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중 왕국(Middle Kingdom Period, BC 2061 ~ 1665)
국토를 재통일시킨 왕의 과제는 지방 봉건 귀족을 굴복시키고, 확립되어 있는 지방 분권을 와해시켜 다시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를 추진시키는데 있었다. 고왕국 시대가 피라미드를 주로 건설하였다면 중왕국 시대는 신전을 주로 조성하는 시대이다. 왕국의 수도로 테베(Thebes, 오늘날 Luxor)가 되면서 멘투호텝 왕조로 불리는 11왕조 후반은 남쪽의 테베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제 12왕조는 파윰 오아시스와 멤피스 사이에 위치한 엘-리쉬트를 수도로 삼았다. 하이집트의 봉건 귀족들은 왕의 지배하에 두어졌으나 국토의 재통일을 실현했을 때 공헌한 중이집트의 봉건 귀족들은 더욱 그 자치를 대폭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로 인해 왕의 강권에 의한 중앙 집권화의 시도는 좌절할 수 있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멘투호텝 2세는 테베의 왕이었지만 이집트 전체의 파라오로 등극하여 51년을 통치하면서 서서히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는 진전하여 '하이집트 총독'을 두는 것을 비롯하여 각주에 중앙으로부터 관리가 파송되어 왕권 하에 통제화가 실현되었고, 그에 따라 중왕국의 초석이 놓여졌다. 그의 아들 멘투호텝 3세는 오늘날의 동부 아프리카 소말리아로 여겨지는 푼트에 대규모 무역 원정대를 파견하는 등 이집트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멘투호텝 Ⅳ세 시대에 이르러 가속적으로 확대하는 왕권에 의한 중앙 집권화에 반발한 노모스의 제후(諸候)들은 왕의 재상 아멘엠헷 I세(AmenemhetⅠ)를 옹립하여 제 11왕조를 쓰러뜨리고 제 12왕조를 설립했고, 고왕국 시대의 명성에 버금가는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집트는 상 하 이집트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아메넴헷트는 수도를 테베에서 북쪽의 엘-리쉬트로 옮겼고, 누비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 3급류 지역에까지 요새를 설치하는 등 이집트의 남쪽 영토를 확장시켰다.
센우스렛 II세(SenusretII = 세소스토리스 II세, Sesostoris II)는 수도를 다시 일흄(Illhum)으로 옮겼다. 그 땅은 나일 강의 지류가 화이윰(Fayum) 분지로 흘러 들어가는 요해지인데, 그는 거기에 수문을 건설하고 대규모적인 관개용 수로를 확보하는데 힘썼다. 이 대 사업은 아멘엠헷 III세 시대에 이르러 겨우 완성되었다. 이후 화이윰은 이집트의 곡창지대로 되고 왕의 영지로 되어 국고를 풍성하게 한 결과 왕권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 시나이 반도의 광산이나 와디 하마맛(Wadi Hamamat)의 채석장에 원정대가 파견되어 크레데(Crete)나 푼트(Punt), 비블로스(Byblos)와의 통상이 성하게 되었다. 센우스렛 III세는 누비아로 군사를 보내 제 2 급단(急湍) 지방까지 정복하고, 중앙집권 체제가 실현된다. 이와 같이 화이윰의 개발, 활발한 통상관계, 왕에 의한 누비아 정복 등 군사 · 정치 · 경제상의 발전이 왕에 의한 중앙집권화를 실현시킨 것이다.
중왕국 시대에는 왕에게 '정의(마앗, Ma.at)'가 요구되었다. 그리고 피라밋 텍스트에 대신하여 구판문(樞板文, coffin text)이 성하게 되었다. 그것에 의하면, 창조신은 모든 인간을 균등하게 창조했으며, 영생을 보증하는 것은 신분이나 직위가 아니고 '정의'를 행하는데 있다고 하여 '정의'의 가치는 영원하며 적극적으로 추구되지 않으면 안될 과제로 인식되어 왕은 '창조신이 그에게 맡긴 전 인류를 쉬지 않고 파수하는 선한 목자'가 아니면 안 되었다. 이 '선한 목자'라는 왕권 사상은 신왕(神王) 이데올로기와 아울러 중왕국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다.
