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항생물질
제25장. 나일론
제26장. 폴리에틸렌(새고 오염된 기구가 준 선물)
제27장. 테플론(원자폭탄에서 프라이팬까지)
제28장. 가솔린('꽃' 이론과 안티녹제)
제29장. 약품(우연히 발견된 예상 밖의 효과)
제30장. 오염된 물과 진흙에서 얻은 약
제31장. 유기합성에 있어서의 붕소와 인
제32장. 총알도 뚫지 못한다
제33장. 현대생활에 내린 행운의 선물
제34장. 생명의 소용돌이
제35장. 착오와 인해 그리고 우연에 의한 유기합성
제36장. 크라운과 크립탠드(왕관모양의 분자)
제24장. 항생물질.
페니실린. 우연에 의한 귀중한 발견 가운데 매우 유명한 것은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의 페니실린의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에 얽힌 이야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세렌디피티가 있으며 플레밍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했던 것인지에 대하여 주목할만한 속편이 있는데 그 속편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플레밍의 생애에는 제각기 연결이 잘 안 되는 사연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 없어도 성공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의 친구이자 연구 동료이던 C.A. 퍼네트 교수가 플레밍의 죽음 앞에 바친 조의를 표하는 글에서 "그런 것들이 단순한 우연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플레밍은 1991년 스코틀랜드의 에어셔주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 때문에 모친은 농장을 운영하면서 4남매의 자기 자식과 몇 명의 의붓자식을 길러냈다. 알렉산더는 다섯 살이 되자 1.6킬로미터의 학교를 다녔다. 12세 때에는 학교와의 거리가 26킬로미터나 되어서 킬마녹 학원에 기숙하였으나 그래도 철도역과 집 사이의 왕복 19킬로미터를 매주 걸어야 했다. 킬마녹에 1년 반 있다가 런던의 형에게로 가서 폴리테크닉(대학 수준의 종합기술전문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형편이 나빠져서 오래 계속할 수가 없었다. 16세가 되어서 플레밍은 해운회사에 취직했으며, 여가가 생겨 런던의 스코틀랜드 자원봉사자 조직에 들어갔다. 이 그룹에서는 그는 수구팀에 가입했었는데 어느 때인가 런던대학 부속 성모마리아병원의 팀과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몇 년 후 그는 약간의 유산을 상속했다. 형은 그에게 의대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런던애는 12개의 의대가 있었으나 플레밍이 알고 있는 의대는 과거에 수구 시합을 한 적이 있었던 성모마리아병원과 관계가 있는 런던대학뿐이었으므로 결국 그리로 입학했다. 같은 무렵 앨름로스 라이트가 미생물학 교수로서 이 대학으로 부임해 왔다. 플레밍은 처음에 외과의사가 될 생각이었으나 줄업 후 라이트 경의 연구실에 취직하였으며, 그 후 1929년에는 미생물학 교수가 되어 일생을 이 연구실에서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플레밍과 라이트는 프랑스로 파견되어 부상병의 치료를 담당했다. 그 당시의 의사들은 전장에서의 부상자 치료에 오로지 소독약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플레밍은,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되던 소독약인 석탄산(페놀)이 이로운 점보다는 해가 더 컸는데 그 원인이 세균을 죽이기 전에 먼저 신체를 지키는 백혈구를 죽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1922년 플레밍은 세균은 죽이지만 백혈구는 죽이지 않는 항생 물질을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했다. 플레밍이 감기에 걸렸을 때 자신의 콧물을 조금 채취해서 배양을 했다. 황색의 세균으로 가득 찬 배양 접시를 살피고 있을 때 그의 눈물 한방울이 접시에 떨어졌다. 다음날 그가 배양 접시를 조사해 보니 눈물이 떨어진 부분은 깨끗해져 있었다. 플레밍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탐구심에 의해 눈물은 세균을 재빨리 분해하면서 인간의 조직에는 해가 안되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눈물에 함유되어 있는 항생 효소를 그는 리소자임(lysozyme)이라고 이름지었다. 리소자임이 죽이는 세균은 비교적 무해한 것이기 때문에 별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후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이 발견은 페니실린 발견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전주곡이었다.
1928년의 여름, 플레밍은 유행성 독감을 연구하고 있었다. 실험실의 평상시 일로 페트리 접시(뚜껑이 있는 평탄한 유리 접시) 속에서 배양한 세균을 현미경으로 살피고 있던 플레밍은 하나의 접시 속에서 이상하게 아주 깨끗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잘 살펴 보았더니 아마도 뚜껑이 열려있을 동안에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한 점의 곰팡이 주위가 깨끗해져 있는 것이었다. 리소자임의 경험으로 보아 플레밍은 이 곰팡이가 배양 접시 속의 포도상 구균을 죽이는 무엇인가를 망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플레밍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리소자임에 관한 이전의 경험이 없었던들 아마도 많은 세균 학자들처럼 그 접시를 버렸을 것이다...또 아마도 몇 명의 세균 학자는 내가 발견했던 것과 같은 변화를 발견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항생 물질에 대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배양접시는 간단히 버려졌을 것이다...나는 이 오염된 배양 접시를 '제기랄' 하면서 버리지 않고 좀 조사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플레밍은 이 곰팡이를 나누어 푸른곰팡이인 페니실륨 속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항생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이름지었다. 후에 그는 "수천 가지의 곰팡이가 있고 수천 가지의 세균이 있는데 마침 알맞은 시간, 마침 알맞은 장소에 그 곰팡이가 떨어졌다는 것은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수천 가지의 세균' 이란 적절한 표현이며 페니실린은 포도상 구균을 함유하는 많은 세균에 유효하지만 다른 몇 가지 세균에는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페니실린이 유효한 세균에는 인간에게 있어서 흔하면서 심각한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 많이 함유되어 있었다.
1928년 당시 전염병에 곰팡이를 이용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1877년 루이 파스퇴르와 그의 공동연구자 J.F. 주베르는 한 미생물이 다른 미생물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을 밝혔다. 고대에는 이집트인이나 로마인들이 빵에서 얻은 곰팡이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빵에 생기는 곰팡이에도 수천 가지의 종류가 있고 전염병에 유효한 물질을 만드는 것은 그 중에서도 극히 적었을 것이다. 플레밍은 이것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놀라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동물에 대해서 독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체의 세포에 대해서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실험을 계속했다.
이것이 언젠가는 치료약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제가 믿게된 것은 백혈구에 대해서 해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인간의 혈액 중에서 실험하면 미정제의 페니실린은 1000분의 1의 농도에서도 포도상 구균의 생육을 완전히 저해했습니다만 백혈구에 대해서는 원래의 배양기 그 이상의 독성은 없었습니다...(병원 환자의) 몇 사람에게 사용해 보았더니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이적인 것은 없고 제가 생각하건데...이것을 농축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페니실린의 농축을 시도했는데 알아낸 것은...페니실린은 쉽게 분해되며, 그리고 우리의 간단한 방법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설파닐아미드가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화학요법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설파제에 관해서는 이 뒤에 설명한다). 플레밍의 공동연구자 레이스트릭이 페니실린을 분리시켜서 농축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페니실린에 관해서는 그 후 몇 년 동안은 손대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3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옥스퍼드대학의 병리학 교수 플로리는 그가 옥스퍼드대학으로 초빙한 나치 독일의 유태인 난민인 생화학자 보리스 체인과 공동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플레밍이 발견한 항균성 효소 리소자임과 기타 항생 물질에 대해서도 연구를 시작했으나 바로 이들 중에서도 가장 우망한 페니실린이 연구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병원의 플레밍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분리나 농축의 세련된 방법을 옥스퍼드대학에서는 이용할 수 있었으며, 플로리아 체인은 그러한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옥스퍼드대학의 그룹은 페니실린의 농축과 정제에 성공하였으며, 먼저 생쥐를 이용하여 실험한 후에 포도상 구균이나 기타 세균에 의해 중증의 감염증에 걸린 환자에 대하여 치유 효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었다(인간에게 사용된 최초의 페니실린은 병원의 납작한 접시 속에서 배양된 것이었다. 환자의 요에서 회수하여 재사용되기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약이 부족해서 임상시험이 빨리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군대의 병자나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근급성 때문에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이 영국과 미국의 쌍방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플로리가 미국을 방문하여 영국에서 이용되고 있는 추출과 제조 방법을 설명하였으며,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측의 화학자들은 페니실린의 화학구조를 결정하기도 하고 합성 또는 발효로 이것을 만드는 방법의 연구에 몰두했다. 이 불안정하고 복잡한 분자의 최초의 화학 합성이 이루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훨씬 뒤였으나, 발효에 의해 이것을 제조하는 방법의 개발은 전쟁 중에 경이적인 속도로 진보했다.
발견 당시와 마찬가지로 페니실린의 제조법에 관해서도 세렌디피티가 관련하고 있다. 플로리가 페니실린의 대량 합성법에 대해서 상담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을 때 그는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에 있는 미국 농무성의 북부농학연구소를 방문했다. 그 연구소는 당시 잉여 곡물의 공업적 이용법을 찾고 있었으며, 이와 관련해서 옥수수의 제분 과정시 부산물인 점성이 있는 추출물의 처분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 추출물을 페니실린의 배양기에 넣으면 놀랍게도 곰팡이의 수득이 10배나 많아졌다.
피오리아연구소에서는 다음으로 페니실린을 생상하는 곰팡이의 개량종 개발에 나섰다. 전세계에서 몇 백 종류의 곰팡이의 수집되어 피오리아연구소에서 테스트 되었다. 믿기 어려운 일로 곰팡이 추적에 가장 큰 공은 그 지방의 메리 헌트라는 한 부인에게 돌아갔는데, 그녀는 새로운 곰팡이를 찾는데 너무 열심이어서 '곰팡이 메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녀는 '화려한 황금빛' 의 곰팡이가 나 있는 칸탈 루프 멜론(참외의 일종)을 피오리아의 과일시장에서 사 가지고 왔는데 이 새로운 계통의 곰팡이는 페니실린의 생산량을 20배로 올겼던 것이다. 영국 런던에서 우연히 발견된 마법의 약을 생상함에 있어서 미국 중서부의 한 고을 피오리아가 이토록 현저한 공헌을 하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인들 했을 것인가? 전쟁 중 수천 명에 달하는 생명이 이 페니실린에 의해서 구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페니실린과 화학적으로 친척 관계인 세팔로수포린을 포함해서 그 외에도 항생물질을 찾으려는 연구가 성행했다. 새로운 항생물질 중에는 페니실린에 저항력이 있는 세균에 대해서 유효한 것이 있었다(세팔로스포린C의 우연한 발견에 대해서는 제30장을 참조할 것). 플레밍, 플로리 그리고 체인 이 세 사람은 1945년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이 세 사람 모두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하고 목숨을 구했다는 공적이 인정되어 작위가 수여되었다.
알렉산더 플레밍 경은 자기 자신이 세렌디피티와 조우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일찍이 "페니실린에 얽힌 사연에는 분명 로맨스가 있고 어느 누구의 인생에도 따라 다니는 우연과 행운 그리고 운명이나 숙명과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술회한 바가 있다. 다만 내가 굳이 부가하고 싶은 것은 플레밍에게 있었던 우연도 그의 지성 또는 통찰력이 없었더라면 모두 다 헛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그것이 월폴의 세렌디피티의 정의에 있어서 필수 요건인 것이다.
설파제. 설파닐아미드 및 이에 관련된 합성 항생제의 발견은 세렌디피티 뿐만이 아니라 오해(제35장 참조)에 의한 경우도 있다. 아무튼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이 발견에 의해 게르하르트 도마크가 1939년에 노벨생이의학상을 수상했는데 이 드라마에는 더 많은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도마크는 1895년 독일의 라고우에서 태어났다. 킬대학에 들어갔으나 의학 공부는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중단하게 되었다. 휴전이 되자 킬대학에 복학하여 1921년 의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라이프스왈트대학의 강사에 이어서 묀스테르병리학연구소의 교수로서 수년간을 보낸 후 독일의 염료 카르텔(기업 연합)인 I.G. 파르뱅(I.G.F.)사의 실험병리학과 세균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프릿츠 미츄와 요셉 클라라가 합성한 새 염료의 약리학적 성질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미츄는 이미 최초의 합성 항말라리아제 아타브린의 개발자로서 유명했었다. 말라리아는 매독과 마찬가지로 원충에 의한 전염병으로서 매독에 관해서는 에이를리히가 유효한 약으로서 살바르산을 발견했으며 이것이야말로 병에 대한 화학 요법으로서 최초로 사용된 마법의 총탄이었다. 그러나 1932년에 이르기까지 폐렴, 수막염, 임질 또는 연쇄상 구균과 포도상 구균에 의한 감염증 등 무서운 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에 대해서 유효한 화학 약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었다.
I.G.F.사의 화학자와 약리학자 팀은 동물이나 인간에 해를 주지 않고 이러한 병원균을 죽일 수 있는 화합물을 발견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이 생각한 계획은 일정한 형의 염료를 합성해서 그것들이 항균성을 가지고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으로서 그 이유는 어떤 종류의 염료, 특히 설폰아미드기를 가진 것은 모직물에 빨리 단단하게 결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단백질 분자에 대해서 친화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학자들은 세균이 단백질이기 때문에 이들 염료가 세균에 단단히 달라붙어서 세균을 저해하거나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폰아미드기가 꼭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생각은 부분적으로 들어맞았으나 항균성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염료로서의 구조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미츄와 클라라가 합성한 염료 중에는 도마크가 연구실에서 연쇄상 구균에 감염시킨 생쥐나 집토끼에 시험해 본 프론토실(prontosil)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연쇄상 구균에 대해서 강력한 살균성이 있고 더구나 동물에게 대량으로 투여해도 아무런 악영향이 없었다. 이 동물체내에 있어서의 항균 효과는 아마도 1932년 초에 발견되었을 것이며 I.G.F사는 그 해 12월에 특허를 신청했다. 사람에 대한 임상실험은 직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지는데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에 의하면 사람에게 아직 아무런 시험도 하기 전에 바늘에 찔린 상철 인해 연쇄상 구균에 감염되어 위독상태가 된 자기의 어린 딸에게 자포자기가 된 도마크가 프론토실을 투여했더니 그 소녀가 바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다른 보고에 의하면, 최초의 임상실험은 포도상 구균에 의한 패혈증으로 위독해진 생후 10개월의 남자 아기에 대하여 의사인 포에르스터가 프론토실을 투여한 것이라고 한다. 포에르스터는 뒤셀도르프 의과대학의 교수인 쉬리우스 박사의 동료였다. 포에르스타에게 패혈증의 어린이에 관해서 상담을 받은 쉬리우스는 도마크의 선배인 호레인으로부터 동물실험 당시 연쇄상 구균에 마법처럼 잘 낫는 빨간 염료(프론토실)에 대해서 들었던 것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 염료가 포도상 구균에 대해서 효과가 없더라도 어쨌든 그 어린이는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포에르스터가 아기에게 그 빨간 염료를 두 번에 걸쳐 투여했더니 위독 상태로 생각되었던 패혈증이 급속하게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아야기 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둘 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도마크가 1939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점으로 보아 1930년대 중반쯤에는 이 의학적 기적이 널리 알려졌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1933년부터 1939년 사이에 그것과는 별도로 중요한 진보가 있었다. 도마크는 프론토실의 감염 동물에서의 시험 결과를 실제 시험이 끝난 후 2년 이상 지나서 I.G.F.사의 특허가 성립된 1개월 후인 1935년 2월에야 겨우 발표했다. 파리의 파스퇴르연구소에서는 독일의 연구 결과를 알게 된 트레포엘 부부가 포르뉴의 지도하에 기본적인 발견을 했다. 그들은 프론토실과 화학구조가 비슷한 화합물 즉, 아조(azo)염료를 몇 가지 조사했다. 이 염료에 붙여진 아조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질소를 뜻하는 '아조토(azote)'에서 유래된 것이며, 분자의 한가운데에 이중결합으로 이어진 두 개의 질소원소가 있기 떄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들 염료는 분자의 한편이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그 반대측은 모두 같은 설폰아미드기를 가지고 있다. 트레포엘 부부는 이들 염료가 모두 프론토실과 거의 같은 항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발견은 프론토실에 관한 또 다른 수수께끼도 잘 설명했다. 즉, 프론토실은 생체 안에서는 세균에 대해서 매우 효과적인데 시험관 안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즉, 어떤 생체의 작용이 설폰아미드염료를 항균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의 연구자들은 동물의 체내에서 염료가 두 부분으로 분해되며, 설폰아미드기 쪽만이 항균제로서 유효하다고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프론토실의 설폰아미드 부분 즉, 이미 알려져 있는 물질인 P-아미노벤젠설폰아미드 또는 단순히 설파닐아미드라고 하는 화합물을 합성하여 조사해 보니 세균성 감염증에 대해서 프론토실과 같은 효력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24-1에 있는 프론토실과 설파닐아미드의 구조식을 보면 프론토실의 분자가 한가운데의 질소원자 사이의 이중결합 부위에서 쪼개지면서 우측 부분에 두 개의 수소 원자가 붙으면 설파닐아미드가 생긴다. 이러한 쪼개지는 현상은 프론터실을 주사나 내복으로 섭취할 때 동물의 체내에서 일어나며, 그 결과 생긴 설파닐아미드가 진짜 항균제로서 가능하게 된다. 설파닐아미드는 무색이며 프론토실의 다른 반쪽도 무색이다. 이 둘을 주안에 있는 두 개의 질소원자로 연결함으로써 비로소 아조 염료의 색이 난다. 설폰아미드 색소에 살균력이 있다는 것은 오해이며 병원균을 죽이는 기능을 했던 것은 이 염료 분자 중의 설폰아미드기 부분뿐인 것이다. 이것이 염료 분자의 일부였다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발견은 세렌디피티였던 것이다.
트레포엘 부부의 발견은 프론토실에 관한 I.G.F.사의 특허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설파닐아미드는 훨씬 이전에 합성되어 염료 중간체로 특허 등록을 하였으나 항균성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특허 기한이 지났었다.
이 발견이 포르뉴에 의해서 파스퇴르연구소에서 1935년에 발표되자 설파닐아미드의 임상시험이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시행되어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새로운 약의 이름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은 프론토실이 미국 대통령의 아들 프랭클린 D. 루즈벨트2세의 목숨을 구하는 데 사용되었던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936년 이 아들이 연쇄상 구균에 감염되어 위독했을 때 모친 엘레노어 구즈벨트의 요청으로 메사츄세츠 종합병원의 조지 토비 박사가 그에게 프론토실을 투여한 결과 그는 즉시 회복되었던 것이었다.
화학자들에 의해서 설파닐아미드의 단순한 유사체가 많이 합성되어 동물과 인간에게 사용되었다. 1938년에 만들어진 설파피리딘은 폐렴에 대해서 보다 높은 효과를 나타냈으며 설파티아졸은 1940년에 만들어져 치료에 사용되었다.
(해설) 약효가 있는 설폰아미드류의 분자구조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합성하여 실험된 몇천이라는 화합물 중에서 유효한 것은 거의 모두가 그림 24-2에 명시한 설파피리딘과 설파티아졸의 구조식과 너무 흡사하여 고딕체로 쓴 질소 원자 우측에 붙어있는 원자군만이 다른 것이었다.
