐스러운 수국은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으니
얘야 미안하구나
몇 날이 지나 다시 내릴 때
거친 방망이질 해대지 말고
수줍은 아가씨처럼 고운 잎새에
사뿐히 내려앉아 꽃잎을 어루만져 주다가
방긋 고운 미소 띄우며 인사해주고
길 떠나면 얼굴마다 환한 웃음꽃이어라
사탕처럼 천천히 녹는 여름
박해람
손가락 끝에서 먼저 물드는 것들, 충분한 염료가 여름 내내 펄펄 끓고 있다
깊어서 닿자마자 물드는 색
여름이 모든 열매들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후두둑, 진한 색깔들이 익어가고 있다
모든 열매들은
그 몸의 팔랑거리는 그늘 색을 닮아간다
뽕나무는 제 그늘을 닮아 가려 했을 것이다
검고 푸른 것들이 매달려
검게 바람을 익히고 있다
누구나 제 그늘을 한 번쯤 내려다본다.
그러다 후드둑 떨어져 내리는 지경이 되어서야
제 색깔을 알아차린다
물들어 가는 시간
한차례 다 털어 낸 색깔들
스스스 흔들려 올려다보는 뽕나무
진하게 익었다는 색
가장 끝과 닮았다는 색
올려다보는 이 한 몸과
먼저 깊어가는 생각의 끝이 물들어 가고 있다
물들어 가고자 하는 것들 단맛에 취해 호들갑이다
사탕처럼 천천히 녹아
꿀꺽, 해보지도 못한 한 생이 넘어간다
엄살은 오디처럼 검은 색이다
여름날의 팡파르
박해옥
환장하게 볕 좋은 오후 간식 때쯤
낙조 2길 정자나무에서 낙성식이 있으니
근동에 주민들은 다 모이라고 들뜬 목청으로 깍깍대는 방송
궁금증에 달려가 나무아래 서니
덧개덧게 에둘린 잎사귀에 가려 잔칫집은 보이질 않고
쏟아져 내리는 햇발 침에 눈만 시린데
구경꾼으로 나온 바람이 기합을 한 토막 넣자
그제야 엿보이는 비밀의 城
언제 저렇게 바지런을 떨었을까
석가래 주춧돌은 어떻게 날랐을까
하늘 쪽으로 채광창 들이고 문턱을 낮게 낸 까치집 한 채가 덩그랗다
선한 이웃을 만난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아롱이다롱이 줄줄이 낳아 깨볶으며 살라고 한 덕담 해주고
낙성식 술 한 잔 얻어먹고 돌아서는 길
둥지를 품은 젊은 엄마들이 벤치에 졸졸이 나앉아
까치처럼 까륵대며 말바람에 신명이 났다
콩나물 대가리 같은 꼬맹이들이 노란 셔틀에서 콩콩 뛰어 내려
어미의 날갯죽지로 깃드니
시샘이 난 이파리 몇이 색종이 가루처럼 날리는
정자나무 쉼터
여름에 묻는다
박현영
뜨거운 태양을 품고 찾아와
너는 수많은 꽃들을 피워냈지
밤하늘 꽃향기 뿌려놓고
은하수 흐르게 했던 여름
멀어져 가는 매미 소리
나뭇잎 새들을 춤추게 한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바닷가
여름에 묻는다
또다시 올 거지
파도가 여름을 안고 밀려간다
비 오는 날 여름이면
박희자
아버지께서
넝쿨마다 열린 애호박 몇 덩이 따오면
부엌에는 금세 손과 마음이 즐거운
어머니 뒷모습이 있었다
기름 두른 무쇠솥뚜껑에서
보드라운 애호박 익는 냄새가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 담을 넘을 때
아홉 식구 한자리서 웃음 마주 보며
어머니 사랑을 안으로 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술 한 잔 못하는 어머니는
보름달 닮은 애호박전을 접시에 올려놓고
보름달처럼 둥근 지어미 사랑을
빈 술잔에 둥글둥글 채웠다
나는 비 오는 여름날이면
막걸리와 애호박 사는 버릇이 있다
어머니처럼 둥근 지어미의 마음을
아직도 닮고 싶은지
여름이 간다
박희자
불을 지핀다
바람 지나갈 틈 없이
두꺼운 구름 속에서
솟는 수증기가
안개비처럼 땅을 건너고
땀방울은 굵은 소나기처럼
후드득후드득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밤낮없이
줄곧 목청 돋우는
매미에게는 매달림의 짧은 계절
해 지고
깊은 어둠 속
별이 뜨거움에 몸살이다
모두가 계절을 당기기 위한
각각의 몫만큼
순리에 응해 가는 시간
도시를 둘러싼 뜨거움이
콘크리트 껌딱지를 녹인다
차오르면 기울 듯
바람 이름도
곧 바뀌겠지
땡볕 쏟아지는 날
박희홍
아침 일찍 길을 나서려는데
간밤에 하늘에 무슨 사단 있었나
험상궂게 인상을 잔뜩 찌푸려 잠포록해
하루를 어찌 보내야 할까 착잡한데
한나절이 지난 뒤에서야
일을 끝내고서 보니
살포시 붉은 웃음 웃기에
마음이 풀렸나 했더니
앙금이 가시지 않았을까
불볕더위를 몰고 와
비지 땀투성이를 만들어
맥없이 허덕거리게 하는데
바람이 보기에 쩔쩔매는 모습이
꽤 안쓰러웠나
한숨 돌릴 수 있게
흰 차일 구름을 펼쳐주니
그 덕에 여름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여름날의 단상
박희홍
효자라고 하더니
고구마순 나물에
한 양푼 밥을 비벼
어머니께 한 수저
나는 입 찢어져라
고봉으로 먹는다
배고픔을 이겨낼
그런 배짱 없지만
마냥 옆에 있으니
어머니가 좋아해
그래서 효자라니
보는 눈이 다르다
한여름
박희홍
잠자리 한 마리
뙤약볕이 더워
물 위를 맴돌며
가슴팍 적신다
구름 흘러가며
주고 간 그늘에
잠자리 앉아서
졸졸 졸고 있다
그늘 밖이 더워
바람 기다려도
한 점 가뭇없는
바람에 속 탄다
* 가뭇없다 : 전혀 안 보여 찾을 길이 없다
여름 꼬리
배갑병
아쉬워
꼬릴 빼지 못하고
잡아달라 돌아보는 눈,
지난 수개월 사랑해서
그리도 기억하라 해서
뜨거운 정을 쌓은 것이
이제는 가야 하지만
조금만 더
너를 품고 파서
밀려 밀려 몸통 다 빠지고
사랑하는 마음 헤지고 싶지 않아
겨우 꼬리만 걸쳤구려
여름나기
배귀선
대지 위 푸르름을 태워버릴 듯
숨 쉬는 순간에도 뜨거움이
목젖을 타고 흐른다
열기로 가득한 하늘 한가운데
구멍 난 듯
세찬 소낙비 퍼부어 대고
맑음과 흐림
오늘만 벌써 몇 차례를 반복하는지
여름나기란
아파트 앞 장미수퍼 영희 엄마의 굴곡진 삶처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가파른 시간들인가
여름 비행
배수연
여기 구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하얀 초파리 떼
비행기 비상문을 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주인 없이 흘러가는 덫
신과 악마의 비밀을 닦아내던 행주
종종 쉰내를 맡는 사람이 있다
매일 매일 정류장에서 새치기를 하는 사람
그는 마치 긴 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지나가는 그를 홱 꼬집을 수 없어서
나는 구름을 더 올린다
구름 속엔 눈먼 초파리가 아주 많지
여름마다 박수를 치며
