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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과 사회 2

2. 르네상스의 본질

 

삶에 대한 관념은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설교와 같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도 아닌 변증법적인 것이다. 그것은 각 시대의 삶이 가지는 특수한 운동의 본질로부터 형성된다. 세계사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관념과 사고방식은 이러한 삶의 과정의 결정체, 즉 인간의 사회적 삶의 결정체일 뿐이다.

이것을 간단한 과학적인 공식으로 줄여 말할 경우, 내가 이 책의 서론에서 출발점으로 삼았던 사상의 토대와 일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경우 먼저 문제되는 것은 삶 속에서 나타나는 운동과정을 결정하는 요소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나는 앞에서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었다. 즉 내가 대략적인 윤곽을 밝혔던 것처럼 삶 속에서 특수한 운동의 모습을 형성하고 그것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지해 나가게 하는 것은 인간의 물질적 이해관계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의 물질적 이해관계란 생산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민족이나 계급내부에 새로운 요구가 등장하여 기준의 지배계급이 축출되거나 다른 계급에 의해서 압박받기 때문에 부단히 변화해 간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관념과 사고방식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아주 확실하고도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이 중요한 결론이란 인간의 기존의 생산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 즉 혁명적인 변화는 생활 속에서 아주 새로운 정신 내용,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새로운 관념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혀 새로운 경제원칙이 역사에 등장하면, 바꾸어 말하면, 특정의 생산양식이 발흥하여 기존의 생산양식과 대립하고 따라서 전혀 상이한 사회조직이 필요하게 되면 위에서 말한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며 그 변혁은 또한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과 관념의 탄생을 촉진시킨다.

요컨대 이러한 새로운 경제원칙의 발흥이 역사의 혁명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 요소는 사회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며 그 영향은 발전의 완만한 흐름 속에서 배태된 아주 사소한 모순만을 제거하는 그치지 않고 사회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킨다. 사회의 본질이 변화하는 까닭은 첫째로 새로운 경제원칙의 탄생과 동시에 새로운 이익을 가진, 따라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새로운 요소가 자신과 대립하는 모든 계급을 소멸시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변혁시키기 때문이다. 위의 두 현상은 발전과정의 필연적인 산물로서 이러한 변혁과정에서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모든 기존양상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전환기에는 낡은 시대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되면 문화적인 면에서의 모든 경계선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물론 하나의 새로운 원칙이 철저하게 추진됨에 따라 그리고 그 새로운 원칙의 의의를 점차 혁명적으로 철저하게 인식함에 따라 - 그것이 사회의 기존 토대를 전면적으로 붕괴시켜 새로운 토대로 대체시키든 혹은 부분적으로만 변화시키든-낡은 시대, 즉 낡은 사상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영위되던 기존의 사회생활과 새로운 시대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한층 명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현재는 과거에 비해 마치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구분처럼 한층 선명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시대를 구분하는 경계가 처음부터 확실하게 드러나든 혹은 처음에는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이든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사발전이 그러한 전환기적 단계에 이르면 시대는 혁명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시대에는 삶의 모든 분야가 새로운 원칙에 의해 변모된 모습으로 수용되고 또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나 새로운 세계의 입법자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그들에 의해 지배되기까지는 그 막이 내리지 않는다. 이러한 진행은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며 심지어는 한 세기에 걸쳐 계속되기도 한다.