설파제는 1940년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군대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그후 페니실린이나 다른 새로운 항생물질로 바뀌었으나 어떤 병의 치료에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이 약의 결점 중 하나는 잘 녹지 않는 성질 때문에 신장에 남아서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이 난점에 관해서는 세 가지 종류의 설파제를 꼭 유효량이 되도록 복합해서 투여함으로써 극복되었다. 각 성분의 농도가 3분의 1이 되어 충분히 배설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도마크가 1939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것은 엄밀히 따져서 틀린 말이다. 그는 스톡홀름의 당국에 의해서 수상이 지명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훨씬 후에까지 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39년 10월에 수상 통지를 받았을 때 도마크는 일단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 왔으나, 그 후 상을 거절한다는 두 번째 편지가 11월에 스톡홀름에 도착하였다. 편지는 나치의 압력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도마크는 이때 게슈타포의 감독하에 있었다. 전후 1947년이 되어서 겨우 스톡홀름을 방문할 수 있게 된 도마크는 수상 기념 강연을 하여 메달과 상장을 받았으나 상금은 노벨재단에 반납하였다.
마가이닌류(개구리의 피부에서 얻은 항균 물질). 국립소아보건발육연구소의 소아과 의사이자 생화학자인 마이켈 저슬로프 박사는 그의 실험실의 물탱크 안에 있는 개구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1986년 여름, 낭포성 섬유증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의 폐 질환에 관한 그의 연구의 일환으로 개구리의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그를 갑자기 놀라게 한 것은 감염증에 걸리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세균이 가득한 실험실의 거무튀튀한 물탱크 속에서 개구리의 수술한 상처가 몇 일만에 깨끗하게 아물고 벌써 나아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종류의 아프리카 개구리의 수술을 여러 번 했었으며 그때마다 개구리의 상처가 깨끗하게 낫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저슬로프 박사는 기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으며,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가를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었다.
그 후의 연구로 저슬로프 박사는 개구리의 피부에서 두 가지의 펩타이드(단백질의 단편)를 분리하뎌 각각의 아미노산 순서를 정했다. 이 펩타이드들은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과 진균류 또는 말라리아 원충과 같은 원생 동물 등에게 매우 높은 활성이 나타나는 것이 었다. 저슬로프 박사는 이것들의 이름을 헤브라이어로 방패를 뜻하는 '마가이닌(magainin)' 이라고 붙였다. 저슬로프 박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개구리에서 이 마가이닌의 유전자를 추출하여 그것을 이용해서 인간에게도 같은 유전자가 있는가를 조사했다.
이 발견은 저슬로프 박사에게 있어서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이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서로 관련된 두 가지 문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유전병인 낭포성 섬유증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건강한 아이의 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균으로부터 폐의 심한 감염증을 어째서 자주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세균에 대해서 강한 방어 작용을 나타내는 세크로핀류가 어떤 곤충에서 수년 전에 발견된 것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세크로핀류는 펩타이드로서 곤충 자신의 세포막을 상하게 하지 않고 세균의 세포막을 파괴함으로써 세균을 죽이는 작용을 한다. 마가이닌류는 척추 동물 중의 면역 조직으로부터 분리된 최초의 화학 방어 조직이다.
제25장. 나일론.
냉연신법이 부리는 묘기. '지혜나 노력보다 운이 앞선다'는 말이 있다. 고대 북 유럽의 무용담에 의하면, 바이킹들이 리이프 에릭슨을 따라서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를 지붕도 없는 배로 건너가는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건 이유는 그가 강하거나 용감하거나 지혜로웠기 때문이 아니라(설령 그가 이 모두를 다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운이 따른다고 바이킹들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에 있어서 리이프란 행운(lucky)을 의미하는 것이며 '리이프 에릭슨' 이란 에릭의 행운을 타고난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 노르웨이식 이름이다. 그는 북유럽의 그린랜드에 처음으로 식민지를 개척한 애릭 더 레드의 아들이었다.
서기 1000년 경의 리이프 에릭슨에 의한 북아메리카의 발견은 세렌디피티의 또 하나의 예이다. 리이프는 노르웨이 국와의 명령을 받고 그린랜드를 크리스트교국으로 선언하기 위해 아이슬랜드로부터 그린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악천후 때문에 코스를 벗어나 멀리 떠밀려서 뉴펀들랜드섬에 토착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일론의 발견 이야기는 이 행운의 대표격이라고 할만하다. 월러스 흄 카로더스는 일리노이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지금까지의 가장 우수한 유기화학자' 라는 추천을 받고 뒤퐁 사이의 새로운 기초화학 연구계획을 지도하기 위해 초빙되어왔다.
카로더스는 셀룰로오스, 실크, 고무 등의 천연 고분자 구조를 해명하고 그것들과 합성물질을 목적으로 계획에 착수했다. 그의 그룹은 1943년까지 귀중한 기초적 성과를 올리기는 했어도 실크를 닮은 섬유를 만드는 것은 실패로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였다. 제자인 화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느닷없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거기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그때까지의 실패를 1939년의 뉴욕 만국 박람회에서의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들어진 합성실크! 나일론'이라는 유명한 광고가 말하는 것처럼 대성공으로 바꾼 것이다. 'Journal of Chemical Education'지의 1981년 7월호에서 칼 S. 마벨이 나일론을 상업적 개발로 이끌어간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일론(실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폴리아미드)은 이미 만들어지고는 있었으나 특별하게 유용한 어떤 성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특허 출원도 하지 않고 선반 위에서 잠자야 했다. 연구는 보다 잘 녹고 취급하기 쉬운, 따라서 실험실에서 조사하기 쉬운 폴리에스텔의 계열에서 계속 되었다. 이와 같이 소프트한 재료를 연구하고 있을 때 줄리언 힐이 폴리머의 작은 덩어리를 유리 막대기 끝에 모아 그것을 잡아당겼더니 늘어난 모양은 외견상으로 실크와 아주 비슷하였다. 이것은 그를 포함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보고에 의하면, 어느날 카로더스가 외출하고 없는 동안에 힐과 그의 동료들은 이 실험 재료들 중의 하나가 어느 만큼이나 늘어나는지 시험해 보기로하여 작은 덩어리를 유리막대기 끝에 붙여 넓은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실을 뽑아냈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뽑힌 실의 모양이 실크와 흡사하다는 것과 이렇게 해서 폴리머 올이 얻어지고 제품의 강도가 증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연구하고 있던 폴리에스테를 섬유 제품으로 만들기에는 용융점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이전에 방치해 두었던 폴리아미드류로 되돌아가, 이러한 섬유질 역시 냉연신하면 장력이 향상되어 우수한 직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라멘트나 톱니바퀴 그리고 기타 성형품 등도 냉연신법으로 질긴 폴리머로 만들었다. 마벨 박사가 나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뒤퐁사는 나일론에 관한 물질 합성법을 특허로 취득하지 않았으며, 오직 냉연신법에 관해서만이라고 한다. 우연히 발견된 이 과정은 뒤퐁 사가 매우 중요한 제품을 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소란이 세계의 경제 및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진 것은, 줄리언 힐과 그의 동료들이 장난삼아 폴리에스테르를 잡아당겨서 생긴 실이 모양과 물리적 성질에 대하여 과학적 중요성으로 눈을 돌릴 줄 아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25-1에서는 냉연신법(냉동으로 뽑아내는 방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여준다. 가장 일반적이 나일론은 나일론-6,6이라고 한다. 두 개의 6은 두 종류의 모노머 단위인 탄소원자의 수를 의미하며 하나는 육탄소인 디칼본산(산소원자 함유)이며 또 하나는 육탄소인 디아민(질소원자 함유)이다. 두 개의 모노머가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폴리머를 만들 때는 제각기 모노머 단위의 양끝 사이에서 일분자의 물(H2O)을 제거하여 그림 상부에 명시했듯이 두 종류의 모노머가 사슬 속에서 하나씩 서로 이어진다. 냉동으로 뽑아내는 과정에서 길다란 폴리머 분자가 서로 평행으로 있으며, 하나의 폴리머 분자의 산소가 각각 옆 사슬의 질소와 수소결합 되도록 놓인다. 로우프 속에 따로따로 놓여있는 실이 서로 꼬여서 케이블을 만들면 대체로 같은 방법으로 각각의 폴리머 분자는 결합되며, 길고 가는 폴리머 분자의 수소 결함에 의한 집합 방법이 나일론 섬유를 매우 강인하게 만든다. 같은 원리가 실크 섬유의 강인성의 설명에도 적용된다. 실크의 천연 폴리아미드 분자는 각 분자를 서로 끄는 수소 결합이 될 수 있게 놓여져 있다. 누에는 끈적끈적한 실크 섬유를 뱉아낼 떄에 냉연신을 한다.
(해설) 합성 섬유로서의 나일론의 성공의 기초가 된 냉연신법은 원래 폴리에스테르에서 발견되었는데 카로더스의 폴리에스테르는 직물용의 섬유로서는 좋지 않았다. 나일론이 합성 섬유로서 생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의 화학자들이 몹시 질기고 우수한 섬유인 폴리에스테르를 개발하여 테럴런(Terylene)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를 시작했다. 카로더스의 그룹에서도 여러 디칼본산과 디알콜로 많은 폴리에스테르를 만들었는데, 아직 실험해 보지 않은 디칼본산이 테레프탈산이며 이것이야말로 우수한 섬유가 되는 바로 그 디칼본산이었다.
그러나 뒤퐁사는 폴리에스테르 사업에서도 경영을 잘해 이익을 얻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 테럴린에 사용된 폴리에스테르를 평면으로 잡아당기면 강한 필름이 된다는 것을 뒤퐁사의 필름 사업부에서 발견했던 것이다(섬유의 냉동식과 같은 원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 필름은 마일러라는 이름으로 시판되었으며, 또한 거의 동시에 뒤퐁사의 테럴린이 데이크론(Dacron)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나왔다. 몇 해 전에 내가 뒤퐁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이 폴리에스테르섬유에 이름을 붙일 때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뒤퐁사에서는 사내에서 이름 콘테스트를 실시했다. 이름이 발표되고 시상식 전날 밤에 콘테스트의 책임자가 걱정이 되어서 그 선택된 이름이 이미 다른 상표로서 등록이 되어있지 않은가 다시 한번 체크해 보았는데 걱정한 대로 마지막 체크에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몹시 서두른 뒤에 차점이던 데이크론이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선택되었다. 데이크론이라는 이름이 달리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발음상의 오류가 있기 쉬운 상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뒤퐁 사의 기본 원칙에 위반된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일론(nylon)이나 올론(orlon)은 이것 외에 다른 발름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데이크론(Dacron)의 a는 '아'라고도 '에이'로 발음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내가 뒤퐁 사에 방문하여 누군가에게 "Dacron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듣게 되었다.
데이크론은 그것만으로 또는 울과 섞어서 신사용 양복감의 섬유로서 보급되었다. 마일러 필름은 1950년대부터 마이크로필름이나 오디오용 자기테이프에 사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콤팩트 디스크의 재료로서 용도가 넓어졌다. 최근에 재미있는 응용으로는 1988년의 4월에 에게해의 한 섬에서 다른 섬으로 건너감으로 해서 신기록을 수립한 인력 비행기 다이달로스호의 날개를 싸는 가장 얇고 가볍고 질긴 천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39년 뉴욕 만국 박람회에서의 나일론의 등장은 그때까지 가장 볼만한 훌륭한 소비자 이벤트 중의 하나였다. 뒤퐁 사는 '석탄과 공기와 물'로 나일론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도표로 설명하는 전시를 하고 그 곁에서는 매력적인 모델이 거대한 유리 시험관 속에서 새 스타킹을 과시하고 있었다. 젊은 화학자였던 나에게 있어서 그 전시는 정말 충격적이라고 할 만하였다.
1940년 5월 15일 뉴욕시에서 '나일론' 이 처음 발매되었을 때 불과 몇 시간 동안에 400만 켤레의 스타킹이 팔렸다. 그러나 바로 전운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여성이 이 새로운 섬유에 열을 올리기도 전에 주로 군사용 낙하산의 재료로 사용되어 이와 같은 판매는 그 후 오랫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새로운 나일론을 파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가지고 있는 나일론까지 낙하산을 만들기 위해 공출할 것을 장려했던 것이었다.
제26장. 폴리에틸렌(새고 오염된 기구가 준 선물).
테플론(폴리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발명되어 원자폭탄 제조에 유용하게 사용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했다. 또한 1930년대에 발명된 고분자로, 연합군이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폴리에틸렌이었다. 폴리에틸렌은 레이다의 전선(케이블)의 절연체로 사용되었으며, 이 새로운 전자기기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절연체의 덕택이라고 할만하다. 프리텔-크라프츠 반응의 이야기에서 미국과 프랑스의 협력으로 실용화된 발명의 제1호는 고옥탄가 항공기 연료의 제조였으며,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을 이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제17장 참조). 테플론, 폴리에틸렌, 항공기 연료라는 멋진 세 가지의 화학적 발명과 개발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헌을 하였다는 점에서 연합국 측의 화학자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리에틸렌(영국에서는 폴리텐이라고 한다)의 발명은 임페리얼 화학 공업사(I.C.I)의 영국 화학자들의 덕분이며, 우연적으로 생산되기는 했어도 그 후 군사용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었다. 이 세렌디피티적 발명에 대하여 I.C.I사의 화학자 J.C. 스웰로우는 '폴리텐의 역사'(1960년 간행)의 제1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시산이 흐름에 따라 어떤 이야기도 관념적으로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기에, 연구를 위한 계획이 처음부터 꾸준하고 논리적으로 발전하여 어떤 제품의 발명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는 순서나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폴리텐에 대한 이야기는 연구 중에 생겨난 예상 외의 결과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며 연구에 있어서도 우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이다 ... 폴리텐의 실제의 역사는 1932년 체셔 주 노스위치에 있는 I.C.I사의 알칼리 분과의 페린과 본인(스웰로우)이 화학반응에 미치는 초고압이 효과에 관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 1932년과 1933년에 걸쳐 약 50가지 정도의 반응이 시도되었으나 결과는 모두 기대에 어긋났다(즉, 흥미 있는 또는 가치가 있는 생성물은 전혀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에틸렌과 벤즈알데히드(benzaldehyde)의 반응도 1933년에 시험되어, 섭씨 170도에서 에틸렌의 압력 1400기압(초고압)으로 실시되었다. 실험이 끝날 무렵에 (반응)용기의 벽이 실험을 담당한 깁슨의 실험 노트에서 인용하면, '백색 왁스와 같은 고체'의 얇은 막으로 덮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고체가 에틸렌의 폴리머라는 것을 알았으나 에틸렌으로 실험을 반복하면 에틸렌은 격렬하게 분해될 뿐이었다.
스웰로우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고압에서의 실험을 좀 더 좋은 장치를 설계하고 만들어낼 때까지 중지했다. 1935년 12월, 개량한 장치를 사용하여 에틸렌의 실험이 재개되었다. 온도가 섭씨 180도에 도달했을 때 압력이 저하되어서 펌프로 에틸렌을 추가했다. 나중에 그 작은 용기를 열어 보니 흰색의 고체 가루가 전부 8그램 발견되었다. 기체의 에틸렌이 고체의 중합체가 되는 중합반응만으로 이 압력 저하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장치의 이음새 한 군데에서 누설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스웰로우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여기서 또 우연의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원인을 완전히 해명하기 위해 연구팀 전원이 수개월간 열심히 연구했으나 만일 이 누설이 아니었더라면 실험은 이토록 획기적이지 못하고 이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실험을 성공하게 된 것은 누설된 에틸렌 대신에 새로운 에틸렌을 용기에 추가한 데에 있었다. 그 에틸렌은 우연히 폴리머의 생성을 촉매하는데 마침 적당한 양의 산소를 함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웰로우는 또 이 폴리에틸렌이 폴리에스테르와 폴리아미드의 성질로서 뒤퐁사의 카로더스가 발견한 '냉연신 현상(제25장 참조)'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고 보고했는데 이것은 그 에틸렌 폴리머가 거의 직선상태로 결합한 모양을 한 고분자량의 중합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I.C.I.사 사람들은 이 새로운 폴리머의 적당한 용도를 찾아내지 못했는데 만일에 또 한 번의 우연이 없었던들 단순히 실험실 안에서의 관심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수중에서의 전신, 전화케이블의 제조에 관계하고 있는 영국건설보수회사의 딘은 새로운 폴리머의 이야기를 듣고 수중케이블의 전연체로서 적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딘과 I.C.I사와의 우연한 정보교환으로 폴리에틸렌이 영국에서 레이다용으로 개발되었다는 것과 그로브즈 장군과 뒤퐁 사와의 우연한 정보교환으로 테플론이 미국에서 원자폭탄용으로 개발된 내용 중에는 신기하게도 우유사성이 있다. 테플론에 관해서는 제27장 참조). 딘은 그 물질을 아주 조금 밖에 얻지 못했으나 조사해 보고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I.C.I사의 사원도 폴리에틸렌의 기계적 성질이 전화케이블의 절연에 사용되고 있던 구타페르카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1939년 7월에 I.C.I사는 1해리의 해저케이블을 만들 만한 양의 폴리에틸렌을 만들었지만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완전한 테스트는 못 했으나 이 목적에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케이블 제조로 얻은 경험은 수년 후 조급한 개발이 필요해졌을 때에 대단히 유용했다. 잠수함 전화케이블용으로서 예상되는 수요에 대비하여 작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이 공장은 1939년 12월 독일군이 폴란드로 침공한 아침 그날에 조업을 개시했다. 실제로 폴리에틸렌으로 절연된 해저케이블이 부설된 것은 전쟁 말기가 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유대를 맺은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는 지상 및 기상탑재 레이다 장치용으로 순응력 있는 고주파용 절연케이블의 수요가 금새 다급해졌다. 이 목적을 위한 폴리에틸렌은 영국에서는 I.C.I사가 또한 미국에서는 뒤퐁 사와 유니온 카바이드 사에 의해 각각 제조되었다.
레이다 장치에 있어서의 폴리에틸렌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레이다의 발명자 로버트 왓슨 와트 경의 1946년 8월의 발언(스웰로우의 '폴리텐'중에 인용된 것)이 그것을 극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폴리텐을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거의 이상적인 절연성과 구조상의 완전성 때문에) 그때까지 거의 불가능했던 기상탑재 레이다의 설계, 제조, 장치, 보수 등의 문제점이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 불가능했던 안테나와 피더의 다양한 디자인이 가능해지고 방송에서 보수 공사의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것은 폴리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폴리텐은 레이다에 의해 항공이나 바다 그리고 육지에서의 긴 연속적인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히틀러 총통이 그의 U보트의 일시적(실제로는 오래 계속된) 패배의 원인으로서 인정한 '유일한 기술장비'에 있어서도 폴리텐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레이다는 우리 함대가 '발견, 조준, 발사, 샤른호르스트호 격침'이라는 해군 사령관의 표현으로 나타났듯이 중요한 해전의 승리에 공헌했다. 그리고 작은 군용함에 의한 계속적인 작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U보트에 대응하는 기상레이더의 소형 장치에 있어서도 폴리텐의 중요성은 그야말로 결정적이며, 또한 폴리텐을 사용하는 함재레이다와 동시에 이용되어 수 주일 동안에 U보트를 100척이나 격침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폴리텐 성형을 한 이상 시스템은 우리 군의 폭격대의 위력을 수십 배로 증가시켰다.
폴리에틸렌은 테플론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후 필름과 성형품의 제조가 대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필름생산이 급속하게 발전한 미국에서는 많은 용도의 폴리에틸렌이 셀로판을 대신하게 되었다. 현재 폴리에틸렌 필름은 농작물과 냉동식품이나 부패되기 쉬운 식품과 섬유 제품 그리고 기타 모든 종류의 상품 포장에 사용되고 있다. 그 밖에 용도로 필름은 농업에서의 광범위한 이용(비닐하우스, 지면 피복, 도장용 피복)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될 쓰레기 봉지 등에 이용되고 있다. 전선의 절연체로서의 이용은 지금도 폴리에틸렌의 중요한 용도이다. 또 폴리에틸렌은 연간 생산량이 45만 톤을 넘는 최초의 플라스틱이었다(1959년).
