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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 이야기 2

15. 노벨 : 그의 인생과 발견 그리고 상에 얽힌 이야기

16. 상아와 견사를 만들다

17. 실험실의 우연에서 나온 새로운 화학공업

18. 노력하지 않고 고고학에서 성공한 경우

19. 천문학에서의 세렌디피티

20. 우연한 의학적 발명. 발견

21. X, 방사선 그리고 핵분열

22. 아무리 달아도 살이 찌지 않는다

23. 깨질 때 파편이 흩어지지 않는 안전유리

 

 

 

 

15. 노벨 : 그의 인생과 발견 그리고 상에 얽힌 이야기.

 

이 책에서 설명한 세렌디피티적인 발견자 중에는 대부분이 노벨상으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이 상을 설립한 노벨 자신도 세렌디피티덕을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발명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은 노벨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그 결과 노벨의 특별한 성격과 어울려서 상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매년 노벨상의 뉴스는 전 세계를 휩쓸고, 그 수상자들은 매우 유명해짐에도 불구하고 정작 노벨이라는 인물과 그의 인생과 발명 그리고 그의 사상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선구자적인 발명가로, 그리고 공업계의 거물로서도 좀 더 잘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노벨은 생전에 이미 막대한 부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질병, 비극, 고독, 우울증의 각인이 찍혀져 있었다. 일찍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인명이나 재산을 파괴하는 폭발물을 개발한 그가 그 유산으로 후세를 위해서 과학, 의학, 문학, 평화 등의 분야에 인류의 귀중한 문화적 진가의 옹호자가 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알프레드 베른하르트 노벨은 1833년 스톡홀름에서 출생했으며, 그해 부친인 임마뉴엘 노벨은 파산을 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허약했다.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모친이 특별히 소중하게 길렀던 은혜 덕분이었다. 네 명의 형제 중에서 알프레드는 모친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으므로 그 역시 특별한 사랑으로 모친에게 보답하였다. 그의 부친은 독학한 발명가이자 기술자였으나 자신의 권익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일도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사업에 실패했을 때 채무자로서 투옥될 것을 두려워한 부친은 아내와 세 아들을 두고 핀란드에서 러시아의 페테르브르크로 도망쳐 그곳에서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몇 년 후 러시아 정부의 군용 폭발물로 성공하여 공장의 공동소유자가 된 임마뉴엘은 가족을 페테르브르크로 불러들였다. 알프레드는 스톡홀름에서 정식 학교 교육을 2년 정도밖에 받지 않았으나 그래도 학급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었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부친의 경제력 덕분에 알프레드와 그의 형들은 가정교사까지 둘 수 있었으나 이와 같은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1856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정부는 해군의 수뢰를 제조하고 있었던 임마뉴엘 노벨의 공장에서 손을 떼, 임마뉴엘은 두 번째 파산을 했다. 이때 그는 알프레드와 두 형 로베르트와 루드비히를 러시아에 남기고 처와 막내아들 에밀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알프레드는 이미 러시아인 교수와 화학을 연구하였고, 실용적인 기계와 공학 짓기에 관해서는 이미 부친의 공장에서 배웠었다. 알프레드는 페테르브르크의 공장을 구하기 위한 자금조달을 위해 파리로 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1861년에 알프레드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몇 년 전에 이태리 화학자 아스타니오 소브레로에 의해서 처음 합성된 새로운 액체 폭발물 니트로 글리세린을 제조하는 부친의 일을 도왔다. 파리의 두 번째 여행에서는 스웨덴에서 소규모의 제품 생산을 다시 시작할 만한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2년 후 알프레드가 30세 때, 그의 중요한 발명 중에 하나인 니트로 글리세린 폭약 기폭용으로 뇌산수은의 뇌관을 발명하여 특허를 얻었다. 그 발명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스톡홀름 교외의 헬레네보그에 있는 부친의 낡아빠진 실험실과 공장에서 실시된 50회 이상이나 되는 피땀 어린 실험의 성과였다. 비극은 18649월에 일어났다. 폭발로 작은 공장이 망가지고 알프레드의 아우 에밀 노벨을 포함하여 5명이 숨졌다. 이 비극이 계기가 되었는지 부친 임마뉴엘 노벨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8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신체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것이 또 알프레드에게 니트로 글리세린을 안전하게 제조하고 수송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가업의 모든 책임은 그의 양어깨에 얹어져 있었다. 그는 철도망을 넓히기 위해 산에 터널을 뚫을 때에 폭약에는 흑색 화약보다도 니트로 글리세린 쪽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스웨덴의 국철에 납득시킬 수가 있었다.

공장을 폭발 사고의 위험 때문에 니트로 글리세린 공장이 가깝게 오는 것을 모두 싫어하여, 실제로 스톡홀름시는 시내에 공장 만드는 것을 허가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굴하지 않고 호수에 정박한 거룻배 위에 공장을 만들었다. 얼마 후, 스톡홀름의 부유한 상인 J. W. 스미트의 원조로 스톡홀름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공장을 세워 그곳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을 50년 이상이나 제조하였다. 두 번째의 공장은 독일의 함부르크 근처에 있는 크륨멜에 세워졌다. 이것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이 널리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시에라 네바다 산지를 횡단하는 중태평양 철도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 사고가 발생했으나 광산과 터널공사에 소비되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절약되었다. 그 때눈에 매우 강력한 이 액체는 한동안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이 성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는 니트로 글리세린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하였거나 설명을 무시하였기 때문이가도 하지만, 무엇보다 니트로 글리세린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안정성 때문에 전 세계에서 비참한 폭발시간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폭발의 민감도 때문에 니트로 글리세린을 흔히 '변덕쟁이'라고도 했다. 깃털로 살짝 건들기만 해도 폭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함부로 굴리거나 부적당하게 사용해도 아무렇지도 않기도 했다. 그래서 가죽구두에 발라서 광을 낸다거나 마차의 굴대에 윤활유로 사용했다는 보고도 있다. 마지막 재난은 1866년의 폭발 사고로, 이 사고로 말미암아 크륨멜 공장이 파괴되었다. 그 때문에 노벨은 더욱 열심히 니트로 글리세린을 안정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에 성공함과 동시에 다이나마이트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노벨이 이 '변덕쟁이' 니트로 글리세린을 얌전하게 길들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모색한 사실에는 다른 설은 없다. 그는 니트로그리세린에 메탄올을 발라 두었다가 폭약으로 사용하기 전에 물로 씻어서 메탄올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용적이지 못했다. 노벨은 다음 방법으로 톱밥이나 목탄, 종이, 심지어는 벽돌 가루 등 분말상이나 섬유상의 물질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 모두 불만족스러운 것뿐이었다. 가연성 물질은 니트로 글리세린과 섞어두면 발화되기 쉬웠고 벽돌가루와 같은 불연물은 폭발력이 떨어졌다. 어떤 설에 의하면 니트로 글리세린의 금속성 용기에 구멍이 뚫려 그 속에 있던 액체가 새어 나와 금속용기 주위의 패킹에 배어 있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이 패킹의 재료는 규조토로서 독일 북부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값이 싸고 가벼운 다공성 광물이었다. 노벨은 용기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이 새어 나와 규조토와 밀가루 반죽처럼 혼합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그가 실험 삼아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을 압축하면 액체의 폭발력을 유지한 채 작은 덩어리로 만들 수 있으며, 더구나 뇌관으로 기폭 시킬 때까지 안전하여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노벨은 열심히 추구하던 문제의 해답을 알아낸 셈이 되고 이것은 유사 세렌디피티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가 우연히 탄생했다는 이 설에 대해 납득할 만한 반증이 있다. 노벨 자신이 소리 높여 부정하고 있으며, 신중한 과학적 실험 결과 이상적인 흡착제로서 규조토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된다. 욕심 많고 비양심적인 장사꾼을 상대로 많은 거래를 해 왔으나 노벨 자신은 누가 보더라도 완고할 정도로 정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발명 후 수년간 또 새로운 발명을 했으며, 그의 폭약 젤라틴의 발명은 계획적이자 또 어느 정도는 우연이기도 했다. 폭약 젤라틴을 발명한 1875년에 있었던 사건을 노벨 자신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어느 날 나는 실험실에서 유리조각에 손을 벴다. 당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다친 손가락에 콜로디온을 발랐다. 콜로디온이란 니트로 셀롤로오스를 에테르와 알콜의 혼합용액에 녹인 끈적끈적한 액체이다. 이 용액은 용매가 증발한 후 상처를 일시적으로 덮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매우 인화성이 강하여 실제로 셀롤로오스의 니트로화의 정도를 더 높이면 강력한 폭약이 되는데, 이것을 면화약이라고 한다.

그날 밤, 손가락의 통증으로 잠이 오지 않자 예전에 생각해 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현안 즉, 니트로 셀롤로오스와 니트로 글리셀린을 결합시켜 무엇보다 강력하고, 안전한 폭약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면화약을 실험해 보았으나 니트로 글리세린과 잘 섞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친 손가락의 콜로디온에서처럼 니트로화의 정도를 낮추면 니트로 글리세린과 잘 섞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새벽 4시에 급히 실험실로 가서 여러 비율의 콜로디온과 니트로 글리세린을 섞어서 실험을 시작했다. 조수가 실험실에 나타났을 때 노벨은 당시 알려졌던 매우 강력한 두 종류의 폭약으로 만든 투명한 젤리와 같은 혼합물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실험해 보았더니 실제로 이 결합물은 어느 쪽 단일 성분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했던 실험을 주의 깊게 되풀이하여 강력하고 안전한 최적의 처방법을 결정한 노벨은 폭약 젤라틴의 특허를 1875년에는 영국에서, 또 다음 해에는 미국에서 취득했다.

노벨 자신이 우연히 손가락을 다쳐 콜로디온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문제에 관련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폭약 젤라틴의 발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세렌디피티의 또 다른 일면으로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아이디어에 중요한 가능성이 있다고 깨달으면 노벨처럼 즉각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나 폭약 젤라틴처럼 니트로 글리세린의 안전한 형을 발전시키고 더욱 개량을 거듭해서 특허를 취득하게 됨으로써 노벨의 폭약사업은 군사적 및 비군사적 이용의 양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스위스의 알프스와 고탈, 심프론, 알베르크 등을 관통하는 터널은 새로운 젤라틴 다이너마이트류의 강력한 폭발력 없이는 도저히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해설) 알프레드 노벨은 엄청난 대부호가 된 후에도 내내 고독했으며 괴팍한 성질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기로는 그가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그것이 내년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올린 사람들을 표창하는 상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독자 여러분은 왜 그 많은 재산이 그의 자손에게 넘겨지지 않고 이와같은 목적으로 쓰이게 되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노벨은 일생동안 병약했다. 때로는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1896년에 사망할 때까지 모친 외에 친숙한 여성이 있었는지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때문에 그는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었다. 50년 이상 지난 후에야 그의 인생에 중요한 여성이 모친 외에 세 사람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그 중의 한 여성에 관한 정보는 관계자가 사망한 후인 1950년까지 노벨 재단의 문서철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초의 여성은 노벨이 18세 때 파리에서 만난 소녀인 것 같다. 노벨은 젊었을 때 시를 쓰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그의 연인이 되어 그때까지 사막과 같이 황량했던 그의 인생에 크나큰 행복이 깃들었고 '둘이서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소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마도 그에게 최초의 고통스러운 절망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의 이 슬픈 사랑이 다정다감한 청년 노벨의 인생을 결정 지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노벨은 43세 때 또다시 파리로 갔으나 비서 겸 가정부가 필요했다. 그의 광고에 베르타 킨스키라는 현명하고 매력 넘치는 젊은 여자 백작이 응모해 왔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난하지만 고귀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가 파리에 와서 노벨한테서 일자리를 얻은 것은 그녀가 아더 폰 수트너라는 빈의 젊은 귀족과 연애 중이었는데 그의 가족이 그들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인인 데다가 총명했고 음악과 어학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어 알프레드 노벨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노벨이 그녀를 비서로 고용했을 당시에는 연애 감정이 없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금세 그녀의 포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하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다"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 의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생애를 통한 우정이 싹텄다. 베르타는 파리에 잠시 동안만 있다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가족의 동의를 얻은 폰 수트너와 결혼했다. 그 후 베르타 폰 수트너는 열렬한 국제평화운동의 제창자가 되었다. 노벨도 이에 관심을 같이 했으나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의견을 달리했다. 노벨은 그 후에도 베르타와 서신 교환을 계속하였으며, 평화상을 제정하는 데 있어 그가 남긴 유언에 반영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녀가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르타 폰 수트너는 1905년 이 노벨평화상의 다섯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베르타가 파리를 떠난 잠시 후에는 세 번째의 여성이 노벨 앞에 등장했다. 그녀는 아마도 노벨이 가장 정열을 쏟았던 여성이었으며, 반면에 또 가장 실망을 안겨주었던 여성이기도 하다. 1876년 가을, 노벨이 43세 때 오스트리아의 휴양지에 체재 중인 그를 도와주고 있는, 사업상 알고 지내는 사람의 부인에게 줄 꽃을 사기 위해 꽃집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소피 헤스라고 하는 유태인 노동자의 딸인 20세의 아담한 미인과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많은 편지나 서류는 1950년에 밝혀졌는데, 그것에 의해 친밀한 교재를 통해 가정에서의 평안과 휴식을 얻으려고 하는, 교양과 자제심과 부를 고루 갖춘 총명한 남성과 매력적이지만 인생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교양 없고 자제심도 없는 젊은 미인과의 정상적이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폭로되었다. 노벨은 그녀를 처음에는 파리의 훌륭한 아파트에 살게 하다가, 나중에는 빈 가까이에 있는 이슐의 별장에서 하인을 두고 살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사업으로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은 혼자 내버려 두었다.

