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오해 받고 있는 대표적 그리스 지성인 에피쿠로스
13. “상인에서 스토아철학 창시자로” 제논
14. 플라톤에게 이데아를 전수하다 파르메니데스
15. “변화가 바로 로고스다!” 헤라클레이토스
12. 오해 받고 있는 대표적 그리스 지성인 에피쿠로스
“Death does not concern us, because as long as we exist, death is not here. And when it does come, we no longer exist.”
“죽음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테네 학당을 보면 이슬람 신학자 아베로즈 뒤편에 보면 얼굴이 넙적하고 퉁퉁해서 마치 ‘우량아’를 연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습이 옛날 유명한 개그맨 김형곤씨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데다 마치 월계관이라도 쓴 듯 풀인지 나뭇잎인지, 잎으로 모아 모자를 만들어 머리에 얹었군요. 그리고 낮은 돌기둥 위에 책을 펼쳐 열심히 읽고 있네요. 바로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에피쿠로스(Epicurus, 342~271 BC)입니다. 그리스 시대 대표적인 쾌락주의 철학의 선봉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 옆에 쾌락주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이 있습니다. 모습이 호리호리하고 모자를 쓰고 있으며 어린 아이와 같이 있습니다. 학문적 경쟁자인 에피쿠로스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에피쿠로스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이 무덤덤하게 그저 독서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
우리가 생각할 때 서로 대립되는 학문이기 때문에 서로 눈을 부라리며 싸울 법도 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 역사상 서로 학파(school)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거나 헐뜯고 싸운 선례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과 자연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최고의 선을 지양했고 덕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학파는 있었지만 파벌은 없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라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탄생합니다. 그러나 두 학파 간에 대립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상이하게 보이는 두 학파도 다시 뒤집어 생각하면 동일한 주장으로 귀결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쾌락주의적인 편견에서 공부와는 담 싸고 방탕하게 노는 것만 생각나는 것은 아닌가요? 아마 그만큼 공부하라고 후배들을 채찍질 한 학자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모든 것을 떠나서 우선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명언 가운데 학문의 자세와 관련 아주 심금을 울리는 명언이 있습니다.
“Let no one when young delay to study philosophy, nor when he is old, grow weary of study. For no one can come too early or too late to search the health of his soul.”
“젊었을 때 누구든지 철학공부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늙었다고 해서 학문에 싫증을 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의 건강을 찾는데 빠르고 늦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학문에 빠르고 늦음이 없고, 젊고 늙음이 없다”
아마 쾌락주의 철학을 창시한 에피쿠로스만큼 오늘날까지도 오해를 받는 학자는 드물 겁니다. 심지어 영국의 공리주의의 대가이자 교육 신봉자인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에피쿠로스학파를 자신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을 가리켜 ‘돼지들(pigs)’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밀의 명언가운데 돼지를 주제로 한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죠?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 말입니다. 밀이 이 명언을 만들어 내는데 에피쿠로스가 한 몫을 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쳐가지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밀이 에피쿠로스를 대단히 증오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증오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짓궂게 표현하자면 ‘돼지’로 취급할 정도로 저급한 철학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어떻게 본다면 에피쿠로스에 대한 밀의 이러한 평가가 무게를 받아, 그 이후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주의를 그저 쾌락이나 향락이나 추구하고, 개인주의에만 집착하는 저질스러운 철학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19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제임스 밀의 아들인 그는 당시 엘리트층에서 유행했으며 지금의 시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기영재교육을 받은 천재였습니다. 세 살부터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여덟 살 때 어려운 고전들을 읽혔고 13살에는 이미 복잡한 경제학에도 정통했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오해는 밀의 영향 커”
“나에게 어린 시절은 없었다”고 말한 그는 지능(IQ)가 180에 가까울 정도였으며 아버지가 따르던 벤담(Jeremy Bentham)과 교육과 경제를 논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영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인이며, 또 얼마나 영향력도 컸겠어요? 이러한 그가 에피쿠로스 철학을 저급한 개인의 쾌락만 추구하는 저급한 이론으로 취급했으니 에피쿠로스에 대한 오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이제는 보통명사로 탈바꿈해서 쾌락주의자, 또는 미식가(美食家), 식도락가라는 의미로 사용될 정도니 살아 있다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하겠어요? 아마 에피쿠로스 만큼 우정을 중요시하고, 또 검약과 소박한 사상을 가진 철학자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오해를 사고 있는 쾌락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물질적 행복을 의미하는 쾌락이라는 우리말 단어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즐거움, 또는 안락(安樂)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사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오해를 산 배경에는 바로 쾌락이라는 단어의 의미의 역할이 크게 작용합니다. 쾌락주의를 뜻하는 영어 hedonism은 쾌락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hedone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래서 쾌락주의란 쾌락을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자 도덕적 기준으로 삼는 윤리학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쾌락은 본질적 선이며 고통은 악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행복을 증진하는 것은 모두 선이라고 주장하는 행복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쾌락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키레네학파가 원조
쾌락주의의 전형은 고대 그리스의 키레네(Cyrene) 학파에서도 나타납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북아프리카(지금의 리비아) 출신의 아리스티포스 (Aristippos)가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연 키레네 학파의 쾌락주의는 소(小)소크라테스 학파가운데 하나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덕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며 이러한 즐거움은 쾌락의 충족으로 얻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쾌락은 행복의 원리로 덕을 추구하는 것이 곧 쾌락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러나 초기의 주장과 달리 순수성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일부 사상가들은 미래가 우리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지금 당장의 감각적, 육체적 쾌락을 강조합니다. 아리스티포스의 뒤를 이은 테오도로스에 이르러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이기주의적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테오도로스는 정치적, 종교적인 모든 종류의 이타적인 행동과 제도를 거부하고 개인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만 몰두했고 동료인 헤게시아스(Hegesias)는 쾌락주의적 염세주의를 추구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쾌락을 얻지 못하므로 쾌락주의의 이상은 달성될 수 없다는 비관적 사상이죠. 결국 헤게시아스는 쾌락을 얻지 못할 때 가능한 최선의 방법은 고통을 피하는 일이며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죽음을 택하는 길이라는 주장까지 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고통이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 곧 죽은 사람이라는 거죠.
불교의 허무주의 영향을 받은 헤게시아스는 염세주의로 변모
결국 염세주의에 빠짐으로써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쾌락을 추구하려는 처음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외적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최고선으로 설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을 찬미한 헤게시아스는 ‘죽음을 권유하는 사람(death persuader)’이라는 뜻의 페이시타나토스(Peisithanatos)라는 별명을 얻었다. 쾌락주의가 이와 같이 염세관으로 귀착한 사실은 대단히 역설적인 대목이다.
최근 자살이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헤게시아스다. 인간은 죽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헤게시아스는 불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고향을 찾아 인도 아소카 왕이 보낸 불교 승려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180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 장 마리 귀요(Jean Marie Guyau)는 불교의 허무주의 철학과 헤게시아스의 철학을 비교한 저술을 통해 헤게시아스가 불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에피쿠로스학파는 키레네학파와는 달리 순간적, 감각적, 육체적 쾌락보다는 영원한 정신적 쾌락을 강조했습니다. 창시자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마음의 안식과 쾌락을 결합함으로써 고통을 피하고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평정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이상적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그는 공포는 정신안정에 위협적인 요소로,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무엇보다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며 “우리가 신처럼 자유롭기 위해서는 행복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아야 하고 덕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폅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평정한 마음, 그리고 덕
그는 또한 덕은 우선 평정한 마음(ataraxia)에서 나타나며 더욱 바람직한 덕은 쾌적하고 단순하며 온화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고상한 쾌락이나 정신적 가치는 육체적 만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죠.
에피쿠로스학파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후 쾌락주의는 2천년 동안 전혀 발전이 없다가 18세기 영국 철학자들이 사회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개인윤리를 쾌락주의에서 처음 찾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합니다. 바로 공리주의가 나타나죠. 다시 말해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는 고통을 극소화하고 쾌락 또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행위라고 주장한 공리주의는 쾌락주의가 윤리학적으로 더욱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밀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를 가리켜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저급한 이론이라면 ‘돼지’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죠.
