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제 3 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 BC 1081 ~ 711)
히타이트 인들과 벌인 전쟁과 교류는 이집트가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집트는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의 침입에 시달렸다. 이렇게 이집트 전체를 지배하는 통일 왕조가 존재하지 않고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혹은 소국가로 분열되거나 외국 왕조에 정복당한 혼돈의 시기에 결국 바다 민족의 리비아와 누비아의 이민족 왕조가 들어섰다. 리비아 출신의 소센크 1세(제22왕조)와 누비아 출신의 피예(제 23왕조), 사바코가 대표적 인물로 각각 하이집트와 상이집트 중심의 패권체제와 이집트 내의 주변 도시국가의 조공체제를 일시적으로나마 유지시켰다. 엘레판티네 섬 남부에 쿠시 왕국을 건설한 누비아 흑인들은 북부로 진출하여 80년 넘게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누비아 흑인 출신의 쿠시왕조는 아시리아와 유대 지역의 패권 다툼에 나섰으나, 에사르핫돈 왕의 침공으로 수도 멤피스와 하이집트 전역이 지배당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원한 건 직할이 아닌 이집트 도시 소국들의 조공이었으므로 얼마 안 가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쿠시 왕조는 멤피스의 회복을 꾀했으나 다시 빼앗기고 누비아의 나파타로 천도했고 이후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누비아 흑인들의 시대가 끝나고 26왕조가 등장하였지만, 이 역시 독자적인 힘으로 성립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의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누비아 인들이 건립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막의 모래가 뒤덮고 있는 BC 8세기 중엽의 아문 신 대신전의 윤곽이 야자나무 숲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드제콘수이우산크(Djedkhonsouiousankh)의 사자 (死者) 들 명부 파피루스(채색 파피루스, 루브르)
파디우프(Padiuf)의 화병-장례용 토기들
나체 여인(상아조각)
제콘수이우판크 석관 뚜껑(루브르)
그물 무늬의 옷을 입은 머리가 없는 여자(BC 1070년~664년경, 청동, 금 조각, 루브르)
어린 시절의 머리 타래를 하고, 앉아 있는 파포크라테스(구리질 합금, 루브르)
헤누타우이의 시스트르 악기(금, 청동, 루브르)
아피스 황소의 달리기(파디셋 석관 요소 일부, 루브르)
석관의 조각 일부(화장벽토 칠 채색된 석관, 릴 미술관)
세샤 여신의 숭배 장면이 새겨진 필기용 이중 종지(돌 조각, 루브르)
음악에 대한 두 풍자 장면이 장식된 부적(편암, 루브르)
파디우프의 화병-장례용 토기들(화장벽토 칠이 채색된 나무 조각, 루브르)
이메넴사우프의 신화 파피루스, 아몬의 방패지기 고관(루브르)
드제콘수이우산크의 사자(死者)들 명부 파피루스(루브르)
네스카파슈티의 신화 파피루스, 아몬의 곳간 곡식을 관리하는 회계 서기관(루브르)
제 20 왕조 말기 : 이집트 재분열, 누비아 독립, 델타 동부(리비아 출신 왕의 즉위)
기원전 1180년 경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불명의 바다 민족들이 대규모로 등장하여 오리엔트 지역은 초토화되었고 이집트 또한 쇠퇴하였다. 바다 민족은 리비아 인들을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의 메슈웨슈족, 베르베르 족, 이탈리아 반도, 발칸 반도, 소아시아에서 온 5개 해양민족이 중심으로 연맹한 집단이었으며, 가히 이런 민족 이동은 로마 제국과 켈트족,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비견할 수준이었다. 이집트는 람세스 3세 시기에 리비아 인들을 여러 차례 격파했으나 리비아 인들의 인구 이동, 특히 서아시아의 영유문제는 막지 못했으며 누비아와 수단도 독립하면서 이집트 분열의 원인이 된다. 비록 기원전 10세기에 바다 민족의 리비아 인들이 파라오가 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람세스 3세가 아니었다면 이집트도 히타이트처럼 사실상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제 21 왕조(BC 1081 ~ 931)
이집트 제20왕조의 몰락 이후 기원전 10세기 중반까지 이집트의 권력은 테베의 아문 대사제단에게 있었다. 21왕조는 아문 대사제단과 같은 시기에 타니스를 중심으로 한 하이집트 지방을 통치하였다. 이 때문에 이 왕조를 '타니스 정권'이라고 하기도 한다.
