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a 신성문자로 '알다'라는 뜻을 지닌 지성(知性)을 의인화한 신으로 시아(Sia)라고도 한다. 그는 엔네아스 계열의 신이다. 문자와 지혜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아는 파피루스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된다. 그는 지혜의 신이기 때문에 저승에서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그 이름을 불렀다(심장이 생전의 행동을 기록한다고 생각했다.). 후대에 아툼이 자신의 남근을 상처 내어 그 피를 사아와 후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생식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아의 이름을 불렀다. 후대에 아툼과 라가 하나로 합쳐져서 아툼-라가 되면서 사아는 라의 자식이 되었다.
사아가 태양의 바지선 위에 서 있는 모습도 있다. 여기에 세 명의 신이 앞에 서고, 세 명의 신이 뒤에 서 있다. 신들의 머리에는 신의 성격을 드러내는 신성문자가 있다.
Sai(그리스 : Ψαις Psais) '운명이 정해진'이란 뜻을 가진 운명의 신으로 운명의 여신 메스케네트의 남편이다. 그는 운명이라는 추상개념이 신격화한 신이다. 추상개념이라서 성별이 없다. 사이는 보통 남자로 표현되지만 여자로 보는 경우도 있다. 여자로 표현될 때는 사이트(Shait)라고 한다.
운명의 신으로써 사이는 사람들의 수명을 정한다. 그는 두앗트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심판할 때 참석한다. 그는 가끔 출생의 여신 메세네트의 남편이 되기도 한다. 후대에는 렌을 할당하는 레네누테트의 남편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때는 레네누테트가 행운의 여신이다. 아케나텐이 일신교를 도입하면서 사이를 아텐의 속성으로 보았다. 람세스 2세는 사이를 운명(사이)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사이는 운명의 신으로써 그리스의 아가토다이몬(Agathodaemon)과 같다고 보았다. 아가토다이몬은 점술의 신이었다. 아가토다이몬이 뱀으로 여겨졌고, 사이는 이집트 말로 돼지를 뜻하기 때문에 헬레니즘 시대에 사이는 뱀 머리를 한 돼지로 표현되었다.
Sakhmet(Sachmet, Sekhmet)
세크메트
암사자의 머리를 한 여자
Sekhnet는 전쟁의 여신이다.
(영국박물관)
(검은 화강암 조각, 루브르 박물관)
카르낙에서 출토된 세크메트(BC 1550년~1295년경, 조각, 루브르)
(BC 1391년~1353년경, 섬록암 조각, 루브르)
(BC 1391년~1353년경, 섬록암 조각, 루브르)
(국립중앙박물관)
(BC 1391년~1353년경, 섬록암 조각, 루브르)
BC1370
(룩소르 무트 신전에서 출토, BC 1403년~1365년경,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코브라관과 태양판을 얹은 세크메트(콤 옴보신전)
제사의식 보호 부적 목걸이(BC870)
오소콘 4세와 타디바셋 왕비의 이름이 새겨지고 세크메트 암사자의 머리가 장식된 방패(BC 800년경, 호박금, 루브르)
방패라고 불리는 금으로 만든 제례의식물(Walters 미술관, 볼티모어)
부적 방패(BC 664년~332년경, 금, 루브르)
세크메트 두상 모양의 방패(BC 1550년~1069년경, 이집트 자기, 루브르)
'강한 여성'이란 뜻을 지닌 전쟁 및 신의 응징과 관련이 있는 파괴의 여신으로 사크메트(Sakhmet, Sachmet)ㆍ세케트(Sekhet)라고도 한다. '서쪽의 귀부인'으로 불렸다. 프타의 아내로서 사자의 머리를 가진 여인으로 묘사된다. 숭배의 중심지는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로, 그곳에서 그녀는 남편 프타, 아들 네페르템과 함께 3대신으로 숭배 받았고 또한 룩소르에서도 숭배 받았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하토르(Hathor)의 분신으로, 태양신 라(Ra)의 뜻을 어긴 인간들을 징벌하기 위해 하토르가 사자(獅子)로 변해 무차별 살육을 자행하자, 라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속임수를 써서 하토르에게 인간의 피와 같은 색깔인 붉은색의 마법 음료를 마시게 한다. 이 음료를 마신 하토르는 만취해 인간들을 죽일 수 없었는데, 세크메트는 하토르의 이러한 잔인한 행위로 얻어진 이름이다. 세크메트가 사나운 암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의 여신으로써 세크메트는 종종 전장에서 파라오를 수행했다. 출전한 왕은 분노한 세크메트와 같은 존재이며 왕이 적에게 활을 쏠 때 여신이 돕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일반적으로 태양 원반이 달린 왕관을 쓰고 ankh("생명")가 아니면 파피루스 갈대 모양으로 생긴 왕홀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테베에서 세크메트는 그곳의 태양신 아문(Amun)의 아내인 Mut 여신과 동일시되었다. 세크메트 여신은 호전적인 면을 가지는데 파라오의 적들에게 불길을 내뿜는다고 말해진다. 하토르 여신처럼 세크메트 여신도 '레 신의 눈'이 되어 태양신의 징벌을 내리는 대리인이 되었다. 세크메트는 역병과 질병을 가져오기 때문에 '전염병의 귀부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질병을 치료하는 신으로 존경을 받았다.