BC 1700년경 누비아의 고유 목축문화를 보여주는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여성 점토상(이집트 아스완 소재 누비아 박물관)
타벳의 석비(다색배합, 석회암 저부조, 렌 미술관)
신성 화가 케페카레-에밧의 장례 석비(석회암 부조, 렌 미술관)
사케티의 석비(석회암 부조, 루브르)
신성체로 쓰여진 서기관의 서판(화장벽토 칠, 나무, 루브르)
봉헌 테이블(석회암 저부조, 렌 미술관)
지게 막대를 메고 있는 남자(석회암 부조, 루브르)
하마 머리가 장식된 조개껍질 화장분 숟가락(패류, 루브르)
작은 바늘 저주상(像)(나무 회화 조각, 루브르)
무릎을 꿇은 포로(석회암, 릴 미술관)
토드의 보물 중 은괴(루브르)
오리 무리 모형(백대리석, 나무, 칠, 루브르)
헤테피(조각, 루브르)
바구니와 오리를 들고 있는 봉헌물 운반 여자(회화, 나무 조각, 루브르)
나크티의 봉헌물 운반 담당 여자(다색배합 나무 조각, 루브르)
봉헌물을 지고 있는 여인상들의 행렬(화장벽토 칠 채색된 나무 조각, 루브르)
세 연꽃 문양이 있는 작은 대접(자기, 루브르)
작은 잔(구운 진흙, 릴 미술관)
베스, 투에리스, 우잣 신이 그려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텍스트와 장면이 장식된 세공 상아(상아, 루브르)
배 모형(나무 조각, 루브르)
작은 배 모형(화장벽토 칠이 채색된 나무 조각, 루브르)
경작지에서 소가 끄는 쟁기로 일하는 모형(화장 벽토 칠 나무 조각, 루브르)
나크티의 묘에서 출토된, 곡식의 입하를 기록하는 서기관들이 있는 곳간 모형(화장벽토 칠 채색된 나무 조각, 루브르)
나크티 묘에서 출토된 작은 배 모형(다색배합 나무 조각, 루브르)
주점 장면 모형(채색된 나무 조각, 루브르)
장례용 작은 배 모형(화장벽토 칠 채색된 나무 조각, 루브르)
나크티의 석관(루브르)
하마(자기, 루브르)
미라 가면(채색, 도금, 석회 조각, 루브르)
사람 두상 형태의 장례용 토기 뚜껑(채색, 구운 진흙, 릴 미술관)
22대 왕조 오소콘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하토리 왕 기둥 상부, 부바티스 신전(분홍 화강암 부조, 루브르)
메다무드 신전의 문(석회암 부조, 루브르)
이이메루 대신(사암 조각, 루브르)
이집트 남자 두상(반암, 루브르)
흰 왕관을 쓴 왕의 대형 두상(석회암 조각, 루브르)
제 11 왕조 후기
아시아 (왼쪽)와 이집트인 (오른쪽)의 묘사. 아시아 지도자는 "외국 땅의 통치자"로 분류된다.(Ibsha)
Dispute between a man and his Ba(삶에 지친 어느 남자와 그의 영혼과의 대화)
영혼과 그와의 대화 또는 어느 남자와 그의 넋 사이 이야기는 이집트 중기 그의 생활이 매우 어렵고 불행한 상황에 대한 파피루스 이집트 원본이다. 이른바 지혜 문학의 일부이며 남자와 그의 넋 사이의 대화 형태를 취한다. 본문의 시작 부분이 빠져 있고, 수많은 문법이 있으며, 번역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155 컬럼의 고대 이집트 문자 형식의 서사시로 작성, 파피루스의 오른쪽 페이지가 베를린 3024에 있다.
시놉시스(M. Lichtheim의 번역에 이어) : 그 남자는 삶이 죽음을 향해 질질 끌려가는, 그의 쓸쓸하고 가난한 넋에게 이야기한다. 그는 삶이 그에게 너무 비참하다고 신을 버리고 싶어 죽겠다는 자신의 바보를 비난했다. 그는 생명이 너무 무거워서, 그의 마음은 서양에서(즉, 내세에서) 쉬게 될 것이고, 그의 이름은 생존하고 그의 몸은 보호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넋이 참을성이 강하고, 내세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제물을 만들기 위해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그의 영혼(ba)은, 슬픔의 죽음은 가치 없는 삶, 인류와의 단절, 삶의 포용과 그와의 머물기를 타이르면서 죽음에 대한 매력에 잘못됨을 말해준다. 프릿 처드 (Pritchard)의 해석은 그 반대를 강력하게 암시하지만, 남자가 자신의 삶을 살 것을 생각하고 있음을 본문에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형식 : 미리암 리치에임 (Miriam Lichtheim)의 번역에서 이 텍스트는 산문, 대칭적으로 구조화된 말투의, 서정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역사 : 파피루스는 1843년 이집트 학자 카를 리차드 렉시우스(Karl Richard Lepsius)가 구입했으며,현재 베를린 주립 박물관에 속한 이집트 박물관과 파피루스 람믈 람 (Papyrussammlung)에 있다. 초판본은 1859년에 출판되었고 이후 수적으로 번역되었으며 때로는 매우 다르게 해석되기도 했다.
Dispute between a man and his Ba(상형문자 hieratic 원문)
이티센의 석비(석회암 부조, 루브르)
Mentuhotep II Nebhepetre
멘투호테프 2세는 이집트 제11왕조의 파라오로, 제1중간기의 혼란을 끝내고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였다. 그의 이름은 '멘투(테베의 전쟁신)가 만족하신다'라는 뜻이다. 즉위명은 네브헤테프레로 '레가 기뻐하신다'라는 뜻이다. 멘투호테프는 인테프 3세와 이아(Iah)의 아들이었으며, 그 자신은 '왕의 어머니'로 불린 템(Tem)을 비롯하여 다섯 명의 아내를 두었다. 부인들과의 사이에 멘투호테프 3세를 낳았다. 토리노 파피루스에 따르면 총 51년을 다스렸다.