초파리 잡는 요령을 익히지만
그건 모두 덫
여기 굉음을 내는 덫이 있다
여름의 집
배수연
여름의 집, 여름의 집
대문을 열면
코끼리 울음을 길게 우는 푸른 경첩
여름의 밤, 여름의 밤
식탁의 초들이 흰 여우처럼 목을 위로 길게 빼는
아아
여름의 밤, 여름의 밤
아브라함의 별처럼 미래의 편지들은 모두
너를 위해 쓰이고
우리는 자손이 없어도 행복하지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줄게
아무리 비워도 허전하지 않고
나를 다 받고도 너는
나를 닮진 않지
너는 결국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를 숨겨 놓았지만
우우우우
원숭이들은
밤하늘을 보고 아름다움을 알까
원숭이들은 서로의 목덜미에
불을 가져다 대는 놀라움과 슬픔을 알까
여름밤의 폭죽을 봐
울음이 결국 우주의 먼지가 되는 것을
별들은 폭죽에 눈이 멀어
검은 화약 덩어리가 되었어
너의 목에 떨어진 불덩이를
장마는 처마에서 기다리고
나는 밤새 장마를 받아 적어
아무리 크게 읽어도
너는 빗소리밖에 듣질 못하고
그래도 상관없지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여름의 더위와 부패 속에서
나뭇잎들은 잎맥을 열어
초록을 흘리는
여름의 집, 여름의 집
여름의 귀
배한봉
곰산 어디쯤서 샘물 하나가
실낱 물줄기 만들었을 것이다
그 물줄기가 조그마한 돌들의 이마를 씻어주고
어린 풀의 입술 적셔주며 바다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똑같은 일을
신라시대보다 더 전부터 받아주고 있는
소사천의 이야기 알든 모르든
송사리 떼만 봐도 깔깔대는 아이들, 예쁘다
개구리자리 노랑 꽃 이름 알든 모르든
쫑알쫑알 한참 들여다보는 아이들, 예쁘다
우리나라 산이 되고 바다 될 아이들에게
예쁘다는 이 똑같은 말을
단군할아버지 시대보다도 더 전부터
처음 하는 인사마냥 하고 있는 소사천 물소리의
생기발랄 이야기 다 들어주는
너무 시원해서 투명한 여름의 귀
여름과 가을의 만남
배혜경
여름과 가을이 만난
기쁨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리고 있나 봐요
찌는 듯한 더위도
가을의 큰 배려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함께
시원하게 바뀌었어요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환상의 조화로움 속에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만남
그대는 가을
나는 여름이에요
하(夏)
백석
짝새가 발부리에서 날은 논두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먹었다
게 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늪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가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여름날
백설부
따가운 햇살 한가운데
섬처럼 서 있는
창백한 슬픈 사람들
여름숲의 울창함으로
격정을 인내하고
지금은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그리울 뿐임을
얄팍한 시간들이
차가운 향기로 날린다
삶의 언저리에서
바람 끝자락이라도
질척거리며 잡고 싶다
여름날은 왜 이리
허기가 지는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인다
여름 아침
백설부
눈꺼풀이 무거운 아침이면
스르르 최면을 건다.
오늘도 무사히 저물길
출근길에 장난스레
입을 맞추고는
빙그레 웃는 그이의 미소가
잠깐이지만 더위를 날린다
헉헉 거리는 시간 속에서
쓰라린 언어가 빚어낸
보랏빛 맥문동은
너무 신비롭다
여름에게
백설부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리도 치열하게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려고 애쓰시는가
지나고 나면 다 헛되고
헛된 일인 것을
이젠 조용히
자신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소중하게 아끼시게나
한 계절을 그렇게
온전히 풍미하고도
무슨 미련이
그리 많으신가
심장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것을
여름 한나절
백설부
하루의 빈 들녘엔
새벽바람이 문지방을
넘나들며 시작된다
여름 한나절엔
세상을 초월한
눈으로 허공에
몸을 기대는
내가 있고
화려한 행렬의
백일홍의 삶도 있다
눈끝의 신선함에서
어진 마음이 일렁인다
여러 개의 표정들이
두루두루 평화롭기를
기도하며 보내보련다
여름 향기
백설부
채송화가 돌담 밑에서
올망졸망 누굴 기다리며
곱게 피었을까
마당 안까지 개망초가
마실 왔다 가고
정오의 햇살 안고
오수를 즐기는
달맞이꽃의 늘어진
끄덕임이 정겹다
보도블럭 위를
정겨운 비둘기 한쌍이
쫑쫑거리며 거닐고
쑥대머리 축축
늘어뜨리고 알알이
영글어가는 옥수수가
뙤약볕에도 우쭐하다
담장 밖으로
임 그리는 맘
마지막까지 영원한
능소화가 애달프다
지루한 여름
백설부
무거운 눈꺼풀로
거리에 나서면
건조한 언어들이
늘어진 재즈 공연을 한다
축축 엉켜가는
멍한 영혼들은
아이스커피 한 잔에
제자리를 찾는다
여름 한낮 텃밭
백승운
응달에서 졸고있는 나른함이
바람에게 좀더 새게 돌려봐요
애원을 하는 여름
바람도 땀 뻘뻘 흘리며
나뭇가지 밑에서 어슬렁어슬렁
쉬면서 돌릴까 말까
보름달 같은 황금 품은
호박잎 어깨가 축 처져
맥아리 없이 헉헉대는데
청춘 같은 상추 야들야들
속살 드러내고 날 잡숴
물오른 오이도 불쑥 자랑질이다
한여름
백우선
나무는 저 수많은 나뭇잎으로 태양을 일일이 통째로 빨아들이며 타오르고 있다
나는 이 부풀은 다면체 거울의 가슴으로 태양을 가득 품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기억해야 할 여름
백원기
섭씨 사십 도를 바라보는 더위
이천십팔 년 칠월은
재앙의 달이다
무심했던 것이 그리워진다
흘러가는 구름과
귀찮던 빗방울
그리고 나그네 바람
한 번이라도 붙잡고
눈인사할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더위
위대한 창조자의 힘이기에
넘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세상 사람아
