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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 2

1편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1: 일반적 고찰

 

1. 소유와 존재의 차이의 중요성

 

'소유''존재'의 선택은 상식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우리 생활의 정상적 기능이다. ,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물건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우리는 물건을 소유해야만 그것을 즐길 수가 있다. 소유하는 것-그것도 더욱 많이 소유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한 문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소유와 존재 간의 선택이 가능하겠는가. 반대로 존재의 본질이 소유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 간의 선택을 그들 각 체제의 중심적인 문제로 삼아 왔다. 석가모니는 인간 발전의 최고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소유를 갈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망치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누가복음 9 : 24 ~ 25). 위대한 스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고 '비게'하는 것, 자기의 자아가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적인 부와 힘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가르쳤다. 마르크스는 사치는 가난 못지 않은 부덕이며, 우리의 목표는 풍성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마르크스는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제시하는 가짜 마르크스가 아니라 급진적 인도주의자인 참다운 마르크스이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이 소유와 존재의 구분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고, 정신분석학적 방법에 의해 개인과 집단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통하여 그 구분의 경험적인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이러한 구분은 삶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사랑 간의 구분과 더불어 생존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경험적이며 인류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데이터는 '소유와 존재는 경험의 두 가지 기본적 양식이며, 이 각각의 힘이 개인의 성격 차와 사회적 성격의 여러 가지 유형 간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2. 갖가지 시적 표현의 실례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서론으로서 고 스즈키 다이세츠가 '선에 대한 강론'에서 언급한 비슷한 내용의 두 편의 시를 예로 들겠다. 하나는 일본의 시인 바쇼가 지은 하이꾸이며 또 하나는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경험, 즉 산책을 하면서 본 꽃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적고 있다. 테니슨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갈라진 암벽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갈라진 틈에서 뽑아낸다.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재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내가 너를, 뿌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련만.

 

바쇼의 하이꾸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

 

이 두 시의 차이점은 뚜렷하다. 테니슨의 반응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꽃을 '뿌리째 뽑아낸다.' 그는 신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꽃이 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한 지적 명상으로 시를 끝맺고 있지만, 꽃 자체는 꽃에 대한 테니슨의 관심의 결과로 생명을 잃는다. 테니슨은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생명을 해체하는 수단에 의해 진리를 찾으려는 서구의 과학자들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바쇼의 꽃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다르다. 그는 꽃을 뽑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꽃에 손을 대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것을 가만히 살펴볼 뿐이다. 스즈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마도 바쇼는 시골길을 걷다가 울타리 밑에서 사람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무엇을 보게 된 것 같다. 그는 가가이 다가가서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야생초, 길가는 사람들이 대개 쳐다보지도 않는 보잘것없는 풀임을 알았다. 그런 평범한 사실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일본어 가나로 씌어진 마지막 두 음절을 제외하면 별다른 시적 감흥도 나타나 있지 않다. 흔히 명사, 형용사, 부사 등에 붙은 이 마지막 음절은 감탄, 찬양,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영어로 옮겨 쓸 때는 감탄부호로 아주 잘 어울린다. 이 하이꾸에서는 전체의 시가 감탄부호로 끝난다.

테니슨은 사람과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꽃을 소유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꽃은 파괴되고 만다. 바쇼가 원하는 것은 '보는 것'이다. 그것도 그저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꽃은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둔다. 테니슨과 바쇼의 차이는 괴테의 다음 시로 충분히 설명된다.

 

발견

나는 홀로 숲속을 거닐었다.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처없이.

 

나무그늘에 서 있는 작은 꽃을 보았다.

반짝이는 별과 같고

아름다운 눈동자 같은 작은 꽃을.

 

나는 꺾고 싶었다.

그러자 꽃이 상냥하게 말했다.

어째서 나를 꺾으려 하나요?

곧 시들고 말 텐데.

 

그 꽃을 뿌리째 뽑아

아름다운 정원에 심으려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꽃을 다시 심었다.

이제 그것은 자꾸 번져 나가

꽃을 피운다.

 

괴테는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아름다운 작은 꽃에 이끌린다. 그도 테니슨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꺾고 싶은 충동을 잠시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테니슨과는 달리 괴테는 그것이 꽃을 죽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괴테에게 있어서 꽃은 당당히 살아 있는 존재이므로 꽃이 그에게 말을 하며 경고한다. 그래서 그는 문제를 테니슨이나 바쇼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한다. 그는 꽃을 '뿌리째' 뽑아서 그것을 다시 심음으로써 그 생명이 보존되도록 한다. 괴테는 테니슨과 바쇼의 중간에 서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결정적 순간에 생명의 힘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힘보다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시에서 괴테가 자연탐구에 대한 그의 개념의 핵심을 표명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테니슨의 꽃에 대한 관계는 소유의 양식에 해당한다. 이것은 물질적 소유가 아니고 지식의 소유이다. 바쇼와 괴테의 꽃에 대한 관계는 각각 존재의 양식에 속한다. 존재라는 말로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생존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삶을 사랑하고 인간의 해체와 기계화에 대항해서 투쟁한 사람 중의 하나인 괴테는 많은 시에서 소유에 대립되는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 '파우스트'는 소유와 존재 간의 투쟁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소유를 대표하는 것이 메피스토 펠레스). 다음의 짧은 시에서 그는 존재의 특징을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재산

나는 알고 있다.

내 영혼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생각과, 자애로운 운명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기쁘게 하는 모든 행복한 순간 외에는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소유와 존재의 차이가 본질적인 면에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아니다. 그 차이는 오히려 인간에 중심을 둔 사회와 사물에 중심을 둔 사회 사이에 있다. 소유지향은 돈, 명예, 권력에 대한 탐욕이 인생의 지배적 주체가 된 서구 산업사회의 특징이다. 중세사회, 주니 인디언, 아프리카의 부족사회 등과 같이 현대의 '발전' 개념에 영향받지 않은 사회는 각기 그들 자신의 바쇼를 가지고 있다. 아마 몇십 년의 산업화가 진행되고 나면 일본인들도 그들의 테니슨을 갖게 될 것이다. 서구인들이 선불교 같은 동양적 체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융이 생각했던 것처럼). 다만 현대인은 재산과 탐욕에 중심을 두지 않은 사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저작(이것도 바쇼나 선처럼 이해하기 힘들다)과 불타의 가르침은 같은 언어의 두 가지 방언에 불과하다.

 

3. 어법상의 변화

 

소유와 존재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는가 하는 방법의 변화는, 과거 2, 3세기 동안의 서구의 여러 언어에서 명사의 사용이 점차 늘어나고 동사의 사용이 점차 줄어드는 현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명사는 어떤 물건을 표시하는 품사이다. 나는 어떠어떠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테이블을, 집을, 책을,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등의 표현을 쓴다. 동사는 어떤 행동, 또는 그 과정을 나타내는 품사이다. 예를 들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미워한다 등등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점점 '행동''소유'의 측면에서 표현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 명사가 동사 대신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명사와 결부된 '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그릇된 사용법이다. 과정이나 행동은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인의 관찰 (뒤 마레-마르크스)

이 혼동이 가져온 나쁜 결과는 이미 18세기에 지적되었다. 뒤 마레는 사후에 출간된 저서 '진정한 문법의 법칙'에서 이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시계를 가지고 있다' 고 하는 예문에서의 '나는 가지고 있다'라는 표현은 그 본디의 뜻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예문에서 '나는 가지고 있다'라는 표현은 모방의 방법에 의해 쓰인 것이다. 그것은 빌어온 표현법이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또는 이런 방법으로 생각한다'를 뜻한다. '나는 욕망을 갖는다'라 함은 '나는 바란다'의 뜻이며, '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는 ...하겠다'의 뜻이다.

뒤 마레가 동사가 명사에 의해 대치되는 이와 같은 현상을 관찰한 지 1세기 뒤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 문제를 '성스러운 가족'에서 더욱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 에드가 바워의 '비판적 비평'에 대한 그들의 비평 가운데는 짧지만 매우 중요한 사랑에 관한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다. 이 에세이 속에는 바위의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다. '사랑은 잔혹한 여신이다. 이 여신은 모든 다른 신들처럼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며, 인간이 자기에게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적 자아까지도 희생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 사랑의 여신에 대한 숭배는 괴롭다. 이 숭배의 그치는 자기희생이며 자살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에 대답한다. (바워는 '사랑하는 인간', '인간의 사랑''사랑의 인간'으로 변모케 함으로써 사랑을 '여신'으로, 그것도 '잔혹한 여신'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사랑을 인간과 격리된 존재로서 분리시켜 그것을 독립된 실체로 만들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기서 동사 대신 명사를 쓰는 결정적인 요인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행동의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 '사랑'이란 명사는 인간과 분리된다. 사랑하는 인간은 사랑의 인간이 된다. 사랑은 여신이 되고, 인간이 사랑하는 마음을 투사하는 우상이 되며, 인간은 그 여신, 그 우상에게 그의 사랑을 쏟는다. 이런 소외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사랑을 경험할 수 없게 되며, '사랑'이라는 여신에게 굴복함으로써 그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겨우 접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능동적 인간이 되기를 멈추고, 그 대신 우상의 소외된 숭배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우상과 접촉할 수 없을 때 파멸하는 것이다.

 

현대의 용법

뒤 마레 이후 2백 년 동안 명사를 동사 대신 쓰는 이 경향은, 그로서도 도저히 상상 못했을 정도로 늘어났다. 약간 과장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기 오늘날 언어의 전형적 용례를 들어 본다. 정신분석의의 도움을 청하는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하자.