아마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소 알게 됐을 것이고, 오해도 어느 정도 풀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쾌락주의란 원래 그런 게 아닌데…”
영국이 낳은 거목 존 스튜어트 밀이 어떤 정확한 근거에서 에피쿠로스학파를 자기만의 쾌락을 추구하고 이웃의 행복은 거들떠보지 않는 이기주의 철학자들로 규정하고 돼지 운운하게 됐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본질인 정신적 쾌락은 빼버리고 육체적 쾌락주의로 오해를 받아 심지어 향락주의자, 식도락가, 미식가 등으로 의미가 변질되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의미를 변질시켜
그러나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합니다. 우선 에피쿠로스가 애당초 추구했던 정신적 쾌락주의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본질에서 벗어나 퇴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부 제자들 가운데는 쾌락을 물질적 쾌락으로 본 경우도 많았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헤게시아스는 불쾌를 수반하지 않는 쾌락은 없다고 생각하여 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를 현명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생활에 무관심할 수 없을 바에는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 거죠. 이는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로 이어졌고 말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부르짖은 밀이 이런 에피쿠로스를 좋아할 리가 없죠. 전체를 중요시한 밀이 이런 개인적인 쾌락, 또 설사 처음의 의도가 개인의 정신적 평안 또는 깨달음을 추구했다 해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종교적인 영향도 대단히 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그리스 석학들이 기독교에서는 이단아들로 취급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비단 이 석학들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에 꽃 피웠던 철학과 철학자 모두가 기독교의 이단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스토아철학을 신봉한 기독교에 의해 대립적으로 간주돼
다시 말해서 마치 전 세계나 다름없는 유럽 전역을 지배한 막강한 기독교 세력과 문화에 의해 어떤 철학이 전혀 새로운 철학으로의 변질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에피쿠로스가 바로 그런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주의를 마치 향락주의로 생각하여 방탕한 생활을 정당화한다고 오해하기 시작한 것은 대제국 로마가 그 힘을 점차 잃고 향락과 퇴폐로 젖어 들기 시작하는 로마 말기 시대에 들어와서였습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와 거의 일치합니다.
철학사적으로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의 시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붕괴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도시국가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계승한 헬레니즘 시대의 왕들이 벌인 권력 다툼의 저당물이 됩니다. 내분 속에서 암울한 시기가 계속되는 거죠.
이 어지럽고 불안한 환경에서 2개의 독단적 철학체계, 즉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 생겨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에 의해 정복되기 전인 그리스 말기로 헬레니즘 시대가 점차 그 막을 내릴 조짐이 나타나던 시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스토아철학의 금욕주의가 생깁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소위 회의주의라는 것이 이때 생겨난다는 겁니다. 내용은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세 철학의 공통점은 현실도피적이라는 데 특색이 있습니다. 얄궂게 표현한다면 살아남기 위한 철학들인지도 모릅니다. 지족안분(知足安分)의 에피쿠로스, 금욕과 절제의 스토아철학, 그리고 기존 개념에 비판적인 회의주의철학이 그것이죠.
혼란한 시대에 나온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
사실 혼란한 시기에 나타나는 철학들이 은둔과 도피, 기존 개념에 대한 비판의 철학이 대세를 이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정치나 군주의 도(道), 또는 백성을 위한 철학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죠. 이 중 절제와 자연적인 삶이라는 금욕주의를 주장한 스토아철학은 기독교의 기본윤리가 돼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죠. 그러나 헬레니즘철학의 쌍두마차 가운데 하나로 스토아학파와 대립했던 에피쿠로스는 자동적으로 소외되고, 다시 비난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스토아학파가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반해 에피쿠로스 학파에는 신을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않습니다. 신이 있든 없든, 그것이 인간의 정신적 안정과 평안함에는 그렇게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죠. 기독교가 이를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If God listened to the prayers of men, all men would quickly have perished: for they are forever praying for evil against one another.”
“만약 신이 모든 인간의 기도를 들어준다면 모든 인간은 곧바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영원히 서로를 반목하는 악을 위해 기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재미있는 지적입니다. 이런 말도 했습니다.
“Is God willing to prevent evil, but not able? Then he is not omnipotent. Is he able, but not willing? Then he is malevolent. Is he both able and willing? Then whence cometh evil? Is he neither able nor willing? Then why call him God?”
“신은 악을 막고 싶은 의지는 있는데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걸까? 그렇다면 신은 결코 전능하지 않다. 그러면 능력이 있는데 (악을 막고 싶은) 의지는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사악한 의도를 갖고 있다.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을까?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만약 능력도 의지도, 둘 다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르는 건가? ”
“우리는 그를 왜 신이라고 부르는가?”
자, 이 정도라면 에피쿠로스가 밀에 의해서 돼지라는 수모를 받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 그의 학문이 왜곡됐을 거라는 게 짐작이 가겠죠? 로마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 년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러나 철학의 꽃이 만발하게 피었던 것은 헬레니즘 시대입니다. 원래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말은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Hellene는 바로 그리스의 다른 말입니다.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 그리고 심지어 인도 문화까지 융합하여 이루어진 세계를 아우르는 예술, 사상, 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입니다. 비록 역사는 짧았지만 소위 세계주의, 국제주의라고 할 수 있는 cosmopolitanism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죠. 헬레니즘은 오늘날 기독교의 근간이 된 헤브라이즘(유대주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기본을 이루는 문화의 사조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그 사조가 이룬 거대한 업적에 비해 평가를 못 받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입니다. 참고로 헬레니즘(정확하게는 Hellenistic)이라는 말은 19세기 초 독일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드로이젠(Johann Gustav Droysen, 1808~1888))이 처음 썼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에 정통한 그가 수많은 지역을 정복한 대왕의 영향력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단어를 처음 만들어 낸 것이죠.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과 문화까지 포함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더 3세의 죽음에서 로마 제국에 의해 이집트가 합병된 BC 323~BC 30까지의 대략 3세기에 걸친 기간을 말합니다.
“I am an Epicurean. I consider the genuine (not the imputed) doctrines of Epicurus as containing everything rational in moral philosophy which Greek and Roman leave to us.”
“난 에피쿠로스를 따르는 사람이요. 에피쿠로스의 (왜곡되지 않은) 진짜 사상에는 그리스와 로마가 우리에게 남겨준 도덕적 철학에 있어서 이성적인 모든 것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제퍼슨, 미국 3대 대통령-
“평정한 마음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
“It is impossible to live a pleasant life without living wisely and honorably and justly, and it is impossible to live wisely and honorably and justly without living pleasantly.”
“현명하고 명예롭게, 그리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는 즐거운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현명하고, 명예롭게, 그리고 정의롭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에피쿠로스의 핵심이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은 탈레스 등에 의해 시작된 자연주의 철학에서 진리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꽃을 피우고 다시 또 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철학으로 발전합니다.
그리스 철학, 자연탐구에서 개인의 행복추구로
헬레니즘시대에 출현한 새로운 2개의 학파, 즉 쾌락주의를 대변하는 에피쿠로스학파와 금욕주의를 대변하는 스토아학파로 발전합니다. 물론 나중에 신플라톤학파들이 출현하지만 큰 줄기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헬레니즘 시대 근간이 됐던 2개 학파로 끝을 맺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정신을 혼란하게 하지 않는 평정한 마음(perfect mental peace) 즉 ‘아타락시아(ataraxia)’에 있었는데 인간의 행복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공포, 고통, 감정과 같은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 기본이었습니다.
(육체적) 향락은 인간 행복의 일부분이라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정신의 평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하는 경우에 한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정신과 인간 내면의 행복을 주장한 겁니다.
그래서 평정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데 종교라는 신이 방해가 된다면, 그 신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죠. 신에 대한 무조건적 의지나 복종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수양과 관조(觀照) 속에서 스스로의 성찰을 이루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과연 종교나 신은 인간에게 행복을 선사한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해독을 가져왔느냐 하는 논쟁도 나올 수 있습니다.
죽음,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의 탈피가 바로 최고의 행복
유신론자는 행복하고 무신론자는 불행한가? 유신론자는 도덕적이고 무신론자는 비도덕적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할 수 있는 거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만약 종교가 없다면 사회는 살인, 방화, 도둑질, 못된 짓으로만 가득 찰 것 같은가요?
인간은 스스로 통제하고 도덕을 추구하는 내재적 본능이 없을까요? 우리는 신을 이야기할 때 주로 기독교의 창조주를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불과 천 년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200년 남짓하고요.
어쨌든 신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를 둘러싼 논쟁은 과거에도 존재했다는 이야기죠. 그러한 논쟁에서 에피쿠로스는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아마 그래서 훗날 밉상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데모크리토스의 유물주의적 원자론 학파였던 그는 원자론이 가지는 과학적인 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인간의 감정, 심신(心身)과 관련한 사실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 내는 데 이용했습니다.
원자론을 인간의 감성파악에 연결시켜
물론 신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도덕의 기초로서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었습니다. 그가 이끈 공동체는 특히 우정을 중요시했고 스승이나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Luxurious food and drinks, in no way protect you from harm. Wealth beyond what is natural, is no more use than an overflowing container. Real value is not generated by theaters, and baths, perfumes or ointments, but by philosophy.”