이 무더위에 눈을 감고
자성의 시간을 갖자
내 생각과 언행이
과연 옳은 것인가
여름 고개
백원기
아침 해가 뜨면 서산에 지고
불던 바람도 싫증 나면 멈추던데
더위는 여간해서 수그러들 줄 모른다
오랜 가뭄에 기다리던 비 오면
이젠 물러가려나 싶지만
틈틈이 쪼여주는 불기운이 더 지겹다
시원한 산바람 강바람 불면
더위가 멈추려나 눈여겨보면
불청객 무더위는 훌훌 옷까지 벗기려 든다
더위가 달려들 때마다 그늘에 숨고
다리 밑에 숨었다가 숲 속에 숨어들고
때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
에어컨에 선풍기에 시원한 바람
냉장고 얼음물에 수박이어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여름 더위
겨우 중복 지났으니 입추가 되어서야
넘을 듯 말 듯 하던 여름 고개
어슬렁어슬렁 마지못해 넘어가려나 보다
이런 여름
백원기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세상
예전엔 생각도 못 해봤지 정말
비 오다 그치면 서쪽 하늘에 무지개 뜨고
밤이면 영롱한 별빛 아래
풀벌레 울음소리 정답게 들려오면
모기 짚불 연기는 호박넝쿨 지붕 위로
곱게 피어올랐다
울먹울먹 구름 하늘
언제 비가 쏟아질까 알 수 없는데
지난 비에 무너진 둑과 잠긴 농경지가 안타깝다
밟고 다니는 땅과 보이는 산천이 불안하고
난데없는 바이러스 지뢰 무서워
조심조심 살피며 걷는 세상
가다가 무얼 내밀는지 알 수 없는
이런 여름은 처음이야
여름 시
백은선
두 손은 물속에 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새를 모르는 아이들이 새, 하고 말할 때.
두 손은 물속에 있어서.
먼 나라로 엽서를 썼다.
몇 시간이나 걸었어. 검은 얼굴들이 빈터를 가득 메울 때까지 가만히 서서. 목소리들이 하나의 단어를 끝없이 꺼내 공중에 풀어놓는 것을 지켜봤어. 이상한 밤이 밤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고, 빼곡한 얼굴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모르는 마음을 내내 가졌어
해안가에서 그가 두 손을 펼쳐봐, 손바닥을 위로 하고. 그래. 너는 불과 함께할 수 없구나, 할 때. 눈이 큰 아이들은 원을 그리며 서로를 때리는 춤을 췄다. 점점 더 세게 서로를 때리며. 이 영화를 열 번 봤어. 대사를 다 외웠어. 소포에 든 것은 새끼손가락이지. 그는 분홍리본 상자를 가리키며 웃는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쳤다.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내내 누워있었고 가끔씩 마 서로를 바라봤다. 그거 알아? 광장에 있는 나무는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우기 때 죽은 사람들은 거기에 묻혔어. 이제 정확한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
물속에 잠긴 커다란 나무.
거짓과 거짓, 진실과 진실을 이어 붙인 커다란 목관.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
야윈 개들이 눈을 빛내며 컹컹 짖을 때
온종일 벽을 긁고 낮게 엎드려 앞발을, 꼬리를 숨길 때
예감은 창백하고 밤은 길어서
나는 창을 열고 바다 끝의 섬을 봤다. 섬은 커다란 짐승의 귀 끝 같아, 물이 다 사라지면 감긴 문을 뜰 것 같았다. 저긴 아무도 안 가. 천둥 신의 어머니가 그곳에 있어. 그분은 인간과 짐승의 피와 살을 빚어 빛을 만들어. 바다와 기원의 상징이야
이제 달이 돌아눕는 시간
두 손을 부러뜨리고 싶다
아프다, 아프다 하며 가장 옆에 있는 신과 가장 투명한 신이 서로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나는 이곳의 사람들에게 영화를 만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건 옛날에 사라진 왕국에 대한 이야기야. 왕국이 생겨날 때의 이야기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여왕이 되고 목이 잘려 죽기까지의 이야기야
너를 꺼내고 싶다
눈을 처음 본 아이들이 고개를 들어 아, 하고 혀를 내밀 때
언덕 너머까지 달려가 사라져버릴 때.
두 손은 꽁꽁 얼어 있을 때
나무 아래서 올려다본 벌집
그것이 네 얼굴이었다
가지 마 여름
백종오
편의점 김밥 한 줄 먹고
밥이 너무 질어
오빠
너무 더워
빨리 가을이 왔으면
아니야
선풍기 안고 있으면 시원해
가을이 오면은
거꾸로 터널을 빠져나왔던 그 날이 싫고
시한부 삶 그 여자
3개월 조금 남았다는데
뜨는 해
지는 해
얼마나 아프겠어
에어컨은 한 번도 돌리지 못했다!
눈치 보여서
여름이 오면
변종윤
하늘엔 먹구름 연기처럼 피어나고
들녘에 햇살은 비친 풀잎들 구워진 오징어 되고
한줄기 소나기라도 온다면
푸른 새싹 파랗게 일어날 텐데
여린 나뭇가지 빨갛게 타들어 가니
나와 무관한 일들에 내 마음은 허탈할까?
여름이면 물장구치고 놀던 친구들 하나둘 그립다
가뭄에 말라버린 개울가엔
고기 떼죽음에 마음이 아프다.
온난화의 현상이 지구를 태우고 있다
당신을 보내야 하는 것은
단지 슬픔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에 더욱더 서럽습니다.
보내야 한다는 아픔보다는 잊어야 하는 날들이 너무 길어서
살아가야 할 긴 날들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라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공허함에 눌려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름
변용환
오가는 이 없는 숲속에 홀로 앉아
구멍 난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노라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도망을 가고
짝 찾는 매미노래 소리 골짜기가 시끌시끌하다.
참매미 애매미 말매미 털매미
반달 울음을 위해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보낸 그들의 울음에
흐르는 땀이 멈추었노라
삶의 쓰라림을 잊었노라
떠나기 싫어 발버둥치는
더위가 애처로워라
더위야 이제 한 바락 물러나렴.