카낙의 아몬의 사제인 파세르의 석관 큰 통(루브르)
아몬 레의 여가수, 타네테레렛의 석관(루브르)
신성체로 쓰여진 편지(파피루스, 루브르)
세리멘의 신화 파피루스(루브르)
피네젬 파라오의 금 목걸이(금, 루브르)
소베크레 악어 신의 초상이 새겨진 목걸이 평형추와 방패(금, 청동, 조각밀랍 주조, 상감 기법의 조각, 루브르)
피네젬 1세의 장례용(이집트 자기, 루브르)
제 21 ~ 23 왕조 계보
Smendes
테베에서 헤리호르가 왕위를 찬탈할 무렵, 북부에서는 네지바다두트(스멘데스)가 타니스에 제21왕조를 열어 이집트는 양분되었다. 그 후 리비아 출신의 일족이 중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펼쳤으며 곧이어 시샤크(셰숑크 1세)는 삼각주지대의 부바스티스를 근거로 제22왕조를 일으켰다. 삼각주 지역에서 태어난 스멘데스는 아마도 이전의 왕조 출신이었을 그의 왕비 텐타몬을 통해서 통치권을 확보했던 것 같다.
이집트 제21왕조의 수도는 타니스(Tanis), 리비아나 팔레스티나 출신 왕조라는 설이 있다. 람세스 11세가 죽자 타니스 총독인 스멘데스가 왕이 되어 제21왕조(타니스 왕조라고 부름)를 세웠다. 타니스와 테베의 왕들로는 스멘데스, 프수센네스, 셰숑크 1세 등이 알려져 있다.
Amenemose(Amenemnisu)
Pasebakhaienniut I (Psusennes I)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에는 황금 마스크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황금을 신의 피부라고 생각해 황금이 가장 귀하게 여겨졌으며 사후 세계에서는 파라오의 신성을 보장하기 위해 왕을 매장할 때 널리 사용됐다. 아메넴하트 3세(Amenemhat III) 의 딸인 네페룹타(Neferuptah) 공주의 시신에서 발견된 황금색이 홍옥수의 복잡한 원호와 황금 매 머리로 마감한 장석에 나타난다.
몽테가 타니스에서 발굴한 프수센네스 왕의 미라는 목에 청금속 구슬을 엮은 커다란 목걸이를 걸고 있다. 이 목걸이의 매력적인 특징은 구슬 한 개가 나머지 구슬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다른 구슬들보다 색깔이 짙고 상당히 순수한 이 구슬은 장식이 새겨진 유일한 구슬이다. 구스에 쐐기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R. 보저는 고서체와 역사를 근거로 하여 이 짧은 아카디아어 명문을 기원전 11세기의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명문에 이름이 기록된 관리는아마르나 시대에만 그 존재가 입증되어 있다. 구슬에 새겨진 명문은 아래와 같다.
"이바슈시-일루 총리總理(의 소유). 그는 사랑하는 맏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슈르의 수호신 아슈르와 엔릴과 닌릴(의 소유물을 만들었다). 아무도 이것을 부당하게 탐내어 훔쳐가거나 신과 왕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써 이것을 제 것으로 삼지 않기를."
Amenemopet
Osokhor(Osorkon the Elder)
오소르콘 1세는 리비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그의 시대부터 제26왕조까지는 리비아인의 혈통을 가진 통치자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검은 고양이는 행운을 혹은 불행을 가지고 있을까?
이는 고양이가 여신에게 바쳐진다고 생각했던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점차 고양이는 신의 상징이 되었으며, 위대한 고양이 여신으로 존재했다. 이집트 제22왕조 오소르콘은 장엄한 신전의 중앙에 하얀 고양이를 두었으며, 격식대로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다. 어떤 파라오는 그의 고양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의 옷소매를 잘라내기도 했다.