I.C.I사의 화학자들에 의해서 발명된 것으로서, 산소를 촉매로 하여 고압에서 제조되며,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폴리에틸렌은 저밀도 가지형 폴리에틸렌이다. 여기서 '가지형'이란 탄소 두 개의 에틸렌 모너머 단위로 된 고분자 사슬의 특성을 표현한 말이다. 만일 에틸렌분자가 전부 서로 끝과 끝이 이어지면 폴리머분자는 그림 26-1에서와같이 가지형이 아닌 직선형이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까지는 나뭇가지 모양의 폴리머를 생산하였다. 이것은 1950년대에 결국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어지게 된 고밀도 직선형 폴리에틸렌에 비하여 용융점과 밀도가 낮았다(가볍다).
사실, 폴리에틸렌의 우연한 합성은 1933년에 I.C.I사의 화학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3년 전 일리노이대학에서 마벨 교수의 지도를 받고 있던 대학원생 프리드리히가 실험을 하고 있을 떄 예기치 않았던 부생성물로서 이 폴리머가 생겼던 것이다. 이 실험은 알킬리튬 화합물이 존재하는 대기압에서 에틸렌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
미국화학회의 화학교육부가 1980년에 만든 비디오테이프 중에서 마벨 교수는 자기가 50년 이상 걸쳐서 공헌해 온 사연을 담은 '고분자 연구에의 입문'에서 1930년의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실험결과를 바로 추적하지 않는 이유로 "폴리에틸렌이 그토록 쓸모있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나는 또 하나의 잘못 판단한, 장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예를 상기한다. 몇 년 전 나는 가끔 존스 흡킨즈대학의 에머트 레이드 교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에틸렌과 벤젠으로부터 프리델-크르프츠반응(제17장 참조)을 이용하여 좋은 수율로 에틸벤젠을 합성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그가 그 과정을 특허출원을 하지 않은 이유는 '에틸벤젠을 아무런 쓸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1928년에 있어서 사실이었다. 그러나 에틸벤젠은 스티렌의 원료이며 1930년대에 들어서자 스티렌으로 폴리스티렌을 만들게 되었다. 폴리스티렌은 매우 용도가 광범위한 물질이며 1987년에는 미국 내에서 230만 톤 이상의 폴리스티렌 제품이 판매되었다.
이 두 가지 일화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우연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고 해서 전부 중요한 발견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즉, 세렌디피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밀도의 가지형 폴리에틸렌은 압력용기의 누설과 그것을 관찰하고 조사한 덕분에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고밀도의 직선형 폴리에틸렌은 더러워진 장치(또는 사용한 후 깨끗이 씻지 않았던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1953년 칼 지글러 박사는 독일의 뮬하임(Muelheim)에서 석탄 연구를 하는 맥스프랑크연구소 소장이었다. 그는 이전에 에틸렌을 I.C.I사의 화학자들이 사용한 방법보다도 저압에서 중합시킬 목적으로 마벨과 프리드리히가 하던 방법을 따르고 또한 발전시켰으며, 에틸렌을 알킬리튬과 또다른 유기금속 시약(금속원자가 유기의 원자단과 결합하고 있는 화합물)과 섞어서 시험하고 있었다. 이 실험에서 에틸렌폴리머가 생산되었으나 분자량이 작아서 소용이 없었다. 어떤 날의 실험에서는 전혀 폴리머가 생산되지 않았으며, 에틸렌의 2분자가 서로 붙은 이량체인 다이머(dimer)만 생겼다. 이 결과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지글러와 그의 공동연구자인 E. 홀치캄프는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다. 수주일 걸려서 간신히 알아낸 것은 그 반응에 사용한 용기 속에서 그 전의 실험에서 사용된 니켈화합물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발견에서 지글러와 그의 부하들은 니켈이나 다른 여러 가지 금속 또는 금속화합물이 에틸렌의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로 했다. 그 결과 니켈과 마찬가지로 에틸렌의 중합을 저해하는 금속도 몇 가지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더욱 놀라운 발견으로는 어떤 종류의 금속염화물과 유기 알루미늄화합물을 조합하면 매우 유효한 종합촉매가 되어 그림 26-1에 그려져 있듯이 완전히 가지가 없는 거대한 고분자량과 고용융점 그리고 직선형 분자구조의 폴리에틸렌이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직선형 폴리에틸렌의 용융점이 높아짐으로써 실용성이 있는 한 예로는 자동 접시 닦기 기계에 의해서도 변형되지 않는 컵이나 기타의 식기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987년 미국에서의 고밀도 폴리에틸렌의 생산량은 360만 톤이나 되었다.
제조회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중합이 I.C.I사의 공정에 필요한 고온 고압이 아니고, 상압의 저온에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최적의 촉매는 4염화 티타늄과 트리에틸알루미늄을 함유한 것이었다. 촉매는 소비되지 않고 재사용이 가능했으므로 티타늄의 값이 비싸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과정은 뮬하임 상압 폴리에틸렌 과정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급속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다.
밀라노의 몬테카티니 사의 고문이었던 이태리 화학자 줄리오 나타 교수는 지글러의 연구소와 몬테키티니사 사이의 라이센스 계약 덕택에 새로운 과정에 관한 정보를 그때그때 즉시 입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는 지글러의 촉매를 프로필렌(propylene)이나 기타 에틸렌과 유사한 탄화수소류에 응용하여 이 촉매가 이것들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밝혔다. 즉, 그때까지 만들어졌던 어느 폴리프로필렌보다도 유용한 고밀도, 고용융점, 직선형의 폴리프로필렌을 만들 수가 있었다. 폴리프로필렌은 세계의 주요 플라스틱이 되어 1987년에 미국에서의 제조량은 320만톤에 가까웠다. 자동차 부품, 냉장고, 기타의 기구류 등 많은 성형품이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융단, 로우프, 케이블 등에 사용되는 섬유도 폴리프로필렌이다. 에틸렌과 프로필렌의 공중합체는 탄력성이 있고 어떤 용도에서는 고무 대신에 사용된다. 이 새로운 촉매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천연고무와 거의 같은 합성고무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새로운 촉매는 이소플렌이라는 모노머 단위가 서로 연결되어서 나선형의 고무 고분자로서 배열하게끔 제어할 수가 있다. 이 나선형이야말로 고무의 탄력성을 내는 분자구조인 것이다(합성고무에 관하여는 제11장 참조).
자동차 타이어의 합성은 지금까지 천연고무와 합성고무의 가격을 비교하여 결정되었고, 때로는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글러의 발견이 고분자공업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한 증거로 이 방식으로 제조된 모든 재료의 평가액이 연간 10억달러를 넘는다는 추산이 있다.
지글러와 나타는 1936년에 노벨화학상을 공동으로 받았다. 1973년 지글러의 사망 직후 열린 추모식에서 그의 후계자인 막스 프랭크연구소의 G. 윌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글러의 기본적 지침은 참으로 새로운 것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며 그것은 실험에 의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예상 외의 발전에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새로운 현상이 주목적과 관계가 없을지라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도 지글러의 지침 중의 하나였습니다."
(해설) 폴리염화비닐(Poly Vinyl Chloride): 폴리염화비닐(PVC)은 폴리에틸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노머인 염화비닐(CH2=CHCI)은 에틸렌의 수소원자 하나가 염소원자로 바뀌어진 것만이 다르다. 이 폴리머는 대단히 용도가 광범위하며 공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플라스틱 재료이다. 1987년의 판매액은 6억 달러 이상이었다. 또한 매우 값싸고 다목적인 플라스틱으로, 파이프와 파이프 부속품(용도로는 이것이 가장 많다), 유연한 컴퓨터 디스크, 원예용 호스, 건축용 벽판, 전선용 케이블 전연체, 식품 포장재료, 자동차의 시트 커버, 샤워 커튼, 기타 많은 가정용품 등에 사용된다. 1930년대 초에 플라스틱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업적인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또한 최초의 합성 고분자이기도 했다.
이 합성도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1938년에 프랑스의 화학자 빅토르레그놀는 봉해진 유리관에 염화비닐을 넣어서 햇빛을 쬐면 하얀 분말이 생성된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로부터 훨씬 후인 1872년에 E. 버우만은 염화비닐이 '용매나 산에 영향을 안 받는' 백색 고체가 된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의 중요성은 훨씬 후에까지 알지 못하였으며 공업적 개발은 염화비닐의 실용적인 촉매 중합법이 발견된 후의 일이었다.
폴리에틸렌 산화물과 폴리프로필렌 산화물: 1951년 여름 웨스트버지니아주 남부 차알스턴에 있는 유니온 카바이드 사 소속인 두 명의 화학자 조지 파울러와 월트 데니슨은 에틸렌 산화물 (CH2CH2O)의 봄베(bombe)의 밸브를 열었다. 무색의 기체가 나와야 했었다. 그런데 나온 것은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였다. 그래서 그 즉시 이 상태가 불량한 봄배를 옆으로 밀어 내놓고 다른 봄베를 가져다가 계획했던 실험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다행히도 호기심 많은 두 사람의 화학자는 상태가 불량했던 봄베의 내용물을 살펴보게 되었다(이것은 같은 상황에서 테플론을 발명한 로이 플랑켓트의 체험을 상기시킨다. 제27장 참조). 검은 액체를 밖으로 내놓았더니 단단한 흑색 고체로 변했다. 그리고 그것을 물에 잘 녹았다. 물에 녹아서 검어진 액체를 여과시켜 보았더니 흑색 분말과 무색의 투명한 용액으로 나뉘어졌다. 투명한 용액을 증발시켜 본 결과 굳은 백색의 고체가 남았다. 그 고체를 분석해 보니 철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백색 수용성 고체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즉, 이 백색 고체는 에틸렌 산화물의 폴리머이며 이것은 상태가 불량한 봄베 속의 산화철 촉매(녹)의 작용으로 생긴 것이었다. 이 작은 실험이 계기가 되어 10만에서 500만까지의 여러 분자량이 있는 에틸렌 산화물의 폴리머를 합성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몇 년 후 찰스 프라이스는 광학 활성 프로필렌 산화물을 중합시켜서 광학 폴리머를 만들었다.
사실은 독일의 화학자들이 그로부터 18년 전에 에틸렌 산화물을 중합시켰는데 아무도 이 발표된 논문을 몰랐던 것이었다. 재발견된 폴리에틸렌 산화물의 몇 가지 성질이 공업 화학자의 흥미를 끌었다. 그 하나는 폴리에틸렌 산화물은 설령 미량이라 할지라도 물의 점도를 크게 상승시키고 매끄러운 감촉의 용액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성질은 수성 페인트의 점도를 높이는 데 이용할 수 있으며 화장품, 로션 또는 식기용 액체 세제 등에도 사용되었다. 수용성 폴리머의 또 하나의 용도는 농업용이다. 튜브로 된 테이프를 만들어 거기에 종자(씨)를 일정한 간격으로 넣어서 이 '종자 테이프'를 얕은 골에 넣고 흙으로 약간 덮기만 하면 된다. 빗물이나 관개수에 젖게 되면 테이프가 녹아 종자의 싹이 발아하게 되고 일정한 간격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재배나 수확이 간단해졌다.
이 폴리머의 가장 매력적인 성질의 하나는 극히 작은 양을 물에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파이프나 호스 속을 흐르는 물의 마찰을 대폭으로 저하시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건축 현장에서 파이프를 통하여 콘크리트를 흘려보내는 데에 이용되어왔다. 소화 작업에도 이용되어왔는데, 보다 가는 호스로 물을 보낼지라도 같은 힘의 펌프보다 더 먼 곳까지 물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발견에는 몇 가지 중요한 '만약'이 있다. 이를테면 만약에 불량한 봄베 속에서 중합이 조금만 더 진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들은 원인을 살펴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하게도 중합은 마침 알맞게 진행되어 흥미로운 끈적끈적한 물질이 나왔기 때문에 파울러와 데니슨의 호기심과 상상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제27장. 테플론(원자폭탄에서 프라이팬까지).
테플론(Teflon)이라는 것은 폴리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에 대한 뒤퐁사의 등록상표이며 달라붙지 않은 프라이팬에서 우주복, 인공 심장판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사용되며 매상은 10억 달러에 달한다. 그것은 뒤퐁사의 젊은 화학자 로이 J. 플랑켓트에 의한 우연한 발견의 결과인데, 그는 이 운명적인 날인 1938년 4월 6일의 겨우 2년 전에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갓 학위를 받았다. 이날 플랑켓트는 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에서 독성이 없는 냉매를 만들 목적으로 이 가스 봄베의 밸브를 열었다. 그런데 아무 가스도 나오지 않아서 플랑켓트와 그의 조수 잭 리복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봄베의 무게는 불화탄소(플루오로카본)의 기체가 가득 들어있음을 증명하고 있었으므로 플랑케트는 이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봄베로 냉매의 연구를 계속하는 대신 이 '비어있는' 봄베에 대해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밸브의 주둥이에 철사를 밀어넣어 보고 봄베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봄베를 톱으로 가로 잘라 보았다. 그 속에서는 매끈한 하얀 분말이 나타났다. 화학자인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즉각 이해했다.
테트라 플루오로 에틸렌의 기체분자가 서로 중합되어 고체의 물질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이 화합물이 중합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는데 이 신비한 '비어있는' 봄베 속에서 그것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루워졌던 것이다. 이 우연한 발견과 이 폴리머의 이상한 성질에 용기를 얻어서 플랑켓트와 뒤퐁 사의 화학자들은 바로 '폴리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을 필요에 따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 왁스와 같은 백색 분말은 실로 놀라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 산과 염기 그리고 고열에서도 끄떡없으며 어떠한 용매에도 녹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래보다 불활성인 한편, 모래하고는 달라서 미끈미끈하다. 그러나 이런 재미있는 이상한 성질이 있다 하더라도, 만일 제2차세계대전이 없었다면 새로운 폴리머에 관해서 오랜 세월동안 그 이상의 연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매우 고가였기 떄문이다. 그런데 몇 개월 후에 원자폭탄 제1호의 제조에 관계하고 있던 과학자들이 원폭용 우라륨-235를 제조하는데 사용되는 물질의 하나로써 6플루오로화 우라늄이라는 위험한 부식성 가스에도 끄떡없는 개스킷(gasket)용의 재료를 필요로 하는 새태가 일어났다. 미국 육군의 원자폭탄 계획 담당의 책임자였던 레슬리 R. 그로브즈 장군은 우연히 뒤퐁사의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이 개발한 매우 불활성인 새로운 플라스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비슷한 우연의 정보로 인해 영국에서 레이다 설비용 절연체로서의 폴리에틸렌 사용이 전쟁 중 개발을 촉진하게 된 이야기에 관하여는 제26장을 참조할 것). 그것이 고가라는 것을 들은 그로브즈 장군은 가격은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미끈미끈한 폴리머는 혼합해서 개스킷과 밸브로 성형되었다. 이것들은 확실히 부식성인 우라늄 화학물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뒤퐁 사는 전쟁 중에는 테플론을 이 용도로만 제조했다. 일반 국민은 전쟁 후까지 이 새로운 폴리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실제로 테플론으로 도금한 빵 찌는 판과 프라이팬이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이었다. 여러 가지 새로운 폴리머가 그렇듯이 처음 대중용으로 생산된 이들 테플론 제품은 약간 기대에 어긋났다. 이 플라스틱은 달라붙지 않은 조리용 기구의 표면에 접착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부들의 습관대로 박박 문지르다 보면 냄비나 프라이팬은 벗겨지는 것이었다.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하여 실험해 본 뒤퐁 사는 1986년에 테플론 가공의 4세대째인 실버스톤 슈프러를 개발하였는데, 이것이 3세대 째인 실버스톤보다 2배의 내구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그 외에도 많은 용도가 개척되었으므로 조리 기구의 가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플랑켓트는 1910년 오하이오주 뉴 칼라일에서 태어났다. 1932년 맨체스터대학을 졸업했으나 대공황이던 때라 직장을 얻지 못하고 오하이오주립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유명한 화학자 폴 폴로리와는 대학과 대학원 동급생이자 친구였다. 플로리는 고분자 물리화학의 업적으로 1974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로이 플랑켓트는 1936년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뒤퐁 사의 잭슨연구소에 들어가서 냉매로서의 플루오로카본을 연구하도록 명 받았다.
이 연구 중에 젊은 플랑켓트는 극적으로 테플론을 발명해냈던 것이다. 그 후의 테플론의 개불은 고분자 제품을 그때까지 주로 취급해 온 뒤퐁사의 다른 부문에 인계되었다.
플랑켓트는 화학자로서 다른 일로 옮겼으며, 곧이어서 뒤퐁사의 플루오로카본과 4에틸연 제조부서의 관리직으로 출세했다. 프레온 제품이 부장이던 시절에는 텍사스 주 코퍼스 크리스티 부근에서 공장 설치에 전력했다. 1975년에 뒤퐁 사를 퇴직한 후 플랑켓트 부부는 코퍼스 크리스티 가까이에 있는 섬의 별장에서 지내며 낚시와 골프를 즐겼다. 플랑켓트는 모교인 맨체스터대학과 오하이오주립대학 그리고 워싱턴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시로부터 존 스코트 메달과 아메리카 제조업협회, 플라스틱공업협회, 아메리카 화학자협회 등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973년에 그는 플라스틱 전당에 가입하였으며, 또 1985년에는 아메리카 발명자 영예 전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플랑켓트는 이러한 영예 이상으로 전세계 수백만의 생명에 불 밝힌 테플론 이용법의 다양성에 긍지를 갖고 있다. 그는 테플론재의 대동맥이나 맥박 보조기가 신체 안에 장치되어있는 덕택으로 오늘도 살아있다는 편지나 전화가 너무 많아서 다처리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많지 않은 물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테플론은 인공 각막이나 턱, 코, 두개골, 허리나 무릎 관절 등의 인공뼈, 귀 부분, 인공 기관, 심장판막 또는 힘줄이나 봉합용 실, 의치, 담관 등에 사용할 수 있다.
테플론은 우주복의 외피감으로서도 사용되었다. 전선이나 케이블의 절연체로서 달에서 태양으로부터 강력한 복사열에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선의 선단 부분이나 기타의 내열 보호막 또는 연료탱크에도 테플론이 사용되고 있다.
이 훌륭하고 귀중한 응용도 모두 로이 플랑켓트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명 우연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발견된 것은 우연을 만나 사람에게 호기심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설) 로이 플랑켓트가 불소(플루오린)의 화합물에서 냉매를 개발함에 있어서 또 하나 다른 세렌디피터적인 일이 있었다. 1928년 제너럴 모터스 사의 냉장고 부서의 찰스 F. 케터링은 당시 냉장고에 사용되고 있던 암모니아와 이산화유황과 같은 유독 유해한 물질 대신에 안전한 무색, 무취, 무미, 무독, 불연인 냉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화학 문헌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토마스 미즐리와 알버트 헨은 불소와 염소를 모두 함유하고 있는 탄소화합물을 결정해야 하는 단계에까지 갔는데 불소의 화합물이 때로는 유독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독성의 보고를 시험하기 위해 미즐리와 헨은 간단한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의 견본을 합성해서 그것으로 동물 실험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시약회사에서 3불화안티몬 28그램이 들어있는 다섯 병을(그 당시 미국에서는 이것이 전부였다) 주문했다. 그들은 이 다섯 병 중에서 한 병을 무작위로 선택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을 합성시켰다. 이 클로로플루오로카본 화합물의 가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불소를 함유한 유기화합물은 독성이 없다는 그들의 믿음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이 실험을 재확인하기 의하여 두 사람은 다른 병에 들어있는 3불화안티몬으로 이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의 견본을 계속 합성하여 기니피그로 실험을 반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몇 번을 반복해도 기니피그가 전부 죽는 것이었다. 주의 깊게 조사해 보았더니 다섯 병 중에 한 병을 제외한 나머지 네 병의 3불화안티몬에는 물이 함유되어 있었는데 이 물 때문에 치사성의 가스인 포스겐(phosgene)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포스겐 속의 염소원자는 이 클로로플루오르카본 합성의 출발원료로서 3불화안티몬과 함께 사용된 유기염소화합물에서 유래한다). 기니피그를 죽게 한 것은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이 아니고 포스겐이었던 것이다.
