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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사상 2

4장 현대철학

 

1831년 헤겔의 죽음은 한 철학자의 개인적 삶의 완성이며 종말인 동시에 철학을 확실한 토대 위에 거대한 체계를 갖춘 구조물로 종합적으로 구축하려고 한 근대철학의 완성이자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콜라 정신에 의해 그 자체의 확실한 토대를 상실하고 말았던 철학은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헤겔로 이르면서 자기완결적 체계의 구축이라는 근대철학의 시대정신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특히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그야말로 철학 전체를 완벽한 체계 속에서 전체화시키고 종합화시키는 작업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론을 떠받치고 있는 형식적 체계성은 이제 새로운 경험을 하기 시작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구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철학이 하나의 완벽한 체계로만 남아 있기를 고집하는 한, 철학은 한갓 체계 속에 갇혀 있는 수인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철학이 이제 더 이상 형식적으로 아름답게 구축된 학적 체계가 아니라 정형화된 틀을 끊임없이 허물어가는 활동이기를 원한다.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그 형식적 체계성은 화려하게 걸치고 있지만 그 내용적인 면에서는 구체적 경험을 토해 내어버린 초라한 모습을 지닌다. 그리고 그 방법적인 면에서는 전체적 통일을 향한 끊임없는 진화론적인 전진과 전체성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열망으로 일관되어 있다.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전체주의적 도식 속에서 근대철학의 완성과 종말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근대철학의 종말을 재촉한 "전체는 진리이다"는 방법적 도그마는 부분들의 구체성과 다양성을 전체화의 부품으로 희생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원죄를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한 관념론적 열망은 모든 구체적인 현실을 의식의 현실로 추상화하여 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근대인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이성은 "현대"라는 거대한 지평 앞에서는 무기력한 난쟁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학적인 체계만 잘 갖추면 그만이라는 헤겔 철학의 거만함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사유의 장애물로 등장한다. 절대이성의 관념론으로 체계적으로 완성하려는 근대인들의 열망의 이면에는 경험의 풍만성과 현실의 구체성 그리고 부분들의 다양성을 논리적으로 사상(사상)해버리는 방법론적 이데올로기가 은폐되어 있다. 절대이성의 주도권이 지배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패권주의는 그 외양의 장엄함과는 달리 그 내부로부터 이미 해체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헤겔의 철학 속에 갇혀 있던 철학의 생생한 문제들이 그의 죽음을 기다리기나 한 듯이 그의 죽음과 함께 여러 방향으로 봇물터지듯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헤겔 이후의 철학을 "현대철학"이라는 용어로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면, 현대철학의 얼굴을 단적으로 읽어내기를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철학은 폐쇄적인 체계를 갖추기를 거부하고 그때그때 생생한 문제들을 여러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풍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의 근본적인 성향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대철학을 지배해 온 주관성의 철학을 포기하고 객관적 실재 자체에로 방향을 취한다. 실재적인 것을 주관성의 구성적 산물로 생각하려는 근대 철학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실재,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해명하려는 실재론적 경향을 취한다. 둘째, 사유하는 이성적 주관 대신에 생동하는 구체적인 주관으로 돌아간다.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주관 대신에 의지하고 활동하고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주관이 등장한다. 셋째, 방법적인 면에서 전체성을 위한 종합 대신에 분석적 방법을 취한다. 논리적 통일을 위한 종합적 추상 대신에 구체적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한 분석적 검증이 등장한다. 헤겔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무리 완벽하고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기념비적 철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모래나 진흙 위에 세워진 기념비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언어와 논리에 대한 철저한 분석적 검증이 철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는 현대철학의 흐름을 우리는 편의상 다음과 같이 3시기 나누어 다루고자 한다. 초기는 헤겔 이후 등장한 유물론과 실증주의 그리고 비합리주의 등의 흐름이 등장한 19세기이다. 중기는 19세기 말을 포함하여 20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삶의 철학, 현상학, 실존철학, 분석철학, 실용주의 등 다양한 흐름들이 등장한다. 후기는 20세기 중엽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비판이론, 후기 분석철학, 포스터구조주의, 해석학, 신실용주의 등의 흐름이 등장한다.

 

 

1절 초기 현대철학

 

우리가 현대철학의 '초기'라고 부르는 시기의 특징을 말한다면, 그것은 19세기의 전반까지를 지배했던 헤겔의 관념론이 와해되는 사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독일 관념론의 와해는 새로운 경험에 직면하게 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지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하여 보면, 첫번째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헤겔의 죽음은 근대철학을 주도해 왔던 물 자체나 실체 혹은 절대정신이 모든 존재자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설명원리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했다. 인간을 궁극적 원리로 규정하는 근대철학은 결국 인간 정신의 실체화에 지나지 않으며, 구체적인 인간이 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 속에 매몰되어 있던 인간과 역사의 구체적 토대를 다시 회복하려는 인간학적~유물론적 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철학 역시 인간중심적 견해를 취한다는 점에서는 근대철학과 공통점을 가지지만 근대철학의 인간은 사유하는 추상적 인간이었던데 반해, 현대철학의 인간은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인간, 즉 느끼고 노동하고 의욕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다르다. 두번째는 주체로부터 객체, 즉 구체적 사실에로 전환하는 사실중심적 실증주의가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겔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비합리주의가 등장한다. 즉 절대정신 대신에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지가 구체적인 절대자로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개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유물론

 

1)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물론

 

(1) 헤겔좌파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철학은 보수적인 면과 혁명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최종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당시 일어나기 시작한 사회의 변동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정지상태를 표현한 것이었다. 헤겔 자신의 철학이 이제 새로이 나타나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지양(지양)될 운명에 처하였다. 헤겔 이후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체계에 대한 반발에서 모두 그 시발점을 찾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헤겔은 결국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서로 다른 두 입장에서 헤겔 철학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 하나는 헤겔 우파라 불리어지는데, 법학자 사비니(Savigny)와 역사학자 랑케(Ranke)가 중심이 된 역사학파와 낭만주의자들에 의한 보수적 성격을 띤 반발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헤겔은 모든 역사적인 것을 단순히 세계발전의 부수 현상으로만 간주하고 신과의 연결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헤겔 철학에 반기를 든 또 다른 하나는 소위 헤겔 좌파라 불리어지는데, 헤겔이 소홀히 했던 자연과학을 강조하고 동시에 오히려 헤겔 철학에 신학의 잔재로 남아 있는 종교적 사변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려 함으로써 철저한 실증주의적 유물론적 입장을 고수한다. 헤겔 좌파 중에서 중요한 두 사람은 슈트라우스(D. F. Strau )와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이다. 두 사람 모두 헤겔에서 출발했으나 후에 헤겔철학과 결별한다. 두 사람의 저서는 당시 헤겔 철학에 젖어 있던 독일에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물론 그들의 중심 과제 중의 하나인 종교비판은 이미 18세기에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가 시도한 것과 유사점이 많다. 차이가 있다면 보수적인 독일에서 시민혁명이 늦게 일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뒤늦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며, 또 그사이 발전된 자연과학의 결과로 비판이 날카로워지고 객관적으로 된 점이다. 슈트라우스는 신학자였는데 그의 저서 "예수전"(1835)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는 주로 교회신앙이 역사적 비판이라는 안목에서 공격되었다. 즉 복음이란 결코 역사적 현실성을 갖지 못한 신화, 혹은 상징적 의미만을 갖는 창작이다. 그의 후기 저서 "옛 신앙과 새 신앙"(1872)에서는 범신론적(범신론적) 색체가 두드러진다. 그는 "아직도 우리는 기독교인인가?"라 묻고 확고하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종교를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긍정적으로 답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는 진보와 문화를 신봉하는 낙관적인 현세종교이다. 여기서는 신 대신에 우주가 들어선다.

포이에르바하는 칸트가 죽은 1804년에 독일의 도시 란츠후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학자 가문의 법률가였다. 포이에르바하는 처음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적 합리주의를 표방한 다우브와 파울우스에게 신학 강의를 들은 후 실망하고, 1824년 헤겔의 강의를 듣기 위해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갔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며 신학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넘어간 것은 헤겔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점차 헤겔 철학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헤겔 철학은 철학을 위장한 신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이란 인간이 자기의 소원과 이상을 객관세계로 투사하여 마치 그것이 독립한 실재인 것처럼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 상상에서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복추구, 이것이 바로 신의 정체인 것이다. 헤겔 철학은 종교와 학문과의 용납할 수 없는 야함이며, 논리의 겉치레를 한 신학이다. 헤겔의 이른바 절대정신은 실상은 망령에 불과하다. 포이에르바하는 "철학의 개혁을 위한 제언"에서 헤겔 철학을 폐기하지 않는 자는 신학을 폐기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같이 포이에르바하는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자신의 출발점을 찾는다.

 

(2) 감각주의와 인간학

독일 시민계급의 시대적 정치적 의식은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시도에서 그 윤곽을 얻는다. 그의 철학은 다른 헤겔 좌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관념적인 헤겔 비판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론적 기초를 정립하려 한 점에서 고전적 독일철학의 종말로서 지칭된다. 그는 철학 자체 속에 머물지 않고 철학 외부에서, 즉 과학, 산업, 정치 등을 고려하면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신학을 비판하는 점에서 18세기의 기계론적 유물론자와 구별된다.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중심적인 원리이고 자연주의적이고 감각주의적이며, 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적이라고도 표현된다. 그의 저술 속에 나타나는 근본 테마의 하나는 물론 종교, 신학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의 무신론은 헤겔 철학의 비판이 깃들어 있는 철학적인 것이다. 그의 종교 비판이 결국 인간학에 기인함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무신론자라는 것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 즉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논쟁은 17, 8세기의 것이지 19세기에 속하지 않는다. 신을 부정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인간의 부정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인간 자체로 고찰하고 현실적인 인간을 철학의 중심에 두어야 하는 인간학을 헤겔의 추상적 관념론과 대체한다.

포이에르바하가 이성이나 관념의 추상성 대신에 감각과 자연의 구체성을 철학의 기초로 둔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물론적 성향을 띤다. 그의 인간학적 유물론은 두 가지의 면에서 종래의 철학과 논쟁한다. 한편으로는 관념론과 신학의 비판에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 자체에 대한 비판에서이다. 전자를 철학 속에서의 비판이라 한다면 후자는 철학 밖에서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본령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감성을 출발점으로 그는 "예비명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그러므로 그 자체와 더불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부정인 비철학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사유와 구분되는 비철학적인, 절대적으로 반()스콜라적인 본질이 감각주의 원칙이다", 논리적 사유로서의 철학에 대한 거부는 인간 외부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 속에서 규명된다. 인간을 자연의 도구로 보고 물질에서 인간으로 나아갔던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 요소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그 어느 것에도 우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영국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감각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물론 포이에르바하는 이들처럼 주관적 관념론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실제적인 것을 관념의 다발이나 복합체로 환원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실제적인 것이 인간의 사유나 지각의 밖에 존재하고 대상이 사유에서 유출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유가 대상에서 유출된다. 그러므로 그의 감각주의 원칙은 실재론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실재성과 연관되는 것이 감각이고 따라서 감각만이 유일한 인식의 근거이다. 감각은 직접적인 지식의 비밀이다. 감각주의 원칙이란 그러나 결코 고정된 사실만을 수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감성은 사유되거나 고안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의 통일이다. 감성은 이 두 가지의 모순을 동시에 내포하고 감성 속에서 그것은 중재되어 나타난다.

헤겔의 사변철학(사변철학)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진 자연이 오히려 사유의 주체로서 인정되어야 하고, 또한 자연은 그 자체 속에 근거를 갖고 있으므로 결코 헤겔에서처럼 정신의 외화현상(외화현상)이 아니다. 물론 포이에르바하는 감각, 자연, 인간 등의 존재를 독단적으로 전제하고 거기에서 정신을 도출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정신에 의해 정립된 것이고 정신은 또한 자연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겔의 자연철학은 가장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연은 논리학으로부터 유출되는 범논리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논리학이 자연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고하는 주체가 논리학의 밖에서 직접적인 존재, 즉 자연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직접 인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없다면 순결한 처녀와 같은 논리학은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연역해 낸다는 것은 환상이다. 헤겔 철학은 현실의 추상화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철학은 구체적인 인간을 소외시킨다. 헤겔에 있어서는 자연의 본질을 자연 밖에, 인간의 본질을 인간밖에 그리고 사유의 본질을 사유 밖에 갖다 놓음으로써 직접적인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확신도 없어졌다. 헤겔의 추상으로부터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은 이론에 불과하고 참된 객관적 실재성은 이론적으로 도려내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과 실재성이 이념에 의해 정립된다는 이론은 자연이 신에 의해 정립된다는 신학이론의 합리적 표현에 불과하다. 결국 포이에르바하는 관념론의 폐허에서 새로운 철학, 즉 이론을 지양하는 실천철학을 구상하였다.

 

2)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1) 소외론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소외의 제 양태를 분석하고 그 해결방안을 찾는 데서 그의 철학을 출발시키고 있다. 맑스의 소외론은 직접적으로는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다. 헤겔은 세계의 본질을 절대정신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절대정신은 자기소외와 자기복귀의 이중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논리적으로 실현시켜 나간다. 절대정신의 공간적 소외 또는 외화(Entt u erung)가 자연이며 시간적 소외가 역사이다. 절대정신의 자연화, 역사화는 절대정신의 본성인 자기활동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자연이나 역사는 절대정신이라는 실재의 외양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이나 역사에의 소외의 극복도 절대정신의 관념적 자기 극복일 뿐이다. 이러한 극복은 헤겔은 지양(Aufheben)이라 불렀으며, 그 결과는 자유라는 것이다.

헤겔의 소외개념에 대한 맑스의 핵심적 비판은 실재의 정신성, 소외의 추상성, 지양의 사변성에 관한 것이다. 맑스는 실재는 물질적인 것이며, 소외는 구체적인 것이며, 아울러 지양은 실천적인 것이라야 한다. 즉 세계의 본성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며, 소외도 정신적 관계의 추상적 양태가 아니라 물질적 관계의 구체적 양상이며, 지양도 사변적 해소가 아니라 실천적 변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맑스는 헤겔 철학의 관념성, 추상성, 사변성을 물질성, 구체성, 실천성의 철학으로 전도시킨다.

초기 저술에서 맑스는 소외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논의하고 있다. 맑스는 "종교적 소외"에서 출발하여 "철학적 소외", "정치적 소외"를 거쳐 "경제적 소외"로 이르는 다양한 유형을 검토하면서 그 중에서도 경제적 소외를 소외의 근본 양태로 간주하였다. 종교현상은 인간의 자기소외가 반영된 사회현상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 비판을 차용하고 철저화한다. 신은 인간의 자기의식의 투사이며 신학은 인간학이다. 종교는 현세의 억압받는 인간의 욕망구조를 내세에 해방된 인간의 환상구조로 대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종교는 인간의 소외를 지속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인민의 아편이다. 따라서 종교의 철폐는 인간해방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철학도 인간의 소외를 반영한 이데올로기이다. 철학, 특히 헤겔의 사변철학은 종교의 신 대신에 추상적 정신을 대체함으로써 인간정신의 계몽화를 꾀하나 세속화된 신학 이외의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변철학 역시 소외된 인간의식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변철학의 폐기는 인간의 철학적 소외를 극복하여 그 철학적 이념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맑스는 동일한 분석을 정치적 소외에도 적용시킨다. 국가 제도, 특히 브르조와 국가 제도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실현하는 기회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 기회를 박탈한다. 일자의 기회획득은 타자의 기회상실이라는 모순구조를 국가 제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계급대립을 영속화시키며 인간의 정치적 소외를 야기시킨다. 따라서 국가는 폐지, 소멸되어야 한다.

맑스는 소외의 근본양상으로서 경제적 소외의 4가지 양태를 고찰한다. 1. 생산품으로부터의 소외, 2. 생산활동으로부터의 소외, 3. 사회생활로부터의 소외, 4.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등이다. 맑스는 이러한 소외는 노동자 계급에 가장 잘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계층에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가 가지는 모순이기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소외현상이라는 것이다.

 

(2) 사적 유물론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 이해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독일 관념론이고, 두 번째는 프랑스 사회주의 그리고 세 번째는 영국 고전 경제학이다. 독일관념론 철학에서 칸트는 실천이성의 이론이성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며, 이성의 실천성과 능동성에 기인한 역사의 합리적 진보에 관해 이야기한다. 피히테 역시 인류의 역사를 합리적으로 보았으며,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식의 진보로 정의하였다.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로서의 역사는 절대정신의 본성인 자유의식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논리적으로 볼 때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가 보기에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는 변증법이며, 이런 전도된 관념 변증법을 유물 변증법으로 재전도시킨 것이 사적 유물론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에서 생 시몽(Saint Simon)은 공업중심주의와 정치경제이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를, 푸리에(Fourier)는 합리적 윤리적 사회주의를, 프루동(Prouhdon)은 평화적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맑스는 이들의 사회주의 사상 중 경제가 중심이 되는 정책은 인정하였으나, 이들의 방안을 이상에 그치는 실현성이 없는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이와 대비해서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영국 고전 경제학에서 아담 스미스(Smith)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어떻게 운용되는가를 설명하였고, 리카르도(Ricardo)는 노동가치설을 수립하였는데, 맑스는 이 이론들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의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의해 착취당하는 과정을 증명할 수 있었다. 자본증식의 경제학에 내재한 노동착취의 구조를 폭로하는 것이 사적 유물론의 또 다른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사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맑스 자신에 의해 사용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그는 오히려 '유물론적 역사이해' 또는 '유물론적 생산조건'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사적 유물론을 충분히 발전된 이론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유물론적 역사이해의 핵심은 "사회변화의 관건은 인류가 생활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방식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산활동이 기본적이고 이런 생산활동을 해석하고 조직하는 이념체계, 즉 정치, 철학, 종교, 예술 등은 부차적인 것이다. 전자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로서 '하부구조'에 해당하고, 후자는 이 하부구조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정치 법률적 구조와 그것이 관념적으로 반영된 이데올로기적 구조로서 '상부구조'에 해당한다. 역사에 있어서 궁극적인 결정요인은 생산관계의 총화이며, 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고 이러한 현실적 기초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구축되며, 이에 대응하여 일정한 형식의 사회의식이 생겨난다. 역사 변천의 원동력은 사회의 경제적 요인이며, 이는 필연적 법칙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맑스는 경제적 요인의 역사 결정론과 더불어 혁명적 주체의 역사 변혁론을 함께 논구하고 있는데, 이는 자유와 필연의 통합이라는 서구의 형이상학적 과제를 사적 유물론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역사적 현실에서의 그런 과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맑스 철학의 특성이며 동시에 한계이다.

 

(3) 노동이론

맑스에 의하면 노동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참여하는 과정인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발적으로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적 반응을 조정, 규제, 통제한다. 맑스는 헤겔이 노동의 본성을 파악하고 객관적인 인간, 진정한 인간, 현실적 인간을 그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는 헤겔이 노동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그 부정적인 면은 간과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가운데서 자신을 실현하는 수단이며, 소외된 인간으로 자신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즉 노동은 인간성의 소외라는 부정적 측면과 인간성의 실현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공유하는 것이다.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에 대하여 맑스는 아담 스미스와 푸리에의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의 중도적 입장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노동은 필연적으로 부담이요, 희생일 뿐 인간의 쾌적한 상태는 휴식이라 하였다. 이에 반하여 푸리에는 이상적인 미래를 예견하면서 노동을 오락이나 유희와 동일시하였다.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 반대하여 맑스는 정상적인 작업량은 모든 인간 존재에게 필수적인 것이고 정상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노동의 결과는 자기실현이요, 주체의 객관화이며 따라서 진정한 자유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푸리에에 반대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운 노동은 동시에 너무 진지한 것이며 최대한의 노력을 요하는 것이라 하였다. 물질 생산에 관여하는 노동은 사회적 본성에서 비롯되고 과학적 성격을 띠고 있을 때만 이러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맑스는 노동의 성격이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노동의 철폐'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다. 노동은 모든 문화 국가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노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철폐하는 것이라 한다. 즉 자유노동은 소외노동을 야기시키므로 자본주의적 노동을 철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노동 분화의 소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노동 분화의 소멸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도 해소시킬 것이라 한다. 이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은 "오전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비판에 종사하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맑스의 묘사는 그의 이론이 과학적 가능성보다는 미학적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4) 혁명론

혁명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사적 유물론의 결과이다. 사회의 발전은 경제적 토대, 즉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화에 의해 규정된다. 한 사회에서의 생산이 가지는 물질적 힘은 그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기존의 생산 관계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생산력의 발전에 생산 관계가 장애물로 변모한다. 즉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에는 모순이 생긴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면 이제 사회혁명의 시기가 임박해 온다.

맑스는 프랑스 혁명을 연구한 끝에 이를 '정치혁명'을 규정한다. 이어서 그는 시민혁명으로서의 정치혁명이 가지는 모순을 계급착취라는 도식으로 설명한다. 정치혁명을 통해서 누구나 브루조와지가 됨으로써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자유경쟁을 통한 일자의 계급상승은 타자의 계급하락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혁명은 새로운 계급대립, 즉 브루조와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을 야기하며, 이러한 새로운 모순은 새로운 혁명을 발생시키고, 이 혁명의 근본 성격은 '사회적'이라는 데 있다.

맑스는 새로운 혁명, '사회혁명'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만인의 추상적인 정치적 자유를 선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실제적인 경제적 평등을 성취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수행할 임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교육수단이기도 하다. 혁명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를 변혁시킨다. 왜냐하면 혁명은 그 자체의 요원들을 대대적으로 변혁시킬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러한 혁명이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성취되어야 하며, 그러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의 구호는 '영구혁명'이라 한다. 따라서 공산혁명은 세계혁명이며 그 후의 세계는 국가가 소멸되고 공산주의 사회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측을 그는 '과학적'이라 불렀다.

 

 

2. 꽁트의 실증주의

 

꽁트(Auguste Comte, 1789~1857)는 몽펠리에에서 가톨릭 계통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14세 때 자신은 더 이상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는 이때부터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1814년 그는 에꼴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저명한 과학자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의 과학주의적 정신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1817년부터 7년 동안 생시몽(Saint~Simon)의 조수 생활을 한 것이 그의 과학적 정신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826년 그는 실증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18337월부터 "실증철학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를 계속 여섯 권으로 출판했다. 그후에도 이 책을 보완하기 위해 "실증주의 정신에 관한 강론"(Discours sur l'esprit positif)(1844)"실증주의 전반에 관한 강론"(Discours sur l'ensemble du positivisme)(1848)을 출간했다. 1851~1854년 사이에 "실증정치 체계"(Systeme de politique positive)를 네권으로 출판하고 "실증주의 교리문답"(Catechisme positiviste)1852년에 출판했다.

꽁트 철학의 최대목표는 사회체계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1830년을 전후하여 프랑스는 정치, 경제적으로 큰 혼란기였고, 이에 대한 철학사상들도 여러 대안으로 난무하였던 시기이다. 이에 꽁트는 사회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와 철학 모두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의 실증주의는 단순한 하나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과학적 해결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증주의는 사물의 본질이나 형이상학적 실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이 사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과학적 방법으로 인식하려는 태도이다. 이것은 구체적 사실을 추상적인 의식의 경험으로 환원하였던 헤겔의 사변적 형이상학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 철학이 갖고 있는 데카르트적인 명석성과 판명성을 철학의 기준으로 삼아 왔던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명석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적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꽁트의 철학은 헤겔의 관념적 추상성에 식상한 그 당시의 프랑스 지성인들에게 요구된 것이다.

꽁트는 부질없이 사변을 희롱하여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를 탐구하는 따위를 일체 배제하고 오로지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그 속에서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스승 생시몽의 영향을 받아 무엇보다도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을 수립하여 사회의 개혁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정한 원칙 아래에 다양한 과학들을 정돈하고 종합하는 데서 실증철학의 체계를 세웠으니, 인류의 지식발달의 3단계와 단순한 대상에서 복잡한 대상에로 나아가는 과학발달의 순서와 같은 것이 곧 그러한 원칙이다.

꽁트에 의하면 우리의 지식은 3단계를 취하여 발달하는 것이다.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가 그것이다. 신학적 단계에서는 인간은 극히 제한된 관찰을 기초로 한 위에 상상력을 움직여서 초자연적 신을 생각하고, 모든 현상을 신의 의지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형이상학적 단계에서는 본질적으로 신학적 단계와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신이라는 인격적 존재 대신에 개별적 궁극 원리를 세우고, 상상력 대신에 사면적 추리가 행해진다. 실증적 단계에서는 어디까지나 경험적 사실에 입각하여 사실들 상호 간의 불변적 관계를 탐구하는 것으로써 만족한다.

현상을 초월한 궁극 원인과 같은 것을 구하지 않고 다만 현상 속에 지배하는 법칙을 탐구할 뿐이다. 이리하여 법칙을 인식하면, 우리는 현상의 생기(생기)를 예견할 수 있다. 예견하기 위하여 관찰한다는 것, 장래를 위하여 현재를 연구한다는 것이 실증적 단계에서의 인식의 목적이다. 그는 14세기 이후 발달한 과학의 성과를 종합의 정신으로써 조직화하는 실증철학이 완성되면, 그때야 비로소 허물어진 정신적 권위가 재정립되고 형이상학적 단계에서 발생한 사회적 혼란도 극복된다고 말한다.

그는 실증주의의 원리에 입각하여 실증철학을 수립함에 있어서 먼저 지식의 보편성의 감소로부터 복합성의 증가로, 또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간다고 파악했다. 다시 말해 그는 모든 과학은 대상의 단순성과 보편성에 따라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실증철학으로 나누어 이것들의 서열을 다음처럼 작성하였다.