"박사님, 저는 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집, 훌륭한 아이들, 행복한 결혼생활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 몇십 년 전이라면 환자는 아마 "저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 "저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저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신 "저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라고, 그리고 "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 "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최근의 어법은 더욱 높은 소외의 정도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괴로워하고 '있다') 대신에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주관적 경험은 배제된다. 경험의 ''가 소유의 '그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나는 내 느낌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무엇으로, 즉 문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온갖 종류의 곤란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다. 나는 문제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가질 수는 있다. 바꿔말하면, 나는 '나 자신''문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의 창조물에 의해 소유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법은 감춰진 무의식적인 소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면증은 목의 아픔(인후염)이나 치통처럼 육체적 증상이므로 아픈 목구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듯이 불면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정당한 것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차이가 있다. 인후염이나 치통은 다소 강해질 수 있는 육체적 감각일 뿐 정신적인 성질은 거의 없다. 목구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후염도 '가질' 수 있고 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치통도 '가질'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불면증은 육체적 감각이 아니고 잠을 잘 수 없다는 정신적인 상태이다. '잠을 잘 수 없다'는 말 대신 '불면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잠을 방해하는 걱정, 긴장, 불안의 경험을 보류하고 정신적 현상을 '마치' 육체적 증상인 것'처럼' 다루고 싶어하는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나는 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 사람이 그 주체가 되는 내적 행동인 것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4. 용어의 기원

 

'갖는다(to have)'는 말은 단순한 표현이기 때문에 속기 쉽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갖는다'. 육체(이 시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에 대해서도 존재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육체를 살아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나는 내 육체를 가지고 있다'라는 대신에 '나는 내 육체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표현될 수 있다. 모든 감각의 인식의 훈련은 이 육체의 '있다'는 경험을 얻고자 시도하는 일이다.), , -나아가서 현대인은 자동차, 텔레비전 수상기, 세탁기 등등을 갖는다. 무엇인가를 가지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유가 문체가 되는가? 그런데도 '소유'의 언어적 역사는 그 말이 실제로 문제임을 나타낸다. 소유가 인간존재의 가장 자연스런 범주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은 언어에 '갖는다'라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 예를 들면, 헤브라이어에서는 '나는 가지고 있다'jesh li(=it is to me ; 그것은 나에게 있다)라는 간접적 형태로 표현해야만 한다. 실상 소유를 '나는 갖고 있다'는 표현 대신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매우 많다. 언어의 발달과정에서 '그것은 나에게 있다'라는 구문이 뒤에 '나는 가지고 있다'라는 구문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에밀 방브니스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언어의 발전이 그 반대방향으로 진행되는 일은 없다. 이 사실은 '갖는다'는 말이 사유재산의 발달과 관련해서 발전되었으며, 기능적 재산이 지배적인 사회, 즉 사용하기 위해 소유하는 사회에서는 갖는다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사회언어학적 연구를 더욱 진행시키면, 이 가설이 타당한가, 또 어느 정도 타당한가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가 비교적 단순한 개념처럼 보인다면, 존재(being) 또는 존재한다(to be)는 개념은 그 만큼 더 복잡하고 어렵다. 'being'이라는 말은 몇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1. 계사로 쓰인다 : 'I am tall(나는 키가 크다.)', 'I am white(나는 희다)', 'I am poor(나는 가난하다)' 등의 'am(be)'처럼 동일성을 나타내는 문법적 표현으로 쓰인다(대개의 언어는 이런 의미의 'to be'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스페인 어는 주어의 본질에 속하는 영구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 ser, 본질이 아닌 우연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말 estar를 구별한다).

2. 동사의 수동태로 쓰인다 : 'I am beaten(나는 맞는다)는 내가 다른 사람의 행동의 객체이다. 'I beat(나는 때린다)'에서처럼 내가 행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경우이다.

3. 존재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 방브니스트가 지적한 것처럼 존재를 나타내는 'to be'는 동일성을 말하는 계사인 'to be'와는 다른 용어이다. '이 두 말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공존해 왔고 아직도 공존할 수 있다. '방브니스트의 연구는 계사로서보다 그 자신만의 권리를 가진 동사로서의 'to be'의 의미를 새로이 밝혀주고 있다. 인도 유럽 어족에서의 'to be''존재를 갖는다. 실제로 발견된다'는 의미를 가진 어근 es로 표현된다. 존재와 실재는 '신뢰할 만하고, 지속적이며, 진실된 것'이라고 정의된다(산스크리트 어에서 sant'존재하는' '실제로 좋은' '진실된'의 뜻이며, 그 최상급인 sattama'가장 좋은 것'의 뜻이다).

이와 같이 'being'은 그 기원이 된 어근에 있어서는 주어와 그 속성간의 동일성을 가리키는 말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서술' 용어 이상의 말이다. 그것은 누구, 또는 무엇이라는 존재의 실재성을 나타내며, 또 그 신뢰성과 진실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 또는 무엇이 '어떻다(is)'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 또는 그 물건의 본질을 말해 주는 것이다. , 그것은 그 사람의(그녀의, 그것의) 확실성과 진실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녀의, 그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지 그 외관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소유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이와 같은 예비적 개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 존재 또는 소유라는 말을 가지고 나는 '나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나는 희다' 또는 '나는 행복하다' 등의 논술에서 예증되어 있는 것과 같은 주체의 어떤 격리된 특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생존의 두 가지 기본적 양식, 자아와 세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지향(orientation), en 가지 다른 종류의 성격 구조이다. 이들 중 어느 편이 우세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이 결정된다.

2. 소유의 존재 양식에서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소유나 점유의 관계이다.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 모든 물건을 내 '재산'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3. 생존의 존재 양식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두 가지 형태를 확인해야 한다. 하나는 뒤 마레의 말에 예시되어 있듯이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살아 있음, 세계와 진실로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의 또 하나의 형태는 '외관'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방브니스트적 존재(being)의 어원에 예시되어 있듯이 겉모습과 대조되는, 어떤 사람 혹은 물건의 진정한 본성, 진정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5. 존재의 철학적 개념

 

존재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존재가 수천 권이나 되는 철학서의 주제가 되었고, '존재란 무엇인가'가 서양철학의 결정적인 문제의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다. 이 책에서는 존재의 개념이 인류학적, 심리학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겠지만, 물론 철학적 논의도 인류학적 문제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으로부터 현대철학에 이르는 서양 철학사에서 존재의 개념의 발달을 간단히 소개하는 일도 이 책의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나는 다만 중요한 한가지 점, '존재의 요소로서의 과정, 능동성, 운동'의 개념만을 언급하겠다. 게오르그 짐멜(George Simmel)이 지적했듯이 존재가 변화를 포함한다는 생각, 즉 존재는 '생성(becoming)'이라는 생각은 서양철학의 초기 및 절정기에 각각 한 사람씩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비타협적인 대표자를 갖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헤라클레이토스와 헤겔이다.

스콜라 학파의 실재론자, 즉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등이 주장한 바와 같이 존재를 영원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불변의 실체, 생성과는 반대의 개념으로 보는 입장은 이데아(idea)가 궁극적 실재라는 관념론적인 개념에 입각한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만일 사랑의(플라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이데아가 사랑의 경험보다 더욱 실재성을 지닌다면 이데아로서의 사랑이 영구적이며 불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는 인간들의 실재를 따지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생성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살아 있는 조직체는 생성하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다. 또한 그것들은 변화하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다. 변화와 성장은 생명의 과정에 내재하는 특질이다.

생명을 실체로 보지 않고 과정으로 보는 헤라클레이토스 및 헤겔의 극단적인 개념은 동양의 불교철학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사물이든 자아든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실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들은 모두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그다지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탁월한 체코의 철학자인 Z. 피체는 불교적인 과정의 개념을 정통적인 마르크스 철학에 결부시켰다. 나는 사적으로 영역에 의해서 읽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서는 체코 어로만 간행되었으므로 대부분의 서구 독자들은 접할 수가 없다.). 오늘날의 과학사상은 '과정사고'라는 철학적인 개념을 발견했고, 그것을 자연과학에 응용함으로써 이 개념의 재생을 가져왔다.

 

6. 소유와 소비

 

생존의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의 몇 가지 간단한 실례를 논의하기 전에 여기서 소유의 또 다른 현현, '합체(incorporating)'라는 형태의 나타남에 대해서 말해야겠다. 이를테면, 먹거나 마심으로써 어떤 물건을 합체시키는 것은그 물건을 소유하는 원초적 형태이다. 성장의 어떤 시점에서 유아는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입속으로 집어넣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유아의 소유의 한 형태로서, 신체적 발달이 아직 소유를 지배하는 다른 형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러 형태의 식인풍습에서도 이것과 같은 합체와 소유의 연관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다른 인간을 먹음으로써 나는 그 사람의 힘을 얻는다(따라서 식인풍습은 노예 획득의 주술적 형태라고도 볼 수가 있다). 용감한 사람의 심장을 먹음으로써 나는 그의 용기를 획득하게 되며, 토템(totem) 동물을 먹음으로써 나는 그 토템 동물이 상징하는 신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등이다.

물론 대부분의 대상은 육체적으로 합체될 수 없다(또 그것이 가능할 경우에는 배설과정에서 다시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상징적' 또는 '주술적' 합체도 있다. 내가 신이나 아버지, 또는 동물의 이미지를 합체했다고 믿으면 그것은 제거할 수도 없고 배설될 수도 없다. 나는 그 물체를 상징적으로 삼키고 그것이 상징적으로 내 속에 있음을 믿는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는 초자아(super ego)를 이렇게 설명했다. , 그는 초자아란 아버지의 금지와 명령이 잠재의식 속에 받아들여진 총화라고 설명했다. 권위, 제도, 생각, 이미지 등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잠재의식 속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나는 이들을 뱃속에 '갖고' 영구히 보호하는 것이다.