Sarapis(Serapis)
죽음과 부활의 신 오리시스와 창조의 신 프타, 그리고 프타의 신성을 구체화한 황소 아피스가 헬레니즘화 하며 결합된 세라피스(그리스 코스(cos) 출토, BC 30년~AD395년, 로마시대 대리석 조각)
(로마시대 테라코다, 뮌헨의 이집트미술국립박물관)
(100년~150년경, 에페소스에서 제작, 대영박물관)
( 아프가니스탄 베그람 출토)
세라피스(Serapis, 그리스어 Σέραπις) 또는 사라피스(Sarapis, 그리스어 Σάραπις)는 그리스-이집트 신으로 세라피스 컬트는 BC 3세기경 이집트를 다스리던 그리스인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I세 소테르(Ptolemy I Soter)가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 내의 그리스인들과 이집트인들 간의 폭동을 진압하는 것 보다 더 용이하게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 이들의 통합을 위해 그리스 신의 정형적 모습을 지닌 오시리스와 신성한 황소 아피스가 결합된 세라피스를 만든다. 곱슬머리에 kalathos라고 알려진 바가지 모양의 머리장식을 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집트 사제들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세라피스 컬트를 만들고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세라피스의 신전, 세라페움(serapeum, 그리스어 serapeion)을 세웠다. 고대 이집트의 제15~16왕조(BC 1674-1567년경) 때 이집트를 다스리던 힉소스(Hyksos) 이민족 지배자가 숭상하던 세트(Set)의 경우나, BC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대제는 아문(Amun) 신전을 방문해 자신이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아내는데, 이를 계기로 이집트인들은 그를 새로운 파라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민족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신을 이용하는 것에 사제들은 격렬히 반대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피스는 상부 이집트에서 현저하게 퍼져 나간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던 하부 이집트에서는 아직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리스인들은 동물 머리를 하고 있는 이집트 신에 대해 그다지 숭배심을 느끼지 못했다. 하여 그리스 신의 정형된 모습을 택하고 당시 가장 인기 높은 성스런 황소 아피스와 동일하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세라피스의 이름은 오리시스와 아피스가 융합하여 아세르-하피(Aser-hapi), 오세라피스(Oserapis), 세라피스/Sarapis)가 되었다. 이때의 오시리스는 영혼, 바(Ba)의 표명인 바넵제데트(Banebdjedet)를 양으로 나타내지는 것과 달리, 완전체로서의 오시리스로 여겨진다. 이집트에서의 세라피스가 언급된 것은 BC 323년 경 플루타르크(Plutarch)의 '알렉산데르의 삶(Life of Alexander, 76)'과 아리아노스(Arrian, 95~175)의 '원정(Anabasis, VII, 26, 2)'에서인데, "프톨레마이오스(Ptolemy)는 '창조자' 신은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세라피스 상을 보고 그리 말한다, 세라피스 상의 풍부한 의상 표현은 세라피스의 컨셉을 이집트와 그리스 모두로부터 가져와 묘사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세라피스 컬트를 만들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알렉산드리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이집트 창조신화에서 멤피스 버전은 다른 창조 신화들의 자연발생적인 창조와는 달리 인식을 통한 창조와 창조의 능력을 보유한 말씀과 관련된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멤피스 신학에서의 창조의 중심에는 창조주인 프타(Ptah)가 있는데, 세상 모든 창조물들을 흙으로 빚어 존재하게 한 창조주로 프타는 세상 창조를 처음에 자신의 생각으로 품고, 말로써 이루어냈다. 맴피스 신화에서 "프타는 이집트인들이 인간의 생각의 의자라 여기는 자신의 심장이 생각한 말이 프타의 혀에서 그것들의 이름이 불리어졌을 때, 세상 만물은 드러내지게 되었으며 세상의 마법을 통해 생명을 주었다"라 하고 있다. 프타의 지시로 창조된 세상은 자연과 동물계, 그리고 식물계로 구성되어 지고 세상의 보존과 왕실의 영속성을 프타가 주관한다. 중왕조 시대부터 프타는 라, 이시스, 오시리스, 아문과 함께 이집트 주요 5대신으로 자리 잡게 되며, 점차 오시리스와 합쳐지며 프타-소카르-오시리스(Ptah-Sokar-Osiris)라 부르는 새로운 신이 되었다.
또한 아마르나 시기에 태양신 라는 아텐과 합쳐지며 만물의 존재들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태양신으로서의 기본 신성을 지니게 된다. 프타는 마지막으로 성스러운 황소 아피스로 구체화하며 신왕조 시기부터 종종 라의 전령사로 태양신 라와 연결되는 신성한 동물로 연결된다. 고대 이집트에서 숭배되는 여러 성스러운 동물들 중 아피스는 가장 신성한 동물 중에 추앙받으며 사제들은 아피스 황소의 행동을 보고 예언을 읽어냈고 파라오들은 아피스의 힘과 풍요를 나누어 받고 파라오가 사후에 태양신에게로 가는 일을 아피스가 도와준다고 믿었다.
세라피스가 가장 처음 언급된 것은 BC 323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알렉산드리아 대제의 죽음 장면에 관하여, 바빌론 세라피스 신전에 "중태에 빠진 대왕을 신전 내로 옮겨야할 것인가를 신탁을 통해 물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아리아누스(Lucius Flavius Arrianus)의 시대에 세라피스가 바빌론에서 숭배되었다는 것이 되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만들어진 사실과 다르게 되는데, 이는 바빌로니아의 에아(Ea, 또는 엔키(Enki)라는 개별적인 신을 '심연의 왕(king of the deep)'이란 뜻의 세라프시(Serapsi)라 불렀는데, 아마도 기록에 있는 세라피스는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세라프시가 알렉산드리아 대제에 죽음과 관련되며 오시리스-아피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최고의 신으로 선택되는 데에 기여하였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꿈자리에 낯선 신이 나타나 소아시에 있는 시노프(Sinope)에서 알렉산드리아 동상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그리고 꿈에서 명령한 대로 동상을 옮긴 뒤, 두 명의 종교적 권위자에게 세라피스라고 선언하게 했다. 한 명은 선사 시대부터 엘레우시스 신비주의(Eleusinian Mysteries)의 가르침을 맡고 있던 제사장 가문인 에우몰피데(Eumolpidae)와, 나머지 한 명은 이집트의 학자이며 신관인 마네토(Manetho)로 세라피스는 이와 같이 이집트와 그리스의 양쪽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다. 일부 이집트 학자는 이 전승에서 언급되고 있는 시노페(Sinope)는 멤피스에 이미 세라페움으로 존재하고 있던 시노페이온의 언덕(hill of Sinopeion)에 대하여 라고 해, 플루타르코스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오시리스와 아피스를 완전히 동일시 한) 세라피스는 원래 라코티스(Rhacotis)라는 마을에서 모셔지고 있던 신으로, 그것이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시에 전해져 급격히 신앙이 확대되었다라고 한다. 그리스의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Hades)와 데메테르(Demeter)의 속성과 연결되며 디오니소스(Dionysus)의 자비와 연결된다. 세라피스 상은 점차 하데스니 플루토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바뀌며 머리에 곡물 등을 재는 용기(modius)를 싣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에서 저승의 상징이다. 세라피스는 정형화된 그리스 신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집트인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풍요와 부활을 상징하는 많은 이집트 컬트의 도상학과 결합되어 있다.