행복한 시기가 얼마만큼은 계속되었으나 운명이 정해져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18년 후에 예상했던 대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피 노벨 부인(공식적인 결혼은 안 했으나 알프레드에게 온 수백 통의 편지 겉봉에는 그와 같이 쓰여져 있다)은 유럽 주변의 좋은 휴양지에서 젊은 추종자들과 지내게 되었다. 노벨은 방자하고 놀러만 다니는 말괄량이를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성이 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그것마저 실패로 끝났다. 소피는 드디어 젊은 헝가리 장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그에게 고백했다. 노벨은 결국 소피의 교육을 체념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충분한 연금을 지불하였다. 소피는 그 헝가리인 장교와 결혼을 하기는 했으나 함께 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노벨이 18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로부터 돈을 빼앗아 갔다. 그 후에도 그녀는 유서에 정해졌던 금액보다도 더 많은 돈을 갈취하였고, 만일 그것이 안 되면 노벨이 그녀에게 보낸 216통의 편지의 출판권을 매각한다고 협박했다. 오랜 교섭 후 소피는 편지를 모두 돌려주는 대신에 노벨 생전에 그에게 받아 왔던 연금을 계속해서 받는다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이탈리아의 산레모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1896년 사망했다. 노벨은 생의 후반기에 몇 번인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협심증으로 괴로워했다. 죽음 직전에 쓴 그의 편지에는 "니트로 글리세린을 내복하라는 지시를 받다니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약제사나 대중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트리니트린(Trinitrin)이라고 부르고 있지만"이라고 적혀있었다. 노벨은 사망하기 전 2년 동안은 우울증이 없어진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인 보장을 한다는 조건으로 소피와의 관계를 청산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산레모의 별장이 마음에 들었으며, 스웨덴의 보폴스 공장을 사들였을 때 인접한 장원 영주관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 실험을 위한 연구실을 만든 일도 있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젊은 조수 라그너 숄만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는 후에 노벨의 유언 집행인이 되었다.

1895년 가을, 노벨은 2개월간을 파리에서 보내고 노벨재단과 노벨상의 기초가 되는 유언을 세밀하게 작성했다. 그는 이것을 변호사의 도움없이 혼자서 스웨덴어로 썼다. 이 유언과 재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 때문에 곧 화제의 선풍을 일으켰으며, 그의 유언이 실현되기 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그가 사망했을 때는 처도 자식도 없었으며 그의 모친과 형제도 모두 사망하고 아무도 없었다. 조카나 그의 가족에게는 타당한 금액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재산은 유언집행인에 의하여 안전하게 투자되어, 그 이자는 매년 그전 해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최대의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수상하기로 한다. 또한 이자는 5등분 하여 아래와 같이 분배할 것, 즉 일부는 물리학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한 사람에게, 또 일부는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 또는 개량을 한 사람에게, 일부는 생리학 또는 의학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그리고 일부는 국가간 우애의 촉진이나 상비군의 폐지나 삭감 및 각종 평화회의의 개최나 진전에 가장 많은, 또는 가장 뛰어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할 것.

노벨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인 국가적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유서가 공개되자마자 비난을 받았다. 스웨덴의 언론은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국제적 활동 쪽을 존중한다는 것은 애국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노벨이 평화상의 전형을 노르웨이 의회에 맡긴 것은 당시의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긴장된 관계 때문에 더욱 불쾌하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유언집행인과 가족과의 격심한 의논이 있은 후 상의 운영은 스웨덴 정부의 관리하에 두기로 하되 수상자의 지명과 전형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기로 한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뜻에 따른 형태로 노벨재단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수상은 1901년에 있었다. 노벨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사후 기증에 의해서 그가 자기 인생에서 할 수 없었던 것, '인류의 복지에 최대의 공헌'을 할 것과 특히 '국가간의 평화와 우애를 조장'할 것을 희망했다. 가장 강력한 군사용 폭발물을 발명하여 팔면서도 그는 그것들이 전쟁을 방지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1892년에 베르타 폰 수트너가 노벨에게 스위스에서의 평화회의에 참가하도록 요청했을 때 노벨은 이를 거절하면서 "나의 공장이 오히려 당신들의 회의보다도 빨리 전쟁을 종결시킬지도 모릅니다. 두 패의 군대가 서로가 서로를 한순간에 파괴시킬 수 있게 된다면 모든 문명국은 전쟁을 두려워하게 되어 군대를 해산시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것은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 노벨의 다이너마이트나 폭약 젠라틴의 강력성을 비교해 볼 때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원자폭탄이 발명되었으며, 그 후 개발계획에 관여한 사람들로 구성된 원자과학자협회는 미국과학자협회(FSA)로 발전했다. 그 주된 목적은 국제 군비 관리이다.

 

 

16. 상아와 견사를 만들다.

 

셀롤로이드. 합성 플라스틱으로 처음 성공한 것은 셀룰로이드로서 처음에 이것은 당구의 상아공 대용품으로 개발되었다. 1863년에 당구공의 재료로 당시 가장 애용되었던 상아가 아프리카의 야생 코끼리의 감소에 따라 매우 부족되는 사태가 일어났다(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중요시 되었다는 것은 심히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당구공의 대규모 제조업자가 상아 대용품 발명에 상금을 내걸었다. 미국 뉴저지주의 인쇄업자 존 훼슬리 하야트와 그의 아우 이사이아는 여러 가지 재료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 하나는 톱밥과 종이의 혼합물을 풀로 굳힌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을 하는 도중에 하야트가 손가락을 다치자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콜로디온을 찾아 선반 앞으로 갔다(콜로디온이라는 것은 니트로 셀룰로오스를 에테르와 알콜에 녹인 것으로서 그 당시 이러한 목적에 흔히 사용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이 이와 비슷한 경험으로 폭탄 젤라틴을 발명한 이야기는 제15장을 참조할 것). 그런데 콜로디온의 병이 쓰러져서 내용물이 흘러나와 있었다. 그리고 용매가 증발했기 때문에 선반 위에는 니트로 셀롤로오스가 굳어서 얇은 판으로 변해있는 것을 보았다. 하야트는 톱밥과 종이의 혼합물을 굳히는 데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풀보다도 콜로디온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험을 시작한 하야트 형제는 니트로 셀룰로오스와 방충제로 쓰이는 장뇌를 알콜에 섞어서 압력을 가하면서 가열하면 당구공으로 적당한 플라스틱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노벨의 경우는 니트로 셀룰로오스와 니트로 글리세린으로 폭약 젤라틴을 만들었다). 장뇌는 니트로 셀룰로오스의 폭발성을 많이 완화시켰음에는 틀림없으나 그래도 셀룰로이드로 만든 당구공은 이따금씩 폭발을 했다. 하야트 형제는 당구공 대용품의 현상금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 폭발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니트로 셀룰로오스와 장뇌로 만든 자신들의 플라스틱을 '셀룰로이드'라고 이름을 지어서 1870년에 특허를 취득했으며, 이것은 오히려 다른 용도로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경에는 셀룰로이드는 남성용 와이셔츠 칼라나 소매의 손목 부분에 사용되기도 하고 또 성형 의치를 만드는 틀, 나이프의 자루, 주사위, 단추 또는 만년필 등에 사용되었다. 후에 그것들은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바뀌었으나 그래도 나는 어렸을 때 조그마한 포켓용 달력, 카드 등이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졌던 것을 그 장뇌의 냄새를 통해 기억하고 있다.

 

레이온. 콜로디온이 병에서 흘러나온 것이 우연히 발견되어 성공을 거둔 것처럼 또 하나의 아이디어로는 최초의 실크 대용품이 있다. 파스퇴르가 심각한 누에의 전염병으로부터 프랑스의 실크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무렵, 그의 조수인 이렐 샤르돈네라는 젊은 화학자가 있었다. 이 누에 문제의 경험에서 샤르돈네는 실크의 대용품 개발이 강력하게 요망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78년 그가 암실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콜로디온이 담긴 병이 엎질러졌다. 잠시 후에 그가 닦아내려고 했을 때, 용매는 일부 증발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닦아내자 길고 가는 실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이 실이 실크와 비슷하므로 샤르돈네는 콜로디온을 계속 연구하기로 했다.

이 우연한 사건이 있은 후 6년이 지나 샤르돈네는 인조견을 개발했다. 그는 누에의 천연 먹이인 뽕잎에서 채취한 펄프를 에테르와 알콜에 녹여서 콜로디온을 만들어 실로 뽑아내고 더운 공기로 굳게 했다. 이 새로운 합성섬유로 짠 천은 1891년 파리 박람회에 성공적으로 전시되어 그 즉시 재정 지원을 받았다. 이 새로운 섬유는 '인조 견사'라고 명명되었고, 그 후 1924년경부터는 레이온(rayon)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해설) 샤르돈네의 레이온은 발화온도가 매우 낮았다. 나중에 면을 실크 비슷한 잘 타지 않는 섬유로 바꾸는 다른 공정이 개발되어 최초의 레이온인 니트로 셀룰로오스는 더 이상 직물용 섬유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니트로 셀룰로오스는 스틸 사진과 상업 영화 양쪽의 사진용 필름으로 한때 사용되고 있었으나, 그 가연성 때문에 몇 번인가 영화관에서의 비참한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영사기가 고장나서 강력한 광선의 통로에 필름이 몇 초 동안 멎어 있기만 해도 인화될 정도였다. '안전필름'으로서 수년 전부터 사용하게 된 것은 아세테이트 셀룰로오스이다. 면과 실크의 외견상의 차이는 제각기 짠 실이 달라 면실은 오글오글한 데 비하여 실크실은 누에에서 나온 그대로 매끄럽다. 이 매끄러움이 실크의 독특한 광택이다. 샤르돈네의 레이온이 실크와 비스한 것은 면이나 목재의 셀롤로오스가 에테르와 알콜에 녹아서 화학적으로 다른 형(니트로 셀롤로오스)이 되는데, 이 점도가 높은 용액에서 다시 매끄러운 실로 뽑아내기 때문이다.

새로운 레이온으로 다음에 성공한 것이 크산토겐산 레이온과 아세테이트 레이온이다. 크산토겐산 레이온이라는 이름은 셀롤로오스가 화학적으로 다른 형인 가용성 크산토겐산 셀룰로오스로 바뀌는 과정에서 따왔다. 크산토겐산 셀룰로오스으 점도가 높은 용액이 아주 작은 구멍으로부터 밀려나와 매끄러운 실이 되는 과정에서 화학작용으로 인해 원래의 셀룰로오스로 바뀌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효과는 오글오글한 셀룰로오스 섬유에서 매끄러운 실크와 같은 섬유가 되는 물리학적인 형의 변화이며 이 레이온은 사실상 재생된 셀룰로오스인 것이다. 아세테이트 레이온은 처음에 샤르돈네가 만든 레이온과 비슷하다. 셀룰로오스는 아세테이트 에스테르로 변하며 이것은 질산 에스테르(니트로 셀룰로오스)와 마찬가지로 가용성이며, 매끄러운 실을 뽑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니트로 에스테르는 아세테이트 에스테르와 달라서 타지 않는다. 현재 섬유산업에서는 레인온의 주류인 크산토겐산 레이온(비스코스 레이온)과 혼동되지 않도록 아세테이트 레이온을 '아세테이트'라고 통틀어 말한다. 만일 상표에 '레이온'이라고만 쓰여 있으면 그 재료는 대개 크산토겐산 레이온이다.

아세톤과 같은 유기 용매를 사용하는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여기서 주의를 환기시켜 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세테이트'는 유기 용매에 어느 만큼은 녹기 때문에 그와 같은 용매의 접촉이 가능한 환경에서는 아세테이트로 만든 옷을 입지 않는 것이 좋다. 보통의 '레인온'(크산토겐산 레이온)은 화학적으로는 면과 같기 때문에 유기용매에는 녹지 않는다. 그 후 레이온보다도 훨씬 실크를 닮은 합성섬유가 여러 가지로 개발되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실크보다 우수했다. 월러스 카로더스와 뒤퐁사에 속해 있는 그의 그룹이 1930년대에 개발한 나일론은 그런 섬유의 하나이다. 신세대의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새로운 합성섬유가 개발되어 직물에 많은 용도로 레이온을 대신 하게 되었다(나일론의 발명은 25장을 참조할 것. 테럴린, 테이크론 등 폴리에스테르에 관해서도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천연 실크를 흉내내거나 보다 좋은 것을 만들려고 한 시도는 샤르돈네의 인조견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17. 실험실의 우연에서 나온 새로운 화학공업.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이란 두 사람의 화학자 샤를 프리델과 제임스 M. 크라프츠에 의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이 반응의 발견은 두 사람이 1877년 파리의 프리델 연구실에서 실험 중에 예상 밖의 결과를 얻은 데서 비롯되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는 그들의 우연한 발견에 실용적인 중요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탄화수소와 케톤류의 합성법을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특허를 취득했다. 그들의 판단은 그야말로 적중했다. 그것은 유기화학 반응 중에서 실용상 이 반응보다 중요한 반응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라고 해도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이옥탄가 가솔린, 합성고무, 프라스틱, 합성 세제 등의 제조는 모두 '프리델-크라프츠 화학'의 응용인 것이다.

