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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의 사상과 <리바이어던>

 홉스의 사상과 리바이어던

한승조

 

1. 17세기 영국의 사회적 배경

토마스 홉스의 정치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 맥락 속에서 홉스 사상의 위치를 확립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7세기에 있어서의 영국의 정치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정치사상이 배양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홉스나 로크의 정치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사실 및 객관적 조건들을 구명하기에 앞서, 17세기가 어떠한 시대였던가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문화사적 견지에서 17세기는 근대적 자연과학이 획기적인 발달을 성취한 시기였다(물리학. 수학 방면에서는 뉴턴이 나와서 유명한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수학 방면에서는 미분학이 발견되었으며, 또 데카르트. 파스칼. 라이프니츠 등이 배출되어 근대 수학이 크게 비약하였다. 근대 화학의 기초는 보일(Boyle)에 의하여 세워졌고, 식물의 분류를 완성한 것은 린네였으며, 하비는 혈액순환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또 철학에 있어서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이 성숙하여 식자간에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한 시대였다(찰학에 있어서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어용철학인 스콜라 찰학을 대치한 근대철학이 자연과학 연구의 부흥에 자극을 받아 인간 인식활동의 방법론 체계를 과제로 하여 출발하였다. 합리주의 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는 연역법적방법을 창시하고, 베이컨은 경험론의 시조가 되었다).

종교 면에 있어서는 대륙의 처참한 종교전쟁. 30년 전쟁(1618~48)을 비롯하여 유럽 방방곡곡에서 신구교도의 치열한 싸움 끝에 관용을 부르짖는 이신론적인 종교관이 점차로 대두하기 시작한 세기임을 기억할 수 있다(일명 자연신론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종교관으로, 이의 제창자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를 비롯하여 라이프니츠. 로크. 샤프츠버리(Shaftesbury) 등을 들고 있다). 또 경제사적 면에서 볼 때에는, 상업자본주의가 점차적으로 산업자본주의로 넘어가던 시대였다. 다른 견지에서 본다면, 국가가 직접 화폐의 축적. 획들을 위하여 식민지를 개척하며 상업 무역 진흥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 전기 중상주의로부터 상업 무역보다도 국내 공업의 보호 육성에 중점을 두어 관세정책으로써 수입을 억제. 수출 장려하는 후기 중상주의로 넘어가기 시작한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는 근대적 주권국가가 힘차게 등장하여 절대 군주주의가 그 절정에 도달한 시대이며, 국위 선양과 민부강병의 정책으로써 유럽 및 식민지역에 맹렬한 약육강식의 국제정치가 싹트기 시작한 때였다. 이러한 객관적 정세 및 조건들이 홉스와 로크의 정치사상에 어떠한 영향과 제약을 주었던가는 가히 추측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

중세기에는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철두철미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지배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지만, 17세기까지만 해도 종교 문제는 모든 인간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17세기에 있어서 모든 정치문제가 신앙과 신학 이론의 의상을 입지 않고서는 논의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미리 인식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을 개략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각기 신학의 기초 위에 세워진 절대 군주주의의 이론과 인민주권의 이론이 오랫동안 대립하고 투쟁하던 끝에 근대적. 입헌적 군주주의의 기초가 된 명예혁명(Glorious Revolu -tion)으로 일단락을 맺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백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봉건제도는 급속도로 붕괴하고 중앙집권의 기운이 촉진되었다. 영국에 있어서는 이미 백년전쟁, 그리고 요크-랭커스터 양가가 대립해서 왕위를 다툰 장미전쟁(Wars of Roses)이라는 대내란이 발발하여 영국의 전 귀족은 두 파로 분열되어 싸웠으나 1485년 튜더 왕가의 헨리 7세가 그 내란을 진압하고 즉위하였다. 이와 같이 2회의 전쟁으로 봉건귀족이 큰 타격을 받게 됨에 따라서 헨리 7세는 왕권 신장에 주력하여 신분제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독재정치를 행하였고, 고등재판소(Court of Star Chamber)를 설치하여 귀족의 반항을 방지하였다]. 그러면 절대 군주주의 이론과 인민주권의 이론은 어떠한 시대적 및 사회적 배경과 기초 위에서, 어떤 경위로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근대적 주권국가의 등장과 시민계급의 발달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에 의해서 쇠퇴하여 가는 봉건 귀족을 억압하고 봉건제도를 극복하자 중앙집권적 군주정치 제도가 시작된 것은 15세기 튜더 왕조의 개조 헨리 7(1485~1509) 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전국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적 군주전제정치를 확립하여 근대적 민족 주권국가로 등장하게 된 것은 로마교황과 절연을 감행한 헨리 8(1509~47)에서 비롯한다. 헨리 8세가 대담하게도 로마교황과 절연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여 스스로 그의 수장이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요한 동기는 경제적 원인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전 국토의 거의 3분의 1에 이르는 토지를 소유하고 사치스러운 향락생활을 하며 군주에 반대하던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재산을 몰수한 것이 영국 전제군주의 물질적 지반이 되었다.

한편 장원 해체로 생긴 자영 농민층을 중심으로 메뉴팩처가 형성되어 날로 치부 성장하고 있던 신흥 시민 계급에게 그 몰수된 교회 재산이 불하됨에 따라서 그들이 치부의 기회를 얻어 전제군주의 보호하에 상업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1547~53)에 와서는 영국 교회 안에 캘빈주의가 침투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메리 튜더(Mary Tudor:1553~58)가 취한 신교탄압 정책이 결과적으로 신교도들의 투지를 강화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의 지배하에 와서는 법률가. 상인. 제조업자 등으로 구성되는 신흥 시민계급이 봉건적 특권계급을 대신하여 영국 내의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2) 영국 정치의 전통적인 메카니즘

영국의 튜더 왕조는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또 종교개혁운동에 자극되어 국민 의식이 고양되고 있던 당시 영국 국민 통일의 상징이었으며, 신흥계급 이익의 대변인으로서 치열한 신구 종교대립을 진압 및 조정하면서, 대내외로 급격히 팽창하는 신흥 상공계급 활동의 옹호자 구실을 하였다. 그리하여 외국세력을 축출하여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확고한 지주로 있는 동안 튜더 왕조의 전제정치는 국민의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일시적인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 중세 이래의 영국의 정치적 전통 및 사회적 구조는 그러한 전제군주제도와 융합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한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전통은 홉스나 로크의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영국의 정치사상 및 제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이며 중요한 바탕이므로 여기에서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1066년 노르만의 윌리엄 공이 영국을 침공하여 정복함으로써 그 초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영국의 지방 봉건 제후에게 많은 특권을 인정하여 주었고, 그 후 영국의 왕이 전쟁을 할 때나 중요한 정책을 세우려 할 때, 특히 세금 징수에 관해서는 지방 봉건제후와 협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영국 정치의 관례가 되어 있었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존 왕(1199~1216)의 전제적 거동에 대해서 영국의 지방 제후가 단결하여 항거한 것임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례가 영국 정치의 확고한 전통이 되어왔으므로, 튜더 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정치하에서도 그러한 관습은 여전히 영국 정치사회의 전통적 제도로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17세기 영국에 있어서의 군주 대 국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홉스나 로크가 말하는 군주와 국민의 관계에 관한 이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a. 군주와 교회의 관계

절대군주는 외래 세력에 대항하는 국민적 상징으로서 봉건적 특권계급의 반발과 횡포를 억압하며, 또 한편에 있어서는 모든 기존제도와 질서를 파괴하는 급진적 신교 분파와 막강한 구교도 세력을 조정하는 권력으로서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한편 영국 교회 안에서 팽창 일로에 있던 신교도들, 그중에서도 특히 청교도들은 객관적 정세 때문에 부득이 전제군주에 묵종하였을망정 내심으로는 튜더 왕조의 전제정치가 그들의 신앙 및 종교적 자유와 인민 주권사상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b. 당시만 해도 주권의 소재라든가 군주의 권한이라든가 의회의 권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명확한 관념이 없었다. 군주는 의회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정확히 어떠한 권한을 갖고 또 어떠한 기능을 담당할 것인지 아무런 규정도 없었다. 이것은 당시의 군주나 의회가 아직 준봉건적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제임스 1세가 행사한 권한을 분석해 볼 때 어떤 때는 봉건 기구의 수령으로서, 어떤 때는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그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근대적 주권을 갖는 군주는 아니었다.

의회로 말하더라도, 그것이 수명의 전문가 집합에서 한때는 4백 명의 대표자 회의로까지 확장되기도 했으나 왕의 자문에 응할 정도의 것이었고, 그저 모든 것이 정치적 편의와 전래의 관습에 의해서 결정되었을 뿐이다.

c. 군주와 법의 관계

법률가들은 자연법사상. 로마법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개인의 자유 및 재산권이 신성함을 주장하였으나, 의회와 보통법(common law)이 국가 주권의 법률상의 권위(legal authority)의 유일한 원천이라고까지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이리하여 모든 정치문제는 군주. 교회. 의회. 귀족. 시민 대표자들의 억제와 균형으로서 관습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예로부터 영국 국민사회의 특징적인 전통이 되었다.

 

3)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의 전제정치와 왕권신수설

이와 같은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전통을 무시하고 그 균형을 깨뜨리는 전제군주 권력의 일방적 팽창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계속되어 나가리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영국민의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 해군에 의하여 격파됨으로써 신흥 상공계급의 위협이 사라지자, 튜더 왕조 전제정치의 존재 이유와 압제된 손의 필요성은 동시에 사라졌다. 이렇게 되자 여지껏 쌓였던 엘리자베스의 전제정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떠한 전제군주도 급속한 자유사상의 유포를 막지 못하고, 신학적 근거 위에 세워진 부권적 지배권력도 상공계급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합법적으로 억압하지 못하며, 왕의 자의적 지배가 국민을 속박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영국의 사정이나 특이한 전통도 모르면서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것이 완고한 왕권신수설의 제창자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1603~27)였다.