“비싼 음식과 술은 결코 해로움(불행)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자연이 주는 것 이상의 부(富)는 넘쳐 흐르는 컨테이너와 같이 필요가 없다. 진정한 가치는 극장도 목욕탕도 아니며, 향수나 좋은 화장품도 아니다. 철학에 의해서다.”
스토아학파가 금욕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사회와 현실참여를 중요시한 데 비해 에피쿠로스학파는 현실을 멀리하고 은둔생활을 쫓은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의 완성을 추구했다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과학에 대해서 에피쿠로스는 그것의 실천적 목적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정원 개설, 오늘날 코뮌과 비슷해
BC 306년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 있는 자기 집 정원(kepos, 케포스)에 일종의 학원을 설립합니다. 정원학파가 탄생하는 거죠. 그러나 이 학원은 공부하는 요람이라기보다 주민자치단체인 코뮌(commune)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처럼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은 생활양식이었으며 철학의 목적은 행복을 보장하고 이를 성취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학문이란 돈벌이 수단도, 출세의 수단도, 그렇다고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한 삶의 궁극목표라고 결론 짓고 현명한 자가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방식에는 2가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욕구를 최소로 줄이고 인간들 사이의 경쟁과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은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이라는 일종의 사적인 약속을 법으로 나타나는 공적 약속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그는 우정을 아주 소중히 여겼습니다. 우정은 비록 효용에서 비롯되지만 일단 생겨나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에피쿠로스는 “친구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사자와 늑대처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짓이다”라고도 합니다. 우정은 자치 공동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Of all the means which wisdom acquires to ensure happiness throughout the whole of life, by far the most important is friendship.”
“지혜로운 자가 전 생애에 걸쳐 행복을 지킬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정이다”
행복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는 것은 우정
어쨌든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행복추구가 가장 중요하며 심지어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는 과학도 행복추구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하늘의 현상과 죽음에 대한 의문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또 고통과 욕망의 한도를 파악하지 못하여 고뇌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자연과학은 우리에게 필요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죠.
인간의 불행은 헛된 욕망과 세속적 위험에서 유래합니다. 또 불행의 원천으로는 그밖에 2가지 큰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욕망의 한도를 파헤치고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데 유효하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달랠 수 있다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했습니다.
과학은 영혼을 하나의 신체 내부에 있는 또 하나의 신체로 보기 때문에 신체가 분해될 때 영혼도 분해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영혼이 신체 일부라면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죽음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물론 원자론적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바로 이 관념 때문에 영혼에 고통을 주는 모든 격정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요? 아니죠,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이성으로 쾌락의 한계를 측정해 볼 때 “만일 쾌락이 매 순간마다 완전하지 않고, 또 시간이 무한하다고 해서 유한한 시간보다 더 큰 쾌락이 생기지 않는다면 불멸에 대한 모든 욕망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정복한 사람은 고통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에피쿠로스가 설립한 학원에는 남녀 차별이 없었고 에피쿠로스의 노예도 자유롭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정치활동과 사회생활은 피하라고 가르쳤으며 하루에 0.5리터 정도의 포도주가 허용되었지만 평소 마시는 것은 물이었고 보리빵이 주식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와 달리 공유재산도 없었으며 또한 학생들 또는 스승 사이의 관계가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간에 플라토닉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립적인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에피쿠로스 학생들의 성적(性的)으로 부정한 사례를 지적한 기록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훗날 로마의 세네카의 기록에 따르면 에피쿠로스 정원 앞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Stranger, here you will do well to tarry; here our highest good is pleasure”라는 글이 일종의 교문 앞에 있었던 거죠.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거처할 진정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 즐거움이 있습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It is impossible for someone to dispel his fears about the most important matters if he doesn’t know the nature of the universe but still gives some credence to myths. So without the study of nature there is no enjoyment of pure pleasure.”
“만약 누군가 우주의 본성을 알지 못한 채 신화적인 것에만 믿음을 의지한다면 가장 중요한 사실들(죽음, 신 등)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공부 없이 순수한 행복감에 젖어들 수도 없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끼는 나는 무엇인가? 또한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러한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곧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역설하려고 한 지성인이 바로 에피쿠로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13. “상인에서 스토아철학 창시자로” 제논
“That which exercises reason is more excellent than that which does not exercise reason; there is nothing more excellent than the universe, therefore the universe exercises reason.”
“이성(理性)을 실천하는 것은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다. 우주(로고스)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우주(로고스)는 이성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서양철학의 기본이 된 스토아철학
지난번에 다루었던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 바로 옆에, 그림에는 왼쪽 제일 구석에 보면 약간 깡마른 얼굴에 헐렁한 꼬깔 모자를 쓴 노인 한 분이 보입니다. 다시 그 옆에는 정면을 주시하면서 퉁퉁하게 생긴 어린애처럼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군요.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이 어린이처럼 생긴 사람을 아무런 의미 없이 등장시키지는 않았을 것인데, 아무리 뒤져봐도 누구를 상징하는 인물인지 나와 있지가 않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소개를 하도록 하죠.
어쨌든 깡마르고 여윈 데다가 그을린 모습을 하고 있는 노인이 바로 유명한 금욕주의 스토아학파(Stoicism)의 창시자 제논(334~262 BC)입니다. 사실 제논은 피부가 꺼칠했으며 얄궂게 표현하자면 대단히 갈비씨였다고 합니다.
역시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제논의 역설로 잘 알려진 엘레아의 제논(Zenon of Elea, 490~430 BC)과 구별해서 키프러스의 제논(Zenon of Cyprus, 또는 Citium)으로 씁니다. 이름 뒤에 오는 것은 지명으로 태어난 고향 이름을 나타낸다는 이야기는 이미 설명한 것 같습니다.
제논의 역설은 “토끼는 아무리 빨라도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는 역설적 주장이죠. 정확하게는 대단한 영웅 아킬레스가 느림보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무역상인, 물건 실은 배가 난파돼 돈을 몽땅 잃어
고대 그리스시대 철학의 한 부분이었던 스토아학파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대단합니다.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계적인 종교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철학보다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스토아학파를 설명하기 앞서 제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까요? 아마 그를 알게 되면 스토아학파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어떤 계기와 과정을 거쳐서 스토아학파를 창설하게 됐는지도 말입니다.
참고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30년경 전문적인 전기작가(biographer)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가 지은 <저명한 철학가들의 생애와 사상(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애와 철학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데에는 이 분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 키프러스에서 무역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제논도 아버지를 따라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라는 것이 물건을 싸게 구입해서 비싸게 팔아 돈을 버는 겁니다. 이득을 챙겨 돈을 버는 것은 상인의 철학이자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상인으로 상당히 성공해 여유로운 생활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인생이 새옹지마라고 했던가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새로운 전환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 날 배에 물건을 싣고 아테네로 가 떼돈을 벌어보자는 꿈에 부풀었던 그가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우로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배가 난파해 모든 물건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거죠. 재산을 완전히 잃어버린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외딴 섬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그는 도적을 만나 몸에 지니고 있던 약간의 돈마저 모두 빼앗겨 완전히 알거지 신세가 되고 맙니다. 지나가던 배의 선장에게 간절히 애걸한 끝에 아테네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견유학파 철학자 크라테스의 문하생 돼
아테네 시내를 헤매다가 우연히 서점에 들린 그는 서점 주인에게 묻습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싶은데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서점 주인이 대답합니다. “당연히 있지요. 테베스의 크라테스(Crates of Thebes)를 만나보세요. 그 분은 당신 같은 알거지도 환영하니까요.”
크라테스가 누구냐고요? 당시, 그러니까 제논이 아테네에 머물 당시 가장 유명한 견유학파 철학자(Cynic)로 정평이 나 있던 학자죠. 견유학파라면 디오게네스(Diogenes)를 생각하면 됩니다. 부나 명예를 초개(草芥)처럼 생각하고 빵 한 조각에 의지하면서도 세상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살아가는 철학자들이죠. 심하게 표현하자면 ‘많이 배운 거지들’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마음의 평안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알거지가 된 제논이 의지할 곳은 이런 철학자들의 집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논이 찾아가 자신이 겪은 사정을 이야기하자 크라테스는 제논을 위로하면서 물질적인 재산이란 인간의 행복에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충고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란 부질없는 것이요. 왔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돈과 명예요. 사라지지 않는 것은 영원한 진리밖에 없소. 진리 탐구에 뛰어드시오.”
욕심을 줄이는 금욕이 행복감을 높인다는 것 깨달아
크라테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던 시절 그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콩 수프가 든 항아리를 시내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제논이 항아리를 들고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크라테스가 지팡이로 항아리를 내려치자 콩 수프가 학생들에게 튀겼습니다.
