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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물결 2

2의 물결

 

2장 문명의 구조

 

300년 전에 지구상에서는 대폭발이 일어났다. 지역에 따라서는 반세기 전후의 시간적 차이는 있었지만 충격적인 파괴력을 가진 변동이 전세계에 파급되었다. 낡은 사회들은 붕괴시키고 전혀 새로운 문명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대폭발이 바로 산업혁명이다. 그리고 이 혁명에 기인되는 거대한 해일, 즉 제2의 물결은 맹렬한 기세로 전 세계를 덮쳐서 과거의 모든 제도 및 관습과 충돌하면서 수백만이라는 인간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1의 물결로 이루어진 문명이 지배하던 수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은 두 개의 범주, '미개인''문명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소수의 집단과 부족을 이루어 채집, 수렵, 혹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이른바 미개인족은 농업혁명과는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문명' 세계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토지를 경작해서 생활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농업이 시작된 지역에는 어디나 문명이 뿌리를 내렸다. 중국, 인도로부터 아프리카의 옛토후곡 베닌(Benin)이나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리스나 로마에서 여러 문명이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끊임없이 다채로운 융합문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표면상의 차이는 있더라도 토지가 경제, 생활, 문화, 가족 구조 및 정치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생활은 부락을 중심으로 영위되었다. 예외 없이 간단한 분업이 행해지고 몇 가지로 뚜렷하게 구분된 카스트(cast)의 계급이 출현했다. 그것은 귀족, 승려, 무사, 농민, 농노 또는 노예였다. 어느 곳에서도 권력은 엄격한 독재주의였다. 가문의 인생의 지위를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나 경제는 지방분권적이었고 각각의 공동체는 생활필수품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역사는 단순하지는 않았으므로 예외도 있었다. 대양을 종횡으로 활약한 뱃사람들에 의한 상업문화권도 있었고 거대한 관개시설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왕국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얼핏 특수한 것처럼 보이는 문명들은 같은 하나의 사회현상, 즉 제1의 물결에 의해 일반화된 농업 문명의 특수한 경우로 보아도 잘못은 아니다.

농업 문명의 지배적이었던 시대에도 간혹 장래를 예견케 하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는 대량생산공장들도 있었다.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는 기원전 400년에, 미얀마에서는 서기 100년에 석유를 채굴하기 위해 시추를 했던 일이 있다.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에서는 광범위한 관료주의가 번창했다. 아시아나 남아메리카에서는 거대한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화폐가 존재했고 교역도 행해졌다. 중국에서 도버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칼레(Calais)에 이르는 통상의 길은 사막 바다와 산맥을 넘어 종횡으로 교차되어 있었다. 물론 성숙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치단체나 국가라는 개념도 존재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놀랍게도 선구적인 증기기관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산업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 거론한 미래를 내다볼 만한 현상들은 시대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여기저기 흩어진 것에 불과해서 말하자면 역사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일관성 있는 체계를 이루지 못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따라서 1650년까지는 완전히 제1의 물결 시대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1750년까지도 제1의 물결세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곳곳에 미래사회나 곧 도래하게 될 산업사회를 예견하게 하는 현상이 보이기는 했지만 역시 농업 문명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러한 상태가 영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은 이 농업 문명 속에서 시작되었고 제2의 물결을 일으킴으로써 전혀 미지의 강력하고 열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활력이 넘치는 문명, 그때까지의 문명과는 대조적인 문명을 창조해 냈다. 산업주의란 단순히 공장 굴뚝이나 조립라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력하고 다방면에 걸쳐진 사회체계이며 인간 생활 모든 면에 관계하고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제1의 물결의 모든 특질에 도전했던 것이다. 산업주의는 다트로이트 교외 윌로우 런에 거대한 공장군을 만들어 낸 것뿐만 아니라 농장에는 트랙터를, 사무실에는 타이프라이터를, 부엌에는 냉장고를 등장시켰다. 일간신문이나 영화, 지하철, DC3 항공기를 이 세상에 내놓았다. 회화의 세계에서는 큐비즘(cubism)을 음악에는 12음계를 가져다주었다. 공업기술과 예술과의 결합을 목표로 하는 종합조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건축, 바르셀로나 양식의 의자, 연좌 파업, 비타민제, 평균 수명의 연장이것들은 모두 산업주의의 산물이었다. 팔목시계와 선거를 보급시킨 것도 산업주의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산업주의자 이러한 별개의 현상들을 모아서 마치 부속품으로 기계를 조립하는 것처럼 이것들을 조립하여 그때까지는 없었던 대단히 강력하고 일관된 광범한 사회제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2의 물결이 가져온 문명인 것이다.

 

폭력적 해결

2의 물결이 여러 사회로 밀어닥침에 따라 농업사회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도래하고 있는 산업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은 마침내 정면충돌을 일으켜 양자의 격돌현장에 있던 구시대의 사람들은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때로는 대량살육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국에서의 이 충돌은 농업에 의한 제1의 물결 문명을 확립하려고 하는 유럽인이 이주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백인에 의한 농업 문명의 조류는 사정없이 서쪽으로 밀려가서 인디언들을 내쫓고 멀리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농장과 농촌을 계속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농민들의 뒤를 이어 앞으로 오게 될 제2의 물결 시대의 첨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초기 산업인들도 도착했다. 뉴잉글랜드와 대서양 연안 중부 여러 주에는 공장과 도시들이 급격히 출현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동북부는 공업지대로서 급속한 발전을 계속하여 무기, 시계, 농기구, 섬유제품, 재봉틀 등의 제품을 생산해 냈다. 반면 그 외의 지역에서는 아직 농업세력이 지배적이었다. 1의 물결과 제2의 물결 사이에는 경제적,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어 드디어 1861년에는 무력투쟁으로 발전되고 말았다.

남북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노예제도를 둘러싼 도덕적 논쟁이나 관세문제라는 협소한 경제적 대립만이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전쟁이 결말지으려 하는 것은 훨씬 중요한 문제 때문이었다. , 풍요한 이 신대륙을 농민이 지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산업가들이 지배할 것인가, 1의 물결세력에 굴복하는가 아니면 제2의 물결세력이 승리하는가, 그것이 전재의 진실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미래의 미국 사회가 기본적으로 농업형 사회로 되느냐 산업형 사회로 되느냐의 분수령이었다. 북군이 승리함으로써 주사위는 던져졌다. 미국의 산업화가 확정된 것이다. 그때 이후부터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면에서 농업은 후퇴를 계속하고 공업이 융성의 길을 걷게 되었다. 1의 물결은 후퇴하고 제2의 물결이 밀려들게 되었다.

비슷한 두 문명의 충돌은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났다. 1868년에 시작된 일본의 메이지유신 역시 과거의 농업시대와 미래의 산업 시대와의 싸움을 똑같이 재연한 것이었다.

1876년에 실시하게 된 사족의 기록을 폐지함으로써 봉건제도가 종말을 고하고, 1877년에 일어난 사쓰마항의 반란 때문에 일어나 세이난의 전쟁, 1889년에 서구형 헌법의 공포, 이런 것들은 모두 일본에 있어서의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의 충돌을 반영하는 사건이며 일본이 세계 제1급의 산업국으로 전진하는 첫 걸음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의 세력 사이에 이같은 충돌이 일어났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남북전쟁의 러시아판이었다. 표면상의 중요한 쟁점은 공산주의 체제를 취하느냐 아니냐처럼 보였지만 실은 여기서도 문제의 중심은 산업화에 있었다. 볼셰비키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농노제도와 봉건영주의 전제정치에 종지부를 찍어 농업은 뒷전으로 제쳐 놓고 의식적으로 산업화를 촉진시켰다. 볼셰비키 역시 제2의 물결 편에 들어온 정당이 된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이 계속 충돌하면서 정치적 위기, 동란, 파업, 반란, 쿠데타, 전쟁 등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20세기 중반까지 제1의 물결세력은 완전히 붕괴되고 제2의 물결 문명이 지구를 지배했던 것이다.

오늘날 산업주의 사회는 지구상의 북위 25도 선과 65도 선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다. 북미대륙에서는 약 25000 만의 인구가 산업화된 생활양식에 따라 살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남쪽에서 이탈리아에 이르는 지역에 역시 25000 만 정도의 인구가 산업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동쪽으로 향하면 유라시아(Eurasia) 공업지대, 즉 동유럽과 소련의 서부가 산업주의 문명권이며 여기에도 25000만의 인구가 산업사회 특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아시아의 산업 지역인 일본, 홍콩, 싱가포르, 대만, 호주, 뉴질랜드, 한국, 중국 본토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의 25000만의 산업화된 인구가 있다. 결국 산업 문명에 속하는 인간은 약 10억에 이르고 이것은 지구 전체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이 나라들은 분명 다른 언어, 문화, 역사, 정치형태를 가지고 있어서의 그 뿌리 깊은 차이점 때문에 전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물결에 속해 있는 사회에는 여러 가지 공통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가 알고 있는 그 차이점의 배후에는 유사성이라는 공통의 기반암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체제와 충돌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회변화의 물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이들 사회의 공통적 구조, 즉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제2의 물결이 이루어 놓은 문명의 구조를 확실하게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름 아닌 이 산업사회의 기본구조 그 자체가 지금 붕괴되려 하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에 의존하고 있던 동력

새로운 문명이건 낡은 문명이건 간에 모든 문명의 전제조건은 에너지이다. 1의 물결사회에서의 에너지원은 인간이나 동물의 근육의 힘인 '생물에 의한 동력원', 태양열, 풍력 등 자연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다. 취사나 난방을 위해서 삼림이 벌채되었다. 물레방아도 있었다. 논이나 밭에서는 관개용 풍차가 찌극찌극 소리 내며 돌고 있었다. 가축은 쟁기를 끌고 있었다. 프랑스혁명 당시만 해도 유럽에는 에너지원으로 1400만 필의 말과 2400만 두의 소가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제1의 물결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이용된 모든 에너지원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림은 자연이 회복시켜 주었고 배를 달리게 해주는 바람도, 기선의 외륜을 돌려주는 강물의 흐름도 자연의 힘으로 해서 순환되었다. 에너지원으로서 혹사당하던 가축이나 인간도 교체 요원은 얼마든지 있었다.

여기에 비해서 제2의 물결이 만들어 낸 사회는 모두가 석탄이나 가스, 석유 등 한번 소비해 버리면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712년 영국의 기술자 토머스 뉴코먼에 의해서 실용적인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단순하게 자연이 만들어 내는 이자만으로 인간 문명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축적해 둔 자본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가 축적해 두었던 에너지를 조금씩 뜯어 먹는 것은 산업 문명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보조금의 역할을 했다. 이것으로 해서 산업 문명은 대단히 급속한 경제성장을 실현했다. 2의 물결이 밀려온 나라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나 값싼 화석연료를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거대한 과학기술의 체계와 경제기구를 수립했다. 자본주의 사회이건 사회주의 사회이건, 그리고 동서양을 불문하고 분명히 같은 전환이 일어났다. 즉 어디에서도 구할 수 있는 에너지에서 특정한 장소에 집중하고 있는 에너지로, 재생 가능한 것에서 재생 불능의 것으로, 잡다한 종류의 자원이나 연료에서 소수의 연료로 전환하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화석연료는 제2의 물결에 속하는 모든 사회의 에너지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기술의 요람

새로운 에너지 체계로의 도약은 과학기술의 거대한 진보와 발전을 가져왔다. 1의 물결이 가져온 사회는 2000년 전에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문명의 발달에 필수불가결한 발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랭크, 쐐기, 노포, 포도 짜는 기구, 지렛대, 기중기 등 초기에 발명된 기계는 주로 인간이나 동물의 근육의 힘을 증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2의 물결은 과학기술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모터, 벨트, 호스, 베어링, 볼트 등이 하나가 되어 규칙적인 운동을 계속하면서 톱니바퀴를 물고 돌아가는 거대한 전기기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계는 단순히 근육의 힘을 증강시키는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산업 문명은 인간보다 정확한 시각, 청각, 촉각을 갖는 기계를 만들어 과학 기술에게 감각기관을 대행시킬 수도 있게 되었다. 산업 문명은 또 새로운 기계를 만들기 위한 공작기계를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술에 요람을 제공해 준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업 문명이 여러 가지 기계를 한 지붕 밑에 모아 놓고 상호연관된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리하여 공장이 만들어지고 나아가서 공장 내부에 조립 라인 작업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기술적 기반 위에 서서 많은 산업이 급격하게 일어나 제2의 물결이 이루어 내는 문명의 특질을 명확하게 했다. 맨처음 발달한 것이 석탄산업, 섬유산업, 철도 산업이고철강, 자동차산업, 알루미늄, 화학제품, 항공기산업이 그 뒤를 이었다. 거대한 공업 도시가 각지에 출현했다. 섬유산업이 성황을 이룬 프랑스 북부의 릴,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 미국의 자동차산업 도시인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 철강도시인 서독의 에센, 소련 서부에 있는 마그니토고르스크 등 수백 개가 넘는 공업 도시가 태어났다.

이 공업 중심지에서 내의, 구두, 자동차, 시계, 장난감, 비누, 샴푸, 카메라, 기관총, 전동기 등 동일한 제품들이 수없이 생산되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 체계로 가동되기 시작한 새로운 과학기술이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붉은 탑

그러나 대량생산이 되었다 해도 유통체제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제1의 물결사회에서 상품은 보통 손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제품은 주문에 따라 하나씩 만들고 있었다. 유통도 이러한 생산과 비슷했다.

서구에서는 낡은 봉건적 질서의 균열이 넓어짐에 따라 상인들은 규모가 크고 복잡한 조직을 가진 무역회사를 만들어 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회사들이 상선대나 낙타로 운반하는 대상을 조직하여 전 세계에 무역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이들은 유리, 종이, 명주, , 포도주, 양털, 인디고(indigo), 메이스(mace) 등을 판매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품의 대부분은 소규모의 점포 또는 시골구석까지 짐을 지고 가거나수레를 끌고 가서 판매하는 행상인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전달되었다. 조잡한 통신 사정과 원시적인 수송수단이 판매시장을 결정적으로 한정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들 소규모 점포의 경영자와 행상인들이 제공하는 상품의 종류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게다가 상품이 품절되는 상태가 몇 개월 또는 몇년 동안이나 이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2의 물결은 시대에 뒤떨어져서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는 이 유통체계에도 변혁을 가져왔다. 유통상의 변혁은 생산부문의 변혁 못지 않게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철도와 고속도로, 운하가 오지까지 개발시켰다. 그리고 산업주의와 더불어 상업의 전당인 최초의 백화저머이 출현했다. 중개인, 도매업자, 대리점, 그리고 제조업자의 대표들 사이에 복잡한 조직망이 만들어지고 1871년에는 조지 헌팅턴 하트포드가 대량판매망을 확립했다. 나중에 헨리 포드가 공장에서 실현하게 된 대량생산을 그는 유통 면에서 일찍이 실현하였던 것이다. 뉴욕에 진출한 하트포드의 최초의 상점은 붉은 건물과 중국의 탑 모양을 본뜬 독특한 매장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세계 최초의 거대한 체인점(chain store) 조직인 '대서양, 태평양 차 회사(The Great Atlantic and Pacific Tea Company)'를 창립함으로써 유통산업을 기존의 것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특정의 단골손님만을 상대로 하던 유통이 기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산업사회에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요소가 된 대량유통과 대량판매에 밀려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검토해 온 모든 변화를 만일 일관해서 표현한다면 '기술영역'의 변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개사회나 농업사회, 혹은 산업사회를 불문하고 모든 사회는 에너지를 소비하여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유통시킨다. 어떠한 사회에서도 에너지 체계와 생산체계, 유통체계는 상호 간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다 전체적인 하나의 체계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보다 전체적인 체계가 기술영역이다. 이 기술영역은 사회의 발전단계에 따라 각기 특징적인 형태를 갖는다.

지구상에 제2의 물결이 파급됨에 따라 농업사회의 기술영역은 산업사회의 기술영역으로 바뀌어졌다.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가 대량생산체계에 직결되고 그 대량생산체계는 고도로 발달한 대량유통체계에서 상품을 건네주게 되었다.

 

유선형 가족

그러나 제2의 물결의 기술영역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영역이 필요했다. , 기술이 산업사회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사회조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가족 형태는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농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어디나 백부, 백모(혹은 숙부, 숙모), 장인, 장모(혹은 시부모), 조부모, 사촌 등 여러 세대의 가족이 한 지붕 밑에서 생활했고 경제적으로도 모두가 하나의 생산단위로서 함께 일하는 대가족주의가 일반적이었다. 인도의 가부장제에 대한 대가족(joint family),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가족공동체 (zadruga), 서유럽에서 일반적이었던 수세대를 포함하는 종의 복합가족인 확대가족 (extended family) 등의 예를 들 수가 있다. 그리고 가족은 이동하지 않고 토지에 뿌리를 박고 살았다.

2의 물결이 제1의 물결사회를 휩쓸게 되자 가족은 변화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각 가정 내부에서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이 충돌하면서 가정 내의 분쟁, 가부장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변했고 예의범절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경제적인 생산의 장소가 농토에서 공장으로 바뀌어지자 가족은 이제 하나의 생산단위로서 함께 일하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일꾼을 공장노동으로 보냄으로써 가족의 중요한 기능은 각각 전문적 기관들이 분담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은 학교에 맡겨졌다. 노인에 대해서는 구호시설이나 양호시설에 맡겨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새로운 사회에서는 필요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노부모, 병자, 신체장애자, 그리고 많은 자녀들을 부양하고 있는 확대가족은 도저히 이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비극을 일으키면서 가정의 구조가 점차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시로의 이주로 이별하게 되고 경제적인 폭풍에 휩쓸리기도 하면서 가족은 불필요한 친족을 떨쳐버리고 이제는 보다 작고 이동성이 큰 새로운 기술영역에 적응해 나아갔던 것이다.

성가신 친족들은 떼어내 버리고 부모와 두셋의 자녀들만으로 구성되는 이른바 핵가족이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할 것 없이 모든 산업사회에서의 표준적인 '근대적' 가족의 모델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조상숭배에 의해서 가부장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일본에서마저도 핵가족이 성행하게 되었다. 단결심이 강한 대가족이 제2의 물결의 도래와 더불어 붕괴하기 시작했고 점점 핵가족이 늘어났던 것이다. 요컨대 석탄이나 석유 등 화학연료, 제철소, 체인점 등이 제2의 물결를 제1의 물결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던 것처럼, 핵가족은 제2의 물결사회와 제1의 물결사회를 확연히 구분 짓는 요인이 된 것이다.

 

내면적인 교육계획

노동의 장소가 농토나 가정에서 벗어나 공장으로 이행함에 따라 자녀들은 공장노동에 적합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생겨났다. '일단 사춘기를 지낸 사람들은 농업에서 전업한 경우거나 수공에서 전업한 경우거나 간에 공장의 유능한 일꾼이 되기는 어려웠다.'라고 1835년에 앤드루 우어가 쓰고 있지만 산업화한 영국에서는 초기의 광산이나 공장경영자가 먼저 그 사실을 알았다. 젊은 연령층을 미리 산업주의 체제에 적합하게 양육하면 나중에 산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훈련을 받을 때 직면하게 되는 곤란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이 모든 제2의 물결사회에 공통적인 또 하나의 중요한 구조 즉 대중교육이다.

공장을 모델로 해서 설립된 대중교육은 초보적인 읽기와 쓰기, 산수를 주체로 하고 역사나 기타의 과목도 간단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교육계획이었다. 사실에 있어서 그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교육계획이 있었고 이것이 산업사회에는 근본적으로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이 교육계획은 세 개의 과목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물론 대개의 산업주의 국가에서는 현재도 이 세 개의 도덕 과목이 존재해 있다. 그것은 첫째, 시간 엄수이다. 둘째가 복종, 셋째가 기계적인 반복작업의 습관화이다. 공장노동자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 일이다. 특히 조립 라인의 근무자인 경우가 그러했다. 그리고 상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노동자여야 했다. 또한 남자든 여자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완전히 기계적인 반복작업을 싫증도 내지 않고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인내력의 양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세기 중반 이후 제2의 물결이 밀어닥친 나라에서는 교육제도가 지나칠 정도로 발달해 갔다. 취학연령은 점점 나아지고 재학생 수는 늘어날 뿐이었다(미국에서는 1878년에서 1956년 사이에 35퍼센트가 늘어났다). 그리고 의무교육 연한도 당연히 연장되었다.

공립학교에서의 대중교육은 분명히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진전이었다. 1829년 뉴욕의 어느 기계공과 직공 그룹이 선언한 것처럼 '교육은 생명과 자유 다음으로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라고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의 물결이 도래한 이후의 학교는 몇 세대에 걸쳐서 젊은 사람들을 규격화하고 전기기계와 조립 라인에 알맞은 획일적인 노동자를 양성해 왔다.

핵가족제도와 공장노동자를 위한 교육제도는 젊은 사람들이 산업사회에서 유능한 역할을 다하기 위한 종합적인 준비체제의 일부로서 기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제2의 물결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건 공산주의 사회건 북이건 남이건 모두 비슷했다.

 

법인이라는 이름의 불사조

2의 물결에 의해서 태어난 모든 사회에는 핵가족 및 대중교육과 함께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을 더 한층 강력하게 하는 제3의 제도가 대두되었다. 그것은 주식회사라는 조직의 발명이었다. 그 이전의 기업에서는 보통 개인 또는 가족이 소유하고 있거나 몇몇 사람의 공동경영이었다. 주식회사도 있기는 했지만 극히 소수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독립혁명 당시만 해도 공동경영이나 개인 경영을 대신해서 주식회사가 기업으로서의 주요한 조직으로 되리라는 것은 경제사가 아더 듀잉이 말했던 것처럼 '누구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였다. 1800년이 되어서도 미국 전토에 있는 주식회사는 불과 335개사에 불과했는데 그것마저도 대부분은 운하 건설이나 유료도로를 경영하는 공영에 가까운 사업체였다.

대량생산의 개시는 이러한 상태를 일변시키고 말았다. 2의 물결이 가져온 과학기술은 방대한 자본의 축적을 필요로 했다. 이제는 개인이나 소수의 집단이 출자하는 한도를 넘고 있었다. 투자할 때마다 자기 개인의 전 재산을 잃게 되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면 기업의 소유자 또는 공동경영자는 위험이 수반되는 대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서 유한책임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만일 회사가 망하더라도 투자자는 투자한 재산만 잃을 뿐이며 그 이상의 피해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 제도는 투자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왔다.

게다가 회사는 사법기관에 의해서 절대로 '죽지 않는 존재=법인'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 최초의 투자자가 사망하여도 법인을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여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거대한 사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01년에는 세계 최초의 10억 달러 규모의 기업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스틸(United States Steel)사가 등장했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자본의 집중이었다. 1919년에는 이러한 거대 기업이 6개로 늘어났다. 그야말로 거대기업은 모든 산업국가의 경제생활에 공통되는 특징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은 사회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업의 형태는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는 상이했지만 조직 면에서 보았을 때 그 본질은 대단히 비슷했다. 핵가족, 공장식의 대중교육, 그리고 거대 기업이라고 하는 3개의 조직이 제2의 물결에 의해서 태어난 사회에는 예외 없이 출현해서 그 사회를 특징짓는 제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스위스, 영국, 폴란드, 미국, 소련 등 제2의 물결세계에서는 국민의 대부분이 규격화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즉 핵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여 공장노동에 순응하기 위해 집단으로 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사기업이건 공영기업이건 간에 대기업으로 들어가서 일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개개인의 생활방식이 모든 면에서 제2의 물결사회를 성립시키고 있는 사회제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음악 공장

지금까지 논술해 온 가족, 학교, 기업이라고 하는 세 가지 핵심적 제도들을 중심으로 그 밖의 여러 가지 무수한 조직이 생겨났다. 정부의 각 부서, 스포츠 단체, 교회, 상공회의소, 노동조합, 변호사회나 의사회 등의 전문기관, 정당, 독서 클럽, 미국에 많은 인종이나 문화, 종교 등을 공통으로 하는 인종단체, 기타 수많은 단체들이 제2의 물결과 함께 출현했다. 각 단체들은 서로 원조하거나 원조를 받거나 하는 관계 외에 대등의 관계, 세력의 균형 관계 등 실로 복잡한 조직상태가 조성되었다.

그저 보기에는 이러한 다수의 단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어서 혼돈상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들 잡다한 단체에도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의 물결이 밀려오면 어느 나라에서건 사회적 제도를 발명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공장이야말로 가장 진보된 능률적인 생산조직이라고 믿는 나모지 공장 이외의 조직에도 그 원리를 적용하려고 했다. 학교, 병원, 형무소, 정부의 관료기구 및 그 외의 조직, 분업, 위계 구조, 금속처럼 냉랭한 비인간성 등 여러 면에서 공장과 공통적인 특징을 갖게 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예술의 분야도 어떤 면에서 본다면 공장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오랜 농업 문명 시대의 예술가는 후원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연주가나 작곡가, 화가, 작가들은 점차 시장원리에 좌우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가들까지 이름도 없는 소비자들을 위해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2의 물결이 밀려온 나라의 여기저기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자 예술작품의 구조 그 자체도 변하게 되었다.

음악이 그 좋은 예이다. 런던, 파리, 비인 등 여러 도시에 콘서트홀이 출현한 것은 제2의 물결이 도래한 시대였다. 이와 함께 매표소가 생겨났고 예술제작에 투자하여 문화소비자에게 표를 판매하는 흥행주라는 이름의 사업가가 나타난 것이다.

표가 팔리면 팔릴수록 당연히 흥행주의 주머니에는 보다 많은 돈이 모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홀의 객석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콘서트홀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큰 소리로 연주해야 했다. 맨 뒷좌석에서도 음악 소리가 잘 들릴 수 있어야 했다. 그 결과 음악은 실내악에서 교향악으로 그 형식이 바뀌게 되었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후에 미국으로 귀화한 유명한 음악학자 쿠르트 작스는 그의 저서 '악기의 역사'에서 '18세기 중에 귀족적 문화에서 민주적 문화로 이행함에 따라 음악회장은 작은 살롱에서 거대한 콘서트홀로 변했고 홀이 크면 클수록 한층 더 음량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당시는 이런 음량을 높이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필요한 음량을 내기 위해 점차로 악기와 연주자의 수를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근대의 관현악이고 베토벤이나 멘델스존, 슈베르트, 브람스 등이 웅장한 교향곡을 쓴 것도 이러한 산업사회의 조직 때문이었다.