원래 잉글랜드와 숙원지간이던 스코틀랜드 왕이 영국의 왕위를 겸한 것이 영국민의 민족감정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열렬한 카톨릭 교도인 어머니를 가진 데다 그의 왕비가 공공연히 가톨릭을 옹호하는 것이 의회 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던 신교도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므로 왕위의 신성불가침성과 군주의 절대권력을 주장하며 평민의 권리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제임스 1세가 의회와 정면충돌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추세였다. 1604, 하원에서는 이에 대하여 국왕은 영국 국민의 권리에 관하여 전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상신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가 그러한 항의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고, 1605년의 유명한 의회 폭파 음모 사건은 의회의 왕에 대한 의혹을 더욱 깊게 했다. 영국에 있어서 군주의 횡포를 억제하는 전통적 수단인 의회의 납세 거부도 제임스 1세에게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것은 제임스 1세가 관세의 인상, 독점권의 불하, 작위의 매각, 강제 기부금의 징수로써 왕실 비용을 조달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제임스 1세의 사치벽에 의해서 국고금은 낭비되어 없어졌고, 궁정의 부패와 군주의 방탕은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갖는 청교도들의 분노를 샀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 1세는 당시 경제적.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장로교파. 독립파(청교도파)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또 종교상 및 상업상의 적국인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는다든가 스코틀랜드와 합병하려는 정책이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되었고, 그에게 반대하는 의원들은 가차없이 투옥당하고 말았다.

다음에 연구하게 되는 홉스의 절대군주 이론과 대조해 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스튜어트 왕조 전제정치의 기초가 되는 왕권신수설의 유래와 내용, 그리고 그 교리에 반대하여 인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대표적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배자의 권력에 종교적. 신학적 이론을 갖다 붙여서 합리화하거나 그것을 절대화시키려는 경향은 인류사회의 지배자가 생기게 된 이래 한결같이 볼 수 있는 경향이다.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 역시 그 이론을 성서에서 끌어낸 것이며, 아직도 신학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 군주주의의 신학적 토대를 이루는 분권적 지배 이론은 <구약성서>에 명확히 표시되어있는 것이지만 <신약성서>에 있어서도 각 정부는 그 권위를 신으로부터 부여받는다는 신약적 제도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복종은 정치적 필요성과 더불어 종교적 의무로서도 요구되었다. 이러한 원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신봉된 사상은 중세에 들어와서 교회세력의 확대와 봉건제도의 확립으로 말미암아 때때로 매몰된 적도 있었으나, 그래도 줄기차게 이어 내려온 전통적인 정치사상이었다. 이것이 근대적 주권국가와 절대군주 전제정치의 시대적 요청과 결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제임스 1세는 버클리 블랙우드와 프랑스 정치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이론에는 성경이나 봉건제도 하의 법률 사상 및 자연법이론에서 받아들인 것이 많다. 1609년 의회에 대한 연설에서 제임스 1세는 왕은 마땅히 신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지상에 있어서 왕은 마치 신권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1617년 고등재판소는 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논한다는 것은 크나큰 모욕이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러한 왕권신수설이 성경이나 스콜라 철학에 의거하는 신학파 이외의 수많은 석학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베이컨. 후커. 셰익스피어. 홉스. 필머 등은 어느 모로 보나 당대의 석학이며 인격자들로서 왕권의 절대성과 신성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보쉬에와 페늘롱의 왕권신수설은 가장 권위 있는 이론으로서 유력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왕권신수설에 대한 반대는 어떻게 전개되었던가. 17세기 초기에 있어서는 그것이 주로 법 이론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 영국 관습법의 우월성, 사법부의 독립, 의회에 있어서의 인민 주권사상, 의회에 의한 왕권 제한의 선례 등이 왕권신수설을 반대하는 논거가 되어 있었다. 제임스 1세에 대한 가장 유력한 반대자는 당시의 대법관이었던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 이었는데, 그는 법의 지상성과 법치주의를 강경히 주장하여 면직된 후로는 의원이 되어 권리청원을 지도한 사람이었다. 또 의회의 지도적 정치가였던 존 셀든(John Selden)은 철두철미 합리주의적 논점에서 군주의 초자연적 권위라는 이론을 반대하였다. 그는 왕의 종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은 마치 가정에 있어서 식료품을 사도록 한 사람이 임명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정치상의 제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승려들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성과 상식에 의해서 모든 정치제도 및 사상을 판단하도록 주장하였다. 그 외에 의회 지도자인 엘리엇(Eliot). 존 파임(John Phym). 햄프든(Hampden) 등은 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한 권리가 아무에게도 침범될 수 없는 자연권임을 열렬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군주 대 의회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고 마침내 폭력에 의한 혁명으로까지 진전되었으며, 또 한편 인민주권 이론이 절대군주 사상을 타도하게 된 것은 찰스 1세 때의 일이다.

 

4) 청교도혁명과 인민주권 이론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1629~49)는 표면상 선왕보다 영리하고 융통성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국교도로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고 신교도(의회 의원의 대부분)에 대한 압박과 사치. 낭비의 악습은 더 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도 그의 상투적 무성의와 기만 수단은 의회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의회가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위하여 바친 전채는 사치 생활로 낭비되었기 때문에 카디스(Cadiz)에서 영국 해군은 에스파냐에게 참패당하고, 프랑스의 위그노를 구원하러 간 영국 군대도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재정상 버킹검(Buckingham) 공의 파면을 요구하던 의회는 찰스 1세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그 후 재정난 때문에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권리청원(Petiton of Rught)에 서명하였으나, 그 후 2년 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의로 중세의 악법을 부활하고, 주류. 소금. 비누 등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전매하고 조함세를 거둬들이는 등 온갖 갈취를 함으로써 전제정치를 감행하였다. 종교정책에 있어서는 영국 국교회의 대사교 랜드(Land)의 신교도 압박이 이를 좋아하지 않던 국민의 감정에 부채질을 했고, 또 스코틀랜드에 감독제도를 강행하려다가 반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군비 조달을 위하여 소집한 단기 의회나 장기 의회는 결국 전국의 신교도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와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및 독립교회는 1643년 엄숙동맹(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맺어서 찰스 1세에 대한 공동전선을 결성하였다.

청교도들에 의하여 신봉되고 있던 인민주권 사상으로 말하더라도 역사적 연원은 절대 군주주의, 왕권신수설에 못지않을 만큼 길다. 무릇 강력한 왕권이 요청되는 시대에 왕권신수설이 대두하고, 반대로 전제적 왕권에 대해서 개인의 이익과 권리의 주장이 팽배하는 곳에 인민주권론이나 사회계약론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는 사실은 역사를 주의 깊게 읽을 때마다 관찰할 수 있는 일이다. 근세의 인민주권과 사회계약의 이론은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들의 정치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려니와, 로마의 정치사상도 대체적으로 그러하였다. , 국가 권위의 근원은 정치적 전제로서의 인민에게 있다. 왕이나 군주(magistrate) 및 황제의 권위는 시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인민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다. 모든 시민은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다. 그들이 시민 전체의 권위를 황제에게 위탁한 것이므로 황제의 의사는 법률적인 효과를 갖게 된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것이 로마의 정치사상이었다. 근세의 민주주의 이론은 이와 같이 로마법 사상과 스콜라 찰학에서 받은 영향이 막대하였다.

근대 초기에 와서 이러한 이론이 절대군주의 압박을 받는 신교도 또는 구교도들에 의해서 이용된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폭군 정벌론이란 사상도 그 근거를 여기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의 인민주권 이론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그것은 결국 스튜어트 왕조의 폭정보다도 더 혹독한 크롬웰의 군사 독재정치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종교적 광신자의 폭정 앞에서 영국의 전통적인 의회도 없고, 인민의 사생활의 자유도 없었으며 종교상의 자유도 없었다. 크롬웰은 엄격한 청교도로서 강력한 군대의 유능한 지도자였고, 그의 엄격한 법 집행에 의해 국내 산업이 발달하였다. 또 그의 해외정책은 영국의 번영을 초래하였지만, 그가 죽고 나자 그 독재자를 이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청교도 독재에 싫증이 난 영국민이 왕정복고를 희망하자 마그나 카르타 와 권리청원을 충실히 지킬 것을 약속하고 영국의 왕위를 계승한 자가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였다.

 

5) 명예혁명의 사적 의의

찰스 2세가 즉위한 때부터 그의 아우 제임스 2세가 폐위될 때까지는 또한 대대적인 반동의 시대였다. 찰스 2세는 왕위에 오르자 1642년 이래 발포된 모든 법률의 무효를 선언하고, 또다시 왕권의 확대를 도모하게 되었다. 또 그들은 모두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이었고, 또 전형적인 절대 군주주의자들이었으므로 헌정과 국교를 옹호하려는 의회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되었다.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이 기타 자유주의적인 서적과 함께 옥스퍼드 교정에서 불태워지고, 로크가 그의 후견인인 샤프츠버리 경(Lord Shafresbury)과 함께 열렬히 군주에 대항, 투쟁하다가 외국으로 추방된 것도 이때였다. 또 의회가 찰스 2(구교 부흥)를 저지하기 위하여, 구교도를 심사하여 공직에서 추방할 것을 규정한 심사율을 가결하고, 또 왕의 전제에 대항하여 인신보호율을 가결한 것도 이 시대이다. 또 찰스 2세의 재위중 구교도인 왕의 동생 제임스 2세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자는 주장으로 의회에 자유주의적인 휘그(Whig)당과 보수적인 토리(Tory)당이 생기게 된 것도 이때였다. 의회에서는 1685년 제임스 2세가 즉위하자 토리당의 협력을 얻어서 왕의 장녀이며 신교도인 메리(Mary)와 그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최고 행정관 오렌지(William of Orange) 공과 교섭하여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킨 후 두 사람을 영국의 왕으로 맞이하고, 드디어 무혈혁명을 성취하였다. 이것을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의회는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s) 을 선언하여 왕에게 의회가 획득해 온 권리의 확인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윌리엄 3세에 의하여 권리장전(Bill of Rights)으로서 공포되어 민권의 법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영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1세기에 걸치는 절대 군주주의와 인민주권 이론의 대립과 투쟁은 양자의 원만한 타협으로서 끝나고, 국가의 주권은 실질상 의회로 돌아가 영국 헌정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2 홉스의 정치사상

 

1) 홉스의 생애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으로 침입해 들어온다는 소문에 국민들은 공포에 들끓고 있었다. 이때 런던 교외에 있는 웨스트포트(Westport)라는 조그만 마을에 살던 목사의 아내는 그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 산일도 아닌데 그만 아기를 낳아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158845일 영국이 낳은 대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가 출생한 상황이었다.

