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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작은 인간 1

기상천외한 짐승의 탄생

도슨의 새벽 인간, 그 출현과 사라짐

다이아몬드 가득한 하늘의 루시

호모 사피엔스의 싹이 트기까지

작은 인간, 그 손재주의 수수께끼

테크놀로지의 여명

무엇을 위한 도구인가

고기가 뭐길래?

인류의 조상은 살인 원숭이였는가

최초의 사냥꾼

호모 에렉투스의 수수께끼

체온, 머리카락, , 그리고 마라톤

뇌가 생각하기 시작하다

문화는 인간에게만 있다?

언어적인 도약

원시적인 언어?

원숭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았더니...

소리의 승리

네안데르탈인에 대하여

네안데르탈인의 운명과 우리 인류의 기원

문화의 그림자

조상은 없다?

인종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인류의 피부에 어떻게 색깔이 입혀졌을까

 

 

 

 

기상천외한 짐승의 탄생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나온 지 12년이 지난 1871년 찰스다윈(Charles Darwin)인간의 계보(The Descent of Man)라는 책을 출간했다. 거기에서 그는 인간 진화에 관한 질문을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고 있다. <사람도 다른 생물 종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전 단계의 형태로부터 나온 것이다.> 자연 선택이라는 것이 다른 생물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적용되는 바로 그만큼 인간의 기원을 풀이하는 데도 적용되며, 이는 다니지 신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뛰어난> 인지적, 심미적, 도덕적 능력에도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은 개나 고양이 같은 미천한 동물들도 공유하는 것인데, 다만 그들은 가장 초보적인 수준으로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그토록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다윈은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과 동물의 중간 정도의 지능과 신체를 가진 원인류가 생존 경쟁에서 낙오해 오래전에 멸종한 사살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커다란 유인원들은 인간의 진화론적 기원을 밝히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들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나머지 생물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의 골격이나 생리 또는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기분 나쁘게도 자꾸만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록 그들이 지능에서 좀 뒤지기는 하지만 사람과 한 가족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사실 다윈보다 훨씬 이전에 스위스의 저명한 분류학자 린네(Linnaeus)는 유인원가 인간을 같은 분류학적 범주에 집어넣은 바 있다. 진화론에 반대했던 생물학자들조차도 큰 유인원들을 인간의 여러 다른 종류로 또는 인간을 단지 한 종류의 원숭이로 생각하는 데 반박할 순수한 해부학적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다윈과 그의 추종자들도 인간이 어떤 전 단계의 형태(pre-existing form)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후에는 인간이 모종의 유인원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단정지었다. 이런 추론 끝에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나중에 그런 식으로 이름이 붙여진 그 개념은 처음부터 잘못 짚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화론에 따르면 관련된 생물 종들 사이에 그 고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기 때문이다). 반 유인원이자 반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를 밝히려다가 다윈의 추종자들은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원숭이의 상태와 사람의 상태로 각기 떠올리는 모습들을 근거로 해서 한 가지 기상천외한 짐승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짐승은 두뇌가 사람처럼 커다랗고 턱에는 원숭이처럼 송곳니가 달려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엉뚱한 상상력이 발휘된 데에는 다윈의 책임도 있었다. 그는 <인간의 초기 선조들> 가운데는 <커다란 송곳니를 가지고 무시무시한 공격 무기로 사용했던 수컷들>이 있었다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다윈 그 자신도 또 하나의 다른 <잃어버린 고리>- 인간가 유인원의 공통 조상이 될 수 있는 생물 종- 를 찾아내 묘사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바로 그 <잃어버린 고리>를 나도나도 잇따라 찾아나서는 바람에 그러한 구분은 애매해졌다. 그 괴상한 짐승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유젠느뒤부아(Eugene Dubois)라는 네덜란드 의사였다. 1890년대 초기 그는 자바 ㅡ 솔로 강 둑을 따라가면서 화석을 발굴하다가 납작하면서 둘레가 큰 테두리 해골 하나를 발견했다. 윈시 시대의 것으로 보였다. 그 옆에는 넓적다리뼈가 있었는데 영락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는 그 발견물에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 사람같이 생긴 직립 유인원- 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그것이 <인간의 선조>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러한 발견은 유럽의 전문가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 두개골은 인간과 유사한 종의 뇌를 담기에는 이마가 너무 좁다는게 그 이유였고, 결국 그것은 다지 그냥 한 마리 유인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넓적다리뼈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대인의 유골이 어쩌다 그리로 간 것이라는 것이었다. 뒤부 자신은 나중에 그것은 잃어버린 고리가 아니라 멸종한 커다란 긴팔원숭이라고 결론지었다. 뒤부아가 죽고 나서야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는 오늘날의 호모 에렉트스(Homo erectus)라고 알려진 종의 초기 멤버로 다시 분류되었다. 사실 그의 발견은 중요했다.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유인원 선조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였던 것이다. 비록 그 두뇌의 크기가 뒤부아 비판자들이 설정한 기준을 넘었고, 돌을 가지고 정교한 도구를 만들기는 했지만, 에렉투스는- 지금부터 그렇게 부르겠다- 인간의 수준에 충분히 도달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의 서주였다.

마침내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진짜 잃어버린 고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자바가 아니라 바로 자기들이 살고 있는 영국의 서섹스에서.

 

 

도슨의 새벽 인간, 그 출현과 사라짐

 

1912년 찰스 도슨(Charles Dawson)이라는 아마추어 골동품 수집가는 지질학회에서 해골 조각 몇 개와 부숴진 아래턱뼈를 발굴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들은 서섹스에 있는 필트다운 커먼스 근처의 플레스토센느에서 멸종한 포유류 뼈다귀와 섞여 있었다고 한다. 뛰어난 해부학자이자 영국 자연사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스미스 우드워드(Smith Woodward)가 일어나 도슨의 진술을 거들어주었다. 그는 멸종한 동물로 추정되는 모습을 석회로 만들어 청중들에게 보여주면서 그것을 그때부터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Eoanthropus Dawsini)- <도슨의 새벽 인간>이라는 뜻- 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이 두개골은 볼륨도 크고 둥글며 이마도 넓어서 한결 현대적으로 보였지만 원숭이의 것과 비슷한 아래턱이 달려 있었다. 송곳니는 찾지 못했지만 우드워드는 다윈을 끌어들였다. 그는 그 송곳니를 찾기만 하면 그 두개골은 뾰족한 앞니를 한 모습으로 완결되리라고 예언했다. 일 년도 채 안 돼 프랑스의 사제이자 과학자인 떼아르 드 샤르뎅(Tdilhard de Chardin)이 필트다운의 발굴을 돕겠다고 자청(가톨릭교회는 당시까지 진화의 물리적 증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드워드가 예언했던 바로 그 송곳니로 보이는 것을 찾아냈다. 유인원의 송곳니만큼이나 <뾰족하고 앞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조금도 놀랄 일은 못 되었다. 그것은 원숭이의 송곳니<였고> 새벽 인간의 턱 역시 어떤 원숭이의 턱이었다. 누군가가 -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 감쪽같이 속인 것이다. 그는 유난히 뼈가 두꺼운 현대인의 두개골을 구해다가 잘게 부순 쉬 갈색을 칠해 화석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멸종한 플레이트토세 포유류의 진짜 또는 가짜 화석들과 섞어 필트다운 지역에 묻어두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송곳니가 떨어져 나간 현대 오랑우탄의 아래턱 반쪽까지 구해다가 그 근처에 섞어 묻어 놓았는데, 그 위의 뒷부분이 부서져 없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의 두개골과는 맞물릴 수 없음을 아무도 모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턱이 어금니를 줄질로 깎아내어 마치 사람이 음식물을 많이 씹어서 남긴 마포같이 보이게 만들었고, 그 전체를 화석처럼 갈색으로 칠해 놓았기 때문에 그 전체 유골들을 한 유인원의 것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지은 것이다. 이런 일을 꾸민 그 짓궂은 자는 얼마나 주도면밀했던지 자기의 걸작품이 잃어버린 고리로 확신되기 위해서는, 그 증거물의 마지막 조각으로는 다윈이 실컷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려 놓은 바대로 송곳니가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드워드가 함정에 빠져 그 엉터리 송곳니에 관해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리자, 그 장난꾸러기는 자기의 창작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침팬지의 송곳니를 부분적으로 줄질하고 보통 갈색 염료를 칠한 다음, 그것을 누구라도 신뢰할 수 있는 어떤 성직자(떼아르 드 샤르뎅 - 옮긴이)가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 갖다 놓았다. 몇몇 학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새벽 인간의 두뇌와 그의 턱이 너무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학자들은 그 커다란 머리 때문에 의심을 하지 못했다. 역시 두뇌는 인간을 다른 짐승들과 구별시켜 주는 기관인 것이다. 손이 제아무리 재주가 좋은들 두뇌의 안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확실히 두뇌는 손의 능란함이 꽃 피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먼저 진화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영국에 처음 거주한 사람이 이마가 좁고 머리가 나쁜 자바의 직립 인간보다 이마가 더 넓고 지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얼마나 그럴듯한 사실인가?

새벽 인간은 영국의 새로운 황관이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연사 박물관에 열쇠를 꼭꼭 채워 단단히 보관했고, 그 첫 영국인의 소중한 유골을 연구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본 뜬 석고상을 조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 쇼를 꾸민 자를 그렇게 오랫동안 추적할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1953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뼈들은 정밀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영국 박물관에서 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 통상적인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석고상이 아닌 원본들에 새로 개발된 플루오르 연대 측정 방법을 적용하였다. 그 결과 새벽 인간의 두개골도 턱뼈도 전혀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이단적인 뼈들은 그동안 신성하게 보관되던 상자에서 꺼내어져, 원래 그것을 믿지 않았던 인류학자 바이너(J. S. Weiner)의 실험실로 넘겨졌다. 이빨 위의 줄질한 자국을 밝히는 데는 그냥 평범한 현미경 하나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이빨과 턱뼈에 송곳으로 작은 구멍을 몇 개만 뚫어보니, 안은 하얗고 신선한데 그 거죽만 인위적으로 변색시킨 것임이 발견되었다. 무려 80년 동안이나 고생물학계의 혼줄을 빼놓았던 그 생물 종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마침내 장애물은 모두 제거되었고 인간의 진화는 스스로의 기반 위에 서게 되었다.

 

 

다이아몬드 가득한 하늘의 루시

 

그러나 그러한 진실의 규명에 모두가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줄곧 남아프리카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탐색해 온 일군의 과학자들은 희색이 만연했다. 1924년부터 그들은 비트바터스트란드 대학의 레이몬드 다트(Raymond Dart)가 석회암 채석장에 발굴한 어떤 나이 어린 영장류의 화석을 연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동물의 얼굴은 원숭이처럼 생겼고 두뇌는 침팬지보다 약간 큰 정도였지만, 송곳니를 포함해서 이빨과 턱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머리와 척추가 연결되는 두개골 하단부 구명은 당시까지 알려진 어떤 원숭이보다도 훨씬 앞쪽에 있었다. 그것은 그 동물이 일어서거나 돌아다닐 때 곧은 직립 자세를 취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트는 진짜 <원인>을 발견한 것은 뒤부아나 도슨이 아니라 바로 자신임을 재빨리 선언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 유인원에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 - 아프리카에서 온 남쪽 원숭이라는 뜻 -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필트다운 발굴품들은 여전히 영국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었고, 학자들은 다트의 발견에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다.

1950년이 되자 다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트랜스발 지역의 여러 동굴과 채굴장에서 트랜스발 박물관의 로버트 브룸(Robert Broom)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유해를 몇개 더 발견했다. 그 가운데는 다트가 발견한 어린 <남쪽 원숭이>가 완전히 성장한 형상에 속하는 두개골이 잘 보존된 채 발견된 것도 있었다. 브룸 씨는 또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 번째 종도 발견했다. 그 특징은 앞니와 어금니가 크고 얼굴이 넓으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이마에서 머리 꼭대기 뒷쪽에서 모서리뼈(cres)t가 날카롭게 솟아 뻗어 있어서, 살아 있었을 때는 거기에 씹는 근육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 두 번째 종은 보통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Australopthecus robustus)>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조금 더 작고 호리호리한 아프리카누스와는 구별된다.

새벽 인간이 거짓으로 판명되어 사라지자 다트와 브룸의 발견물이 각광을 받게 되었고, 아프리카는 잃어버린 고리를 더 찾아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동아프리카, 특히 남으로는 탄자니아로부터 북으로는 이디오피아까지 뻗어 있으면서 거대한 지각 변동 모양으로 유명한 리프트 계곡이 있는 동아프리카에는 바깥으로 드러난 화석이 가장 풍부한 세계적인 보고들이 있다. 리프트 계곡 일대에서 발굴되는 두개골, 이빨, , 다리뼈 등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이제 아프리카에 한때 최소한 두 종류의 인간 비슷한 원숭이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종류는 강인하고 어금니가 커서 아마도 딱딱한 열매를 깨고 질긴 식물 열매를 갈아 먹는 데 유리했을 법한 원숭이이고, 다른 하나는 호리호리하고 그 이빨이 보다 다양한 음식을 씹는 데 적합할 것 같은 원숭이이다. 둘 다 두 발로 서서 돌아다녔고, 그 뇌가 침팬지나 고릴라보다 크지 않으며, 송곳니가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지구의 자장을 거구로 하고 화산 지대에서 방사성 아르곤으로 바꾸는 것 같은 원리에 기초를 둔 연대기 측정 기술에 힘입어, 그 두 종류의 원숭이는 3백만 년에서 130만 년 사이의 것으로 판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1973년 도날드 요한슨(Donald Johanson)은 이디오피아의 아파트 지역에서 훨씬 더 오래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발견했다. 그것은 대충 325만 년 전에 살았던 것이다. 그 유해 가운데는 키가 3.5피트밖에 안 되는 작은 여자 어른의 두개골이 놀랍게도 40%나 완벽하게 보존된 것도 있었다. 그 옛날의 생물체와 20세기의 그 후예들 사이의 초현실적인 연계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요한슨은 거기에 루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에 그 이름은 비틀즈의 노래다이아몬드 가득한 하늘의 루시(Lucy in the Sky with Diamond)를 연상시켰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 L.S.D.라는 환각의 암호였다. 요한슨은 조금 더 산문적인 분위기를 가미해 거기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책에서는 편의상 아파렌시스라고 부르기로 한다. 루시 가까이에서 발견된 다른 아파렌시스의 유해들은 상당히 컸다. 아마도 남성들이었을 것이다(물론 그들은 다른 종의 존재를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요한슨이 루시를 발견한 지 일 년 후 매리 리키(Mary Leaky)와 그의 동료들은 북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 근처에 있는 라에톨리에서 아파렌시스 유해를 더 발견했다. 요한슨과 리키가 발견한 아파렌시스는 3,4백만 년 전에 크게 번성했다. 그러나 스티븐 워드와 앤드류 힐이 케냐의 바링가 호수에서 발견한 아파렌시스의 턱뼈는 인류가 5백만 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파렌시스의 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긴급한 상황에서 나무에 기어오르는 데 아주 유리했을 것 같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뼈는 조금 휘어져 있어서 손과 발로 나뭇가지를 쥐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4피트도 안 되는 키는 나무에 재빨리 오르는 데 더없이 편리한 조건이다. 그리고 윗쪽 팔의 길이는 아래쪽 다리의 95%, 양쪽 길이가 똑같은 침팬지와 대단히 흡사했다. 그에 비해 사람의 팔 길이는 다리의 70%밖에 안 된다. 긴 팔과 짧은 다리 역시 나무를 타는 데 장점으로 작용했다. 아파렌시스의 이러한 모습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의 직립을 방해하지 않았다. 인과에 속한 모든 동물들처럼 아파렌시스의 적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체는 땅 위를 두 발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파렌시스가 진짜 호미니드였을까 하는 의혹을 말끔히 지우기라도 하듯, 그는 직립을 증거하는 탁월한 기념비를 이 세계에 남겨주었다. 350만 년 전 라에톨리 가까이에서 사디만 화산이 폭발한 직후의 어느 날, 고운 화산재로 한 꺼풀이 뒤덮인 그 근방에 아파렌시스 세 명이 걸어갔다. 한 걸음씩 옮겨지는 그 발들은 푹푹 빨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아주 선명한 발자국이 남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사디만 화산은 친절하게도 그곳을 다시 한번 화산재로 그 발자국들을 봉하여 보존해 주었다. 최근 2, 3천 년 사이에 그 보호막이 벗겨지면서 그 발자취의 일부가 드러났는데 그 가운데 가장 긴 것은 75피트나 이어지고 있다. 그 발자국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현대인이 그와 비슷한 지표면에서 찍어냈을 듯한 모양새와 아주 닮아있다. 발뒤꿈치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난다든지, <손이 네 개인> 현대의 원숭이처럼 발가락들이 옆으로 쫙 벌어져 있지 않고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들이 평행을 이루는 것이 영락없는 사람의 발자국이다. 그 자국의 생김새와 선명함, 그러면서도 그렇게 오래전에 남겨진 것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아파렌시스는 아마도 <호모(Homo)>의 첫 성원은 물론이고 후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모두에게도 조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싹이 트기까지

 

그런데 아파렌시스가 언제 어디서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4백만 년 전부터 8백만 년 전 사이의 호미니드 기원에 관련된 화석 기록은 완전히 공백 상태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8백만 년 전 아프리카에는 이런저런 턱과 이빨을 가진 크고 작은 원숭이들이 다양하게 서식하다가 멸종했다는 사실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인간 이외의 영장류의 진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간간이 나서서 그 동물들 가운데 어떤 것이 호미니드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입증된 바는 없다. 라마피테쿠스(Ramapthe-cus)라는 9백만 년 된 원숭이 속이 한때 아파렌시스의 조상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새로 발견된 증거에 비추어 보니 오랑우탄의 조상임이 밝혀졌다.

화석이 없는 상태에서 아파렌시스의 선조를 더듬는 데 몇 가지 생화학적 방법이 활용될 수 있다. 그 기법들 가운데는 단백질 속에 있는 헤모글로빈 같은 아미노산의 연쇄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있디. 그 연쇄 구조가 비슷할수록 가까운 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를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재배합 기법이라는 것을 도입해 그 유전자들 내부의 염기 짝(base pairs)의 연속 패턴을 규명할 수 있다. 또 다른 기법으로 두 가지 상이한 종의 핏속에 특정한 이물질을 투입해 그에 대한 면역적 반작용의 힘을 재는 것이 있다. 반작용의 힘이 비슷할수록 가까운 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모든 기법을 적용해 본 결과, 해부학적 증거를 기초로 추론하고 기대했던 바대로 사람과 아프리카의 살아 있는 유인원들은 - 침팬지와 고릴라 - 다른 어떤 종들 사이보다 가깝게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면역력을 측정하는 기법은 두 종이 서로 갈라지기 시작한 시점을 잡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 단 연역적인 차이가 오랜 시간에 걸쳐 거의 같은 비율로 계속 축적되어야 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그 가정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고릴라, 침팬지 그리고 사람은 불과 6백만 년 전만 해도 하나의 공통 조상이었다고 버클리 대학의 빈센트 사리히(Vincent Sarich) 교수는 추정한다. 그렇다면 아파렌시스는 1~2백만 년 전에 유인원과 사람의 공통 조상이었다는 말이 된다.