미즐리와 헨이 맨 처음 동물실험에서 습기가 없는 3불화안티몬의 병을 선택할 수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을 냉매로 쓴다는 아이디어를 포기하였을 것이며, 이들 화합물이 유독할 것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좋은 선택으로 프리지디어 사와 뒤퐁사와의 공동사업으로서 뒤퐁 사 안에 클로로플루오로카본 화학의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프레온 부서가 생기고 겨기서 로이가 테플론을 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28장. 가솔린('꽃' 이론과 안티녹제).
이 장에서는 가솔린 공업기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우연한 발견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자동차의 초기 무렵에 있었던 것이며, 또 하나는 최근의 발전에 관한 것이다.
에틸용액의 발견. 녹킹(Knocking)을 방지하는 가솔린 첨가제의 탐구는 찰스 F. 케터링이 1912∼1916년형 캐딜락 엔진이 녹킹에 의해 시달리는 것을 해결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성공은 잘못된 찯상에 우연히 겹쳐져서 탄생하였다. 케터링과 델코 사(그 후 제너럴 모터스 사에 흡수되었다)의 연구원 토마스 미즐리는 녹킹이 가솔린의 불완전연소 때문에 생기는 후속 폭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붉은색 잎을 가진 철쭉과의 상록관목이 땅에 눈이 녹지 않은 초봄일지라도 다른 꽃보다 일찍 꽃이 피는 것에서 착안하여 가솔린을 진홍으로 착색한다면 복사 에너지를 좀 더 빨리 흡수하여 기화가 빨라지고 녹킹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16년 12월의 어느 날 미즐리는 붉은색 염료를 구하기 위해 화학실험실에 갔다. 그러나 요오드가 들어있는 병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그는 이 요오드가 가솔린을 붉게 할 수 있으므로 우선 이것으로 시험해 보기로 했다.
요오드로 녹킹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구한 결과 연료의 색은 녹킹 해소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다만, 첨가물로 녹킹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오드는 너무 비싸고 부식성 때문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탐구는 계속 되었다. 시행착오를 여러 번 되풀이한 후 1921년에 철쭉과의 꽃에서 착안한 것보다는 조금은 과학적인 구상으로 테트라 에틸납(4에틸연)을 발견했다. 이 구상의 일부는 '에디슨식', 다시 말해 약품 선반 위에 놓여져 있는 병의 내용물을 전부 시행착오를 거쳐 시험해 보는 방법으로 얻은 실험 결과와 또 일부는 좀더 과학적으로 원소의 주기성에 관한 멘델레예프(Mendeleef)의 이론을 근거로 한 것이다. 녹킹을 방지하는 가솔린에 녹인 것이 에틸(ethyl)액의 주성분이다. 에틸액이 훌륭한 안티녹(antiknock)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60년 이상 동안이나 주요한 가솔린 첨가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환경 중에 납이 배출되는 위험성 때문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메탄으로 가솔린을 만들다. 1986년, 뉴질랜드의 북쪽 섬에 있는 한 공장이 천연가스를 이용해 가솔린 제조를 시작했다. 이것이 순조롭게 가동되어 뉴질랜드의 액체 연료의 자급률은 현재 50%에 이른다.
이 제조과정의 1단계는 화학적으로 말하자면 천연가스의 주성분이 메탄(CH4)에서 메탄올(CH3OH, 메틸알콜)로의 변환이다. 그리고 2단계는 메탄올에서 분자의 탄소수가 6에서 12까지의 범위를 가진, 자동차의 엔진에 적합한 휘발성 탄회수소의 혼합물인 가솔린으로 변환한 것이다. 이 두 번째 단계가 메탄 분자에 산소를 1원자만 더할 뿐인 처음 단계보다 다음 단계쪽이 복잡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 이 과정의 장기적이인 관점에서의 성공 방법은 제1단계의 원가를 어떻게 삭감하느냐 하는 개량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량은 세균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고 알려진 효소의 변화과 필적할 만한, 효율이 좋은 공업용 촉매를 발견함으로써 달성될 것이다.
제2단계의 성공은 모빌 오일 사 화학자의 세렌디피적 발견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Chemical and Engineering News'지의 1987년 6월 22일 자에는 뉴질랜드의 새로운 메탄으로부터 가솔린을 생산하는 제조 공장을 커버스토리로 소개하였다. 또한 1987년 9월 2일자의 투서란에 은퇴한 화학자 윌리엄 H. 랭이 이 발견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972년 3월 10일, 그와 클라렌스 창은 ZMS-5라는 부호의 결정성 실리카-알루미나 촉매를 사용해서 이소부탄(C4H10)과 메탄올에서 네오펜탄(neopentane)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모든 메탄올과 일부의 이소부탄은 액체 탄화수소로 변화했습니다만 그중에서 네오펜탄을 검출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나는 나프타의 성분 개선 연구를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때 이 탄화수소 생성물의 성분이 고옥탄가 가솔린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 메탄올과 이같은 촉매만으로 실험한 결과 메탄에서 가솔린 계열의 탄화수소로의 변화가 확인되었습니다 ... 그 후 수년간 연구와 개발이 거듭되어 이 최초의 발견이 뉴질랜드에서의 성공적인 과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랭 박사는 이전에 가솔린 화학을 연구하고 있었던 덕택으로 이와 같은 물질에 대한 센스가 충분히 있었으며 그 결과 우연한 관찰을 최대한 이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제29장. 약품(우연히 발견된 예상 밖의 효과).
페니실린, 설파제, 세팔로스포린, 시클로스포린 등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약도 세렌디피티 또는 최소한 유사 세렌디피티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목적에 사용되던 약이 전혀 엉뚱한, 때로는 대단히 중요한 목적에 효과가 있음이 나중에 발견된 경우도 더러 있다. 이 장에서는 그런 타입의 발견의 예를 몇 가지 밝히기로 한다.
아스피린. 이 약은 무척 오랫동안 가장 많이 사용되던 약 중의 하나였으며 최근에 다시 그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처음에 아스피린은 내복용 살균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효과가 없다고 판명되었다. 그러나 귀중한 진통제와 해열제로 밝혀졌으며, 최근에는 마비를 방지하는 데 추천되고 있다.
조셉 리스터가 외과 수술용 살균제로 페놀을 처음 이용하게 된 직 후, 연구자들은 세균성 질환 환자의 내복용 약을 찾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살리실산이 합성되었으며, 그것이 체내에서 페놀을 생산한다는 것이 알려져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해열의 효과는 있으나 열의 원인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구역질을 일으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후 바이엘 사의 화학자 페릭스 호프만이 살리실산의 개량형으로서 아세틸 유도체를 합성했더니 해열과 관절염의 통증을 억제하는데 효과가 있으며 반갑지 않는 부작용도 적다는 것을 알았다. 아스피린(aspirin)이라는 이름은 살리실산을 처음에 장미과의 조팝나무과(Spiraea)의 식물에서 얻은 데서 유래되고 있으며 접두어인 a는 아세틸을 뜻하여 붙여진 것이다.
1890년대에는 제약업계가 등장한 이래 아스피린은 다른 어떤 약보다도 많이 사용되어왔다. 심장발작 예방효과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시험 되지 않는 응용 분야이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연간 1800만 톤의 아스피린이 생산되고 있으며 이것은 1인당 매년 약 300정에 해당된다.
정신병 치료제. 1950년대 이전, 정신병은 약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정신분열증, 심한 조울증이나 신경증(노이로제) 등의 환자는 정신병원에 감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약 10년가량 동안에 정신병에 치료하는 약이 개발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하는 희망을 갖게 함으로써 정신병원은 사실상 텅텅 비게 되었다. 거의 모든 정신병 치료약의 발견에는 세렌디피티가 얽혀있다.
클로로프로마진 : 1940년대 후반, 프랑스의 정신외과 의사인 헴리라보리는 수술에 앞서 마취보다도 먼저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한 약을 찾았다. 수술 전의 불안에 의해서 환자의 체내에 히스타민이 방출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라보리는 항히스타민제가 이 목적에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보리는 어느 제약회사로부터 프로메타진이라는 이름이 진정용 항히스타민제를 얻어서 사용해 보았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그는 좀 더 강한 항히스타민테인 클로로프로마진(chlorpromazine)을 구했다. 라보리는 클로로프로마진에 의하여 수술 전의 환자가 '평온한 행복감'을 갖게 되는 것에 강한 감명을 받고 그의 동료들에게도 이 약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다른 두 사람의 프랑스인 정신과 의사 장 드레와 피에르 드니케르는 이 약이 수술 직전의 외과 환자에게 유용할 뿐만 아니라 조울증 환자를 진정시키는 데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을 포함한 또 다른 정신과 의사들이 1952년부터 1955년에 걸쳐 정신병 환자에게 이 약을 사용해 보았더니 정신분열증의 치료에 특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0년 후반, 클로로프로마진은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약 10년 만에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때까지 갇혀 있었던 보호시설의 완충벽으로 둘러싸인 방과 구속하는 옷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의 생산적인 일과 거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주립 정신병원의 환자가 수십만 명이나 감소했으며, 정신장해자를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만든 사회의 정책변화도 강도가 심한 정신병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클로로프로마진의 효능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다.
클로로프로마진의 사용은 정신질환의 약물치료에 있어서 두 번째 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임상시험 결과 이 약을 대량으로 투여하면 파킨슨병(뇌질환의 후유증으로서 일어나는 신경증상)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의 운동기능을 관장하는 부분에 고농도로 존재하는 신경 전달물질인 도파민(dopamine)은 파킨슨병으로 사망한 환자의 뇌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뇌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도파민으로 변화시키는 화학물질 L-도파를 주사하면 파킨스병 환자의 증상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스웨덴의 약리학자 아비드 칼슨은 클로로프로마진과 같은 약이 정신분열증을 억제하는 것은, 사실상 도파민 수용체를 막아냄으로써 뇌안에 도파민의 부족상태를 유발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1975년 존스 흡킨즈연구소의 솔로몬 H. 스나이더 박사에 의해서 뇌 안의 도파민 수용체의 측정이 가능하게 되면서 클로로프로마진과 같은 항정신분열증 약의 치료 효과가 도파민 수용체의 반응억제에 의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이 발견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뇌의 기본적 이상이 도파민의 과잉 생산이거나 도파민 수용체의 과민화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미프라민(Imipramine): 정신분열증에 대한 클로로프로마진의 세렌디피터적 성공은 화학적으로 유사한 약을 다수 합성하여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스위스의 제약회사인 가이기(Geigy)사에 의해서 합성된 이미프라민이었다. 롤랜드 쿤 박사는 이것이 정신분열증에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안 후, 다른 정신질환에 실험해 보았다. 1957년 그는 이 약이 클로로프로마진과 상반되는 약리 효과인 '항우울제'로서 훌륭하다고 보고했다.
리튬(Lithium): 항정신병약으로서의 리튬의 발견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을 뻔했던 일이었다. 1940년대 말엽, 젊은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인 존 케이드는 조울증의 일종인 조병이 요산의 대사 이상으로 인하여 발병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이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는 요산을 리튬염의 형으로 해서 탄산르튬과 함께 실험동물에 주사하여 극적인 치료 효과를 관찰했다. 그는 이 발견을 오스트레일리아의 논문지에 보고했는데 1950년대 중엽까지 그의 관찰 결과에 주목한 정신과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그 무렵 덴마크의 의사 모건스 쇼우가 케이드의 논문을 읽었다. 그는 케이드가 말한 화합물을 조병 치료에 사용해 보았더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 약의 성분 중 요산 부분은 유효성분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요산이 르튬염의 형태로 사용된 것이 치료 효과의 원인이었으며 다른 어떤 리튬염에서도 마찬가지로 효과가 있는 것을 알았다.
리튬염 따위는 흔해 빠진 것으로서 약으로서도 특허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제약회사는 임상용으로서 대량 제조에 관계하기를 꺼려 했다. 리튬의 임상 사용을 더디게 한 또 다른 원인은 리튬이온을 약으로서 대량으로 섭취하면 화학적으로 유사한 나트륨이온과 몸 안에서 경쟁하여 독성을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이 예상되었기 떄문이었다.
그 결과 조울증을 억제하는 리튬의 효과가 발견된 지 20년 이상이 지난 1970년이 되어서야 겨우 리튬이 미국 정신과에서 치료에 받아들여졌다. 이 간단한 리튬이온은 조병의 치료용으로서는 가장 효과가 있는 약제이지만 그 효과의 원인은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다.
리브륨(Librium)과 발리움(Valium): 화학요법의 역사에 있어서 1960년은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발매된 두 가지 약은 사회의 각각 다른 명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새로운 진정제 시리즈의 첫 번째 약은 리브륨과 여성호르몬 경구피임약이다(피임약 필의 발견에 관해서는 재20장 에 설명되어 있다). 1960년대에 가장 많이 처방된 리브륨은 1970년대가 되어서 화학적으로 비슷한 성질인 발리움에게 그 수위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 두 가지의 진정제가 개발된 사연은 유사 세렌디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호프만 라 로슈 사의 레오 스턴바흐는 불안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에 착수하고 있었다.
레오 스턴바흐는 1908년,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부였으며 그 후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된 풀라반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약학의 석사와 박사학위의 폴란드의 크라쿠프대학에서 받았다. 1940년에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호프만 라 로슈 사의 연구소에서 일했으나 다음해 미국 뉴저지주 너틀리에 있는 연구소로 옮겼으며, 1946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 후 그는 1973년 의약품 화학 부장을 마지막으로 호프만 라 로슈 사를 퇴직했다.
1953년 스턴바흐 박사는 새로운 타입의 진정제를 개발할 것을 임명 받있다. 경쟁회사가 같은 약을 개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감소하기 위해 필요한 화학물로는 어느 정도 합성의 연구 노력이 요구되면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화합물은 입수하기 쉬운 출발물질이어야 한다. 게다가 효과가 있는 약을 발견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 화합물의 기본적인 분자구조가 다수의 유도체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턴바흐는 크라쿠프대학에 있을 때 염료 합성의 출발물질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구하였던 화합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화합물군은 새로운 신경안정제로 앞서 말한 희망하는 바를 거의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스턴바흐가 합성한 이래 18년 동안이나 아무도 이와 관련된 어떤 연구도 하지 않았었다). 합성은 쉬우며, 생물학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화합물과 마찬가지로 방향성 고리에 질소 원자 하나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요구되고 있는 진정효과가 없다고 밝혀졌다.
1957년 4월, 스턴바흐는 부하 연구원들에게 이 화합물군에 관한 연구를 끝내고 다른 타입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대청소를 하던 중 한 연구원이 2년 전에 합성되었으나 약리 시험을 하지 않았던 화합물을 찾아내고 스턴바흐에게로 내밀었다. 그는 약리 시험을 해보았자 어차피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여 희망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의 관심이 다른 타입의 화합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턴바흐가 매우 놀란 것은 이 소홀히 했던 화합물이 강력한 진정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진정효과도 보이지 않았던 화합물군과 화합적으로 닮았을 이 화합물의 이상한 성질을 알아보기 위해 조사했더니 이 화합물은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합성하는 동안에 예상외의 분자 내 전위반응이 일어나 전혀 다른 구조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잊고 있었던 화합물의 구조를 닮은 다른 화합물군을 합성시켜 보았으나 원래의 것보다 효과가 큰 것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이어서 신중한 임상시험 후 이 '잊혀졌던 화합물'은 1960년에 리브륨이라는 상품명으로 발매되어 바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리브늄이 발매되기 이전에 호프만 라 로슈 사의 연구자들은 리브늄이 체내에서 가수분해될 때 생기는 것으로 여겨지는 화합물이 동일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가수분해 화합물의 여러 유도체를 합성해 본 결과 그 중의 하나가 리브륨보다도 여러 가지 점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새로운 약의 상품명은 발리움(일반명은 디아제팜)이라고 명명되었다. 1963년에 발매되어 신경안정제로 리브륨과 교체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강력한 진정효과를 지닌 정신분열증 치료제인 클로로프로마진과 항우울제인 이미프라민이라는 두 가지 약이 서로 닮은 분자구조로 되어있으면서도 거의 상반되는 약리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리브늄과 발리움도 닮았으나 똑같지는 않다(약으로서 유용한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항정신성 물질인 LSD의 우연한 발견에 대해서는 제20장에서 설명했다.) 발리움이 발매된 이후 미국에서는 유사한 화학구조의 약이 12종류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으며,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규제가 미국보다 엄하지 않는 점도 있고 하여 그 외에도 21종류가 판매되고 있으나 리브늄과 발리움의 우연한 발견 후에는 진정제의 분야에서 기본적인 약리학적 진보는 없다.
부정맥 치료제(이것으로 충분한 수면을). 상품명 노보카인과 자일로카인(xylocaine)〔일반명은 프로카인(procaine)과 리도카인(lidocaine)〕은 국소마취제로서 (예를 들면 치과 마취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 1940년대에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심장부정맥 증상이 있는 개에게 전신을 마취시킬 때 노보카인을 주사했더니 그 심장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것이 마취과 의사에게 알려져 바로 그 효과를 사람에게 시험해 볼 기회가 생겼다. 미국 육군의 어느 흉부 센터에서는 급성심장혈관부전인 환자 몇 명에게 이를 시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선구적인 테스트는 찰스 버스테인 대령에 의하여 실시되어 1946년에 보고되었다.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최초의 테스트는 기능부전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경우에만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이 있는 환자에 대한 노보카인(novocaine) 주사는 결과적으로 마비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항상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한 부정맥 증상이 진행 중인 마취상태의 환자에게 국부 마취제를 주사할 경우에 나쁜 영향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심장 순환 개선이 관찰되었다. 1950년에는 J. L. 사우스워즈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자일로카인이 뛰어난 항부정맥 효과가 있다는 임상적 증거를 제출했다. 그 이후 심장수술에 관련되는 국부마취약의 정맥주사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떤 목적을 위해 개발된 약이지만 전혀 다른 목적에 유용하다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 명백한 예이다.
미녹시딜(머리카락도 깜짝 놀라다). 1980년 펜실바니아주 브라인 모어의 자퍼코스터 박사는 38세된 남성의 고혈압을 미녹시딜(minoxidil)이라는 약으로 치료하고 있었는데 두피에 새로운 털이 돋아났다는 것을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지에 편지로 보고했다. 이 환자는 20세 때부터 거의 대머리 상태였다. 자퍼코스터이 편지나 그 후 나오기 시작한 다른 보고는 먼저 피부과 의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리고 곧이어 이 뉴스가 번지기 시작하자 일반 남성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대머리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며 그 치료법은 고대 이집트시대부터 탐구되어 왔던 것이다. 피부과 의사 중에는 시카고의 일리노이 대학병원의 버지니아 피들러 와이스라는 여의사가 있었다. 그녀는 만일 이 약을 국소적으로 사용하면 혈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기타 반갑지 않은 부작용 없이 머리털을 성장 촉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미녹시딜의 정제를 분쇄해서 로션으로 만들어 3명의 환자 두피에 1일 2회씩 발라보았다. 그러자 수 주일 후에 3명의 환자 중 2명의 머리에서 머리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피들러 와이스 박사가 미녹시딜의 제조원인 어브존사에 전화를 하자 거기에서도 이미 이 약의 로션을 사용하여 예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피들러 와이즈는 그 후 어브존사와 공동으로 대규모의 연구를 시작했다. 1984년에 보고된 논문에 의하면 48명의 환자 중 25명에게 새털이 돋아났으나 미용상으로 만족할 만한 사람은 그중 11명이었다.