그런데 새로운 역사의 건축가에 의해 시대의 모습이 새롭게 만들어질 경우 그러한 시대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상이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혁명기에는 인간의 역사가 그 관객에게 보이는 연극으로서 가장 우수하게 연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연극에서는 특히 매우 풍부한 경험이 수집되고 아주 훌륭한 성과를 거두어야만 하며 인간 정신 또한 지고의 단계에까지 고양되어야 한다. 한편 몰락자의 비극은 보는 것만으로도 비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어야 한다. 이제 전장은 순차적으로 펼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광경은 여러 세기에 걸쳐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을 결코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모든 것들은 내적인 필연성일 뿐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는 항상 창조적인 것이 위세를 떨치고-재가 지금부터 서술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러한 시대에는 창조적인 것이 위세를 떨칠 수밖에 없다-위대한 것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위대한 것이란 결국 더욱 높은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다. 새로운 원칙이 세계에 등장하는 순간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힘이 인간의 모든 형태의 행동력에 저절로 따르게 된다. 그 때문에 개인뿐만 아니라 작은 집단 속의 인간들의 삶을 형성하는 기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 사회 전체가 전혀 상이한 토대 위에 놓이기 때문에 적어도 모든 계급들의 안목이 높아지며 그 결과 모든 계급의 기존의 낡은 견해는 교란되어 소멸해버린다. 그런데 새로운 전망, 따라서 새로운 힘이 인간의 노력을 향하여 열림과 동시에 날개가 생기게 되어 정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날아간다. 정신은 시대 그 자체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받아들여 때로는 예감과도 같이 수 세기 이후의 미래에 비로소 성숙될 결과를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정확하게 예견한다. 공상이 만발하게 된다. 그것은 인류에게는 두텁고 불투명한 베일로 가려져 있음으로써 가까이 있는 것조차도 보지 못하도록 눈이 가려져 있는 상태와도 같이 생각된다. 바야흐로 이 베일이 벗겨지면서 미래를 향한 전망은 인류를 위해 끝없이 무한히 펼쳐지고 정신의 세계에 돌연히 등장한 드넓은 새로운 시야는 예측하기조차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무한하게 펼쳐진다. 그것은 인류가 이러한 시대에 체험하는 일반적이고도 동시적인 잉태의 행위이다. 이 생식의 환희는 전 세계를 풍미한다. 그 이후로 모든 개인은 자신의 태내에 미래를, 머지않아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도래시킬 수밖에 없는 새로운 세계를 잉태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하여 환희에 찬 봄의 예감, 몸 가까이까지 바짝 다가온 위대한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미래를 향한 예감이 모든 계급과 국민에게, 때로는 전 세계에 감돌게 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정체되어있던 발전의 흐름은 그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돌연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민첩하고 대담하며 득의양양하게 흘러간다. 그때까지는 가장 훌륭한 미덕으로 칭송되던 기회주의적인 신중론은 가장 경멸해야할 악덕으로 변해버린다. 민첩한 결단, 대담한 행동, 저돌적인 기업욕, 무한한 모험욕 등은 최대의 칭찬을 받는다. 이러한 것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까지 광적으로 추구되어도 무방하다. 이런 시대에서는 정열, 즉 사랑과 증오가 장엄한 존재로까지 받들어진다. 세계가 평범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에서 이익을 얻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근거하고 있는 재산이 흔들리기 때문에 마치 공격을 당하는 것처럼 또한 자신들의 "가장 신성한"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 상황은 이런 사람을 베르제르커(Berserker:북부 신화에 나오는 곰의 가죽을 걸친 광포한 용사)로 만들어진다. 이런 무리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새로운 존재의 전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기에 급급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 의해 인류의 존속은 심각하게 위협당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의 경제사상을 대표하는 새로운 계급은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다. 신흥계급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으며 위선적이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주 명확한 언어로서 자신의 역사적 권리를 하나하나 주장해나가며 자신의 실제적인 혹은 가상적인 적에 대하여 조소와 매도를 퍼부을 뿐이다. 세계에 등장한 새로운 존재로부터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이상을 도출하기 위해 참으로 헌신적인 연애가 두 진영을 향해 펼쳐진다. 이러한 연애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덕성의 형태-결국 희생을 감격적으로 여기면서 인간을 세계 속에 던짐으로써 자신을 잊어버리는 연대감이 싹튼다. 바야흐로 이러한 여러 가지 경향의 충돌 속에서 혁명투쟁의 격렬한 형태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경우 혁명투쟁의 과정은 몸을 떨리게 할 정도로 두렵고 또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공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투쟁은 실로 거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 즉 전 세계의 운명을 내건 승부로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전통적인 편견들은 모두 대담하게 축출되어버린다. 낡은 것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낡은 것들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고 느껴지며 인습이란 라벨이 붙여진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의문과 조소가 퍼부어질 뿐이다. 그리하여 눈앞의 모든 상황과 제도가 비판된다. 그리고 발전 그 자체가 계속 진전됨에 따라 영원하리라고 여겨지던 과거에 굉장했던 지주들을 대담하게 무너뜨림으로써 모든 권위가 흔들리게 되며 지금까지 최상의 신뢰나 신앙 그리고 당연한 존경으로 타인을 떠받들던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눈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과연 자격을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다. 그러한 선고는 위의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생활을 결정하는 모든 규율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성의 한계를 성생활에서 가장 빨리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대에는 인간의 파괴에 대하여 대담해질 분만 아니라 진실에 있어서도 당당하게 끝까지 밀고 나간다. 