관현악단은 그 내부 구조에 있어서도 몇 가지 공장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처음에 관현악단에는 지휘자가 없었다. 연주자들이 수시로 돌아가면서 지휘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연주자들은 공장이나 관료조직이 잘 정비된 사무실에서 일하는 근로자처럼 부문별(악기별 섹션)로 나누어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체의 생산(음악)에 기여하면서 매니저(지휘자)나 때에 따라서는 관리자의 계급조직에서 본다면 훨씬 하급의 장(콘서트 마스터나 악기부의 장)에 의해 조정되게 되었다. 그리고 악단이라는 조직이 그 제품을 대중시장에 판매한 것이다. 결국에는 음악이라는 생산에 레코드라는 제품이 첨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음악의 제조공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2의 물결의 사회영역은 가족, 학교, 기업 등 세 가지의 핵심조직과 함께 여러 분야의 조직이 제각기 산업기술영역의 필요에 따라 그것에 적합한 형태로 발생함으로써 성립된다.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술영역과 거기에 대응하는 사회영역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문명에는 정보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전달하는 이른바 '정보영역'이 필요한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도 제2의 물결이 가져온 변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종이 바람

모든 인간집단은 원시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적인 의사전달에 의존해 왔다. 그러므로 메시지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낼 수 있는 제도도 필요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외치는 보초대'라 불리는 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큰 음성을 낼 수 있는 사람을 올라가게 하여 이 탑에서 저 탑으로 필요한 메세지를 육성으로 중계하도록 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쿠르수스 푸블리쿠스(cursus publicus)라 불리는 광범위한 메신저(messenger) 서비스망을 두고 있었다. 1305년에서 180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의 탁시스(Taxis)일가에서는 유럽 전체에 망아지를 이용한 일종의 우편 서비스망을 운영하고 있었다. '탁시스 우편'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이 우편제도는 1628년 당시만 해도 2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고용되어 있었다. 이 회사의 배달부는 청색과 은색의 제복을 입고 황태자, 장군, 상인, 금융업자들 사이에서 왕래되는 메시지를 가지고 유럽대륙을 종횡으로 뛰어다녔던 것이다.

1의 물결 문명 시대에는 이러한 정보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부자나 권력층에 한했다. 일반 대중은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가 로린 질리아쿠스가 말한 것처럼 '이와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편지를 보내려는 시도는 권력자에게 의심을 받거나 결국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과 사람 간의 정보교환은 모든 사람에게 허가된 데 비해 가족이나 마을을 넘어서는 정보 전달의 보다 새로운 체제는 본질적으로 공공적 서비스가 아니라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대중을 관리하는 목적으로 이용된 데 불과했다. 실제로 이 제도는 엘리트의 무기였던 것이다.

2의 물결이 여러 나라로 파급되는 과정에서 대중 전달의 점유체제는 하나하나 타파되었다. 이것은 부유 계급이나 권력층이 갑자기 서민의 이익을 생각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제2의 물결이 가져온 과학기술과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이 낡은 제도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정보의 '대중화'를 필연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원시사회와 제1의 물결사회에서는 경제적인 생산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어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얻는 정보로도 충분했다. 대부분은 언어나 몸짓에 의한 정보였다. 이것에 비해 제2의 물결경제는 다수의 장소에서 행해지는 작업의 엄격한 조정을 필요로 했다. 대량의 정보를 낳아서 원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그 정보를 각 방면에 유통시켜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제2의 물결이 본격화되자 모든 나라가 앞을 다투어 우편제도를 확립하게 되엇다. 우체국이라는 것은 솜을 다루는 기계나 방적기와 마찬가지로 그 이전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참으로 창의적이고도 사회적으로 유익한 발명이었다. 오늘날에는 보통의 흔한 기계로 되어 버렸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은 매우 기쁘게 한 물건들이었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명연설가로서 유명했던 에드워드 에버레트는 "우체국이야말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들의 근대 문명을 뒷받침해 주는 큰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우체국에 의해서 처음으로 산업화 시대의 대중 전달 회로가 열렸던 것이다. 1837년에 영국의 체신성은 엘리트층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1년에 약 8800만 통의 편지를 취급했다. 당시의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현상이라고 할 정도의 규모였다. 산업화 시대가 거의 절정에 이르러 제3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에는 연간 우편물 취급 건수가 100억 통에 달했다. 같은 해에 미국의 우정국은 어린이까지 포함하여 전 국민 한 사람당 355통의 국내 우편물을 배달했다.

산업혁명과 동시에 일어났던 우편물의 홍수는 제2의 물결에 따라 밀려오기 시작한 방대한 정보와 비교하면 그것은 극히 작은 하나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대규모 조직체 내부에서는 우편물을 훨씬 능가하는 정보가 이른바 마이크로 우편제도라는 기구를 통해서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회사 내부의 문서는 공공의 커뮤니케이션 회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 역시 편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제2의 물결이 절정에 달했던 1955년 후버 위원회(Hoover Commission)3 대 기업의 서류철 내용을 감사했다. 그 결과 3사는 각각 종업원 한 사람당 34000, 56000, 64000건의 서류나 연락문서를 철해 두고 있음이 드러났다.

더욱이 산업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급격한 정보의 필요성은 문서만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19세기가 되자 전화와 전보가 발명되어 언제나 팽창일로에 있는 대중 정보의 일부를 분담하게 되었다. 1960년의 미국 내에서의 1일 통화량은 약 25000만 건, 연간 930억 건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전화망과 최신식의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서도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이상의 예를 든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는 일정한 시간에 개인과 개인이 정보를 전달하는 체제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 즉 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했다. 소수의 고용자를 두고 필요할 때는 그 고용인의 자택도 방문할 수 있었던 산업혁명 이전의 고용주와는 달리 산업사회에서의 고용주는 수많은 근로자와 1 1의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대중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판매업자로서는 고객의 한 사람 한 사람과 의사소통을 꾀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2의 물결사회는 같은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싼값으로 또한 단시간 내에 틀림없이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으며 또 실제로 그러한 수단을 발명했다.

우편은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수백만이라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걸렸다. 전화는 메시지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수백만이라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간격을 메우게 된 것이 대중매체였다.

오늘날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모든 산업 국가들에는 예외 없이 대량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과 잡지가 일상생활의 일부로 정착되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전역을 대상으로 한 인쇄물의 발행이 활발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새로운 산업 문명적 기술과 사회형태의 급격한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쇄물을 가능케 한 원인을 장 루이 세르방 슈레베르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발행한 인쇄물을 하루에(유럽 정도의 넓이) 국내 모든 곳에 운반할 수 있는 철도, 몇 시간 만에 수천만 부를 인쇄할 수 있는 윤전기, 전보와 전화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무교육에 의해 글을 해득하게 된 대중과 제품의 대량 판매를 필요로 하는 산업들의 결합 때문이다.'

신문이나 라디오로부터 영화나 텔레비전에 이르는 대중매체에도 역시 공장의 기본적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매체는 마치 공장이 수백만의 가정에서 사용되는 물건을 찍어 내듯이 수백만이라는 사라들의 머릿속에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대량생산된 표준화 제품과 마찬가지로 대량생산된 '사실'이 집중화된 소수의 이미지 공장에서 수백만의 소비자에게 흘러간다. 이 엄청나게 강대한 정보유통의 체계가 없었더라면 산업 문명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고 확실하게 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산업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간에 주도면밀한 '정보영역', 즉 커뮤니케이션 루트가 발생했으나 개인적인 메시지나 대중 상대의 메시지도 모두 이 루트에 의해 제품이나 원료처럼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보영역은 기술영역과 사회영역에 결합되어 그것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경제적 제품과 개인의 소비활동을 연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 세 가지 영역들은 그것들을 통합한 보다 큰 체계 속에서 각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어느 것이나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기술영역은 부를 생산하여 그것을 개인에게 분배했고 사회영역은 서로 관련을 갖는 무수한 조직을 통해서 개인에게 체계 내에서의 역할을 분담했다. 그리고 정보영역은 체제 전체가 작동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배정했다. 이 세 가지 영역이 일체가 되어 사회의 기본구조를 형성한 것이다.

이상이 제2의 물결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사회에 공통되는 구조의 윤곽이다. 그것은 문화적 또는 풍토적인 차이나 인종적, 종교적 유산을 초월하여 스스로가 자본주의를 표방하건 사회주의를 표방하건 상관없이 공통의 구조를 찾게 되는 것이다.

서독이나 프랑스, 캐나다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이들 기본 구조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표현되는 한계를 설정해 주었다. 어느 나라에서는 낡은 제1의 물결구조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그 낡은 문명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문명뿐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 간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인 격심한 투쟁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러한 공통의 사회구조가 출현되었던 것이다.

2의 물결의 도래와 함께 인류의 희망은 상상을 넘을 정도로 커졌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빈곤과 기아, 질병이나 전제정치를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8세기 영국의 평등사상가 아베 모렐리나 공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 프랑스의 사회과학자 생시몽, 사회개혁가 푸리에, 사회주의자 프루동, 루이 블랑, 미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벨라미 등 수많은 유토피아 작가나 철학자들은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한 산업 문명 속에서 평화와 화합의 도래, 실업 문제의 해소, 부화 기회균등, 족벌에 의한 특권의 종언, 기타 수십만 년 동안의 원시생활, 수천년 동안의 농경 문명 속에서 절대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어오고 있던 일의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오늘날에 만일 산업 문명이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는 가혹하고 황량하며 상태학적으로도 위험에 처해 있고 전쟁과 연결되기 쉽고 인간의 심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2의 물결을 살아가는 정신구조를 서로 적대적인 두 부분으로 분열시키는 거대한 쐐기가 무엇인가를 살펴볼 때 우리는 처음으로 이 문제에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장 보이지 않는 쐐기

 

2의 물결은 마치 핵분열의 연쇄반응과 같이 종전에는 하나의 통합체였던 인간 생활을 격렬하게 양쪽으로 갈라 놓았다. 그 과정에서 제2의 물결은 우리들의 경제생활, 정신구조, 나아가서 성적 자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쐐기를 박고 말았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산업혁명은 아주 독특한 기술이나 사회제도 및 정보채널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매우 종합적인 사회구조를 이루어 놓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산업혁명은 사회의 내면적인 통일성을 깨고 우리 생활을 경제적 긴장, 사회적 대립, 심리적 불안 등이 가득찬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2의 물결 시대를 통하여 이 보이지 않는 쐐기가 우리 생활의 유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이해해야 비로소 오늘날 우리 생활을 재구축하려는 제3의 물결의 충격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의 물결은 우리 인간 생활을 생산과 소비라는 두 개의 극으로 갈라놓고 말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현재 자기 자신을 '생산자''소비자'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된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류가 자신의 손으로 생산한 식량이나 그 밖의 일용품, 또는 갖가지 서비스의 대부분이 생산자 자신이나 그 가족 또는 자기를 위해 어떻게든 잉여물자를 모을 수 있었던 극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소비되고 있었다.

농업사회의 단계에서는 대개 인구의 대부분이 영세한 농민이며 그들은 겨우 외부와의교류도 별로 없이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겨우 식사를 하며 소유주의 유복한 생활에 필요할 만큼만 경작을 하면서 최저수준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농민이 농업기술을 개선하거나 생산을 늘리는 데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지 못한 이유로서는 장기간 식량을 저장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고 또 먼 시장에 식량을 운반하기 위한 도로도 없었다. 물론 아무리 생산을 늘린다 하더라도 노예소유주나 봉건영주에게 징수당하여 버린다는 사실을 농민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상업도 존재했었다. 극소수의 두려움을 모르는 상인이 나타나 수레 또는 배에 상품을 싣고 수천 마일의 먼 곳까지 운반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또 도시의 발생이 농촌지대에서 운반되는 식량 공급에 의존했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1519년 멕시코에 도착한 스페인 사람들은 틀라텔롤코(Tlatelolco)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갖가지 상품을 매매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보석, 귀금속, 노예, 샌들, 포목, 초콜릿, 로프, 짐승 가죽, 칠면조, 야채, 토끼, , 각종 도기류와 같은 잡다한 것이 매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독일의 금융업자들을 위해 발행된 민간통신 '더 푸거 뉴스레터: The Fugger Newsletter'를 보면 당시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코친(Cochin)에서 온 한 통의 편지는 후추를 사들여 유럽으로 운반하기 위해 5척의 선단을 편성하여 인도로 온 한 유럽 상인의 활동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후추의 매매는 이익이 많은 장사이다. 그러나 그 장사를 하려면 일에 대한 열의와 인내가 요청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상인은 후추 외에도 정향나무, 육두구, 밀가루, 육계피와 같은 약재 등을 싣고 유럽 시장으로 가져갔다.

그간 이와 같은 상업활동은 역사에 매우 미미한 흔적을 남겼을 뿐이며 당시의 생산품은 그 대부분이 농토가 없는 노예나 농노들 자신이 소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이 시대의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한 페르난도 브로델에 따르면 서쪽은 프랑스, 스페인에서 터키 국경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전역의 인구는 6000만에서 7000만 정도였으며 시장에 팔기 위해 내놓은 것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브로델은 '지중해 연안 지역의 전 생산물 중 60~70퍼센트까지는 결코 시장경제에 유입되는 일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도 그러했었다면 북유럽의 경우는 도저히 시장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것이 아니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메마른 토지와 긴 겨울 때문에 영세한 농민들이 잉여생산물을 얻어내기는 더욱 곤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3의 물결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업혁명 이전의 제1의 물결경제가 두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부문에서는 자가소비를 위해 생산활동이 이루어진다. 둘째 부문에서는 팔거나 교환하기 위해 생산활동을 하게 된다. 1의 물결경제에서는 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크고 후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작은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생산과 소비는 단순한 생활 유지 기능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양자가 완전히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이나 로마인, 중세 유럽인들은 생산과 소비를 구별하지 못했다. '소비자'라는 말조차 없었다.

1의 물결 시대를 통해서 시장경제에 생활의 터전을 두고 있었던 것은 전인구 중 극히 적은 부분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장과는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역사가 R. H. 토니는 "금전거래는 자연경제의 세계에서는 주변적이고 2차적인 행위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2의 물결은 이러한 상황을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그때까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하는 사람들과 자급자족의 사회를 대신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의 식량, 일용품, 서비스란 것이 모두 판매나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되고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2의 물결에 의해서 생산자 자신과 그 가족이 자가소비를 위해서만 물건을 만드는 경우는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이미 거의 자급자족으로 사는 사람이 없는 문명, 농민까지도 자급자족을 하지 않는 문명을 창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다른 사람이 생산한 식량이나 일용품, 서비스에 의존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요컨대 산업주의는 하나였던 생산과 소비를 분열시켜 생산자와 소비자로 갈라놓았다. 이렇게 해서 제1의 물결 시대의 생산과 소비가 융합된 경제는 양자가 분리된 제2의 물결경제로 변모되었다.

 

시장의 의미

생산과 소비의 분열은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짐나 그 의미는 오늘날까지도 잘 이해되지 않고 있다. 먼저 시장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기 이전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이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즉 경제가 시장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산업화도니 사회라면 자본주의 경제나 사회주의 경제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다.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순전히 자본주의적 생활실태만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어 이 말을 '이윤추구형 경제'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교환, 또는 시장은 이윤보다 먼저 발생된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이란 정확히 말해서 재화나 서비스가 마치 메시지처럼 각기 적당한 목적지로 송달되는 교환조직 또는 문자 그대로 교환대에 불과한 것으로서 자본주의적인 것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시장이라는 교환대는 이윤추구형의 산업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산업사회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요컨대 제2의 물결이 몰아닥쳐 생산의 목적이 자가소비에서 교환으로 바뀐 사회에서는 그 교환을 하는 기구가 존재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시장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시장이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경제사가 칼 폴라니는 초기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또는 종교 문화적인 목적에 종속되어 있던 시장이 산업사회가 되자 반대로 사회의 목적을 설정하는 존재로 변모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화폐경제 속에 짜여지게 되었다. 상업적인 가치가 중시되기에 이르고 시장규모로 측정할 수 있는 경제성장이 자본주의 국가이든 사회주의 국가이든 정부으 제일 목표가 된 것이다.

시장이 커지게 된 배경에는 원래 시장의 성격이 확대를 목표로 꾸준히 자신을 강화하여 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의 분업이 상업을 발달시켰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시장이라는 교환대의 존재 자체가 다시 노동의 세분화를 촉진하고 그 결과 생산성의 급상승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노동의 분화와 시장이 서로 상대방의 활동을 촉진하면서 확대되어 간다는 자체증폭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장의 폭발적인 확장은 생활 수준의 전례 없는 비약적 상승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치면에서는 제2의 물결에 휩싸인 여러 나라의 정부들이 생산과 소비의 분리로 생겨난 새로운 대립에 의해 차츰 분열이 심화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중시하는 계급투쟁이라는 사고방식은 고임금, 고이윤을 추구하는 생산자(노동과 경영자의 쌍방을 포함한다.)의 요구와 반대로 가격 인하를 추구하는 소비자(마찬가지로 노동자와 경영자 쌍방을 포함한다.)의 요구 사이에 생긴 보다 크고 보다 심각한 대립을 불명확하게 만들어 버렸다. 경제정책은 이 대립을 받침대로 해서 어느 쪽의 요구에 역점을 두느냐에 따라 시소와 같이 변동해 왔다.

미국에서의 소비자 운동의 증대, 폴란드에서의 공정가격인상에 반대하는 폭동, 물가와 임금정책을 둘러싸고 영국에서 쉬지 않고 계속되는 논쟁, 또 소련에 있어서의 중공업과 소비재 공업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끝없는 이데올로기 투쟁, 이런 것들은 모두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생산과 소비의 분리가 사회내부에서 일으킨 심각한 대립의 구체적인 예이다.

정치뿐 아니라 문화도 또한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 의해서 변모되었다. 왜냐하면 이 분리에 의해 금전만능, 이익추구형의 상업 본위적이고 극히 타산적인 문화가 역사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가족의 유대, 사랑, 우정, 이웃이나 지역공동체와의 유대는 모두 상업주의적 이기심에 물들어 타락해 버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당 선언'에서 '새로운 사회에는 노골적인 사리, 가차 없는 현금거래 이외에 사람과 사람을 묶어둘 고삐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과 사람의 인간적인 유대가 상실되었다는 지적은 옳았지만 마르크스가 그 책임을 자본주의에 떠넘긴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집필했을 당시에 관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산업사회는 자본주의 형태였다. 사회주의, 적어도 국가사회주의에 기반을 두고 산업사회가 성립된 지 반세기 이상이 경과된 현재 약탈적인 이윤추구, 상업적 부패, 인간관계를 차가운 경제 관계로의 격하 등은 결코 이윤추구를 노린 자본주의 사회만의 독점물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금전, 재화, 물질에 뒤따르는 끈질긴 관심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체제와는 관계없이 산업주의의 반영이다.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있는 사회에서는 시장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가 생활필수품을 얻기 위해 자기의 생산 기술보다는 시장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산업사회에서는 정치체제와는 관계없이 제품뿐 아니라 노동, 아이디어, 예술, 영혼까지도 모두 거래나 교환의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구미에는부정한 커미션을 착복하는 구매담당자가 있으며 소련에는 책을 출간해 주는 대신에 저자로부터 뇌물을 받는 편집자나 의뢰받은 일을 하기 위해 요금 이외의 보드카를 1병 요구하는 연관공이 있기도 하다. 프랑스나 영국, 미국에는 돈만을 위해서 일을 하는 작가나 화가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소련의 별장, 보너스, 새 자동차의 구입권과 같은 여러 가지 경제적 특전을 얻기 위해 창작상의 자유를 포기하는 작가나 화가, 극작가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패나 타락은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 수반하여 발생한 것이다. 소비자와 생산자를 다시 연결하여 생산된 상품을 소비자에게 도달케 하기 위한 교환대로서의 시장이 꼭 필요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시장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어떤 논법으로 그 권력을 정당화하려고 하는가는 별도로 하고도 지나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모든 산업사회, 즉 제2의 물결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이 생산과 소비의 분리는 인간성

에 관한 우리의 퍼스낼리티에 대한 전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행동을 일련의 '거래행위'로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우정, 혈연관계 혹은 부족의 장이나 영주에 대한충성에 바탕을 두는 사회를 대신하여 제2의 물결의 도래와 함께 실질적 또는 암묵적인 계약관계에 기반을 두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부부 사이까지도 계약 결혼이라는 말이 오르내리는 시대인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두 역할의 분리는 또한 이중적인 퍼스낼리티를 만들어 냈다. 동일인물이 생산자로서는 가정에서나 학교, 직장의 상사로부터도 개인적인 만족은 뒤로 미루고 규율이나 통제에 복종하며 모든 것에 소극적이고 순종하며 팀의 일원으로서 행동하도록 교육받는 한편, 소비자로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만족감을 충족하고 신중히 행동하기보다는 쾌락에 사로잡혀 규율 따위와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요구받았다. 특히 서구에서는 소비자에 대한 광고기술이 교묘해져서 소비자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충동 구매를 하게 하고, '먼저 하늘의 여행을 즐기십시오. 지불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라는 팬 아메리카의 광고처럼 경제의 수레바퀴를 계속 돌아가게 함으로써 국가발전에 공헌하자는 것이다.

 

남녀의 역할 분리

생산자와 소비자를 분리시킨 제2의 물결사회의 거대한 쐐기는 노동 또한 두 종류로 나누어 놓았다. 이 사실은 가정생활, 남녀의 역할 및 개인의 내면생활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산업사회에 가장 일반적인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의 하나는 남자는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하여 '객관적'이며 여자는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남녀의 차이에 관하여 이런견해에 진실의 핵심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생물학적 실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않는 쐐기에 의한 심리적인 영향일 것이다.

1의 물결사회에서는 노동의 대부분이 논밭이나 가정에서 이루어졌고 가족전체가 하나의 경제단위로서 일하며 생산된 물품은 대부분 촌락이나 장원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다. 촌락에서는 어디서나 자급자족이 일반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에 일정 지역의 농민이 많은 수확을 올리느냐 못 올리느냐는 다른 지역의 풍작, 흉작과는 관계가 없었다. 하나의 생산단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계절이나 질병이나 기호에 따라서 자기역할을 바꾸거나 타인과 일을 교환하면서 여러 종류의 일을 했다. 산업주의 이전의 분업은 매우 원시적인 것이었다. 1의 물결에 속하는 농업사회의 노동은 상호 간의 의존도가 낮은 것이 특징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기타 국가들에 밀려든 제2의 물결은 노동의 장소를 농토와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기고 노동의 상호의존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노동은 이제 집단작업이 되고 분업, 조정, 각종 기술의 통합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일이 잘되기 위해서는 각지에서 모인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중히 계획된 협동작업에 의존하도록 되었다. 대형 제철소나 유리공장에서 자동차공장에 필요한 제품이 원만히 흘러가지 않으면 경우게 따라서는 산업계나 지역경제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상호의존도가 높은 노동과 낮은 노동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분담, 책임, 또는 보수에 대한 격렬한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초기의 공장경영자는 종업원의 책임감 결여로 고민했다. 공장 전체의 능률에는 전연 관심이 없고 가장 분주한 시기에 낚시를 가거나 소란을 떨거나 술에 취해 나타나기가 보통이라고 불평했다. 사실 초기의 공장노동자 대부분은 농민 출신이고 상호의존도가 낮은 일만 해 왔기 때문에 생산공정 전체 속에서의 자기역할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여 자기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공장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능률저하나 경영의 파탄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임금이 비참할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일할 의욕이 희박했다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상호의존도가 높은 노동과 낮은 노동이라는 두 노동형태가 충돌한 결과 새로 태어난 노동형태의 우위는 명백해졌다. 생산이 차츰 대규모 공장과 사무실에 집중되기에 이르고 농촌인구는 흡수되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상호의존도가 높은 조직의 구성원으로 짜여졌다. 2의 물결이 만들어 낸 노동은 이렇게 해서 제1의 물결과 관련된 과거의 낡은 노동형태를 완전히 압도하고 말았다.

그러나 상호의존적인 노동이 자급자족의 노동으로 완전히 대치된 것은 아니었다. 낡은 노동형태가 완고하게 고수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가정이 그러한 곳이었다.

가정은 여전히 아기를 낳는다는 생물학적인 재생산을 하면서 육아와 문화의 전승에 종사하는 독립된 하나의 단위였다. 어는 가정이 출산이나 육아에 실패하거나 자녀를 장래의 노동형태에 잘 적응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반드시 이웃의 출산이나 육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가정내의 노동은 상호의존도가 낮은 활동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도 주부는 여전히 중요한 경제적 기능을 해왔다. 그것은 바로 출산과 육아, 기타 가사노동이다. 주부가 하는 일도 '생산'이었다. 그러나 그 생산은 자기의 가정을 위한 것이지 시장에 내놓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남편은 직접적인 경제활동에 진출하고 있었던 데 비해 주부들은 가정에 남아 간접적인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역사적으로 보다 진보된 형태의 노동을 분담하고 여자는 뒤쳐져서 더욱 뒤떨어진 형태의 노동을 맡았다. 남자는 이른바 미래를 향해 전진한 데 비해 여자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녀의 역할분담은 사람들의 인격과 내면생활에서도 분열을 야기시켰다. 공장이나 사무실은 본래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공장소이며 조정이나 통합을 필요로 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공장노동이나 사무노동이 일반화되자 객관적인 분석이나 객관적인 인간관계가 강조되게 되었다.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장차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역할을 수행하도록 길러지고 '개관적'인 사람이 되도록 기대되었다. 이에

비해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고립되어 출산, 육아 그 밖의 여러 가지 단조로운 가사를 분담하도록 훈련된 여자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성은 대부분의 경우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는 어렵다고 생각되어 왔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사고나 분석적 사고는 본시 객관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비교적 고립되기 쉬운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타인과 관계가 깊은 상호의존적 생산에 종사하는 여성이 여자답지 않고 냉철하고 거칠어졌다고 비난받는 일은 당연했다. 요컨대 그러한 여성은 '객관적'으로 되게 마련인 것이다.

남녀의 차이나 그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이 사실은 남자도 소비 활동을 하고 여자도 생산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생산에만 종사하고 여자는 소비만을 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에 의해서 더욱 강조되어 갔다. 즉 제2의 물결이 지구상을 휩쓸기 훨씬 이전부터 여성은 억압된 존재였지만 현대의 '남녀의 투쟁'은 거시적으로 보면 두 노동형태의 대립과 함께 시작되고 특히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경제는 남녀의 분열에도 박차를 가한 것이다.

여기까지 밝혀 온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쐐기가 박혀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자 그 뒤에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가 연이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시장이 형성되고 확대되어 생산자와 소비자를 결부시키는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인 대립이 생기고 남녀의 새로운 역할이 정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었다는 사실은 이 정도의 의미만으로는 그치지 않았다. 2의 물결사회는 모두 같은 방법으로 운영되고 특정한 기본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생산의 목적이 이윤이든 아니든, '생산수단'이 공공의 것이든 사유이든, 또 시장이 '자유경제'이든 '계획경제'이든,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이 점에 대해서는 똑같다.

생산이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교환을 위한 것이라면 생산물을 경제적인 교환대나 시장을 통하여 유통시키는 한 제2의 물결 특유의 원리는 준수되어야 했다. 일단 이러한 원칙의 존재가 확인되면 모든 산업사회의 숨겨진 역할관계가 밝혀지게 된다. 2의 물결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고방식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제2의 물결 문명의 기본법칙, 즉 사람들의 행동규범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4장 규범의 내용

 

어떠한 문명이든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그 문명 고유의 숨겨진 규범이 있다. 즉 그 문명의 모든 활동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일련의 법칙 혹은 원칙이 있다. 그것은 갖가지 사례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그 문명의 기본적인 구도와 같은 것이다. 산업주의가 지구상을 휩쓸면서 그때까지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 문명 특유의 기본적 구도가 차츰 밝혀지게 되었다. 그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진 6개의 원칙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6개 원칙이 오늘날까지 수백만이라는 인간의 행동을 규제해 왔다. 이 원칙은 앞 장에서 서술한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서 파생된 것이며 우리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성, 스포츠, 노동, 전쟁 등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학계나 기업계 또는 정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투쟁이 사실은 이 6개 원칙을 둘러싼 싸움이다. 2의 물결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 원칙들을 적용하여 자기들의 문명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 원칙을 고수하려 하고, 3의 물결의 사람들은 그것에 도전하여 원칙 자체에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서서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표준화(standardization)

2의 물결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들 원칙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표준화'이다. 산업사회가 무수한 규격품을 생산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장이 수행하는 역할이 커지면서 단순히 표준화되는 것은 코카콜라병, 백열전구, 자동차의 변속장치 같은 종류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간은 표준화의 원칙을 그 밖의 수많은 사물에 적용한 것이다. 이 사실의 중요성을 최초로 이해한 사람은 시어도어 베일이었다. 그는 금세기 초에 미국 전신전화회사(AT & T)를 설립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1860년대 말 철도 우편 사무원으로 일하던 베일은 우편물의 수신인이 동일한 경우라도 배달경로는 반드시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우편량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곤 했는데 수 주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으며 몇 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배달경로의 표준화를 도입하여 수신인이 동일한 편지는 모두 동일한 경로로 배달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써 우편사업의 혁명을 이룩했다. 그 뒤 그는 AT & T 회사를 창립했을 무렵에 이번에는 미국내의 가정용 전화기를 모두 흑색 규격품으로 통일하여 버렸다.