그 외에 1987년까지 다수의 연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 미녹시딜액은 탈보가 심한 모든 환자에게 전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약의 가장 유효한 사용법은 환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을 유지하게 하며, 대머리가 되는 초기단계에서 회복하는 것을 돕게 될 것이다. 이 약은 무한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으며, 한편 장기간을 사용할 경우 피부의 안전성은 확인되어 있지 않다. 1987년 말까지 그 일반적인 사용을 FDA(미국 식품 의약품국)로부터 인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설령 인가가 된다 하더라도 의사의 처방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혈압의 치료약인 미녹시딜이 머리털의 발모를 촉진하는 것은 임상시험에 의해서 증명된 셈이다. 'Clinical Pharmacy'(임상 약학)의 1987년 5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어느 환자가 이 요법에 양성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는 적당한 지침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아마도 가장 적당한 용매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 효율을 향상시킬 수가 있겠으나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탈모치료에 있어서 미녹시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할 것이다"
인터페론(암과 관절염). 1955년, 아이잭스와 린덴만은 인터페론(interferon)이 바이러스 감염에 대응하는 세포가 만들어 내는 단백질 및 당 단백질이며, 이것으로 넓은 범위의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새로운 타입의 항암제일 가능성 때문에 매스콤과 대중 그리고 의학계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물질의 적당량을 얻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인터페론의 임상 응용의 진보는 매우 더디었다. 몇 년 전에 처음으로 인간의 인터페론 유전자가 클로닝되어 사정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1984년에 실시된 임상적인 암 치료의 실험 도중에 우연한 관찰을 통해 인터페론 주사가 류머티즘성 관절의 통증과 부기를 완하시킨다는 놀라운 이 사실이 발견되었다. 예비적인 연구 결과 일반적인 치료로는 도움받지 못했던 환자 중 3분의 2에게 이 호르몬이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만일 이 결과가 보다 넓고 일반적인 것으로 확인된다면, 유전자공학에 의해 대량 생산된 인가 호르몬은 예상 밖의 큰 시장이 될 것이다.
암 치료약이 관절염을 치료한다는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생물공학 회사인 바이오젠 사의 독일 자회사 바이오페론 사에서 연구 중에 생긴 일이었다. 제스 루드닉 박사에 의하면 암과 류머티즘성 관절염 두 가지를 앓고 있는 환자 몇 사람이 관절염의 동통에 어느 정도 개선을 보였다고 한다. 회사의 간부는 처음에 회의적이었으나, 독일 국내에서 38명의 환자에게 테스트했더니 1주일에 5회의 주사로 1주일에 2주일 동안에 28명은 관절염의 통증이 완화되었으며, 또 몇 사람은 통증이 없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터페론이 플라세보인지를 비교하는 검사가 더욱 필요하며, 이 호르몬이 단지 증상을 완화시키기만 하는 것인가 또는 원인인 관절염이라는 병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조사하는 것도 필요하다.
제30장. 오염된 물과 진흙에서 얻은 약.
오늘날 가장 중요한 약 중 두 가지는 오염된 물과 진흙에서 발견되었다. 신형 페니실린의 대표적인 항생물질인 세팔로스포린(cephalosporin)은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섬에 있는 칼리아리 시의 오염수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또 사람의 장기이식을 용이하게 하는 항생물질인 시클로스포린(cyclosporine)은 제약회사 사원이 위스콘신주와 노르웨이에서 스위스로 가지고 온 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균이 항생물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균이라고 하면 무좀이나 빵의 곰팡이 등과 같은 불쾌한 것을 상기하기 마련이다. 농가에서는 균이라고 하면 작물을 망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불쾌한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균 중에서도 좋은 균이 있어 맥주나 와인 또는 된장과 간장을 만들기도 하고 빵을 부풀게 하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발효 과정을 포함한 모든 공업 작업과정은 이스트(yeast)균에 의한다.
또한 균의 가장 중요한 작용 중 하나는 다른 생물 특히 세균(박테리아)에 대항하는 항생물질의 생산이다.
세팔로스포린. 1950년대 초엽, 페니실린을 사용하고 있던 의사들은 중대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몇 가지의 세균, 특히 포도상 구균에 페니실린의 효과가 없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그 몇 년 전에 발견되었는데 한동안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1948년 지중해에 있는 이탈리아의 큰 섬인 사르디니아의 세균학 교수 주셉 브로추는 칼리아리시의 하수구 가까이의 바다에서 세팔로스포륨 아크레모늄(cephalosporium acremonium)종의 균으로 만들어진 항생물질을 분리했다. 브로추 교수는 하수의 자체 정화작용에 항생물질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연구하고 있었다. 균 배양액을 농착하여 항생물질로서의 활성을 발견한 그는 동물테스트를 생략하고 이를 국부 도포와 주사의 두 가지 방법으로 감염증인 환자에게 투여했다. 그 결과 환자, 특히 장티프스의 환자에게는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으로 이탈리아의 제약회사들의 관심을 끌려다가 실패한 그는 1948년 '칼리아리 위생연구소 연구보고'라는 학술잡지에 사르디나아 섬에서 설비도 기기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누군가가 이 연구를 계속해 주기를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 이 발견을 이전에 칼리아리의 공중위생을 담당한 관리였던 영국인에게도 보고하였는데, 그 결과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병리학교실의 에드워드 에이브라함 경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몇 년 후에 에이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브로추의 연구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그의 연구보고가 지방의 학술잡지에 게재되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제가 그에게 그 잡지가 어느 정도의 횟수로 발행되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 보고가 실린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다음 호가 발행된다면 그것은 아마 이전과 같은 재미있는 발견을 했을 때일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에이브라함은 옥스포드대학에서 세팔로스포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항생물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개시했다. 옥스포드대학의 연구팀은 이 균이 몇 가지 종류의 다른 항생물질은 만들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분리된 것은 그람 양성(gram-positive)균에 효과가 있었서 세팔로스포린 P라고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브로추가 균으로 조제한 액은 그람 양성균과 그람 음성균 양쪽에 유효했기 때문에 옥스퍼드대학의 연구자들은 배양기에서 다른 항생물질을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1954년에 에이브라함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또 하나의 항생물질을 거의 순수한 형으로 분리해 내었는데 그람 음성(gram-negative)균을 죽임으로서 세팔로스포린N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화학적인 연구 결과 이 물질은 페니실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페니실린N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55년 또 하나 순수한 결정물질을 얻고 그것을 세팔로스포린C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은 독성이 매우 낮았고 1950년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페니실린에 저항력이 있는 몇 가지의 극동성 세균에 유효했다. 1961년 에이브라함과 가이 뉴턴은 화학적인 근거를 둔 세팔로스포린 C의 분자구조를 발표했다. 그 잡지의 같은 호에 도로시 C. 호즈킨과 E.N. 메슬렌은 X선 결정해석에 의하여 이 구조를 확인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도로시 호즈킨은 그보다 앞서 1940년대에 페니실린의 구조에 관하여 X선 해석에 의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었다. 그녀는 1965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세팔로스포린의 단리나 구조 결정에 관한 연구는 거의 옥스퍼드의 연구들에 의한 것이었으나 세팔로스포린C의 합성은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B. 우드워드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우드워드는 1966년 그의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이 합성법을 발표했다.
원래의 균에서 세팔로스포린C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양은 너무 적어서 도저히 실용적이라고 할 수 없었으나 다음의 두 가지 발견 덕택으로 세팔로스포린은 의약품으로서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세팔로스포린C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변종균의 발견이며, 두 번째는 세팔로스포린 C분자를 화학적으로 변환시켜 의학적으로 유용한 광범위한 베타 락탐계 항생물질을 제조하는 방법의 발견이었다. 락탐이란 질소원자를 포함한 4원자 고리분자를 말한다. 페니실린도 베타락탐의 일종이지만 그림 30-1과 같이 페니실린은 제2의 고리가 6원자 고리이다. 미국에서는 현재 20가지에 가까운 세팔로스포린이 사용되고 있으며 더 많이 합성되어 가고 있다. 최근 6개의 제3세대 세팔로스포린은 모두 기본이 되는 베타 락탐핵이 있으며, 그림 30-1의 R1, R2, R3에서 명시된 위치의 치환기가 다르다. 이것들은 모두 폭넓은 그람 음성균에 활성이 있으나 각 약마다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
지중해의 연안 도시에서 바다로 흐르는 하수구가 바닷물 속에서 어떻게 정화되는가 하는 최초의 의문에서 시작된 좀 별난 사건이 아주 새로운 항생물질의 보고를 발견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시클로스포린. 1981년 이래 시클로스포린(cyclosporine)은 인간의 장기이식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 약은 거부반응을 억제한다. 거부반응이란 인간의 면역계의 작용으로써, 다른 조직을 인식하면 때로는 그 즉시 이식된 기관의 기능상실을 야기시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시클로스포린은 놀라울 정도로 부작용이 적다. 1983년 하원 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알버트 고아(1994년 현재 미국 부통령)가 소집한 의회 공청회에서의 보고에서 피츠버그대학 의학부의 외과 의사인 토마스 스타즐 박사는 1979년에 이 약이 사용되기 전, 간장 이식은 가장 잘된 경우에서도 일종의 도박과 같은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의 20년간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사용된 약은 거부반응을 방지할 수 있을까하는 점에서 신용할 수 없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클로스포린을 사용하면서부터 이식된 간장 조직의 기능을 중요한 시기인 처음 1년 동안 유지하고 있는 환자의 비율이 35%에서 내지 70%로 향상되었던 것이다.
존스 홉킨즈대학의 멜빌레 윌리엄 박사는 신장 이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미국 국내의 4개의 병원이 이 새로운 명역 억제제 시클로스포린에 관해서 경험을 쌓아 왔습니다만 이들 병원의 모든 연구자가 지금까지 이식의 생존율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실시해 온 여러 가지 방법들은 이 약을 일반인에게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 시클로스포린을 사용하면 모든 시체 신장 이식 수술이 80% 내지 90%가 성공하는 데 반해 사용하지 않으면 성공률은 5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심장 이식 및 심폐 동시 이식에서도 시클로스포린에 의해서 크게 도움받고 있다. 스탠포드대학의 외과 의사 노먼 슘웨이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 12월에 시클로스포린의 사용을 시작한 이래 동종 이식된 심장에 임상검사 상 거부반응이 발견된 예는 한 건도 없었다."라고 한다.
시클로스포린 발견의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회사의 사원이 세계를 여행할 때 새로운 항생물질이 함유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미생물 테스트를 통해 알아보기 위해 흙의 샘플을 가지고 오도록 장려했던 제약회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스위스의 바젤에 있는 산도스 사도 이러한 회사 중의 하나이다. 1970년, 미생물학자 장 보렐은 미국의 위스콘신 주와 노르웨이에서 각각 여생자가 가지고 온 흙을 연구하고 있었다. 연구 결과 이 두가지 흙이 물에 녹지 않는 물질을 생산하는 두 가지 새로운 균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클로스포린A로 명명된 이 물질은 항생물질로서의 성질은 약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독성이 낮았기 때문에 테스트를 계속한 결과 보렐은 1972년 1월에 이 시클로스포린A가 현저한 면역 억제 효과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산도스 사의 경영진은 면역관계의 연구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고 보렐에게 시클로스포린A의 연구를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보렐은 이 결정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다행히도 시클로스포린A의 연구는 계속하기로 허락받았다. 그는 이 면역 억제 효과가 테스트했던 모든 동물종에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인체 실험을 시도해 보니 물에 잘 녹지 않은 성질 때문에 체내 흡수의 문제가 생겼다. 그때 한 지원자가 젤라틴 캡슐에 넣어 내복해 보았는데 약 성분은 혈액 중에서 거의 또는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보렐은 운반의 방법에 문제가 있으며, 그 해결은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진해서 소량의 물과 유화제를 함유한 거의 순수한 알콜 속에 약을 녹여 만든 칵테일을 마셨다. 그는 '갈지자걸음'이 되었다고 보고했으나, 어떻든 2시간 후에는 그의 혈액 중에 약리학적으로는 활성인 농도의 약이 검출되었다(후에 경구 투여용으로 더 좋은 용제로 올리브 오일이 발견되었다).
1978년 6월, 영국의 외과의사들이 처음으로 시체 신장 이식의 부적합한 예와 골수이식 환자에 관하여 연구했다. 그 후 많은 연구자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성공을 거두었다. FDA가 약을 승인하여 장기이식의 가능한 센터에서는 어디서든지 이 약이 보통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식되는 장기는 제공자의 신체로부터 환자의 신체까지 24시간 이내에 이송되어야 한다. 이 제약 때문에 어떤 정소에서 장기를 신체로부터 떼내어 다른 장소까지(통상 비행기로) 운송하여 시클로스포린A로 처방한, 이식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환자의 신체에 이식하는 조작을 빠른 속도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클로스포린A의 정식명은 지금은 단순하게 시클로스포린으로 바뀌었다.
시클로스포린에는 기생충으로 말미암은 병의 치료라는 또 하나의 놀랄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약은 열대 지방의 병의 근원이 되는 주혈흡층이라는 기생충을 죽인다는 것이다. 존스 흡킨즈대학 의학부의 어네스트 뷰딩 박사는 처음에 시클로스포린이 이 병의 증상을 어느 정도 개선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약이 기생충에 대한 직접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던 것이다. 시클로스포린은 또 말라리아 원충도 몰아내어 없앤다. 이 역시 말라이아에 걸리는 얼마되지 않는 동물 중의 하나인 쥐를 실험할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시클로스포린은 클로로퀸에 내성을 갖는 말라리아 원충에도 효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클로로퀸은 1940년대에는 말라리아에 대해서 효력이 있었으나 베트남전쟁 중에 내성종이 출현했다).
거부반응억제와 기생충을 죽이는 효과가 시클로스포린에게 왜 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화학구조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어서 11가지의 아마노산 성분으로된 고리형 분자이다. 그 중의 하나인 아미노산은 이미 알려져 있는 분자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천연아미노산이 L형(좌수형)인데 반하여 이것은 진귀하게도 D형이다(파스퇴르와 분자의 우수형, 좌수형에 관해서는 제12장 참조). 또한 다른 하나는 전혀 새로운 아미노산이다. 시클로스포린은 이미 합성되었으며, 화합자들은 유도체나 유사체를 만들어서 그 구조의 어떤 부분이 이 생물학적 효력에 필수인가를 조사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아직 시클로스포린보다 뛰어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발견은 세렌디피티의 새로운 한 예이다. 산도스 사는 전세계 이곳저곳의 흙 속에서 흥미있는 항생물질을 탐구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심장이나 폐, 간장, 신장과 같은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장기의 이식 수술에 혁명을 일으킨 약을 발견하였으며, 다른 항생물질을 발전하는 것보다 중요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도 틀림없다.
제31장. 유기합성에 있어서의 붕소와 인.
1979년도 노벨화학상의 헌사에는 "유기합성의 중요한 시약인 붕소화합물 및 인화합물의 개발에 대하여 각각 인디아나 주 웨스트 라피예트의 허버트 C. 브라운 교수와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게오르그 비티히 교수에게 반반씩을 ..." 이와 같이 쓰여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경력을 가진 이 두사람은 과학계에 대한 기여도가 비슷하다해서 노벨상을 나누어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이 수상에 이르는 과정도 세렌디피티의 은혜를 나누어 받았다.
수소붕소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두 살 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젊은 시절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보내면서 교육을 받았다. 1935년에 라이트 전문대학을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1936년에 시카고대학의 2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고 졸업했다. 세렌디피티와 초름 조우했을 떄 브라운 자신은 전혀 몰랐었다. 졸업 축하로 그의 여자 친구(나중에 아내가 됨)가 '붕소와 규소의 수소화물'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이 책은 허버트 브라운이 전문가로서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책방에 있는 화학책 중에서 가장 값이 쌌으며 아직 대공황의 와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래의 브라운 부인은 이 선물에 '나의 장래 노벨상 수상자에게'라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브라운은 자신의 이름에 H.C.B.(원소기소인 수소, 탄소, 붕소)라는 이니셜이 선택된 것은 부모님의 훌륭한 선견지명 때문이라 술회했다.
브라운은 붕소의 화학에 대한 강한 흥미를 발전시켜 시카고대학의 슐레징거 교수 밑에서 대학원 과정으로 이 분야를 연구하여 1938년에 학위를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총성의 원조를 받아 박사 연구원으로 슐레징거 교수 밑에서 붕소와 우라늄의 화합물 연구를 계속했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수소화붕소의 르튬과 나트륨의 새로운 실용적인 합성법을 개발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웨인주립대학의 교수로 4년간 제임한 후, 브라운은 무기화학 교수로서 퍼듀대학에 부임하였으며, 거기에서도 붕소의 화합물에 대한 흥미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의 연구는 전쟁 중에 정부와의 계약하에 계속되었으며, 그 연구 결과는 기밀이었기 때문에 전후에도 수년간 발표할 수가 없었다. 한편 수소화알루미늄리튬은 전후까지 연구가 계속되었으며, 이와 같은 제약은 받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 발표되자 화학계의 커다란 관심을 끌게 되었다.
브라운은 수소화알루미늄리튬이 먼저 알려져 버렸기 때문에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소홀히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50년대에 퍼듀대학에서 이 화합물의 환원력에 미치는 용매, 치환기, 금속 이온 등의 영향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계획에 착수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은 염화알루미늄에 의해서 촉매되고(반응속도가 빨라진다) 안식향산에틸이라든가 스테아린산에틸과 같은 '에스텔'이라고 알려져 있는 화합물군의 탄소-산소 이중결합을 환원시킨다(수소가 첨가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두 가지 에스텔은 모두 같은 양의 수소화붕소나트륨으로부터 정확하게 두 가지 수소원자를 받는 데에 대하여 올레인산에틸에 관해서 같은 실험을 해보았더니 이 에스텔에 의해서 소비되는 수소화붕소나트륨의 양은 수소원자 두 개분보다 상당히 많았다.
브라운 교수와 함께 이 실험을 하고 있던 수버 라오 박사는 브라운 교수의 지도하에 1955년 퍼듀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계속하여 공동연구자로서 유임했었다. 브라운이 올레인산에틸의 이상한 거동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올레인산에틸의 실험재료 중의 불순물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브라운은 올레인산에틸의 실험 재료를 주의 깊게 정제하여 순수한 재료를 사용해서 다시 한번 실험 중의 불순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실험을 주의깊게 반복해 보면 스테아린산에틸은 2개 분량의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하는 데 대하여 올레인산에틸은 실제로는 3개의 분량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브라운은 이것이 올레인산염 에틸분자와 스테아린산에틸에 공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탄소-산소의 이중결합 이외의 부분이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았다. 올레인산에틸과 스테아린산에틸의 차이는 전자에 존재하는 탄소-탄소의 2중결합이 후자에는 없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결합이 여분의 수소화붕소나트륨의 반응상대라고 인식했으나 그것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다음 단계는 탄소-탄소의 2중결합을 가지고 있는 분자와 가지고 있지 않는 분자(단순 알켄)가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의 혼합물과 반응하는지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반응이 일어났는데 이 반응은 그 이전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자로서 정확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결론을 내려야 했다.