생산력의 팽창에 대하여 게오르크 브란데스는 그의 세익스피어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영어가 수억의 인간에게 읽히고 있는 오늘날 영국에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시인밖에 없다. 그런데 옛날 영국에는 삼백명에 가까운 서정시인과 희곡시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인들은 왕성한 창작요구로 현대의 덴마크에 독서계보다도 크지 않은 독서계를 위해 펜을 휘둘렀다. 왜냐하면 인구 500만 가운데 문맹은 겨우 4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것은 현대 독일의 숙녀가 피아노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 남자들 사이에서 흔히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보다 훌륭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인간은 도처에 새로운 널빤지를 세우고 도처에 새로운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낡아빠진 것을 고치는 데에만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에도 힘껏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크고 공상적인 일은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일은 전체나 개인에게 너무도 거대하고 위험하며 또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것은 요컨대 인간이 사상이나 감정의 모든 면에서 세계적이 되고 개개의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 거대한 힘이 존재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모든 것을 포용하려 했고 모든 것을 탐색하려 했으며 모든 저항을 축출시키려고 했고 모든 것을 지배하려 했다. 이러한 것이 개인이나 계급, 민족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통일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이나 인간에 대하여 최대한의 것을 요구했다. 그 요구에는 제한이나 한계가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또한 항상 성숙한 것에 우선권을 부여했다. 성숙한 것이라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두가 찬양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가장 인기를 모은 존재는 전도양양한 청년이나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와 같은 아가씨가 아니라 오히려 최상의 정력을 소유하는 실천력 있는 남성과 발육이 절정에 달한 이해력 있는 여성이었다. 남성의 형상은 아폴로와 헤라클레스(여기서의 아폴로는 그리스 조각들 가운데 특히 미남이 벨베데레의 아폴로, 헤라클레스는 대담무쌍한 영웅으로 늠름한 몸을 가진 남자를 말함)이어야 했고 여성의 형상은 비너스와 쥬노(비너스는 사랑의 여신, 쥬노는 쥬피터의 처로서 단정한 미인을 말함)여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는 욕망에 있어서 대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와는 달리 실천에 있어서도 항상 당당하고 늠름했다. 요컨대 실천은 욕망과 동일한 보조를 취했다. 인간 정신에 있어서 그때까지 고찰되었거나 형성되었던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심오한 것이 실천에 옮겨졌다. 그리고 개별적인 것의 완성된 모습이나 풍요함은 그 진지함에 있어서도 위대했다. 시대가 토해내는 숨소리는 항상 창조적이며 그 숨결은 잠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수 세기에 걸쳐야 겨우 완성될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놀면서도 손쉽게 해낼 수 있게 되었으며 게다가 머리속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하게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인간이 전개한 모든 일은 영웅적이라는 또 하나의 특색을 지닌다. 시대의 모든 힘찬 에너지가 일 가운데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시대 그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아주 작은 일 속에까지 숨어서 작용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소위 불후의 가치가 있다는 보증을 받았다. 물론 이 경우 이 세상의 가장 훌륭한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최상의 수준을 항상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시대가 새로운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 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시대의 성숙도 혹은 수준에 달려 있다. 이용될 수 있는 수단의 정의와 숙련방식이 시대에 대담함과 실천력의 크기를 결정하며 나아가 한 시대에 이를 수 있는 일의 분량이 어느정도까지 가능한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수단, 즉 과거의 유산이 원시적이고 유치하면 할수록 일의 분량도 줄어들고 대담한 약속이나 모험도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기준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세상사람의 모든 것이 한층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위의 사실들은 새로운 경제원칙이 역사를 결정하기 시작한 시대의 본질이며 특징이었다. 새로운 경제원칙은 이러한 혁명기의 전망을 전반적으로 드높은 차원으로까지 변혁시켰다. 항상 "신변의 안전" 만을 지키려고 하는 속물들은 이러한 시대에 대하여 은근한 공포를 느낀다. 전진하는 인간 앞에서 인간 정신의 이상이 아직도 우뚝 솟아있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이 경천동지의 시대를 싫증을 느낄 때까지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항상 그러한 시대의 생동하는 "축복받은 사람들을 은밀한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인류의 정상에 기어올라 가장 멀리까지 전망을 하는 인간이며 그러한 정상에 오르는 것은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하고 전진하고 싶다는 어쩔 수 없는 동경은 그러한 시대가 다시 한번, 가능하면 빨리 오기를 바란다. 결국 인류는 그러한 시대의 도래를 통해 다시 찬란한 경탄으로 충만되기 때문이다. 경탄과 개벽은 이번에야말로 이전에 등장했던 그러한 것보다도 훨씬 위대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새로운 문제로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유치하기는커녕 절대적, 상대적으로 오히려 숙련된 상태에까지 발달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야말로 최대의 것에 대한 전제가 부여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대는 이 가장 높은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확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계급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비등점만이 아니라 수십만 개의 비등점이 대열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말로 그것은 재차 "생생한 환희"가 되며 또한 최고의 기쁨이 되기조차 할 것이다.