베일은 전화기를 비롯하여 모든 부품을 표준화했을 뿐 아니라 AT & T 회사의 업무절차, 관리체계까지 표준화했다. 그는 1908년에 몇몇의 중소전화회사들을 흡수합병했는데 그 정당성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표준화가 진행된 공장을 중앙에서 관리함으로써 교환업무, 법률관계 업무 분야에서 경비를 절감할 수 있고 아울러 전선, 전선관, 기타 시설의 건설비 절감도 기대할 수 있다. 더욱이 교환업무와 요금계산이 단일화되는 데서 파생되는 경비의 절감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2의 물결세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hardware)에 발맞추어 업무절차라든가 관리업무 등의 소프트웨어(software)를 모두 표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베일 이외에도 산업사회를 육성한 '위대한 표준화 추진자'는 수없이 많다. 또 하나의예는 미국의 발명가 프레데릭 윈슬로 테일러이다. 기계 수리공 출신의 개혁운동가인 그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종사하는 일의 절차를 표준화함으로써 노동을 '과학적'으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테일러는 각 작업을 수행하는 데는 한 가지 최선의 방법이 있고 그 일을 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도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의 순서나 도구는 그것에 맞추어 표준화해야 하며 또 그 일을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에 대해서도 표준화된 작업시간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철학으로 이론무장을 한 테일러는 세계의 지도적인 경영관리의 거물이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프로이트, 프랭클린 등과 나란히 존경을 받았다. '능률전문가', '성과급제도', '초고능률지도자'라는 말과 더불어 테일러주의를 예찬한 것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마지막까지 짜내는 데 열의를 보이던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의 경영자들뿐만은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똑같이 테일러에 열광했던 것이다. 레닌은 그의 방법을 사회주의적 생산에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러시아의 산업화를 제일의 목표로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이지만 표준화의 열성스런 신봉자라는 점에서는 남못지 않았다.

2의 물결사회에서는 노동의 표준화뿐만 아니라 고용절차까지도 점차 표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공무원의 경우 표준화된 시험에 의해서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확인하고 배제했다. 모든 산업을 통하여 임금 기준이 결정되고 임금 이외의 복리후생, 점심시간, 휴일, 불만처리절차 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표준화가 진행되었다. 젊은 층을 노동시장으로 내보내기 위해 교육관계자는 표준화된 교과과정(curriculum)을 세우게 되었다. 터먼이나 비네와 같은 사람들은 표준화된 지능 테스트 방법을 고안했다. 학교의 채점법, 입학시험 방법, 졸업자격에 관한 규정 등도 똑같이 표준화되었다. OX식 시험도 완전히 일반화되었다.

한편 대중매체도 표준화된 이미지를 보급시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광고, 같은 뉴스, 같은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다. 중앙정부에 의한 소수민족의 언어탄압에 매스컴의 영향도 가세되어 웨일스어나 알사스어와 같은 한 지역의 사투리가 그의 사라지거나 완전히 없어지기도 했다. 영어, 프랑스어라는 표준어가 비표준어를 밀어내 버렸다. 이 점은 러시아어도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여러 가지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지역이 어디를 가나 같은 주유소, 광고판, 흔해 빠진 주택 따위밖에 볼 수 없게 되고 지방색이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 '표준화'의 원칙은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이 점을 살펴보자. 산업 문명은 중량이나 길이 등 도량형의 표준화를 필요로 했다. 산업 시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도량형이 제각기 달랐다. 프랑스의 산업주의 시대가 개막된 대혁명 직후 각지에서 제각기 달랐던 도량형 대신에 새로이 미터법과 태양력을 채택하는 법률이 공포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2의 물결에 의해 통일된 도량형제도가 거의 전 세계에 보급된 것이다.

또 대량생산방식이 기계, 제품, 작업공저의 표준화를 필요로 하게 되자 확장을 계속하던 시장도 거기에 대응하여 화폐의 표준화와 가격의 표준화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보면 화폐는 국왕은 물론이고 은행이나 개인에 의해서도 발행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지방에 따라 19세기에 와서도 개인이 발행한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으며 캐나다에서는 1935년까지도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된 국가들은 차차 정부 이외의 화폐 발행을 금지시켜 단일화된 표준통화가 국내에 유통되도록 힘썼다.

더구나 산업화된 국가들에서도 19세기 이전은 팔 사람과 살 사람이 거래 때마다 마치고대 이집트 카이로의 바자(bazaar)처럼 가격을 둘러싸고 흥정하는 것이 거의 보통이었다. 1825년의 일이다. A. T. 스튜어트라는 북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청년이 뉴욕에 포목상을 내고 상품에 가격을 표시하여 고객과 경쟁업자들을 놀라게 했다. '정가상법'은 가격의 표준화뿐 아니라 이 상법 덕택에 스튜어트는 당시의 거상이 되었다. 동시에 그의 방식은 대량유통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주요한 장애 하나를 제거하게 된 것이다.

2의 물결의 선구적인 사상가들은 여러 가지 사고방식의 차이는 있었으나 표준화가 능률적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었다. 인간 생활의 여러 부문에서 제2의 물결은 가차 없이 표준화의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에 갖가지 특질과 차이점이 그 과정에서 획일화되고 있었다.

 

전문화(specialization)

2의 물결사회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또하나의 대원칙은 '전문화'이다. 2의 물결이 진행됨에 따라 언어, 여가, 생활양식의 분야에서 다양성이 사라질수록 노동의 영역에서는 다양성이 더욱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분업을 추진함으로써 제2의 물결은 계절 노동자와 같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농민을 대신해서 한정된 분야에서만 통용되는 전문가와 테일러의 방식대로 오직 한 가지 알만을 날마다 되풀이하는 노동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1720년 어느 영국인에 의해서 '동인도 무역의 권장'이라는 보고서가 공표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분업에 의해서 '노동시간과 노동 손실의 경감'이 가능해진다고 지적되어있다. 이어 1776년에는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공간하고 그는 그 서두에 자신을 가지고 이렇게 서술했다. '생산력이 가장 큰 진보는 분업이 가져다준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스미스는 이제 고전이 그의 저서에서 핀의 제조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자기 혼자서 필요한 모든 작업공정을 해내는 옛날식의 직공이 하루에 만드는 핀의 양은 고작해야 한 줌, 수로 따져 20개밖에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미스는 자기가 전에 방문한 일이 있는 '공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기서는 하나의 핀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공정을 18개 부문으로 나누고 10명의 전문직공을 고용했다. 오직 한 가지 작업을 맡은 직공도 있으며 두세 작업을 담당하는 직공도 있다. 이 방식에 따르면 하루에 10명이 48000, 1인당 4800개의 핀을 제조할 수 있다."

19세기경에는 더욱 많은 작업이 공장으로 옮겨지게 되고 이에 따라 핀 제조의 사례가 점차 대규모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전문화에 의한 인건비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산업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점은 고도로 전문화된 반복노동이 노동자의 인간성을 박탈했다는 것이었다.

1908년 헨리 포드가 포드 T형의 자동차제조를 개시했을 때에 1대의 자동차를 완성하는 공정은 18개 공정이 아닌 7882개 공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뒷날 자서전에서 포드는 이 7882개 공정으로 분할한 작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전공정 중에서 949개 공정은 '신체가 튼튼한 숙련공, 육체적으로 장애가 없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3338개의 공정은 '여성이나 어느 정도의 연령에 도달한 어린이'라도 작업이 가능하다." 그리고 포드의 냉정한 분석은 다시 계속된다. "670개 공정은 두 발이 없는 노동자라도 충분하여 2637개 공정은 다리가 하나뿐인 노동자라도 할 수 있다. 두 팔이 없는 직공이라도 할 수 있는 공정이 둘이 있고 715개 공정은 팔이 하나뿐인 직공이라도 된다. 장님 직공 10명으로 작업할 수 있는 공정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전문화된 노동은 종합적인 환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사람의 한 부분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포드의 방법은 극단적인 전문화가 인간을 짐승처럼 만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였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전문화를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사회주의 체제하의 산업사회에도 분명히 나타났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모든 제2의 물결 사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노동의 극단적인 전문화는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전문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소련, 폴란드, 동독, 헝가리와 같은 나라들의 공장도 미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전혀 다른 데가 없다. 미국 노동성의 통계에 따르면 1960년 현재 분류할 수 있는 직종은 2 만종에 이르고 있다.

더욱이 자본주의 산업국이나 사회주의 산업국에서도 전문직업화의 풍조가 고조되었다. 전문화된 노동에 종사하는 집단이 어느 분야의 난해한 지식을 독점하고 신참자를 배제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낼 때마다 그들은 정해 놓고 자기들의 일을 전문적 직업으로 만들어 버렸다. 2의 물결이 밀어닥침과 동시에 지식의 소유자와 그 지식을 구하는 고객 사이에 시장이 개입하게 되었다. 전자가 생산자이며 후자가 소비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제2의 물결사회는 건강이라는 것도 자기자신의 지식이나 주의의 결과로 누리게 되는 것(이것은 자체 소비의 생산이지만)이라기보다는 의사나 건강증진을 관장하는 의료관료기구라 할 수 있는 것에 의해 제공되는 하나의 제품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교육도 결국 학교라는 시설에서 교사라는 생산자에 의해 '생산'되고 학생이라는 소비자에 의해 '소비'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도선과의 사서에서 세일즈맨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직업집단이 자기들은 전문직업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고 자기들의 작업규준, 가격, 신규참가자의 가입조건을 결정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미국 연방무역위원회 의장 마이클 퍼처크는 "현대문화는 이제 우리 일반 시민을 '고객'이라 부르고 우리의 필요를 알려주는 전문직업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2의 물결사회에서는 정치적인 선동행위까지도 하나의 전문직업으로 생각되었다. 레닌이 대중은 전문가의 원조 없이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레닌에 따르면 '필요한 것은, 수가 한정되어 있던 직업적 혁명가를 대중으로까지 확대하여 그들을 직업적 혁명가로 탈바꿈시키고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2의 물결에 의해 자본가, 경영자, 교육자, 성직자 또는 정치가들에게 공통의 정신상태를 조장함으로써 분업을 더욱 더 세분화하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켰다. 1851년 세계대박람회가 크리스탈궁(Crystal Palace)에서 개최되었을 때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공은 '전문화야말로 문명을 추진하는 힘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 한 사람 그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표준화와 전문화는 평행으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화(synchronization)

생산과 소비 사이의 균열이 커짐에 따라 제2의 물결의 인간들은 시간에 대한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시장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유경제이든 계획경제이든 시간은 돈으로 환산된다. 값비싼 기계는 쉬게 할 수 없고 그 기계의 리듬에 따라 작동한다. 이렇게 해서 산업 문명의 제3원칙인 '동시화'가 발생한다.

초기의 사회들에서도 노동에 있어 시간은 중요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용사가 먹이를사냥하기 위해 전원이 일제히 작업에 임할 필요가 있었다. 어부가 배를 젓거나 그물을 잡아당길 때도 같았다. 오래전에 조지톰슨은 노동의 필요에 의해 얼마나 많은 노래가 생겼는가를 밝혔다. 배 젓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오우오프(O-op)'라는 단순한 두 음절의 소리에 의해서 구획되고 있었다. 두 음절째의 '오프'는 준비시간을 의미하고 있었다. 배를 끌어당기는 작업은 노를 젓는 일보다도 중노동이 의미하고 있었다. 그래서 톰슨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힘을 내는 방법을 정점으로 가져가기 위해 지르는 소리는 비교적 긴 간격을 두고 내게 된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의 배를 당기며 부르는 노래는 '홀리호헙(Ho-li-ho-hup)'하는 식으로 마지막 ''에서 힘을 결집할 때까지 준비 기간이 다소 길게 잡혀 있다."

2의 물결에 의해서 기계가 도입되고 노동가가 불리지 않게 되기까지 이러한 작업의동시화는 자연발생적이며 유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계절의 리듬, 생리적인 반응, 지구의 자전, 심장의 고동 등에서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제2의 물결사회에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기계의 고동에 맞추어 움직였다.

공업생산이 일반화되자 기계 그 자체의 비싼 비용과 노동의 높은 상호의존성이라는 두 요인에 의해서 동시화가 한층 정밀히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공장에서 어떤 작업공정을 담당하는 노동자 그룹의 작업이 지연되면 그다음 공정에서는 더욱 더 지연된다. 이렇게 해서 농경사회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시간 엄수라는 것이 사회적 필수사항이 되고 각종 시계가 보급되었다. 1790년대의 영구에서는 이미 시계가 진귀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P. 톰슨에 의하면 시계는 '산업혁명에 의해 더욱 대규모적인 노동의 동시화가 요구된 바로 그 시점에서 보급된 것'이라는 것이다.

산업문화 속에서 자란 어린이가 어릴 때부터 시계 보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학교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늦지 않도록 등교하는 습관을 익히는 것은 나중에 사이렌에 맞추어 정확히 공장이나 사무실에 출근시키기 위한 것이다. 일은 시간으로 계산되고 초 단위로 세밀히 측정되게 되었다.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가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근무시간의 원칙이 되었다.

동시화가 진행된 것은 직장생활만이 아니었다. 2의 물결사회에서는 정치적 배려와는 상관없이 사회생활을 모두 시계로 규제하고 기계의 요구에 맞추어지게 되었다. 여가 시간까지 미리 결정되고 있었다. 작업시간 속에 표준적인 휴가와 휴일, 휴식시간의 길이가 설정되었다.

아무튼 어린이의 취학과 졸업 연령이 통일되었다. 병원도 환자를 일제히 기상시켜 아침식사를 들게 한다. 이렇게 해서 러시 아워가 발생하고 교통체계가 위태로워진다. 방송국은 한정된 시간대에 오락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골든 아워(golden hour)가 생기게 된다. 원료제공자나 판매담당자의 형편에 따라 모든 일에 그 일 특유의 피크타임이나 성수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 공장의 생산 촉진계, 선표 작성자에서 교통순경, 나아가서는 표준작업시간의 연구자에 이르는 동시화에 대한 전문가들이 나타났다.

반대로 새로운 산업사회의 시간체계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리고 여기서는 남녀의 차이가 문제로 되었다. 2의 물결 밑에서 노동에 종사한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남자들인데 그들은 가장 시간의 움직임에 얽매였다.

2의 물결사회에서는 세상의 남편들이 언제나 이런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아내는 태연히 사라마을 기다리게 하고 시간 감각이 없다. 언제까지고 옷차려 입기에 정신을 빼앗겨 약속시간에 늘 늦는다고 투덜댄다. 대부분의 여성은 가사라는 상호의존성이 적은 일을 하기 때문에 남성만큼 기계적인 리듬에 영향받지 않고 일해 왔다. 이와같은 이유에서 도시인들은 시골사람을 느리고 믿을 수 없다고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늘 약속시간에 오지 않는다. 도대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이런 불만이 나오는 것도 원인을 따지면 고도로 상호의존이 필요한 제2의 물결의 노동과 논밭이나 집에서 이루어지는 제1의 물결의 노동에서 생기는 차이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제2의 물결이 지배하게 되자 가장 사사로운 일상적인 잔일까지도 일정한 시간체계 속에 짜여져 버렸다. 전체 문명이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의 원칙을 채용함에 따라 미국, 소련, 싱가폴, 스웨덴, 프랑스, 덴마트, 독일, 일본 등 모든 나라의 가정이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출근한다. 일하는 시간도 집에 돌아가는 시간도 같고 침실에 들어가서 잠이 드는 것도 같고 게다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일까지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비슷한 시간에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집중화(concentration)

시장의 등장과 함께 제2의 물결 문명의 또 다른 원칙 즉, '집중화'가 발생했다.

1의 물결사회는 갖가지 에너지원에 의존하여 성립된 사회였다. 그러나 제2의 물결사회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라는 고도로 집중화된 화석연료에 에너지원을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중화가 진행된 것은 에너지만이 아니었다. 2의 물결은 인간의 집중화를 촉진했다. 농촌에서 사람들을 끌어내어 거대한 도시로 이동시킨 것이다. 그뿐 아니라 노동까지 집중화했다. 1의 물결사회에서는 노동을 가정이나 마을, 들판, 등 어디서나 이루어졌던 데 비해 제2의 물결의 노동은 대부분이 수천명의 노동자가 한 지붕 밑에서 일하는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에너지나 노동만이 아니다. 영국의 사회과학잡지 '뉴 소사이어티(New Sociely)'에서 스탠리 코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는 다소의 예외는 있으나 가난한 사람은 자기 집에 있든가 친척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죄인은 벌금을 내게 되거나 곤장을 맞거나 혹은 이 시설에서 저 시설로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또 정신병자는 집에 갇히고 집이 가난한 경우에는 지역사회가 보살펴 주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와같은 집단은 특정한 장소에 집중하지 않고 지역사회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산업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19세기 초는 대투옥 시대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 시대에는 죄인은 일망타진되어 감옥에 감금되고 정신병자는 정신병원에, 어린이는 학교로 각각 끌려나오듯이 모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공장에 수용되었다.

집중화는 자본의 흐름에도 나타났다. 그 결과 제2의 물결 문명은 거대기업을 낳고 더 나아가 트러스트(trust)나 독점을 만들어 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제너럴모터스사, 포드사, 크라이슬러사라는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가 전 미국 자동차의 94퍼센트를 생산하고 있었다. 서독에서는 폴크스바겐사, 벤츠사, 오펠(GM), 포드 베르케사의 4개 회사가 91퍼센트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프랑스에서는 사실상 르노사, 시트로엠사, 생카사, 푸조사의 4개 회사에서 100퍼센트를, 이탈리아에서는 피아트사 한 곳에서 90퍼센트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알루미늄, 맥주, 담배, 아침 식사용 시품과 같은 상품의 80 퍼센트 이상이 각 분야의 4~5개 회사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었다. 서독에서는 플라스터보드(plasterboard)와 염료생산의 92 퍼센트, 사진필름의 98퍼센트, 산업용 재봉틀의 91퍼센트가 각 분야의 4개 회사 이내의 기업에 의해 독점 생산되었다. 이런 종류의 고도의 집중화가 진행된 기업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사회주의의 입장에 있는 경영자들도 생산의 집중화가 능률적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은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산업의 집중화가 진행되는 것을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필요한 과정으로서 환영하고 있었다.

완전히 집중화된 산업은 궁극적으로 국가가 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레닌은 "모든 시민은 단 하나의 거대한 기업합동체인 국가라는 기업의 노동자, 즉 국가의 종업원으로 변모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반세기 후에 소련의 경제학자 N. 렐류키나는 '보프로시 예코노미키: Voprosy Ekonomiki'지에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집중화된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라고 서술하기에 이르렀다.

2의 물결 문명에서 볼 수 있는 집중화의 원칙은 모스크바와 서방 여러 나라 사이에 가로놓인 온갖 이데올로기상의 대립을 초월하여 모든 분야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그것은 에너지원, 인구의 분포, 노동형태, 교육방법, 기업과 같은 경제조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극대화(maximization)

생산과 소비 사이에 균열이 생김으로써 제2의 물결사회에는 대개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극대화 편집광'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이 나타났다. 그것은 큰 것을 좋아하는 텍사스 인들처럼 쓸데없이 크기와 성장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공장의 작업시간이 길어져서 생산량이 많아지면 단위생산원가는 저렴해진다. 이 사고방식이 옳다고 한다면 같은 논법으로 규모를 크게 하면 절약을 꾀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결과 '크다'는 말이 '능률적'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고 '극대화'는 제2의 물결 시대를 해명하는 제5의 열쇠가 되었다.

국가나 도시는 저마다 세계 최고의 초고층 빌딩이 있다. 세계 최대의 댐이 있다고 자랑하게 되고 결국에는 세계 최대의 축소형 골프장이 있다고 서로 겨루는 사태까지 출현했다. 원래 큰 것은 성장이 가져다 준 결과였기 때문에 산업화가 진행된 국가의 대부분은 정부나 기업, 그밖의 모든 기관이 홀린듯이 성장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마쓰시타사에서는 매일 아침 종업원과 관리직이 다 같이 모여 사가를 합창한다.

새 일본의 건설에

힘을 합하고 마음을 합쳐

생산에 부지런히 힘쓰자.

세계 속으로 우리는 나아간다.

샘물이 콸콸

끊임없이 솟아나듯이

산업진흥 산업진흥

화친일치의 마쓰시타전기!

1960년이라는 해는 미국이 전통적 산업주의를 완성의 영역으로 제고시킴과 동시에 변혁을 강요하는 제3의 물결의 영향을 최초로 느낀 해이기도 했다. 이 해에 전미국 50위까지의 대기업은 평균 종업원 8만 명이라는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제너럴 모터스사만도 595000명의 종업원을 고용했으며 앞서 언급한 데오도어 베일이 창립한 공익사업 AT & T 회사는 남녀를 합하여 736000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 해에 미국의 평균 가족 수가 3.3명이었으므로 2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AT & T라는 한 기업이 지불하는 급여로 생활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다시 말하면 해밀턴이나 조지 워싱턴이 미국을 하나의 국가로 수립하려고 했던 시대의 미국 전인구 중 반수에 해당하는 집단이 AT & T 회사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1960년 이후에도 AT & T는 흡수합병을 계속하여 더욱 더 커졌다. 1970년에 이 회사는 956000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불과 1년 동안에 136000명을 증원했다.)

AT & T 회사의 예는 특수한 사례지만 미국인에게는 특히 큰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극대화 편집광은 미국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63년 프랑스에서는 숫자상으로는 전체 기업의 불과 0.2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1400개 기업이 전체 노동인구의 39퍼센트를 차지한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독, 영국, 그 밖의 나라에서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기업합병을 권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미국의 거대기업과의 경쟁력이 강화된다고 믿었기 때문

이다.

기업규모의 극대화는 단순히 이윤의 극대화만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마르크스는 '사업체의 규모확대'를 사업체의 '물질적 힘의 확장'과 관련시켜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거대기업, 트러스트, 기업합병은 대량생산의 기술을 최고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혁명 후에 레닌이 경제활동에 관하여 내린 지령은 러시아인의 경제생활을 정리 통합하여 기업체의 수를 최소한으로 정리하고 가급적 규모가 큰 생산단위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규모의 극대화를 더욱 추진하여 몇몇의 커다란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마크니코고르스크와 자포로즈스탈의 철강단지, 발하슈의 동제련소, 하르코프와 스탙린 그라드의 트랙터 공장이 그것이다. 스탈린은 곧잘 미국의 이런저런 공장설비의 규모를 묻고 그 이상의 큰 공장을 세우라고 명령했었다.

레온 M. 허먼박사는 그의 저서 "소비에트 경제 계획에 있어서의 거대신앙"에서 '소련 각지에서 지방정치가가 세계 최대의 사업을 유치하는 경쟁에 말려들고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미 1938년에 이같은 '거대광'에 대하여 경고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소련이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은 허먼 박사가 말하는 '거대화 중독증'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모에 대한 이러한 단순한 신앙은 '능률'이라는 것을 제2의 물결의 좁은 시야에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주의의 극대화 편집광은 공장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른바 GNP(국민총생산)를 통계지표로 삼는 사고방식에도 나타나 있다. GNP란 한 나라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총계한 것으로,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데이터가 들어 있다. 이를테면 GNP라는 관점에서 보는 한 경제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식료품이든 교육이나 건강에 관한 서비스이든 혹은 군수품이든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옥을 건축하는 데에 고용이 되든 반대로 집을 헐어버리는 데에 고용이 되든 그들이 받은 임금은 모두 GNP에 가산된다. 한쪽의 행위는 주택의 숫자를 늘이는 것에 기여하고 다른 한쪽은 그 숫자를 줄이는 것이지만 모두 생산으로 보는 것이다. GNP는 시장 활동이나 상품거래만을 계측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육아나 가사노동과 같은 급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 유지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모두 경시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러한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의 물결 시대의 각종 정부들은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든 GNP를 상승시키려고 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고도성장을 위해서는 생태계의 파괴나 사회적 파멸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풍조를 낳았다. 이같은 극대화 편집광적 원칙은 산업주의 시대 사람들의 정신에 깊이 침투하여 이 이상 더 합리적인 원칙은 없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극대화는 표준화, 전문화등 산업사회를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몇몇 원칙들과 더불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

산업화가 진행되자 모든 산업국가들은 중앙집권화를 예술작품의 영역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교회를 시작으로 하는 제1의 물결의 지배자도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는 방법은 잘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대처한 것은 현대와 비교하면 훨씬 단순한 사회였다. 또 오늘날의 산업사회를 밑바닥부터 중앙집권화된 사람에 비하면 제1의 물결의 지배자들은 미숙한 아마추어와 같은 존재였다.

복잡한 사회는 예외 없이 중앙집권적 기능과 탈중앙집권적 기능의 공존을 필요로 한다. 1의 물결경제는 기본적으로 지방분권적이며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지방색이 뚜렷한 경제였다. 이러한 특징을 갖춘 경제가 종합적 국민경제인 제2의 물결경제로 이행함에 따라 전연 새로운 권력의 중앙집권화 방법이 나타났다. 이 새로운 유형의 중앙집권화 방법은 개별기업과 산업, 그리고 전체경제의 차원에서 구체화되어 갔다.

이러한 이행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초기의 철도산업이다. 당시는 다른 산업과 비교하면 거대한 규모였다. 1850년의 미국에서 자본금 25만 달러 이상의 공장은 41개 업체에 불과했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뉴욕 센트럴 철도회사는 이미 1860년에 3000만 달러의 자본금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거대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영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의 철도회사 경영자는 오늘날로 말하면 우주계획관리자들처럼 새로운 경영기법을 개발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들은 기술, 운임, 운행시간을 표준화하고 수백 마일에 이르는 열차운행을 동시화하고 새로운 업무를 부서별로 전문화했다. 자본, 에너지, 인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철도망 규모의 극대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것을 잘 통합하기 위해 정보와 지휘계통의 중앙집권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냈다.

