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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명

이집트 문명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 인더스 · 황하 문명과 함께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는 40여 개의 부족 국가를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룩하였고 강력한 통일 왕조가 성립되어 훌륭한 문화가 발달하였다. 왕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태양의 아들'인 파라오라 하였다. 왕이 죽은 뒤에는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무덤을 세우고, 왕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그 속에 넣었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신성한 무덤을 지키기 위해 스핑크스라는 석상을 세웠다.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하였고 상형 문자를 만들어 기록을 남겼다.

한편 관개 농업에 필요한 과학 기술도 발달하였다. 나일 강은 매년 정기적으로 홍수가 났는데, 그 시기를 예측하면서 천문학이 발달하고, 태양력도 만들어졌다. 오늘날 사용하는 태양력은 이 때에 비롯되었다. 또 홍수로 사라져 버린 밭의 경계선을 가려 내면서 측량술과 수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피라미드나 신전을 짓는 데도 이용되었다.

이집트 인은 문자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그림으로 뜻을 나타내는 그림 문자를 쓰다가 이를 간략하게 하여 상형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일 강 가에 자라는 파피루스를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글을 적었다. 그 밖에 무덤에 함께 넣을 인형이나 동물상을 비롯하여 많은 보석으로 장식한 금관 등이 만들어졌다.

이집트 문명의 유적

이집트 기제에 있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그릇 만드는 도공을 조각한 목제 모형

농사일을 하는 농부의 목제 모형

아부심벨 신전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

투탕카멘 왕의 황금 마스크

카르나크에 있는 룩소르 신전의 기둥

이집트 인이 쓰던 그림 문자

이집트 왕 람세스 1세의 무덤에 그려진 벽화

테베에 있는 이집트 벽화

 

이집트인은 셈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햄족 계통에 속하는 민족이다. 이집트에 인간이 정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2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문명의 발생 시기는 수메르와 거의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는 원래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메네스라는 전설적인 왕이 나타나 통일을 이루어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여 외부의 침입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 결과 거의 2천 년 동안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적으로 고유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6세기 후반 페르시아 왕국에 정복될 때까지 약 2500여 년간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면서 통일국가 체제를 지켜왔다. 고왕국은 외부의 침입으로 붕괴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쇠약함으로 인해 무너졌다. 그 계승자인 중왕국은 힉소스인의 침입으로 그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곧 힉소스인을 몰아내고 강력한 중앙집중화 경향을 지닌 신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전통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집트가 정복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셈족

셈계 인종의 특징인 긴 수염이 눈에 띈다. 기원전 3000년경 만들어졌다.

아카드 왕

자그로스 산의 약탈자 루루비족과 싸워 승리하는 모습.

 

BC 2925년경에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고, 이후 약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지배자의 위치를 계속 이어갔다.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 고대사에서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나일 강 범람의 규칙성을 알아내기 위해 이집트에서는 태양력,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투탕카멘의 무덤,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 등은 이집트 문명의 뛰어난 건축술과 기하학을 보여준다. 이집트 사회는 신, 왕, 죽은 사람, 인간으로 이루어진 하향식 계급 구조 사회였다. 왕은 어떤 인간보다 잠재 능력이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웠고 파라오라고 불렸다.

 

이집트 문명과 기후

이집트의 아부심벨 대신전

 

이집트는 북쪽의 지중해로 흘러가는 나일 강을 따라 계곡을 이루며 뻗어 있다. 나머지 삼면은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뜨거운 모래 황무지를 ‘테스레트(붉은 땅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사막’이란 뜻의 영어 단어 ‘데저트(desert)’는 여기서 유래했다.

고대 이집트인에게 사막은 위험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이 한때는 물이 흐르고 초목이 우거졌던 때가 있었다. 사막에 솟아 있는 산악 지역에는 금과 보석, 이집트의 웅장한 건축물과 멋진 예술품이 묻혀 있다.

 

나일 문명의 탄생

나일 강 하류는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다. 나일의 골짜기나 델타 지대에 인류가 정착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대략 1만 년 전쯤이다. 서방의 초원지대에서 이주자들이 들이닥쳤고, 이들은 수천 년 동안 쟁기 등을 사용하면서 농사짓는 법을 배워갔다. 초기 이집트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사하라 주민의 특징을 지녔을 것임에 틀림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집단을 이루고 국가를 세우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5,000년 정도에 이집트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당시는 지질사적으로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 홍적세)의 마지막 빙하기인 뷔름(Würm) 빙하기가 물러가면서 기온이 서서히 상승할 즈음이었다.