재위 14년, 아비도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이집트 제10왕조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이 놓였다. 정확히 어느 시기에 통일을 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재위 39년에 "두 땅을 통일한 자"라는 칭호를 쓴 것이 알려져 있다. 같은 해에 멘투호테프는 나일 강의 제1폭포를 지나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다. 이때 그는 제1폭포 남쪽으로 27km 떨어진 아비스코까지 진격하였다고 한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원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
멘투호테프는 전쟁에 능한 파라오답게 전쟁과 관련된 유물을 남겼다. 미국의 고고학자 허버트 윈록은 멘투호테프 신전 근처에서 대형 무덤을 발견하였다. 이 무덤은 수십 명의 전사자들의 무덤이었는데, 집단적인 전쟁 묘지로는 매우 이른 시기의 것으로 평가된다. 이 외에 멘투호테프는 나라를 재정비하고 재상을 두었는데, 아크토이라는 재상은 누비아 원정에 동참하기도 했다고 한다.
멘투호테프의 무덤은 테베의 서안에 위치한 다이르알바하리(Dayr al-Bahri)에 있다. 그의 선왕들은 모두 이 근처에 묻혔다. 이 지역 근처에 훗날 왕들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s)가 들어서며, 대표적으로 하트솁수트의 무덤이 건설된다. 멘투호테프의 무덤 신전으로 들어가면, 석조 좌상이 등장한다. 석조 좌상은 하얀 색 왕위 갱신제 복장과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빨간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오시리스를 상징하고 있다. 그의 무덤 근처에는 멘투호테프를 모셨던 다기 등의 무덤이 있다. 이 외에도 그는 아비도스, 덴데라 등 다른 여러 도시에 자신의 기념물 등을 세웠다.
하이집트의 빨간관을 쓴 멘투호텝 2세 사암
Mentuhotep II세의 장제원
Deir el-Bahari의 장제원(mortuary temple)에 있는 Mentuhotep II세와 이집트 문자를 새긴 벽화
Mentuhotep II세와 그 오른쪽에 Intef III, 회계원(treasurer) Kheti, 그 왼쪽에 Iah 왕비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카위트 왕비(석관에 새겨진 모습)는 멘투호테프 2세와 정략 결혼한 누비아 출신의 귀족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이집트 카이로 소재 이집트 박물관)
Mentuhotep III
멘투호테프 3세는 이집트 제11왕조의 파라오이며, 그의 이름은 '멘투(테베의 전쟁신)가 만족하신다'라는 뜻이다. 즉위명은 산크카레로, '레의 영혼에 생명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고 이집트 제1중간기를 마무리지은 멘투호테프 2세의 아들이었다. 멘투호테프 3세의 무덤은 선왕의 무덤이 있는 다이르 알바하리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파라오 자리는 멘투호테프 4세가 계승하였다.
Mentuhotep III세는 그의 통치의 고대 왕국 이후 완료되지 않은 각종 건축 사업을 위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8년 동안 푼트(Punt)의 땅을 탐험을 했다. Hammamat의 비문은 3000명의 강한 군대를 동원해 선왕 때부터 신하였던 청지기 Henenu의 지휘 하에 탐험을 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들이 콥토스(Coptos-상업의 거점)를 떠나 홍해를 거쳐 그들은 미래 탐험을 위해 12개의 우물을 파고 반란군의 지역을 정복했으며 푼트지역 에서 향, 껌, 향수를 가지고 돌아왔고, 와디 함 마맛(Wadi Hammamat)의 돌을 채취했다.