너의 그 열기 붙잡을 수 없지만
내 뜨거운 가슴에 담아 놓았다가
땡 초 바람에 고드름이 살찔 때
우리 님 시린 손 감싸주리라
가는 여름 끝에서
변종윤
여름이 앞서듯 다가선다.
산새가 울부짖고
녹음이 짙은 한낮의 울음들
시끌시끌했던 짙푸른 바다
여기저기 모여 흥겨운 울음들
지는 햇살 따갑게 내려
사람들의 얼굴 굽던 날도
이젠 저만큼 밀려가는
파도처럼 올여름이 멀어져간다.
어느 사이 귀뚜라미 울고
치매 걸린 코스모스 피어
가을을 기다리는 오후에
여름 한국화
서규정
이웃 공장에도
바람이 인다
뜨겁게 돌아 나온다
입천정이 뜯어지고
불자동차들이 쏟아져나와
두리번거린다
투쟁 투쟁 단결 투쟁
붉은 글씨의 장미꽃이 담벼락을 타고
도망나온다
표정 놓친 늙은 공원들
그 옆에 기대선 전신주
이번 여름 우리들의 죄명은
폭염주의
알몸뚱이의 아이스바
여름이 말을 걸면
서대범
기억의 저편
꽃잎 밟고 오시는 님
그리 급히 빗살처럼 오셨나요.
지난가을 매몰차게
숨소리 흔적 없이 가신 님
저리 반짝이며 소리치면
비박 터 잠자리
밤하늘 개똥벌레 옆을 난다.
하나둘 몇 마리가
사십 년 전 기억 속에
아프다
비뚤어진 선을 긋다 지쳐
지금 흐릿하게
우수수 떨어진 소리
멀리 느릿 떠오른 발광(發光)
울음보다 슬픈 변동(變動)
반딧불이
도둑이 든 여름
서덕준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 올 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설레는 초여름
서문인
철렁이는 초여름
흐르는 강가에 서면
빙어같이 튀어 솟는
그대 향한 그리움
돌아서면
그렇게 귀엽던 당신
가시밭 덩굴장미로 피었으니
어여뻐 죽겠네
죽겠네
내 마음 쓸어
편지를 쓰면
펄펄 뛰는 내 가슴
옛 추억 속에
포옹하네
여름 우포를 읽다
서숙희
세상의 뭇 생명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품안의 모든 것들 순하고 둥글구나
저 여자,
필시 깊고 너른 자궁을 가졌으리
앉아서 누워서
혹은 선 채로 몸을 내린
세상에서 가장 편한 저 서식의 몸짓들
그윽히 품어 안으니
젖은 절로 푸르게 돌아
칠십 만평이나 되는 거대한 젖가슴은
일억 사천만년 동안 마른 적 없었다지
도무지 읽어내지 못하겠네
저 서사, 지구의 자궁
여름 낮
서정숙
꽃들이 덥다고
"아이 더워" 졸라대니까
나비가
나풀나풀 부채질해요
새들이 덥다고
"아이 더워" 졸라대니까
나뭇잎이
살랑살랑 부채질해요
나무
서정우
바람 한 점 없는 중복 더위에 불볕 가득한 운동장에 서 보셨나요? 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무작위로 내리꽂는 폭서. 때 맞추어 아래로부터 푹푹 쪄오르는 지열. 그래요. 현기증 같은 아지랑이가 온 지천에서 스멀스멀 자라 내게로만 밀려드는
수천수만 개의 모공에서 하염없이 묻어나온 신음 같은 땀방울이 골골이 흘러 온몸 적십니다. 정신이 아뜩해지고 나는 문득 푸른 동산에 서 있습니다. 잎새 가득한 건강한 나무, 잎새 흔들어 청량한 바람 동산에 뿌리는, 눈이 큰 짐승과 詩보다 아름다운 아기가 소리 없이 웃는
그러나 그뿐, 고개 들면 나는 땡볕 가득한 운동장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한 자리 지키다가 다른 자리로 지정해 옮겨가는 것.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진대. 세상에! 나는 이제 이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일상에 붙박혀 있는 것입니다. 선택했었고, 오랜 나날 지켜왔던. 이제는 '나'보다 더 '나'를 대신하는
자리. 하염없이 서 있는.
내 발밑에서 뿌리가 내리고 있습니다. 시나브로 시작된 이 작업은 발바닥 언저리 핏줄과 신경을 땅 밑으로 끌어내립니다. 접지 된 몸은 뜻과는 상관없이 그 자리 버팁니다. 멍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운동장엔 나무들 저마다의 生으로 드문드문 붙박혀 있습니다. 더러는 푸른 잎 피워 올리지만
나무들. 마음이 탈진되어도 수백 번도 더 탈진되었을
여름날 오후
서정윤
굵은 빗방울이 내린 지도 한참 되었고
잠시 햇살로 목덜미 따가운 오후
나는 한 그늘을 찾아
가물한 산자락을 밟고 오는 바람을
겨드랑이에 낀 채
키 큰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여름은 무거운 눈꺼풀 위에
잠자리 날개로 내려앉는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들이
나뭇잎 손등에 반짝이고
내내 지친 아낙의 거친 손길
잊으려 부르는 노래도
지치기는 매한가지
긴 그림자와 함께 돌아서는 언덕길
편히 보낼 날은, 달력에도 없지만
아직 뜨거운 기운이 남아
발길 무겁게 하는
여름날 오후는 길기만 하다
여름 한낮
서정홍
"나무실 마을 어르신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지금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공소에 사시는 윤행도 신부님이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씩 대접해 드린답니다."
이장님이 마을방송을 하자마자
나무실 마을 어르신들
정자나무 아래 모여 팥빙수를 드신다
"한 그릇 더 묵읍시다. 더 있소?"
"아, 여기 달달한 거 좀 더 넣어 줄랑교?"
"허어, 참, 팔십 넘도록 이런 거 첨 묵어 보네."
"내가 무슨 복이 많아서 이래 맛있는 거 묵나."
"오래 살다 보이 별걸 다 묵어 보네."
"먹긴 잘 먹는데 누구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노?
하느님한테 해야 하나, 신부님한테 해야 하나?"
마을 어르신들 잘 드시면서 한마디씩 하는데
요즘 들어 자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새터 할머니는 혼잣말로 자꾸 중얼거리신다.
"내사 마 이름도 모르고 묵는다.
내사 마 이름도 모르고 묵는다."
내가 아무리 팥빙수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태어나서 처음 드시는 팥빙수
이름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시원한 팥빙수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처럼 듣기 좋은
여름 한낮에
올해 여름
석옥자
여름만 즐기는 매미는
나뭇가지를 타며 열심히 노래한다.