30억 년 동안 생물의 나무는 자라면서 가지를 치고 싹을 틔웠다. 영장류(primates)에 속하는 큰 가지에는 유인원(apes)에 속하는 3천만 년 된 가지가 달려 있다. 그 가지 끝의 싹에는 지금 살아 있는 아프리카의 큰 유인원들(African great apes)이 있다. 그 가까운 곳, 지금은 잎새들로 가려져 있는 어떤 지점에서 유인원 가지는 새 가지를 쳐서 우리 인류를 담고 있다. 우리 인류라는 생물 종,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그 가지의 맨 끝에서 피어난 하나의 싹이다.

 

 

작은 인간, 그 손재주의 수수께끼

 

다음으로 떠오르는 문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초기 인류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점이다. 리프트 계곡을 따라 발굴 작업을 하던 과학자 팀은 바로 그 해답을 찾는 데 가장 중요한 발견을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에렉트스 - 뒤부아가 말한 피테칸트로푸스 - 가 구대륙 다른 곳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살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더욱 중대한 사실은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160만 년 전부터 살았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선 시기이다.

게다가 그들은 아파렌시스와 에렉투스 사이의 연결 고리였음직한 호미니드(Hominid, 호모 사피엔스와 그 가까운 진화론적 선조들 - 옮긴이) 종이 또 하나 존재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리키(Leaky) 부부가 탄자니아 올두바이 계곡에서 처음 발견한 그 종은 2백만 년에서 180만 년 전까지 번성했다. 그 두뇌의 크기는 650~775큐빅센티미터로, 450~500큐빅센티미터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900-1000 큐센티미터인 에렉투스의 중간치를 이루고 있다. 이 새로운 호미니드의 두개골 유해 가까이에서 루이스 리키는 거친 석기들을 발견했다. 그 대부분은 주먹 크기만한 조각의 한 쪽 끝을 쪼개 만든 것으로, 찍개(chopper)와 돌파편(flake)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확신하고 있던 리키는 에렉투스가 아니라 이 새로 발견된 종이야말로 인류의 첫 멤버가 되는 영예를 누려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손으로 물건을 만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줄여 하빌리스라고 부르겠다.

하빌리스의 두개골 용량은 아파렌시스와 에렉트스 중간이었기 때문에 몸집도 그 중간이었기 때문에 몸집도 그 중간쯤 되리라고 모두 추정했다. 그런데 1986년 올두바이에서 어떤 여자 하빌리스의 다리뼈가 발견되면서 그 가정은 깨지고, 과연 석기 제조가 인류의 멤버를 규명하는 적절한 기초인가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게 되었다. 하빌리는 키가 3피트 남짓했으니까 루시라는 이름의 작은 아파렌시스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발가락과 손가락이 조금 굽었고 팔이 길며 다리가 짧아, 나무에 오르는 것이 생활에 계속 어떤 역할을 차지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 큰 두뇌 및 그와 관련된 석기가 아니라면, 하빌리스는 사실 초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구별될 수가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하빌리스를 과연 인류의 한 멤버로 끼워주어야 할 것이냐는 의문이 든다. 지질학적으로 불과 20만 년 전에야 하빌리스는 에렉투스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에렉투스의 키는 남자의 경우 6피트, 여자의 경우 5피트 남짓했다. 에렉투스와 동시대에 공존했던 아프리카누스 역시 비록 두뇌가 작기는 하지만 에렉투스의 직계 조상이 아닌 것으로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다. 리키가 하빌리스를 무대 한가운데 세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만든 단순한 석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누스와 밀접하게 연관된 석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일부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그런 석기를 만들었다고 믿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사실 로부스투스 유적지에서는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찍개와 돌파편은 하다르 지역 고나와 오모 계곡의 이디오피아 지구에서 나온 것이다. 학자들은 칼륨-아르곤 방법을 이용해 오모에서 나온 도구를 250만 년 전의 것으로 확정했고, 고나에서 나온 도구를 31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했다. 오모의 도구들은 하빌리스를 50만 년 앞서고, 고나 것은 1만 년 앞선다. 어느 경우든 그 당시 살아 있던 유일한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고, 이는 그들 가운데 일부 또는 전부가 어떤 도구를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 도구들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석기를 만들었다면, 분명 그들은 좀 더 없어져 버리기 쉬운 물질을 가지고서도 도구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 그 생김새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걸 어디에 썼을까?

 

 

테크놀로지의 여명

 

동물들은 뇌가 크지 않아도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곤충들조차 도구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아모필라 우르나리아(Amophila urnaria)라는 말벌은 아래턱으로 조약돌을 집어서 은신처의 옆면을 메운다. 개미귀신은 깔때기 모양의 함정 속에 반쯤 몸을 묻은 채 고개를 세게 흔들어 모래를 뿌려댐으로써, 운 나쁘게 걸려든 곤충이 벽은 타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미르미센트 개미는 나무와 풀잎 쪼가리를 꿀이나 과즙 또는 먹이에서 나온 체액 등에 담아 적셔 놓아둔 후, 기다리고 있다가 먹이가 달라붙으면 자기 집으로 물고 간다.

새들 가운데 몇몇 종은 타조나 해오라기의 딱딱한 알을 깨는 데 돌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이집트 독수리는 부리로 돌을 집어 들고 타조 알에서 3피트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던지는데, 그 적중률이 상당히 높다. 콩새 같은 되새류는 나뭇가지, 선인장 가시, 또는 잎새 더미를 부리로 집어 나무껍질에 붙어 있는 곤충들을 꼼짝 못하게 하거나 그 은신처에서 쫓아내는 데 이용한다. 먹이를 먹을 때는 그것을 잠깐 발에 내려놓았다가 다음 나무로 날아갈 때는 다시 집어들고 간다. 물고기도 도구를 사용한다. 동남아시아의 사수어는 물어 쏘아서 파리나 모기를 떨어뜨린다.

역설적인 이야기 같은데, 자연발생적이고 즉각적인 도구 사용은 뇌가 크다고 해서, 그리고 본는보다는 학습에 더 의존하는 동물들이라고 해 더 정교하지도 않고 그들 사이에 일반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야생에서 도구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포유류는 극히 드물다. 간혹 코끼리는 나뭇가지를 꺾어 가려운 곳을 긁고 거머리를 쫓아내며 파리를 내쫓는다. 에스키모인들에 따르면 북극곰은 얼음 덩어리를 위에서 내던져 물개나 해마를 잡는다고 한다. 가장 습관적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포유류 가운데 하나가 캘리포니아 수달이다. 그냥 맨몸으로는 조개껍질을 열 수가 없는 그 동물은 바다 밑으로 헤엄쳐 내려가 반 파운드나 되는 납짝한 돌을 집어 네 발과 가슴 사이의 연한 살에 끼운 후 조개가 널려 있는 곳에 가서 커다란 조개 하나를 잡아뗀다. 그러고 나서 뭍으로 올라와 돌을 뒤집어 던져놓고 앞발로 조개를 들고서 열릴 때까지 돌에다가 내려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유인원과 원숭이들 역시 지능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능한데도 도구 사용의 범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딱딱한 열매, 나뭇가지, 대변 찌꺼기, 돌 따위를 연달아 던져 침입자를 격퇴시키는 것이 고작이다. 배분은 좀 더 나아가 돌을 가지고 껍질이 딱딱한 열매를 깨부수거나 도마뱀을 죽여서 먹는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땅 밑에 사는 벌레집의 입구를 후비기도 한다.

인간을 뺀 나머지 동물의 왕국에서 현재 가장 탁월한 도구 사용 솜씨를 가진 것은 침팬지이다. 구달(Jane Lawick-Goodall)과 그의 동료들은 몇십 년 동안 탄자니아의 곰베 국립 공원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한 종의 침팬지 무리를 연구했다. 거기에서 발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침팬지가 개미나 흰개미를 <낚거나(fish) 집어내는(dip) >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흰개미를 낚기 위해 그들은 나뭇가지를 골라 잎새를 벗겨낸다. 흰개미집은 뭔가로 얇게 덮인 터널 입구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콘크리트처럼 단단해 좀처럼 뚫을 수가 없다. 침팬지들은 그 입구의 얇은 막을 긁어내고 그 속에 막대기를 집어넣는다. 안에 있는 흰개미들이 그 막대기 끝을 입으로 물면, 침팬지들은 그것을 꺼내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개미들을 핥는다. 그렇게 해서 흰개미 집 하나를 다 훑고 나면 침팬지는 막대기를 입에 물고 다른 집 입구를 물색하러 다닌다.

곰베의 침팬지는 물리면 대단히 아픈, 공격적이고 방랑적인 열대산 군대개미를 <집어낸다.> 침팬지는 그 개미집을 땅속에서 발견하면 녹색 나뭇가지로 도구를 만들어 그 입구에 집어넣는다. 성난 개미들은 그 침입자를 내몰기 위해 몇백 마리 떼를 지어 거기에 기어올라 달라붙는다. <침팬지는 그 개미들이 나뭇가지를 따라 올라오는 것을 응시하다가 손 가까이에 거의 다다르면 그 도구를 재빨리 꺼낸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른 한 손으로 그 도구를 훑어... 엄지와 검지 사이에 한 줌을 집은 뒤 한입에 넣고는 질근질근 씹는다.>

침팬지들은 손이 닿지 않는 나무 구멍 속에서 물을 빨아내기 위해 <스펀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선 나뭇가지에서 한 줌의 잎새를 벗겨내 입에 넣고 대충 씹은 다음 어떤 구멍 속에 고영 있는 물에 넣어 적신다. 그렇게 축축해진 잎새 더미를 빨아 물을 먹는 것이다. 그들은 그와 비슷한 스펀지를 가지고 털을 말리거나 끈적끈적한 것을 닦아내기도 하며 새끼의 궁둥이를 씻기도 한다. 곰베의 침팬지들에게 막대기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해서 지렛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땅을 파고, 나무를 쳐서 개미를 떨어뜨리거나 땅속의 벌집 입구를 후비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을 조사한 자료에서도 비슷한 행동들이 보고 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개미를 낚고 흰개미를 집어 올리고 벌레집을 파거나 그것을 비집어 여는 다양한 방법들이 나와 있다. 탄자니아 카사카티 숲에 사는 침팬지는 침이 없는 벌은 꿀을 모을 때 막대기를 벌집에 넣어 거기에 묻어나오는 꿀을 핥는다. 또 어떤 곳에서는 침팬지들이 막대기와 돌로 껍질이 두꺼운 과일이나 씨앗을 쳐서 부수는 광경도 관찰된 바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발한 것 하나는 코트디봐르의 타이 숲에서 발견된 것이다. 거기에 사는 침팬지들은 판다 넛츠라는 딱딱한 껍질을 깨기 위해 우선 숲 바닥에서 망치로 쓸 돌을 구한다. 그 돌의 무게는 1내지 40파운드인데 침팬지들은 그것을 한쪽 팔에 품고 나머지 세 발로 땅을 짚으면서 600피트나 운반한다. 그들은 나무뿌리나 돌조각을 가져다가 모루로 이용한다. 코트디봐르의 침팬지들이 도구를 기발하게 사용하는 또 한 가지 경우는 껍질이 너무 미끄러워서 커다란 무화과나무를 올라가지 못할 때이다. 침팬지는 그 나무 곁에 잇는 다른 나무에 올라가는데, 그래도 무화과나무 가지에 손이 미치지 못하면 그는 올라가 있는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꺾어 잎새를 벗긴 다음 갈고리를 만들어서 무화과나무를 향해 높이 던진다. 마침내 하나가 걸리면 그것을 한껏 끌어당겨 손으로 열매를 따는 것이다.

침팬지는 다른 영장류들에 비해 무기를 사용하고 물건을 던지는 데 훨씬 뛰어난 것 같다. 그들은 돌, , 나무 같은 것을 아주 정확하게 던질 줄 안다. 어떤 곰베의 침팬지는 숲에 사는 돼지에게 큰 돌을 던져 실신시켰고, 그 사이에 다른 침팬지가 잽싸게 달려가 그 돼지가 돌보고 있던 새끼 돼지를 낚아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동물들은 모두 야생 상태에서보다는 사람에게 잡혀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있을 때 도구의 제작가 사용에서 훨씬 더 뛰어난 재주를 보인다. 이는 특히 침팬지가 더 그러하다. 나는 여기에서 설거지에서 자동차까지 모든 것을 하도록 인간이 고의로 훈련시켜서 영화나 텔레비전의 스타로 만들어진 침팬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심지어 쥐조차도 사다리를 타고 다리를 건설하면 벨을 울리고 불을 켰다 껐다 하도록 <훈련 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물의 도구의 제작과 사용은 침팬지가 자기 스스로 물건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다가 일부러 또는 우연히 그 쓰임새를 학습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높은 곳에 바나나가 있어서 그냥은 꺼낼 수 없는 상황에 박스와 막대기가 있다고 치자. 여기에서 침팬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박스를 바나나 밑에 갖다 놓고 그 위에 올라가 막대기로 바나나를 쳐서 떨어뜨린다. 그와 비슷하게 작은 막대기를 큰 막대기에 끼우고 그것을 다시 더 큰 막대기에 끼워 그 긴 장대로 멀리 있는 음식을 끌어오는 꾀를 발휘하기도 한다.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침팬지는 거기에서 빠져나가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데, 그것은 마치 탈옥수들이 필사적인 궁리를 하는 것과 흡사하다. 여기서도 막대기를 가져다가 지렛대로 삼아 문을 비집어 열고 울타리를 둘러싼 그물망을 끊는다. 아틀랜타 근처에 있는 <델타 지역 영장류 센터>에서는 침팬지들이 커다란 막대기를 부수고는 거기에서 나온 작은 막대기들을 20피트 높이의 울타리 틈새 여기저기에다가 끼워 넣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마치 등반가가 암벽을 타듯이 그 위를 하나씩 디디면서 울타리 끝까지 올라가서는 뛰어내려 도망친 일이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막대기와 나뭇가지들을 담벼락에다가 쌓아 올려 사다리를 만든 일도 있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사례이지만, 거울로 자기가 하는 일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으로 이빨과 목구멍의 이물질을 빼내는 데 언제나 플래시를 비추는 침팬지도 있다.

실험실 비슷한 상황에서 침팬지는 곤봉을 효과적으로 휘두른다. 어떤 연구자가 표범을 박제로 만들어 머리와 꼬리를 기계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장치해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침팬지들이 서식하는 들판에다 갖다 놓고 기다리다가 침팬지가 그것을 보자 그는 표범을 조종해 움직이게 했다. 그러자 침팬지들은 옆에 있는 곤봉을 집어 들고 공격했는데, 결국 표범은 갈기갈기 찢겨져 버렸다.

사람에게 잡힌 침팬지들이 도구를 정교하게 사요하는 것은 우리 원인류의 도구 사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거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침팬지는 필요가 생기면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을 확대할 줄 안다는 점이다. 양생 상태에서 비교적 도구 사용이 드문 것은 지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야생에서 그들은 대개 그냥 타고난 신체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비용-효과적인(cose-effective) 방식으로 일상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비용- 효과적이란 무엇인가? 지금 침팬지의 조상들은 끈으로 칭칭 감긴 울타리나 20피트나 되는 울타리 같은 것을 전혀 만나보지 못했다. 자연 선택 덕분에 그들은 팔다리만으로도 그들이 접하는 모든 갇힌 공간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들은 기어오르는 데는 명수였기에 양생 상태에서 높은 데 매달려 있는 과일을 따는 데 긴 막대기를 이용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물론 코트디봐르 침팬지들처럼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으리라). 당시 침팬지들은 그런 꾀를 내어 높은 데 매달린 열매를 따느니 차라리 다른 나무로 눈을 돌리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침팬지는 기어오르고 걷고 뚜는 데 네 발이 모두 필요하므로, 무거운 도구를 오랫동안 들고 다니다가는 자칫 기동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이 야생에서 도구를 사용할 때는 나뭇가지나 나뭇잎, 또는 돌처럼 가까이에서 손으로 바로 집을 수 있는 물건들에 주로 의존하게 된다. 그런 물건들은 만드는 데 수고를 들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어디에 가든 흔히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 없으면 아무 때나 버리더라도 별로 손해볼 게 없는 것들이다. 바로 그 때문에 큰 유인원과 원숭이들의 도구 사용에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던지는 것이 가장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듯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몸으로 때우는 것은 이중으로 비용-효과적으로, 그러면서도 훨씬 덜 위험하게 그를 퇴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순식간에 손과 발만 가지고도 안전한 곳으로 기어 올라갈 수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지금의 침팬지 수준의 지능에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도구 사용을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었으리라고 내가 확신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직립을 하게 되면서 도구 사용의 비용-효과에 변화가 왔다. 이제 도구를 집어 운반하고 사용함으로써 그냥 맨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더 유리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지금 침팬지들이 실험실이나 동물원에서 하는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어쩌다가 하는 것도, 긴박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생활 양식의 중요한 일부로서 일상적으로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도구인가

 

도구 사용과 직립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도구에 의존할수록 그들의 손을 발로부터 더욱 차별화되었다. 그리고 손이 발로부터 차별화될수록 도구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였는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혜택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도구 덕분에 땅에서 발견되는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섭취할 수 있게 된 것이라는 게 거의 확실하다. 물론 나무에서 사는 원숭이들도 그런 음식들을 전혀 섭취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만큼 그렇게 효과적으로 조달하지는 못했다.