손에 들고 있는 홀(笏, sceptre)은 왕권을 상징하며, 저승의 문지기 케르베로스(Cerberus)가 그의 발에서 쉬고 있다. 혹은 발밑에 뱀이 그려지는 일도 있는데 이는 이집트 왕권의 상징인 우라에우스(Uraeus)를 나타내는 것이다. 세라피스(오시리스)는 아내 이시스와 그들의 아들 호루스(하포크라테스)와 함께 그리스 세계에서 중시되어, 고대 로마에서도 숭배되었다. 또한 사망자를 인도하는 죽음의 신 아누비스를 케르베로스와 동일시하였다. 로마의 제2차 삼두정치 시대에 캠퍼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 지어진 이시스의 신전인 이세움(Iseum)에서도 세라피스를 숭배하였다. 그 후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체험한 기적이 세라피스에 의한 것으로 여겨져, 1세기 후반에 세라피스와 이시스 컬트가 널리 퍼졌다. 또한 플라비우스 황조 이후, 동전의 도안으로 황제와 함께 세라피스가 그려진 것이 등장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세라피스와 예수를 차별 없이 숭배하고 있었다.
로마 황제사(Augustan History)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것으로 여겨지는 글 중에, 이집트에서 그리스도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세라피스를 숭배하고 있는 것이나, 세라피스 신앙이라고 칭한 그리스교 신앙이라는 등 큰 혼란이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오시리스 컬트는 나일 강 상류의 필라에(Philae)에서 AD 6세기까지 이어져 왔다, 390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의 칙령( Theodosian decrees)에 의해 이교 예식 참여 금지를 명하며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데, 여기서 이교도들의 사원들은 파괴되었으나 팔라에서는 집행되지 않았다. 하여 이곳에서의 오시리스와 이시스 숭배는 블레미스(Blemmyes)의 노바다에(Nobadae)와 디오클라누스(Diocletian) 황제 사이의 협약에 의해 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Ⅰ세까지 지속되었다. 매해 추종자들은 상이집트 아스완 지역의 나일 강 가운데에 있는 섬 엘레판티네(Elephantine)를 찾아 이시스 여신상을 강물에 띄워 블레미스 땅으로 보내는 비교 의식을 행한다. 의식은 비잔틴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Ⅰ)가 532년 콘스탄티노플의 ‘니카의 반란’ 때 나르세스(Narses)를 보내 상소를 파괴하고, 사제들을 체포하고, 성상들을 압수하는 것을 나타내며 끝이 난다.
Satis
소베코텝 3세가 숭배(BC 1760년경, 뉴욕 브루클린 박물관)
나일 강의 폭포가 의인화된 여신이자 남부(누비아) 지역의 수호신으로, 또 다른 그리스 명칭으로 Sati, 이집트 명칭으로는 사트지트(Satjit), 사테스(Sates), 사테트(Satet), 사티(Sati)라고도 한다. Khnum의 아내이자 아누케트의 어머니, 나일 강의 흐름을 상징하기 때문에 '화살처럼 달리는 여자'라고 불렸고, 나일 강의 엘레판티네 섬에서 숭배되었기 때문에 '엘레판티네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그는 이집트 남부 누비아를 수호하면서 파라오의 적들을 활로 쏘아 죽였다. 그는 연례적인 나일 강의 범람과 관련이 있었다. 크눔, 아누케트와 함께 '엘레판티네의 3대신'의 하나이다. 각 모서리에 깃털이나 영양의 뿔이 달린 상이집트의 큰 원뿔형의 왕관을 쓰고, 왕홀과 앙크(ankh, 생명)상징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주된 숭배중심지는 Elephantine 부근의 Sahel 섬(현재의 아스완 부근)에 있었다.
그는 나일 강의 범람이 의인화된 신이다. 그에 대한 숭배는 수에네트(Swenet, 지금의 아스완) 시에 시작했다. 그는 초창기에 전쟁, 수렵, 다산의 여신이었고, 나일 강을 상징하는 아누케트의 어머니였다.
여신의 기호는 화살과 흐르는 강물이 되었다. 그는 헤제트라고 하는 뾰족한 상 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여자로 표현된다. 머리에는 가젤이나 영양의 뿔이 나 있다. 그는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신은 앙크를 들고 있기도 한데, 나일 강의 범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다산의 여신이기 때문에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는 정화수를 담아 바치는 단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크눔이 라의 한 모습으로 여겨지면서, 사티스는 라의 눈이 되었다. 이 눈은 웨자트에서 유래했는데, 호루스의 눈으로 발전했다가 결국 라의 눈으로 불렸다.
Scarabe 많은 보석 위에 종종 푸른 빛깔로 딱정벌레의 모양을 새기고 금으로 도금되어 있다. 사자의 서 30장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것들은 미라에서 심장 부분을 정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태양신 케프리의 특별한 상징이고 딱정벌레가 그 알을 굴리는 것과 같이 하늘을 가로 질러 태양이 구르도록 하는 '굴리는 자'다.
Sebek(Sebeq, Sebk, Sobk, Greek Suchos) Fayum의 악어의 신. 소베크의 다른 이름
Sechat-Hor 암소의 여신.