브라운은 이 반응이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에서 생긴 다이보레인(diborane)을 중간체로 함유하고 있으며, 이 다이보레인이 2중결합에 더해져서 유기수소화붕소(organoborane)라는 생성물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알켄에 다이보레인을 첨가하는 것은 임 알려져 있었다. 이 반응은 어떤 분자에 대한 수소와 붕소의 첨가를 포함함으로써 수소붕소화(hydroboration)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로는 수소붕소화는 대단히 엄격한 실험 조건에서만, 더구나 비실용적인 정도의 진행이었다. 온화한 조건에서 좋은 수율로 수소붕소화를 진행하는 데 성공한 것은 염화알루니늄의 촉매작용 때문일 것이라고 브라운은 생각했다. 브라운과 수버 라오는 에테르용액(그들이 사용한 에테르는 마취제가 되는 디에칠 에테르가 아니고 휘발성이 없는 시판하는 용매의 일종이었다) 속에서 온화한 조건하에서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에서 다이보레인을 생성하여 그것이 단순한 알켄이 더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브라운은 이 새로운 실용적인 수소붕소화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이 성공은 염화알루미늄의 촉매작용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실험을 하려고 했다. 즉 에테르용액 중 다이보레인과 알켄에서 염화알루미늄을 빼고 반응시키는 실험이었다. 놀랍게도 수소붕소화는 염화알루미늄 없이도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다. 그 후의 실험 결과 수소붕소화의 성공의 비밀은 우연히 사용했던 그 에테르 용매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브라운 교수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 수소붕소화를 신속, 간편하고 일반적인 유기붕소화합물의 합성법으로 계속 발전시켰다. 일단 유기붕소화합물을 용이하게 합성할 수 있게 되자 이것들은 수많은 귀중한 유기화합물(그 대부분은 붕소를 이미 함유하고 있지는 않지만)의 합성중간체로서 매우 유용한 것이 되었다. 수소붕소화의 유용성은 브라운이 받은 노밸상에 의해서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브라운이 '거대한 미지의 대륙'이라고 하는 수소붕소화의 세계를 세렌디피티적 발견에 의해서 해택을 받은 세계의 화학자들의 서적, 총설, 연구 논문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브라운의 발견은 복잡한 유기분자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쉽게 만들 수 없는 지극히 간단한 분자의 합성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어떤 약국에서든지 볼 수 있는 소독용 알콜의 주성분인 이소프로필알콜(2-프로파놀)은 석유를 기초로 한 출발원료인 프로필렌에서 간단하게 또한 염가로 제조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성체인 노르멀프로필알콜(1-프로파놀)은 마르코프니코프의 법칙에 의한 원리 때문에 간편한 방법으로는 만들 수 없다. 그런데 브라운의 수소붕소화법을 사용하면 이 노르멀 프로필알콜은 프로필렌으로부터 '역 마르코프니코프'라는 단계를 포함한 방법에 의해서 만들 수 있으며, 이 방법은 현재 어떤 기초 유기화학의 교과서에도 쓰여져 있다.
(해설) 브라운은 수소화붕소나트륨에 관해서 또 하나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을 보고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미국 육군통신대는 야외에서의 실용적인 수소가스 발생원을 찾고 있었다. 슐레징거와 브라운이 수소화붕소나트륨에서 수소가스를 만드는 방범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그들은 순수한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제조하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목적의 실험 중에 브라운은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정제하는 방법으로 지극히 보통의 용매인 아세톤에 의한 추출을 시도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은 발열하면서 아세톤을 녹였는데 그 용액을 조사해 보니 아세톤이 이소프로필알콜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해서 알데히드와 케톤(아세톤은 케톤의 일종이다)을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시켜서 알콜로 바꾸는 매우 유용하고 일반적인 방법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자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야외에서 사용하여 수소를 발생시키는 방법은 개발되지 않았으나 알데히드나 케톤과 같은 기능기관을 수소화붕소나트륨으로 환원하는 반응의 발견은 종래 유기화학자가 이와 같은 목적에 사용해 온 방법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이 화합물은 전쟁 중 연구 명령의 급선무하에 개발되어 나중에는 제약 공업의 주된 응용의 장을 차지하게 된 셈이다.
알켄 합성. 1979년도의 노벨상을 브라운과 나누어 수상한 게오르그 비티히는 1897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그는 과학과 음악 양쪽에 흥미를 가지고 재능을 발휘했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음악 사이에서 고민한 인물로서 러시아의 화학자이자 작곡자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보로딘이 유명하다. 보로딘은 많은 사람들에게 러시아 음악의 최초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어서, 그가 화학과 의학의 선생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비티히가 음악을 직업으로 선택했다면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주었을까는 알 수 없겠지만, 유기와 무기화학 양 분야에 있어서 그의 귀중한 공헌 덕을 입은 다수의 화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주된 관심이 음악이 아니었다는 점에 감사해도 될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비티히의 세 번째 취미는 등산이었다. 다행히도 그것을 취미로 즐겼는데, 그의 등산과 화학연구가 귀하고 높은 영역의 추구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비티히의 연구자로서의 경력은 1916년 튀빙겐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병역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으나,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학부의 졸업연구를 마치고 이어서 192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2년까지 마르부르크에서 교편을 잡고 그 후 브라운슈바이크공업대학으로 갔으며 이어서 프라이부르크대학 그리고 1944년에 튀빙겐대학의 정교수 겸 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학과장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1956년에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79년에는 브라운과 노벨상을 나누어 수상하였다. 1987년 8월, 비티히는 90세로 사망했다.
그가 튀빙겐에 재직했었던 1953년에 노벨상으로의 첫걸음이 된 세렌디피티와 우연히 만났다. 비티히와 그의 제자 게오르그 가이슬러는 인원자 한 개가 다른 원자 5개와 결합한 듯한 화합물 즉, 5개의 인 화합물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어떤 실험에서 그들은 유기 인 화합물이 탄소-산소의 2중결합(알데히드와 케톤이라고 하는 중요한 종류의 화합물군에 특징적인 단위 구조)을 가진 화합물과 반응하여 탄소-산소의 2중결합이 탄소-탄소의 2중결합으로 치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이슬러와 공저인 최초의 연구 논문 중에서 비티히는 "이 유기 인 화합물인 벤조페논(탄소-산소의 2중결합을 갖는 케톤)의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다"라고 썼다.
비록 이것은 그의 연구 논문 중 작은 한 부분이고, 분명히 예상 밖의 결과였으나 비티히가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다른 연구생 올리히 셸코프와의 공저에 의한 두 번째의 논문「올레핀 생성시약으로서의 트리페닐포스핀메틸렌」이 뒤이어 곧 발표된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이 논문 중에서는 우연히 발견된 이 반응이 온화한 조건으로 진행되어 다른 방법으로는 만들기가 쉽지 않는 다수의 '올레핀' 합성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비티히 반응ㅇ의 중요성은 어떤 분자 속의 특정한 장소에 탄소-탄소의 2중결합을 가진 올레핀을 자유롭게 합성할 수 있다는 점에 있으며, 1953년 당시(현재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비티히 반응의 또 하나의 장점은 온화한 반응조건에서도 고온이나 강력한 시약에 민감한 물질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곧, 뒤이어 다른 논문이 비티히의 연구소와 전세게의 화학연구실에서 연달아 발표되었다. 이들 연구보고는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최근의 참고도서에 의하면 이 반응에 관한 단행본이 2권, 총설이 25권 있다고 한다. 노벨상 이외에 이 발견의 중요성의 증거로서는 비티히 반응에 의해서 비타민A가 톤 단위로 제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티히의 음악에 대한 애정은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국제심포지엄에서의 그의 강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53년에 발견되고 후에 자기 이름을 붙이게 된 이 합성법의 역사를 '슈타유딩거의 주제에 의한 변주'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자기가 우연히 접한 이 반응이 헤르만 슈타우딩거가 30년이나 전에 보고한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슈타우딩거의 주제'에 의한 그의 화학적 '변주'와 이를테면 브람스(Brahms)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처럼 클래식 음악의 작곡가가 선배 작곡가의 작품에 입각하여 작곡하는 것과 같은 유사성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티히의 유기 인 화합물과 사용한 실용적 합성법은 옛 방법의 개량이 아닌 혁명적인 발견이며, 실제로 비티히는 그의 세렌디피적 발견 후에 문헌을 찾아볼 때까지 슈타우딩거의 일을 전혀 몰랐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노벨상에 의해서 인정된 브라운과 비티히의 공헌의 유사성은 그들의 방법이 분자구조의 명확한 유기화합물의 합성법으로써 탄소 이외의 원소를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어떤 발견도 행운스러운 우연과 그 우연을 멋지고 훌륭하게 발전시킨 브라운과 비티히의 충분히 준비된 마음에서 얻은 결과였다.
제32장. 총알도 뚫지 못한다.
발명 또는 발견의 계기가 되는 우연이라는 것은 화합연구에서는 실지로 온갖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출발물질 중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불순물의 존재일 때가 있었다. 이것은 예컨대 크라운 에테르를 발견함으로써 찰스 J. 페더센과 도날드 J. 크램 그리고 장 마리렌 이상 3인이 1987년도 노벨상을 수상하게 한 경우이다(제36장). 또 어떤 경우에는 우연한 촉매의 존재로서 나타나, 영국의 화학자들이 에틸렌 중합에 이용하여 레이다용의 이상적인 절연체를 적시 적절한 때에 제조할 수가 있었다(제26장). 그리고 때로는 필요한 시약이 약품고에 없어서 무엇이든 다른 것으로 대용했다는 실로 단순한 계기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연구소에서 어떤 유용한 폴리에스테르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발명된 폴리에스테르는 우리가 입고 있는 종류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매일 접촉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다.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라는 이름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자동차 범퍼나 미등이 이것으로 되어있을지도 모르고, 제트비행기의 좌석 옆의 창문에 사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대통령이나 로마 교황의 자동차가 이것으로 방호되어 있는 것을 당신이 보았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런 것들 중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1953년의 어느날 다니엘 폭스가 약품고에서 원하는 물질을 찾지 못했던 사건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년 전에 오클라호마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폭스 박사는 뉴욕 주스케넥터디에 있는 G. E. 사의 연구소에서 고온도와 고습도에서도 분해되지 않는 전자 자석용 전선의 절연체를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룹의 기획 회의에서 "가수분해에 견고한 폴리에스테르만 있다면 좋겠는데..."라고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장황스럽게 투덜댔다. 즉, 이것을 열이나 습기로 분해되지 않는 폴리에스테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폭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전에 박사연구원으로 연구하고 있을 때에 구아야콜이라는 페놀성 화합물의 탄산에스테르가 예상외로 가수분해가 안 되는 사실을 알고 그는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 형태의 화합물이 대체로 물에 분해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약품고로 가서 구아야콜과 화학적으로 가까운 비스-구아야콜을 찾아보았다. 그는 이 화합물을 분자의 양끝에서 연결하여 원하는 폴리에스테르로 만들 작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다행스럽게 약품고에는 비스-구아야콜이 없었으므로 폭스는 관련된 화합물인 비스페놀(bisphenol)A로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마침 그 무렵에 시판되기 시작한 에폭시 수지의 성분이어서 엽가이고 입수하기가 쉬웠다. 탄산알킬(지방족 탄산에스테르)류를 비스페놀A와 가열하는 실험을 몇 번인가 시도했으나 잘 될 것 같지가 않아서 폭스는 방향족 화합물인 탄산디페닐을 비스페놀A와 가열해 보았다. 이 반응의 부생성물로 예상되는 페놀(끓는점이 높은 액체)을 반응용기에서 증류함에 따라 용기의 내용물은 점점 점도가 높아졌다. 서서히 온도를 올리고 압력을 내림으로써 끓는점이 높은 페놀을 더 제거했다. 이것을 하는 도중에 휘젓는 교반봉이 더 이상 돌지 않게 되고 모터가 멎어버렸다.
생성물은 점도가 너무 강해 플라스코 밖으로 꺼낼 수 없어서 그대로 냉각시켰다. 냉각되자 생성물은 굳으면서 줄어들었고 플라스코의 유리에서 분리되었다. 폭스가 플라스코를 깨고 굳은 내용물을 꺼내보니 교반봉 끝에 반구형의 덩어리가 되었으며 군데군데 유리 플라스코의 파편이 박혀 있었다. 1987년의 강연에서 폭스 박사는 그 후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 생성물 덩어리를 두들겨 보고 콘크리트 바닥에 던져도 보았는데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무에 못을 때려 박는 망치 대신으로 쓸만도 했다. 결국 톱으로 단면을 자르고 그 몇 개를 섭씨 300도쯤의 온도에서 압축하여 천연 그대로의 필름으로 만들었다. ... 연구소에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고분자화학자가 많이 있었는데도 우리 그룹의 대부분은 열가소성 고분자의 합성에 관한 경험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으며 또한 이 포리카보네이트처럼 색다른 고분자의 상업적인 중요성에 관해서 전혀 평가할 줄을 몰랐다. 간단히 말해, 폴리카보네이트의 활용은 한동안 보류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특히 신규사업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여 피츠필드에 생긴 G.E.사의 화학개발부가 새로운 연구과제를 찾고 있었다. 당시의 개발부장은 피츠버그 판 유리(P.P.G.) 사에서 옮겨 온 페츠커스 박사로 그는 P.P.G.사에서 지방족 폴리카보네이트에 관해서 상당한 경혐을 쌓았었다. P.P.G.사의 저융점에서도 부서지기 쉬운 지방족 폴리카보네이트와 G.E.사의 고용융점에서도 매우 강한 방향족 폴리카보네이트의 차이를 아는 그는 당장에 초기의 폴리카보네이트 개발을 위한 옹호자가 되었다.
새로운 플라스틱 개발이라는 것이 시간도 걸리도 간단하지는 않지만 결국 G.E. 사는 성공하여 갖가지 새로운 응용을 발견했다. 그런데 방향족 폴리카보네이트를 개발하고 있던 곳은 G.E. 사뿐만이 아니었다. 제조법은 다소 다르지만 독일의 바이엘 사도 잘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폭스의 발견은 사실상 재발견인 셈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용도에서 사용되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어떤 고분자였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할지라도 이것과 유사한 고분자가 1902년에 이미 독일에서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G.E. 사가 강조한 것은 폴리카보네이트의 투명성과 강도였다. 곧, 다른 플라스틱들도 ' 폴리카보네이트와 거의 같은 정도로 강하다' 거나 '폴리카보네이트와 같은 강도' 등의 광고를 내게 되었다.
폴리카보네이트는 투명하고 매우 강하며 넓은 온도범위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투명한 방탄 구조물을 만들 수 있으므로 대통령이나 로마 교황을 지키는 보호물, 외국 대사관의 건물, 은행 출납부의 창구, 교도소의 철창이 없는 창문, 값을 메길 수없을 만큼 귀중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피복, 아이스하키 경기장의 관객 보호용 받침대, 초음속 제트기의 지붕, 스쿠버 다이빙용 마스크, 기동대원이 사용하는 방패 등에 이용된다.
폴리카보네이트의 강도, 투명성, 증기 멸균이 가능한 성질 등의 특성 때문에 우유병 5갤론(약19리터)들이 용기와 의료용 기구인 보호용 안경과 헬멧 등에고 사용되고 있다. 앰트랙(Amtrak:미국 철도 여객 운송 공사)의 앞 유리창에는 석탄덩어리가 부딪쳐도 깨지지 않도록, 또 항공기의 밖으로 나온 차양에는 새와 초음속의 속도로 부딪쳐도 끄떡없도록 각각 폴리카보네이트의 얇은 층으로 설계되었다. 그토록 철저하리 만큼 엄격성이 요구되지 않는 용도로는 승용차, 버스, 열차, 항공기의 창이나 항공기 객실의 선반, 자동차의 미등이나 새로운 디자인의 헤드라이트 등도 포함된다. 또한, 다른 플라스틱과 혼합함으로써 충돌에 대비한 범퍼가 만들어지는 등 전세계에서 35종의 모델의 자동차에 사용되고 있다.
폭스 박사는 1987년의 강연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교반봉 끝에 붙은 반구형의 덩어리가 어디까지 성장하는가를 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또 개인적인 만족감의 크나큰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 우리는 그가 처음에 원했던 출발물질을 입수하지 못했다는 운 좋은 실패와 그 대신 세렌디피티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과 그리고 폭스 박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의 예민한 직관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제33장. 현대생활에 내린 행운의 선물.
매직테이프. 매직테이프(미국에서의 상표는 벨크로)로 알려진 갈고리와 고리로 동여매는 것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독창적인 발명품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중요한 발명과 마찬가지로 이 매직테이프의 아이디어는 아주 우연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50년대 초, 조지 드메스트랄은 그의 모국 스위스의 시골에서 산책에 나섰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옷에 도꼬마리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그서을 떼어내면서 "어째서 이렇게 집요하게 달라 붙지?"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현미경으로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도꼬마리는 갈고리로 꽉 차 있으며 그 갈고리가 옷 천의 고리에 끼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흩어져서 번식하기 위한 자연법칙으로 도꼬마리는 자기 종자의 가시가 지나가는 새나 짐승에게 달라붙게 되어있는 것이었다. 드케스트랄은 도꼬마리를 본따서 혐오대상이 아닌 유용한 것을 만들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은 고착제의 이야기다. 현재는 도꼬마리형의 갈고리와 섬유의 고리를 응용한 매직테이프가 어린이의 신발에서부터 우주선의 마이크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고착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제품으로서의 응용 범위는 엄청나게 크며 자동차, 가정용품, 의료 기구, 군사용 기기 그 외에도 너무 많아서 다 쓸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등록 상표인 벨크로(velcro)는 우단(velvet)과 코바늘 뜨개질(crochet)에서 앞글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갈고리와 고리식 테이프는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그 생상은 손으로 직접 만들어 매우 더디었다. 고리 테이프의 기계생산은 비교적 용이했으나 갈고리 테이프의 기계생산은 처음에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시스템을 실용화하는 해결법으로는 우선 고리를 기계로 만들고 그것의 끝을 잘라 갈고리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처음 매직테이프가 시장에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많이 개량되었다. 갈고리와 고리에 새 소재를 쓰면서 품질향상이 도모되었다. 먼저 갈고리와 고리를 만드는 나일론 필라멘트를 굵게 하고, 그리고 나일론에 폴리에스테르를 섞어서 더욱 강하게 했다. 자외선이나 화학약품 또는 습기에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순수 폴리에스테르 테이프가 사용되었다. 항공기가 우주선용의 매직테이프로서의 지금은 섭씨 약 430도의 고온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강철이나 우주 시대용 합성직물도 사용되고 있다. 우주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매직테이프 중에는 순수한 산소 속에서도 타지 않는 것도 있다.
숲속을 걸어가면서 옷에 도꼬마리가 달라붙어서 난처한 경험을 한 사람이 무척 많을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러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봄으로써 이 자연의 오묘함을 응용하여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 조지 드메스트랄에게 우리는 모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이보리 비누. 수없이 많은 화장비누 중에서 독특한 것은 아이보리 비누로서 이 비누는 물에 떠오른다. 이 독특한 비누의 개발은 아주 우연하게 발생하였다. 1879년 주의력이 약간 산만한 작업원이 점심시간 중에도 비누 가마의 교반기를 작동시킨 채 방치해 두었기 때문에 공기가 많이 들어가 비누의 거품이 너무 많이 일고 말았다. 제작회사인 프록터 앤드 겜블(P&G) 사는 처음에 이것을 전부 버리려고 했으나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수요자들로부터 이 물에 뜨는 비누를 더 구하고 싶다고 편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판매촉진의 수단으로 간파한 하리 프록터는 그 즉시 물에 뜨는 이 새로운 비누를 빨래는 물론 목욕에도 쓸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는 비누덩이에 홈을 넣어 두 쪽으로 쪼개기 쉽도록 했다. 그리고 당시 평판이 높았던 고가의 수입비누 3종류와 비교하여 P&G사의 비누가 가장 불순물이 적다는 분석결과가 나오자 '순도 99.44%'라는 광고를 냈다. 그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아이보리(ivory)라는 이름은 하리 프록터가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구약성서 시편 제45편에 나오는 '상아의 궁전'(ivory palaces)을 읽는 중에 생각했다고 한다.