중세 이전까지만 해도 검은 고양이가 악마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중도에 서지 않고 검고 흰지 옳은지 그른지만 믿으려 했다. 편 나누기를 좋아해서, 당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쁜 사람이어야만 했다. 당신이 신을 숭배하지 않으면 악마를 숭배하는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새로운 종교적인 것은 이전의 종교에 의해서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것은 고대의 뿔이 있는 신이 그리스도교의 악마가 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고양이에 대한 박해는 시작되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박해한 사람들이었고,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야행성이고 밤에 돌아다녔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악마의 부하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악마가 변한 모습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고양이의 유연한 몸놀림과 밤이면 빛나는 눈 또한 악마에 대한 희생양이 되었다.
검은 고양이는 어둠과 의혹을 구체화시켰으며, 비이성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나타내게 되었다. 만약 검은 고양이가 아픈 사람이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면, 그는 곧 죽게 된다면, 고양이의 초자연적이 능력은 비난받았다. 만약 검은 고양이가 당신에게 해를 주지 않고 길을 지나간다면, 이는 악마로부터 보호받은 것을 의미했다.
Siamun
성경 역사상 애굽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 솔로몬은 바로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그 바로는 게셀을 탈취한 후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준 인물이었다(왕상 9:16). 그는 시아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짙다. 시아문은 그의 왕조 수도였던 타니스(Tanis. 성경의 소안)에서 발견된 바 깨어진 한 전승기념 부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필시 블레셋과 팔레스타인 남서부를 침략한 애굽 왕이었을 것이다. 시아문의 왕조는 곧 무너지고 새 왕 곧 제22왕조의 창건자 셰숑크 1세(Sheshonq I 왕상 11:4014:25의 "시삭")가 대신하여 일어났다.
Pasebakhaenniut II(Psusennes II)
제 22 왕조(BC 931 ~ 725)
초기에는 성공적이어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을 되살렸다. 솔로몬이 죽은 뒤 셰숑크 1세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 예루살렘을 유린했다. 오소르콘 3세 때 페이웨드 리비아인이 삼각주 서부지역을 위협하는 바람에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22왕조의 후반기를 특징짓는 것은 나라의 분열이었다. 한꺼번에 최고 6명이나 되는 왕이 나라를 쪼개어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리비아인 족장들도 저마다 지역을 다스렸다. 이같은 지역 분할과 동시에 도시화 경향이 일어났고 분열이 가장 심한 곳은 나일 삼각주 지역이었다.
안케세니셋 파피루스 : 저승 여러 지역을 여행하는 태양신, 신성체 상형문자, 붉고 검은 그림(루브르)
총애 여신에 의해 이루어진 의식 장면이 그려진 파피루스(루브르)
사크 이름이 새겨지고, 보호 기원이 써 있는 목걸이용 장식 부적(금, 루브르)
카로마마 총애 여신(금, 청동 상감기법 조각, 루브르)
쉐페누펫 여신 숭배 궤(금, 은, 청동 상감기법, 루브르)
바크탄의 석비(사암 부조, 루브르)
제 22 왕조 계보
Sheshonq I(ShishakⅠ)47
BC 10세기에 활동한, 이집트 제22왕조의 초대 왕(BC 945~924 재위). 리비아 종족의 왕족이나 족장 출신으로 '메시웨시의 대(大)추장'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중앙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정착한 듯하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의 가문이 동부 나일 삼각주의 부바스티스에 있었으며, 아들 오소르콘을 이전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프수센네스 2세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싸움을 치르지 않고 왕위에 오른 것 같다. 셰숑크 1세는 성경 열왕기상 11:40, 14:25 및 역대하 12:2~9 에서 시삭이라고 묘사되어있고, 업적은 카낙에 위치한 부바스티스 입구에 새겨져있다. 성서에 따르면,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 5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맞서 이스라엘 왕위계승권에 도전한 여로보암을 지원하기 위해 BC 930년경 "이집트의 시삭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했다"(Ⅰ열왕 14 : 25~26)고나와 있다. 카르낙에 있는 부조(浮彫)와 비문은 팔레스타인에서의 그의 승리를 찬양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이렇게 그가 궁전과 사원을 약탈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집트의 기록에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메기도에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파편이 발견되었다.