Sed 늑대 모습을 한 구원의 신으로, 세딤(Sedim), 웨프와웨트(Wepwawet)라고도 한다. 이것에 유래한 파라오의 통치를 축하하는 축제가 있는데, 헤브 세드(Heb Sed), '꼬리 축제'라고도 한다. '꼬리 축제'라는 이름은 파라오의 옷 뒤에 붙어 있는 짐승 꼬리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예전에 의식용 의상을 동물가죽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세드 축제는 오래된 축제이고, 이집트 역사에 수 백 번 언급된다. 가장 자세한 기록은 아부 구랍(Abu Ghurab)에 있는 5왕조의 파라오 네우세라(Neuserra)의 부조와 아멘호테프 3세 시대의 부조, 카르낙 동부에 있는 아케나텐의 부조, 부바스티스에 있는 22왕조의 파라오 오소르콘(Osorkon) 2세의 부조에 남아 있다.
이 고대 축제는 파라오가 늙거나 통치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살해하던 의식을 대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드 축제는 통치자가 왕위에 오른 지 30년을 축하하는 희년축제였다. 즉위 30년이 넘으면 3년이나 4년마다 세드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는 파라오의 오랜 통치를 축하하고 파라오의 힘과 정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파라오들이 헤브 세드를 거행했다는 증거가 있다. 1왕조의 파라오 덴과 3왕조의 파라오 조세르가 이 축제를 거행했다. 조세르의 피라미드 지구에 있는 조세르의 헤브 세드 마당에 두 개의 경계석이 있다. 피라미드 내부의 가짜 통로에 조세르가 헤브 세드를 거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드 축제에는 정교한 의례와 종교행렬이 있었고, 돌기둥(제드)나 돼지등뼈, 남근을 들어올리는 의식이 있었다. 증거가 남아 있는 초기 세드 축제는 6왕조의 파라오 페피(Pepi) 1세의 세드 축제다. 이 축제에 대한 기록은 사카라(Saqqara) 남부의 돌에 새겨진 연대기에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비문으로 보아 가장 성대한 축제는 람세스 2세와 아멘호테프 3세의 축제였다.
세드 축제는 쇼셍크(Shoshenq) 3세, 쇼셍크 5세, 오소르콘 1세 같은 리비아 출신의 후대 임금들도 거행했다. 오소르콘 1세는 재위 33년 두 번째 헤브 세드 축제를 열었다. 오소르콘 2세는 부바스티스에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그는 붉은 화강암으로 문을 만들었는데, 자신의 헤브 세드를 축하하는 장면으로 장식했다.
30년을 통치하지 못한 파라오는 사후에 수백만 번의 희년을 축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여러 파라오들이 30년 축하 전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들의 재배에서 나라를 회복한 18왕조의 파라오 핫셉수트와 아케나텐은 많은 전통을 새롭게 바꾸었다. 핫셉수트는 테베에서 자신의 세드 축제를 거행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들은 그 축제가 재위 16년에 거행되었다고 보았다. 핫셉수트는 연약한 남편의 왕비로 있는 기간을 포함해서 연수를 세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도 핫셉수트는 왕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공동 통치자였던 것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왕실의 유일한 남자는 양아들이자 조카였는데, 당시 어렸다. 핫셉수트는 그와 결혼하고, 그 직후 왕관을 쓴 파라오가 되었다. 폰 베커라트(von Beckerath) 같은 이집트학자들은 '이집트 파라오들의 연대기'에서 핫셉수트가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죽은 지 30년이 된 것을 기리기 위해 첫 세드 축제를 거행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투트모세는 딸을 고위관직에 임명하고 통치경험을 쌓도록 했다. 아문-라의 사제들이 제공한 신탁에 투트모세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아케나텐은 부패한 아문-라 사제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종교적인 관행을 많이 바꾸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첫 세드 축제를 즉위한지 3년이 되는 해에 거행했다. 세드 축제는 파라오의 권능과 종교적인 지도력을 강화하는 축제이기 때문에 강력한 신전을 맞서서 유리한 입지를 세우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는 동시에 사제들이 조종하는 도시에서 수도를 옮겼다.
Seker Sokar 참조.
Sekhmet Sakhmet 참조.
Selket Serket 참조.
Sentait 암소의 여신.
Sepa(Sep) 명계의 신.
Septu(Sopd, Sopdu) '시리우스'란 뜻의 전쟁의 신으로 소페두(Sopedu), 소프드(Sopd), 소프투(Soptu), 소프두(Sopdu)라고도 불렀다. 그는 원래 한여름의 태양이 내뿜는 열기를 의인화한 신이다. 작렬하는 열기가 전쟁을 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전쟁의 신으로 여겨졌다. 소프두라는 이름은 소프드(Sopd, 소프데트(Sopdet)의 남성형)라는 뜻이 있는데, 시리우스가 지평선 위로 나타난 직후에 더워지는 열기에서 유래했다. 소프데트는 시리우스가 신격화된 것이다. 소프데트가 이 열기를 낳았다고 하고, 소프두는 그 자식이라고 본다. 그리스 사람들도 비슷한 결론을 냈다. 그리스 이름 시리우스는 기본적으로 ‘열기를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시리우스가 동쪽에서 지평선 위로 나타나고, 그때부터 태양의 열기가 뜨거워지기 때문에 소프두는 '동쪽의 주인'이라고 불린다. 그는 하이집트 동쪽 노메(nome)를 숭배의 중심지로 한다. 그 지역은 페르-소프두(Per-Sopdu)라고 하는데, '소프두의 땅'이라는 뜻이다. 전쟁신이라는 성격과 동쪽 끝에 있다는 것이 결합하여 소프두는 아시아의 전사로 표현되었다. 그는 쉠세트(shemset) 허리띠를 하고, 긴 도끼를 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국경을 지킨다고 한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을 때, 그는 그곳에 있는 터키석 광산을 지킨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이름은 뾰족한 삼각형을 나타내는 신성문자와 3인칭 복수어미(메추리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이름을 그대로 옮기면 '예리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삼각형 기호는 가시식물을 상징하고, 이집트 사람들은 이빨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이빨의 복수형으로 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전쟁신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그는 '피라미드 문헌'에 죽은 사람의 치아들을 보호한다고 나온다.