콘 푸레이크와 휘트 푸레이크. 아침 식사용으로 친숙하지고 있는 이 두 가지를 제조하는 과정은 적어도 유사 세렌디피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느 정도 우연의 결과에 의해 발견되었다. 1898년, 콘 푸레이크가 먼저 만들어졌다. 겔로그 형제는 밀을 요리해서 하루 이상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그 후 롤러에 넣었더니 놀랍게도 밀은 평탄하게 되지 않고 푸레이크(flake)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뻐했다. 같은 방법으로 옥수수에 응용해 보니 콘 푸레이크가 되었으며, 그것은 인기품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모르겠지만 밀로 만들어진 휘트 푸레이크가 발매되기 시작한 것은 26년이나 뒤였다.
포스트 잇. 비범한 착상과 시패작이 어울려 1980년대에 매우 잘 팔린 상품의 하나가 되었으며, 현대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제품으로 탄생했다. 보통은 노란색이나, 어떤 색인건 풀 없이 붙는 이 메모용지를 사용해 본 사람은 이것이 없을 때는 어떻게 했는가를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이 종이쪽지는 사무실에서는 편지나 서류철 위, 전화나 컴퓨터의 화면 옆에 그리고 가정에서는 냉장고나 TV의 화면 위에 또는 뒷문 문짝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메모용지는 3M사에서 발명하여 포스트 잇(post it)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으며, 시장에서는 누구나 모방하여 팔 수 있기 때문에 환영을 받게 되었다.
이것을 발명하게 된 비범한 착상을 살펴보자. 1974년 아트 프라이는 3M사의 제품개발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일요일 미네소타 주 성 바울 북장로교회의 성가대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성찬식에서 그는 원하는 시간에 재빨리 다음에 부를 찬송가의 페이지를 찾기위해 지금까지 해오던 요령대로 종이쪽지를 목적하는 페이지 사이에 끼워넣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가다가 그 종이쪽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떨어져 버려 프라이는 성찬식 때에 다급하게 성가집을 뒤져야했다.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가 지루했는지 아니면 영감을 떠오르게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마음이 당황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3M사의 다른 연구자 스펜서 실버에 의해서 수년 전에 만들어진 접착제가 생각났습니다."
영속적인 접착제로 사용하기에는 접착력의 강도가 부족했기 떄문에 스펜서가 그 접착제를 버렸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접착제라면 종이쪽지가 영구히 붙어있지 않을 것이며, 성가집의 원하는 페이지에 일시적으로 붙여놓는 데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프라이의 착상이었다. 프라이의 표현에 따르면 '일시적으로 내구성이 있는 접착제'인 것이다.
월요일에 출근한 프라이가 자신의 책갈피에 넣을 서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이 서표의 여러 가지 용도를 생각하였다. 용지는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으면서 그곳에 메모를 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접착제를 개량하여 일시적인 용도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충분히 내구성이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이 일에는 많은 실험이 필요했다.
거의 1년쯤 지나서 프라이는 메모용지의 결점을 충분히 제거하였다고 판단하여 마케팅 담당자들에 보였다. 처음에 그들은 그다지 신통해 하지 않았다. 보통 메모용지에 비해 비싼 값으로 판매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접착메모용지를 필요로 할 것인지 어떤지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1977년, 미국의 4개 도시에서 포스트 잇의 시험 판매가 실시되었다. 그 중 2개 도시에서의 결과는 실망적이었으나 다른 2개 도시에서는 놀라운 결과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 상반된 반응을 조사해 본 즉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시에서는 판매점에서 견본품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던 것이었다. 즉 상품을 먼저 소비자 손에 쥐어 주게 한 것이 주요했다. 그 후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1980년에는 포스트 잇이 전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1981년에는 유럽에서의 판매액이 미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스카치가드. 3M사의 광고에 의하면 스카치가드라는 상표로 알려져 있는 불소계 더러움 방지제는 우연한 발견이라고 한다. 새로이 개발된 제품을 테니스 운동화 위에 조금 흘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묻었던 자리가 좀처럼 더러워지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만한 센스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또 하나의 우연에 의한 발견인 것이다.
제34장. 생명의 소용돌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DNA라는 문자가 어쩐지 중요하다는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디옥시리핵산(deoxyribonucleicacid)의 머리글자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과학자를 제외하고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지 이 물질의 중요성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의 분자구조나 생물학적 기능에 관한 지식은 생명의 비밀로 알려져 왔다.
1962년 제임스 와트슨, 프란시스 크릭, 모오리스 윌킨스 이상 3인은 DNA의 구조 해명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나누어 수상했다. 와트슨은 생물학자이고 크릭은 물리학자 그리고 윌킨스는X선 결정학자였다. 그들이 연구했던 자세한 내용은 유기화학이나 생화학의 모든 교과서에 쓰여 있으나 한 사람의 화학자가 우연하게 휘말려 들어간 사건이 노벨상을 받게 한 비약적 발전의 열쇠가 되었다고 설명한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없다, 와트슨의 흥미로운 자전적 저서 '2중의 나선' 중에서 자신의 세렌디피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타이틀은 생명의 중요한 분자구조를 그래픽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임스 와트슨은 1950년, 그의 나이 22세 때에 인디아나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박사연구원으로서 유럽으로 가고 그 2년 후에는 케임브리지대학의 로렌스 브래그 경의 연구소에 있었다. 브래그는 1915년 X선을 사용해서 결정의 구조를 알아내어 노밸상을 수상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와트슨은 총명하면서도 약간 별난 물리학자 프란시스 크릭과의 공동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DNA의 신비를 해명하여 노벨상을 수상하자는 솔직한 의도하에 서로 다른 분야에서 얻은 지식을 갖다 모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라이너스 폴링이 단백질이 알파 헤릭스구조(거대분자에 있어서 원자가 시계방향의 나선형으로 배치된)를 발견했을 떄의 연구법을 참고로 했다. 폴링은 1954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그의 연구법은 거의 자기 자신이 발전시킨 구조 화학의 법칙을 기초로 한 것으로, 이들 법칙을 보면, 유치원 어린이용 장난감과 같은 피상적인 단백질의 모형을 적용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폴링의 모형은 결정의 X선 사진을 기본으로 하여 크기나 형태에 맞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DNA는 단백질과 닮은 거대분자라고 알려져 있었으며, 그 X선 자료도 나선 또는 소용돌이 구조와 맞지 않는 것을 아니었다. 와트슨과 크릭이 입수할 수 있었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X선 자료는 런던대학교 부설인 킹스대학의 모리스 윌킨스 연구실에서 나온 것으로써 그것은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윌킨스 연구실에서 나온 것으로써 그것은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윌킨스가 공동 연구한 것이었다. 단백질은 다수의 아미노산 단위(그리스어로 '단일 부분'을 의미하는 모노머)가 서로 결합하여 거대분자(그리스어로 '다수부분'을 의미하는 폴리머)를 형상히고 있다. 1952년까지 DNA는 한 종류 이상의 모노머로 된 폴리머라고 알고 있었다. 되풀이 사용되고 있는 모노머 단위는 디오기리보오스(당의 일종)와 인산 및 4종의 유기염기(구아닌, 시토신, 아데닌, 티민)였다.
와트슨과 크릭이 DNA의 퍼즐을 푸는 데 도움이 된 단서 중의 하나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콜롬비아대학 교수 어빈 샤르가프에 의하여 얻게 되었다. 샤르가프는 여러 생멸의 원천에서 얻은 DNA의 연구에서 구아닌과 시토신 사이와 아데닌과 티민 사이는 언제나 1대 1의 관계가 있다고 보고했다. 바꾸어 말하면, 구아닌은 언제나 시토신과 짝이 되어있으며 아데닌은 언제나 티민과 짝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와트슨과 크릭은 디옥시리보오스와 인산의 단위를 바깥쪽으로 하여 두 개의 나선, 즉 소용돌이로 되어있으며, 이 이중나선의 안쪽에 있는 유기 염기에 의해서 서로 조합되어 있는 DNA의 모형을 고안했다. 그들은 케임브리지대학의 카벤디쉬연구소의 공작실에서 만든 각 구성 성분 단위의 모형을 조립할 것을 계획했다. 그리고 DNA결정의 X선 사진으로부터 얻은 치수를 참고로 하였다. 기계공작공이 금속제로 단위 모형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 와트슨은 염기를 그려서 열심히 판지의 모형을 만들었다. 그는 점점 폴리머분자의 바깥쪽 나선에 규칙적인 반복 구성 부분으로 알려진 염기의 비슷한 것끼리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이 됨으로써(즉, 구아닌과 구아닌, 시토신과 시토신이라는 상태로) 두 개의 나선을 서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수소결합이라는 것은 원자간의 화학결합의 일종이다. DNA에 존재하는 염기에서와 같이 분자를 서로 묶어 놓을 수 있다고 알려진 물의 분자도 수소결합에 의해서 무리를 이루어 맞붙어 있다. 따라서 물분자의 실제 크기는 H2O의 1분자보다도 훨씬 크고 휘발성은 훨씬 낮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지구상에 액체인 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와트슨은 DNA 염기가 다른 여러 가지 토터머(tautomer) 형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결합을 이룰 수 있는 수소원자가 염기분자에 반드시 한 개의 장소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와트슨은 염기의 수소원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당시의 책으로부터 구조를 취해 사용하였고, 그 염기를 같은 종류의 조합끼리 수소결합한 나선의 일부에 붙여보았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형은 유전자의 복제과정에 관한 지식을 설명해 줄 것 같이 생각되었으므로 X선의 자료에서 요구되는 분자의 치수와 그리고 구아닌과 시토신, 아데닌과 티민이 짝이 되어있다는 샤르가프의 법익을 만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와트슨의 마음에 들었다. 제출된 구조에 어느 정도 불만은 있었으나 라이너스 폴링이나 다른 사람을 이기고 노벨상을 수상해야 한다는 긴급성 때문에 와트슨은 "훌륭한 DNA의 구조를 고안했다"라는 편지를 동료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발송한 지 1시간도 채 못 되어서 와트슨은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결정학자이기도 한 테리 더너휴를 만나 그의 방에서 이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너휴는 당시 우연하게도 와트슨과 크릭과 같은 사무실을 사용했었다. 그는 곧 와트슨이 생각한 구조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와트슨이 나선형의 사슬을 붙이기 위해 수소결합 시킨 염기의 토터머 형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와트슨은 자신이 참고로 한 책 이외에도 자기가 사용했던 토터머 형체로 염기를 그린 책은 얼마든지 있다고 반론했다. 그러나 도너휴는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도 거의 없이, 잘못된 토터머 형체를 쓴 책이 몇 년 동안 출판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너휴는 폴링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DNA염기와 유사한 분자의 X선에 의한 결정구조 연구를 해오고 있었으므로, 그가 와트슨에게 잘못된 토터머 형체를 사용했다는 그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와트슨은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서 도너휴가 옳다고 주장하는 별도의 토터머형을 새롭게 판지 모형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이 모형으로는 아무리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크릭에서 도너휴의 의견에 따라서 수정한 구조를 보이자 크릭은 그것이 X선에 의한 치수에도 잘 맞지 않으며 샤르가프 법칙에도 어긋날 것이라고 말했다.
와트슨은 그날 밤 매우 의기소침해서 돌아왔으며, 그다음 날 아침 일찍이 자기 책상으로 갔다. 그 후에 있었던 것을 그는 '이중나선'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튿날 아침,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방에 도착한 나는 책상 위에 서류를 재빨리 치우고 염기의 한 쌍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넓게 수소결합으로 조합된 평탄한 장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같은 염기끼리가 서로 짝이 된다는 선입관에 구애받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음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제리(도너휴)가 들어왔을 때 잠시 고개를 들었으나 프란시스(크릭)가 아니었으므로 그대로 염기를 여기저기로 움직여서 다른 여러 가지로 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험해 보았다. 갑자기 아데닌과 티민(A-T)의 쌍이 두 개의 수소결합으로 조합된 형태가 구아닌과 시토신(G-C)의 쌍이 적어도 두 개의 수소결합으로 조합된 형태와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든 수소결합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결합된 듯이 보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염기 한 쌍의 모양을 만드는 데 아무런 속임수도 필요하지 않았다. 급히 제리를 불러들여 나의 새로운 염기 구조에 이번에도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잘못된 점이 없다고 대답했을 때 이번에야말로 수수께끼가 풀린 것을 알고 나는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그 후 "우리의 아이디어는 심미적이고 우아했으며 ... 이와 같이 아름다운 구조를 본 적이 없다"고 부언했다. 와트슨이 조립한 염기 한 쌍의 구조는 그림 34-1을 참고 바란다.
와트슨과 크릭은 「Nature」지에 짤막한 논문을 투고했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으며 몹시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디옥시리보오스핵산(DNA)의 염의 구조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 구조는 적지 않은 생물학적 흥미를 부추기는 참신한 특색을 갖추고 있다." 이 두 번쨰의 문장은 활자로 된 조심스러운 표현으로서는 최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와트슨은 자기 저서의 끝머리에 "화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제리(도너휴)가 프란시스(크릭), 피터(폴링), 그리고 나와 같은 방이었기 때문에 생긴 뜻하지 않은 이익이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다. 만일에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같은 것끼리의 염기 한 쌍을 가지고 아무 쓸데없는 노력만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술회했다.
그래서 DNA의 사연에 얽힌 세렌디피티는 '제리가 프란시스와 피터 그리고 나와 같은 방이었기 때문에 생긴 뜻하지 않은 이익' 이었던 것이다. 노벨상을 획득한 발견에 얽힌 세렌디피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5장. 착오와 인해 그리고 우연에 의한 유기합성.
데릭 H. R.바톤 경은 1969년도의 노벨화학상을 노르웨이의 오드 핫셀과 공동으로 수상했다. 런던의 임페리얼 대학의 유기화학자 바톤과 오슬로대학의 교수를 퇴임한 물리학자 핫셀은 분자의 3차원 구조의 연구인 입체배좌 해석의 업적에 대하여 상을 받았다. 입체배좌(conformation)는 유기분자의 구조를 표시하는 '제4의 C'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나머지 세 개는 조성(composition), 화학구조(constitution), 입체배치(configuration)이다. 그리고 제3과 제4의 C가 분자구조의 3차원적 표현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유기분자의 입체배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제12장을 참조할 것).
오드 핫셀은 1897년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1915년에서 1920년까지 오슬로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1922년에서 1924년까지 베를린대학에서 헤르만 마르크 교수와 함께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오슬로대학으로 돌아왔다. 마르크로부터 배운 X선 결정해석의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처음 무렵에 오슬로대학에서는 X선 기기를 입수하지 못했던 탓으로 쌍극자모멘트의 측정으로 만족해야 했다. 쌍극자모멘트의 연구는 보다 간단한 장치로 가능했기 때문에 핫셀도 이용할 수가 있었다. 이 쌍극자모멘트의 연구는 6탄소고리 화합물(시클로핵산류)의 측정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노벨상에 의해서 인정받은 연구로 바로 연결된 것은 만큼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85년의 아돌프 폰 바이어의 시대부터 1920년까지 많은 화학자는 시클로핵산의 6탄소고리가 그림 35-1의 (a)에 그려진 것과 같이 평면인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1918년 사이에 입체적으로 꺾여 휘어진 두 개의 구조가 옳은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것들은 보트형〔그림 35-1(b)〕과 의자형〔그림 35-1(c)〕이며 보트형에서는 어떤 반발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의자형 쭉이 더 안정되어 있다. 핫셀은 1943년까지 그의 실험결과 시클로헥산의 6원소 고리를 가진 화합물은 사실상 모두 의자형이라는 결론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는 이 결론을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노르웨이의 연구잡지에 노르웨이어로 발표했기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핫셀은 나치스에 의해 2년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전후에 그는 오슬로대학의 교수로 돌아왔으며 1964년에 퇴임하였다. 그러나 1981년 사망할 때까지 그 대학에 적을 두었었다.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로써 수용소에서 핫셀은 라그너 프리시와 같은 방에 있었는데 핫셀이 바톤과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던 같은 1969년에 프리시도 노벨상(경제학)을 수상했다.
독일에서 있었던 어느 학회에서 바톤은 자신과 핫셀이 화학에 공헌해 온 사연 등에 관해서 흥미로운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제목은 바로 '노벨상 획득법- 입체배좌해석 초기 스토리'였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의 일부와 앞으로 설명하게 될 핫셀과 바톤 자신의 이야기 자료는 이 강연에서 발췌한 것이다.
데릭 H. R. 바톤은 1918년 영국 그레이브즈젠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조부는 목수였다. 그의 부친이 제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성공하여 그는 명문학교(톤브릿지)를 다닐 수있게 되었으나, 부친이 1935년에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아무런 자격도 얻지 못한 채' 중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년간 제재업에 종사했으나 인생에 있어서 좀 더 흥미 있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신념이 싸텄으며, 수년 후에는 런던대학의 부설인 임페리얼대학의 유기화학분야에서 학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쟁 중에는 2년 동안 군의 첩보기관에서 근무하다가 그 후 회사에서 1년간 근무한 뒤에 임페리얼대학으로 돌아와서 교직에 취임하는 기회를 얻었다.
1949년 봄, 하버드대학의 루이스 피져 교수이 초청으로 R.B. 우드워드 교수의 연구 휴가로 일시적으로 공석이 된 그 자리에 대신 취임했다. 하버드대학에서의 그 1년 동안에 노벨상 수상의 밑거름이 되는 혁명적인 논문을 썼다(논문은 짤막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자기 혼자서 타이핑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논문은 어떤 세미나에서 피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며, 피져의 실험결과를 몇 개의 6탄소 고리를 포함한 스테로이드분자의 안정된 입체배좌로 해석한 것이었다. 이 논문은 많은 분자에 관한 유기화학자의 사고방식을 바꾸었다. 바톤은 핫셀이 이 입체배좌 해석의 기초를 쌓은 것이라고 칭찬했다.
바톤은 런던대학교의 버크벡대학에서 직장을 얻기 위해 영국으로 갔으며, 이어서 그라스고대학 그리고 1957년에는 임페리얼대학으로 돌아가서 그 후 22년간 유기화학 강좌를 담당했었다. 1978년에는 그곳을 시작하여 파리 교외의 C.N.R.S.(국립과학연구소) 천연물리화학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1987년에는 이 연구소를 떠나 텍사스주 대학 광장에 있는 텍사스 A&M대학으로 옮겼다.