 

(점역자 주: 표 설명)

1. 수학

2. 천문학

3. 물리학

4. 화학

5. 생물학

6. 실증철학(사회학)

* 천문학=천체물리 현상

* 물리학 ^26^ 화학=지구물리 현상

* 생물학=생물 현상

* 천체물리 현상 ^26^ 지구물리 현상=무기체 현상

* 생물 현상=유기체 현상

* 실증철학=사회물리 현상

* 무기체 현상 ^26^ 유기체 현상=자연 현상

 

이러한 서열에서 꽁트는 보편성과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발견했다. 상위의 것은 단순성과 보편성이 가장 큰 것이고, 하위의 것은 상위의 것에 종속되는 것으로 복합성과 구체성을 지닌 것들이다. 이 도식에서는 수학이 가장 먼저 발달한 학문이다. 그러나 수학은 특정한 연구대상이 없고 천문학 이하 다섯 가지 과학에 대해 그 기초를 제공하는 하나의 방법과학이므로 나머지 과학들은 모두 수학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학을 제외한 나머지 과학들은 서로 모자 관계를 맺고 전자에서 후자가 생겨나며, 후자는 전자에 의존한다. 수학이 보편량을 취급한다면, 천문학은 질량과 힘과 중력의 요소를 여기에 첨가시킨다. 또한 물리학은 중력과 빛과 열을 취급 할 때 여러 형태의 힘들을 구분해 주고 화학은 물질들에 대해 양적인 분석과 질적인 분석을 동시에 하며, 생물학은 그 물질적 질서에다 유기체의 구조를 첨가시킨다. 끝으로 모든 과학의 발달에 있어서 정점은 사회물리학이다. 왜냐하면 사회물리학은 제반 과학의 여왕이며, 이전의 모든 지식을 활용하며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것들을 통합한 종합과학이기 때문이다. 실증철학인 사회학인 사회학은 완성은 바로 지적 무정부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3. 비합리주의

 

1)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1788~1866)는 세계가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헤겔의 이성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서 파악한다.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살려는 맹목적 의지가 세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세계의 본질이 맹목적인 비합리적 의지라는 것은 어떻게 파악되는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인과율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 시간과 공간은 칸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선천적 직관형식이고, 인과율은 오성 범주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을 통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경험적 세계는 한갓 표상(Vorstellung)의 세계일 따름이지, 물 자체(Ding an sich)의 세계는 아니다. 이 점은 칸트의 견해와 같으나 범주를 인과율 하나뿐이라고 보는 점이 다르다. 그러면 물 자체를 파악할 길은 전혀 없는가? 칸트는 이 길을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서 구하였지만,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신체를 통하여 이것을 파악할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 신체를 가지고 있다. 경험적 인식에 대해서 신체는 물론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고 인과율에 의하여 규정되는 하나의 객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체는 동시에 우리 자신 속에 의지가 있다는 것을 직접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의지는 신체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살려는 맹목적 의지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 운동과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무의식적 의지이다. 의지작용과 신체 운동은 인과관계에 의하여 결부된 두 개의 객관적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의지작용은 필연적으로 신체의 운동이라는 관계에 있다. 이 양자는 동일한 것이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즉 하나는 직접적으로 또 하나는 간접적이고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신체를 통하여 표상세계 이면의 물 자체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데, 한번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면, 여기서 우리는 신체 이외의 다른 객관적 사물 속에서도 그 본질로서 의지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잡다한 표상 세계는 본래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개별화된 세계이다. 시간과 공간은 말하자면 개별화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개별화되기 이전의 물 자체의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잡다한 하나의 근원적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를 통하여 물 자체가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든 객관적 사물의 본질 역시 의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쇼펜하우어는 인간 자신의 경우에서 유추하여 비단 동물과 식물뿐 아니라, 무기물에 이르기까지도 그 근저에 의지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의지는 일정한 목표가 없는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충동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의지의 활동은 결코 쉬지 않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려고 애를 쓸 뿐이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을 얻자마자 다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욕구한다. 그것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고뇌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살려는 부단한 욕망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필연적으로 고해(고해)로 된다. 이 고해에서 해탈할 길은 없을까. 의지를 버리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 길은 우선 예술적 관조에 있어서 달성된다. 예술적 관조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주관을 버리고 무의지, 무고통, 무시간의 순수한 주관으로 높여진다. 엑스타시스, 즉 탈아란 이러한 주관의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세계의 고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심미적 해탈로서 결국 일시적 해탈에 불과하다. 그러면 영속적 해탈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이것은 윤리적 해탈에서 가능하다. 즉 도덕에서 비로소 달성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도덕은 동정(Mitleid)에서 성립한다. 동정은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서 동감하는 동고(동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동고의 도덕에 의해서도 결국 궁극적 해탈을 얻지 못한다. 동정은 자기의 개성을 버리고 인간 상호간의 공통한 고통을 동감하는 데서 인간의 고뇌를 덜어 주기는 하나, 살려는 맹목적 의지를 긍정하고 있는 이상 고뇌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일 수는 없다. 유정, 무정의 일체가 고해이고, 이 고해의 근원이 의지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이 의지 자체를 근절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금욕과 무의지에 있어서 비로소 진정한 해탈이 가능하다고 본다. 진정한 해탈을 구하는 자는 공허한 무로 몰입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해탈한 자의 눈에는 세계란 그것이 본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염세적 허무주의에 도달했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불교적 요소로 뚜렷하게 채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니체

니체는 삭센지방 뢰켄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Bonn)대학과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문헌학을 연구하고, 그의 스승 릿첼의 추천으로 25세의 약관으로서 바젤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889년 이탈리아 트리노에서 착란증을 일으킨 이후 정신의 정상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채 1900825일 사망하였다.

독일관념론 철학에서는 한편으로 유한자와 생성이 가치 없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낮추어지는가 하면, 다른 편으로 모든 유한자를 삼켜서 자기 속에 포함한 무한자 즉 절대자 혹은 이른바 참된 존재는 공허한 도식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이러한 경향에 항거하여 니체는 유한자, 생성, 유동하는 생명, 특히 인간의 생명에 대한 열렬한 변호자가 된다.

니체에 의하면 현실의 세계를 초월한 피안의 무한자, 절대자, 신과 같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부단히 유동 생성하는 모든 유한자와 인간의 생명과 이 놀라운 현실, 즉 초현실적 절대자 앞에 너무나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이 현실을, 저 허구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어 참다운 문제로 삼으려는 것이 니체의 관심사였다.

이리하여 니체는 절대자를 그 초세계성에서 세계내재성으로 돌이키고 무한자의 모든 속성을 유한자에게 귀속시킨다. 그럴 적에 초세계적인 무한자는 벌써 무의미한 중복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여기에서 초인간적인 것은 인간 속으로 옮겨 놓여져서 초인(초인, bermensch)으로 되고, 영원성은 시간 속으로 옮겨져서 영겁회귀(ewige Wiederkehr)가 되고, 존재는 생성 속으로 옮겨 놓여져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된다. 이리하여 니체는 인간을 초인으로, 시간을 영원으로, 생성을 존재로 높인다. 그러나 이렇게 높여진 존재는 어디까지나 생성 속에, 영원은 어디까지나 시간 속에, 초인은 어디까지나 인간 속에 머문다. 초월하되 어디까지나 인간 속에 머무는 초인, 시간을 초월하되 어디까지나 시간 속에서 되풀이되는 영겁회귀, 생성을 넘어 있으되 어디까지나 생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디오니소스적 생성, 이와 같이 초월과 내재와의 모순을 지양한 동일성에 그의 이른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가 있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고,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니체의 이른바 힘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를 수정한 개념이다. 니체에 있어서도 쇼펜하우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다. 그러나 이 의지는 맹목적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부단히 보다 더 큰 힘을 추구하는 의지이고, 부단히 성장하고 강화되려는 의지이다. 힘의 성장에는 물론 파괴가 수반한다. 우리는 힘의 성장에서 환희를 느끼고, 힘의 파괴에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세계에 있어서 힘의 총량은 불변이다. 힘의 총량은 유한한 일정량이지만, 그 작용은 무한하다. 이 세계는 발단도 종말도 없는 힘의 괴물이다. 그것은 전체로서 증감도 없고 생멸도 없으나 부단히 유동, 변화한다. 이 세계는 온갖 힘과 힘과의 물결의 출렁거림으로서, 여기에 쌓이는가 하면 저기서는 줄어들어, 영원히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파괴하는 디오니소스적 생성이다. 세계는 확실히 모순에 차 있고, 모순에 차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생은 비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의 총량은 쾌락의 총량을 능가한다고 봄으로써 생을 부정하고 의지를 근절하려고 하는 약한 염세관을 니체는 취하지 않는다. 창조의 반면에 파괴가 따르는 자기 모순적인 디오니소스적 생성, 언제나 같은 것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영겁회귀의 세계, 그것은 확실히 허무한 세계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허무한 세계를 허무한 그대로 받아 들여, 이런 것이 인생이더냐, 좋다. 그러면 다시 한번! 이렇게 크게 생을 긍정하고 나서는 운명애(운명애)의 태도, 이것이야말로 도래한 인간인 초인이 지녀야 할 태도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한 유럽 최초의 긍정적인 혹은 적극적인 완전한 허무주의자로 자처한다.

 

 

2절 중기 현대철학

 

초기 현대철학이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중기 현대철학은 초기의 입장을 지양적으로 계승. 발전시킨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실증주의적 해석은 그 나름의 의의를 가지지만 동시에 소박한 사실숭상주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헤겔의 관념론의 와해와 함께 등장한 유물론과 실증주의적 사고는 일종의 과학적 제국주의의 모습을 등장한다. 이와 같은 것은 헉슬리나 스펜서가 그 전형을 보여준다. 이 진화론에 근거한 실증주의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패러다임으로 체계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삶과 역사가 지닌 고유성을 설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이들의 기계론적 사고를 지탱시켜 준 뉴튼 물리학이 더 이상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의 형성 등과 같은 물리학의 혁명은 근대철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던 뉴튼 물리학을 위기에 몰아넣게 되었다. 이 물리학의 위기는 결국 소박한 실증주의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했으며, 삶과 역사 및 이념의 타당성을 철학적으로 옹호하려는 경향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특수 경험과학인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호전적인 심리학주의는 인간의 정신영역까지도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한다. 베르그송이나 딜타이의 생철학과 후설의 현상학은 바로 이런 심리학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정신과학의 영역을 자연과학과 다른 방식으로 정초하려고 한다. 이 생철학과 현상학을 이어 실존철학이 현대철학의 중요한 흐름으로 등장한다. 이와 동시에 물리학과 함께 근대철학을 그 절정에 도달하게 했던 수학 역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칸토르(G. Cantor, 1845~1918)의 집합론의 발견은 수학의 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품게 하였다. 이 수학의 위기와 관련하여 형식논리학이 논리계산이나 수학적 논리학의 형태를 띤 논리적 실증주의가 신실증주의란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방면에서는 드 모르간과 부울 그리고 프레게 등에 의해 체계가 형성되면서 20세기의 러셀과 무어를 통해 분석철학을 발전시키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물리학적 및 수학적 이성의 위기와 더불어 직접적인 경험의 확실성에로 다시 돌아가려는 운동이 등장한다. 전통적인 경험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경험의 생생한 영역에로 다시 돌아가려는 일종의 생기론적인 혹은 비기계론적인 경향이 윌리암 제임스를 통해 발전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실용주의란 이름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1. 현상학

 

헤겔에 대한 직접적이 반동으로 시작한 실증주의는 모든 학문의 모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특수과학들의 반전과 일반 대중사회에서 얻은 그 특수과학들의 성공으로 인하여 철학이 스스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실증주의에 힘입고 등장한 과학적 제국주의(Szientismus)는 철학의 학문성까지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이에 맞서 철학의 독특한 주장들을 재정립해야 할 과제가 에드문드 후설(E. Husserl)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므로 후설은 특수 경험과학에 의해 철학의 영역이 침탈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일종의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 천박한 외양에서 탈피해 철학을 엄밀한 학으로 재정립해야 할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지배했던 심리학주의는 철학의 영역을 자연과학적으로 변조시켰다. 후설 역시 헤겔의 관념적 추상성을 철학에서 배제시키려는 실증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그는 현실을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적 선입견이나 전제에 의해 굴절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즉 현실을 그 원본적인 명증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현상, 즉 스스로 나타나는 것(Ph nomenon)에 관한 학은 '사태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 돌아가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꽁트와 같이 본질을 심리적 여건이나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해 버리는 소박한 실증주의자와는 구분된다. 왜냐하면 소박한 실증주의자들은 본질 자체를 물리적 사실로 환원하려는 자연과학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이들에게는 현실이 단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후설은 소박한 실증주의와 구분하여 자신을 진정한 실증주의자로 칭한다. 이 현상학적 실증주의자는 모든 실증적 학들이 의미토대로 전제하고 있는 생활세계를 해명함으로써 근대 실증주의에 의해 초래된 학문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학문적 대상들이 의식의 활동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소박한 태도는 실증주의가 남긴 유산이다. 이 유산은 대상과 의식활동의 엄밀한 상관관계, 즉 대상은 이것을 구성하는 의식활동에 의해 성취된 산물이라는 선험적 반성을 통해 비로소 폐기된다. 그러므로 현상학의 길은 일차적으로 모든 대상구성의 영역인 의식에로 돌아가야 하며, 이를 통해 의식과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드러내어야 한다.

 

1) 심리학주의와의 논쟁

후설 역시 초기 단계에서는 심리학의 영향하에 있었다. 원래 수학자였던 후설은 수의 발생적 기원을 심리학적으로 정초하는 데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인 브렌타노(F. Brentano)에 의해 철학으로 안내를 받은 후 차츰 심리학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1913)에서 선험적인 방법을 끌어들여 심리학주의적 잔재를 걷어 치운다. 이 선험적 방법이란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으로 돌아가되, 이 의식은 영혼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과 구분되는 것이다. 경험~심리학적 잔재를 걷어 치운 잔여로서 남는 선험적 의식은 현상학적 환원의 산물이다. 이 선험적 의식으로의 환원이 필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굴절 없이 파악하기 위해 의식의 명증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의식의 명증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대상과 현실을 명증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현실을 포착하는 렌즈이기 때문에 이 렌즈가 투명성을 갖지 못하면 현실 자체가 있는 그대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태도 변화를 의미한다. 실증주의자들처럼 자연과학적 편견을 가지고 현실을 왜곡시키지 말고 현실을 아무런 전제나 가설 없이 단적으로 직관하려는 선험적 태도로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와같이 태도 변화는 현실을 의식의 단순한 켤레로 생각하여 대상에 대한 의식의 주도권을 천명했던 근대철학으로부터 의식의 절대적 상관자인 현실을 그 자체로 건져 올리려는 실재론적 경향의 표현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현대철학의 근본특징 중의 하나로 언급했던 것이다. 우리가 현상학적 환원을 실증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적 절차라고 한다면, 이 환원은 모든 본질을 감각적 소여로 단적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소박한 실증주의적 환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현상학적 환원은 자연과학적 태도에 의해 매몰되어버린 우리의 생활세계를 이념의 옷을 벗겨 그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려는 의식의 인위적인 태도변경이다. 자연과학주의에 깊이 물든 근대 과학은 대상의 존재를 의식에 대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학문적 인식과 삶의 고리를 단절시켜버렸다. 이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자연스런 사고방식에 혁명적 전환을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스런 태도에서 의식과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 객관적으로 그 자체 존재하는 대상들의 존재를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상관자, 즉 주관의 상관적 켤레로서~후설의 용어로 노에시스의 상관자인 노에마로서~확인하기 위한 사고의 혁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스런 태도 속에서 보여진 세계와 현상학적으로 환원된 세계가 다른 세계는 아니다. 단지 동일한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의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두 세계일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현상학적 눈을 가지는가 아니면 특정한 방법론에 묶어 세계를 굴절시켜 보는 자연과학자의 눈을 가지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든 산은 산이고 물을 물이다. 단지 우리의 태도가 문제일 따름이다.

우리가 현상학을 실증주의를 극복하는 현대철학의 대안으로 규정할 때, 그의 지향성 개념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한 안내를 해줄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 t), 즉 의식은 이미 '무엇에 관한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과 대상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실증주의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간다. 모든 학문적 대상이 우리의 의식활동의 켤레라는 사실에서 학문과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실증주의자들이 학문의 가치중립성이나 몰가치성(Wertfreiheit)을 주장하는 것은 학문의 위기를 절정에 달하게 한다.

 

2) 생활세계와 학문

후설은 그의 마지막 유고로 남긴 저서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1936)에서 근대학문, 즉 근대과학의 위기를 고발한다. 후설은 근대과학의 의미토대인 생활세계, 즉 우리의 일상적인 관습을 통해 익숙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알려진 세계를 다시 부활하려는 과제를 가진다. 근대의 실증주의적 낙관론은 과학적 활동과 이에 앞서는 실행적 생활세계와의 연관성을 의식적으로 차단하였다.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다같이 물리학주의의 성과를 등에 업고 생활세계를 단순한 물리적 공간으로 추상화하였다.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의 발달을 촉진시킨 갈릴레이는 발견자인 동시에 은폐자라고 후설은 비난한다. 갈릴레이의 물리학은 시.공간적 형태를 수학화함으로써 자연을 수학적 우주로 설계하였다. 이 수학화의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이념의 옷으로 위장되어 버렸다. 우리의 직관의 대상인 확실한 경험의 세계가 비직관적인 이념화에 의해 그 의미가 추상화된다.

근대의 물리학적 객관주의는 모든 이념화의 전제가 되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방법적으로 추상함으로써 직관적인 생활세계 대신에 비직관적인 과학의 세계가 들어선다. 과학의 소박한 명증성이 생활 세계의 근원적 명증성을 대신하여 과학의 탈세계화가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자연공간은 기하학적 공리체계에 의하여 일종의 수학적 집합과 같은 형태로 변형되었다. 이와같이 현실을 수학화하는 물리학적 객관주의가 초래한 근대과학의 위기를 데카르트는 선험철학을 통해 치유하려 한다. 그러나 객관주의와 자연주의에 끊임없이 저항하였던 데카르트에서 헤겔까지의 철학 역시 이 생활세계에로 돌아가는 데는 실패하였다. 후설은 선험적 현상학을 통해 이 길을 열어 간다.

모든 과학적 활동과 개별적 학문들은 과학적 활동 이전의 경험, 즉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생활세계라는 보편적인 신념토대에로 돌아가서 다시 되물어져야 한다. 이 생활세계는 우리가 언제나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식작업과 학문적 규정에 토대를 부여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물리학적 공간개념으로 추상화될 수 없는 지각의 세계이며 우리와 친숙한 세계이다. 근대의 정밀과학은 이 세계에 입혀진 하나의 옷일 뿐이다. 학문의 모든 성과는 이 직접적 경험세계에 자신의 기반을 갖는다. 이 기반을 상실한 근대 물리학주의는 이 세계의 구체적 의미를 이념화하고 형식화함으로써 학문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후설은 이와 같이 현대 자연과학적 인식의 고향상실, 의미가 공동화된 소외현상을 밝힘으로써 현대인들이 처한 위기를 철학적으로 치유하려 한다. 근대 이후의 물리학적 객관주의가 자신의 의미기반인 생활세계뿐만 아니라 선험적 주관성까지도 망각하였기 때문에 학문과 인간성의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는 바로 철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성과 학문의 위기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인 공생관계를 회복하려는 생태학적 진단과도 연결된다.

 

 

2. 삶의 철학

 

1) 딜타이

헤겔의 범논리주의와 신칸트주의자들 그리고 실증주의자들에 있어서 철학은 다만 논리적 체계성을 지닌 철학이었고 동시에 강단의 철학이었다. 이들 철학은 인간의 구체적 삶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체계적 완전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는가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대중들의 관심은 삶의 철학으로 모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삶의 철학은 20세기초를 지배했던 기계론적 사고, 도식화하는 사고, 표면에만 붙어 있는 사고, 수학적~합리주의적 사고, 정적인 사고에 반대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 일회적인 것, 내면적인 것, 영혼적인 것, 체험적인 것, 역동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제 이들에게 중심이 되는 개념은 이념이나 논리나 사유작용이 아니라 바로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삶 자체이다.

딜타이(W. Dilthey, 1833~1911)는 이미 낡은 시기에 속하지만 그의 영향은 제1차 대전 후에 전개되었다. 그 역시 역사가로서 그 당시를 지배했던 실증주의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칸트의 선험적 계기도 받아들인다. 삶의 현상들을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식화하고 객관화하려 했던 실증주의적 사고는 결국 삶 자체를 무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고,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에 대해 가지는 고유성을 차단시켜 버리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딜타이가 그 이후의 역사철학이나 정신과학에 남겨 준 유산은 바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방법론은 '설명''이해'의 방법으로 이원화하였다는 점이다.

딜타이의 중심 문제는 삶과 삶의 이해(Verstehen)이다. 삶은 그에 있어서 목적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자기완결적 통일체이다. 이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Erkl ren)하려는 실증주의적 태도는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심리학에서 '이해'라는 단어를 받아들인다. 그는 '설명하는' 심리학에 반대했다. 이 심리학은 자연과학과 그 보편화해 나가는 도식적인 방법에 바탕하고 있어, 바로 살아 있는 영혼에 고유한 것, 즉 삶의 일회성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그 자체가 자기완결적 통일체이고 그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개별적 대상으로서 자연과학적 방식에 의해 보편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딜타이는 기계적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연상심리학을 반대하고 심리적 사실을 꿰뚫고 있는 구조연관, 즉 심리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체험 연관에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인간의 정신적인 것에 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역사가로서의 딜타이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 자체를 맹목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거부하고 역사의 문제를 삶의 이해의 문제와 연결하여 해석하려 한다는 점에서 해석학(Hermeneutik)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신과학의 역사에서 이런 구조에 들어 맞는 것은 정신사적인 '유형'(Typus)이다. 언어, 종교, 국가 등은 비교를 하는 방법에 의해, 변화의 유형, 발전의 방향, 규칙 등을 알려주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계관에 있어서도 이와 똑 같은 것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사(정신사)의 여러 현상들 역시 일정한 유형, 즉 삶의 형식으로서 모든 개별적 삶의 현상들을 꿰뚫고 흐르는 보편적 형식들에 바탕하여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개별적 삶의 하나의 일정한 형식 하에서 작용을 하기 때문에 역사적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딜타이가 헤겔 이후 기계론과 결정론적 사고에 의해 매몰되어 버린 인간의 구체적 삶과 역사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다시 꺼집어 내려는 노력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정신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려고 했지만, 그가 발견해낸 것은 개별적 유형들과 다양한 입장들 뿐이었다. 헤겔에게는 하나의 절대자가 있었지만, 딜타이에게는 상대주의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딜타이가 역사적 상대주의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버리진 못했지만, 정신과학적인 이해의 방법을 자연과학적인 설명의 방법과 구분하여 실증주의의 유령을 역사 속에서 몰아내려 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점은 이후의 역사철학이나 학문의 방법론적 논의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베르그송

딜타이와 함께 베르그송 역시 삶을 과학적 방식으로 다루는 것을 거부한다. 20세기 초를 지배한 실증주의와 결정론 그리고 진화론은 마치도 일종의 종교와도 같이 그 시대의 정신을 사로 잡았었다. 베르그송 역시 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과학을 통한 천년왕국의 꿈을 꾸었던 그 당시의 지적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펜서(H. Spencer)의 진화론을 수없이 읽은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삶의 현상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려는 한 그 당시의 과학주의를 철저히 거부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앙리 베르그송(Henry Bergson, 1859~1941)18591018일 파리에서 4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꽁도르세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프랑스의 일류 고등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스펜서에 심취하였고 스펜서식의 과학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문제에 대한 스펜스의 취급방식에 실망을 느끼면서 그 당시의 기계론적 사고방식에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시간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던 스펜서에 염증을 느끼면서 시간을 일종의 지속으로 규정하기 위한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그는 시간을 의식의 본질과 지속(duree)으로 파악하고 직관을 통한 지속의 파악이라는 자신의 핵심적인 철학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그 당시 프랑스의 지적 분위기를 지배한 과학주의에서부터 벗어나 삶의 철학을 특유한 방식으로 형성하게 된다.

 

(1) 지성과 직관

베르그송에 의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즉 지성과 직관이다. 이것은 바로 딜타이가 구분한 설명과 이해의 방식과 유사한 것이다. 지성은 우리가 대상의 주변을 맴돌면서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고, 직관은 우리가 대상안으로 들어가서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방식이다. 지성은 우리가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장점을 갖지만 관찰자에 따라 다른 상대적 지식을 제공해 준다. 분석적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지성은 특정한 관점에서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대상을 그 전체로서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 지성은 과학적 추론에는 적합한 능력이긴 하지만, 이것은 결국 분석적 작업이기 때문에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분석은 대상을 이미 알고 있는 요소로 환원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대상의 본질을 역동적이고 생동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다. 대상의 본질은 본래 역동적이고, 생동적이며 연속적인 존재, 즉 지속이기 때문에 분석은 이 지속을 방해하고 삶과 운동을 정지시킨다. 과학적 분석의 일상적 기능은 바로 대상을 정태적인 여러 부분으로 쪼개는 일이며, 자아를 파악하는 방식 역시 심리학적 방식으로서 자아를 여러 심리상태로 분리해서 연구하는 방식이다. 베르그송은 바로 이런 과학적 분석의 일을 담당하는 지성에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직관을 대체시킨다.