그는 중왕국 시대에 전쟁 신으로서 파라오와 강한 관련이 있었다. 그 결과 하늘의 신이 되어 호루스와 연결이 되었다. 호루스는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수호신이었다. 그 결과 소프두는 머리에 두 개의 송골매 깃털을 꽂은 것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매는 전통적으로 호루스의 모습이다. 그의 이름에 호루스(송골매) 기호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의 이름에 복수형 접미사는 신관문자의 압축형(소용돌이)으로 표시되었다. 소용돌이 기호는 종종 메추라기를 나타낸다고 오역되기도 했다. 그 기호는 그 외의 경우 생략된다. 결국 호루스와의 관련은 호루스와 합쳐지게 만들었다. 신왕국 시대에 그는 독자의 신이 아니라 호루스의 한 모습을 나타내는 하르-세프투(Har-Septu)라고 불렸다.
Serapis Sarapis 참조.
Serket(Selket, Selkis, Selchis, Selquet)
'목구멍을 닫게 하는 여자' 또는 '목구멍으로 숨 쉬게 하는 여자'란 뜻을 지닌 전갈의 여신으로 셀케트(Selkhet, Selquet, Selket, Selqet), 셀키스(Selkis, Selchis), 셀키트(Selkhit, Selkit), 세르크(Serk), 세르케트 헤티트(Serket h-etyt 이집트 명칭)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이집트 파라오의 수호신. 그는 사자의 내장을 담는 카노피 단지를 지키는 여신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는 머리에 전갈을 이고 있거나 전갈모양의 머리장식을 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가끔 전갈의 몸에 사람 머리를 한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갈에게 물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세르케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전갈의 침으로 착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그의 전갈 침이 뱀에게 물린 것 같은 다른 독이나 전갈의 독을 치료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고 저승의 관습을 알려주는 신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죽은 후에 재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세르케트는 전갈로 표현되는데, 전갈 기호는 왕조시대 이전부터 발견된다. 세르케트는 자신의 신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러 도시에 상당한 사제들이 있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전갈 종류가 북 아프리카에 살았기 때문에 세르케트는 아주 중요한 여신이었다. 가끔 파라오의 수호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초기 파라오들과 관련이 있으며 그들의 수호신이었다. 두 명의 파라오는 전갈 왕(scorpion kings)이라고 불렸다.
전갈이나 뱀의 독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세르케트는 아페프(Apep)로부터 신들을 보호한다고 한다. 아페프는 사악한 거대한 뱀인데, 세르케트는 아페프가 잡혔을 때 그것을 지키는 신으로 표현된다.
이집트에서 독을 가진 동물들이 치명적이기 때문에 세르케트는 죽은 사람들을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특히 독이나 경직을 초래하는 액체로 죽은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장의사의 텐트를 지키는 수호신’, ‘독과 관련이 있는 카노피 단지의 수호신’이라고 불렸다. 이 카노피 단지는 나중에 호루스의 네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케베세누프(Qebehsenuf)가 되었다.
카노피 단지 가운데 하나를 지키고 수호신이라는 성격 때문에 세르케트는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아세트(이시스), 네베트 헤트(네프티스), 네이트와 강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이집트 역사가 길어 수천년에 이르기 때문에 신들이 합쳐졌는데, 세르케트는 이시스와 같다고 여겨지면서 모습과 가계가 같아졌다. 결국 세르케트는 이시스의 한 모습으로 전락했다.
Seshat(Sesat, Sesheta)
별양식의 머리장식과 표범가죽의 옷을 입고 있는 여자
문학, 수학, 건축계획(측량)의 여신으로 토트의 딸이다. 그녀는 도서관, 편지, 문서보관소, 역사적 기록 등과도 관련이 있다. 그녀는 모든 왕의 통치기간과 대관식 연설을 담고 있는 왕가의 연대기를 보존하였다. 세샤트는 왕의 군사작전동안 포로와 전리품의 수를 기록했고, 핫셉수트의 탐험의 전리품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녀는 파라오가 '노끈을 잡아 늘이다'라고 알려진 제식에서 사원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녀는 머리 위에 별이나 장미꽃 장식을 하고 있고, 표범가죽옷을 입고 희년(jubilee years)을 기록한(50년마다 기록을 새기는 눈금이 나있는) 톱니모양의 야자나무 가지로 만든 왕홀을 들고, 별이나 장미꽃 장식을 머리에 달고 있고 있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Sesmu 기름, 포도즙 짜는 일의 신.
Seth(Set, Setekh, Setesh, Seti, Sutekh, Setech, Sutech)
파라오 람세스를 경배하는 세트와 호루스
세트
어미에 붙는 š나 ḫ는 주권(왕권)을 뜻한다.
이집트 신들 가운데서 이 별칭을 갖고 있는 신은 라와 세트밖에 없다.
태초의 혼돈의 신이자 사막, 악, 암흑, 가뭄, 전쟁, 태풍의 신. 그 뜻은 불확실하지만 '어지럽게 하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이집트어로 세테쉬(stš)였다가 후대에 수테크(swtḫ, 어미에 붙는 š나 ḫ는 주권(왕권)을 뜻함), 콥트어로 세에트(Sēt), 그리스어로 세트(Σεθ). 세테쉬(Setesh), 세테크(Setekh/Setech), 세티(Seti), 수테크(Sutekh), 세테흐(Seteh)라고도 하고, '폐하(이집트 신들 가운데서 이 별칭을 갖고 있는 신은 라와 세트밖에 없음)', '힘이 센 분'이라는 별칭이 있다. 헬리오폴리스의 엔네아스의 일원. 게브 또는 라와 누트의 아들. 누이인 네프티스와 결혼하였다.