이렇듯 식생활 면에서는 땅에서 나는 음식원들이 나무 열매를 대체하면서, 나무 등반 능력의 감퇴를 새로운 식생활로 상쇄시킨 개인들이 생존에 유리해지는 자연 선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도대체 땅에는 무엇이 그렇게 끌리는 게 있길래 원숭이들이 그것을 취하려고 도구의 제작과 사용에 투자를 했을까? 침팬지들을 통해 추적해 보자. 우리가 알기로 그들은 둔덕이나 구멍 속에 숨어 있는 벌레들을 찾기 위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데 가장 많은 투자를 한다. 여기에서는 나뭇가지와 막대기가 애용되는 도구이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곰베 침팬지들은 흰개미를 훑는 도구를 잘 만들어 가지고 개미집을 하나하나 쑤시고 다니는데, 그렇게 한 시간 동안 1킬로미터를 섭렵한다. 그리고 숲 자체보다는 나무가 뜸하게 나 있는 사바나 평원에 있는 흰개미집이 훨씬 크고 찾아내기가 쉽다. 우리 한번 상상해 보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조상은 일정한 계절이 되면 그런 곤충의 요새에 저장되어 있는 지방과 단백질 더미를 찾아 숲에서 바깥으로 과감하게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그런데 벌레의 집이 그것을 낚고 집어올리고 파는 도구의 원천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구 또는 그것을 만드는 재료는 숲 안에서보다 평원에서 더 먼 거리를 운반해야 한다. 막대기를 가장 잘 만들어 능숙하게 사용한 놈은 지방과 단백질을 풍부하게 섭취해 몸집도 커지고 튼튼해지고 새끼도 많이 낳았을 것이다. 평원으로 여행이 잦아지고 그 기간도 길어지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선조들은 그 새로운 서식처에서 더 많은 음식을 취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떤 계절에는 목초 씨앗도 벗겨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땅을 파고 그 속에서 벌레들을 찾다가 그들은 필시 칼로리가 풍부한 구근 식물과 뿌리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인들에게 중요한 식량자원이다. 그렇게 땅 속에 묻힌 보물들을 찾게 되자 그들은 땅을 파는 도구를 개선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아마도 한 쪽 끝을 이빨로 물어뜯어서 더 뾰족하게 만든다든지, 돌에다 대고 문질러서 부드럽고 날카롭게 만드는 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아득히 먼 5백만 년 전 어느 날 아침으로 돌아가 숲과 사바나 평원과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면, 거기에서 우리 조상을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늘 속에 서서, 장차 환하게 펼쳐질 파노라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들을 멀리서 보았다면 한무리의 침팬지 가족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풀밭을 거쳐 평원으로 나아간 것, 그리고 계속 일어서서 다닌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동물들은 손에 뾰족한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그날 아침 거기에 있었다.

 

 

고기가 뭐길래?

 

탁 트인 평원이 지닌 매력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숲속에서는 동물들이 작고 숨어다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바나 평원에는 금방 눈에 띄는 동물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닌다. 막대기를 들고 다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은 어미 품에서 벗어난 영양을 발견하고 에워싸 잡아서 먹은 일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간혹 그들은 자연적인 이유로 죽거나 사나운 새나 맹수들에게 죽임을 당한 큰 동물의 잔해를 마주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훠이훠이 소리를 질러 독수리 등 약탈자를 쫓아내고 달려들어 썩고 있는 고기를 물어뜯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숲에 달려가 나뭇가지들을 주어다가 그 고기들 위에 덮어 맹수들이 돌아와 먹어치우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일이 있어 왔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음식 선호도뿐만 아니라 침팬지 같은 영장류의 행동을 보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고기를 꽤나 밝혔으리라는 데는 의심할 의지가 거의 없다. 사바나 평원에서 도구를 가지고 살았던 그들은 썩은 짐승을 뒤지거나 아예 산 채로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고 그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나무에서 아전 지대를 찾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굽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침팬지같이 긴 팔과 짧은 다리를 암시하는 화석 자료가 이미 확보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원숭이가 오로지 채식만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생에서 세밀하게 보면 영장류는 거의가 다양한 먹이를 섭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도 사람처럼 육식과 채식을 겸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몸집이 좀 작다 보니 사냥감 동물보다는 거의 곤충을 먹이로 삼는다. 그리고 곤충 섭위와 상당한 부분은 잎새와 열매를 먹는 과정에서 생겨난 단순한 부산물이다. 잎새를 먹다가 그 안에서 굼뱅이가 나온다든지 무화과 열매에서 벌레가 나오면 원숭이는 그 침입자를 뱉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잎새나 열매를 뱉는다. 그래서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가면서 식사를 할 때는, 반쯤 씹다가 만 잎새와 과일이 마치 비가 내리듯이 연거푸 후두둑 쏟아져 내린다.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원숭이들도 보통 채식에 비해 육식은 상대적으로 적게 한다. 이것은 일부러 그렇게 먹기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단지 원숭이들이 육식 먹거리를 꾸준하게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미비아와 보츠와나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배분(baboom)이라는 놈은 곤충들이 창궐하는 곳에서는 다른 음식을 일체 중단한다. 그들은 동물 고기를 가장 좋아하고, 그다음으로 뿌리, 씨앗, 열매를 좋아하며, 그다음으로 풀과 잎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들은 일 년 중 어떤 계절에는 식사 시간의 75% 가까이를 벌레 먹는 데 할애한다. 커다란 원수잉 가운데 몇몇 종은 벌레만 먹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기도 한다, 원숭이 가운데 가장 능숙한 사냥 솜씨를 갖춘 이들이 평원에서 사는 배분이라는 사실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생활 양식에 대한 나의 재구성을 뒷받침해 준다. 로버트 하딩(Robert Harding)은 케냐의 겔길 근처에서 일 년 동안 배분을 관찰하면서 배분이 작은 척추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47번이나 목격했다. 가장 만만한 것은 가젤(gazelle)과 영양 새끼였다. 배분이 새끼 영양을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라면, 초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그보다 못했을 리 없다.

현존하는 영장류 가운데 사람 다음으로 가장 고기를 밝히는 놈은 침팬지다. 그들이 흰개미를 잡아먹는 데 쏟아붓는 시간과 노력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기를 좋아하는지 짐작이 간다. 그 과정에서 물리고 쏘이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침팬지의 육식은 개미나 흰개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적어도 23종의 포유류를 잡아먹는다. 거기에는 몇몇 종의 원숭이와 배분, 갈라고, 부시 벅, 숲 돼지, 다이커, , 다람쥐, 뒤쥐, 몽구스, 바위너구리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또한 침팬지도 잡아먹으며 심지어 기화가 닿으면 어린아이까지도 먹는다. 곰베에서 10년 동안 관찰한 결과를 보더라도 침팬지는 작은 동물을 95마리나 잡아먹었다. 거의가 새끼 배분, 원숭이, 숲 돼지 등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분만 헤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의 눈을 피해 다른 동물들을 더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곰베 침팬지들은 통틀어서 자기 시간의 10%를 동물을 잡아먹는 데 소모한다.

침팬지들은 사냥할 때 보통 동료들과 협동하며 포획물을 서로 나누어 먹는다. 사실 다른 침팬지들의 그런 협동을 얻어낼 수 없다면 그들은 사냥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동물을 죽이고 분배하고 먹는 과정 전체를 통하여 그들은 비상할 정도로 사회적 상호 교섭과 흥분을 드러낸다. 사냥을 하는 동안 셋에서 아홉 마리 정도가 목표물을 에워싼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자리를 자주 바꾸어가면서 사냥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한다.

수놈이든 암놈이든 모두 사냥을 하고 고기를 먹는다. 1974년에서 1981년 사이에 관찰된 바로, 암놈들은 적어도 44마리의 동물을 잡거나 훔쳐서 먹었다. 여기에는 공격하거나 잡기까지 했지만 끝내 놓쳐버린 21마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암놈보다는 수놈임 더 많이 사냥하고 고기도 더 먹었다. 침팬지들은 식물성 음식의 경우에는 가끔 나누어 먹는다. 그러나 고기는 혼자서 잡은 때를 빼고는 항상 나누어 먹는다. 고기를 나누는 것은 끈질긴 <구걸>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애원하는 침팬지는 고기를 가진 놈의 입에 물려 있는 입 밑에 손을 뻗치거나, 고기를 가장 많이 차지한 놈이 고기를 씹는 입을 억지로 벌린다. 그러한 술책이 잘 먹혀들지 않으면 구걸하는 침팬지는 흐느끼면서도 분노와 좌절감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구달은 위즐 씨라고 이름이 붙은 침팬지가 힘이 가장 센 수놈 골리앗이 새끼 배분 고기를 좀 떼주지 않는다고 역정을 부리는 상황을 묘사한 바 있다. 워즐은 골리앗이 나무를 타고 옮겨다니는 뒷꽁무니를 손을 내밀고 애원을 하면서 졸졸 쫓아다녔다. <골리앗이 워즐이 내미는 손을 열한 번째 뿌리쳐 버리자, 힘이 딸리는 워즐은...않아 있던 자리에서 자기 몸을 홱 뒤로 젖혀 내던지더니 마구 울부짖으면서 둘러싸인 숲을 거칠게 때렸다. 골리앗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동물을 힘들여(손과 이빨 그리고 발 한 쪽까지 써가면서) 두 쪽으로 나누어서는 워즐에게 한쪽을 건네주었다.>

 

 

인류의 조상은 살인 원숭이였는가

 

침팬지들은 죽은 짐승을 뒤져 먹기보다는 직접 잡아먹는 편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숲속에서 큰 동물의 시신이 평원에 비해 훨씬 적고 찾기도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바나 평원에서 큰 짐승의 무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면 초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은 직접 사냥하기보다는 죽은 짐승을 뒤져 먹는 쪽을 선호했을 것이다. 그들이 당시 가지고 있었던 굴봉은 야생 짐승들의 가죽을 뚫을 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설령 어쩌다가 커다란 짐승을 때려눕혔다 하더라도, 송곳니도 없고 그렇다고 자르는 도구도 없었던 처지에서 두꺼운 가죽을 찢고 고기를 꺼낼 방안은 없었다. 죽은 짐승을 뒤져 먹는 것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사자 같은 맹수들은 여러 짐승들을 잡아 죽이고 친절하게도 시체의 가죽을 열러 살코기를 드러내 주었다. 맹수들은 일단 그 고기를 대충 발라 먹고 나면 그늘에 가서 누을 붙였다. 바로 이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닥친 문제는 거기에 눈독 들이고 달려드는 다른 짐승들을 어떻게 내쫓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독수리나 재칼 정도는 굴봉을 찌르고 휘두르는 것으로 내몰 수가 있었다. 아니면 시체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것도 틀림없이 유효했을 것이다. 맨이빨로 뼈를 부숴버리는 하이에나는 셋 또는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커다란 유인원들에게 정말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은 그에 대처하는 꾀를 궁리해 냈다. 하이에나가 먼저 시체에 접근하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또는 자기가 먼저 먹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하이에나가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가기가 그것이다. 그 어느 편이든 오래 머물지 않으면서 최대한 많은 고기를 뜯어내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다는 것은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들고양이가 그 살육의 현장에 출현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는 제 명을 다해 자연사한 시체일 경우에는 들고양이들은 금새 나타나 기웃거렸을 것이다 - 예나 지금이나 식육 동물은 거의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시체 주변에 빌붙어 고기를 뜯어 먹으니까 말이다. 그중 안전한 곳은 역시 나무가 몰려 있는 숲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은 여차하면 막대기를 내던지고 굽은 발가락을 이용해 나무를 타고 높은 곳으로 튀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이 그 과정에서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을 과장하고 싶지는 않다. 일본 연구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틴자니아의 말할레 국립공원 침팬지들은 때로 한두 마리 고양이를 대적해 겁을 주어 용케 고기를 빼앗는다고 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은 거기에 몽둥이와 돌멩이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더 유리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로버트 아드레이(Robert Ardrey)아프리카 기원(African Genesis)이라는 책에서 묘사한바, <무기로 살해하려는 본능>을 지닌 <살인 원숭이>의 모습이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이 힘센 사냥꾼들이었다는 생각은 고고학자 레이먼드 다트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그에 따르면 남아프리카의 몇몇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화석 뼈와 뿔과 엄니(식육 동물의 양 턱에 난 굳세고 날카로운 송곳니 - 옮긴이)가 다름 아닌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물건들을 가지고 몸집이 크고 살갗도 두꺼운 짐승들에게 어떻게 치명타를 가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설령 그 무기들이 치명적인 효능을 가졌다 해도 걷어채이거나 뿔에 받히지 않고 접근해서 휘두르는 것이 가능했을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호석뼈와 다른 동물들의 뼈, 뿔 및 엄니가 한군데서 발견된 것을 달리 설명할 수 있다. 아마도 그곳은 하이에나의 동굴로서 여기 저기에서 동물들을 잡아다가 먹고 잔해를 남긴 것이라고 풀이하는 편이 더욱 설득력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힘센 사냥꾼이 되지 못한 대신, 결국 죽은 짐승을 뒤져 먹는 능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성공을 하는 데는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다. 두꺼운 고기 가죽을 뚫는 데 필요한 더 뾰족한 이빨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3백 내지 250만 년 전, 그러니까 루이 리키가 발견한 손재주 능한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테크놀로지의 돌파구를 찾아냈다 -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그들은 돌을 가지고 자르고 베고 쪼개는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새로운 발명품은 짐승의 살가죽과 힘줄과 뼈를 다루는 데 가장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만큼이나 끝내주었다. 그리고 이제 더욱 대담한 생활 양식이 환하게 열리고 있었다.

 

 

최초의 사냥꾼

 

최초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적어도 지금의 침팬지 정도의 수준으로 돌을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집어던져서 침입자를 격퇴하고 두들겨서 딱딱한 열매를 부수는 것이다. 그렇게 던지고 두들기다 보면 때로 파편들이 튕겨 나왔을 것이고 그것은 짐승의 가죽을 쨀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게 날카로운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일의 효율성이 더 높아지는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그 쓰임새가 충분히 발휘되지는 못했다. 날카로운 파편이 단단한 가죽을 째고 살점을 베어내며 팔다리뼈를 걷어내는 데 활용될 수 있음이 발견된 계기는, 아마도 죽은 짐승을 발라먹으러 달려드는 독수리와 재칼을 내쫓기 위해서 돌을 던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한 걸음 발전한 그다음 단계에서는 돌을 집어서 땅에 있는 다른 돌에 내리치고 나서 거기에서 나온 파편들 가운데 가장 날카로운 것을 찾아내는 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고안해 낸 방법은 돌을 양쪽 손에 하나씩 쥐고 돌 하나를 해머로 삼아 다른 돌 모서리 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얻은 것은 쓸 만한 파편만이 아니었다. 그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쪼가리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몸통 돌 그 자체도 모서리가 날카로워지면서 자르고 쪼개는 데 유용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디오피아 고나와 오모에서 발견된 최초의 석기들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몸통 돌과 해머로 쓰기에 적절한 재료들을 고르는 안목이나, 그것을 정확하게 맞부딪쳐 면도날 같은 파편을 얻어내는 능력이 꽤 훈련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이 실험 삼아 그 구석기들의 모사품을 만들어보니, 몸통 돌과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이 매우 요긴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몸통 돌 끝의 한쪽 면을 망치 돌로 치면 무겁고 뾰족한 도구가 나오는데, 이는 근육을 잘라 관절부를 쪼개는 데 유용하다. 거기에서 나온 파편들은 가죽을 자르고 살점을 베어내는 데 안성맞춤이다. 무거운 몸통 돌은 뼈를 으깨 골수를 꺼낸다든지 두개골을 부숴 뇌를 꺼내는 데 제격이다. 인디애나 대학의 니콜라스 토스(Nichoals Toth) 교수는 그런 단순한 도국들을 그대로 복제해 코끼리처럼 몸집이 크고 살갗이 두꺼운 짐승을 각 뜨는 것 이외에 다른 쪽으로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토스 교수는 무거운 돌도끼는 몸통이 나무에서 곧은 가지를 쳐내는 데 유용했고, 다른 파편들은 고기와 지방질을 발라내고 가죽에서 털을 긁어내는 데 유용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운반 도구가 또한 요긴했을 것이다. 탄자니아에 있는 2백만 년 전의 석기들을 분석해 본 결과 몸통 돌에 남아 있는 자국을 가지고 추정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렇다면 돌을 깎아 다듬은 그 누군가가 파편들, 그리고 혹시는 작은 몸통 돌과 망치 돌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했다는 뜻이 된다. 잘라낸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어 거기에 붙어 있는 근육 쪼가리들을 어깨나 허리춤에 꿰어차면 아주 그럴싸한 운반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석기, 굴봉으로 된 창, 가죽 가방을 만들면서 원숭이의 뇌는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도구 하나하나를 따로 만들고 다루는 데 침팬지가 자신의 능력을 한껏 쥐어짜 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은 짐승을 뒤지고 수렵하고 채취하며 땅을 파는 등 생산 체계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그러한 제반 활동의 한 부분으로 그러한 도구들을 조작하는 데는 초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수준을 넘어서는 인지 능력이 요구되었다.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조느이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도구가 더욱 정교해지고 뇌가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빌리스가 큰 짐승을 잡는 사냥꾼에 가까웠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작은 모집과 굽은 손가락과 발가락 - 이는 맹수들을 피해 나무에 올가가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은 사냥에서의 대담성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그 도구들이 큰 짐승들을 각 뜨는 데 아무리 유용했다 해도, 그것이 그런 짐승들을 직접 사냥했다는 징표가 될 수는 없다.

적어도 160만 년 전 에렉투스가 출현하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주로 죽은 짐승를 뒤져 먹는 동물에 머물러 있었다. 에렉투스에 관한 자료를 모두 훑어보면 그것이 새로운 생존 양식에 기초해 하나의 생태학적인 적소를 메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것은 하빌리스보다 현저하게 키가 컸고, 그 손가락과 발가락은 나무를 잽싸게 타고 오르는 장점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날카로운 돌조각, 그리고 양쪽 면이 모두 사용되고 커다란 타원형 모양을 한 뾰족한 <손도끼>와 곡괭이 같은 도구들을 사용했다. 그렇게 <양면으로 된> 도구를 실험해 보면 커다란 짐승를 각 뜨는 데 매우 유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에렉투스의 도구들과 함께 발견된 동물 뼈 표면에 미세하게 나 있는 일련의 홈줄들은 <잘라낸 자국>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그 도구들이 짐승들을 분해하고 살점을 발라내는 데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에렉투스는 또한 몸통 돌과 파편들을 가지고 나무를 벗기고 깎아내어 뾰족한 창을 만드는 데도 능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을 각 뜨는 이들이 반드시 사냥꾼일 필요는 없다. 더구나 에렉투스의 도구 가방에는(하빌리스의 것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뭔가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그 몸통 돌이나 파편들 가운데 어떤 것도 창이나 기타 던지는 도구의 끝에 끼워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무로 된 창을 작은 동물들에게 던져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큰 짐승의 경우에는 그 창 끝 부분에 뾰죡한 돌이나 뼈를 끼우지 않고서는 멀리서 던져 가죽을 뚫고 급소를 찌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에렉투스가 사용하던 창끝에 뾰족한 돌이 끼워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초기 호미니드보다 죽은 짐승을 뒤져 먹는 데 더욱 능했고, 설령 그들 중 일부가 이따금 사냥을 했다 해도 작은 동물을 잡는 데 그쳤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 생각에 에렉투스는 처음에는 죽은 짐승을 뒤져 먹는 것으로 만족하다가 나중에 사냥꾼으로 변신하지 않았을까 싶다. 커다란 짐승들이 금방 눈에 띄는 상황에서 그들은 맛있는 음식을 확실하게 얻는 방법으로 직접 때려잡고 싶은 유혹을 항상 느꼈을 것이다. 결국 석기 테크놀로지 발달의 상당 부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고기를 섭취하려고 시도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 망치, 도끼, 운반 도구 등을 만들 수 있었던 에렉투스가 돌을 끼운 창을 발명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창을 멀리서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가까이서 찌르는 방식으로 사냥을 했을 것이다. 고고학에서는 이런 추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 대신 인간의 어떤 형태적 특징에 눈을 돌려야 한다. 몸에 털이 없다든지 피부 밑에 땀샘이 있는 것, 그리고 마라톤을 할 수 있는 능력 따위 말이다. 그러나 나는 먼저 에렉투스의 뇌에 관해 몇 가지 불리한 점을 이야기하겠다.