크라프츠는 1839년 보스톤에서 태어났다. 19세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한후 채광학을 1년간 공부했으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야금학을 배우고 있는 동안에 화학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로버트 빌헬름 분젠과 파리대학의 샤를 아돌프 부르츠의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부르츠의 여구실에서 사를 프리델을 만난 크라프츠는 1861년부터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크라프츠는 1865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서 광산 검사관으로 근무한 후, 마침 그 무렵 설립된 코넬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3년 후에는 메사추세스 공과대학(M.I.T)으로 옮겨 교육과 연구에 많은 개혁을 했다. 1874년에 건강이 나빠져 파리로 돌아갔으며, 부르츠의 연구실에서 프리델과 공동연구를 재개했다.

크라프츠는 M.I.T로 곧 돌아갈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기후가 바뀐 것과 또 하나는 아마도 프리델과 함께 발견에 대한 흥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건강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7년간 파리에 머물렀다. 1877년부터 1888년까지 프리델과 크라프츠는 염화알루미늄과 유기화합물의 반응에 관련하여 50가지가 넘는 논문과 특허를 냈다. 1884년에 부르츠가 사망하자 프리델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유기화학 교수와 연구 주임 자리를 인수 받았다. 프리델은 프랑스 화학회의 창시자이며 그 회장직을 4기 동안 맡아왔다. 1891년에 크라프츠는 M.I.T.로 돌아와서 교수로 복귀하여 1897년에는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육과 연구의 수준을 높임으로 해서 M.I.T.를 유럽의 대학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시도했다. 3년 후에는 실험실에서의 연구에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학장직을 사임하였으며, 1917년에 78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 두 사람은 모두 학계나 대학의 관리 운영 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과 공업의 역사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역시 그들이 발견한 반응에 의해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연구의 계기가 된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로 하자. 그들은 염화알루미늄을 알루미늄과 요오드로 처리해서 요오드화알루미늄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리고 이 예상외의 결과는 알루미늄 대신에 염화알루미늄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유기염화 화합물과 어떤 종류의 금속(예컨대 아연)과의 반응으로 유사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거기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으며, 반응물이나 촉매로서 금속염화물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는 금속염화물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비로소 증명했다. 그들은 프랑스 화학회에 자기들이 발견한 것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유기염화물에서 염소 한 개를 제거하고 탄화수소에서 수소 한 개를 제거한 나머지를 조합해서 생기는 탄화수소를 고수율로 생성시키는 방법을 확립했다. 이 방법에 의해서 에틸벤젠이나 아밀벤젠 또는 벤조페논 등을 얻을 수 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는 예상외의 결과가 여러 종류의 탄화수소류나 케톤류(벤조페논은 케톤의 일종으로 그들의 새로운 반응으로 얻을 수 있는 제2의 중요한 화합물군이다)의 합성법이 된는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실험으로써 이를 증명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의 방대한 연구논문과 특허는 유기화학의 새로운 연구분야와 실험법을 확립하여 더구나 현대 화학공업에 매우 중요한 몇 가지 기초 과정을 구축했던 것이다.

'프리델-크라프츠 화학'을 복잡하고 전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우리들의 생명에 여러 중요한 형태로 관계되고 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상공에서의 전투에서 비행사에 의하여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인류 분쟁의 역사에 있어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성과가 이토록 소수인에 의해서 달성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이 공중전에서의 승리는 단지 영국 공군의 비행사의 수완과 용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항공기 연료의 우수성에도 있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전투기는 영국군이나 미국군의 전투기보다 우수했으나 연료는 그렇지 못했다. 영국군이나 미국군의 비행기가 사용한 항공기 연료 덕택에 그들은 성능면에서 결정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연료가 프리델-크라프츠 화학의 직접 산물이었으며 톨루엔이라든가 기타 알킬화 방향족 탄화수소를 함유하고 있었다.

그와 마친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천연고무의 공급원이 단절된 연합군에게 합성고무는 지상전의 사활문제였다. 자동차, 항공기용의 타이어는 필수품이었다. 정부와 생산업자, 과학자 및 기술자의 협력에 의하여 합성고무는 매우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그것은 스틸렌(styrene)으로 만들어졌으며 GRS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것은 스틸렌형 정부고무(Govenment Rubber, Styrene type)의 앞글자에서 따왔다. 또한 이것은 스틸렌과 부타디엔(C4H6)의 공중합물인데 공중합물이란 2종류의 단량체(모노머)의 혼합물을 중합시켜서 만든 고분자 화합물(폴리머)로서 이 경우 스틸렌과 부타디엔은 단량체이다. 아크릴로니트릴(C3H3N), 부타디엔, 스틸렌으로 만들어진 중합체(ABS)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이것은 스틸렌-아크릴로니트릴 공중합물의 강도와 스틸렌-부타디엔 공중합물의 유연성을 어느 정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행가방이나 자동차 부품에 사용되어 왔다. 스틸렌만으로도 중합이 일어나며, 단순히 폴리스틸렌이라고도 하는 이 폴리머의 용도는 매우 넓다. 성형을 하게 되면 라디오, 전지, 완구등의 케이스나 기타 온갖 종류의 용기로 사용할 수 있다. 폴리스틸렌폼(스티로폼)은 단열성이 우수하고 가벼워서 건물의 단열제로 사용되기도 하고, 성형해서 아이스박스나 뜨겁거나 찬 음료의 일회용 컵으로도 사용된다. 최근에 발전한 스티로폼의 용도로는 옥외 광고용 조각이 있다. 1982년에 제조된 폴리스틸렌 제품은 180만톤 이상이나 되었다.

합성세제는 현재 우리의 생활에 혁명을 가져왔다. 식기 세척이나 의류 세탁용이 이것이며 비누와 달라서 경수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샴푸의 주성분도 바로 이것이다. 생분해성 합성세제의 대표적인 예는 도데실벤젠설폰산염이며, 곁가지가 되는 12개의 탄소는 프리델-크라프츠의 알킬화반응으로 인해 벤젠 분자에 소속된다. 아스피린(29장 참조)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페놀은 이소프로필벤젠[쿠멘(cumene)이라고도 한다]으로 제조하는데 이 이소프로필벤젠은 벤젠과 프로필렌과의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으로 만든다. 매년 4,000만 파운드(18,000)이상의 아스피린이 미국에서 제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1인당 300정에 해당된다. 프리델과 크라프츠가 1877년에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었던 것이 그들의 통찰력에 의해서 설명되고 발견된 지도 약 1세기가 지났다. 앞에 열거한 것들은 그동안의 실용적인 용도 중에서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G.A. 올라와 R. E. A. 디어는 그들의 저서 '프리델-크라프츠와 관련 반응들'(1963)에서 "많은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우연의 선물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발견한 것을 놓치지 않고 발전시키려면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 예민한 관찰력과 창조력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라고 술회했다.

(해설)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 교수가 되고 나서 수년 동안 나는 그해 여름을 오크릿지 국립연구소에서 지내면서 방사성 탄소(14C)를 유기화학의 연구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공부했다. 방사성 탄소는 원자력 에너지 계획의 부산물이다. 이것의 원자를 유기분자 속에 도입하여 특수한 기기로 검출하면 그 방사성 때문에 그것의 존재와 심지어 그 위치도 알 수 있다. 오스틴대학으로 돌아온 후 이 새로운 기술을 연구에 활용해 보았다. 내가 선택한 주제는 독일의 화학자들이 1892년에 보고한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에서의 14C 추적 실험이었다.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에 관한 당시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인 화학자들의 결과에는 의문이 있었으며 실험적 증거는 신빙성이 부족했다. 새로운 실험 기술을 사용하면 그들의 결과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기술로는 적외선 분석과 가스 색층 분석, 이상 두 가지가 고려되었다. 둘 다 신뢰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14C 방사 화학 분석보다 간단했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14C 방사 화학법에 흥미를 더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사용해서 예전의 연구를 다시 한번 조사해 보기로 했다. 대학원생인 스탠리 브란덴버거가 실험을 도와주었다.

만일 우리가 적외선 분석이나 가스 색층 분석을 사용하였다면 이전의 연구 결과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14C 트레이서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분자 재배치를 발견했다. 우리가 사용한 14C 표지분자는 보통의 방향족 탄화수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발견에 학문적 의미가 있다 치더라도 실용적 가치는 없었다. 그러나 이 14C 표지분자에 의한 발견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보통의 방향족분자에서도 유사한 분자 재배치를 찾아냈다. 그 결과물 중에는 실용상 중요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화학 문헌 중에서 잘못된 보고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바로 잡기도 하고 그 외에도 의문이 되어있는 결과를 설명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연히 발견한 이 '알킬벤젠 재배치'의 연구는 우리들의 장기간에 걸친 연구 주제가 되었으며, 게다가 과학에 있어서 세렌디피티의 온갖 예에 관한 나의 무한한 흥미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18. 노력하지 않고 고고학에서 성공한 경우.

 

고고학자이자 고고학자의 아내인, 그리고 고고학자의 모친이기도 한 메어리 리키는 "고고학의 역사상 계획에 의해서 발견된 경우는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고학상 유명한 발견은 대부분 역사적으로 흥미가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렌디피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헤르큘라네움이나 품펴이의 로마제국이나 중국 중부의 서안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초대의 중국 황제 등에 의해서 번영했던 고대문명과 프랑스의 라스코나 오리냑의 동굴 속의 벽화나 지중해의 해저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배 등에서 대표되는 선사시대의 문명, 그리고 또 덴마크의 톨론드인, 독일의 네안데르탈인, 남아프리카의 타웅 차일드 등 고대 또는 선사시대의 인류와 사해문서에 의해서 빛을 보게 된 종교의 역사나 자료, 이것들은 모두 세렌디피티적 발견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뜻밖에 얻은 보물.

헤르큘라네움과 폼페이 : 서기 79년 이탈리아 서남부에 있는 베수비어스 화산이 분화하여 헤르큘라네움과 폼페이의 도시가 묻혀버렸다. 용암과 화산재가 너무 빠른 속도로 대량으로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화산 가까이에 있던 도시의 주민과 건물은 그대로 생매장 되었던 것이다. 1709년 헤르큘라네움 유적지 위에 해당되는 농지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대리석 조각의 파편 하나를 캐냈다. 이것을 알게 된 이탈리아의 왕자가 이 토지를 사들여 일꾼을 보내서 종갱(수직으로 파고 들어가는 굴)을 연장시켜 판 다음 수평으로 파게 했다. 그 결과 손상하나 없는 여성상을 몇 구 발견하였으며, 종갱은 헤르큘라네움 극장을 관통했다. 매몰되었던 도시의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하자 찰스 3세는 스페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발굴하게 하였으며, 모든 재보를 자신을 위해서 만든 개인 박물관으로 옮기게 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시에 프랑스 정부가 실시했던 조심성 없는 발굴도 그 이전에 이탈리아인들의 발굴에 지지 않을 만큼 철저했다. 프레스코 벽화나 조각품들은 사원에서 가지고 가버렸으며 건물은 상할 대로 상한 채 방치되었다.

1860년 빅토리오 엠마뉴엘 2세가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자 로마의 위대한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힌 그는 폼페이의 역사에 조예가 깊은 쥬세피 피오렐리 교수의 지휘하에 조심스런 폼페이 발굴을 원조하고 나섰다. 피오넬리는 용암에 에워싸인 희생자의 시체가 수 세기 동안에 부식해서 생긴, 속이 비어있는 빈 껍질로 석고모형을 만드는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껍질에 석고를 흘려 넣고 석고가 굳은 후에 경석(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된 가벼운 돌)과 재로 된 주형을 조심스럽게 부셔내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희생자의 모습이 죽음을 맞이했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폼페이의 4분의 3이 발굴 정리되어 그 중에는 두 개의 극장과 광장이 포함되어 있다. 도시의 나머지 부분은 현재 이탈리아 도시의 집이나 뜰 밑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베수비어스산은 현재도 이따금씩 연기를 내뿜고 있으며 마지막 대규모 분출은 1944년에 있었다.

 

중국 진 시황제 무덤 : 1974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우물을 파는 공사 중에 또 다른 고대문명이 발굴되었다. 농민들이 캐낸 것은 초벌구이를 한 실물 크기의 인물상의 일부였다. 그것은 기원전 221년에 통일 중국의 초대 황제라고 스스로 선언한 진나라의 시황제 능 가까이에서 발견되었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구축한 제국의 북쪽 국경을 몽고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한 인물이다. 우물 주변 발굴을 계속해 보니 일련의 지하 건조물이 나타나 이것들은 고고학상 매우 훌륭한 발견 중의 하나가 되었다. 4에이커(16,000평방미터) 정도의 제1갱에는 실제 인물 크기로 초벌구이를 한 6,000명의 병사들과 사두마차 6대가 11열로 놓여져 있었다. 2년 후에 발견된 제2갱은 10,000평방미터의 넓이로 그곳에서는 인간과 말이 1,400채 있었다. 거의 같은 무렵에 제3갱인 작은 갱이 발굴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말을 탄 장군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73명의 병사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도자기로 된 병사들은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서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병사들의 다양한 체구로 보아 진 제국의 여러 지방의 소수 민족들로 구성된 징집병들로 군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복장이나 무기도 당시의 전쟁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가장 큰 갱 위를 덮고 그 위에 박물관을 세워, 견학자들이 난간을 사이에 두고 지하 6미터의 갱 속에서 갑옷 모습으로 정렬한 2,200년 전의 전사들을 내려다 볼수 있도록 하였다. 병사나 말의 대부분은 병마용이 놓여지고 난 후 천장이 허물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파손되었으며, 지금도 수리 수복이 계속되고 있다.