상 카레 멘 투헤 텝(Sankhkare Mentuhotep)은 그의 통치 12년 동안 여러 건의 건축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그 자신의 사후 기념관(사원)은 Deir el-Bahari에서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는 못했다. 성전은 아버지의 기념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둑길은 성전 건축물로 인도하였을 것이다. 비문은 왕이 암면에 떨어진 방에 묻혔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상 카레 멘 투헤 텝(Sankhkare Mentuhotep)은 서쪽 테베의 토스 힐(Thoth Hill)에 세워진 진흙 벽돌 사원도 가지고 있었다. 사원은 오래된 고풍의 사원의 위치에 지어졌는데, 그것은 신 몬투 라 (Montu-Ra)에게 바쳐졌다. 이 사원은 11번째 왕조가 끝날 무렵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Medamud의 Monthu 사원에 있는 Mentuhotep III세 부조
토드 신전에서 나온 부조(석회암, 루브르)
곤봉 무기를 꺼낸 왕(석회암 부조, 루브르)
소피의 석관(채색, 나무, 루브르)
몬투 신의 무릎 위에 앉은 어린 왕(석회암 부조, 루브르)
멘투호텝 3세의 명칭 총체가 있는 조각(석회암 부조, 루브르)
신과 여신에게 둘러싸인 왕(석회암 부조, 루브르)
Mentuhotep IV
멘투호테프 4세는 이집트 제1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며, 즉위명은 네브타위레로, '두 땅의 신은 레이시다'라는 뜻이다. 멘투호테프 4세의 이름은 각종 기록물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사카라 석판, 아비도스 왕 목록과 같은 연대기 기록에는 멘투호테프 3세가 1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록되어 있다. 토리노 파피루스의 11왕조 부분에서 유실된 마지막 부분(5-18)이 멘투호테프 4세에 관한 부분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멘투호테프 4세의 무덤과 석관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시대의 재상은 아메넴헤트였는데, 이가 바로 이집트 제12왕조의 개창자인 아메넴헤트 1세이다. 재위 2년, 멘투호테프는 그에게 명을 내려 와디 함마마트(Wadi Hammamat) 지역에서 파라오의 무덤을 지을 재료를 구하라 하였다. 아메넴헤트가 이끈 원정대의 규모는 1만에 달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멘투호테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아메넴헤트가 파라오에 오른 뒤에 만들어진 사발 조각에 아메넴헤트와 함께 이름이 언급될 뿐이다. 피터 클레이턴을 비롯한 몇몇 이집트학 학자들은 아메넴헤트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그에 관한 고고학적, 문헌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전무한 상황이다.
멘투호테프 4세의 이름은 아비도스 왕 이름 리스트 등 각종 기록물에서 등장하지 않으며, 사카라 석판, 아비도스 왕 목록과 같은 연대기 기록에는 멘투호테프 3세가 1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록되어 있으며 토리노 파피루스의 11왕조 부분에서 유실된 마지막 부분(5-18)이 멘투호테프 4세에 관한 부분일 수도 있다고 하는 추측뿐이다. 뿐만 아니라 멘투호테프 4세의 무덤과 석관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시대의 재상은 아메넴헤트였는데, 이가 바로 이집트 제12왕조의 개창자인 아메넴헤트 1세로 재위 2년, 멘투호테프는 그에게 명령을 내려 와디 함마마트(Wadi Hammamat)에서 파라오의 무덤을 만들 돌을 구하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아메넴헤트가 이끈 원정대의 규모는 1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멘투호테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아메넴헤트가 파라오에 오른 뒤에 만들어진 사발 조각에 아메넴헤트와 함께 이름이 언급 되었을 뿐이며 피터 클레이턴을 비롯한 몇몇 이집트학 학자들은 아메넴헤트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 피력하지만, 그에 관한 고고학적 기록이나 문헌의 증거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와디 함 마맛(Wadi Hammamat)의 몇 안 되는 비문에 홍해 해안 탐험 기록과 왕의 기념비를 위한 돌 채석장 원정은 유명하다. 그는 전임자의 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와디 엘후 디(Wadi el-Hudi)의 비문으로 어느 정도 정체성이 밝혀졌다. Ain Sukhna에서 또 다른 관련 비문이 발견되는데 이 위치는 시나이 반도의 원정을위한 통상적인 발판 항구였다. 멘테호프테의 애매함 (그는 아비도스의 공식 왕의 명단에 없다)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석에는 그의 통치기간에 대한 조직과 업적을 잘 다듬어 놓았다.
