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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 1

서장 : 위대한 약속, 그 실패와 새로운 선택

 

1. 환상의 종말

 

무한한 진보라는 저 위대한 약속-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 자유의 보장-은 산업 시대의 개막 이래 각 세대의 희망과 신념을 유지시켜 왔다. 우리의 문명이 인류가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지배는 산업 시대가 도래하기까지는 제한된 것이었다. 산업이 진보되어 기계 및 핵에너지가 동물 및 인간의 에너지를 대신하고 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게 되자, 우리는 무한한 생산, 나아가서는 무한한 소비의 길로 들어섰으며, 기술이 우리를 전능(omnipotent)하게 하고 과학이 우리를 전지(omniscient)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자연 세계를 우리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벽돌로 사용하여 제2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지고의 존재, 이를테면 신이 되는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남자, 그리고 점차 여자들도 새로운 의미의 자유를 경험했다. 그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다. 봉건적 사슬은 끊어졌고, 사람들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상류 및 중류계급에 한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성취를 본 다른 사람들은 산업화가 그 속도만 유지한다면 이 새로운 자유가 결국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미치게 되리라는 신념을 가질 수 있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인간을 목표로 한 운동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부르즈와적 생활을 이상으로 한, 즉 미래의 인간을 '보편화된 부르즈와'로 이끄는 운동으로 재빨리 변모되었다. 모든 사람이 부와 안락을 성취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무제한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한한 생산, 절대적 자유, 무제한의 행복, 이 세 가지가 '발전'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핵을 형성하였고, 이 새로운 '발전된 세속의 도시''하느님의 도시'로 대치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새로운 종교가 그 신자들에게 에너지와 활기, 희망을 주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위대한 약속'의 영광, 산업시대의 놀라운 물질적, 지적 성취를 마음에 그려봄으로써 비로소 그 실현의 실패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일으키고 있는 충격을 이해할 수 있다. 산업 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주지 않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2. 자기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의 사상, 감정, 취미가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코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정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끝나버렸다.

3. 경제적 발전은 여전히 부국에만 국한되어,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들 사이의 간격은 계속 넓어져 왔다.

4. 기술적 발전은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냈으며, 이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1952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상황에 과감히 직면하기 위하여...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 힘을 갖게 된 이 초인은 초인적 이성의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욱더 가련해진다... 초인이 될수록 자신이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2. '위대한 약속'은 왜 실패했는가

 

위대한 약속의 실패는 산업주의의 근본적인 경제적 모순은 제쳐놓더라도 다음의 두 가지 주요한 심리학적 전제에 의해 산업체제 속에 침투되었다. 그 전제란 1. 인생의 목적은 사람이 느끼는 어떤 욕망이나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서 정의된 행복, 즉 최대한의 쾌락에 있다(극단적 쾌락주의). 2.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탐욕은 체제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조화와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역사상 어떤 시대나 부유층이 극단적 쾌락주의를 누려왔음은 잘 알려진 것이다. 이를테면, 로마의 엘리트 계급,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상류계급, 18세기 및 19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엘리트층처럼 무한한 자력의 소유자였던 그들은 무한한 쾌락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쾌락주의가 뜻하는 최대한의 쾌락은 특정 시대의 특정 부류가 누린 것이긴 하지만, 17세기까지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중국, 인도, 근동, 유럽의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이 제시한 복지의 이론으로서 표명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하나의 예외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티포스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그는 기원전 4세기 전반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만족할 만한 육체적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행복은 누린 쾌락의 총화라고 가르쳤다. 그의 철학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지식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아리스티포스가 유일한 진짜 쾌락주의자였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된다. 그에게 있어서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을 충족시킬 권리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따라서 인생의 목표인 '쾌락'을 실현할 근거가 되고 있다.

에피쿠로스를 아리스티포스 류의 쾌락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는 '순수한' 쾌락이 최고의 목표이긴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 쾌락은 '고통의 부재(aponia)'와 영혼의 안정(ataraxia)을 의미했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욕구를 충족시키는 쾌락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런 쾌락은 반드시 불쾌함을 동반하고, 따라서 인간을 그 진정한 목적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이론은 많은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과 비슷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대조되는 일종의 주관주의를 대표했던 것같이 보인다. 다만 이것은 에피쿠로스의 견해에 관한 모순된 기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단정적인 해석을 내린 경우에 있어서이다.