제논이 놀라 도망치려고 하자, 크라테스는 그를 향해 이렇게 일갈(一喝)을 퍼붓습니다. “Why run away, my little Phoenician? Nothing terrible has befallen you!”
“왜 도망치는 것이냐, 이 (쥐새끼같이) 작은 페니키아 놈아? 너를 무섭게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옛날 고승(高僧)들의 일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제자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전수하기 위해 기이한 행동으로 교육적 효과를 달성하는 일들 말입니다. 그러면 콩 수프가 든 항아리를 갑자기 깬 크라테스는 무엇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걸까요? 그리고 특히 제논을 향해 일갈을 퍼부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일화 속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요? 적어도 술이 취한 크라테스가 술김에 항아리를 깨고 욕설을 퍼부은 것은 아니겠지요?
연꽃을 들고 있던 부처의 마음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헤아린 가섭 존자에게 대(代)를 잇게 한 것처럼 크라테스도 제논을 수제자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도록 말입니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깨진 것은 항아리지, 제논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전혀 깨지지도 다치지도 않았거늘 왜 깨진 항아리를 보고 놀라 달아나려고 하느냐. 진리를 깨우치려면 사물의 현상을 정확히 봐라!” 이런 정도로 말입니다.
스토아철학, 견유학파의 무소유 정신에서 나와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쨌든 배가 난파당하는 바람에 알거지가 된 제논은 철학적 지조가 있는 견유학파 철학자 크라테스 밑에서 공부하면서 적어도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돈이라는 것이 사람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구나. 가난하게 살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있구나. 그것은 결국 끝없는 인간의 욕심을 줄이는 일이다. 금욕(禁慾)이 바로 행복에 도달하는 길이구나!”
그의 금욕주의 스토아학파와 철학이 이렇게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시대 등 기독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스토아철학이 바로 ‘개 같이 산다’는 견유학파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거죠.
이런 의문도 듭니다. 제논이 굳이 스승인 크라테스에서 독립해 스토아철학을 새로 세울 게 아니라 크라테스와 같이 거지처럼 살아가면서 가난 속에서 행복을 느끼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글쎄요?
견유학파에서 나온 스토아철학
아테네 학당 우리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구동성으로 당연히 행복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때는 대답이 각양각색 달라질 겁니다.
“탐욕스런 인간은 사막의 모래땅과 같아”
금욕주의 스토아철학의 창시자인 제논의 철학이 녹아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The avaricious man is like the barren sandy ground of the desert which sucks in all the rain and dew with greediness, but yields no fruitful herbs or plants for the benefits of others.”
“탐욕스러운 인간이란 욕심으로 가득 차서 비(물)를 다 삼켜버리는 사막의 척박한 모래땅과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과일이나 나무를 제공하지 못한다.”
행복을 수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행복의 수치 말입니다. 욕심을 절제할수록 행복감이 높아진다는 금욕주의 철학자 제논의 주장을 수학적으로 표현해 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분모를 사람의 욕심이나 욕망(desire)으로 하고, 다시 분자를 그 욕심의 성취도(accomplishment)로 곱하기 100을 해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취도(accomplishment)/욕망(desire) x100=행복감(happiness)이라는 공식을 만들 수 있겠죠. 결국 행복감이 높아지려면 분자인 성취도, 원하는 것을 많이 얻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반면 성취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동안 과학과 기술 등 문명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옛날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러나 제논이 살았던 기원전 300년 당시보다 더욱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욕망을 줄이는 길이 곧 행복을 높이는 길”
물론 그렇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성취도는 산술급수적인 증가 수준에 머무는 이상 행복감이 증가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결국 해답은 분모인 욕망을 줄이는 일입니다. 욕망을 줄인다면 행복감은 자동적으로 높아질 거니까요.
이처럼 욕망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찾아보자는 것이 금욕주의 스토아학파가 견지하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금욕생활을 좀더 철저하게 실천에 옮겨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순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All things are parts of one single system, which is called Nature; the individual life is good when it is in harmony with Nature.”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시스템의 부분들일 뿐이다. 개인의 삶도 자연과 조화를 유지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스토아철학을 학문이라고 보기보다 하나의 윤리적 규범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철학 가운데서 가장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는 사상체계라고들 합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조화가 곧 행복”
그러나 로마로 전해지고, 다시 훗날 기독교의 기본철학으로 흡수되면서 서양철학의 기본이 됩니다. 대신 앞서 소개했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그 본질이 왜곡되면서 저질스러운 학문으로 퇴색하고 맙니다. 스토아학파에 ‘스토아’ 라는 말이 붙게 된 것은 제논이 스토아(Stoa)라는 곳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스토아를 주랑(柱廊), 또는 회랑(回廊)이라고 하는데 아마 옛날 특별한 공공건물이 없을 때 사람들이 모였던 새마을회관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에는 아고라(agora, 집회장, 중앙광장)라는 공공광장이 있었습니다. 지중해의 영향으로 기후가 좋은 그리스에는 시민들이 옥외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아고라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뉴스를 교환하며 정치를 논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과 사상은 이러한 토론문화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수많은 정치적인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지탱하는 잠재력이었죠. 스토아는 일종의 공회당으로 그들에게 그늘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제논은 이러한 토론의 장소 스토아에서 금욕주의가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설파했고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많은 제자들을 확보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독자적인 학파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견유학파의 사상은 스토아철학의 윤리관
재미있는 것은 아테네의 수많은 철학들이 나왔고, 그 철학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스승의 이름을 따서 학파의 이름을 지었지만, 그 중에서도 스토아학파는 특이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논의 이름을 따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초창기 그리스철학을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 밀레토스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경우도 있습니다. 소위 자연철학자들이죠.
어쨌든 제논이 “Extravagance is its own destroyer. 과욕은 패망의 길이다.” “The goal of life is living in agreement with nature. 삶의 목표는 자연과 합의하는 것이다”와 같은 말들을 남긴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욕심을 자제하는 금욕주의야말로 스토아학파의 중심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논이 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적 삶을 중시한 스토아학파는 무소유를 중시하는 견유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견유학파에 대해서는 나중에 디오게네스를 소개할 때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제논은 윤리를 중요하게 다루었고 우주가 곧 신이라는 범신론의 입장에서 금욕과 극기를 통해 자연에 순종하는 현인(賢人)의 생활을 이상으로 내세웠습니다. 그의 철학은 절제와 인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결국 인간의 행복은 자연과 일치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의 이성’ 즉 로고스(logos) 철학은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이 됩니다. 로고스라는 말은 원래 헤라클레이토스가 처음 했지만 ‘보편주의(cosmopolitanism)’로 그리스 철학의 축을 이루는 사상입니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추종자 많아
후에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알려진 세네카가 그의 이론을 완성하면서 서양의 기본적인 철학이 됩니다. 특히 로고스를 절대적 유일신과 같은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기독교 신학의 기초가 됩니다. 제논의 윤리와 도덕을 신학의 이론으로 재구성한 것이죠. 뿐만이 아닙니다. 스토아철학은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천재’로 일컫는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354~430)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기독교의 확고부동한 이론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는 삼위일체론(Trinitas), 신국론(The City of God), 고백록(The Confessions) 등을 통해 신학이론의 기초를 마련한 학자입니다. 신학이론의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스토아 철학은 마치 기독교 신학이론을 위해서 태어난 학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독교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 철학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는 이후 서양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고 비단 서양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거죠.
로고스는 신, 금욕과 절제는 기독교 윤리로
다시 말해서 스토아철학의 로고스는 기독교의 중요한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그리고 스토아철학의 금욕과 절제의 도덕과 윤리는 기독교의 윤리관을 설명하는 이론적 기초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근대 유럽의 합리주의 철학의 기반이 됩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당시 철학가들에게 많은 영양을 끼치는 것이죠. 명상록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역대 로마 황제 가운데 가장 존경 받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스토아철학의 추종자입니다. 금욕과 절제를 주장한 황제, 그리고 수많은 주옥같은 명언을 남긴 황제로 알려져 있죠.
“If you are distressed by anything external, the pain is not due to the thing itself but your own estimate of it; and you have the power to revoke at any moment.”
“당신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괴로움을 받는다고 할 때, 사실 그 고통은 외부의 사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고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괴로움은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겠죠?