베르그송은 자아를 파악하는 방법이 직관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의 누구나 내부로부터, 즉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파악하는 실재가 적어도 하나 있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흘러가고 있는, 즉 지속하는 우리의 자아이다". 이것은 자아의 주위를 맴돌면서 자아의 여러 형태들을 분석하여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아 안으로 파고 들어가 자아와 하나가 되는 방법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직관을 일종의 '지적 공감'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직관으로 사유하는 것은 곧 지속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지성은 비운동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데 반해 직관은 운동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베르그송은 그의 모든 관심을 사물 내에 있는 지속이라 불리는 과정에 쏟는다. 그가 고대 여러 철학들을 비판하는 것도 그들이 지속, 또는 생성을 심각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전통적인 철학은 항상 정태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베르그송은 운동, 생성, 지속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특히 그의 시간개념에 대한 분석은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논고"에서 수학적~물리학적 동질적 시간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시계에 의해 측정되는 시간은 시간의 공간화에 불과한 것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시간이 아님을 강조한다. 물리학적으로 측정가능한 시간은 순수한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단순히 시계 자판 위에 공간적으로 표현된 시간일 뿐이다. 이것을 베르그송은 "의식의 그림자를 떠도는 공간의 환영"이라고 불렀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가 만일 공간화된 용어로 시간과 운동을 사유하게 된다면, 우리도 역시 제논이 쳐 놓은 그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사실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화살은 매순간 공간상의 한 점을 점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순간 화살이 정지해 있음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제논의 가정이 옳다면 제논의 논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논은 시간이란 공간 속에 실재하는 위치에 있으며, 시간의 불연속적인 단위구간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시간이 일정한 단위구간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성의 분석적 활동에 의해 비롯된 억측일 뿐이다. 시간은 결코 불연속의 파편들이 아니다. 음악의 멜로디가 분할될 수 없는 지속적인 흐름이듯이 시간 역시 지속이다. 이 지속을 마치 일정 구간을 지닌 파편들로 생각하는 것은 지성이 인위적으로 공간화하는 작업 때문이다.

멜로디나 제논의 화살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성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정태적인 부분들을 파악하는 일일뿐, 운동이나 지속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삶의 본질을 형성하는 시간은 마치 두루마기가 풀리고 감기는 것 같은 연속적 흐름이다. 이 연속적 흐름이 바로 의식적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지성의 분석적 추론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베르그송의 입장은 기계론적인 사고인 진화론에 대해 가졌던 그 당시의 지배적인 성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와 연결된 것이다. 특히 삶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 한 그 당시의 실증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을 구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주요 저서인 "창조적 진화"에서 두드러진다.

 

(2) 창조적 진화

베르그송은 모든 사물이 넘쳐흐르는 폭발적이면서도 여전히 보완적이며, 오직 하나의 방향을 고수하는 여러 힘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직관을 통해 파악한 순수지속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약동하는 생명의 흐름이다. 인간의 삶의 본질을 형성하는 시간은 단순한 지속이 아니라 동시에 창조적인 생명의 약동이다. 지속을 약동하는 생명의 흐름으로 파악한 베르그송은 과학이 어떻게 지속과 생성을 성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그의 관심을 옮긴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창조적 진화"의 서두에서 기존의 진화론을 검토한 후, 그런 과학이론들 가운데 어느 것도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은 내린다. 그는 기계론이든, 목적론이든 생기론이든 어떤 진화론도 생명의 약동의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 당시의 진화론은 모든 생명의 약동을 단순히 기계론적인 틀 속에서 고정된 모습으로 이해하였을 뿐, 생명의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확실하게 설명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베르그송은 과학적 진화론 대신에 생명일반의 진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열쇠를 인간의 내적 생명에 대한 고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열쇠는 다름 아닌 '삶의 약동'(elan vital)이다. 약동이란 진화의 선들로 분할되면서도 애초의 힘을 지니며, 적어도 규칙적으로 유전되고, 스스로 축적되어서 신종을 창조하는 변이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삶의 약동은 모든 사물의 동기가 되며, 그것은 곧 근본적인 실재이다. 그것은 모든 생물의 근본적인 내적 요소이며, 모든 사물을 통해 깨어지지 않는 연속성 속에서 운동하는 '창조력'이다. 이 삶의 약동의 과정은 직관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된다. 과학적 추론을 일삼는 지성에 의해서는 이 약동의 과정이 파악될 수 없다. 지성은 연속적인 창조의 동작을 정지된 모습으로 찍어놓은 일련의 사진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으로는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것의 창조를 그려낼 수 없다. 지성이 생명을 파악한다는 것은 관성에 의해 생명을 번역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지성은 진화도 측정가능한 단계들을 거쳐 상향하는 단일하고 점진적인 경향이라고 기술할 수밖에 없다. 삶의 창조적인 진화과정은 과학적 추론에 의해 개념화되고 범주화될 수 없는 약동의 과정이기 때문에, 기계론적인 인과론이나 목적론은 이 과정에 대한 충분한 번역이 될 수 없다.

 

(3) 도덕과 종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베르그송은 지성과 직관의 기준을 도덕과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직관이 적용되는 곳은 운동이고, 지성이 적용되는 곳은 부동성이다. 개방된 도덕은 운동을 함축하고, 폐쇄적 도덕은 부동성을 함축한다. 운동과 부동성은 사실상 그가 주장하는 도덕의 두 원천이다. 사회적 결속을 위해 폐쇄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의 감정이 부동성을 토대로 한다면, 운동은 위대한 도덕적 인물들의 모범에 의해 작용하는 개방된 사회의 창조적 감성의 토대가 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무의 감정은 사회적 억압의 감정이다. 의무의 목소리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그 사회 밖에서 들려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목소리이다. 사회적 명령들은 각 개인에게 관계하기 때문에 각 개인은 의무감을 느낀다. 이렇듯 의무를 폐쇄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부과하는 억압이다. 사회적 결속을 위해 요구되는 의무는 그 기원을 지성에 둔다. 이에 반해 개방된 동적인 도덕은 초이성적 기원을 갖는다. 개방된 도덕은 위대한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이나 예언자들의 삶을 기원으로 한다. 이들의 삶은 기원으로 하여 도덕에 있어서 비약이 이루어진다.

지성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규율을 부과한다. 지성은 도덕을 폐쇄사회에 한정하려 한다. 그러나 공감과 감정의 폭을 이루는 직관은 폐쇄사회를 넘어 적용되는 도덕을 발전시킬 수 있다. 즉 신비주의자이건 성인이건 위대한 도덕적 삶의 영웅들이 나타나야 비로소 의도적 진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성을 새로운 문명으로 고양시키며, 그들의 마음의 눈으로 새로운 사회의 분위기를 보고 그 분위기 안에서 삶에 가치를 더욱 더해 준다. 지성이 제아무리 법을 체계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체계적인 억압수단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도덕가의 직관은 감정의 더욱 풍부한 원천을 개방시키며, 그로 인해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열망을 유발시키고 그러한 창조력을 제공해 준다.

베르그송은 도덕의 두 가지 유형과 관련해서 종교도 두 가지 유형, 즉 정태적 종교와 역동적 종교로 나눈다. 두 가지 유형의 도덕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두 가지 종교에서도 그것들의 기원은 부동적인 지성과 역동적인 초지성, 즉 직관이다. 물론 정태적 종교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삶의 특정한 근본적인 요구를 해결해 주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종교란 본질적으로 안전과 확신, 그리고 공포에 대한 위안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 요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인간에 의해 그리고 사회에 의해 곧 제도화되며, 그것들은 비판적인 이성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믿음으로 전환되고 의식과 계율에 의해 보호되며, 결국은 사회의 구조 속에 끼어들어 간다. 이것이 바로 정태적 종교이다. 그러므로 정태적 종교는 지성의 표상에 대항하는 자연의 방어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역동적 종교는 신비주의를 본질로 하며,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적 노력, 즉 신적 노력과의 접촉이다.

이때 신비주의가 신화형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신비주의는 개개의 존재를 삶의 약동, 또는 참된 존재와 연관시키는 것으로서 매우 보기 드문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신비주의를 행할 수 있는 몇몇 안되는 예외적인 사람들의 힘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인류의 삶은 달라지고 사람들은 인류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신의 도움을 통해 신의 창조를 완결시키는 자이다. 신을 통해서 그는 신적 사상으로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

세계의 모든 신앙도 신비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사막이나 심산유곡에서 명상이나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 나온 결과이다. 대부분의 동양의 신비주의가 그렇다. 불교는 이성의 세계를 넘어 모든 생물에 대한 절대적 외경(외경) 그리고 무념, 무상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가르친다. 기독교 역시 신비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신비주의는 기존의 교회나 경직된 종교를 넘어 흐르는 작렬하는 불꽃이요, 용암이다. 그것은 기존의 교회와 종교를 밝히고 그들의 문을 열어 놓지만, 그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의 사도로서 초대교회의 활기에 찬 임무에로 복귀시키려 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와 기독교는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신비주의자들은 예수를 계승하고, 참된 존재에의 몰입 또는 접촉을 수행한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의 영혼 속에 뜨거운 생명력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불어넣어 준다.

 

 

3. 실존철학

 

1) 실존철학의 발단

실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철학 사조는 1930년대에 독일에서 형성되었고, 그 이후 여러 유럽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실존철학은 그 뿌리를 삶의 철학에 두고 있다. 헤겔의 추상적인 관념론에 반대하고 정신이나 이성이란 낡은 개념 대신에 구체적인 삶을 철학적 주제로 다루기 시작한 삶의 철학이 보다 철저화된 모습으로 실존철학은 등장하였다. 공허한 형이상학적 명상을 거부하고 삶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한 삶의 철학의 운동은 실존철학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삶의 철학이 문제시하는 ''(Leben)이란 개념이 철저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삶의 현상들을 유형화하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선 실존철학은 이와 같은 상대주의적 요소를 거부하고 하나의 절대적인 삶의 철학을 형성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이 실존철학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을 지배한 정신적 상황, 즉 전쟁이 가져다주는 극한적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대상적인 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없게 하였고, 나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미련을 가질 수 없게 하였다. 이 시대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것, 즉 더 이상 대상화할 수 없고 객관화할 수 없는 최종적인 삶의 문제에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 않으려고 도망치다가 할 수 없이 절벽에 뛰어내렸고, 다행히 절벽 한가운데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은 건졌지만, 아래는 시퍼런 바닷속에 악어가 입을 벌리고 서 있다. 그리고 내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거의 썩어 부러질 정도가 되었는데, 그 남은 부분마저 생쥐가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다. 이런 한계상황에서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성이나 정신 혹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남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에 대한 불안은 그 시대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에게 만연되어 있었다.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무너지게 되었고, 역사는 반드시 진보할 것이라는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인간은 불안이라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가장 적나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던져졌고, 아무런 대상이 없는데도 하염없이 현기증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전쟁이 가져다준 죽음의 문제를 바로 자신의 문제로 싸안아야만 했고, 죽음에 이르는 절망적인 존재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을 가속화한 것은 그 당시의 산업화나 기계화가 안겨다 준 인간의 소외 현상이다. 이것은 군중과 집단에 휩싸여 자신의 삶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왜소한 인간 그리고 기계화에 의해 단지 부품으로 전락한 바퀴벌레 같은 인간으로 변신한 현대인들은 이제 삶이란 문제를 철저하게 해명하고 한계상황을 극복하려는 철학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이란 개념은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아주 명확하고 결정적인 체험 능력을 사상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실존이란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삶을 표현하는 생계와 같은 외면적인 실존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계를 잃는다'거나 '잘 산다' 혹은 '죽지 못해 산다'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외면적인 삶의 양식인 경제적 부나 육체적 건강 혹은 지적 풍요로움에서 오는 상대적인 실존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 즉 마지막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삶의 체험을 지칭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부나 건강이 비록 인간의 삶의 외면적 치장을 해 줄 수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건, 예를 들어 죽음이나 불안과 같은 것들 앞에서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체험하는 실존이란 사건은 인간의 외면적인 삶의 내용들이나 형편들을 초월한다.

실존은 Existenz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existentia라는 중세의 용어에서 연유한다. 이 말은 중세의 본질(essentia) 개념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이 본질은 "어떤 무엇이 바로 그것인 바", 즉 나무가 나무인 소이를 일컫는다. 즉 어떤 것의 우연적인 속성들을 제거하고 남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이래 전통 철학은 존재자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왔다. 말하자면 본질 철학이다. 예를 들어 '망치'란 대상의 본질은 망치를 못이나 책상 등과 구분하여 주는 보편적 속성, '못을 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실존을 의미하는 existentia는 영원불변한 실재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의 현실 존재, 즉 현존(Dasein)을 의미한다. 여러 내용적인 규정들을 다 제거하고 남아있는 오직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런데 실존철학에서는 이 현존이란 개념의 외연이 좁아진다. 즉 인간의 현존을 특히 실존으로 부른다. 인간을 제외한 여러 존재자, 예컨대 산이나 나무, 신과 고양이 등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부채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신에게는 존재가 문제 될 필요가 없고, 동물에게는 문제화할 능력이 없는데 반해, 인간은 마치 달팽이가 자신의 껍질을 평생 짊어지고 살듯이, 자신의 삶을 항상 문젯거리로서 짊어지고 산다. 이와 같은 인간의 특이한 존재 방식은 실존이라고 칭한다. 이런 맥락에서 샤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전통 철학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항상 앞선다. 플라톤에 있어서 개체는 보편자인 이데아를 모방으로 하여 제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아란 본질이 먼저 주어져 있고 이를 모방으로 비로소 개체의 존재가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중세철학에서도 실존은 본질에 대한 보충물이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존철학의 형성과 더불어 인간의 구체적 현존을 실존으로 지칭하게 되었고, 이 실존을 본질에 앞서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인간과 사물은 똑같은 현실 존재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개별성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현존이 본질에 대한 단순한 부가물로서 생각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 망치는 못쓰게 되면 '' 망치로 대체될 수 있지만, '' 인간은 '' 인간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가"하는 전통적인 물음은 인간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제거한 이후 개념적으로 본질을 규정하려는 물음이다. 사물과 신은 단지 거기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항상 자기의 문제로 끌어 안아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이라는 추상적인 껍질에서 튀어져나와 각자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와 씨름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어떻게 사는가가 일차적인 문제이다. 인간에게는 현실적 존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본질이 정해진다. 이것을 샤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철학의 근본명제로 정식화했다.

 

(2) 실존은 주체적 결단이다

전통 철학이 논리적 체계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는 가운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각은 뒷켠으로 물러나 있었다. 헤겔의 범논리주의는 논리적~객관적 체계를 이론적으로 구축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뿐 인간의 현실 존재에 대한 주체적 반성은 결여되어 있었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확보하기에 급급했던 전통 철학은 인간의 개체적이고 주체적인 진리를 한갓 체계의 부산물로 여기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실존철학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문장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감탄사" 또는 "줄 사이에 거꾸로 인쇄된 활자"라는 키에르케골의 말은 거대한 논리적 체계만 갖추면 철학은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내었다는 헤겔 철학의 거만함을 꼬집는 말이다. 객관성과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거대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의 구체적 실존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거대한 궁전을 지어 놓고서 그 자신은 오두막에 살아가야 하는 가련한 모습이 될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젊은 시절의 일기에서 아무리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외친다. 그는 어떤 종교강연에서 한 저술가의 예를 들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저술 때문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저자가 불행한 고난의 시련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민 끝에 어떤 목사를 찾아가서 충고를 구했는데, 그 목사는 찾아온 사람의 하소연을 다 들은 후 "그 누가 지은 "하나님의 사랑"이란 책을 읽어보시오. 그 책을 읽으시고도 만일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당신은 구원될 길이 없는가 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리는 어느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타당할지는 몰라도, 그 보편타당성이 나의 구체적 실존을 확인시켜주는 주체적 진리는 되지 못한다. 이 주체는 근대 이성주의에서의 추상적인 주관이나 인식론적 주관을 의미하지 않고 예외자, 단독자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결단하며 살아가는 실존하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주체적 진리가 논리적 명제에 국한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명제에 국한되어 생각하는 한, 진리는 한갓 논리적 추론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적 진리는 자신의 삶에 성실함을 의미하며 자신의 본래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주체적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러기에 부단히 자기 자신의 존재 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의 양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적인 의미의 진리는 한갓 명제적 진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성실한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골은 개인이 자신의 개별실존을 성취하는 바로 거기에 자신의 진리에 도달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개별 실존이 보편으로 약분되어 버릴 수 없음을 강조한다. 헤겔의 전체주의는 인간 개별 실존을 사변의 추상물로 환원하여 버림으로써, 개별 인간의 주체적 실존이 진리의 장이 되어야 함을 간과하였다. 키에르케골은 이 실존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설명한다. 첫째는 감성적 실존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감성적 욕구의 충족, 즉 향락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결국 인간을 쾌락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기회도 가질 수 없다. 이제 두 번째의 단계인 윤리적 실존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 단계는 양심을 가지고 윤리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윤리적 사명을 다 할려고 하면 할수록 항상 한계에 부딪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윤리적 단계로부터 종교적 실존의 단계로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의 참된 실존이 가능하게 된다. 신 앞의 단독자로서의 실존체험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실존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2) 야스퍼스

 

(1) 존재 물음

만약 실존철학이 본질이 아닌 실존 즉 존재의 양식에 대한 물음이라면, 우리는 야스퍼스로부터 존재물음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함의 모든 길은 모든 현상 속에 한없이 많은 부분 부분들과 수없이 분산된 것들을 샅샅이 살피며 존재 자체를 찾는다"라는 야스퍼스의 말은 존재물음을 철학함의 궁극적인 문제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 존재 자체는 모든 변화 속에 존속하고 있는 하나이자 전체인 것으로 추구되고 있으며, 그것은 신성(Gottheit)으로서의 근원적인 근거이다. 그러나 야스퍼스에 따르면, 이 물음 자체는 단순히 이론적 의도나 보편적인 존재론적 의도에서 또는 단순히 방법적인 회의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균열에 직면하여 가능한 실존이 당황하고 파산된 상태에서 제기된다. 이 존재 자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적 물음과는 달리 실존적 결단에 의해 비사유의 방식으로 경험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존재 자체는 오성의 추론적 방식을 통해 개시되어져야 할 대상적 규정성이 아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방식으로 존재에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존재 자체를 은폐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존재 자체는 모든 개별적 존재자를 넘어서 단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무규정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존재 물음은 그 자체가 초월이다. 이 존재는 모든 개별적인, 즉 대상적인 존재자들을 그 고유한 존재가능성에로 이끌어 주는 무대상적 근거이기 때문에 이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은 전통적인 대상적 물음과는 다른 그 자체 초월적 물음이다.

그러므로 만약 존재 물음이 개별적인 존재자에서 시작한다면 이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를 지시할 것이고 따라서 항상 존재 전체를 단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존재는 개별자의 존재를 자신 속에 포괄하고있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지평이요 포괄자(Umgreifende)이다. 이 전체로서의 존재는 모든 대상성의 비대상적 근거이고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포괄하는 근원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주체도 객체도 아닌 오히려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지평이다. 이 근원 지평은 주객이 분리되는 가운데서 그 형체를 취하여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존재 자체는 주객의 분리를 통해 비로소 형태를 취하고 표현되지만, 이를 통해 존재 자체는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은 존재의 균열이라는 존재 의미의 근본 방식들을 야스퍼스는 그의 독특한 "포괄자 존재론"(Periechontoiogie)으로 설명한다.

 

(2) 포괄자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을 포괄하는 존재 자체는 그 존재 방식이 이중적이다. 즉 한편으로는 개별적 존재자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전체로서 현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 존재자에게 규정된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나는 방식으로 현존한다. 이것은 바로 존재가 우리에게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사라진다는 이중적 존재 방식을 가진다. 말하자면 존재 자체는 우리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자신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포괄적 존재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다른 모든 존재는 항상 우리 인간에 대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존재 자체는 인간 존재를 통해서 비로소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은 존재 자체인 포괄자를 드러내는 포괄적 존재가 된다. 이 포괄적 존재의 존재방식들에 대해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한다.

먼저 우리 자신으로서의 포괄자인 현존재가 첫번째의 것이다. 존재 물음으로 중재되는 첫번째 근본 경험은 "나는 거기에 있다"는 말로 표현된다. 나는 시간의 한계 내에서 현존과 권력의 관심에 이끌려 살고 있는 존재인 포괄자이다. 그러나 이 포괄자인 현존재는 시공간적으로 규정된 대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괄자로서의 현존재는, 어느 것이든 나에게 현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들어가야 할 현실의 장이다. 나의 존재는 모든 대상성이 근거를 두고 있는 바탕으로서 그 자체는 비대상적이고, 단순히 시간과 공간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결코 그 자체가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현재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 현존재는 항상 죽음에 직면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현존재는 더 이상의 근원적인 포괄자를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의 포괄자는 의식 일반이다. 개인적이고 사실적인 의식으로서의 나는 나의 현존재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반면에, 나는 의식 일반으로서 보편타당한 오성의 사유와 "나는 사유한다"의 확실성에 참여한다. 이 의식 일반의 범주들은 대상의 사유를 위한 필연적 사유형식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대상의 존재 조건이 된다. 따라서 의식 일반을 모든 대상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포괄자이다. 그러나 이 의식 일반 역시 절대적인 보편성과 그리고 사유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할 때 한계를 갖는다.

세 번째의 포괄자는 정신이다. 무시간적 의식 일반의 추상성과 살아있는 현존재의 구체성과는 달리 정신은 나의 앎에 대해 자신 안에 폐쇄된 대상이 되지 않고 이념으로 남아 있게 되는 이해가능한 사유와 행위 및 느낌의 전체성이다. 이 이념은 모든 개별적 연구에 전제된 것이고 그 연구를 개별적 제약들과 인식들의 완결될 수 없는 계열에로 이끌어 가는 무제약적 전체이다. 이 이념은 또한 현존재의 우연성을 간직한 보편타당한 오성적 앎의 통일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식의 보편타당성의 필연적 조건인 오성의 단순한 형식적 통일성과는 달리 정신은 역사적 통일성과 시간적인 사건으로서 현실적인 것이다. 정신은 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마다 언제나 역사적이며 직업, 이념, 문화 이념, 민중 이념 등에서 전제되며 장소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념의 현실성인 정신의 통일성은 역사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형태이며,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혹은 거부하느냐가 한 시대의 모습을 새겨 놓는다. 세계와 시대의 역사적인 변동과 붕괴는 바로 이념의 좌초와 정신의 한계를 드러내 준다.

네 번째의 것은 세계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오성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근원적인 사실인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세계는 비록 우리 존재에 대해 마주 서 있긴 하지만, 객체화될 수 있는 대상 또는 세계 내부의 존재로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우리가 세계 존재에 접근 할 수 있게 되는 모든 현상들이 우리와 만나는 근거이다. 세계는 대상으로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안에서 직관의 형식들과 사유 형식들에 의해 개개의 대상성이 구성되는 곳이다. 세계는 우리의 대상적 사유에 의해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모든 추정적인 세계인식은 무너지게 된다. 세계는 우리의 유한한 인식에 대해 결코 개방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이다.

다섯 번째는 실존이다. 실존으로서의 자기 존재인 포괄자는 앞의 다른 포괄자들과는 달리, 나 자신과의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을 자신의 결의에서 나온 결단에 의해 존재에로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실존은 자신과의 관계를 맺게 하는 가능한 경험으로서 야스퍼스가 말한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비약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실존은 모든 포괄자들의 근거가 되는 포괄자로서 "나는 스스로가 될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온다. 실존은 스스로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모든 다른 포괄자들의 의미를 드러낸다. 실존은 자유를 통한 자기 존재이므로 파악될 수 없는 근원이다. 실존은 대치될 수 없는 역사적 절대성을 가지며 해석될 수 없는 방식으로 갑자기 현실이 되는 존재가능성이다. 실존은 세계를 향한 자유이며 그 완성은 나 자신의 역사적 제약성인 현존재의 현실을 자유롭게 떠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실존은 객관적 역사 전체에 내가 현사실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를 수행하는 실존이 개별자의 독백적 행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실존은 '실존적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실존은 초월과의 연관성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실존은 초월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월자와 연관되지 않은 실존은 존재의 확신을 결여하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삶에 빠진다. 이처럼 실존은 초월자에 의해 선사된 것이다. 따라서 야스퍼스는 "실존은 자기 자신과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의 초월과 관계하는 그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나 자신이 되도록 하는 힘인 초월에 대한 앎과의 일치 속에서만 오직 실존일 뿐이다". 초월은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며, 실존은 초월과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일치하는 장소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이 초월과 분가분리의 관계를 맺는 방식을 "철학적 믿음"이라 부른다.

여섯 번째는 초월이다. 초월은 우리의 철학적 믿음 속에서 현전하게 된다. 이때 이 현전은 그때그때 대변될 수 없는 한계상황의 경험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하는 사유에 의해 만회될 수도 혹은 보편타당하게 발언될 수도 없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이란 무규정적인 이름들인 "존재", "현실", "신성", "" 등이다. 이것들은 그 자체 상 내용이 텅 빈 것이며 실존적인 경험 속에서 비로소 그 내용이 충만해진다. 그것들은 대상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초월이 그 안에서 역사적 결단에 의해 접촉되고 느껴질 수 있는 경험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인 인격적 신에로의 약진인 존재의 접촉은 직접적이지 않고 "암호"의 상징적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암호는 어떤 저 세상의 신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하나인 무한한 신이 유한하게 실존하는 인간에게 세계적 존재자 안에서 감각적으로 현재하는 방식이다. 이 현재하는 방식은 그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다. 초월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수행하는 실존에게만 암호 속에서 현전적일 수 있기 때문에 초월의 나타남도 역시 실존에게는 역사적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이성이다. 초월로서의 일자와 결단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포괄자의 보든 방식에 관통하는 자기 자신이 되는 운동은, 일자에 의해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이 관계되도록 내맡길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러한 처신이 비로소 개별 존재자들 및 포괄자의 모든 방식들을 초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고 동시에 그것들의 일치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실존의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운동을 야스퍼스는 이성으로 파악한다. 이 이성은 모든 포괄자들의 "연결매듭"이다. 이성은 어떤 것도 산출해 내재하지 않으면서 모든 불일치를 일치시키려는 전체적 교제의 의지이다. 이성은 일치에로의 의지와 비역사적 절대적 일자에로의 의지로서 오성의 모든 고정과 논리를 넘어서는 사유이다. 이성은 일자를 탐구하는 철학함의 추진력이며 그 스스로 초월을 수행한다.