 

 

호모 에렉투스의 수수께끼

 

뇌와 도구 사이의 상승적인 피드백(feedback)은 아파렌시스에서 하빌리스로 넘어온 과정을 자연스럽게 풀이해 준다. 그와 똑같은 피드백으로 하빌리스에서 에렉투스로의 이행도 해명할 수 있을까? 내가 고고학적 자료들을 살펴본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에렉투스의 뇌는 하빌리스이 뇌보다 33% 더 컸지만, 그만큼 더 커다란 뇌를 필요로 할만한 도구가 그들의 유물에서는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에렉투스가 만든 손도끼와 곡괭이는 하빌리스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만든 도구들과는 다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큰 짐승의 각을 뜬다든지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막중한 일에 걸맞는 커다란 장비들이었다. 에렉투스의 도구들 가운데 어떤 것은 하빌리스의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몸통 돌의 양쪽 면과 그 둘레 전체에 붙어 있는 돌파편들은 더 높은 수준의 기량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갑자기 석기 시대로 건너뛰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에렉투스의 도구들을 볼 때 가장 희한한 것은 그것들이 엄청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60만 년 전 케냐의 코비 포라(Koobi Fora)에서 에렉투스가 만든 손도끼와 다른 양면 몸통 돌들을, 30만 년 전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 거주하던 말기 에렉투스들도 거의 그대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선사 시대의 그 장구한 세월 동안에 이루어진 기술 변화의 속도는 오스트랄로티테쿠스 시대만큼이나 느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렉투스의 계승자인 호모 사피엔스가 이룩한 기술 변화의 속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설령 에렉투스가 하빌리스보다 더 영리했다 해도, 그 단서를 기술적인 차원에서 이끌어내기는 불가능하다.

초기 에렉투스가 어느 정도는 불을 다룰 줄 알았다는 증거가 몇몇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엄청난 성취이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그 증거라는 것이 뭐냐 하면 코비 포라와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땅의 한 부분의 흙이 뚜렷이 변색된 흔적이다. 변색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불(캠프 파이어)을 지펴 집중적으로 열을 받아 흙이 구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번개나 기타 다른 자연 발화가 한 지역에 유난히 많이 일어나도 - 그 가까이에 있는 나무 밑에 에렉투스가 캠프를 만들었을 것이다 - 그와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중국 베이징 근처에 있는 주구점 동굴에서 발견된 30만 년 전의 목탄 지층을 근거로 에렉투스와 불의 연관성을 따지는 데서도 비슷한 문제가 걸린다. 어떤 인류학자들은 그 목탄 퇴적물이 동굴에서 살던 에렉투스의 <난로>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멕시코 대학의 루이스 빈포드(Lewis Binford) 교수 같은 학자들은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정말로 난로 때문에 생긴 흔적이라면 그것은 동굴 몇몇 군데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목탄은 다른 보통 지층과 접하는 두꺼운 층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동굴 안쪽 또는 그 입구 근처에서 몇 차례에 걸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 자료를 가지고 에렉투스가 불을 아무 때나 마음대로 켜고 끄면서 몸을 보온하고 음식을 데웠다고 결론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물론 앞으로 더 조사하고 연구해 보면 에렉투스가 어느 정도 불을 다룰 줄 알았다는 것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에도 왜 그들은 다른 기술의 영역에서 그에 걸맞는 진보를 이루지 못했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우리 인류는 석기 시대에서 출발하여 수렵 채취를 거쳐 오늘의 초산업 사회로 건너오는 데 불과 10만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에렉투스가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시기의 8%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현생 인류가 에렉투스만큼 생존할 수 있다면 앞으로 120만 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 아득한 훗날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리라는 사실이다. 그와 똑같은 의미로, 그리고 그 비스ㅎ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에렉투스가 지구상에 살았던 130만 년 동안 그들의 생활 양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똑같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 에렉투스는 침팬지에 비해서는 한결 영리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각 세대가 자기의 집단 체험을 토대로 사회적, 기술적 전통의 레퍼토리를 확대하고 진전시키는 수준으로까지는 그 지적 능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은 침팬지들의 소리나 신호를 능가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인의 언어 및 인지 능력을 갖지 못했다. 만일 가졌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으면서 몇몇 석기 더미만을 달랑 자취로 남기고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뇌가 하빌리스이 뇌와 질적으로 완전히 달랐다면, 좋든 나쁘든 그들은 지구의 모습을 오래전에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이제 뇌라는 기관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되었다. 커다란 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몸에서 그만큼 많은 에너지와 피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사람은 휴식 중에도 몸의 전체 신진대사 가운데 20%가 뇌를 위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렇게 대가를 치르는 뇌가 생존과 종족 번식의 성공에 중요한 기여를 하지 못한다면, 쓸데없이 많은 뇌세포는 자연 선택에 의해 도태될 것이다. 에렉투스의 뇌가 도구를 발명하고 지구의 모습을 바꾸는 데 유용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에 도움이 되었을까? 모ㅍ란드 과학 아카데미의 진화 및 이론 생물학 위원회의 일원인 콘라도 피아코프스키(Konrad Fialkowski)는 독창적인 해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달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체온, 머리카락, , 그리고 마라톤

 

에렉투스는 뇌가 컸기 때문에 다른 맹수들이 거의 사냥을 멈추고 그늘이나 물가에서 쉬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뛰어다닐 수가 있었다. 피아코프스키는 그의 이론을 세우는 가정으로서 에렉투스의 뇌에 필요 이상의 세포가 있어서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리면서 받게 되는 열 스트레스를 잘 견딜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뇌 세포 하나하나는 다른 기관의 세포에 비해 열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그것이 파손되면 인지적인 혼란, 경련, 뇌일혈로 이어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뇌처럼) 파손되기 쉬운 요소를 가진 종보 체계에서는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들 및 이들 사이의 연결 고리 수를 중가시킴으로써 시스템의 신빙성을 높인다는 것이 정보 이론의 한 가지 기본적인 원칙이다. 따라서 에렉투스의 뇌는 열 스트레스 아래서 안전판 장치의 수단으로 선택된 잉여의 세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 장치는 사냥감을 쫓아서 먼 거리를 달려갈 때 작동했다.

현대 인간은 동물의 왕국에서 가장 빠른 주자가 결코 아니다. 단거리에서 우리는 기꺼해야 시속 20마일의 최고속도를 낼 수 있는데, 이것은 말의 시속 45마일, 치타의 시속 70마일에 비하면 그냥 걸어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장거리 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이 단연 앞서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원주민들은 바로 그 능력을 발휘해 짐승을 끊임없이 추적해 잡았다. 때로는 며칠 동안을 추적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멕시코 북부 타라후마라(Tarahumara) 인디언들은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이틀 동안 쫓아간다. 아무리 짧아도 하루 이상은 걸린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사슴이 쉬지 않고 뛰도록 만든다. 아주 가끔 그 추적물을 희미하게 볼 수 있지만, 발자국을 식별하는 그들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동원해 매우 정확하게 쫓아간다. 사슴은 마침내 지치고 많은 경우 그 발굽이 완전히 닳아버려 쓰러진다. 바로 그때 사람이 달려들어 목을 조르거나 개가 나서서 죽인다.> 사람은 장거리를 일정한 속도로 계속 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막판에 갑자기 속력을 높일 수가 있다. 그러한 능력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시베리아 가나산족(ganasan)의 순록 사냥을 묘사한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사냥꾼에 쫓기는 순록은 재빨리 도망치면서 간간이 멈취 서서 뒤를 돌아다본다. 사냥꾼은 계속 쫓아가면서 숲이나 바위 더미 같은 자연물에 모을 숨긴다.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놀랍다. 어떤 사냥꾼들은 어린 야생 순록을 따라잡아 뒷다리를 잡아챌 수 있다. 때로 어떤 이는 10킬로미터나 쫓아가기도 한다. 순록은 암컷이 수컷보다 빠르고 덜 지치기 때문에 잡기가 그만큼 어렵다. 상처 입은 순록을 쫓는 사냥꾼은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파라과이의 아쉐족(Agta)이 야생 돼지를 사냥하는 데는 아직도 뛰어서 쫓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 사냥 방법이 원주민들에게 일반적인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대의 사냥하는 족속들은 뾰족한 돌이 뼈가 달린 창이나 화살을 사용하기 때문에 달음박질로 대상물을 쫓아갈 필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장거리 질주는 창이나 화살에 맞아 상처 입은 동물을 쫓아가는 데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하리(Kalahari) 사막의 산족(San)의 경우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하면서도 몇 시간 동안 뙤약볕 밑에서 상처 입은 짐승을 재빨리 쫓아가는 것이 때로 필요하다. 짐승이 지친 몸에 독 기운이 퍼져 쓰러진 다음 사자나 독수리 같은 맹수가 달려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매우 민첩해야 한다. 상처 입지 않은 동물을 추적하는 것만큼이야 힘들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사냥은 상당한 열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피아코프스키의 이론은 우리 에렉투스 조상이 항상 상처 입지 않은 짐승만 쫓았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여건만 허락되었다면 그들은 아주 가까이 접근해 나무로 된 창으로 찔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동물을 쫓아가 완전히 녹초로 만들고 거기에 창을 몇 개 더 찌를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혹독한 조건에서도 조금 부상당한 또는 상처 입지 않은 동물을 장거리 질주를 하면서 쫓아갈 수 있는 개체들을 자연은 선택했을 것이다.

에렉투스의 뇌가 커진 것을 열 스트레스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는 피아코프스키의 이론은 이간 특유의 몇 가지 다른 열 조절 장치의 존재와 연결된다. 포유동물은 대부분 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코와 입으로 습기를 방출함으로써 열을 식힌다. 그에 비해 인간의 냉각 장치는 완전히 다른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우리는 땀샘으로 물기를 내보내 피부를 적심으로써 열을 식힌다. 사람에게는 그 땀샘이 무려 5백만 개나 있는데 이는 다른 포유동물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이다. 공기가 젖은 피부를 스쳐 지나가면서 습기가 증발되고 피부 바로 밑에 흐르는 모세혈관의 열은 떨어진다. 정상적인 상태를 넘어선 과도한 열의 95%는 땀의 증발과 함께 발산된다. 땀이 피부에서 증발되어 열을 내리기 위해서는 공기가 그곳을 스쳐 지나가야 한다. 공기가 건조할수록 더 빨리 지나가고 그래서 열도 잘 식는다.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달려가게 되면 바로 그렇듯 공기가 피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동아프리카 사바나의 건조한 공기는 증발이 일어날 수 있는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했을 것이다.

증발을 통해서 냉각은 그 대신 우리 몸에 자라날 수 있는 털을 제한한다. 숲에 사는 원숭이들은 장거리 질주처럼 집중적인 육체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열역학적인 문제는 과도한 열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습도나 비 때문에 몸이 추워지지 않도록 - 특히 밤에 -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름처럼 미끄럽고 아래쪽으로 향해 있는 털이 원숭이의 몸을 코트처럼 무성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에렉투스가 장거리 주자로서 생활을 영위하고 그 몸에 증발을 통한 냉각 장치를 진화시켜 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코트를 입을 수가 없었다. 공기는 땀 냄새에서 나온 습기의 얇은 막 위를 거침없이 지나가 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하게 <벌거벗은> 몸을 갖게 되었다. 물론 우리 몸에도 원숭이만큼이나 털이 많이 나 있다. 그러나 그 털들이 코트처럼 몸을 감싸기엔 너무 가늘고 짧다. 다만 물기를 밑으로 흘려보내는 이점만은 팔다리의 털들이 아래쪽으로 향해 있는 것으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피아코프스키의 이론에 맞아떨어지는 또 한 가지 사항은 최근에 수정되어 다시 그려진 에렉투스이 체형이다. 에렉투스는 예전까지 믿어온 바대로 작고 옹골찬 모습이 아니라, 남자의 경우 사실 6피트 이상으로 키가 컸던 것으로 밝혀졌다. 버그만의 법칙(Bergman's rule)이라고 알려진 한 가지 단순한 원리에 따르면, 추위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는 동물의 몸집은 옹골차고 구형인 반면, 더위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는 동물을 키가 크고 원통형이다. 구형에서는 몸의 피부에 대한 표면적인 비율이 원통형보다 작기 때문이다. 옹골차고 땅딸막한 사람의 몸은 열을 발산할 수 있는 피부 표면적의 비율이 작기 때문에 열을 보존할 수 있다. 반면에 키가 크고 깐깐한 사람의 몸은 그 표면적의 비율이 크기 때문에 열을 방출한다.

낮 동안에 에렉투스의 벌거벗은 몸은 추위로부터 인위적으로 보호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밤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의 기온은 새벽 직전에 화씨 40도까지 내려갈 수 있다. 그와 비슷한 기후에서 살고 있는 현대의 수렵 채취인들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담요를 덮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사는 원주민들은 낮에는 벌거벗고 다니다가도 밤에는 새벽 추위를 막기 위해 캥거루 가죽을 덮고 개를 옆에 끼고 잔다.

이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하빌리스가 동물 가죽으로 운반 도구를 만들 줄 알았기 때문에, 에렉투스도 별 어려움 없이 가죽을 잘라내 담요를 만들었을 것이다. 에렉투스는 그 가죽 담요들을 석기들과 마찬가지로 캠프를 옮길 때마다 가지고 다니거나, 필요할 때 다시 돌아올 만한 곳에서는 떠나면서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것이다.

에렉투스가 두 발로 곧게 서서 달리는 동안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에는 햇빛이 비스듬이 내리쬐었다. 그래서 기어 다니는 동물들에 비해서는 몸 전체에 열을 덜 받게 되었지만, 뇌는 오히려 더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 영국처럼 햇빛이 적은 곳에서도 대머리 신사들은 대낮에 해가 떠 있을 때는 웬만하면 외출을 삼가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마에서 땀을 흘려 뇌의 체온을 유지하도록 운명지워졌다면, 그것은 우리의 이마에 땀샘이 조밀하게 있고 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털에 관한 몇 가지 다른 문제들이 피아코프스키의 이론과는 상관없지만, 나는 이 주제를 다루는 김에 마저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남자와 여자는 머리털은 비슷하게 나지만, 남자는 턱과 구렛나루에 유난히 털이 무성하다. 추정하건대 이러한 차이는 얼굴에 털이 수북한 남자일수록 성적인 경쟁자를 위협하고, 그리고/또는 여자를 더 잘 유혹하는 경향(후자 쪽이 더 유력하다)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다음으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의 밀집된 털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 두 곳에서는 땀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아포크린선이라는 피부선이 분포되어 있다. 아포클린선은 증발을 통한 냉각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기능은 겨드랑이 냄새 제거제 산업을 일으킬 만큼 골치 아픈 암내를 숨기는 데 있다. 아포클린선은 결렬한 운동이나 성적인 흥분 또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사람의 기분을 알리는 냄새를 발산한다.

한 캠프에 동거하는 에렉투스들은 그러한 냄새를 발산함으로써 서로에게 자극을 주어 극도의 흥분을 일으켰을 것이다. 겨드랑이에 남아 있는 털뭉치는 아포클린서과 함께 선의 분비물을 보존하고 집중시킨다. 신체의 상태를 알리는 다른 많은 비자발적인 신호들 -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흐느끼는 것 - 은 이제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겨졌다. 그러나 겨드랑이 및 사타구니의 털과 아포클린선은 그 쓰임새가 다했다는 데도 계속 남아 있다.

 

 

뇌가 생각하기 시작하다

 

피아코프스키 이론의 핵심으로 다시 돌아가면, 우선 에렉투스에서 사피엔스로의 이행이 가장 전면에 부각된다. 열 스트레스에 대한 안전장치로 선택된 결과로 뇌가 대단히 커진 상태에서 에렉투스의 신경회로는 신속하고도 근본적으로 재구성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과학자들도 뇌가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당시에 이루어진 재구성의 본질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컴퓨터 설계의 발달과 에렉투스 이후 뇌의 변화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컴퓨터 공학자들은 처음에 선형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회로를 설계했다. 그 기계에 문제가 입력되면 한 번에 하나씩 차례로 밟게 되는 단계들로 분해되어야 한다. 기계 전체는 각 단계들을 연달아 거치면서 작동한다. 트랜지스트와 기억 단위가 늘어나고 구성 요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 속도가 빨라진 커다란 기계를 만들게 되면서 더 복잡하 문제도 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 설계자들은 얼굴의 인식이라던지 언어의 번역, 또는 가르칠 수 있는 로봇의 설계 같은 문제를 선형처리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작은 컴퓨터를 여러 개 연결해 각각이 동일한 문제의 상이한 측면들을 동시에 풀도록 만드는 쪽으로 노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 설계를 병렬 처리라고 한다. 에럭투스 뇌에서 사피엔스 뇌로 이행한 것을 선형처리에서 병렬처리로 이행한 것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 그러나 그 비유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선형처리 컴퓨터가 나오고 나서야 병렬 처리 컴퓨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때가 많다. 애당초 어느 한 가지 기능을 위해서 선택된 구조를 이용하여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구조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폐는 원래 공기주머니에서 진화한 것인데, 이는 물고기가 호흡이 아니라 부레의 기능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 사용하는 뇌가 원래 달리기를 위해 사용된 뇌에서 진화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그전 단계가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피아코프스키의 이론은 기각류의 생리를 이해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각류는 돌고래나 바다표범처럼 바다에 사는 포유류를 말하는데 뇌가 크고 사회성이 높다. 활동성이 매우 강한 그 동물들이 당면한 문제는 열을 식히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 오래 헤엄치는 동안 산소가 고갈되는 것이다. 육지에서 장거리를 질주하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기각류 동물들도 이중의 뇌세포 및 회로의 안전 그물망이 있어 혜택을 본다. 미국의 해군은 기각류들을 훈련시켜 바다 밑에 떨어진 미사일의 폭발물 부분을 물어다가 적군의 배밑에다가 갖다 붙이도록 했다. 이란-이라크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돌고래 여섯 마리가 샌디에고를 떠나 페르시아만까지 파견되었다. 그러나 도구를 사용하거나 물체를 조작해야 하는 자연적인 필요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기각류 동물들의 뇌는 에렉투스에서 사피엔스로 넘어오면서 일어난 재구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보자면 그들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다. 만일 그러한 재구성이 일어났다면 지금쯤 해군 신병 훈련소에 수용되어 바다 밑에서 서로를 죽이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문화는 인간에게만 있다?