세트에게는 많은 아내가 있었다. 여기에는 외국의 여신들과 여러 자식들이 있다. 네프티스(네베트 헤트) 이외의 아내로는 네이트가 있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소베크를 낳았다. 암트케레트(Amtcheret)와의 사이에서 우푸아트(Upuat)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우푸아트는 아누비스나 오시리스의 아들로 여겨졌다. 타우레트, 헤텝사베트, 카나안의 아나트와 아스타르테도 그의 아내로 여겨졌다.
그는 긴 다리와 길고 넓은 귀, 짧고 끝이 갈라진 직립한 꼬리를 가진 나귀와 같은 외양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커다란 개와 비슷하게 변했다. 이 특이한 모습은 왕조 이전시대 전갈왕의 철퇴장식에 나타난다. 그가 처음으로 나오는 유물은 왕조 이전시대 나카다 1기의 묘에서 출토되었다. 그가 들고 있는 와스(was) 왕홀은 권력의 상징으로 신이나 파라오, 사제들이 들고 다녔는데, 후대에는 혼돈(세트)의 힘을 다스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세트의 귀가 지느러미라는 설명에 따르면 세트 짐승의 머리는 옥시링코스(oxyrhynchus)라는 물고기를 닮았다. 오시리스의 남근을 먹어치운 물고기가 옥시링코스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세트는 이집트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악어나 하마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는 상이집트의 수호신으로 이집트 남부에서 숭배되었다. 그는 나일 강 상류의 사막과 외국 영토를 상징하며, 외국 사람들의 신으로 여겨졌다. 사막의 신으로서 사막을 지나는 대상(隊商)들을 보호하기도 했지만 풍요의 신 오시리스와 갈등을 빚었던 모래폭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와 오시리스의 갈등은 '피라미드 문헌', '관 문헌', 샤바카 돌,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의 벽에 새겨진 비문, 여러 가지 파피루스 문헌에 나온다. 형제인 오시리스가 나일의 홍수로 그를 익사시키려하자, 그는 네프티스를 이시스로 변장시켜 오시리스와 동침시켰다. 오시리스가 잠들자 그를 죽여 몸을 여러 조각을 잘라 버렸다. 이시스가 오시리스의 시신을 수습하고, 아누비스가 인조 남근을 만들었다. 이시스는 마법 주문을 외워 오시리스를 잠시 동안 되살리고 그와 관계를 하여 호루스를 잉태했다. 오시리스는 곧 다시 죽어버리고 아누비스가 오시리스를 미라로 만들었다. 일부 전설에는 아누비스 대신에 토트가 나오기도 한다. 오시리스의 유복자로 태어난 호루스는 세트의 적이 되었다. 일부 전설에는 세트가 호루스의 형으로 나오기도 한다. 어쨌든 호루스는 장성하여 세트를 물리치고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후대 이집트 사람들은 세트와 호루스의 갈등을 사막과 나일 강의 범람 사이에 있는 갈등으로 해석했다.
오그도아스 체계가 엔네아스 체계와 통합되면서 라가 아툼이 되었는데, 그것은 상하 이집트가 통합된 결과였다. 이때 호루스가 라의 계승자가 되었고 세트도 라의 부하가 되어 밤마다 아페프와 싸우게 되었다. 그는 라가 밤에 저승을 여행할 때 타는 배의 뱃머리에 서서 뱀 모습의 아페프를 창으로 찌르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세트와 오시리스의 투쟁은 역사적 사건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샤바카 돌에 따르면 게브가 세트와 호루스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이집트를 둘로 나누어 상이집트(사막지역)는 세트에게, 하이집트(삼각주지역)는 호루스에게 주었다. 그러나 게브는 나중에 이집트 전부를 호루스에게 주었다. 이 신화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하 이집트가 상 이집트를 정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상 이집트가 하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설이 있다. 예를 들어 호루스와 세트가 상 이집트에서 같이 숭배되다가 호루스를 숭배하던 집단이 세트를 숭배하던 집단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알려진 사실은 1왕조 시대에 호루스가 페립센(Peribsen) 또는 세레크(Serekh)라는 파라오를 올라타고 있었는데, 2왕조 시대에 들어서 잠시 동안 세트가 올라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인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2왕조 말기에 카세켐위(Khasekhemwy)가 그 갈등을 끝냈다. 그는 호루스, 세트와 함께 세레크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종교적 타협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가 통일되자 세트와 호루스는 함께 파라오의 대관식이 나타났다. 1왕조의 왕비들은 '호루스와 세트를 보는 여인'이라고 불렸다. '피라미드 문헌‘에 파라오를 두 신이 합쳐진 존재로 표현했다. 결국 두 신의 특징을 결합하여 호루스-세트가 나타났다.
두 번째 단절기에 힉소스(Hysos, 외국 땅의 지배자들)로 알려진 아시아계 사람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들은 아바리스(Avaris)에서 삼각주 지역을 다스렸다. 그들은 하 이집트의 주요 신이자 외국 사람들의 신이었던 세트를 수호신으로 삼았다. 이로써 세트는 위협적인 외국의 세력과 연합하여 불편하게 최고신으로 숭배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는 페니키아의 아나트와 아스타르테였다. 네프티스는 세트의 하렘에 있는 한 여신에 불과했다.
아모세(Ahmose) 1세가 힉소스를 타도하고 이집트에서 몰아냈다. 이집트 사람들은 아시아계 외국 사람들에게 외국인혐오증을 갖게 되었다. 이때 세트는 사악한 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파라오들은 힉소스 통치시기를 깎아내리면서 세트의 위상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바리스에서는 세트 숭배가 번성했다. 아바리스에 있는 사제들은 아모세가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신왕국 시대에 삼각주 지역에서 세트는 외국 신들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히타이트의 천둥신 테슈브(Teshub)와 같다고 여겼다. 19왕조의 창건자 람세스 1세는 아바리스의 전사계급 출신으로 세트를 모시는 사제들과 강한 연고가 있었다. 람세스 왕조에서 여러 파라오가 이름에 세트를 넣었다. 세티(Seti, 세트의 남자) 1세와 세트나크트(Setnakht, 세트는 강하다)가 그런 이름이었다. 람세스 2세의 부대 가운데 하나가 세트를 수호신으로 삼기도 했다. 람세스 2세는 피-라메세스(Pi-Ramesses)에 소위 ‘400년 돌기둥’을 세워 삼각주 지역에서 세트를 숭배한지 400년이 된 것을 기념했다.