 

3) 사르트르

 

(1) 즉자와 대자

샤르트르는 그의 저서 "존재와 무"에서 존재를 즉자(즉자)와 대자(대자)로 구분한다. 즉자란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자신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른 의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마치 돌맹이가 존재하는 방식과 다름없는 존재이다. 이에 반해 대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 의식을 떠나서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대한) 의식이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의식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존재와는 다른 것, 즉 비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본래 존재의 부정이나 무화(무화)를 통해 생겨나야 한다. 즉자는 어떤 무도 품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대자, 즉 의식은 존재를 무화하는 활동이며 의식은 무로 인해 존재와 거리를 두거나 분리되어 있다. 의식 자체가 비존재이면서 무화의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의식은 자유이며 돌맹이인 즉자 존재와는 다른 존재의 양식을 갖는다. 인간은 다른 즉자 존재와 같이 이미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항상 무화의 활동을 자유로이 수행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핍과 공허와 무를 자신의 중심부에 전제하는데 무란 의식이 즉자가 아님을 나타낸다. 의식은 무를 창조한다. 존재 자체는 일종의 무이다. 이 존재로서의 즉자를 무화하는 과정에서 대자는 발생한다.

의식이 결여된 채 응결된 즉자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존재와 분리되어 있는 대자(의식)는 즉자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샤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자유이다. 그것은 의식적 존재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항상 가능성이지 완결된 기성품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어떤 외부의 것으로부터 예컨대 신으로부터도 규정되지 않는 그 자체 무이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실존의 공허를 매꾸어 가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바로 인간의 존재이며, 바로 인간 존재의 무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만큼은 본질이 실종을 규정하는 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며, 그런 한에서 실존은 가능성이다.

 

(2)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샤르트르가 야스퍼스나 마르셀과 달리 인간 실존을 무로 규정하고 어떤 신적인 존재로부터 규정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실존을 가능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개방성과 자유를 선언하려고 한다. 신의 도덕률, 선천적인 가치, 형이상학적 본질 등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려는 것을 거부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을 형성하고 창조해가는 존재이다. 버려진 채 세계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그의 실존에 대해 홀로 책임을 지고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선악을 스스로 결정한다. 스스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입법자이다. 자신 이외에는 다른 입법자도 있을 수 없고 스스로 선택하고 실존을 매꾸어 간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또한 그의 실존주의는 인간을 탈자적(탈자적) 존재로 간주하는 휴머니즘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있다. 인간은 자신을 외부로 기투하며 스스로를 초월하면서 실존한다. 이 경우 초월의 주체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왜냐하면 탈자적 인간이 신으로부터 탈락한데 치러야 할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저주받았다. 이 선택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이 선택은 바로 인간 존재가 자유임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와 선택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인간은 무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히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무한히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자유와 마추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미 타인의 시선에 붙들여 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나의 상황이 다른 상황이 되고 여기서 나의 자유는 제한을 받는다. 타인은 나의 가능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타인의 시선은 메두사의 눈처럼 나를 하나의 가능성에 고정시키고, 그에 의해 내게서 다른 가능성들이 거부된다. 나는 나의 자유의 한계 속에서 타인의 자유를 경험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인의 자유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므로 샤르트르에 있어서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은 분리될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실현해 가는 가운데 인간의 본래적 실존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어떤 초월적 존재도 인간의 실존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실존은 휴머니즘적이다.

 

4) 하이데거

 

(1) 현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역시 존재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다. 존재자의 존재가 전통 철학 속에서는 문제 되지 않은 채 존재자만이 문제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존재자와 존재를 혼동하여 그 차이점을 간과한 전통 철학을 해체시키고 존재 자체를 중심적인 문제로 다룬다. 모든 존재자가 그 안에 서 있는 존재의 사건을 시간의 지평 속에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존재의 물음은 존재자를 통로로 하여서만 탐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이며, 존재의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에 대한 물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존재 물음을 던지고 있는 존재자는 이미 존재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존재자를 실마리로 해서 그의 존재 구조를 밝히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이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나름대로 이미 이 물음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이란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 비해 탁월한 존재이해를 가진다. 말하자면 인간 존재는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항상 자신의 존재를 부채로 짊어지고 살며 항상 이 존재의 지평 속에 던져져 있다. 이 인간 존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 부른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 물음은 바로 이 특이한 존재방식을 가진 현존재 분석에서 시작한다. 이 현존재는 바로 존재 이해를 위한 기초가 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현존재 분석은 바로 기초존재론이다. 하이데거는 이 현존재의 특이한 존재 방식을 "실존"으로 부른다. 현존재는 그 존재함에 있어 존재함 자체가 문제가 되는 존재이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한다. 오직 인간만이 그 자신으로 존재하든지 안 하든지 식의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실존한다. 현존재는 처음에는 주체의 극으로 존재하여 그 뒤 그 자신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될 수 없는가 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는 단지 자기 자신의 근본 가능성들의 이행으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이 가능성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그 가능성들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 그 자신의 가능성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의 본질은 그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그 자신의 실존을 파악할 뿐, 어떤 고정된 본질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현존재의 본질은 바로 그 실존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분석은 "사실 자체에로"라는 현상학적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의 방법과는 달라야 한다. 선험적 방법에 의해 현존재는 더 이상 개시되지 않는다. 생활세계의 역사 안에서 현사실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의 분석은 현존재의 이해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자체가 해석학적인 존재자인 현존재는 현상학적 기술이 방법적으로 해석으로 이해될 때에만 합당하게 기술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에 대한 현상학은 오직 해석학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은 하이데거에 의해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대치된다. 이 해석학적 현상학은 현존재의 근본구조들, 즉 실존성의 해석을 통해 존재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현존재의 실존성은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방법적 실마리가 되며, 현존재의 근본구조인 실존범주들을 해석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실존범주는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존재 규정인 범주와는 구별된 개념이다. 이제 이 실존범주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2) 세계 내 존재

현존재는 거기(Da), 즉 이미 세계에 처해 있는 존재이다. 현존재는 이미 세계에 묶여 있는 존재이다. 이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란 술어를 마치 '공간적으로 안에 있음'이란 식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잉크 병 속에 잉크가 들어 있듯이 그렇게 세계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는 세계와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친숙해져 있고 세계에 던져져 있음을 말한다. 이 세계는 사유하는 존재와 동떨어져 있는 연장적 실체(res extensa)로서의 존재자의 총체가 아니라, 현존재 자체의 구성적 실존범주이다. 따라서 세계 내 존재는 우성 주위 세계를 이해하고, 주위 세계와 친숙해 있음을 말하며, 이때의 이해 방식은 곧 존재자를 다루고 사용하며 존재자에 관심을 쏟는 그런 왕래이며, 존재자는 이런 배려 속에서 "도구"로 만나게 된다. 도구는 봉사 가능성, 사용 가능성 등과 같은 자신의 "무엇을 위함"(Um~zu)에 의해 특징 지워지고 그것은 이미 나름대로 도구 전체 속에, 다시 말해 하나의 지시 연관 속에 있다. 이 지시연관은 현존재에 최종적인 근거를 둔다. 예를 들어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있고, 못은 시계를 고정시키기 위해 있으며, 이 시계는 현존재의 시간 계획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 도구의 존재 성격은 이론적 관찰에서가 아니라 오직 도구를 다루는 교섭 속에서만 드러난다. 도구적 존재는 바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손안에 존재"(Zuhandensein)이다. 이것은 바로 이론적 관찰에 의해 도구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둘러보며 관심을 쏟고 배려하는 것(Besorge)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이 도구는 손안에서 존재를 잃어버렸을 때, 즉 예컨대 망치가 망가졌거나 잃어버렸을 때 지시연관성이 드러난다. 이 지시연관성은 바로 현존재가 자신이 세계 내 존재임을 발견하게 해 준다. 현존재는 이 세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를 통해 이 세계와 친숙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현존재는 도구 존재와는 다른 존재인 타인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인은 도구처럼 배려될 수 없고 심려(Frsorge) 속에서 만난다. 이 타인은 바로 대중(Das Mann)이다. 이 대중들은 모든 존재 가능성들을 평균화시켜 버리고 일상적으로 누구라도 대신할 수 있는 그런 보통의 타인으로서 대중이다. 현존재는 이 대중 속에 몰입함으로서 실존의 본래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대중들은 비본래적인 실존의 양상이며, 이 양상 안에서 현존재는 자신을 바로 자기 자신의 가능성들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능성들로부터 자신을 풀어 주어 그것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할 짐을 없애준다. 그러나 이 대중의 비본래성 역시 현존재의 본래성과 함께 실존을 구성하는 범주이다.

 

(3) 처해 있음과 이해

현존재는 이미 대중의 익명성 속으로 던져져 있는 존재이다. 현 존재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기분에 휩싸여 있다. 이 기분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는 없으며, 명백한 것은 단지 기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존재는 이미 내던져져 있으며 세계에 내맡겨져 있다. 현존재의 내던져져 있음(Geworfenheit)이란 현존재가 바로 세계 내 존재로서 실존함을 이해하게 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실존함을 이해하며 자신의 존재 가능이 어떻게 처해 있는지를 알고 있다. 내던져져 있음은 바로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을 기획투사하여(entworfen)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드러나도록 하게 하는 근거이다. 그러므로 기획투사와 이해는 기분에 의해 열려진 영역에로 되돌려 지시됨을 말한다. 기분에 의해 젖어 있는 방식으로 현존재는 그 방식에 의해 그가 존재하고 있는 그 가능성들을 본다. 그러한 가능성들을 기획투사하여 밝혀내는 가운데 그는 나름대로 이미 기분에 젖어 있다.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의 기획투사는 자신의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는 그 현사실성에 떠 맡겨져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내던져진 기획투사이다.

 

(4) 염려와 죽음

현존재의 실존범주로서의 염려(Sorge)는 걱정이나 근심과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염려는 자신을 실존가능적 존재로 앞질러 이해하고(실존성) 세계 내에 이미 존재함(현사실성)과 세계 내부에서 만나는 존재자들에 머물러 있음(퇴락)을 포괄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그에게 세계 내 존재로서 그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한,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염려의 탁월한 방식을 불안으로 설명한다.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불안이라는 기분에 젖어 있으며 이 불안 속에서 그 자신의 가능성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공포와는 다른 불안은 현존재를 향상 주위 세계로부터 단절된 혼자 있는 상황으로 몰아 넣는다. 그런데 이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로 던져 준다. 이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자유롭게 자신의 실존 가능성을 선택하게 된다. 실존의 본래성을 선택하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이 양심의 부름을 현존재가 듣는다는 것은 어떤 사실적인 역사적 과오나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함을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실존범주이다. 현존재가 이 양심의 부름을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부름은 현존재가 이미 부채를 떠맡고 있는 무력한 존재임을 자신의 고유한 실존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자신의 무력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면, 죽음이야말로 현존재를 가장 무력하게 만든다. 그런데 만약 이 죽음이 현존재의 실존의 끝을 의미하거나 생물학적인 혹은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삶의 줄이 끊어진다는 사망이란 개념이 아니라면, 이 죽음은 인간을 가장 무력하게 만들어 동시에 이 죽음은 인간을 가장 고유한 실존의 가능성에로 들어서게 한다. 이 죽음은 단지 종말이 아니라, 현존재의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 현존재 안에 항상 깊이 파고들어 와 있다. 현존재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으며, 지금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이 현존재가 종말의 사건으로 연장하거나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존재의 실존에 깊이 관여해 있다면, 죽음은 바로 현존재를 가장 본래적인 실존가능성에로 옮겨 주는 적극적인 범주가 된다.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은 그 자신의 가능성에로 미리 달려감(Vorlaufen)이다. 이 미리 달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가장 고유하고 확실한, 그리고 규정되어 있지 않고 건너뛸 수 없는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내보이고, 이해하며 다가가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향상 존재는 불안에 직면하고 이 불안은 현존재를 고유한 본래적인 실존의 장으로 이끌어 준다. 그러므로 죽음에로 미리 앞질러 가 본다는 것은 현존재를 불안에 몰아 놓는다. 하지만 이 불안은 바로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실존적 결단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범주이다.

 

(5) 현존재의 시간성

현존재가 죽음을 앞질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은 현존재가 그 가능성을 자신에로 다가올 수 있다는 데서 가능하다. 이 다가옴(Zukunft)의 현상에 의해 현존재는 미리 앞질러 감이 가능해 진다. 이 앞질러 감이 가능한 것은 바로 현존재가 이미 내던져져 존재해 왔음이란 현사실성에서 유래한다. 이 존재해 왔음은 지나쳐 버린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져 있다. 그렇게 존재해 왔음과 미리 앞질러 감은 모두 현재화에 의해 현전한다. 하이데거는 존재해 오고 현재화하는 미래로서의 단일성을 시간성(Temporalit t)이라 부른다. 현존재의 존재를 시간성이란 범주로 설명하는 것은 현존재를 인격이나 주체 혹은 이성과 정신 등과 같은 무시간적이고 초시간적인 것에서 규정함으로써 현존재의 존재 시간성을 잘못 파악한 전통적 시간이해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인간을 시간적 존재로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 시간은 단지 물리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는 시간적이다. 현존재의 실존적 시간성을 탄생과 죽음이란 시작과 끝의 시간 계열에 묶여 있음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물리학적 시간계열에서 벗어나는 탈자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통상적인 시간지평은 한갓 현존재의 실존적 시간성에 의해 시간화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재는 본래가 염려의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존재해 왔음에서부터 미리 실존의 가능성인 죽음을 앞질러 경험한다는 시간성을 자신의 실존범주로 가진다.

 

 

4. 분석철학

 

현대철학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반동이다는 말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물론 크로체와 같은 대표적인 헤겔주의자들도 있긴 하지만, 거의가 탈헤겔적 경향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다른 철학적 흐름은 헤겔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지만 거의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헤겔로부터 빠져 나오기를 시도한 것은 영미의 분석철학이다. 분석철학은 현상학과 함께 현대철학의 두 흐름을 구성한다. 이들은 다 같이 헤겔철학의 극단적인 사변성에 식상하여 철학을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토대 위에 다시 구축하려는 방법론적 모색과 함께 등장하였다. 이들은 포괄적인 철학을 새로 만들려 하지 않고 철학과 과학에 대한 방법론적 반성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흐름은 이후의 현대철학의 큰 두 조류를 각각 형성할 정도로 매우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보다 잘라서 말한다면 현대철학은 이 두 방법론 간의 논쟁의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상학을 방법적 모델로 하여 발전한 해석학과 분석철학을 토대로 발전한 신실증주의 간의 학문의 방법에 관한 논쟁으로 현대철학은 채워진다. 대륙의 현상학이나 영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분석철학은 그 지적 분위기가 다른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후의 현대철학을 두 진영으로 갈라놓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후기 현대 철학에로 들어서면서 이 두 진영 사이의 경계점을 쉽게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만남의 지평이 확대된다. 특히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책이, 비록 해설을 곁들인 주해가 붙어 있긴 하지만, 독일에 소개된 이후부터 이 두 철학적 방법의 만남은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분석철학과 현상학은 다같이 주어져 있는 현상에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헤겔철학이 남겨 놓은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하려는 방법론적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은 직접 주어진 사태, 즉 언어 이전의 의식적 삶의 영역을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에 분석철학은 언어적 현상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상이점을 나타낸다. 이들은 다같이 꽁트의 실증주의의 영향하에 있지만 현상학이 실증주의의 원리를 의식에 직접 주어진 사실에 적용하는 반면에, 분석철학은 실증주의가 중시하던 실증적 소여를 언어적 구조로 대치하였다는 점에서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분석철학은 '언어분석'이란 다소 한정된 개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분석의 대상은 사물이나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이것들을 지칭하는 언어이며, 분석의 방법은 현상적 혹은 실험적 방법이 아니라 논리에 의한 언어분석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분석철학은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라는 명제 아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채널을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분석을 시도한다는 뜻이지 단순히 언어의 구조 자체를 분석하는 문법학은 아니다.

분석철학자들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의미를 언어 이전의 선험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다루는 현상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진다. 그러나 후기 분석철학은 이와는 달리 언어의 문제를 언어의 틀을 벗어나서 선험적 차원에서 혹은 행위연관 속에서 다루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즉 언어의 문제를 삶의 문제와 동떨어진 단순한 기호로 생각하던 초기 분석철학과는 방향을 달리한다. 우리는 분석철학의 이와 같은 흐름을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의 흐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의 흐름은 바로 분석철학 전체의 흐름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영향은 지대하다. 젊은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하여 초기 분석철학자들은 자연과학 혹은 수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그들의 언어이론도 언어와 사물 간의 관계를 일대일의 대응 관계로 생각하는 고정되고 기계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림이론' 혹은 '의미지시설'로 불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언어이론은 바로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고 후기로 오면서 언어는 단순히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언어와 세계 간의 관계를 신축적이고 다양하게 파악하려는 경향, 즉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이상 언어나 인공언어로써 기계적으로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입장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이론이 '쓰임새 이론' 혹은 '의미용도설'로 불리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이하에서 분석철학 전체의 흐름을 비트겐슈타인을 기점으로 하여 전. 후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먼저 분석철학의 형성과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 그리고 후기 사상으로의 전회와 함께 이루어진 일상언어학파의 형성 등으로 구분하여 다룬다.

 

1) 분석철학의 발생 배경

현대철학의 특징을 헤겔적 관념론에서 실재론에로, 거대한 체계확립보다는 엄밀한 철학적 분석에로 그리고 관념의 추상성에서부터 구체적 사실에로의 전환으로 규정한다면, 분석철학 역시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발생한다. 우리는 분석철학의 철학사적 기원을 통상 무어(G. E. Moore, 1873~1958)와 러셀(B. Russell, 1872~1970)로 삼는다. 이들은 캠브리지 대학 재학 중 헤겔주의자였던 매타가아트(McTaggart)와 브래들리(Bradley)의 영향은 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곧 관념의 의미는 정신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착상을 하게 되었고 마이농(Meinong)이나 프레게(Frege)와 같은 독일철학자들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실재론적인 전회를 이룩하였다. 무어와 러셀은 실재론의 입장에서 세계 전체를 포괄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철학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이들의 관심은 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실재론적인 형이상학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때 이미 철학의 유일한 과업은 진술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이지 세계 전체에 관하여 사색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여 주고 있었다. 사실의 세계에 대한 기술로부터 개념의 분석에로 옮겨가기 위한 토대를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 세계를 거대하게 기술하는 일보다는 세계의 그림인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에 철학이 전념해야 한다는 분석철학의 임무를 일찍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들은 분석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옛 실재론의 동지들과 결별하게 된다. 바로 이 분석적 관심이 카르납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업적과 연결되는 고리이다.

이들은 다 같이 언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언어는 차이점을 갖는다. 러셀은 무어에 비해 수학과 논리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러셀을 장래가 촉망되는 수학자로 일찍 칭찬하였다. 러셀은 무어에게 화이트헤드로부터 수학 개인교습을 받으라고 충고할 정도로 무어는 러셀에 비해 수학적 재능이 모자랐다. 그러나 무어는 이 충고를 받지 않았고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이 충고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러셀과 다른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게 된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러셀은 수학적 훈련을 삼으면서 언어를 수학적 기호와 같은 인공언어로 구성하는 데 익숙한 재능을 보인다. 그는 일상언어에는 무관심하고 단지 사유체계를 수학적 부호로 논리화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바로 논리실증주의자들과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에게 유산으로 남겨진다. 이에 반해 무어는 언어의 기호화 내지는 논리화에 대한 상식의 철학의 입장에서 반대한다. 무어에 있어서 분석은 일상언어에 대한 충실한 번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공동으로 지은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는 무어에게는 일상성과 상식성을 벗어난 한갓 기호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무어의 일상 언어에 대한 관심은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을 통해 일상언어학파를 형성하는 데로 이어진다.

 

2) 무어

무어는 처음에는 브래들리나 맥타가트의 형이상학적 영향하에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자신 비록 관념론에서부터 실재론으로 옮겨 왔지만, 역시 형이상학에 기울어 있었다. 물론 헤겔과 같은 관념론적이고 일원론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실재론적이고 다원론적 형이상학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플라톤적 형이상학에서부터 이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관념론 논박"이란 논문을 발표하고 나면서부터 차츰 무어의 관심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성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된다. 무어는 궁극적 실재를 탐구하거나 철학을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각색해내는 일에 식상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관심은 거대한 체계를 구성하는 도구인 언어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분석에로 모아졌다.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몰아넣기 위해 사용된 허황하고 애매한 말들을 하나 하나 분석하는 일을 자신의 철학의 과제로 삼는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세계나 과학이 나에게 철학적 문제를 암시해 줬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철학적 문제를 암시해 준 것은 다른 철학자들이 세계와 과학에 관해 말한 것들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어떤 특정한 철학자가 말한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진실로 명백히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철학자가 의미하는 것이 참 혹은 거짓이라고 생각할 어떤 진실로 만족스러운 이유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일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철학의 동기가 언어에 대한 분석적 반성에 있음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신은 자비하다""실체는 관념이다" 혹은 "이데아는 영원하다"는 등의 형이상학적 진술은 마치 "토요일이 침대에 잔다"와 같이 허황하고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무어는 철학의 과제가 일차적으로 개념이나 의미의 분석에 있다는 사실은 그 후의 분석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 실재를 찾고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확인하려는 돈키호테적인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철학은 스스로 작지만 매우 중요한 일, 즉 의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자신의 철학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다. 대륙의 철학이 상식을 경시하고 주어진 것을 관념의 산물로 추상하였던 데 대해, 무어는 상식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철저하게 반박한다. 만약 철학이 관념과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면 철학자는 현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창백한 관념론자에 지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헤겔의 추상적 관념론에 반대하여, 현실을 주어져 있는대로 기술하려는 현상학과 무관하지 않는다. 단지 현상학과 달리 무어를 통해 형성된 분석철학은 그들의 관심을 사실에 대한 기술에서 개념과 언어에 대한 분석에로 방향을 정했다는 사실에서 갈라지게 되었다. 무어가 이와 같은 방향으로 자신의 철학을 몰고 나가게 된 사상적인 추진력은 그의 "관념론 논박"과 상식의 철학 때문이다.

신실재론의 운동은 무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903년 그의 유명한 "관념론 논박"에서 당시 영국 철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관념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전통적인 관념론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 안에 있는 관념들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모든 실재는 정신적인 것이다.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됨이다.

 

이와 같은 진술은 진실로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외부에 물질적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도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어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모든 실재는 정신적이다."는 추상적 진술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이 진술들을 '' 연필 혹은 '' 책상 등과 같은 개별적 대상을 포함하는 팽창되지 않은 진술로 환원하려고 한다. 어느 날 유명한 관념론자가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청중의 한 사람이었던 무어가 강단 앞으로 나가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강의 탁상을 손으로 화를 내면서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무어는 상식을 대변하여 철학을 건전한 상식에 토대한 철학으로 재구성하려고 하였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간에 감각 소재(sense~data)가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무어가 이처럼 보편적 개념이나 궁극적 실체를 감각소재로 환원하는 것은 영국의 유명론(유명론)적 전통에 따른 것이며, 건전한 상식에 근거한 실재론을 토대로 관념론자들의 오류를 분석하는 일과 연결된다. 무어는 전통적인 관념론의 범례인 버클리의 관념론은 논박한다. 이 논박을 통해 무어는 버클리의 관념론은 우리의 의식 외부에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세계를 부정하는 모순을 범한다고 반박한다. 감각 소재가 우리의 정신에 관계는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정신에 의존적인 것은 아니다. 감각 소재는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존재한다.

무어는 이와 같은 관념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우리의 정신 외부에 있는 대상과 이 대상에 대한 지각 사이에는 논리적 거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 의해 지각된다는 사실 때문에 대상이 의식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여 대상을 정신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을 한다. 관념론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대상과 지각을 혼동하여 모든 존재가 정신적인 것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관념론자들은 존재를 의식 혹은 감각 속에 잘못 흡수시킨것이다.

그러면 감각이나 지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채널이 아니라 단지 외부에 있는 대상을 단순히 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지각은 항상 의식의 외부에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이다. 그러므로 관념론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우리들의 의식과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세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이 버클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관념론자들에게는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무어의 답변은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여 증명할 수밖에 없다.

무어는 철학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처럼 보이는 물음을 묻는 데 관심을 가진다. 즉 관념론자들처럼 고상하지도 휘황찬란하지도 않지만 가장 건전한 태도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보았고 또한 본 것을 용감하게 "황제는 옷을 입지 않았다"고 말한 소녀처럼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그 당시 영국사회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관념론에 대한 논박을 통해, 대상이 우리들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식에 호소해서 증명한다. 전통적으로 상식은 보편화되지 않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경시되어 왔지만 무어에 있어서 우리 모두에게 갖추어져 있는 건전한 양식(양식)인 것이다.

무어는 그의 논문 "상식의 옹호"(A Defence of Common Sense)에서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상식적 신념을 나열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물질이 존재한다거나 정신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의 신체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사실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독자들에게 독자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기를 요구한다. 감각적으로 주어져 있는 손을 지각한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똑바른 막대기가 물속에서는 휘어져 보이고, 달리는 기차는 바퀴가 없는 것으로 지각되지만, 어떤 상황하에서든 감각 소재만큼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 감각 소재의 객관적 존재를 관념으로 추상화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엉뚱한 생각이다.

무어가 상식을 옹호하는 예를 하나 더 들면,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철학적 주장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약 이 명제가 참이라면, 우리가 점심을 먹기 전에 아침을 먹었다는 사실을 수정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반문한다. 무어가 상식을 옹호하면서 전통적인 철학에 반기를 드는 것은 철학자들이 상식과는 정반대로 논리의 조작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지식과 하나의 지식을 논리적으로 잘못 연결하는 데서 혼란을 일으킨다. 사실과 사실을 논리적으로 잘못 연결함으로써 사유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무어의 철학의 관심은 논리적 착각에서 비롯된 엉뚱한 결론은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이와 같은 관심은 그가 러셀이란 동지를 만남으로써 더욱 가속화되었다.