 

처음부터 호미니드는 음식을 먹고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 등을 자기와 동거하는 이들, 특히 연장자들의 선례를 따라 하면서 배웠다. 그들은 이른바 기본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단순한 전통의 작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부모의 유전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부모 및 동료들의 행동방식을 통해서 전달된다. 유전적 프로그램과 문화적 프로그램 사이의 차이는 앞으로 몇 번 더 나오는 문제이므로, 여기에서 분명하게 설명해 두어야 하겠다. 동물의 행동 가운데 유전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배우고 저장하고 그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은 특수하게 유전적으로 결정된 능력에 의존한다. 조개 같은 동물에게 무슨 문화가 있으랴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유기체는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데 본능보다 학습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종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데 더 의존한다. 또한 어떤 종은 다른 개체들이 배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것을 학습하는 데 더 의존한다.

인간의 삶을 유전적으로 해석하는 데 열을 올리는 일부 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아닌 신경회로에 코드화된 정보를 활용하는 면에서 유기체들의 능력이 얼마나 천차만별인가를 간과하고 있다. 물론 그 신경회로를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회로 안에 있는 것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침팬지가 개미를 핥는 데는 특별한 유전 정보가 없어도 된다. 사실 그 행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배우고 대상을 조작하고 이것저것 먹는 데 필요한 유전적으로 결정된 능력이 어린 침팬지 속에 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적인 생물학적 능력과 성향만으로는 개미를 잡는 행위가 설명되지 않는다. 거기에 빠져 있는 요소는 어른 침팬지의 뇌 속에 저장되어 있는 개미잡이에 관한 정보이다. 이 정보는 어미에게서 새끼에게로 전달된다. 곰베의 어린 침팬지는 18내지 22개월이 되어야 비로소 개미 잡기를 시작하고 3살이 되어야 능숙해진다. 새끼들은 어른 침팬지들이 개미 잡는 것을 바라본다. 초보 침팬지들은 이미 못쓰게 된 개미잡이 막대기를 다시 집어 들고 잡으려 한다. 물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개미잡이는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장 어린 침팬지가 능숙해지기까지 4년이 걸렸으니 말이다. 침팬지가 아프리카에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다른 침팬지들은 병정개미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개미잡이가 초보적인 문화의 특질을 내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다른 침팬지들은 다른 종류의 개미를 잡고 그 방식도 곰베 침팬지와 다르다. 곰베에서 남쪽으로 170킬로미터 떨어진 마할레(Mahale) 산에 사는 침팬지들은 나무에 사는 개미의 집안에 나뭇가지와 나무껍질을 집어넣는데, 이는 곰베 침팬지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이 아닌 영장류 가운데 초보적인 문화를 지닌 것은 아프리카 원숭이만이 아니다. 교토 대학 영장류 연구소 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원숭이들은 사회적 학습에 기초한 관습과 제도를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의 수컷은 암컷이 식사를 하는 동안 새끼를 돌본다. 그런 관례는 오로지 다까사끼 산과 다까하시 지역에 사는 원숭이들에게서만 발견된다. 다른 문화적 차이들도 발견되었다. 다까사끼 산 원숭이들이 무쿠(muku)라는 열매를 먹을 때, 안에 있는 딱딱한 씨는 뱉든지 아니면 씹어서 즙만 짜먹는다. 그러나 아라시 산 원숭이들은 이빨로 씨를 으깨서 안에 있는 과육을 먹는다. 어떤 원숭이 무리는 조개를 먹지만 다른 무리는 먹지 않는다. 또한 식사할 때 개체들 사이에 떨어져 있는 간격이나, 숲을 지날 때 암컷, 수컷, 새끼들이 앞뒤 순서를 짓는 방식에서도 문화적 차이가 있음이 주목되었다.

영장류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어떤 행위의 혁신이 개체에서 개체로 확산되어 그 무리의 기초적 문화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원숭이들을 바닷가로 끌어내면 관찰하기가 쉽겠다 싶어, 과학자들은 고구마를 물가에 갖다 놓았다. 어느 날 어린 암컷 한 마리가 그것을 주워 해안을 따라 나 있는 웅덩이 물 속에 던져 모래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이 세척 방식이 점점 퍼지더니 마침내 종전의 비벼서 씻던 방식을 대체하고 말았다. 9년 후에는 80~90%가 웅덩이 물이나 바닷물로 씻어내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밀을 바닷가에 갖다 놓았을 때 코시마 원숭이들은 처음에 알갱이를 모래에서 골라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곧 그중 한 놈이 밀에서 모래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 이후 그것은 다른 놈들에게 전달되었다(그 방법이란 물속에 던져 모래는 가라앉히고 알갱이는 띄우는 것이었다).

초보적인 문화와 충분히 발달한 문화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양적인 것이다. 원숭이들도 전통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다. 다만 사람에게는 그것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뿐이다. 문화적인 인공물, 관행, 규칙, 관계 등이 우리 환경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룬다. 먹고, 숨쉬고, 배설하고, 짝을 짓고, 자녀를 낳고, 앉고, 돌아다니고, 잠자고, 눕고 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사회의 문화의 어떤 측면을 따르거나 그것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우리늬 문화는 성장하고 확장하며 진화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본질이다. 문화의 본질은 보통의 유기체적인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마치 유기체적 본질이 화학적, 물리적 토대에서 비롯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조상들이 문화적 도약의 문지방을 통과했을 때, 그들은 마치 에너지가 물질로, 또는 아미노산이 단백질로 전이하는 것만큼 결정적인 돌파구를 뚫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적인 도약

 

여기서 문화적 도약과 인간이 의사소통하는 방식 사이의 관련성을 잠시 생각해 보자. 문화의 도약은 사실상 언어적 도약이다. 전통의 변화가 빠르고 누적적인 속도로 일어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획득, 저장, 검색, 공유되는 정보의 양에서 하나의 돌파구를 의미한다. 그 변화의 속도와 정보의 양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기억이 개체와 세대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미디어(media)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베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진화가 일상생활에 부과하는바,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활동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인 힘을 발휘한다. 언어적 능력은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의 행동 규칙까지도 정식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둔한 보통 삶이 병정개미와 그 집을 한 번도 보지 않고서도 어떻게 그것을 잡는지를 서로 가르쳐줄 수가 있다. 그 점이 침팬지와 다르다. 물론 연습을 해야 하겠지만(또한 그 방법을 계속 개선해야 하겠지만), 개미잡는 법에 대한 언어적 규칙을 정식화할 수 있는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한 세대 내에서 그리고 세대를 넘어서 그러한 행동을 계속 복제할 수가 있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상당 부분이(전적으로는 아니고) 그러한 규칙에 의해 조정되고 지배되는 사고와 행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적 행동의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그에 상응해서 그러한 관행에 걸맞는 규칙들을 또한 만들어내고 그것을 뇌에 저장한다(이는 생물적 혁명을 일으키는 명령어가 유전자 속에 저장되어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언어적인 규칙을 통한 행위를 뛰어나게 수행하는 인간은 사회적 역할을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집단을 이루어 서로 협동하는 면에서 다른 동물들을 쉽게 능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적 탁월함은 단지 호미니드 뇌의 확대되고 재구성된 회로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유아기에서 유년기로 이행하면서 언어적 능력을 획득하도록 돕는 인간 특유의 신경 프로그램에 기초한 것인가? 만일 어린아이가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면 그는 말을 전혀 배울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마치 걸음마를 배우듯이 말을 배우는 것 같다. 기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데는 양식화된 가르침이 거의 필요 없다. 그 까닭은 두 발로 걸을 때 발, 다리, , 몸통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령어는 그의 유전자 안에 이미 프로그램으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위한 프로그램은 걸음마를 위한 프로그램만큼 강하고 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부모나 다른 언어 공동체 성원이 아주 조금만 가르쳐주어도 작동할 만큼 강하게 내장되어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충격 속에 사람들이 대거 이주한 결과 생겨난 한 가지 특정한 언어의 역사를 내세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서양 열강들은 값싼 플랜테이션 노동력을 얻기 위해 저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강제로 차출했다. 그리고 그들을 하이티, 자마이카, 구야나, 하와이처럼 고립된 연안이나 섬에 한데 몰아넣고 함께 살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다중 언어 사회의 성원들은 서로 이야기하기 위해 <피진어(pidgins)>라고 알려진 의사소통 형식을 개발했다. 당시에는 피진어에 뒤섞인 언어가 대단히 다양했고,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피진어는 새로운 언어 형성의 자연적인 실험인 셈이었다. 피진어의 제1세대는 그 새로운 언어 형성의 자연적인 실험인 셈이었다. 피진어의 제1세대는 그 새로운 언어를 자기 부모로부터 배울 수 없었다. 어디에서나 부모는 아이보다 모국어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아이들은 피진어의 언어적 능력을 완성하기 위해 자기 부모들이 구사하는 피진어의 결점들을 빨리 극복해야 했다. 1세대의 피진어는 실로 초보적인 언어로서 아득한 옛날 언어적 도약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형태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거기에는 주어-동사-목적어, 정관사와 부정관사, 구문의 일정한 양식 같은 언어 질서의 규칙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문장은 짧고 거의 동사와 명사의 지리멸렬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와이 대학의 데렉 비케르톤(Derek Bickerton) 교수는 제1세대 하와이 피진어에서 그에 대한 예를 두 가지 끌어오고 있다. 하와이 피진어는 19세기 말엽 영국인, 일본인, 필리핀인, 한국인, 포르투갈인, 그리고 하와이 원주민들이 섞이면서 형성되었다.

aena tu macha churen, samawl churen, haus mani pei

and too much children, small children, house money pay

bilhoa mil no moa hilipino no nating

before mil no more Filipino no nothing

세계 여러 곳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피진어는 새롭고 정말 그럴듯한 언어를 곧바로 낳았는데, 그것에는 크레올어(creoles)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하와이에서 그 언어는 단지 한 세대동안 생겨났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어린아이에게는 자라나면서 채택해야 하는 일련의 총체적 문법 규칙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가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발명>했음이 분명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하와이 크레올어의 문법이 그 구성 모국어들의 배합이 어떠하든 간에 다른 지역에서 한 세대 동안 형성된 크레올어들의 문법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언어들은 모두 주어가 먼저 오고 다음으로 동사가 그리고 목적어가 온다. 또한 문장의 특정한 단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그 순서를 바꾸는 규칙도 명확하다.

Ai si daet wan(I saw that one.)

Ai no si daet wan(I didn't see that one.)

O, daet wan ai si.(Oh, that one i saw.)

피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빨리 피진어를 하와이 크레올어로 바꿀 수 있었을까? 비케르톤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현대인의 뇌에 문법적으로 적합한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청사진이 생물학적 프로그램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가 자라나면서 활성화되고, 이는 걸음마를 위한 프로그램이 펼쳐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는 부모의 언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결코 언어를 발명할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의 언어 행위에 아주 조금만 노출되어도 그들은 <걸음마>를 멈춘다. 일단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 달리기에 해당하는 언어적인 그 무엇을 가르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현대인이 언어적 능력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프로그램은 하빌리스나 에렉투스의 뇌에서는 충분히 개화되지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걷는 능력, 또는 마주 향하게 할 수 있는(그래서 물체를 잡을 수 있는-옮긴이) 손가락을 가지고 대상물을 조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함께, 자연 선택에 의해 개념형성과 언어적 표현 양식의 효능이 한 걸음씩 진척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첫 걸음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사촌격인 원숭이가 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현대 언어의 위치에 대해 흔히 오해하는 것 한 가지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원시적인 언어?

 

언어학자들은 현대의 <원시적인>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사실 동물 언어와 문명화된 언어의 중간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크놀로지나 정치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문법 규칙들이 그 복잡성에서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 발견되면서 그러한 생각은 기각되었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콰키우틀어(Kwakiutl)는 라틴어보다 어미(語尾)가 두 배나 많다. 그 밖에 일반 개념이나 특수 개념의 존재 여부 같은 것이 제시되었지만 <원시적> 언어를 판정하고 진화의 등급을 가리키는 지표로서는 신빙성이 없음이 곧 드러났다. 예를 들면 필리핀의 아그타족은 <고기를 잡는다>를 뜻하는 동사가 31개나 되는데, 그것들은 각기 특정한 유형의 고기잡이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고기를 잡는다>를 일반적으로 뜻하는 단순한 동사가 없다. 브라질 원주민들의 투피어(Tupi)에서는 앵무새를 여러 종별로 구분해 지시하는 단어는 많이 있지만, 그 모든 앵무새를 총칭하는 단어는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언어에서는 세세한 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부족하다. 거기에서는 수를 헤아릴 때 1에서 5까지밖에 안 나간다. 그래서 그 이상으로 넘어갈 때는 <많다>를 뜻하는 단어에만 의존한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일반 개념이나 특수 개념의 많고 적음이 진화론적인 단계와 무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런 개념의 문화적인 필요를 반영할 뿐이다. 고기잡이로 주된 생계를 이어가는 아그타족은 고기를 잡는 행위를 하나의 일반화된 행위로 지칭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고기를 잡느냐 하는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무문자(無文字) 사회의 주민들은 식물들의 속성을 매우 세밀하게 구별할 줄 안다. 평균 그들은 500내지 1000종을 분간해 그 이름을 알고 지낸다. 그에 비해 산업화된 도시 사람들은 보통 50내지 100 정도밖에 알지 못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도시인들은 풀, 나무, 관목, 수풀, 줄기 따위의 모호한 개념으로 대충 뭉뚱그려 말한다. 5 이상의 숫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불편 없이 지내는 경우도 그렇게 커다란 양을 정확하게 헤아려야 할 필요가 생긴다면, 그들은 가장 커다랗다는 말을 몇 번 반복하는 것으로 대처한다.

무문자 사회의 언어에는 또한 색을 세분하는 낱말이 많지 않다. 염색을 하거나 색을 칠하는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에 색을 예민하게 의식할 필요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필요가 생기면 그들은 언제라도 거기에 적응할 수 있다. <하늘색>, <우유색>, <피색> 같은 말로 표현하면 될 테니 말이다. 심지어는 신체의 각 부분에 대한 명칭도 문호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벌거벗고 다니는 열대에서는 <><>을 한 단어로, 또한 <><다리>를 한 단어로 묶어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추운 기후 속에 살면서 특수한 옷들(장갑, 장화, 버선, 바지 등)을 몸의 각 부분에 걸쳐야 하는 사람들은 <><>, <><다리> 같은 것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러한 차이들을 근거로 해서 언어의 진화 수준을 가늠할 수는 없다. 지금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는 3천여 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공통의 구조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보의 저장, 검색, 전달에서, 그리고 사회적 행위의 조직화 측면에서 하나의 언어가 또 하나의 다른 언어와 똑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휘를 조금만 변화시키면 된다. 그러므로 위대한 언어인류학자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아직도 건재하다. <언어의 형식에 관하여 말하자면, 플라톤과 마케도니아 양돈가가 함께 걷고, 공자와 아쌈(Assam)의 머리 사냥하는 야만인이 함께 걷는다.>

, 이제 다시 원숭이로 돌아가 보자.

 

 

원숭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았더니...

 

야생의 유인원들은 특별나게 타고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은 상당 부분 본능적인 얼굴 표정과 몸짓이다. 겁이 날 때 빈정거리고, 서글플 때 입을 삐죽 내밀며,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이빨을 넓게 드러내는 따위 말이다. 유인원들은 복종을 나타낼 때 자기 엉덩이를 보여주면서 손을 펼치고 웅크려 절을 한다.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할 때는 털을 곧게 치켜세우고 펄쩍펄쩍 뛴다. 그러면서 나무를 흔들고, 돌을 던지고, 팔은 흔들고, 네발로 거드름 피우며 걷는다. 어쩐 놈은 잎새가 달린 나뭇가지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주목을 끌어, 집단의 움직임을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그들은 본능적인 목소리를 이용해 폭넓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의미를 전달한다. 음식을 찾았을 때는 <아하>, 무서울 때는 <->, 뭔가 궁금할 때는 <아욱>, 화가 날 때는 부드럽게 짖는다든지 기침을 한다. 그리고 서글픔을 토로할 때는 울거나 흐느끼며 비명을 지른다. 그들은 거친 야유로 인사를 나누고, 흥분할 때 짖어대며, 동료에게 만족하거나 음식이 맛있을 때에 끙끙거린다. 그들은 몸을 접촉하면서 친구를 사귈 때는 웃고, 헐떡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이빨을 딱딱거린다. 그리고 교미를 할 때는 헐떡거리면서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남이 보지 않을 때 자기가 했던 일을 말해 줄 수도 없다. 막대기, 열매, 돌멩이, 바나나 같은 특정한 물건을 달라고(누군가 가까이에서 그것을 손에 쥐고 있지 않다면) 다른 이에게 요구하지도 못한다.

이상이 야생에서 침팬지들이 드러내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요체이다. 그러나 도구 사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어 사용에서도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있는 침팬지들이 더 뛰어나다. 과학자들도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그것은 과학자들이 침팬지의 말을 가르치는 데 우선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케이스(Keith)와 해이스(Hayes)가 비키(Viki)라는 침팬지를 자기 아이처럼 입양시켜 기르면서 그렇게 했다. 6년 동안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비키는 겨우 <맘마>, <파파>, <>, <(up)> 정도를 말할 수 있었고 그것도 아주 불분명했다. 그러나 비키의 결함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목에 있었다. 사람의 말소리와 노랫소리는 후두에서 나온다. 후두는 성대를 포함하고 있는 호흡기의 윗부분이다. 거기에서 나온 소리는 후두와 입 사이에 있는 인두라는 유연한 공명실을 통과해 입과 코로 나온다.