홉스의 부친 역시 토머스 홉스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16세기 영국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교양 없는 목사였다. 그는 무식한 데다 성미가 몹시 사나워 곧잘 싸움을 하였고, 그 싸움에서 상대방을 구타한 것이 화근이 되어 목사직에서 파면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가족을 남겨둔 채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홉스는 어렸을 때부터 장갑 제조 공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숙부 프랜시스 홉스의 손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홉스는 매우 조숙한 편이어서 소년 시절부터 자주 우울증에 사로잡혀 방 한구석에서 책이나 읽으며 세월을 보내기 일쑤였고, 머리카락이 까만 탓으로 친구들은 물론 이웃에서까지 까마귀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하던 해 그는 옥스퍼드 대학이 매그덜 학교(Magdalen Hall)에 입학하여 거기서 청교도 교육과 전통적인 논리학. 스콜라 철학. 자연학 등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학교 교과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시간만 있으면 여기저기 서점이나 돌아다니면서 세계지도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한다.

1608년 대학을 졸업하자 그는 학장의 추천에 의해서 디밴셔 백작(Earl of Devanshire)가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 주인은 홉스의 재치. 근면. 유머 등을 좋아했고, 그의 평생의 보호자 및 후원자가 되었다. 이것이 홉스에게는 다시없는 행운이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 백작의 저택에는 대학 도서관 못지않은 풍부한 장서가 있었고, 또 많은 여가가 있었으므로 마음껏 충실한 학구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집에는 항상 유력한 정치인들이 모여들어 정치를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정치에 관한 많은 실제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분위기에서 살 수 있었다.

1610년 홉스는 디밴셔 백작을 따라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었다. 이때는 종교전쟁으로 전 유럽이 혼란스러운 동란상태에 있었던 때이므로, 그 전란을 목격한 것이 홉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1613년 귀국해서는 대륙에서 논리학이나 자연학이 등한시되는 것을 보고 고전과 역사연구에 몰두,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하기도 했다.

1629년 그는 훌륭한 보호자였던 디밴셔 백작이 죽자, 홉스는 그 집을 나와 저베이스 클리프턴 경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유럽을 여행하였을 때 비로소 유클리드(Euclid) 기하학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것이 어떻게나 신기해 보였던지, 이와 같이 정확한 방법으로 정치학을 창시해 보려는 야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 기하학에는 이성만이 지배하지만, 인간 행동에는 정욕이 지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 의지와 지각의 문제를 별도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631년 다시 디밴셔 백작가로 돌아가서 세 번째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때 파리는 유럽에 있어서 신흥과학의 중심지였는데, 그 학문적 중심지는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마리 마르센의 서재였다고 한다. 그곳은 여러 과학자와 사상가가 모여서 매일같이 새로운 연구에 관한 보고가 들어오고 토의되는 장소였으므로, 홉스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매일 그곳을 방문하였다. 또 이탈리아로 가서 갈릴레이를 만나보고 많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1637년 귀국해서는 그의 사상을 <물체론(De Corpore)>.<인간론(De Homine)> <시민론(De cive)>3부작으로 쓸 계획을 세웠고, 1640년에는 <법의 원리(The Eliments of Law)>를 썼는데, 거기서는 국왕과 교회, 국왕과 의회의 관계 및 주권 분할의 불가능성과 왕의 절대권을 명석한 논리로써 논하였다. 또 파리에 있는 동안 홉스는 데카르트가 발견한 수학상의 공식을 훔쳤다는 혐의로 논쟁했고, 이 때문에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1640년 의회에서 왕권 옹호자에 대한 처벌을 결의했다는 소식을 듣자, 홉스는 재빨리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제일 먼저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Richelieu)의 강력한 통치에 의해 파리가 유럽에 있어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번성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망명 중에 있던 찰스 2세의 사부가 되었으나 왕당파에 의하여 무신론자라고 냉대받았다. 그러나 한편 크롬웰의 신생 공화국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갖고 홉스가 새로운 국가의 전도를 축하하면서 쓴 것이 그 유명한 <리바이어던>이었다. 이 저서로써 홉스는 왕당파의 미움을 받아 불충과 신의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궁정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광신자 및 프랑스 관헌의 박해를 받을 우려와 공포 속에서 지내다 1650년 본국 의회에서 대사령이 내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1655년에 <물체론>, 1658<인간론>을 쓰는 등 90세가 넘도록 근면한 학구생활을 계속하다가 167911492세의 고령으로 일생을 마쳤다.

 

2) <리바이어던>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홉스는 그의 주요 저작인 이 작품에 왜 하필이면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책의 부제가 종교적. 시민적 국가공동체의 재료. 형태 및 권력(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l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 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나, 책의 내용으로 보아서 국가론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가장 합당했을 것이다.

리바이어던이란 <구약성서>에 나오는 수중 괴물의 이름이다.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성서에서는 리바이어던에 주석을 붙여서 악어(Krokodil)라고 했다. 그러면 왜 이같은 가공의 괴물 이름을 그의 국가론에 붙여 놓았는지, 이 문제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구약성서> <욥기> 40~41장을 보면 야훼께서 욥에게 신의 절대적 위력을 과시하던 끝에, 자신이 창조한 리바이어던의 성능과 위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그 혀를 끈으로 맬 수 있느냐? 코에 줄을 꿰고 턱을 갈고리로 꿸 수 있느냐? 그가 너에게 빌고 빌며 애처로운 소리로 애원할 성싶으냐? 너와 계약을 맺고 종신토록 너의 종이 될 듯싶으냐? 그 앞에서는 아무도 이길 가망이 없어 보기만 해도 뒤로 넘어진다. 건드리기만 하여도 사나와져 아무도 맞설 수가 없다. 누가 그와 맞서서 무사하겠느냐? 하늘 아래 그럴 자가 없다. 재채기 소리에 불이 번쩍하고 그 눈초리는 새벽 여신의 눈망울 같구나. 아가리에서 내뿜는 횃불, 퉁겨 나오는 불꽃을 보아라. 연기를 펑펑 쏟는 저 콧구멍은 차라리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구나. 목구멍에서 이글이글 타는 숯불, 입에서 내뿜는 저 불길을 보아라. 목덜미엔 힘이 도사려 있어 그 앞에서 절망의 그림자가 흐느적일 뿐, 뗄 수 없이 마구 얽혀 피둥피둥한 저 살덩어리를 보아라. 바위같이 단단한 심장, 맷돌 아래짝처럼 튼튼한 염통, 한번 일어서면 신들도 무서워 혼비백산하여 거꾸러진다. 칼로 찔러 보아도 박히지 않고 창이나 표창, 화살 따위로도 어림없다. 지상의 구 누가 그와 겨루랴. 생겨날 때부터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모든 권력자가 그 앞에서 쩔쩔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

이 글로 보아 리바이어던이라는 가공 동물은 지상 최강의 존재를 상징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부제를 국가의 재료. 형태. 권력이라고 붙인 것을 보면, 그는 리바이어던으로 국가권력 또는 주권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 것 같다.

여기서 그가 논의하려 한 국가론이나 주권론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와 주권 그리고 주권자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전개되는 참혹한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를 만든다. 국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향유하는 자연권을 포기하면, 그것을 어떤 사람 또는 인간의 집단에 주어버림으로써 성립된다. 이것은 국가가 생김으로써 국가가 성립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이 존 로크나 기타 정치 사상가들로부터 구별되는 홉스의 정치사상의 특색이라고 하겠다.

 

3) <리바이어던>을 쓰게 된 동기

앞에서 홉스가 갈릴레이를 방문한 후 큰 감명을 받았고, 갈릴레이가 자연과학에서 이룩한 업적을 인문과학에서 이루어 보려는 야심을 갖게 되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곧 자연과학 연구의 원리와 방법을 인간 행동과 관계의 연구에 적용함으로써 정치. 도덕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하학적인 정확성을 갖는 사회과학을 차시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리바이어던>의 저술 방법과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 사상적 내용을 규명하고 그런 내용의 저술을 내게 한 동기는 무엇일까? 이 저술이 씌어진 시대는 홉스가 파리에 망명해 있을 때로서 그나마 프랑스의 데카르트를 비롯하여 여러 철학자, 과학자, 기타 지식인들의 냉대를 받고, 또 정치적으로는 왕당파들의 박해와 천대를 받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바랄 수 있었던 것은 영국에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어 그가 안식처를 찾아 돌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마침 신생 네덜란드가 공화국으로서 융성하는 것을 보고, 그는 크롬웰 치하의 영국의 평화와 질서에 큰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이것은 홉스가 그의 가장 존경하는 친구 프랜시스 고돌핀에게 보낸 헌사에서 엿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4) <리바이어던>의 내용 개요

홉스가 쓴 여러 권의 저술 중에서 유독 <리바이어던>이 유명하고 그것만이 자주 논의 또는 인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저술은 홉스가 성격적으로나 지능적으로 가장 성숙한 50대에 구상 집필되어 63세 되던 해에 출판된 책으로서 그의 사상이 남김없이 집대성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바이어던>의 내용은 인간의 인식론. 인성론. 사회. 국가철학. 국가의 기원. 목적. 기능. 형태, 법률, 성경에서 계시된 인간. 사회. 국가의 여러 문제, 기타 당대의 문명비판을 포함한 광활한 문제가 거창한 건축물과 같이 일사불란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책에서는 1부와 2부밖에 소개하지 못하였으나, 그 대신 <해제>에서는 이 책의 총목차(3. 4부 포함)에 따라 각 장별로 그 개요를 요약하고자 한다.

머리말에서 홉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이 자연을 지배하며 인간을 지배한다. 국가는 자연에 의하여 인간을 본떠 만들어낸 인조인간이다. 그래서 국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을 연구해야 한다.

첫째, 국가의 자료이자 창조자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1부에서는 인간을 다루었다.

둘째, 계약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주권자의 권리와 정당한 권한과 권위는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과 해체시키는 요인은 무엇인가? 여기서 국가론을 다루게 된다.

셋째, 그리스도교 국가론이란 어떤 것인가?

넷째, 몽매의 세계론 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데서 이 책을 끝맺고 있다.

 

1부 인간론

 

1장 인간 사고의 근원은 감각이며, 감각은 외부의 물체나 대상이 있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감각은 근대 과학 정신의 발현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선구자임이 드러난다.

2장 정신은 외계 사물에 종속하여 있다는 전제 아래 영상. 기억. . 환영. 이해를 설명했다. 여기서 철저한 유물론자이며 경험 과학자의 풍모가 나타난다.

