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는 말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그는 1850년 5월 20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한 직후였다. 그 후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시대 전반까지 공업화와 민주화라는 큰 변화를 겪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친구이자 공리주의 옹호자였던 아버지 제임스 밀로부터 엄격한 사교육을 받았다. 세살 때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해 여덟 살 때 헤로토스 플라톤 대수학, 열두 살 때는 논리학까지 깨우친다. 아버지가 밀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은 사람의 가능성과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그는 밀이 세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딛기 전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람과 사귀게 되면 네가 또래들 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많은 이들은 너를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게 네 공로 때문은 아니다. 너를 가르치고 거기에 필요한 수고와 시간을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를 둔 네 행운 덕분이지. 그런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보다 좀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칭찬 받을 일은 못 되며, 반대로 칭찬을 받은들 더 없는 치욕이 될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1.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
이 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 억압의 한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자유와 권력의 다툼은 역사가 시작된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왔다. 이 다툼은 '인민 대 정부' 혹은 '인민 중 일부계급 대 정부'라는 대결구도로 진행됐다(인민이란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피지배자를 의미하고 국민이란 시민계급이 정치에 등장하고 통일 국가가 확립되면서 생겨난 개념). 과거 자유는 정치권력자의 압제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인민과 권력은 적대관계였고 권력자들은 주로 세습이나 정복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인민의 의사에 따라 권력을 얻은 게 아니었다. 권력자는 인민을 위해 권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권력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인민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인민을 억누르는 데 사용될 때 발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규정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바로 '자유'라 불렀다.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권력자로 하여금 정치적 자유와 권리라는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권력자가 이 영역을 침범할 때는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어 인민의 저항이나 반란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둘째, 국가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구성원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의회)의 동의를 얻도록 헌법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당시 권력자들은 대부분 첫 번째 방법을 택했으나 자유의 확대를 원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 방법을 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지배자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이 꼭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즉 고위관리는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사람들은 지배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보다는 선거를 통해 일정기간 동안만 일하는 지배자를 뽑는 게 더 효율적이란 사실을 알았다. 권력제한은 국민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통치자에 저항하는 수단이었지만 이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권력은 인민의 것이니까. 권력의 사용처와 방법을 엄격하게 규정한다면 권력을 지배자에게 맡겨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존재하지 말아야 할(히틀러나 일제 같은) 정부가 아니라면 정부가 하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제약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리하면 민주정부를 세우는 일이 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대에는 인민 스스로 행사하는 권력을 제한할 필요가 없었지만, 선거를 통해 정부가 수립되는 시대에는 정부의 모든 일은 관찰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자치'나 '인민의 자기 자신에 대한 권력행사'라는 말은 본질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인민은 그 권력의 지배를 받는 대상과 같은 인민이 아니다. 자치라는 말은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이외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정치체제다. 즉 '인민의 의지'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다수파의 의지를 뜻한다.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다수의 횡포다. 다수의 횡포는 정치탄압처럼 눈에 보이는 형벌을 내리진 않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삶에 침투해서 영혼까지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젠 권력자의 횡포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다수의 견해가 개인 삶에 강요하는 것도 대비해야 하는 시대다. 다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개별성은 발전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획일화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집단의 생각이나 의사는 일정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독립성에 관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 한계를 명확히 하여 부당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정치적 독재를 방지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이 한계라는 것이 또 어디까지인지도 애매하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의 통제가 만나는 점, 그것이 문제이다. 행위 규범은 법으로 정하고 법이 관여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수의 생각에 따라 결정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정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시대마다 변하는 게 규범이고 서로 다른 두 사회가 같은 답을 낸 적도 없으며 한 시대나 사회의 결정이 다른 시대의 그것들에게는 놀라워 보이기도 하니까. 또한 행위규범을 만드는 데는 선호, 이성, 편견, 호감, 반감, 질투, 부러움, 교만, 심지어는 욕망이나 자기염려 같은 것들도 작용한다. 결국 한 사회의 행위규범이나 도덕 감정의 형성은 이성적인 결과물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결과 실질적으로는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세력이 규범을 만들게 된다. 사람들은 처벌이 두려워서, 여론의 힘에 밀려서 규범을 준수한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 규범, 도덕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강한 사람에게는 종교 차이 때문에 생기는 증오심도 도덕 감정의 일종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은 종교적 견해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각 교회와 분파 간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이 발생했다. 오랜 싸움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의 승리 없이 막을 내리자 다수파가 될 수 없는 소수파 쪽에서는 종교적 차이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생존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결과적으로 이 싸움을 통해 사회가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라는 중요한 원리의 토대가 확보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신장시키는데 기여한 저술가들은 '양심의 자유'는 결코 침해되어선 안 된다고 했으며 개인은 종교적 믿음을 절대적으로 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것에 쉽사리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 실제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관용의 폭이 넓은 지역조차 예외 속에서만 관용을 베푼다. 예를 들면 교회행정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은 인정하나 교리 자체에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거나, 자선을 베풀다가도 신과 천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등을 돌리는 등의 행동들이 그것이다. 신앙이 지극히 순수하거나 강렬할수록 관용의 폭은 좁아진다. 인간인 이상 자기와 다른 입장을 가진 이를 인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 다수의 횡포 :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사용한 용어. 민주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를 모두 추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을 선호하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곤 한다. 자유는 쟁취하기도 어렵고 이점도 잘 보이지 않는 반면 평등은 즉각적인 이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는 자유가 억압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평등을 위해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전제주의적인 경향을 띤다. 민주주의가 평등제일주의를 낳고 개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독자적 판단능력이 없는 개인의 고립을 심화시킨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유대관계가 사라진 사회는 다양한 의견보다는 다수가 형성한 여론이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로 인해 개인은 다수 의견에 복종하고 안주하면서 책임을 회피한다. 밀 역시 토크빌과 같은 생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가 행사하는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더 크게 위협한다. 따라서 밀은 이제는 국가권력이 아닌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횡포는 공권력 관습 여론의 압력 등의 형태로 개인의 영역에 침투하며 어떤 형태의 정치탄압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본 것이다. 다수 의견이 언제나 합리적이고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오히려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가 될 가능성이 크다.