Went Hammamat의 원정대는 멘투호프테 4세의 2년차 통치 기간에 Amenemhat이라는 장교였으며, Amenemhat I은 12번째 왕의 첫 번째 왕이며 멘테호프테의 직계 후임자로 추측된다. Lentt 북쪽에는 멘투호프테 4세의 공식적인 표제로 외부에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아멘넴하트 1세(Amenemhat I) 왕의 후계자가 새겨져있다. 도로시 아놀드(Dorothea Arnold)에 따르면 두 가지 비문이 다른 스타일의 글씨로 찢어진 것이므로 Amenemhat은 이미 Mentuhotep IV라는 이름을 지닌 오래된 선박에 그의 이름이 추가된 것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Intef Kakare
Iibkhenetre
Segerseni
Segerseni의 이름 묘사
제 12 왕조(BC 1991 ~ 1786)
제사장
지팡이를 잡고 걷고 있는 고관(채색된 나무 조각, 루브르)
카노푸스 단지(고대 이집트의 장례 의식에서 미라를 만드는 도중 시체에서 내장을 꺼내 향료로 방부 처리해 넣어두었던 뚜껑 달린 그릇)
대법관과 재무 대신의 장례 석비 : 봉헌 테이블 앞에 서 있는 세누세트(석회암 부조, 루브르)
호르 궁의 집정관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 : 빵을 봉헌물로 바치는 인물(석회암 부조, 루브르)
나체의 내연처(자기 조각, 루브르)
미라 가면(자기, 루브르)
토드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기부 예치물(루브르)
토드의 보물 중 풍뎅이(청금석, 루브르)
토드의 보물 중 은고리(은, 루브르)
토드의 보물 중 모자 형태의 큰 잔(루브르)
토드의 보물 중 반구형 큰 잔(루브르)
다섯 고리로 만들어진 사슬(루브르)
아메네맛 안크 선지자(사암 조각, 루브르)
여자 상반신(사문석, 루브르)
제 12 왕조 계보
Amenemhat I
아메넴헤트 1세( Amenemhat I 또는 Amenemhet I 및 Helmenized form Ammenemes)는 이집트 왕국의 황금기라고 여겨지는 12대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이다. 그는 BC 1991 년에서 BC 1962년까지 지배했다. 아메넴헤트(Amenemhat)는 전임 메투호테프 4세(Mentuhotep IV)세를 따라 Wadi Hammamat 탐험을 이끌었던 Amenemhat 라는 당시 총독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권력 쟁탈을 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학자들 사이에 많이 하고 있다. 학자들은 멘투호테프 4세가 아마넴헤트 1세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르고 이것을 확증할만한 독립된 증거는 없으며, 그들의 통치 사이에 공동 섭정의 기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메넴헤트 1세는 왕족의 혈통이 아니었으며 일부 문학 작품 (네페르티의 예언, Amenemhat의 지시문)과 건축에서 여섯 번째 왕조 통치자의 피라미드형 단지로의 회귀의 시도는 그의 통치의 정당성을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메넴헤트 1세는 수도를 테 베스에서이트 타위로 옮기고 엘 - 리 슈트에 묻혔다.
El-Lisht에 있는 그의 매장지의 아메넴헤트 1세의 부조
파이 이름이 새겨져 있는 아메넴헤트의 팔레트(루브르)
대법관 메리의 석비(석회암 부조, 루브르)
Sesostris I
"나는 이 나라를 내 두 어깨로 정복했노라!"
세누스레트 1세(Sesostris I와 Senwosret I로도 영국식화된 세누스테트 1세(Senusret I)는 이집트 12대 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이다. 그는 이 왕조의 가장 강력한 왕 중 하나였다. 그는 아메넴헤트 1세(Amenemhat I)와 그의 아내 네페르티타넨(Nefertitanen)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내와 누이는 네페루였다. 그녀는 또한 아메넴헤트(Amenemhat II세)의 후계자 어머니이기도 하다. 세누스레트 1세(Senusret 1)는 그의 프리마인 Kheperkare에 의해 알려졌다. "Re의 Ka가 창조되었다." 출생명인 '세누스레트'의 뜻은 "우스레트 여신의 남자"이며, 즉위 명 케페르카레(Kheperkare)의 뜻은 "레의 영혼이 생겨난다."이다. 토리노 파피루스의 5-21과 아비도스 왕 목록에 그의 존재와 45년이라는 재위기간이 언급되어 있다.
그는 또한 리비아 사막의 서부 사막 오아시스 탐사를 조직했다. 세누스레트 1 세는 시리아와 가나안에 있는 몇몇 통치자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주지사를 지원함으로써 국가의 정치 구조를 중앙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피라미드는 el-Lisht 에 건축되었다. Senusret는 자신의 아버지 Amenemhat I의 암살 소식을 듣고 리비아 군사 작전에서 멤피스에 있는 왕의 궁전으로 돌진했다고 기록된 Sinuhe의 이야기에서 증명되었다.
<사누헤 이야기>에 따르면, 세누스레트가 리비아인과 전투를 벌이던 재위 30년, 아메넴헤트는 살해당했다. 이에 그는 수도로 돌아가 쿠데타를 진압하고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세누스레트 1세의 시기는 아메넴헤트 1세 시기와 더불어 이집트 문학과 건축 문화가 최절정에 달한 시기이다. 국토 전역에 걸쳐 금광과 채석장이 개발되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아스완에 이르기까지 수십 곳에 건설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재위 30년 왕위 갱신제 때 Heb Sed Jubilee를 축하하기 위해 헬리오폴리스에 20미터에 달하는 붉은 화강암 오벨리스크를 두 개 세웠다. 오벨리스크 중 하나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 오벨리스크이다. 그것은 지금 Ain Shams지역 (Heliopolis) 근처의 Al-Matariyyah 지역의 Al-Masalla(아랍어 Obelisk) 지역에 있다. 키는 67피트이고 무게는 120톤 또는 240,000파운드이다. 세누스레트1세는 코프토스(Koptos)에 민의 사원, Elephantine에 Satet 사원, Armant에 Month-Temple과 El-Tod에 Month-Temple을 포함하여 고대 이집트의 여러 주요 사원의 건축자로서의 인정되고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세누스레트를 소재로 한 《사누헤 이야기》와 《아메넴헤트의 가르침》 두 편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는 선왕과 마찬가지로 죽기 전에 아들 아메넴헤트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였고 죽기 전에 선왕의 피라미드 남쪽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그러나 지하수 침수로 내부의 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다. 왕의 피라미드 곁에는 아메넴헤트 2세의 어머니이자 제1왕비인 네프루의 피라미드가 자리 잡고 있다.