바톤은 자신의 연구를 그 과정에 따라 착상, 오해, 우연의 셋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오해와 우연은 세렌디피티의 최적의 예이며, 착상은 계획된 연구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우연에 의해 중요한 발견으로 진전되는 예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우연을 만난 사람들에게 '기다리는 마음가짐'(파스퇴르)과 '통찰력'(월풀)이 없었다면 발견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획된 연구의 예로써 쉽게 얻을 수 있는 화합물인 코르티코스테론-아세테이트가 인체에 있어서 염류의 정상적인 균형을 유지하면서 주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는 호르몬인 알도스테론(aldosterone)으로 변환하는 것을 들고 있다. 바톤이 광화학 반응의 계획을 세웠을 때에는 전세계에 있는 순수한 알도스테론의 양을 밀리그램 단위로 계량할 수 있었다(작은 물방울의 무게가 50밀리그램이다). 1년 후 바톤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순수한 이 호르몬을 60그램이나 입수했으며, 처음으로 이것의 생물학적 활성작용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천연물의 합성에 있어서 유용했던 과정 중 하나는 오해가 낳은 것이었다. 원래 이 방법은 복잡한 분자 속에 감마 락톤(감마-lactone)이라는 환상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그러나 감마 락톤은 얻어지지 않았고 전혀 예상 못한 결과를 얻었다. 반응이 실제 과정을 주의깊게 분석한 후, 바톤과 그이 연구자들은 이 새로운 반응을 다른 유용한 합성에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맛보았으나 바톤은 출발물질과 반응물을 수정하여 재차 감마 락톤 합성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성공하였으며, 수년 후에는 현재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인 잭 볼드윈과 공동으로 에스트론〔그림 35-2(a)〕을 18-히드록시에스트론〔그림 35-2(b)〕으로 변환하는 데에 이 개량법을 이용했다. 이 화합물은 여성의 요중에 존재하는 물질인데 너무 미량이기 때문에 알도스테론과 마찬가지로 그 생물학적 활성작용은 합성에 의해서 얻어질 때까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었다. 이와 같이 바톤의 오해로부터 시작된 연구는 생물유기화학에 있어서 가치가 매우 높은 두 가지의 새로운 착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앞의 강연에서는 우연의 예를 몇 가지 들었다. 그리고 바톤은 1984년 가을,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의 세미나 떄에 다른 예에 관해서 설명했다(바톤은 이 세미나를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유기화학의 중요한 반응 중 많은 것이 우연히 발견되었던 것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몇 가지 예에 관해서 말한 다음 자기 자신이 최근에 만난 세렌디피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세렌디피티와 그것이 과학에 대한 기여에 관햐여 필자는 훨씬 이전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을 주제로 책을 만들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세미나 직후부터이다). 그 전년도에 바톤과 천연물화학연구소의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연구 중에 생산된 복잡한 천연물과 비교하기 위해 몇 가지 모델화합물은 합성하기로 했다.
원하던 화합물의 하나는 그림 35-3(b)와 같은 구조였다. 이것은 그림 35-3(a)의 화합물을 수소화 트리부틸주석과 같은 환원제와 반응시키면, 두 개의 염소원자를 두 개의 수소원자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a)의 CHCI2기가 CH3기로 변환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바톤이 정말 놀란 것은 예상하였던 화합물〔그림 35-3(b)〕은 미량도 생기지 않고, 반면 6탄소고리가 7탄소고리의 물질〔그림 35-3(c)〕로 거의 정량적으로 변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실제의 생성물이 유기화학자나 생화학자의 커다란 관심의 표적이었던 트로폰(tropone)이라고 하는 화합물군 중 하나인 것을 확인했다. 트로폰과 이것과 관계가 깊은 화홥물인 트로폴론(tropolone) 분자구조의 일부에 진귀한 7원자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적 관점과 귀중한 생리학적 특성을 보이는 천연물질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예를 들자면 콜히친(colchicine)은 통풍에 유효한 치료제로 사용되어 왔으며, 식물이 세포분열을 할 때 염색체의 수를 늘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식물종의 생산에도 실용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트로폰과 트로폴론의 합성은 이전에는 쉽지 않았다. 그림 35-3의 출발 물질(a)과 유사한 화합물은 간단한 출발재료로 용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바톤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 우연한 발견이 일반적이고 유용한 합성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진 반응의 생성물이 예상하지 못했던 트로폰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이 반응의 기계작용을 설명하는 것은 유기화학의 이론에 있어서 훌륭한 과제였다. 이 예상 밖의 결과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 결과를 낳았으며, 이것은 바로 세렌디피티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6장. 크라운과 크립탠드(왕관모양의 분자).
1987년의 노벨화학상은 두 사람의 미국인과 한 사람의 프랑스인이 그 영예를 나누어 가졌다. 이 세 사람은 화학에 있어서 세 가지의 다른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찰스 페더센이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으로부터 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1927년이고 도날드 J. 크램이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47년, 그리고 장 마리 렌이 스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1963년의 일이었다. 페더센이 1960년대에 우연히 화합물의 주성분을 발견하였으며, 나머지 두 사람이 그 뒤에 이 일을 생물유기화학적 응용으로 발전시켰던 것이었다. 페더센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연구가 뒤퐁사에서의 자신의 정년퇴직이 다가올 무렵에 이루어졌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수상을 통지받고 "과학자이 생애 최고의 연구는 35세까지에 이루어진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이 연구는 뒤퐁사에 있었던 나의 최후의 9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63세였으며, 그 2년 후에는 퇴임했다.
페더센의 발견은 그가 실제로 사용한 화학 약품 중의 하나에 우연히 불순물이 존재했던 때문이었다. 페더센은 예상하지도 않았던 '하얀 섬유상의 결정성 부생성물'이 나타나자 이것을 분리하고 검사해 보았으며 그것이 매우 희귀한 성질을 가진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우연을 발견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이 물질이 염화나트륨이나 염화칼륨과 같은 무기염과 결합될 수 있으며, 그리고 이것이 그때까지 녹지 않았던 유기 용액에 녹게 되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처음 이 부생성물을 우연히 발견한 페더센은 그 후에는 이를 계획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일렬의 유사물질은 전부 합성했다. 이들 새로운 화합물은 마취제로 잘 알려져 있는 디에틸에테르와 관계있는 환상에테르였다. 다만 1분자에 1개의 산소원자를 가지는 대신에 그것은 큰 고리(환) 속에 탄소원자 2개 이상을 사이에 둔 산소원자가 여러 개 존재하고 있다. 이들 환상에테르가 무기염과 합쳐지면 환상에테르는 소금의 금속이온 부분 둘레를 에워싸게 되고, 사람의 머리에 얹힌 왕관(크라운)과 같은 모양의 복합체(complex)를 만든다. 그래서 페터센은 이 새로운 환상에테르류를 '크라운에테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림 36-1은 페더센에 의해 발견된 최초의 크라운에테르가 금속이온M(나트륨이온이나 칼륨이온과 같은 소금 중의 정전하를 가진 부분)을 왕관화하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 속에는 산소원자와 금속이온만이 원소기호로 표시되어 있으며, 선의 각은 수소원자 1개나 또는 2개를 가진 탄소원자를 나타낸다. 이 도표는 복합체 결정의 3차원 X선 사진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림 36-1(a)는 위에서, 그림 36-1(b)는 복합체의 전방 약간 위에서부터의 투시화법에 의한 것이다. 후자는 이 분자가 왕관을 닮았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복합체의 안정성은 환의 크기, 금속이온의 크기, 폴리에테르 중의 산소 원자의 수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최초의 크라운에테르의 생성은 우연이었으나 페더센은 이 우연을 큰 발견으로 이끌어가는 '준비된 마음가짐'이 있었다. 뒤퐁사에서의 연구생활 중 페더센은 어떤 종류의 유기분자가 금속과 결합되는(chelate) 능력에 관해서 장기간 연구해 왔으며, 가솔린이나 기타 석유제품 중에서 오염물질의 소량의 금속을 제거하는 데에 이 화합물을 이용해 왔다. 금속과 유기화합물과의 화합물에 기인하는 산화방지제, 안정제, 억제제 등을 대상으로 하는 다수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가 만든 새로운 크라운에테르의 금속복합제 형성능력에 그 즉시 관심을 가지고 유사한 크라운에테르류를 합성하여 최초의 것과 비교한 것은 그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페더센이 1967년에 처음 크라운에테르에 관한 보고를 발표하자, 전 세계에서 즉각 반응이 왔으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의 장 마리 렌은 페더센의 복합체를 3차원으로 발전시켜 산소 이외의 원자, 예를 들면 질소 등을 고리 속에 넣었다. 렌의 분자는 그 모양이 3차원이기 때문에 보다 튼튼하며 결합할 수 있는 기질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는 자기의 복합체의 새로운 이름을 고안하여 3차원의 복합체를 크립테이트(cryptate), 구성성분을 크립탠드(cryptand)라고 이름 지었다. 이들 이름은 희랍어로 숨는다의 뜻을 가진 크립토스(cryptos)에서 유래하였다. U.C.L.A.대학의 도날드 J. 크램은 페더센이 하는 일을 발전시켜, 그가 '호스트-게스트화학'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분야를 확립시켰다. 호스트(host)란 작용을 하는 분자를 말하고 게스트(guest)는 작용을 받는 물질을 말한다. 렌과 크렘이 연구하는 접근 방식은 달랐으나 그들 두 사람의 사고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은 둘 다 어떤 원하는 물질을 수용하는 데 알맞는 크기나 형태의 빈 공간이 있으면서 충분히 튼튼한 유기분자를 합성하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이 계획한 것은(생물학적 효소의 거대분자에 비하면) 비교적 간단한 촉매를 만들어 단백질분자를 성분아미노산으로 쪼개는 것 같은, 세포 중에서 효소가 하고 있는 기능을 흉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호스트-게스트의 화학은 3차원 분자의 형태나 유연성 그리고 견고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크램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분자모형을 십분 활용했다. 이들 사진은 그림 36-1의 구조식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형은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플라스틱의 구로 되어있으며 구의 상대적인 크기나 그것들이 서로 조합될 때의 각도는 알려져있는 실제의 원자 크기나 결합 각도를 제법 정확하게 나타낸다. 약 90개의 호스트-게스트 복합체를 합성한 크램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X선 회절에 의해 결정된 그것들의 구조가 대개의 경우 거의 모형으로 예상했던 대로라는 것을 발견했다.
유기화학에 있어서 분자인식이라는 분야는 현재 기초와 응용의 양면에서 발전해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세포 중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학반응에 관하여 중요한 식견을 거기에서 얻을 수 있었으며 급속하게 발전한 생물의학 분야의 기초도 이에 의해서 구축되었다. 1987년 봄,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화학회 국내회의에서 분자인식을 테마로한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몇몇 대학과 제약회사의 화학자들이 자기의 최신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나 이것들은 모두 크림이나 렌의 연구를 거쳐 페더센의 발견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1987년 11월, 페더센이 크렘과 렌하고 노벨상을 나누어 수상할 때 그는 이미 83세로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다. 스톡홀름에서의 노벨상 수여식에 출석한 후 귀국한 그는 'Industial Chemist'지의 인터뷰에 응했다. 다음은 그 인터뷰에 인용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상상해 보자. 1900년경, 노르웨이의 한 기술자가 세계를 절반 돌아서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금광에서 일을 한다. 이번엔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한 일본인 한 가족이 새로운 시장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한국으로 건너갔다.
일본인의 아들은 금광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였고, 딸은 젊은 노르웨이인과 만나서 결혼을 한다. 세월이 흘러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 그는 화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것을 소설과 같은 줄거리지요" 찰스 페더센은 소리 높혀 말했다. 자신의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 스톡홀름에서는 이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 역사적인 크라운에테르의 발견에 이르는 자세한 방법론에 대하여 그는 "그 발견은 마침 좋은 때에 마침 놓은 일을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해서 내가 그것을 해냈는가는 지금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이라고 말했다.
장기간에 걸쳐서 페더센은 두 가지 진리의 산증인이었다. 그 첫째는 박사학위가 없더라도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 둘째로는 최고의 연구를 하는 때는 젊은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크라운에테르의 연구를 시작했을 때 60대였던 것을 마음 속에 생각하면서 그는 말한다. "늙은이라 하더라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시켜야 합니다." 허먼 슈레이더가 뒤퐁 사의 동료로서 찰스 페더센을 만난 것은 페더센이 수상하기 48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 그들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페더센의 크라운에테르 화합물 발견 20주년을 기념하여 그를 표창하는 기념식이 일본에서 개최되었을 때 슈레이더는 병환 중인 수상자의 대리로서 그의 친구의 업적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강연을 했다. "크라운에테르의 발견에 관하여 제대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찰리(페더센)는 배위화학의 정평이 있는 전문가였습니다 ...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 발견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발견에 딱 마주쳤다기보다는 오히려 구 화합물이 자신의 앞으로 걸어 오는 것을 잽싸게 붙들었던 것입니다. 예민하고 융통성 있으며 또한 기다리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한 발견에 관해서 이 책에서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 온 또 하나의 예증인 것이다. 우연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고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우연이 마침 알맞은 인물을 만난 때일 것이다.
-에필로그-
우연이 어떻게 해서 발견으로 바뀌는가?
이 책의 부제는 '과학에서의 우연한 발견'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 책에 쓰여진 우연한 발견의 모든 예에 있어서, 우연이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우연을 만난 사람의 통찰력(월폴의 말)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에필로그에서는 발견을 위해 필요한 노력과 통찰력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고 육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파스퇴르는 "관찰의 세계에서 행운은 준비된 마음가짐에만 기회를 준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준비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야 그것이 몸에 배게 되는가? 프리스트리나 파스퇴르 그리고 퍼킨과 같은 세렌디피티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은 확실히 태어나면서 발견과 발명의 재능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세 사람과 우연을 발견으로 바꾸어 버린 다른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특성으로는 왕성한 호기심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관찰한 우연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해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성은 인지력이다. 그들이 예상외의 현상을 관찰했을 떄 그것이 사소한 것이고 귀찮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주목하였던 것이다. 예상외의 기체 발생이라든가 변해버린 형태의 결정, 그리고 버리려고 했던 폐기물의 짙은 색 등을 본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이 무척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원소인 산소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생명에 지극히 중요한 분자구조의 형태에 관해서 추론한 바도 없었고, 또는 검은 콜타르에서 아름다운 염료를 발명할 수도 없었다. 알버트 센트 조르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발견이란 모든 사람이 본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호기심이나 인지력이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것들을 육성하고 개발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로날드 S. 레녹스는 말했다. 「세렌디피티적 발견을 위한 교육」(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VOL. 62, 1985, p.282)이라는 제목의 논문 중에서 레녹스는 학생이 우연한 행운을 이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기르는 몇 가지 방법에 관해서 말한 바가 있다. 그 첫째 방법은 예상했던 것뿐만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관찰하여 기록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레녹스는 이 훈련에서 학생에게 실험노트를 기록하게 하고 그것을 지도자가 단순히 '맞다' 또는 '틀렸다'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관찰능력과 기록능력에 관해서도 평가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시사했다.
학생은 자기 생각이나 해석에 관해서 충분히 유연하도록 지도되어야 한다. 예상하였던 것만을 보고 예상외의 결과를 '잘못' 또는 '실수'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에게는 발견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를 나 자신이 두 가지 경험했다. 한 학생이 실험을 한 뒤 내가 예상했던 대로의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두 번째 학생은 이 결과를 재현하지 못했으며, 나중에야 그 전 학생의 결과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학생이 시간에 쫒겨 자기의 지도교수가 예상하고 있다고 말한 그대로의 결과를 잘못 보고 했던 것이다(다행히 우리는 틀린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으며 후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기다렸다). 두 번째 예는 어느 학생 하나가 어떤 특정한 결과가 예상된다고 들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관찰하여 자기가 관찰했던 대로 정확하게 보고했다. 이 예상외의 결과는 원래 계획하였던 연구에 전혀 새로운 구상을 하게 했으므로 이것은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세렌디피티의 은혜를 받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선택한 연구 분야를 주의 깊게 충분히 공부해 두는 것이다. 미국의 물리학자 조셉 헨리는 파스퇴르의 격언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위대한 발견의 씨는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그것이 뿌리를 내리는 곳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된 마음가짐뿐이다." 이를테면 포자가 플레밍의 배양 접시에 날아들었을 때 그는 특별히 항균성 물질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지만 미생물학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한 곰팡이의 접종에 의해서 생긴 배양 세균 속의 깨끗해진 부분의 의미를 금새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떤 일이, 설령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인식하는 마음의 준비가 그들 연구자에게 없었다면 내가 유사 세렌디피티로 말한 발견의 몇 가지는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굿이어가 우연히 고무를 유황과 함께 가열하였을 때 고무의 탄력성이 고온이나 저온에서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그가 장기간 찾아왔었던 효과이었기 때문이며, 그 효과를 재빨리 테스트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이 주위의 작은 구멍이 많은 포장재료 속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보고 그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해 왔던 폭약의 위험성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느꼈던 것이었다. 이 위험천만의 액체와 여러 물질과의 혼합물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실험을 해왔으며, 우연히 생긴 이 혼합물에 관해서도 어떤 테스트를 하면 좋은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단숨에 발견으로 도달했던 것이다.
이러한 많은 유사 세렌디피티적 발견과 대조적인 것은 진짜 세렌디피티적 발견으로써 이것은 우연한 행운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 그 우연을 만난 사람의 통찰력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을 말한다. '좋은 시간에 좋은 장소에 있을 때'라는 운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월폴이 세렌디피티를 설명했을 때 그는 '우연'과 '통찰력'에도 같은 비중을 두고 있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친구인 호레스 맨 경에게 세렌딥의 세 왕자가 "우연과 통찰력에 의해서 찾지도 않던 것을 노상 발견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명해 온 우연을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과가 뉴턴의 발 옆에 떨어진다. 뵐러가 시안산 암모늄이 아닌 요소를 만든다. 퍼킨이 보라색 색소를 만든다. 이태리의 샘을 파는 농부가 물 대신에 조상을 발견한다. 프랑스의 병사가 이집트의 요새를 수리하던 중에 이상한 비문이 새겨진 돌을 캐낸다. 팔레스티나의 소년이 어두운 동굴 속에 돌을 던졌을 때 뜻하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된다. 창문 옆 선반 위의 온도가 섭씨 26도 이하였기 때문에 파스퇴르가 특별한 형태의 결정을 얻는다. 빛이 날 리가 없을 때에 형광스크린에서 빛이 나고, 검은 종이로 싸인 형광성 결정이 사진건판을 노광시킨다. 우유를 짜는 여인은 무서운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골 의사가 발견한다. 플레밍이 열어놓았던 배양 접시 속에 포자가 떨어진다. 뒤퐁사의 화학자들이 연구소의 홀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장난치다가 늘어난 섬유가 몹시 질기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 뒤퐁 사의 다른 화학자가 봄베가 비어있는 것도 아닌데 가스가 나오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다.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누설되고 더러워진 기구 덕분에 고분자가 생긴다. 출발물질 중에 우연히 존재한 불순물이 새로운 분자 '크라운'을 만든다.
이러한 우연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쳐가고 중요하지도 않는 단순한 것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일을 마주친 사람들의 통착력 덕택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행성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 합리적인 원리를 발판으로 한 과학으로서의 유기화학의 확립,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활성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 왕족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아름다운 보랏빛 염료, 고대문명의 문화나 언어에 대한 안목, 의학의 진단이나 치료를 위한 X선, 방사능이나 핵 에너지, 천연두나 다른 병에 대처하는 왁친 접종, '마법의 약' 페니실린과 그 대용품들, 의류에 사용되는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 프라이팬이나 심장판막에 쓰는 테플론, 기타 플라스틱 쓰레기 주머니나 아이스박스, 레이다용 절연체, 수상스키의 로우프, 방탄 보호물, 항공기의 창 등에 사용되는 고분자 그리고 천연효소인 생명작용을 모방할 수 있다고 기대되는 합성분자 등이다.
이것들은 "그들(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추구하고 있지 않던 것을 우연과 통찰력에 의해서 발견한다"는 세렌디피티의 혜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수 세기 이전에 발견된 것이며, 또 어떤 것은 아주 최근의 것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과학, 의학, 기술에 우리의 지식은 눈부신 속도로 진보해 왔다. 미래에 어떠한 진보가 있을 것인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한 것은 혹성간 우주여행일까? 암 치료일까? 어떻든 확실한 것은 우연한 언제까지나 계속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며 지금까지보다 더 충분한 준비된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이러한 일들은 세렌디피티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훌륭한 발견과 발명으로 바뀌어 갈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