2. 자유의 기본영역
정부 간섭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없다.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은 각양각색이고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다르며 자기 이익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개입한다 해도 정부가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도 모두 다르다. 어느 쪽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자유에 관한 간단명료한 원리가 하나 있다. 사회가 개인을 강제하거나 통제하는 경우를 엄격하게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이다. 인간사회에서 타인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자기보호'를 위해서 뿐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권력이 사용되어도 좋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누군가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 혹은 금지해서는 안 된다. 충고, 설득, 간청의 방법을 쓰는 정도만 가능하다. 사회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만 간섭할 수 있다. 반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당연히 간섭불가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인이므로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 절대적인 자유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성인)에게만 적용된다. 애들은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아직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책임)로 부터도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미개사회에 사는 사람 역시 문명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 이들은 미성년자나 다를 바 없다. 나아가 미개인을 개화시키기 위한 일이라면 독재도 정당하다.
자유의 제한. 모든 윤리적 문제의 기준은 '효용'이다. 이는 인간의 지속적인 이익에 기반을 둔 넓은 개념이며 개인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익에 연관되는 한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이다. 사회적 책임의 일종.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법과 여론의 비난으로 처벌 받아야 한다. 타인의 복지를 위해 강제로 수행해야 할 일도 있다. 법정 증언이나 국방 또는 사회이익을 위해 해야 할 공동의 작업 등이 그것이다. 생명을 구하거나 약자를 보호하는 일을 회피하는 사람에게는 사회가 책임을 지울 수 있다. 한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입는다면 이 역시 책임을 져야한다. 다만 국가는 매우 신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결국 모든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람들과, 필요하다면 그들의 보호자인 사회에 법적 책임을 진다. 본인에게 맡겨두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낳거나 사회가 간섭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 경우 개인의 양심에 따라 사회 이익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본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행위는 관여하면 안 된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타인에게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결국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기준은 '어떤 행위가 낳은 최초의 직접적인 결과'가 본인에게만 영향을 줄 때로 볼 수 있고 이때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인간 자유의 고유 영역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에 자리 잡은 자유, 실천 · 사색 · 과학 · 도덕 ·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 책은 곧 저자의 생각과 사상을 옮긴 것이기에 출판의 자유 역시 생각의 자유만큼 중요하다. 둘째, 기호와 희망의 자유로서,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 방식대로 삶을 설계하고 살아갈 자유가 있다. 셋째, 결사의 자유로서,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강제나 속임수에 의해 끌려온 게 아니라면 모든 성인은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회든 이 세 자유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삶을 꾸려나갈 자유다. 설령 일이 잘못돼도 억지로 끌려가는 길보다는 궁극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다. 사람들은 사회가 설정한 기준에 따르도록 강요당한다. 국가권력이 사적영역에 개입하는 건 점점 줄고 있지만 사회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대한 여론의 도덕적 억압은 훨씬 강해졌다. 세계 곳곳에서 여론, 심지어 법의 힘으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늘고 있다. 지도자든 일반 시민이든 자기 의견이나 기호를 다른 사람에게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이런 경향을 막기 위해 우리는 생각의 자유를 탄탄하게 보장하고 굳건히 세워야 한다.
3. 생각의 자유 - 절대적인 확신이 위험한 이유.
생각의 억압은 침묵의 강요다. 이는 현 세대 뿐 아니라 미래 인류에게까지 강도질은 하는 것이다. 과거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처럼 억압당했던 생각들은 현재에 와서 모두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인류는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당했다.
한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할지라도 옳은 의견과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우리가 억압하려는 의견이 틀렸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확신한다 치더라도 억눌러선 안 된다. 알고 보면 그 의견이 옳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은 타인을 대신해 결정하고 판단할 기회를 빼앗을 만큼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지 않았다. 타인이 틀렸다는 확신 아래 그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조차 막는 것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져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막강한 권력자나 절대적인 복종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에 자신이 없을수록 집단의 권위에 맹목적인 신뢰를 갖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당성 증명의 책임을 소속집단에 떠넘기는 무책임한 자들이다.