3장 사고의 흐름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고의 흐름을 지도하는 것은 의욕과 계획인데, 그것이 없을 때 지도되지 않고 일관성 없는 사상이 된다. 통제된 사고에는 결과에서 원인을 찾아내려는 것이 있고, 또 원인에서 결과를 알아내려는 것이 있다. 이 원리로써 회상. 통찰. 신려. 징후를 설명하고,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한정된 것이므로 객관적 사물의 법칙을 무시한 사고나 실증성이 없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고 한다. 홉스가 탁월한 심리학자요 쇼펜하우어류의 유기론자임이 드러난다.

4장 언어는 사람의 가장 귀중한 발명품이다. 이것 없이는 사회가 계약도 국가도 그리고 평화도 있을 수 없다. 언어의 효용은 사고. 기록. 상기. 교육. 교제. 자기표현 및 오락인데, 그 오용은 또한 무엇보다도 유해하다. , 생각을 잘못 기록한다든가 은유적으로 말함으로써 사람을 기만하거나 허위를 말하거나 서로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은 말이 없는 것보다 훨씬 유해한 것이다. 또 언어의 효용은 우선 명사를 올바로 정의하는 데서 생기게 된다. 진리란 명사의 정확한 배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다운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우선 저자의 말의 정의를 정확히 검토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언어는 현자에게는 계산기이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화폐가 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의 권위에 의하여 말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홉스가 20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발달한 논리적 실증주의 및 분석철학의 선구자였음이 드러난다.

5장 추리란 우리의 사고를 기록하고 표시하기 위해서 합의된 일반적 명사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추리의 용도와 목적은 어떤 결론이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정의에서 시작하거나 어떤 인과관계에서 출발해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데 있다. 모든 이러한 확언과 부정의 확실성 없이는 최후의 결론에도 확실성이 있을 수 없다.

추리는 마치 산술과 같이 그것에 숙련된 사람들일지라도 틀리기 쉬운 것이어서,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추리도 확실한 것이 못 된다. 마땅히 뒤따라야 할 말이 뒤따르지 않고 또 선행되었어야 할 말이 선행되지 않았을 때의 추리를 오류라고 하며, 언어만 있고 실질적 내용이 없는 말을 배리, 바보스럽고 하찮은 말은 넌센스라고 한다. 추리는 감각처럼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고 노력에서 생긴다. 곧 처음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주장하며 삼단논법으로 추리해 가는 과정이다.

과학은 사물의 인과관계와 상호 관련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학문도 잘못하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애매모호하지 않은 명료한 말은 인간 정신의 빛이 된다. 추리가 걸음이면 학문적 진보는 길이요, 인류의 복지는 걸어가는 목표이다. 그런데 은유나 애매하고 무의미한 말들은 마치 도깨비불과 같다. 그런 말로 추리하다가는 무한한 우매와 배리 속을 헤매게 된다. 이것은 홉스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사조나 사상이 그렇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6장 모든 사람의 자의적 행동은 호혐애증의 정욕에서 나온다. 이런 전제 아래 인간의 심리를 낱낱이 해명하는 이 장은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이요,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심리학자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사고 방법은 철저히 유물론적이요 합리주의적이면서도 인간존재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면을 날카롭고 깊게 파악하고 있다. 이런 사상을 그대로 추적하면 인도의 고대 철학으로 귀착되는데, 그에게 인도 철학의 배경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인간의 성격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7장 생략)

8장 지성의 덕에는 선천의 덕이 있고 후천의 덕이 있다. 이지. 활동의 민첩성. 시기. 장소. 사물을 분별하는 재능은 선천에 속하고, 언어의 정확성을 기하는 추리 과학은 후천에 속한다. 사람의 기지의 차이는 정욕의 강도에 따라서 다르며, 정욕의 불균형은 착란. 광기. 분노. 우울을 나타내게 된다. 정욕은 권력욕. 부강욕. 지식욕. 명예욕 등이 한마디로 요약된 권력욕(desire for power)이라 할 수 있다.

9장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의 사실에 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하나의 단정의 다른 단장에 대한 영향과 결과에 대한 지식이다. 전자는 감각과 기억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요 절대적 지식임에 반하여, 후자는 과학으로서 조건적인 지식이다. 전자는 증명. 증언에 필요한 지식이며, 후자는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지식이다. 지식을 자연철학과 정치철학으로 나누고, 이것을 더욱 세분하여 철학. 기하학. 수학. 천문학. 공학. 건축학. 해양학. 금속학. 점성학. 음악. 윤리학. 시학. 수사학. 논리학. 정의와 불의의 학문 등으로 나누었다.

10장 사람의 권력은 미래의 명백한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그 힘에는 자연의 힘과 수단의 힘이 있다. 비상한 체력. 용모. 신중. 기예. 웅변. 관용. 고귀성. 학문 등 신체와 정신의 탁월한 능력이 자연적인 힘이요, 재산. 명성. 친우. 행운 등은 수단적인 힘이다. 사람의 힘이 극대화되는 것은 많은 사람의 힘이 그들의 합의에 의하여 한 사람에게 집결되어 있을 때이며,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힘의 사용을 위해서 치르는 값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와 판단에 달려 있다. 고위 현직은 국가가 그의 힘에 대해서 치르는 값이다.

11장 여기서 말하는 예법은 평화와 통일 속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의 성질을 말한다. 사람의 행복은 만족스러운 심정이나 정욕의 휴식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욕망이 계속 진전해 나가는 데 있다.

사람의 보편적 취향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죽기 전에는 그칠 줄 모르는 영구적이고 쉴새 없이 발동하는 권력욕이다. 이것은 지금보다 더 큰 힘을 얻지 않고서는 장래 잘 살 수 있는 힘이나 방편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산. 명예. 명령권 또는 그 밖의 힘을 위한 경쟁은 인간관계를 대립. 증오. 전쟁으로 이끌어가기 마련이다. 반면에 안일. 오락에 대한 욕망, 죽음. 부상에 대한 공포, 기예 등은 공통의 힘에 대한 복종으로 이끈다. 전정한 기예와 친절의 표시를 모르는 자나 자연의 원리를 모르는 자, 또는 이해력이 부족한 자, 선악의 판단을 몰라서 관습에만 의지하는 자, 평화의 원인을 몰라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는 자, 장래를 근심하는 자 등은 자기 이외의 다른 권위를 믿게 되는데 종교가 그중의 하나이다.

12장 종교는 인간의 특성으로서 그것은 대개 알려져 있지 않은 원인을 알아내고자 하는 욕망, 또는 장래에 대한 근심에서 나온다. 종교는 사람이 어떤 볼 수 없는 힘이 작용함을 상상하고, 그것을 사람을 공경하듯 대하는 것인데, 이것이 제도화하면 사람들은 폭력에 의한 지배보다 더 잘 복종하게 된다. 그래서 이교도 세계에서는 종교는 정치의 수단으로 국가의 설립자나 입법자는 인민을 복종시키기 위해 황당무계한 종교를 꾸며냈다. 그러나 참다운 종교는 조국의 법에 대한 신앙이다.

종교의 변혁은 불가능한 일에 대한 신안을 강요할 때나 사제들이 종교에 반대되는 일을 할 때, 또는 기적이 없을 때 일어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제의 부패나 이교도 철학의 도입, 사제의 세속권 장악 등 이유로 인민의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13장 사람은 본래 신체적. 정신적 능력에 있어서 평등하며, 이 능력의 평등에서 불화. 질투. 경쟁이 생기고 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국가가 없을 때 인류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보기 때문에 이성을 자연법으로 삼아 그것을 회피할 길을 가르쳐 준다.

14장 자연법 이란 이성이 그에게 해로운 것을 금하기 위해서 명령하는 율법이다. 1의 자연법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며, 2의 자연법은 평화를 위해 타인들이 자연권을 포기할 만큼 그의 자연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 이같은 자연권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의 계약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한쪽이 그 권리의 이양을 전제하여 그의 자연권을 포기하는 것을 신약이라고 하며, 그래서 정의의 본질은 정당한 약정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약정의 정당성은 사람들을 강제하기에 충분한 시민 권력이 구성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정당성이 존재할 수 있다.

15장 제3의 자연법은 그들의 신약을 지키는 것으로 이것이 곧 정의인데, 신약이 없는 곳에는 정의도 불의도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 이성의 법칙이다. 4의 자연법은 감사와 보은, 5의 자연법은 상호융합, 6의 자연법은 용서, 7의 자연법은 불필요한 보복을 삼가고, 보복은 다만 장래의 이익을 위해서만 할 것, 8의 자연법은 무례하지 않을 것, 9의 자연법은 지나친 자존심을 갖지 않을 것으로 모든 사람이 본질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신념, 10의 자연법은 제멋대로 하지 않을 것(거만하지 않을 것), 11의 자연법은 공평, 12의 자연법은 공공물을 독점하지 말 것, 13의 자연법은 분할할 수 없고 공동으로 쓸 수 없는 것은 추첨에 의해서 결정할 것, 14의 자연법은 장자 상속권제를 인정할 것, 15의 자연법은 조정자의 권리 보장, 16의 자연법은 재판관에게 복종할 것, 17의 자연법은 자기 자신의 재판관이 되지 않을 것, 18의 자연법은 관계자의 발언권을 인정할 것, 19의 자연법은 증인을 내세울 것 등이다.

결론적으로 너 자신에게 하기 꺼리는 일을 남들에게 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이 자연법의 근본 원칙으로서, 자연법의 학문 바로 이것이 참다운 도덕철학이라는 것이다.

16장 법인이란,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 또는 다른 사람 또는 어떤 것의 말과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행위자는 그의 언약이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 가공적인 것에 의해서 대표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교회나 병원 같은 것은 목사나 병원 책임자에 의해서 인격화되어야만 한다. 생존하지 않는 것이 행위의 책임자가 될 수 없으므로 그 기관은 행위자에 의해서 대표되어야 한다.

 

2부 국가론

1장 자연법에 의해서 맺어진 계약을 준수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권력(common power)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본래 자연적 정념(natural passion)에 의해서 지배되는 한 공권력 없이 자연법을 준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력 없는 계약은 빈말에 불과하므로 공권력이 없거나 인민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때 각자는 각자의 판단과 무력에 의하게 된다. 그러면 공권력 은ㄴ 어떻게 세워지는가? 모든 사람이 맹약하여 그들의 모든 권한을 어떤 한 사람 또는 집단에게 양도함으로써 생긴다. 그리하여 그 권한을 인수 받은 사람의 판단과 행동은 전체 인민의 판단이 되고 또 전체 인민의 행동이 된다. 이 모든 사람의 맹약에서 생긴 전체 인민의 실재적 통일체, 한 인격에 통일된 민중이 바로 국가이다.