지나가는 공기가 혀, 이빨, 입술에 차단당하면서 대부분의 자음이 생겨난다. <><>라는 모음은 후두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모든 언어에 나오는 <><에이>, 그리고 <>는 인두에서 만들어진다. 후두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침팬지(인간 이외의 다른 영장류는 물론이고)는 인두가 없다. 비키가 아무리 배우려 해도 네 단어 이상을 발음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리학적 사실 때문이다.

알랜(Allen)과 가드너(Gardner)1966년에 와쇼(Washoe)라는 이름을 붙인 침팬지에게 신호로 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 실험가들은 유인원에게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데 청각보다는 시각적인 채널에 집중했다. 4, 5년 후 와쇼는 160개의 신호 언어를 습득, 그 레퍼토리를 지기 나름대로 다양하게 조합시켜 사용했다. 그놈은 처음에 특수한 문을 열어 달라는 요청의 하나로서 <열어>라는 신호를 배웠다. 그러더니 냉장고 문이나 옷장 문 같은 다른 문을 여는 데도 그 신호를 보냈다. 나중에는 책상서랍, 가방, 상자, 항아리처럼 닫혀 있는 용기는 무엇이든 그것을 열어 달라고 할 때 <열어>라는 단어를 일반화해서 사용했다.

한번은 수잔(Susan)이라는 연구 조교가 와쇼의 인형을 밟았다. 와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나타냈다. <up Susan>, <Susan up>, <mine please up>, <give me babe>, <please shoe>, <more mine>, <Up please>, <please up>, <more up>, <babe down>, <shoe up>, <baby up>, <please more up>.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막(Premack)이라는 다른 조교는 플라스틱 칩세트를 이용해 사라(Sarah)라고 이름 붙은 침팬지에게서 상징 150개의 의미를 가르쳐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도록 했다. 프레막은 사라에게 다음과 같은 좀 추상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사과와 같은 것은 뭐지?> 사라는 <빨강>, <둥글다>, <꼭지>, <포도보다 맛없는 것>을 나타내는 칩을 골라 대답을 했다. 프레막은 초보적인 문법을 그의 <인간-침팬지>의 언어에 통합시킨 것이다. 사라는 다음과 같이 어순 의존적인 word-order-dependent 플라스틱 칩 명령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법을 배웠다. <Susan, put the banna in the pail and th apple in the dish.> 그러나 사라는 프레막의 문법 의존적인(grammer-dependent) 요구를 스스로 언어화하지 못했다.

로저 파우츠 Roser Fouts가 기른 침팬지 와쇼와 루시는 두 놈 모두 <>이라는 신호에서 <더럽다>라는 신호를 일반화할 줄 알게 되었다. 루시는 파우츠 씨가 지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그 신호를 사용했다. 루시는 또한 무를 지칭하기 위해 <cry hurt food>, 수박을 위해 <candy fruit>를 만들어냈다.

또 다른 경우에서는 라나(Lana)라는 이름의 3살 반 된 침팬지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 컴퓨터로 조정되는 키보드와 예르키쉬(Yerkish)라고 알려진 문자 언어를 활용했다. 라나는 <Please mashine make the window open> 같은 문장을 쓰고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적절하게 시작되는 문장과 그렇지 못한 문장, 예르키쉬어의 단어를 제대로 연결한 문장과 그렇지 못한 문장을 정확히 구분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가장 극적인 발견은 신호를 익힌 침팬지들이 인간의 개입 없이도 신호를 전혀 모르는 동료들에게 신호를 가르칠 수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와쇼는 루리스(Loulis)라는 10개월 된 침팬지를 입양해 들여와서는 바로 신호를 가지고 커뮤니케이션하기 시작했다. 루리스는 36개월이 되었을 때 와쇼에게서 배운 신호를 28개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와쇼와 두 마리의 또 다른 침팬지에게서 신호를 5년 동안 배운 후에 루리스는 55개를 익히게 되었다. 와쇼와 루리스와 다른 신호를 사용하는 침팬지들은 사람이 없을 때도 규칙적으로 신호를 이용해 커뮤니케이션한다. 원격 비디오카메라에 기록된 이러한 <대화들>은 한 달에 118번에서 649번 따지 발생했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실험 결과는 침팬지가 인간의 언어 능력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습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그것은 서투른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실험들을 통해 유인원들이 추상적인 생각을 커뮤니케이션하는 소질이 과학자들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뛰어나다는 점은 밝혀졌다. 그러나 침팬지의 능력은 3살짜리 어린아이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거의 특정한 물건을 달라는 것, 아니면 어떤 감정 상태를 표출하는 것에 국한된다. 신호를 활용하여 묻지 않은 과거나 미래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든지, 상황을 기획하거나 협동적인 모험을 조정하고 행위의 사회적 규칙을 형식화하는 예는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 와쇼가 인간의 개입 없이 루리스에게 신호를 55개 가르쳤다는 것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루리스가 어쨌든 신호를 익혔다는 것은 대단히 놀랍다. 그러나 그가 구사하는 신호는 자기 어미가 구사하는 것보다는 적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순전히 침팬지들의 창의력에만 맡겨 둔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신호는 점점 줄어들게 되고 결국엔 몇 세대 안 가서 신호를 사용하는 습관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숭이의 언어에 대해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그들의 신호 행위가 인간의 신호 행위와 닮았는 지의 여부가 아니라, 신호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의 초보적인 능력이 더 훌륭한 언어 능력의 진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느냐의 여부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 언어 기술의 진화 어느 단계에서 우리 조상들이 주고받은 메시지들은 지금 신호를 익힌 침팬지와 그를 훈련시키는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메시지들과 너무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 메시지들은 <인형을 달라>, <바구니에 바나나를 넣어라>, <창문을 열어라>처럼 서로에게 뭔가를 해달라는 요청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학생들과 함께 일전에 뉴욕에 있는 한 가정의 일상 대화에 대해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연구한 결과,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메시지들도 역시 거의가 타인에게 뭔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여기 앉아>, <돈 좀 줘>, <시끄러워, 조용히 해>, <콜라 좀 줘요>, <그것 여기다 내려놔>, <쓰레기 내다버려라> 같은 말이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창조된 물건과 서비스에 점점 더 의존할수록, 그러한 물건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타인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일 역시 잦아진다. 우리 조상들이 도구의 제작 및 사용과 문화적 전통에 의존하면 할수록, 타인에게 요청해야 할 메시지의 범위도 점점 확장되었다. 그래서 끙끙거린다든지 얼굴을 찡그리는 등 유전적으로 조정되는 레퍼토리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원숭이의 신호 사용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아파렌시스는 사회적으로 습득한 소리와 몸짓의 레퍼토리 100~200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가 출발할 수 있었던 시초였음이 분명하다.

 

 

소리의 승리

 

우리 조상들은 감정을 표현하고 간단한 요구를 할 때 시각적 청각적 신호를 모두 사용하였다. 그러나 보는 것과 말하고 듣는 것 사이에는 더욱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진화될 수 있는 잠재력의 측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에렉투스 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은 도구를 만들고 음식과 아기들을 운반하고 사냥 도구를 가지고 다니기에도 너무나 바빴다. 그래서 자기 팔과 손과 손가락을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할애할 겨를이 없었다. 그에 비해 발성-청각의 채널은 - 적어도 처음에는 - 특별히 더 신경 쓰지 않아도 수월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폐에서 나오는 공기는 어차피 날려 보내야 하는 폐기물이다. 게다가 소리는 낮 동안만큼이나 밤에도 쉽사리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한 의사 전달은 걸으면서 또는 뛰어가면서 행해졌다. 그리고 나무나 언덕에 시야가 가려 안 보일 때에도 먼 거리에서 효과가 있었다.

의미 있는 소리의 레퍼토리를 더 풍부하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이 종족 번식에 분명한 도움이 되기 시작하면서, 인두라고 알려진 호흡 기관은 특유하게 유연해지고 길어지게 되었다. 다른 포유동물의 인두는 작다. 왜냐하면 후두 또는 위쪽 기관이 두개골의 밑부분에 가까이 있어서 비강 뒷쪽에 거의 닿아 있고 호흡할 때에는 음식물과 공기가 서로 교차해서 통과한다. 그 결과에 대해 다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삼키는 모든 음식물은 기관의 구멍을 넘어서 지나가야 한다. 그래서 자칫하면 폐로 들어갈 위험도 있다.> 사실, <잘못 삼키는 것>은 우리에게 치명적일 수 있지만 다른 포유동물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목이 깊어지면서 치르는 대가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이러한 배열은 위험보다 이점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길어진 인후 덕분에 <>, <에이>, <> 같은 모든 언어에서 필수적인 모음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호미니드 조상의 몸에서 부드러운 부분은 화석으로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인두가 정확하게 언제 지금의 형태로 변형되었는지는 알아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브라운 대학의 필립 리버만(Philip Lieberman) 교수는 두개골 밑부분의 형태에 관한 지식을 근거로 해서 입과 목의 얼개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호미니드의 발성기관은 대충 해부학적으로 현대의 사피엔스가 등장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 주장대로라면 에렉투스도 네안데르탈인도 충분히 진화된 언어를 갖지는 못한 셈이다.

아기들이 옹아리를 하는 것만큼 인간의 본능에 깊이 다가가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단어와 문장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발음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따져보면 불과 50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기들이 자발적으로 내뱉는 소리의 폭은 훨씬 넓다. 부모와 그 외에 언어 공동체의 성원들은 점점 언어적으로 의미 있는 소리를 강화하고, 그 언어를 구사하는 데 필요 없는 소리는 무시하거나 억압한다.

이러한 소리들은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복잡한 모터 컨트롤 장치에서 비롯된다. 그 장치는 완전히 자동화되었기 때문에 작동이 가능하다. 리버만에 따르면 인간의 말을 자동화하도록 하는 그 신경호로는 인두에서 모음을 만드는 능력과 연계되어 진화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사피엔스 이전의 영장류에게는 모음을 내는 인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낼 수 있는 분명한 소리들을 속사포같이 연달아 발음할 수 있도록 하는 신경회로도 없다. 리버만은 훨씬 더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 말하는 소리를 지배하는 한층 상위의 규칙을 자동화하는 데도 역시 똑같은 정도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말하는 재주는 듣는 재주를 내포한다. 소리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를 구별해 듣는 소질은 다양한 소리를 내는 소질만큼이나 우리의 타고난 천성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만드는 것 역시 본성 속에 있다고 할 때, 이 역시 그와 똑같은 연유에서인가? 음악이 본질적으로 말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이 본질적으로 음악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인지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음조의 오르내림, 그리고 말과 노래의 리듬은 동일한 감수성에 호소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호른, 드럼, , 전자 신디사이저로 만들어내는 비슷한 음향 효과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 때문에 음악이 사람을 춤추게 만들고 군대를 행진하게 하며 연인들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일까? 구슬프게 울리는 현음에서부터 귀가 찢어지는 듯한 록뮤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악 연주들은 보이는 신호에 앞서서 들리는 신호가 진화해 온 것, 언어의 탄생, 인간 문화의 초월적인 비상의 시작을 그 나름으로 칭송하는 것일까?

 

 

네안데르탈인에 대하여

 

우리 인류는 이 지구상에서 문화 및 언어의 차원에서 도약을 성취한 최초이자 유일한 종일까? 나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40-20만 년 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에렉투스가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라고 알려진, 좀더 사피엔스처럼 보이는 종에 의해서 서서히 대체되었다. 에렉투스와 비교해 볼 때 그들의 머리는 더 둥글고 덜 울퉁불퉁하긴 하지만, 그들의 도구들을 보면 에렉투스가 백만 년 이상 사용했던 단순한 몸통들 및 조각들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그들이 원문화와 원시 언어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문화적 도약에서 우리 인류 말고 다른 선수가 있다면 그것은 네안데르탈인이다. 그들은 10만 년 전 유럽과 중동에서 나타났다가 멸종한 인간에 가까운 종이다. 처음 발견된 독일이 계곡 이름을 그대로 따다 지은 네안데르탈인은 그 선조 격인 초기 사피엔스보다 머리가 더 크다 사실 우리만큼 크다. 그러나 그들은 크고 앞으로 튀어나온 턱, 묵직한 앞니, 두툼한 눈두덩이, 깎아지른 이마, 타원형의 머리, 짧은 목, 그리고 두꺼운 팔다리뼈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들을 갖춘 사람이 미식축구 경기에 참가하고 있다면, 비록 규정된 유니폼과 헬멧을 쓴다 해도 스크럼 속에서 금방 눈에 띌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해부학적 설명은 그럴듯하게 와 닿는다. 네안데르탈인보다 앞서 살았던 에렉투스와 초기 사피엔스는 대륙의 빙하가 퇴조하고 기후가 따뜻했던 또는 심지어 아열대적이기까지 했던 시기에만 유럽에 살았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이 화석 기록을 남긴 약 10만 년 전은 마지막으로 대륙의 커다란 빙하기가 시작된 시기와 일치한다. 네안데르탈인은 극도로 추운 기후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에 살아남은 유일한 호미니드일 것이다. 그들의 해부학적 특징은 외부의 냉동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리라. 무엇보다도 그들의 몸은 두껍고 땅딸막한데, 이는 버그만의 이론에서 추위에 적응하는 체형으로 제시한 특징과 맞아떨어진다. 두번째, 그들의 커다란 앞니는 동물 가죽을 부드럽게 해서 털 담요와 따뜻한 옷을 만드는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소년 네안데르탈인의 앞니도 오래 지속된 저작 운동으로 마모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빨로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보내는 현대 에스키모 여인에게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두툼한 눈두덩이도 역시 강력한 저작 작용을 위한 선택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강한 턱이 위로 치켜 밀어 올리는 힘에 맞서 얼굴을 지탱해 준다. 따스한 기후에서 사는 당시의 다른 종들과 달리 네안데르탈인들에게는 먹을 것이 많지 않았고, 따라서 거의 사냥에만 의존해야 했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의 상징적인 행위와 사고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 , 여우의 송곳니로 만든 귀고리 같은 물건들이 네안데르탈의 유적지에서 함께 발견되었는데, 하버드 대학 피바디 박물관의 알렉산더 마샥(Alexander Marshack)은 그것들을 개인의 장신구로 해석한다. 프랑스와 불가리아에서 발견된 뼈에는 지그재그 모양이 선이 새겨져 있고, 헝가리에서 발견된 맘모스의 이빨에는 반짝거리는 부분이 있는데, 이들도 역시 네안데르탈인들이 모종의 의례를 치렀음을 보여주는 증거일지 모른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또한 네안데르탈인들이 시체를 일부로 매장하면서 마치 태아처럼 그 무릎을 굽혀 가슴에 접어넣었다고도 믿는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적 옆에 또는 가장 꼭대기에서는 석기와 동굴 곰의 조각 등의 포유류 유골들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장례 의식을 치렀고 내세를 믿었다는 이론을 뒷받침해 왔다. 현대의 원주민들이 악마가 꾀지 않도록 시신에다가 종종 칠하는 붉은 황토색 염료가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에서도 발견되었다. 콜럼비아 대학의 랄프 솔레키 Ralph Solecki 교수는 6만 년 전 이라크의 샤니다르(Shanidar) 동굴에서 죽은 네안데르탈인이 유골에 덮여 있는 꽃가루를 해석하면서 그들이 장례 의식을 치르렀으리라는 추정에 최후의 결정적인 단서를 내놓았다. 솔레키에 따르면 그 꽃가루는 국화나 접시꽃 같은 야생화의 큼직한 다발의 잔해로서 누군가가 동굴로 가져와서 시신 위에 정성스럽게 쌓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문화적 능력을 보여준다고 주장되는 표시들은 대부분 네안데르탈인들의 고안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사건에서 생겨난 것이다. 매장은 동굴이 함몰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태아처럼 웅크린 시신의 유골은 단지 그 함몰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태아처럼 웅크린 시신의 유골은 단지 그 함몰이 희생자들이 잠자고 있는 밤중에 일어나 빚어진 결과일 뿐이다. 거기에서 함께 나온 동물의 뼈와 석기들은 식사하고 남은 것이 우연히 연결지워진 것이다. 붉은 황토색 자국은 단순히 거기에 그런 색의 흙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장신구>들은 뼈와 이빨을 가지고 만지작거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샤니다르의 꽃가루는 무엇인가? 그것을 무덤 위에 뿌린 것은 장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들이 정말로 위에서 논쟁되는 그 모든 관습들의 적극적인 담지자였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발달된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 도약의 돌파구를 통과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뼈와 뿔로 만든 개인용 장신구들이 반드시 의식 면에서 엄청난 비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시 네안데르탈 남녀들은 단지 이성의 눈길을 더 잘 끌기 위해 그렇게 정교하게 만든 물건을 몸에 걸친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의례를 치렀으리라 추정되는 것도 그렇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언어화된 신념 체계가 없이는 성립되지 못할 만큼 복잡하고 신비하지가 않다. 예를 들어 시신에다가 붉은색 염료를 바른 것은 붉은색과 피의 연상 작용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적인 이론보다는 통상적인 행위 경험의 결과이리라. 마찬가지로, 시신 옆에 음식을 함께 놓는 것도 집단 성원들 사이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음식 분배의 패턴이 연장된 것으로서, 내세의 여정에 대한 관념을 공유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면 일부러 매장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당시에는 동굴이 곧 거주지였음에 주목한다면, 그것 역시 상징이 개입되지 않은 단순한 행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썩은 시신을 살아 있는 이들 가까이에 두면서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매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묻은 것은 무엇인가? 삽이나 곡괭이가 없었던 네아데르탈인들이 자연히 구멍을 작게 팔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시신을 넣다 보니 그 무릎을 굽혀 턱에다가 붙이는 것이 편리했으리라.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꽃다발을 얹었던 것이다. 무덤의 깊이가 얕았다면 거기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심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가까이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향수를 뿌렸을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인류에게서 어떤 행위가 문제가 될 때, 거기에는 그것을 그 나름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법칙이 있으리라고 우리는 자동적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들은 다른 종이서서, 그들에 대해 그렇게 자동적으로 무언가를 가정할 수는 없다.