아무리 코로나가 위험을 줘도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
식사한 다음 후식으로
더운 여름을 먹기 위해
스타벅스 찻집을 갔다
먹음직한 팥빙수 4인분이
유리그릇에 수북이 담겨
탁자에 앉아 유혹한다.
투명한 유리그릇은
사랑과 만남을 혼합해서
주걱은 열심히 골고루
휘휘 저어 섞는다
앞접시에 담아서 더위를 식히며
더운 올해 여름이 제법 체온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빙설도 녹고
애틋한 내 사랑도
주걱 끝에 녹아내린다
여름은 그렇게 갔다
성명희
누가 내 등을 두드린다
누군지 알기에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깨를 두드린다
알기에 눈길 주지 않는다
팔꿈치를 당긴다
알기에 뿌리쳤다
그 바람에 넘어진다
너무 거부하면 이렇게 되나 보다
엎어져서 고개 들어 보았다
지천명
어쩌란 말인가
여름 단풍
성백군
폭염을 피해
나무 그늘 안으로 드는데
먼저 와 풀 위에 누워있는
나뭇잎 한 잎
곱다
단풍들었구나
한여름에도 단풍이 드는구나
여름뿐인 하와이에도 단풍이 있구나
맨날 초록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너처럼 죽을 때는
고운 모습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신선한 충격으로
선한 일이 변종으로 해석되는 세상에서
여름 단풍 한 잎 갈잎 사이에서
불을 뿜고 있다
냄새도 열기도 없지만
자신을 불사르는 나뭇잎
귀하여, 두 손으로 받들고
스승처럼 책갈피 속으로 모신다
여름 보내기
성백군
8월도 끝이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시원섭섭합니다
가뭄, 장마, 불볕더위에
진이 다 빠지고
폭풍에 상처까지……, 그때는
여름이 미워 죽겠었는데
시간은 막히지 않아
한 철 같이 살다 보니, 그 사이
싸움은 무디어지고 미움도 그런대로 정이 들고
겨우 마음 정리되는데
벌써, 처서라고
굳이 가겠다고 하시니
바닷가 해수욕장엔 발자국만 스산하고
계곡 너럭바위 위 널린 수영복들은
주인 잃은 슬픔에 버림받은 설움까지 겹칩니다
여름 향기
성백군
여름 숲은 초록 일색이다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출렁이는 풀과 나무
썩여서 숲이고 얽혀서 한 몸이다
소리 없다고 울림이 없으랴
계속 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스트레스가 빠져나온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내 마음 가벼워져 파도 위 거품처럼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초록 울림을 오르내린다
더는
클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여름은 성장의 절정기라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울 만한데
저들은 자연이라 그런지 자연스러워
인위적인 나는 저들의 삶이 부럽다
저 여름 숲,
풀과 나무의 삶은 상생의 땀 냄새다
싱그러운 여름 향기에 취하여
숲속에 몸을 누이고 한숨 자고 나오면
내 몸에서도 초록 냄새가 날까
여름 궁전
성영희
폐허를 두들겨 빨면 저렇게 흰 바람 펄럭이는 궁전이 된다. 매일 바람으로 축조되었다 저녁이면 무너지는 여름 궁전은 물에 뿌리를 둔 가업만이 지을 수 있다. 젖은 것들이 마르는 계단, 셔츠는 그늘을 입고 펄럭인다
몸을 씻으면 죄가 씻긴다는 갠지스강 기슭에서 두들겨 맞다 이내 성자처럼 깨끗해지는 옷들, 어제 죽은 이의 사리*를 계단에 펼쳐놓고 내일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헹구는 도비왈라들, 거품 빠진 신분들이 명상처럼 마르고 있다
이 강에서 고요한 것은 연기뿐,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밤이면 강물은 다시 태엽을 감고 소리를 잃은 것들은 물결이 된다. 화장장의 연기도 무시로 강물 따라 흐른다.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섞여 흐르는 이곳에 오늘이 있고 산 자만이 빤 옷을 육신에 걸칠 수 있는 내일이 있다
물소리를 베고 잠들면 잠결에도 물이 흐를까, 사내들의 팔뚝은 강기슭을 닮았다. 끊임없이 궁전을 세우지만 그 안에 들 수 없는 불가촉 타지마할, 하얗게 펄럭이는 그들만의 궁전이다
* 인도의 여자 의상
여름나기
손병흥
땀방울처럼 허공 가르는 계절의 뜨락
태양을 가득 품고선 날 선 햇살 가슴에
점차 허물어져 가는 그늘진 등골 사이로
신기루같이 그리움 가득해진 넓은 바다
마구 추스르고픈 팽팽해진 몸과 마음
가만히 있어도 못내 갈증으로 지쳐가는
흔들림 없는 풍경 속 어긋난 조화의 부활
부채로 후려치고픈 하늘 품은 구름 떼 옷자락
가지런히 빗질해놓은 맞물린 시간처럼
어느새 무등 태워 버린 무수한 세월들이
자꾸만 불거져 나올 애틋해진 한줄기 다짐
흐느적거릴 고뇌마저 서러워 외로워지는 나날
여름 설경(雪景)
손병흥
정선 일원의 고봉 준령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백두대간
강원도 태백 금대봉 대덕산
환경부가 지정하여 관리하는 지역
무려 천여 종류에 가까운 식물들이
푸른 숲 능선 골짜기에 자생하는
동쪽 일원 이어지는 보전지역 풍광
여름철 접어들면서 천상 화원이 되어
눈꽃처럼 아름답게 소복이 핀 진풍경
여름 설경 펼쳐놓은 야생화 전호 군락
아늑한 심연 가득하도록 젖어 드는 향연
여름휴가
손병흥
분주한 일상 잠시 물린 채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숨은 명소 찾아 펄럭이는 시간
못내 기다려왔던 정겨운 여행길
눈에 보이는 풍경처럼 삶 배우려
아직도 살가운 정 남아 있는 곳 찾아
어릴 적 고향 전경 빼닮은 두메산골
숲 그늘 드리운 골 깊은 계곡을 지나
그냥 훌쩍 길 떠나보는 여름휴가
검푸른 파도 한없이 넘실대는 바닷가
설레이는 마음 가득한 추억거리 담아다
고적함 색다르고 여유롭게 체험해보는
휴식 재충전 한가로움 이내 넘쳐나도록
모처럼 만에 즐겨보는 낭만적인 나날들
여름
손석철
터질 듯 푸르다
자만의 눈 흡뜬 그대여
이제 그 눈 아래로 감아야 하리
갈증의 가을
곧 그대 입술 마르게 하리니
푸름은 진정 짧고
지금 그대는 그걸 정녕코 잊고 있음이라
한여름 날의 꿈
손종일
이 도시의 절망적인 몸짓이 빚어내는
가련한 흐느적거림으로
한때, 가식에 묻혀 사랑을 꿈꾸다
유토피아의 땅으로 곤두박질치려던
내 꿈이 진정 어리석었다는 걸
그 얼마나 오랫동안 깨우쳐야 하는지
이건 분명 네가 떠남으로 인해 빚어진
도시의 높아 가는 빌딩 숲에 갇혀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슬픈 몸짓
애꿎게도 내가 너 아니면 일어설 수 없는
푸른 언어를 꿈꾸며 자라는
플라타너스 한 그루의 앙상한 가지같이
한 여름날의 꿈만 꾸며 기다리는
초라한 몰골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 도시에서의 고립
하지만, 진정 무엇이 나를 슬프게 하는지
내 슬픈 눈을 감싸는
절망의 어둔 눈물만 잔 속으로 채워지고
술 기운에 온통 흔들리는 불빛은
현란한 몸짓으로
스멀거리며 내 옷깃을 파고드는데
쓸쓸한 것의 의미도 모르는 채
하늘은 밤비를 불러 내린다
그저,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뜻하건
죽을 때까지 너로 인해 살아가는 나,
나로 인해 즐거워지는 너를 위하여