 

타웅 차일드(Taung Child) : 1924년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 근처 타웅 동굴에서 석회를 채굴하던 한 노동자가 석회암 사이에 작은 뇌의 주형같은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광산 사무소로 가지고 갔다. 사무소는 이 사실을 위트와테르스란트대학의 해부학 교실의 주임인 레이몬드 더트 교수에게 알렸다. 곧이어 더트는 타웅 동굴에서 발견된 석회석 주형 속에서 거의 완벽한 어린이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발견을 영국의 과학잡지 'Nature'에 발표했다. 이 어린이는 그 당시에는 가장 오래된(백만 년 이상) 인류의 조상이었다[198511월호 'National Geographic'지의 표지에 이 타웅 차일드의 화려한 홀로그램(hologram)이 재현되어 있다]. 타웅차일드의 두개골을 더트가 입수한 것에 관해서 그 유물(?)이 임자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 31세로 젊었으며 경험도 적고 학문적으로는 이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우연한 발견을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바꾸는 데에 더트야말로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는 거의 직감적인 예민성으로 이 고대의 어린이가 우리 인류의 조상과 유인원과의 사이를 메우는 소위 '잃어버린 연결 고리'(missing link)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개골의 기본 형태에서 추정된 머리의 각도를 증거로 하여 더트는 타웅 차일드가 직립보행을 했었다고 주장했다. 더트의 착상은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논쟁 가운데는 이 고대의 화석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그 자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프리카가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이 태어난 곳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리키부부나 도날드 요한슨 등을 비롯한 우수한 고고학자들의 아프리카 연구에 의해서 더트의 설은 대부분 입증되었다.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 : 1857년 독일의 네안데르탈에서 가까운 동굴에서 채석부가 문제의 '인간'을 발견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원래 두개골을 포함한 갈색 뼈의 집합체였다.

그 직후에 다윈이 '종의 기원'(1859)을 출판하였고, 토마스 헉슬리는 자연도태에 의한 발생이 인류 초기 역사의 이론적 뼈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 중에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헉슬리는 그 두개골이 유인원과 비슷한 특징이 있으며 인류와 유인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네안데르탈인이 초기의 인류를 대표한다는 생각은 1886년에 벨기에의 스피 동굴에서 이와 비슷한 뼈를 깎아 만든 석기와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북극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던 동물의 뼈가 함께 발견됨으로써 실증되었다. 현재는 네안데르탈인이 10만년 이상 전의 인류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톨론드인(Tollond Man) : 1950년 덴마크의 톨랜드 늪지대에서 토탄을 채광하던 두 남자가 보존상태가 양호한 남자 시체를 캐냈다. 이 남자 시체는 가죽 모자와 벨트만을 걸치고 있었으며 목에는 가죽 로프가 단단히 감겨져 있었으나 얼굴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종교상의 이유로 처형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 그 남자는 톨론드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고고학자와 해부학자 그리고 식물학자들은 그의 모자에서부터 최후의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분석했다. 그 시체는 토탄 속에서 잘 보존되어 있어서 두 발도 제대로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턱수염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토탄의 늪지는 방부제로서의 효력이 있는 타닌산을 함유하고 있으며, 토탄은 그 밑에 있는 물체를 덮어서 산소를 차단하기 때문에 부패를 방지했다). 그 남자는 30세 정도로 약 2,200년쯤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린도우인(Lindow Man) : 19848, 영국의 맨체스터 공항 가까이에서 상업용 토탄을 캐던 광부가 한 덩어리의 토탄을 분쇄기에 투입하려고 할 때 토탄에 붙어 있던 이끼가 떨어지면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고고학자들이 회수하여 감정한 결과 이 고대인의 인체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매우 보존상태가 좋은 것이었다. 린도우인이라 불려진 이 남성은 켈트족이며 드루이드라고 불리우는 지배 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톨론드인과 마찬가지로 이 남성 역시 2,200년 전의 제비뽑기의 결과 종교의식에 의해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물에 처박아 밀어 넣고, 인후를 자르고 숨통을 가죽끈으로 조이고, 머리를 치는 그런 잔인한 처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얼굴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가 원해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남성의 위와 장의 내용물을 분석한 결과, 일부는 심하게 탄 케이크 조각이 나왔다. 켈트족의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고고학자인 앤 로스 박사는 이 탄 케이크야말로 린도우인이 뽑은 '제비'이며 그 결과 드루이드의 신에게 바쳐진 희생물로 그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로스 박사는 이 탄 케이크가 드루이드의 의식에서 사용되는 보릿가루로 만든 얇고 납작한 케이크의 태운 조각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식의 사제가 케이크를 조각내어 가죽 푸대에 넣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돌리면 참가자들이 한 조각씩 꺼내는데 운이 나빠서 탄 조각을 꺼낸 자가 희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잉글랜드의 켈트인 발견이 유럽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것이라고 시사했다. 그들이 믿는 바에 의하면 유럽에서 켈트족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지역을 지배했으며, 기원전 2세기부터 3세기 무렵 스칸디나비아를 지배한 것은 게르만족이 아니고 켈트족이었다고 한다.

 

멕시코시의 아즈텍 원반 : 1978년 멕시코시에 있는 전기회사의 작업원이 케이블 설치용 도랑을 파다가 커다란 돌 원반에 막다르게 되었다. 적업원들이 살펴보니 원반에는 수족이 절단된 아즈텍의 달의 여신이 새겨져 있었고, 전설에 의하면 여신은 그녀의 형제인 전쟁의 신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을 시작했는데 이쯤 되고 보니 전력 케이블 설치는 문제 밖이 되고 말았다. 아즈텍의 고을은 멕시코의 지하에서 4세기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고 한다. 위칠로포치틀리 사원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서는 재물용 칼과 공물을 포함하여 100여점 이상의 의식을 위한 봉헌물이 있었고, 돌로 둘러싼 구덩이 속에서는 비의 신 틀라로크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생후 3개월에서 8세까지의 34명의 어린이 두개골도 발견되었다.

 

블랙 힐즈의 맘모스 : 1974년 미국 남 다코타 주의 블랙 힐즈에서 가까운 고을, 핫스프링스의 교외에서 불도저 운전수 조지 한슨이 지면으로부터 약 6미터쯤 되는 곳에 묻혀있는 어떤 뼈를 캐냈다. 한슨의 아들이 이 발견을 자기의 은사 랠리 에이젠브로드 교수에게 알렸으며, 그는 이 뼈가 콜롬비아 맘모스 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맘모스는 26,000년 전에 구덩이로 빠진 것으로 추측되며, 지금은 이 지점 바로 위에 빌딩을 세워 견학자들이 이 선사시대의 거대한 동물이 죽은 채로 그 자리에서 화석이 된 뼈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발굴은 지금도 그 장소에서 1년에 한 달씩 계속되고 있다.

 

오스틴의 마스토돈 : 19851,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의 22층 건물 오피스 빌딩의 건설 현장을 파고 있던 굴삭기 운전수가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아를 캐냈다. 굴삭 기간 중 건설 작업자로 고용되어 현장에 있었던 고고학자(고고학상의 유물이 공사장에서 더러 발견되기 때문에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다)인 알톤 브릭스는 이 상아처럼 생긴 거대한 뼈가 맘모스와 같은, 코끼리와 관련된 선사시대의 동물인 마스토돈(mastodon)의 것이라고 감정했다. 마스토돈의 화석은 맘모스의 것보다 드물었기 때문에 그동안 맘모스는 3,000두나 불굴되었는데 마스토돈은 수백 두 정도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3두의 마스토돈의 엄니(상아와 같은), 늑골, 좌상악골과 상처가 없는 커다란 치아 2, 등뼈, 다리뼈 등이 발견되었다. 2개의 치아 중 한 개는 보존상태가 대단히 양호하며 잘 닦았더니 반짝거릴 정도였다. 뼈가 발굴된 후 브릭스와 함께 조사한 텍사스대학의 고생물학자 어네스트 룬델리우는 이 발견이 진귀한 것이라면서 "이토록 많은 마스토돈의 뼈가 이와 같이 어디서 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상태로 발견되기란 좀체로 없을 것이다. 마스토돈의 뼈는 하류로 흘러내려 가다가 더 내려가지 못한 곳의 강바닥에서 발견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말했다. 이 발견 장소는 오스틴을 가로질러 흐르는 콜로라도가의 옛 범람지역 근처의 못 바닥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하면 마스토돈의 뼈가 묻혀 있는 지층은 약 15,000년 전의 것으로 나타난다.

 

아크밈의 왕비상 : 1982년 강연 여행 중에, 저자는 이집트의 나일강가의 도시 아크밈에서 파라오 람세스 3(기원전 1304~1237)가 사랑했던 아내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볼 수가 있었다. 새 빌딩의 기초 공사를 하고 있던 작업원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3,200년 동안 이름도 모르는 사원의 폐허 속에 묻혀 있었으며, 매끄러운 대리석 위의 입술의 붉은색과 아이샤도우의 청색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말라버린 호수.

비스쿠핀 마을 : 1933년 폴란드에서 학생과 함께 소풍을 나왔던 교장 선생님이 나무 기둥이 같은 간격으로 호수 위로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의 조사에 의해서 2,300년도 더 전에 호수의 한복판에 있었던, 섬 위에 건설되었던 마을 비스쿠핀이 빛을 보게 되었다. 마을 주민이 수확이 적고 적들의 침략이 빈번하여 마을을 버리고 떠나자 그 후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서서히 수몰되어 버렸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강을 준설하는 바람에 호수의 수위가 내려가고 섬과 고대의 마을이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1934년에 시작된 발굴로 인해 통나무로 된 벽과 제방으로 둘러싸인 24,000평방미터 정도의 세심하게 설계된 마을이 나타났다. 무기와 도구, 도자기 등 유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고고학자들은 말을의 상당 부분을 재현시킬 수 있었다. 거기에는 한 지붕으로 된 연립 가옥도 있었다. 호수 위로 조금만 나와 있었던 마을의 유적이 교장 선생의 예민한 관찰력에 의해 발견되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문명 연구에 공헌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터스빌의 두개골 : 1985년 미국 플로리다 주의 타이터스빌에서 계획적으로 연못의 물을 뺏더니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못 바닥의 토탄 속에서 7,000년 전의 인류의 두개골이 몇 개 발견되었는데 그 중의 두 개는 보존상태가 좋은 뇌가 들어 있었다. 과학자는 그 뇌의 하나에서 DNA를 추출했다. DNA연구에 의해서 유전자 구조의 진화론적 변화가 더욱 잘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자연히 나타난 유물.

고대 유물 중에는 다소나마 우연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민첩한 관찰자가 이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오리냑 동굴 : 1852, 프랑스 피레네 산록에 있는 오리냑 마을의 가까운 곳에서 도로 공사인이 토끼 굴에서 사람의 뼈를 꺼냈다. 호기심 많은 공사인이 구멍을 넓히자 동굴이 발견되었고, 그 속에서 17구의 사람 뼈와 구멍이 난 둥근 조개껍데기 그리고 포유동물의 치아들이 있었다. 공사 감독은 고생물학의 연구를 위해 그것들 중의 몇 가지를 모았다. 이것이 뼈의 화석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변호사 에드워드 라르테의 눈에 띄었다. 라르테는 수년 후에 오리냑을 방문하여 동굴 주위를 더 파보았다. 그러자 부싯돌과 사슴의 뿔로 만든 도구, 절멸된 포유류의 뼈 등이 나왔다. 이러한 것들의 발견과 금속의 유물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리냑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에 살고 있었다고 결론지어졌다.

반창의 유물 : 1966년 태국에서 사회학의 조사를 하고 있던 스테반 영이 반창 마을의 무덤 옆길을 지나가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지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항아리 하나를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길 양옆에는 많은 항아리가 있었다. 유약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그 근방을 심하게 약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펜실바니아대학의 고고학자 체스터 고만이 수년 후에 찾아와서 가까운 마을의 도로 한복판을 파보았을 때 무려 18톤이나 되는 고고학 자료가 나왔다. 청동제의 장신구와 창날 등은 그 연대가 오래된 기원전 2000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동남아시아에서 선사시대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제안했다. 그때까지의 설에 따르면 야금술은 근동에서 발달하였으며, 그 후 동남아시아에는 기원전 500년경에 전파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풀삼의 인디언 유적 : 1908년 가을, 조지 맥준킨이라는 카우보이가 뉴멕시코주 풀삼 마을 가까이에 있는 골짜기를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골짜기의 비탈 부분의 땅에서 뼈가 삐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뽑아내 보니 상당히 큰 뼈였으며 그가 잘 알고 있는 소나 버팔로(물소)의 뼈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훨씬 후에 폴삼을 방문한 콜로라도 박물관의 제시 피킨스는 그 뼈가 빙하기 말엽에 절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바이슨(들소)의 일종인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뼈와 함께 금속제의 창날이 발견되었는데 그 몇 개인가는 동물의 뼈에 꽂혀져 있었다.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의 프랭크 로버츠 Jr.은 이 유물들을 조사하여 약 1만 년 전인 빙하기 말엽에 아메리카의 이 지방에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피킨스의 설을 뒷받침했다. 이것은 바이슨의 뼈가 발견되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보다도 5,000년이나 더 오래된 옛날이었다.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 뜻하지 않게 출현한 유물 중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은 아마도 고대 이집트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된 로제타 스톤일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의 한 병사가 나일강 서쪽의 한 지류의 기슭에 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동서쪽에서 약 8키로미터 떨어진, 해안으로부터 수 마일 떨어진 삼각주 지역에 위치한 로제타 마을 근처인 성 쥴리언 요새를 수리할 때 이 돌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 이 돌을 소장하고 있는 영국 박물관의 캐롤 앤드루스는 이 발견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7997월 중순, 이것을 발견하게 된 배경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냥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좀더 믿을 만한 견해에 의하면, 후에 쥴리언 요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이 요새를 증축하면서 기초 공사용의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 프랑스 군대가 부셔버리도록 명령받았던 매우 오래된 벽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돌의 3비문, 즉 한 문장이 세 가지 종류의 다른 문자로 쓰여져 있다는 중요성을 곧바로 알아차린 공적은 파괴 명령을 받은 부대 책임장교인 피에르 프랑소와 부차드 대위와 동료 장교들에게 있다. 비문의 세 번째 서채는 그리스어로 쓰여 있으므로 맨 처음 서체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열쇠로 사용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8월 중순에 그 돌이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나폴레옹을 따라서 이집트까지 와있던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대 이집트의 언어를 새기는 데에 상형문자가 최후로 사용된 것은 서기 394824, 이집트 남쪽 국경에 있는 필레섬에서였던 것같다.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한 세 가지 문자 중 문자와 문자사이를 떼지 않은, 쓰기가 가장 어려운 서체이던 민중문자(demotic)가 최후로 새겨진 것은 그 후 60년도 지나지 않은 서기 452년이었다.