스토아철학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 종교, 문학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단 기독교 신학의 기초뿐만 아니라 훗날 브르노, 스피노자 등 신과 자연을 하나로 보려는 관점에 커다란 역할을 한 거죠. 또한 스토아철학의 윤리사상은 몽테뉴 등 모럴리스트(moralist)들에게는 일종의 처세훈으로 사랑 받기도 했습니다. 돈 버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상인 출신의 제논이 어느 날 배가 파선돼 알거지가 된 이야기를 하며, 다시 아테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좋은 스승을 만나 금욕주의 철학에 빠지게 된 것을 보면서 사람은 어떤 운명적 삶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4. 플라톤에게 이데아를 전수하다 파르메니데스
“We can speak and book/5kyeong only of what exists. And what exists is uncreated and imperishable for it is whole and unchanging and complete. It was not or nor shall be different since it is now, all at once, one and continuous.”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다. 왜냐면 그것은(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며, 변하지도 않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그대로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다르지도 않았고, (앞으로)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어렵죠?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전혀 모를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서 약간 알쏭달쏭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원래 그러한 철학자입니다.
중앙 왼쪽 하단에 있는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 오른쪽 옆을 보면 책 같은 걸 펴 들고 상체를 비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이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긴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of Elea)라는 철학자입니다. 그림 속에서 나타난 인물 크기로 보나 이상한 포즈를 통해 부각시킨 것을 보면 라파엘로가 상당히 신경을 쓴 인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철학에서뿐만 아니라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간주한 거죠.
실존주의, 형이상학의 시조
독일의 근대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도 파르메니데스를 높이 평가하면서 “파르메니데스가 없었다면 어떻게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나왔겠는가?”라는 의문을 던질 정도였죠. 서양철학사에서 파르메니데스는 날카로운 논리를 요구하는 존재론, 실존주의, 그리고 관념철학의 시조로 평가됩니다. 우리가 그야말로 어렵다고 느끼는 ‘진짜 철학’의 시작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왜 라파엘로는 파르메니데스를 그리면서 하필이면 몸을 비튼 포즈를 택한 걸까요? 혹시 히파티야가 너무 예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를 훔쳐보는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그의 철학 사상이 종잡을 수 없이 난해하며, 그리고 고집이 세고, 그래서 삐딱하다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몸을 비비꼰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히파티야를 힐끔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삐딱한 것도 아닙니다. 피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가 서로 토론하는 내용과 자기가 읽는 책 내용을 서로 비교하는 것 같군요. 표정이 너무 진지합니다.
기원전 4세기, 진리탐구가 들불처럼 타오를 때
적어도 BC 4세기 이후 고대 그리스에서는 BC 6세기 전반에 활동한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는 데 동감했습니다. BC 6세기에는 아직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 그리고 수학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업적이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정치, 사회, 문화를 지배하던 신화적 요소를 철저히 버리고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자연에 기초하여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종교에서 찾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시를 비교한다면 대단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물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물론 물이 인체를 비롯해 중요하다는 내용도 되겠지만 사실은 바다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바다동물의 화석을 발견한 데 근거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사고도 이때부터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많죠.
아테네 본토에서는 철학이 나오지 않아
탈레스가 세상의 기원을 비신화적으로 설명하려 한 것은 틀림없이 그가 소아시아 해변인 밀레토스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그리스 문명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민족들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민족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신화적 설명들은 서로 달랐으며, 또한 그리스인의 신화적 설명과도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세계를 다르게 본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그마한 도시국가들의 집합체인 그리스에서 다양한 철학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죠. 그래서 고대 철학자들이 제기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다양했던 것이고 위대한 철학과 철학자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 철학이 꽃 피던 시절은 지구 곳곳에서 ‘나’, ‘존재’, ‘우주’를 화두로 삼은 물음과 깨달음이 꽃을 피운 시기입니다. 사유(思惟)를 통해 자아를 탐구하고 진리를 찾겠다는 인류의 지적 욕망이 동시대에 여러 문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중국의 노자와 공자, 인도의 마하바라(자이나 교주)와 붓다(석가모니),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와 같은 소위 성인들의 생각과 말이 탄생한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비슷한 시기 그리스 세계에서도 인류의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값진 사유와 비판과 논쟁이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of Elea)도 있는 겁니다. 그는 엘레아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리는 변화가 아니라 불변에 있다”
그리스 철학을 보면서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그리스 사상의 주류로 알고 있는 철학들이 아테네 본토가 아니라 주로 식민지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리스 철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자연철학도 소아시아에서 나왔고, 지금 설명하려는 파르메니데스의 엘레아학파도 외부에서 생겼다는 겁니다.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 지금의 벨리아(Velia)에서 일어난 엘레아학파의 특징은 날카로운 논리적 사고에 있습니다. 소위 형이상학의 기원이 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의미에서 있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뿐이라고 하는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에서 생성변화라는 움직임의 존재를 부정했고 다양한 모습과 그 변화를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은 잘못된 미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근본적인 물질이 운동 변화하여 많은 것이 생긴다고 하는 이오니아학파의 자연철학의 주장을 반박해 우주론까지도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인 엘레아의 제논(Zenon of Elea)과 사모스의 멜리소스(Melissos of Samos)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다신론(多神論)을 공격한 방랑시인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를 이 학파의 창시자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멜리소스 이후 BC 4세기경에 이 학파는 완전히 소멸했으나, 2천200년이 지난 17세기에 스피노자(Spinoza)에 의해 부활되기 시작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에 결정적 역할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 영원불변한 것만이 정말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한 지식만이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있는 것’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없는 것’은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으로 통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 영원 불변한 것이 바로 그가 제시한 이데아(idea)였다는 겁니다. 실존주의 거장 하이데거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파르메니데스를 높이 평가한 것이죠. 사실 그와 대립되는 견해가 바로 변화를 중요시했으며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입니다. 에페소스 출신의 그는 파르메니데스와 함께 그리스 초기 사상의 탁월한 인물로 꼽힙니다.
요한복음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다
아테네 학당에 등장한 파르메니데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변화를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 바로 옆에 세워 대비시킨 것을 보면 더욱 확신이 갑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파르메니데스가 아닌 제라사의 니코마코스(Nicomachus of Gerasa)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제라사는 현재 요르단의 제라쉬(Jerash)입니다.
제라사의 니코마코스라는 주장도 있어
피타고라스학파의 한 사람으로 수학에 뛰어난 니코마코스는 기원전 1세기경의 학자로 <산술 입문(Introduction to Arithmetic)>으로 유명합니다. 이 책은 이후 1천 년간 산술의 교과서로 이용될 정도로 대단한 저서로 인정받았습니다.
기원전 6세기의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은 숫자 6이 매우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제외한 약수들의 합과 같다’는 것이죠. 즉 1과 2와 3을 더하면 6이 됩니다. 6 다음으로 이러한 성질을 갖는 수는 28입니다. 28의 약수는 1, 2, 4, 7, 14와 그 자신인 28입니다. 그리고 28=1+2+4+7+14’가 성립합니다. 이와 같은 수를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완전수(perfect number)’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니코마코스는 완전수로 알려진 네 개의 수를 나열했습니다. 그러니까 6과 28 다음에 완전수는 496이고 그 다음은 8천128이라는 겁니다. 이 증거에 의해 두 가지의 추측이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의 추측은 n째 완전수는 n자리라는 것이었고 완전수들은 6과 8로 번갈아 끝난다는 것이 또 다른 추측이었습니다. 완전수 중에는 다섯 자리의 완전수는 없습니다. 또한 다섯째 완전수 3천355만336은 6으로 끝나지만 여섯째 완전수 85억8천986만9056도 역시 6으로 끝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가 니코마코스였고 그가 입양한 아들 역시 니코마코스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 사람과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를 제라사의 니코마코스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디오카이테스(Diochaites)의 아들인 아메이니아스(Ameinias)의 제자였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기원전 30년경 전문적인 전기작가(biographer)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가 지은 <저명한 철학가들의 생애와 사상(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에 이렇게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파르메니데스에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아메이니아스가 누구냐고요? 미소년으로 유명하며 오늘날 수선화의 전설을 있게 한 나르키소스(Narkissos, 또는 Narcisuss)는 동성과 이성을 가리지 않고 숱한 사람들에게 구애를 받았는데 아메이니아스도 그 중 한 사람이었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때마다 항상 무시당했어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죠. 귀찮게 여긴 나르키소스는 하인을 시켜 칼을 선물하자, 여기에 담긴 비정한 의미에 절망한 아메이니아스는 나르키소스의 집 앞에서 저주를 퍼부으며 그 칼로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면서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에게 소원을 빌죠. 뒷날 헬리콘 산에서 사냥을 하다 목이 마른 나르키소스는 샘물로 달려 갔는데 갑자기 샘에 비친 자신의 미모에 반하여 식음을 전폐하다 지쳐 죽은 뒤 수선화가 되었는데, 이는 아메이니아스의 저주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저주도 있습니다. 아메이니아스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거절당한 뒤 실의에 빠져 목소리만 남은 님프 에코의 저주 때문에 나르키소스가 샘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아메이니아의 제자인가
어쨌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르키소스를 죽도록 사랑한 아메이니아의 제자냐 아니냐를 떠나, 파르메니데스가 생성소멸이라는 변화와 운동이라는 현상세계(경험세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세계(불변의 것)가 있다고 굳게 믿은 철학자라는 겁니다.