이밖에 생리적 욕구에 관련되지 않은, 따라서 제한을 받지 않는 여러 형태의 합체가 있다. 소비지상주의에 내재하는 태도는 온 세계를 삼키려는 태도이다. 소비자는 우유병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영원한 젖먹이다. 이것은 알콜중독, 마약중독 같은 병리적 현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가 특히 이들 중독을 문제 삼는 이유는 그 영향이 중독된 사람들의 사회적 의무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심한 끽연이 이런 비난을 받지 않는 것은, 긱연의 중독현상 정도가 심할 때는 그 중독이 끽연자의 수명에는 '관계될지' 모르지만 사회적 기능 수행에는 방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형태의 일상적인 소비지상주의에 대해서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다만 여기서 말해 둘 것은, 여가에 관한 한 자동차, 텔레비전, 여행, 섹스가 오늘날 소비지상주의의 주 대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여가활동(능동성)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여가 수동성'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요약하면,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그것도 아마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다의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는 없다는 이유에서 소비는 걱정을 없애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이전의 소비가 곧 그 만족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확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 = 내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

 

 

2: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재산을 얻고 이익을 좇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으므로, 우리는 여간해서는 생존의 존재 양식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보지 못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양식을 가장 자연스러운 생존 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여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 양식의 본질을 깨닫고, 나아가서는 소유는 가능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특히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인간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두 개념 중 어느 것도 추상적이므로, 순전히 사색의 문제로만 검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또 검토될 수도 없다. 두 가지 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 반영되어 있으며, 따라서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소유와 존재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예는 독자들이 이 두가지 양자택일적인 생존 양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학습

 

생존의 소유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그 내용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고, 가능한 한 그 말을 모두 노트에 적는다. 후에 적은 것을 암기하여 잘하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체계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사고를 풍요하게 또 폭넓게 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강의의 내용을 사상 또는 전체적인 이론의 고정된 몇 가지 집합으로 변경시켜 저장한다. 어떤 다른 사람이 진술한 모든 사실의 집적의 소유자가 어떤 다른 사람에서 학생 개개인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학생들과 강의내용은 여전히 서로 무관한 상태 그대로이다.

소유양식에 젖은 학생들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 배운 것을 단단히 기억하거나 또는 노트를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배운 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하거나 창조할 필요는 없다.

아니, '소유'형의 사람은 오히려 어떤 주제에 관한 새로운 사고나 개념에 대해 다소 당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양의 지식에 의혹을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유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요한 형태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고정될 수 없는 개념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따라서 지배할 수 없는 다른 모든 것처럼 두려운 것이다.

세계와 존재 양식으로 결부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학습의 과정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일련의 강의에, 비록 그것이 첫 번째 강의라 할지라도 '백지상태'로는 참석치 않는다. 그들은 그 강의에서 취급할 문제를 미리 짐작하고 있으므로, 그들대로의 어떤 질문과 문제를 마음속에 간직한다. 그들은 강의 주제에 완전히 몰두하게 되며, 또 흥미를 느낀다. 그들은 스스로가 말과 개념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되는 대신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그들이 듣는 것은 그들 자신의 사고과정을 자극한다. 새로운 질문, 새로운 개념, 새로운 전망이 그들 마음속에 일어난다. 존재 양식을 가진 학생들의 학습과정은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며, 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들으며, 자발적으로 그들이 듣는 것에 응답하면서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집으로 가져가서 암기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 개개인은 강의를 통하여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다. 강의를 받은 후에는, 학생 개개인의 강의를 받기 전의 그와는 다른 인간이 된다. 물론 이러한 학습양식은 강의가 적극적인 내용을 제공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존재 양식에서 보면 공허한 이야기는 아무런 반응도 얻을 수 없으며, 그러한 경우 존재 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 자신의 사고과정에만 전념하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임을 알고 있다.

 

2. 기억

 

소유양식에서도, 존재 양식에서도 기억은 발생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기억형태 사이의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루어지는 결합의 '종류'이다. 기억의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한 단어와 다음 단어와의 결합이 그 빈도에 의해서 확립되는 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결합은 전적으로 '기계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상반되는 결합, 또는 어떤 한 점에 집중하는 개념의 관계, 또는 시간, 공간, 크기, 색채의 결합, 혹은 어떤 주어진 사상체계 내의 결합과 같이 그 결합은 순전히 '논리적'일 수도 있다.

존재 양식에 있어서 기억은 '능동적으로' , 개념, 광경, 회화, 음악 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 기억해야 할 단일한 데이터와 관계되는 다른 많은 데이터를 연결시키는 태도이다. 존재 양식의 경우에 있어서 결합이란,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논리적인 것도 아닌 살아 있는 결합이다. 하나의 개념은 올바른 단어를 추구할 때 동원되는 생산적 사고(또는 감각)의 행위에 의해서 다른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내가 '두통'이란 단어와 '고통' 혹은 '아스피린'이란 단어를 연관시킨다면 나는 논리적이고 극히 평범한 연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통''스트레스' 혹은 '분노'라는 단어와 연관시킨다면 나는 주어진 데이터로 가능성이 있는 결과, 즉 현상을 연구하는 동안에 얻은 통찰과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후자의 기억은 그 자체가 생산적인 사고행위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살아 있는 기억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예는 프로이트가 고안한 '자유연상'이다.

데이터의 수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이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즉각적인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외국어 단어일지라도 반드시 기억해 낼 필요가 있을 때는 그것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는 특별히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내가 그 사람과 다시 얼굴을 맞대고 그의 모든 인격적 특징에 관하여 생각을 집중시켜 보면, 2주일 전이나 5년 전이나, 어쨌든 과거에 내가 분석한 그 사람의 꿈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5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꿈을 전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존재 양식에 있어서의 기억은 언젠가 보았거나 들은 어떤 것을 되살리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가 일찍이 보았던 그 사람의 얼굴 또는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려고 애씀으로써 이러한 생산적인 기억을 경험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도 금방 기억할 수는 없다. , 우리는 주제를 다시 창조하여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소생시켜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억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얼굴이나 풍경을 완전하게 상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충분한 집중력을 기울여 보아야만 한다. 그러한 기억이 완전히 떠오를 때, 마치 그 사람 또는 그 풍경이 자기 앞에 실제로 물리적으로 있는 것처럼, 그 얼굴이 상기된 사람은 살아 있는 것 같고 또 기억된 풍경은 선명해진다.

소유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인물이나 풍경을 기억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진을 바라보는 방식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사진은 어떤 인물이나 어떤 풍경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기억에 대한 보조물로서만 도움이 되고 있으며, 그것이 자아내는 일반적인 반응은 '그래, 그 사람이다,' '맞아, 나는 그곳에 갔었다,'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진은 일종의 '소외된' 기억이 되는 것이다.

종이에 맡겨진 기억은 소외된 기억의 또 다른 형태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적어놓음으로써 나는 그 정보의 '소유'를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을 머리에 새겨놓으려고 하지 않는 정보의 기록도 잃은 것이 된다. 나의 기억능력은 나를 떠나버렸다. 저장된 기억이 노트의 형태로 나의 구체화된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많은 데이터를 생각한다면, 노트 속에 어느 정도의 기록과 정보를 저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상식적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적어놓는 행위가 우리의 기억력을 감퇴시킨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 속에서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에 드는 몇 가자지 전형적인 예는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가장 흔한 예는 상점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점원은 두세 품목의 간단한 덧셈도 거의 하지 않고 바로 기계를 사용한다. 학교의 수업시간은 또 다른 예를 제시하고 있다. 교사들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강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받아 적는 학생은, 자신의 이해력을 신뢰하며 최소한 요점만 기억하는 학생보다 십중팔구 이해력이나 기억력에 있어서 뒤진다. 그리고 또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사람들은 악보 없이는 그 음악을 연주하는 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음악가들은 알고 있다(남다른 기억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던 토스가니니는 존재 양식을 가진 음악가의 좋은 예이다). 마지막 예로, 문맹자나 글을 겨우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산업화된 국가의 잘 읽고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멕시코에서 관찰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은 읽고 쓰는 능력이란 결코 널리 선전되고 있는 것과 같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읽소 쓰는 것을 단순히 자신의 경험능력과 상상력을 약화시키는 데이터를 읽는 데에만 상용할 경우 특히 그렇다.