시대 역시 개인처럼 오류를 저지른다. 과거에는 사실이었던 것이 오늘날에 오류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듯 오늘날의 진리가 미래엔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확실히 부도덕하고 불경건해 보이는 경우라도 자신에게는 절대 오류가 없다고 전제하는 태도는 여전히 위험하다. 한 세대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면 그 결과는 다음 세대에 까지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인했다는 이유로 불경죄를 뒤집어썼고, 철학과 강좌를 통해 젊은이들은 타락시켰다고 고발되어 독배를 마셨다. 예수는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 하에 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사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은 당시에는 악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들을 욕하지만 막상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똑같은 일을 저질렀을지 모르는 일이다. 또한 매우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오류를 저지른다. 고대 윤리학 저술 중 최고로 평가받는 '명상록'의 저자이자 로마제국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개방적이고 막힘이 없는 지성의 소유자였으며 관대한 왕, 왕들 중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그가 보기에 당시 사회는 매우 불안했는데 그 와중에 그리스도교는 혁명적 변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면서 말이다. 자신의 권위가 타락할까 두려워한 마르쿠스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가 오히려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마르쿠스의 그리스도교 탄압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만약 당신이 마르쿠스보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진리에 대한 갈망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부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무조건 옳다는 생각은 버려라.
종종 이러한 탄압이 사실 옳은 일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박해는 진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련이다. 그리고 진리는 항상 박해를 성공적으로 통과한다. 그래야 진리가 더욱 돋보인다.' 진정한 진리라면 박해 따위에 끄덕도 않을 테니 진리를 박해하는 게 정당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새로운 진리를 밝혀준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박해에 대해 이런 견해를 가지면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보상은 커녕 억울하게 핍박 받아도 '진짜 진리라면 박해쯤은 이겨낼 거다'라는 논리의 폭압을 당한다. 무엇보다 진리가 항상 박해를 이겨낸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저자 사후에야 출간됐고 역시 지동설을 주장했던 브루노와 갈릴레이는 각각 화형과 종교재판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진리가 단지 진리라는 이유로 온갖 박해를 극복할 고유의 힘을 가진다는 것은 근거 없는 착각이다. 다만 여러 번 박해받아 계속 소멸될지라도 맞서 싸워 이길만한 힘을 가질 때까지 거듭 진전한다는 게 진리가 가진 진정한 이점이다.
4.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는 법. 토론.
전술했듯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므로 무언가를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다. 하지만 '누구도 절대 진리를 알 수 없으므로 아무도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 역시 틀렸다. 비겁한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의견을 진리로 가정한 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이 자신의 행동을 이끄는 진정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온갖 논쟁을 거쳤지만 허점이 보이지 않는 의견을 진리로 가정하는 것'과 '아예 논쟁의 기회가 허용되지 않은 것을 진리로 가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 삶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인간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토론이 필수적이다. 사실과 논쟁이 인간 정신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 바로 토론이다. 판단의 신뢰성은 비판을 수용하는 개방적인 자세에서 나온다. 반대 의견을 듣고 맞서며 옳은 것은 받아들이고 그 이유를 깨쳐갈 때 판단은 신뢰를 얻는다.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를 따진 후 가장 정확한 진리가 도출된다. 토론의 장이 개방되어 있으면 언젠가 인간은 이성을 통해 더 높은 진리에 이르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전까지는 현재 수준에서 최고의 진리를 찾는 데 만족해야 한다. 이것이 오류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확실성의 한계이자 진리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확신하는 진리일수록 세상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또한 검증 받은 후 허점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도 절대 진리라 확신할 수는 없다. 인간의 현재 이성 수준 내에서 검증받은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A'라는 사실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이 단순히 사회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로 이어진다. 위 주장은 'A가 진리냐 아니냐' 대신 'A가 유용하냐 유용하지 않냐'가 토론의 기준이 된다. 유용성 역시 자유롭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야 한다. 만약 한 이교도가 '내 생각이 진리라는 건 아니지만 우리 종교는 효용이 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논리에 맞을까? 어떤 생각이 담고 있는 진리는 그 생각이 가진 효용의 일부다. 따라서 의견을 믿어도 되는지 알고 싶을 때 그게 진리인지 아닌지를 제쳐두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효용의 일부이므로 진리와 배치되는 생각은 결코 유용할 수 없다. 효용의 문제는 전적으로 진리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5. 다수라는 이름의 폭력, 여론.
