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랄의 기원과 본질
1) 일부일처제의 기원과 그 토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오늘날의 모든 문명의 토대는 사유재산제이다. 모든 것은 사유재산제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인간 정신의 가장 뛰어난 모습도 일상생활의 너절하고 자질구레한 모습도 그 모두가 역시 사유재산과 결부되어있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힘은 성 모랄 분야에서도 그 토대의 형태를 결정하고 형성했다. 이 토대의 형태가 바로 일부일처제이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성적 사랑의 결과라는 주장이 옛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매우 잘못된 견해이다. 일부일처제는 그 주장주의에 비추어 볼 때 또한 그것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수행해왔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시대에서도 개인적인 성적 사랑의 결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성적 사랑을 일부일처제의 토대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제도로서의 일부일처제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에 불과하다. 일부일처제는 그러한 이상에 의해서 전혀 질적 발전도 없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이상에 도달했던 적도 거의 없으며 나아가서는 어느 특정한 계급이나 그 외의 다른 계급에서도 결코 없었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성적 사랑과는 전혀 다른 문명의 결과로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요구에서 발생한 것이다. 모간이 가족의 진화사에서 상세하게 증명했던 것처럼 일부일처제는 점점 커져가는 부가 한 사람의 수중에 - 즉, 남자의 수중에 - 집중되고 따라서 그 부를 그 남자의 자식들에게 상속시킴으로써 타인의 자식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요구에서 발생했다. 적자상속이 최초이자 최후의 목적이었으며 이는 수백 년에 걸친 유일한 목적이었다. 아내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오직 정해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잉태된 자식들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일처제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공적으로 인정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은 일부일처제를 남녀 화해의 결과라든가 결혼의 최고의 형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일부일처제를 " 그 이전에는 (인간의) 역사에서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남녀 투쟁의 선언"이라고 했다.
이것이 일부일처제의 토대이며 또한 최후의 목적이었다. 즉 이러한 성적 행동의 내적 구성 논리가 결국은 이러한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상호 간의 성관계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관계, 한 여자와 한 남자 사이의 관계, 나아가서는 두 사람이 결합된 결혼생활 속에서만의 관계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혼전의 남녀의 절대적인 순결, 결혼후의 남녀의 절대적인 순결이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일부일처제가 인간에게 요구한 논리의 궁극적인 결론이었다. 이 법칙은 분명히 정식으로 제시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항상 여자에게만 완고하게 요구되는 짐이었고 남자에게는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대개는 입으로만 떠드는 구호에 그칠 뿐, 적용되지 않았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모순이지만 단지 공공연한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 아니라 바로 뒤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되었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성적 사랑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인습 위에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조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조건 위에 세워진 가족형태였다. 그런데 이 경제적인 조건은 오로지 남자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 오늘날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 일부일처제 역시 원래 한 쪽의 성에 의한 다른 것의 억압, 즉 결혼에 있어서는 남자의 지배와 그 상대인 여자의 억압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발생은 여자에게만 일부일처제를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적자 상속인을 낳게 되는 목적이 달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남자 쪽은 노골적이든 은연중이든 일부다처제를 도모해도 전혀 거칠 것이 없었다. 결혼 생활에서 남자는 지배계급의 위치에 있고 여자는 피압박계급 및 피착취계급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남자만이 입법자였다. 이 입법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비는 항상 지어미의 순결을 엄격아헤 요구하고 지어미의 부정에 대해서는 최대의 범죄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는 언제나 미온적이고 원시적인 제한만을 두어 의연한 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와 같은 논리는 모두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사물 자체의 필연성, 즉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모순을 토대로 하여 생각할 수도 없는 다른 문제, 즉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압박받은 자연의 복수가 나타났다. 이 자연의 복수는 피할 수도 없고 또한 우리들의 문명과는 분리시킬 수도 없는 두 가지의 사회제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첫째는 피할 수 없는 사회구조로서의 간통이며 둘째는 피할 수 없는 사회구조로서의 매춘이다.
노예는 항상 자신이 정복되어 노예가 되었던 방식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교회, 국가, 사회가 여성들에게 온갖 언어와 형식을 통하여, 처녀 시절부터 전생애에 걸쳐 누누이 강조된 훈계의 요지는 지아비 이외에는 어떠한 남자도 지어미의 침대에서 자게해서는 안되며 지아비 이외의 어떤 남자에게도 지어미의 몸을 바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지아비 이외의 남자가 실제로 지어미와 동침했고, 지어미의 육체를 소유했으며, 확실한 부자관계란 기껏해야 지어미의 정조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은 모든 시대와 민족에 있어서 여성의 복수행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증거이다. 간통이 탄로날 경우 받게 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성의 복수를 부단히 위협하는 잔혹하고도 야만적인 형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복수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간통이라는 복수가 근절될 수 없었던 것은 결혼이 인습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 그 결혼의 토대가 자연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혼의 대용품으로서의 매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가지 어떠한 법률도 완전히 매춘을 없앨수는 없었으며 무자비한 공권력의 박해가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매춘부가 사회에서 일소된 적이 결코 없다. 매춘부는 여기저기 몸을 숨기고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매춘부가 숨어 있는 집은 항상 손님을 향하여 열려 있었다. 매춘이 근절 될수 없었던 것은 완전히 도리에 어긋난 것이었다. 상품경제의 발전을 토대로 하는 사유재산제는 모든 것에 상품성을 부여하고 모든 것을 금전 관계로 변화시켰다. 이 때문에 연예는 속옷과 완전히 똑같은 상품이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결혼이 상거래의 성격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마치 일부일처제가 매춘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이것은 그리스의 시닉(cynicism: 사회습관과 문화생활을 무시한 철학파 - 역주)가 결혼과 매춘의 차이를, 결혼은 청부업이고 매춘은 임대업이라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 그대로이다. 매춘을 일부일처제 덕분에 일취월장 새롭게 조직적으로 배양되어간다. 이것은 마치 매춘이 일부일처제의 찬미자를 지옥으로 떠밀어 버린것과도 같다. 매춘이란 결국 일부일처제의 중요한 목적인, 혈통이 바른 상속인을 어느 정도까지 유지시키기 위하여 일부일처제가 어쩔 수 없이 필요로 하는 보호막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것은 운명적이었으며, 또한 비극적이었다. 왜냐하면 간통과 매춘은 피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이며 지어미의 정부, 오쟁이 진 지아비, 매춘부는 어느 시대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사회의 구조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바로 "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였던 것이다.
2) 성 모랄의 여러 가지 변화
경박스러운 비판자는 틀림없이 말한다. " 당신이 말씀 하신 것이 옳다고 한다면, 당신의 주장으로부터는 두 가지 논의가 생길 것이다. 첫째는 이 세계가 영구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따라서 이 세계가 존재하는 한 이 세계의 사건도 영원히 같은 형태일 것이라는 것이다.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세계가 생길 때부터 있었던 악이며 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은 내가 편한 대로 꾸며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인구에서 회자되는 말이며 이른바 그러한 말이 전형이다. 조잡한 의견이란 매우 하잘것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견에는 항상 잘못된 점이 많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통이나 매춘과 같은 것이 과연 앞으로 변모할 것인가 어떤가가 또 하나의 의문점이 된다. 요컨대 이 의문은 이러한 상태가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까지 정말로 한 번도 변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절로 나오는 결론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여하튼 이 두 번째의 의문을 조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그다음에 처음의 의문, 즉 세계는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는 의문에 대답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이치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확실히 이 세계는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러한 진술에 대해서 음미하고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곧바로 같은 모습이었다는 진술 가운데서의 아주 다른 차이, 즉 상수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변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일반적인 행동 속의 차이만은 아니다. 즉 일반인들이 일부일처제에서 발생한 성 모랄의 원칙을 어기고 그 원칙으로부터 이탈해가는 특징과 그 차이점,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증감추세는 하나의 종합된 대중현상 속에 나타난다. 그 결과 그 대중현상으로부터 항상 각 시대의 대표적인 모습이 발생하고 그것이 가 시대를 명확히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위의 사실은 계통적인 풍속의 역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먼저 성 모랄의 여러 분야에 걸친 특징적인 사례, 즉 결혼생활의 정절, 혼전 여성의 순결, 매춘, 가장 특징적인 의례의 개념 등에 대한 갖가지의 견해에 관한 나의 의견을 하나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러한 것은 여기에서는 개략적인 것에 불과하며 상세한 것은 "풍속의 역사" 전체의 각 장들에서 설명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결혼생활의 정절에 관한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일부일처제의 최고의 원칙인 부부 사이의 정절이 사회 전체에서 상당히 압도적으로 관철되고 있으므로 이런 요구가 세상에서 진지하게 주장된 시대와 민족이 있었고 이와는 반대로 결혼의 성 모랄 원칙이 대중에 의해서 완전히 유린되어 남자가 일부다처제를 행하는 것과 똑같이 기혼녀가 일처다부제를 행해도 좋은 시대와 민족도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전자의 경향은 비록 남녀가 공공연하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죄를 범하는 것만으로도 양심에 대한 부정이라고 간주하고 아내가 외간남자와 은밀히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정으로 여기는 극단으로 흐른 반면 후자의 경향 - 예를 들면 아내의 장롱 속에 정조대가 있는 따위의 경향 -은 난봉꾼에게까지 매우 대담한 공격을 허용했고 또 아내의 정조는 성행위만 하지 않으면 훼손되지 않기 난봉꾼에게까지 노골적으로 그러한 도발을 하더라도 부부의 정절은 별로 손상당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단으로 흘렀다. 또 어떤 시대에는 남편이 아주 열성적인 뚜장이가 되어 매일 자신의 아내를 시장에 팔려고 내놓는다거나 기혼녀가 아주 부지런하고도 빈틈없는 매춘부가 되어 자신의 침실에서 매춘행위를 하여 남편의 입신출세를 뒷바라지하고, 남편의 경쟁상대를 회유하고, 남편의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남편의 재산을 수십 배로 늘리기도 했다. 연애결혼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간주되었던 시대와 계급이 있었던 반면 연애는 아무래도 결혼을 위하여 그다지 필요하지 않으며 연애와 결혼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어 아주 타산적인 처지에서 노골적으로 "자식을 낳는 암말"로서 아내를 취했던 시대와 계급도 있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인은 결혼에서 이러한 손해와 이득만을 생각한 나머지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리스에서 는 여자가 한 사람의 아내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선 매춘부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어떤 시대와 계급에서는 아내는 가축이자 노동하는 동물이었으며 평생동안 속박된 가내 노예로서 자신의 의지란 전혀 없는 오직 참고 견디는 분만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시대에는 아내는 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인형 혹은 응석 부리는 사치품이거나, 자신의 선배인 남편의 첩들이 남편을 즐겁게 하여 남편을 사로잡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노력을 침실에서 남편에게 바치는 것을 유일한 임무로 여기는 향락물 혹은 세련된 향락 도구로까지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부부는 두 사람의 동지, 즉 같이 손을 잡고 인생의 험한 비탈길을 기어올라 자신들의 높은 이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믿을 만한 동지라고 생각한 시대나 계급도 있었다.
미혼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가치에도 역시 다양한 원칙적인 차이가 있었다. 미혼여성의 처녀성을 최고로 여겼던 시대와 계급이 있었던 반면 처녀성 따위는 신부에게서조차 전혀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초야에 신부가 아직도 처녀라는 생각을 신랑에게 주는 것을 가장 치욕스럽게 여겼던 시대와 계급이 있었다. 그러한 시대에는 결혼 전에 한 사람의 남자와도 상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처녀에게는 최대의 치욕으로 여겨졌다. 시정이 이럴진대 사생아를 낳는 것도 처녀의 가치를 전혀 떨어뜨리지 못했다. 어떤 시대와 계급에서는 남자와 단 둘이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목격당한 것만으로도 혹은 부모와 동행이 아니라 혼자 제 멋대로 공개석상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젊은 처녀의 평판이 손상되었던 반면 다른 시대와 계급에서는 혼기에 든 나이의 처녀가 매일 밤 자기 방으로 애인을 수년 동안 초대하는 프로베네흐테(Probenachte)나 콤네흐테(Kommnachte) 등 이른바 시험혼(2권, pp. 117~22 참조 - 역주)이 공인되기도 했었다. 이 경우 한 애인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처녀가 자신의 기대와 요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뭇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애인까지 곧바로 퇴짜를 놓고 제2, 제3, 제4이 애인을 순서대로 초대하더라도 전혀 처녀의 평판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처녀가 장래의 지아비로 맞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격에 상대편 남자가 과연 적당한가 않는가를 여러 애인을 놓고 수개월에 걸쳐서 시험해보더라도 그것은 결코 처녀의 평판이나 장래의 결혼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못했다. 이와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결혼적령기의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처녀의 육체에 대해서 구석구석 아는 것도 허용되었다. 그리고 그 젊은이다 그 처녀와 결혼하는가 않는가는 결국 철저한 감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여러 여자들과 돌려가며 잠을 자볼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이러한 성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그 청년이 상대 여자에게 속박되는 것도 아니었다. 일부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관습 속에 참으로 그 무엇이 숨어 있음을 인정했다. 그것은 확실히 정확한 말이다. 다만 이 경우 낭만주의자들이 그 속에서 건강한 개인적인 성적 사랑의 토대만을 인정하고 이 경우의 남녀관계가 순수하게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을 때만 그들의 말은 타당하다. 이러한 노골적인 관습들을 장식하는 절차들이 청년에게 방해가 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과 처녀들이 일로매진했던 유일한 목적은 성행위였다. 이와 반대의 것은 농민 계급의 소박한 인생철학에서 보자면 전혀 이치에 어긋난 것이었다.
사회 생활에 있어서의 매춘부의 공적인 지위는 원칙적으로는 상당히 다양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창녀는 어떤 시대에는 온갖 증오와 멸시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창녀가 토해내는 한숨을 받는 것만으로도 몸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고 "성실한" 사람은 누구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 문둥이처럼 취급되었고 어두컴컴한 은신처로 내쫓겼다. 그리고, 색에 굶주린 남자만이 세상의 눈을 피해 은밀히 창녀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또 다른 시대에는 창녀는 인생이라는 축제의 가장 화려한 장식물로 떠받들어졌다. 고대 희랍에서는 여자에 대한 모든 숭배는 창녀에게 집중되었다. 당시의 창녀는 남자에게는 함께 철학적인 논의를 하는 여자친구들이었다. 남자들은 창녀를 아름다운 옷과 장식품으로 치장시켰고 창녀의 우정과 총애를 받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창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모든 시민이 마치 신을 숭배하듯이 떠받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없으면 곤란한, 귀찮은 존재 또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져서 남편의 색욕이 남아돌기만을 정숙하게 기다리면서 번잡한 세상과는 떨어진 집의 안방에서 끈기 있게 독수공방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창녀가 더 이상 여신으로까지 떠받들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때때로 각별한 여자친구가 되기도 했고 축제, 향연 등을 빛내기 위한 장식물로 초대되기도 했다. 고귀한 신분의 군주가 방문할 때면, 창녀는 가장 아름다운 옷조차 벗어던진 채 가장 값비싼 경치로서 완전한 나체가 되어 도시의 입구에까지 나가 군주라는 손님을 맞이했다. 절대주의 시대에는 창녀가 옥좌에 앉아 국가와 사회의 최상위 법률까지 제멋대로 주물렀다. 국민은 절대군주의 애첩에게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설령 이 여자가 진흙구덩이와도 같은 하층계급의 비천한 신분에서 꽃가마를 타게 되었을지라도...