이 공권력을 갖는 자가 주권자로서 주권을 갖는다. 이와 같은 주권=국가를 형성하는 경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민의 합의로써 제도화된 국가(commonwealth by institution)이고, 또 하나는 자연적 힘으로 획득된 국가(commonweath by acquisition)이다.

2장 국가는 국민의 대다수가 어떤 개인 또는 집단에게 국가를 대표하는 권한을 주고, 그 주권자의 판단과 행동을 전체 인민의 것이라고 하여 철저히 복종할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국민이 군주에 반역하는 것은 그 동기가 그들의 양심에서 나왔든, 신의에 의한 것이든 간에 죄악이다.

국가의 목적은 국내 평화와 외적 방위에 있는데, 주권자가 그 목적을 갖는 한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수단에 대해서도 권리가 있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합의로써 설립된 국가의 공권력을 갖는 주권자의 권리는 무엇인가?

1. 맹약을 맺었으면 주권자의 승낙 없이 그것을 변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민은 그들의 정부형태를 변경하지 못한다.

2. 맹약에 의하여 신민 전체의 인격을 대표하는 권리가 무조건으로 주권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신민은 주권자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3. 소수자는 다수자의 결의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은 어느 단체에 가입함으로써 충분히 그 단체의 다수결에 따라 의사를 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4. 모든 국민은 주권자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주권자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무슨 행동을 하든지 반대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5. 주권자는 국민에 의해서 처벌받지 아니한다.

6. 주권자는 모든 의견과 학설을 검열하고 억압할 수 있다.

7. 주권자는 입법권을 갖는다.

8. 주권자는 재판권 및 신재권을 갖는다.

9. 주권자는 선전. 강화의 권한을 갖는다.

10. 고문. 관리의 임명권을 갖는다.

11. 상벌권을 갖는다.

12. 작위 수여 및 계급 등위 결정권을 갖는다.

이러한 주권자의 권리는 불가침의 권리이며, 이것이 너무나 크다고 근심하는 사람은 이것이 없을 때의 더 나쁜 폐단을 모르는 사람이다.

3장 국가에는 군주정치. 귀족정치. 민주주의 형태가 있는데, 그것이 타락하면 폭군정치. 귀족정치. 무정부주의로 바뀔 우려가 있다. 이 모든 형태 중에서 군주정치가 가장 우수하다. 그것은 첫째로 인간이란 공공심과 사욕을 다 함께 갖는 존재인데 군주정치는 오로지 국민의 부. . 명예에 의존하여 존속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정책 결정 과정의 비밀이 보장되며, 셋째로 결의 계속성이 유지되며, 넷째로 정치인들의 상호 시기나 선망 때문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일이 없으며, 다섯째로 간신. 아첨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불리한 점이지만 의회에서는 선동자나 웅변가의 해독은 이보다 더 심하며, 여섯째로 유아가 군주가 될 때 어려움이 따르지만 의회라고 해서 그 보필자가 부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점 등을 들고 있다.

혼합정부의 대표적인 경우는 선거군주제(elective kings)이며, 군주 정치제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권력 계승의 문제이다. 이것은 다른 체제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거나 매우 간단한 문제이다.

4장 이것은 계승이 아니라 취득. 정복에 의한 국가 지배의 경우이며, 제도에 의한 국가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주권자의 권리는 같다. 취득에 의한 국가 지배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는 출생에 의한 지배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정복에 의한 지배이다.

출생에 의한 지배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리에서 비롯되며, 정복에 의한 지배는 전쟁에서 이긴 승자가 패자에 대한 지배를 말한다. 이 두 가지 경우 다 국가는 공포에 의해서 생긴 것인데, 공포로 인한 약속도 일단 약속으로 성립되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권력을 얻었든 간에 주권을 얻으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며, 주권이 위대한 것은 반항자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힘을 상실할 때 사회는 다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 벌어지는 무정부상태로 환원된다.

5장 자유란 외부로부터의 행동에 대한 방해가 없는 상태를 말하며, 자유인 이란 그의 의사와 힘에 의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유와 공표는 양립한다. 어떤 사람이 투옥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빚을 갚았다면 그것도 그의 자유이고, 빚을 안 갚고 감옥에 들어갔다면 그것도 그의 자유이다. 일반적으로 법의 두려움에 의해서 국가에서 하는 행동은 그 국민의 자유행동으로 보아야 한다. 국가 생활에 있어서 자연적인 자유는 참다운 자유가 아니며, 시민의 자유는 주권자가 허용한 행동 범위 안에만 있다. 주권자의 행동은 국민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위배하거나 거역할 권리는 아무도 가질 수 없다. 그리스. 로마의 자유도 국가의 자유였지 개인의 자유는 아니었다.

6장 집단에는 정규적 집단과 비정규적 집단이 있다. 정규적 집단에는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집단이 있으며 종속적인 집단이 있다. 정치단체는 종속적인 집단으로 주권자가 허용한 범위를 넘어서 행동할 자유는 없으며 무제한의 힘을 갖는 것은 주권자뿐이다. 시민집단. 개인 집단에도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이 있는데, 이는 주권자의 허용 여부에 따라서 구별된다. 주권이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단체에 있을 때 파벌이 형성되기 쉽다. 또 민간단체가 국가보다 더 많은 종신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혀용 될 수 없다. 더구나 세도가의 가족 싸움이나 파벌 싸움은 금지되어야만 한다.

7장 각료들은 주권자에 의하여 임명되고, 국가의 인격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국민들은 군주에게 하는 것처럼 이 권위에 절대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들은 인간 신체에 있어서 중추신경과 같은 존재이다. 그 밖에 수상을 비롯하여 각료의 역할이 기술되어 있다.

8장 국가의 역량은 인간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풍부한 분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만약 국가가 없다면 개인의 소유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소유를 확정시키는 것은 법이 있기 때문이며, 주권자가 그것을 배분함으로써 각자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 소유는 다른 국민으로부터 그 권리를 보장받을 수는 있어도 주권자의 의사로부터 보장받을 수는 없다.

국가 자신이 토지나 해역을 소유할 수 있으나 비능률적이므로, 신민에게 주어서 그 재산 관리나 사용에 간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물자의 개발에 있어서 주권자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무역계약이나 교역을 통제해야 한다. 식민지는 국가의 번식인데, 이것도 충분한 주권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9장 첫째 조언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목적과 이익이 일치되어야 하며, 둘째 애매하고 혼돈되기 쉬운 형이상학적인 표현으로 해서는 안 되며, 셋째 조언자는 국내외의 모든 소식과 문헌에 정통해 있어야 하며, 넷째 비밀리에 사적으로 문의할 때 비로소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고, 다섯째 주권자는 조언자의 수를 적절히 정해서 단체적으로가 아니라 사적으로 들어야 한다. 사물은 여러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만 결정은 혼자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10장 법은 국가가 선악을 구별하기 위해서 모든 신민에게 언어. 문학 그 밖의 충분한 표시에 의하여 명령한 것이다. 이 정의를 연역적으로 보면, 1. 입법자는 주권자이며, 2. 주권자는 법에 구속받지 않으며, 3. 관습은 주권자의 묵인으로서 법이 되며, 4.자연법과 국법은 상호 용납하며, 5. 정복자가 재래의 법을 실시해도 그것은 새로운 법이며, 6. 법 제정이 어느 개인이나 종속적인 판사에 있는 것이 아니며, 7. 법의 집행은 입법자(주권자)의 의사와 완전히 합치되어야 하며, 8. 법은 공포되어 신민에게 충분히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법은 어리석은 자나 아동. 광인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통용되어도 성문법화 되지 않은 법이나 특정한 조건과 특정한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법은 자연법이다.

법이 잘 인식된 후 필요한 것은 법의 해석 문제로서 법의 해석은 우선 성문법의 규정에서 자연법, 그리고 다음은 권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법의 종류에는 우선 신법과 인간법이 있고, 자연법과 실정법이 있으며, 실정법에는 기본법과 비기본법이 있는데 그 해석은 오로지 주권자만이 할 수 있다.

11장 인간은 본래 죄인이기 때문에 주권 속의 죄악을 가리켜 범죄라고 할 수는 없다. 범죄는 법의 위반뿐만이 아니라, 입법자나 주권자 등을 경시하는 것도 말한다. 모든 범죄는 죄악이지만, 모든 죄악이 다 범죄는 아니다. 국법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범죄가 생기고 국법이나 주권이 없는 한 범죄는 있을 수 없다. 범죄는 이해의 부족, 추리상의 오류, 욕의 돌발에 의해서 일어난다. 자연법을 몰라서 저지른 범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 국법을 몰랐을 때는 용서 받을 수가 있다.

형벌은 소급되지 않으며, 범죄는 범죄자의 주관에 따라서 경중이 생긴다. 법을 모르거나 법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은 다른 것이며, 건전한 정신을 가진 자와 정신상의 결함이 있는 자는 동일시할 수 없다. 더욱이 포로가 되어서 저지른 범죄는 용서받아야 한다. 범죄는 범죄자의 악의 대소, 범죄의 전파성, 범죄 효과의 해악성, 범죄의 시기. 장소, 범인의 성격을 보아서 그 형량이 결정될 뿐이다. 범죄 가운데 최대의 범죄는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며, 또한 종교나 국가에 반항하는 이론을 갖는 것도 큰 범죄이다. 특히 권위 있는 학자일수록 그 죄는 더욱 큰 것이다.

12장 형벌을 공공의 권위자가 국법에 더 잘 복종시킬 목적으로 위법자에게 내리는 처벌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보복, 멸시하는 행위, 공청 없이 가하는 처벌, 주권을 갖지 않은 자의 판결, 의도 없이 가한 형벌, 위법자나 기타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법을 더 잘 지키게 할 가능성이 없는 경우,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처벌, 행위 이익, 오히려 보복이 더 큰 경우, 법이 생기기 전에 가해진 해악, 법정 형벌보다 더 큰 해악, 국가의 대표자에게 가하는 해악, 반항하는 인민이나 적에 가하는 해악 등은 형벌이 되지 않는다. 형벌에는 체형. 과료. 금고. 추방과 그 혼합물이 있다. 무수한 인민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전시 반역자의 가족에게는 행사할 수 있다.

13장 유한한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영원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이성에 의해서 국가를 돌볼 때 국가는 안전해질 수 있다. 국가의 약화나 해체는 제도상의 결함인 만큼 그것은 사람의 과오이다. 그러면 국가의 해체 원인은 무엇인가?