 

3. 대화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의 차이는 대화의 두가지 예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x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Ay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B, 이 두사람 사이의 전형적인 좌담식의 논쟁을 예로 들어보자. 각자는 자신의 의견과 동일화된다. 이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의견을 지키기 위해 보다 나은, 즉 보다 합리적인 논의를 발견하는 일이다. 양쪽 모두 자기의 견해가 변하거나 또 상대방의 견해가 변할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그 견해가 자기 소유물의 하나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을 상실하는 것은 자신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 다 자신의 견해가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토론이 아닌 대화일 경우에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누구나 유명하고 덕망이 있고 뛰어난 자질까지도 갖춘 사람과,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그에게서 얻고 싶은, 즉 일자리를 부탁하거나 사랑을 받아 보고 싶다거나 칭찬을 기대해 보거나 하는 그러한 사람과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막연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수가 있으며, 흔히 중요한 회견에 대비해서 '준비'를 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관심을 끄는 화제를 생각하고,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까 하는 것까지 미리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역할에 관한 한 전체 대화의 계획을 미리 짜두기도 한다. 또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있는 것, 즉 자기의 과거의 성공, 자기의 매력적인 개성(또는 그 역할이 더 효과적일 경우에는 상대방을 위협하는 개성), 자기의 사회적 지위, 자기의 교제범위, 자기의 외모와 의상 등에 관해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단히 무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마음속에서 자기 가치를 저울질하며,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그 다음 대화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런 일을 훌륭하게 잘 해내는 사람은 실로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만, 그 감명 중에서 아주 적은 일부가 개인의 연기에서 나온 것이며, 대부분은 사람들의 판단력의 빈곤에 기인하고 있다. 만일 그 연기자가 별로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닐 때, 그 연기는 어색해서 일부러 꾸며낸 듯하고, 지루하게 보여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아무것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을 무장하지 않은 채 상황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반응한다. ,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아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그들의 생각에 충실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생산적일 수 있고 줄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관념을 탄생시킨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 또 그들이 억제를 버리고 반응할 용기만 있다면 새로운 어떤 것이 탄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한 집착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 없으므로 대화 속에서 충분히 활기를 갖는다. 그들의 활기는 쉽게 전염되기 때문에, 가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초월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대화의 범위는 상품(정보, 지식, 지위)의 교환에만 머물지 않고, 누가 정당한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대화가 된다. 대결자들은 함께 춤추기 시작하며, 또 그들은 승리감이나 슬픔-양쪽 다 무익하다-을 안고 헤어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헤어진다(정신분석요법의 본질적인 요소는 치료의사가 환자와의 관계에서 그와 같은 활기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그 치료의 분위기가 답답하고 활기가 없고 또 지루하다면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4. 독서

 

대화에 있어서 지리인 것은 독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대화이다(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물론 독서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대화와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의 작품을 읽는가(또는 누구와 이야기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성이 없는 값싼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백일몽이다. 그것은 생산적인 반응을 가져올 수 없다. , 문장을 텔레비전의 쇼처럼, 아니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 감자튀김처럼 습관적으로 삼킬 뿐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발자크의 소설은, 내적 참여와 함께 생산적으로, 즉 존재 양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의 일상적 독서시간은 소비의 양식, 즉 소유양식으로 읽는 일로 허송되고 있다. 독자들은 호기심에만 의지하여 주인공의 생사, 혹은 여주인공이 유혹당했는가 저항했는가 등의 줄거리에 관심을 기울이며 또 결과를 알고 싶어한다. 소설은 그들을 흥분시키는 일종의 전희역할을 한다. , 행복한 또는 불행한 결말에 의해 그들의 경험은 절정에 달한다. 결말을 찾아낸 것처럼 현실적으로 전체 스토리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고양시키지는 못한다. , 그들은 소설 속의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을 심화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지식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독서의 양식은 그 대상이 철학책이나 역사책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철학책이나 역사책을 읽는 방식은 교육에 의해서 형성,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면 변형된다. 학교는 저마다의 학생에게 어느 정도의 '문화적 재산'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학교교육이 끝날 때에는 학생들은 적어도 그 최소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 그들은 저자의 주요 사상을 욀 수 있게 하는 독서교육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을 '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의 다양한 교육수준 사이의 차이는 주로 획득한 문화적 재산의 양에 있으며, 이것은 학생들이 이후의 생애에서 소유하기를 바라는 물질적 재산의 양과 대충 일치하는 것이다. 이른바 우수한 학생이란 여러 철학자들이 각기 말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욀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박물관 안내인과 비슷하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특정 지식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그들과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철학자 자신의 모순과, 그가 어떤 문제는 무시하고 있거나 쟁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당시에는 새로웠던 것과, 그 시대의 '상식'이었으므로 저자가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한 법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저자가 단지 그의 머리로만 말할 때와 머리와 가슴이 함께 말할 때를 구별할 수 있도록 듣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저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이밖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존재 양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는, 이따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책조차도 전혀 가치가 없거나 극히 제한된 가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저자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쓴 모든 사실에 관하여 이따금 저자보다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

 

5. 권위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을 구별하는 또 다른 예는 권위의 행사에서 볼 수 있다. 권위의 '소유'와 권위의 '존재'사이의 차이에 그 결정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우리는 대부분 최소한 일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권위를 행사한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고 또 적어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충고를 해주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권위를 행사해야만 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성 역시 남자를 위한 권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관료적인 계급사회로 조직된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그 대부분의 구성원이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제외된다. 그들은 단지 권위의 대상일 뿐이다.

두 가지 양식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권위'라는 것이 아주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용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 그것은 '합리적' 권위일 수도 있고 '비합리적' 권위일 수도 있다. 합리적인 권위는 능력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의 성장을 돕는다. 비합리적인 권위는 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것에 종속된 사람을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냥꾼과 식량 채집자들로 이루어진 가장 원시적인 사회에서의 권위는 일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에게 있다. 이러한 능력이 어떠한 자질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은 특정한 환경에 달려 있지만, 거기에는 경험, 지혜, 관용, 숙련, 용기 등이 포함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들 부족의 대다수에는 영속적인 권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권위는 필요한 경우에 나타난다. 또 전쟁, 종교적인 행사, 분쟁의 조정과 같이 서로 다른 권위가 존재하기도 한다. 권위의 기초가 되는 자질이 사라지거나 약화될 때 권위 그 자체는 끝나는 것이다. 이와 아주 비슷한 형태의 권위는, 능력이 육체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흔히 경험이나 '지혜'와 같은 자질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는 수많은 원시사회에서 관찰될 수 있다. J. M. R 델가도(Delgado)는 원숭이를 사용한 매우 독창적인 실험을 통하여 만일 우월한 위치에 있는 원숭이가 그 능력을 구성하고 있는 자질을 일시적으로라도 잃으면 권위는 끝난다는 것을 입증한다.

존재의 권위(being-authority)는 한 개인의 어떤 사회적 기능 수행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이 고도의 성장과 통합을 성취한 인격의 본질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권위를 방사할 뿐 명령하거나 위협하거나 배수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인간이 무엇일 수 있나를 보여주는 고도로 계발된 사람들이다.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그러한 권위자였다. 또 그들만큼 완성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런 인물은 모든 교육수준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발견된다(이 점에 교육의 문제가 달려 있다. 가령 부모들 자신이 더욱 계발되어 있고 그들 자신의 핵심을 신뢰하고 있다면, 권위주의 교육과 자유방임주의 교육 사이의 대립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와 같은 존재의 권위가 필요하므로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그 권위에 반응한다. 그 반면에 아이들은, 성장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노력을 그들 자신은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사람에 의한 '과잉보호'나 압력, 방임 등에는 반항한다.).

계급적인 질서에 바탕을 둔 수렵민과 식량 채집자의 사회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복잡한 사회가 형성된 결과로, 능력에 의한 권위는 사회적 지위에 의한 권위에 굴복하고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권위가 반드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다만 능력이 권위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군주제의 권위-제비뽑기와 같은 유전인자가 능력의 질을 결정한다고 믿는-를 다루든, 또는 살인이나 반역에 의해 권위자가 되는 데 성공한 파렴치한이나 범죄인을 다루든, 또는 현대 민주국가에 흔히 있듯이, 선거에 쓸 수 있는 많은 돈이나 사진을 잘 받는 그럴듯한 용모를 기반으로 하여 선출된 권위자를 다루든 간에,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능력과 권위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관련도 없다.

하지만 어떤 능력을 근거로 하여 확립된 권위의 경우에는 더욱 중대한 문제가 있다. , 어느 지도자는 한 분야에는 유능할지 모르지만 다른 분양에는 무능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어느 정치가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유능하지만 평화 시에는 무능할 수가 있다. 또 자기 생애의 초기에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지도자가 그러한 자질을 권력의 유혹에 의해서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노령이나 육체의 병도 어떤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가 있다. 결국 어떤 권위의 행동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선전 전문가들이 창조한 인위적인 이미지에 의해서만 자기들의 입후보자를 알고 있는 우리 체제의 수백만의 사람들보다 소규모 부족의 구성원들의 경우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능력을 형성하는 자질의 상실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계급적으로 조직된 대부분의 대규모 사회에 있어서는 권위의 소외과정이 일어난다. 진정한 능력 또는 최초로 추정된 능력은 제복이나 권위를 표시하는 칭호로 변모된다. 만일 권위자가 적당한 제복을 입고 있거나 어울리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권위자의 능력의 외부적인 표시는 실질적으로 그가 가진 능력이나 자질을 대신할 것이다. 국왕-이러한 형의 권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이 칭호를 사용한다면-은 어리석고 부도덕하며 사악할 수도 있다. , 그는 하나의 권위의 '존재'이기에는 완전히 무능하지만, 그는 권위를 '가지고'있다. 그가 그 칭호를 가지고 있는 한 그는 그 능력을 구성하는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만일 임금님이 발가벗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모두 그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제복이나 칭호를 능력의 참된 특징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은 저절로 발생된 것은 아니다. 이들 권위의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빙자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즉 비판적인 사고를 둔화시켜 허구를 믿게끔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머리를 짜내는 사람들은 누구나 선전의 음흉한 효과를 알고 있고, 비판적인 판단력을 파괴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또한 상투적인 문구에 복종함으로써 마음이 어떻게 누그러지는가를 알고, 사람들이 의존을 원하고, 자신의 눈과 판단을 믿는 능력을 잃게 되어서 그들이 어떻게 침묵을 지키고 마는가를 알고 있다. 그들은 허구로 인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6. 지식

 

'인식'의 영역에 있어서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 사이의 차이는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나는 알고 있다'의 두 가지 공식에 나타나 있다. 지식의 '소유'는 유용한 지식(정보)을 점유하는 것이고, (인식)은 기능적인 것으로서 생산적인 사고과정에서 하나의 방법으로만 도움이 된다.