우리가 무어를 분석철학에 토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의 철학적 태도일 것이다. 그는 철학적인 문제에 하나의 완전한 답을 내리기를 거부하고, 단지 논리적인 착각으로부터 초래할 수 있는 사유의 혼란을 지적함으로써 그릇된 언어사용이나 논리적 조작에 의해 병든 지성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그의 철학적 태도는 그 당시 우리의 사고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관념론에 날카로운 분석의 매스를 가함으로써 어떤 형이상학적 독단으로부터도 자유스러워지려는 그의 철학적 스타일에서 비롯된 분석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3) 러셀

버틀랜드 러셀(B. Russell, 1872~1970)은 오늘날까지 서방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영국의 철학자이다. 특히 1차대전 이후 러셀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주원인은 그가 한때 옥고를 치를 정도로 철저한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영국인 특유의 비타협성을 가진 러셀은 지배적인 견해나 선입견에 끝까지 항거하는 자세를 말년까지 고수하였다. 그는 많은 저술활동을 했으며, 철학 이외의 정치적인 문제나 그 밖의 여러 방면으로도 그의 영향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러셀은 무어와 함께 분석철학에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특히 그는 수학자로서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고,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와 함께 저술한 "수학 원리"는 수학을 학문적으로 정초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러셀의 사상은 크게 전.후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수학연구에 몰두했던 청년 러셀 역시 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브래들리로 대표되는 영국 관념론에 심취하여 있었다. 그는 플라톤주의자로서 수학을 연구했다. 그는 경험적 현실밖에 관념이나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굳게 견지하였다. 그의 "수학원리"는 바로 철학을 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연역적 학문으로 생각한 그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는 저서이다. 이처럼 러셀은 그 당시의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그리 이탈하지 않고 수학을 관념적 실재를 다루는 학으로 규정하는 브래들리나 화이트헤드와 같은 플라톤주의자의 모습을 지녔다.

그러나 말년의 러셀의 모습은 실증주의자의 모습으로 차츰 변한다. "수학 원리"의 공동 집필자의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에 깊이 빠져들어 소위 하르트만(N. Hartmann)과 함께 신형이상학에로 방향을 정한 반면에, 러셀은 논리 실증주의자와 연결되는 실증주의자로~꽁트의 고전적 실증주의에 대해 신실증주의자로서~변신을 한다. 보편자의 문제는 이제 그에게는 구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고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철학은 이미 연역적 학문이 아니라 영국 전통의 경험론을 잇는다. 수학은 이제 과학은 연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는 자연과학적 방법만이 인식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과학주의자가 된다. 러셀은 확고한 체계를 수립하는 형이상학자들의 일에는 싫증을 느낀다. 자연과학만이 제대로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인식수단이다. 철학은 자연과학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철학이 도덕이나 종교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차차 실증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이와 같이 러셀의 실증주의적 경향은 그가 관념론에 철저하게 반대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는 개체와 개체 간의 본질적인 내적 관계가 있고 이 관계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브래들리의 관념론에 반대한다. 러셀은 존재하는 것은 감각 소재(sense~data)뿐이며 무수한 개체들만이 실재임을 주장함으로써 다원론적 입장을 취한다. 또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의 세계는 덜 무성한 것이 되었다. 오캄의 면도날은 점차 보다 깔끔한 실재의 그림을 나에게 제공하였다."라고 말하는 데서 그가 전통적인 영국 경험론의 맥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세계를 개체로 분석하여 오류를 피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러셀의 입장은 그의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과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에서 체계화된다.

그는 "기술이론"에서 한 낱말은 그 낱말이 지시하는 대상을 가질 경우에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한 문장은 실제로는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주장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현재 왕은 대머리이다"와 같은 문장은 이 문장이 지시하는 어떤 대상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사이비 문장이다. 어떤 종류의 진술에 있어서 이름같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이름이 아니고 위장된 기술(기술)이다. 한 문장의 의미를 그 문장을 구성하는 낱말의 의미가 있고 없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명제 함수개념을 소개하였다. 예를 들어 "나는 한 일각수를 만났다"란 문장은 그 자체로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긴 하지만 '일각수'란 낱말은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따라서 그 문장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러셀은 의미분석이라는 철학의 과제를 기초하였으며, 언어분석이란 과제를 철학으로 끌어 온다.

이름과 그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확인한 러셀의 기술이론은 그의 논리적 원자론에서 더욱 드러난다. 언어와 세계 사이에는 논리적 대응 관계가 있다는 러셀의 확신은 세계를 수학적.논리적 구조로 환원하려는 입장과 연결된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그림 이론은 그의 친구면서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의 입장이었는데 아마 러셀은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러셀은 세계가 수학적 논리적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것을 이상 언어 혹은 인공언어인 수학적 부호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가 "나는 항상 가능한 가장 작은 수의 장치를 가지고 철학을 진행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류의 위험을 감소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논리분석에 의해 관념론이 범한 오류를 방법적으로 차단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이트헤드와 공저한 "수학원리"는 기호논리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와 같은 러셀의 입장은 상식과 일상언어를 중시했던 무어와는 다른 점이다.

러셀은 우리가 이상 언어를 구성할 수 있다면 그 언어는 실재의 구조와 동일하다는 신념을 가진다. 우리는 그 언어를 가지고 세계의 진정한 구조를 적절하게 기술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논리적 원자론이 형성된다. 이상 언어는 일상언어처럼 모호하거나 애매한 것이 아닌 정확한 언어이다. 우리의 일상언어는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다의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러므로 이상 언어를 통해 논리적 구조가 충분히 표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복합명제는 러셀이 '원자적 사실'이라 칭하는 요소명제로 그리고 이 원자적 사실은 그것의 관계항인 개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고유명사로 표현된다. 이 사이의 논리적 구조는 다름 아닌 세계의 다원적인 구조와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살펴볼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입장과 거의 유사하다. 이와 같이 하나의 개체라는 블록(block)으로 쪼개는 논리적 원자론은 쓸데없는 관념론적 유희를 철학에서 배제하려는 실증주의의 원칙과 그 정신을 공유한다.

 

4) 논리실증주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는 종종 분석철학과 혼용되어왔다. 왜냐하면 그 정신이나 목적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조들에 있어서도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공통점을 가진다.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은 이들에게 매우 영향을 미쳤지만, 논리실증주의는 보다 급진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들의 관계를 모든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분석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과학자들이거나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쉽게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운동 자체는 비엔나 학파(Vienna Circle)라 불리는 일군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1922년 비엔나 대학의 철학교수 모리츠 슐릭(M. Schlick)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여기에는 바이스만(F. Weismann), 노이라트(O. Neurath), 파이글(H. Feigle), 카르납(R. Carnap), 괴델(K. G del)등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근처에 있는 비트겐슈타인과 접촉을 가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들은 나치에 의해 쫓겨나 영국이나 미국으로 명하였고 2차 대전이 끝난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야 독일로 다시 돌아 왔다. 이들이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하였지만 이것은 오히려 다른 지역에로까지 이들의 입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실증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검증가능하고 과학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과 다른 편으로는 검증가능하지 않고 비과학적이며 따라서 무의미한(nonsense)것 사이에 논리적 쐐기를 박고자 한다.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일이 그들의 일차적 관심이다. 물론 형이상학을 부정, 극복 비판해 온 것은 고대 희랍에서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이 실증주의자들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흄(D. Hume)에게서이다. 철저한 경험론자로서의 흄은 철학에서부터 형이상학을 영원히 추방하려는 극단적인 태도를 가졌었다. 만약 어떤 책이 "성질이나 수에 관한 추론도 아니고 사시로가 존재에 관한 실험적 추론도 아니라면, 다 불태워 버려라."는 흄의 태도는 신학이나 강단 형이상학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참과 거짓을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진술은 무의미한 것이다. 예를들어 '2^26^2=4'라는 진술이나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다'는 진술은 그 형식상 항상 참임을 증명할 수 있다. '북한은 핵시설을 가지고 있다' 혹은 '코끼리는 비스킷을 좋아한다'라는 진술은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참이거나 거짓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마치 '둥근 사각형은 네모난 삼각형보다 각이 많다'라는 진술만큼이나 무의미한 진술, 즉 사이비 진술이다.

그러므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어떤 진술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의미 충적적인 조건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진술의 구조가 필연적으로 참일 수밖에 없는 진술, 즉 칸트식으로 말하면 분석적 진술이다. 이것은 그 진술을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 진술을 말한다. 위의 예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다'라는 진술은 그 구조상으로 필연적으로 참일 수밖에 없는 진술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술의 참과 거짓이 경험적 사실에 의해 검증가능한, 즉 종합적 진술이다. '코끼리는 비스킷을 좋아한다'는 진술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만약 이 두 조건을 결여한다면 검증 가능성을 결여하고 따라서 무의미한 진술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실증주의가 말 그대로의 형이상학 자체를 부정한다고 해석해서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단지 말할 수 잇는 것만을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자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초월적 실재가 있다 없다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일 뿐, 궁극적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자는 그의 느낌이나 정서 또는 매우 심오한 진지함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명제(proposition)일 수 없는 단지 무의미한 언술일 뿐이다. 실증주의자는 문제 자체가 설립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논쟁을 일삼는 것을 거부한다.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이 있다"(Es gibt nur das Gegebene)는 슐릭의 선언은 실증주의를 대변하는 기본적인 강령이다.

이와 같은 실증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고 생산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카르납(R. Carnap, 1891~1970)이다. 카르납도 다른 비엔나학파의 회원들처럼 소위 통일과학(unified science)의 이념을 선언하였다. 모든 진술은 물리학적 언어로 환원되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리학주의를 철학의 영역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사람인 카르납은 원래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러셀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카르납은 수학은 물론이고 물리학적 방법에 의해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카르납은 러셀이 수학적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에 이것을 경험론적 전통과 결합하는 일에 보다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카르납을 '논리적 경험론자'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들을 소박한 꽁트의 실증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신실증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카르납은 분석적 진술보다는 경험적 진술이 유의미하다는 신념을 보다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연과학의 위엄을 더 높였다. 카르납은 그의 논문 "심리학과 물리 언어"에서 심리학의 모든 문장은 물리 언어로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신적 대상을 표현하는 심리학도 물리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 '물리 언어는 보편언어이다.'라는 그의 말은 어떤 진술이든 관찰 가능한 물리 언어로 환원될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무가 무화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은 물리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사이비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는 전혀 부정적인 것 또는 무엇인가가 현존하지 않는 것인데, 이 단어를 활동과 행위의 주체로 삼거나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처럼 카르납은 사회과학이나 정신과학까지도 자연과학의 법치하에 포섭시키려 한 통일과학의 이념을 그 절정에까지 실현시킨다.

그런데 검증 가능성의 원리는 근본적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차츰 이 실증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첫 번째, 검증원리는 근본적으로 감각 경험에 호소한다. 그런데 이 감각 경험이 만일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라면, 결국은 유아론을 낳을 것이며, 경험의 객관성이 문제 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관찰이 단순히 사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면, 관찰 명제의 보편성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검증의 원리가 과학적 예측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과연 이 예측 자체가 보편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이다. 과학적 명제 자체도 검증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모든 물은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는 100에 끓는다"라는 과학적 명제는 검증가능하지만,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명제는 완전한 검증이 가능하지 않다. 세 번째 검증원리 자체가 검증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든 현상은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 과학적 제국주의의 식민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현상들이 있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말았다. 예컨대 사랑하는 애인이 흘린 눈물을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물리적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의미는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오히려 이것이 바로 그 눈물의 진실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상과 같은 몇가지의 문제점들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논리실증주의는 자폐증에 걸린 사람처럼 결국은 시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검증원리를 약한 의미로 수정하여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바로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의 원리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기 현대철학에서 다시 언급된 비판적 합리주의를 통해 다시 보충될 것이다.

 

5)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이 분석철학에서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무어, 러셀 그리고 논리실증주의로부터 일상 언어학파로 전환하는 근본적인 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논리실증주의로 완성된 과학주의가 스스로 위엄을 포기하고 일상의 철학으로 변신하게 한 분기점을 비트겐슈타인이 마련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사상적 전환과 일치한다.

우리는 통상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후기로 나눈다. 전기는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다듬어진 논리적 원자론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당시에는 러셀과 함께 논리적 원자론을 형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의미문제 역시 의미지시설(referential theory of meaning)의 입장을 나타낸다. 즉 의미 있는 문장은 사태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는 명제이다. 의미 있는 문장은 사태에 대한 그림이다.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지만, 어떤 그림도 그 그림이 나타내려는 사태와 일대일의 대응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러셀의 입장과 같다. 의미 있는 문장은 그 문장이 지시하는 사태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지시설은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 발언은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철학이 많은 종류의 사이비 문제를 일으키는 언어적 혼란을 치유하는 과제를 가져야 한다는 언어 분석철학의 정신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나 논리실증주의자인 카르납과 마찬가지로, 일상언어를 철학적 표현의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불신을 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부호나 기호보다 훨씬 정확성을 띠고 있는 부호나 기호를 가지는 기호논리학의 언어와 같은 이상적이고 인공적인 언어의 구성을 선호했다.

그러나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그는 이제 수정같이 맑은 얼음에서부터 거친 땅으로 돌아가기를 선언한다. 이제 이상 언어의 정확성을 포기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마당으로 돌아가자는 태도의 변화를 보인다. 그는 후기저술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이와 같은 자신의 변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논리~철학 논고"를 완성한 후 자신의 입장에 회의를 품고 철학을 떠났다. 그는 다시 철학에 돌아오면서 자신의 초기 입장과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물론 전.후기의 사상의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에 관련된 논쟁들이 제기되지만 우리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의 사상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기의 그림이론을 포기한다. 말하자면 표현의 의미는 그것에 대응하는 지시체의 현존에 달려 있다는 입장에서 벗어나 표현의 쓰임새(use)에서 찾으려 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의 형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점은 이미 무어에 의해 강조되었었고 그 이후 옥스포드학파의 분석철학자들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 언어는 마치 연장이 각각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그 고유한 쓰임새가 있다. 이 쓰임새가 바로 언어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즉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의미이다. 이 방법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유의미한 언어사용이다. 우리가 베개를 가지고 못을 칠 수 없고, 못을 베고 잠을 잘 수 없듯이, 언어는 그 고유한 기능과 쓰임새를 가진다. 이 쓰임새에 맞게 언어게임을 한다. 언어를 수단으로 우리는 한 종류의 담화에서 다른 종류의 담화에로 이동해감에 따라 여러 가지 게임을 한다. '언어게임'에서 낱말들은 사람과 사물들을 서술하고 배열하고 지시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인공언어는 일상적인 개념 사용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심각한 왜곡이나 편견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공언어를 가지고서는 사실을 진술하고 주장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노출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의 복잡한 삶의 형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인공언어를 갖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용도설'(use theory of meaning)로 넘어 간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는 1919년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던 러셀과는 단절하고 오히려 무어의 입장을 수용하는 데로 나아간다. "당신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일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던 명석한 두뇌의 무어도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석한 후, 비트겐슈타인의 방법을 성공적인 방법으로 인정하였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용도설을 간추려 보자.

그는 "논리~철학 논고"에서 마치 물리학자처럼, 모든 언어는 원자적 진술로 분해될 수 있고, 이 진술은 하나의 사실을 지칭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의미지시설을 견지했었다. 일상언어는 우리에게 애매하고 모호한 의미를 전달해 주기 때문에, 이상 언어로 환원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는 머지않아 초기 자신의 언어관을 인위적이고 언어의 고유성을 왜곡시킨 상상적인 구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결코 획일적인 그물로 싸잡아 넣을 수 없는 다양성과 신축성을 갖는다. 만약 언어의 의미를 언어의 지시체로 규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많은 언어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폐기된다. 예를들어 "어머나!" 혹은 "! 아름답다"란 문장은 그 지시체를 갖지 않지만 우리는 사용하면서 의미를 서로 이해하고 전달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초기 그림이론에 대해 스스로 회의를 품게 된 것은 자기 동료인 경제학자 피에르 스파라와의 토론을 벌이던 중이다.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이 명제는 그것이 묘사하는 사실과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갖는다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고 있을 때, 스파라는 네아폴리타 사람의 몸짓을 하며 조소하는 듯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논리적 형식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질문 때문에 초기의 입장을 포기하게 되었음을 회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사과'라는 단어는 하나의 이름으로서 그 대상을 가지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붉은 사과'란 단어 역시 그렇다. 그리고 '하나의 붉은 사과'란 문장도 우리가 그 대상을 확인하여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한 문장이다. 그러나 '다섯 개의 붉은 사과'라고 하면 좀 어려워진다. '다섯'이란 단어가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어가 어떤 경우에 사용되는가를 익히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진 않지만 말이다. 나는 사과나 붉은 색상을 가리킬 수는 있으나 '다섯'이라는 수를 가리킬 수는 없다. 그러면 '다섯 개의 붉은 사과'란 문장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가령 어떤 사람을 '다섯 개의 붉은 사과'라고 쓴 쪽지를 주어 가게에 보냈다고 하자. 그 가게 주인은 '사과'라고 표시된 상자로 가서 색상표를 보고 붉은 색을 골라 다섯을 셀 것이다. 그가 만약 ''이나 '여섯'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런 행동을 했다면 그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 단어나 문장의 의미는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이는가에 달려 있다. 그 가게 주인은 '다섯'이란 단어의 쓰임새를 올바로 알았기 때문에 그 쪽지에 쓰인 것을 이해한 것이다. 예컨대 '망치'란 단어가 무엇의 이름인지만을 알고 그 쓰임새를 모르는 사람은 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자면 '망치'란 단어를 이해하는 것은 그 단어의 용도를 알기 때문이다. 바둑게임의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바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의미 역시 그 사용규칙을 모를 때는 이해하지 못한다. 게임의 규칙을 알 때 비로소 바둑을 이해하듯이, 언어의 사용규칙을 알 때 비로소 의미를 이해한다. 이런 상황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language~game)으로 규정한다.

초기의 "논리~철학 논고"에서는 단어가 반드시 이름이어야만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철학적 탐구"에서는 단어가 이름이 아니고, 이름으로 쓰일 수 있으나 다른 식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즉 단어의 고정된 의미체계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만약 언어가 더 이상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면, 언어를 가지고 하는 놀이는 어떤 고정된 규칙도 없이 일어나는가?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놀이에는 모종의 공통된 속성을 가지듯이, 언어 역시 한정적인 공통된 속성을 가지 않지만 일종의 유사성을 가지고 일어나는 게임이다. 이것은 바로 그가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 부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종의 유사성을 가진 것처럼, 언어 역시 모종의 유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가 가진 애매성과 다양성을 회피하여 이상언어에로 돌아가기보다는 일상언어로 되돌아와 이상 언어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유의미한 것을 이해하기 위한 변신을 수행한다. "만세!", "됐어!"라는 단어는 무엇의 이름이나 그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한다.

이상과 같은 일상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그의 철학적 입장을 대변해 준다. 말하자면 무수한 일상언어의 수많은 쓰임새를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 물론 가능하지도 않지만 철학적 문제를 유발하는 잘못된 언어사용을 지적하는 일이 그의 관심이다. 이것은 마치 파리통에 빠져 있는 파리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릇된 언어사용에서 비롯된 병든 지성을 치료적으로 분석(therapeutic analysis)하는 일과 같다. 이제 일상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을 더욱 체계적으로 다듬어 가는 일상언어 학파를 만날 것이다.

 

6) 라일

근본적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을 계승하면서 분석의 방향을 언어문제로부터 전통적으로 문제가 되어 온 정신 개념에로 돌려 하나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 길버트 라일(G. Ryle, 1900~1976)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나오기 4년 전인 1949년에 주저인 "정신의 개념"(The Concept of Mind)을 출간했다. 이 두 저서가 일상언어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란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라일은 특히 정신~몸이라는 전통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라일의 관심은 매우 국한되어 있다. 그는 우리가 정신에 관하여 사유하면서 사용하는 개념의 논리적 약도(logical geography)를 교정하는 것 이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전통 철학이 정신~몸의 관계에 대해 가졌던 혼란을 치유하는 일이다. 그는 "정신의 개념"에서 정신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논리적 약도를 교정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라일은 정신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철학자들이 과오를 범한 것을 분석한다. 특히 데카르트는 정신과 몸이 마치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범주착오(category mistake)이며, 데카르트의 신화로 지적한다. 이것은 마치 정신이 몸이라는 기계 속에 유령처럼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착오를 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일은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을 일종의 데카르트적인 교리(doctrine)로 고발하면서 철학적 분석을 일상언어에 호소하여 수행한다. 그는 "정신의 개념"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당신이 대학을 방문하여 안내자로부터 경기장, 운동장, 도서관, 기숙사 등을 안내받고 난 이후, 당신이 나는 "여러 대학의 시설들을 눈여겨보았소, 그런데 대학은 언제 보여 줄 작정이오?"라고 안내자에게 말한다면, 당신은 바로 범주착오를 범한다. 왜냐하면 마치 대학을 대학의 부속 건물들과 동일한 실체로서 가정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대학의 건물과 따로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대학은 바로 당신이 본 바 있는 모든 것들이 조직되어 있는 그 방식을 따름이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가 정신을 몸과 다른 실체로 생각한 착오와 동일한 것이다. 라일은 또 하나의 예를 든다. 일개 사단이 행진을 하고 있는 군대 행렬을 보고 있는 어린애의 예를 든다. 그가 각종 대대와 포대와 기병대 등을 보고 나서 사단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똑 같이 범주착오를 범한 것이다. 이 역시 사단이 각종 대대와 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일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공간 내의 물체에 적용되는 갈릴레오의 기계론적 이론은 채택하여 이것이 정신에 적용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정신은 몸과 달리 기계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교리인 것이다. 정신은 비물리적인 데 반해, 몸은 비정신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렇다면, 정신과 몸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데카르트는 이 둘을 마치 대학과 대학의 건물을 분리하여 생각한 것처럼, 상호 분리시켜 놓고서 어떻게 상호 작용을 설명해야 하는가를 고심하는 큰 실수를 범하였다. 정신과 몸은 전적으로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을 무시하고 동일한 두 실체로 분리하여 놓은 데카르트의 신화를 벗어나기 위해 라일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한다.

라일은 정신적 개념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분석하여 전통적인 이원론을 제거하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지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그를 그렇게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말해 보자. 물론 그의 머릿속에서 일련의 지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교양있는 행위를 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를 지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행위가 바로 그를 지적인 사람으로 판단하게 한다. 이 지적인 능력인 지능은 사적이고 은밀한 개인적인 정신현상이 아니라 지적 행위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행위자가 어떤 행위가 지적인지를 알아야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능이라는 정신적 현상과 지적 행위를 따로 구분하는 착오를 범한다. 지능은 어떤 개인적인 비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공개적 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논리학을 배우고 재치가 있고 글을 잘 쓰며, 바둑을 잘 두는 것은 모두가 지능의 증거이다. 지적인 것은 바로 지적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라일은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정신과 몸을 안과 밖과 같이 이원화하는 것은 데카르트가 저지른 큰 실수임을 지적한다.

라일은 이와 같은 것을 일상언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시 분석한다. 예를 들어 "그의 행위는 허영심에서 유발되었다"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그는 마치 사과나무 줄기를 잘랐기 때문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과가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듯이, 허영심이란 감정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허영심에 찬 물리적 행위가 일어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고 말한다. 이것은 허영심이란 내부적인 정신적 감정과 그 감정에 의해 유발된 외부적이고 신체적인 행위를 두 개의 독립된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데카르트적인 범주착오이다. 우리가 정신과 몸이란 두 개의 실재물을 가지고 있고 이 사이에는 신비로운 연결이 있어서, 인과적 상호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라일의 생각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로써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단체정신으로 무장한 야구팀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에 데카르트적인 범주착오를 일으키면, 우리는 단체정신이란 것이 선수들의 동작을 야기시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물이라고 잘못 생각하지, 그 팀의 모든 행동과 형태 속에 나타나는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라일의 입장은 정신의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정신이 아니라 정신의 행위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식하고, 지성을 고양시키고, 이해하고, 의지하며, 느끼고, 상상하는 등등의 행위는 모두 육체와 상관없이 정신에 의해 일어나는 결과로 생각한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었다. 라일은 이에 반대하여 정신에 관한 모든 주장 속에는 몸의 행위에 관한 사실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아낸다는 것은 단지 어떤 종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 보는 것에 불과하다. 정신의 활동은 다름아닌 정신적 행위 자체의 활동이다. 따라서 정신의 작용을 기술하는 것은 바로 정신적 행위들이 일어나는 방식들을 기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7) 오스틴

오스틴(J. L. Austin, 1911~1960)은 옥스포드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그의 학문은 2차 대전을 중심으로 초기와 후기의 사상으로 나누어진다. 전쟁 전에는 라이프니쯔와 희랍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관심을 가졌었다. 전쟁 후에 그는 독자적인 철학의 방법을 발전시켰다. 오스틴은 후기에 와서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 철학적 용어들의 문제들을 뒷전으로 하고, 철학적 이론보다도 일상언어를 명확히 하고 일상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오스틴은 무어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상언어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오스틴은 일상언어 자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는 그의 일차적인 관심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일상언어의 분석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비트겐슈타인과는 태도가 다르다.

그의 주저인 "How To Do Things With Words"는 일상언어의 문제를 행위의 차원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말의 수행적(performative) 성격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언어학의 구분에 따르면 화용론(pragmatics)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오스틴이 말의 수행적 성격을 분석하고 전통적인 언어관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입장을 "언어수행론" 혹은 "화행론"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스틴은 '진술'(statement)만이 진위를 가릴 수 있고, 따라서 진술만이 논리적 명제가 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에 대한 진술만이 진위의 검증이 가능하고 그렇지 못한 문장은 무의미한 사이비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통적인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기록이나 보고가 아닌 사이비 진술의 형태인데도 진위를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그런 문장들이 있다. 예를 들어 결혼식에서 주례가 묻는 말에 대해 ""라고 대답했을 경우에, 이것은 진술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예 나는 이 여인을 합법적인 아내로 맞이합니다."라는 약속을 수행하고 있는 발화(utterance)이다. 이것은 결혼하는 사실을 보고하기보다는 결혼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그 자체가 수행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진술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있지만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스틴은 이런 종류의 발화를 수행적 발화로 규정하여 보통 진술 혹은 진술적 발화와 구분하였다.