과거 영국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졌다. 무신론자는 범죄를 당해도 고소할 수 없었으며 배심원 자격도 박탈당했다. 신과 내세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재판과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었다. 역사의 무지다. 이는 실제로는 신앙이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 한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할 경우 재판장에서 받아들여지는 문제를 낳는다. 또한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짓을 말한다'라는 논리를 연장하면 '내세를 믿는 사람은 지옥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모욕적인 논리가 도출된다. 아주 고약한 박해는 사라졌을지언정 관용 부족에 따른 정신박해는 여전하다는 뜻이다. 적대적인 감정과 생각은 정신 자유를 저해하는 요소이다. 세포이(참고 :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서 일하는 인도군인) 항쟁 당시 영국 복음교회 지도자들은 성서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 공적자금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가 아닌 사람은 공공기관에 취직할 수 없었다. 또 당시 국무 차관은 그리스도교의 신성함을 믿지 않는 사람은 관용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사람들은 법적 처벌보다도 그 뒤에 따르는 사회적 불명예를 더 두려워했다. 따라서 영국인들은 금기를 표현하길 꺼렸다. 보통 사람에게는 여론이 법만큼 강한 힘을 지닌다. 여론에 반하는 것은 밥벌이를 잃는 것이며 처벌만큼 두려운 일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스스로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기 시작했다.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지도 않고 사회에 순응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편으로는 좋은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박해받지도 않고 (본인 생각과 다를지언정)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킬 수도 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길 거부한 나머지 자기 의견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상태다. 겉모습뿐인 지성의 평화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용기 전체가 희생되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은 생각을 멈추고 대중들은 타인에게 억지로 맞장구나 치며 원칙의 큰 테두리를 건들지 않은 채 소소하고 사소한 일에만 집중한다. 인간 정신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중요한 문제를 자유롭고 거침없이 펼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피해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단이 아닌 사람들'이다. 이단으로 몰릴까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발전에 타격을 입히고 이성 또한 위축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상가라면 자신의 지성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지 끝까지 추구해야 한다. 준비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진리는 발전하니까. 또한 생각의 자유는 보통 사람들의 정신 발달을 위해 중요하다. 큰 원칙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하는 사회, 여론의 압력 때문에 토론이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인간 역사를 찬란히 빛낸 거대한 정신 활동이 일어날 수 없다. 여론이 가하는 통제의 위험은 바로 위와 같다.
6. 자유로운 토론의 필요성
이미 옳다고 여겨져 토론에서 배제된 사실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이다. 진리의 근거를 알지 못해 소소한 비판에도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권위자가 심어준 생각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무런 득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확신에 바탕을 두지 않는 믿음은 토론이 시작되면 사소한 비판에도 무너진다. 사람들은 특정 문제에 관한 자신만의 의견을 가져야 한다. 지성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장의 근거를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문제가 한 번도 토론에 붙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그럴 리는 없다. 물론 모든 주장이 한 쪽으로 쏠리는 수학 같은 학문의 진리에는 반대가 없고 반대에 대립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생각차이가 생기는 분야에서는 상반되는 두 의견을 종합 판단한 후 진리를 찾아야 한다(자연과학에서조차 원소를 두고 플로지스톤설, 연소설, 산소설 등이 대립한다). 이때는 다른 주장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그 전까지는 진리의 근거를 알 수 없다. 도덕 종교 정치 삶 사회 문제를 다룰 때는 상황이 다르다.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내 논리적 근거 3/4를 사용해야 한다. 고대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자기 문제를 아는 것만큼이나 상대 주장을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자신의 근거가 탄탄하면 다른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상대를 반박하지 못하고 그의 논거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느 쪽 의견도 선호할 수 없다. 이 때 토론을 지켜보는 제3자가 취하는 입장은 판단을 유보하거나 권위에 이끌리거나 기분 내키는 대로 따르는 것뿐이다.
상대의 주장을 진심으로 알고자 할 때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의 해석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상대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이야기만을 온전히 듣고 판단해야 한다. 가장 그럴 듯하고 설득력 있는 부분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생각을 연구 검토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진다. 종종 모순된 두 주장은 알고 보면 같은 내용이기도 해서 판단에 어려움이 생긴다.
진정한 진리를 아는 방법은 자유 토론뿐이다. 도덕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 심지어 악마인 것 같은 사람에게 조차 발언 기회를 줘야한다. 가톨릭교회는 성직자들에게 이단자들이 쓴 금서를 읽도록 허락했다(단 평신도는 금지). 적을 잘 아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배우는 사람에겐 유해하다는 것이다. 결국 엘리트들은 평신도에 비해 정신문화를 발전시킬 더 많은 기회를 가졌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식으로 정신적 우위를 확보했다.