생존의 존재 양식에 있어서 인식의 특질에 대해서는 석가모니를 비롯하여 유대의 예언자들, 예수, 에크하르트, 프로이트, 마르크스와 같은 저명한 여러 사상가들의 통찰에 의해 이해를 높일 수 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적인 현실이 '참으로 현실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은 깨어 있고 반은 꿈꾸고 있으며, 그들이 참되고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의 대부분이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암시적인 영향에 의해 생긴 환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식은 우리의 상식적인 지각만을 통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인식은 환상의 파괴와 함께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식은 근원까지, 나아가서는 원인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표면을 꿰뚫는 것을 의미한다. , 인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표면을 뚫고 탐구하며, 비판적으로,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창조적인 탐구의 특성은 알고,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헤브라이 어 'jadoa'에 남성의 성적 관통의 의미로 표현되어 있다. 불타, '깨달은 자'는 사람들에게 일상으로부터 깨어나서 물질의 추구가 행복에 이른다는 환상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유대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우상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환상이라는 것을 알라고 호소하고 있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했다.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인식의 개념을 여러 번 표현했다. 예를 들어,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지식은 어떤 특별한 생각이라기보다 오히려 (모든 껍질을)벗겨내는 것이며, 사심을 갖지 않고, 벌거벗은 채 신에게로 달려가 그와 접하고 그들 끌어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환상이 불필요하게 되는 상황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환상을 파괴해야만 한다. 프로이트의 자각의 개념은 무의식적인 현실을 깨닫기 위한 환상의 파괴'(합리화)'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 사상가들은 모두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 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용인된 사고유형에 비판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식의 목적은 사람이 그로 인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것인 '절대진리'의 확신이 아니라 '인간이성의 자기확인의 과정'이다. '알고'있는 사람에게는 무지도 지식만큼 좋은 것이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무지가 지각이 없는 사람들의 무지와는 다를지라도, 무지와 지식은 모두 인식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는 그것은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하나의 재산으로 소유하게 하는 훈련에 힘쓰고 있는데, 그 지식은 그들이 그후의 생애에서 가질 법한 사회적 명성 또는 재산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얻는 최소한의 지식이란 그들이 일을 불편하지 않게 완수하는 데 필요한 양이다. 또 그들의 훌륭한 감각을 고양시키기 위해 그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지식 상자'가 주어졌다. 그 상자의 크기는 그 사람이 아마 얻게 될 그럴싸한 사회적 위신과 일치할 것이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을 인간정신의 가장 높은 위엄에 접하게 하려고 한다고 항상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주장과는 반대로 종합적인 지식상자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특히 이러한 환상을 기르는 솜씨가 능숙하다. 인도의 사상이나 예술로부터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식의 메뉴를 제공하며,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영양을 섭취하고, 자발성과 자유의 이름으로 하나의 주제에만 집중하거나 심지어는 한 책을 통독하는 것조차 강요되지 않고 있다.

 

7. 신념

 

신념의 개념은 종교적, 정치적, 아니면 개인적 의미에 있어서 그것이 소유양식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아니면 존재 양식에서 사용되고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소유양식에 있어서의 신념이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이성적인 검산을 해보지 않은 해답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만든 공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보통 그 다른 사람들, 즉 관료주의에 굴복함으로써 그 공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공식은 관료주의의 실질적인(또는 단지 상상적인) 권력으로 인해 확실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규모가 큰 집단에 편입되기 위한 입회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과 같은 힘든 일을 면제하여준다. 우리는 올바른 신념의 '행복한 소유자(beatipossidentes)'가 된다. 소유의 양식에 있어서 신념은 확실성을 준다. , 그 공식은 신념을 준다. , 그 공식은 신념을 전파하고 보호하는 사람들의 힘이 확고부동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궁극적이고 확고한 지식을 표명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요구하는 것이 단지 독립의 포기뿐이라면, 누가 확실성을 선택하지 않을 것인가.

신은 본래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의 상징인데,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우상이 된다. 예언적인 개념에서는, 우상이란 우리 자신이 만들고 우리 자신의 힘을 투영시켜서 우리 자신을 약화시키는 하나의 '사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창조물에 복종하며, 그 복종에 의해서 우리는 소외된 형태로 우리 자신과 접촉한다. 우상은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내가 그것에 복종함으로써 '그것'''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신이 우상화되면, 흔히 말하는 신의 특성은, 소외된 정치적 교의와 마찬가지로나 개인의 경험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우상은 '자비의 신'으로 찬양될지도 모르지만, 그 이름으로 어떤 잔인성이 자행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간적인 결속에서 소외된 신념이 더할 수 없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데도 그러한 사실에 대한 의혹조차 일으키지 않는 것과 똑같다. 소유양식에 있어서의 신념이란 확신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 감히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서 인생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삶들을 위한 하나의 지주이다.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의 신념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우리는 신념 없이 살 수 있는가? 젖먹이는 그 어미의 젖을 믿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모두 다른 인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규범을 믿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가? 실제로 신념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고 절망적인 것이 되며, 존재의 핵심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내적 지향, 즉 하나의 '태도'이다. 어떤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신념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사람은 자기 자신 또는 타인을 향한 신념 속에 있을 수 있으면, 종교적인 사람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 속에 있을 수 있으며, 종교적인 사람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 속에 있을 수 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우상의 부정,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수 있는 신의 부정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동방의 왕에 대한 유추에서 표현된 것이지만, 신의 개념은 애초부터 그 자신을 초월하고 있다. 신은 이름을 가져서는 안 된다. , 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미지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발전도상에서 신의 완전한 탈우상화를 달성하려는 시도, 아니 오히려 신의 속성조차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자명한 이치로 생각함으로써 우상화의 위험과 싸우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또는 기독교적 신비주의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신의 개념은 베다나 신 플라톤파 철학에 표현된 생각과 결부되면서 유일한 것, '신성', 즉 빗물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신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자신 속에 있는 신적 특성의 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고 있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능동적인 자기창조의 과정이다. 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우리 속에서 예수가 끊임없이 태어나는 과정이다.

나 자신 속에서, 타인과의 사이에서, 인류 속에서, 완전히 인간적으로 되기 위한 우리의 능력 속에서, 나의 신념은 역시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자신의 경험에 근거를 둔 확신이지, 어떤 신념을 강요하는 권위에 대한 나의 복종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증거를 강요한다고 해서 입증되어질 수 없는 진리의 확실성이며, 그것은 나의 경험을 통한 주관적인 증거로 인해 내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의 확실성이다.

내가 만일 인간의 성실성을 확신하고 있다 해도 나는 그 마지막 날까지 그의 성실성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만일 인간의 성실성이 그 죽음의 순간까지 더렵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성실성이 더럽혀졌을지도 모른다는 실증주의적인 견해를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확신은 타인과 나 자신의 사랑 및 성실성의 경험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깊은 지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내가 자아를 버리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속에 있는 힘의 구조를 인식하고, 그의 개성을 아는 동시에 그의 전체적인 인간성을 살필 수 있는 정도에까지 도달해야만 가능하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으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안다. 물론 나의 이 말은 내가 그의 장래의 모든 행동을 예언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성실성과 책임감 등과 같이 기본적인 성격의 특성에 뿌리박고 있는 행동의 일반적 경향만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신념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들은 인습적인 방법과 실증주의 심리학의 방법에 의해서 인식할 수 있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나는 사실을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8. 사랑

 

사랑 또한 그것이 소유의 양식에서 이야기되는가 아니면 존재의 양식에서 이야기되는가에 따라 두 자기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랑은 하나의 사물, 즉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여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는 사물은 없다. '사랑'은 추상적 개념이며, 아마 아무도 이 여신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사랑의 행위'만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것은 생산적인 능동성이다. 그것은 사람, 나무, 그림, 사상 등을 존중하고, 알고, 반응하고, 긍정하고, 누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의(그녀의, 또는 그것의) 생명력을 증대시키고 소생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를 재생시키고 소생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를 재생시키고 자기를 증대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다.

소유양식에서 사랑이 경험될 때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목을 조르고 질식시키며 죽이는 행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용하고 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는가는 여전히 전적으로 미해결된 문제이다. 모제는 지난 2천 년 동안의 서양 역사를 살펴보면 부모의 자식들에 대한 잔인성에 관해 수많은 기록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잔인성은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고문, 무관심, 단순한 소유욕 및 사디슴에까지 걸쳐 있으며,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사랑을 베푸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임을 믿어야만 한다.

결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사랑에 의해 결혼을 했든, 아니면 과거의 전통적인 결혼처럼 사회적인 편의나 관습에 의해 결혼을 했든,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분의 경우는 예외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며 또 지금까지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모두가 깨달을 때까지 사회적 편의, 관습, 상호의 경제적 이해, 자식에 대한 공동의 관심, 상호의존 또는 상호증오나 공포 등은 의식상으로는 '사랑'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이 점에 관해서는 어떤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수 있다. , 사람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제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 거리를 둔 채 사이좋게 협동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견해는 상대를 더욱 자주 바꾸게 했지만 보다 정직해지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사랑의 빈도를 보다 높인 것은 아니며, 또 예전의 상대보다는 새로운 상대와 더 많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사랑을 '가진다'는 환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사랑에 빠진' 부부들의 역사 속에서 가끔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

구애의 기간 중에는 어느 쪽도 아직 상대방에 대해 자신이 없으며, 서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노력한다. 생기는 항상 얼굴을 아름답게 하므로, 양쪽은 모두 활기를 띠어 매력적이며, 흥미를 끌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어느 쪽도 아직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각자는 '존재하는' , 즉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데 정력을 기울인다.