그 외의 위대한 스승 중에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윤리적 규범을 구성한다'고 가르친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인류의 만족스런 복리에 관심을 두었다. 주관적으로만 느껴지고 그 충족이 순간적 쾌락만을 가져다주는 욕구와, 인간 본성에 뿌리박고 있어 그 실현이 인간적 성장에 기여하며, 복지를 생산하는 욕구와는 사고의 기본적 요소에서 구분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느끼는 욕구와 객관적으로 타당성을 가지는 욕구간의 구분'에 관심을 두었다. 전자의 일부는 인간적 성장에 해를 끼치며, 후자는 인간 본성의 요건과 일치한다.

인생의 목적이 모든 인간 욕망의 충족에 있다는 이론을 아리스티포스 이후 처음으로 분명히 표명한 사람들은 17세기와 18세기의 철학자들이었다. 그것은 '이익'(성경에 있어서, 그리고 후세에 와서 스피노자에 있어서 그러했듯이) '영혼을 위한 이익'이 아니고 물질적, 금전적 이익을 의미하게 되었던 시대, 중류계급이 그 정치적 굴레뿐만 아니라 사랑과 단결의 모든 유대까지 벗어던져 버리고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더욱 자기 자신답게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된 시대에 쉽사리 생겨날 수 있는 개념이었다. 홉스에게 있어 행복은 하나의 탐욕에서 또 다른 탐욕으로의 끊임없는 추이였으며, 라 메트리는 적어도 행복의 환상을 주는 것이라는 이유로 약제(마취제)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마르키 드 사드에게 있어서는 잔인한 충동의 만족도 정당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런 충동이 존재하며, 만족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부르즈와 계급의 결정적 승리의 시대에 살았던 사상가들이었다. 귀족들의 비철학적인 관행이었던 것이 부르즈와지의 관행과 이론이 된 것이다.

18세기 이래 많은 윤리학상의 이론이 발전되었다. 일부는 공리주의처럼 좀더 훌륭한 형태의 쾌락주의였고, 다른 일부는 칸트, 마르크스, 소로, 슈바이처의 이론처럼 철저하게 반쾌락적인 체계였다. 그러나 대체로 1차대전 이후의 최근에는 다시 철저한 쾌락주의의 관습과 이론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무한한 쾌락이라는 개념은 규율 있는 작업이라는 이상과 묘한 모순을 이룬다. 이것은 일에 대한 집념을 윤리적 규범으로 인정하는 것과 휴가 동안의 완전한 나태라는 이상, 그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과도 비슷하다. 한쪽에는 일관작업의 벨트컨베이어와 관료적인 일과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텔레비전, 자동차, 섹스가 있어서 이 모순적 조합을 가능하게 한다. 작업에의 몰두만을 강요받는다면 완전한 나태에만 탐닉하는 사람들은 미치고 말 것이다. 이 둘의 조합에 의해서 사람들은 살 수가 있다. 게다가 이 두 가지 모순되는 태도는 경제적 필연성에도 대응된다. , 20세기의 자본주의는 일상화된 공동작업은 물론 생산된 상품 및 서비스의 최대한의 소비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에 비추어 극단적 쾌락주의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론적 고찰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론적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관찰할 수 있는 데이터만으로도 우리의 '행복의 추구' 방식이 복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불행한 사람들의 사회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기가 죽고, 파괴적이며, 의타적인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쪽에서는 마구 허송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는 현재 쾌락이(복지와 기쁨 같은 능동적 감정과 대조되는 수동적 감정으로서) 인간존재의 문제에 대한 만족스런 대답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최대의 사회적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쾌락적 충동의 만족이 인구의 소수에게만이 아니라 과반수 이상에게 가능하게 되었다. 이 실험의 해답은 벌써 부정으로 나왔다.

개인적인 이기주의의 추구가 조화와 평화, 모든 사람의 복리증대를 가져다준다는 산업 시대의 제 2의 심리적 전제 역시 이론적 근거에서도 오류이며, 또 그 오류는 관찰할 수 있는 데이터에 의해 입증된다. 고전학파의 위대한 경제학자 중에서는 단 한 사람, 즉 데이비드 리카르도만이 반대했던 이 원칙이 어떻게 진실이 될 수 있는가. 이기주의자라는 것은 내 행동뿐만 아니라 내 성격에도 관계되는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만사가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 공유가 아니라 소유가 내게 쾌락을 준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 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내 고객을 속여야 하고, 경쟁자를 없애야 하고, 내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보다 적게 가진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미소를 머금고 이성적이며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에 대한 열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계급전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체제가 계급을 철폐함으로써 계급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구실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체제는 인생의 목표로서의 무한한 소비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고 계급전쟁이 있게 마련이며, 또한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전쟁이 있게 마련이다. '탐욕과 평화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만일 18세기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극단적 쾌락주의는 경제 행동의 지도원리로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세사회에서는, 다른 고도로 발달된 여러 사회 또는 원시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 행동은 윤리적 원칙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학구적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가격이나 사유재산과 같은 경제적 범주가 도덕적 신학의 일부가 되었다.