헬리오 폴리스(Heliopolis) 오벨 리스크(Senusret I). Osiride 동상(Senusret 1세). 스톤 무게와 Senusret 1세. Senusret I 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부조가 있는 신사(White Chapel or Jubilee Chapel)는 30년째 해를 기념하기 위해 카르낙(Karnak)에 세워졌다. 이후 1926년 앙리 체비어(Henri Chevrier)가 발견한 여러 돌 조각으로 성공적인 복구가 완성 되었다. 마지막으로 세누스레트 1세는 아비도스의 Khenti-Amentiu Osiris 사원을 다른 주요 건축 프로젝트로 리모델링했다.
Senusret I세의 흉상(Neues Museum, Berlin)
Senusret I
Amenemhet II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아메넴헤트(Amenemhat)의 어머니, "왕의 어머니" 네페루 3세(Neferu III)의 이름을 제공했지만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전임자인 세누스레트1세(Senusret I)의 아들이라고 일반적으로 추측된다. 아메넴헤트의 초기 증언은 베니하산(Beni Hasan)에 묻힌 주지사, 아메넴헤트의 무덤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세누스레트 1세 휘하에 살았던 주지사는 왕의 아들 아메니(Ameny)를 누비아 탐험에서 호위 하였다 이 황태자는 아메니의 젊었을 때 아메넴헤트 2세가 아닐 것이라 믿어진다.
아메넴헤트 여왕의 배우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왕실 여성들이 피라미드 단지에 묻혔지만 왕과의 분명한 관계의 기록은 없다. 여왕 케미누브(Keminub)는 나중에 13번째 왕조가 되어야하고 Ita, Itaweret 및 Khenmet이라는 세 개의 호칭은 왕의 딸이 아메넴헤트(Amenemhat) 딸일지도 모르며, 확실한 증거는 아직 부족하다. 그의 후계자인 세네누스레트 2세는 비록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아이들은 아메넴헤탄크어(Amenemhatankh) 왕자와 Prfcesses Nofret II와 Khenemetneferhedjet, 아마도 Khenemetneferhedjet I 의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두 여자들은 나중에 그들의 형제인 세누스레트 2세의 아내가 된다.
그는 한때 아버지인 세소스트리스 1세와 함께 공동 통치를 하였으며, 그 시절에도 금광 탐사대를 이끌고 누비아로 갔다. 그는 선대 왕들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 아메넴헤트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였다. 일종의 한국으로 치면 태자 책봉을 한 뒤 얼마간 함께 정치 수업을 한 듯하다. 단독 정치를 하게 된 뒤에도 누비아와 시나이에 다시 탐사대를 보내 구리와 금을 찾았으며 시나이에서 새로운 광산을 발견, 개발했다. 또한 현재 에티오피아 근처의 아프리카 해안선에 있는 푼트 지역의 무역사업을 일으켰다. 아메넴헤트의 동상들은 시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상이집트의 도시 타우드에 있는 한 신전에서 그 시대 유품이 발견되어 크레타와 시리아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크레타의 방식은 내세보다는 현세에 귀 기울이는, 종교관의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고 볼 수도 있다, 내부적으로는 지방총독들이 지속적으로 행정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이들의 고향 근처에는 권위 있는 무덤들이 만들어졌다. 멤피스 남쪽의 다슈르에 있는 아메넴헤트의 피라미드 무덤은 진흙벽돌로 벽을 세우고 잡석으로 중심부를 만든 뒤 그 위를 질 좋은 석회암으로 덮는 방식으로 아버지 세소스트리스 1세 피라미드의 건축방식을 이어갔다. 그의 피라미드 근처에서 딸의 보석류가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이집트의 예술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앉아있는 동상은 Amenemhat II 에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제 제19 왕조 파라오에 빼앗겼다.(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Tanis 에서 Amenemhat II세의 스핑크스(루브르 박물관, A23)
왕족 스핑크스(아메노피스 2세?), 파라오 장식관을 쓴 두상, 가짜 수염(석영암 조각, 루브르)
Amenemhat II세의 딸 이타 공주의 스핑크스(사암 조각, 루브르)
이집트 남자 두상(루브르)
Senusret II
Khakaure 세누스레트 2세는 이집트의 열두 번째 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였다. 다음 왕으로 세누스레트 3세(BC 1878 ~ 1841)가 계승하였다. 엘라훈에 있는 세누스레트2세의 피라미드 외벽이 벗겨지고 벽돌로 쌓은 중심부만 남아 있다. 세누스레트 2세는 파이윰(Faiyum) 오아시스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져 왔으며 엘라훈(El-Lahun)에 제방을 건설하고 배수로 네트워크를 추가함으로써 Bahr Yussef에서 모에리스(Moeris)호수까지 광범위한 관개 시스템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프로젝트의 목적은 그 지역의 재배 가능한 토지의 양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중요성은 세누스레트 2세가 왕립 묘지를 다흐슈르(Dahshur)에서 엘라훈으로 옮겨서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이 위치는 이집트의 12번째 및 13번째 왕조의 정치적 수도로 남는다.