그 후 1,370년 동안, 고대 이집트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는 침묵해 버렸다. 이집트에 범람하고 있는 유적 중 무수한 상형문자의 비문이나 파피루스(papyrus ; 이집트의 나일강변에 자생하는 파피루스 풀로 만든 종이와 같은 것)나 돌 또는 도기 파편에 꽉차있는 신관문자(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풀어서 쓴 행서체 문자)나 민중문자의 원전을 풀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상형문자의 해독에는 많은 사람이 참가했으나 로제타 스톤의 연구에 의해서 비로소 현재의 고대 이집트 언어에 관한 지식의 기초를 만들어낸 것은 장 프랑소와 샴폴리온이었다. 로제타 스톤의 상형문자가 해독됨으로써 비문에 숨겨진 많은 사실이 밝혀지고, 수 세기에 걸쳐서 나일강 유역에 발달한 문명에 관해서 완전하고도 훌륭한 묘사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자연도 때로는 돕는다.

머피의 법칙을 바꾸어 말하면 '자연은 원래 짖궂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연도 때로는 우리 인류에게 도움을 주고 고고학자에게 과거의 역사를 엿보게 해준다. 다음에 설명하는 루시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인간을 찾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사 세렌디피티의 예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자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남아프리카의 타웅 차일드의 두개골 발견은, 석회암 채굴인에게는 화석을 찾는다는 것은 전혀 엄두도 못냈던 것이었으니 만큼 완전히 세렌디피티적이었다).

 

루시(Lucy) : 197411, 인류학자 도날드 요한슨과 대학원생 톰그레이는 이디오피아 중북부에서 고대인의 화석을 찾고 있었으나 발견되는 것은 동물의 뼈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골짜기를 지나가는데 그들이 있는 위쪽의 침식된 경사면에서 뼈가 불거져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수천년 동안의 퇴적물과 화산회의 두꺼운 층 밑에 묻혀 있었던 것인데, 최근의 집중 호우로 토사가 깎여내려 뼈를 노출 시킨 것이었다. 처음에 발견된 것은 팔 뼈 한 개 뿐이었지만 요한슨과 그의 공동연구자가 3주일 동안 열심히 발굴한 결과 발견된 뼈는 수백 개에 이르렀다. 이 뼈들은 사람의 몸체였으며, 신장이 겨우 112센치미터인 성인 여성은 발굴 당시 유행했던 비틀즈의 곡 이름에서 착안해 루시라고 이름지었다. 루시는 당시 알려졌던 선사시대 인류의 조상 중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방사성탄소에 의한 연대 결정에 의해서 연령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전으로 판정되었다. 또 그 여성의 골반을 조사한 결과 루시는 타웅 차일드보다 100내지 200만 년 전에 직립보행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오제트 인디언 유적 : 오제트 마을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묻혀 있던 유물이 유사 세렌디피티적으로 출현하는 데에 자연히 도와준 또하나의 예이다. 브리언 페건은 이 발견의 경위를 '고고학의 모험'(1985)에 다음과 같이 썼다. 워싱톤 주립대학의 인류학자 리차드 도허티는 워싱톤 주 북서단의 작은 해안에 있는 폐촌 오제트에서 유적을 발굴했을 때 참고가 될 만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반세기 전까지 오제트에 살고 있었던 마카하 인디언의 역사를 이어 맞추기 위해 도허티는 현존하는 그들 자손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주 옛날에 거대한 진흙 산이 마을을 메웠다는 크나큰 재해에 관한 전설이었다. 도허티는 어쩌면 이 전설이 사실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1970년 추운 겨울, 매우 강한 폭풍으로 높은 파도가 오제트의 넓은 해안에 밀어닥칠 때 그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둑의 일부가 유실되면서 대량의 유물[카누의 노, 나무 또는 뼈로 만든 낚시 바늘, 상감세공된 상자의 일부, 작살 자루, 모자 등]이 나타났다. 연대는 모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당시의 것으로 수세기 동안 진흙층 밑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마카하족 평의회는 유물을 거두어 보관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웠다. 마카하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오제트의 진흙에서 나온 것이 우리의 유산인 것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다." 폭탄도 도움을 준다.

2차세계대전 말기, 유럽의 대도시 중에서도 런던, 베를린, 로테르담, 함부르크 등은 공습에 의해서 폐허가 되었다. 그것은 매우 큰 비극이지만 이 황폐한 상태는 고고학에 약간의 독특한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런던의 폐허 속에서 신설된 '로마시대 및 중세 런던 발굴 평의회'는 서기 43년경 로마인에 의해 발견된, 주위의 마을인 런디늄의 흔적을 탐색했다. 로마의 병사들에 의해 번졌던 신앙의 주 대상이던 미트라(Mithra)신에 바쳐진 사원이 발견되었다. 오피스 빌딩을 건설하기 위해 건축업자가 사원을 파괴하려고 하자 여론이 정부를 움직여 결국은 로마사원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놓게 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현재도 그 도시의 역사에 흥미를 가진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다.

 

소년과 동굴. 동굴을 반견한 소년들의 호기심이 고고학상의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다.

 

라스코(Lascaux)동굴 : 1940, 4명의 소년이 프랑스 남서부의 몬티냑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을 탐험할 때 지면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들은 호기심으로 그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구멍을 넓혀 보았더니 좁은 통로가 나타났으며 그것은 커다란 지하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소년들이 가지고 있던 램프 불빛에 의해 동굴의 벽과 천장의 하얀 석회암 위에 색상도 선명한 동물 그림이 나타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이전의 교장선생님에게 보고하였고 교장선생은 선사시대 미술 전문가 아베 헨리 브루일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브루일은 동굴로 와서 그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이것은 분명 고대의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발견이 일반에게 알려지자 고고학자, 언론인, 구경꾼들이 동굴로 모여들었으나 견학은 몇몇 사람에게만 조심스런 통제하에 허락되었다. 전쟁 후에 프랑스 정부와 토지 소유자는 좀더 튼튼한 입구를 만들어 벽화를 보다 안전하게 관리하기로 했다. 그 후 수 천이라는 관광객이 라스코 동굴로 찾아 들었으나 지금은 귀중한 진짜 벽화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본래의 동굴 옆에 설치한 정교한 복제 동굴을 견학할 수 있게 했다.

 

사해문서 : 1947, 베두인(Bedouin : 아랍계의 유목인)족의 소년이 사해의 북서안에 접한 황무지의 절벽에서 미아가 된 산양을 찾고 있었다. 절벽의 한곳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한 소년이 그곳에 돌을 던져보았더니 그 속에서 도기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겁을 먹고 소년은 일단 도망쳐 왔다. 그 후 한 친구를 데려고 와서 그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큰 도제 항아리가 많이 있었고 그중의 몇 개는 아마포로 싸인 오래된 양피지의 두루마리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들은 그 두루마리를 자기네 부족의 야영지로 가지고 갔다. 그 후 몇 개는 21키로미터 서쪽에 사는 예루살렘의 시리아인 대주교에게 팔아 넘겼다. 대주교는 그것을 예루살렘의 아메리카 오리엔트 사 연구소로 보냈다. 연구소의 존 C. 트레버 박사와 윌리엄 브라운리 박사는 두루마리의 글씨가 옛 형태인 헤브라이어인 것으로 보아 이 문헌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두루마리 중의 하나(구약성서의 이사야서의 사본)중에서 여러 부분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그것을 존스 홉킨즈대학의 헤브라이 고분서학의 전문가 윌리엄 F. 알브라이트 박사에게로 보냈다. 알브라이트 박사는 이 사본이 거의 기원전 100년경의 것으로 곧 판정하였으며, 이 두루마리를 '믿기 어려운 발견'이라고 했다. 이것들은 다른 대부분의 구약성서 사본의 단편에 비하면 거의 10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아랍인과 유태인 간의 군사적 적대관계 때문에 고고학자에 의한 그 후의 연구는 늦어졌으며, 1949년부터 겨우 시작된 여러 종류의 두루마리 찾기와 그 두루마리에 관여했던 사람들에 관한 정보 수집은 처음에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지방의 가난한 베두인들은 이것에 대한 새로운 수입원의 가능성을 간파했다(그들은 처음 발견한 두루마리를 이미 예루살렘의 학자들에게 팔아 넘겼다). 그들은 사해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 불모지로 버려진 황무지의 갈라진 틈을 사방팔방으로 찾아 헤맸다. 1952년 그들은 크므랑(Qumran) 유적 근처인 베두인족의 소년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제1동굴에서 2키로미터도 채 못 되는 곳에서 귀중한 것을 캐냈다. 그 후, 베두인족과 고고학자의 열성적인 작업에 의해서 금욕적인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Essene)파의 고대 수도원 유적이 밝혀지게 되었다. 로마인의 박해가 끝난 후에 되찾을 요량으로 이와 같은 두루마리를 만들어 숨긴 것은 아마도 에세네파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400권 가까이의 두루마리가 수천의 단편이 되어 발견되었으며, 구약성서의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두루마리의 중요성을 완전히 평가하는 데는 아직도 수십년 걸리겠지만, 이미 우리에게 성서에 관해서 미흡했던 중요한 지식을 주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던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에 관해서 새롭게 이해되었으며, 신비적인 에세네파의 입장이 비로소 명백해졌다.

 

해면 채취 잠수부에 의한 발견.

수 세기 전에 난파한 배는 그것이 항해하던 시대의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 아주 최근에 자력계나 수중음파 탐지기, 또는 리모콘으로 조절되는 비디오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에 지중해의 해면 채취 잠수부들이 해양에서의 가장 유력한 정보원이었다. 그들이 깊이가 30미터 이상이나 되는 해저에서 스펀지를 채취해 올 때에 난파선이나 그 흔적을 발견한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난파선 탐험가 중의 한 사람인 조지 바스는 198712월호의 'National Geographic'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랜 경험으로 고대의 난파선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정보원은 터키의 해면 채취선의 잠수부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최신의 수중음파 탐지기나 자력계보다도 훨씬 도움이 된다. 한여름 동안 만에 25척의 배에서 일하는 다이버들이 총 2만 여 시간이나 해면을 찾아서 해저를 뒤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해면 채취 잠수부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해 고고학적 조사를 하는데 그 결과를 얻게 한 발견을 세렌디피티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해면 채취 잠수부들에 의한 최초의 발견 역시, 고대의 난파선을 찾아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오직 해면을 찾는 데만 그들의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세렌디피티인 것이다.

터키 앞바다의 청동기시대의 배 : 해저 탐험가 피터 스록모톤은 지중해 해저에서 고대의 동상과 도기 항아리를 얻었다는 해면 채취선의 건장한 터키인 선장을 만났다. 선장은 미국인 해저 탐험가 그룹이 사용하는 근대적인 스쿠버 다이빙 장비를 경멸하였다. 이런 장비는 관광객이나 쓰는 것이지 진짜 다이버의 것은 못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곧 터키인 다이버들도 미국인이나 그들의 장비에 경의를 품게 되었다. 사실상, 젊은 다이버들은 그들의 케케묵은 금속성이나 다이빙 헬멧보다도 스쿠버 다이빙 장비의 사용법을 배우게 되었다. 1958년의 여름은 별다른 발견도 없이 끝났으나 한 해면 채취 잠수부가 동물의 가죽과 같은 모양을 한 청동으로 된 덩어리를 보았다고 해서 스록모톤과 그 동료들은 다음 해 여름에도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해 청동기시대의 배의 잔해가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그들은 배 그 자체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청동의 덩어리, 창날, 도끼, 조잡한 도기류 등을 다수 회수했다. 기후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배에 대한 조사는 다음 해인 1960년 여름까지 연기하기로 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선체의 파편과 회수한 유물을 통해 그 배의 마지막 항해를 거의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그들은 그 배의 화물칸에서 발견된 1톤 이상의 청동과 동제품을 터키의 보드럼(Bodrum)박물관에 기증했다.