다 알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변합니다. 물질이 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그 변화를 설명하는 과학이 있는 것이죠. 심지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도 결국 변합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독특하게도 변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경험과 물질의 세계를 뛰어 넘은 관념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 그리고 신의 세계가 될 수 있겠지요?
관념의 세계는 다시 神의 세계로
정리를 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상세계는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변하기 때문이다. 로고스는 변화와 운동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관념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만이 참된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궤변에 가까운 이러한 그의 주장, 다시 말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생각은 플라톤에게 영향을 주어 이데아(idea) 사상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고, 이는 또 다시 유럽의 합리주의 기반이 된 이성(reason)으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유일신의 사상을 확립하는데도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파르메니데스의 로고스는 불변의 진리라는 바로 ‘신(God)’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는 거죠. 또한 그리스 철학에서는 바로 수학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물론 수학은 이미 존재했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로 간주해 왔습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심오한 접근과 통찰력이 담겨 있는 요한복음의 로고스 사상은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사상적 기초가 돼
로고스는 바로 변화 속에 내재하며, 변화의 세계가 바로 리얼한(real) 세계라고 하는 헤라클레이이토스의 사상과 변화의 세계는 결코 진정한 세계라고 볼 수 없다고 한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결합이 요한복음을 탄생시켰다는 내용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로, 파르메니아데스의 사상을 정신세계, 즉 신의 세계로 보고, 인간과 신을 연결시켜준 이가 바로 예수라는 주장이 바로 요한복음의 요체라는 이야기입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육체와 정신, 하늘과 땅을 이어준 이, 그리고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빛(light)과 어두움(darkness)의 세계를 이어준 사람이 예수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진수입니다. 또한 그러한 사상적 기초를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아데스의 대립적인 사상, 그리고 다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얻었다는 겁니다.
그리스 철학이 혼합된 그노시스파 영향을 줘
이 이야기는 차제하고라도 사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그리스, 이집트의 다양한 철학과 종교를 비롯해 유대교, 기독교, 동방 아시아의 종교, 점성학 등 다양한 사상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그노시스파(Gnosticism)의 영향을 받았다는 데에는 이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노시스파는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과 사상이 활발하게 융합작용을 하던 헬레니즘시대에 특히 유행했는데 훗날 기독교와 대립하면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처럼 철학과 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철학의 중대 문제를 시사하고, 후에 대두하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존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립니다.
그가 남긴 시 <자연에 대해서(On Nature)>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What exists] is now, all at once, one and continuous… Nor is it divisible, since it is all alike; nor is there any more or less of it in one place which might prevent it from holding together, but all is full of what is.”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바로 현재이며, 모든 것이며,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꼭 같기 때문에 분리할 수도 없다. 또한 그것은 결합을 방해하는 적고 많고의 증감(增減)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존재다.”
아리송한 게 좀 어렵죠? 어떤 분이 이렇게 충고하더군요.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부분만 얻으면 된다. 모든 철학을 알려고 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하고 말입니다. 사실 이야기하자면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여러분들이 더 책도 많이 읽고 이것저것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그렇게 심오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명한 독일의 역사 철학자 헤겔은 ‘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철학 역시 역사와 시대적 산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환경과 시대 속에서 이렇게 독특한 철학을 생각하게 된 걸까요?
一神論의 개념을 세우다
종교의 근원에 대한 논의는 이쯤하도록 하죠. 어쨌든 종교는 인류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종교와 함께 했을까요?
그들은 제우스, 헤라 등이 등장하는 그리스의 12명의 신들을 지성(至誠)을 다해 믿었을까요? 예를 들어 교회에서 하나님과 예수를 찬탄하고, 절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샤머니즘도 많아
성격이 포악하고 복수심이 많은 제우스, 그리고 질투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헤라, 그리고 권력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몹쓸 짓까지 서슴지 않는 신들을 과연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숭배했을까요?
다신론(多神論)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종교는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일신론(一神論)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종교는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대교에서 출발한 기독교죠. 교권(敎權)이 통치권인 왕권을 지배할 정도였으니 대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교의 힘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그러면 다신론이 지배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믿었을까요?
물론 그들은 제우스와 헤라와 같은 올림피아 신들을 경배했고, 옛날부터 내려온 신화나 전설, 올바른 도덕과 양심을 추구하는 오도프락시(orthopraxy), 상대방에 대한 사랑(reciprocity) 등이 중요한 덕목이었죠.
또 어떤 정기(精氣)나 영기(靈氣) 같은 에테르(aether, ether), 천지창조 이전의 신 카오스(Chaos), 암흑을 상징하는 에레부스(Erebus)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올림피아 신은 아니지만 대지의 신으로 알려진 가이아(Gaia), 낮의 신 헤메라(Hemera), 밤의 여신 닉스(Nyx)와 같은 신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신이나 영적인 개념을 믿은 거죠.
다양한 神, 그리고 다양한 철학
아마 이러한 여러 종류의 개념, 그리고 여러 가지 신들이 지배했기 때문에 다양한 사상과 철학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 이아트로만티스(iatromantis)에 심취했던 학자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신들 가운데 태양의 신 아폴로를 가장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샤머니즘도 있었지요. 살아 있는 동물을 제단에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산 사람을 제물로 올리는 풍습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파르마코스(parmakos)라는 것이죠. 아마 유대 풍습에서 나오는 희생양(scapegoat)을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네요.
그리스에서는 축제가 벌어지는 날 곱사등이, 거지, 범죄를 지은 범인을 쫓아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병, 기근, 외적의 침입 등 나라에 커다란 재앙이 닥칠 때 사람을 신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제도 가운데 도편추방제(ostracism)라는 것이 있죠. 참주, 그러니까 나쁜 지도자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써서 투표한 다음에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일입니다. 본인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는 이 제도는 전형적인 희생양의 산물로 그리스의 이아트로만티스의 본보기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자면 내용과 형식만 다를 뿐 희생양은 오늘날도 존재합니다. 소위 본보기라는 거죠.
대표적인 그리스 샤머니즘
이아트로만티스는 치료하거나(healing), 보호한다는(care)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의사와 같은 치료사(physician seer)라는 뜻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아폴로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 아폴로야말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고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신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왜 파르메니데스가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라는 주장을 폈는지 조금 이해가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학자들은 이아트로만티스를 그리스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일종의 샤머니즘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종교와 샤머니즘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또 구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파르메니데스가 고대 그리스 샤머니즘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입니다. 좀 더 냉정히 생각해보면 다신론이 지배하는 당시 하나의 신을 가정하고, 그러한 생각을 하나의 철학으로 옮긴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입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앞서 말했듯이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일원론에서 만물을 통치하는 절대자는 하나라는 유일신 사상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호수의 여신 므네모시네를 만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과 종교에 정통한 영국의 피터 킹슬리(Peter Kingsley)는 특히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샤머니즘적인 이아트로만티스는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 황홀경(ecstatic)을 경험하거나, 명상에 잠기고(meditative), 그러면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는 절대자가 있다고 생각한 철학자가 바로 파르메니데스입니다. 마치 인도의 요가와 같은 생각에 몰입했다는 거죠.
킹슬리 박사는 파르메니데스를 미신, 사교(邪敎)와 같은 저급한 샤머니즘으로 몰아 붙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기원을 바로 샤머니즘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는 거죠.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시에서 암말들이 자신을 호위하고 처녀들이 길을 인도해서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를 만났다고 합니다.
므네모시네는 기독교에 영향을 끼친 오르페우스교(敎)에 나오는 여신입니다. 호수에서 사는 이 여신은 물을 통해 사람의 삶과 죽음의 고통을 해방시켜 주는 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사의 반복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는 신입니다.
유일신의 개념을 만들다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생각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기원전의 일이라는 겁니다. 2000년 전의 이야기라는 거죠. 책도 별로 없었고, 쓸 노트도 별로 없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 이야기들이 오늘날 종교와 많은 철학들의 기초가 된 거죠. 어쨌든 변하는 것이 로고스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로고스라고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훗날 요한복음의 기초가 되고 기독교의 종교적 철학의 기본이 됐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철학자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신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독특하게 일신론의 개념을 완성한 이가 바로 파르메니데스라고 생각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논리죠.