셰송크 1세의 스핑크스상
카로마마 총애 여신
Nimlot (2)
Osorkon I
하토르의 수석 음악가에게 주는 대지 증여 석비(루브르)
Sheshonq II
Takelot I
Osorkon II
Horsiese I
Takelot II
Sheshonq III
오우세크 가슴 방패 목걸이를 하고 앉아 있는 바스텟 암고양이의 큰 조상(彫像)
Pimai(Pami)
Sheshonq V
Osorkon IV
제 23 왕조(BC 813 ~ 711)
오소콘 4세와 타디바셋 왕비의 이름이 새겨지고 세크메트 암사자의 머리가 장식된 방패(호박금, 루브르)
Padibastet I(Petubastis I)
Iuput I
Sheshonq IV
Osorkon III
Takelot III
Amunrud (Rudamon)
Iuput II
Sheshonq VI
Iny
Peftjauawybast
Nimlot (4)
Djehutiemhat
제 24 왕조(BC 724 ~ 711)
제 24 ~ 25 왕조 계보
Tefnakht
Bakenrenef(Bokchoris)
Padinemti
제 25 왕조(BC 711 ~ 656)
흑인 파라오는 75년 동안 이집트 전역을 통치한 이집트 제25왕조의 누비아 왕들을 일컫는다. 누비아 인들과 그들의 적이 새겨놓은 비문으로 흑인 파라오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가늠할 수 있다. 흑인 파라오들은 분열된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장엄한 기념물들을 수없이 세우면서 오늘날의 하르툼 남쪽 국경에서 북쪽으로는 지중해까지 길게 뻗은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아시리아 인들에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아마 예루살렘도 구해주었던 듯하다.
이집트 국내 정치는 아시리아 제국의 성장에 영향을 받았다. BC 671년에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이 이집트에 들어와 타하르카 왕을 상이집트로 쫓아냈다. 2년 뒤 타하르카는 멤피스로 돌아왔지만 BC 667년에 에사르하돈의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은 타하르카를 쿠시왕국에서 유래한 누비아인들이 확고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테베로 쫓아냈다. 타하르카의 후계자인 타누타몬은 아시리아를 지지하는 삼각주 군주들의 동맹군을 멤피스에서 무찔렀지만, 이에 대해 아슈르바니팔은 테베를 약탈하는 것으로 보복을 했다.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의 사냥 장면이 담긴 벽화
바사 총독의 이름들과 직책이 쓰여 있는 장례용 원뿔
왕관을 쓴 나체 여인의 작은 상(像)(상감 청동 조각, 루브르)
우나몬의 석비(채색된 나무, 렌 미술관)
사자 머리를 한 아페데마크(Apedemak)(BC 100년, 루브르)
뒷면에 에디오피아 문자(Meroitic script)로 고대 이집트 제 25 왕조의 왕 타누타마니(Tantamani)의 이름이 쓰여 있다.
Alara(Alula)
Kashta
Piankhi(Piye)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건설했던 위대한 문명은 군소 군주들에 의해 분열된 채 쇠퇴하고 있었다. BC 730년 누비아의 왕 피예가 이끄는 군대는 나일 강을 따라 도시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한 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 멤피스를 불화살로 맹공격한다. 당시 피예(피앙키)는 20년 동안 아프리카 북동부의 누비아 왕국(오늘날 수단의 대부분 지역에 해당)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람세스 2세와 투트모세 3세 같은 위대한 파라오들의 영적 전통을 계승한 정통 후계자인 이집트의 진정한 통치자로 여겼다. 피예가 하이집트를 가본 적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일부에서는 그의 호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북쪽의 군소 족장들을 굴복시켜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75년 동안 누비아는 이집트 전역을 통치한다.
그의 군사는 배를 타고 나일 강 북쪽으로 나아가 상이집트의 수도 테베에 상륙했다. 피예는 성전(聖戰)을 수행하기 위한 절차로 병사들에게 전투에 앞서 나일 강에서 몸을 씻고 고운 모시옷을 입은 후, 카르나크 신전의 성수를 몸에 뿌려 몸을 정결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카르나크 신전은 피예 자신이 숭배한, 숫양의 머리를 가진 태양신 아몬을 기리는 성지다. 피예는 향연을 베풀고 아몬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렇게 정화의식을 치른 후 그의 군대는 그들 앞을 가로막는 적을 물리치며 전진했다. 1년 동안 계속된 원정 끝에 나일 강 삼각주의 강력한 군주였던 테프나흐테를 비롯해 이집트의 모든 군소 군주들이 그에게 항복했다. 테프나흐테는 전령을 보내 피예에게 이렇게 전했다.