성 모랄의 근본문제에 관한 각 시대의 대표적인 차이에 대하여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았는데 그러한 것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 몇 가지의 사례에는 성 모랄의 하부 구조에 관한 참으로 수많은 사례가 연결되어 있고 또 뒷받침되어 있다. 그러한 사례를 보면 이 차이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언어, 복장, 수치심, 교육, 예술 그리고 법률 등에 있어서의 모랄의 변천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변하기 쉬운 것과 필연적인 변천을, 가장 특징적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쉽게 검토할 수 있는 사실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기로 하자. 이 책이 변하기 쉬운 것과 필연적인 변천에 대해 하나의 일관성 있는 서술이 도리 것이라는 점은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끼리의 교제와 남녀의 교제시에 가장 중심이 되는 화제가 어떻게 다른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명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시대에는 남자끼리 모인 경우 가장 흔한 화제는 노골적인 연애 이야기, 자신이 체험했거나 남에게서 전해들은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연애모험에 대한 잡담, 비너스 여신과의 싸움에서의 승부에 관한 사소한 공적담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실례로서 포죠(1380-1459)의 300개에 달하는 만담을 들 수 있다. 이 만담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주제가 중심이 되었으며 교황 마르티누스 5세(재위1417-31)의 궁정의 사제와 추기경들도 날마다 그것을 화제로 삼았다. 그들은 오직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해 매일 교황청의 한 방에 모였다. 그러한 민담의 제목이 항상 외설적인 익살이었음에도 교황 자신이 종종 이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또한 어떤 시대에는 아주 노골적인 음담을 스스럼없이 나누고 있는 좌중에 여자들이 끼어드는 것이 예삿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세속적인 외설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14~15세기의 독일의 사육제 연극은 그 시대의 남자의 귀에만이 아니라 여자들의 귀에까지 메아리쳤었다. 여자들은 보고 듣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스스로 자진하여 이러한 즐거운 무리에 뛰어들었고 남자들처럼 외설적인 익살과 대화를 겁 없이 즐기게 되었다. 여자들도 음란한 이야기를 입에 담고 유혹이나 연애행위의 기술, 침실에서의 부부의 값진 체험 등을 논의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런 실례로서는 복카치오의 이야기, 나바라의 쾌락적인 여왕(마르그리뜨(1492-1549)/역주)의 수백 가지 이야기 그리고 그외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들을 들 수 있다. 또한 기생들을 끼고 질펀하게 술을 마셔대는 애로틱한 장면들만 나오는 궁중의 연극에 여자들이 참석해도 괜찮은 시대가 있었다. 이에 대한 실례는 알렉산더 6세의 교황청에서 행해졌던 공연으로서 여기에서는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나체의 기생과 체구가 좋은 남자가 정사하는 장면이나 한창 달아오를 숫말과 암말의 교미장면 등이 공연되었다. 이러한 교미장면은 프랑스 궁정, 영국 궁정, 독일 연방(Land)들의 소궁정에서도 공연되어 궁정 남녀들이 보았다. 이와 비견할 만한 민중 오락은 바보제나 당나귀제라고 불리던 것으로서 이러한 축제에서는 남근의 위장이나 남근에 대한 익살이 중심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는 남녀가 서로의 풍류를 위해 아주 노골적인 음담이나 그에 대한 비유를 지껄이는 것이 유행했었다. 또다른 시대, 예컨대 슐레지아 시인파(3권, p.18 참조 - 역주)가 득세했던 17세기 독일에서는 사교에서 어느 정도는 춘화를 연상시키는 내용이 주된 화젯거리가 되었다. 어떤 말이나 문구도 춘화를 암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말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그 방면을 적절하게 암시하면 할수록 - 아주 평범한 말에 매우 비천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정도로까지 세련된 말일 때 - 그 말은 아주 열광적인 갈채를 받아 살롱에서 살롱으로 돌고 돌았다. 특히 18세기 및 프랑스 제2 제정시대 (3권, p.70 참조 - 역주)의 사교계에서는 그러한 기교가 놀라울 정도로 극에 달했었다. 제2 제정시대의 전성기 때는 여자들이 일상의 대화에서도 외설적인 말을 즐겁게 지껄여댔다. 게다가 그 시대에는 여자들이 비천한 말을 노골적으로 입에 담는 실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리고 그러한 말리 외설적일수록 그 여자는 사교계의 훌륭한 스타로 떠받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와 계급이 있었던 반면 사교계에서 무례한 말을 서슴지않는 남자는 가차 없이 추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 그러한 말이 악의 없이 자연스럽게 나왔을 경우라도 여자들에게 무조건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와 계급도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절정기는 여자들이 의복의 어떤 명칭이나 몸의 한 부분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금지당했던 답답한 시대였다. 이 시대의 사교계에서는 남자나 여자에게 어떤 종류의 악의 없는 말이나 문구도 지껄여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세련의 결과로 에로틱한 의미를 내포한 말을 추방되었으나 그 대신 세상은 아주 악의 없는 말 가운데서조차 항상 그 속에 숨겨진 에로틱한 의미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풍기에 관한 법률은 수백 가지에 달하는데 그것은 매우 특징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시대에는 아내가 잠옷 차림으로 외간남자 앞에 나가는 것을 법률로서 철저히 금했다. 그 이전까지는 잠옷 차림으로 나가는 것이 아주 예의 바른 것으로 여겨졌고 한술 더 떠서 그 여자가 외간남자의 방문을 자신의 침실에서 받아들여 화장을 하고 있을 때 방문객이 그 옆에서 기다려도 상관이 없었다. 또 다른 시대에는 여자는 정식 예복으로서 가장 내밀스러운 잠옷은 걸치고 방문객을 모조리 침대 - 17세기 무렵에는 침대의 모서리 통로가 남자친구나 구애자의 대기 장소였다. -에서 맞아들여 친구나 방문자는 그녀가 화장하는 동안 그 옆에 서서 화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에로틱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도 전혀 개의할 것이 없었다. 또 다른 시대에는 남녀가 함께 탕 안에 들어가 목욕하면서 유쾌한 얘기로 흥을 돋우는 것을 법률이 허용했다. 그러나 어떻든 각 시대는 내부의 거대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떤 계급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을 그 외의 계급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제한했다. 또한,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어느 시대의 경우 가장 특징적인 모순 - 물론 표면적인 모순에 불과하지만 - 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드러났다. 즉 조금 전까지 남자를 응접하는 가장 예의 바른 옷차림이었던 잠옷 차림을 금지한 시대에 세간에서는 여자가 얘기를 할 때 특히 무도회에서 춤을 출 때 가슴부분에 "창"이 있는 옷을 입고 나타나서 아름다운 유방을 과시하여 상대 남자에게 그 유방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스스로의 눈으로 확실히 확인하게 하려는 듯한 무도복을 만들어 입는 것을 허용했고 또 그렇게 만들어 입도록 강제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여자가 목욕하는 모습 그대로, 즉 알몸으로 남자앞에 나타나는 것도 허용되었다.
어떤 시대가 성적인 것은 모두 부부의 침실 이외의 곳에서는 보여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으로 선언하고 동시에 여자에게는 복장이나 걸음걸이, 자세, 표정을 통해서만 세상 사람들과 음란한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남자에게는 공상속에서 여자를 나체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도취할 수 있게 했을 때 그 시대도 모순이 많은 존재방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에 관한 실례를 현대에서 찾아보자. 현대의 여자의 옷은 목 윗부분까지만 드러내고 있지만 상의에 "부채꼴의 창"을 낸 옷을 고급품으로 친다. 어떤 시대에도 임신부가 풍만한 배를 하고 공개석상에 나타나는 것 정도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미혼녀가 임신했을 때는 그 풍만한 배로 인해 직접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세상으로부터도 경멸을 받았다. 한때는 성적인 것이 행동으로 과시되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대대적으로 임신부처럼 가장했고, 이 때문에 임신 2개월, 3개월, 4개월의 배가 제조되어 상품으로 널리 판매되기도 했다.
여자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에로틱한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때로는 완전 나체로 사람들 앞에 나서도 상관이 없었다. 16세기의 르네상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총재정부 시대(directorie, 1795~99) 에는 여자가 자신의 몸을 완전 나체의 초상화로 그리게 하여 전시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방면에서 유명한 것은 우리비노공의 부인인 디안느 드 포아티에, 나폴레옹 황제의 여동생 레카미에의 초상화 등의 초상화이다. 시대는 때로 "정사" 장면의 초상화까지도 허용했다. 오를레앙 필립의 섭정시대(3권, p.103 참조 - 역주)에는 침대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아주 비밀스런 연애 장면의 증인을 초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또 어떤 시대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마돈나 상의 의상을 입고 외설적인 연극을 하는 것도 용인되었다. 처녀 마리아로서의 "아네스 소렐의 초상화" 이와 유사한 여타의 마돈나 상들이 바로 그 증거이다. 시대는 현실의 모습을 변형 시켜서 재현하는, 요컨대 현실을 영웅화하는 미술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저질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을 통해서 에로틱한 흥행물에 일반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허용했다. 예를들면 현대에는 모든 배우들을 유디트와 살로메, 몬나 반나로 분장시켜 나체사진을 찍어 갖가지 모습의 사진을 미술품 상점에 공공연하게 진열하고 소매점에서 판매하는 것을 허용한다. (4권, 5장 참조/ 역주) 여배우들이 무대에 설 때는 살색 타이즈를 신어야만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그것마저 벗어던저도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각국의 무수한 일류 여배우들이 그토록 아름답다고 이야기 되는 육체, 그 중에서도 특히 탐스럽게 발달한, 아직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싱싱한 유방을 자랑하는한, 카메라 앞에서 이 역을 맡기 위해서 우르르 밀어닥치고 공개시장이나 일반 사람들 혹은 수많은 호색한들의 감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나첼르 도발적으로 과시하고 부자연스러운 관능적인 포즈까지 취하고 있다.
복장의 역사는 어느 면에서 보나 언어의 역사나 예의범절의 역사와 완전히 동일한 변천양상을 보이고 있다. 복장의 역사는 분명히 가장 중요하다. 복장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어떤 시대에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제복으로 감싸고 다니는 것이 모든 여자의 도덕에 대한 의무였고, 그 때문에 아담 씨와 이브 부인의 구별조차 어려울 정도였지만, 시대가 바뀌자,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를 세상에 과시하는 일에 몰두했다. 어떤 시대에는 복장에 대해서 " 여자에게는 만족이란 없다."라고 까지 말했다. 또다른 시대에는 여자들은 노출, 러트루세, 즉 걷어올리기를 공공연하게 발전시키고 개량했으며, 스스로 이 노출로 더욱더 도발적으로 자신의 발에 남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했다. 이 시대에는 모든 여자들이 좋던 싫던 끊임없이 걷어올리는 복장을 고안해 냈다. 또한 어떤 시대에는 비너스 칼리퓌고스, 즉 커다란 엉덩이를 가진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흉내내어 허벅지나 유방의 모습을 부조처럼 드러나게하는 복장을 만들었다. 이 목정에 맞추어 시대는 생생한 육체를 나타내고 대담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코르셋이나 스커트까지 벗어던졌다. 중세말기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남자는 계속 바지의 허벅지 부분에 큰 주머니 (라츠)를 붙인 옷을 입고 그것을 통해 남자다움을 세상에 과시했다. (2권, p.68) 이 주머니는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크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은 그것에 쏠릴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것은 마치 남자의 모습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대의 여자들은 옷의 전면, 즉 가슴부분을 아주 깊게 파 내려 갔기 때문에 유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마치 상품처럼 진열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눈은 그곳에 집중되었다. 때로는 그러한 모습이 더욱더 세련된 결과 유방만을 노출하게 되었고, 윗 옷중 정확히 유방이 있는 부분에 두 개의 둥그런 창을 내고 그 창으로 좌우 양쪽의 유방만을 자랑스럽게 내놓았으며, 그렇게 노출된 유방은 얼굴이나 손과 같이 완전히 맨살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총재정부 시대의 복장은 남자 여자 모두 거의 몸을 생긴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남자는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어서 근육은 물론 육체의 모든 부분을 구석구석 그대로 드러나게했다. 여자들은 옷을 홀랑 벗어던지고, 셔츠 하나만을, 그것도 대개는 투명한 가제로 된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또 다른 시대, 예를 들면 중세의 기사 시대에도 동일한 목적과 효과를 노리는 이와같은 복장이 유행했다.
여기에서 마지막 결론으로서 특히 강조해두고 싶은 점은 나라마다 시대에 따라서는 종종 공적이나 사적인 도덕의 규제와 요구가 모조리 유린되곤 했는데, 그것이 개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 계급 및 그들 계급을 구성하는 전체민족에 의해서 유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이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던 시대에는 그때 까지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도덕률은 의식적이고도 계획적으로, 즉 모든 사람들이 양해한 가운데 유린되었으며 수치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렇기는커녕 자연 법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가운데 모든 야성의 해방을 보게 되었으며, 그렇게 짓 밟는 가운데 자학적인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영국의 찰스 2세의 궁정과 프랑스의 앙시엥레짐(구제도)의 붕괴기인 섭정시대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공연하고도 조직적인 방탕시대였다.