결혼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상황은 흔히 근본적으로 변한다. 결혼이라는 계약은 각자에게 상대방의 육체, 감정 및 관심의 독점적 소유를 인정한다. 사랑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즉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더 이상 상대방의 환심을 살 필요가 없다. 두 사람은 사랑스러우려고 노력하거나 사랑을 연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권태를 느끼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실망하고 당혹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는 옛날의 그 사람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들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을까? 대개 각자는 상대방이 변한 원인을 찾으며 속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들은 서로가 사랑할 때의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이미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랑하지 않게끔 한 과오임을 알지 못한다. 이제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즉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 등을 함께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리하여 어떤 경우에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시작된 결혼이 사이좋은 소유형태로 변모해 버린다. 그것은 두 이기주의가 하나로 뭉쳐진 조합, '가정'이라는 조합이다.

부부가 지난날의 사랑의 감정을 소생시키려는 소망을 억제할 수 없을 때, 부부의 어느 한쪽은 새로운 상대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란 오직 사랑뿐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들의 존재의 표현이 아니라, 그들이 복종하기를 바라는 여신이다. 그들은 반드시 사랑에 실패하지만, 그것은 '사랑은 자유의 아들'(프랑스의 옛 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결국 너무나 수동적이 되어 권태에 빠지고, 자신의 옛 매력의 나머지조차 모두 잃어버린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 결혼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결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소유 및 존재구조에,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에 있다. 오늘날의 집단결혼, 파트너 교환, 그룹섹스 등과 같은 공동 생활양식의 주창자들은, 내가 보기에는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보다는 많은 '애인'들을 소유하기를 원함으로써, 또 항상 새로운 자극으로 권태를 치료함으로써 그들 사랑의 난제를 회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3: 구약, 신약성서 및 에크하르트의 저술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1. 구약성서

 

구약성서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는, 그대가 가진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해방하라. 그리고 '존재하라!'라는 것이다. 유대 부족들의 역사는 최초의 유대영웅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명령, 즉 그의 고장과 씨족을 버리라는 명령으로부터 비롯된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 12 : 1). 아브라함은 그가 가진 것-땅과 가족-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새로운 당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씨족관계를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은 더욱 심한 속박을 초래한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부유하고 강력해졌기 때문에 노예가 되고, 유목시대의 조상들의 신관, 유일신관을 잃고 훗날 그들의 지배자가 된 부자들의 신인 우상을 숭배한다.

두 번째 영웅은 '모세'이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고향이 되어 버린 고장(결국은 노예의 고향이 되었지만)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해 내서 '인식을 행하기 위해' 황야로 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헤브라이 인들은 커다란 불안을 안고 마지못해서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따라 황야로 간다. 황야는 이 해방에 있어 중요한 상징이다.

황야는 나라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다. 거기에는 재물도 없다. 그곳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을 소유하는 유목민들의 땅이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생활필수품들이지 소유물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출애굽기)의 기록에는 유목민의 전통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같은 유목민의 전통이 비기능적인 재산에 반대하는 경향을 결정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위한 준비로서 황야에서의 생활을 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같은 역사적 요인들은 구속받지 않고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삶의 상징으로서의 황야의 의미를 오히려 강조할 뿐이다. 유대인 축제의 몇몇 주요 상징들은 황야와의 관련 속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은 급히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빵이며 방랑자들의 빵이다. '수카(장막)'는 방랑자들의 집이며 천막에 해당하는 것으로 쉽게 세우고 쉽게 걷을 수 있다. 탈무드에 정의되어 있는 대로 수카는 점유하기 위한 '고정주거'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기 위한 '임시 주거'이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갈망하고, 고정주택을 동경하며, 가난하지만 먹을 음식만은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재산이 없는 황야생활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을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 : 3)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해방의 역사가 그렇듯이 하느님은 유대 민족의 도덕적 약점에 응답한다. 하느님은 아침에 ''으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여줄 것을 약속한다. 하느님은 각자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거두어야 한다는 두 가지 중요한 계율을 덧붙인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어떤 자는 많이 거두고 어떤 자는 적게 거두었도다. 오멜(유대의 계량 단위)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자는 먹을 만큼 거두었더라'(출애굽기 16 : 17~18).

마르크스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각자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몫이 돌아간다'는 원리가 최초로 여기에서 형성된다. 부양받을 권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확립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자식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이다. 자식들은 부양받을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 계율은 축재와 탐욕과 소유에 대한 금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저축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먹을 만큼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출애굽기 16 : 20~21) 샤바트를 준수한다는 개념도 음식을 모은다는 것과 관련되어 도입되었다. 모세는 금요일(유대교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에는 평상시의 음식량보다 두 배를 모으라고 말한다.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출애굽기 16 : 26)

안식일은 성서의 개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훗날 유대교의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것은 십계명 가운데서도 가장 엄격한 종교적 계명이다.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의례를 부정하는 예언자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은 강조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을 떠나 세계각지에 흩어져 방황하던 지난 2천 년간을 통해, 그것을 지키기가 몹시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지켜 온 계명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생명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무력해지고 자주 모멸과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안식일을 지킬 때면 왕과도 같은 긍지와 위엄을 되찾았던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들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적어도 하루만은 해방시켜 준다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휴식일에 불과한가? 확실히 그것은 그렇다. 그리고 휴식한다는 그 기능은 인류 진화에 있어 위대한 혁신 중의 하나라는 존엄성을 안식일에 부여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안식일은 방금 설명한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안식일 제도의 핵심에까지 들어가야만 한다. 안식일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휴식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의 휴식이다. 어떤 것도 파괴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것도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세계와 인간 사이의 싸움에 있어 휴전의 날이다. 사회적 변화도 발생하면 안 된다. 풀잎 하나를 뜯는 일까지도 이 조화를 깨뜨리는 것으로 간주되며, 성냥 한 개비를 켜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 집 정원 안에서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이 허용되는 반면 거리에서는 어떤 것(비록 그 무게가 손수건 하나 정도로 가벼운 것일지라도)의 운반도 금지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요컨대, 짐을 운반하는 노력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사유하는 땅으로부터 어떤 물건을 다른 사람의 땅으로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천적으로 재산의 이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는 개인은 그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생활하며, 기도하고, 공부하고,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사랑을 하는 등, '존재', 즉 자기의 본질적인 힘만을 표현한다.

인간은 안식일에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 따라서 안식일은 기쁨의 날이다. 탈무드가 안식일을 메시아 시대의 선구라고 부르고 메시아의 시대를 영원한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날에는 재산이나 돈은 애통이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금기이며, 그날에는 시간이 타파되고 순수한 존재가 지배한다. 안식일의 역사적인 전신인 바빌로니아의 샤파투는 슬픔과 두려움의 날이었다. 오늘날의 일요일은 오락의 날, 소비의 날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날이다. 조화와 평화의 보편적인 날로서, 또 인간의 미래를 예견하는 인간적인 날로서 안식일을 재정립할 때는 지금이 아닌가. 메시아의 시대에 관한 개념은 세계문화에 대한 유대인들의 또 다른 특별한 공헌이며, 본질적으로 안식일의 개념과 같은 것이다.

메시아의 시대에 관한 생각은 유대인들이 생활을 유지해 가는 희망이었다. 2세기의 바로 크헤바(Bar Kochba : 아드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함)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짓 메시아들로 인한 씁쓸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희망이었다.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떤 역사적 시대, 즉 소유가 의미가 없게 되고, 공포와 전쟁이 끝나며, 우리의 본질적인 힘의 표현이 삶의 목표로 나타나는 시대에 대한 개념이다.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종말로 진행이 된다. 유대인들은 '소유' 없이 산다는 것에는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일정한 거주지 없이도 살 수 있고 날마다 하느님이 주는 음식 외의 다른 음식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즉 현존하는 '지도자'가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래서 모세가 산속으로 사라졌을 때, 절망한 유대인들은 아론으로 하여금 그들이 숭배할 수 있는 어떤 눈에 보이는 이미지, 즉 황금 송아지를 만들도록 한다. 이 일을 두고 이집트로부터 금과 보석들을 갖고 나오도록 허용한 하느님의 과오에 대해 유대인들이 갚음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황금과 함께 부에 대한 갈망을 마음속에 지니고 나온 것이며, 절망의 순간이 닥치자 그들 존재의 소유적 구조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아론이 그들의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주자, 사람들은 말한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애굽기 32 : 4)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렸고, 모세마저도 새로운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도 그들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구속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땅에 얽매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자기들의 적을 아예 절멸시켰으며, 적의 땅에 정착했고, 적의 우상들을 섬겼다. 그들은 자기들의 민주적인 부족생활을 동양적인 전제주의로 바꾸었다. 국가로서의 규모는 작으면서도 그들은 당시의 강대국들을 모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혁명으로 인한 유일한 성취는-만일 그것을 성취하고 할 수 있다면-유대인들이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만일 새로운 계시가 모세처럼 지도력의 부담, 특히 독재적 권력수단(예를 들어, 코라를 지도자로 한 반역자에 대한 대대적 학살처럼)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에 감염되지 않은 혁명적 사상가들이나 이상가들을 통해 표현되지 않았더라면, 유대인들은 오늘날 근동 역사의 학술적 각주 정도로밖에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혁명적 사상가들, 즉 유대의 예언가들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했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란 사물에 속박당하지 않는 것이며, 인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우상들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유로운 사람들로서 그 땅에서 살 수 없게 될 때, 즉 그 땅에 자기를 파묻지 않고는 그 땅을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그들은 그 땅에서 다시 추방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언자들에게는 그 땅으로부터의 추방은 일종의 비극이었으나, 궁극적인 해방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새로운 황야는 한 세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세대들을 위해서 지속될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새로운 황야를 예언하면서도 어떤 땅의 오랜 거주자들을 절멸시키거나 축출할 필요 없이 평화와 풍요를 약속해 주는 메시아의 비전에 의해 유대인의 신앙을 유지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전 인류의 신앙을 지탱해 오고 있었다.