신학자들은 그들의 도덕률을 새로운 경제적 요구에 적용시키는 형식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적정가격'이라는 개념의 정의처럼), 그런데도 경제적 행동은 '인간적' 행동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고, 따라서 인본주의적 윤리의 가치관에 예속되는 것이었다. 몇몇 단계를 거쳐 18세기 자본주의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 경제적 행동은 윤리 및 인간적 가치관과 분리되었다. 사실 경제적 기구는 인간의 욕구나 의지와는 독립된 자율적 실체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체제였다. 확대일로를 걷는 대기업의 성장을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중소기업이 멸망하거나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것이 유감스럽게는 생각되지만, 이것들이 자연법칙의 귀결인 듯이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 경제적 필연성이었다.

이 경제체제의 발전은 이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체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모순의 날카로움을 감추려고 체제의 성장(혹은 한 큰 기업의 성장)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 해석은 하나의 보조적 해석에 의해 보강되었다. 보조적 해석이란 체제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제 특질-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탐욕 등-이 인간성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체제뿐만이 아니라 인간 본성 그 자체가 그러한 특질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탐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원시적 사회'로 그 주민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특질들이 산업사회를 존재하도록 하는 자연스런 충동이 아니고 사회적 환경의 '산물'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중요성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 자연과 인간들 간의 관계가 매우 적대적인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생존의 조건에 의해서 자연 안에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의 이성이라는 천부의 자질에 의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자연의 변종'인 우리는, 우리의 존재적 과제를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라는 메시아적 이상을 버리고 자연을 정복하고 그것을 우리 목적에 맞게 변경시킴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자연의 정복은 더욱더 파괴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정복과 적대감에 맹목적이 된 우리는 천연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 따라서 결국 고갈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연이 인간의 탐욕에 대해 반격을 가해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산업사회는 자연을 경멸하고 있다. 또한 기계로 만들지 않은 모든 물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최근의 일본, 중국 등을 예외로 하는 유색인종들)에 대해서도 경멸감을 갖고 있다. 현대인들은 기계적인 것, 강력한 기계, 생명이 없는 것에 이끌리고 있으며, 따라서 점점 더 파괴를 향해서 전진하고 있다.

 

3. 인간변혁의 경제적 필연성

 

이 책의 지금까지의 고찰은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제, 즉 우리의 생활방식이 낳은 성격과 특징이 병인적이라는 것, 따라서 병든 인간, 병든 사회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주 다른 관점에서 경제적 및 생태학적 재난을 피하는 대안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심리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제 2의 논의가 성립된다. 이 논의는 로마 클럽에 의해 위촉된 두 보고서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D. H. 메도스 등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D. M. 메사로빅과 E. 페스티벌에 의한 것이다. 이들 보고서는 기술적, 경제적 동향, 인구 동향 등을 세계적 규모에서 다루고 있다. 메사로빅과 페스텔은 종합기본계획에 따른 전세계적 규모의 경제적, 기술적 대변혁만이 '대규모적인,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 지구에 미치는 파국'을 피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주장의 입증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자료는 지금까지 행해진 전 세계적이고 체계적인 탐구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그들의 저서는 메도스의 보고서에 비해 방법론적인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메도스의 보고서보다 더욱 철저한 경제적 변혁을 생각하고 있다). 메사로빅과 페스텔은 또 그러한 경제적 변혁은 '인간의 가치관과 태도', 나의 표현으로는 인간의 성격 지향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때에만, 즉 자연에 대한 새로운 윤리, 새로운 태도 같은 것이 생겨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보고서가 출판되기 이전, 혹은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을 그저 확인한 데 불과하다. , 새로운 사회는 그 발전과정에서 인간이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될 때에만, 좀 더 조심성 있게 말한다면, 현재의 인간의 성격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에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유감스럽게도 두 보고서는 우리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수량화, 추상화, 비인격화의 정신으로 씌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 없이는 어떤 실제적 계획도 세울 수 없는 정치적, 사회적 요소를 모두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보고서는 귀중한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인류의 경제적 상황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가능성 및 위험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윤리,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이들 보고서의 결론은 이 요구가 그들의 철학적 전제와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에 한층 귀중하다.