그러한 시대가 바로 르네상스였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위에서 묘사한 모든 것은 새로운 경제원칙-상품생산을 향한 발전과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화폐경제-14세기와 15세기에 다시 유럽 세계사에 등장하여 중세와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었을 때 유럽 문명의 틀 속에서 전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발전은 중세에 대한 경계선을 그음과 동시에 혀 새로운 시대를 위한 탄생을 의미했다. 이 새로운 시대야말로 2세기에 걸쳐 마르크공동체라는 틀 속에서 형성되었던 농민 생산과 수공업 생산의 협애성을 탈피하고 세계통상이라는 거대한 규모로 약진하여 마침내는 근대자본주의의 최초의 단계를 구획한 시대였다.

르네상스가 지니는 혁명적인 의의를 그렇게 간단하게 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대에 나타난 가장 뛰어난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 혁명은 그 의미의 심오함과 광대함에 있어서도 뛰어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명 유럽전체를 휩쓸어 당시에 등장한 새로운 원칙이 도처에서 압도적으로 관철될 때까지는 결코 그 막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고대의 붕괴와 종말 이후 처음으로 최고의 시대를 유럽 사람들에게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근대 인간사의 탄생이기도 하였다. 이 이후, 또한 이와 동시에 문명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국민과 국어가 탄생했다. 이 시기 이전에는 국민이라든가 국어라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었다.

국가라는 것은 그 이전에는 대부분 적대적으로 경계하는 이익집단이라는 미개한, 함께 모여 사는 집단에 불과했으므로 그것은 아주 잡다하게 결집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마르크공동체, 즉 대부분의 촌락집단은 고작해야 인접한 몇몇 촌락으로 구성된 중세적인 사회조직의 형태가 지배적이 세계였다. 마르크라는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외지인이나 이방인 대접을 받았다. 자신이 속한 마르크공동체의 성원이 아닌 사람은 모두 외지인이었고 따라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이 다른 세계를 향해서는 아주 원시적인 통로만 존재할 뿐 대부분 서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러 다른 세계들은 이미 다양하게 상충된 이해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세계가 갖는 이해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좋은 조건 아래에서도 그런 이해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에도 경계심을 품었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이해관계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협할 경우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결국 수천으로 분열되어있는 교회주의라는 입장이 중세 정신구조의 본질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간을 결집시키는 매개체인 언어조차 뿔뿔이 흩어진 나라들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격리된 채 무수한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방언만을 마치 성역처럼 외곬로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의 방언일지라도 외국어처럼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 나라 안에서도 수많은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다. 인접한 지역 사이에 참혹한 천재지변이 발생한 경우에만 공동의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그러나 부득이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유가 사라지면 그들은 곧 원래의 격리된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런 상태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중세의 경제적인 토대였다. 중세는 자연경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간은 자가수요만을 위해서 생산했고 따라서 보통 자기의 가정에서 소용되는 모든 것, 즉 식료, 의류, 주택, 노동용구를 스스로 생산했다. 인간의 공적이고 사적인 모든 활동을 제한하는 테두리는 생산자와 그 가족이 속한 마르크 공동체에 의해 결정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는 봉건영주에 의해 결정되었다. 인간은 이 테두리 내에서만 자신의 모든 수요를 충족시켰고 그 수요는 또한 이 테두리의 생산력에 의해 제한되었다. 봉건영주는 여러 적들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고 그 대가로 무거운 의무를 지웠다. 상당히 작은 집단이 격리되어 있거나 영지가 고립되어 있는 경우 그러한 고립적인 사회생활에서 생기는 관념은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여 지도하는 인간들의 공동관념에 비해서 그 숫자가 훨씬 적었다. 예를 들면 서로간의 교통에 대한 이해는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국도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동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국도공사를 추진하자는 사회적 요구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촌락이라는 작은 구조에서 발생되는 사소한 이해관계에서는 끝없는 충돌이 야기되었고 심지어는 손자 대에까지 집요하게 계속되기도 했다. 자연경제의 지배가 장기간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러한 사실로부터 설명이 된다. 경계가 되는 강, 산맥, 호수에 의해 그리고 자연의 교통로로부터 격리된 지방, 그리고 그러한 지리적인 장애가 중복되어 있는 곳은 오늘날에도 자연경제의 지배를 강하게 받고 있다.