오직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해 여름의 방
손택수
플라스틱 화분에 금이 갔다
비좁은 껍데기를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뒤틀리고 비틀어진 뿌리들
흙을 움켜쥔 채 벽을 밀다가
벽을 힘껏 밀어보다가
숨이 막힐 만큼
몸을 움츠리고 한데
엉켜 있는 뿌리들
분을 갈아줘야 하는데
온몸에 쩍, 쩍 주름이 간
어머니가 말했다
이대로 그냥 견뎌요
화분 살 돈이 어딨어요
그해 여름이 다 가도록
몸을 뻑뻑하게 죄어오는
후끈거리는 방 속에 틀어박혀
암수한몸 달팽이처럼
누이들과 나는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었다
바다로 간 이름
손택수
방파제 끝 등대에 그리운 이름 하나 새겨놓았더니
그 이름 파도에 쓸려가 버렸습니다
떨어져 나간 페인트칠 따라
흔적도 없습니다
방파제 끝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갔던
저녁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지워진 이름이 점등을 합니다
바다로 간 이름이 바다를 비추고 있습니다
여름 냇가
송남선
꼴 먹이러
소 끌고 나간 냇가
모래밭엔
여름이 햇살과
뒹굴고 있었다.
아이들은 와- 와-
소리치며
금빛 목욕을 하고
한 뼘이나 더 처진 무게로
머리를 감는
더위 먹은 갯버들
그늘 밑 소 한 마리
끔벅이며
더위를 되삭임할 때면
한 움큼씩
햇살을 주워 담는
사과나무
주렁주렁
여름이 열린다
만하(晩夏)
송문문
쓰르라미가 작년에 앉았던 감나무에서
꼭 그 모양새로 운다
지난여름이 이맘때쯤에
그 자리에 숨겨놓았던 매미를
꺼내놓은 것 같다
계절이 곳곳에 사람도 숨겨놓았다가
때가 되면 꺼내놓는지
오늘은
천강(千江)에서 호수에서 바다에서 모든 유리창에서도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그 동안 숨겨놓았던
아장아장 나부터 어제의 나까지 꺼내
여기저기 걸쳐놓고 있다
명왕성에서 보면 그게 그 자리, 그때가 그때
뭉게구름
가까이 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면서도
해마다 그 속에 한참씩 들어가 보던 나를
어느 곳에
숨겨두었다가
요즘 자꾸 꺼내고 있다
여름 낙조
송수권
왜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 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 들어 산다
왜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날으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판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엔
왜 나 채석강에 와서 사는지 묻지 말아라
여름
송승언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거나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통해 겨울이 왔다 나는 장롱을 뒤져 목을 묶는 생물을 찾았다
그것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습관을 버렸다 네가 온 벤치 하나 네가 오지 않은 벤치 하나 발목 잘린 벤치 하나 온통 하나뿐인 공원에서 왜 우리는 여전히 둘일까
네 입을 벌렸다 그것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쓸모가 없었고 살아 있었다 내가 온 벤치에 너는 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둘일까 목이 막혔다 개별적인 나무에서 개별적인 꽃이 피었다
얼어붙은 호수에서 너를 찾았다 너는 없고 너의 표정만 갈라지고 있었다 목이 막혔다
얼음 깨지는 소리, 벤치로 왔다 나는 땀을 흘렸다
여름 연못
송영희
연잎 몇 장 물 위에 떠 있다
밑으로는 빽빽이 잔뿌리 얽혀 있어도
속 물살, 뒤척이며 몸을 떨어도
연잎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생이 그러셨다
굽이굽이 세월의 소용돌이에 시달리셔도
언제나 물 가운데 연잎이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온몸으로
바람 다독이시며
억센 갈대 잎 사이
가만히 가만히 물살 잡아 놓으셨다
하나둘 꽃잎 피워 놓으셨다
그리고 이젠 하늘까지 두 팔로 안으시고
저렇게 명경(明鏡)이시다
여름
송정숙
태양의 몸살로
신록이 짙어지니
산, 물, 좋은 여름
바다 스쳐 온 바람
산마루에 머물다
돌담 돌아 나가면
해바라기 만발하고
한 그루 나무 그늘
사람을 모은다
평상에는
막걸리 상 차려지고
매미 소리 잦아들면
꿈속으로
별 헤러 가는 아이들
여름은 그렇게 깊어지고
여름날
송정숙
여름날 눈물이 배달되었다
별들이 죽어간
서울 하늘을 대신하여
아름다움을 못 보는
눈먼 이들을 대신하여
잎새 사이로 울어 대던 새들에 눈물
죽어가는 가슴 적셔주라고
여름 편지
송정숙
여름 어느 날 편지를 보내려거든
빗물로 하얀 백지에 써서 보내주세요
무슨 말인지 몰라 절절매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
행복할 수 있도록
여름 어느 날 편지를 보내려거든
햇볕 뜨거움으로 나뭇잎에 써서 보내주세요
가지마다 매달아 바람에 살랑이며
소리 내서 읽어 달라 할 수 있도록
여름 어느 날 편지를 보내려거든
온 밤, 가슴으로 써 내려간
그런 편지를 보내 주세요
낱장 들추며 어둠 밝힐 수 있는
그런 편지를 여름 어느 날 받고 싶어요
뭉크의 여름
송태옥
나무는 여름에 말한다
나무의 잎들은 여름이면 바이올린의 E 선과 같아진다
건드리면 끊어질 듯 팽팽히 조율된
바이올린의 E 선이 잎사귀마다 나부낀다
한 치의 빈틈도 두지 않고
E#의 고음을 연주하는 나뭇잎
나무는 온몸으로 말하고 또 말한다
검초록의 바이올린이 짙푸르게 내리누르는
잎사귀 마디마디 떨리는 선율 사이사이마다
아픔을 얼싸안고 E 선으로 부르짖는다
쓰린 상처 건드리는 쓰라림을
전율하는 고음으로 처리하고
끓고 끓어오르는 절창의 나무
스타카토가 난무하고 아르페지오가 떨리며
쏟아지는 바이브레이션에
더는 폭발할 수 없는 절정의 E선
나무는 여름에 뜨겁게 뜨겁게 절규한다
그 여름
신경림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꽃과 춤을 불러오고
저주와 욕설과 원망을 불러왔다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몰고 오고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다
여름날 - 마천에서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 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밖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첨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여름 고개
신동엽
산 고개 가는 길에
개미는 집을 짓고
움막도 심심해라
풋보리 마을선
누더기 냄새
살구나무 마을선
시절 모를 졸음
산고개 가는 길엔
솔이라도 씹어야지
할멈이라도 반겨야지
여름 이야기
신동엽
팔월의 하늘에는 구름도 없고 바람 부는 가로수
피난 가는 내 소녀는 영어를 알고 있었지
나뭇게 끄을며 절길 오른 바랑,
산골길 칠백 리엔 이마 훔치던 원효 선사.