지금까지 열거한 상수 속의 변수에 의해서 상호 모순적인 많은 풍속화가 확실하게 떠오른다고 말하고 싶지만, 여기에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첫째, 여러 방면에 걸쳐서 조사해보면 지금까지 고찰해 본 것은 아주 미미한 부분만을 선택한 것에 불과하며, 둘째, 이러한 방법으로는 더욱더 많은 사실이 사장되어 버릴 수 있고, 셋째,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느 풍속화도 극히 대략적인 윤곽밖에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각론이 되는 다음 책들에서 더욱더 많고도 새로운 특징적인 모습을 많이 모아서 그것들을 다시 파해쳐볼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풍속을 비판할 경우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은 일부일처제 위에서 구축된 성 모랄의 근본적인 변화, 즉 이러한 성 모랄 원칙의 강함과 약함이 어떤 경우에서든 각 시대의 때로는 일부민중 그리고 때로는 광범위한 민중에 의해서 부도덕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을 뿐 만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용인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특수한 변화는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그 시대 모랄의 법률이나 불문율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결국은 법률적, 철학적, 사회적 측면에서 승인되었다. 따라서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일한 논리적 결론이 명확하게 도출된다. 요컨대, 어떤 시대에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공개적인 도덕률로써 요구되던것도 다음 시대에 들어서면, 종종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역사적인 실례를 통해서 설명해보고 싶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두 나라의 도덕률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17세기 후반기의 독일에서는 결혼은 애를 낳기 위한 것으로 도덕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이러한 도덕적인 이상에 대하여 결혼 그 자체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 나라에서는 임신한 여자나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여자만이 진정한 여자로 보였고 태어난 아이가 아직 젖을 떼기도 전에 또 애를 배는 것이 도덕적인 이상이었다. 그런데, 18세기의 프랑스에서는 - 물론 프랑스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고 또, 특히 이 시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 결혼 및 여자에 대한 이와같은 견해는 부도덕한 것으로 보였고, 이 시대의 일부 사회계층의 여자들에게는 결혼 후 적어도 1년간은 애를 갖지 말자고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공인된 권리였다. 즉 "아이들이 우글대는 마구간"을 만드는 결혼은 적어도 가장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 비교는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앞에서 열거한 대표적인 현상을 모두 이와 같이 비교 연구하여 비판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때는 도덕적인 것이 또 다른 때는 부도덕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실례로서 가장 극단적인 것을 고찰해보기로 하자. 어느 시대를 살펴보더라도 일부일처제나 간통의 권리가 법률로서 표현된 적은 없었고 또한 볍률로서 보장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살펴보더라도 남자에게 남의 아내를 유혹해도 좋다는 확실한 권리를 부여한 법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이 권리를 열심히 추구했다. 따라서 공공도덕의 규칙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것을 조문으로 못을 박아 입법자로부터 인정을 받은 법전 가운데 실어놓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한 공공도덕의 규칙은 항상 각 시대의 사회도덕의 의견과 요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의견과 요구는 문자로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확실하고도 강제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도덕이란 어떠한 사실을 판단하는 데 잇어서 그것이 도덕적인가 부도덕적인가를 결정해주는 아주 커다란 힘을 갖고 있었던 기준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도덕은 남편이 유혹이라는 행위에 노골적으로 빠져드는가 아니면 은밀하게 그것을 즐기는가에 따라서 또는 여자가 사회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방정하게 행동하는가 아니면 요염하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도덕적인가 부도덕적인가를 결정한다. 어떤 시대의 사회도덕은 한 아름다운 아내가 남편에 대한 정절을 내세워 다른 남자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해도 그것은 그 여자에게 은밀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제멋대로 결정해버린다. 어떤 시대의 사회도덕은 조심성 있는 아내가 자신의 나체를 남자에게 보여도 자신의 `정숙` 그 자체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의를 어떻게 입어야 할까라는 문제를 놓고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게 하기도 했다. 어떤 시대의 사회도덕은 여자 앞에서 바지라는 말만 꺼내도 그것은 그 여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규정했다. 어떤 시대의 사회도덕은 남녀 간의 대화 내용을 항상 신성한 수수께끼에 한정시켰지만 대화 방법은 가능한 한 신성하지 않게 했다. 어떤 시대의 사회도덕은 남자가 상대 여자에게 "당신은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못견디게 유혹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여자는 상대 남자에게 " 나는 당신의 마음을 휘저어놓고 싶어요. 보세요. 당신은 내게 동하고 있군요. 나는 당신의 공상 속에서는 맛있는 음식으로 보이겠지요."라고 말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회도덕은 점점 제한 없이 많은 것을...재가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모든 것, 그 속의 특수한 것, 이 이전과는 전혀 정반대의 것이 각각 특정 시대에 의해서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사실이다. 사물을 과학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어서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왜 그랬는가라는 문제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요컨대 사회도덕의 전체적인 차이는 시대와는 관계없는 우연의 소치가 아니며,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제멋대로 배제해버릴 수 있는 우연도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차이 속에서 일반 사회생활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과 그 저류의 필연적인 결과를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모순된 여러 현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주 정연한 질서가 있다. 거기에는 무의식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혼돈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는커녕 전사회적으로 관철되는 경향 가운데서 언제나 그리고 도처에서 하나의 엄격한 법칙이 그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상의 사실로부터 우리는 과학적인 원칙 위에서 도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풍속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제, 즉 그것을 위해서 인정해야만하는 유일한 토대로서 풍속의 역사가 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어떠한 사회도덕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그러한 사회도덕이 어디에서 그렇게 강제적인 힘을 갖게 되었는가, 그러한 영구한 변화와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요인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성 모랄의 모든 상수 중에서 끊임없이 현상을 변화시키는 필연적인 변수가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변혁의 법칙
이러한 변천의 법칙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즉 무엇보다도 먼저 이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각 시대의 도덕의 표준을 그 이론과 실천의 면에서 항상 각 시대의 사회생활과 결부시켜 조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사해보면 역사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은 앞에서도 서술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지배적인 도덕관 속에는 아직도 많은 윤리학자들이 소위 변덕스러운 관념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무의미한 것은 실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곧바로 명확히 알게 된다. 여기에서 윤리학자들의 그와 같은 거창한 의견, 즉 이 세상에는 영원불변의 도덕의 표준 따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이라는 관념에서는 항상 순수한 우연이나 변덕이 문제의 중심이 되며 이 때문에 줏대 없는 천민만이 이러한 우연이나 변덕이 문제의 중심이 되며 이 때문에 줏대 없는 천민만이 이러한 우연이나 변덕에 빠져들 뿐, 고귀한 인간은 결코 시시하게 여기에 빠져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계사의 어릿광대짓에 대하여 초연하게 존재한다는 의견을 한번 고찰해보기로 하자. 프록코트를 입은 기독교 신자와 같이 에이프런을 두른 브라질의 보토쿠도 족(Botocudos)에게도 똑같은 논리를 펴서 영구히 변하지 않는 도덕관을 주장하는 잠꼬대와 같은 논릴에 비하면 이 논리는 그렇게 사리에 어긋나거나 기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의견에 나타난 모순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주 피상적인 검토, 아주 유치한 과학적 방법을 통한 검토에서까지도 모든 현상이 역사와 확실한 연관 관계를 갖고 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에서는 전혀 연관 관계가 없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변칙이 변태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만약 그 시대 인간의 품행을 문제로 삼는다면, 역사와 연관 관계가 없는 대중 현상이란 있을 수가 없다. 18세기에 행해졌던 방탕, 아무래도 음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복장 그리고 음란한 언어 등 이 모든 것이 대중의 사회생활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7세기 영국의 원두당의 도덕적 엄격성, 음산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간소했던 복장, 청교도들의 성서 그대로의 언어 등과 그들의 생활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 관계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그 역이 진실은 아니었을까? 예컨대 18세기에는 유방의 에로틱한 기능이 왜 부차적인 것, 즉 하찮은 것이 되었을까? 그리고 17세기의 영국 청교도들에게서는 왜 육체적 향락에 대한 세련된 숭배와 에로틱한 나체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까? 풍속과 역사가 연관 관계가 없다는 논리는 정신병자의 이론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는 정신병원에나 가야 할 도덕군자들의 머리만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마치 "영구히 변치 않는 도덕 관념"이 시대 현실과 유리되어 있었던 것처럼 시대의 이성과 유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도 서술한 것처럼 거기에는 아주 엄격한 조화, 한 치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논리가 지배한다. 수백 개의 고리와 다리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그리고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실을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는 그것과 그 시대 사회생활과의 관계가 상당히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보아넘기게 되고 또 이 사실을 더 자세하게 증명하려고 하지 않으며 모두가 마치 이 사실이 이미 증명된 것처럼 무조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뒤에서 다른 분야를 논할 때 가능한 한 분명하게 증명할 작정이다. 이에 반하여 지배적인 도덕관 및 그것에 관계된 도덕 활동 가운데 소위 그 시대 인간의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숙련된 안목과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결정적인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결정적인 토대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더욱더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먼저 찾아보고 그것을 증명해보기로 하자. 어떤 시대의 특정한 도덕 활동 및 그 도덕 활동에 관한 법 가운데에서도 마치 법, 사상, 종교, 예술적 표현 등의 경우에서처럼 그 시대의 경제적 토대의 사회적 특질이 발견된다. 더욱 명확하게 말하면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예외 없이 생산 관계를 축으로 하여 발전해가고 그 발전단계의 정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생산 관계에는 사회적 분업의 발전 정도, 계급구성의 폭, 재산의 분배와 재산상태 등 간단히 말해서 " 시대의 경제적인 토대"라는 정의 속에 총괄되는 일체의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사유재산제, 즉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성 모랄의 모든 토대를 결정하고 또 싫든 좋든 끊임없이 성 모랄의 하부 구조를 결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유재산제라는 것이 모랄 전체의 토대이기 때문에 성 모랄은 그 커다란 틀 속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또 성 모랄을 지배하는 사유재산제가 겪게 되는 변화와 발전에 따라 변화해간다.
분명히 성욕 그 자체가 경제적인 동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성욕의 배출구는 역시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성욕 – 대중 현상으로 간주되고 인정되는 모든 성욕 - 이 남녀를 일찍 결혼하도록 하는가 늦게 결혼 하도록 하는가, 결혼의 대용품으로 첩을 두는가 매춘부를 찾는가, 상류의 유한마담을 구하는가 타락한 타이피스트를 구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처녀가 결혼하여 주부가 되는가 어머니가 되는가 귀부인이 되는가, 처녀를 고르는 기준이 애를 잘 낳을 수 있는 체격이 되는가 아니면 아름다움이 되는가, 처녀가 애완물로 교육이 되는가 아니면 필수품으로 교육이 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부부의 순결이 가장 중요한가 아니면 성생활의 자극적인 향락이 가장 중요한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남자를 손에 넣으려는 경쟁 혹은 여자를 손에 넣으려는 경쟁이 어느 정도로 벌어지는가, 수많은 여자가 원만한 성생활은 추구했으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나머지 설교책의 상투적인 문구처럼 "타락 속에 몸을 던지는가" 어떤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상의 것은 기본적인 경우이지만, 모든 성행동의 하부 구조, 즉 복장, 사교에서의 예절 등도 경제적인 토대와 결부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항상 그 기본적인 케이스에서 유래하는 것, 즉 정신과 물질 가운데 나타나는 부차적인 현상이다.
물질적인 이익이 그 토대이며 그 결정요소라는 점이 문제의 초점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러한 법칙이 옳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견해의 중요함을 모든 면에서 인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책에서 말하는 문제점은 몇 가지의 대표적인 실례를 통해서 충분하고 확실하게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소수에 불과하지만 대표적인 실례만 증명된다면 나머지 것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우선 성 모랄과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의 연관 관계가 극히 확실한 몇 가지의 실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17세기 중반 무렵 독일의 어느 한 지방에서는 "일부이처제"가 옛날보다 더욱더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그것도 한 사람의 남자가 두 사람의 본처를 두고 그 두 사람의 본처가 같은 방에서 함께 기거하는 형태를 취했다. 즉 이것은 완전한 일부다처제 현상이다. 그런데 이 일부다처제를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이 세 사람 사이의 결혼이 비밀스러운 것으로서, 즉 당사자끼리의 개인적인 협정이나 개인적인 비밀로서 이웃 사람들이 알세라 쉬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리는, 즉 세상 사람들 앞에서 협정을 맺고 당국으로부터도 공인받고 권장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두 명의 본처를 갖는 것은 이 지방에서는 범죄가 아니었고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기는커녕 훌륭한 것이었고 따라서 도덕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절대로 믿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고 대개는 그것을 황당하고 형편없는 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은 그 당시 독일이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을 환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그 바로 전에 30년 전쟁을 경험했었다. 이 30년 전쟁의 참혹한 고난의 시대에 독일의 전 국토는 철저히 황폐화되어 완전히 물자가 거덜났을 뿐만 아니라 인구마저도 크게 줄었다. 수백만의 사람이 전쟁에서 살육되거나 방방곡곡에서 봉기한 약탈군인에 의해 학살되었고 마침내는 이 끝없는 학살에 뒤이어 전국을 휩쓴 전염병 때문에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수천 개의 촌락과 도시가 거의 없어져 버렸다. 이 불행한 30년간 전쟁 전에 독일의 인구는 1,600만에서 1,700만을 헤아렸는데 전쟁이 끝난 후인 1648년의 총인구는 실로 400만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400만의 인구 중에서도 남자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남자의 수는 여자 2.5명에 대하여 1.5명의 비율이었다. 이것은 전재의 비참한 결과였다. 그런데 어느 시대에서든 가장 중요한 자본은 인간, 즉 노동력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이 인간이라는 자본이 역사상 유래 없이 부족했고 또 그 때문에 인간이라는 자본 이외의 것은 점점 돌보지 않게 되었으므로 무엇보다도 이 가장 중요한 자본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식의 생산, 즉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경제적 요구였고 따라서 그것이 생식능력이 있는 모든 남자의 가장 고귀한 도덕적인 의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의 근본적인 도덕관과 모순된 것이었으므로 이번에는 정부가 나서서 남자는 모두 이 방면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며 무조건 이 의무를 이행할 것을 공개적으로 엄명했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증거는 분명히 있다. 이 시애의 얼마되지 않는 공문서 속에서 우리는 이 증거를 명확히 찾아볼 수 있다. 1650년 2월 14일 뉘렌베르크 지방의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했다.
그러므로 신성로마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피비린내 나는 30년 전쟁 시기에 전쟁과 전염병과 기아 때문에 잃어버린 군사를 다시 보충하고...하는 것을 요구한다. 금후 10년간 모든 남자는 두 사람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만약 당시까지의 도덕을 뒤집어엎는 경제적 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이 공인된 목표가 위와 같은 간단한 문장으로 나타났을 리가 없다.
그런데 세상을 알지 못하는 관념론자는 "이것은 30년 전쟁의 비참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철저한 풍기문란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으며 오직 그것 하나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성행동이 나타난 형태나 도덕 수준 모두를 인간의 도덕 감정의 발달의 고저에 의해서 설명하는 데에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역사과학에서 이와 같은 불유쾌한 현상에 대해 대개는 이러한 논의나 이와 유사한 논의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설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상하게 결합되는 예외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기껏해야 이와 유사한 역사적 현상의 특수한 일면과 결부되는 예외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은 그러한 각도에서 농민 도덕을 한번 살펴보고 특히 대표적인 농민의 고대법인 바이스튀머(Weistumer : 중세 독일의 관습법 총람/ 역주)를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이와 동일한 것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끈기 있게 찾아보면 바이스튀머에서 많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보쿰(Bockum) 국법 중의 한 기록을 원문 그대로 소개해보겠다.