(1) 절대권력이 없는 경우 주권자는 국가의 평안과 방어를 위하여 필요한 권력보다 미약한 권력에 만족하고 있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낭패한다.

(2) 반국가적 이론이 민중에게 전파되는 경우, 예컨대 개인이 각자 선악 판단의 심판자라는 믿음, 신앙이나 신성한 것이 학구나 이성에 의해서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영감에서 온다는 사상, 사람이 그 자신의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죄악이라는 사상, 주권자도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 사람의 생명. 자유. 재산은 절대적이라는 사상, 주권이 분립되어야 한다는 사상, 타국의 정치제도를 본떠 고유의 정부형태를 변경하려는 사상 등은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왕정에 유해한 행위를 하는 그리스. 로마의 정치관이나 역사 서적을 읽는 것(폭군을 시역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믿으며, 왕정하에는 모든 사람이 노예가 된다는 사상)이 그러하다. 또 삼권분립을 말하는 것은 마치 사람의 영혼이 셋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주권 위에 보다 높은 권위가 있다는 주장과 신법이 국법을 지배한다는 사상, 그리고 국가권력 외에 어떠한 정신적 권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 등은 국가의 권력을 억제하며 내란을 조장하는 사상이다. 삼권이 분립된 국가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세 개의 독립된 국가이다.

(3) 이밖에 국가에 병이 되는 것은 1. 세금을 거두지 못하는 일(이것은 혈액순환의 부조에 비할 수 있음), 2. 국가의 재산이 소수자에게만 몰려 있는 것(이것은 늑막염에 비할 수 있음), 3. 유력한 신하의 명망이 높은 것(카이사르가 그 예이다), 4. 어떤 도시가 너무 번성하는 것, 5. 자치단체가 너무 많은 것, 6. 절대권력에 대한 비판의 자유가 있는 것, 7. 영토확장이 지나친 경우, 8. 전쟁이 빈번할 때 전쟁에 패망하면 국가의 생명도 없어지는 경우 등을 들고 있다.

14장 주권자의 직무는 인민의 안전을 증진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여기서 안전이라는 것은 생명의 보호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의 만족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권자의 직무는 주권자의 권리를 완전히 보장하는 데 있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리를 포기해서도 안 되며, 또 인민에게 그 권한의 근거와 이유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더 우매하게 내버려 두어 반항이 일어날 조건을 제공해서도 안 된다. 국가는 이것을 잘 알려주어야 하며 국법이나 강제만으로 국가는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면 인민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첫째로 타국의 정부형태를 가르쳐서는 안 되며, 둘째로 주권자 외의 인망 있는 자를 칭찬해서도 안 되며, 셋째로 주권자를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가를 가르쳐 주어야 하며, 넷째로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주권자의 의사와 신만의 의무를 가르쳐야 하며, 다섯째로 주권자가 신민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야 하며, 여섯째로 정의와 도덕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야 하며, 끝으로 사람을 해치지 말고 서로 사상하도록 권해야 한다. 대학은 최고의 교육기관인 만큼 이러한 이론을 가르쳐야 하는데, 지금의 대학은 그렇지 못하다. 또 주권자는 신민의 조세부담을 균등히 해야 한다.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자는 사람들의 자선행위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국법으로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주권자의 의무는 훌륭한 법을 만드는 데 있으며, 상벌을 적당히 시행해야 하고, 좋은 자를 택해야 한다. 군대의 지휘자는 인망이 있어야 하고, 특히 주권자가 인망이 높으면 아무런 위험이 없을 것이다.

15장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려는 자연법에 의하여 국가가 건립되었고, 모든 사삼이 이 국가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신법과도 합치되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살펴왔다. 그러면 신법이란 무엇인가? 신은 만물의 왕으로 말씀 한마디로 세계를 다스리며, 그 말씀에 복종하는 자는 상을 받고 거역하는 자는 처벌을 받는다. 신의 말씀은 자연 이성의 명령. 계시, 그리고 예언자를 통해서 사람에게 계시된다.

이 장에서 취급하는 것은 자연이법의 명령인데, 그것은 인간관계를 조정하여 신에 대한 숭배를 가르친다. 신에 대한 숭배는 신의 힘과 그의 선을 높이 경모하는 것이다. 또 신의 예배에도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도 신의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가장 큰 예배이다. 그리고 국가가 하나의 인격인 한 국가도 신에 예배해야 하는데 공공 예배는 획일적으로 국법에 의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자연적인 신의 벌은 악인. 악과를 수반한다. 예컨대 무절제에는 질병이, 경솔에는 재난이, 불의에는 적의 폭행이, 교만에는 파멸이, 비겁에는 억압이, 소홀한 통치에는 폭동이, 폭동에는 살육이 따른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권자의 구성. 성격 및 권한과 신민의 의무를 자연 이성의 법칙에 의해 살펴왔다. 그러나 이 이론이 현실 세계와 얼마나 유리되어 있는가, 또 이것이 실현되려면 얼마나 높은 도덕을 요하는가를 생각할 때 이 작품도 플라톤의 <이상국가론>만큼이나 무가치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은 당시 철학자가 주권자가 되지 않는 한 무질서와 내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플라톤이나 다른 철학자들도 어떻게 통치하고 지배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도덕 이론을 내세우지 못했다.

 

3부 그리스도교 국가론

1장 그리스도교 정치의 원리에 대하여: 이 장부터는 자연 이성이 아닌 신의 계시에 의하여 인식되는 그리스도 국가의 성격과 권한을 논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감관이나 경험과 이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성서에 씌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구에 얽매여 철학적 진리를 논리로써 조작해서도 안 되며, 또 자연 신학적으로 따져서도 안 된다.

약은 입에는 써도 몸에는 이롭다. 이해력은 구속한다 해도 지적 능력의 굴복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맹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종교도 복종할 때 복종하는 것이 옳다. 신이 사람에게 말할 때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우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자칭 예언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성서에 의하면 참다운 예언자는 첫째로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로 전통적인 종교와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적이 없어진 후로는 성서가 유일무이한 성전으로서 신의를 찾아보는 원천이 된다.

2장 수.시대. 목적. 권위 및 해석자에 대하여: 성서는 그리스도교도 생활의 경전이요 율법의 서이다. 그리스도교 국가의 법이 무엇이냐, 또 그리스도교 군주가 어떤 법을 판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성서에 적혀 있지 않지만, 군주가 어떤 법을 판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충분히 시사되어 있다.

주권자가 입법자이므로 법은 주권자에 의해서만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복종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신이 언제 무엇을 말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초자연적 계시를 받지 않은 신민에게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국내 평화와 방위를 희망하는 자연 이성에 의해서만 국가 권위, 즉 합법적인 주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성서의 저자 및 그 시대는 역사문헌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성서 자체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성서가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저술되었든 아니든, 경전으로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교회의 권위가 인정하기 나름이다. 결국<구약>의 역사적인 예언이나 <신약>의 복음 등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성서의 권위는 어디서 유래하며, 또 어떻게 그것이 신의 말씀인 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서가 자연법과 다르지 않고 또 법의 힘을 갖는 권위, 즉 국가의 주권자의 권위에 의해서 그것이 신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요는 그리스도교도의 주권자가 그의 영역에서 절대 권력을 갖거나 갖지 않거나 하는 문제에 귀착된다. 종교 신앙에 대한 합리주의적 공리주의의 태도가 여기서 분명히 나타난다.

3장 성서에 나타나는 정령. 천사. 영감의 의의에 대하여: 물이란 것은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공간을 점령하여 온도. 색채. 구미. 향취 및 음향을 갖지만 그 밖의 기체도 있다.

그러면 정령이란 무엇이며 성서에서는 어떻게 해명되어 있는가? 그것은 심판의 책에 대한 신비하고 비상한 이해 능력, 비상한 애정, 꿈이나 환상에 대한 예언 능력, 생기. 권위. 기체로써 설명되고 있다.

요컨대 정령이나 천사가 물체라면 존재하지만, 물체가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특별한 작업에 의하여 생겨난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신이 그의 존재와 계명을 알려주는 것이다. 영감은 생기 있는 움직임(vital motion)이요, 생기 있는 호흡(vital breath)이라는 뜻이다.

4장 성서에서의 신국, 신성한 신에 바쳐진 성례의 의미에 대하여: 신국이란 신학자들이 보통 천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신민에 대한 신의 최고권을 갖는 것으로 나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서에 의하면, 신국이란 이스라엘 인민이 특이한 방법으로 선발되어 신을 왕으로 선거한 것으로, 이것은 죄에 대한 지배라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부터 신은 모든 인류를 지배해 왔지만, 어떤 국민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것이 후손에까지 효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신국은 신이 계약으로써 그의 선민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령이란 말은 신국에 있어서 공공적인 것, 또는 왕을 부를 때 사용한 말이었다.

5장 신의 말씀 및 예언자에 대하여: 성서에서 신의 말씀은 신이 한 말씀, 신에 관한 말씀, 곧 신의 명령이나 권능, 그 말의 효과 등 이성과 공평을 통틀어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떤 때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또 인간을 대표하여 신과 대하는 사람, 어떤 때는 앞으로 닥쳐 올 일을 예언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칭 예언자의 말, 특히 주권자의 인정이 없는 예언은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 주권자를 신의 예언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의 몽환을 가지고 예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6장 기적과 그의 효용에 대하여: 기적은 감탄할 만한 신의 작용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드물게 일어나고, 또 그 원인도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처럼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기적은 본래 신의 사자나 예언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만, 기적에도 사이비 기적이 많으므로 주권자의 확인이 있는 기적이 되어야 한다.

7장 성서에 있어서 영생. 지옥. 구제. 내세 및 속죄에 대하여: 본래 아담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신의 계율을 어겨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은 지상에서 영생을 얻었다. 신국은 신의 최고권을 갖는 지상 국가로서 그 국가는 신의 대리에 의해서 지배되는데 구세주가 다시 와서 왕위를 차지할 때는 영생을 얻게 된다. 영생의 기쁨이나 구원의 기쁨은 다같이 죄의 비참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8장 성서에 있어서 교회의 의미에 대하여: 교회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어떤 때는 신의 집, 집회, 그리스도교도의 예배를 위해 만들어진 건물 의 뜻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에클레지아(Ecclesia: 고대 그리스의 민회)와 같은 통치자의 연설을 듣기 위한 시민의 집회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 교회는 교인들이 여러 학자의 교리의 지위를 가리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교회가 하나의 법적 인격이었다. 그 인격은 의사를 가지며 선언하고 명령하고 율법을 정하는 힘을 가졌다. 따라서 주권자의 허가 없는 교회나 집회는 불법집회로 취급되었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교회이기 때문이었다.