기후가 건조기에서 습윤기로 변하면서, 아프리카 북반부는 물기가 많은 대초원이 되었다. 현재의 사하라 사막과 건조한 사바나에는 초목이 우거지고 산들은 아름다운 나무로 뒤덮였으며 새와 짐승, 물고기도 많았다.

 

비행기에서 본 이집트와 수단 접경지대의 나일 강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사람들은 나일 강 주변에 모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북위 25도의 아열대 지역인 나일 계곡에는 계절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반복적인 서늘한 기후는 나일 강의 홍수를 조절해 주었고 고제국 성립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 강의 풍부한 물은 곡식의 생산을 증대시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나일 강 유역의 농업 발달이 문명의 탄생을 이끌었던 것이다.

 

강의 범람이 축복이었던 나라

나일 강은 다른 문명의 강들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매년 일어나는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인의 달력에서 각각 네 달씩 계속되는 범람, 생장, 수확의 세 절기를 구분한다. 범람은 씨 뿌릴 때와 추수할 때를 알려주었다.

농사의 성공 여부는 매년 6월에 시작되는 홍수에 달려 있다. 6월 말까지 나일 강은 상류 지역인 앙골라나 수단에서 내린 비로 인해 수위가 상승하면서 주변의 저지대에 홍수가 진다. 10월에 홍수가 끝나면 나일 강 유역의 경작지에는 상류 지역에서 운반되어 온 비옥한 흙이 쌓인다.

이곳에 곡물의 씨를 뿌리면 다음 해 2월에 엄청난 수확을 하게 된다. 만일 홍수가 일어나지 않거나 나일 강의 수위가 낮아져 경작지의 면적이 한정되면 다음 해에는 흉년이 닥치고 기근과 재해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홍수가 나는 것이 재해가 아닌 축복이 된다.

나일 강은 비옥한 경작지를 제공해 주는 것뿐 아니라 교통의 간선으로도 이용되었다. 테베에서 카이로까지의 약 900km에 이르는 거리를 홍수기에는 배로 2주일이면 갈 수 있었다. 이집트 문명의 생성과 발전은 범람하는 나일 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홍수는 큰 재앙이지만 유일하게 이집트만은 홍수가 축복이 되는 나라였다. 이집트인들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홍수만 아니라면 홍수가 크게 날수록 더 좋아했다.

나일 강은 경작지를 제공하고 교통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나일 강의 범람 수위에 따라 농작물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한 높이가 18m이면 굶주림, 19.5m이면 고생, 21m이면 행복, 22.5m이면 안심, 그러나 27m 이상이면 재앙이었다는 기록이다. 재앙은 강이 너무 범람해서 진흙 집까지 쓸어가 버릴 때를 말했다고 하는데 다행히 백 년에 한 번 이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일 강의 홍수는 축복이요 행복이라는 이집트 사람들의 말은 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나라 전체의 번영은 연례적인 나일 강의 범람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나일 강은 이집트인들에게 종교 이상의 숭배 대상이었다.

 

이집트의 고대 역사

먼저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살펴보자. 예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여러 방법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을 분류했다. 그중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네토가 수립한 분류법이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다.

 

선왕조 시대(기원전 5,000년 이전)

 

원왕조 시대(기원전 4,000년)

상하 이집트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3,100년경~기원전 2,686년)

이집트 제1왕조

이집트 제2왕조

 

고왕국 시대(기원전 2,686년~기원전 2,181년)

이집트 제3왕조

이집트 제4왕조

이집트 제5왕조

이집트 제6왕조

 

제1중간기(기원전 2,181년~기원전 2,040년)

이집트 제7, 8왕조

이집트 제9왕조

이집트 제10왕조

이집트 제11왕조(통일 전)

 

제1중간기 이후에 중왕국 시대가 이어진다. 이 글에서는 제1중간기까지의 시기를 다루도록 하겠다. 이집트의 선왕조(先王朝) 시대는 신석기 시대부터 고대 이집트에 왕정이 시작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기원전 4,000년경에는 원왕조 시대로 진입하는데 이때는 크게 상, 하이집트의 두 왕국이 존재했다. 왕국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른 채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았다.

타실리의 암벽화

 

나일 강의 이웃에 있었던 사하라 사막이 당시에는 푸른 초원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상당히 많다. 타실리 암벽화는 알제리의 타실리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있는 것으로 1909년에 프랑스군 대위가 우연히 발견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의 바위산에서 코끼리·기린·하마 등의 동물 그림이 많이 발견된 것이다.