더구나 진실한 아내를 두고 있는 남편은 그의 아내의 여자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거두어줄 수 없을 때에는 아내를 이웃 사람에게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웃 사람이 그녀를 충분히 도와줄 수 없을 경우에는 그는 그 여자를 다정스럽게 보듬고 고통을 주지 말고, 자식을 줄 수 있는 아홉 남자에게 차례로 데리고 가서 부드럽게 내려놓고 고통을 주지 말고 5시간 동안 거기에 둔 다음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큰소리로 외치게 해야 한다. 그래도 그 여자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이웃 사람은 그 여자를 다정스럽게 껴안을 다음 천천히 내려놓고 고통을 주지 말고 그 여자에게 새 옷과 여비가 든 돈지갑을 주어 대목장으로 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를 도울 수가 없을 경우에는 수천의 악마만이 그 여자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오늘날의 말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건강하지만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가진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대를 이을 아이를 잉태하게 해줄 가능성이 있는 남자의 침대에 자신의 아내를 보내야 하며 그 사람의 힘으로도 애를 갖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2, 제3의 이웃 사람에게도 시험해보아야 하고 모두 실패할 경우에는 수천의 악마가 아내를 돕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러한 경우에는 결국 초자연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 초 자연의 힘만이 여자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이다. 애를 낳는 것은 확실히 여자의 의무였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는다는 것, 즉 가능한 한 많은 아이를 낳는 분만 도구가 되는 것은 모든 여성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성 모랄은 어디까지나 농촌경제, 즉 농촌의 물질적인 이해관계와 결합되었다. 농민에게는 어느 계급보다도 자식이 중요한 자본이었다. 왜냐하면 자식은 가장 값싸고 또 가장 필요한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자식은 미개시대에는 농민이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을 위해서 일해줄 수 있는 유일하 존재였다. 그래서 자식의 혈통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내가 자식을 낳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자신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기지 않을 때에는 남편은 아내에게 자식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차례로 그의 침대에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얘기한 바와 같이 이 경우 개인적인 애정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적 남자의 생식능력이 중요했으며 이 때문에 아내는 자식을 낳은 동물로 취급되었고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에는 오늘을 이 남자에게로 내일을 저 남자에게로 보내졌다.
오늘날에도 농촌 경제에 있어서는 자식을 많이 갖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농민들 사이에서는 간통에 대해서는 예의 관대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나타난다. 농민의 아내가 남편 대신에 비천한 농노나 애인을 만들어 중요한 가족을 증산하여 남편을 도와줄 경우 그 남편은 오늘날에도 어느 다른 계급에서 볼 수 있는 경우보다도 더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똑같은 경제적인 토대에 기초하여 앞에서도 얘기한 바 있는 "시험혼"이라는 관습이 생겼다. 시험혼은 각 나라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남자(또는 여자)가 연애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 즉 자식을 낳아줄 수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해보는 것은 농촌의 도덕관에서는 훌륭한 도덕으로 인정되었다.
이것과 아주 독특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불임률이 높은 민족에서 볼 수 있는 대중 현상이다. 이러한 민족에게는 농민과 마찬가지로 자식이 가장 중요한 자본이기 때문에 "남자 씨받이"가 언제나 필요했고 일의 증대성에 비추어볼 때 자식을 낳게 해주는 행위는 대개는 신, 즉 예언자의 직업에 속하는 것이었다. 에스키모인은 이러한 민족의 한 예이다. 에스키모인들은 최고의 신이 예언자의 중개를 통하여 자식을 보내준다고 믿고 있다. 프레트요프 난젠은 "북극탐험" 이라는 책에서 이에 대한 중요한 보고를 하고 있는데 동시에 이 보고를 통해서 사실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 난젠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린란드인이 가장 어기기 쉬운 계율은 10계명 중에서 제7계명이다...정조와 정숙은 그린란드인들에게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다...미혼의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사람들(서부해안)은 대체로 그것을 커다란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고트하브에 머물고 있을 때 그곳 근처의 처녀가 두 명이나 임신하고 있었지만 그 여자들은 임신한 사실을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처녀가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이 훌륭한 증거를 아주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홀름도 동부 해안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 지방에서도 사생아를 낳는 것을 별로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에게데도 이 지방의 여자는 안게코크, 즉 예언자와 친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아주 커다란 행복이며 명예로 삼고 있다고 말하고 그것에 덧붙여서 남편들은 대개 이를 흡족하게 생각하며 특히 부부간에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안게코크에게 아내와 동침해주도록 돈을 지불할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키모인 여자의 자유는 게르만 민족의 여자에게 허용되고 있는 자유와는 매우 다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게르만 민족에게는 언제나 상속, 혈통, 족보의 유지가 중요했지만, 에스키모 인에게는 그런 것들은 의미가 없다. 그녀들에게는 상속할 것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식뿐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있다는 혹은 자식은 가져야만 한다는 이해관계는 비밀스러운 방법을 통하여 항상 동일한 탈출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많은 귀족의 혈통이나 상당수 군주의 가문은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족보"에 정통성을 확보했다. 통치군주의 가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식으로 가계를 유지한 경우로는 로마노프가가 가장 좋은 예이다. 로마노프 가는 어느 면으로 보나 정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독일의 안할트 - 째르프스트 가 출신의 유달리 억척스러웠던 에카테리나 2세는 그녀 스스로가 고백했듯이 성불구였던 남편 표트르 3세와의 성교를 거부하고 남편의 충실한 하인이자 총신이었던 세르기우스 살티코프에게 쾌락의 임무를 분부하여 한 사람의 후계자를 얻어 러시아를 구했다. 그러나 왕실의 역사에서 로마 여자인 아우구스투스의 황비 리비아의 예는 더욱더 무절제한 것이었다. "배가 가득 찬 때가 아니면 나는 한 사람도 손님을 태울 수가 없어요"라는 말은 왕비가 그녀의 남편에 의해서 임신했다고 생각한 시기에만 자신의 애인들에게 최후의 총애를 베풀었다는 의미이다. 이 원칙은 대개 신분은 천하지만 체격이 좋은 구원자가 원기 왕성한 씨를 제공해주어 확실히 임신했다는 증거가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몸이 약한 남편에게 동침할 권리를 허용하는 것이 상황의 정반대이다. 이것에 관해서도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항상 개인적인 이해와 함께 사라져버리게 되는 개인적인 도덕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대중 현상으로서의 매춘이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서, 즉 무엇보다도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은 수차례에 걸쳐서 자세하게 증명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 사실을 다시 증명하기 위해서 특별히 유명한 기록을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대중현상으로서의 매춘을 단지 병리학적인 문제, 즉 선천성 창녀의 문제로 한정시켜버리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인 해석방법이겠지만 그러한 해석방법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신소리를 늘어놓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이러한 성 심리학자는 대부분 자신들이 사회현상으로서의 매춘이라는 개념의 특수한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뒤섞어 나열해놓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추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행동, 즉 도덕의 표준과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하여 지금까지 들어왔던 실례는 이러한 성심리학설을 뒤엎는 아주 대표적인 실례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17세기에 법률에 의해서까지 공인되었던 일부이처제의 경우, 경제적인 요구가 매우 강할 때에는 그 경제적 요구가 성 모랄의 가장 중요한 요구나 도덕의 근본적인 요구, 즉 일부일처제까지도 유린해버린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물질적인 이해관계는 중요한 사실뿐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실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만약 여러 현상이 인간의 눈앞에 나타날 때 혹은 인간의 의식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 때 본질을 가리고 있는 외피를 벗겨버린다면 우리는 위와 같은 사실을 수없이 많은 다른 현상 속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실례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16세기의 동업조합조직이었던 쭌프트는 직장에 도제를 고용할 때 도제 지원자들에게 "자유인이며 명예로운 혈통"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도제 지원자들은 확실한 적출 출신이어야만 했다. 우리는 쭌프트 제도에 관한 묘사나 16세기 도시의 번영을 주제로 한 많은 묘사에서 당시 존경받는 직업이었던 수공업 속에서 출렁이고 있던 "기품 있는 도덕의식"이 그러한 조합의 규약 속에서 얼마나 장중하게 찬미되어 나타났는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조합규약은 "진보적인 따라서 생기가 넘치는 인간을 창조하는 도덕 감정의 발로"라든가 "종교개혁에 의해 세계에 등장한 도덕적 정화의 고귀한 결정"이라는 식으로 절찬을 받았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외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왜 어리석은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만약 우리가 그 시대의 동업조합의 조직을 자세히 조사하여 쭌프트 규약을 작성할 때, 그 초안자에게 그 규약을 그렇게 만들도록 한 근본 입장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그렇게 작성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을 여러 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 정화"라든가 "도덕적 의식"이라는 것이 유일한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규약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러한 도덕적인 요구는 결코 도덕 따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어디까지나 금전욕에 있었던 것이 분명해진다. 16세기에 동업조합이 도제를 고용할 때 "자유인이며 명예로운 혈통"을 문제로 삼아 대부분의 도시에서 적출이라는, 즉 사생아가 아니라는 증명까지 요구했던 것은 결코 쭌프트라는 계급을 도덕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쭌프트의 독점력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16세기 초에 가난한 젊은이들이 수공업기술을 배우려고 우르르 몰려들었을 때에 쭌프트 성원들은 이 규약을 방패로 삼아 그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규약을 방패로 삼아 목전에 임박하고 있는 경쟁을 깨부술 수가 있었다. 그들 성원은 오로지 이러한 이유에서 도덕적이 되었고 이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 결혼의 신성함을 선언하고 결혼을 명예의 초석이라는 보증서로 삼았던 것이다. 실제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경쟁에 대해서 이보다 더 훌륭한 방파제는 없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자신이 신생아가 아니라 명예로운 혈통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고 먼 지방에서 온 지원자의 경우에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장사에 빈틈이 없던 동업조합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도덕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이 조합의 규칙을 작성할 때 품었던 바와 같은 물질적인 이기심에서 동업조합에 속하지 않는 많은 직업에 "비천한 직업"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따라서 비천한 직업 출신을 그 누구도 "명예로운 수공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명예로운" 직업에 당연히 주어져야 할 경제적인 특권마저 동업조합에 속하지 않는 직업에는 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제적인 원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던 쭌프트의 도덕적인 의무나 그밖의 사항에 관한 말이 이러한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주장되었다고 해서, 사태가 그 주장 그대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그러한 말을 입에 담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겪는 경쟁과 주장하던 이익이 규칙 초안자의 의식에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도덕이라는 전화된 의미로 나타났던 것을 증명해준다.
16세기에 들어 점차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목욕탕 생활을 부도덕한 것으로서 규정했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6세기까지는 목욕탕에 가는 것은 별로 나쁜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완전한 나체로, 여자는 목욕통의 특별한 옥을 입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혼욕을 하고 목욕탕에서 화끈하게 서로 농담하고 희롱했었다. 그것은 퓨리탄적인 정신으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풍속이 특별히 문란해진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서자 갑자기 사정이 일변하여 혼욕을 반대하는 주장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목욕탕에 가는 것에 대해서 트집을 잡게 되고 목욕탕에 가는 것은 음란한 짓이라고 평가되어 목욕탕은 죄악의 연못처럼 묘사되었고 결국은 하나 둘 폐쇄되어버렸다. 목욕탕에 대한 열기가 식어감에 따라 그 장사도 점차 빛을 잃게 되었고 이 때문에 목욕탕은 점차 영업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인심이 왜 이토록 급변했는가? 그 관념의 역사를 구석구석 조사할 때 우리는 앞에서 설명했던 것과 똑같은 설명을 듣게 될 것이다. 즉 쭌프트 조합조직에 대한 설명과 똑같이 목욕탕에 대해서도 드높여진 도덕 감정, 종교 개혁의 정화의 영향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와 유사한 도덕적인 힘이 세태를 그렇게 움직였다는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소리는 목욕탕의 경우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5세기를 경계로 하는, 매독에 대한 공포의 확산이 이 사정을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뒤에서 설명하는, 이와 유사한 여타의 원인과 더불어 매독은 인간의 품행을 바로잡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즉 이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그때까지 매우 인기가 있었던 목욕탕을 마치 지옥처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목욕탕에서 즐기던 사교적인 오락 가운데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음란한 짓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차녀가 항상 여자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욕탕의 욕조 옆에는 작은 방이 붙어 있었다. 욕정에 불타는 남자손님은 언제나 같은 기분을 가진 여자손님과 함께 그 작은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간에게 이 시대만큼 목욕탕 행차가 "가장 부도덕하다"라는 변증법을 뇌리에 심어준 시대는 없었다. 나는 이것에도 경제적인 원인이라는 라벨을 붙여둔다.
결혼횟수의 변화, 매춘이용의 광범위함 그리고 그밖에 이와 유사한 종류의 사정 등 이러한 중대한 문제는 어느 정도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예의범절, 유행복, 여자 옷의 가슴 노출의 정도 등과 같은 문제나 규칙 그리고 육체미의 개념에 대한 기호의 변천이라는 부차적인 사항까지도 경제적인 이익과 결합될 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견상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사항도 역시 경제적인 이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한 사항도 예외 없이 인류 및 민족의 사회생활의 경제적인 토대의 반영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은 간접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실의 핵심을 말하기 전에 먼저 많은 현상에 대하여 하나하나 끈기 있게 그 내용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부터 몇 가지 현상을 분석해가면서 이것을 증명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만 증명한다면 지금부터 서술하려고 하는 또다른 중요한 결론에도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의는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그 논의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이 된다. 지금까지 증명해온 실례들을 살펴보았다면 도덕적인 요구나 규칙, 사고방식은 결코 도덕감정의 강한 또는 약한 발현이 아니며 그것들의 결정적인 원인들을 알기 위해서는 각각의 경우 목적이 되는 진정한 동기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정되면 여기에서 문제의 테마가 나타나게 된다. 이 테마는 바로 "모든 도덕 활동은 그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특정한 사회적 요구와 일치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내가 내용의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진실되고도 결정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새롭게 체득한 역사관에 의해서 곧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성 모랄의 중요한 요구는 사회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지배받는다. 따라서 그것뿐만이 아니라 부차적인 분야 및 특수한 분야의 모든 요구도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요구일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앞에서 설명했던, 성 행동에서의 모든 현상이나 반영을 사회적 요구라는 시금석을 기준으로 하여 다시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조사해가다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 즉 사회적인 요구는 시대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문명이라는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고부터는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이미 같은 무리는 아니었다. 민족은 언어라는 외적 현상만으로는 같은 무리처럼 보였지만, 그 내부는 항상 여러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문명의 토대가 되었던 사유재산제가 발전함에 따라 좋든 싫든 도처에서 계급분열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계급분열은 모든 시대에 바로 정치형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체로 이 계급구성은 지배계급과 피압박계급 및 소멸해가는 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계급은 각각 다른 이해관계, 즉 그 시대 전체가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외에 각각의 계급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삶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사이한 계급에만 적용되는 이해관계와는 다른 것일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따라서 서로 그것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시대에는 이러한 이해관계의 차이로부터 성행동이나 도덕의 관념과 규칙의 차이가 생긴다. 바꾸어 말하면 성 모랄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가 아니라 각 계급에 따라 때로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정면으로 대립할 수도 있다.