9장 아브라함. 모세. 제사장 및 유대 왕들에 대한 신국의 권리에 대해: 신자의 조부이며 정부에 의한 신국의 창시자는 아브라함이며 그가 신과 맺은 언약은 신의 계율이 되었다. 신과 아브라함의 계약 속에서 우리는 신이 다스리는 인민의 정부에 관해서 세 가지 중요한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신이 아브라함과 계약하였다는 사실과 그가 최고권을 가졌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아브라함이 그의 명령과 다르게 신의를 들었다고 자칭하는 자를 처벌하고 그 종교 아닌 다른 종교를 금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 셋째는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주권자인 아브라함만이 신의 말씀이 무엇이었는가를 판단 해석하고 결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 이후 이사야와 모세에 의하여 계약이 갱신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제사장이 그 주권을 계승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모세의 자리를 차지한 자가 신의 유일한 율법자와 계율의 해석자였고, 국가의 권력 및 교회의 권력은 최고의 제사장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여호수아(Jehoshua)가 죽은 후 사울(Saul)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자신의 판단과 기호에 의해서 제멋대로 살게 되자 왕도 신도 모르는 죄악 생활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요컨대 신국이 처음으로 창설되었을 때부터 바빌론의 유폐 시까지 교권과 국권이 한 손에 장악되었고 사울이 선출된 후에도 제사장의 직책은 보좌역에 그쳤다. 따라서 유대인 사이에 주권을 갖는 사람이 신의 예배에 대해 최고권을 가졌으며 신의 인격을 대리하였다는 것이다.

10장 축복받은 구세주의 직무에 대하여: 성서를 보면, 메사아가 속죄자로서의 기능과 목자로서의 기능과 왕으로서의 기능 등 세 가지 기능을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속죄하러 온 것이었지 지상의 왕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계약에 의해서 그의 지상국을 신에게 반환하러 왔고, 또 그것을 인민에게 선고한 것이었다. 또 그의 설교는 주의 법대로 카이사르의 법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가 말한 것은 내세였고 그동안 군주에게 복종할 것을 인민에게 가르쳤을 뿐이다. 예수는 카이사르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을 뿐 결코 카이사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부활에서 시작되고, 그때는 왕으로서 만물을 지배하며 또한 그들 선민의 왕이 되는 것이다.

11장 교회의 권한에 대하여: 교회의 권한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왕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 교회권은 사도에게 있었는데, 그 이전에는 인격신으로서 모세와 제사장에게 있었다. 성부. 성자. 성신은 천국의 증인으로 간주되었다. 사도는 본래 위안자(comforter)라는 뜻으로 그는 명령자나 지휘관이 아니었다. 천국으로 가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담뿐이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다같이 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이교도들에게 신국을 받아들이도록 설교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 결코 왕이 되려거나 신의 대행자가 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바울로는 우리는 그대의 신앙을 지배할 수 없다. 다만 당신의 기쁨을 도와주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원수가 불신자라도 그에 복종해야 한다. 만약 주권자와 제사장의 말이 다른 때라도 주권자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왕이나 귀족이 그리스도교를 금지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대체 그러한 금지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국법으로서 정신상의 신과 불신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며 신앙이 신의 선물인 만큼 사람은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그리스도교도에게 믿지 못하도록 선언한다 하여도, 외형적으로는 복종하고 내면 상으로는 믿고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면 순교자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바울로도 말한 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행동을 같이했거나 그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선교의 사명을 띠게 되었으므로 주권자에게 반항할 수 있어도 그렇지 못했던 자는 주권자에게 반항하는 것이 죄가 되었다.

교회의 임무는 1. 신국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설교할 것. 2.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것, 3.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 4. 교회인에 한해서 파문할 수 있는 것 등이다. 그러나 성서를 율법의 서로 만드는 것은 주권자이다. 구약이 법이 된 것은 유대로 돌아와서 이사도라가 국권을 장악하여 국가를 재건하였을 때이며, 신약이 법이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왕에 의해서였다.

사도 시대에 교직자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성직 가운데 어떤 것은 신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는 권위 있는 직책이었고 어떤 것은 교회를 관리하는 행정직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교도의 집합에서 선출되었다. 그리고 구세주와 사도를 포함한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연보로 생활하였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교를 믿는 주권자와 교회의 관계는 어떠한가? 주권자는 우선 무슨 교리가 평화에 적합하며 국민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판단할 권리를 가지며, 또 주권자는 평화를 확보하는 책임을 짐으로써 그 목적을 위해 목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 실제 주권자의 대행인이다. 그리스도교 국가에 있어서는 국가의 주권자가 최고위의 목사이므로 다른 목사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그가 모든 목사의 직능을 수행하게 된다. 대사교 벨라르민(Bellarmine)5권으로 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2권에서는 베드로는 로마의 주교이며 교황은 그 후예에 지나지 않으며, 3권에서는 교황이 주권자의 권한을 빼앗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반대자가 아니며, 4권에서는 교황은 모든 신앙과 예법에 대해서 최고의 판단자이며, 5권에서는 교황은 전 세계의 주인이 아니며, 또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인도 아니므로 세속적인 관리권에 대해서 직접적인 권한을 갖지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최고권을 갖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적 권위가 세속적 권위에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틀린 말이다. 그것은 구세주가 그에게 명령할 권한도 판단할 권한도 처벌할 권한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항이 비록 그리스도의 유일한 부사교이지만, 그는 구세주가 부활할 때까지는 그의 통치를 실행할 수 없으므로.

12장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모든 내란과 반란은 신과 인간에게 동시에 복종할 수 없는 데서 일어난다. 더욱이 어떤 인간이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신의 이름을 팔 때 그렇게 된다. 그러나 참다운 신국의 계율은 모든 일에 있어서 주인을 따르고, 아이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구원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법에 대한 복종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후자만으로도 족하다.

아무리 선행을 해도 국법을 어기는 것은 신의 계율을 위반하는 것으로 구원에 필요한 사항은, 1.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 2. 우리가 여기서 설교한 것 외의 복음을 말하는 자는 저주받고, 3. 육신으로 나타난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신앙을 갖는 것이다.

신의 법과 그리스도교 국가의 법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주권자가 불신자라 하더라도 거역하는 것은 하느님의 율법과 사도들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신민이 그런 경우에 복종하면 그들은 천국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4부 몽매의 세계론

1장 성서의 오해가 생기는 정신적 암흑에 대하여: 주권과 국가의 주권 이외에 문제되는 것으로 몽매의 세계가 있는데, 이것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하여 몽매하고 틀린 교리로써 자연 이성과 복음에 의한 광명을 찾는 것이며 사람들을 내세로부터 결리시키는 기만자들의 집합이다. 그중에도 가장 몽매한 영역은 교회인데, 그들은 첫째로 우리가 성서를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것을 남용하여 그 광명을 소멸시키고 있으며, 둘째로 이교도 시인이나 괴상한 교리의 귀신학을 도입하고, 셋째로 성서와 여러 종교의 조물 및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혼합시킴으로써, 넷째로 그릇된 전통과 역사를 혼합시킴으로써 사람의 정신을 혼란에 빠뜨린다. 성서의 남용은 신국을 현조하는 교회라고 주장하는 점, 현재의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왕국이며 교황이 그리스도의 총사교라고 주장하는 점에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또 이교 철학은 선악을 개인의 기호에 따라 판단하는데, 이것은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조성할 뿐이다. 또 결혼이 정조나 자제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죄악이라는 것도 허위이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치는 폭정이라는 것도 타당치 않은 말이다. 이 밖에도 마법을 신성화한 것이나 세례 의식에 주문을 외는 것을 비로하여 결혼식, 환자 위문, 교회 봉헌식에서 주문을 외는 일도 필요 없는 일이며 영생. 영사, 연옥, 영혼의 주문이나 악령 풀이 등도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2장 귀신학. 이교도 종교의 유적에 대하여: 환상이나 우상숭배는 주로 이교도의 종교들인데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에 침투해 왔다.

3장 공허한 철학과 환상적 전통으로 인한 암흑에 대하여: 철학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기억이나 신중성만으로 철학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그릇된 이론이나 교리로부터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초자연적인 계시나 필자의 명성에 의해서 구성될 수도 없다. 철학 하면 우선 그리스의 철학을 말하는데, 그리스 철학은 모두 무의미한 말장난이요, 아무런 통일성도 없이 제각기 지껄인 것들로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다.

한편 유대인의 학파도 본래 모세의 율법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도 잘못된 의사소통이나 공허한 의식으로 인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스 교회에서의 강론이나 논의는 그 율법을 알 수 없는 신이나 정령의 성질에 관한 환상적인 철학으로 전환시키고 말았다. 대학은 사람들과 그들 이론이 집합하는 곳이다. 예컨대 로마의 종교나 로마법, 아리스토텔레스나 그의 이해 부족에 의한 공허한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종교에 끌어들이는 것, 자연 철학상의 비합리성과 부조리 등에서 많은 착오가 나오게 마련이다. 하나의 몸의 많은 장소에 나타나거나 많은 몸이 동시에 한 곳에 나타나는 등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내포하는 오류, 민주 정부 아닌 모든 정부는 폭정이라는 논리, 사람이 지배하는 거이 아니라 법이 지배한다는 관념도 경계하여야 할 오류이다.

4장 이러한 몽매에서 나오는 이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모든 학설이나 교리의 오류는 누구의 이익에 귀착되는가? 그것은 1. 목사들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라 하여 군주의 권한을 찬탈하고 있는 점, 2.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점, 3. 모든 목사는 신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받지 못한다는 점, 4. 교회권은 군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 5. 승려가 사제권을 가지며 그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권한을 갖는 점, 6. 결혼을 금함으로써 왕에 대한 발언을 강화한 점, 7. 군주나 고관의 참회를 들어서 정보에 접한 점, 8. 주권자에게 죽음으로써 항거할 수 있도록 정신적 위안을 주는 점, 9. 죄에 대해서 벌을 주는 점, 10. 연옥의 이론, 육체노동의 합리화와 면죄부의 판매로써 승려가 치부한 점, 11, 과학이나 실천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으로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며 그리스도교 국가의 합법적인 주권에 의해서 비합법적인 권력을 세우는 점 등 교황과 로마교회의 이익에 귀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리바이어던>의 비판

<리바이어던>을 비판함에 있어서 시대나 사회환경을 달리하는 사람의 정치사상을 다른 상황에 사는 사람들이 속단할 수는 없다. 홉스의 사상이 원자론적. 기계론적 유물론이라 해서 그것이 틀렸다거나, 전제주의 사상가라고 해서 전제주의 제도의 결점을 드러낸다는 것은 지극히 우매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부적인 부분은 철학자. 심리학자. 법률학자. 신학자들에게 일임하고, 여기서는 <리바이어던>에서 표시된 홉스의 근본 태도 및 사고 방법을 비판하기로한다.