“자비를 베푸소서! 이 치욕의 날에 감히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당신의 눈부신 광채 앞에 설 수도 없으니 이는 내가 당신의 위용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피정복자들은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피예에게 자신들의 신전에서 참배하고 가장 좋은 보석과 준마들을 가져가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다. 그는 기꺼이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피예의 속왕이 된 그들은 그의 앞에서 벌벌 떨었지만 누비아와 이집트, 두 왕국의 제왕으로 새로 등극한 피예는 다소 의외의 행보를 보였다. 군대와 전리품을 챙겨 남쪽에 있는 자신의 고향 누비아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그러고는 이집트로 다시 오지 않았다.
피예는 BC 715년 재위 35년 말에 죽었다. 신하들은 그의 바람대로 이집트 식 피라미드에 시신을 안치했다. 그가 아끼던 말 네 필도 근처에 함께 묻었다. 그는 500여년 만에 이집트 식으로 매장된 최초의 파라오였다. 하지만 이런 위업을 이룩한 위대한 누비아의 왕, 피예가 우리에게 말 그대로 얼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교한 화강암 석비에 그의 이집트 정복을 기념하고자 새긴 피예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에 지워져 버렸다. 누비아의 수도 나파타에 있는 신전 부조에 피예의 다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외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피부색이 어두웠다는 사실이다. 피예는 최초의 소위 흑인 파라오였다.
이집트가 피예 왕에게 바친 선물로 보이는 황금 여신상 장식의 수정 부적
(쿠루에 있는 왕실 묘지에서 발굴, 미국 보스턴 미술관)
Shabaka
Shabataka
Gemnefkhonsubak
Taharqa
BC 8~7세기에 이집트를 통치했던 누비아의 왕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타하르카는 북쪽에서 쳐들어온 아시리아 인들을 물리치는 한편 나일 강변을 따라 웅장한 기념물들을 건립, 증축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의 군대가 쳐들어와 타하르카는 결국 남쪽에 있는 그의 고국 누비아로 쫓겨난다. 타하르카는 그곳에서 BC 664년에 죽었다.
타하르카 왕이 고대 이집트의 가장 성스러운 곳 중 하나인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에 증축한 주랑 현관에 나란히 늘어선 돌기둥 잔해들
타하르카를 비롯한 누비아의 파라오들과 왕비들이 안치된 당시 누비아의 정치, 무역의 중심지 나파타(오늘날 수단에 위치함) 근처에 위치한 이집트 식 피라미드
이집트에 대한 통치권을 잃고 수백 년이 지나서도 누비아는 메로에에 복원된 이 피라미드들처럼 왕릉을 피라미드로 짓는 이집트 전통을 고수했다. 오늘날 수단에는 이집트보다 더 많은 피라미드가 있다.
누리에 있는 누비아 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이시스 여신 펜던트(미국 보스턴 미술관, 허가 하에 제작된 복제품)
타하르카가 바르칼 산에 세운 아몬 신의 아내인 무트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나는 타하르카와 혈투를 벌이며 매일 끊임없이 싸웠노라. ... 모든 신들이여 그를 저주하소서.”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하돈(화강암 석비에 새겨진 모습)이 BC 674년 이집트의 누비아 왕을 물리쳐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해 이렇게 말했다. 에사르하돈은 그가 아시리아로 끌고 온 사람들과 재산의 목록을 기록했다. 그 중에는 누비아의 왕세자인 타하르카의 아들 우샨쿠루도 있었는데, 석비에서 목에 밧줄을 매고 에사르하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인물인 듯 보인다.(독일 베를린 소재 이집트 박물관)
봉헌물을 보여주는 파라오의 작은 상 (像)
Padibastet II(Petubastis)
Neferkare
Tenuetamun
왕족 두상(조각, 석회암, 루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