네안데르탈인들이 과연 의식적인 상징과 문화적 삶의 언어적인 구성물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는 대목들이 또 있다. 무엇보다도 두개골의 밑부분을 측정해 보면 네안데르탈인의 발성 기관은 침팬지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인두는 현대의 사피엔스보다 훨씬 덜 발달되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네안데르탈인들의 목이 짧고 얼굴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들은 인류의 특징인 발성의 능란함을 결여하고 있었고, 그들의 사고력도 그에 대응해서 미숙했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 바로 그 때문에 네안데르탈인들은 현대의 사피엔스가 45천 년~35천 년 전에 유럽에 들어와 문화적 도약을 성취하자마자 바로 멸종해 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네안데르탈인의 운명과 우리 인류의 기원

 

해부학적으로 볼 때 현대 인류는 어디에서 처음 등장했는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 클라지(Klasies) 강 근처의 동굴에서 발견된 화석에 근거해서 본다면 아프리카에서 처음 등장했을 것이다. 지질학적 지표에 의해 측정된 그 연대는 전혀 정확한 것이 아니지만, 아주 대충 잡아서 115천 년~85천 년 사이가 된다. 해부학적으로 볼 때 클라지 강의 호미니드는 외견상 완전한 호모사피엔스 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들은 아프리카의 초기 사피엔스나 유럽의 네안데르탈인들이 사용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부학적인 면에서 현대 사피엔스의 아주 초기 유적은 또한 이스라엘 나사렛 근처의 까흐제(Qafzeh) 동굴에서도 발견되었다. 불에 노출된 적이 있는 석기에 걸린 전자의 방출에 근거에 측정한 그 연대는 좀 더 정확해서 92천 년±5천 년이다. 하지만 그 석기들 역시 대부분이 초기 사피엔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이러한 연대와는 대조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45천 년 전에 와서야 비로소 해부학적으로 현대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 그들은 초기 사피엔스의 도구와 완전히 다른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미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도약을 다루고 있었다.

이러한 발견을 두고서 현대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여 중동을 거쳐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갔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클라지 강의 유적연대를 최대한 가까이 잡아 85천년 전으로 본다면, 현대의 사피엔스는 중동에서 처음 출현하여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로 차례차례 포져 나갔을 수도 있다. 그들이 중동에서 아프리카로 이동했든, 아니면 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이동했든, 중동에서 아프리카로 퍼져나가는 데는 5천 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나가는 데는 왜 5만 년이나 걸렸는지 그 이유룰 알아내기는 어렵다. 아마도 북쪽 지방이 빙하기에 걸려 있었던 만큼, 현대 사피엔스는 자기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까흐제 동굴과 클라지 강가의 동굴에서 나온 자료들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 초기 사피엔스에서 현대 사피엔스로의 이행이 한 지역이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이론이 있다. 미시간 대학의 밀드레스 볼포프(Mildreth Wolpoff) 교수와 뉴멕시코 대학의 제임스 스풀러(James Spuhler) 교수가 견지하는 그 입장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은 하나의 분리된 호미니드 종이 아니라, 유럽과 중동에 다양한 인종으로 살았던 현대인의 조상으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이행기적인 초기 인종에도 그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한다. 논쟁이 붙은 양쪽 모두 자기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현대 인종들에서 추출된 DNA 분석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는 세포 조직의 DNA에 축적된 변화를 근거로 해서 어느 지역의 인종들이 어느 공통 조상으로부터 언제 갈라져 나왔는지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그 작업은 아직 실험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하와이 대학의 레베카 칸(Rebecca Cann) 교수가 저술을 통해 우리 인류의 <이브>14만 년에서 29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어떤 여자라고 주장해온 바를 우리는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중동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사피엔스가 공존했다는 것이다. 까흐제에서 가까운 카르멜(Carmel) 산에서 고고학자들은 지금부터 6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사용하던 도구들을 발견했다. 이는 유럽에서와는 달리 중동에서는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사피엔스가 3만 년 동안(65천 년 전부터 35천 년 전까지)공존했을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그들은 공존했을 뿐만 아니라 똑같은 종류의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여기에서 즉각 떠오르는 의문은 클라지 강과 까흐제 동굴에서 발견된 현대 사피엔스가 해부학적인 면에서 정말 현대 인간과 얼마만큼 비슷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언어적 능력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는가? 나의 느낌으로는 45~35천 년 전에 살았던 그들의 언어적 문화적 능력은 완전한 형태로 발전하지 못했고,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나을 게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초기 아프리카와 중동의 현대 사피엔스의 도구들이 유럽과 중동의 네안데르탈인의 도구와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인종이 유럽에서는 불과 5천 년밖에 공존하지 못했던 반면 중동에서는 최소한 3만 년 이상 가까운 곳에서 공존했던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현대 사피엔스가 유럽에 갑자기 등장했을 때, 그들의 테크놀로지는 네안데르탈인을 훨씬 뛰어넘었다. 석기 작업의 기초는 더 이상 몸통 돌과 조각이 아니라 길고 가느다랗고 면도처럼 날카로운 날로서 그것은 부싯돌에서 매우 정확하게 경제적으로 선별된 것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뼈, 상아, 사슴뿔 같은 물질은 자르고 새기고 구멍 뚫는 데 능숙했다. 그들은 바늘을 발명했는데, 아마도 그것으로 자기 몸에 맞게 옷을 꿰매었을 것이다. 그들은 판자를 이용해 창이나 작은 화살을 훨씬 멀리까지 던질 수 있었고, 거기에 정교하게 돌출시킨 뾰족한 촉을 부착시킬 수 있었다.

프랑스의 한두 군데 고립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지에서 그렇게 발달된 무기와 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인류가 네안데르탈인보다 훨씬 빠른 학습자가 되어 있었고, 네안데르탈인은 문화적, 언어적 도약을 전혀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기를 가지고 직접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이 멸종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침입자와 네안데르탈인이 양쪽 다 작은 밴드를 이루어 떠돌아다녔고, 그 어느 쪽도 상대를 멸절시키는 전쟁을 수행할 정치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때때로 벌어졌을 작은 충돌 정도로도 네안데르탈인은 새로운 종족에게 패해 사냥감이 부족한 지역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 결과 영양이 결핍되고 사망률이 높아져, 애당초 인구가 듬성듬성했던 상황에서 급격한 인구감소가 일어났을 것이다. 만약에 네안데르탈인이 언어와 문화면에서 인류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혀 다른 시나리오가 펼처졌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문화의 그림자

 

이제 서두를 끝낼 때가 다 되었다. 3만 년 전의 우리 조상들은 혀와 손과 눈과 귀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문화는 앞질러 달리는 반면, 인간의 본성은 아주 느리게 기어가거나 제 자리에 서 있다. 지질학적인 순간에 5천 년 사이에 - 예술의 모든 형태가 생겨났고 종교들이 꽃을 피웠다.

낮에도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의 천장과 벽애 살아있는 듯한 동물이 갑자기 등장한다. 3만년이 지났는데도 그 모습을 그대로 알아볼 수가 있다. 그림들 위에 또 다른 그림들이 실제보다 더 크고 우아한 색깔로 그려져 있다. , 들소, 순록, 야생 염소, 수퇘지, 털이 많은 코뿔소, 맘모스 같은 동물들이다. 간혹 가면을 쓴 사람의 모습도 있고, 남녀 성기 모양의 상징과 신비로운 손들도 육체에서 떨어진 채 그려져 있다. 조각도 그와 동시에 시작된다. 처음에는 상아를 가지고 작은 동물과 거친 사람의 입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독일의 포겔하르트(Vogelhard)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나중에는 엉덩이가 크고 가슴이 풍만한 뚱뚱한 여자의 상이 당시 사람들의 심상을 사로잡았다. 프랑스에서 시베리아로 건너간 예술가들은 그 <비너스들>을 돌, , 상아, 그리고 심지어 굽지 않은 흙을 가지고서도 만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동물과 사람의 다산을 기원하는 의례에서 사용되었거나, 또는 그냥 여자들이 뚱뚱해지기를 바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동굴에는 또한 동물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석판도 있다. 그 수 천마리 가운데 몇몇은 특별한 인간들의 가장 최초의 모습이다.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각각의 그 성인 남자들은 코가 길고 머리가 귀까지 덮여 있다. 장신구들은 더욱 다양해졌는데, 그냥 매다는 것이 아니라, , 이빨, 조개껍질 등을 엮어서 목걸이를 만들었다. 동굴이라고는 전혀 없는 러시아 평원에서 맘모스의 늑골에 가죽을 씌워 오두막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은 장신구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24천 년 전의 동굴 하나에서는 어른 한 명과 아이 두 명의 유해와 함께 뼈와 상아로 만든 구슬이 만 개도 넘게 나왔다.

그러나 서유럽의 동굴로 돌아가 보자. 예술과 종교의 싹은 거의 다 거기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멀리 동떨어져 있고 그래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하에 벽화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예술가들이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그림 그리기가 종교적 의례의 일부였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또한 벽에 빈 곳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원래 있던 그림 위에다가 포개어서 그렸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 가까이의 몇몇 군데에서 고고학자들은 한쪽에 구멍이 뚫린 작은 새 뼈를 발견했는데 이는 판(Pa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양의 신 - 옮긴이)의 파이프보다 25천 년이나 앞선 플루트 조각이다. 그러니까 음악도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음악이 있었다면 노래와 시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칠 수 없다. 가면과 옷을 걸치고 춤을 추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동굴에는 춤을 추면서 찍어놓은 발자국이 모랫바닥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따라서 벽에 그려진 그 그림들은 박물관에 걸려 있는 작품들처럼 감상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일단 완성된 다음에는 바꿀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멀티미디어의례 퍼포먼스의 계기로서 그것을 통해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고 갱신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그림들이 장차 고기를 많이 얻기 위해서 특별히 그린 것인지, 아니면 이미 사냥해 죽인 동물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인지, 또는 그 둘 다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려진 동물이 대개 그 지역에서 반드시 가장 풍부하지는 않아도 실제로 잡히는 동물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들이라는 사실은 그 그림들이 기원의 리스트였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 의례는 하나의 전체로서 사회적 심리적 기능들을 복합적으로 띠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마 사람들은 그 의례에 참여하면서 공동체 성원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했을 것이다. 또는 그 의례를 통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의무와 세상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가르쳤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 복합적인 전체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수렵인들이 행하는 의례와 비교할 만하다.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치르는 <인티츄마(intichiuma)> 축제에서 몸에 색칠을 하고 깃털을 꽂고서 마법의 유충이나 에뮤(Emu,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타조 비슷한 새 - 옮긴이) 조상을 흉내 내는 춤을 추면서 창조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절벽과 바위를 찾아가 세상이 젊었을 때의 꿈 같은 역사를 묘사한 그림을 응시하고 거기에 그림을 덧붙여 그린다.

인류가 꿈 같은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하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술과 종교는 물론 과학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과 그 표식을 포착했고, 계절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깨달았다. 동물을 그리고 새기는 데서도 어느 정도로 세밀했는가 하면, 그냥 말이 아니라 여름 또는 겨울의 외피를 입은 말이 등장한다. 순록도 그냥 순록이 아니라 뿔이 다 자란 수컷 순록이 머리를 치켜들고 입을 벌린 채 가을 발정기를 맞아 시끄럽게 울어대는 모습이 나온다. 수컷에게 뿔이 없을 때는 겨울이고, 암컷의 머리에 자기 새끼를 방어하기 위해 뿔이 나온 때는 봄이다. 들소는 겨울에는 털을 가득 입고 있다가 여름에는 모두 벗어버린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 계절에 따라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여름에는 북쪽으로, 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계절을 의식했다는 것은, 초기 구석기 수렵인들이 천문학적 관찰을 하여 시간의 경과를 기록했다는 마샥의 주장에 잘 맞아떨어진다. 그들은 깎는 도구의 마모된 끝부분을 손질할 때도 쓰는, 뼈로 된 작은 판 위에다가, 또는 말 등의 동물이 새겨져 있는 뿔 위에다가 시간의 경과를 표시해 놓았다. 마샥은 거기에 쐐기 모양의 선과 구멍들이 촘촘이 열을 지어 뚫려 있거나 긁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고고학자들은 그것을 사냥꾼들이 잡은 한떼의 동물로 보았다. 그러나 마샥은 그것을 날짜와 음력 달이 경과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았다.

뼈로 된 작은 판은 프랑스 남부의 블랑사르(Blanchard) 근처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최초의 것이다. 최초의 동굴 벽화와 최초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약 3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24개의 세트로 나뉘어진 60개의 표식을 볼 수가 있다. 각 세트에는 표식이 하나에서 7개까지 들어있다. 그 표식들은 분명하게 달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보름달이고 또 어떤 것은 초생달로 왼쪽으로 굽어 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굽어 있다. 그것은 처음에 분명히 표시된 어떤 지점에서 시작해서 뱀 모양으로 휘어지는데, 왼쪽으로 두 번 휘어지고 다시 오른쪽으로 두번 휘어진다. 마샥에 따르면 뱀 모양은 달이 움직이면서 휘어지고 꺾어지는 주요한 모양에 상응하여 점을 찍어놓은 것으로서, 달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포착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 해석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인접해 있는 표식들이 서로 약간씩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날이 바뀌면서 다른 도구를 사용한 것 같다. 그런데 뉴욕 대학의 랜달 화이트(Randal White) 교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그들이 서로 달라 보이는 것은 표식을 하는 돌송곳과 조각칼이 무뎌지고 쪼개지고 모양이 바뀌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절에 따라 모양을 달리해 가면서 정확하게 동물을 그렸던, 저 위대한 갤러리의 창작자들은, 달의 모양을 필요만 있었다면 충분히 그릴 수 있었으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상은 없다?

 

이집트에서 원숭이 같은 옛날 동물을 발견해 유명해진 고생물학자 얼윈 시몬스(Elwin Simons)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옛날 뼈를 캐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내게 설명해 주었다. 아마추어 계보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들 가족이 허드슨강에 원래 정주했던 네덜란드인들과 갖는 연관성에 대해 늘 이야기해 주었다. 만일 찾고자 하는 것이 조상들이라면, 시몬스는 자기 가족들에게 진짜 조상들 - 3천만 년 전에 살았던 - 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계보학자와 고생물학자는 똑같이 조상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혈통 승계의 개념이 다르다. 계보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조상은 특정한 선조에 연계되어 있으면서 일부러 구별되어 채택되는, 특정한 이름을 가진 개인들이다(계보학자들은 원숭이 삼촌을 찾아내는 데는 관심 없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인간을 낳은 시간의 작은 부분만 놓고서 계통을 따지는 데 그친다. 확실한 문서 자료에 근거해 가장 오래된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기원후 17세기에 카롤링거(Carolinger) 왕조의 원조 가운데 한 명이었던 란덴의 페핀(Pepin of Landen)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는다면 카롤링거 혈통은 약 56세대를 이어온 셈이다. 그러나 현대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한 것을 15만 년 전으로 한다면, 우리의 각 가계는 5600세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볼 때 모든 사람의 조상 가운데 99%는 계보학적으로 <불가지 영역>이다.

몰몬교도들은 세계에서 가장 헌신적인 계보학자들이다. 그들은 컴퓨터 디스켓에다가 약 15억 명의 죽은 사람 이름과 관련 통계를 저장해서 솔트레이크시에 있는 시에 있는 교회 본부 근처 땅속에다가 묻어두었다. 온도도 조절되고 핵 폭격에도 안전한 그 저장고에는 한 해에 몇백만 명씩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는데, 그들이 결국 바라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났던 사람의 이름을 모두 밝히는 것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이러한 노력의 이유를 제공한다. 죽은 자는 몰몬교만이 행할 자격이 있는 의례에서 본인의 부재중에 이름이 불려지고 세례를 받지 않으면 천국 생활을 즐길 수 없다. 몰몬교도들은 자기들이 죽어 천국에 들어간 다음 신으로서 군림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느냐는 죽고 나서 자기들이 교회에 데려갈 수 있는 수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몰몬교도 계보학자인 토마스 티니(Thomas Tinny)는 자기 조상을 156세대 거슬러 올라가면 곧장 창세기의 아담에게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몰몬교도 가운데서조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다. 약간 신빙성 있는 또 다른 몰몬교도 계보학자는 고대 노르웨이의 전설과 신화를 이용해 기원후 260년에 살았던 조상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모든 것을 통틀어 놓고 볼 때, 유럽의 조상은 중세 암흑시대 - 가장 길게 잡으면 불과 50세대 전이다 - 에 이르러 이름 없는 모호함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계보학적으로 최대한 추적하는 데 있어 계보학자들이 채택한 전략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그들은 한 직계 조상- 보통 남자이지만- 으로부터 따져 내려오면서 수천까지는 아니지만 수백 명의 다른 직계 조상을 무시해 버린다.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는 베스트셀러이자 인기 있는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였던뿌리(Roots)에서 바로 그 전략을 활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어머니로부터 시작해, 외할아버지로 건너가 그 위로는 거의 대부분 남자들만 헤아려 쿤타 킨테(Kunta Kinte)에 이르렀다. 쿤타 킨테는 영국인 노예상에게 잡혀 1767년 메릴랜드의 플랜테이션 농장에 팔린 아프리카인이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는 헤일리의 조상으로 쿤타 킨테 말고도 255명이나 더 있었을 수 있다. 헤일리 그 자신이 감비아의 어떤 마을을 방문했을 때, 자기의 안색이 그들처럼 검지 않아서 자기가 <순수하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자기가 무시한 어떤 <뿌리>의 중요성을 무심코 드러낸 셈이다.

결함도 많고 또한 억지로 고안된 계보 따지기로 겨우 60여 세대 정도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더 멀리 뿌리를 캐기를 원하는 이를 위한 방법이 있다. 이름을 가진 조상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더듬어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부족과 종족 집단 - 스코트족, 게르만족, 아즈텍족, 캄보디아족, 베트남족, 타밀족, 아샨티족 등 세계에 얼마든지 널려 있다 - 을 규정하는 계보 원리를 채택할 수 있다. 그러한 깊은 뿌리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동일한 종족적 또는 부족적 단일체의 성원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서부터 역사, 신화, 그리고 언어적인 유사성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는 시간의 복도를 지나 아득한 종족적 또는 부족적 여명기를 신비하게 떠돌게 된다. 그러나 종족적 또는 부족적 계보의 핵심적인 가정은, 스코트족은 항상 스코트족과 결혼했고 게르만족은 게르만족끼리만 짝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그리고 정복자들은 늘 여자를 전리품으로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러한 가정은 애매해진다.

바스크족과 유태족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두 종족이다. 피렌체 북부 양쪽에서 생겨난 바스크족의 언어는 유럽의 다른 어떤 언어와도 관계가 없다. 그들의 종족성은 로마 시대 훨씬 이전 유럽의 청동기 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갈대아 우르 지방이 기원이라고 성서가 증언하는 유태족은 그 어느 쪽도 자기들이 엄격한 족내혼에 의해서 생겨난 순수한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 두 경우에 모두 공통의 조상이라는 경전은, 사실 엄청난 숫자의 외래 조상 계통을 무시함으로써만 성립된다. 혈액이나 다른 면역적인 특징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떤 주어진 지역에 사는 유태인들은 다른 지역의 유태인보다 그 지역의 이웃 종족들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거듭 밝혀왔다.