칸트는 철학이란 결국 모든 철학자의 자기 고백이라고 말했다. 이 말의 진부는 그만두더라도 <리바이어던>을 모독하는 사람도 이 저술은 분명히 홉스의 자기 고백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리바이어던>은 홉스가 살던 환경과 홉스 자신의 개성의 산물이다. 홉스가 살던 시대는 처참한 종교전쟁과 치열한 계급투쟁과 근대 국가의 해외팽창 경쟁의 시대였고, 또 홉스 자신은 두뇌가 명석하고 예민했으나 공포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홉스 자신의 병적인 공포증의 산물이 <리바이어던>이라는 괴기한 기형아를 낳게 한 것이었다.

홉스는 사회계약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자연 상태를 두려워해서,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공권력이 요구되며, 그것을 찾는 자가 주권자가 되고, 만인이 그들의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주어버린 이상 주권자의 판단이나 행동은 전체 인민의 판단과 행동이 된다고 하였다. 또 주권자의 전제적 지배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신민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억지 논리를 전개하였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어떠한 희생이나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홉스의 병적인 공포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홉스는 1604년 의회에서 왕권옹호론자를 처벌한다는 말에 겁을 먹고 맨 먼저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거기서 그는 왕당파로부터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프랑스 관헌의 박해를 두려워한 나머지 1652년 영국 의회에서 대사령을 내리자 바로 크롬웰의 치하로 돌아갔다. 그후 그는 스투어트 왕정이 복귀하자 근 20년의 망명생화에서 돌아오는 찰스 2세를 궁정 문앞에서 치하하였다. 이러한 위인으로부터 모든 사람이 배우고 추종할 만한 정치사상이 나오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편 홉스는 주권자를 지정할 때마다 사람 또는 사람들의 집단(man or assembly of men)이란 말을 함으로써 왕당파들로부터 크롬웰에 아부한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또 그들로부터 불충과 신의 모독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사실상 홉스는 이 책 제2부 제4<가부장적 지배와 폭군의 지배에 대하여>에서 크롬웰의 전제정치를 합리화하였다고 볼 수 있고, 이어 5. 10. 11장에서 인민을 내적. 외적 침해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주권자에게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으며, 포로가 저지른 죄는 범죄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하였다.

홉스는 절대군주제가 다른 정부형태보다 여러 가지 점에서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밖의 어떠한 정부형태라도 국내의 평화를 유지하고 외침 방어를 할 수 있다면, 주권이 누구에게 속하더라도 상관없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을 홉스의 개성적 약점으로만 본다는 것은 타당치 않을는지도 모른다. 홉스를 좀 더 동정적으로 본다면, 홉스처럼 사랑하고 전쟁을 미워한 사람도 없었다. 끊임없는 전란과 내분의 참상을 보고 그 원인 규명을 연구하는 일이 홉스가 평생을 두고 고심한 숙제이며 숙원이었다. 수많은 종교가. 철학자가 신의 왕국 또는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저술하고 웅변을 토하였으나, 그러한 설교나 학설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조장을 야기시키는 원인에 불과했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신의 권위는 무력하였고 그리스의 모든 학설은 오히려 민중을 선동한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홉스는 국가철학이 확고부동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기하학적 정화석을 지니고 확고부동한 국가 철학을 세워서 인민에게 올바른 국가 생활의 윤리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다음에 홉스의 정치사상에 이와 같은 중대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바이어던>이 영원히 고전적 가치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 마디로 그것은 봉건제도를 타도하려고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로써 홉스만큼 철저한 논리와 명석한 이론으로 봉건제도의 이데올로기인 스콜라 철학과 승려주의를 공격하는 새로운 국가철학을 전개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근대적 주권의 의의. 근원. 권리를 논함에 있어 홉스는 국가를 말하기 전에 자연 상태를 논하고, 자연 상태를 논하기 전에 인간성과 아울러 인식론까지 논하였다. 실로 인간사회를 논하기 전에 국가를 운운하는 것이나 인성을 말하지 않고 인간사회를 운위한다는 것, 또 인식방법을 해명함 없이 학문을 설계한다는 것은 공리 없는 공식이요, 부질없는 추상이요, 기반 없는 건축으로서 현대 정치학자의 공통적인 맹점이라 할 것이다. 국가철학은 어디까지나 인생철학에서 출발하여 결국 인생철학으로 귀착됨으로써 비로서 참다운 국가철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 홉스가 국가를 말하기 전에 탁월한 인간론을 전개한 것은 증거로 제사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라 하겠다.

1<인간론>을 보면, 홉스의 인식론에는 형이상학적으며 동시에 기계적인 유물론의 경향이 보인다. 서문에서 그는 신이 자연을 만든 기술로써 인간이 인조인간, 즉 국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주권은 영혼, 관리들은 관절, 상벌은 신경, 재산은 체력, 고문은 기억, 인민의 안녕은 국가의 사업이며, 폭동은 병이요, 내란은 죽음이라고 했다. 또 제1<감각에 대하여>, 2<상상력에 대하여>, 3<상상력의 결과 및 흐름에 대하여>, 4<언어에 대하여>, 5<추리와 학문에 대하여>에서 실체 없는 사고는 객관적 사물의 법칙을 무시한 언어의 작희를 극렬 배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어보면 홉스가 단순히 소박한 유물론자가 아닌 것이 뚜렷해진다. 6~12장까지에는 홉스의 인성론에 해당하는 성악설 중에서도 가장 심오한 성악설이 나타나 있으며, 이를 보면 누구나 홉스가 전무후무의 영민한 심리학자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중에는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과 같은 생의 철학의 요소가 다분히 발견되는데, 이 점에서 <리바이어던>은 실로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평이한 윤리학이 기술되어 있다.

한마디로 홉스는 인식이나 허영의 행동에 있어서 그 동기가 되는 것은 권력욕, 곧 인간의 정열인데, 그 정열은 죽지 않는 한 그칠 줄 모르는 정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방임되는 한 무한한 혼란과 투쟁의 자연 상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생겨서 이러한 자연 상태가 지양된 이후에도 국가의 기능을 위태롭게 하는 요소는 그러한 인민의 호전성. 이기성. 허영심이며, 또 거기서 생겨나는 자유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그 존재를 확고히 유지하려면 개별적 인민의 호전성과 허영심을 철저히 부정할 수 있는 절대적 권력을 갖는 리바이어던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상에 유례 없는, 일체의 고귀함을 눈 아래 굽어보는 리바이어던 이야말로 국가의 인민의 헛된 허영심을 주저하게 하고 교만한 왕자 ,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2<국가론>에 전제적 정치사상이 17세기에 있어서 뚜렷한 하나의 유행과 시대적 요청이었다 함은, 제임스 1세나 보쉬에 등의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들이 그 이론을 종교적. 신학적으로 합리화한 데 대해 자연주의적. 합리주의적인 자연법사상으로써 전개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모든 자연법사상이 그렇듯이 국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오로지 논리적으로만 연구한 것이 그의 약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홉스의 주권자의 권한이나 법이론. 삼권 통합론을 보면, 그 출발점과 목적지에 있어서는 전혀 다를망정 현재 소련의 통치방식을 방불케 하는 면이 허다하게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무시, 유물론, 주권자의 전제적 권한의 주장 등 현대의 민주 정치가가 볼 때, 홉스의 국가론은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광인의 헛소리로 들릴는지도 모른다. 한편 홉스는 평생 고독한 사람이었지만, 사후에도 영원히 고고하고, 다만 홉스적이라는 악명과 함께 연상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홉스의 성악설을 전제로 하는 무자비한 논리 추구와 그것이 만들어 낸 <리바이어던> 때문이다.

3<그리스도교 국가론>에서는 이제까지 자연 이성의 논리로써 해명된 주권론을 성서의 계시에 의해서 논증하였다. 무엇을 논하든지 성서를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으면 권위가 서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면밀한 성서 연구와 해석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4<몽매의 세계론>에서는 당시의 몽매와 정신적 암흑이 어디서 유래하는가를 구명하였다. 그 몽매와 기만으로써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가를 따진 것은 <리바이어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점이다.

레닌이나 스탈린 또는 그 밖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리바이어던>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읽었다면 경탄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6) 홉스의 정치사상사적 의의

홉스의 정치사상은 유구한 인류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또 어떠한 가치를 갖는 것일까? 이제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중대한 성격상의 결함과 수많은 이론상의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홉스가 정치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서부 유럽에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세 교회의 정신적 권위가 동요되기 시작할 무렵, 그 부패한 봉건제도를 합리화하는 허위적인 스콜라 철학과 기만적 사제주의의 사상을 철저히 분쇄하고 경험과 추리에 의한 근대과학의 토대를 닦는 한편, 근대적 민족주권국가를 합리화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에 있어서 역사의 발전 방향을 자신의 방향으로 하면서 발전도상에 있었던 신흥 부르주아지가 모든 봉건주의 제도의 잠재 세력인 귀족과 승려의 신분적 권력층 및 기타 중간 착취단체를 배격하는 투쟁에 있어서 원용한 무기는 자연법사상이었다. 이 근대 자연법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로크. 루소. 홉스인 것이다. 이 자연법사상에 따라 홉스의 정치사상의 유래는 멀리 기원전 4, 5세기의 그리스에 소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법사상은 어떠한 내용을 갖는가? 이것은 간접적이나마 제1장에서 기술되었고 홉스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지적되었다. 다만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근대 자연법 사상, 곧 홉스의 정치사상은 첫째로 국가 주권의 강화, 둘째로 개인의 해방, 셋째로 국민국가의 합리적인 재구성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종교로부터 정치를 분리시키고, 윤리로부터 정치를 분리시키며, 개인을 주권 이외의 모든 중간단체에서 해방시킨 데 그 의의가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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