15. “변화가 바로 로고스다!” 헤라클레이토스
앞서 등장했던 파르메니데스의 바로 오른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철학자처럼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돌 의자 위에서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오른 손으로 종이에다 글을 열심히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쓸쓸한 표정과 비탄과 번뇌에 잠겨 있는 모습이 마치 세상의 고민을 다 혼자 짊어진 듯합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종이 위에다 쓰고 있는 것일까요?
만물의 생성변화(生成變化)를 유전(流轉)으로 표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게 마치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하게 합니다. 고독에 빠진 이 쓸쓸한 ‘멜랑꼴리 맨’이 바로 “Everything flows.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 535~BC 475)입니다.
아마 라파엘로가 “고정불변의 존재론이 바로 진리”라는 파르메니데스와, “변화가 바로 진리”라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대비하기 위해 그림 아래쪽에 화면을 크게 할애한 것 같습니다.
불변(不變)과 변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주장 모두 나름대로 후대에 끼친 영향도 크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도 그렇고, 과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일종의 관념적인 것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경험세계에는 전혀 어울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의 이론은 원자이론의 창시자인 레우키푸스(Leycippus)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원자이론에 영향
어떻게 주었냐고요? 아마 이런 것 아닐까요? 사물은 시간과 환경 등에 따라 다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사물 안에도 있다. 바로 원자(atom)라는 개념이죠. 쪼개고 또 쪼개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변의 것이 원자라는 이론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똑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물이 그 위에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변화 이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화 이외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변화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곧 변화가 로고스라는 것이고, 역으로 말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로고스가 아니라는 주장도 됩니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유전(流轉, flow)이라는 말을 쓴 것이죠. 파르메니데스와 완전 반대죠?
“돈 빌릴 때의 나는 갚을 때의 나가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로 변화의 철학을 줄곧 주장해 온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돈이 궁했던 그가 친구들에게 찾아가 돈을 빌려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원래 거만했던 지라 친구들이 다 외면합니다. 그러다가 겨우 한 친구를 만나 돈을 빌리게 됩니다. 대신 이자를 후하게 쳐준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딱 두 달만 쓰고 돌려줌세. 이자도 넉넉하게 쳐줄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게나.”
두 달이 지나 아무런 연락이 없자 친구는 차용증서를 들고 헤라클레이토스를 찾아가 왜 갚지 않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변화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태연하게 대답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나는 자네에게 돈을 빌릴 때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네. 잘 생각해 보게. 물이 두 달 동안 흘러간다면 얼마나 먼 거리를 가버렸겠는가? 그 때의 헤라클레이토스를 찾아가게나.”
이렇게 말을 하면서 빚 갚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이러한 답을 듣고 아연질색 했겠지요?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돈 빌릴 때의 나와 갚을 때가 된 지금의 나와는 다르다는 이야기죠.
주위 학자들에게 독설을 퍼붓기로 유명
이 일화가 사실은 아닙니다. 다만 어느 극작가가 변화니, 유전이니 하면서 건방지고 잘난 척하면서 다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꼬락서니가 하도 보기 싫어서 이러한 내용을 무대에 올렸다고 하더군요. 비슷한 시기에 에피카르무스(Epicarmus)라는 꽤나 유명한 희극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초기 극작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또한 철학자였죠. 그런데 자기만 잘났다고 뻐기면서 다른 철학자나 극작들을 욕하면서 돌아다니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더 두고만 볼 수가 없던 거죠.
그래서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는 논리를 “빚을 진 사람과 그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갚지 않아도 된다”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만들어 한방 날린 거죠. 사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자한 성격도 아니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남을 멸시하고 욕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실 또 모릅니다. 학문적인 공격을 비방으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말입니다. 너무 똑똑하면 주위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마련이죠.
“호메로스, 때려서 쫓아내야 할 사람”
그러나 정도가 심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는 호메로스와 당대 유명했던 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us)를 향해 실력이 없다며 독설을 퍼붓습니다. 특히 호메로스에게는 “채찍질해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피타고라스, 그는 좀 배웠을지는 모르나 이해력이란 전혀 없는 사람이야! 그의 지혜란 사물에 대해 좀 안다는 것이며 익살의 기술에 불과하다”라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어느 정도 배웠다는 학자들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라면서 다 비난했죠. 헤라클레이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국가)는 아직 수염도 나지 않는 어린 소년들에게 맡겨라!” 무슨 말인지 아시죠. 민주주의를 하느니 어린이에게 권력을 쥐어주게 하는 편이 낫다는 거죠. 이만저만한 독설이 아닙니다.
그는 심지어 고향인 에페소스 사람들에게도 때를 가리지 않고 욕을 해댔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언어폭력배(mob-reviler)’라는 낙인이 찍혀 결국 산으로 추방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산속으로 쫓겨나 풀 뿌리로 연명하다 죽어
그는 산으로 들어가 풀과 열매를 따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워야만 했습니다. 기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30년경 전문적인 전기 작가(biographer)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가 지은 <저명한 철학가들의 생애와 사상(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쫓겨난 그의 인생은 몸이 붓는 수종(水腫)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를 진찰한 의사도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다고 그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병을 자신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치료약개발에 나서죠.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암소의 똥을 햇빛에 바삭 말린 다음에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부기(浮氣) 속의 나쁜 액체를 흡수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치료를 시작한 다음날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리고는 어느 누구 알아주는 사람 없이 시장 한구석에 묻히고 맙니다. 그의 대단한 철학이 끝나는 순간이죠. 이러한 이야기가 믿어지나요? 그를 미워한 후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는 아닐까요?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그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는 신화와 역사가 함께하던 시기라는 걸 말입니다. 그렇다면 암소 똥 이야기도 이해가 갈 겁니다.
과학, 특히 화학의 시조로 통해
자 그렇다면, 상존(常存)하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 그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엇이며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과학적으로 볼 때 이오니아학파 소속 자연철학자인 그가 남긴 변화라는 무상(無常)의 이치는 대단한 이론이 됩니다. 과학이란 변하는 현상의 세계를 하나의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학문입니다.
특히 화학이라는 과학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눈물을 흘리는 알 수 없는 철학자”
앞서 언급했듯이 헤라클레이토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 정말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상이나 철학 때문이 아니라 성질이 못돼서 쫓겨나 산 속에서 나무 열매와 풀뿌리로 연명하다 죽을 정도였으니 그 성격을 알다가 남을 정도죠.
그는 변화밖에 할 수 없는 인생의 무상함을 정말 슬퍼했습니다. 고매한 철학자답게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채 번뇌하고 괴로워하는 성자(聖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사상가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관련 상당히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그림 참조). 일종의 그의 초상화죠. 이 그림을 자세히 감상해 보며 ‘변화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과거에 어떤 철학자이었을지 상상이 갈 겁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기(Golden Age of Dutch)의 미술가 요하네스 모레엘스(Johannes Moreelse, 1603~1634)가 그린 그림으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사족이지만 네덜란드 황금 시기란 네덜란드가 당시 유럽 최대 무역 국가였던 스페인(당시 에스파냐)으로부터 독립한 후 결국 해양무역을 제패한 17세기 무렵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해권(制海權)이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간 때죠.
1653년 7월 네덜란드 출신으로 하멜 표류기로 잘 알려진 하멜이 대만에서 소페르베르 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 사건을 잘 알 겁니다. 이 무렵이 네덜란드가 해상왕국을 건설했을 때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한 노인이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기독교 신자가 두 손을 움켜주고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 북받치는 설움으로 회개하는 장면 같기도 합니다. 마치 성화(聖畵)처럼 보입니다.
눈물, 애매모호가 그의 브랜드
하긴 화가의 의도가 들어갔다면 성화로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그림은 “눈물을 흘리는 철학자(the Weeping Philosopher)” 헤라클레이토스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는 지구의로 된 세계를 바라다 보며 두 손을 굳게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슬픈 모습입니다. ‘울며 기도하는 철학자’일 것 같은데 기도하고는 거리가 약간 멀죠?
이 그림은 또한 항상 따라다니는 별칭 “알 수 없는 철학자(the Obscure Philosopher)”헤라클레이토스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둠에 둘러싸인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그러면서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어 잘 알 수 없는 철학자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로 그의 전통적인 모티프가 돼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둠침침한 곳에서 왜 세상을 껴안고, 두 손을 모으고는 울고 있는 것일까요? 모든 종류의 신을 간단히 ‘하늘’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늘에게 울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영원(永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일까?
강물이 흘러 내려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무상하고 덧없는 이 세상에 영원(永遠)을 달라고 기원하는 것은 아닐까요? 태어나면 죽어야만 하는 생사의 고통에서 해방 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그림을 그린 모레엘스는 단순히 그저 눈물 흘리고, 모호한 철학자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이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러니까 헤라클레이토스가 어떤 생각을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까?