이런 목가적인 상태는 고전적이 낭만파가 공상하는 의미에서의 목가풍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것을 강화하는 조건들이 그 내부에서 부단히 발생하여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었다. 그런데 위의 이유로 그렇게 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발전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 때 오히려 그러한 상태가 창출시킨 요소, 요컨대 그러한 상태의 종속에 대립하는 요소에 의해 목가적인 상태는 극복되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자연경제에 대립하여 마침내 그것을 붕괴시킨 요소란 아주 간단한 형태로 부단히 진전되어 오던 분업이라는 자연적인 경향이었다. 분업이야말로 독립 수공업을 탄생시키고 마침내는 상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발전으로 수공업은 낡은 권력과 함께 새로운 권력이 되었으며 동시에 종국에는 내부의 필연성에 의해 낡은 권력을 극복하고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했다. 분업의 경향이란 물론 저절로 형성된 자연현상이었다. 요컨대 이 경향은 노동과정을 더욱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 과정을 단순화하려고 하는,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간의 노력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분업의 최초의 형태는 생산 노동과 비생산 노동의 분리였다. 바꾸어 말하면 방위의 의무를 일정한 조직의 무리들에게 일임시키고 그 외의 사람들은 가능한 한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안심하고 자신의 생산노동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한 구조였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노동용구의 주인이 됨에 따라서, 즉 노동 용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방법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분업은 모든 생산 노동 분야에 점점 확대하게 되었다. 결국 분업에 의해서 생산 노동의 수익은 증가했다. 마침내 독립 수공업이 탄생되었다. 그런데 수공업 생산이 점차 개인이나 공동체의 수요를 충족시키게 되자 남은 노동생산물을 다른 집단과 교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요구에 따라서 시장이 발생했다. 시장은 교통이 좋은 요소요소에 등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적의 습격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장소에 모인 물품들은 외방인 같이 여기던 부근 주민에게는 물론 배가 다니는 하천 부근에서는 해적에게 끊임없이 욕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시장이 개설된 곳은 성곽 도시로까지 발전했다.

원래 상호 간의 교환은 자기 가정의 수요를 위해 만들었던 물품 중 남은 물품들을 물물교환 하는 것이 보통의 형태였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준비의 시대였던 중세 말기의 특징이었다. 노동생산력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요컨대 수공업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인간은 마침내 교환 자체를 위해, 바꾸어 말하면 상업 자체를 위해 물품을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양식은 이윽고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변수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자 가장 혁명적인 요소, 즉 화폐가 등장했던 것이다. 화폐는 상품생산이 필요로 하는 없어서는 안 될 교환의 매체였다. 상품생산은 화폐를 발전시켰다. 가정의 수요나 마르크공동체라는 협소한 사회를 위해서만 물품을 만들었던 자연경제 시대에는 교환의 매체가 특별히 필요하지 않았다. 봉건영주에 대한 의무도 역시 현물로 바쳐졌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영주의 노동과 방위 임무 때문에 자신들의 물건을 만들 수 없었던 영주의 병사들의 노동을 대신했었다.