유대 예언자들의 참된 후계자들은 위대한 학자들인 랍비(Rabbi)였으며, 그중에서 요하난 벤 자카이(Jochanan ben Sakai)가 가장 뛰어난 존재이다. 서기 70년 로마 인에 대항한 전쟁의 지도로는 유대 전통의 시작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모든 것, 즉 국가, 교회, 관료적 성직 제도, 관료적 군사제도, 제물로 바치는 동물들, 의식 등에 관한 상실의 시작이었다. 그자들이 패전으로 국가를 잃느니보다 모두 죽는 것이 낫다고 결정했을 때 랍비 자카이는 '반역'을 범했다. 그는 은밀히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의 장군에게 투항하여 유대인 대학 창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풍들은 모든 것을 잃고 '존재'의 이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하나의 집단으로서만 남았다. 존재의 이상이란 알고, 배우고, 사색하고, 메시아의 출현을 희망하는 것이다.

 

2. 신약성서

 

신약성서는 생존의 소유구조에 대한 구약성서의 이의를 계승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이의를 계승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이의는 초기 유대인이 제기한 이의보다 더 철저하다. 구약성서는 가난하고 짓밟힌 계급의 산물이 아니라 유목하는 목양자나 독립적인 농부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1천 년 후, 학식이 있고 탈무드라는 지적 산물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과 아주 잘 사는 사람들의 중간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두 집단은 사회적 정의의 정신,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 과부나 소수민족 등 힘없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원조 등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부를 나쁘다거나 '존재'의 원리에 모순된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 짓밟히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구약성서의 몇몇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자들과 유력자들을 혹평했고, 부와 세속적 권력과 성직의 권력을 철저한 악으로서 비난하며 타협을 거부했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산상수훈은 확실히 대대적인 노예반란의 연설이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분위기는 완벽한 인간적 단결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것은 종종 모든 물질적 재산에 대한 자발적인 공동소유라는 이념 속에 표현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혁명적 정신은, 아직도 유대교와 분리되지 않았던 기독교의 공동체들에게 알려져 있던 바와 같이, 복음서의 가장 오래 된 부분들 속에 아주 명백히 나타난다.(복음서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부분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공동의 전거에서 재구성할 수 있으며, 신약성서의 역사전문가들 사이에서는 'Q'(Q는 독일어 Quelle '전거'에서 왔다)로 불린다. 이 분야의 기본적인 작업은 지그리트 슐츠에 의해 마련되었고, 그는 'Q'의 오랜 전통과 새로운 전통을 구별했다.)

우리는 이러한 말 속에서 사람들이 모든 탐욕과 소유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그리고 소유구조로부터 완전히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하며, 또 이와는 반대로 모든 긍정적인 윤리 규범은 존재와 공유, 단결의 윤리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주된 추론의 근거로서 발견한다. 이 기본적인 윤리적 입장은 한 개인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한 개인과 물질과의 관계에 다같이 적용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훈계(마태복음 5 : 44~48, 누가복음 6 : 27 이하, 32~36)는 개인의 소유권에 대한 철저한 부인(마태복음 5 : 39~42, 누가복음 6 : 29 이하)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보다 더욱 철저하게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과 이기심의 완전포기를 강조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지 말라는 규범(마태복음 7 : 1~5, 누가복음 6 : 37 이하, 41 이하)은 자아를 잊어야 한다는 원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복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에 전념하라는 원리를 더욱 확대한 것이다.

또한 물건에 대해서도 소유구조의 완전한 부인이 요청된다. 가장 오래된 공동체는 재산에 대한 철저한 부인을 주장했다. 그 공동체는 재산을 축적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 없어지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 없어지는 일이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6 : 19~21, 누가복음 12 : 33 이하), 예수가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로다'(누가복음 6 : 20, 마태복음 5 : 3)라고 한 것도 같은 정신에서 한 말이다. 확실히 초기 기독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였으며, 하느님의 구속 계획에 따라 현존 질서가 궁극적으로 소멸할 때가 왔다는 묵시록적 확신에 차 있었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묵시록적 개념은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메시아 사상의 한 변형이었다. 궁극적인 구원과 최후의 심판에 앞서 혼돈과 파괴의 기간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공포에 찬 기간이므로 탈무드를 쓴 랍비들이 신에게 메시아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자기들을 빼놓지 말라고 간청할 정도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새로운 점은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그때가 왔다'(혹은 가까운 장래에 온다)고 믿었으며, 예수의 출현과 함께 '그때'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은 점이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과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인들('여호와의 증인'은 예외지만)보다도 과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인류가 세계의 궁극적인 대파국에 접근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도 주장할 수 있는 견해이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권력과 영광의 절정에 있던 로마 제국의 한 작은 지역에서 살았다. 당시 대파국을 경고하는 조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의 가난한 유대인의 이 작은 집단은 그 강력한 세계가 머지않아 올 것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확실히 그들이 잘못되어 있었다. 예수의 재림이 실현되지 않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서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서 해석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에 예수의 중재자적 역할을 교황의 교회로 옮기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마침내 교회는 온갖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예수의 대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믿기 힘든 이 소집단의 극단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더욱 진지하게 초기 기독교를 대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덕적 확신만을 근거로 삼아 현존하는 세계에 대해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난하고 짓밟힌 계급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의 유대인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부인하며 계속 메시아를 기댜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인류(유대인뿐만 아니라)가 종말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에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왕국이 이룩될 수 있는 위치에 다가섰을 때 오게 될 것이다.

'Q'의 새로운 전통은 그 기원을 초기 기독교의 전개 중에서 보다 진행된 단계에 두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같은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가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은 이야기가 그 원리를 아주 간결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권력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 밖의 소유구조의 현현들이 비난을 받는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는-물질에 대한 갈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첫 번째 유혹에 대해서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태복음 4 : 4, 누가 4 : 4). 그러자 사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완전한 힘, 즉 중력의 법칙을 바꾸는 힘을 준다는 약속으로 예수를 유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상의 모든 왕국을 지배하는 무한한 힘으로써 시험하지만 예수는 응하지 않는다(마태복음 4 : 5~10, 누가복음 4 : 5~12).

예수와 사탄은 여기서 두 가지 정반대되는 원리의 대표자로서 나타난다. 사탄은 물질적 소비의 대표자이자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의 대표자이고, 예수는 존재의 대표자이자 소유하지 않음이 존재의 전제가 된다는 이념을 대표한다. 복음서의 시대 이후 세상은 사탄의 원리를 추종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의 승리마저도 예수와, 예수 이전과 이후에 살았던 여러 위대한 '스승'들이 표현했던 완벽한 존재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존재로의 지향을 위해 소유로의 지향을 물리치는 윤리적 엄격성은 에세네파(신비주의와 금욕주의가 특징인 기원전 2 세기경의 교단)와 사해문서에 기원을 두고 있는 교단처럼 유대 공동체적 교단들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기독교 역사 전반을 통해 윤리적 엄격성은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겠다는 서약에 근거를 둔 교단들 사이에 존속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초기 기독교의 극단적 개념의 또 다른 표현들을 교부들의 저작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 교부들은 이 점에 있어서는 사유재산 대 공유재산이라는 주제에 관한 그리스의 철학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있다.

비록 극단주의의 정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고 교회의 제도가 더 강력해질수록 덜 급진적인 견해로 기울지만, 초기 교회의 사상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사치와 탐욕을 준열하게 나무라고 부를 경멸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스티누스는 2세기 중엽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일찌기 재물 (동산)과 재산(토지)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우리는 이제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공동재산으로 만들어 그것을 어려운 사람들과 공유한다.' 역시 2세기에 씌어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국이 없는 것에 대한 구약성서의 사상을 연상케 하는 아주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어떤 낯선 나라도 그들 (기독교도)의 조국이며, 모든 조국은 그들에게는 낯선 땅이다.' 3세기의 테르툴리아누스는 모든 상거래는 탐욕이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하고, 탐욕과 거리가 먼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거래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그는 거래는 항상 그 자체에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언명한다. 그리고 탐욕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다른 교부들도 마찬가지지만, 바실리우스(Basilius)에게 있어서도 모든 재물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그의 특성을 말해 주는 이런 질문이 있다. '다른 사람의 옷을 가져가는 사람은 도둑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가?' 바실리우스는 원천적인 물자공동체를 강조했기 때문에 몇몇 저자들에 의해 공산주의적 경향을 대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이 간략한 묘사를 잉여물자는 생산하지도 소비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4세기의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의 경고로써 끝맺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것을 쓴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당신 것이 아닌 것을 쓰고 있다. 방탕하고 이기적인 사용은 당신의 것을 당신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든다. 당신은 냉담한 마음으로 그것을 사용하고 당신의 것을 당신만이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이나 어떤 소유물의 이기적인 사용은 부도덕하다는 교부들의 견해는 아직 몇 페이지쯤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시대로부터 초기 기독교를 거쳐 그 뒤의 몇 세기에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소유지향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 든 주장만으로도 충분히 지적할 수 있다. 공산주의를 공공연히 채용한 분파와 투쟁한 아퀴나스까지도, 사유재산제도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복리를 이룬다는 목적에 제대로 공헌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고대불교는 자아, 영원한 물질의 개념, 그리고 자기완성에 대한 갈망 등, 어떤 종류의 소유든 소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구약이나 신약보다 더 강조한다.