우리가 계급분열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급의 차이가 성 모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며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성 모랄을 지배한다는 두 가지 사실을 더욱 자세히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실례로서는 16세기의 수공업 마스터들과 상인들 간의 결혼관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수공업 마스터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가정의 충실한 고문이었고 집안을 정돈하고 부엌이나 술창고를 돌보는 엄격하면서도 정숙한 주부였지만 돈 많은 상인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주부이자 관능적인 향락에만 이용되는 시녀였다.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은 두 계급의 전혀 다른 경제적인 틀 속에 뿌리를 둔다. 수공업 마스터들의 가정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어야만 했고 아내는 엄격한 생활 자세를 보여 고용인들에게도 위엄을 보여야만 했으며 언제나 검소함을 첫째로 해야만 했고 아침에는 가장 먼저 일어나고 저녁에는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서 집안을 돌보고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는가, 문단속은 잘 되어 있는가, 화재나 도둑에 대한 예방도 잘 되어 있는가를 빈틈없이 확인해야만 했다. 이렇게 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쓰고 빈틈없이 정돈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만이 영세수공업 경제의 모든 생활과 행복이 보장되었다. 만약 이러한 정리정돈과 검소함이 무시되고 여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이러한 일에 등을 돌려버린다면 생활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생활조건은 주부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모든 사고방식 가운데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주부의 모든 행동거지, 전혀 교만하지 않은 태도나 복장 등 그들의 모든 것은 이 생활조건에 의해서 지배된 것이었다. 이 정신으로 말미암아 자녀교육도 주부가 날마다 신경을 쓰는 일 중의 하나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따라서 수공업 마스터들의 아내들은 사람들에게 이와 정반대의 인상을 주는 것을 자신들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아내들은 자신에게 나쁜 평판이 생기지 않도록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마을을 걸어다녔다. 아내들은 신분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싶어도 그러한 허영심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수공업 마스터들의 아내들은 "정숙하고 명예로운" 생활을 하는 조심성 있는 주부의 일반적인 형태의 전형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내들이 지키는 도덕률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것을 거역하면 몸을 망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내들은 이러한 도덕률에 맹종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춤을 추러 간다거나 짬을 내서 이웃집 아내와 이것저것 재잘대고 있으면 하녀는 게으름을 피우고 제멋대로 굴게 될 것이다. 아내가 호색한에 대한 공상에 빠져 제정신을 잃기라도 하면 젊은 도제들은 마스터가 집에 있든지 없든지 개의치 않고 일을 내팽개치고 마스터가 자리를 비울세라 곧장 몰래 여주인의 침실에 스며들 것이다. 그때 그녀가 침대에 함께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해도 호색한은 항상 자기의 몸을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다는 공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정이 머리 속에 가득 차버린다. 미인처럼 보이고 싶은 허영심은 아내들을 가능한 한 화려하게 치장하도록 유혹한다. 이같이 아내가 잘할 경우에는 가족의 생활 전체를 지탱하는 지주이지만 잘못하면 가족의 생활 전체를 파괴해버릴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내를 지배하는 도덕률, 즉 정숙한 주부인가 음란한 주부인가를 결정하는 도덕률은 결국 수공업자의 생계와 번영을 유지시켜주는 경제적인 토대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이 계급의 상층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돈 많은 상인들이 결혼과 가정을 지탱해주는 경제적인 토대는 이 계급의 도덕적 행위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아내는 재산 덕에 해방되었고 이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이제는 아내가 손수 일을 하지 않고 가정의 감독이나 자녀교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어도 가정을 잘 꾸려져나갔다. 아무리 낭비를 해도 그것이 가족생활에 대한 위협요소가 되지 않았고 내키는 대로 돈을 써도 걱정할 것이 없게 되자 아내는 점점 사치품이 되어갔다. 사치품이 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여성해방의 단초였다. 우선 첫째로는 점점 더 늘어가는 재산 덕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치품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가 사치품이 되어감으로써 주부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당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규칙이 아내에게 적용되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생활을 장식하고 남편의 쾌락의 횟수를 증가시키는 최상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전혀 다른 생활목표를 갖게 됨으로써 상인의 아내로서의 임무는 아내에게 전혀 다른 생활형태를 강요했고 따라서 전혀 다른 도덕을 강요했다. 수공업 마스터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었던 남편에 대한 향락봉사가 상인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전면에 나서게 되어 그것이 아내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되었다. 아내는 최상을 사치품이었고 최상의 향락도구였다. 아내는 매일 향락을 준비하고 그것을 신선하게 해야만 했다. 아내가 오랜 기간 그러한 임무를 훌륭하게 해내면 해낼수록 그만큼 아내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사치의 정도는 분명히 재산의 크기를 과시한다. 이것은 자본이 처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던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내는 가장 사랑받는 사치품으로서 이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사치품으로서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 역할은 항상 자신들의 계급 내에서만 수행되었고 아내는 항상 그들의 계급을 "대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이 상인 아내의 모든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것은 아내들의 말을 만들어 냈고 사교의 형식을 만들어냈으며 사상과 복장까지도 만들어냈다. 아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남편과 모든 남자들의 향락도구였으며 또한 향락도구를 대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에게만 향락도구로 보였던 것이 아니라 모든 남자들에게도 향락도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나에게 어울릴까요?"라는 말은 아내들이 옷을 만들 때 아무에게나 물어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질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애를 위하여 다듬어진 육체를 자랑스럽게 과시하고 탐스러운 유방을 어떤 빌미를 만들든 가능한 한 많이 노출시켜 자신의 연애의 고상함, 영원히 늙지 않는 자신의 도발적인 청춘 등을 자신의 복장을 통하여 가능한 한 훌륭하게 드러냄으로써 아내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향락도구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과시했다. 그리고 아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아내가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 즉 그 아내가 속해 있는 계급이 요구하는 특별한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내들은 언어를 고상하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특별한 예의범절 전체를 향상시켰다. 아내들에게는 인생이 영원한 축제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것은 남아도는 재산으로부터 저절로 생겨난 논리였고 또 요구였다. 따라서 아내들이 보기에는 하루하루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마치 축제날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축제 속의 인생 그것이었다. 아내에게 재산이나 노고, 쓰레기 등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은 모두 아내의 주변으로부터 추방되어버렸다. 아내는 언제나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모습으로 축제의 후광 속에 서 있었다. 아내를 이러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하여 남편은 축제기분을 망치는 모든 것을 부인의 생활과 격리시켰다. 이러한 것 속에는 인생의 가장 신성한 임무인 어머니로서의 임무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내가 잘 먹고 잘살게 된 덕에 완전히 향락도구로 바뀌게 된 그 순간부터 모성은 저절로 제한되었고 무시되어버렸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아내에게서 사교를 빼앗고 축제 기분을 오랜 기간 동안 깨뜨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육체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애를 낳는 것은 젊은 아내를 늙게 만들고 또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유방은 남자를 유혹하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결혼의 목적으로서의 모성이라는 하늘이 준 임무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서 결국은 불가피한 불행이라는 의미로까지 격하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출현으로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그 계급관 속에도 나타나 있듯이 점차 "무례한" 것이 되었고 나아가서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것까지도 무례한 것이 되었다.
이것과는 다른 성행동을 보더라도 그러한 사고방식은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간통도 사회적인 위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향락도구로 여겨졌고 연애하는 가운데에서만 향락의 가장 감미로운 대접을 받았던 부인은 술에 취한 기분으로 자연의 법칙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예가로서, 즉 아주 대담한 유희에서까지도 유희의 규칙을 한시도 잊지 않고 또 모든 것을 허용하더라도 그 유희가 범죄가 되는 상황만은 피한다는 기예가로서 자연의 법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회적인 위험성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관념상으로도 이미 간통은 커다란 죄악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간통에 대한 모든 것은 높은 덕성이 되었다. 찬바람이 일게 할 정도로 도덕적으로 엄격하게 집을 지키기보다는 집에 손님을 끌어들이는 기교가 사교적으로 크게 환영받았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떠한 사람과도 놀 수 있다는 재능을 의미한다. 다만 문화적 발전이 그 노는 방식을 변화시켰을 뿐이었다. 미개 시대에는 난폭한 싸움이 유희의 규칙이었지만 바로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이때의 그 규칙은 공상의 탕음난무(Orgie)에 지나지 않는 세련된 플러트(flirt)로 바뀌어버렸다.
이러한 것이 16세기 수공업 마스터들과 돈 많은 상인들의 결혼관이다. 각 계급의 성행동 및 그 규칙이 각각 다르다는 것은 각 계급의 요구들이 상이한 물질적인 토대에 의해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귀족, 궁정인, 군주-군주도 역시 특수한 계급이익과 요구를 가진 계급을 대표한다-농민, 승려, 프롤레타리아 등의 각 계급의 예의범절이나 도덕관도 지금 설명한 바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다. 물론 어느 계층에서도 남편이 아내에 대한 자신의 지위에 대해서 가지는 의견은 남편에 대해서 아내가 가지는 의견과 완전히 동일했다.
계급도덕의 이러한 차이는 저절로 생겨나지만 이 차이가 그 계급의 독립과 걸음을 맞추어서 완성되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각 계급 내에서 공인되고 그와 동시에 종종 신성하고도 범할 수 없는 계급적인 이데올로기로까지 발전된다. 이러한 흐름은 두 가지의 매우 중요한 요소, 즉 계급차별에 대한 강한 충동과 계급연대에 대한 강한 충동에 의해서 더욱더 나아가게 된다.
계급차별에 대한 강력한 움직임은 항상 지배계급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국가 내에서 자신의 재산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획득했고 따라서 지배계급이 된 계급은 항상 다른 계급에 대하여 자신을 훨씬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지배계급은 대중들이 자신들을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조직으로 생각하게 하려고 하며 자신들의 대표자를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질서의 인물로 감쪽같이 속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라고 알 수 있는 것이며 또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결국 지배계급이란 인류 진화의 질서 가운데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이러한 믿음이 하나의 강한 충동이 없이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높은 신분을 이용하여 특별한 우선권을 손에 넣고 특히 대중으로부터 이른바 지배권을 편취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상징조작을 행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의 지배계급으로서의 역사적인 지위에서 생긴 특수한 사회적인 요구였다.
도덕의 표준은 어느 시대에서나 명백한 계급차별을 가지게 된다는 그 큰 이해관계에 맞도록 자의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항상 이 도덕의 표준을 기초로 하여 특수한 성행동에 관한 표준이 결정되었다. 한 계급의 특수한 성행동 및 그것에 적합한 도덕률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계급 차별수단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재산에 의해서 보장되어있는 그 특수한 요구, 즉 자신들의 향락을 충족시켜주는 모든 것을 공인된 것, 따라서 도덕적인 것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자신들에게 허용된 것을 피지배계급에게는 허용할 수 없는 것 또는 부도덕한 것으로 선언했다. 이렇게 하여 특수한 도덕도 지배계급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동시에 다른 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무기로 변해버린다. 그것은 지배의 무기임과 동시에 억압의 무기이다. 요컨대 특권계급의 지배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다른 계급에게는 도덕률로 강요되었다. 수백 가지 실례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듯이 농민, 수공업자, 장인 등에 대해서는 계급차별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부도덕한 것이나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행동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위협할 경우에는 그것은 왕왕 도덕에 대한 범죄라고 호된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면 귀족의 도덕법전은 귀족의 아내에게는 가슴을 드러내는 옷을 입는 것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경우에는 반드시 그러한 복장을 착용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의 아내가 가슴을 드러낸 복장을 할 경우 어느 시대에나 부도덕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따라서 그러한 옷은 마스터의 아내에게는 엄격한 복장 규정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그렇게도 못생긴 귀족 노파가 쭈글쭈글한 유방을 드러내놓아 보는 사람들을 소름 끼치게 하거나 구역질 나게 하더라도 이 노파는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시민계급의 여자가 코르셋의 보물을 과시하여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어도 그것은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이 되었다. 만약 시민계급의 여자가 허영심에 사로잡혀 상의의 목덜미 부분을 규정 이상으로 깊게 파서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만큼 더 내려갔을 경우에도 무자비한 처벌을 받았다. 소시민수공업자가 16세기에 들어와 점점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그 시대의 욕탕 생활이 인간 생활에서 맡았던 훌륭한 역할대로 매일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얼굴을 맞대고 그 결과 목욕탕이 주제넘은 귀족이나 도시귀족의 지배에 대한 반항의 중심지로 변하게 되자 항상 자신들의 지배권을 내세워 협박하던 지배계급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욕탕을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장소라고 선언했고 권력이 흔들릴 경우에는 즉시 목욕탕을 폐쇄해버렸다. 바로 이것이 매독에 이어서 16세기에 욕탕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한 제2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농업노동자나 공장노동자의 남녀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항상 어쩔 수 없이 육체를 맞부딪칠 경우나 부모나 어린이들, 동숙하는 청년이나 처녀, 성년자나 미성년자가 좁은 침실에서 뒤섞여 잠을 잠으로써 어른들의 성생활이 매일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현장교육을 제공하게 되었지만 이 경우 지배계급은 수세기 이래로 한번도 그것이 풍기를 문란하게 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 내부에서만은 남녀가 몸을 밀착시키지 않도록 강제하였지만 하층 계급에 대해서는 이러한 상태가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 개선시켜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도 또한 도리에 맞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태가 자신들의 지배이익과 경제적 이익에 적합했고 따라서 그것은 자신들을 위한 사회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특수한 계급도덕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던 제1의 요소이다. 다음으로 제2의 요소, 즉 계급연대수단으로서의 계급연대감을 강화하기 위한 특수한 도덕관도 앞서의 계급차별의 수단이 가진 본질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특정 계급의 특수한 도덕관은 그 계급의 사회적인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들어진다. 즉 차별이라는 것 자체가 항상 다른 계급으로부터 이미 자신들을 차별하고 있고 또 동시에 자연히 차별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단결시킨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이든 또는 적대적인 계급이든 자신들이 다른 계급으로부터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자신들은 항상 단결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공동의 제복이나 견장과도 같은 것이며 또한 하나의 슬로건 아래 모인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슬로건은 무서운 기세로 확산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특수한 본질은 점차로 배양된다. 차별은 강화되며 목적과 의식에 의해서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차별을 받을 때 인간은 우선적으로 이 차별이 자신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차별함으로써 사회적인 연대 관계가 비로소 확실해지고 그 때문에 기쁨과 증오 등 모든 것이 의식에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개인이 이러한 차별을 적대할 경우에는 그것은 자신의 계급에 대한 범죄로 간주된다. 이것은 모든 도덕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파업을 깨트리는 노동자는 자신의 전투적인 동지의 진영에서 최대의 범죄자이고 항상 노동자의 요구를 깎아 내리는 자본가는 자본가 동료들로부터 욕심이 많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은 성 모랄 분야에 있어서 특수한 사고방식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서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특수한 도덕의 규칙이나 특수한 예의범절의 사고방식이 형성된다. 물론 인습적인 윤리는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칼 카우츠키는 윤리에 관한 그의 뛰어난 저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습적인 윤리는 도덕률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힘을 발견한다. 인습적인 윤리는 사회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개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률이라는 것이 인간과 다른 모든 인간과의 교섭을 지배하지 않고, 동일한 사회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이 경우 동일한 사회의 인간이라는 것을 동일한 계급에 속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배의 결과를 평범한 실례로써 설명하기 위해 유산계급의 비합법적인 연애관계에 대한 규정을 여기에 소개해보겠다. 귀족계급이나 시민계급의 청년이 숨겨놓은 여자가 있으면서도 이 다방 저 다방에서 많은 중매인들의 주선으로 부자나 귀족의 딸과 선을 보더라도 이 청년은 그 계급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청년이 앞서서 혼담이 순조롭게 진척되어 바야흐로 결혼식을 올리는 당일에 수년간에 걸쳐서 동거했고 그 청년의 어떠한 욕망에도 순순히 따랐던 시녀와 같은 그 감추어놓은 여자를 잠깐 짬을 내서 만나더라도 이 청년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올바른 것이라 말해진다. 만약 이 청년이 그 감추어놓은 여자를 약간의 돈으로 위로하려고 하든가 위자료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행동은 꽤 세상 물정에 밝은 행동이라고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버린 여자의 후임자로 집에 들어 앉히려고 하는 "행복한 새색시"가 자신과 결혼하기 이전 수년 동안 이 지아비가 이 여자 저 여자와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은 물론 많은 창녀와 관계하고 거기에다가 유부녀를 차례로 유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임시에도 그 남편이 뻔뻔스럽게 신부의 육체의 순결을 기대하더라도 또는 신부가 신랑에게 허용할 수밖에 없는 최초의 성교에서 신부가 처녀라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신랑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신부에게는 당연한 것이 계급도덕이다. 다른 남자가 이전에 아내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 즉 아내에게 "과거"가 있다는 것을 결혼 후에 남편이 알았을 경우, 이와 동일한 계급도덕은 남편에게 그러한 아내는 부정한 아내로서 지체없이 쫓아내더라도 괜찮다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또 어떤 처녀가 어떤 남자로부터 유혹을 받아 임신을 했을 경우에도 그 남자는 그 처녀를 버려도 괜찮았다. 자신들의 계급도덕의 관점에서는 남자는 그 상대가 사생아를 낳고 자신이 그 아이의 정당한 부친이더라도 그 처녀와 어떻게든 결혼해야만 한다는 책임은 지지 않았다.