왕은 또한 세누스레트호테프(Senusrethotep) (카훈 - Kahun)의 가까운 도시에 첫 번째로 알려진 근로자 숙소를 설치했다. 그의 후임자와 달리, 세누스레트 2세는 파라오만큼이나 부유한 이집트의 다양한 유목민 또는 지방 주지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6년은 베니 핫산(Beni Hasan)의 크눔호테프 2세(Khnumhotep II) 라는 주지사 무덤 속 벽화로 증언된다.
Statue_Senusret_II(카이로 박물관)
el-Lahun의 피라미드 유적
Senusret III
Khakaure Senusret III(Senwosret III 또는 hellenised form Sesostris III로도 쓰여 있음)는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였다. 그는 번영의 시간을 열었던 통치자이다, 그리고 중왕국의 제 12왕조의 다섯 번째 왕이었다.
그는 열두 번째 왕조의 위대한 파라오였으며 아마 왕조의 가장 강력한 이집트 통치자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그는 Sesostris에 대한 전설의 근원 중 하나로 간주된다. 그의 군대는 지역 통치자의 힘을 감소시키고 공예품, 무역 및 도시 개발에 대한 부흥을 가져온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었다. Senusret III세는 자신의 평생 동안 신앙심을 가졌고 영예를 앉은 소수의 왕 중 한 명이었다.
세누스레트 3세(Lepsius XLVII)의 피라미드는 다흐슈르(Dahshur)에,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로 제12대 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를 위해 지어진 것이다. 피라미드는 다흐슈르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세네페루(Sneferu)의 붉은 피라미드(Red Pyramid)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그것은 평평한 땅에 세워졌으며 기초 초석인 흰색 투라 석회암 덩어리로 덮인 진흙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1894년 프랑스 이집트 학자 자크 드 모르간(Jacques de Morgan)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된 이 박물관은 고대 무덤 도둑들에 의해 파인 터널을 발견하고 무덤 안장실을 발견하였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서 이집트 제사장 파라오 세소스트리스에 관해 이야기가 하나 있다. 파라오 세소스트리스는 한때 소아시아 북쪽육로 인도해와 유럽으로 원정하여 전쟁을 벌였다. 그는 스키타이인과 트라키아인을 정복했다. 루마니아 및 불가리아. Sesostris는 콜치스(Colchis) 강 Phasis에 식민지에 사람들을 남겨두고 귀국했다. 헤로도토스는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의 대부분이 이집트 성직자를 통해 전달된 것으로, 실제로 콜키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인들로 당시 식민지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고 지적했다.
(섬록암 조각, 루브르)
세누스레트 3세(영국박물관)
세누스레트 3세 피라미드
세누스레트 3세의 이름이 새겨진 문 상인방 : 몬투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왕(석회암 부조, 루브르)
파라오의 장식 관을 쓴 왕족 두상(사암, 루브르)
프타의 대사제들(석영암 부조, 루브르)
Amenemhat III
Amenemhat III세는 또한 Amenemhet III세라고도 하는데, 이집트 12대 왕조의 파라오 (pharaoh)였다. 그가 가장 널리 알려진 날짜는 성세 46년 (Regnal Year 46) I Akhet 22 에 나온 파피루스에서 발견된다. 그의 통치는 중세 왕국의 황금시대로 불려지며 그는 아버지인 세누스레트 3세와 와 긴 기간인 20년을 함께 한다.
그는 통치의 끝으로 그의 후계자인 아메넴헤트 4세(Amenemhet IV)와 핵심적인 관계를 수립했으며, 아메넴헤트 4세의 1년을 그의 통치 기간 중 46, 47 또는 48년과 동일시하는 누비아(Nubia)의 Konosso에서 손상된 바위 비문에 기록되어있다. 그의 딸인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는 나중에 제12대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로 아메넴헤트 4세를 이어간다. 아메넴헤트 3세의 이름 니마아트레(Nimaatre)는 "재판장 소속" 이라는 기록이 그것을 의미한다.
왕의 통치에서 군사 원정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왕의 나이 아홉 살 때 작은 임무를 위한 단지 1개의 기록이 있다. 그 증거는 쿠마(Kumma) 요새 근처의 누비아(Nubia)에 있는 바위 비문에서 발견되었다. 짧은 글로서 군사 임무가 Nekhen Zamonth(Monthu의 아들) 총독이 지휘하였다는 기록으로, 그는 작은 병력으로 북쪽 원정을 갔고 돌아올 때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보고되었다.