원두막 밑에선 미국 간 아들 편질 읽으며 칠순 할아버지가
사관침 장죽에 쑥을 버무려 넣고 있었지
패랭이 달린 황토 언덕 제트 편대가
강(江)을 울리면 배꼽 내논 아해들은 풀뿌리 씹으며
구경을 하고. 마(馬), 진(辰) 사람네
조개무덤 쌓던 댕댕이 넌출 고을엔
수평 멀리 함성소리만 불 질려 오른다
꽃신 놓인 토방 놋거울은 닳고,
콩밭 매는 뒤꼍 황진이 숲속선
땅 즐겁게 멍석딸기가 익고 있었다
장마철 표정
신석종
늦봄쯤에 책상 위에 놓여졌던
업무용 노트 한 권과 책 두 권이
죽은 사람처럼 그대로 누워있다
그들 몸엔 곰팡이가 살고 있었고
황사가 다녀간 듯 얼굴이 뿌옇다
구름이 매일마다 태양을 삼킨다
내 몸에, 곰팡이 생겨나지 싶다
여름날의 추억
신성호
청록의 아름다운 산천과
찰랑대던 검푸른 바다의 파도소리
불타던 태양빛 정열의 폭염도
타오르던 지열의 작열함 속에
여름날은 지쳐 멀리 떠나려
먹구름 둘둘 말아 거두고
하얀 목화꽃 피어나 듯
흰구름 방석 깔아 놓고
들판의 알곡들 하나 둘 챙겨
깊은 양곡간에 채우려 준비하니
여름은 아스라이 보일 듯 말 듯
바캉스의 날들은 다 가버리고
여름날의 추억들을 간직하기엔
문밖에 가을이 와 버리니 서러워라
여름날이 좋다
신성호
무더위가 떠오르고
늙은 느티나무 위의 매미 소리를 듣는 듯하다
땡볕 아래 잘 익어가는 청포도
주렁주렁 그 모습이 아기 소의 마음같이
먹지 않았어도 맛있게 느껴지고
싱싱함이 목젖에 새콤달콤함으로 와닿는 것 같다
토실토실 잘 여문 하지감자며
쑥쑥 자라는 옥수수와 단 수수가 즐겁게 하고
시원한 바람이 징그럽게 좋은 모정(정자)도
시끌벅적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즐겁기만 하다
잠시 잠깐 졸음 속에 낮잠은 꿀맛이고
그 속에 떠나는 꿈 여행은 세상에는 없는 멋진 여행이다
어느 계절인들 좋고 나쁜 계절이 있으랴만
여름날은 왠지 부담 없는 풍성함에 무척 기쁘다
아직 이른 때지만 문득 떠오른 여름날이
기다림 속에 그리워하는 것조차 너무나 좋다
여름이 간다
신성호
삼복(三伏)을 세어가며
기다렸던 여름이 떠나간다
엊그제가 입추(立秋)인데
쬐악볕은 변함이 없고
산 길에서
바다 위에서
꿈 많은 추억의 시간들이
희미한 미소를 타고 떠난다
영글어가는 삶의 질곡에서
하늘이 높아가는 지절(之節) 앞에
또 다른 한 획을 긋는
가을을 마중하고 있다
이 여름이 가는데
신성호
봄을 시샘하듯
찾아온 여름
땡볕을 쏟아내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고
떠나려는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짧은 시간 속의 사연들을 챙기고 있구나
목청 컷 울어대던 매미들도
야무진 소리로 여름을 아쉬워하는 듯
오늘도 그렇게 울고 있구나
산으로 바다로 부풀어 떠나던 휴가도
추억의 앨범 속에 사진 몇 장 남겨 놓고
그렇게 이 여름은 떠나가고 있는데
파란 하늘을 뒤덮은 저 비구름도
가을의 쓸쓸함의 고독을 알고나 있는지
이 여름이 떠나기를 제촉하는구나
이 여름이 가는 길에
흔적이라도 남긴다면
기쁨과 행복의 그 순간과
좋은 기억들만 남겨 놓아
세월 가고 계절 가도
이 여름을 추억하며 살으리라
여름의 끝자락에서
신영희
차창 밖 경호강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
조금씩 높아 보이는 하늘
구름이 끼여 뜨거운 계절이라고 느낄 수 없네
가로수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들릴 정도로
바람 불어오는 산청 들녘
강바닥은
가뭄에 바닥이 보이고
대지는 메말라 촉촉함을 느낄 수 없다
곡식들은 더위 끝에 고개 숙이고
꽃이 진 자리에 맺혀 있는 열매는 농익어
어느 틈에
고구마를 캐는 농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마 타고 내리는 땀방울 보다
더 많은 수확의 기쁨을 염원하며
높은 하늘 구름 걷히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올여름엔
신영희
동쪽 하늘엔 먹구름
서쪽 하늘엔 뭉게구름이
따가운 햇볕을 밀어내고
선선한 바람 가을을 선물하려 한다
간밤
지구 반대쪽에서 들려 오는
승전보에
밤을 꼬박 새워도 피곤함이 없다
이렇게 열대야에 지쳐가도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올림픽에서 땀 흘리는 선수들과
살아온 시간이 있기에 가능한 것
여름아
아침이 되면 너의 모습도
점점 멀어져 가지만
남은 시간
너의 열정 다 쏟아내어
나의 세월에 청춘의 불씨를 살려다오
소사나무 숲의 여름
신용목
비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 놀이를 끝낼 수 있게…… 이렇게 말하면
비가 내린다
창문은 골목 끝까지 떠나간 시간을 열어놓고
한 장씩
바닥에 찍힌 너의 발자국을 걷어와, 가지런히 너를 쌓아올리는 이 놀이에서
비가 와,
뚝뚝 빗물을 흘리는 뒷모습으로 거기
네가 일어서는데
고요가 죽은 빗소리를 주렁주렁 소사나무에 목매달도록
순서를 기다리는 꿈이 잘린 몸으로 밤의 보를 받치는데?