어떤 시대의 일반적인 성행동에 관하여, 그리고 나아가서는 줄기를 아주 잘게 나누어서 그 영향력 범위를 때로는 전 민족에까지 넓히고 때로는 특정 계급이나 한정된 계급으로 좁히는 여러 가지 특수한 도덕의 규칙이나 요구가 어떻게 하여 발생했는가에 관하여 나는 지금까지 상세하게 얘기해왔는데, 이를 결론짓는다면, 즉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을 하나의 법칙이라도 해도 좋을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요약한다면, 지금까지 설명해온 역사관은 결국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회의 모든 질서는 그 사회현상 그 자체를 도덕률로써 제시하던가 아니면 사회를 유지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에 의해서 사회의 성립조건을 강화하고 또는 완전히 지키는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공식화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는 그 특수한 삶의 이해관계에 대립하는 것, 사회의 토대로서의 제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모두 부도덕한 것이며 부당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둘째,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각각의 미세한 것에까지도 그대로 적용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결코 동질의 단일한 것이 아니라 항상 서로 모순된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계급이익에 따라서 모든 도덕규칙을 다양하게 변경하거나 개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이익에 기초한 사고방식으로 나타난 것은 모두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반하는 것은 모조리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이러한 인식을 하나의 정의로 종합해보면 도덕이란 결국 각각의 특수한 계급이익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모든 삶의 이해관계에 기초를 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현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상의 것은 실로 법칙 그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제 우리들은 도덕률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이나 의회에 의해서, 예컨대 루터나 루소, 칸트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 군주나 도덕이라는 가면을 쓴 장로회, 제국의회에 의해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물이라든가 비밀의회라는 것은 기껏해야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을 하느님의 계시라는 형태로 과장하여 공표하던가 아니면 형식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비준할 뿐이다. 그러므로 "루터 이래로", "루소 이래로", "칸트 이래로", "어떠어떠한 결의 이래로"라고 말하는 경우 세상 사람들이 그 인물이 공표한 것이나 의회가 비준한 것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인 경향의 출현 또는 시작을 발견하는 한 그 견해는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결코 원인은 아니다.
도덕에 대한 특정한 견해나 그것에 따른 사회상태의 연관 관계, 성행동의 특수한 현상과 그것에 따른 사치 현상의 연관 관계를 손쉽게 증명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경우에 대하여 말하자면 결코 용이한 것이 아니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작용이라는 것은 언제나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사회와의 연관 관계는 대개의 경우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는 아주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 진정한 원인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견해나 사고방식은 하나의 관습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나 사고방식을 형성시켰던 당대 사회의 토대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새로운 토대가 또다른 도덕적인 기준이나 요구를 필요로 하고 있는 데도 관습만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삶의 이해관계를 이렇게 소위 법률적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사실의 작용과 본질에 대한 사회의 인식 정도, 즉 세상 사람들의 인식 정도에 의해서 좌우되기도 하기 때문에 특정한 민족이나 계급의 요구에서 발생한 견해나 사고방식이 관습 속에 그대로 편입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견해와 사고방식은 전통에 의해서 또는 사회라는 유기체를 관통하고 있는 각 시대의 동력의 크기에 의해서-때로는 빨리, 때로는 늦게-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인간이 정체된 시대를 살고 있었는가, 즉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었는가, 아니면 모든 분야에서 인류를 혁신적으로 변혁시켜 가는 혁명적인 정열에 가득찬 시대를 살았는가도 중요한 점이다.
물론 이러한 모든 사정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일반적인 성행동과 사회적인 요구 사이에 긴밀한 연관 관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정은 사회적 요구에서 성행동에 이르는 다리, 이 두 가지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다리의 발견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도 명심해야 한다. 도덕률이란 특정한 사회적인 요구에 입각한 사고방식, 즉 사회를 지탱하는 경제적인 토대의 상부구조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적인 주요 문제에 대해서 이 연관 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 증명을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두 가지의 요점을 특히 분명히 해두고 싶다. 세간에서는 대개 일반적인 도덕률과 단순한 예의범절을 구별한다. 세상 사람들의 예의범절이란 대개 도리에 어긋나는 관습의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귀부인이 셔츠 하나만 걸친 차림으로 남자들 앞에서는 것은 무례하고 아주 수치스러운 행위였지만, 바로 그 귀부인이 나체 이상의 나체, 즉 자신의 몸의 골격을 정교하게 드러내는 복장이나 가슴 전체를 노출시키는 상의, 몸에 착 달라붙는 끈적거리는 욕의 차림으로 수많은 호색한들 앞에 나서더라도 그것은 전혀 무례한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보여주는 모순을 세상 사람들은 도리에 어긋난 관습으로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서 하나의 모순을 발견하는데 거기에는 확실히 모순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모순에 불과하다. 이와 유사한 사실 가운데서 도리에 어긋나는 모순을 발견하는 사람이나 이러한 "관습"을 단지 우연하게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복장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법칙의 깊은 비밀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로 모순된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 속에 있는 경향의,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다양한 요소이다. 나는 이것을 <커리커춰에 나타난 여자>라는 책의 "복장"이라는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서로 모순된 두 가지의 것은 전체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른바 "관습"과 일반적인 도덕률 사이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하나의 예의범절이라는 것은 결국 조화를 이루어 전체를 구성하는 일반적인 도덕률의 한 구성분자이다. 도덕관의 기원에 관한 나의 정의는 두 가지 사실의 상호관계나 특수한 본질을 확실하게 설명해 준다. 즉 모든 시대에 발견되는 다양한 예의범절의 개념속에는 소위 거대한 일반 도덕률이 특수한 계급 도덕으로 자세히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각 계급은 당연히 그것은 각각 다르게 표현한다. 계급에 따라서 항상 그것은 잘게 나누어지거나 세부적으로 정정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근본적으로 바뀌어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얘기하기로 한다.
이상의 것이 두 가지 요점 중의 하나이다. 이 점은 어느 정도 확실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여러 가지 도덕률은 일반적으로 적용되지만 자세한 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러한 도덕률은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와 같은 사실로부터 모든 계급의 이익을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의 원칙이 있다거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덕의 표준이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류이다. 우리는 그 사실로부터 바로 앞에서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단 된다. 즉 특정 계급의 특수한 도덕률은 계급연대나 계급차별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계급지배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며 따라서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보도로서 항상 휘둘러지는 수단이다. 각 시대의 지배계급은 여타의 계급을 향해 자신들의 특수한 지배이익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라고 강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지배계급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이러한 것들의 표준을 제시했다. 이러한 강제의 행사는 기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기묘한 것이 아니다. 지배계급은 다른 계급들을 육체적으로, 다시 말하면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신적으로도 지배한다는 것, 따라서 지배계급은 모든 정신 분야에서도 다른 계급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견을 강요한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계급의식이 아직 충분하게 발달하지 않고 다라서 사실이 조작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아직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는 오직 지배계급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만이 일반적인 규칙이자 당위적 규칙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어떤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많이 가지는 것이 미풍양속으로 간주되고 영원불변의 고귀한 도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풍양속은 어떤 시대에는-그것도 그것이 널리 권장되던 시대에는 이상하게도 항상-노동력이나 병사, 납세자 등을 필요로 하는 지배계급에게만 가장 중요한 경제적 이익이 되었다. 물론 지배계급 자신들만은 아이들이 많아야 한다는 규칙에 별로 속박되지 않아도 좋았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에 있어서만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은 무례한 요구라는 식으로 뻔뻔스럽게 그것을 거부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 모랄의 규칙이 왜 남자와 여자에게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는가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 계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있는데 이와 같이 경제적인 원인을 토대로 하여 성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 즉 남자나 여자 한 쪽에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이데올로기 혹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주요한 점에 있어서 특수화된 성의 이데올로기도 존재한다. 그래서 남자에게는 일부다처제의 생활이 허용되는 데도 여자 쪽은 일부일처제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이 왜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내가 앞에서 전개했던 법칙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법칙은 이러한 상황의 역사적인 틀도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를 토대로 하고 있는 일부일처제의 출현과 동시에 남녀라는 계급차별-역사에 있어서 계급차별의 최초의 형태-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왜 권리와 의무가 남자와 여자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은 것을 여자 자신이 "자연의 질서"로 간주하고 또 사물의 당연한 상태로 간주하는가, 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것은 결국 지배계급으로서의 "남자"가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배하고 있는, 즉 계급으로서의 "여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여자들은 19세기 말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계급의식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 이후로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의 발현으로서의, 성 모랄 분야에서의 남자만의 권리와 여자만의 권리라는 두 가지 권리의 법칙도 비로소 철저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하고부터 3,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이러한 비판에 반발하여 지금까지의 상태를 사물의 "자연스러운" 그리고 따라서 "영원불변의" 제도로 보는 남자가 많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건은 바로 남자의 계급지배가 얼마나 튼튼한가를, 즉 남자의 계급지배가 지금도 그 근저에서부터 뒤집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앞에서 법칙 그대로이다라고 했던 건에는 내가 제시했던 제1의 요소와 제2의 요소를 토대로 하여 제 3의 결로나 즉 내가 "서문"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다음과 같은 논의가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는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발전해가며 또 경제조직이 변화해감에 따라 계급이익과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계급구성도 변화해가기 때문에 각 시대는 다른 도덕률을 받아들이고 다른 도덕의 표준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변화는 성 모랄의 규칙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것과 정반대의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또한 이 사실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내가 서문에서도 밝혔고 그후에도 여러 번 언급했던 말,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덕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와 도덕의 표준 사이의 이러한 관계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실해진다. 즉 사회토대의 변혁이 근본적이고 혁명적일수록 공적인 도덕률의 변혁도 근본적이고 혁명적일수록 공적인 도덕률의 변혁도 근본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15세기, 18세기, 19세기에서처럼 완전히 새로운 경제원칙이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자 일체의 도덕률은 그와 동시에 송두리째 변혁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군주의 "씨받이 남자"의 실례에서도 드러났듯이 어느 시대에나 예외적인 욕망에서 발생한 개인적인 요구도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귀띔해두고 싶다. 이러한 개인적인 요구도 그 개인적인 사정이 없어짐과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성 모랄의 표준은 특정한 시대의 사회상태를 토대로 하는 욕망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상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먼 옛날은 풍기가 매우 안정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열쇠도 분명히 이 안정이라는 사실 속에 숨겨져 있다. 옛날에는 생산 관계의 변화의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사회생활 그 자체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동일한 상태를 유지했다. 따라서 특정 시대에는 소시민계급의 "방정한 품행"도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었다. 그와 같이 장기간 소시민계급의 품행이 방정하게 유지되었던 것도 역시 역사적인 필연이었다. 각 시대에서 도덕의 부패가 아주 장기간 계속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사물-이 경우에는 도덕의 표준-도 역시 스스로의 논리를 갖고 때로는 스스로의 길을 제멋대로 달려감으로써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바로 전에 일어났던 변혁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논의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논의는 결국 당시의 풍속의 역사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나고 이 때문에 결과가 오히려 여러 가지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 다시 바꾸어 말하면 옛날에는 경제가 정신을 규정했지만 오늘날에는 정신이 경제를 규정한다는 주장이다.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면 이러한 가설은 참으로 잘못된 의견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 바로 또 다른 사실, 즉 도덕의 이상이 사회의 발전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이라는 것도 현실에서는 의외로 작은 것이라는 사실에 맞부딪치게 된다. 현실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성행동의 안정기에서 점차 성장해온 도덕의 표준은 경제상태가 안정됨에 따라 사실로 굳어져 간다. 이 때문에 도덕은 일반적인 법칙처럼 보이는 관습으로까지 발전한다. 즉 관습을 뒷받침하는 견해와 사고방식은 독립함으로써 이제는 경제적 발전에 의해서 야기된 사회의 끊임없는 진보를 쫓아가지 않게 되고 자신만의 독립된 터전을 영위하게 된다. 사회의 토대가 오래전에 변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신만의 터전은 대개 오롯이 지속된다. 그 때문에 전혀 다른 사회의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도덕의 많은 유물들이 각 시대 속에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전형적인 예는 현대에서 특히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들어가면 사회를 비옥하게 하는 도덕의 힘은 언제나 소멸해버린다. 도덕은 스스로가 시대의 커다란 경제적인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동안에만, 즉 도덕이 사회의 진정한 삶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동안에만 사회를 비옥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덕이 그러한 힘을 잃어버리고 사회의 진정한 삶의 이익에 배치된다면 그 도덕은 더 이상 사회를 개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꾸어 말하면 앞에서 역설한 대로 경제, 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덕률을 요구하는 생산의 발전에 어울리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드디어 사회발전의 지렛대 역할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이 모순된 상태는 역사에서 계속해서 유지되어 마침내 변화된 삶의 내용이 거대한 모순에 부딪히면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대립은 혁명기에 달할 때까지 계속 역사 위에서 유지된다. 이 혁명기야말로 모든 시대에서 낡고 생명력이 없는 도덕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완전히 새로운 도덕이 탄생하는 시기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점진적으로 요구되는 도덕의 필연성이 현실 속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법률상의 비준을 요구하는 시기이다. 이 혁명기를 계기로 하여 똑같은 상황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 가르쳐주는 모습이다. 나의 견해는 사회에서의 이상적인 도덕의 힘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힘을 올바른 길로 되돌려 놓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가장 뒤에 설명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변혁기가 인간의 역사에서 얼마나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로부터는 여기에서 더욱더 추구해야 할 문제를 지향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인식의 열쇠가 나타난다.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가 크게 동요하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발효하고 도처에서 새로운 것이 준비되기 시작할 때야말로 변하지 않는 도덕관 따위란 결코 발붙일 수 없는 때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에는 성행동에서도 모든 것은 이른바 "북적거리게" 되고 전체 문명을 지탱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지렛대로도 움직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근본률이 무시되어 그것에 대한 끝없는 모독이 맹렬히 시도된다. 간통의 급속한 증가나 그와 유사한 사건들은 물론이고 특히 육욕의 지나친 난무가 여기저기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확산되는데 이러한 것이 모독의 내용들이다. 이 어지러운 난무에 의해서 사회적 본능이나 덕성은 모두 구겨지고 자연의 한계는 깨지게 되며, 거기다가 인간은 이 한계를 일부러 깨트리는 데에서 쾌감을 추구하고 또 쾌감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터무니없는 상황은 무엇보다도 개량 또는 혁신을 추구하는 계급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반적인 부패의 크기와 범위는 오로지 사회의 어느 계급이 그 시대에 개량 또는 혁신되는 추세에 있는가에 의해서 달라진다.