자유토론이 없다면 주장의 근거 뿐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도 알 수 없다. 생생한 개념과 확신 대신 기계적으로 외운 몇 구절만 떠들 뿐이다. 본질을 잃고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진리를 진심으로 깨달으면 행동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정신에 일어나는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신념이 세월이 흘러 묵은 신념이 되면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변하고 내면적인 삶과 신념을 연결시키는 일조차 중단한다. 그리스도교 신자 중 계율과 원리에 따라 철저히 삶을 규율하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명도 안 된다. 그들은 교리를 믿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면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행동을 규율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과 종교는 물론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는 책에서도 발견되는 사실이다. 책은 정작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물론 세상의 진리 중 경험하지 않고 참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토론을 벌이고 전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게 문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사안이 확실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치명적인 악습이다.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
'진리를 얻기 위해 억지로 틀린 주장을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면 그 의견은 진리로서의 성질을 잃는다.', '완전한 승리를 얻으면 승리의 열매가 사라진다.' 등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인간 역사가 발전하면서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론은 많아졌다. 1+1=2, 지구는 둥글다, H2O=물 등이 그것이다. 의문이 줄어드는 것은 진리가 확정되는 과정이다. 반대의견을 비판하고 내 주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리를 생생하고 깊이 있게 이해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왜 그런지에 대한 생각이 의식 속에 가득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이 문제를 해결할 대표적인 사례다. 어떤 문제를 본인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을 끊임없는 질문으로 일깨워주는 방법이다. 나아가 무지를 깨달은 뒤 그 의미를 확실히 파악한 바탕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이론상의 약점과 실천상의 과오만 지적하는 '부정적 논리비판' 역시 긍정적 지식이나 확신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남이 싸움을 걸게 만들거나 스스로 싸움을 걸어야 한다. 저런 식으로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우리 논리에 마땅히 부정적인 비판을 걸어줌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조금 더 가까워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므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7. 표현의 자유
서로 다른 두 주장 중 하나만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경우는 드물다.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럴 때는 진리의 빈 곳을 채우도록 통설에 도전하는 이설(이단 소수의견)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많은 혼돈과 오류를 초래한대도 말이다. 루소는 "문명, 과학, 철학의 위용에 빠진 현대인들은 현대가 고대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명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자연 상태의 인간이 더 우월하다"고 말한다. 루소의 이 역설은 당시 통설이 빠뜨린 진리의 한 부분을 채운다. 일방적인 의견을 가진 대중에게 자아성찰의 기회를 주고 더 나은 형태로 재구성되도록 새로운 힘을 줬기 때문이다. 루소는 물질문명에 빠진 당대 사람들에게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가치, 인위적인 삶의 속박과 위선 등을 깨우쳐 줬다. 진보와 보수, 민주주의와 귀족정치, 평등과 재산, 협력과 경쟁, 자유와 규율, 사회성과 개별성 등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주장은 자유롭게 표출되고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서로 대립하는 것들을 화해 결합 시켜야 한다.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도 그 속에는 분명 들어볼 만한 내용이 있다. 그 입을 틀어막아버리면 중요한 진리를 잃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물론 자유토론을 허용해도 사람 생각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순 없다. 오히려 본인의 성향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진리를 드러내기 보다는 '반대파가 주장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더 격렬하게 배척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 대립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방관자'들이다. 그들은 양쪽 사람들의 주장을 억지로 무분별하게 수용한다. 한쪽 의견만 들을 경우 오류가 굳어지고 반대편에 의해 거짓으로 과장되면서 진리로서 역할을 할 수 없지만, 방관자들처럼 두 의견을 모두 듣는다면 충분히 설득 가능성이 있다. 그게 바로 희망의 씨앗이다.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와 표현할 자유는 정신적 복리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첫째, 침묵 당하는 모든 의견은 그것이 어떤 의견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해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이를 부인하면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가정하는 셈이다. 둘째, 침묵 당한 의견이 틀릴 지라도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 모른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 아니라 전적으로 옳다 해도 진지하게 시험에 처하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사람 대부분은 진리의 근거도 모르는 채 일종의 '편견' 정도로만 간직한다. 넷째, 통설이 진리라 해도 의미 자체가 실종되고 퇴색되면서 사람들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의 이성이나 경험에서 강한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막으면서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는 것이다.
'절제된 양식 아래 공정한 토론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만 자유로운 의견 표현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주장은 좀 더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비판 받는 사람은 상대방이 몰아붙이거나 조금이라도 감정 섞인 언사를 하면 자제심을 잃고 비난을 퍼붓는다고 생각하곤 한다. 흔히 자제심을 잃은 토론이라고 할 때 독설, 빈정거림, 인신공격 등을 꼽는다. 하지만 이것을 금지시키는 일은 소수의견을 가진 사람이 통설에 무차별적 공격을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대로 소수 의견을 가진 자들을 향해서는 거침없는 공격을 퍼부을 수 있게 한다. 심지어는 다수 의견을 가진 공격자들에게 '뜨거운 양심', '정의의 분노' 등의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런 싸움은 통설에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결말나고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은 사악하고 비도덕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힌다.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결과다. 다수의견에 어긋나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보통 소수인데다 영향력도 적고 그들이 당하는 옳지 못한 일에 관심 가져줄 사람도 적다. 소수의견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견을 순화하고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 반면 통설을 따르는 사람은 온갖 언어폭력을 동원할 수 있다. 통성보다도 이설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 훨씬 시급하다. 물론 표현방식이 적절치 못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비방의 정도가 심하고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은 가차 없이 비판받아야 한다.
8. 개별성의 가치
다양성과 개별성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은 꽃펴야 한다. 이 때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개별성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별성을 인류 진보의 걸림돌로 여기는 것이다. 훔볼트는 "인간의 목표는 능력을 최고로 개발하고 조화시켜서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항상 개별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와 다양한 상황이 필요하고 두 요소의 결합으로부터 활력과 다양성 독창성이 생긴다. 자기 식대로 경험을 해석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전통과 관습은 경험의 증거다. 물론 이 역시 적절한 수준에서 참고해야 한다. 너무 부분적이거나 잘못됐을 수도 있고 타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관습이니 따른다'는 생각이면 독자적인 생각을 발전시킬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설계하는 사람만이 타고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관찰, 예측, 비교, 판단을 통해 결론을 내린 후에는 확고한 의지와 자기통제가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무엇' 뿐 아니라' 어떻게' 역시 중요하다. 인간은 모형으로 찍어내는 존재나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내면의 힘에 따라 사방으로 자라나는 나무 같은 존재다.