화폐는 중세적인 봉건적 생산양식을 동요시켰고 마침내 붕괴시켰다. 상품교환이 발전됨에 따라 금은 점차 큰 권력을 등장했다. 금은 누구든지 손에 넣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인간은 금이라는 상품을 통해 봉건적이 생산 양식이 공급한 모든 것, 즉 고용인, 집과 대지, 음식물,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가정에서 만들지 않는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장래에 필요하게 될 물건, 다시 말하면 금을 통해서만 입수할 수 있는 물건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돈을 버는, 바꾸어 말해서 상품을 만들거나 매매하는 계급은 점차 큰 힘을 갖게 되었다. 한편 법률에 의해 도제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간신히 어느 정도의 부를 획득할 수 있었던 쭌프트의 마스터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상인으로 전신해갔다. 상인은 이윤을 열광적으로 추구했고 상인의 자본은 무한히 늘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인에 대해 결코 불유쾌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상업을 통한 돈벌이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것은 앞에서 결정적이라 했던 것이 이 상황에서 유행한 사실이었다. 새로운 원칙, 즉 상품거래-화폐를 매개로 하는 항상 혁명적인 수단이었던-를 통해 하나의 생산양식이 역사에 등장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토대를 전반적으로 위협하게 됨으로써 인간들을 곤혹스럽게 했을 뿐 아니라 이전의 모든 토대를 붕괴시키고 전혀 새로운 토대 위에 사회생활을 자리 잡게 했다. 그 때문에 그 토대 속에서 전혀 새 뿌리가 무성하게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상과 감정도 전혀 새로운 내용을 가지게 되었다. 사물을 보는 견해와 관념은 송두리째 뒤집혔다. 상품거래는 상인으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계급인 근대적 부르주아의 최초의 형태를 만들게 했고, 이전까지 자리를 잡고 있던 다른 계급을 모조리 변화시킴으로써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을 형성시켰고 그와 동시에 전혀 새로운 에너지를 역사의 발전과정에 방류했다. 극히 두드러진 현상만을 들어보겠다. 자기 가족의 수요만을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경우에는 그 구조의 협애성으로 인해 각 개인의 에너지가 팽창한다 하더라도 아주 소극적인 충동력 정도를 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정신은 소위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세계의 교역으로 이끈 상품생산의 시대에 이르자 그것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한계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전체의 배후에는 아주 강한 충동력이 움직이게 되었다. 모든 것은 차례차례 새롭게 폭발했다. 모든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무궁한 영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서 정신은 항상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고 또 시대 현실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계를 초월하여 점점 앞으로 전진했다. 그와 동시에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새로운 인간이 세계에 탄생했다. 인간은 집단주의자로부터 개인주의자로,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배금주의자로 변모했다.

이 운동은 일찍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최초의 발단은 남이탈리아에서였다. 이 지역에서는 중세 때부터 동양과 서양 간에 교역 관계가 발생했다. 먼저 희랍인과 사라센 인이 이탈리아를 공격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상품-구식의 처방전이다-특히 비단과 향료를 억지로 떠맡겼다. 그 시대의 해외 교역은 콘스탄티노플과의 무역에서 시작되었다. 남이탈리아에 이어 북이탈리아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스페인, 프랑스, 독일,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와 그 밖의 나라들이 점차 무역에 참가했다. 결국 모든 나라에서 수요가 상품생산을 촉진시켰고 상업은 마침내 세계통상으로까지 발전되어 유럽인은 점차 중세로부터 탈출했다. 이 혁명적인 변혁은 정확히 15세기와 16세기, 특히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트리첸토(Trecento, 1314세기) 및 푸아트로첸토(Quatrocento, 1415세기)가 어느 나라에서든 첫 봄소식처럼 세계에 감돌기 시작한 예감의 시대였다면 친쿠에첸토(Cinquecento, 1516세기)는 어디서든 최고의 실현의 시대였다. 그 세대의 문턱에서는 창조적인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이 쓰였다. 독자들은 예술의 찬란한 표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회화의 분야에서는 어느 나라를 돌아보아도 가장 원숙한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 시대에 탄생했다. 언어는 문학에 있어서 가장 심오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회화는 가장 작열하는 원숙성을, 조각은 가장 완성된 형상을 그리고 건축은 가장 당당한 선을 이 시대에 획득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실례로서 다양한 발견에 대한 상인의 기업정신의 힘찬 결과를 살펴보자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가진, 귀금속 및 시장이 가져다주는 이익은 대담하고도 무한한 대발견의 시대를 열었다. 신대륙의 발견, 신항로의 발견은 급속한 발전을 위해 가장 강력한 지렛대 구실을 했다. 이렇게 하여 문명인은 모든 면에서 유럽의 지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었다. 교회가 세계적인 존재였던 것처럼 지상의 도처에서 상품매매를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자본도 세계교역이라는 목표에서는 국제적이었다. 자본은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구매력이 있는 모든 인간에게 수월한 돈벌이인 상업을 통해 행복을 가져다준 존재가 되었다. 상대방이 이교도이든 유대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상관없이 상대방과 상품매매를 할 뿐 자본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혀 종교적인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대에 유럽 각국에서 자본은 강력한 국민국가를 다지고 국어를 제정했다. 이것은 외관상 여타의 국제적인 경향과는 모순된다. 유럽에서의 상인자본의 이익은 국가를 만드는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상인자본은 분권적인 봉건귀족이나 봉건사회와 전혀 상반된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앙집권적인 이해관계였었다. 자국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요컨대 자국의 상업 이익, 자국의 요구와 권리를 외국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중앙의 권력-이것은 항상 자본의 배후에 대기하고 있다-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인자본의 이윤을 높일 기회는 그만큼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상인-상인은 도시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상인과 함께 도시로 군주의 권력을 옹호했다. 또한 군주의 권력-발전 정도에 따라 어떤 나라에서는 강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약했다-도 분권적 봉건귀족과 싸웠다. 바야흐로 상업자본의 이익은 어디에서든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어떤 나라에서든 공통적이었기 때문에 또한 어떤 나라에서든 끝까지 관철되지 않으면 아 되었다. 진보적인 절대군주의 권력과 특수한 이익을 대표하는 소귀족과의 사이에 전개된 투쟁도 이미 모든 나라에서 절대군주의 승리에 의해 또 역사적으로 극복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생산양식을 대표하던 봉건귀족의 몰락을 통해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역사의 논리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의 논리는 예외 없이 모든 나라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중세적인 생산양식에 따라서 모든 봉건국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이국에 대해서는 전혀 무력한 취약한 국가구조와는 반대로 이제는 강력한 구조의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그것을 재빨리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그렇게 견고한 국민국가를 건설했던 것은 실은 상업자본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결과일 뿐이었다. 국민국가의 성립과 함께 언어도 통일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국어라는 것이 발전했다. 앞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봉건시대의 언어는 각 지방의 상이한 경제적인 조건들에 상응하여 수많은 방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 특정 지방의 방언 가운데 대부분의 것은 지방의 특수한 경제구조, 지방의 특수한 사회적 삶의 결과였다. 견고한 사회구조를 가진 국민은 동시에 이러한 방언으로부터 통일적인 국어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통일적인 국어란 새로운 세계에 통용되는 통일적인 경제적 이익을 언어로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국가를 형성하는 힘이 가장 왕성했던 지역인 대도시에 의해 국어의 주권이 행사되었다. 어느 나라의 국어이든 이러한 지역에서 탄생되었다.