진술적 발화가 진위를 구분할 수 있는데 반해, 수행적 발화는 적절한가 부적절한가로 구분될 수 있다. 오스틴은 수행적 발화는 그것이 적절할 수 있는 조건을 지키면 오발행위나 남용행위가 되지 않고, 성공적인 발화행위가 된다. 사회적 관습이나 약정에 따르는 행위를 수반하는 말은 적절한 수행적 발화가 된다. 이처럼 오스틴은 수행적 발화와 진술적 발화가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기에로 가면서 오스틴은 이 구분, 즉 수행문과 진술문의 구분점을 지워버린다. 즉 모든 발화는 그 나름의 진위값을 가지며 동시에 행동을 수행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예를들어 "제발!"이란 말은 명령, 충고, 애원 등으로 모종의 행동에 관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진술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기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수행적 요소가 전혀 없는가? 그리고 수행적 발화는 전혀 진위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는가? 오스틴은 이 구분 자체가 의미없다고 강조한다. 예를들어 "아마 내일 비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는 발화는 예언하는 행위에 관련된 것이지만 진위의 구분이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수상은 대머리이다"는 발화는 진술적 발화이지만 수행적 발화가 부적절한 것처럼, 역시 적절하지 못한 발화이다. 왜냐하면 현재 대한민국은 수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스틴은 수행문과 진술문의 전통적인 구분점을 지워버림으로써 모든 발화는 수행적 성격을 가짐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진술도 수행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오스틴은 발화가 다음의 세 가지 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첫째, 발화행위(locutionary act)는 문장의 뜻과 지시를 결정하는 행위이다. 둘째는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로서 발화행위에 따르는 진술, 명령, 질문, 약속 등의 행위이다. 그리고 발화효과행위(perlocutionary act)로서 발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청자를 설득하고 놀라게 하고 바쁘게 하는 등의 효과행위이다. 발화행위는 단순히 어린애가 응얼거리는 것과 같이 단순히 소리를 내는 행위이다. 발화수반행위는 이 발화행위가 구체적인 의미를 가짐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수반하는 힘을 가진 행위이다. 발화효과행위는 상대편으로 하여금 모종의 행위를 하도록 하는 강한 힘을 가진 행위이다. 예를들어 제한속도가 시속 80킬로인 거리를 100킬로로 달리는 차안에서 운전석 옆에 앉은 사람이 "이곳은 제한 속도가 80킬로이구만!"하고 새삼 강조를 할 경우에, 아마 이 발호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진술하거나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 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발화효과행위가 될 것이다. 이처럼 오스틴은 서얼(J. Searle)과 함께 '어떤 것을 말한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을 행한다'는 소위 언어수행 혹은 언어행위론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5. 실용주의

실용주의는 진리의 의미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에서 찾지 않고 상대적 효용성에서 찾는다. 즉 진리의 표준을 실용적 가치에 두려는 실용주의(Pragmatism)는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 또는 인식론상의 진리설로서, 영국계통의 경험론 철학과 다윈의 진화론을 결합시키는 데서 주로 미국과 영국을 지반으로 발달하였다. 이 입장은 미국의 퍼어스에 의하여 주창되고, 윌리암 제임스에 의하여 보급되고, 존 듀이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영국에서는 쉴러 등의 인본주의에서 이 입장이 주장되고 있다

이 입장에서도 물론 철학자에 따라 각기 주장하는 바에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근본 사상은 대체로 경험 또는 생활을 중요시함으로써 지식이란 본래 생활에 유용한 것이라야 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생활은 환경에 대한 적응에서 성립되는 바, 지식은 이를 가능케 하고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진리를 위한 진리라느니, 영원불변의 진리니 하는 것은 한갓 망상에 불과하다.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항상 산진리로서 역사적 현실에 따라 생성.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적 사상은 일찍이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설파한 희랍의 저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에 있어서도 나타났으나, 그것이 하나의 인식론상의 입장으로 제창된 것은 미국 학계에서 각광을 받아 점차 유럽 각국에까지 전파된 이른바 프라그마티즘이다.

퍼어스(Charles S. Peirce, 1839~1914)'프라그마티즘'(pragmatism)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서 우리의 관념을 명료하게 만들 것인가"(How to make our ideas clear?. 1873)라는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논하고 있다. 우리의 관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용적 의미(practical meaning)를 가진 것, 이를테면 펜이란 관념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 재료로 만들어져 있는가 하는 따위가 아니고 글쓰기 "위한 것"이라는 실용적 의미에 있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무엇임을 어떤 목적에 적합함"(is=agreeable to any purpose)이다. 관념의 의미는 그것에 따라 행동할 때 행동의 목적이 달성되느냐 안 되느냐에 있어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리하여 실천에 유용한 관념은 진리이고, 그렇지 못한 관념은 거짓이다. 관념의 가치는 행위에 대하여 지니는 바의 유용성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러한 것이 대체로 퍼어스의 의견이었다.

퍼어스의 체장은 당시에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20년 후인 1898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행한 윌리암 제임스(W. James, 1842~1910)의 강연을 계기로 점차 미국 사상계에 큰 세력을 펴게 되었다. 제임스에 의하면 관념은 지각과 같은 직접적인 지식의 대용(대용)이 되는 간접적 지식이다. 관념은 어떻게 해서 지각의 대용이 되는가. 유도(유도, leading)에 의해서이다. 관념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mean)는 것은 그것을 지향한다(intend)는 것을, 거기에 이끌어간다(lead)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우리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인가(인가)를 찾아 해매던 끝에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인가를 찾아 갔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관념의 대용이란 것은 이 경우에 소의 발자국 구실을 하는 것이다. 발자국은 소를 먹이는 인가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관념의 의미는 그러한 유도에 있다. 이 유도의 출발점은 인식주관이고 도달점은 인식대상이니, 반드시 대상과 일치하거나 대상을 그대로 묘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대한 관념의 관계는 오히려 서적과 카탈로그와 같은 것이어서, 대상에까지 도달하게 함으로써 그 목적이 달성되고,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관념의 진리성은 그것이 어떠한 실제적 결과에 도달케 하는가 하는 현금가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관념이 지닌바 어떤 영원불변의 성질(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이 아니라, 관념에 있어서 생성하는 것이다. 진리성은 진리화에 있고 타당성은 타당화에 있다.

제임스보다 더욱 발전적으로 진리의 의미를 설명한 것은 죤 듀이(J. Dewey, 1859~1952)이다. 듀이에 의하면 무반성적 경험이 반성적 경험, 즉 사유작용에 앞선다. 무반성적 경험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가리킨다. 그것은 동적. 발전적이며, 내부로 통일된 경험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며, 재구성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사유작용이다. 사유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지각이나 관념이 아니라 분열된 경험의 상황이다. 사실이니 여건이니 하는 것은 경험의 상태에 있어서도 비교적 안정된 부분이고, 관념이니 사상인 하는 것은 불안정하고 동요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관념은 여건과 더불어 통일된 경험을 재건함에 있어서 그 도구의 구실을 한다. 그 경우에 재건작업에 성공하면 그 관념은 참된 도구, 즉 진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관념은 진리성은 실제로 개개의 경우에 시험된 실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듀이의 학설을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또는 실험주의(Experimentalism)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쉴러(Schiller, 1814~1987)는 프라그마티즘을 인본주의(Humanism)로서 주장한다. 그는 '플라톤이냐 프로타고라스냐'라는 문제를 제출하고, 초개인적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전자를 버리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후자를 택한다. 절대적 진리란 것은, 가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전혀 무익한 것이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식은 본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고, 경험은 각자 자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각 사람에 대하여 상대적이며, 처음에는 다만 진리요구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진리요구가 우리의 실생활에서 검증되었을 때 비로소 타당한 진리로 된다. 진리는 인간이 자기의 생활을 통하여 제작하고 사용하는 데서 진리로 되는 것이다. 진리로 하여금 진리되게 하는 것은 실용이라는 가치에 있다. 진리는 본래 처음에는 진리요구로서 나타나는 바, 그것들 상호 간에 생존경쟁과 같은 것이 일어난다. 그 결과 인간사회에 가장 유익한 것이 가치있는 진리로서 인정된다. 이른바 객관적 진리란 이와같이 사회적 승인을 얻은 진리이며, 그런 한에서 개인적 평가 이상의 것이다. 쉴러는 이러한 인간중심적 견지에서 자기의 프라그마티즘을 특히 휴머니즘이라 부른다.

영미계통의 경험주의적 지반에서 발생한 실용주의 외에 칸트의 비판주의에서 출발하여 일종의 실용주의적인 철학에 도달한 예가 있는데, 그것은 파이힝거(Vaihinger, 1852~1922)의 의제철학(의제철학, Ais~ob~ Philosophie)이다. 파이힝거에 의하면, 학문상의 근본개념은 모두 의제(Fiktion)이다. 의제란 그 허위임을 알면서도 설정하는 가설이다. 이를테면 물질, , 원자, 영혼, 자유, 의지, 절대자 같은 것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편이 실리를 가져오며, 그런 의미에서 진리라고 생각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3절 후기 현대철학

 

우리는 2차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편의상 '후기' 혹은 '당대'(contemporary, current) 현대철학으로 부른다. 이 시기의 사상적 발전 역시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몇가지로 간추리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기를 흐르는 현대철학의 공통적인 얼굴을 반실증주의적인 태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제기된 1930년대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이 시대를 특징 지우고 있다. 이 반실증주의적 흐름들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철학을 통해 가다머에 와서 그 체계적 완성을 보게 된 해석학이다. 가다머를 대표로 하여 형성된 현대의 해석학은 분명 이 시기를 특징 지우는 중요한 철학적 조류이다. 두 번째는 20세기를 시작하면서 현대철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등장한 문제는 언어문제이다. 이것은 언어분석철학이란 이름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언어에 대한 관심을 이제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철학이 오직 언어의 의미분석이라는 좁은 주제에 한정되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출발로 하여 언어의 문제를 실천적이고 선험적인 차원과 연결시켜 다루려는 새로운 언어철학의 운동이 확산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히 아펠이란 철학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름은 영. 미 철학의 전통에서 발생한 반실증주의적 견해들이다. 아마 여기에는 칼 포퍼를 중심으로 한스 알베르트, 토마스 쿤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판적 합리주의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헤겔 철학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변증법의 현대적 부활이다. 소위 '신맑스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비판이론가들의 등장은 바로 변증법을 철학적 방법으로 다시 부활시킨 현대철학의 새 얼굴이다.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판이론가들 사이의 논쟁은 1960년대 후반의 현대철학을 특징 지우는 배경이 된다. 마지막으로 헤겔의 합리주의의 몰락 이후 등장한 비합리주의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포스터모더니즘, 즉 탈현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우리는 여기에 구조주의를 포함시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1. 해석학


우리가 '해석학' 혹은 '해석학적'이라는 비교적 생소한 용어를 현대철학의 후기에 와서 만나게 되지만 사실은 이미 고대 희랍에서부터 그 뿌리를 가지고 발전해 왔다. 후기 현대철학의 한 흐름으로 소개하려는 가다머(H. G. Gadamer)의 해석학은 이미 고대를 거쳐 중세의 성서 해석학(슐라이어마하) 그리고 딜타이의 삶의 해석학을 통해 간추려진 전승물일 뿐이다.

'해석학'(Hermeneutik)이란 용어는 희랍에서 파생된 17세기경의 신조의 중의 하나이다. 고대 희랍에서 언급되는 해석학적 기술이란 참과 거짓에 대해서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탁의 의미를 밝혀내는 기술이었다. 즉 신들이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불분명한 말에 주석을 붙여 분명하게 하는 기술이었다. 이것이 17세기에 와서 비로소 해석의 기술로서 해석학이란 이름으로 체계화되었다. 단지 신탁의 해석에 국한되지 않고 신학, 문헌학 및 법률학들을 위한 보조학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단지 다른 학문의 보조학으로서의 기능을 가졌던 해석학이 학으로서의 보편성을 갖기를 시작한 것은 슐라이어마하(F. D. E. Schleiermacher)와 딜타이를 통해서이다. 특히 딜타이는 자연과학의 방법인 '설명'에 대비하여 정신과학의 방법을 '이해의 해석학'으로 규정함으로써 삶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의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딜타이의 해석학적 방법은 이미 앞의 삶의 철학에서 언급했듯이 그 자체 보편성이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다. 즉 현실은 그 자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설명될 수 없고 단지 이해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에 딜타이는 관심을 가졌을 뿐, 실지로 이해가 보편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심리학적 연관 속에서 경험과학적 방식으로 해결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삶을 추체험(추체험)할 수 있다고 전제를 하는 것은 이해 자체를 데카르트적인 확실성으로 전제하는 일종의 낭만주의적 해석학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낭만주의의 해석학은 이해의 구조나 정신과학에서 이해가 차지하는 역할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가다머의 지적은 해석학의 보편성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이다.

가다머에게 직접적인 공헌을 준 하이데거(M. Heidegger) 역시 해석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이란 이름하에 전개시킨 새로운 철학적 발상의 토대 위에서 딜타이의 작업을 수행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현존재의 해석학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딜타이의 심리학적 연관을 배제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해석학을 현존재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보편적 이해의 학으로 체계화한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방법을 해석학으로 전환하기 위해 현상(phainomenon)에 관한 학(logos)이란 용어에 대한 분석을 한다. '현상'이란 용어는 스스로를 스스로에 즉응하여 현시하는 것 내지는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고스'는 단순히 '판단'을 의미하지 않고 개방화 내지는 스스로를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이란 다름아닌 스스로를~가려짐이 없이 밖으로~ 나타내 보임(aus~legen)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 의미를 해석(Auslegung)으로 규정한다. 그는 인문과학과 구분하여 해석의 학으로 규정했던 딜타이의 입장을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현존재의 해석학으로 완성시킨다. 말하자면 딜타이가 해석학을 삶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근거하여 규정하는 데 반해, 하이데거는 삶의 구체적 현상, 즉 인간의 구체적 삶인 실존에 대한 해석학으로 철저화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자신의 해석학을 '해석학적 현상학'이라고 규정할 때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그 내용적인 추상성은 배제하고 방법적 절차만을 그리고 딜타이에게서는 삶이란 구체적 역동성을 빌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통상적으로 해석에 대한 학문이란 의미를 벗어나 현존재의 존재가 그 스스로 드러나 보이는 실존의 구조에 대한 분석이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결코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시되어 드러날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이데거는 해석학을 전통적인 판단론, 즉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판단론적인 해석학과 구분하여 존재의 의미를 열어 보이는 학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해석학을 전통적인 판단론적 해석과 구분한다고 할지라도 이 구분은 단지 주제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선입견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해석은 그 자체가 "미리 가짐" 속에서 수행되며 "미리 봄"이란 선파악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해석은 이미 이 선구조의 자명성에 대한 선이해를 통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해석은 이미 순환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소위 해석학적 순환은 이제 더 이상 설명과 이해 혹은 '법칙 정립적인 것''개성 기술적인 것' 사이의 방법론적 이원론적 분화가 딜타이에서처럼 지탱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학에 의한 방법론적 통합을 이룬 사람이 가다머이다. 방법론적 논쟁은 자기 폐쇄적인 함정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 설명과 이해가 항상 방법상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온 사실을 가다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 1960)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방법적인 과학과 이 방법을 초월하는 진리가 상호 어떻게 관계를 갖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 과학 이전의 세계 지평과 방법적 관점들 사이의 상호관련성이 어떻게 해명되는가가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하이데거가 해석학적 순환을 미리 가짐, 미리 봄, 선파악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본 것처럼, 가다머는 선이해이론을 선입견이론으로 연결시킨다. 어떤 의미 전체의 선이해와 부분의 해석 사이에 작용하는 해석학적 순환은 특수한 해석학적 과정 속에서 영향사(Wirkungsgeschichte)로 나타난다. 한 사건 속에는 여러 시대의 다양한 이해 지평이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영향사적 연관을 떠나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특히 가다머의 이와 같은 입장은 역사해석에 있어서 헤겔적인 변증법적인 관계에 동조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역사를 통일하는 내적 연관성이 하나의 '전통'으로서 이미 주어져 있음을 가다머는 강조한다. 가다머는 랑케처럼 역사적 경험을 반복가능한 경험으로 단순히 재구성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정과 비판을 통해 새롭게 의미가 인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이미 딜타이에 의해 언급된 사실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딜타이가 아무리 역사적 경험의 반복불가능성을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추체험적인 단순재생산이라는 자연과학적인 실증주의적 모델에 종속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가다머는 후설을 통해 역사적 경험에 대한 보편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지반을 발견한다. 소위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가다머에게 유산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하이데거 역시 이 선험적 기반으로서 세계내존재라는 선구조를 가다머에게 남겨 준다. 이 선구조는 가다머에 있어서 선입견과 전통으로 나타난다. 가다머는 선입견과 전통을 계몽주의자들처럼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지평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모든 이해나 해석은 언제나 이미 일정한 관점이나 예기 등에서 생기는 선입견 혹은 선판단(Vorurteil)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다. 가다머는 이와같이 해석이 선입견이나 전통에 제약당하고 있음을 '영향사'란 개념으로 규정한다. '영향사'란 전통에 속해 있는 것들에 대해 전통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한 계몽주의자들은 선입견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가다머의 견해에 대해 맑시즘의 흐름을 따르는 하버마스(J. Habermas)는 가다머가 주장하는 '전통'이 그 자체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 이해나 합의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가다머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혹은 물질적 요인을 간과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의 이데올로기적 폭력성을 표출하고 있다. 물론 가다머는 이 사회경제적 요인까지도 전통 속에 함축시키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이 논쟁은 상세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하버마스에 대해서는 비판이론을 다루는 절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아펠(K. O. Apel) 역시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가다머의 입장이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닌다고 비판한다. 해석적인 이해만으로 행위와 표현 그리고 세계관 등을 의사소통과 대화를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가다머의 생각은 낭만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아펠에 의하면 의사소통을 통해 결코 극복될 수 없는 행위가 있다. 즉 행위자의 행위가 의도적인 범위를 넘어 인과적으로만 설명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 있다. 이 영역에 대한 해석적 이해는 단순히 대화나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도 극복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아펠은 해석적 이해가 준객관적인 설명과학인 정신분석학에 의해 보완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결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행위는 정신분석적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정신분석적 방법에 의한 이데올로기 비판이 해석학적 이해에 보완되어야 한다.

해석학적 이해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될 수 있다는 아펠의 지적에 대해 하버마스 역시 동조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끌어들인다.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은 정신분석에 의해 비로소 치료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의사소통과 같은 이상적 담화상황 모델에 의해 합의를 차단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인들을 비로소 치유 내지 폭로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한 가다머의 입장은 일체의 선입견과 왜곡의 결과들로부터 자유로운 합리적 합의라는 하버마스의 이상은 충격적일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이 무제약적 의사소통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임을 강조하면서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한 논쟁에도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단지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에는 권위와 전통에 대한 해석학적 인정과 계몽주의적 부정이란 차이점이 있음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선험적 화용론

 

20세기 후반의 현대철학이 공통된 주제로 삼는 것은 한결같이 언어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든 철학적 관심이 언어에로 집중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소위 우리는 이 시기의 철학적 경향을 언어지상주의(Sprachlo~ gismus)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분석철학이 형성되는 가운데 언어의 문제는 철학의 근본적인 주체가 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언어철학적 관심은 그 방향을 달리한다. 이들은 오직 언어에만 매달리는 철학은 결코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고 자부할 수 없음을 스스로 고백한다. 이 고백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개념에 자극을 받고 해석학의 영향하에서 성숙된 것이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초기의 이상언어 이론에서 후기의 언어놀이개념으로 전회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 속에서 언어를 행위나 삶의 형식 혹은 실천의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문제를 가족 유사성이라는 상호주관적 지평으로 확장하여 다루는 것은 언어철학의 선험적 지반에 대한 반성의 문을 열어준다. 이를 계승하여 아펠은 언어 행위의 실용적 측면의 선험적 요구를 정당화시켜 나간다.

칼 오토 아펠(Karl~Otto Apel)2차 대전 후 독일의 본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하였다. 여기서 그는 해석학의 전통에 서서 정신과학 이론을 계승한 로트하커(E. Rothacker)와 언어 철학자 바이스게베르(L. Weisgerber)의 영향을 받으면서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이 철학계를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펠은 인식과 언어의 문제를 선험적~해석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언어 분석철학과 퍼어스의 실용주의 철학을 처음으로 독일에 소개하였다. 특히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와 퍼어스의 기호론(Semiotik)을 연구하였다. 아펠은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 속에 함축되어 있는 논리적 원자론과 카르납을 통해 이어지는 논리실증주의의 언어에 대한 비실용적 측면을 선험적 차원에서 정당화한다. 아펠은 순수 논리분석에만 치중하는 전통적인 언어철학의 편협함을 선험적으로 보충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아펠이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관심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과 종합하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보편적 언어이해를 단순히 논리적 형식이나 순수한 이상언어에 토대하여 정초하려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를 인간의 사고와는 독립되어있는 사실들에 대한 그림으로서 규정함으로서 언어의 실용적인 측면에 대한 선험적 반성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아펠은 칸트로부터 '선험적'이라는 술어를 빌어와서 자신의 언어철학을 '선험적 화용론'(transzendentale Pragmatik)으로 완성해 나간다.

이때 '화용론'이란 단어는 실용주의(Pragmatismus)에서 나온 말인데 단순히 기호의 논리적 관계만을 문제삼지 않고 기호와 사용자 간의 관계를 문제 삼는 학을 지칭한다. 아펠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 자리에 보편적 언어이해의 선험적 기반으로서 의사소통 공동체라는 개념을 대입한다. 그는 칸트의 범주적~선천적 인식기능에 언어의 역할을 새로 첨가한다. 그 역시 이상적 언어상황을 모든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선험철학의 이념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으로 가져온다. 이성의 타당성에 의심을 하기 시작한 현대철학은 철학의 변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후설에 이르기까지 선험적 주관의 절대적 확실성을 정초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것은 결국 의사소통적 연관을 차단하는 유아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펠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성의 기능을 단순한 반성능력에 국한하지 않고 의사소통과 대화로 확장하려고 한다. 칸트가 수학이나 뉴튼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가능 근거를 정초하였다면, 아펠을 정신과학의 선험적 가능 근거를 확인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물론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상호주의적 근거가 전혀 문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카르납은 보편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규약'(convention)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 규약이 어떻게 정당성과 합리성을 가질 수 있는가는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규약의 정당성이 합리적으로 마련되지 못하는 한, 임의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물리주의적 통합과학의 이념으로 끌고가는 형식적 과학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통합과학적 프로그램의 한계를 극명하게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 점에서 아펠의 선험적 화용론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간과된 주체에 대한 반성, 즉 보편적 삶의 형식을 구성적 토대로 가져온다. 보편적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인 의사소통 공동체를 그 토대로 가진다. 모든 사적 언어가 가지는 임의성이나 우연성을 배제한 합리적 논증을 근거로 한 합리적 언어놀이와 언어사용이 상호주관적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아펠은 신실증주의자들처럼 형식적 규약에서 보편적 이해의 근거를 찾지 않고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규범적 원리에서 찾는다. "해석학과 이데올로기"란 저서를 1968년 아펠과 공동으로 집필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하버마스 역시 합리적 의사소통을 강조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선험적'이란 술어를 사용하기를 꺼리고 '보편적 화용론'으로 지칭한다. 왜냐하면 선험철학이 의식의 한계 내에 머무르는 한, 합리서의 상호주관성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에 대해서는 다시 뒤에서 다룰 것이다.

 

 

3. 비판적 합리주의

 

해석학이나 선험적 화용론과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은 과학론의 영역에서 제기된다. 후기 현대철학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한결같이 신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물리학주의에 토대한 카르납의 통일과학의 이념이나 노이라트(Neurath)나 슐릭의 기초명제에 대한 신앙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 신실증주의는 명제의 논리성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기초 명제가 경험적 사실과 실지로 어떻게 상관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명제의 논리성을 과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은 전통적인 형이상학 못지 않게 독단적이다. 현상에 대한 보편타당한 법칙을 추구하려는 논리실증주의와는 달리, 비판적 합리주의는 인간의 지적 능력과 이성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제 과학적 합리성이 관찰 명제나 기초명제의 논리성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추측과 반박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탐구의 과정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과학의 기준을 설정되기에 이른다. '명제의 논리'로부터 '탐구의 논리'에로의 전환이 시급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박한 과학적 검증주의는 그 자체가 과학적 제국주의라는 폭력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검증 가능성이라는 소박하고 편협한 기준에서 비판적 검사의 과정을 중시하는 반증주의에로 전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칼 포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칼 포퍼(K. Popper, 1920~1994)는 역사의 발전과정을 변증법이라는 실증주의적 도식으로 체계화하는 헤겔과 맑스의 역사이해를 역사주의로 고발하면서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 칼 포퍼는 딜타이의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생활을 이해한다."는 방법적 이원론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포퍼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사회과학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이해의 논리를 설명의 논리로 전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방법적 일원론을 주장한다.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은 물리학적 방법을 단순히 역사의 발전과정에 적용시킨 과학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퍼의 입장을 물리학주의에 물든 소박한 실증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다. 그가 비록 과학적 방법으로 일원화한다는 점에서는 실증주의와 견해를 같이 하지만 우리가 그를 '비판적 합리주의'로 부르는 것은 그가 반증주의를 들로 있고 "가설~연역적 방법" 내지는 "시행착오"의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귀납주의를 벗어나 과학적 방법을 가설~연역적 방법으로 전환하였으며 관찰의 이론 의존성을 주장함으로써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기준인 검증 가능성의 원리를 퇴색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의 상황의 논리는 바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설명과 이해의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딜타이의 방법적 이원론이 의미가 없다. 과학은 철학에 뿌리를 박고 있고 철학은 과학의 성과 위에 존립한다는 근본적인 통찰이 포퍼에게는 하나의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와같이 해석학과는 달리 이해를 설명하려는 포퍼의 입장은 비판적 합리주의를 주도하는 한스 알베르트(H. Albert)에게로 전수된다.