조금 더 멀리 갔으면,
네 키보다
더 큰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겠다, 젖을까 봐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뒤돌아
미처 걷지 못한 발자국이 어스름 매미 소리처럼 무너지는 것을 지킬 일은 없었겠다
그러나 쌓을수록 너는 지워지네,
바닥에 음각으로 찍힌 발자국은
포갤수록 사라지는 풍경의 마술
화석에조차 발자국은 갇히지 않는다 여름, 소사나무 숲 가운데 이 어두워지는 놀이에서
한 가지 일은 그리워하는 것
다른 한 가지는, 잊는다
비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오늘은, 비가 내리고
먹구름 뒤에서
너는 젖은 이마로 올해도 휩쓸려가지 않은 하류의 비닐 뭉치나 내리치는 것일 텐데
벼락이여,
아마도 슬픔은 밥 냄새 같은 것이었을까? 가을 어디쯤에선
낙엽이 타다 비를 맞을 것이다
여름
신주연
매미가 처량하게
맴맴 노래 한다
사랑하는 짝을 찾느라
목청껏 울어댄다
이제 여름이 슬슬 머리를 틀고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멀리 떠나기를 바란다
여름아 뜨겁게 불타오르는
불꽃 같은 여름아
너의 광란의 정열을 그만 태우고
지극히 낮은 너의 본향으로
어서 가거라
푸른 대지의 숲과 꽃들은
가을의 찬가가 메아리쳐
오기를 기다린단다
모든 군상을 지치게 하는
뜨거운 여름아
가을의 꽃향기에 고운 미소로
어여쁜 시원한 자리에
너의 몸을 아이스(ice)의
하얀 꽃 속으로 물들게 해다오
여름 지다
신창홍
한낮의 햇빛은 따가운데
그늘진 빌딩 숲에 바람은 스산하다
어제는 아이들 뛰어놀던 시간인데
오늘은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다
계절이 변하는 길목에서
내가 겨우 길들인 여름의 실체들은
이미 퇴색되어 허물 벗듯 하나둘 벗어 버리고
내가 긴 시간 겨우 적응한 파렴치한 날씨조차도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닌 것처럼 짐을 싸듯
바람을 바꾸어 탔다
우리는 어느 것도 대비하지 못한 체
머지않아 어디선가는
준비하지 못하는 한숨 소리가 들릴 것이고
또 다른 어디선가는
아예 넋 놓아 버린 마른 눈물이 있을 것이다
그나마 손에 쥔 것 없어도 만만했던 계절
삼삼오오 나무 그늘에 앉아 말벗이 되고
작은 자두 건네는 할머니의 인심이 아름다웠던 계절
그렇게 주름살 짙게 패인 힘겨운 달동네에
여름 지다
장마철이면 난 행복하다
신현식
장마철이면 난 행복하다
후텁지근한 가슴속에
자존심처럼 간직했던 일들
우르르 쾅쾅
눈물로 쏟아버릴 수 있어
난 행복하다
그리움이 먹구름처럼 끼고
사랑도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는 장마철이면
들고 나갔던 우산을 잊어버려도
핑계가 있어 난, 행복하다.
그러다 가슴속까지 흠뻑 젖어도
난 행복하다.
울다가도 웃는 세상
참 지조 없는 세상
그래서 난, 행복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런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그대의 세상에서
웃고, 또 울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
장마철이면
그대가 있어서 난 행복하다
장마철이면
그대가 없어도 난, 마음껏 행복하다
여름이었다
신혜정
그런 밤도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검은 생각의 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밤
약수에서 상왕십리를 지나 왕십리에 이르는 동안 생각했던 것 혹은
버티고개 지하 깊은 터널로 끝도 없이
에스컬레이트 되는 동안 스쳤던 것 그도 아니면
동호대교와 한남대교 사이를 서성이던 매연과
새벽 강변북로의 가로등에 남아있던 말들
가로등 불빛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빛을 마주보는 자와
빛의 뒤에 서 있는 자와
빛의 방향을 가늠하는 자에게
빚지기로 한다 공평하게
나는 운전대를 잡고
뱀처럼 기어를 스르르
풀고 핸들이 이끄는 대로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영화처럼
공평하다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수도 없이 죽였던 시간을 되돌리듯
오늘은 빨래를 널고 죽은 듯이
빨랫줄에 매달린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여름의 끝
심의운
비 맞은 기와지붕이 축 처지고
움푹 패인 초가지붕 고지박이
마당 한 가운데 떨어져 뒹굴고
마루 밑에 뱀이 갈 곳이 없어
밥상머리에 어슬렁 어슬렁거렸다
천둥 번개가 집이 내려앉은 것처럼
굉음을 내며 번쩍번쩍 이고
뒷산에 황토물이 밤새도록 괄 괄
소리 내며 감나무 우찍우찍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눈만 반짝반짝
번개 치는 문살만 쳐다보고 있었다
먼동이 밝아오자 보리짚 우의를
덮어쓰고 감나무 밑에 우수수 떨어진
상처 난 생감 한 주먹 쥐고 들어와
맛을 보고 있는 사이에
뒷산 계곡에 하얀 폭포가 무섭게
떨어지고 이골목 저골목 황토물이
누런 들판을 덮고 말았다
프라다라스 가로수가 넘어지고
신작로는 어디로 사라지고 논과 밭
귀퉁이를 먹어 치우고 큰물 파도
이루며 바다가 나타난 것 같았다
덜 익은 풋감을 단지에 싹혀
한 개씩 나누어 먹던 시절
고추장에 보리밥이 먹고 싶었다
일천구백오십구 년 구 월 십이 일 추석
사라호 태풍 그해 여름의 끝에서
여름 단풍
심지향
먼 옛날 푸른 꿈
잊혀진 전설에 묻고
새벽 찬 이슬 속에
혼 불 밝힌 열 손가락
속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
저 혼자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