 

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 ~ 1327)

 

생존의 소유양식과 생존의 존재 양식 간의 차이점에 대해 에크하르트는 어떤 교사도 따를 수 없는 통찰과 명석함으로 분석하여 서술했다.

독일 도미니코 수도회의 주요 인물인 에크하르트는 박식한 신학자였고 독일 신비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이자 가장 심오하고 철저한 사상가였다. 그의 영향력은 그가 독일어로 쓴 설교집을 통해서 최대한으로 퍼졌고, 이 설교집은 그의 동시대인과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독일 신비론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또 오늘날에 와서도 무신론적, 합리적, 혹은 종교적 생활철학에의 진정한 인도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하의 에크하르트 인용은 요제프 L. 크빈트의 에크하르트에 관한 위대한 저작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저작집''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집과 종교논문', 레이먼드 B. 블래크니의 영역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그 전거이다.

 

에크하르트에 있어서의 소유의 개념

소유의 양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견해의 전거로 대표적인 것은 빈곤에 관한 그의 설교로서 마태복음 53'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요'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정신적인 빈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검토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은 '외면적'인 빈곤, 즉 물질적인 빈곤이 아니라는 말로 논의를 시작한다(물질적인 빈곤도 미덕이면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서 구절에 나오는 빈곤, '내면적'인 빈곤이며, 그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가난한 사람이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소유하지)않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금욕적인 생활을 선택한 남자나 혹은 여자가 그에 대한 보통의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을 참회의 고행이나 대외적인 종교적 실천으로 이해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을 이런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이기적 자아에 집착한 사람들로 본다. '이러한 사람들은 외관에 의해 성자답다는 평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볼 때 그들은 바보이다. 그들은 신적 진리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원함'은 불교에서도 그 근본적 사상이 된다. '원함'이란 물건과 이기에 대한 갈망과 탐욕을 말한다. 불타는 이러한 원함을 즐거움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에크하르트가 의지를 갖지 말라고 이야기할 경우, 그는 인간이 허약해야만 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인간이 그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의지, 즉 갈망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의지는 아니다. 나아가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신의 의지를 행하려고 원해서도 안 된다고까지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도 일종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탐욕을 갖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에크하르트의 비집착의 개념의 본질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에크하르트는 무식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교육을 못 받고 미개한 사람을 그런 사람이라고 규정한 것일까? 설마 그런 것은 아니리라.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었고, 그 자신이 해박한 지식인이었고 또 그러한 사실을 숨기거나 과소평가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에크하르트가 어떻게 그러한 규정을 내렸겠는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개념은 지식을 '소유함''인식행위' 간의 차이점과 관계가 있다. '인식행위'란 사물의 근본까지 파고들어 원인을 알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에크하르트는 어떤 특정의 사상과 '과정'을 참으로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는 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신을 아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사랑은 욕망과 목적에 관련이 있지만, 지식은 어떤 특별한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사심 없이 적나라하게 신에게 달려가 마침내 신을 접하고 그를 끌어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 (에크하르트는 다양한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쓰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은 자아를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만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무언가 더 말을 해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이 빈곤에 도달하려는 사람은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지식을 없애버려야만 한다. 그래서 신에 대한 지식이 자기 속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존재가 신의 외면적인 종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다른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 그의 삶이 바로 그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한다. 인간은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지식을 비워버리고 신으로 하여금 원하는 성취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도록 해야만 한다고."

에크하르트의 견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말의 참된 뜻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을 비워 버려야만 한다'고 말할 때,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알고 있는 ''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다는 '사실자체'를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지식을, 그것이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고, 우리가 그 속에서 안정을 얻는 하나의 소유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지식으로 '충만'되어서는 안 되고, 지식에 매이거나 지식을 갈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지식은 도그마의 성질을 띠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양식에 속한다. 존재 양식에 있어서는 지식은 확실성을 찾아내기 위해 결코 멈추는 일이 없는 날카로운 사고 활동일 뿐이다.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자. 내가 자주 말했고 권위자들이 동의하는 바, 신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한 거처가 되어 신이 역사하기 좋도록 하려면 인간은 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자신의' 모든 소유물과 '자신의' 일체의 행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야 한다. 만일 인간이 물건이나 생울 혹은 그 자신이나 신을 갖지 않고 비어 있는데 신은 여전히 인간 속에서 자신이 역사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장소가 존재하는 한 가장 직접적인 빈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가난하지 않다고. 신이 역사할 장소를 인간이 예비해 놓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정신의 빈곤은 인간이 신과 그 역사마저도 없애버리도록 요구한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인간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기를 원한다면, 신 자신이 역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은 바로 그것을 바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이 역사할 장소도 갖지 못할 만큼 아주 가난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장소를 예비한다는 것은 구별을 유지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신께 기도한다. 나를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기를."

에크하르트로서 소유하지 않음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이 이상 철저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물질과 행동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 이 말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고 아무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즉 소유물에게, 심지어 신에게도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크하르트는 또 다른 차원에서 소유의 문제에 접근, 소유물과 자유와의 관계를 논한다. 인간의 자유는 우리의 소유물, , 마침내는 자신의 자아에 얽매이는 정도에 따라 제약된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에 얽매임으로써 우리 자신의 길을 가로막으며, 결실을 방해당하고, 우리 자신의 완벽한 실현을 방해받는다. 내 생각에는 미드(D. Mieth)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전적으로 옳은 것 같다. , 진실한 생산성의 조건으로서의 자유는 자아를 포기하는 바로 그것이며, 이것은 타율적 의미로서의 사랑이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속박되지 않고, 물건과 자기의 자아에 집착하려는 갈망을 벗어난다는 의미의 자유는, 사랑과 생산적 존재를 위한 조건이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간적 목표는 완전한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아구속, 자아 중심, 즉 생존의 '소유양식'의 속박을 제거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소유지향의 본질에 관해서 미드만큼 내 생각과 비슷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는 인간의 '재산구조'에 관해 논술하고 있는데, 그 방식은 내 생각으로는 내가 '소유양식' 또는 '생존의 소유구조'에 대해 논술하고 있는 방식과 똑같다. 그는 인간의 내적 재산구조의 파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마르크스의 '소유권 몰수'개념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재산구조의 파괴야말로 가장 극단적 형태의 수단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생존의 소유양식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전반적 태도이다. 모든 것이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물건들, 재산, 의례, 선행, 지식, 사상 등이 모두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들 자체는 '나쁜'것이 아니지만 나쁘게 변한다. ,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슬이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에 있어서의 존재의 개념

에크하르트는 '존재'를 각각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보다 좁은 의미의, 즉 심리학적 의미로서의 존재는 인간을 움직이는 '실제적인', 그리고 흔히 무의식적인 동인을 나타낸다. 이것은 단순한 행위나 견해와는 다르며, 행동하고 생각하는 인간과도 별개의 것이다. 크빈트는 에크하르트를 영혼의 비범한 분석자라고 평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평가인 것 같다. '에크하르트는 인간행동의 가장 은밀한 관계, 가장 깊이 숨겨진 이기심이나 의도 및 견해의 움직임을 밝히는 데, 그리고 감사와 보상을 바라는 강렬한 동경을 탄핵하는 데 결코 싫증을 내지 않는다.' 숨겨진 동기에 대한 이 날카로운 통찰로 인해 에크하르트는 프로이트 이전 시대의 단순성과, 아직도 유행하고 있는 행동주의적 견해의 어리석음을 극복한 프로이트 이후의 독자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세기 초의 과학자들이 원자를 나눌 수 없는 최종적인 물질 단위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주의적 주장은 행동과 견해를 나눌 수 없는 두 개의 궁극적 데이터라고 보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여러 논술에서 이 견해를 표명했는데, 다음 구절은 그 견해의 특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 자기가 무엇(인가)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선하게 (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하며, 행해야 할 일의 수나 종류를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당신의 작업의 토대가 되는 기본적인 것을 중시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야말로 실재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며, 우리 행동의 추진력이 되는 성격이다. 반면에 우리의 동적인 핵심에서 벗어난 행위나 견해는 실재성을 갖지 못한다.

두 번째 의미는 보다 범위가 넓고 근본적이다. , 존재는 생명이며 활동이며 탄생이며 재생이며 유출이며 횡일이며 생산성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존재는 소유의 반대이며, 자아구속, 자기중심주의의 반대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존재는 능동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능동적이라는 것은 분주하다는 현대적 의미가 아니고, 자기의 인간적 힘을 생산적으로 나타내는 고전적 의미이다. 그는 이것은 여러 가지 어구로 표현한다. , 그는 존재를 '끓는' 과정, '낳는' 과정,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 밖으로 자꾸 흐르는'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때로 그는 능동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달린다(running)'는 상징을 사용한다. '평화를 향해 달려 들어가라! 달리는 상태, 평화 속으로 끊임없이 달려 들어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한다.' 능동성의 또 하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능동적이고 활발한 사람은 '가득 참에 따라 늘어가므로 결코 가득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능동성의 조건은 소유양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윤리체계에 있어서 가장 높은 미덕은 생산적인 내적 능동성의 상태이며, 이 내적 능동성의 전제는 모든 형태의 자아구속과 갈망을 넘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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