아메넴헤트 3세 조각상 머리 부분(루브르 박물관)
파라오 장식관을 쓴 아메넴헤트 3세(편암 조각, 루브르)
Amenemhat IV
아메넴 헤트 4세(Amenemhat IV 또한 Amenemhet IV)는 이집트의 제12왕조의 후기 중기 왕국 기간 (BC 2050-1710 년)을 9년 넘게 통치한 일곱 번째이자, 뒤에서 두 번째 파라오 (pharaoh)로서, BC 19세기 후반 또는 BC 18세기 초로 연대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메넴헤트 4세는 그의 전임자의 아들, 손자 또는 계승자, 실권자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일지도 모른다. 그의 통치는 아메넴헤트 3세와 2년의 공동 관계로 시작되었고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그는 시나이 산에서 터키석(청록색)을, 상이집트에서 자수정을 위하여 펀트의 땅을 탐험했다. 그는 또한 누비아에서의 이집트 출신뿐만 아니라 Byblos와의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아메넴헤트 4세는 시나이에 있는 Serabit el-Khadim에서 Hathor 사원의 일부를 만들고 메이넷 마디에서 레네누테트(Renenutet)의 잘 보존된 성전을 지었다. 아메넴헤트 4세의 피라미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남부 마즈후나(Mazghuna)가 피라미드 가능성이 있다. 그는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 아마도 그의 여동생 또는 누이인데, 그의 짧은 통치는 12대 왕국의 끝과 중왕국의 쇠퇴의 시작으로 혼란의 제2 중간기가 시작된 것이다.
Amenemhat IV 의 이름으로 새겨진 작은 편마암 스핑크스
폐허가 된 메이네트 마디 사원
메디넷 마디(Medinet Madi)는 이집트의 남서부 파이윰(Faiyum) 지역으로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와 아메넴헤트 4세(Amenemhat IV) (BC 1855-1799) 시대에 코네티컷 여신인 Renenutet(수확 신)의 성전이 세워진 그레코 로만(Greco-Roman)마을의 유적지이다. 나중에 그레코 - 로마 시대에 확장되고 장식되었다. 중세 왕국에서는 도시가 Dja라고 불렸고 프톨레마이오스와 로마 시대에는 Narmuthis라고 불렸다.
Sobekhneferu
Sobekneferu(때때로 "Neferusobek"이라고 쓰여졌다)는 그녀의 형제 아메넴헤트 4세(Amenemhat IV)의 죽음 뒤 파라오가 되는 이집트 여성이었다. 그녀는 제12대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으며 거의 4 년간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녀의 이름은 "소백의 아름다움" 을 의미한다.
그녀는 아메넴헤트 3세의 딸이었다. 매네토(Manetho)는 그녀가 아메넴헤트 4세(Amenemhat IV)의 여동생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은 증명되지 않았다.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는 의도된 상속인일지도 모를 네프루타(Nefruptah)란 이름의 언니가 있었다. 네페루타(Neferuptah)의 이름은 카우치(카르투슈 cartouche, 흔히 안에 국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이집트 상형 문자가 들어 있는 직사각형이나 타원형 물체))에 함께 기록되었고 그녀는 하와라(Hawara)에 자신의 피라미드가 있다. 그러나 네페루타(Neferuptah) 이른 나이에 죽었다.
아메넴헤트 4세는 대를 이어갈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났을 거라는 논리가 우세하다. 결과적으로, 아메넴헤트 3세의 딸 소베크네페루는 왕 자리에 오른다. 토리노 캐논(Turin Canon)에 따르면, 그녀는 BC 19세기 후반에 3년 10개월 24일 동안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대를 이어갈 다음 왕을 만들어 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집트의 화려한 열두 번째 왕조와 중왕국의 황금시대가 마무리 되면서 매우 약한 열세 번째 왕조가 시작된다.
Gezer에서 발견된 그녀의 이름을 딴 왕의 딸을 대표하는 근거를 포함하여 많은 (머리 없는) 동상은 남아 있지만 그녀와 관련된 기념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머리가 있는 동상은 하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하와라(Hawara)의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 Herodotus의 미로라고 불림)의 장례지에 추가 건설을 하고 또한 헤라크레오폴리스 마그나(Herakleopolis Magna)의 구조물을 건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과 왕실의 표제를 담고 있는 훌륭한 원기둥 씰은 오늘날 영국 박물관에 있다. 쿠마(Kumma)의 누비아(Nubian) 요새에 있는 낙타(Nile graffito)는 그녀의 치세 3년차에 1.83 미터의 나일 강 침수 높이를 기록했다.
덴마크 학자 인 Kim Ryholt 는 소베크네페루의 칭호에 대해서,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여왕"또는 "King 's Daughter"라는 칭호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소베크네페루 여왕의 머리 부분
소베크네페루 여왕의 가슴 부분(루브르)
Drawing by Flinders Petrie of the cylinder seal of Sobekneferu(British 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