설령 이러한 불완전함을 무시한다 해도 우리는 4천 년 또는 160세대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는 종족적 계통의 외적인 한계를 벗어날 길이 없다. 그 지점을 넘어서 더 멀리 있는 조상을 찾고자 하는 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남아 있다. 그것은 흔히 인종이라고 구분되어 알려진 인류의 원조들로부터 자신의 핏줄을 이어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코카서스인은 코카서스인으로부터, 니그로이드는 니그로이드로부터, 몽골로이드는 몽골로이드로부터 나왔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얼마나 오래전으로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각각의 조상들은 정말로 완전히 배타적인 것일까?

 

 

인종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먼저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앞에서 던진 질문은 대답하기가 까다롭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코카서스인이냐 니그로인이냐 몽골인이냐를 판별할 때 주목하는 특징은 우리 몸 바깥쪽의 부들부들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입술, , 머리카락, , 그리고 피부는 화석으로 남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화석으로 보존되는 딱딱한 부분은 인종의 표식으로 신빙성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인종의 거의 모든 해부학적인 특징들이 중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인종들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존재했는가를 따지는 것에는 더욱 중대한 문제가 있다. 현대의 인종 구별에서 주목하는 특징들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항상 함께 붙어 다니는 하나의 다발로서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피부 빛, 머리카락의 모양, 입술 크기, 코의 넓이, 눈꺼풀 등등의 다양성은 각각 독립적으로 결합되고 유전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인종 집단의 체질에서 지금 함께 붙어 다니는 특징들이 과거 그 선조 집단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아예 그런 특징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세계의 인종적 특징들이 너무나 다양하게 조합을 이루기 때문에 네다섯 가지 주요한 인종적 유형의 단순한 틀을 적용할 수 없다. 입술과 코가 가늘고 머리카락은 약간 곱슬이지만 피부는 갈색 내지 검은색인 사람들이 수백만 명 북아메리카에서 살고 있다. 산족같은 남아프리카의 원래 거주자들은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처럼) 내안각취피(눈구석과 눈초리에서 윗눈꺼풀이 아래 눈꺼풀에 겹친 부분-옮긴이)가 있고 피부빛은 옅은 갈색 내지 짙은 갈색이며, 머리카락은 완전 곱슬이다. 인도에는 머리카락은 곧거나 곱슬이고, 피부빛은 갈색 또는 검은색이며, 입술과 코가 가느다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는 내안각취피가 약간의 곱슬머리, 하얀 눈, 몸과 얼굴에 수북한 털, 그리고 하얀 피부와 조합을 이루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내안각취피, 옅은 갈색에서 짙은 갈색의 피부빛, 약간 곱슬머리, 두꺼운 코와 입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오세아니아의 섬 거주민들에게서는 갈색에서 검은 피부빛, 대조적인 형태와 크기의 머리카락 및 얼굴들이 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유전적 특징들이 재미있게 한 묶음이 된 예는 일본 홋가이도의 아이누족(Ainu)인데, 그 피부는 그다지 검지 않고 눈두덩이는 두툼한데 몸에는 세계에서 털이 가장 많이 나 있는 종족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피부가 흰색에서 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금발에서 갈색이며 약간 곱슬이다.

인종적 정체를 밝히는 데 사용되는 특징들이 그렇듯 하나의 다발로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다양하게 조합을 이룬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면, 우리는 이상한 생물학적 범주들을 만들어내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는 데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무시되고 있다. 즉 어떤 흑인들의 눈, , 머리카락, 입술은 백인과 너무 비슷해 잘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백인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흑인보다도 더 니그로적인 모습을 띨 수가 있다. 이러한 예외들이 생기는 까닭은 미국인들이 인종을 따질 때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그 부모가 어떻게 분류되었느냐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종 개념에 의하면 부모의 한쪽이 흑인이고 다른 한쪽이 백인이면 비록 유전자 법칙에 의해 절반씩 유전됨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은 흑인이다. 그렇듯 인종 분류의 비좁은 칸막이들 속에다가 사람들을 억지로 쑤셔 넣는 관행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느냐는, 흑인의 조상이 오로지 한 명의 조부모 또는 증조부모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흑인으로 분류되는 백인이 있게 되는 것이다. 미국 흑인들은 대부분 최근 유럽의 조상들로부터 상당한 부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미국 흑인들의 표본을 연구해 보면 그들이 유전적으로 아프리카인을 대표한다는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인들의 인종적 복합성으로 말하자면 브라질에 맞먹는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브라질인들은 인종의 유형을 3, 4가지가 아니라 3~4백 가지로 나누는데, 이는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뒤섞여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인디언 그 어느 범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사정을 적절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특징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들과 함께 붙어다니지 않는다. ABO 혈액을 가진 집단을 예로 들어보자. 피부빛이 연한 스코트인, 피부빛이 검은 중앙 아프리카인, 갈색 피부의 호주 원주민들은 70 내지 80%O형이다. 만일 우리가 피부빛처럼 혈액형을 눈으로 구별할 수 있다면, 스코트인과 아프리카인을 같은 인종으로 집어넣을 것인가? A형도 피부빛과 상관없기는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인, 동인 도인, 그리고 중국인들의 20%A형이다. 그러면 그들을 모두 똑같은 인종으로 보아야 할까?

통상적인 인종 경계를 경쾌하게 무시하는 특징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또 한 가지는 PTC(phenylthiocarbamide)의 맛을 감지하는 미각이다. 1931년 어떤 실험실의 연구자가 그 물질의 표본을 우연히 떨어뜨렸다. 동료들은 그것이 입속에서 일으키는 쓴맛 때문에 투덜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 인류학자들은 이 세상에는 PTC의 맛을 느끼는 사람들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시아에는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15-40%에 이른다. 일본은 중국보다 두 배나 더 많고, 말레이시아는 세 배나 더 많다. 이는 그 각각의 집단이 다른 인종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만일 그 맛을 느끼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눈으로 구별할 수 있다면, 그들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네 이웃이나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것인가?

현대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이래, 유전자들이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면서 조합을 이루는 동안에 인종 유형은 비정형의 상태 속에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어떤 것들은 우연의 작용을 반영한다. 작은 집단이 새로운 지역에 이주하는 동안에, 정착자들에게는 원래 자기 조상에게는 드물었던 유전자가 우연히 많이 나타날 수가 있다. 그때부터 새로운 인구 집단에게는 그 변형이 자주 나오게 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아시아인들의 앞니가 삽 모양인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주자들이 유전적으로 전혀 다른 인구 집단을 만났을 때 유전자들이 더욱 활발하게 흘러다니게 되는데, 이것은 인종 집단의 소멸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무작위 과정이다. 일찍이 미국과 브라질에서만큼 그렇게 거대한 인종의 혼합이 일어난 적은 없었겠지만, 그러나 아주 오랜 옛날에도 유전적으로 구분되는 두 집단 사이의 불확정적인 경계선에서는 어느 정도 인종의 혼합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생물학적 진화에서는 대개 그러했듯이, 인종을 구분하는 데 통상적으로 이용되어온 유전자들의 분포와 빈도를 변경시키는 주요한 원인은 자연 선택이다. 인구 집단이 다른 거주지로 옮겨가거나 또는 원래 살던 곳의 환경이 바뀌면서 종족 번식을 위한 자연 선택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유전적 특질들의 새로운 조합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인류학자들은 인종적 차이를 기온이나 습도 등의 기후적 요인과 결부시키는 그럴듯한 제안 몇 가지를 내놓은 바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인의 길고 좁은 코는 매우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폐에 도달하기 전에 데피기 위해 자연 선택된 것인지 모른다. 에스키모인들의 둥글고 땅딸막한 체구도 역시 추위에 적응하기 위한 것-버그만의 법칙을 다시 상기해 보자-인지 모른다. 그와 대조적으로 키가 크고 가느다란 몸집은 열을 최대한 방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일강 유역 아프리카인들의 크고 가느다란 몸집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것이다. 그들은 극도로 뜨겁고 건조한 지역에서 사는데, 그 후손들 가운데는 세계적인 농구 선수들이 몇 명 나오기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연 선택에 의해 그 빈도가 결정되는 특질들은 지금의 인종 구분의 역사와 유래를 재구성하는 데 그다지 유용한 표식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코가 짧은 사람들이 열대 지방에서 추운 지방으로 옮겨갔다고 가정해 보자.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서 자연 선택은 그들 가운데 코가 긴 사람의 빈도를 높일 것이다. 만인 어떤 관찰자가 그들과 그 옆에 살고 있는 코가 긴 사람들의 유사성에 주목한다면, 그는 그들이 더운 지역의 코가 짧은 인종보다는 추운 지역의 코가 긴 인종의 후손이라고 곧바로 결론지을 것이다. 따라서 인종적인 계통을 밝히는 데 가장 좋은 지표는 앞서 언급했던 삽 모양의 앞니처럼 우연적인 것 또는 적응과는 무관한 특질이다.

유감스럽게도 인류학자들이 한때 인종 구분의 가장 좋은 지표로 여겼던 특질들 가운데 상당수가 어떤 상황에서는 적응적인 것임이 밝혀졌다. 혈액 집단이 특히나 실망을 크게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ABO 시리즈는 천연두처럼 재생산에 치명적인 질병이나, 독성 박테리아로 인한 음식의 변질에 대한 항체를 배양하는 과정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액형의 빈도는 인종적인 계통을 가지고도 해명할 수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상이한 인구 집단들이 상이한 질병들에 일시적으로 노출되어온 역사를 중심으로 해서도 풀이할 수 있다. PTC의 맛을 느끼는 미각처럼 눈에 띄지 않고 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특질조차도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계통적으로 분리된 집단들이 비슷한 적응적 반응을 보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화학적으로 볼 때 PTC는 갑상선의 기능에 악영향을 끼치는 어떤 물질과 비슷하다. 갑상선이 잘 기능하지 못할 때 일반적으로 갑상선 종양이나 수족 장애, 그 밖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질병이 나타나게 된다. 갑상선 종양의 위험이 큰 인구 집단에서는 PTC처럼 갑상선을 해치는 물질들이 함유된 음식을 맛으로 느끼는 사람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인종적인 계통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상에서와 같은 수많은 유보 단서들에도 불구하고, 그 평균적인 빈도가 통계학적으로 상당한 정도로 함께 붙어 다니는 수많은 비가시적 유전적 특질들을 기초로 해서 인구 집단을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그 집단들이 공유하는 유전자의 퍼센트 비율은 그들 사이의 유전적 거리를 측정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유전적 변화가 모든 집단에서 똑같은 비율로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그 가운데 어느 두 집단이 언제부터 갈라지기 시작해서 각기 그럴듯한 계통수를 형성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지들을 쳐나갔는지 그 시점을 추정할 수 있다. 뤼기 카발리-스포르자(Luigi Cavalli-Sforza)라는 인류학자는 그러한 기법을 활용해 현대의 인류를 일곱 개의 주요한 집단으로 구분했다. 아프리카인, 유럽인, 동북아시아인, 동남아시아인, 태평양섬 원주민들, 오스트레일리아인, 그리고 뉴기니아인이 그것이다. 가장 그럴듯한 계통수를 보면 공통의 아프리카 뿌리에서 처음으로 다른 가지가 갈라져 나온 것은 약 9만 년 전이다. 두 개의 주요한 가지 가운데 하나에서 또 하나의 가지가 갈라져 나와 세 개가 된 것은 약 6만 년 전이다. 45천 년-35천 년 사이에 그 가지는 5개로 늘어나는데, 거기에는 유럽인과 북아시아인이 나뉜 것도 포함된다. 가장 최근에 갈라진 것 가운데는 아메리카 인디언으로부터 북아시아인들이, 태평양의 섬 원주민으로부터 동남 아시아인들이 분리된 것이 있다.

카바리-스포르자의 그러한 계통수가 그 이후에 쏟아진 거센 비판들을 견디고 계속 살아남을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절대 놓치지 말자. 그 나무를 작성하는 데 사용된 특질들의 묶음에는 피부빛, 머리카락의 모양 같은 통상적인 인종적특질들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아득한 옛날로 돌아갈수록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그런 인종 집단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인류의 피부에 어떻게 색깔이 입혀졌을까

 

인간은 대부분 그 피부빛이 아주 희지도 않고 아주 검지도 않다. 피부빛이 완전히 흰 사람들은 북유럽인과 그 조상들이고, 완전히 검은 사람들은 중앙아프리카인들 및 그 조상들인데, 이 모두가 아마도 특수한 적응의 결과일 것이다. 그들의 1만 년 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피부빛은 갈색일 것이다.

사람의 피부빛은 멜라닌 melanin이라는 분자에 의해 결정된다. 멜라닌의 일차적인 기능은 가장 윗쪽의 피부를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포유동물에게 햇빛 가리개로 작용하는 촘촘한 털이 인류에게 없기 때문에 자외선은 심각한 문제이다. 털이 없는 인류에게 햇빛이 가져다주는 위험은 두 종류이다. 하나의 보통의 화상으로 물질이 생기고 갈라지는 감염의 위험이 있다. 다른 하나는 악성흑생종을 포함하는 피부암으로, 가장 치명적인 병 가운데 하나이다. 멜라닌은 이러한 고통을 막는 제1차 방어선이다. 멜라닌 분자가 많을수록 피부는 더 검어지고 햇빛 화상과 모든 피부암에 걸릴 위험은 적어진다. 바로 그 때문에 피부가 흰 유럽의 후예들이 옷을 얇게 입고 실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호주 같은 지역에서 피부암의 발병 비율이 높은 것이다. 아프리카의 자이레인들처럼 피부가 아주 검은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피부암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걸리기라도 할 때에는 손바닥이나 입술처럼 색소가 없는 부위에 걸린다.

만일 햇빛이 오로지 해만 끼칠 뿐이라면 자연은 모든 인구 집단을 검은 피부빛으로만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햇빛은 순전히 위협만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부에 와 닿으면서 표피 속의 지방질을 비타민 D로 전환시켜 준다. 혈액은 비타민 D를 피부에서 장으로 운반하고(기술적으로 그것을 비타민이라기보다는 호르몬으로 만들면서), 거기에서 칼슘을 흡수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이 부족한 사람은 구루병과 골연화증에 걸린다. 여성들은 칼슘이 부족하면 산도의 기형을 초래해 잘못하면 출산 중에 산모와 아기의 목숨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비타민 D는 몇 가지 음식에서 얻어질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바다 물고기의 기름과 간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내륙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중요한 물질을 공급받는데 햇빛과 자기의 피부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 피부의 독특한 색깔은 상당한 정도가, 햇빛이 너무 많아 화상이나 피부암에 걸릴 위험과 너무 적어서 구루병이나 골종에 걸릴 위험 사이의 어떤 타협인 셈이다. 인류의 대다수가 갈색 피부를 가진 것이나, 열대 지방 사람들의 피부가 검고 위도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피부가 희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타협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중위도 지방에서는 피부가 계절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전략을 따른다. 예를 들어 지중해 유역의 경우 여름에는 피부암의 위험이 높은 반면 구루병의 위험은 낮다. 그래서 몸은 멜라닌을 더 많이 생산하게 되어 사람들의 피부가 검어진다(즉 그들은 햇빛에 그을린다). 겨울에는 화상과 피부암의 위험이 낮아 멜라닌이 적어지고 그래서 검게 그을린 피부를 벗는다.

피부빛과 위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요인들-비타민 D와 칼슘이 들어있는 음식의 섭취 가능성, 겨울에 끼는 구름, 입는 옷의 양, 그리고 문화적 선호-이 그 관계에 어느 쪽으로든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은 생각만큼 그렇게 피부가 희지 않지만, 그들의 서식지와 경제는 비타민 D와 칼슘이 유난히 풍부한 음식을 제공해 준다.

길고 춥고 흐린 겨울 동안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는 북유럽인들은 항상 비타민 D와 칼슘 부족으로 구루병과 골종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그 위험은 바다 물고기를 잡지 않은 목축인들이 북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한 기원전 6천 년 이후의 어느 때에 매우 높아졌다. 곡식과 농장 가축과 함께 이주했던 갈색 피부의 지중해인들에게 그 위험은 특별히 더 컸을 것이다. 보스턴(북위 42)에서 코카서스인 피부의 표본(할례 때 수집한 어린아이 성기의 포피)11월에서 2월까지의 맑은 날 햇빛에 노출시킨 결과, 거기에서는 비타민 D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에드먼튼(북위 34)의 햇빛은 한겨울에도 비타민 D를 생산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유럽은 거의 북위 42도에 걸쳐 있다. 약하고 듬성듬성한 일조량으로도 비타민 D를 합성해 낼 수 있는, 피부가 희고 그을리지 않은 개인들이 자연 선택되었다. 혹한의 겨울에는 아이들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고 얼굴의 아주 일부분만 햇빛에 내놓게 하는데, 그 결과 많은 북유럽인들의 특징인바, 뺨에 반투명한 핑크빛 반점이 있는 개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우유를 마심으로써 칼슘을 섭취할 수 있었던 개인도 역시 자연 선택에 의해 생존에 유리해질 수 있었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한다).

만일 피부가 흰 사람들이 한 세대에 한 사람당 단 두 명의 자손만 생존시킨다 해도, 그 피부빛의 교체는 5천 년 전에 시작하여 서기 원년 훨씬 이전에 현재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자연 선택만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문화적 선택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어느 아이를 더 많이 먹이고 어느 아이를 무시할지에 대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결정해야 했을 때마다, 결국 혜택은 피부가 흰 아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이미 경험을 통해 그런 개인들이 검은 후손보다 더 크고 힘세고 건강하게 자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이기에 흰 색은 아름다웠다. 건강했기 때문이다.

적도 지방에서 검은 피부의 진화를 설명하려면 위의 자연 선택과 문화적 선택의 결하된 효과를 단순히 뒤집기만 하면 된다. 일년 내내 햇빛이 머리에 바로 내리쬐고 옷을 입으면 일을 하고 생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상황에서 비타민 D는 결코 부족할 수가 없었다(칼슘도 야채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구루병과 골종도 드물었다. 피부암이 가장 골칫거리였는데, 이는 자연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문화가 증폭시킨 문제이다. 부모들은 피부가 검은 아이들을 선호했다. 경험을 통해 그들이 병도 잘 안 걸리고 잘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다. 검은색은 아름다웠다. 건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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