키프로스 앞바다의 그리스 선박 : 기원전 4세기 키프로스(Cyprus)의 앞바다에서 침몰되었던 그리스 선박이 회수되었다. 이때도 발견의 주역은 한 해면 채취 잠수부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암포라(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달걀꼴의 대형 항아리)로 당시 와인을 담는데 사용되었으며 지중해를 항해하는 상선의 중요한 뱃짐이었다. 19706월 호의 'National Geographic'지에서 미켈 카체프는 이 키프로스의 다이버가 과연 어떻게 해서 항아리를 발견했는지 또 그것들을 다시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면을 찾아서 잠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배의 닻이 끌려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닻을 쫓아갔더니 닻이 그 항아리 무더기 위를 지나가고 있었죠. 그러나 해면으로 나와보니 그것은 강풍 한복판이라 도저히 위치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나는 다시 그 항아리를 발견해 보려고 노력했었습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발견한 것이 수 주일 전이었으니까. 이것은 이제 당신 것입니다.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고고학자 뿐이죠. 당신네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고장의 명예를 위해서 나는 비밀을 지켜왔던 겁니다. 이것은 키레니아(Kyrenia)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목조인 선체는 22세기 동안이나 그것을 덮어왔던 모래로 보호되어 왔다는 것과 원래 배 좀벌레로부터 목재를 지키기 위해 사용된 납으로 피복한 덕분에 거의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은 이 납의 피복을 너무 믿었던 것 같으며, 고고학자가 조사해 보니 배 좀벌레는 납으로 피복된 바로 안쪽의 목재를 많이 해쳤으며 그 때문에 구멍이 나서 이 배가 침몰했는지도 모른다고 추정하였다.

 

울루 부룬의 청동기시대의 배 : 1973년 조지 F. 배스는 텍사스 A&Meogkr에 해양 고고학 연구소(INA)를 설립하여 현재도 그곳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INA는 아메리카 지리학회, 아메리카 과학 재단, 아메리카 인문학 기금 마련회, 에게해 선사시대 연구소등과 함께 울루 부룬에서의 난파선 발굴에 자금을 제공했다. 이 울루 부룬(Ulu Burun)에서의 난파선에 관한 최초의 정보는 1982년 여름에 얻었다. 한 젊은 해면 채취 잠수부가 선장에게 자신이 해면 밑 46미터 지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해저에 신기하게 생긴 '손잡이가 있는 금속제의 도자기'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INA가 해면 채취선의 선주들에게 나누어 준 그림에서 선장은 다이버가 말한 것이 청동기시대의 동으로 만든 주괴(ingot : 녹인 금속을 주형에 부어서 굳힌 것)라는 것을 알았다. 선장은 이 정보를 INA에 전했다. 예비 조사는 1983년 여름에 실시되었으며 그 사진과 스케치를 보고 배스 박사는 "고고학자에게는 마치 이상을 확인하는 것 같다!"라고 외쳤다. 수천 개의 유물이 난파선에서 회수되었으나 그것들은 청동기시대 후기, 즉 이집트에서는 투탄카멘(Tutankhaman ;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제 18왕조)의 통치시대와 트로이 함락시대에 동 지중해에서 번영했던 일곱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들 유물 중에는 수백 개의 동과 주석의 주괴(이것은 동을 섞어서 청동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네페르티티 여왕의 이름을 새긴 작은 황금의 스카라베(scarab ;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 케페라를 상징하는 황금충의 일종을 본따 만든 장식을 겸한 부적), 투탄카멘의 분묘에 사용된 것과 같은 모양의 아프리카산 흑단재, 발트해의 호박구슬, 그리고 아마도 가나안에서 만들어진 코발트 블루의 유리 주괴, 향료로 사용된 방향성 수지가 들어있는 암포라와 티리안 퍼플(왕가의 색인 보라색 염료)을 채취하기 위한 수백 개의 조개껍질, 그리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으로 보이는, 상아의 경첩으로 철한 나무로 만든 책의 일부 등이 있었다. 목재인 책의 각 페이지에는 원래 왁스가 칠해져 있어서 철필로 쓸 수 있게 되어있었다. 왁스는 남아 있지 않았으나 잔해의 봉해진 한 암포라 속에서 왁스의 성분이 검출되었다. 선체의 목재는 서로 장부 구멍을 파서 맞추어졌으며 이것은 호머가 오디세우스 왕의 배의 건조법으로서 설명했던 것과 같았다. 계속되는 고고학적 조사에서 INA의 연구원들은 이 배가 매우 특별한 배로서 아마도 왕족에게 보내는 짐을 싣고 있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 배가 난파한 것은 기원전 14세기경으로 많은 지배자들에게 대단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이 난파선이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된 덕택으로 이와 같이 고대 시대에 관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해설) 기타 많은 고고학적 발견이 '순수한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편에서는 데릭 바톤 경이 말했듯이(35장 참조) 슬기로운 계획이나 훌륭한 착상에 의한 것도 많다. 인용될 수 있는 많은 예 중에서 타이타닉호 발견의 예를 들수 있다. 이 위업은 서구 세계의 주목을 모았으며, 다수인에 의한 훌륭한 계획과 새로운 과학기기 이용의 견본으로 그 중에는 이 계획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도 있었다. 그 내력은 'National Geographic'지의 1985년과 198612월 호의 두 기사 및 로버트 D. 발라드의 책 '타이타닉호의 발견'(1987)에 잘 묘사되어 있다.

 

 

19. 천문학에서의 세렌디피티.

 

빅 뱅. 1964년 미국 뉴저지 주 홀름델에 있는 벨연구소의 과학자 아르노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초기의 통신위성으로부터 신호를 수신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던 전파용 안테나의 개량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목적은 대기권 밖으로부터 오는 전파신호에 관하여 조사한다는 약간 단조로운 연구에 이 안테나를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준비를 위해 지구상으로부터 발신되는 보이지 않는 전파신호를 모두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나팔형 안테나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던 한 쌍의 비둘기를 쫓아내고 고상한 과학용어인 소위 '백색 유전 물질'을 제거했다. 그리고 온갖 주의를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라디오의 공전에 필적하는 잔류 방사선인 '노이즈(noise)'가 남는 것을 그들은 발견했다.

이미 천문학자 사이에는 우주는 150억 년 전에 지극히 농축된 물질의 어마어마한 대 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빅뱅(Big Bang)설이 있었다. 이 폭발로 인해 막대한 방사성 에너지가 생성되었고 그 이후 이 에너지는 계속 감소되어 가는 추세이다. 프린스톤 대학의 제임스 피블스는 1965년 초에 존스 홉킨즈 대학에서 있었던 과학되에서 이 이론에 관한 발표를 했다. 어떤 경로를 통해(몇 가지 설이 있다) 프린스톤대하과 벨연구소의 양 그룹은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벨연구소의 전파 안테나에 검출된 '노이즈'가 빅뱅으로부터 남아있는 방사선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우리는 우주의 탄생을 보고 있었는지 아니면 천체물리학의 설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비둘기를 보고 있었는지 구분이 안 간다"라고 감탄하였다. 노벨재단은 보다 과학적인 이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펜지어스와 윌슨은 1978년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펄 사. 조슬린 벨과 안토니 후이쉬는 펄사(pulsa ; 규칙적인 주기로 펄스 전파를 발하는 별)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발견을 예측할 수도 없었다. 중성자 별들이 무선 주파수의 펄스(전압. 전류의 급격한 변동의 반복) 신호를 방사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67년 여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벨과 후이쉬는 무선전파가 혹성 간의 매체를 통과할 때에 이 무선전파가 깜박거리는가 어떤가를 조사함으로써 그 크기를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은 케임브리지대학의 망원경이 일주일마다 기록하는 긴 기록지에 이상한 현상이 있는 것을 알았다. 기록에 의하면 매일 한밤중에 폭발적인 방사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9월 말까지는 이 신호가 지구상의 어떤 종류의 노이즈일 가능성은 없다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폭발은 매일 그 전날 밤보다도 이른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별에서 오는 것과 일치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그 신호가 아주 강해졌을 때는 단기간의 매우 규칙적인 간격의 펄스(pulse)를 검출할 수 있었다. 벨은 다시 많은 기록지를 조사하여 그와 같은 펄사를 세 개나 더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이 발표되고 그 해석을 구하였을 때 몇 가지 회답이 왔는데 그 중에는 "우주의 '리틀 그린맨'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것에서부터 진지하게 "우주의 어떤 물체가 펄스를 발생하는 법"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게자리 성운의 중심에서 펄사를 발견한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 그린뱅크의 국립전파천문대의 스텔린과 레이펜스테인이 그 해답을 가져왔다. 그 결과 펄사는 초신성 폭발의 잔해인 중성자 별인 것으로 단정되었다.

 

명왕성의 달. 1978년 미국 해군관측소의 제임스 크리스티는 기계가 고장 나는 덕택에 천문학상의 중요한 발견을 했다. 크리스티는 명왕성 특유의 궤도를 관측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왕성의 사진이 찍혀있는 감광판을 스타 스캔(star scan)이라는 장치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그가 그렇게 하고 보니 명왕성의 상이 길게 늘어나 보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확장된 것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되어 사진을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 순간 기계가 고장이 났다(결과적으로 보아 이 고장이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크리스티는 전자공학의 기사를 불러서 기계의 수리를 의뢰했다. 기사는 수리하는 동안에 혹시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 곁에 있어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수리하는 동안에 크리스티는 그 사진을 좀더 자세히 조사해 볼 생각으로 명왕성을 찍은 그 이전 사진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가 본 첫 번째 사진에는 '명왕성 이미지, 길게 늘어나 있음, 감광판 불량, 폐기'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흥미를 느낀 크리스티가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니 1965년에서 1970년 사이에 찍은 6매의 사진이 처음 것과 똑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좀더 연구를 계속한 결과 이 길게 늘어진 것이 명왕성의 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그때 스타 스캔 기계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크리스티는 이 새로운 달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20. 우연한 의학적 발명. 발견.

 

인슐린. 1889년 독일의 스트라스브르크에서 췌장이 소화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던 요셉 폰 메어링과 오스카 밍코브스키는 개로부터 췌장을 떼어냈다. 이튿날 실험실 조수가 이 개의 오줌에 평상시보다 파리가 많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파리가 왜 이 요에 많이 모이는가를 수상쩍게 여기고 요를 분석해 본 결과 다량의 당이 함유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 속에서 당이 발견된 것은 당뇨병의 일반적인 증상이다.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는 자신들이 실험을 통해 최초로 동물이 당뇨병을 일으킨 증세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개가 췌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기관과 당뇨병 사이에 관계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 후,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는 췌장이 당의 이용을 조절하는 분비물을 만든다는 것과 또 이 분비물이 결핍되면 당의 신진대사에 장해가 발생하여 당뇨병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분비물을 분리하려는 실험이 자주 실시되었으나 1921년까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젊은 캐나다인 의사 번팅과 의학생인 베스트는 토론토대학의 맥레오드 교수의 연구실에서 이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개의 췌장으로부터 분비물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췌장을 떼어내서 당뇨병에 걸린 개에게 이 추출물을 다시 주사하자 개의 혈당치는 정상이거나 그 이하로 내려갔으며, 요 속의 당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의 모든 증상도 개선되었다. 맥레오드 교수는 이 연구에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어, 이 호르몬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량하거나 투약량의 기준을 만들거나 했다. 그는 또 이 분비물에 인슐린(insul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슐린은 췌장에 산재하는 '랑게르한스의 섬'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섬과 같은 세포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호르몬 종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년도 채 안 되어 정제된 소의 췌장으로부터 추출물을 당뇨병 환자에게 사용한 결과 증상이 개선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최초로 시험된 사람은 중증의 당뇨병에 걸려있던 번팅의 학교 급우였다. 그의 병은 극적으로 개선되었고, 투약량을 규격화하기 위한 그의 역할은 컸다. 인슐린이 처음 임상에서 사용된 1922년 이전에는 식사 요법이 당뇨병의 증상을 완화시켜서 인명에 도움을 주었으나 도저히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당뇨병은 쇄약성 병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이르는 불치의 병이었다. 면역성이 떨어져 여러 가지 전염병에 걸리기 쉽고 수술할 때는 장애가 많이 따랐으며, 출산의 경우 산모와 산아 모두 다 위험이 많았다. 인슐린은 대부분의 당뇨병을 조절할 수 있으며, 부수적인 위험을 없애거나 감소시키고 수명을 연장시켜 활동적이고 유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하였다.

번팅과 맥레오드는 192212월 아메리카 생리학회에서 인슐린의 분리와 당뇨병의 임상적 이용에 관해서 강연을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1923년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발견 후 단기간에 수상의 영예를 갖게 된 사실은 임상의학에서 이 발견의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슐린은 단백질의 일종으로서 51개의 아미노산이 특정한 순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두 개의 사슬이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천연 고분자이다. 소의 인슐린 고리속의 아미노산 배열은 1953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프리데릭 산거에 의해서 결정되어으며, 그는 이 업적으로 195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아미노산의 배열순서는 동물의 종류에 따라서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 배열의 차이는 사람의 당질대사의 조절효과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면 말의 인슐린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돼지의 인슐린을 사용할 수 있다. 최근까지 인간의 당뇨병에 사용하는 인슐린은 모두 말과 돼지의 췌장에서 채취했었다.