사람들은 욕망과 충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인간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 비해 양심이 약한 것이 문제이다. 강력한 충동은 에너지의 다른 이름이다. 강력한 충동을 지닌 사람은 타고난 자질이 풍부하다. 초기 발전 단계의 사회는 지나친 개별성 탓에 사회적 규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개별성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개인의 충동과 선호가 넘쳐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인간의 존재를 위협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성격과 취향은 어떤지 재능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됐다. 현대인들은 위치, 신분, 관습을 따를 뿐 고유의 기질을 발휘하지 못한다. 취향도 감정도 모두 없어진 것이다.
* 이를 긍정적으로 본 사람도 있긴 하다. 바로 신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한 칼뱅이다. 그는 인간이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봤으며 모든 좋은 일은 복종과 의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느 종교든 인간은 선한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선한 존재는 자신이 인간에게 준 모든 능력이 번성하여 인간이 발전할 때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믿는 게 타당하다.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각 개인이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그들이 모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이런 진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새로운 관행을 시작하여 발전된 행동과 취향을 선보이는 사람은 소중하다. 많은 사람 중 극히 일부만이 새로운 실험을 주도한다.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간다면 사회 전체가 한 단계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이 소수야 말로 빛과 소금 같은 존재다. 소수의 뛰어난 사람은 자유롭고 거리낌 없이 살아야 한다. 또한 누구든 웬만한 상식과 경험만 있으면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여론과 대중은 개별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관계를 벗어나기 싫어하며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럽이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은 성격과 문화의 다양성 덕분이다. 계급, 민족, 개인, 인종 등 극단적으로 다른 서로 덕분이란 말이다. 훔볼트는 인간발전의 두 필수조건을 '자유'와 '상황의 다양성'이라 했다. 현재 영국은 후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같은 것을 읽고 생각하고 같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며 신분이 낮은 사람은 끌어올리고 높은 사람은 끌어내린다. 교육의 확대는 사람들을 비슷한 영향권에 들게 했고 비슷한 사실과 감정을 접하게 했다. 교통통신수단은 먼 사람을 잇고 거주이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은 편리함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모두가 '돈'이라는 똑같은 야망을 품게 했다. 무엇보다 여론이야말로 다양성을 해치는 가장 큰 적이다. 여론은 국가를 움직이는 중요한 변수다. 우리 각자는 대중이 밀어붙이는 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생각과 경향을 지켜야 한다. '서로 다른 것이 다들 똑같은 것보다는 낫다'라는 사실, 즉 개별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한 사정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 칼뱅(프로테스탄트)의 예정설 : "인간의 구원 여부는 이미 신이 결정해두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지하는 것이며 인간은 주어진 운명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구원의 확실한 증거는 '사회생활에서의 성공'이다. 현실세계에서의 성공은 은총의 증거이며 실패는 신에 의해 비난 받고 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근면 금욕 절약이다." 칼뱅의 주장은 재산의 축적과 이윤추구를 긍정하고 금욕생활 윤리를 형성했다. 이는 생산적인 중산계급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9. 간섭의 한계.
개인과 사회는 각각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 사회가 비록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사회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받은 혜택만큼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 또한 개인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한 일정한 행동과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첫째, 개인의 권리로 인정되어야만 하는 타인의 특정 이익을 침해해선 안 된다. 둘째, 각자는 사회와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동과 희생 중 자기 몫을 감당해야 한다. 사회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의무를 강제할 수 있다. 어느 누구의 어떤 행동이든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면 그 순간 사회가 사법적으로 제약할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이 다른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본인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는 그 일과 결과에 대해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심 없는 노력을 기울이라는 말이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며 도와야 한다. 좋은 방향으로 가도록 설득해야 한다. 누군가 자기 인생을 위해 선택한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 본인을 가장 잘 아끼는 것은 자신이기에 타인에게 갖는 관심이란 본인에게 갖는 그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물론 다른 사람의 충고나 경고를 듣지 않아 이런 저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수 역시 타인의 강요에 의해 발생하는 손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아가 우리는 타인에 대한 악감정을 여러 방법으로 드러낼 권리가 있다. 이는 그 사람의 개별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별성을 발휘하는 차원에서 가능하다.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결점을 지닌 사람, 무절제한 사람, 동물적 쾌락만 좇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평판이 나쁘리라는 점을 각오해야 한다. 이 때문에 감수해야 할 불이익은 타인이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판단을 하는 데 따른 불편함 뿐이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주는 행동은 전혀 다른 문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부당하게 손해를 끼치고 타격을 입히는 것, 거짓 또는 겉과 속이 다르게 사람을 대하는 것, 불공정하고 비겁하게 남의 이득을 취하는 것, 다른 사람의 위험을 모른 척 하는 것은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하고 심각하면 법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행동을 유발하는 성향 역시 비도덕적이며 비난의 대상이 된다. 