헤라클레이토스 그림 가운데 또 재미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역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모레엘스와 동시대에 살았으며 바로크 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헨드릭 테르 부뤼겐(Hendrick ter Brugghen, 1588~1629)라는 작가의 그림입니다.
머리가 상당히 벗겨져 있습니다. 생김새가 너무나 투박합니다. 이 그림에서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세상을 상징하는 지구의를 껴안은 채 사람과 이야기하는 모습입니다.
왜 세상(지구의)를 등장시키나?
그런데 화가들은 왜 이렇게 헤라클레이토스를 그리면서 지구의를 등장시키는 것일까요?
“만물은 유전하고 머무르지 않는다. 만물은 없어지게 마련이고 고정된 채 남는 것은 없다. 신은 낮과 밤이며, 겨울과 여름이고 전쟁과 평화다. 그리고 배부름(포만)과 배고픔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는 간단한 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를 요약한 그는 그 어떤 것도 안정되거나 머물러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중요시한 그는, 그 때문에 불교와 함께 중국철학과의 연관성으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서 자연철학자들은 동양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것은 대부분 동감하는 사실입니다.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4원소는 물질의 기본
그리스 철학은 자연철학에서 시작됐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자연철학은 결국 만물은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물질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다시 그러면 구성하는 물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탈레스는 그 물질이 물이라고 했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낙시메네스라는 철학자는 공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이라는 개념이 시작됐다는 것이죠. 이 4대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중요한 원소로 지금까지도 과학의 기본이죠. 불은 바로 화학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신분을 걷어차고 탁발승의 길을
괴팍한 성격으로 사람들에게 쫓겨나 산 속에서 생활하다 굶주림속에서 결국 몸이 붓는 부종(浮腫)에 걸려 죽고 말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 집안은 대대로 대단한 왕가(王家)의 가문이었습니다.
왕가의 아들, 신분을 헌신짝처럼 버려
더구나 사제직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시대에 사제라는 직책은 대단한 것이죠. 귀족 가운데서도 일부에게만 내려진 특권입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거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모든 권리들과 심지어 재산까지 모든 것을 털어서 동생에게 물려주고는 빈털터리 탁발승의 길을 택합니다. 부패한 정치상황을 보면서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허무한 일인지를 직접 보고 깨달았기 때문이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심지어 당시 지중해 최고의 권력자인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가 궁정으로 와 같이 일하자는 제안도 뿌리쳤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조국 에페소스는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공적인 일을 싫어했고 민주체제가 당시 뛰어난 입법자인 헤르모도로스를 과두정치의 주범으로 몰아 추방했을 때 민주주의에 대해 한없는 경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하는 도시(국가)는 수염도 나지 않는 어린 소년들에게 맡겨라!”는 말을 퍼부어댄 거죠. 그리고 유명하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독설을 서슴지 않았고요. 그래서 겉으로만 그를 알던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아주 거만하고 오만하고 인간을 혐오한다며 비판을 가한 겁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손을 뗀 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애들과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법이란 침개미와 같은 것이요”
많이 배운 왕족 출신이 애들과 놀며 히득거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을 보고 길 가던 한 시민이 말했다. “그렇게 놀지만 말고 좋은 법을 만들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좀 잘 살게 해보시죠.” 그러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법이란 침개미(ponera)에 불과하오.” 참으로 아리송한 말입니다. 아마도 법이란 원래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는 뜻도 되고, 그저 달라붙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개미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이 시민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를 보면서 이렇게 야단칩니다.
“이 멍청하고 가련한 놈들아,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민주주의랍시고) 바보 같은 너희들과 같이 머리를 맞대어 정치를 하느니 애들과 같이 노는 게 더 나은 일이 아니겠어, 이 멍청한 양반들아!”
그는 이렇게 독설을 퍼부어대며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하자 그는 다시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말을 전혀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수근대기 시작했습니다.
“저 양반 좀 어떻게 됐나 봐. 정말 모를 사람이네”
“민주정치를 하느니 애들하고 떠드는 게 더 좋아”
그 말을 듣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내가 혀가 없어서 그러는 줄 알아, 너희들보고 마음껏 떠들라는 거야. 내가 떠들면 자네들이 말을 못하잖아!”라며 쏘아부칩니다. 그러면서 다시 내뱉습니다.
“들을 줄도 모르고 말할 줄도 불쌍한 인간들이여!”
우리가 앞서 그림에서 보았듯이 그가 지구의를 붙잡고 우는 것은 이처럼 판단과 지각능력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닐까요? 헤라클레이토스는 군중에게는 분별능력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우는 철학자’였고,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철학자였습니다. 심지어 일부러 모호한 이야기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니체는 이렇게 어려운 헤라클레이토스를 보고 “이처럼 명료하고 분명하게 글을 쓰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난해한 사람들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는가 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달리 고대 그리스에는 ‘웃는 철학자(laughing philosopher)’도 있었습니다. 누구냐고요? 원자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유명한 데모크리토스입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 다녔습니다. 다음에 소개하겠습니다. 어쨌든 참으로 재미있고 독특한 철학자들이 아테네 학당에 다 모여 있는 겁니다.
“웃는 철학자도 있다”
이제 불(fire)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그러니까 이오니아학파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이든 우주든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의해 이루어졌을 거라는 주장을 했는데 데모크리토스는 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불은 어떻게 보면 사물의 운동량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연소란 끊임없는 운동의 소산입니다.
아마 그가 우주의 근본을 제시하기 위한 방안으로 불을 택한 것은 그의 철학과도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소는 산소분자들이 다른 결합을 맺고 있는 분자들과 충돌하고, 그러면 이 분자들이 분열되면서 그 속에 있던 원자들이 다시 일정한 비율에 따라 산소와 결합하여 새로운 산화물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불은 대립하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마치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처럼 서로 대립(충돌)하고, 흩어졌다가, 다시 결합하는 과정이죠. 물론 그는 화학자도 아니었고 화학이 뭔지도 몰랐죠. 또 화학이라는 단어도 없을 때입니다. 불이 연기를 내고, 장작이 타면 재로 남아 사라지고, 등잔의 기름이 줄어드는 정도를 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우주의 변화의 과정을 불의 형상으로 본 것은 놀라운 감각과 직관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준 일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세상은 물로 이루어졌다”, “세상은 공기로 이루어졌다”라는 원소 개념이 아니라 변화와 충돌, 분리와 결합의 주체이며 부단한 변화를 구체화 시키는 실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했기 때문에 마치 불을 신으로 섬기면서 살다 간 철학자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고정불변의 존재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변화의 헤라클레이토스. 두 철학자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적 사유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들입니다. 둘이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엘레아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에페소스는 각각 그리스 세계의 양쪽 끝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이오니아의 정신적 유산을 함께 물려받아 존재와 변화라는 심오한 의미의 학설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로써 철학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부터
자연이라는 기적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것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노력이 오늘날의 과학을 낳았습니다. 광활한 우주뿐만 아니라 주위환경의 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도 경이감으로 접근해 이를 지성의 힘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학자들입니다. 바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죠.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 박사는 1965년에 열린 ‘과학철학 국제토론회’의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철학과 과학의 가장 오래된 몇몇 관념들이 오늘날의 매우 발전된 과학이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있는 철학자나 과학자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고전 물리학과 고전 화학, 상대성이론과 양자론, 유전학 나아가 분자생물학도 고대 관념들의 영향 아래서 발전한 것이다”
“만물은 하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주장의 핵심은 우주의 통일성입니다. 비록 대립과 분열이 있지만 그 속에는 질서와 통일성(unity)가 있다는 거죠. 위대한 우주론의 시작이라고도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 이렇게 결론을 내려보죠. 세상은 변화무쌍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맑은 대낮에 갑자기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옵니다. 잠잠하던 바다에 폭풍이 몰아칩니다. 뜨거웠다가 다시 차가워지고, 더러운 것이 있는가 하면 깨끗한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 경험세계죠.
변화 속에서 질서와 통일을 주장한 철학자
그러나 그 속에는 질서가 있고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 질서를 찾는 일이 바로 과학이 아니던가요?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는 일이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아리송하고 눈물을 흘리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신화와 전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무려 2천500여 년 전에 말입니다.
“This world, which is the same for all, no one of gods or men has made. But it always was and will be: ever-living fire, with measures of it kindling, and measures going out.”
“만물이 모두 그렇듯이 이 세계는 어떤 신이나 인간이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세계는 항상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척도(정도)에 따라 타오르고 사그라지는 영원한 불로써…”
유럽이 이 진리를 알기까지 무려 1천5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