벽화는 암벽뿐 아니라 동굴에도 남아 있었다. 제작 연대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으로 밝혀졌다. 이는 사하라가 당시에 많은 동물이 서식하는 비옥한 땅이었다는 증거다. 암벽화뿐 아니라 지형도와 항공사진에서도 사하라가 과거에 물이 풍부한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발견되었다. 강이 구불구불 흐르면서 산을 침식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리비아 사막의 퇴적물을 조사한 지질학적 연구 결과도 있다. 기원전 3,000년쯤에는 사하라에 100~300mm 정도의 비가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목으로 뒤덮인 이 기름진 땅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타실리의 말기 암벽화로 미루어 보아, 사하라의 풍요로운 시대는 기원전 2,000년경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세기에 이곳을 찾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물이 전혀 없는 사막’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니, 그 무렵에 이미 지금과 다름없는 사막지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3,100년경에 이르러 처음으로 통일 국가가 세워진다. 초기 왕조 시대이다.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는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 왕조 시대부터 고왕국 시대에 이르는 6개의 왕조 시대에는 기후가 온난하고 비도 적당히 내렸다.

이 시절은 더운 계절과 서늘한 계절이 반복되는 온화한 기후였다. 지금의 사하라 사막도 물이 흐르고 풀과 관목이 자라는 곳이었다. 나일 강 유역에는 인간이 정착하기 좋은 토지들이 넓게 퍼져 있어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가 지중해 쪽으로 돌출한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은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그 면적이 점점 늘어났다. 이집트는 국가의 부가 증가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지금도 감탄할 정도의 토목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했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다.

문화와 경제가 급속히 발전했고, 특히 미술 공예품의 생산이 증가했다. 고왕국의 제4왕조 시대는 강대한 권력을 쥔 왕들의 시대였다. 이들은 이집트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라미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고제국의 화려한 영광이었다.

 

기후변화로 붕괴된 이집트 고왕조

그런데 기원전 2,100년경부터 날씨가 변하기 시작했다. 온화했던 기후가 찌는 듯한 무더위로 바뀌면서 서늘한 기후가 불러왔던 계절적 강우현상이 중단되었다. 주기적인 나일 강의 범람도 멈추어 버렸다.

강폭은 차츰 좁아지고 풀 대신에 관목이나 모래가 들어섰다. 삼림도 모래바람이 불어 대는 황야로 변했다. 새도 짐승도 물고기도 없어졌다. 아프리카 북부지방이 지금의 사하라 사막과 황야지대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이집트 사하라의 백사막

 

더욱이 평화시대가 계속되면서 일부 상류층의 극심한 낭비로 경제가 크게 악화되었다. 사회체제 역시 급속히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적기에 관개공사를 하기도 어렵게 되면서 농업생산성 역시 크게 떨어졌다.

사하라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은 갑작스레 도래한 기온 상승에 대한 대응책으로 수십 미터 깊이의 우물을 팠다. 그리고 동굴도 팠다. 물을 넣어두고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나일 계곡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살 수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가 고왕조가 붕괴되고 제1중간기(기원전 2,181년~기원전 2,040년)가 들어선 시기였다. 이후 중왕국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141년 동안 이집트는 혼란 속에 허덕였다. 가뭄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왕(파라오)의 권위가 무너지자 각 지방의 총독들이 할거하며 내전을 벌였다.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나일 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기근이 닥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시기에 141년간 27명의 파라오가 나왔다. 쿠데타와 암살과 반역이 줄을 이었다. 당연히 국력이 약해지면서 제9, 제10왕조는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겨우 그 주변만을 지배할 정도였다.

 

이집트에 영향을 준 기후변화

이집트 문명의 흥망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후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빙하기가 물러난 이후의 따뜻한 기후가 나일 강 일대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후 계절적인 서늘한 기후의 반복은 나일 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가져와 농업생산성을 크게 증대시켰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농업 발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왕권국가가 탄생하고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농업 발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왕국 말기에 나일 강 일대의 기후는 크게 변했다. 기후변화는 농업의 파탄을 초래했고 농업의 붕괴는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기후 때문에 문명이 탄생하고 기후 때문에 문명이 붕괴한 것이다.