잔인한 기질, 나쁜 천성, 질투, 위선, 불성실, 쉽게 화내는 것, 옳지 못한 대접에 지나치게 분노하는 것, 위세부리기를 즐기는 것, 자기 몫 이상을 욕심내는 것,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얻는 자만심, 자기 멋대로 결정하는 이기심 등은 모두 나쁜 것이다.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결점은 인격과 자존심 결여의 증거지만 비도덕적 결점은 그로 인해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이므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사회가 응징을 가하고 고통을 줘서 처벌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오직 자기에게만 해를 끼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재산을 잃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직간접적으로 해를 입히고 사회 전체의 부를 감소시킨다.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퇴보시키면 자신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두의 행복을 망치고, 나아가 자선과 보호를 받는 짐스러운 존재가 된다. 결국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주변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익과 감정을 배려하지 못한 간접적인 이유가 되는 개인적 실수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다. 여기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란 어떤 행위가 낳은 최초의 직접적인 결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누구의 의무도 침해하지 않고 손해를 입히지 않는 행동이 사회에 간접적으로 피해를 준다면 이 정도 불편은 자유라는 좀 더 큰 목적을 위해 감수해야 한다. 사회가 개인의 사적인 문제까지 명령하는 권한은 필요 없다. 그런 간섭은 잘못된 곳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행동=자기에게 해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사회는 개인행동에 간섭하는 것을 도덕적 법칙으로 포장하곤 한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은 상대가 자신의 종교적 금기사항을 실천한다며 반감을 가진다.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이슬람교를 모욕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여 이를 극도로 증오한다. 이슬람 국가의 대중여론이 도덕적 권위를 내세워 그렇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을 불경으로 간주하거나 다른 방식의 예배를 금하는 것도 잘못이다. 만약 정의롭지 못한 원리가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당연히 반대해야하며 우리 역시 그런 걸 함부로 남에게 적용시키면 안 된다.
과거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시행됐던 금주법의 주된 논리는 다음과 같다. '독한 술을 판매하는 것은 끊임없이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하고 조장하여 안전이라는 사회적 기본권을 침해한다. 내 세금으로 도와야 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정부는 그들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기 때문에 내가 누리는 평등권을 침해한다. 사회를 쇠퇴시키고 풍속을 문란하게 함으로써 자유롭고 도덕적, 지적 발전을 도모하는 나의 권리를 방해한다.' 이는 각 개인은 모든 면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에 따라야하며 모두는 이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말이다. 또한 사소한 일이라도 어기는 것은 곧 나의 사회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런 원칙은 그 어떤 자유의 간섭보다 위험한 것이다. 의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 외에는 자유에 대한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현실적용문제 및 결론.
첫째, 각 개인은 자신과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칠 때는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타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잘못된 것으로 보일 때 의사를 표하는 방법은 충고 훈계 설득 회피뿐이다.
둘째,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사회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위반한 자를 처벌할 수 있다. 물론 언제나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살다보면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목표를 추구하다가 불가피하게 타인에게 아픔을 줄 수 있다. 상대병가 시험이나 경선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원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인류전체에는 이익이 된다.
사회적 행위로서의 상거래. 대중을 상대로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과 사회 일반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거래는 원칙적으로 사회 법률적 관할 아래에 들어간다. 한 때는 가격을 고정하고 생산과정을 규제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가장 싼 값에 가장 좋은 물건을 사는 방법은 생산자와 판매자에게 완벽한 자유를 부여하고, 소비자에게 원하는 곳에서 상품을 구매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생산자와 판매자는 서로 견제할 수 있다. 이것이 자유거래의 원리다. 물론 불량품 사기 노동자착취 등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며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선택할 수 있는) 문제들은 통제해야 한다. 반면 금주법 아편수입금지 독약판매금지 등 특정 물건을 획득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는 허용될 수 없다. 생산자나 판매자가 아닌 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범죄예방은 정부기능 중 하나지만 그것이 남용되거나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구매자가 제품을 선의로 사용할지 악의로 사용할지 알 수 없는데도 일률적으로 구매를 금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제품들이 범죄에 사용되지 않게 하면서도 좋은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다. 벤담이 말한 '사전에 법적 증거로서 구성요건을 갖춘 증거'를 제시하게 하는 것이다. 거래계약을 맺을 때 서명과 증인입회 등의 법적 절차를 밟고, 거래시간 장소 구매자정보 제품수량 등의 정보를 판매장부에 기록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동도 간섭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술에 취하는 것은 간섭하지 않지만 과거 술에 취해 남에게 해를 입힌 적 있는 사람이 또 술에 취한 경우는 특수한 법적 제한을 가할 수 있다. 게으른 것을 처벌할 수는 없지만 게을러서 양육과 부양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국가가 의무를 강제시켜야 한다.
타인에게 어떤 일을 권유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행위이므로 통제받아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개인자유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충고를 통해 개인적 이익을 취하면 통제해야 한다.