종업원은 '라인(line)''스태프(staff)'로 나뉘어졌다. 차량운행, 적재량, 파손, 화물분실, 수리, 운행거리 등에 관하여 자료의 제출이 요구되었다. 이들 모든 정보는 중앙집권화된 명령계통을 통하여 상부로 올라가 총지배인에게 도달하고 거기서 결정이 내려져서 라인을 통해 하부로 명령을 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철도산업은 기업사가 알프레드 챈들러가 지적했듯이 이윽고 다른 대규모 조직체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중앙집권적 경영은 제2의 물결의 여러 국가들에서 선진적이고 세련된 경영수법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정치 분야에서도 제2의 물결은 중앙집권화를 촉진시켰다. 미국에서는 이미 1780년대 후반에 탈중앙집권적인 '13개주 헌법'을 중앙집권적인 미합중국 헌법으로 만들려는 투쟁 속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분명히 싹트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1의 물결의 색채를 띤 지방세력은 중앙정부로 권력이 집중하는 데에 저항한 반면에 헤밀턴이 이끄는 제2의 물결의 상업세력은 그들의 기관지 "더 패더럴리스트: The Federalist" 등을 통하여 강력한 중앙정부는 군사, 외교상의 이유뿐 아니라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로서 1787년에 연방헌법이 태어났는데 그것은 교묘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1의 물결을 대표하는 세력도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에 이 헌법을 중요한 여러 권한을 중앙정부에 넘겨주지 않고 종전대로 각 주에 남겨 두었다. 지나치게 강력한 중앙정부의 출현을 막기 위해 입법, 행정, 사법의 3권분립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채택했다. 그러나 헌법 속에는 어떻게도 해석할 수 있는 탄력적인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그것에 의해 연방정부는 매사에 권한을 확장하고 있었다.

산업화로 인해 정치체제가 더욱 중앙집권화함에 따라 워싱턴의 연방정부가 갖는 권한과 책임은 점차 커지고 전국적 차원의 정책 결정은 더욱 더 중앙정부의 독점물로 되어 갔다. 한편 연방정부 내의 권력은 외화나 법원으로부터 3부 중에서도 가장 중앙집권 기능이 강한 행정부로 이행하게 되었다. 닉슨 행정부에 와서는 한때 열성스런 중앙집권주의자였던 역사학자 아더 슐레진저조차도 '황제와 같은 대통령의 지위'라고 공격할 정도가 되었다.

정치의 중앙집권화를 촉진하는 힘은 미국 이외의 나라들에서 더욱 강력히 적용했다. 스웨덴, 일본, 영국 혹은 프랑스 등의 제도는 얼핏 보기에도 미국보다 훨씬 중앙집권적이라는 사실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에도 미국보다 훨씬 중앙집권적이라는 사실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나 예수가 없었다면: Without Marx or Jesus"의 저자 장 프랑소와 르벨은 이 점에 관하여 정치적 항의에 대한 각국 정부의 반응방법의 차이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데모가 금지될 경우 누가 그것을 금지시켰느냐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다. 만일 그것이 정치문제에 관한 데모라면 이를 금지시킨 것은 중앙정부임이 틀림없다. 미국에서 데모가 금지되었다고 하자. 이럴 경우 미국인이 먼저 제기하는 의문은 누가 데모를 금지시켰느냐 하는 것이다.' 라고 르벨은 지적하고 잇다. 그는 미국의 경우 데모를 금지하는 세력은 자치권을 가진 지방행정 당국일 경우가 많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으로 정치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된 것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적 산업국가들이다. 1850년에 마르크스는 '국가에 의한 권력의 결정적 중앙집권화'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엥겔스도 해밀턴과 마찬가지로 탈중앙집권적 연방제에 의한 정치형태를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뒷날 소련은 산업화의 촉진에 엄중한 나머지 정치, 경제의 양면에서 가장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구조의 국가를 건설하게 되고 생산에 관한 결정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중앙 계획 당국의 손을 빌리게 되었다.

전에는 탈중앙집권적이었던 경제가 단계적으로 중앙집권화한 데에는 중앙은행이라는 그 명칭부터가 중앙집권적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는 기관의 출현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694년이라면 아직 산업화의 여명기로서 뉴코먼이 증기기관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무렵인데 이 해에 윌리엄 패터슨이 처음으로 잉글랜드 은행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 은행은 모든 제2의 물결에 속하는 여러 나라에서 중앙집권 기능을 갖는 같은 기관의 원형이 되었다. 통화와 신용의 중앙집권적 관리를 목적으로 한 중앙은행이라는 기관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 나라의 제2의 물결의 발전단계는 완전한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패터슨이 설립한 중앙은행은 정부발행의 국채를 팔고 정부보증의 통화를 발행했다. 한편 나중에는 다른 시중은행의 대출업무도 규제하게 되었다. 결국 이 은행은 통화공급의 중앙관리라는 오늘날의 모든 중앙은행이 갖는 본질적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1800년에는 이와같은 목적을 가진 프랑스 중앙은행이 설립되었고 1875년에는 독일 연방은행 라이히방크(Reichlsbank)가 설립되었다.

미국에서는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 간의 충돌이 헌법제정 직후에 중앙은행의 설립을 둘러싼 대규모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2의 물결정책의 대표적 주창자인 해밀턴은 영국식 중앙은행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남부와 아직 국경을 넓혀가고 있던 서부는 농업중심의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해밀턴에 반대했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 있던 북동부의 지지를 얻은 해밀터은 미국의 연방은행 설립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연방은행이 오늘날의 연방준비제도의 전신이다.

그 역할은 정부를 대신하여 시장활동의 수준과 속도를 규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은행들은 자본주의 경제 내부에 일정 한도의 비공식적인 단기계획을 도입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제2의 물결사회의 모든 동맥에 통화라는 혈액이 흐르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가 모두 중앙집권화된 통화공급 기관을 필요로 했고 그 결과 중앙은행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중앙은행과 중앙정부는 서로 손을 맞잡고 나아가게 되었다. 이렇듯 중앙집권화도 또한 제2의 물결 문명의 지배적 원리의 하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6가지 지도원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2의 물결국가들로부터 한결같이 작용하고 있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이루고 있다.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 '집중화', '극대화', '중앙집권화'라는 6가지 원리들은 자본주의 국가건 사회주의 국가건 모든 산업사회에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6가지 원리들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결정적인 분리와 시장기능의 계속적 확대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원리들은 상화간에 상승작용을 계속하였는데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비인간적인 관료제도였다.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거대하고 경직되고 강력한 관료조직이 출현하여 각 개인은 거대조직이 지배하는 카프카(Kafka)적 세계에서 갈길을 몰라 방황을 계속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이 거대조직들에 짓눌리고 압도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의 근원을 제2의 물결 문명을 프로그램화한 숨겨진 규범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규범을 형성하고 있는 6가지 원리들은 제2의 물결 문명에 뚜렷한 특징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곧 밝혀지듯이 이 6가지 원리들은 어느 것이나 제3의 물결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위기는 기업, 금융, 노사관계, 정부, 교육, 언론 등의 분야에서 오늘날도 여전히 이 원리들을 자기의 행동 원리로 적용하고 있는 제2의 물결사회의 엘리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새로 태어난 문명은 낡은 문명의 모든 기득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규칙을 만드는 일에 익숙해 있던 산업사회의 엘리트들은 앞으로 전개될 격동 속에서 과거의 봉건귀족이 겪었던 것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엘리트들 중 일부는 낙오될 것이고 일부는 권좌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일부는 무능력자로 전락하거나 구차스런 체면유지에 급급하게 될 것이다. 다만 지성과 적응력을 갖춘 일부 엘리트들만이 변신하여 제3의 물결 문명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3의 물결 문명이 지배하는 가까운 장래에는 누가 지배자의 자리에 앉게 될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의 사회를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5장 권력의 전문가

 

'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가?' 이 의문은 제2의 물결사회에 특유한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이런 의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배자가 국왕이든 무당이든 장군이든 태양신이나 성자이든 민중은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누군인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밭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부가 고개를 들어 바라볼 때면 멀리 지평선 위로 화려한 궁전이나 사원이 솟아 있었다. 정치학자나 언론인에게 특별히 권력의 정체에 관하여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고 할 것까지도 없이 지배자가 누구인가는 만인의 눈에 명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의 물결이 밀어닥침에 따라 도처에 새로운 권력이 대두하였다. 그것은 막연한 정체불명의 권력이었다. 지배자는 이제 이름없는 '그들'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란 대체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

 

통합자

산업주의는 이미 보아왔듯이 사회를 공장, 교회, 학교, 노동조합, 형무소, 병원과 같은 서로 맞물린 부품으로 분해시켰다. 교회와 국가가 개인 사이에 있었던 명령계통을 단절시켰다. 포괄적인 지식은 여러 전문분야로 나뉘어졌다. 일은 세밀한 작업과정으로 분해되었다. 내 가족은 분열하여 핵가족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산업주의는 공동체의 생활과 문화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군가가 이들 부품을 모아 새로운 모양으로 만들 필요가 생겼다. 이같은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전문가집단이 탄생했다. 그들의 주요임무는 '통합하는 일'이었다. 경영자, 행정관, 대표, 조정자, 사장, 부사장, 관료, 중역 등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집단이 모든 기업, 정부기관, 그리고 사회의 각계각층에 출현하여 이윽고 그 존재는 사회에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이들이 통합자(integrator)들이었다.

통합자들은 사람들의 역할을 결정하고 업무를 배정했다. 누구에게 어느 정도의 보수를 지불하는가를 결정했다. 또한 계획을 입안하고 판단기준을 정하며 사람들에게 자격을 부여하거나 철회했다. 통합자들은 생산, 유통, 수송, 통신 등을 서로 연결시키고 여러 조직들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요컨대 산산이 흩어진 사회를 다시 재조립한 것이 그들이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제2의 물결체제는 도저히 운영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마르크스는 기계와 기술,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은 노동이란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노동자는 스트라이크에 의해서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고 고용주로부터 기계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생산수단을 소유하면 노동자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는 마르크스의 예상을 뒤엎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적절히 지적한 노동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현실에서는 체제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새로운 인간집단에 더욱 큰 권력이 집중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지배자의 지위에 오른 것은 자본가도 아니며 노동자도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를 불문하고 정상의 자리에 앉은 것이 이들 통합자들이었다.

권력의 원천은 '생산수단'의 소유가 아니고 '통합수단'의 장악이었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깊이 고찰해 보자.

기업계에서 초기의 통합자들은 공장소유자, 상점 경영자, 제분소나 철공소주인과 같은사람들이었다. 이들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몇몇 사람들의 조수들과 함께 다수의 미숙련공의 노동을 조정하고 나아가서는 기업을 커다란 경제의 흐름 속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소유자=통합자'였으므로 마르크스가 이 양자를 혼동하여 소유라는 것을크게 강조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생산양식이 다 복잡해지고 분업도 더 한층 전문화되어 감에 따라 고용자와 노동 간의 중간적인 존재로서 놀랄 만큼 다양한 관리자와 전문가들이 기업에서 속속 출현하게 되었다. 문서업무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윽고 대기업에서는 사장이든 대주주이든 그 어떤 개인도 기업 전체의 운영을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기업소유자의 의사결정이 체제의 조정역할을 맡은 전문가집단에 의해 형성되고, 결국 그들에게 통제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소유에 의존하지 않고 통합수단을 관리함으로써 권력을 손아귀에 쥐는 새로운 경영 엘리트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경영권의 권력이 증대함에 따라 주주들의 힘은 후퇴해 갔다. 회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친족끼리 소유하고 있던 주식은 다수의 분산된 주주들에게 매각되어 이 주주들은 회사의 실무에 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주주들은 회사의 일상업무뿐 아니라 회사의 장기목표나 경영전략이라는 것까지 고용된 경영자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론상으로는 회사의 소유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이사회조차도 만족스런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또 투자 면에서도 개인의 직접투자를 대신해서 연금이라든가 투자신탁 또는 은행의 신탁부문 등을 통한 간접투자가 활발하게 되자 기업의 실제 소유자는 더욱 기업경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들 통합자들의 새로운 권한을 가장 명백히 설명해 준 사람은 미국의 전 재무장관 마이클 블루멘덜이다. 블루멘델은 재무장관이 되기 전에 벤딕스사의 사장이었는데 벤딕스사의 소유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중요한 것은 회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지배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사장으로서 완전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다. 다음 주에 주주총회가 있는데 이 97퍼센트의 주주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소유하고 있는 주식은 불과 8000주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회사의 지배권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바란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기업이라는 이 거대한 동물을 지배하여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의 경영방침은 고용된 경영자나 남의 돈을 투자하는 자금 관리자들에 의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노동자는 차지하고 회사의 실제소유자(주주)들 조차도 정책을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통합자들이 이 일을 떠맡았다.

이와같은 현상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발생했다. 이미 1921년에 레닌은 자기 손으로만든 소련의 관료제도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었다. 트로츠키는 망명 중인 1930년에 소련에는 이미 5600만 명의 관리자계급이 '생산 노동에는 직접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관리하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를 하며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사면하고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은 국가이지만 '국가를 소유하는 것은 관료이다.'라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밀로반 질라스가 그의 저서 "새로운 계급"에서 유고슬라비아의 경영 엘리트 집단의 권력증대를 비판하고 있다. 티토 대통령은 질라스를 투옥했으나 대통령 자신도 '기술자에 의한 지배와 관료에 의한 지배는 노동자계급의 적이다.'라고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모택동 시대의 중국에서도 경영주의에 의한 지배를 미연에 막는 일이 언제나 중심과제였다.

이와같이 자본주의 사회뿐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통합자들이 효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의 존재 없이는 사회체제 각 부분들이 통합적인 기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사회라는 이름의 '기계'는 통합자 없이는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통합의 원동력

한 기업 또는 전체 산업을 통합한다고 해서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산업사회는 노동조합이나 동업자조합에서 교회, 학교, 진료소, 오락단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단체나 조직을 만들어 냈다. 그 때문에 법률을 만들 필요가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영역, 사회영역, 기술영역이라는 새 영역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2의 물결 문명을 통합해야 한다는 강력한 필요성 때문에 사회체제를 통합하는 엔진이라 할 수 있는 최대의 통합자인 '거대한 정부'가 출현했다. 2의 물결사회마다 모두가 거대한 정부를 가지게 된 것은 이 사회체제가 통합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부의 축소를 주장하는 정치가들도 나타나긴 했으나 이들도 일단 정권을 잡고 나면 행정부의 축소는 커녕 반대로 관청의 수를 늘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제2의 물결 정부의 첫째 목적이 산업 문명을 건설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와같은 언행의 불일치는 일어날 만한 일임을 납득할 수 있다. 산업 문명의 확립과 유지라는 중요한 목표 앞에 사소한 입장의 차이는 해소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문제에서는 서로 논쟁을 벌이는 정당이나 정치가들도 이 점에 관해서는 암암리에 서로 양해하고 있다. 비록 주의주장을 달리하더라도 거대한 정부를 만드는 일은 모든 정당과 정치가의 양해사항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산업사회에서는 통합이라는 중요한 과업이 행정부에 완전히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정치평론가 클레이튼 프리치도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 연방정부는 심지어 최근 3기에 걸친 공화장 정권하에서도 끊임없이 확대일로를 걸어왔다. 프리치에 의하면 '그 까닭은 지극히 단순하다. 중대한 악영향을 남기지 않고 연방정부를 해체하는 일이란 요술사 후다니의 솜씨를 가지고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자유시장론자들은 정부의 기업활동에 대한 간섭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민간기업에만 맡겨 두었더라면 산업화가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고 과연 산업화가 진행되었는지조차도 의문이다. 정부는 철도건설을 촉진하고 항만, 도로, 운하,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우편제도를 확립하고 전신, 전화, 방송시설을 개설하고 그것들을 운용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상거래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시장의 표준화를 시행했다. 자국의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거나 관세를 부과했다. 산업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농민을 농촌에서 몰아냈다. 가끔 군사 채널을 통해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고 첨단기술개발을 지원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정부는 어느 누구도 해낼 수 없었고 또 하고자 하지도 않았던 커다란 통합역할을 맡아온 것이다.

정부는 거대한 산업화의 추진자였다. 정부는 강제집행력과 조세권을 가지고 민간기업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민간기업이 들어갈 수 없는 분야 또는 재산성이 없는 분야라는 체제 내의 공백 지대를 진출하여 산업화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말하자면 정부는 '예상적 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대중교육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장래의 산업노동력으로서 기대되는 청소년을 교육시키고 결과적으로 산업계를 원조함과 아울러 핵가족이라는 생활양식의 보급에도 기여했다. 어린이의 교육을 비롯하여 전통적 역할의 부담으로부터 가정을 해방시켜 줌으로써 정부는 가족 구조가 공장체제의 요구에 적응하도록 촉진했다. 이와같이 정부는 여러 차원에 걸쳐 복잡하게 뒤얽힌 제2의 물결 문명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통합의 중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당연히 정부의 본질이나 형태도 변화했다. 예를 들면대통령이나 수상은 옛날과 같이 창조적인 정치지도자나 사회지도자가 아닌 관리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인격과 행동 면에서도 대기업의 사장과 거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 닉슨, 카터, 대처, 브레즈네프, 지스카르 데스탱, 오히라 등과 같은 선진공업국의 수뇌들은 의무적으로 민주주의라든가 사회정의를 말하지만 그 직무에 앉으면 실제로는 능률적으로 행정을 한다는 정도의 약속밖에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산업사회에는 전체를 일관하는 한 가지 동일한 패턴이 생겼다고 해도 될 것이다. 대기업 또는 생산조직과 거대한 행정기구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생산수단을 탈취한 노동자 계급'도 아니며 아담스미스 학파가 거대한 '권력을 유지하는 자본가계급'도 아니다. 전혀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이 세력은 노동자나 자본가에게도 소속되지 않고 그 양자에 대항하는 세력이다. 권력 전문가들이 '통합수단'을 먼저 수중에 넣고 그것을 사용하여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을 지배한 것이다. 이로써 제2의 물결사회는 통합자들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권력 구조의 피라밋

권력 전문가들은 엘리트들과 준엘리트들로 구성되었다. 각 기업과 정부의 각 부처에도 즉시 독자적인 체제가 이루어지고 그 안에 지배층, 다시 말해서 강력한 '그들'이 형성되었다.

스포츠, 종교, 교육 등 각계에는 고유한 권력 피라밋이 있으며 과학계의 지배층, 국방관계의 유력자, 문화계의 지배층 등이 차례로 형성된다. 2의 물결 문명의 권력은 이와같이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의 전문분야의 엘리트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분야의 스페셜라이즈드 엘리트(specialized elite)를 통합하고 있는 것은 제너널리스트 엘리트(generalist elite)이다. 이 집단은 모든 전문분야에 걸쳐 구성원을 가진 다재다능한 조직 밖의 집단이다. 소련이나 동구의 공산당이 그 예로 항공분야로부터 음악, 철강업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에 당원이 있다. 공산당원은 준엘리트들 사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정보연락망으로 기능하고 있다. 공산당은 정보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전문적 준엘리트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이처럼 명확한 형태는 아니지만 각종 민간위원회나 임원회에 참여하는 주요기업인이나 변호사가 비슷한 역할을 해왔다. 어쨌든 명백한 것은 제2의 물결국가에는 관료라든가 이사라는 이름의 통합전문가집단이 존재하고 그것을 다재다능한 통합 제너럴리스트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슈퍼 엘리트

이 피라밋의 더 높은 상층부에서는 투자의 배분을 담당하는 '슈퍼 엘리트'들에 의한 통합이 이루어졌다. 금융계나 산업계, 국방성이나 소련의 경제계획 관료들 등 산업사회 내의 주요한 투자 배분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그 밑에 있는 통합자들이 기능할 테두리를 정한다. 미국의 미니에폴리스에서나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도 대규모적인 투자결정이 내려지면 그 결정은 장애의 선택범위를 제한하게 된다. 자원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므로 일단 투자하여 벳세머 용광로나 석유분해 증류 공장, 조립공장과 같은 것을 건설해 버리면 감가상각이 끝날 때까지 해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설비 투자에 의해서 일단 매개변수가 고정되면 그것이 장래의 경영자나 통합자의 행동을 규정하게 된다. 모든 산업사회에서는 이러한 투자 결정의 조종간을 장악하는 익명의 결정권자집단이 슈퍼 엘리트층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제2의 물결사회 어디에서나 서로 비슷한 엘리트 구조가 생겼다. 사회위기나 정치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지방이나 나라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반드시 이와같은 은밀한 권력의 위계질서가 생겨났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바뀌고 슬로건, 정당명, 후보자가 그때마다 달라졌고 혁명의 불길은 타올랐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훌륭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는 얼굴 모습도 바뀌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권력 구조 그 자체는 전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3세기에 걸쳐 권력의 장벽을 타파하고 사회정의와 정치적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고자 하는 반란이나 개혁이 거듭 여러 나라에서 시도되었다. 한동안은 자유에 대한 희망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도 있었다. 때로는 혁명가들이 한 체제를 전복하는 데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최종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반역자들이 자기들 혁명의 기치 아래 준엘리트, 엘리트, 슈퍼 엘리트들로 이루어진 유사한 구조를 재구축했던 것이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통합구조와 그것을 지배하는 권력 전문가 집단이 제2의 물결 문명에 있어서 공장, 화석연료, 핵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산업주의와 그것이 약속한 완전한 민주주의는 사실상 양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운동 등에 의해서 산업국가들은 자유시장 경제와 중앙계획경제 사이를 오락가락할 때가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바뀌거나 또는 그 반대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표범은 그 반점무늬를 바꿀 수 없는 법'이라는 속담대로 산업국가의 본질은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강력한 통합구조 없이는 산업국가는 기능할 수가 없었다.

변혁의 제3의 물결이 경영관리층 세력의 보루에 거세게 밀어닥치고 있는 오늘날 이 권력체계에도 최초의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경영 참여, 의사결정의 분담, 노동자, 소비자, 시민에 의한 관리, 예상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장 진보된 산업국가에서는 과거보다도 위계적 색채가 덜하고 애드호크러시 성격이 강한 조직구성이 시작되고 있다. 권력의 분산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관리자들은 더욱 더 하부로부터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정치체제의 격변을 예고하는 초기적 경고에 불과하다.

현재 이미 제2의 물결 문명의 산업사회를 공략하고 있는 제3의 물결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튼 사회적, 정치적 혁신을 초래할 것이다. 현재의 낡고 억압적이고 뒤떨어진 통합구조들을 대신하여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새로운 제도가 태어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기 전에 무너져 가는 체제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뒤떨어진 정치체제를 X광선으로 투시하여 이 체제가 제2의 물결 문명에 얼마나 적합한가 산업사회의 질서와 엘리트에게 얼마나 봉사해 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이 체제가 이미 부적당하고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떠오를 것이다.

 

 

6장 숨겨진 청사진

 

프랑스인에게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운동의 풍경만큼 이해하기 곤란한 것도 없다. 핫도그를 먹여주기도 하고 어깨를 두들겨 주며 갓난아기에게까지도 키스를 해준다. 그런가 하면 아주 조심스럽게 출마를 포기했다가는 예비 선거에 참가하고 전당대회를 열고 이어 열광적인 자금 모금 운동,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의 유세, 연설회, 그리고 TV광고로 이어진다. 이들 모두가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다. 한편 미국인들은 또 프랑스인들의 지도자 선택방법을 납득하기가 힘들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영국식의 구태의연한 선거, 20개도 넘는 정당이 제멋대로 후보자를 내세우는 네덜란드의 선거, 몇몇의 후보자에게 순위를 매기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선택투표제도, 그리고 일본의 돌려먹기식 파벌협상 등이다.

이 모든 정치 제도들은 나라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더군다나 소련이나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당 독재하에서의 선거, 다시 말해 가짜 선거제도쯤 되면 더욱 이해하기 곤란하다. 특히 정치제도에 관한 한 산업국가들 사이에서도 같은 형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의 물결 시대를 개척한 혁명가는 프랑스, 미국, 소련, 일본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제1의 물결 시대의 엘리트를 가까스로 권력의 자리로부터 끌어내렸다.

그리고 나서 헌법을 제정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거의 무에서부터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창조의 의지를 불타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말하고 새로운 정치구조에 대해 논의를 했다. 도처에서 대의제도의 형태에 대해서 논란이 전개되었다. 누가 누구를 대표할 것인가? 의원에 선발된다면 의회에서의 투료는 선거민의 뜻에 구속당하는 것인가?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투표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임기는 긴 것이 좋은가, 짧은 것이 좋은가? 정당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새로운 정치구조는 어느 나라에서나 이같은 의견의 대립과 토론을 통해 등장했다. 이들 정치구조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모두가 낡은 제1의 물결의 사고방식과 산업화 시대의 도래를 가져온 새로운 사상들의 결합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업의 시대가 수천년이나 계속되었으므로 제1의 물결 시대의 정치체제의 창설자들은 토지 대신에 노동력, 자본, 에너지, 원자재 같은 것을 기반으로 한 다른 종류의 경제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토지를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이 여러 가지 선거제도 속에 남아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미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은 지금도 사회계층, 직업, 인종, 성별, 혹은 생활양식별 집단을 대표한다기보다는 일정한 넓이의 토지에 사는 주민들을 대표하는 의원으로서 선출된다.

1의 물결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이동성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산업화 시대의 정치체제의 설계자가 한평생을 똑같은 장소에 계속해서 사는 사람들을 상정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각국의 선거법에는 거주요건이 일반화되어 있다.

1의 물결 시대는 생활의 속도가 완만했다. 통신수단도 매우 원시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회의'의 뉴스가 뉴욕에 도달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걸렸었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의 연설내용이 미국 전역에 전해지기까지는 여러 주일 내지 여러 달의 시간을 필요로 했었다. 1865년에 링컨이 암살되던 때에도 런던의 시민이 이 소식을 알게 된 것은 12일이나 지난 뒤였다. 세상의 움직임이 느리다고 하는 암묵의 양해를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의회나 영국의 국회와 같은 대표기관은 심의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천천히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의 물결 시대의 선거민은 거의가 무지하고 문맹이었다. 따라서 일반 사회에서는 의원이라면 당연히 선거민들보다도 현명하고 훌륭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교육정도가 높은 계층으로부터 선출된 의원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였다.

그러나 제2의 물결과 함께 나타난 혁명가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제1의 물결사회의 상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래에도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구조물은 당시의 몇몇 최신 기술부문의 개념들을 반영하고 있다.