대기근의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온다. 석판이나 석주에 새겨진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 기원전 2,180~2,130년경 대기근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 먼 후대의 이집트 예언자인 이퓨테르는 그때의 대기근을 이렇게 기록했다. “식량창고는 비었고 / 경비병은 땅바닥에 뻗었네. …이집트의 곡식은 ‘먼저 줍는 자의 것’ …사방에서 약탈의 무리가 날뛰고 / 노예도 자기가 줍는 것을 차지하네.”

그렇다면 이렇게 기후가 변화된 원인은 무엇일까? 지구 상의 바람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만약 바람이 부는 지역의 위치가 바뀌면 다른 지역의 위치도 모두 이에 맞춰 바뀌게 될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 때 적도무풍대와 지구 상의 사막 위치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편서풍대와 북아메리카와 유럽 전역에 나타나는 겨울철 폭풍우도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적도무풍대가 훨씬 남쪽에 있었던 그 옛날에는 오늘날에 비해 북아프리카 지역에 비가 더 많이 내렸음을 의미한다. 비가 많이 내리면 생태계는 다양성을 띠고, 하마와 코뿔소, 기린 같은 동물들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매년 여름 열대 아프리카에 내린 비는 나일 강으로 흘러든다. 거의 해마다 일어나는 홍수는 많은 비를 품은 몬순이 이집트의 고지에 비를 뿌리는 탓에 발생한다. 이 물 펌프가 고대 이집트를 떠받친 원동력이었다.

에티오피아의 청나일 폭포

 

고기압과 저기압의 복잡한 상호작용은 에티오피아 산맥의 날씨에 영향을 준다. 여름이면 인도와 아라비아 해에 꾸준히 저기압이 형성되면서 인도양 일대에 강한 남서풍을 보낸다. 열대수렴대는 에리트레아1) 바로 북쪽에 위치하므로 에티오피아 고원에 내린 많은 비는 청나일 강과 앗바라 강으로 흐른다. 이런 상태는 서태평양에 고기압이 있는 한 계속 유지된다.

그런데 기압배치가 달라지면서 태평양의 기압이 하강하면 인도양의 기압이 상승한다. 열대수렴대는 남쪽 먼 곳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 인도양의 커다란 저기압은 힘을 쓰지 못하고 동쪽으로 밀려난다.

이 경우 몬순은 평소보다 약해져 버리고 인도와 에티오피아 고원은 가뭄에 시달리게 된다. 북쪽으로 수천km 떨어진 이집트에는 흉년이 든다. 이런 흉년이 몇 년이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고대 이집트의 고왕국 시대는 기후변화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이집트의 흑인왕조

 

아프리카 지역은 중세에는 아랍인의 노예나 용병으로 근대에는 유럽인의 노예나 식민지 역할만 해왔는데 독자적인 문자와 문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고대 이집트 전국을 재패한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무려 104년 동안 (BC 760 - 656) 다스렸다.

먼저 이집트의 지도를 살펴보면 상이집트(Upper Egypt)와 하이집트(Lower Egypt)로 나뉘는데, 하이집트는 비옥한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지역 멤피스를 하이집트라고 부르고 수단과 중간에 있는 나일강 중류에 해당하는 지역이 상이집트이다. 테베가 상이집트에 속한다. 하류와 상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 나일강 상류지역을 누비아(Nubia)지역이라고 한다. 누비아는 대부분 북수단에 들어간다.

현재의 이집트인의 외모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다양한 인종계통도

이집트의 왕조는 숫자가 매우 많은데 기원전 3100 ~ 332년 까지 무려 32개의 왕조가 등장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반드시 단일왕조가 끝나고 차기 왕조가 나온 것만은 아니라 분열국시대도 각각의 왕국을 등장 순서에 따라 순번 왕조로 명명하기 때문에 독립국가라고 순번을 붙여준다. 별도의 국호는 쓰지 않는다. 누비아의 보병들이다.

북수단에는 쿠쉬왕국, 에티오피아 지역에는 악슘왕국이 있었다. 훗날 악슘왕국에 의해 정복당한다.

그 중 수단지역에 쿠시(Kush)왕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BC 1000년경에 등장하여 AD 350년경까지 고대 이집트가 멸망하고도 780년간이나 존속하였다. BC 750년경에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25왕조를 세우는데 에티오피아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티오피아'는 이집트어로 흑인이라는 뜻이다.