때로는 모서리가 날 정도로 우리는 압박하는 이 현상은 설명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현상은 계급지배가 신조로 삼고 있는 법칙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계급지배가 어느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 내무에서 반드시 이러한 피할 수 없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계급지배는 특정한 하나의 도덕관을 필사적으로 방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했듯이 특정한 도덕관을 방어하는 것이 계급지배에는 매우 중요한 지배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안정적이 된 경제적 방법을 대표하고 유구한 사회적 조건 위에서 자신들의 모든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보수계급도 마찬가지이다. 보수계급은 서로가 똑같은 이해관계에 있기 때문에 변환된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수정을 강인하고도 철저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것은 결국 다른 계급을 위한 것이며 이론적으로만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보수계급도 개인적으로는 변화된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역사발전에서 생긴 거의 대부분의 수확의 달콤한 즙을 빨아 먹는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마침내 특정한 발전단계에서는 역사의 상황 여하에 따라 어떤 때는 위선적으로 또 어떤 때는 노골적인 철면피로 변하는 이중의 토대를 가진 유명한 도덕이 발행한다. 위선의 경우에 해당되는 고전적이 실례는 19세기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점잔빼는 신사숙녀들의 유형을 공공도덕의 모범으로까지 치켜세웠다. 노골적인 철면피의 경우에 해당하는 고전적인 실례는 18세기 봉건제도의 붕괴과정이 보여준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러한 상황은 프랑스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절정에 이르렀다. 위선과 노골적인 뻔뻔스러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결과야 어떻든 결국 완전히 동일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완전히 동일한 전제의 결과, 즉 전통적인 도덕과 삶의 진정한 사회적 상태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붕괴 일보 직전에 이른 계급이 이렇게 신사 숙녀인 체 점잔을 빼고 몰래 즐겼던 육욕적인 방탕은 앙시앵 레짐에서 난무했던 저 육욕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반사회적이었고 무절제한 것이었다. 둘 모두 에로틱한 향락생활에서는 아주 똑같은 방탕한 기술과 장기를 발달시켰다. 근대 영국이 남긴 추잡한 연대기는 에로틱한 방탕의 장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즐거운 낙은 여자가 영원히 한 상대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며 물실호기 모든 남자의 쾌락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앙시앵 레짐하에서는 프롱사크 공이나 아르트와 백작 등이 던졌던 쾌락의 그물, 즉 탕음난무(Orgie)는 모든 탕아를 훌륭한 모범생으로 치켜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탕음난무에서는 모두 자신의 정부를 외간 남자의 공상에 넘겨주는 것이 고등 인간인 귀족의 고상한 풍속이었다.
파멸 일보 직전에 있거나 붕괴 일본 직전에 있는 계급에서 발견괴는 일반적인 위선과 노골적이 뻔뻔스러움은 그 파멸이나 붕괴와 걸음을 같이하여 그 계급의 특수한 이익이 난폭하게 춤추는 퇴폐현상 중에서도 가장 대담한 형태를 취한다. 그것이 대담하면 할수록 그리고 다른 계급으로부터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방해가 적으면 적을수록, 즉 국가와 사회에서 그들의 권력이 독재적일수록 사회적 덕성과 동일한 의미의 사회적 본능이라는 저항은 이러한 계급으로부터 점점 사라져간다. 신사숙녀연 하면서 노골적인 뻔뻔스러움이 설치는 상황이 어느 시대와 나라에서 판을 치게 되는가는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거처럼 우연이라는 것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그러한 것의 출발점이 되는 다양한 역사의 상황에 의해서 좌우된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와 같이 19세기 영국에서도-여전히 이 두 나라의 흥미있는 실례를 예로 들지만-불로소득으로 얻은 거대한 부가 결국 이 육욕적인 방탕의 토대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이 부는 어디까지나 거짓으로 얼버무린 위선이라는 외피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사회의 토대는 가장 발달된 근대적 입헌정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대중의 감시와 비판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앙시앵 레짐의 프랑스는 그 토대가 영국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토대는 극단적인 절대주의였기 때문에 일체의 진보적인 감시나 공개적인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한편 부르조아 계급은 겨우 그 맹아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에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은폐를 위한 외피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적 덕성을 닥치는 대로 짓밟아버렸던 특수이익, 점점 새롭고도 파격적인 향락생활만을 추구하려고 했던 특수이익은 대중의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설쳐댔고 스스럼없는 뻔뻔스러움도 제멋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과 시대가 보여주었던 도덕의 형편없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 말고도 지배계급은 언제나 지배계급이 쥐어짜던 계급, 사회의 각 시대의 침전물, 동물화 되어버렸던 대중 가운데서 자신들과 아주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이처럼 억눌렸던 계급에서도 완전히 지배계급과 똑같이 일체의 것을 유린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직 조심성이라는 것이 발달해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생활고 때문에 일체의 인간다운 저항이 묵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예로는 룸펜프롤레타리아라는 가장 하층계급이 귾임없이 보여주었던 형편없는 도덕에 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풍양속"이라든가 "우리나라의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어떠한 모습인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것에 관해서는 수많은 실례가 있다. 바로 이 시기에 중부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 거짓 맹세에 대한 배심재판이 열렸다. 당시의 일간신문은 공판기록을 다음과 같이 게재하고 있다.
38세의 기혼자인 S촌의 L은 작년 여름에 R촌의 지주의 집에서 곡물 수확 노동자로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하녀 M과 하녀 방에서 정을 통했다. 그러나 임신을 한 하녀 M은 같이 더부살이하고 있는 하인 F에게도 위자료를 요구했다.
F는 M에게도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우겨댔다. 그런데 L은 법정에서 선서를 한 뒤 이 사실을 부인했다. 사실심리에서 하녀는 L이 머슴 F와 함께 자주 한밤중까지 자신의 옆에서 잠을 잤다고 증언했다. 그 하녀의 방에는 또 하나의 침대가 있어서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다른 하녀들이 역시 자신의 정부들과 동침을 하고 있었다. 이 22세의 하녀는 L과 K 외에 F와도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하녀 M은 그때까지 이미 여러 번 사생아를 낳은 적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처녀가 자는 방에 몰래 잠입하는 것은 농촌의 풍습인가라고 변호사가 물었을 때 이 하녀는 증인으로서 "그런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습인걸요. F로부터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는 꾀를 L이 나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주었어요"라고 대답했다. 농노 K도 L과 하녀 M과의 관계를 증언하고 자신도 L과 함께 하녀 M과 몇 번이나 관계를 가졌다고 증언했다.
바로 이 얘기가 공판에 관한 간단한 기사이다. 이 기사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가장 고귀한 것과 가장 비천한 것은 결국은 동일한 것, 즉 "정부를 서로 바꾸는 것"을 좋아하며 양자의 차이란 세련됨의 정도일 뿐이다.
독자 중에는 위와 같은 기사로 증명된 이러한 사건이 예외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사람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근시안일 것이다. 바로 하녀가 "그런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습"이라는 몇천 배 증빙 능력이 있는 진신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왜냐하면 18세기에서의 쾌락의 난무가 그 당시 프랑스의 역사적인 상황의 필연적인 결과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바와 똑같이 이러한 성적이 문란은 농촌도덕을 지탱해주던 토대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귀함과 비천함이라는 두 가지 현상은 보기에 따라서는 동일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도덕의 표준의 기준에 대해서 설명할 때 펼쳤던 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 현상은 아주 정반대의 결과에 해당한다. 앙시앵 레짐의 요란한 방종은 사멸해 가는 계급의 부패 현상이 있지만 농촌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서 나타난 동일한 현상은 결국 이 계급이 아직 계급의식에 눈도 뜨지 못하고 계급적인 사고방식이 손톱 끝만큼도 형성되지 못하는 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부패 현상의 하나에 불과했다.
여기에서는 계급의식이라는 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계속 이 개념을 사용해왔다. 계급의식이라는 것이 사회발전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연구해보면 우리는 이 방면에서도 지금부터 논의해야 할 논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특수한 계급도덕은 가장 중요한 계급여대수단 중의 하나이며 명확한 연대성을 띤 슬로건, 즉 사람들이 그 밑에 모이게 하여 단결시키는 슬로건이라고 설명했다. 이 특수한 계급도덕은 새로운 계급적 탄생과 함께 점차 형성되어간다. 계급의 발전은 계급이 스스로를 계급으로 느끼기 시작하고 스스로의 특수한 이익을 깨달아 마침내는 스스로의 특수한 요구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 계급은 계급의식에 눈을 뜰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시대의 중요한 이익을 반영하는 이른바 일반적인 도덕의 표준이 비로소 계급도덕으로 구별된다. 이것은 완전히 논리적이다. 그런데 이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이 더욱더 발전하면 계급투쟁이 발생하게 된다. 사회의 태내에 새롭게 탄생된 계급이 계급의식을 갖게 되면 이 새로운 계급은 항상 다른 모든 계급들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주장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계급은 그렇게 노력함으로써 기존의 지배계급을 그 특권적 지위에서 추방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스스로 지배계급의 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한다. 이리하여 항상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과 함께 계급투쟁이 역사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창조하는 이와 같은 힘은 지금 설명한 이유로 말미암아 역사를 전진시키는 또 하나의 힘이 된다. 또한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은 언제나 인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도덕의 지렛대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의 계급도덕을 훌륭하게 향상시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 발돋움하는 계급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는 한 그들의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도덕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의 도덕까지도 훌륭하게 향상시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계급동료들의 도덕수준을 한층 높은 단계로 향상시키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신흥계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을 억압하고 또 지배하는 계급이 대표하는 지배의 정당성을 부도덕한 것으로-물론 이것은 성 모랄에만 한정되지 않고 도덕 일반도 포함된다-의식하고 이러한 시각에서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공격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요구는 정의라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신흥계급은 도덕의 분야에서도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확한 대립은 대가의 경우 바로 의식상의 대립으로 발전하다 이것이 의식상의 대립으로 발전하는 순간부터 신흥계급은 자연히 조직적인 비상을 시도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도덕적인 부분에서도 한층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내게 되어 자주 지배적인 도덕관에 노골적으로 반항한다. 이리하여 특수한 도덕은 최고의 강령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런데 신흥계급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의 지배를 부도덕한 지배라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정의라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행위에서까지도 진정한 도덕을 대표하려고 한다. 그 결과 신흥계급은 자신들로서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청렴결백이야말로 최고의 조건이라고 모두에게 시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 있어서의 한층 높은 도덕성은 항상 그 시대의 신흥계급, 즉 기존의 권력과 싸움으로써 낡은 사회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 새로운 계급에 의해서 대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길을 밟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즉 드높아진 정치의 이상은 항상 신흥계급의 편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논리가 된다. 따라서 드높아진 정치의 이상은 언제나 드높아진 일반적인 도덕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분야에서는 놀랄 만한 정도의 크기로까지 방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체의 사상과 감정이 인간의 최고의 목표 속에 내걸어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항상 순수하게 되고 또 품위가 있게 된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에 대해서 역사적인 증명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 증명은 계급으로서의 근대 부르주아의 해방시대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 증명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즉 17세기의 영국과 18세기의 프랑스, 19세기의 독일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사멸해 가는 봉건제도와 싸웠던 시민계급이 매우 높은 도덕성을 대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신흥계급이 성 분야에서도 예컨대 금욕을 신봉하고 자유분방한 연애의 모든 형태를 엄금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 해방시대에서는 분명히 결혼과 가족에 대해 근엄한 의견을 선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 가운데는 한층 향상된 도덕성이 일부 정확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영원히 적용되는 도덕의 표준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기준은 아니었다. 이와 동일한 현상은 사회의 발흥과 몰락도 증명하게 된다 이 점에 관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16세기에 복장으로써 임신부를 가장했던 것은 그 시대를 풍미한 창조력의 반영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제 2제정시대의 복장의 이와 동일한 형태의 가장은 오히려 붕괴 일보 직전에 있는 사회가 보여준 세련미의 반영이었다. 이것은 그 어떤 것이 어떤 계급에서는 부패한 도덕의 산물인 무질서한 성관계의 결정적인 수단이 되지만 반면에 그것이 다른 계급에서는 향상된 도덕의 성숙의 산물인 무질서한 성관계의 결정적인 수단이 된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신흥계급이 사회에서 한층 향상된 도덕을 대표하는 것은 이 하나의 이유, 즉 자신의 진영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교육활동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 즉 신흥계급에서는 항상 어떤 사회적 요구를 극히 대담하게 선언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도덕 활동이라는 것은 결국 언제나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의 반영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의 재구성의 중심이 된 계급은 성행동에 있어서도 그 시대의 최고의 발전단계로서의 도덕의 필연적인 가장 진보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신흥계급은 소위 고급 빵가루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른 계급보다-더 영리함과 동시에- 더 도덕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논리가 그들의 편이었기 때문에, 즉 역사적인 논리에 최후의 결정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도덕적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이유가 하나가 되어 신흥계급의 특수한 도덕을,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사회의 전체 도덕의 진보를 위한 지렛대로 만들었다.