 

기계광

산업화 시대의 초기에는 기업가, 지식인, 혁명가들은 모두가 기계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증기기관, 시계, 방직기, 펌프, 피스톤 등에 매혹되어 그 당시의 여러 가지 간단한 기계기술에 기초한 수많은 유사개념들을 무수히 만들어 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든가, 토머스 제퍼슨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정치의 개혁자인 동시에 과학자 겸 발명가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때는 뉴턴의 위대한 발견에 의해서 새로운 문화가 꽃피우려 하던 격동의 시대였었다. 뉴턴은 천체를 관측한 결과 우주 전체가 거대한 시계처럼 정확한 기계적 질서에 의해서 운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이기도 했던 라 메트리는 1748년에 "인간 기계론"을 발표하여 인간 자체가 기계라고 선언했다. 그는 경제도 하나의 체계이며 더욱이 그 체계는 '여러 면에서 기계와 매우 흡사하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제4 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 헌법을 둘러싼 논의를 설명하면서 '체계''재형성'이라든가 정치 권력의 '구조'의 변경이라든가, 일련의 여과 과정을 통한 공직자선출 등의 종종 기계로부터 발상된 표현을 사용했다. 미국 헌법 자체도 거대한 시계의 내부처럼 여러 가지 부품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으로 성립되고 있었다. 3대 대통령 토머슨 제퍼슨도 '정부 기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미국의 정치사상은 그 후에도 계속 회전조절용 바퀴, 체인, 기어, 견제와 균형 등과 같은 표현을 반영했다. 8대 대통령 마틴 바 뷰렌은 '정치기구'를 만들어 냈으며 뉴욕시에서는 실제로 '트위드 기구'라 불리는 1인 지배의 기반을 만들고 뉴저지주에서는 프랭크 헤이그가 '헤이그 기구'를 통해서 제멋대로 지배를 했다.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역대 정치가는 정치적 '청사진'을 만들고, '선거공작'을 하고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연방의회나 주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크로머 경이 '기계의 여러 가지 부품처럼 조화있게 활동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제국 정부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기계적 발상법은 비단 자본주의에만 국한된 산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레닌은 "국가란 자본가가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한 기관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의 사회적 기계장치의 모든 바퀴와 나사가 일체가 되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혁명 정당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기계에 관한 용어를 사용해 논하고 있다. 혁명 정당을 강력한 '장치'에 비유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계도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정지하고 있다. 대중운동은 이 죽은 것과 같은 관성 상태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증기의 힘으로 이 관성 상태를 타파하고 회전조절용 바퀴를 돌려야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적 발상에 완전히 젖어 기계의 힘과 능률을 맹신하게 된 제2의 물결사회의 창시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사회주의 사회의 많은 면에서 초기 산업기계의 특징을 닮은 정치제도를 만들어 냈던 것은 당연했었다.

 

대의정치

그들이 꾸준히 쌓아 올린 제2의 물결의 정치구조는 대의제도의 개념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각 나라에 따라 특정한 부품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부품들은 일종의 보편적 대의 장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부품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 선거권이라는 무기를 가진 개인들.

2. 표를 모으는 정당들.

3. 당선되면 자동적으로 유권자들의 대표가 되는 후보자들.

4. 의원들이 투표로서 법령을 만들어 내는 의회들(영국형 의회, 일본형 국회, 미국형 의회, 독일형 의회, 기타 미국형 주의회 등).

5. 정책이라는 형태의 원자재를 입법기관에 공급하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법률을 집행하는 행정부들(대통령, 수상 등).

정치 세계에서의 유권자들은 뉴턴 물리학에 있어서의 '원자'에 해당한다. 정당에 의해서 모아지는 표는 대의정치 체계의 요체로서 기능했다. 당은 여러 형태의 표밭에서 표를 모아 그것을 선거라는 집계기에 투입한다. 이 기계에서 집계된 표의 수는 당의 세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국민의 뜻을 나타내 준다. 비록 그 숫자가 정부라는 기관에 원동력을 제공하는 기본 연료로 간주되었다.

이 대의장치의 여러 가지 부품들은 나라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교묘하게 조작되었다. 20세 이상의 성인들 누구에게나 투표권이 주어지는 나라도 있으며 백인 남성 이외에는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선거라는 절차가 실제로도 독재정치를 위한 겉치레인 경우가 있으며 선출된 공직자가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도 있다. 정당제도에 대해서 양당제인 나라도 있고 다수정당제인 나라도 있으며 일당독재의 나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이나 역사적으로 명백한 하나의 유형이 있다. 아무리 여러 가지 부품을 수정하여 배치하더라도 공식 정치기구를 구성하는 데 사용한 기본장치는 모든 산업국가들에서 동일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든가 의회제는 결국 특권층의 위장물에 불과하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흔히 자본주의에 대하여 공격한다. 그러한 정치기관은 대부분의 경우에 엘리트에 의해 조작되고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운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데 그러면서도 모든 사회주의 산업국가들은 서둘러서 이와 유사한 의회제도(물론 허울뿐인 것이지만)을 도입했다.

공장이 모든 산업사회의 기술체계 그 자체의 상징이 된 것처럼, 대의제도 하의 정부를 갖는 것은 (그 실태야 어떻든 간에) '선진국'의 상징으로 되었다. 실제 여러 후진국들조차도 식민지 건설에 앞장서 온 제국주의 국가의 압력에 의해서이건 맹목적인 모방을 통해서이건 서로 다투어 이같은 공식기구를 설치하여 선진국들과 똑같은 보편적 대의장치를 사용하게 되었다.

 

범세계적 법률공장

민주주의의 기관들이 국가적 차원에서만 설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기관들은 주, 군 등 지방수준에서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시의회나 읍의회 등의 시, , 면의 수준에서도 생겨났다. 오늘날 미국에는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공직자의 수는 약 50만 명에 달한다. 도시에서만도 25869개의 자치단체가 있으며, 제각기 선거제도와 대의기관 및 선거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도시 이외의 지역에서도 수천 개의 대의기관들이 서로 법석대면서 제각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 전체로 본다면 그 수는 더욱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스위스의 주, 프랑스의 군, 영국의 주, 캐나다의 주, 폴란드의 지방구, 소련의 공화국, 싱가포르, 이스라엘의 항만도시 하이파, 오사카나 오슬로에서 입후보자가 출마하여 요술처럼 '의원'으로 변신한 기관들이 각종 법과 시행령, 규칙, 규정의 제조에 힘쓰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각 개인과 각 투표권이 독립된 원자로 비유되는 단위인 것처럼 전국이나 주 단위, , 면 단위의 정치적 단위들도 각각 독립된 원자적 단위로서 취급되었다. 각각의 정치 단위는 신중하게 정해진 관할권, 독자적인 권한 그리고 독자적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었다. 이 단위들은 국가 단위에서 주나 시, , 면과 같은 지방 단위에 이르기까지, 계층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로 질서정연하게 조직화되어 왔다. 그러나 산업주의가 성숙하여 경제가 점차적으로 통합되어 감에 따라 이들 정치 단위의 정책 결정은 그 관할구역 밖에까지 영향을 미쳐 다른 정치조직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일본의 국회가 섬유산업에 관한 어떤 결정을 내리면 그것은 곧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고용문제나 시카고의 복지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의 하원이 외국산 자동차의 수입제한을 결정하면 나고야나 트리노의 지방자치단체는 곧장 대응책의 검토를 재촉받게 된다. 예전 같으면 정치가는 분명히 정해져 있는 자신의 관할권 내의 일에만 정신을 쏟고 그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내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외관상 주권이나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전 세계의 수만 개의 정치조직들이 20세기 중엽이 되자 경제의 각종 회로를 통해 단단히 맺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급격히 늘어난 여행, 이민, 통신 등을 통해 정치기관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활성화하고 자극하게 되었다.

대의정치의 여러 구성 요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전 세계의 수천 개의 대의기관들은 이러하여 점차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초대형기구, 즉 범세계적 법률공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누가 어떻게 이 초대형기구의 조종간을 조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선거는 확인의식

2의 물결의 혁명가들이 품었던 인류해방의 꿈에서 탄생한 대의정치 제도는 종전의 권력체계에 비교한다면 매우 비약적인 진보였다. 이것은 나름대로 증기기관이나 비행기에 못지않은 정치기술의 승리였다.

대의 정치제도의 도입에 의해서 세습왕조 없이도 질서정연한 정권 이양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회의 상하 계층 간에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통로가 트였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집단 간의 의견 차이를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토대가 쌓여졌다.

다수결 원칙과 11 표 원칙에 입각한 이 제도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 점유가들로부터 혜택을 얻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따라서 대의 정치제도가 전 세계에 확산되는 것은 인간존중의 시대를 개척하는 돌파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제도는 처음부터 당초의 약속과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상상을 크게 해보아도 이 제도는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었든 간에 인민에 의해 장악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준엘리트, 엘리트, 슈퍼 엘리트로 구성된 산업국가들의 기본적 권력 구조는 어느 나라에서나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사실 관리자인 엘리트는 감독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공식적 대의기관을 통해 더욱 더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핵심적 통합수단의 열쇠를 장악하게 되었다.

누가 당선하는가에는 전혀 관계없이 선거 그 자체는 엘리트들을 위한 강력한 문화적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가 한 표를 던질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선거는 평등에 관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정책적 선택이 조직적이고 기계처럼 체계적이고, 그리고 은연중에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으며 이 안도감이 투표를 대중의 확인의식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선거는 일반 시민이 역시 권력의 소유자임을 보증함으로써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지도자를 그 자리로부터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이러한 확인의식(선거)이 선거의 실제 결과보다 훨씬 중요한 경우가 많았다.

정치의 조직은 장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통합기능을 수행하는 엘리트는 정당의 수를 규제하기도 하고 선거자격을 조작함으로써 조금씩 다른 정치기관의 프로그램을 편성한 것이다. 그러나 선거라는 으식 그 자체가 희극적인 요소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어는 나라에서나 받아들여졌다. 소련과 동유럽의 선거가 항상 99퍼센트 내지 100퍼센트라는 놀라운 지지율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의 사회에서도 자유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유권자를 안심시키는 확인의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항의를 해소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대의 정치체제는 민주적 개혁의 추진자나 급진론자의 의도와는 달리 항상 통합기능을 수행하는 엘리트의 손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좌우되었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제2의 물결정치체제가 갖는 기계적 본질을 간과해 버리고 있는 설명이 대부분이다.

2의 물결 정치제제를 정치학자의 눈이 아닌 엔지니어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간과해 온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산업 엔지니어들은 기계를 기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즉 단속적으로 작동하는 일괄처리 기계와 연속적으로 작동하는 연속 흐름 기계이다. 전자의 예로서는 흔히 쓰는 동력 펀칭 프레스기와 같은 것이 있다. 노동자는 기껏해야 한 번에 두세 장의 금속판을 천공기 위에 올려 놓고 필요한 형으로 구멍을 뚫는다. 한 공정이 끝나면 다음 재료가 올 때까지 기계는 멈춘다. 후자의 예로는 정유시설을 들 수 있다. 정유장치는 일단 작동하기 시작하면 쉬는 일이 없이 계속 작동한다. 석유는 온종일 송유관과 저장 탱크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간다.

범세계적인 법률공장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투표가 단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일괄처리공장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중은 정해진 시기에 후보자들 가운데서 대표를 선택할 수가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계'는 다시 정지상태에 들어간다.

선거는 단속적으로 실시되지만 정치 활동은 연속적이어서 조직화된 세력, 정치 브로커, 압력단체의 활동이 끊일 새가 없다. 각 기업체와 정부의 각 부처로부터 파견된 로비스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지식인들로 구성된 각종 위원회에서 증언하는가 하면 심의회의 위원으로서 활약한다. 회합이나 만찬에 참석하고 워싱턴에서는 칵테일로 건배를 하고 모스크바에서는 보드카로 축배를 든다. 이처럼 항상 정보를 교환하면서 24시간 정책 결정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엘리트들은 요컨대 선거라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단속적인 기계와 병행하여 또 하나의 연속적인 기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이 강력한 기계는 단속적인 기계와 더불어 어떤 때는 이것을 보완하고 또 어떤 때는 완전히 역방향으로 작동한다. 단속적인 기계와 연속적인 기계를 함께 고찰할 때 비로소 범세계적 법률공장에서 국가의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선거에 의한 대의정치라는 게임에서 국민은 기껏해야 몇 년 만에 한번 정부나 그 정책에 찬부를 표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권력 전문가들은 이러한 정책결정의 과정에 연속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의제도의 원리 자체에 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보다 강력한 장치가 교묘하게 조립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인을 대표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을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노동자들이 최초로 노조결성권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괴로움을 받고 음모죄로 기소를 당하거나, 회사의 스파이에게 미행당하거나 경찰이나 고용된 폭력배에 의해 구타당했던 것이다. 노동자는 아웃사이더였으며, 체제 내에 노동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이 없었거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단 노동조합이 결성되면 새로운 통합자 집단이 생겨나게 된다.

노동귀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노동자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기업 및 정부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조정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죽은 미국 노동총동맹 산업별 조합회의(AFLCIO: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의 회장 조지 미니나, 프랑스의 CGT(노동총동맹) 회장 조르쥬 세기 같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무슨 말을 하건 간에 통합 엘리트의 중요한 일원이 되어 버렸다. 소련이나 동유럽의 노동조합위원장들도 노동자대표라는 자리는 허울좋은 간판일 뿐 권력 전문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낙선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선거구민에게 항상 성실하게 행동하고 선거구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원칙 아래 움직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만으로써 의원들이 권력 구조에 휩쓸려 버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례를 들자면 한이 없겠지만 전 세계의 도처에서 의원들을 선출하는 사람들과 의원에 선출되는 사람들 간의 단절은 확대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대의 정치제도는 요컨대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개발된 산업사회의 기술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대의 정치제도는 대의제의 유사한 제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까지의 설명을 정리해 본다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현대문명의 중요한 지주는 석탄이나 석유 등의 화석연료, 공장생산, 핵가족, 기업, 대중교육, 대중매체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은 점점 확대되는 생산과 소비의 분열에 기초한 것으로 이 모두가 전체를 통합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일련의 엘리트들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이러한 체제하에서는 대의 정치정치제도가 정치 세계에 있어서의 공장과도 같은 구실을 했다. 이 공장이 생산해 온 것은 집단적 통합결정이었다. 대부분의 공장과 마찬가지로 대의 정치체제도 상부에서 관리했다. 그것은 또 대부분의 공장들처럼 나날이 시대에 뒤떨어져 가고 있다. 3의 물결이 고조됨에 따라서 그 물결의 희생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의 물결 시대의 정치구조가 날이 갈수록 시대에 뒤떨어져 오늘날 새로운 사회의 복잡한 문제에 대응해 나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원인의 일단은 다음 장에서 고찰하려는 제2의 물결 시대의 또 하나의 중요한 제도인 국민국가에서 찾을 수가 있게 된다.

 

 

7장 광란하는 국가

 

아바코(Abaco)섬은 인구 6500명의 플로리다 앞바다에 있는 바하마 군도의 하나이다. 수년 전 미국인 실업가, 투기 상인, 정부의 규제를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자유 기업론자' 그리고 흑인 첩보원과 영국 상원의원이 포함된 1개 집단이 이제야말로 아바코는 독립을 선언해야 할 때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혁명이 성공하는 날에는 1인당 1에이커의 토지를 무상으로 주겠다고 약소하며 바하마 정부의 지배를 배제하고 섬을 점령하려고 기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섬 주민들에게 1에이커씩 주더라도 또한 속셈이 시커먼 부동산업자나 투자자들에게 25만 에이커 이상의 토지가 남았을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꿈은 아바코섬에 세금이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여 사회주의를 두려워하는 돈 많은 실업가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하는 데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섬 주민들은 바하마 정부의 속박을 떨쳐버릴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신생국가건설계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국제연합(UN)이라는 국가 조합에 152개국이 가입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러한 독립운동의 희극도 아주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바코섬의 6500명의 주민은 괴짜인 실업가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간에 과연 그들은 국가를 만들 수 있었을까? 싱가포르가 인구 230만 명으로 한 국가를 형성한다면 왜 뉴욕은 800만의 인구가 있는데도 국가가 아니란 말인가? 뉴욕의 브루클린 구는 제트폭격기만 갖추면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제3의 물결이 제2의 물결 문명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 질문은 결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제2의 물결 문명의 기초의 하나가 다름 아닌 이 국민국가였기 때문이다.

3의 물결이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의 쌍방에 충격을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민족주의의 문제를 둘러싼 애매한 논의의 결말을 보지 않는 한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는 사건을 이해할 수도 없고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 간의 충돌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 갈아타기

2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기 전에는 세계 대부분의 지역들은 아직 국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세계는 부족, 씨족, 후작령, 공국, 왕국 등 잡다하고 다소간 지역적 성격이 강한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국왕이나 속국의 군주는 아주 작은 권력밖에 갖지 못했었다.'라고 정치학자인 파이너 교수는 쓰고 있다. 국경은 분명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권한도 확실치 않았다. 국가권력도 아직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지방에 따라 엉망이었다. 파이너 교수에 따르면 어떤 마을에서는 풍차의 사용료를 징수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다른 마을에서는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정도였다. 개인이 여러 지역에 재산을 갖고 있다면 여러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장 위대한 황제일지라도 잡동사니와 같은 자그마한 지방자치의 공동사회를 통치했을 따름이다.

정치적 지배력은 아직도 장소에 따라 한결같지는 않았다. '유럽을 여행할 때는 말을 갈아타듯이 법률까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볼테르의 불평은 이 상태를 단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물론 이 풍자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었다. 말을 빈번히 갈아 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수송력과 통신수단이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결국 군주가 제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 지배력이 실제적으로 강력하게 미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국가의 권위는 약화되고 있었다.

정치적 통합 없이는 경제적 통합도 불가능했다. 값비싸고 새로운 제2의 물결기술은 지방시장의 범위를 초월한 보다 커다란 시장을 상대로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재산이 맞았다. 그러나 기업가가 자기들의 소속한 공동체를 벗어나 한 걸음 내디디자 여러 가지 관세, 세금, 노동법규가 있고 또 통화도 달라 있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넓은 지역을 상대로 하는 매매가 가능할 리 없다. 새로운 기술이 이익을 낳기 위해서는 각지의 경제가 전국적인 하나의 국민경제로 통합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전국적인 분업이 성립되고 상품과 자본을 위해 전국적인 시장이 열리지 않으면 안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결국 정치적으로도 전국적인 통합이 필요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제2의 물결의 경제단위의 규모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제2의 물결의 정치적 단위도 그 규모를 확대해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2의 물결사회가 전국적인 경제권을 확립하자 대중의 의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1의 물결사회의 소규모 지역적 생산은 지방색이 강한 인간을 길러냈다. 그들 대부분은 오로지 이웃이나 자기네들의 부락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극히 소수의 귀족이나 승려, 아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상인 그리고 몇몇의 예술가, 학자, 용병 등 이러한 사람들만이 마을 외부에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제2의 물결이 도래하자 보다 넓은 세계에 이해관계를 갖는 인간들이 증가해 갔다. 증기나 석탄을 기초로 하는 기술과 전기의 출현으로 보다 많은 제품생산이 가능해진 프랑크푸르트의 의류, 제네바의 시계, 맨체스터의 직물제조업자들은 지방의 한정된 시장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또 먼 곳으로부터의 원료를 구해 와야만 했다. 공장노동자들도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금융시장의 변동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그들의 일자리가 먼 곳의 시장 사정에 의해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심리적인 지평선이 조금씩 확대되어 나갔다. 새로운 대중매체는 먼 지역으로부터의 정보나 이미지를 증가시켰다. 이러한 변화가 자극이 되어 지역편중의 사고방식은 후퇴하고 국민의식이 싹텄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를 걸쳐 계속 고조되어 오던 국가에 대한 열광은 세계의 산업화 지역을 휩쓸어 나갔다. 독일의 소규모이고 다양하고 서로가 반목시하고 있던 350개 미니 국가들이 연합하여 오직 하나의 국민적인 시장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조국 독일'이다. 사보이가, 교황, 오스트리아의 함스부르크가, 스페인의 부르봉가 등에 의해서 분할통치되었던 이탈리아도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헝가리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프랑스인 등 모든 민족이 갑자기 자기들의 동포에 대해 신기하게도 서로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시인들은 민족정신을 노래했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국민적 영웅이나 문학 그리고 민속을 재발견했다. 작곡가들은 민족에 대한 찬가를 작곡했다. 그러한 현상들은 산업화가 그것을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일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산업화 시대가 통합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국민국가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된다. 국가는 슈펭글러가 말하는 '정신적인 통일체'도 아니고 또한 '정신적 공동체' 혹은 '사회적 정신'도 아니다. 또 국가는 르낭의 말처럼 '풍요로운 기억의 유산'도 아니고 오르테가 가세트가 주장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공유의 이미지'도 아니다.

우리가 근대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제2의 물결에 특유한 하나의 현상으로서 단일의 통합경제 위에 위치해 있거나 또는 융합되어 있는 단일의 통합경제는 제아무리 모여들더라도 국가가 될 수는 없다. 가령 지역경제의 엉성한 집적 위에 공고한 통일적 정치체제가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근대국가는 아니다. 통일된 정치체제와 통일된 경제, 이 둘의 융합이야말로 근대국가를 탄생시킨 결정적 요인이다.

미국, 프랑스, 독일, 그 밖의 유럽의 나라들에서 산업혁명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는 정치적 통합의 수준을 제2의 물결이 가져온 급속한 경제적 통합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가 뚜렷한 특징을 가진 국가 단위들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어떤 신비주의적 영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황금의 못

각국의 정부는 시장을 넓히고 정치적 권위를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언어의 차이나 문화적, 사회적, 지리적, 전략적인 장벽 등 외곽적 한계에 부딪쳤다. 또한 하나의 정치구조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영역을 아무리 확장하려 해도 수송력이나 통신수단의 정비 유무, 에너지 공급이나 기술의 생산성의 조화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제약으로 작용했다. 나아가서 회계절차, 예산관리, 관리기법 등이 어느 정도 세련되어 있는가에 따라서도 정치적 통합 및 범위가 한정되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정부나 기업의 통합 엘리트들은 규모의 확대를 목표로 싸웠던 것이다. 지배하는 지역이 확대될수록 또 경제적 시장의 범위가 커질수록 그들의 부와 권력은 증대했다. 각국이 경제적, 정치적 변경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에는 그 나라 고유의 한계뿐만 아니라 경쟁 국가들과도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통합 엘리트들은 고도의 기술을 이용했다. 그들이 달려든 것은 예를 들면 19세기의 '우주개발 경쟁', 즉 철도의 건설이었다.

18259월 영국에서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철도가 부설되었다.

유럽대륙에서는 벨기에가 18355월 브뤼셀과 말리느 사이를 개통시켰다. 그해 9월 독일이 바바리아 지방에서 뉴렘베르크와 푸르트 사이에, 다음 해 프랑스에서 파리와 생제르맹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384월 차르콩 셀로와 페테르스부르크 간에 철도가 부설되었다. 그뒤 30여년에 걸쳐 각국에서는 차례차례 철도를 건설하여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여 나갔다.

프랑스의 역사가 샤를르 모라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1830년에 거의 통일되어 있던 나라들은 철도의 출현으로 그 통합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던 나라들도 이 새로운 철도의 건설없이는 통일이 어려운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자기 나름대로 철도를 건설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나라들은 1세기가 넘게 유럽의 정치적 경계선을 정해 준 이 수송체계에 의해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철도가 건설되기 전부터 서둘러 존립권을 선언하고 나섰다.' 미국에서는 역사가 마즐리시가 말하는 것처럼 정부는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 간의 연대의 밧줄을 더욱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광대한 토지를 민간 철도회사에 무상으로 불하했다.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의 개통을 기념해 박은 황금의 못은 참으로 미국이 전 대륙적인 규모로 통합된 상징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전국적인 시장의 문이 개방된 것을 의미한 것이다. 이로써 전국에 대한 정부의 지배권은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인 것이 되었다.

이제 워싱턴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미국 대륙 어디에나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켜 그 권위에 종속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각지에서 차례차례로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강력한 통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세계의 지도는 빨강, 분홍, 오렌지, 노랑, 녹색 등에 의해서 정연하고도 중복됨이 없이 나뉘어 채색되었다. 그 결과 국민국가라는 체제는 제2의 물결 문명을 지탱하는 핵심적 구조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이 국민국가의 밑바탕에는 통합을 촉진시키려는 산업주의의 일상적인 요청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통합은 국민국가 각각의 국경에서 멈추지 않았다. 산업 문명은 그 강대한 힘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산업 문명은 세계의 다른 지역을 화폐경제로 끌어들이고 이 화폐경제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통제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제3의 물결이 창조하는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얼서도 매우 중요하다.

 

 

8장 제국주의로의 길

 

어떤 문명도 다른 문명과는 분쟁없이 확장될 수는 없다. 2의 물결 문명은 제1의 물결세계에 대해 대규모적인 공격을 퍼붓고 그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백만이라는 인간 그리고 나중에는 수십억이라는 인간을 마음대로 지배했다.

물론 제2의 물결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인 16세기부터 유럽의 통치자들은 이미 거대한 식민지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성직자와 정복자, 프랑스의 사냥꾼, 영국, 독일, 포르투칼, 이타리아의 탐험가 등이 지구를 횡단하면서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학살하고 광대한 토지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본국의 왕에게 공물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그다음에 일어난 사태에 비하면 그것은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이들 초기의 탐험가나 정복자가 본국으로 보냈던 금은보화는 실제로는 개인적인 약탈물이었다. 이러한 보물들은 전쟁자금으로 쓰이기도 했고 사적인 재산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겨울을 지내기 위한 궁전이나 무위도식하는 궁중인의 허식에 가득 찬 개인생활을 채색하는 자금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물들은 아직 본질적으로 자급자족의 단계에 있던 식민주의 국가의 경제와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화폐제도와 시장경제와는 전혀 관계없이 햇볕에 그을은 스페인의 대저나 영국의 짙은 안개가 무상한 광야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농노들은 수출할 만한 것이라곤 거의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그 지방에서 소비하는 것조차도 충분히 재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다른 나라들에서 훔쳐오거나 구입해 온 원료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농민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외정복의 성과는 농민으로서 살고 있던 일반 대중과는 상관없이 지배계급이나 도시민을 풍요하게 해줄 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1의 물결 시대의 제국주의는 아직 한 나라의 경제 속에 충분히 통합되지 못하고 있었다.

2의 물결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이러한 좀도둑 행위를 커다란 사업으로 변모시켰다. 소제국주의를 대제국주의로 바꾼 것이다.

이리하여 생겨난 새로운 제국주의는 금과 에메랄드, 향료, 비단 등을 몇 상자 가져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대량의 초석, 면화, 야자유, 주식, 고무, 보크사이트, 텡스텐 등을 여러 척의 배에다 실어 자기 나라로 운반해 가는 본격적인 제국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이 제국주의는 콩고강 유역에 구리광산을 파고 아라비아에 석유 굴착 장치를 만들었다. 또한 식민지로부터 원료를 빼내다가 그것을 가공한 다음 완성된 제품을 식민지에 되팔아 거대한 이익을 올렸다. 요컨대 이 새로운 제국주의는 이제 한 나라의 경제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산업국가의 기본적 경제구조에 통합하여 수백만이라는 노동자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일자리가 생겼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새로운 원료에 대한 수요뿐 아니라 점차로 식량의 수요도 증가했다 제2의 물결국가들은 제조업을 중시하여 농업노동력을 공장으로 이동시킴으로써 보다 많은 식료품을 해외로부터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중국, 아프리카, 서인도제국, 중앙아메리카 등으로부터 쇠고기, 양고기, 곡물, 커피, 홍차, 설탕 등이 수입되었다.

한편 대량생산이 진전됨에 따라 새로운 산업 엘리트들은 보다 큰 시장과 새로운 투자의 장소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유럽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뻔뻔스럽게 서슴지 않고 말했다. '제국은 무역에 의해 성립된다.'라고 영국의 정치가 조지프 체임벌린은 선언했다. 프랑스 수상 패리는 더욱 노골적으로 프랑스에 필요한 것은 '산업과 수출품과 자본의 확장이다.'라고 말했다.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 동요되고 만성적인 실업에 직면한 유럽 지도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식민지의 확대가 중단되면 실업으로 인해 자국에 무력혁명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대제국주의의 뿌리는 경제적 요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략상의 배려, 종교적 열정, 이상주의, 모험심 이것을 모두가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백인 또는 유럽인이 다른 인종보다 뛰어나다는 맹목적인 억지와 더불어 인종차별정책도 관계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적 정복을 신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인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이라는 영국의 작가 키플링의 표현은 기독교와 '문명'을 보급시키려는 유럽인의 사명관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 문명이란 제2의 물결 문명을 의미한다.