도박과 간음은 개인과 사회 두 준칙 중 어디 속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도박과 간음은 개인에게만 관계되는 생계 이윤을 위한 일이다. 이를 범죄라고 볼 수 있는가?' 대(對) '비록 사회와 국가가 결정할 권한은 없지만 나쁜 일이니 최소 논쟁에 붙일 권한은 있다.' 이 논쟁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도박할 자유는 인정하지만 정부가 공개적인 도박장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경찰의 권력과 감시가 있다하더라도 비밀도박장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도박을 완전 금지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도박꾼 외에는 비밀도박장을 알기 어렵다.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영향을 끼치기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사회는 이 이상 간섭하면 안 된다.
국가가 국민에게 어떤 행위를 허락하면서도 이익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도록 설득하는 방식은 합당한가? 말하자면 음주를 제한하기 위해 술값을 올리거나 술 판매를 제한하는 조치가 옳으냐는 말이다. 내 답은 '부당하다'이다. 이는 술 판매 전면 금지나 마찬가지다. 인상된 가격을 따를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음주가 금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가 번 돈으로 법, 도덕적 의무를 다한 뒤 원하는 쾌락에 돈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국가유지를 위해 돈은 필수다. 국가가 가장 많이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루트는 세금이며, 과세의 상당부분은 간접세다. 주류세 자체는 정당하다는 말이다. 다만 국가는 삶에 필수적인 것(빵이나 밥)보다는 아주 적은 양으로도 해를 줄만한 물건(술, 마약)에 우선 과세해야 한다.
개인에게만 관계되는 계약에서는 계약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여러 개인이 모였을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계약은 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호동의에 의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한 번 맺으면 지켜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제3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자신을 해치는 계약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개인의 자발적 행동을 간섭하면 안 되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는 계약(노예계약 같은)을 체결하는 것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유롭지 않을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노예계약은 허용될 수 없다.
결혼과 가정에 관하여. 결혼이라는 계약은 두 사람이 감정을 이루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훔볼트는 따라서 이혼하고 싶을 땐 한 사람만이라도 뜻을 밝히면 계약이 파기된다고 봤다. 하지만 결혼은 '아이'라는 제3자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이에 대한 남녀 두 사람의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이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고려하지 않았을 경우 도덕적 책임을 져야한다. 타인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은 감시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관계에서는 종종 이것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곤 한다. 부모는 자녀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면서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통제권을 행사하려 한다. 법이 조금이라도 간섭하면 매우 불쾌해하기도 한다. 아내 역시 폭력과 학대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가족은 권리와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일정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도록 요구하고 강제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부모의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나서서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직접 국민 교육을 담당해선 안 된다. 교육을 일괄 통제하는 것은 사람들을 똑같은 틀에 맞춰 찍어내는 방편에 불과하다. 국가는 교육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할 뿐이다. 결혼할 능력이 없으면 결혼하면 안 된다. 생명을 인간답게 살 수 없게 한다면 범죄행위나 마찬가지이므로 정부가 간섭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진 않지만 정부가 간섭하면 안 되는 경우. 첫째, 개인에게 맡겼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올 때. 일을 결정하는 문제에서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다. 둘째, 개인이 정부 관료보다 어떤 일을 잘하지 못해도 시민의 정신적 풍요에 도움이 될 때는 개인이 그 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배심원제도, 지방자치제, 자선 등이 그것이다. 이는 시민에 대한 특수훈련이고 자유로운 대중정치교육의 실제적인 부분이다. 시민을 개인과 가족적 이기주의의 세계에서 불러내는 것이고 공동의 이익과 관심사를 다루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이미 정부권력이 비대한 상태에서 정권을 더 강화하는 것은 큰 해악이다. 도로 철도 은행 보험사 대기업 대학 자선단체 지방자치단체가 모두 중앙정부에 편입되면 이 기관의 직원들은 모두 정부 봉급에 의존하게 된다. 아무리 언론의 자유와 민주입법체제가 발전한다 해도 이 나라는 이름뿐인 자유국가다. 정부의 모든 부처가 나라의 가장 유능한 인재들로 채워지면 해악은 더 커진다. 그렇게 되면 국민은 일상생활의 지침이나 방식을 얻기 위해 모두 '똑똑한' 정부만 쳐다보고, 유능한 인재 역시 출세를 위해 정부 일자리에만 목을 맨다. 시민은 관료의 일처리 방식에 감히 토를 달지 못한다. 정부조직은 유능하고 막강한 관료체제가 되기 때문에 정부 이익에 반하는 개혁은 실행될 수 없다. 결국 나라의 인재는 한 쪽에 쏠리지 않아야 하며 대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에 비판을 가해야 한다. 정부가 국민 일상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이익을 극대화 하는 방법은 1) 효율성을 지키면서 권력을 최대한 나누고 2) 정보를 중앙으로 집중시킨 후 각 분야로 분산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국가의 힘은 개인에게서 나온다. 국가가 시민의 내적성장과 발전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사소한 행정이나 업무처리를 위한 기능적 효용만 우선시하면, 시민을 말 잘 듣는 도구처럼 끌고 간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크고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개개인의 가치를 지켜주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자유론'을 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