DNA(디옥시리보 핵산)에 의한 단백질 합성의 조절기구가 해명되어 그 지식에 의한 유전 공학이 진보한 결과, 주요 제약회사는 대장균을 이용한 사람의 인슐린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때로는 신뢰할 수 없었던 동물 재료에 의존하지 않고 인슐린의 대량공급을 가능하게 하였다.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는 소화에 관한 그들의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고, 주로 당뇨병의 원인과 제어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 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이 무서운 병의 치료에 대한 공헌에 번팅과 베스트 쪽이 큰 영예를 얻고 있으나, 병의 원인에 관한 최초의 통찰은 췌장을 적출한 개의 요에 파리가 모여 든 것을 발견한 세렌티피티에 대하여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민하게 대응한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에 의한 공적인 것이다.

 

알레르기. 아나필락시. 항히스타민제. 샤를 로버트 리셰는 알레르기와 아나필락시(anaphylaxis : 과민증)에 관한 발견으로 1913년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상했다. 리셰는 1850년 외과의사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은 생리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그의 흥미는 생리학이라는 분야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리화학(현재의 생화학), 병리학, 약학 또는 심리학 분야에서도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다. 최신의 항공기술에 관하여도 박식하여 실제로 비행기를 설계하기도 했다. 평화운동에도 열성을 발휘하였는데. 그에 일화 중에는, 그의 아들 하나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비행사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노벨사을 수상하게 한 그의 연구는 전혀 예기치 않은 실험결과에 의해 탄생했다. 노벨상 수상 직전에 리셰는 자신의 발견에 관해서 퍽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현상을 제가 처음 관찰했을 때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상 이 발견은 충분히 생각한 결과는 절대로 아니었으며 거의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순한 관찰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눈앞에 나타난 매우 명백한 사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것 그 이상의 공적인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께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리셰는 모나코의 알버트 왕자의 요트를 타고 항해할 때 왕자로부터 속칭 전기해파리라고 하는 바다에 사는 동물의 독소를 연구해 볼 것을 권유받은 사실에 대해 말했다(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반갑지 않은 방문자의 독침에 찔려서 참기 어려운 동통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파리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리셰가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이러한 종류의 해파리를 쉽게 구하지 못하자 그 대신에 유럽 해안에 흔한 말미잘의 촉수에 있는 독소를 연구하기로 했다. 글리세린으로부터 독소를 추출하였으며, 실험용 동물로서 개를 사용하여 독소의 강도를 측정하기로 했다. 이 독소의 효과는 매우 늦게 나타났으며, 때로는 수일 후에 최대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실험은 매우 어려웠다. 개 중에서 몇 마리는 치사량 이하를 투여해서인지 또는 그 밖의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죽음을 면했다. 수주일이 지난 후 이 개들이 정상의 건강상태로 회복된 것같이 보여서 다시 한번 새로운 시험에 사용되었다. 그러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맨처음 일정량의 독소가 투여되고 나서 살아남은 개가 두 번째에는 훨씬 적은 양의 독소를 주었는데도 즉각 구토, 의식상실 그리고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증상이 나타났다. 리셰는 말을 잇는다.

몇 번인가 이 기초적인 실험을 되풀이해 본 결과, 1902년에 우리는 '아나필락시'의 기초가 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적 사실을 확립시킬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전에 주사했던 동물은 새로운 동물보다도 독소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민감하다는 것, 둘째로, 두 번째 주사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은 처음의 주사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과는 전혀 다르며 신경계 전체의 신속한 기능 저하가 특징이라는 것. 셋째로, 이 아나필락시 상태가 되는 데는 3~4주일의 간격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을 잠복기라고 합니다. 리셰와 공동 연구자들의 연구는 극히 미량의 단백질 주사에 대하여 생체가 과민해지는 소위 '아나필락시'라는 현상을 일반화 시켰다. 리셰는 민감해진 동물의 혈액을 채취하여 그것을 정상인 동물에 주사하면 그 동물이 아나필락시 상태가 되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그 효과가 전염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에 따라 이것의 본체가 혈액 속에 있는 화학 물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셰는 이 과민 상태에 대하여 자신의 연구 대상의 하나였던 예방을 말하는 프로필락시(prophylaxis)의 반대말인 아나필락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는 이 과민 상태를 말할 때 유사어인 알레르기(아나필락시보다 넓은 개념이지만)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알레르기성 질환은 지금은 내과의 중요한 영역의 하나로 되어있다. 알레르기의 치료에는 주로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항원을 알았을 때에 과민성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고 추정되는 물질을 매우 적게 적당한 간격을 두고 면역이 생길 때까지 점차 증가하여 투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치료법은 항히스타민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항히스타민제란 알레르기를 나타내는 물질에 대해서 환자 신체 속에서 방출되는 히스타민의 효과를 상쇄하는 약물을 말한다. 항히스타민제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약이며, 처방약과 비처방약 모두 약품시장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분야의 의학은 학술적인 연구도 임상적 응용도 모두 샤를 리셰의 연구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말미잘이 가지고 있는 미량의 독소에 대한 개의 예상 밖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써 리셰는 이 반응이 의미하는 중요한 성질을 인식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의 이유를 알아냈던 것이다.

 

질소 마스터드 가스와 암의 화학요법. 2차세계대전 중에 병사들이 우연히 마스터드 가스(mustard gas ; 살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독가스)에 당한 사실이 암의 화학요법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스터드 가스란 원래 액체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군대에서 이를 고의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쌍방 모두 상대방이 먼저 사용할 때를 대비하여 전선 가까이에 두었다. 이것이 가스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용시 폭발한 포탄에 의해서 흩어 뿌려지면서 기화하여 인간을 포함한 주위 전체에 번지기 때문이다. 마스터드 가스를 실은 연합군 측의 선박이 이태리의 항구에서 폭격당하자 이 독가스가 해상으로 번졌으며, 많은 병사가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구조되어 마스터드 가스의 영향에 대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환자의 대부분이 혈액 장애를 일으켜 백혈구가 위험할 정도로 감소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수 종양에서 백혈구가 과잉생산되는 어떤 종류의 백혈병에서는 백혈구의 감소는 용태의 개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후 마스터드 가스는 백혈병 환자에게 시험되었다. 그러나 마스터드 가스의 높은 독성 때문에 금지되었으므로 그 대신 유황 마스터드 가스의 분자구조와 유사성을 띄고 있는 질소 마스터드류가 백혈병에 시험되었다. 질소 마스터드란 보통의 마스터드 가스와 흡사한 화합물인데 보통의 마스터드 가스 분자속의 유황 원자가 질소원자로 바뀐 것이다. 독가스 후보로서 여러 가지 질소 및 유황 마스터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폭격으로 병사가 우연히 독가스의 피해를 보고 나서 수백 개의 질소 마스터드 유사체가 기타의 구조상 연관이 있는 화합물이 항암제로써 실험되었다. 결국 어떤 형이 되었건 인간의 암 치료약으로는 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볼 수 있었던 종양 지연 효과는 긴 안목으로 보면 치료약이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능성을 높이게 되었다.

 

(경구 피임약). 약 상자 속이나 약국의 선반에 많은 종류의 환약이 있는데 보통 필(pill)이라고 말했을 때는 먹는 피임약을 일컫는다. 1960년대에 널리 퍼진 경구 피임약은 우리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성 혁명이나 여성해방, 서방 세계에서의 카톨릭 교회의 세속화 등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필의 기원은 세렌디피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좀 복잡하지만 세렌디피티가 사연의 일부에 포함되어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기업가 럿셀 E.마커로부터 시작된다. 마커가 펜실바니아 주립대학 화학 교수진의 일원이었던 1930년경 그는 사포게닌(sapogenin)이라는 아주 흔한 형태의 스테로이드류에서 여성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을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프로게스테론은 생리불순의 치료나 유산 예방 등에 효과가 있었으며 당시 유럽의 제약회사에서만 어렵고 힘이 드는 합성법으로 만들고 있어서 매우 고가였다. 마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필요한 형태의 사포게닌이 멕시코에서 야생하는 어떤 종류의 참마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커는 멕시코까지 원정해서 이 참마를 채취하여 그 참마에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프로게스테론 합성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재정적 지원을 그의 대학에서도 그리고 미국에 있는 어느 제약회사에서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펜실바니아 주립대학을 사직하였으며, 멕시코로 가서 오두막을 하나 빌렸다. 그리고 노새를 타고 바로 멕시코 남부의 정글지대로 향했다. 그는 10톤의 참마를 채취하여 멕시코 시내에서 빌린 실험실에서 그가 원했던 사포게닌인 디오스게닌(diosgenin)을 분리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마커는 친구의 연구실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2,000그램의 프로게스테론을 합성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가격으로 16만 달러였다.

마커는 멕시코 시로 다시 돌아가서 전화번호부를 보고 작은 연구소 하나를 찾아내었으며, 두 사람의 소유자를 설득해서 프로게스테론을 생산하는 모험적인 일에 협력할 것을 납득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사를 신텍스라고 이름 지었다. 마터는 동료들과 크게 다투는 바람에 2년도 못 되어 손을 떼고 말았지만 신텍스 사에 남아있는 멕시코 공동 경영자들은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은 조지 로젠크랑츠를 쿠바에서 데리고 왔다. 로젠크랑츠는 계속하여 프로게스테론을 합성하는 일에 몰두하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멕시코의 참마에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텍스 사는 유럽의 카르텔(cartel ; 기업연합. 특히 독일에서 발달한 자본 독점 형태)제도를 깸으로써 호르몬의 가격은 1그램당 80달러에서 약 1달러로 떨어졌다.

1949년 칼 제러시는 신텍스 사 연구그룹의 지도자로부터 수년 전 E.C.켄달이 발견한 당시 마법의 약이라고 여겼던 별도의 스테로이드인 코리손(cortisone)을 제조하도록 요청받았다. 제러시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갔으며, 19세에 케년대학을 졸업한 후 22세 때에 위스콘신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뉴저지주 시바 제약회사의 연구자 시절에는 멕시코로 가서 신텍스 사의 스테로이드 연구를 지도해 줄 것을 권유받았다. 제러시가 신텍스로 갔을 때 "경구 피임약을 계획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주요한 목적은 코디손이었으나 또 다른 연구목표는 여성 호르몬의 하나로 사춘기나 폐경기에 있기 쉬운 어떤 생리불순을 치료하는 에스트라디올(estradiol)이었다. 에스트라디올과 같은 생리 작용을 갖는 분자를 합성하고 있는 도중에 제러시와 신텍스 사의 화학자들은 우연히 프로게스테론과 흡사한 스테로이드를 만들게 되었다. 이 화합물은 19-노르프로게스테론이라고 하며 프로게스테론보다 탄소 원자가 한 개가 적은 분자였다. 이 화합물은 천연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보다도 효과가 강했으며 혈관으로 직접 주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로게스테론의 작용 중 하나가 임신 중에 배란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연 피임약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신텍스 사 화학자들의 다음 목표는 프로게스테론형 화합물인 19-노프로게스테론을 개량하여 주사가 아닌 경구 투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12년쯤 전에 독일의 화학자 한스 인호픈이 발표한 연구에서 힌트를 얻어 약간의 화학적 변형으로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개량 화합물 노르에신드론(norethindrone)은 목적했던 대로 강력한 프로게스테론형 활성을 가지고 있으며, 위 속에서 안전하기 때문에 입으로 섭취할 수 있었다.

이렇게 최초의 경구 피임약은 탄생했다. 이것은 마커에 의해서 사포게닌을 성 호르몬으로 변환시키는 새로운 방법의 발견과 멕시코의 야생 참마에서 사포게닌을 얻기 위해 열대 정글에서의 그의 위험한 모험, 그리고 아주 작고 새로 생긴 연구소가 유럽의 카르텔 지배에 도전하는 모험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칼 제러시의 프로게스테론과 유사한 합성 피임약의 우연한 제조, 그리고 입으로 쉽게 섭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의 가능성이 알려짐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었으며, 지금은 여러 종류의 경구 피임약이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임약의 거의 절반은 자그마한 멕시코의 제약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합성한 화합물, 노르에신드론을 그 유효성분으로 하고 있다.

(해설) 럿셀 마커는 신텍스 사를 사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학도 그만두었다. 그가 47세가 된 1949년 이후에는 화학의 연구와 제조에도 관계하지 않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매우 자존심이 강했다. 예를 들면, 메릴렌드대학에서 화학의 학의를 취득하기 위한 필수과목인 자연계 화학의 학점을 취득할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는 평생 학위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주요 대학에서 연구직의 지위를 얻었고, 인생의 젊은 한때에 이미 화학 역사에 남는 과업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칼 제러시는 멕시코에서 3년을 보낸 후 웨인 주립대학에 직을 얻어 부교수에서 1959년 정교수가 되기까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신텍스사와 그리고 나중에는 제이콘 사와 연구에 관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1959년에는 스탠포드대학의 화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항히스타민제 및 경구피임약 등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인하여 여러 명예학위와 상을 수상했다.