식민지주의자들은 제1의 물결 문명이 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한 것이더라도 이를 뒤떨어지고 미발달된 문명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농업 종사자는 유치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특히 유색인종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런 사람들은 '약삭빠르고 부정직'한 데다 '근면하지 못하고, 삶의 가치를 모른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제2의 물결세력은 가는 곳마다 그들을 방해하는 자들을 전멸시키는 행위를 쉽사리 정당화할 수 있었다.

"기관총의 사회사: The Social History of the Machine Gun"에서 저자인 존 엘리스는 19세기에 돤성된 이 새로운 치명적인 무기가 우선 맨 먼저 체계적으로 사용된 대상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이었지 결코 유럽의 백인이 아니었다고 쓰고 있다.

대등한 인간을 기관총으로 죽이는 것은 스포츠맨 정신에 위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인을 사살하는 것은 전쟁이라기보다 오히려 사냥과 같은 것으로서 또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엘리스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남로디지아의 마타벨이나 탁발 고행승 그리고 티베트인을 총으로 해치우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군사작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소 위험성이 있는 사냥놀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서 나일강을 건넌 곳에 있는 옴두르만이나는 도시에서 이 최신 기술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898년에 스스로 마디(Mahdi, 세상의 종말 전에 나타난다고 하는 구세주)라 칭하고 수단 독립 정부를 수립하고 있던 무하마드 아메드가 거느린 회교승들이 6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에 의해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목격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구세주 마디의 강림 신앙과 위대한 지도자의 최후였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처형이었다.' 이 단 한 번의 교전에서 영국군의 사망자는 28명인데 비해 회교승의 사망자는 실로 11000명에 달했다. 영국군 한 사람에 대해 회교도는 392명이나 죽은 것이다.

엘리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싸움은 영국 정신의 승리와 백인들의 우월성을 보여준 또 하나의 예가 되었다.'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등이 전 세계로 뻗어가도록 밀어준 인종차별주의적 사고방식과 종교적 정당화의 배후에는 하나의 냉엄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제2의 물결 문명이 고립해서는 존속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값싼 자원이라는 일종의 보조금과 같은 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었다.

2의 물결 문명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러한 보조금을 빨아들이는 흡수관의 역할을 하는 통합된 세계시장이었다.

 

앞뜰의 가스펌프

통합된 하나의 세계시장을 창조하려는 움직임의 토대에 있던 사고방식은 영국의 경제학자 리카도의 '분업은 공장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국가들 사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말에 가장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리카도는 이렇게 지적했다.

"만일 영국인이 섬유산업을, 포르투칼 사람이 포도주 제조를 전문화한다면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있다. 각국이 제작기 유리한 산업에 종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제적 분업'이 성립되고 각 나라에 전문화된 역할을 배정함으로써 모든 나라들이 윤택해질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그 의미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 동안 확고한 정설로 굳어져 왔다. 어떤 경제권에서 분업이 통합의 필요성을 증대시켜 통합 엘리트를 생성시켰듯이 국제적 분업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범세계적 규모의 통합을 요구하여 범세계적 엘리트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2의 물결에 속하는 소수의 국가들로 이들 나라들이 모든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다른 대다수의 나라들을 교대로 지배해 왔다.

하나의 통합된 세계시장을 창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성공을 거둔 것은 유럽이 한 차례 제2의 물결에 휩쓸리자 세계무역이 놀랄 만한 성장을 보인 것만으로도 명백하다. 1750년부터 1914년 사이에 세계무역의 거래액은 7억 달러에서 거의 400억 달러로 50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리카도의 말이 옳았다고 한다면 이러한 세계무역의 이익은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거래 참여 국가에 골고루 배분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문화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나라에게 이익이 된다.'라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신념은 공정한 경쟁이라고 하는 하나의 환상 위에 성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학설은 노동과 자원의 완전한 효율적인 이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정치력이나 군사력의 위협을 받지 않는 공명정대한 거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대등하게 맞서는 계약당사자 간의 객관적 거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리카도의 이론은 현실 그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제2의 물결에 속하는 상인과 제1의 물결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의 설탕이나 구리, 코코아 등 그 밖의 자원에 대한 거래 교섭은 전혀 일방적인 경우가 많았다. 테이블 한쪽에는 돈 계산에 빈틈이 없는 유럽인 또는 미국인이 대기업과 은행의 방대한 금융조직, 압도적인 테크놀로지, 강력한 정부를 배경으로 앉아 있으며, 또 한편에는 아직 대부분이 화폐제도조차 갖추지 못하고 소규모 농업이나 향토 공예에 경제적 기반을 둔 사람들을 거느린 지방 영주나 족장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강력한 기계력의 진보된 문명을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자기들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당장이라도 총검이나 기관총으로 그 우월성을 증명항 수 있다는 태도로 앉아 있었다. 그에 대해 또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무력이라고는 고작 활이나 창밖에 갖추지 못한 아직 국민국가 이전의 조그만 부족국가나 속국의 대표에 불과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후진국의 통치자나 기업인은 서구인들에게 간단히 돈으로 매수당해 버리고 뇌물이나 개인적인 이익에 눈이 어두워 원주민의 노동력 착취를 방관하고, 저항운동을 억제하거나 법률을 외국인에게 유리하도록 바꿔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식민지화해 버리면 제국주의자들은 원료의 가격을 자국의 기업인들에게 유리하도록 정하고 경쟁국의 무역관계자가 가격을 인상할 수 없도록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상황 아래에서 산업국가들에게서는 당연히 자유경쟁의 시장가격보다 싼 원료나 에너지 자원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2의 물결국가들이 필요로 한 원료의 대부분은 그 소유자인 제1의 물결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거의 무가치했다. 아프리카의 농민에게는 크롬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으며, 아랍의 족장은 자신들이 사는 사막의 모래 아래에 있는 검은 황금인 석유의 용도를 알지 못했다.

어떤 상품에 대해서 한 번도 거래의 경험이 없는 경우에는 첫번째 거래로 결정된 가격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가격은 생산원가나 이익, 경쟁이라는 경제적 요소보다도 상호의 군사력이나 정치력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결정된 가격은 이렇다 할 경쟁상대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러한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의 가치 상태에서 대부분 구매자의 요구대로 가격을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이 '최초의 가격'이 한번 싼 값으로 결정되고 나면 그 이후의 가격은 모두 거기에 따라 낮추어지는 것이었다.

싼 가격에 사들인 원료가 일단 산업국으로 옮겨져 최종적인 제품으로 상품화되면 처음의 낮은 가격은 그대로 고정되어 버렸다. 결국 이렇게 하여 모든 상품에 대해 세계시장가격이 형성되고 모든 산업국은 아무런 경쟁 없이 제공받은 값싼 원료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이 미시여구를 써서 자유무역과 자유기업의 미덕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의 물결국가들은 '불완전한 경쟁'에 의해서 막대한 이익을 올렸던 것이다.

제국주의자인 레토릭이나 리카도의 학설에도 불구하고 무역을 확대한 데 따른 혜택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혜택은 주로 제1의 물결세계에서 제2의 물결세계로 흘러들어 갔다.

 

마기린을 위한 야자농장

1의 물결세계에서 제2의 물결세계로 이윤의 흐름을 촉진시키기 위해 산업주의 열강은 열심히 세계시장을 확대하고 통합해 나아갔다. 통상이 국경을 넘어 형성되자 각국 단위의 시장은 보다 커다란 상호 관련을 가진 일정 지역, 또는 하나의 대륙 전체의 시장 연합체의 일부가 되어 마침내 제2의 물결 문명을 지배하는 통합 엘리트들이 꿈꾸고 있는 단일의 통일적 교역 시스템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온 세계가 화폐로 짜여진 한 폭의 직물처럼 변해 버렸던 것이다.

2의 물결국가들은 세계의 나머지 나라를 모두 자신들의 가스나 식량, 석탄, 석재, 그리고 값싼 노동력의 공급자로서 취급하고 지구상의 비산업국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수천년 동안 자기들의 식량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자급자족의 생활을 계속해 온 사람들의 문화가 싫든 좋든 간에 세계무역의 시스템에 끌려 들어가 볼리비아인이나 말레이시아인의 생활 수준은 엉뚱하게도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산업국가들의 경제적 요구에 얽매이게 되었다.

가정용 마가린 제조의 변모은 그동안의 사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마가린은 원래 유럽에서 그 지방 특유의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가린이 널리 보급되고 수요가 증가하자 원료가 부족하게 되었다. 1907년 한 연구가가 코코넛과 야자유로도 마가린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럽에서의 이 발견이 서아프라카인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영국 식량과학기술연구소의 전 소장이었던 매그너스 파이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야자유 주산지의 땅은 부락 전체의 공유였었다.' 야자나무의 이용에는 지방마다 복잡한 관습과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죽기까지 그 나무의 생산물에 대한 권리가 주어졌다. 장소에 따라서는 여성이 특권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파이크의 기술에 따르면 '유럽이나 미국의 산업사회의 주민이 가까운 가게에서 언제나 마가린을 쉽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방의 기업인들은 야자유의 대량생산체제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것은 산업화되어 있지 않은 아프리카인의 복잡하고 취약한 사회조직을 파괴해 버렸다.' 벨기에링 콩고, 나이지리아, 카메룬, 아프리카 서부의 영국 식민지인 골드코스트(Gold Coast)에 거대한 야자농장이 만들어졌다. 유럽은 거기에서 마가린을 얻었고 아프리카인은 이들 대농장에서 반노예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또 하나의 예가 고무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의 자동차 제조가 타이어와 튜브의 원료인 고무의 수요를 급증시켰다. 무역업자는 현지의 통치자와 결탁하여 고무의 생산에 종사하는 아마존강 유역의 인디언을 노예처럼 부렸다.

리오데자네이로 주재의 영국 영사 로저 케이스먼튼는 '아마존강의 지류인 푸투마요강 유역에서 1900년부터 1911년까지는 4000톤의 고무가 산출되었는데, 이 때문에 3만 명의 인디언이 죽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므로 대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예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식민주의 열강이 항상 잔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장소에 따라서는 학교가 세워지고 피지배주민들을 위해서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보건시설도 설치되었다. 위생시설, 상하수도 등도 개선되어지는 등 일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린 것도 사실이었다.

또 식민지 이전의 사회를 낭만적으로 이상화하거나 오늘날의 비산업국가의 빈곤의 원인을 제국주의 탓으로만 돌려 이것을 나무라는 것도 공평한 태도는 아니다. 빈곤의 원인에는 풍토, 그 지방의 도덕적 수준의 낮음, 전제정치, 무지, 외국인 기피성, 기타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 유럽인이 찾아오기 훨씬 이전부터 여러 가지 참상이나 억압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자급자족의 생활이 깨치고, 화폐와 교역을 위해 생산을 부득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자신들의 사회조직을 광업이나 대규모 농장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도록 장려를 받기도 하고 강요당하기도 하자 제1의 물결사회의 주민들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시장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버렸다. 지도자들이 매수당하기도 하고 고유의 민족문화는 조소의 대상으로 변했다. 자신들의 언어를 말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더구나 식민주의 열강은 피정복민의 마음 속에 깊은 열등감을 심어주고 말았다. 이 열등감이 오늘도 과거 열강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하나의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나 제2의 물결사회에서 대제국주의는 상당히 성과를 거두었다. 경제사가 윌리엄 우드러프는 '이들 식민지의 개발과 그 식민지를 상대로 한 무역의 증대야말로 서유럽 국가들의 가족에게 일찍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요를 가져다주었다.'라고 쓰고 있다.

2의 물결의 경제기구와 깊이 연결된 제국주의는 끝없는 자원의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지구 전체를 석권해 나갔던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최초로 신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유럽인이 지배하고 있었던 지구 전체의 겨우 9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1801년에는 3분의 1이 되었으며, 1880년에는 3분의 2에 달했다. 그리고 1935년에 유럽인은 세계 면적의 85퍼센트, 전인구의 70퍼센트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2의 물결사회와 마찬가지로 세계가 통합하는 쪽과 통합당하는 쪽으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미국인에 의한 통합

그러나 통합하는 측도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2의 물결국가 사이에서도 성장 과정에 있는 세계경제기구의 지배권을 에워싸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우위에 서 있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신흥 독일의 산업력이 도전했다. 전쟁에 의한 파괴, 거기에 잇따른 인플레이션과 불황의 악순환, 러시아혁명, 모든 것이 산업사회의 세계시장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격변은 세계무역의 성장률을 매우 둔화시켰고 무역체제 속에 들어온 나라의 수는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국제거래량은 감소했다. 2차 세계대전은 다시 통합적인 세계시장의 확대속도를 지연시키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서유럽은 폐허의 잔재만이 남아있었다. 독일은 마치 달표면처럼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소련도 인적, 물적 양적 면에서 말로 할 수 없는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일본의 산업시설도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주요한 산업 열강 가운데서 미국만이 경제적 피해를 받지 않고 있었다. 1946년부터 1950년에 걸쳐 세계경제는 이러한 지독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국제무역은 1913년 이래 최저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유럽의 열강들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자 식민지 국가들이 차례로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치민, 케냐의 케냐타와 같은 반식민주의자들의 식민주의 배척운동에 열을 올렀던 것이다. 따라서 전후의 세계산업경제는 새로운 기반 위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미국과 소련이 제2의 물결체제를 재구성하고 재통합하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미국은 그때까지 대제국주의 운동에서는 한정된 역할밖에 맡고 있지 않았다. 북미대륙에서 국경선을 확장해 나가는 가운데 미국도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을 대량으로 학살하거나 보호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멕시코,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의 제국주의적 전략을 모방했다. 미국의 '달러 외교'20세기 초 수십 년에 걸쳐 유나이티드 푸르트사 등 많은 자국 대기업들에게 남아메리카로부터 설탕, 바나나, 커피, 구리, 기타 원료를 헐값에 구입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미국은 활발한 대제국주의 전개운동에선느 신참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등장을 했다. 이 나라는 최신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가장 안정된 정치구조를 과시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약화된 경쟁국들이 식민지로부터 밀려나게 되자 이때 생겨난 공백을 틈타 권력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1914년 초 미국의 금융정책 입안자들은 전후의 세계 경제를 자국에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재통합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국제통화, 금융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1944년 미국의 제창으로 뉴햄프셔주 브렌튼우즈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44개국이 두 개의 중요한 통합조직인 IMF(국제통화기금)와 세계은행의 설립에 동의했다.

IMF에서는 회원국 통화의 외환 비율을 미국의 달러와 금값에 고정시킬 것을 의무화했다. 그 당시 금의 대부분을 미국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금 보유량은 1948년 현재 전 세계 금 보유량의 7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IMF는 이것으로써 세계의 주요통화의 기본적인 관계를 고정시켰던 것이다.

한편 세계은행은 당초 유럽 국가들에게 전후의 복구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것인데, 점차로 비산업국가에도 융자를 해 주게 되었다. 이러한 융자는 주로 도로, 항만 등 이른바 '기간시설'의 건설에 투자되었지만 이들 시설이 결국은 제2의 물결국가들에 대한 공업원료나 농산물 수출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이 체제에 제3의 요소가 추가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 설립되었다. 역시 미국의 주도로 추진된 이 협정은 무역자유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경제력이나 과학기술이 뒤진 나라들에게 자국의 산업보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IMF에의 가입이나 GATT의 취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는 세계은행의 대부를 금지한다는 규정에 의해 이 세 개의 조직체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체제에 의해서 미국의 재무국들은 통화나 관세율 조직을 통하려 부담을 줄이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이 체제는 세계시장에서 미국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제1의 물결국가들이 정치적 독립을 이룬 후에도 그들 나라의 경제계획에 대해 산업화가 이루어진 열강, 특히 미국의 계속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도록 해주었다.

상호 관련된 이들 세 개의 기관들은 세계무역의 단일 통합구조를 형성했다. 그리고 1944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미국은 이 체제에 편승하여 정책을 실행해 나갔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미국은 다른 통합국을 다시 통합해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제국주의

그러나 제2의 물결세계에 대한 미국의 리더쉽은 소련의 등장과 더불어 점차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스스로 반제국주의자를 자칭하고 세계 식민지국가들의 우방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정권을 장악하기 1년 전인 1916년에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정책에 대해서 통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또한 레닌은 제국주의를 순전히 자본주의적 현상으로만 보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들이 다른 나라를 억압하고 식민지화하는 것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필연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주장 소게,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이윤은 일반적으로 시간과 함께 체감하는 불가항력적인 경향이 나타난다고 하는 설이 있다. 다분히 의심스러운 이 학설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철칙이 되었다. 이 학설을 전제로 하여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최종단계에서 작구내의 이윤체감을 보완하기 위해 해외에서 '과당이익: super profits'을 추구하는 것은 부득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레닌은 사회주의만이 경제적 착취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화된 사람들을 억압과 비참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간과한 것은 자본주의 산업국가들을 움직이고 있는 원리원칙의 대부분이 사회주의 산업국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세계통화체제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다름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도 생산과 소비의 분리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를 맺어 주는 시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반드시 이익을 목표로 한 시장은 아니었지만) 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자국의 공업기계를 운용하기 위해 외국으로부터의 원료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들 또한 자국의 필수품을 획득하고 생산품을 외국에 팔기 위해 통합된 세계 경제 기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사실 레닌은 제국주의를 공격하면서도 사회주의의 목적에 대해 "단순히 여러 나라들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합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소련의 경제분석학자 M. 세닌이 "사회주의적 통합"에서 쓰고 있듯이 레닌은 1920년에 '여러 나라들의 통합은 최종적으로는 공도의 계획에 의해서 조정되는 단일 세계 경제를 창설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과정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산업주의적인 견해였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산업국가들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원의 필요에 쫓기고 있었다. 그들 역시 급속히 증대되는 공장과 도시인구에 원료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면화나 커피, 니켈, 설탕, , 기타의 물자가 필요했다. 소련은 지금도 그렇지만 풍부한 자원의 혜택을 입고 있었다. 망간, , 아연, 석탄, 그리고 금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두 나라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가능한 한 낮은 가격으로 이러한 원료를 구입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소련도 세계통화체제의 일단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나라건 일단 이 통화체제에 흡입되어 일반적인 통상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내 그 형태에 알맞도록 능률과 생산성의 정의에 얽매여 버렸는데 이러한 정의 자체는 초기의 자본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사회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거의 무의식중에 전통적인 경제개념, 범주, 정의, 회계절차, 일련의 도량형 단위 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전문가들은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원료생산원가를 외국으로부터 조달하는 경우의 비용과 비교 계산하게 되었다. 그들 또한 만들어야 하는지 사들여야 하는지의 결정으로 고민해야 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체와 마찬가지로 명확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원료는 세계시장에서 구입하는 편이 자국에서의 생산원가보다 싸게 먹힌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던 것이다.

한번 이런 결단이 내려지면 소련의 빈틈없는 구매담당자들은 일제히 세계시장으로 나아가 이미 제국주의 국가의 무역업자들이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 놓은 가격으로 원자재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트럭은 영국의 상인이 말레이시아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사들인 고무로 만든 타이어를 달고 다니게 되었다.

최근에 들어 소련은 기니아에 소련 군대를 주둔시키고 미국이 1톤당 23달러에 사들이는 보크사이트를 6달러에 사들였다. 소련은 그 제품을 인도에게 자국 내 가격보다 30퍼센트나 비싼 가격으로 수출하면서 인도의 제품을 소련이 수입할 때는 30퍼센트나 낮은 가격으로 가져가서 인도가 항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에 비정상적인 헐값으로 천연가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같이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국가들의 희생에 의해서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의 공업화는 매우 늦어졌을 것이다.

소련 역시 전략적 고찰에 의해서 제국주의적 정책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은 우선 발틱 연안 국가들을 식민지화하고 핀란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군대에 의한 침략의 깃발을 나부끼면서 동유럽 전역에 걸쳐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거나 유지하도록 했다.

소련보다 산업화면에서는 훨씬 진보되어 있던 이들 나라들은 더러는 소련에 착취당하면서 식민지 또는 '위성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신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하위드 셔먼은 이렇게 쓰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수년 동안 소련이 동유럽의 자원을 정당한 대가의 지불도 하지 않고 자국으로 가져갔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매우 노골적인 약탈과 군사적 배상이 실행되었다. 소련이 경영상권을 가진 합작회사도 설립되었고 소련은 이들 나라로부터 이윤을 착취해 간 것이다. 또한 추가적으로 전쟁배상에 해당하는 국토의 불평등 통상조약이 체결되어졌다.'

오늘날에는 표면적으로 노골적인 약탈행위나 합작회사는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셔먼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소련과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 간의 교역은 소련이 상당히 공정해진 현재에도 여전히 불평등한 것으로서 소련이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많다.' 그러면 이런 방법으로 얼마나 많이 부당한 이익을 얻고 있는지는 소련에서 발표한 통계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확실히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유럽 전역에 소련군을 주둔시켜 두는 군사비보다는 이러한 경제적 이익이 웃돌고 있으리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미국이 IMF, GATT, 세계은행이라는 구조를 만들어 낸 데 대해 소련은 COMECON(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을 만들어 동유럽 여러 나라에 가입을 강요함으로써 단일의 통합된 세계 경제체제라는 레닌의 꿈의 실현에 한 발자욱 내디딘 것이다. COMECON 회원국들은 소련에 의해 그 밖의 가입국들과의 통상을 강요당했을 뿐 아니라 자국의 경제개발계획을 모스크바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모스크바는 분업화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리카도의 학설은 내세워 과거 제국주의적 열강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에 각각 분업화된 전문적인 기능을 부여했다. 이에 대해 공공연히 침착한 저항을 시도한 것은 루마니아뿐이었다.

루마니아는 소련이 자기 나라를 '석유 펌프가 딸린 앞뜰'로 삼으려 한다고 주장하면서루마니아의 전면적인 발전, 즉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다각적인 산업화를 목표로 개발에 착수했다. 루마니아는 소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통합'에 착수했던 것이다. 요컨대 미국이 자본주의 산업국가들 사이에서 리더쉽을 발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 자국에 유리한 세계 경제체제를 만들어 가는 동안에 소련도 자국 지배하의 지역에서 거기에 상응하는 기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와 같이 방대하고 복잡하고 변화하는 현상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국주의가 종교와 교육, 보건위생, 문학과 미술의 주제, 인종 문제에 대한 수용 자세, 세계 각국 국민의 심리구조에 끼치는 영향,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아직도 역사가들은 해명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잔혹 행위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적극적인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2의 물결 문명의 발생에 대해 제국주의가 많은 기여를 했다고 지나치게 강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제국주의를 제2의 물결세계가 산업화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엔진의 과급기 또는 액셀레이터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미국이나 서유럽, 일본, 소련이 외국으로부터의 식량이나 에너지, 원료의 도입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빠른 산업화를 실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인가? 보크사이트나 주석, 바나듐, 구리와 같은 온갖 원자재의 가격이 만일 10년마다 30~50 퍼센트씩 올랐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아마 무수한 최종제품의 가격이 그것에 따라서 올랐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 비싼 상품의 대량소비가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다. 1970년대 초의 원유가격의 급등에 따른 석유파동을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나마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설령 국산자원으로 대체가 되었더라도 제2의 물결에 속하는 여러 나라의 경제성장은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가져다 준 은밀한 보조가 없었더라면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제2의 물결 문명은 지금도 고작 1920년이나 1930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전체적인 조감도가 분명히 보일 것이다. 2의 물결 문명은 세계를 세분화하고 제각기 독립된 국민국가로 재구성했다. 그리하여 다른 지역의 자원을 필요로 했던 제2의 물결 문명은 제1의 물결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원시적인 민족을 통화체제 속으로 끌어들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시장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휩쓴 산업주의는 단순히 경제적, 정치적, 혹은 사회적 체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양식, 사고방식의 문제이기도 했다. 산업주의는 제2의 물결특유의 정신구조를 생성해 냈다.

이러한 정신구조야말로 오늘날 제2의 물결 문명의 창조를 방해하는 최대의 핵심적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9장 산업적 현실상

 

2의 물결 문명은 지구 전체에 그 강한 촉수를 뻗어 그 손길이 미치는 모든 것에 변화를 강요했다. 그것은 과학기술이나 통상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2의 물결은 제1의 물결과의 충돌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현실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도록 했다.

2의 물결은 여러 면에서 농업사회의 가치, 관념, 신화, 도덕과 충돌하는 가운데 신이나 정의, 사랑, 권력,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해 나갔다. 새로운 개념이나 태도, 유추의 방법을 보급시켰다. 시간과 공간, 물질, 인과관계에 대한 옛날부터의 전제를 뒤엎고 이것을 무용화시켰다. 강력하고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 등장하여 제2의 물결의 현실을 정당화한 것이다. 이 산업사회의 세계관에는 이제까지 특정한 이름이 없었으나 '산업적 현실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적 현실상이란, 산업주의 사회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속한 현실 세계를 이해하도록 가르쳐 주는 개념이나 가설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제2의 물결 문명에 의해서 채택된 이 문명에 속하는 과학자, 실업계의 리더, 정치가, 철학자 등이 즐겨 활용해 온 온갖 전제의 포장물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산업적 현실상에 대립하는 견해의 소유자도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산업적 현실상의 지배적인 개념에 도전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제2의 물결사상의 지류가 아니라 본류였던 거이다. 외관상으로 본류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오히려 두 개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흐름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중반에 이르게 되자 산업화를 추진하는 나라마다 개인주의와 자유기업주의를 옹호하는 우익집단과 생산이나 경제활동의 수단을 국가가 통제하는 집산주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좌익집단이 구분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산업국가들에만 한정되어 있던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투쟁은 곧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갔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세계적 규모의 중앙통제 하의 선전기구가 조직되면서 이데올로기의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 되자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국에 유리한 세계시장, 혹은 전 세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대부분의 시장을 재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거액의 돈을 쏟아 넣어 비산업국가의 국민들에게 각각 자신들의 주의를 심어 나갔다.

한쪽에는 전체주의 정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논리적인 토의가 결렬될 때를 대비해 총과 폭탄을 배치해 놓았다. 종교개혁기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충돌 이후 두 개의 사상진영 사이에 이만큼 뚜렷하게 주의주장에 의한 경계선이 그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이 치열한 선전 전쟁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양측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양쪽 모두 같은 '초이데올로기'를 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측의 결론(그 경제계획과 정치원리)은 완전히 이질적이었지만, 출발점이 된 전제의 대부분은 동일했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성직자들이 저마다 해석을 다르게 하면서도 같은 성서를 똑같이 거룩하게 받들면서 양쪽 다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자와 반마르크스주의자, 자본주의자와 반자본주의자, 미국인과 소련인은 한결같이 세계의 비산업화 지역인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해 갔다. 그리고 그 진출에 있어서 그들은 같은 기본적 전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스스로는 그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모든 문명에 대한 산업주의의 우월성을 역설했다. 양자는 모두 산업적 현실상의 열렬한 주창자였던 것이다.

 

진보의 법칙

그들이 전파한 세계관은 산업적 현실상을 구성하는 상호연관성이 깊은 세 개의 신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세 가지의 신조는 제2의 물결에 속하는 나라들을 하나로 묶어 지구상의 다른 나라들과 그들을 구별 짓게 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해냈다.