국민국가와 국어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지배적이었던 변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과였다. 그것은 결국 가장 빼어난 공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들은 인류로 하여금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와 국어는 또한 최고의 사회적 덕성인 연대성의 토이기도 했다.

이상이 그 시대의 일반적인 목표, 즉 르네상스의 가장 큰 경향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르네상스의 본질만이 아니라 당장 다가왔던 르네상스의 거대한 모순을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일반적인 면에서 만족하지 말고 그 이상의 아주 상세한 내용에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상세한 내용은 도덕활동에서 특히 문제시된다. 사회적 삶의 거대한 모순은 시대의 도덕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미쳐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는 앞에서 역사적으로 절박한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각 시대가 발전할 수 있는 수준의 정도는 새로운 시대가 조작하는 수단에 의해 결정된다고 서술했었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시대가 받아들인 유산, 즉 새로운 시대가 먼저 계산에 넣어야 하는 일반적인 역사적 전망의 크기가 새로운 시대의 전진 가능성을 결정하는 최종 요인이다. 이것은 별로 어려운 이론이 아니다. 새로운 이익과 함께 새로운 관념이 부단히 생겨나면서 하나의 형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관념은 초기에는 낡은 시대의 유산을 내포하고-, 초기에는 낡은 시대의 유산을 내포한 상태에서 새로운 전투에 임한다-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가 낡은 시대의 유산을 내포한 상태에서 얼마만큼 전진할 수 있는가는 이론적으로 볼 때 낡은 시대의 유산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새로운 시대가 절박한 자신의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획득한 수단을 실제로는 그렇게 유치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러 면에 봉건시대의 원시성이 남아 있다.

위의 사실만으로도 시대적인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는 과정에는 뛰어넘기 어려운 난관이 있으며 이루어진 일의 크기와 범위가 실은 항상 미완성이었다고 얘기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미완성 상태들이 그렇게 빼어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새로운 경제원칙에 의해 해방되고 발전된 힘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증거해줄 뿐이다. 모든 일들이 미완성의 상태로 후대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미술에도 적용된다. 미술도 발전하지 못한 현실로 인해 시대를 뛰어넘어 가장 최후의 경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하차한 상태로 그쳐버렸다. 하나만 실례를 들어보겠다. 우리는 회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공기의 묘사, 정확히 말하여 각각의 대상이 그 속에 파묻혀 있는 분위기를 완전히 묘사해내는 문제를 생각하면 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풀지 못하는 숙제로 남겨졌다. 회화가 이 방면에서 이룩한 것이 있다면 기껏 변죽을 울린 것일 뿐이다. 위의 사실들은 그 밖의 삶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도처에서 대규모의 대담한 등산이 시도되었다. 험한 산의 정상을 정복하려는 용기는 고대의 몰락이 이후 한번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르네상스가 끝난 후에도 아주 드물었는데 어떤 나라에서도 실제로 그 정상에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다.