20왕조 시대에 세트를 격하하는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벽면에서 지워지고 외곽지역으로 밀려났다. 22왕조 시대에 세트는 자신의 오랜 원수 아페프와 같다고 여겨졌다. 신전 벽에 새겨진 세트의 모습은 소베크나 토트로 바뀌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악한 신이 된 것은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다. 그는 전통적으로 외국 사람들의 신이었기 때문에 외국 압제자와 관련이 있었다. 아카이메네스의 페르시아 왕조, 프톨레마이오스의 그리스 왕조, 로마 제국이 그런 경우였다. 이 시기에 이집트 사람들은 호루스가 세트를 물리친 것을 넓은 지역에서 축하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세트를 티폰과 관련지었다. 두 신은 사악한 신이고, 천둥신이었으며 주신을 공격한 땅의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외곽지역에서 세트는 여전히 주신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다클라(Dakhlah) 오아시스에 있는 무트 알-카랍(Mut al-Kharab) 마을에 세트 신전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시스와 오시리스'편에서 호루스와 세트의 싸움을 기록했다. 그는 헤로도토스의 글을 참조했고 세트가 사악한 신으로 탈바꿈한 1세기경 로마 시대에 살았다.
카르가(Khargah) 오아시스에 있는 페르시아 시대의 히비스(Hibis) 신전 벽화를 보면 세트가 송골매 머리를 하고 호루스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 통합으로 저승의 신 아누비스의 자리를 세트가 차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시스는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네프티스 대신에 아누비스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것은 네프티스가 이시스로 변장하여 세트의 사랑을 받으려 했으나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세트가 네프티스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설명이 생겼다. 오시리스는 네프티스를 이시스로 착각하여 아누비스를 낳게 되었다. 좀 더 후대 문헌에서 세트가 사막과의 관련성을 잃고, 그의 불모성도 사라진다. 아누비스는 네프티스와 세트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옴보스(Ombos, 지금의 콤 옴보), 상 이집트의 옥시링코스(Oxyrhynchus), 일부 파이윰(Fayyum)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세트는 람세스 왕조시대에 상대적으로 대도시인 세페르메루(Sepermeru)에서 숭배되었다. 그곳에는 '세페르메루의 주인 세트의 집'이라고 부르는 주요 신전이 있었다. 이 마을의 별명은 '사막으로 가는 문'이었다. 그것은 이집트 국경지역의 신이라는 세트와 잘 어울린다. 세페르메루에서 세트 신전의 경내에 있는 한 건물은 '강한 팔을 가진 세트의 집'이라고 불렸다. 람세스 2세는 네프티스를 신전을 세웠는데, 그 신전은 '라메세스-메리아문의 네프티스의 집'이라고 불렸다. 세페르메루에 세트 신전과 네프티스 신전이 별도로 있었고, 별도의 사제들이 관리를 했다. 중간 정도의 세트 신전이 피와이나(Pi-Wayna) 마을 부근에 있었다. 파이윰 지방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수(Su) 마을에도 '세트의 집'과 '네프티스의 집'이 있었던 것 같다.
세트 신전와 네프티스 신전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은 볼로냐(Bologna) 파피루스에도 나온다. 이 파피루스에 지금은 사라진 마을 푸노젬(Punodjem, 달콤한 곳)에 있는 '세트의 집'에서 일하는 사제 프라엠합(Pra'em-hab)이 불평을 늘어놓는다. 프라엠합은 신전에 대한 부당한 과세에 대해 탄식하다가 '네프티스의 집'도 관리해야 하고 선박도 관리해야 한다면서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탄식한다.
세트와 네프티스 신전이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특별한 이유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오시리스 신화에서 네프티스는 남편을 배신하고 오시리스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트 숭배는 외곽지역에서 끈질기게 후대까지 이어졌다. 이런 지역으로는 카르가(Kharga), 다클라(Dakhlah), 데이르 엘-하가르(Deir el-Hagar), 무트(Mut), 켈리스(Kellis)가 있다. 이런 곳에서 세트는 '오아시스의 주인'이라고 불렸다. 네프티스도 마찬가지로 '오아시스의 여주인'으로 존경받았다. 네프티스는 이런 지역에 있는 오시리스 신전에서도 '여주인'으로 숭배되었다. 이런 지역에서 오시리스, 이시스, 네프티스를 3대신에 대치되어 세트와 네프티스를 숭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었다. 20왕조 이후에도 세트를 중요하게 여긴 것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Shait 운명의 여신. sai 참조
Shu(Su, 그리스 명칭 Sos)
타조의 깃털을 꽂은 슈
머리 위로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슈
'메마른'이란 뜻을 가졌고, '높이다'를 나타내는 동사에서 유래했으며, '들어 올리는 것' 이라고 풀이되는 슈는 공기와 하늘의 기둥을 의미하는 이집트 태초의 신으로, 헬리오폴리스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남매인 테프누트 여신과 함께 최초의 신들 중 한 명인 태양신 아툼의 정액이나 콧물에서 창조되었다. 테프누트는 그 뒤 그의 아내가 되었고 하늘의 여신 누트와 대지의 신 게브를 낳았다. 슈는 게브와 누트(하늘과 대지)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음으로써 둘을 분리하였다. 타조 깃털(그의 이름에 해당하는 상형(표의)문자)을 덮고 있고, 반듯이 누운 게브 신 위에서 누트 여신을 받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슈는 또한 공기의 신이며 성스러운 공허의 신이다. 그러나 다른 위대한 자연신들처럼 제사를 받지 않으며 항상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라의 후계자로서, 지상의 주인으로서 그는 아버지인 라와 마찬 가지로 그 권력의 성쇠를 맛보았다. 즉 아포피스의 자식들이 음모를 꾸며 아트 누브에 있는 궁전에서 그를 습격했기 때문이다. 슈는 그들과 싸워 이겼지만 그가 병이 들자, 충실한 신자들까지도 그를 배반했다.