이들과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이 슈마커인데 그는 경제학자이며 극단적 인도주의자이다. 인간의 극단적 변혁을 요구하는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거에 기초를 두고 있다. , 현재의 우리 사회구조는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근본적으로 사회체제를 변혁하지 않으면 경제적 파국을 향해 전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인간변혁의 필요성은 윤리적, 종교적 요구, 또는 우리의 현 사회적 성격의 병인적 본질에서 유발되는 심리적 요구로서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한 조건으로서도 나타나고 있다. 올바른 삶은 이제 윤리적, 종교적 요구의 충족만이 아니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의 육체적 생존이 인간 심성의 극단적 변화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 심성의 변화는,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서 그 마음에 변화를 위한 기회와 그것을 성취할 용기와 이상을 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4. 파국은 막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 언급된 데이터는 모두 발표되어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그러나 거의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무서운 인간 운명의 마지막 선고로 생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아무런 진지한 노력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우리의 전존재에 대한 이런 위협을 보고도 아무 대책도 없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임한 사람들 또한 그 담당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모든 본능 중에서도 가장 강한 생존을 위한 본능마저 우리에게 아무런 행동동기도 주지 않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도대체 어째서일까. 여기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설명 중의 하나는, 지도자들이 파국을 피하기 위해 효과적인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럴듯한 여러 행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행동이란 끝도 없는 회의, 결의, 군비축소 회담 등으로, 이 모든 것들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을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도를 하는 자나 지도를 받는 자나 모두 갈 길을 알고 있는 척,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척함으로써 그들의 양심과 생존에 대한 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은, 이 체제가 낳은 이기주의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성공에 더 놓은 가치를 두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사업의 경영자들이, 그들에게는 개인적 이익을 주는 것이지만 사회에는 해롭고 위험한 결정을 내려도 이미 아무도 충격을 받지 않는다. 사실 이기주의가 현대의 실용적 윤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 중의 하나라면, 그들이 달리 행동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그들의 자식과 배우자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관심처럼 그들 스스로의 진정한 이익추구에만 관심을 두는 한에서는 탐욕은 (굴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동시에 일반대중도 자기들의 개인적 일에 너무 이기적으로 관련돼 있기 때문에 개인적 영역을 벗어나는 것에는 무엇에나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의 생존본능이 무력화한 데 대한 또 하나의 설명은, 요구되는 삶의 변화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감수해야 할 희생보다 차라리 앞으로 닥칠 파국을 택하려 한다는 것이다. 케스틀러가 기술한 스페인 내란 동안에 겪은 그의 경험은 이 널리 보급된 태도를 설명해 주는 현저한 실례가 될 것이다. 케스틀러는 한 친구의 편안한 별장에 앉아 있을 때 프랑코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는 보고를 들었다. 프랑코의 군대가 밤사이에 도착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아마 총살을 당할 것이다. 그는 달아나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춥고 비가 오고 있었으며, 집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포로로 잡혔다. 그후 몇 주일이 지나서 그는 동료 언론인들의 노력으로 거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행동은, 대수술을 요하는 중병이라는 진단이 내릴 것이 싫어 검사를 받기보다 차라리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려는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난다.

생사의 문제에 있어서의 인간의 치명적 수동성에 대해서는 이외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거야말로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의 하나인 것이다. 그건 바로 우리가 기업적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아니면 '미소짓는 얼굴을 가진' 기술주의적 파시즘의 모델에 대하여 다른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몇 개의 사회 모델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위한 노력이 거의 기울여지지 않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회적 재건의 문제가 오늘날 과학과 기술로 꽉 채워져 있는 최고의 두뇌 속에 대치되어 들어가지 않는 한, 새롭고 현실적인 대안을 그려낼 만한 상상력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주된 논제는 존재의 두 가지 기본적 양식, '소유의 양식''존재의 양식'에 대한 분석이다. 첫 장에서 나는 이 두 양식의 차이에 관한 개관을 제시하였다. 2장에서는 독자들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경험 속에서 쉽사리 관련을 지을 수 있는 일상경험에서의 예를 몇 가지 들어가면서 그 차이를 입증하였다. 3장에서는 구약 및 신약 성경,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저작에 나타난 소유와 존재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 이후의 몇 장에서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 소유하는 존재 양식과 존재하는 존재 양식 간의 차이에 대한 분석이다. 여기서 나는 경험적 데이터에 기초해서 이론적 결론을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존재의 두 기본적 양식의 개별적 양상들을 취급하고 마지막 몇 장에서는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의 형성에 대해 이러한 양식이 갖는 관련성을 다루고, 인간을 약하게 하는 개인적 불행, 전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사회, 경제적 진전에 대한 대안에 대해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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