제25왕조의 파라오는

 

피안키

샤바카

셰비쿠

타하르카

타누타멘

 

이렇게 5명의 흑인 파라오들이 104년간 통치하였다. 이때를 제3중간기라고 부른다. 물론 그 이전에도 파라오 중에 흑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투탕카멘왕도 외형상 흑인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전부터 누비아 용병들의 전투력을 이용하여 외적을 물리치거나 정복사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대략 제 12왕조시절부터 이미 누비안들과 접촉이 있었으며 분쟁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소스트리스3세는 누비아를 정복하여 영토 확대를 하였다.

제 25왕조 시절에 쿠시왕국은 이집트 전국을 통일하게 되고 문화적으로 번영했다고 한다. 심지어 피라미드가 남부 수단 쿠쉬왕국의 중심지에 건설되기도 했다.

첫 번째 파라오인 피안키(piye)는 피라미드 건설을 부활시키고 제벨 바칼(Jebel barkal)의 아문신전을 확장하였다. 또한 중근동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BC 720년 블레셋과 가자에 앗시리아의 반군지원을 위해 원군을 보냈지만 사르곤2세에게 패배하여 실패하고 만다.

2대 파라오 셰비쿠(shebiku)는 712년 상하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전체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24왕조의 바켄레네프(Bakenranef) 파라오를 화형시키고 수도를 멤피스로 천도한다. 샤바카가 이집트 파라오라는 기록은 앗수르의 왕 사르곤2세의 비문에 나타나 있다.

3대 파라오 샤바카(Shabaka)는 아몬의 제사장이 되어 신권정치를 부활하였다. 또한 앗수르의 반란국가들을 돕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실패하였다. 샤바카 스톤에 오래된 종교 파피루스를 새겨 넣음으로 맴피스 신학을 보존하였다.

4대 파라오 타하르카(Taharqa)는 셰비쿠의 사촌으로 집권 초기에 앗시리아의 왕 센나케리브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반군(유대왕국의 히스기야왕)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BC 671년 그의 아들 에사르하돈에게 패했다. 그리고 역습을 당하면서 오히려 멤피스가 함락당하고 후궁들의 생포와 엄청난 약탈이 일어났다.

에사르하돈은 멤피스에 주둔군만 남기고 앗시리아로 철수 하였는데 이틈에 상이집트로 피난갔던 타하르카가 군을 재정비하여 멤피스로 돌아와 주둔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에스라하돈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이 돌아와 복수전을 펼치면서 패배하여 남쪽의 누비아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남은 여생을 살며 그곳에서 거대한 피라미드에 묻힌다.

또한 제벨 바르칼 (Jebel Barkal), 카와 (Kawa), 카르나크 (Karnak) 등지에서 작품을 남겼다.

5대 타하르카의 후계자인 타누타멘(Tantamani)는 앗시리아로부터 빼앗긴 이집트 탈환을 시도하였다.그는 이집트를 침략하여 통치자이자 아슈르바니팔의 꼭두각시 통치자 이집트 출신의 네코를 사로잡는다. 그러자 아시리아의 대규모 군대를 보내고 타누타멘은 누비아 본진으로 퇴각하고 만다. 그리고 아시리아 군대가 테베를 점령하면서 이때 아슈르 바니팔은 이집트 제 24왕조 출신의 왕자중 한 명을 파라오로 세우는데 26왕조의 네카우 1세이다. 26왕조는 100년 정도를 통치하고 아케네메스제국에 BC 535년 멸망한다.

남부로 밀려난 쿠시왕조는 나파타를 중심으로 재정비하려고 했으나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더 남쪽인 메로에(Meroe)로 수도를 옮기면서 900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와 단절되며 문명세계와 단절되고 점차 아프리카화로 도태되어 갔다. 쿠시왕조는 과감한 행정제도 덕분에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데, 왕이 관습법을 통치하였고 세습제가 아닌 선출제로 통치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쿠시왕국이 유라시아대륙과 연결되었더라면 아랍과 유럽세계와 적극적인 접촉이 일어났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쿠시왕국 외에도 에티오피아왕국 등 당시 흑인들이 세운 고대문명국가들이 있었다.

알파벳과 비슷한 표음문자인 고대 메로에(meroe) 문자이다.

그들은 한 때 고대세계에서 세상의 중심에 나오고자 했다. 아랍이나 유럽 아시아 세력과 경쟁하며 독자적인 문명으로 번영을 이루고자 했으나 앗시리아를 이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흑인특유의 탄력 있는 육체를 이용한 보병이 장점이었으나 기마병과 갑옷을 입은 북방세력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문명국가들과 단절되면서 평범한 아프리카의 흑인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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