이 핵심적 신조의 첫째는 자연에 관련된 것이다.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자는 자연의 산물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대해서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나 자연을 보는 견해는 똑같았다. 양쪽 모두에게 자연은 인간이 이용해도 좋은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인간은 당연히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은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산업혁명까지만 해도 그것은 소수의견에 지나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전의 거의 모든 문화가 강조했던 것은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인류와 인간을 둘러싼 자연생태계를 조화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혁명 이전의 문화가 자연에 대해 특별히 순종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산을 개간하고, 토지의 면적에 비해 너무 지나칠 정도의 가축을 방목하고 땔감을 위해 남벌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인간이 가진 자연파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지에 결정적인 충격을 주는 힘도 없었으며 스스로가 끼친 손해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2의 물결 문명이 도래하자 자본주의 산업가들은 이윤추구를 위해 땅속의 지하자원을 대규모로 파올리고 대기 중에 대량의 유해 가스를 방출하고 넓은 지역의 삼림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나 먼 장래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은 개발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상이 근시안적 전망과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편리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들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이윤추구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산업가들 역시 권력을 장악하면 어디에서나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사실 그들은 자연과의 투쟁을 자기들의 경전 속에 짜 넣어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원시사회에 대해 인간과 자연은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연을 상대로 생사를 건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고 명시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계급사회의 출현과 함께 이 '인간 대 자연'의 투쟁이 불행히도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변해 버리고 공산주의에 의한 계급 없는 사회가 실현된 다음에 인간은 '인간 대 자연'의 투쟁으로 희귀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연과 대립하고 이것을 지배한다. 이데올로기의 분수령으로 막혀 있던 두 진영에 이처럼 동일한 인간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인간상은 산업적 현실상의 주요 구성요소이므로 이 초이데올로기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한결같이 자신들의 가설을 도출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산업적 현실상을 구성하는 두 번째 신조는 첫째 신조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논쟁을 더 한층 진전시켰다. 그것은 인간이 단순히 자연을 관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랜 진화과정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진화론은 그 이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 개념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19세기 중엽 당시의 최선진 산업국인 영국에서 교육받은 다윈이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세계 속에는 '자연도태'라는 무작위적 기능이 작용하고 있어서 생존 경쟁에 의해 약하고 무능력한 자는 용서 없이 도태되어 가는 것이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종이 최적자라고 정의했다.

다윈의 관심사는 주로 생물의 진화였지만 그의 사상은 명백히 사회적,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재빨리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자'들은 사회 내부에도 이 자연도태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진화론적 사실 때문에 가장 부유하고 강한 권력을 가진 자가 부와 권력에 적합한 최적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고방식을 좀 더 진전시키면 모든 사회가 이 도태의 법칙에 따라 진화한다는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산업주의는 그 주변의 비산업문화에 비해 보다 높은 진화의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하는 결과가 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제2의 물결 문명은 다른 모든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이 자본주의를 합리화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문화적인 우월은 제국주의를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해 주었다. 확대되는 산업사회는 값싼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생명선이 필요했고 심지어는 농업사회나 모든 원시사회를 말살시켜서라도 싼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행위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즉 사회진화론은 비산업사회의 사람들을 산업사회의 인간보다 못한 존재라고 결정짓고 따라서 생존 부적격자로서 대우하는 것에 대한 지적, 윤리적 구실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다윈 자신도 냉혹한 필치로 태즈메니이니아 원주민의 대량학살에 대해 언급하며 민족말살의 열정을 뿜어댔다. 그는 "장래의 언젠가는 문명인이 온 세계의 야만인을 멸종시키고 그에 대신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라고 예언했다. 2의 물결 문명의 선구자들에게는 생존할 가치가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만 하더라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산업주의가 사회의 가장 가장 진보된 형태이며 다른 모든 사회도 필연적으로 점차 그 단계를 향해서 발전해 갈 것이라는 점에서는 진화론의 소유자였다.

산업적 현실상을 구성하는 핵심적 신조의 세 번째는 자연과 진화를 연결하는 사상, 즉 진보의 법칙이었다. 역사는 거꾸로 흐르는 법 없이 인류에게 있어 보다 나은 생활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도 역시 산업주의 시대 이전에 이미 많은 선례가 있었다. 그러나 진보사상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 된 거은 제2의 물결의 진행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2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쓸자 갑자기 수많은 목소리가 문명의 찬가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라이프니츠, 튀르고, 콩도르세, 칸트, 레싱, 존 스튜어트 밀, 헤겔, 마르크스, 다윈 등 많은 사상가들이 모두 우주론적인 낙관주의를 논증해 갔다. 과연 그들의 이론적 전개는 다양했다. 진보는 역사의 필연인가 아니면 인류의 손을 빌려야 하는가, 향상된 생활의 핵심은 무엇인가, 진보는 영원히 계속하는가 아니면 계속할 수 없는가 등등. 그렇지만 진보라는 개념 그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신론자와 신학자, 학생과 교수, 정치가와 과학자들이 모두 이 진보를 만드는 새로운 신앙을 역설했다. 기업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인민위원도 모두가 악에서 선으로, 선에서 보다 나은 선으로 향하는 이 불가항력적인 전진의 예증으로서 각지의 새로운 공장, 신제품, 신흥주택단지, 도로, 댐의 탄생을 내세웠다. 시인도 극작가도 화가도 진보를 의심하지 않았다. 진보라는 이름은 자연의 파괴와 '저개발' 문명의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도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는 견해가 일치하고 있었다. 로버트 헤일브로너가 기록하고 있듯이 "스미스는 진보의 신봉자였다. '국부론: Wealth of Nations'에서 진보는 이제 인류의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인류가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목적지이며 개인의 경제적 목표가 이룩하는 부산물로서 저절로 얻어졌다."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개인의 경제적 목표가 자본주의를 낳게 하고 또 가지 멸망의 종자를 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보 그 자체가 인류를 사회주의, 공산주의, 나아가서 그것을 초월한 보다 나은 체제에로 진화해 가는 긴 역사의 당당한 흐름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제2의 물결 문명기에서의 자연과의 투쟁, 진화의 의의, 진보의 법칙이라는 세 개의 주요개념은 산업주의 전파자들에게 문명을 설명하고 이것을 정당화시킬 때에 사용되는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이러한 확신의 배후에는 현실에 대한 보다 더 심오한 가설이 존재했다. 인간 경험의 구성요소들 자체에 대한 무언의 신념들이 내재해 있었다. 인간인 이상 이들 요소와 무관하지 않으며 모든 문명이 제각기 다른 표현에 의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문명들은 그 사회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간과 공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신화에 의해서건 비유나 혹은 과학이론에 의해서건 어떻게 자연이 작용하는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도 무언가의 해답을 제시해 주어야만 한다.

이리하여 제2의 물결 문명은 성숙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 사상과 그 원인에 대해 이 문명의 독특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혀 새로운 현실상을 만들어 냈다. 과거의 단편적 사실을 수집한 뒤 새로운 방법으로 에워싼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과 경험적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인간이 자신을 에워싼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과 일상생활에서의 행동 양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시간의 소프트웨어

인간의 행동과 기계 리듬의 동시화가 산업주의의 보급에 얼마만큼 공헌을 했는가는 이미 제6장에서 본 대로이다. 사람들이 정확히 같은 시각을 새겨 넣은 시계에 따라 살아간다고 하는 동시화는 제2의 물결 문명의 지도 원리들 중의 하나였다. 산업사회의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디에 있더라도 시간에 쫓겨 언제나 초조하게 시계만 들여다보는 시간의 노예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이 시간관념의 철저를 통한 동시화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시간에 관한 사람들의 기본적 가설, 즉 마음속의 시간에 대한 영상을 변혁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간에 관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농경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씨를 뿌리는 시기와 수확의 시기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1년을 단위로 한 시간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한 측정법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노동에는 따로이 정밀한 동시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 사이에서는 짧은 시간을 재기 위한 정확한 시간 단위는 거의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보통 1시간, 1분과 같이 시를 일정 단위로 분할하지 않고 가사노동에 필요한 시간의 길이를 대체적이고 애매한 덩어리로 나누고 있었다. 예를 들면 농부가 '젓 짜는 시간'이라는 표현으로 일정한 시간의 경과를 나타냈다. 마디가스카르에서는 시간의 단위로서 통용하고 있던 것의 하나로 '밥 짓는 시간'이라는 시간 단위가 있으며, 또 짧은 시간을 표현하는 데는 이 지방의 식생활을 반영하여 '메뚜기 튀기는 시간'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영국인은 '주기도문을 외는 동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라는 기도문을 외는 시간이라든가 더 까다롭지 앟은 표현으로 '소변을 보는 동안'이라는 시간개념을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인접한 공동체 혹은 촌락 간의 교류가 거의 없었으며 노동형태도 정확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머릿속에서 시간을 재는 단위 그 자체가 토지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중세의 북부 유럽에서는 일출부터 일몰까지를 일정하게 나누었지만,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길이는 날마다 변화하므로 12월의 '1시간은' 3월이나 5월의 '1시간'보다 짧았다. 산업사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외는 동안'이라는 막연한 시간 구분 대신에 시, , 초라는 아주 정확한 시간 단위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들의 단위는 계절이 변하더라도 언제나 통용할 수 있도록 규격화, 표준화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가 질서정연한 시간대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는 '표준시'라는 말을 쓴다. 전 세계의 항해사들은 '줄루시간(Zulu time)' 즉 그리니치 표준시에 의존하고 있다. 국제 협약에 의해 영국의 그리니치가 모든 시차를 계측하는 기점이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마치 하나의 의지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럼 시계를 주기적으로 한 시간씩 앞으로 또는 뒤로 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제아무리 우리 마음속에서 주관적으로 시간이 천천히 지나가기도 하고 또 그와 반대로 날아가듯이 빨리 지나간다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이제 1시간은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일정한 길이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2의 물결 문명은 시간을 보다 정확하고 표준화된 단위로 분할한 것만이 아니다. 이들 단위를 무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미래로 연장되는 직선상에 배열했다. 시간을 직선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시리제로 시간이 직선적이라는 가정은 우리의 사고 속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제2의 물결사회에서 자란 우리로서는 다른 시간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많은 산업화 이전의 사회나 지금도 제1의 물결사회로 남아있는 일부 나라에서는 시간을 직선이 아닌 원이라고 생각했다. 마야족에서 불교도와 힌두교도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순환적, 반복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역사 또한 무한히 반복되고 생명도 부활에 의해 재생된다고 믿었다.

시간이 커다란 원과 같다고 하는 생각은 힌두교에서 순환하는 겁(우주의 생성과 멸망 사이의 아주 긴 시간)의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1겁은 40억 년에 해당하는데 그것마저도 힌두교의 창조신 브라마(Brahma)가 재생했다가 붕괴되고 또 재생을 반복하는 단 하루를 나타내는 데 불과하다. 시간이 순환한다는 개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리스토텔레스의 제장인 에우데무스는 자기 자신이 시간의 순환에 따라 같은 순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이었다. "시간과 동양인: Time and Easten Man" 속에서 조지프 니덤은 '인도 그리스 문화권에서의 시간은 순환적이며 영원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시간의 직선적 개념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니덤에 따르면 '고대 도교의 사변 철학자들 중에서 분명히 시간의 순환적인 관념이 지배적이었다.'라고 한다.

유럽에서도 산업화 이전의 몇 세기 동안 두 가지의 모순된 시간관이 공존하고 있었다. 수학자 F. J. 휘트로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세를 통해서 직선적인 시간개념과 순환적인 시간개념이 대립상태에 있었다. 직선적인 시간개념은 상인계급과 화폐경제의 등장에 의해서 조장되었다. 이것은 토지소유자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있는 한 시간은 얼마든지 있고 농민의 생활은 불변하는 대지의 순환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2의 물결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몇년 동안의 갈등은 끝이 났다. 승리를 거둔 것은 직선적인 시간개념이었다. 직선적인 시간개념이 동서양을 불문하고 모든 산업사회의 지배적인 개념이 되었다. 흡사 시간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하나의 고속도로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간개념은 산업 문명 이전에 살아온 수십억이라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었지만 제2의 물결사회에서는 경제, 과학, 정치의 각 분야에 걸쳐 모든 계획의 기초가 되었다.

IBM의 경영진이든 소련의 아카데미든 일본의 경제기획청이든 간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직선적 시간관이 진화와 진보에 관한 산업현실관(indust-real view)에 있어서의 전제조건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직선적 시간관이 진화와 진보에 그럴듯한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 자체가 반복하고 있던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진화와 진보는 이제 환상 시간이라는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화, 표준화, 직선화, 이 세 가지는 제2의 물결 문명을 성립시킨 기본적 가설에 영향을 끼쳐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변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변모를 가져온 이상 공간도 역시 새로운 산업적 현실상에 적응하는 변화가 필요했다.

 

공간의 재구성

1의 물결 문명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의 우리의 먼 조상들의 수렵이나 목축, 어로나 채집에 의존하던 때의 생활은 끊임없는 이동의 연속이었다. 굶주림과 추위 또한 환경의 변화에 쫓기고, 혹은 따뜻한 기후나 사냥감을 찾아 이동을 계속했다. 고도의 이동성은 현대인의 특성처럼 말해지는데 사실은 고대인이야말로 최초의 '수준 높은 유랑인'이었다. 거추장스런 가재도구를 일체 갖추지 않고 가볍게 여행하면서 광막한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남녀노소를 모두 합하여 50명 남짓의 인간이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맨해턴 섬의 6배 넓이의 토지가 필요했고 주위의 상황에 따라 매년 실제로 몇 백 마일씩 이동을 해야 했다. 그들은 오늘날 지리학자가 말하는 '공간적으로 넓은' 생활을 영위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1의 물결 문명은 '공간적 수전노'라고 표현할 수 있는 토지에 집착하는 인종을 길러냈다. 유목 생활이 농경 생활로 바뀌자 유랑민들이 다녔던 고장은 농경지와 항구적인 경정착지로 변해 갔다. 넓은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이제는 농부가 되어 그 가족과 함께 정주하여 넓은 바다 같은 공간 속의 자그마한 밭은 열심히 갈았다. 아득한 대평원 가운데의 이러한 인간의 생활은 그 규모가 더욱 작아 보였다.

산업 문명이 탄생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농가의 군락은 모두가 넓다란 광야에 둘러싸여 있었다. 소수의 상인, 학자, 군인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영역은 아주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 밭으로 나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외에는 교회에 다녔다. 배로는 6, 7마일 떨어진 이웃 마을을 찾는 수도 있었다. 기후나 지형에 따라 사정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역사가인 J. R. 헤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한 여행은 일생 중 가장 긴 것이라야 평균 잡아 15마일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농업은 '공간적으로 제한된' 문명을 낳았다.

18세기에 유럽에 불어닥친 산업화의 회오리는 다시금 '공간적으로 넓은' 문화를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거의 세계적인 규모를 지닌 문화였다. 몇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의 상품과 인간, 사상이 교류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각지의 농지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생산을 바야흐로 도시지역에 집중되었다. 엄청난 인구가 소수의 인구 밀집지대로 모여들었다. 옛 촌락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높은 굴뚝과 용광로의 불길로 둘러싸인 공업 중심지가 생겨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전원풍경이 급변하면서 도시와 농촌 사이에는 훨씬 주의 깊은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식량, 에너지, 인간 그리고 각종 원료가 도시로 흘러 들어가고 농촌으로는 각종 공산품과 유행, 사상, 금융정책이 흘러 들어갔다. 이 두 방향의 흐름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주의 깊게 통합되고 조정되었다. 나아가서 도시 내부에서도 더욱 다양한 공간형태가 요청되었다. 오랜 농업체제 속에서의 기본적 건조물이라고 하면 교회, 영주의 저택, 그리고 초라한 농가 같은 것들에 가설 술집이나 수도원 정도였다. 그런데 제2의 물결 문명의 경우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진 분업화로 인해 여러 가지 전문화된 공간형태가 수없이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에서 얼마 후 건축가들은 사무실, 은행, 경찰서, 공장, 철도역, 백화점, 교도소, 소방서, 병원, 극장 같은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의 이러한 공간형태들은 논리적, 기능적으로 적합하도록 구성되어야 했다. 공장의 입지, 집에서 상점가는 길, 철도 대피선과 부두 또는 트럭 하역장과의 관계, 학교나 병원, 수도관, 발전소, 배전관, 가스관, 전화국 등 모든 설비가 공간적으로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했다. 공간은 마치 바흐의 푸가처럼 세심한 배려로 주도면밀하게 구성될 필요가 있었다.

용도별로 특수화도니 공간을 이와같이 정확하게 배치하는 것은 적당한 때에 적재를 적소에 얻기 위해 필요했던 조건이므로 시간에 대해 동시화가 추진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일반화된 것이었다. 즉 공간의 동시화였다. 산업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선행하는 시대보다 더욱 세밀히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고 표준화된 단위가 필요했던 것처럼 공간에 있어서도 보다 정확하고 보편적인 단위가 필요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전, 아직 시간이 '주기도문을 외는 동안'이라고 하던 식으로 시간이 커다란 단위로 나뉘어져 있던 무렵은 공간의 측량도 역시 엉망이었다. 예를 들면 중세 영국에서는 1루드(rood)의 길이가 짧게는 16.5피트, 길게는 24피트까지 여러 가지였다. 16세기에 1루드의 길이를 재기 위해 교회에서 나오는 남자 16 명을 임으로 선발해서 서로의 왼발과 오른발을 붙들어 매고 한 줄로 세우고는 그 길이를 재는 것이었다. '말을 타고 하루의 거리', '걸어서 한 시간' 혹은 '말을 가볍게 달려서 30'처럼 더욱 애매한 말투도 있었다.

일단 제2의 물결이 노동형태를 변화시키기 시작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쐐기에 의해 시장이 확대되어 가자 이러한 대체적인 개념으로는 더 이상 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무역의 증대로 정확한 항해술이 더욱 중요시되어 각국 정부는 상선에 정확한 항로를 잡아주기 위해 좋은 방법을 고안해 내는 자에게는 큰 상을 주었다. 육지에서도 더욱 정밀한 계측과 보다 정확한 단위가 도입되었다.

1의 물결 문명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혼란과 모순과 무질서한 여러 가지 관습, 법률, 상거래 행위 등을 새로이 정비하여 합리적인 것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정밀하고 표준화도니 도량형 단위가 없다는 것은 제조업자나 신흥상인계급에 있어서 일상생활상의 큰 문제였다. 산업시대의 여명기에 프랑스혁명을 단행한 부르주아가 새로운 역법에 따른 시간의 표준화와 미터법에 의한 거리의 표준화에 열의를 보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시되어 국민의회가 공화국 선언을 위해 처음 소집되었을 때 우선적으로 상정해야 할 의안의 하나가 되었다.

모든 것에 변화를 가져왔던 제2의 물결은 또한 국경선의 증가와 정밀함에도 영향을 끼쳤다. 19세기까지도 여러 왕국들의 경계선은 애매하고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토지가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으므로 정확성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교역이 증대되고 공장이 유럽 전역에 세워지기 시작하자 각국의 정부는 자국의 국경을 체계적으로 지도에 그려 넣게 되었다. 관세를 부과해야 할 구역에 대해서는 특히 분명한 구획선이 그어졌던 것이다. 국유지는 물론 사유지조차도 전 시대와는 달리 더욱 세밀하게 경계를 정하고 표지를 세워 울타리를 만들고 기록을 분명히 했다. 지도는 더 한층 세밀해지고 포괄적이고 표준화되었다.

새로운 시간관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새로운 공간관이 등장한 것이다. 시간에 따라 계획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정확성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여러 가지 한계와 경계를 정해야 했던 것처럼 더 많은 경계선이 출현하자 공간적으로도 한계가 설정되었다. 시간의 직선화까지도 공간에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는 육로나 수로를 불문하고 일직선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농부가 다니는 길, 소가 다니는 길, 인디언들이 밟고 다니던 길 모두가 지형에 따라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다. 도시를 에워싼 성벽도 불룩 튀어나와 구부러지거나 불규칙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중세 도시의 도로는 서로 얽혀 복잡하게 구부러지고, 뒤엉키고, 소용돌이처럼 꼬부라져 있었다.

2의 물결사회는 선박에게 정확한 직선 항로를 잡게 했을 뿐만 아니라 철도를 건설할 때도 번쩍거리는 두 줄의 궤도가 어디까지라도 평행선으로 펼쳐지게 선로를 부설하고 그 위에 기차를 달리게 했다. 미국의 기획담당관인 그래디 클레이가 언급하고 있듯이 철도의 선로(이 말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직선적임을 의미하고 있다.)를 중심축으로 하여 그 주변에 바둑판 모양의 새로운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직선과 직각으로 결합된 이 바둑판 무늬는 자연의 경관에 독특한 기계적 규칙성과 직선적 특징을 더해 주었다.

지금도 하나의 도시를 관찰해보면 구시가지에서는 가로, 사각형의 광장, 원형광장, 복잡한 교차점 등이 마구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똑같은 도시 내에서도 산업화가 더욱 진전된 시기에 새로이 건설된 구역에서는 이와같은 복잡한 것들을 대신해서 질서정연한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가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어떤 지역이나 혹은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기계화가 진전되면서 농경지에도 직선 모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업화 이전의 농민들은 소가 밭을 갈았으므로 밭이랑 불규칙하게 구불구불한 곡선이 되었다. 농부는 일단 밭은 갈기 시작한 소를 중도에서 쉬게 하지 않으려고 소가 밭이랑 끝까지 가면 크게 돌아서 S자 모양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비행기의 창에서 내려다보는 농지는 네모반듯하게 구획정리가 되어 자로 잰 듯한 이랑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직선과 직각의 배합은 농지나 시가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과 가장 친밀한 공간인 주택에도 반영이 되었다. 산업시대에서는 곡선을 이루는 벽이나 직각으로 교차하는 모서리 같은 건축물의 형태는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불규칙한 모양의 방 대신에 정돈된 직각의 방이 나타났고 고층건물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뻗어 갔다. 또한 일직선의 도로에 면한 건축의 대형 벽에는 창문들이 직선 또는 바둑판 모양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인간의 공간에 대한 관념과 경험은 시간의 직선화에 병행하여 공간의 직선화라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불문하고 모든 산업사회에서는 건축공간의 전문화, 정밀한 지도, 같은 모양의 반복, 통일되고 정밀한 도량형 단위의 사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직선이 새로운 산업적 현실상의 기본이 되는 하나의 문화적 상수가 되었던 것이다.

 

현실상의 본질

2의 물결 문명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 거기에 따라 인간의 일상행동을 규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오랜 궁금증이었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사물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 의문에 해답을 주기 위해 모든 문화는 그들 나름대로의 신화나 비유법을 만들어 왔다. 어떤 문화에 있어서는 우주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통일체'라고 상상했다. 그곳에서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조상이나 자손의 생활과 불가분으로 연결되고 동물이나 수목, 암석, 하천에서까지도 자기들과 똑같이 '생기'를 느낄 정도로 자연계와 융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개인은 개별적, 자율적인 독립체가 아니라 가족, 씨족, 부족, 공동체 등 보다 큰 유기체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다른 사회에서는 우주의 전체성이나 일체성이 아니라 우주가 몇 가지인가의 요소로 분할될 수 잇다는 분열성을 강조해 왔다. 현실은 하나의 융합된 통일체가 아니라 많은 개별적 부분들로 이루어진 구조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산업주의가 출현하기 약 2000년 전, 데모크리투스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학설을 발표했다. 우주는 완전무결한 단일체가 아니라 분리되어있으며 파괴하거나 줄일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며 더 이상 세분할 수 없는 여러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미세한 입자를 '원자(atom)'라 이름 붙였다.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우주가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거듭 제기되었다. 중국에서는 데모크리투스의 시대보다 약간 늦게 정리된 "묵자" 속에서 ''의 정의를 분명히 하였는데, 이 이상 더 분할할 수 없는 짧은 한 조각으로 절단된 선이라는 것이다. 인도에서도 서력 기원 후 얼마 되지 않아 원자, 즉 현실구성의 최소단위라는 사고방식이 제기되었다. 고대 로마의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론의 철학을 아주 상세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관들은 소수의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남의 조소를 받든가 무시를 당했다.

2의 물결 시대가 막을 열어 여러 가지 혼합된 사상의 흐름이 몇 가닥씩 합류하여 우리의 물직관을 변혁시키자 마침내 원자론은 지배적인 사상으로 성장했다.

17세기 중반 프랑스인 신부이자 파리 왕립대학의 천문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삐에르 가생디는 물질은 '초미립자(corpuscula)'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루크레티우스에게 영향을 받은 가생디는 원자적 물질관의 아주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으며 그의 사상은 얼마 후 영국 해협을 건너서 기체의 압축성을 연구하고 있던 젊은 과학자 로버트 보일에게 전해졌다. 보일은 이 원자론을 사변적 이론으로부터 실험실로 옮겨 공기마저도 몇 가지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생디가 사망한 뒤 6년 후, 보일은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어떠한 물질도(예를 들면 흙 보다) 단순한 물질로 분해할 수 있으며 그것은 원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편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은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가생디로부터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다 작은 부분으로 분해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검토 중인 어려운 문제는 하나하나를 가능한 한 여러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2의 물결이 고조됨에 따라 물질에 대한 원자론에 병행하여 철학적 원자론이 발달한 것이다.

이리하여 '통일체'라는 개념에 대해 차례차례로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 공격에는 즉시 과학자나 수학자, 철학자가 차례로 가담하였고 그들은 우주를 더 작은 단편으로 분할을 계속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올렸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발표하자 미생물학자 르네 뒤보스는 '그것을 의학에 응용함으로써 즉각 수많은 발명이 이루어졌다.'라고 쓰고 있다. 원자론과 데카르트의 원자론적 방법론의 결합은 화학과 그 밖의 분야에 놀랄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1700년대 중반에는 우주가 분리할 수 있는 독립된 부분과 소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은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새로이 형성되어 가고 있던 산업적 현실상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때에는 언제나 과거로부터 관념들을 추출하여 그것들을 새로운 문명 자체와 세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재구성한다. 마치 따로 떨어져 있는 부품들을 모아 조립제품의 대량생산을 막 시작한 사회인 것 같은 산업사회에서의 우주가 개별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집합체라는 사고방식은 불가피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현실에 대한 원자론적 해석이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정치적, 사회적 이유도 있었다. 2의 물결은 제1의 물결에 속하는 기존의 구체제와 격돌하면서 사람들은 대가족, 전능의 교회, 군주제 등으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산업자본주의는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낡은 농업 문명이 쇠퇴하고 산업주의의 새벽을 1,2세기 앞둔 때로부터 무역이 확대되고 도시의 수가 증가하자 신흥상인 계급들은 거래나 융자, 시장확대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새로운 인간관을 구상해 냈다. 한 인간의 원자가 모여 사회가 성립한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이제 인간은 부족, 신분제도, 씨족 등의 수동적인 부속물이 아니라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이었다. 각 개인은 재산을 사유하고, 상품을 획득하고 운반하고 거래하며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부자도 되고 굶기도 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에 상응하여 종교를 선택하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갖게 되었다. 요컨대 산업적 현실상은 원자와 아주 흡사한 개인, 즉 사회의 기본적 구성요소로서 더 이상 줄일 수도 파괴할 수도 없는 구성단위로서의 개인이라는 사고방식을 낳게 했던 것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원자로는 정치 분야에도 등장하여 투표가 최소의 구성입자가 되었다. 또 국제사회에서의 경우 국가라고 부르는 그것이 자기충족적, 불가침적, 독립적인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이 나타났다. 즉 물질적 질료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인 질료도 벽돌을 쌓아 올라가듯이 자율적인 단위, 즉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원자론은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했다.