그 시대의 발전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항상 구불구불한 길을 택했으므로 도처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기친 것은 봉건적이 생산양식이 여러 지역에서 불가피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생산양식을 유지하려고 하는 삶의 조건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서술했던 상인자본의 초기의 혁명적인 작용은 극히 확실한 중요성을 가진 지역, 즉 지리적인 위치나 역사적인 단계의 혜택으로 상품의 집산지로까지 발전된 지역에만 한정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뭉치기 시작한 국가의 중심부에만 한정되었다. 이 중심부는 대부분 어느 사이에 수도가 되었다. 그런데 수도에 있어서조차도 봉건주의는 아직도 매우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도시의 일부 거주자는 그후까지도 여전히 농업 부르주아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이르러서도 베를린은 여전히 그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의 사회는 토대는 수십 년에 걸쳐 변혁되었는데 도시에서 지방으로의 발전의 확산은 일반적으로 아주 완만하게 행해졌다. 앞에서도 서술했던 것처럼 각국의 여러 지방에서는 지리상의 고립이나 격리 때문에 봉건적인 생산양식이 수백 년씩 계속 유지되어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가정이나 부락의 수요를 위해, 또는 고작해야 인근의 수요를 위해 물건을 만들었으며 아주 한정된 사람들만이 일반 상업을 위한 물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그들이 이룩한 것은 두 가지 생산양식의 기묘한 혼합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만개한 상태에서 조락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단계에 있는 봉건주의적인 생산양식과 여러 발전단계의 신흥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모습이었다. 이것은 결국 사상이나, 감정, 행동에도 많은 차이를 야기시켰다. 그 때문에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모순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이 책의 특수한 주제인 위의 내용을 더 상세하게 설명할 경우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사상과 행동으로써 모랄에 있어서 대담한 결과를 낳은 아주 혁명적인 요구와 더불어 요컨대 순수한 근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여러 가지 결과를 수반한 파괴와 건설을 닥치는 대로 수행함과 더불어, 사회의 봉건적인 토대 속에 아직도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던 낡은 도덕관에 의해 야기된 유물도 아주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계 속에 등장한 사실의 논리가 목전의 원시적인 사회현실에 부딪혀 점차 난파당했기 때문에 기존의 낡은 사상은 새로운 시대의 습격에 대해 점점 오랜 저항을 시도하는 극히 끈덕진 힘을 보였다. 이것은 16세기 중엽 무렵에서부터 점차 여러 분야에 나타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기적인 발전조건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실로 모든 혁명적인 것이 지니는 비극이기도 했다. 모든 혁명적인 것은 자기자신, 요컨대 눈앞의 현실의 벽을 뛰어넘으려 할 경우 아직 발달하지 못한 뒤쳐진 현실의 어느 부분에서 무자비하게 채여 부숴진다. 이러한 경우 항상 발생하는 혼란으로 인해 현재 유행하는 흐름의 정체가 모호해져 버리기 때문에 항상 "순박하고 아름다웠던 그리운 옛날"로 도피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발전과정으로부터 생기는 당연한 부수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소위 자연법에 반하는 원죄라는 생각이 인간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된다. 이에 반해 역사의 논리는 옹호하는 새롭고도 보다 완전한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이 마침내 미덕이 된다.

모든 발전의 경향은 성숙된 단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명확히 드러낸다. 15세기에 세계통상의 발전과 함께 세계사에 나타난 자본주의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팽창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팽창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본주의의 본질과 법칙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5세기 및 16세기의 무질서로부터 저 힘찬 혁명기의 유기적이고 논리적이며 본질적인 것을 발견하여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도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의 본질에 대하여 지금 서술한 것은 르네상스의 모든 장에 적용된다. 이것은 시대의 미에 대한 관념, 결혼의 새로운 형태, 개인적이 사랑의 발전과 장애, 부인해방의 최초의 형태, 예의범절과 복장의 법칙, 매춘에 대한 여러 견해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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