Sobek(그리스 명칭 Suchos)
(BC 664년~332년경, 청동조각, 루브르)
소베크와 악어
악어 형상을 한 소벡
아멘호텝 3세와 소벡(소벡신전)
'당신을 지켜보는'이란 뜻을 지닌 악어의 신이고, 나일 강물에서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Neith의 아들이며, 파라오들의 권능을 상징한다. 악어의 모습으로 그려지거나 악어 머리를 하고 한 쌍의 깃털이 꽂혀있거나, 후대에 태양신 라와 관계하여 어떤 경우에는 태양원반과 uraes(코브라)가 결합되어 있는 모양의 왕관을 쓴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스 식 이름은 수코스이다. 그는 종종 라나 세트와 동일시되었다.
숭배의 중심지는 상하 이집트의 경계에 있던 엘 파이윰(el Faiyum)이었으나 후대에 전국적으로 숭배가 확산되었다. 현재 그의 신전 중 일부가 발견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그리스어로 크로코딜로폴리스(Crocodilopolis)라 불리는 마을에 있다. Kom O-mbo (현재, 아스완의 북쪽)과 상이집트의 테베도 또한 후대에 Sobek신의 숭배중심지가 되었다.
Sokar(Seker, 그리스 명칭 Socharis, Sokaris)
이아메스의 이름이 새겨진 프타 소카 오시리스(BC 600년~200년경, 화장벽토 칠 채색된 나무, 루브르)
식품의 신이지만 나중에는 부활과 재생의 신이며, 멤피스의 지하 묘지의 장례의 신이다. 매의 머리를 한 녹색 미라의 모습으로, 상이집트의 상징인 하얀색 왕관을 쓰고 홀과 채찍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로 스티우', 즉 복도의 문이라 불리는 성소에서 숭배 받았다. 그 문은 지하세계로 직접 연결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지하세계의 세케르 영역에서는 뱀과 비슷한 '네헤브카우'가 죽은 자들을 기다리며 누워있었다. 사자의 서에 따르면, 이미 고왕국 때부터 Sokar는 상이집트의 아비도스에서 죽은 오시리스의 현현으로 여겨졌다. Sokar는 파라오의 부활을 돕고 그와 그의 상속자들의 신성한 왕권을 넘겨준다고 한다. 또한 고왕국 때에 프타 신과 합쳐져서 Ptah-Sokar가 되었으며 이런 이름으로 사자 여신인 Sakhmet를 아내로 맞았다. 중왕국 때에는 때때로 이들 세 명이 모두 합쳐져 Ptah-Sokar-Osiris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Sokar는 미라 제작과 장례의식에서 사용되는 여러 물건들의 제작과 관련 있다. 그는 멤피스의 지하묘지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의 신이 되었으며, 결국은 지하묘지 자체의 수호신이 되었다. 테베에서는 왕실의 묘지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이었으며, 중요한 연례 축제가 그에게 경배를 표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그 축제는 오시리스가 Sokar신의 형태로 부활하는 것과 이집트의 정체(政體)가 지속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다. 이 축제에서 Sokar 신의 이미지는 'henu'라고 알려진 장식된 배에 실려 운반된다. 당시의 모습은 기원전 12세기 중엽에 세워진 메디네트 하부(Medinet Habu)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신전 내부 벽화에서 볼 수 있다.
Somtus(Harsomtus) Dendara에서 숭배되는 신.
Sopedu(Sopdu) 동쪽 변경의 신으로, 매의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큰 깃털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는 유목민(Bedouin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Sopedu 신은 동쪽 사막과 시나이 반도와 시나이의 터키옥 광산의 신이었다. 피라미드 텍스트에서는 별자리의 모습을 띄게 되어 시리우스별의 모습으로 이시스 여신을 임신시킨다. 시리우스별은 7월에 출현하여 나일 강의 연례적인 범람을 알려주는 별이다. 이시스는 그래서 Sopedu-Horus라는 혼성적인 신을 낳게 되었다. 주된 숭배 중심지는 나일 강 삼각주의 북동쪽에 있는 Saft el-Henna에 있었다.
Sothis(그리스 명칭, 이집트 명칭은 Sopdet)
천랑성(天狼星) 시리우스를 의인화한 여신으로, 7월의 새벽에('태양과 같은' 때에) 출현하여 나일 강의 연례적인 범람을 미리 알려준다. 따라서 당연히 연례적인 범람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번영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별들이 얹혀있는 상이집트의 큰 원뿔형의 관을 쓰고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리우스는 1460년마다 칠월 새벽에 태양과 동시에 떠오른다(이 천문학적 행사가 AD 139년 로마 안토니우스 황제 재임기간에도 일어났었는데, 당시 이 대대적인 천문학적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안토니우스 황제는 동전에 이 사건을 기념하였다).
시리우스가 떠오르는 기간, 즉 시리우스 사이클은 이집트 나일 강의 연례적인 범람을 미리 알려준다. 따라서 연례적인 범람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번영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의 파피루스에서 이시스 여신은 오시리스의 죽음을 탄식하고 오시리스가 오리온성좌로 현현하자 그를 따라가겠다고 맹세하면서 자신을 Sothis 여신과 동일시하였다. 소프데트는 Sah(오리온자리)의 배우자이며, 그녀의 아들은 Soped이다. 이런 트라이어드는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에 필적한다. 파피루스 문서에 따르면 왕(오시리스를 뜻함)이 그의 여동생과의 결합으로 금성(비너스)를 낳았다고 전한다.
종종 소프데트는 남자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호루스와 연관되어진다. 이때 소프데트는 동쪽 끝과 세상의 네 귀퉁이 중 하나의 신으로 나타나며, 너트의 한쪽 다리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Suchos Sobek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