4) 미래의 전망
나는 앞에서 인간의 문명사회의 일반적인 성행동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모습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의문, 즉 세상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본질에 있어서 과거에도 불변적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불변적일 것인가, 혹은 근본적인 차이가 증명될 수 있는가 따라서 그것에 평행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어떤가에 대한 의문을 연구하여 먼저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의문에 대해서는 이 책이 허용한 범위에서도 충분히 대답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첫 번째 의문이 해결되면 장래에도 그러한 원칙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라는 두 번째 의문이 생겨나게 된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첫 번째 의문의 해결에 필요했던 페이지 수의 절반으로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대답 속에 확실하여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상태-동일한 내부법칙을 토대로 한-가 과거에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에도 새롭고 더 향상된 형태가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현대가 화석화된 것은 아니다. 생산 관계의 발전단계, 즉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인 요구를 어느 정도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가의 정도가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결정하며 따라서 사회의 각 시대의 성 모랄도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증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도덕 활동 및 각 시대에 적용되는 기준의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흐름은 경제발전에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먼 앞날의 흐름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필연적이 흐름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제발전의 대략적인 미래상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경솔한 예언자의 희극에 구애받지 않고 미래의 도덕의 표준을 미세하게 변화시켜나갈 방향이 어떠한 것인가를, 즉 이 근본적인 변혁이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설명할 수 있다. 현대의 발전이 한층 높은 도덕성을 향하여 나아감과 동시에 현대의 발전은 미래에, 즉 현대와 과거의 흐름이 자연법적인 필연성을 갖고 결국 실현될 수박에 없는 미래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까지 높은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시대의 발전은 한층 향상된 도덕성을 보이고 있다. 중세적 반동의 현상 유지파들에 의해서 이러한 주장에 대한 완강한 거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의 발전이 더욱 향상된 도덕성에 있다고 되풀이하여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이것은 진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어떤 시대의 도덕수준의 높이를 비판할 경우에는 절대적인 "부도덕"이나 절대적인 "도덕"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도독수준의 높이를 비판하는 데에는 그러한 것보다는 오히려 시대의 흐름의 방향과 중심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시대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사람이 현대의 도덕의 부패상을 말할 때 극히 소수의 비교만을 끄집어내어 프랑스 제2제정이라는 퇴폐한 시대는 에로틱한 향락이나 방탕 생활에서 오늘날에 비하여 덜 세련되어 있었다고 증명하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다. 그러한 사람은 이에 대해서 모든 분야에서 수백 가지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현대의 도덕성은 그러한 면에 있어서도 역시 훨씬 높은 경지에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높다는 것은 도덕적 저항의 운동방향이나 그 범위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저항의 운동방향은 과거에는 결코 현대처럼 도덕의 한층 높은 형태라는 방향을 향하여 의식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최고의 사회도덕을 선전하는 여러 가지 저항은 사회적인 의무를 파괴하는 이기심을 현대와 같이 맹렬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날의 민중은 일반교양과 정치도덕 수준의 높이로 볼 때 과거의 역사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어 있다. 과거에는 세계의 발전에 대한 민중의 인식이 오늘날처럼 깊지도 않았고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민중의 요구가 오늘날처럼 진지하지도 못했다.
바로 이러한 사실 속에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숨겨져 있다. 더구나 이 미래는 일부일처제가 언젠가는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진리가 될 것이라는 미래이다. 사회의 모든 인간에 대하여 남자와 여자라는 두 인간을 결합시키는 수단으로서의 개인적인 사랑이 가장 추한 이해타산을 숨기기 위한 꾸며낸 말이 아닌 것이 될 때, 인생의 올바르고 유일한 요구와 법칙으로 자리하는 사회조직이 탄생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일부일처제라는 진리도 점점 현실화되어 간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기품있는 사실, 즉 인간은 역사의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역사의 시작, 진실로 영광된 역사의 제1장 제1페이지에 서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5) 이 책의 분류에 대하여
내가 사회생활의 흐름이 내부법칙으로서 제시했던 여러 가지 원인들로부터 앞에서 전개한 과학적인 관점에 선, 성 모랄에 관한 모든 관찰의 구조와 역사적 분류에 관한 여러 가지 조건, 따라서 각 시대의 도덕활동 및 도덕의 표준에 관한 여러 가지 조건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 조건들은 어떠한 분야를 서로 결합시키면 좋은가, 어떠한 분야를 일정한 역사관 아래에 결합시켜야만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나누면 좋은가를 가르쳐 준다.
각 시대와 사회의 생산력의 크기가 그 시대의 전체적인 생활의 흐름을 결정하고 따라서 또한 성적인 분야에서의 각 시대의 도덕의 표준을 결정하기 때문에 사회으 토대가 동일한 경제적 발전단계 위에 구축되어 있는 곳에서는 결국 도덕의 표준은 본질적으로는 항상 동일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경제적인 토대가 변했기 때문에 사회의 토대도 변하게 된 곳에서는 도덕의 표준도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후나 언어, 정치적인 국경 등이 도덕활동의 차이점을 만들어 내거나 각 사회와 국가의 도덕 활동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회나 계급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발전의 정도가 도덕 활동의 다른 모습이나 동일한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도덕의 표준은 항상 동일한 경제적 발전의 정도를 나타낸다. 프랑스의 봉건제도에 적용되는 도덕의 표준은 독일의 봉건적 토대에 기초하고 있는 도덕의 표준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동일한 모습은 실제 역사에서도 항상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도 참으로 명확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의 각 계급의 도덕의 표준은 서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것을 다른 나라의 동일한 계급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계급구성이 동일한 것은 언제나 생산력의 크기가 동일한 결과이다. 어떤 경제원칙의 선이 분명하게 그어질수록 이 상태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그것은 현대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고 그 때문에 그것을 분석하는 일은 매우 쉽다. 오늘날의 영구의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의 표준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의 표준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따라서 각국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지만, 그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의 표준은 영국의 소시민 및 프롤레타리아의 성 생활을 결정하는 도독의 표준과는 원칙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후자는 각국의 소시민 및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의 표준과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프랑스 소시민의 성 모랄과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성 모랄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생산관계의 발전단계가 동일한 경우에서는 프랑스 소시민과 독일의 소시민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기후나 언어, 정치적인 국경이 도덕의 표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생활조건만이 그 차이를 만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국을 동일한 경제적 발전단계의 토대를 기준으로 서로 연결시켜, 예컨대 봉건제도 하의 프랑스와 봉건제도 하의 독일, 자본주의 하의 영국과 자본주의 하의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식으로 각국의 도덕의 표준을 공통된 틀 속에 집어넣어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다. 나는 항상 원칙적으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으로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각국을 비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그 연관 관계는 더욱 명확해진다. 만약 우리가 각국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를 서로 비교할 수 있다면 실제로는 그때에야 비로소 본질적인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각국에서의 본질적인 것이 어디에 있는가는 비교를 통해서 비로소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각국의 각 시대의 도덕의 표준이란 언제나 각국의 전통, 발전의 속도, 경제원칙의 지배에 대한 통일의 강약 등 여러 가지 요소의 크기에 의해서 형성되거나 그 영향을 받는 합성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각국에서의 이러한 요소의 크기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르며 따라서 서로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게 살펴보면 그 합성물도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각 시대의 원칙이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고 또 확실하게 관철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영국은 절대주의 프랑스의 유산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를 더욱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러한 영향이 대개는 어제나 부차적인 것이며 항상 미세한 점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칙적인 본질의 커다란 테두리는 언제나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 두 번째 사실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각국의 동일한 단계를 연결시키는 공통의 틀을 결코 역사관의 기계적인 공식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요컨대 우리는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발전의 생생한 윤곽의 성격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과거를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재구성하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최상의 조건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하나로 연결시킴으로써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윤곽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윤곽일 뿐 하나하나의 모습에 특유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명암이 아니다. 그러한 부분은 전문적인 특수연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까지 제시한 여러 가지 이유를 토대로 해서 우리에게 도덕 활동의 역사를 유럽 문명 세계의 여러 나라에 동시에 펼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시 이 방법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주로 다루어진 범위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에만 한정했고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터키와 같은 반아시아적 국가 및 헝가리와 그 외의 농업국은 제외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상과 같이 각국을 하나의 공통된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면 이러한 시각은 또한 논의의 출발점과 분리점을 결정해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근대에서부터 시작할 경우 맨 먼저 다루어야 할 내용은 이 새로운 경제원칙이 어떻게 유럽의 문명사를 관통하여 오늘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단계가 된다.
이 때문에 이 책의 자연스러운 구성은 다음과 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중세 자연경제의 붕괴기와 상업자본의 발흥기, 즉 쭌프트 시대와 시민계급지배의 시대이다. 두 번째는 새로운 경제력과 옛 봉건세력의 투쟁시대로서 군주가 신흥계급의 도움을 받아 봉건 귀족계급을 압박하고 두 계급의 지배자가 되었던 절대주의 시대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경제력으로서의 봉건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었던 부르주아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자본가가 경제적인 지배력과 정치적인 지배력을 장악하게 된 나라도 있었지만 융커 계급이 자본가의 근위병으로서 정치적인 지배력을 갖게 된 나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구분이 바로 화폐경제 발흥 이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경제적 발전의 단계이며 또한 그것의 정치적 표현형태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료도 이러한 시기에 맞추어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3권 번으로는 4권으로 나눈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세 개의 커다란 시대를 각각 1권으로 묶었으며 세 개의 역사적인 발전단계를 구별하기 위하여 각 권은 그 자체로서 독립된 형태를 취하도록 구성했다. 따라서 각권 제목도 르네상스, 색의 시대, 부르주아의 시대라는 명칭을 붙였다.
세 권은 각 권이 완결된, 따라서 독립된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세 경제시대의 하나하나는 또한 각각의 독자적인 주기 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14세기에서부터 16세기, 17세기, 18세기, 19세기라는 식으로 확실한 연대구분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연대별로 기술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특히 강조해둔다.
연대별이라는 구분은 전적으로 기계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비역사적이다. 각 시대는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전혀 다른 두 시대의 전성기가 공존하고 있는 경우까지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는 절대주의시대가 이미 벌써부터 그 전성기의 내리막길에 있었을 때에 이웃 네덜란드에서는 북유럽의 르네상스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처럼 분명히 시대의 흐름에 뒤져 있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뛰어난 창조력에 의해서 부르주아 시대가 일찍이 건설되고 공업이 이미 그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을 때에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아직도 봉건주의가 계속 수십 년 동안이나 어리석은 방종을 연주하고 있었다. 시대나 국토에는 대개 경계선이 그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 경계를 간단히 밝혀두어야 하지만 지금은 제1권(번역으로는 제2권)의 내용이 되는 첫 단계의 범위와 경계선을 결정하기로 한다.
르네상스는 보통 15세기 중반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이전의 시기는 모두 중세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계이다. 그리고 중세는 보통 16세기 말경에 그 막을 내린 것으로 본다.
이러한 연대규정에 대해서는 르네상스의 정의를 고딕 시대와 바로크 시대를 경계로 하는 문예시대의 범위로만 한정시킬 경우에는 별다른 반대가 없다. 그러나 이 정의를 광의의 의미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해석하여 르네상스를 참으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추진력이 분출하게 되었던 시대로 간주한다면-르네상스는 지금까지의 생각으로는 하나의 문명에 대한 정의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그리고 각각의 나라들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이 새로운 원칙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든 나라를 관찰의 범위 안에 넣는다면 르네상스 탄생의 연대는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막이 내린 연대는 최근대에 이르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결국 이 정의 속에 본질적으로 동일한 모든 것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연대의 상한선을 이탈리아로 잡는다면 근대까지의 하한선은 네덜란드와 영국이 된다.
우리가 예술사적인 명칭으로서만이 아니라 광의의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르네상스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이 르네상스의 정의를 확장시키는 것이 논리적일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더욱 상세히 설명할 예정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아주 간단히 귀뜀해두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나는 문명사적으로 본 르네상스란 유럽 역사에서의 전혀 새로운 경제조직의 등장과 그 승리, 즉 앞에서 설명한 대로 화폐경제의 발흥과 기존 자연경제의 철저한 극복, 그리고 화폐경제의 최초의 팽창을 의미한다는 선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정치형태의 관점에서 보면 이 단계는 시민 세계의 탄생 및 소년시대, 청년시대 따라서 도시 부르주아의 탄생 및 그것의 최초의 황금시대였다고 해도 좋다.
도시 부르주아의 발생이 수공업, 즉 쭌프트의 지배를 등장시켰다면 도시 부르주아의 최초의 황금시대는 상인의 지배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업자본에 의한 최초의 자본축적이 나타났고 따라서 자본의 최초의 세계사적 팽창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힘의 논리가 이와 같은 보조로 발전하지 못했던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할 정도까지 발전되면서 이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이 단계에서는 당연히 경제력의 여러 가지 관계의 변혁과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절대주의시대로의 발전 속에서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이 연대의 기간과 이 연대에 나타난 현상의 강도는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유럽 민족의 생활사에서는 결국 동일한 발전기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대는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르네상스의 개념 속에 통합시킬 수 있다.
위와 같은 발전을 시대와 국가의 경계라는 관점에 의해서 보면 그러한 발전은 중부 이탈리아 및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이미 13세기초에 활발한 기세로 나타났다. 중부 이탈리아 및 북부 이탈리아에서 도시에 영지를 갖고 세계에 군림하던 교황의 지배권에 새로운 경제력의 탄생과 번영을 위한 여러 가지 조건이 가장 먼저 주어졌던 것이다. 독일은 그 뒤 1세기가 지나서야 남부 독일과 라인 연안의 도시가 먼저 이 변혁에 참가했다. 그것은 이 지방이 북방의 민족 및 항구와 이탈리아를 연결시키는 천연의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동시대의 스페인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도 시작되었고 표면상으로는 영국도 가장 늦었지만, 이 세계적인 대열에 참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영국이 가장 늦었던 것은 영국이 섬나라라는 지형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역사적인 필연이라는 새로운 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국에서는 사회를 자본주의로 성숙시키려는 흐름이 유럽대륙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대륙에서는 상업자본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영국에서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상품인 양모를 생산하던 지주의 자본주의화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영국에서는 아주 기묘한 시민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막은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내려졌다. 그것은 이들 나라에서 여러 가지 전제가 토대가 되어 절대주의체제를 성립시키는 조건이 가장 빨리 발달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16세기 초기에 이와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고 영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 1649년에 "명예혁명"을 성취시켰던 시민계급의 승리는 영국에서는 최후의 것이었지만 이 승리도 그후의 타협에 의해서 그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이후의 영국의 정치적 발전은 대륙의 정치적 발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전되었다.
이에 대해서 미술사적인 견해는 이 세계사적인 연극의 제 2막, 즉 상업자본의 활발한 팽창에 의해서 형성되었던 미술적인 반영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굉장한 연극은 제 1막도 있다. 연극이라는 것은 대단원과 함께 서막이 있는 것이다. 미술사는 이 다른 부분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문명사는 전체, 즉 초기, 중기, 말기를 말하자면 전성기만이 아니라, 전체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