현실이 불리 가능한 단위를 조직화함으로써 성립된다는 개념은 또 새로운 시간상 및 공간상에도 완전히 부합한다. 시간과 공간 그 자체가 보다 작은 단위로 세밀하게 분할된다고 생각하기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2의 물결 문명은 세력을 확대하여 소위 '원시'사회와 제1의 물결 문명을 제압하고 동시에 논리성, 일관성을 점차로 강화해 가면서 인간이나 정치사회에 대한 이 산업주의적 개념을 전 세계에 전파시켜 나갔다.

그러나 이 논리체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최후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궁극적 질문 ''

'' 여러 가지 사상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문명은 이 ''에 대해서 뭔가의 설명이 필요하다. 설령 1할은 해명이 되고 나머지 9할이 수수께끼로 남는다 해도 뭔가의 설명을 준비하지 않는 한 그 문명은 효과적인 생활을 계획할 수가 없다. 문화가 요구하는 것을 수행해나가는 데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약간의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오래된 질문 ''에 대해 어떤 종류의 해답을 의미하는 것이다. 2의 물결 문명은 모든 것의 설명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강력한 이론을 제시해 주었다.

연못 속에 돌멩이를 던진다. 파문이 재빠르면 수면에 퍼진다. 왜인가? 무엇이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일까? 산업사회의 아이들이라면 '누군가가 돌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12, 3세기의 학식이 풍부한 유럽 신사라면 우리와는 현저하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의 4원인이라는 사고방식에 따라 질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4원인의 어느 것이나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일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중세 중국의 현자라면 음양과 같은 신비한 힘의 상호작용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의해서 모든 현상이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2의 물결 문명은 인과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뉴턴의 획기적인 발견인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찾아냈다. 뉴턴에게 있어서 원인이란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물체에 가해지는 힘'이었다. 뉴턴적 인과론을 설명해 주는 전형적인 예로는 차례차례로 충돌하여 거기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당구공의 예가 있다. 계측이 가능하여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외적 요인들만을 강조하는 이러한 변화의 개념은 직선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산업적 현실상에 완전히 합치한다는 점에서 아주 유력한 이론이 되었다. 사실 뉴턴의 역학적 인과론은 산업혁명이 유럽 전역에 전파되는 것과 동시에 받아들여졌으며 그에 따라서 산업적 현실상도 확립되어 갔다.

만일 세계가 소형의 당구공과 같은 독립된 입자들로 구성된 것이라면 모든 원인은 이들 공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생겨나게 된다. 하나의 입자, 즉 원자는 제2의 원자와 부딪친다. 1의 원자의 운동은 제2의 원자가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되고 그 운동은 제1의 입자나 원자의 운동이 가져온 결과가 되는 것이다. 공간에는 운동이 없는 작용은 없으며, 원자는 동시에 한 군데 이상의 장소에는 존재할 수 없다.

복잡하고 흐트러져서 예측할 수 없는 아주 번잡스럽고 신비하고 혼돈스럽던 우주가 갑자기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 세포의 내부원자로부터 까마득히 먼 밤하늘의 차가운 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이 운동하는 물질로서 각 입자가 인접한 입자를 활성화시켜 그것을 움직여 영원한 존재의 춤을 추게 하고 있다고 해석되어졌다. 이 사상은 후에 라플라스가 주장했듯이 무신론자가 신이라는 가설 없이도 생명을 설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신의 자리가 남아있었다. 신이 지금은 그 게임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신은 당구채를 가지고 최초로 당구공을 쳐서 움직이게 한 원동력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관한 이 비유는 새로이 등장하는 산업주의의 문화에 대해서 지적 아드레날린 주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프랑스혁명의 토양을 만들어 내는 데에 기여했던 급진적 철학자의 한 사람인 돌바크 남작은 의기양양하게 내뱉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대집합인 우주는 물질과 운동만을 나타낸다. 이 전체는 우주의 사색에 오직 원인과 결과의 중단없는 방대한 연속만을 제시해 줄 뿐이다." 의기양양한 이 짧은 한마디 속에는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즉 우주란 조립된 실체로서 개별적인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집합체가 이루어져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물질은 운동 즉 공간에서의 이동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되었다.

사건은 직선적으로 연속해서, 즉 과거에는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시간의 직선을 따라 평행으로 나아간다. 돌바크에 따르면 증오, 이기심, 사랑과 같은 인간의 감정도 마찬가지로 반작용, 관성, 인력 등 물리적인 힘에 비유되며 마치 과힉이 공동의 선을 위해 물리적인 힘을 조작하는 것처럼 현명한 국가는 그들의 인간적 감정을 공공의 복리를 위해 조작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산업사회의 현실을 근거로 한 우주관 그리고 거기에 내재된 갖가지 가설로부터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강한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행동 양식이 탄생했다. 거기에는 우주나 자연뿐만 아니라 사회나 인간도 일정하게 에측가능한 법칙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하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확실히 제2의 물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은 강력히 우주의 법칙성을 논리적으로 논한 사람들이었다.

뉴턴은 천체의 운행 법칙을 자신 있게 발표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심리상태의 법칙을 찾아내어 설명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학자, 기술자, 사회과학자, 심리학자들이 이러한 분야 외의 각 분야에서 여러 가지 법칙을 차례차례로 탐구했다.

2의 물결 문명은 이제 기적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고 폭넓은 응용성을 가진 인과론을 자유로이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전의 복잡하게 보이던 것도 이제는 간단한 공식에 환원해서 설명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법칙이나 규칙은 뉴턴 또는 이름이 알려진 누군가가 법칙을 정했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실험과 경험적 검증을 거쳐 타당성이 실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법칙을 따라 다리를 건설하고 공중으로 전파를 보내고 생물학적 변화를 예지할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경제를 움직이고 정치운동이나 정치기구를 조직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행동까지 예측하거나 형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한 것이라고는 어떠한 현상도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변수를 발견하는 일뿐이었다. 만일 적당한 당구공을 찾아내서 그것을 가장 좋은 각도에서 쳐주기만 하면 무슨 일이라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인과론은 새로운 시간관, 공간관, 물질관과 결합함으로써 인류의 대다수를 낡은 우상의 압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것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성취하게 함과 동시에 모든 것의 확실한 개념화와 실천적 성취의 기적할 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권위주의에 도전하여 수천 년 동안 구금상태에 있던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산업적 현실상은 또한 스스로의 새로운 질곡을 낳았다. 즉 산업주의적 정신구조는 수량화되지 않은 것을 멸시하거나 무시하고 때로는 엄밀성만을 중시하여 상상력을 도외시하였다. 또한 인간을 너무 단순화하여 원형질로 된 개체로 생각하였고 어떠한 문제든지 기계적 해결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산업적 현실상은 또한 표면상으로 도덕적 중립성을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제2의 물결 문명의 호전적인 초이데올로기로서 산업시대를 특징짓는 좌익사상이나 우익사상 모두가 거기에서 파생된 자기 정당화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다른 문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2의 물결 문명도 일그러진 여과 장치를 만들어 내는 이 문명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나 우주를 보게 되었다. 이 여과 장치를 통한 일련의 사상, 관념, 가설,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난 온갖 유추가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가장 강력한 문화체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끝으로 산업주의의 문화적 측면이라고도 해야 할 산업적 현실상은 스스로가 이룩해 놓은 사회에 적합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이든 사회주의 사회이든 사회를 만들어 내는 추진력이 되었다. 산업적 현실상은 새로운 에너지 체계, 가족체계, 기술체계, 경제체계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제2의 물결 문명을 형성했던 것이다. 오늘날, 여러 가지 제도, 기술, 문화와 함께 지구를 휩쓸고 있는 제3의 물결의 급변 속에서 제2의 물결 문명 전체가 붕괴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산업주의의 결정적 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산업화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10장 홍수

 

산업화 시대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볼 때 3세기에 불과한 짧은 기간동안을 휩쓴 홍수와 같은 사건이었다. 산업혁명은 왜 일어났는가? 2의 물결은 왜 전 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여러 가지 작은 변화의 흐름들이 이 시기에 한곳에 모여들어 하나의 커다란 강물을 이루었다. 신세계의 발견은 산업혁명 전야의 유럽의 문화와 경제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인구증가는 도시로의 인구이동을 촉진했다. 영국은 산림자원이 고갈되어 연료를 석탄으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탄광의 갱도는 더욱 깊어져서 말이 움직이던 종전의 양수기로는 갱내에서 솟아나는 물을 퍼낼 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의 완성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넓혀 주었다. 점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이 널리 확산되어 교회와 정치 권력을 위협하게 되었다. 문맹률이 저하되고, 도로가 개선되면서 교통기관이 발달하자 어떤 모든 변화들이 한 지점에 일시에 집중되어 역사의 둑을 뚫는 힘이 되었다.

산업혁명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원인을 하나로 좁힐 수가 없고, 다른 것에 비해 특별히 지배적인 원인을 들기도 어렵다. 역사는 기술 자체만의 발전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이념이라든가 가치관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계급투쟁에서만 찾는 것도 잘못이다. 생태학적 변화나 인구 동향, 통신 기술상의 발명과 같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역사는 아니다.

산업혁명이건 다른 역사상의 사건이건 간에 경제적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변화들을 설명할 수 있는 '독립변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요인이 끝없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것이다.

미로처럼 복잡한 원인을 찾으려 해도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하나의 목적에 가장 합치된 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왜 그 요인만을 특별히 선택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무리라는 사실을 인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전제에서 제2의 물결 문명을 형성하기 위해 모여든 여러 요인들 중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분열 확대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시장이라고 일컫는 그물코와 같츤 교환조직망의 성장이 가장 뚜렷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시장이 현실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시장은 놀랄 만큼 복잡해져서 사람들의 일련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치며 시장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은유와 숨겨진 가정들이 사회적 현실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미 보아왔듯이 근대의 화폐제도는 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쐐기에 의해서 태어났다. 중앙은행제도, 주식시장, 세계무역, 관료적 계획자들, 모든 것을 양으로 파악하는 계량주의적 사고방식, 계약의 윤리, 물질주의적 경향, 편협한 성공관, 엄격한 보상체계도 모두 생산과 소비의 분리와 화폐제도의 확립이 가져다준 것이다. 고성능의 계산기가 태어난 것도 그 때문인데 계산기의 문화적 중요성을 우리는 경시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는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 그리고 중앙집권화를 향하여 여러 면에서 박차를 가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분담이나 기질의 차이도 이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 힘입은 바가 크다. 2의 물결을 일으킨 요인은 다른 데에도 얼마든지 있지만 먼 옛날부터 일체였던 생산과 소비 사이의 분열이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음은 틀림없다. 이 분열의 여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의 물결 문명에 의해서 기술혁신이 일어나고 자원이나 문화가 바뀐 것만은 아니다. 인간 그 자체가 바뀌고 그 결과 새로운 성격을 띤 사회가 태어나기도 했다. 물론 여성이나 어린이들도 제2의 물결 문명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또 그와 반대로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성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시장과 관계를 가지고 새로운 작업방법을 경험했기 때문에 여성보다 산업주의적 성격을 더 깊이 익혔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요약하여 '산업화 인간: Iudustrial Man'이란 말을 사용해도 여성 독자의 양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산업화 인간은 그 이전의 어떠한 인간과도 다르다. 에너지라는 노예를 지배하여 그 위에 군림함으로써 자기의 미약한 힘을 극도로 강화했다. 산업화 인간은 공장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기계와 조직을 상대로 일생의 대부분을 지내게 되고 거기에서는 개인이 마치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핵가족의 일원으로 자라 공장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학교에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세상일은 대개 대중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다. 그는 대기업이나 관청에서 근무하고 노동조합이나 교회와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자기 힘을 쪼개서 조금씩 기여하면서 살았다. 자기가 사는 마을이나 도시에 대한 소속감은 희박해지는 한편 국가에 대한 소속감은 강해졌다. 자연과 대치하고 생활하면서 평소부터 자연을 황폐시키는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자연을 찾아 나선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자연을 해치면 해칠수록 자연을 로맨틱하게 노래하며 찬미하는 법이다.) 산업화 인간은 자기자신을 거대한 경제, 사회, 정치체제의 뒤얽힘 속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한 여러 체계의 지나친 복잡함에서 그 확대를 잃고 만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산업화 인간은 자주 반항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생활을 위해 싸우고 사회에서 요청되는 역할을 맡도록 배웠다. 이러한 역할에 불만스런 일이 많지만 이윽고 순응해 간다. 생활 수준은 향상되었으나 자기 자신을 풍요한 사회의 희생자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산업 중심의 사회에서는 시간을 재촉하면서 오로지 달려가고 있으나 결국 도착하는 곳은 묘지라고 느끼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이 지구와 거기에 사는 인간은 규칙적이고도 냉혹하게 움직이는 광활한 우주 속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실을 깨달았다.

산업화 인간은 그때까지의 인간이 여러 의미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살았다. 인간의 오감에 작용하는 것까지도 바뀌어 버린 것이다.

2의 물결은 소리의 세계도 바꾸었다. 수탉이 때를 알리는 소리에 뒤섞여 사라져 버렸다. 밤은 낮과 같이 밝아지고 취침시간이 늦어졌다.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시각 영상의 세계도 열렸다. 우주에서 인간이 보지 못하던 지구의 사진을 보내게 되고 일부 영화에는 초현실주의적 몽타쥬가 나타났다. 전자현미경은 생명의 신비를 해명해 주었다. 거름냄새가 없어지고 대신에 휘발유 냄새와 페놀의 악취가 코를 찌르게 되었다. 고기나 야채 맛도 바뀌었다. 오감에 작용하는 모든 지각세계가 바뀐 것이다.

사람의 몸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표준적 신장이 현재와 같이 커진 것도 이 시대에 들어선 뒤부터이다. 여러 대에 걸쳐 자식들이 줄곧 부모의 키를 뛰어넘었다. 신체에 대한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엘리어스는 "문명의 과정"에서 '16세기까지는 독일이나 다른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나체를 보는 일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체를 수치로 생각하게 된 것은 제2의 물결이 확산된 이후의 일이다. 특별한 잠옷을 입게 되면서부터 침실의 풍속도 바뀌었다. 식탁용 포크와 나이프가 보급된 결과 식사에서까지 예절을 따지고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죽은 짐승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것을 경사스럽고 즐거운 일로 생각하던 문화에서 '고기 요리라도 동물의 주검을 연상시키는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려는' 문화로 이행된 것이다.

결혼은 경제적인 편의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전쟁의 규모도 확대되어 공장의 조립라인에 의존하게 되었다. 부자 관계가 바뀌고 사회적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인간관계가 모든 면에서 바뀌었다. 이렇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의 자의식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여러 가지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너무나 광범위했기 때문에 인간의 두뇌는 그것을 어떻게 파악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게 되었다. 한 문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 것인가? 그 문명의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척도로 평가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것인가? 예술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그 문명이 인간의 수명을 얼마나 연장시켰는가? 과학적인 성과는 얼마나 올렸는가? 개인에게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었는가 등을 평가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2의 물결의 영역 내에는 대공황과 엄청난 인명의 손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물질적 생활 수준이 향상된 것은 틀림없다. 산업주의의 비판자들은 18~19세기 영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생활을 들어 제1의 물결 시대를 자주 낭만적으로 말하곤 한다. 옛날의 전원생활은 온화하고 안정되고 유기적인 공동생활로서 단순한 물질적 가치보다도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연구결과는 아름다워 보이는 시골 촌락도 사실은 영양실조나 질병, 빈곤, 불량배의 소굴이며 폭력의 온상이었으며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영주와 주인의 채찍 앞에 속수무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도시나 그 주변에 생겨난 보기 흉한 빈민가와 불량식품, 질병을 만연시키는 비위생적인 급수, 비참한 구빈원, 끊이지 않는 폭력 등이 모두 문제였다. 확실히 그것은 비참한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산업혁명 이전의 생활조건에 비하면 상당히 향상된 것이 분명하다. 영국의 작가 베이지는 '영국의 농촌이 목가적이라는 것은 과장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빈민가이기는 하지만 농촌에서 도시의 이주가 사실상 평균 수명을 지표로 해보아도 주택조건이나 음식의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보아도 비약적인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의미했던 것이다.

보건의료에 관해서도 윌리엄스의 "고뇌의 시대: The Age of Agony"나 클라크슨의 "산업혁명 이전 영국에 있어서의 죽음, 질병, 기근: Death Disease and Famine in Pre-industrial England"을 읽어보면 제1의 물결 문명을 찬미하고 제2의 물결 시대를 비판하는 것이 잘못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크리스티나라너는 이러한 서적에 대한 비평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회사학자나 인구통계학자의 연구에 의해 드넓은 농촌에서도 불결한 도시와 같이 질병, 고뇌, 죽음 등이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균 수명은 매우 짧았다. 16세기에는 40세 정도였으나 17세기에 들어서자 전염병이 유행하여 35~36세까지 낮아졌다. 간신히 40대 초반으로 회복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선 뒤의 일이다. 결혼을 해도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 사는 일이 드물었고 유아의 사망률도 매우 높았다.' 오늘날의 보건 제도가 잘못되어 있고 위기적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의 보건의료에는 문제는 있겠으나 산업혁명 이전에는 공적인 의료기관은 전무했으며 출혈 요법을 치료수단으로 여겼고 수술도 마취 없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 시대의 주된 사인은 페스트, 티푸스, 인플루엔자, 이질, 천연두, 결핵 등이었다. 라너는 냉철한 어조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보건의료의 진보라 하지만 고작 사망원인이 약간 바뀐 정도가 아닌가라고 현명한 체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수명이 연장된 것은 사실이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전염병이 노인뿐 아니라 젊은이까지도 무차별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럼 보건의료나 경제문제에서 예술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로 눈을 돌려보자. 산업화 시대는 물결주의 일변도의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가 그 이전의 봉건시대에 비해 정신적으로 더 불모의 시대였을까? 공업을 중시하고 기계를 중심으로 한 사상은 전시대에 비해 새로운 것에 대한 사고방식을 더 개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중세의 교회나 전제군주에 비해 어느 쪽이 이단에 대해 너그러웠을까? 현대의 비대화한 관료제도와 수 세기 전의 중국이나 고대 이집트의 관료제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경직되어 있을까? 예술 면에서는 지난 300년 동안 서구의 소설, , 회화 등은 그 전시대, 혹은 서구 이외 지역의 예술에 비해 생동감이 적고 깊이가 없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지 못한 단순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의 물결 문명은 우리 부모세대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한 반면, 물론 어두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기보다도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지구상의 생태계를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엉망으로 파괴해 버린 점이다. 자연을 경시하는 산업현실적 편견, 인구증가, 과학기술의 비인간성, 그리고 제2의 물결 문명 자체가 언제나 확대재생산을 필요로 한다는 것 등의 원인으로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환경파괴가 일어났다. 산업화 이전 도시의 거리거리에는 말똥이 굴러다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오염이란 세삼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서 곧잘 인용되는 예이다. 고대 도시의 길거리가 하수에서 넘쳐 나온 오물로 가득해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사회에 들어서자 생태계의 오염 및 자원의 극단적인 이용이라는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어 현재나 과거의 척도로는 다루기 어렵게 되었다.

도시를 파괴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지구 전체를 파괴할 그러한 수단을 문명이 가졌던 경우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인가의 탐욕이나 부주의의 결과 바다 전체가 오염되거나 동식물의 종이 하룻밤 사이에 멸종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광산의 개발은 지구표면을 상처투성이로 만들고 헤어스프레이의 에어졸은 오존층을 고갈시켰다. 열오염은 지구전체의 기상조건을 바꾸어 버릴 정도가 되었다.

더욱 복잡한 것은 제국주의의 문제이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이 광산채굴을 위해 노예로 사용되고,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농업이 도입되는 등 식민지의 경제는 산업국가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크게 왜곡되어 버렸다. 이러한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제2의 물결 문명은 인종차별을 낳고 자급자족의 소규모경제를 무리하게 세계적인 무역체제로 몰아넣었다. 상처는 아직도 곪고 있어 치유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옛날의 가난한 자급자족의 경제를 찬미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까지도 300년 전에 비해 더 악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평균 수명, 식량 사정, 유아사망률, 문맹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면에서 아직도 사하라사막 주변이나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수백만, 수천만이라는 사람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를 비관하기에 바쁜 나머지 과거를 미화하고 낭만적인 옛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래를 향한 길은 과거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2의 물결 문명을 일으킨 원인이 하나가 아닌 것처럼 이에 대한 평가도 한 가지일 수 없다. 나는 제2의 물결 문명을 결점도 포함해서 묘사하려고 했다. 내가 한편에서 이 문명을 비난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이를 찬양한 것은 단순한 평가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면적으로 찬미하는 것도 옳다고 할 수 없고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도 옳은 평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산업주의가 제1의 물결 밑에서 살던 윈시적인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해 버린 것을 증오하고 있다. 2의 물결은 자기 문화에 대하여 오만하고 지역에 대하여 수치스런 약탈행위를 저질렀다. 또 도시의 빈민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에너지 낭비, 창조적 정신의 낭비는 불쾌할 정도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시대나 같은 시대의 사람에 대한 불합리한 혐오는 미래를 창조하는 최상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산업주의는 과연 쾌적한 문명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을 덮치는 악몽이었을까? 혹은 또 광막한 황야이며 완전한 공포의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까? 과연 과학기술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온통 죄악으로 칠해진 세계였을까?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보다 더 많은 장점이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영원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산업화 시대도 역시 인생 자체와 마찬가지로 고통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길고도 짧은 시대였다.

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현재를 역사 속에서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별도로 하고 산업화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다음 차례의 변화 물결이 시작되면 제2의 물결은 에너지를 다 써 버리고 쇠약해져 사라져 간다. 새로운 물결의 도래에 의해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 산업 문명은 이제 정신적으로 존속할 수 없게 된다.

첫째로 우리는 자연에 대한 투쟁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생태계가 이제 산업주의의 공격에 견딜 수 없는 한계까지 도달해 버린 것이다. 둘째로 이제까지 산업화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온 재생 불능의 에너지에 더 이상 무한정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기술사회의 종말 또는 에너지 자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의 과학기술의 진보는 환경적 요인들에 의해서 과거에 없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대체 에너지가 개발될 때까지 산업국가는 아마 몇 번이고 격렬한 퇴조의 증상으로 인해 고생할 것이다. 그리고 낡은 형태의 에너지와 대체할 것을 찾아내기 위한 싸움이 우리에게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가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앞으로 몇십 년 이내에 값싼 에너지가 종말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2의 물결 문명은 이 문명의 발전을 뒷받침해 온 두 가지의 중요한 성분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동시에 제2의 물결에 있어 다른 하나의 숨은 성분이었던 값싼 원자재도 없어지고 있다. 식민지주의 또는 신제국주의의 시대는 끝나고 선진산업국이 나아갈 길은 둘밖에 없다. 하나는 대체 에너지나 새로운 원자재를 선진산업국 상호 간의 무역에 의해서 교역함으로써 비산업국과의 경제관계를 점차 약화시켜 가는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산업국과의 무역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조건으로 무역을 하게 될 것이다. 어느 경우나 원가가 상당히 높아지고 문명의 에너지 기반은 물론이고 자원기반 전체가 완전히 바꾸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

산업사회는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해 변혁을 강요당할 뿐 아니라 체제 내부의 힘에 의해서도 와해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가족제도나 프랑스의 전화제도(중남미의 작은 개발도상국보다도 나쁜 상태에 있다), 일본의 전철체제를 보거나(승객들이 역에 밀어닥쳐 역무원을 인질 삼아 항의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가족제도, 통신체계, 교통체계 등 문제는 모두 같아 인간과 제도 간의 긴장 관계가 이미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다.

2의 물결체계 전체가 위기에 빠져 있다. 사회복지제도, 우편제도, 학교제도, 의료보험제도, 도시체계, 국제금융 제도도 모두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국민국가 그 자체도 의문시되고 있다. 2의 물결의 가치체계도 붕괴의 위기에 빠져 있다.

산업 문명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고 있던 역할분담, 의무와 책임도 위기에 처해 있다. 남녀 역할분담의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이 그러한 가장 극적인 현상이다. 여권운동, 동성애 합법화 운동, 유니섹스(unisex) 패션의 보급에서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분담은 서서히 불분명해지고 있다. 직업에 있어서의 역할분담도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간호사와 환자가 모두 의사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하고 있다. 경찰관이나 교사도 정해진 역할을 버리고 위법으로 되어 있는 파업을 하게 되었다. 법률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은 변호사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있다. 노동자는 차츰 경영참여의 요구를 증대시키고 전통적 경영자 역할을 침해하고 있다. 산업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던 역할 구조의 이러한 범사회적 균열 현상은 매일 신문지면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정치적 항의나 데모 등 표면에 나타난 변화보다도 더욱 의미하는 바가 크고 사회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핵심적 지주의 상실, 사회의 생명유지장치의 기능 마비, 역할 구조의 분해 등의 여러 가지 압력들이 수렴되어 가장 기본적이고도 취약한 구조물인 인격의 위기를 조성했다. 2의 물결 문명의 붕괴는 인격의 위기를 만연시켰다.

오늘날 자기의 생활 태도에 자신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아 영화관에 쇄도하고, 연극을 보고 자기 개발을 주장하는 책을 탐독하고 있다. 비록 내용이 애매하더라도 주체성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필사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미국에 있어서의 인격의 위기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격 위기의 희생자들은 정신과의사의 집단요법에 몰려들고 신비주의의 포로가 되고 성 유희 등으로 치닫는다. 그들은 변화를 갈망하면서 다가올 변화를 두려워한다. 어떻게든 현재의 존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에 뛰어들어 현재의 자기와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다. 직업, 배우자, 역할, 책임까지도 바꾸고 싶어한다.

원숙하고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미국의 기업인들조차 현실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미국 경영자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간관리자의 40퍼센트 이상이 현재의 직업에 불만을 품고 있고 전체의 3분의 1 이상의 사람들이 좀 더 보람 있는 직업으로 바꾸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만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방랑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추구하기도 한다.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으며 수축되는 원을 따라 더욱 더 빠른 속도로 돌다가 마침내 압력에 못 이겨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불안의 원인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다가 까닭 모를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게 된다. 마음속의 고민이나 불안이 더 큰 사회적 위기의 주관적 반영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사회의 병폐를 반영한 연극 중의 어떤 장면을 실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여러 가지 위기는 각각 하나의 고립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인격의 위기 사이의 관계를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남녀의 새로운 역할 간의 관계를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남녀의 새로운 역할 간의 관계를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붕괴의 위기에 빠져 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어느 것이나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관련된 연속적인 변화의 물결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 세대의 본질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산업화 시대는 과거의 것이 되고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탈산업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는 여러 가지 변화의 징조들 중에서 진정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제3의 물결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 생활의 테두리가 되는 것은 이러한 제3의 물결의 변화이다. 멸망해 가는 옛 문명에서 지금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새로운 문명으로 원활히 갈아타려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몰아닥칠 더욱 격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제3의 물결의 변혁을 정확히 파악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변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을 면밀하게 살펴볼 때 우리는 온갖 실태와 붕괴 현상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 이미 새로운 것이 태어날 조짐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가까이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제3의 물결이 벌써 멀지 않은 해변가에서 우르렁거리면서 밀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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