가설~연역적 방법과 비판적 검사의 이념을 이어받은 한스 알베르트 역시 편협한 실증주의를 넘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낡고 오래된 대립을 벗어나고자 한다. 포퍼의 추종자인 알베르트는 자연주의적 설명 모델을 인문사회과학 영역에까지 적용한다. 그는 해석학은 일종의 신화이며, 이것은 합리적 설명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해석학은 일종의 이해의 기술에 지나지 않으며, 이해도 과학의 법칙적 모형에 종속되어야 한다. 특히 비판적 합리주의는 사실과 가치의 문제를 불리하여 학문의 몰가치성(Wertfreiheit)과 가치중립성을 주장한다. 이들은 막스 베버(M.Weber)의 영향하에서 학문에서 가치판단의 영역을 제외하려고 한다. 학문은 경험적 대상만을 토대로 해야 하며, 학자는 가치를 설정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베버의 신념은 이들에게 전수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 즉 비판이론가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는다. 비판이론가들은 비판적 합리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의 가치중립적 "비판적 검사의 이념"은 한갓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인식행위가 결정된다고 맑스적인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비판이론가들의 견해를 살필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적 합리주의의 새로운 실증주의적 경향은 문헌학상으로는 포퍼주의자로 불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인 토마스 쿤(Th. Kuhn)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1962)는 새로운 과학론을 등장시킨다. 주로 분석철학의 영향하에 있었던 포퍼와 알베르트와는 달리, 쿤은 독일철학의 흐름 속에서 해석학적 배경을 가지고서 과학론은 제기한다. 해석학은 과학적 지식은 이미 선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학은 생활세계의 선과학적 활동에 이미 연루되어 있다는 주장은 학문의 가치중립성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쿤 역시 과학은 과학적 대상이 될 수는 없는 전제조건을 이미 가지고 비로소 성립한다는 과학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과학은 이미 사회와 전통 속에 주어져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가진다. 그는 과학의 이론의 혁명적 전환구조를 분석하여 과학이론들 사이의 비교불가능성, 불가양립성,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을 강조한다. 그는 포퍼의 입장에 잠재되어있는 과학의 누적적 진보이념을 실증주의의 유형으로 비판하면서 과학의 발전은 패러다임에서 패러다임으로의 혁명적 변환일 뿐 결코 점진적 진보로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공동체의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과학이론, 법칙, 지식, 방법, 가치 심지어는 습관 등과 같은 것을 통틀어 지칭한다. 이것은 정상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전과학(prescience)의 단계이다. 정신과학은 위기에 처하고 다시 혁명의 단계를 거쳐 새로운 정상과학으로 그리고 새로운 위기를 거쳐 새로운 혁명의 단계에로 이른다. 이 과정은 점진적 진보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진보이념은 과학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쿤은 과학자는 패러다임을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이론들을 수용하고 이론들 사이의 모순을 조정하면서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이 비판적으로 수정해 간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을 거쳐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고 이를 혁명적으로 선택하는 일련의 비판적 조정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비판적 조정의 과정이 합리적 근거를 갖지 못하고 패러다임이 항상 과학의 전제조건으로 늘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이 패러다임이 과학적 사유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경직된 과학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은 파이어아벤트(P. Feyerabend)에 의해 제기된다 그는 쿤의 패러다임의 변환의 논리를 변증법의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Mill)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첨가하여 과학론은 '무정부주의적 인식론'으로 규정하였다. 파이어아벤트는 준변증법적 방법을 토대로 하여 포퍼주의자들의 비판적 합리주의에 남아 있는 준실증주의적 잔재를 해체하려 한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아나키즘적 영위이다"는 말로 대변되는 파이어아벤트의 입장은 과학주의적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해체하려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를 맹신하지 않으며 과학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우월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과학에서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다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진다는 다원론적 입장을 가진다. 과학자는 반드시 어떠한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어떠한 방법도 다 좋다는 다원론적 입장은 과학이론들의 불가공약성을 전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어떤 이론이든 간에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과학이 미신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무궁화 2호 발사를 앞두고 과학자들이 돼지머리 앞에서 고사를 지내는 것이 과학과 미신은 결코 분리된 두 영역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미신이나 주술 등도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에 토대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그는 과학은 개인적인 자유에 의해 선택되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과학은 스스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속박에서 사회를 해방시키는 임무를 가진다. 그는 방법론적 아나키즘을 주장함으로써 과학과 비과학이라는 전통적인 구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그는 이 과학과 비과학을 어느 한쪽으로 일원화시키지 않고 방법적 다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 '방법에 대한 쓸데없는 논쟁'을 지양하려고 한다. 변증법의 논리를 끌어들여 비판적 합리주의의 실증주의적 잔재를 해체시키려는 파이어아벤트의 입장은 비판이론, 즉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근본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제 비판적 합리주의와 소위 실증주의 논쟁을 벌였던 비판이론가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4. 비판이론

 

1) 형성배경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19세기 독일 민주주의의 발산지이며 한 때 자유도시의 성격을 강력히 지녔던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정부의 재정지원 없이 1914년에 세운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부설된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연구소는 1923년에 창설되어 나치 정권이 들어선 그 이듬해인 1934년에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뉴욕으로 옮겨가서 그곳 콜롬비아 대학의 부설기관이 되었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다.

우리가 다루려는 '비판이론'이란 개념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에 의해 주조된 것이다.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스탈린적 왜곡이 가져다준 환멸감 그리고 이민의 고립적 상황 등은 호르크하이머를 위시한 비판이론가들은 맑스의 플로레타리아 계급혁명에 식상하고 동시에 헤겔의 긍정 혹은 동일성의 변증법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므로 비판이론은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의 변증법으로 재구성하고 맑스의 교조주의적 성격을 청년 맑스의 인본주의의 얼굴로 다시 읽으려는 지성적인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이다. 호르크하이머는 그의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에서 데카르트 이래 비판적 합리주의에까지 이르는 실증주의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에 의해 왜곡된 맑스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통이론이 이론과 실천을 대립시켜 놓은 것에 대해 비판이론은 이론의 사회적 실천성을 강조하며 이 양자 사이를 동태적 변증법적으로 매개한다.

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불리는 비판이론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동으로 생성된 실증주의가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헤겔의 변증법을 부활하여 그것을 토대로 해체시키려는 헤겔의 르네상스 운동에 시발점을 두고 있다. 특히 비판적 합리주의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이 비판이론가들에 의해 날카롭게 공격을 당한다. 헤겔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맑스의 철학을 정확하게 다시 읽어냄으로써 비판적 합리주의가 만들어 놓은 이론과 실천, 인식과 가치 사이의 이원주의를 변증법적 이성의 힘으로 해체하려고 한다. 물론 비판적 합리주의에 의해 비판이론은 교조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도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의 비판이론가들의 입장을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교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가치판단을 여과시키는 태도는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분석적으로 인식하려는 작업을 포기한다. 둘째 자연과학의 논리를 사회과학의 논리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학문의 가치판단적 성격을 추출해버리는 것이다. 셋째 현실을 전체로서 파악하지 않고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분리하여 고립적으로 다루는 것은 학문의 몰가치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학문의 계도적 과제를 소홀하게 다룬다.

우리가 비판이론가들에 대해 다루기에 앞서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루카치(G. Luk cs, 1885~1971)와 칼 코르쉬(K. Korsch, 1889~1961)의 입장을 간략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루카치는 그의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서 헤겔 변증법의 르네상스를 부채질한다. 루카치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맑스의 이론을 굳건하게 다시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다시 굳건하게 다진다는 것은 전통적인 맑시즘이 앓고 있는 필연적인 문제를 오히려 헤겔로 돌아가서 극복하려는 입장으로 나타난다. 그는 단순한 유물론에 반대하면서 헤겔의 관념론을 부활하여 맑시즘의 정통성을 다시 구축하려는 동기를 부여 해주었다. 또한 칼 코르쉬는 속물화된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의 변증법에로 돌아가 유물변증법이나 자연변증법에 의해 실증주의적으로 채색된 요소를 해체하려고 한다. 속물화된 맑스에 의해 지양된 헤겔의 변증법이 지닌 생동력을 부활하려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비판이론의 형성배경이 되어 소위 신맑스주의의 태동을 가속화하게 된다.

 

2) 도구적 이성 비판

세계대전 동안에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1875~1973)와 아도르노가 공동 저술한 "계몽변증법"은 비판이론의 이론적 틀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계몽변증법"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점자본주의의 나치적 성격을 비판한다. 이들은 이 책속에서 왜 인류는 참으로 인간다운 조건들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야만주의에로 침잠하는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17^5^ 18세기에 출현한 계몽적 이성이 존재와 비존재, 진리와 허위를 식별하는 능력이었고 한편으로 인간을 부자유와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오늘에 와서 그것이 역으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들었으며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계몽적 이성의 발달은 자연을 지배하는 기술로서 과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문명의 발달을 촉진했지만, 오히려 계몽적 이성은 인간의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 한 때 주체적이고 자주적이었던 이성이 인간의 자기 보전이라는 이기적 관심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계몽적 이성은 경제적, 사회적 힘에 반사적으로 순응할 따름이다. 이를 통해 전체주의가 기반을 마련하게 되고 인간을 관리하는 전체주의적 권위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계몽적 이성에 의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합리화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합리화의 과정은 다름이 아니라 계몽적 이성에 의한 통제와 조정에 의한 것이다. 이 기술적 합리화의 과정은 인간을 자본주의 체제의 관리제도에 예속시킨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한 인간의 통제와 억압구조를 비판한다. 계몽적 이성에 의한 인간의 자연지배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 자신의 지배는 계몽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통해 가능하다. 이와같이 인간과 자연, 주체와 자연의 근본적인 분리를 선언하는 계몽의 근본특성은 실증주의를 그 절정에로 다다르게 하였다. 도구적 이성이 가장 진보된 단계로 표현된 것이 실증주의이다. 그러나 이 진보된 발전은 가장 퇴보된 단계를 함의하고 있다. 특히 가치와 사실의 분리는 도구적 이성이 얻어 낸 실증주의의 전리품이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은 결국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삶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관리하는 기제로 등장한다. 이와같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의 등장에 따라 마비된 이성의 사회비판적 기능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으려는 분석을 수행하였다.

 

3) 아도르노

비판이론은 아도르노(Th. Adorno, 1903~1969)"부정의 변증법"을 계기로 더욱 그 이론적 토대를 다져 나간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을 고수해 나가면서도 보다 더 세부적인 문제로까지 그 지평을 확대시켜 나간다. 아도르노의 사상에 영향을 준 몇 가지를 들어 보자. 첫째는 헤겔에 대한 맑스의 비판적 관점을 수용한다. 특히 헤겔의 변증법이 가진 도구적인 측면을 거부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주관~객관의 동일성이론을 거부하고 헤겔의 부정의 부정개념에서 수반되는 긍정적인 성향들을 변증법에서 제거하여 '부정의 변증법'을 강조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긍정의 변증법에 대항하여 부정의 변증법을 강조함으로써 헤겔을 격하시키고 있다. 헤겔은 주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리의 사고를 전체주의적인 동일성의 틀에 묶어버림으로써 전체주의적 폭력을 일삼는다. 세계를 정신에 의해 통제하고 전체적인 체계로 추상하려는 욕망은 동일성의 사고에 집착한다. 헤겔에 있어서는 전체가 진리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전체의 진리는 부분들의 진리를 체계의 단순한 부속물로 전환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할 뿐이다. 아도르노는 헤겔적인 역사적 낙관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이 모든 개념적인 체계 속으로 여과 없이 수용될 것이라는 헤겔의 전망과는 달리 아도르노는 객체가 항상 주체와는 다른 비동일적 대상으로 남아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객체가 주체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체가 주체와 동일한 상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주체와 객체의 비동일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아도르노는 헤겔에 의해 의식의 동일자로 규정되어버린 칸트의 물 자체를 총체적 타자 혹은 비동일자로 부활한다. 헤겔의 동일성의 사고는 일반적 개념하에서 특정한 개체들을 포섭하는 것이 목적인데 반해,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객체를 그것이 가진 기준에 따라 주체와는 결코 동일화될 수 없는 구체적인 면들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전체는 비진리"라는 근본명제에 근거한다. 전체라는 것은 단지 특정한 기원없이 상호 작용하는 성좌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를 발생학적 중심이나 창조자, 주체로 전제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같은 아도르노의 입장은 벤야민(W. Benjamin)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는 자신의 비판이론을 미학이나 예술, 문학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다양하게 정립해 나간다. 벤야민은 그의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개별적 현상이 보편자 속에서 파악된다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보편자가 개별자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관념들은 구체적인 요소들이 특정하게 구성된 개념들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아도르노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특히 아도르노가 미학에로 이행하여 자신의 비판이론의 토대를 새롭게 다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벤야민의 영향이다.

이론이 끝나는 곳에서 바로 예술이 시작된다. 1970년에 발간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예술을 통해 자본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특히 그의 음악미학은 독창적인 필체로 우리들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사회학적 예술이론으로 안내해 준다. 그러나 여기서 그 많은 부분들을 소개하기는 힘들다. 단지 그가 미학적 영역에로 옮겨가게 된 동기만을 언급한다.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끝나야 하는 곳에서 예술의 영역에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미학적 가상은 처음부터 어떤 다른 것을 가정하지 않는 까닭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유일한 가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진리는 예술에 의해서만 기대될 수 있다. 예술은 "행복의 약속"이라는 스탕달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면, 예술은 사회적 모순과 이율배반을 가장 여과 없이 반영하는 거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속물화된 맑스주의에 의해 은폐되어있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예술비평이라는 맑은 프리즘을 통해서만 노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확신 아래 아도르노는 우리에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미학이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4) 마르쿠제

나치에 쫓겨 미국으로 이민가 그곳에서 체류하는 동안 반체제운동의 이론적 선동가로 지적당하면서 비판이론을 미국적 풍토 속에 이식시킨 사람이 마르쿠제(H. Marcuse, 1898~1979)이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그리고 20년대에 출현한 신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유물사관에 대한 종래의 기계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상학과 실존 첨가의 입장에서 새롭게 재해석하였다.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역사 해석을 사적 유물론과 결합시켜 이른바 '변증법적 현상학'을 구상했다. 그는 구체적인 실존이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932년 맑스가 1884년에 써 놓은 "경제학, 철학수고"가 발견되면서 마르쿠제의 관심은 맑스 연구에로 모아졌다. 특히 그는 맑스를 인간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고 초기 맑스의 노동의 소외문제를 인간학적 이론으로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1932년 후설의 소개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만남으로써 비판이론의 계열로 들어서게 된다

마르쿠제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가담한 이래 1930년대에 발전시킨 비판이론은 그가 미국에서 발간한 "이성과 혁명"에서 이론적 완성을 보았다. 특히 이 책은 헤겔을 나치와 연결해서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자로 규정했던 당시 영미철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헤겔을 혁명이론가로 새롭게 부활시켰다. 여기서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보다 헤겔에 더 친숙한 모습을 보인다. 헤겔의 변증법 속에 간직되어있는 혁명적 요소를 다시 끄집어내어 해석한다. 특히 이 저서 속에서 마르쿠제가 발견한 헤겔철학의 중요한 계기는 이성의 변증법적 해석이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이 가지는 실천적 혁명적 계기를 강조하면서 변증법적 이성의 부정적 기능을 드러낸다. 1960년도 판 "이성과 혁명"의 새 서문에서 마르쿠제는 "사유란 실로 본질상 우리 앞에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부정이다."는 헤겔의 말에 따라 부정적 사유의 부활을 주장한다. 그러나 부정적 사유의 힘이 자본주의 억압구조를 해체할 만한 사회적 세력을 갖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맑스의 사적 유물론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현실을 변혁시킬만한 장치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파시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는 더욱 더 전체주의에로 박차를 가했고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이나 맑스의 이념이 동적인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마르쿠제는 1955"에로스와 문명"을 저술하면서 프로이드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려고 한다. 그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심리학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분석하려고 한다. 그는 개인을 위축하고 개인의 인격을 파괴하는 현존질서에 대한 심리학적 검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류의 문명은 인간본능을 영원히 굴종시키는 데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프로이드의 명제에 따라 마르쿠제는 억압된 사회로부터의 자유로운 해방을 그려내고 있다 마르쿠제는 프로이드의 도식에 따라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관계를 설명한다. 인간의 본능인 쾌락원칙이 사회적 규범이나 문명적 제도라는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당하는 구조를 사회비판의 모형으로 인용한다. 이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된 쾌락원칙의 힘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면서 남아 있다. 현실원칙 아래에서 본능이 억제되어야 하는 것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사회가 인간이 본능구조를 변형함으로써 경제적인 절제와 성적인 절제를 합리화시킨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일은 정력발산을 합리적으로 억압하는 장치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일은 현실원칙을 강요하는 쾌락원칙의 단념을 뜻한다. 이 일은 더 이상 인간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생산성 향상에 동원하는 억압의 틀이 된다. 산업사회에서 현실 원칙이 보다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업적원칙(performance principle)의 형태로 바뀐다. 이에 따른 과잉억압은 경제적 업적에 따라 계급적 분화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며, 노동이 인간을 노예화시키게 된다. 노동은 개인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또한 인간의 성적 욕망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해방되어야 할 대상이다. 산업자본주의는 이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가운데 생산성 향상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원활히 이루어 낸다. 산업사회에서의 진정한 인간해방은 성적 충동의 해방을 요건으로 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서 5년간 신체의 여러 기관이 성감대였는데 업적원칙에 의해 이 성감대의 탈성화(desexualization)가 이루어져 성욕은 성기에만 집중되고 나머지 신체기관은 노동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탈성화의 현상을 재성화(resexualization)함으로써 비로소 자본주의적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마르쿠제는 1964년에 쓴 "일차원적 인간"에서 역시 산업사회의 위기를 진단한다. 물질적 풍요는 인간으로 하여금 안정성을 추구하고 현존질서에 동화되게 만든다. 어떤 기존질서에 대한 반항의식도 생기지 않고 일차원적 사유에 머무르게 된다. 과학과 기술은 고도의 풍요를 가져다주었고 이 풍요를 손상당하지 않기 위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금단의 것으로 거부한다. 기술지배가 이루어지는 일차원적 사유에 비한다면 플라톤의 사유는 이차원적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사유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는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도산업사회에서는 물질의 풍요와 함께 정신의 표준화와 사물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 정책은 공산주의와 같은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이다. 여기에서 노동자는 혁명 수행을 위한 연대의식을 강탈당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가 더 이상 혁명의 실천 주체가 될 수 없다. 혁명 주체에 대신할 계급은 학생과 같은 지성인들이다. 이들에 의해 혁명의 불이 붙여지고 노동자와 제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쿠제는 1960년대 미국 학생운동의 이론적 지원자가 되었고 미국 사회로부터 맑스, 모택동과 함께 3M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마르쿠제 역시 기술지배의 현상을 문명비판의 형태로 수행한다. 고도산업사회에서 문화의 상황은 기술적 이성의 발달로 탈승화의 과정을 겪는다고 마르쿠제는 주장한다. 문화 자체가 사회현실에 대립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마르쿠제는 '예술의 소외화'로 특징지운다. 예술은 본래 현실을 초월하여 대항하는 기능을 가지는데 현재의 예술은 저항감을 상실한 체제유지적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예술은 위대한 거부이고 현존하는 것에 대한 항거이다. 이런 위대한 거부가 산업자본주의, 특히 미국에서는 거부되고 있다.

 

5) 하버마스

1929년에 태어나서 나치의 독일 하에 자라난 하버마스(J rgen Habermas)는 후기 비판이론을 이론적으로 종합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는 1971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슈타른베르그에 있는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그는 비판이론이라는 틀을 과감히 벗어나서 과학론, 해석학, 언어철학 등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대가답게 해결해 나간다. 그의 관심은 광범위하다. 그의 목표는 외관상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방법적 접근들을 조리 있게 통합할 수 있는 체계를 사회과학에 제공하는 것이다.

 

(1) 변증법적 과학론

후기 현대철학을 특징짓는 사건 중의 하나는 바로 "실증주의 논쟁"이다. 아도르노와 포퍼간에 1961년에 일어난 이 논쟁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 후에 이들의 제자인 하버마스와 알베르트 사이에 일어난 비판이론과 분석적 이론 간의 방법론적 논쟁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정신과학을 자연과학과 구분하여 이해의 학으로 규정한 딜타이의 입장은 하버마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진다. 하버마스는 논리실증주의에 근거한 포퍼와 비판적 합리주의의 자연과학에 토대한 알베르트의 통일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을 한다. 하버마스는 사회과학의 방법을 해석학적 방법으로 규정하면서 과학주의에 대항한다. 하버마스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분석적 경험적 방법에 변증법을 대치하고 개별적 사회현상과 전체로서의 사회사이의 변증법적 중재를 강조한다. 그는 전체로서의 사회의 선이해가 부분적 사회현상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분석적 경험적 방법은 역사적 사실이나 자연현상 혹은 사회현상을 동일한 법칙하에서 다룬다. 이에 반해 하버마스는 사회현상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학문 이전의 보편적 경험의 토대로 돌아가서 해석되어야함을 강조한다. 또한 하버마스는 과학과 실천의 분리를 주도하는 분석적.경험적 방법에 대해서도 대항한다. 어떤 과학이론이든지 간에 이미 모종의 가치판단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과 가치 사이의 변증법적 중재 과정은 기본적인 틀이다. 특히 사회과학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는 근본범주로서 기능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변증법을 해석학의 방법 절차와 연결시킨다. 인식객체에 대해 인식주체는 이미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순환에 의해 사회과학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의 필연성이 요청된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해석학에 대해 살핀 바 있지만, 하버마스의 이론은 비판이론에서 따로 다루기 위해 남겨 두었던 것이다.

하버마스는 1965년 정교수 취임강연인 "인식과 관심"에서 실증주의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여 대항한다. 실증주의적인 과학론은 인식주체의 관심이나 사회 관련성을 무시하고 가치중립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자연과학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술지배의 관심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모든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을 3가지로 구분한다. 경험적 분석적 과학은 기술적인 관심을 융합하고, 역사적~해석학적 과학은 실천적 관심을 그리고 비판적으로 방향을 취하는 과학은 해방적 관심을 융합한다. 첫 번째가 실증주의의 태도이고 두 번째가 정신과학이론인 해석학의 태도이라면, 셋째는 인간을 모든 강압으로부터 해방하고 인간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비판적 사회과학의 태도이다. 하버마스는 1968년에 같은 제목으로 출판한 "인식과 관심"이란 저서에서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특히 헤겔, 맑스, 딜타이, 프로이드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통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경험적 분석적 방법의 한계를 해석학적 접근으로 극복하기 위해 딜타이의 해석학을 맑스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특히 가다머의 해석학을 비판이론적 관점에서 받아 들인다. 하버마스와 가다머는 근본적인 점에서는 같은 견해를 보이지만, 특히 전통의 본질에 과한 견해는 의견을 달리한다. 이 양자가 이해는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된 의견을 보이지만, 가다머가 언어적 전통이 모든 비판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의 권위를 비판할 어떤 통로도 인정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하버마스가 비판한다. 이것은 의도된 의미와 드러난 의미사이에 모순이 생기더라도 의도된 의미가 주어진 전통의 체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말하는 전통이 만약 거짓된 합의의 산물이라면, 그 자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한다. 하버마스는 전통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다머와는 달리 권위는 끓임 없이 이성에 의해 파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상호소통적 과정 속에 구체화되어 있고 전통 속에 왜곡되고 은폐되어있는 권력 관계들을 드러내는 데 해방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해석학적인 접근만으로는 이 이데올로기의 해체가 가능하지 않다. 하버마스는 보다 충분한 대안을 찾는다. 그는 일차적으로 맑스를 통해 실증주의와 해석학을 통합하는 비판이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경험적 분석적 방법이 현실을 기술적 지배의 관심에서 다루고, 해석학이 사회적 행위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지평을 확립하려는 실천적 관심이 주도한다. 그러나 이 양자는 한계를 가진다. 이 양자는 다같이 자기반성적 계기를 결여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일차적으로 맑스로부터 이 반성적 계기를 찾지만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한다. 그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기원을 탐구할 수 있는 틀로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인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맑스가 간파하지 못한 구조를 제시한다. 사회제도는 의사소통을 왜곡하는 틀이며 문화전통은 무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 맑스에게는 충분히 감지되지 못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은 방법적 자기반성을 구체화하는 학문의 유일하고 명백한 예이다. 정신분석학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구성을 위한 중요한 지침들과 반성적 과학의 논리를 제공해 준다. 정신분석학의 분석절차는 경험 분석학의 설명과 해석학의 이해의 절차를 통합하는 과정이다. 피분석자에 대한 분석은 인과적 설명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매개된 상호소통적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드가 사용했던 과정과 방법들을 '심층해석학'으로 부른다.

 

(2) 의사소통이론

현대의 고도산업사회가 철저하게 관리되어 있는 사회라면,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의 영역은 점차 축소되어 간다. 하버마스의 후기 사상의 주제는 이 축소된 공공성(Oentlichkeit)의 영역을 개방함으로써 이상적인 대화 상황이 가능하게 되는 지평을 마련하는 것이다. 후기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인간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고 여론이 지배하는 열린사회를 지향해 간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대중의 탈정치화를 막고 거침없는 의사소통으로 충만된 공공성의 영역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1971"의사소통능력의 이론을 위한 서론"1976"보편적 화용론"에서 이런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룬다. 의사소통능력이론의 과제는 대화의 참여자가 이상적인 언어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따라야할 규칙체계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제조건을 탐구한다. 이런 조건이 없으면 이상적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왜곡되기 쉽다. 그는 이상적 대화가 가능하기 위한 규칙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 서로가 알아 들을 수 있게 표현한다. 둘째, 참된 명제를 전달해야 한다. 셋째, 진실되게 표현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올바르게 표현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이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여러 조건들을 밝히고 이들을 재구성하는 분야를 "보편적 화용론"(Universalpragmatik)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정상적인 대화상황 하에서만 정당화된 합의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담론(Diskurs)을 통한 합의로서의 진리설은 사회이론의 인식론적 근간이 되었다.

이 보편적 화용론은 촘스키(N. Chomsky)의 언어학과 오스틴(Austin)이나 서얼(Searl)의 언어행위이론에 토대를 둔다. 보편적 화용론은 일반적으로 언어적 상황의 하부구조(언어술에 있어서 문장을 사용하는 규칙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 하부구조는 모든 문장이 언술됨을 통해 함축되어 있는 '실재와의 관련성'을 검토함으로써 드러낼 수 있다. 특히 오스틴이 주장하는 언어의 행위수행적(illocutionary)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언어행위이론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의사소통능력이론을 형성해 간다. 모든 언술은 화자와 청자가 상호 작용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즉 청자는 화자에 의해 의도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 자유로운 언어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규칙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보편적 화용론의 과제이다. 특히 서얼이 자유로운 언어 행위를 위해 든 4가지의 유형은 위에서 든 하버마스의 4가지 규칙으로 연결된다.

 

 

5. 신실용주의

 

해석학과 실증주의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판이론사이의 논쟁을 새로운 형태의 실용주의를 통해 마무리 지우려는 시도가 리차드 로티(R. Rorty)에 의해 제시된다. 그는 이 신실용주의를 제창하면서 분석철학이나 정초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 전통 철학에 대해 탈철학적 태도를 취한다. 근대철학의 인식론 중심주의는 가렵지도 않은 곳을 긁어대는 꼴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인식의 토대를 정초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론은 잘못된 길을 걸어 왔다. 로티는 인식론 자체의 가능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인식론, 아니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다. 인식의 주관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거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야기짓기(narration)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칸트는 정신을 마치 자연의 거울과 같은 것으로 상정하고 정신에 의한 구성적 정초작업을 그릇되게 수행했다. 전통적 인식론은 신(), 코기토, 감각소여, 프로토콜 문장, 기초문장, 불변적인 원리 등과 같은 것을 확실한 기초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데카르트적인 불안'때문에 확실한 토대를 발견하려는 긴장을 하게 된다. 현대 분석철학 역시 데카르트적 로크적 칸트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재를 인간이 있는 그대로 모사한다는 전통적인 인식론의 모델은 근거를 상실한다. 존재 또는 실재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설정하는 언어 또는 개념이 틀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실재를 인간 지식의 객관적 표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로티의 입장이다. 로티는 잘못 설정된 기초 위에서 서로 이원적으로 갈라져 온 정초주의적 전통을 그의 새로운 언어이해를 근거로 비판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부 밖으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어떤 절대적인 것과 비교할 수도 없다. 정초주의(fundamentalism)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피부 밖으로 나가 실재와 대면할 수 있을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티에 의하면 우리는 언어 밖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언어의 체계 안에서만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언어는 생활양식의 일부이다. 이런 언어를 보편적으로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인간의 생활세계를 하나의 논리체계로 파악하고, 그 논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모두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분석철학의 정초주의적 발상이다. 인간은 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고 자신의 언어라는 감옥에 얽매여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라는 주장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로티는 포스트분석철학의 입장에서 분석철학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 정초주의적 독단은 이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해체되어야 한다. 로티를 신실용주의자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듀이나 제임스와 같은 전통적인 실용주의자들처럼 인식이나 윤리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정초하려 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 자체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므로 로티를 상대주의나 주관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그 자신의 본래 의도와 어긋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실용주의자들이 지식론이나 윤리성에 대해 이론을 세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그것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회과학에 적용하는 실증주의의 통합원리나 자연과학을 사회과학과는 다른 논리로 구분 짓는 해석학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와 비판이론 사이의 논쟁은 각각의 정초주의적 신앙이 빚어낸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구분 지어 온 합리성과 비합리성 그리고 과학과 사이비 과학, 인식과 억견 등의 분리는 전통적인 유산일 뿐이다. 이 구분은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어느 것이 보다 실용적인 대안인지를 선택한 것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우리는 과학이 미신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합리적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일을 포기하고 실재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방식을 정초 지우는 일을 단념하면서 상대방의 대안 역시 또 하나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계속하는 일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로티에 있어서 진리는 사회적 실행이다. 진리는 철학적 작업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과정을 통해 장점과 결점들에 비추어 실용적 견지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다른 개념보다는 그 개념에 더 친숙하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티의 실용주의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반본질주의이다. 진리가 본질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거나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전통에 따르지 않는다. 진리는 이론화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실천적 행위 자체이기 때문에 진리를 본질화하려는 것은 착각이다. 두 번째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대한 비판이다. 분석/종합, 이론/관찰, 과학/비과학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의 규칙에 의해 인간 사고의 결과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로티는 모든 문제를 규칙에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철학적 전통을 플라톤적 신화로 부른다. 자신이 속한 시대의 어휘와 실천에서 벗어나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비역사적이고 필연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임의적으로 구분 지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 인간의 인식능력이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장치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탐구를 행할 수 있다. 인간에게 인식의 구조나 능력이 선천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화만이 탐구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처럼 로티는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마치 과학을 신적인 것으로 대치하는 실증주의의 독단을 실용주의적으로 해체한 점이 그 특징이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상대주의적 배경 하에서 로티는 '합리성', '객관성', '필연성' 등과 같은 개념에 현혹되어서도 안 되고 '비합리성', '주관성', '우연성' 등과 같은 개념에 의해 위축되지도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로티는 과학적 합리성이란 기준에 의해 그릇되게 진행되어 온 전통적 이원론적 분화현상에 종언을 선언한다는 점이 그의 철학의 특징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유대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확보되는 한에서 상대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철학의 임무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며 합리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 있지 않고, 실천적이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마련하는 일에 있다. 이렇게 될 때 철학은 스스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없다. 로티에게는 '상대주의'가 더 이상 불명예스러운 어휘가 아니다.

이상과 같은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진리를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혹은 '믿어서 좋은 것'으로 대치하고, 객관성을 '상호주관적 유대''설득에 의한 합의'로 대체함으로써 정초주의적 전통을 미국적인 실용주의로 재해석한다 이 실용주의적 태도란 정초주의적 아집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합리적인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론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 가능하지도 않지만 맹신에서 벗어나 그때그때 보다 유용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로티의 태도는 미국식의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 자신은 미국 사회를 특별히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미국식의 자유민주주의 만큼 개방된 사회는 없다는 신념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 실제로 좋은 것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로티의 실용주의는 어떤 현실적 대안도 거부한 채 해체를 선언하는 프랑스의 해체주의자들도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어떤 토대도 전제하지 않은 설득에 의한 자유로운 합의가 상호유대를 통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실용성과 유용성의 원리가 보편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어떤 원리로부터 현실비판의 메카니즘을 찾아야 할 것인가?

 

 

6. 포스트구조주의

 

1960년대에 프랑스 철학은 또 하나의 독특한 흐름을 형성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매를로 퐁티의 현상학 그리고 이 두 철학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생긴 구조주의를 뒤이어 형성되었다. 우선 우리가 이 흐름을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alism)란 용어로 지칭하는 데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이 용어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혹은 '해체주의' 혹은 '탈현대'라는 다양한 용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 용어들이 어떤 관계성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아직 이 용어들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확정된 판정을 내리기에는 성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스트구조주의'란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문학이나 예술 분야, 가장 넓은 의미로는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인데 반해, '포스트구조주의'는 주로 철학과 사회과학의 분야에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체주의''탈현대'란 용어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은 이 용어들에 대한 타당성 검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포스트구조주의란 이름 하에서 여기에서는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의 구조주의 이후 1960년대 급부상한 프랑스 철학의 주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특히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적 뿌리가 된 구조주의자인 소쉬르(F. de Saussure)의 일반 언어학 이론이나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 혹은 바르트(R. Barthes)의 문학 이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에게는 철학적 및 사회학적 문제에 주된 관심을 보이는 포스트구조주의와의 만남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사상 역시 매우 중복적이고 복합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을 주체, 역사, 언어(의미)의 문제로 한정해서 다룰 것이다. 또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거의 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특정한 분야에 중점적인 관심을 보인 몇 사람을 중심으로 다룬다. 주체이론에 대해서는 라깡(J. Lacan), 역사이론은 푸코(M. Foucault)를 그리고 언어이론은 데리다(J. Derrida) 그리고 철학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리오타르 (J. F. Lyotard)를 다룰 것이다.

 

1) 데리다의 언어관

언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견해를 단적으로 대표하는 데리다의 언어이론을 살펴보자. 데리다는 1967"문자학에 관하여", "말하기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3권을 출판하면서 그의 언어관을 정리한다. 그는 전통적인 언어이론을 반성적으로 해체한다. 그 역시 다른 구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니체로부터 해체적 전략을 빌어 온다.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려 한 니체와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플라톤에서 후설에 이르기까지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현전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Presenz)으로 칭한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항상 로고스, 즉 이성이나 말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성과 말만이 의식에 현전적이라는 편견에 사로 잡혀 있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말은 세계와는 무관한 채 독자적으로 언어의 세계를 생산하려는 본질을 가진다고 지적한다. 이성 또는 말로써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헤겔과는 달리 세계가 의식에 주어지는 대로(현전하는 것으로) 말하려 했던 후설의 시도 역시 말, 즉 음성중심의 현전의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전의 형이상학은 말에 대한 지나친 신뢰 속에서 형성되었다. 말은 아무리 현전성과 직접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말하는 자와 듣는자 사이에는 단절이 없을 수 없다. 현전성에 대한 성급한 환상이 서구의 형이상학을 음성중심의 형이상학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전통의 해체는 글쓰기를 통한 의미의 차이와 흔적을 추적하는 문자 중심의 문화로 전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데리다는 강조한다.

그는 언어적 표현과 이 표현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서로 구분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의식의 작용에로 돌아가서 설명하는 후설의 현상학에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말하자면 표현은 그 표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현상학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의미의 동일성, 객관성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해체의 대상이다. 언어적 기호와 독립적인 객관적 의미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소쉬르의 공식으로 말하면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 혹은 능기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언어의 기호적 측면을 지칭한다. 과 독립적인 시니피에(signifie) 기의 혹은 소기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언어의 의미적 측면을 지칭한다. 는 없다. 기호와 분리될 수 있는 어떤 의미영역도 있을 수 없다. 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는 어떤 고정된 구별도 없다. 시니피앙과 구분된 종국적인 혹은 동일하고 객관적인 시니피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들 사이를 이원적으로 구분한 형이상학적 편견에서만 가능한 발상이다. 의미는 쉽사리 하나로 고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치 이와같이 의미의 객관적인 동일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것은 마치 키메라의 사냥만큼이나 무모한 짓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의미론, 즉 기호의 의미가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을 토대로 하여 객관적인 동일체로 구성될 수 있다고 믿는 후설의 입장은 현전의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동시에 글보다 말의 직접성에 우위성을 두는 소위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와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에 토대하고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적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 즉 현전(presence)하는 것을 의미토대로 한다. 이런 입장은 결국 글보다는 말이나 목소리를 더욱 현전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데리다는 글에 비해 말이나 목소리에 의미의 토대가 확실하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전통 철학은 음성 중심주의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강조한다. 서양철학은 목소리나 말이 글에 비해 의식에 보다 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자 중심주의 대신 음성 중심주의의 모습을 띠어 왔다. 말할 때는 글쓸 때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나 자신과 관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글은 이차적인 전달수단이며 말의 기계적인 모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존재를 빼앗아 가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과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모든 철학적 전통이 글은 단순히 표현의 소외된 양태로서 생명력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목소리를 계속 찬양해 왔다. 이와 같은 현전의 형이상학은 다른 한편 기호의 궁극적 의미를 언어 이전의 선험적 기반에 두려는 로고스 중심주의와도 연결된다. 의미의 궁극적 기원을 찾으려는 것은 현전과 부재를 대립시키는 형이상학적 편견에서 가능한 것이다.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완전히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 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 할 수 있다. 데리다는 기호의 구조는 항상 영원히 부재하는 타자의 흔적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기호 자체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다른 기호의 흔적이 이미 깃들어 있다. 내가 어떤 문장을 읽을 때 그 문장의 의미는 항상 어느 정도 연기 내지는 지연된다. 하나의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 관계하도록 만든다. 각각의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기호의 의미를 본질이나 형상과 같은 어떤 동일자로 생각하는 것은 동일성에 대한 무모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동일성 속에는 이미 타자의 흔적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음을 전통적인 형이상학자들은 간과하였다. 데리다는 의미가 현전에 토대를 둔다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는 달리 현전과 부재의 이원적 대립을 해체한다. 그리고 의미를 동일성이나 현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부재와 차이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데리다의 언어관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차연'(차이 ^26^ 연기)이란 개념에서 잘 추적될 수 있다. 하나의 언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차이, 즉 그 언어가 다른 언어와 구분된 차이를 가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빨간 신호등의 멈춤의 의미를 갖는 것은 파란불의 의미와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전의 순간이 아무리 생생하게 체험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나간 것의 꼬리, 즉 비현전의 계기를 자체 속에 포함하고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어떤 독립적인 시니피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시니피앙과 단절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니피에는 영원히 유보된 채 시니피앙만 끝없이 흩어진다. 따라서 데리다는 기호학을 문자학으로 대치한다. 이 끊임없이 흩어지는 과정을 데리다는 '차연'이란 개념으로 규정한다. 이 차연(dierance)이란 낱말은 공간적으로는 dier를 시간적으로는 defer를 동시에 의미하는 신조어이다.

 

2) 푸코의 역사관

니체는 역사적 사건들이 일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향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확립하거나 역사의 순환을 입증하는 일에서 벗어난다. 그는 체계성을 비판하고 통사(통사)와 같은 역사해석을 거부한다. 푸코(1926~1984)는 니체의 역사해석의 도식을 빌어서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발상을 비판한다. 푸코는 진정한 역사 혹은 쓸모있는 역사는 최초의 원인을 가정하는 전통적인 역사학과는 달리 사건의 불가피성이나 연속성을 거부하며 목적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역사해석을 거부한다. 전체적 역사는 사건을 거대한 설명체계와 단선적인 과정 속에 해소시켜 큰 계기와 영웅을 찬양함과 아울러 시원점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계보학적 분석은 사건들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중요시되어왔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경시되어왔으며 일정한 역사를 통해 부정되어왔던 모든 현상들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계보학은 기원을 확립하는 일보다는 역사형식의 가변성 뒤에 숨겨져 있는 복잡한 구조들의 발생과 유래를 추적한다. 푸코의 계보학적 분석은 총체적~전체적~거시적 역사이론에 의해 차단된 국지적 비판을 수행한다.

푸코는 이성이 열정이나 광기에 대해 주도권을 가져 왔던 이성 중심의 서양 역사를 광기의 역사로 새로 쓴다. 이성이 재배해 온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역사체계 이면에 은폐되어있는 폭력성을 광기의 구조로 다시 들여다본다. 그는 "광기와 비이성"(1961)에서 광기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중세에는 광기가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상한 이성의 특수형식으로 파악되었다. 광기는 종종 이성을 넘어서서 용기있는 생각을 나타내었다. 이 시대에는 광인들이 치료나 감금의 대상이 아니었다. 광인들은 뱃사람으로 만들어져서 유랑하도록 했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광기도 어떤 진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광인은 정신병원에 감금해야 할 대상으로 되었다. 소위 대감금의 시대인 고전주의 시대가 등장했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이성의 시대는 비이성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감금을 선택한다 푸코의 지적에 따르면, 중세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18세기만 해도 광인들은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나름의 힘을 잃지 않았던 현명한 바보들이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이성과 비이성 사이의 대화는 단절되고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광기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감시와 감금의 대상이 되었다. 푸코는 이성에서 잃고 있는 차원이 광기에도 있을 수 있고 광기에도 지혜가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광기는 단지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고 감금의 대상이었을 뿐 치료의 대상일 수 없었다. 이제 치료를 위한 병원 대신에 감금을 위한 수용소가 등장한다. 말로만 치료일 뿐 감금이고 사회질서나 도덕적 질서라는 미명하에 광기는 지배의 대상이 되었다. 정신병 치료는 그 자체가 단지 광기를 신비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치료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억압은 광인들뿐 아니라 현대의 일상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이성이란 권위구조가 광기를 억압하는 양태를 분석함으로써 현대 산업사회의 지배구조를 드러내는 데 푸코는 관심을 가진다.

광인은 무지하기 때문에 의사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근대 권력/지식의 공생관계를 푸코는 해명한다. 그는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에서 18세기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육체의 처벌에서 영혼의 처벌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권력의 역사적 존재 방식을 서술한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범죄와 처벌은 공개적인 고문이었고 정신적이기보다는 육체적 고문이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이라는 고상한 이상아래 계몽사상은 이전보다 훨씬 효과적인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법적 감금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제 파놉티콘(Panopticon), 즉 원형 감옥과 같은 효과적인 감시체제가 합법적으로 등장한다. 이 원형 감옥과 같은 전체적 감시체제는 이제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일정한 규율하에 관리하게 하는 구조가 되었다.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이 규율의 거미집인 셈이다. 거미집 같은 유폐의 망 속에서 철저하게 감시받는다.

푸코는 "성의 역사"(1976년과 1984)에서 서양 근대문화가 성억압의 문명으로 전개되어 온 과정을 추적한다. 근대인들은 성을 일종의 죄의식과 결부시켜 표현하도록 훈련받았다. 17세기부터 19세기 청교도 시대에 더욱 강화되어 성과 성욕에 대해 억압과 침묵을 강요받아 왔다. 19~20세기에 들어와서 그 침묵이 고백의 강요로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성과 성욕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받는다. 이 성에 대한 죄의식과 성에 대해 알려는 의지가 낳은 성과학 그리고 성에 대한 고백을 강요받는 사회체제는 이제 성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른바 서양사회의 생체적 권력이 등장한다. 이 권력은 성과 성욕을 지식이라는 감시의 거울망으로 올가미를 채운다. 이 권력과 지식의 연계는 순종적 인간(homo docilis)으로 재교육하기 위해 요구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략적 메카니즘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관리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침묵을 강요받았던 18세기 이전의 시대에서 성에 대한 고백의 시대에로 이르는 동안 성은 재교육되고 통제되고 관리되고 조정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와 결부된 것이다.

70년대 이후 푸코가 발전시킨 권력~지식 연계론은 모든 사회에서의 지식형성이 권력작용과 불가분리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근대적 주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권력의지와 그것의 결과에 관심을 갖는다. 그의 권력/지식론은 거대한 근대적 사유 속에 잉태되어있는 앎에의 의지에 의해 발생된 권력 실체를 미시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전략적 지렛대이다. 따라서 권력은 지배계급이나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회에 편재해 있는 관계의 그물이다. 권력은 개인이나 집단의 손에 쥐어지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의 부분들을 가두는 전략적 그물망이다. 모든 사회의 부분들을 관리하기 위해 편재하는 유폐적 그물망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푸코의 권력~지식 연계론은 국가의 권력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는 맑스식의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해방의 논리를 생산적으로 창출하는 전략적 메카니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맑스는 미세한 통로를 통해 일상생활에까지 운반되어있는 미시권력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푸코는 통치권의 중심에 있지 않고 주변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일상생활에까지 편재해 있는 권력과 지식의 연계상황을 미시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3) 라깡의 자아론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근대철학은 자아의 동일성을 기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을 거쳐 후설의 선험적 자아로 변형된 모습으로 전개되어왔다. 이 근대적 주체(의식)중심적 사고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시도는 우리가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부르는 자들에게는 공통된 과제이다. 이들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의 영향하에 의식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무의식의 층에로 되돌아가려는 반전을 감행한다. 특히 라깡(J. Lacan, 1901~1981)은 주체성의 생성과정을 거울의 단계인 상상적 단계와 상징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아이가 갓 태어나서 24개월 사이에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비로소 자기동일성을 확립한다.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타인의 영상으로 지각하다가 차츰 거울 속의 영상이 결국 자신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확립한 아이는 자기 바깥의 모습을 통해 가능한 것이며, 자기 자신 속에 내재적인 자아가 거울에 비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신의 '자기''자기가 아닌 것', 즉 타자에서 얻어 온 것이다. 아이의 자기동일성은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구성된 동일성이다. 그러나 이 거울의 단계인 '상상적 단계'에서는 거울 속에 비친 상이 내 자신이 아닌 타자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말하자면 거울 속의 상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상으로 지각하고 그 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가 타자이고 타자가 자기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거리를 둘 수 있는 타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아이는 자기 자신이 거울 속에 비친 상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상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에 대한 완벽한 재현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상 '쪼개진 주체', 즉 다른 것에서 자신을 차용해 온 주체로 구성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상이 자신의 상이라고 상상하는 이 거울의 단계에서는 자신과 거울 속의 자신의 상 사이의 이자적 관계가 이루어지지만 이 사이에 완전한 타자가 들어섬으로써 삼자적 관계가 형성되어 주체의 분열이 일어난다. 이 단계를 라깡은 '상징적 단계'로 부른다. 이 단계에서는 주체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통해, 즉 자기 자신과의 분리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주체의 심적 상태와 언어 활동의 상징적 연쇄 사이에 금이 간다. '상상적인 것''상징적인 것' 사이에 입벌림이 일어나며, 후자가 전자를 이기는 단계가 생긴다. 이 입벌림이나 틈에 의해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이자적 관계가 형성되는 상상적 단계에서부터 제3의 타자인 아버지가 들어서는 상징적 단계로 나아간다. 즉 상상적 단계에서는 아이와 어머니가 일치를 이루었지만 아버지라는 절대적 타자의 등장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이제 서로 종속되어야 할 보편적 질서인 상징적 단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와 어머니의 이자적 관계로부터 아버지라는 제삼자가 절대적 타자로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얻고 이름을 통해 가족과 사회의 관계 그물 속에 일정한 자리를 얻게 된다. 절대적 타자로부터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려짐으로써 비로소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왜냐하면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직접성의 관계만으로는 아이의 전체성이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욕망이 아이를 통해 충족될 수 없고 아이는 어머니의 단순한 부속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법(아버지의 존재)과 같은 상징적인 질서가 필요하게 된다. 이 상징적 질서는 언어를 통해 짜여진 질서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언어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확립한다. 그런데 아이는 이미 타인의 언술의 그물 속에 놓여 있다. 이 그물, 즉 언어로 표현되는 금지, 명령, 욕망, 기대, 의무와 가치판단 등의 체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동일성을 정립해 간다. 마치 빨강색이 푸름이라는 다른 색깔에 의해 비로소 빨강색으로 규정되듯이, 자아 역시 그 자신이 아닌 타자의 자리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이처럼 라깡은 데카르트이래 당연시되어 온 자아의 확실성에 대해 정신분석학적 매스를 가함으로써 이성 중심적인 근대의 이데올로기를 허물어뜨린다.

 

4)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1970년대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류한다. 특히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 1979)에서 '포스트'의 성격을 부각시킨다. 리오타르는 '모던'의 성격을 거대한 이야기로 특징짓는다. 이 거대한 이야기란 이성주의 시대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꿈꾸었던 거대한 계획을 말한다. 이들은 객관적인 학문, 보편적 도덕과 법률 그리고 자율적인 예술을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말할 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보편화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배양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아발견, 도덕의 진보, 정의로운 사회와 제도의 실현, 인류의 행복증진이 가능할 것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계획은 파산되었다. 이 거대한 계획은 오히려 일상생활의 가치를 오염시키고 무한한 자기실현의 요구와 과도하게 자극된 감수성을 강조하는 주관주의가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보편성과 총체성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려 했던 하드웨어 중심의 거대한 이야기는 5~6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리오타르는 헤겔이나 맑스나 휴머니즘 철학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에 부합하는 소프트웨어 체계의 작은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새로운 질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난 40년 동안 인공두뇌와 컴퓨터, 정보저장과 자료은행과 단말기 등의 등장은 우리의 지식의 체계를 보편화시켰다.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이 옳은가를 묻지 않고 무엇이 쓸모 있으며 어느 만큼 생산성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제는 인간의 정신적 삶이나 인류의 해방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는 말의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컴퓨터 시대의 지식문제는 이제 정부의 문제 이상의 것이 되었다. 규제와 재생산의 기능이 관료의 손을 떠나 기계로 넘겨졌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는 정보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모던적 신앙은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에서 학문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수행성(performativity)이다. 즉 가장 이상적인 투입/산출 관계를 가져오는 것이다. 과학자, 기술자 그리고 기구는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힘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말하자면 지식의 장사화(mercantilization)가 이루어진다. 교육은 단말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선생의 역할을 기계가 부분적으로 대신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자료의 효율적인 활용이다. 자료은행(data~bank)은 내일의 백과사전이다.

이런 사회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보편성이나 총체성으로 짜여진 권위에 맹종하기보다는 단편화된 작은 이야기의 창조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이나 맑스의 인간 해방과 의미의 해석학까지 근대 계몽주의 설화의 성격을 지닌 거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리오타르의 작은 이야기 전략은 하버마스에 의해 공격받는다. 이제 포스트구조주의자들까지 하버마스와의 논쟁에 개입한다. 변증법적 전통을 이어가면서 하버마스가 제시한 합리적 의사소통이론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야기의 틀이다. 합리적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정당성이 결여된다는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을 안티모더니즘으로 부르면서 그들은 신비적인 방식으로 근대 세계의 밖으로 도피하여 스스로 감정의 영역으로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신실용주의자인 로티 역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의사소통을 결여한 극단적인 건조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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