 

LSD. 환각 유도 물질인 '리세르긴산 디에틸아미드'(LSD)의 발견은 의학 역사의 기록 중에서도 매우 놀라운 사연 중의 하나다. LSD는 리세르산의 유도체 중 하나인데 산 자체에 환각 유발성은 없다. 리세르산은 밭의 호밀에서 특히 우기에 가끔 발생하는 맥각균 속에 수많은 독성 알칼로이드(alkaloid)와 함께 함유되어 있다. 몇 세기 동안 스페인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모르고 또는 배가 고픈 나머지 오염된 호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은 사람들이 이 균 때문에 심한 역병에 시달려야 했다. 극도의 혈관 수축으로 팔다리에 회저병이 걸렸다. 희생자는 자신의 피부가 타기도 하고 검게 되어 수족 끝이 숯처럼 보이는 공포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성 안토니우스의 교회에서 기도했다는 점에서 이 역병을 '성 안토니우스의 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염된 호밀가루를 먹었던 중세에는 유산이나 시각장애 또는 정신이상을 일으켰으며, 극도의 정신착란이 유행처럼 번졌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러한 증상은 리세르긴산 그 자체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다분히 유독한 맥각 알칼로이드의 과잉 섭취와 수족을 절단해야 한다는 고뇌로 인해 발생한 히스테리가 겹친 때문일 것이다. 바젤의 산도츠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스위스 화학자 알버트 호프만이 디에틸 아미드기를 합성에 의해 결합시킬 때까지는 리세르긴산에 환각을 일으키게 하는 성질은 발견되지 않았다. 호프만은 편두통의 치료와 출산 후의 출혈을 억제하기 위한 약을 개발할 목적으로 리세르긴산과 그 관련 화합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시드니 코헨 박사가 쓴 'LSD의 이야기 - 내면의 세계를 넘어서'(1870)에는 호프만이 이러한 것들을 연구하면서 체험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난주 금요일(1938416), 나는 웬지 모르게 불안하고 어지러워 연구실에서 작업을 중단하고 귀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누워있는데 심한 환각을 특징으로 하는 꼭 불쾌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섬망상태에 빠져들었다. 햇살에 눈이 부셔 불쾌했으며, 눈을 감자 일종의 황홀 상태가 되어 주마등과 같은 움직임을 수반한 강렬하면서도 약동적인 환상이 내 주변에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이 상태는 두 시간 후에 가라앉았다. 호프만이 이 이상한 체험이 연구실에서 어떤 약품을 잘못 먹었거나 코로 들이마신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그날 금요일에 내가 만진 이상한 물질이라면 D-리세르긴산(D-lysergic acid)과 이소리세르긴산(isolysergic acid)인 디에틸아미드(diethylamide) 밖에 없었다. 나는 이러한 이성체를 정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축합물을 만들기도 하고 또 그것들을 다시 분해하여 원래의 성분으로 만드는 시험을 하고 있었다. 예비 실험에서는 리세르긴산 디에틸아미드(LSD) 몇 밀리그램과 물에 잘 녹는 결정인 중성 주석산염(LSD와 주석산으로 된 염)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는 이 물질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이상한 상태가 될 만큼 섭취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 증상 자체도 에르고타민-에르고노빈군의 증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유를 확인해 보기 위해 나는 리세르긴산 디에틸아미드의 결정을 사용하여 나 자신에게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 물질이 정말 원인이라면 아주 적은 양으로도 효과가 있을 것임으로 에르고타민이나 에르고노빈과 같은 극히 미량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여기서 호프만은 250마이크로그램(0.00025그램)의 리세르긴산 디에틸아미드를 섭취했다. 40분 후에 그는 '가벼운 현기증, 불안, 집중력의 결여, 시각장애 및 억제할 수 없는 웃음'이라고 기입했다. 여기서 시험 노트의 기록은 끝나 있었으며 마지막 부분만 간신히 기입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입했다.

요전의 금요일과 똑같은 사태가 발생될 것이 예상되어 조수에게 집에까지 함께 가 줄 것을 부탁했다. 집까지 가는 도중에(전쟁 중이어서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자전거로 6키로미터 정도의 길) 전번보다 훨씬 더 심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사리에 맞는 말을 전혀 할 수 없었고, 또 시야는 흔들렸으며 모든 것이 요철 거울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또 자기는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나중에 조수가 말하기를 무척 빠르게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었다고 했다. 기억나는 것은 의사가 도착하여 위험한 고비를 겨우 넘겼다는 것뿐이다. 당시 증상의 특징은 현기증과 시각장애 그리고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괴상하게 채색된 가면을 쓰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증상과 극도의 흥분으로 인한 부분 마비 현상, 때로는 머리, 신체, 사지의 냉증과 무감각, 혀로 느껴지는 금속의 맛, 바짝 마르고 쉰 목, 숨이 막히는 느낌, 명료한 사태의 인식과 혼란의 교차, 또 때로는 나 자신의 옆에 또 다른 내가 제삼자처럼 서서 정신이 절반 나간 사람처럼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있는 느낌 등이었다. 의사의 진찰 결과는 맥이 약간 약한 정도이며, 대체로 정상적인 순환 상태였다. LSD을 복용한 지 6시간이 지나자 나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지각 이상은 아직 남아있었다. 모든 것이 파도 위의 수면에 비쳐진 것처럼 삐뚤어져 보였으며 주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녹색과 청색의 색조로 변화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가지각색의 색채로 연신 그 형태가 변하는 기되한 영상에 압도되었다. 그중에서도 특징적인 것은 소리가 시각으로 바뀌는 것으로 온갖 소리와 잡음에 대응하는 착색상을 불러일으켜 주마등처럼 모양과 색이 바뀌었다. 하룻밤 실컷 잠자고 난 후에 호프만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지만 피곤하다"라고 말했다. 이 화학자의 직감에 의한 우발적인 LSD의 섭취실험이 계기가 되어 약물유도에 의해 발생하는 정신질환에 관한 연구가 모든 정신의학 연구센터에 퍼졌다. 호프만의 발견의 중요성은 LSD 그 자체가 정신분열증과 같은 병에 직접 화학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LSD는 인간의 신진대사에 의해서 합성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LSD 발견이 주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란 극히 미량의 화학 물질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정신병과 유사한 정신적 장애를 유도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경계에 관한 화학, 특히 신경세포의 연접부인 시냅스(synapses)에서의 화학적 전달물질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정상과 비정상의 정신 과정에 대한 연구를 실험실에서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환각 유발성이 있는 리세르긴산 유도체가 다수 합성되었으나 LSD만큼 강력한 것은 없었다. 아주 새롭고 관계가 없는 화학물질도 유사한 정신작용을 갖는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언젠가 정신병의 화학이 명백하게 밝혀진다면 어느 정도는 이 세렌디피티적이고 매우 모험적인 알버트 호프만의 경험 덕택인 것이다.

(해설) LSD가 함부로 사용되어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던 탓으로 산도츠연구소는 1966년에 이 약의 제조를 중지하여 재고를 모두 국립 정신의학연구소에서 인수하도록 하였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이라고 제목을 붙인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인 코헨 박사는 LSD의 이용과 남용의 가능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글의 제목은 LSD 신앙을 제창하는 사람들이 권유하는 말에서 빌린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LSD 따위의 마약에 의해 환각상태에 빠진 후에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기껏해야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당신은 훨씬 나빠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도 있고 심지어는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파파니콜라우 실험. "25년 전 자궁암은 미국 여성에게 최대의 적이었다. 미국 암협회에 의하면 현재는 18만 명의 여성이 치료 후 5년간 '치유되고 생존하였으며 건강했다'고 했으며, 이것은 주로 도말 표본검사의 덕택이다." 이것은 1962년의 'Medical World News'지에 게재된 조지 니콜라스 파파니콜라우 박사의 사망기사에 쓰여져 있는 글이다. 파파니콜라우 박사는 1923년의 세렌디피티적 관찰로 그의 도말 표본검사를 개발했다. 그는 미시간주 배틀크리크의 학회에서 '새로운 암 진단법'이라는 표제의 소논문을 처음으로 발표하였으며, 그 논문은 바로 'Growth'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1940년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장이던 힌제이 박사에 의해 주목받게 될 때까지 의사들로부터 거의 무시당했었다. 힌제이 박사는 파파니콜라우 박사에게 코넬대학의 연구실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자궁암에 관한 그의 연구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1943년에 그가 트라우트 박사와 공저로 발표한 논문 '질의 도말 표본검사에 의한 자궁암의 진단법'은 마침내 의사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1948년에는 미국 암협회의 의학과 과학 이사인 카메론이 보스톤에서 학회를 소집하였으며, 그 후 서서히 파파니콜라우법은 전 세계적으로 채택되기 시작했다.

조지 파파니콜라우의 비범한 생애는 1883년 그리스의 작은 고을 코우미에서 시작되었다. 의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아테네대학에서 의사 자격을 얻었다. 가정의로서 개업하지 않고 연구에 일생을 바칠 결심으로 독일로 가서 예나, 프라이부르크, 뮌헨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1910년에는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연구 생활은 발칸전쟁으로 인한 그리스군에서의 복무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거기서 그는 그리스계의 미국인을 만나 미국에서는 누구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듣고 자기의 장래를 그 나라에서 보내려고 결심했다. 뮌헨에서 공부를 끝내고 그리스로 귀국하여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갔을 때, 그에게는 생물학과 의학의 연구를 위한 자신의 야망을 어떻게 성취시킬 것인가 하는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어떤 날은 뉴욕의 백화점에서 융단 판매원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뮌헨에서 연구를 하다가 알게 되었던 콜롬비아대학의 동물학 교수 토마스 모건 박사의 추천으로 뉴욕의 어느 병원 병리부문에 파트타임으로 직업을 구했는데 이 병원은 코넬대학교 의과대학과 제휴하고 있었다. 그는 곧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로 옮겨졌으며, 조교수로 승진하였고 나중에는 정교수, 명예교수, 파파니콜라우 연구소 소장, 그리고 파파니콜라우 세포학 연구소의 고문이 되었다. 그의 코넬대학에서의 생활은 반세기 가까이나 되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일주일에 6일하고도 반나절을 대학의 연구실과 집에서 아내를 조수삼아 일을 했다. 그가 휴가를 가진 것은 41년 동안에 단 한번 뿐이었다. 누가 이것을 물었을 때 그는 "일이 매우 즐겁고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파파니콜라우 박사가 성최한 공적과 성공은 그 자신이 "대부분 운이었다"고 말한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1917년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 주임이었던 스톡카드 교수가 파파니콜라우 박사에게 자기의 실험 유전학 연구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 당시는 성 결정에 대한 염색체의 역할에 큰 관심이 모아졌었다. 파파니콜라우는 실험용 동물인 기니피그(guinea pig)를 이용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는 기니피그 발정 주기의 여러 상황에 따라 질 조직에 나타나는 세포의 변화를 기술한 것으로, 1817년에 스톡카드 박사하고의 공저 논문이 되었다. 여성의 월경 주기의 특징에도 이와 유사한 질세포 변화가 있는지 어떤지를 조사하기 위해 파파니콜라우는 1923년 질 내용물에 있어 조직적인 세포 생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뉴욕 부인과병원의 환자를 대상으로 실행되었다.

한 자궁암 환자에게서 표본은 얻었다. 파파니콜라우 박사의 예민한 관찰력과 뛰어난 판단력으로 질 내용물의 도말표본 중인 암세포가 구조적으로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후에 "자궁 경관의 도말 표본 중인 암세포를 처음 보았을 때 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크게 감격한 일은 나의 연구과정 중에서 처음이었다"라고 말했다. 파파니콜라우 박사는 병균이 침식되기 전의 자궁암에 대한 새로운 시험법을 설명한 후 1928년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암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되고 더 정확한 분석이 뒤따를 것이다. 또한 다른 기관의 암을 발견하기 위한 유사한 방법이 개발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이 개발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그렇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예측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의 방법은 결장, 신장, 방광, 전립선, , , 유방, 부비강 그리고 심지어 뇌에까지 적용되었다.

(해설) 파파니콜라우 박사에게 주어진 수많은 영예는 너무 많아서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중에서 그의 이름을 붙인 암 연구소와 많은 암 학회나 여성 단체로부터의 상, 그리고 3개 대학으로부터의 명예 학위와 그리스 정부로부터의 2개의 상 등이 포함된다. 병균 침식이 되기 전의 자궁암에 대한 파파니콜라우 염색시험은 구명 의료의 가장 빛나는 개가 중의 하나이다. 1959년 모스코바의 종양학 연구소 소장은 러시아에서 800만 명의 여성이 파파니콜라우 염색시험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의학적인 기록이 전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나라인 스웨덴은 10년 동안에 207455명의 여성이 검사를 받았으며, 그 기록은 컴퓨터에 들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10년 동안에 적어도 1회 이상 도말검사를 받은 여성에게는 자궁암의 발생율이 75%로 감소했다. 우프살라대학의 의사들이 추정한 바에 의하면 여성이 3년마다 파파니콜라우 염색시험을 받는 시스템이 생기면 침균성 자궁암의 발생율은 연간 10만명의 여성에 대해서 1~5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빛과 신생아 황달. 닐스 핀젠은 '강력한 광선에 의한 치료, 특히 심상성 낭창(피부 결핵의 일종)의 치료법에 관한 공헌'이 인정되어 190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뼈의 병인 구루병 예방에서 햇빛의 중요성은 1919년부터 알려져 왔다. 빛은 체내의 비타민D 전구체를 활성 비타민으로 바꾸고, 이것이 뼈의 석회화를 조절하는 것이다. 최근에도 몇 가지 빛의 유익한 효과가 제기되었으며, 그 중에는 우연에 의해 발견된 것도 있다. 그리고 자연광이건 인조광이건 제기된 빛의 효능 중의 몇 가지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중 의사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이용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신생아 황달에 대한 햇빛의 효과이다. 이 발견은 세렌디피티였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피부가 노래지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것을 신생아 황달이라고 한다. 노랗게 되는 원인은 다른 황달과 같이 담즙 색소인 빌리루빈(bilirubin)이 비정상적으로 고농도로 생성되어 피부나 눈의 흰자(안구 결막)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빌리루빈은 헤모글로빈의 분해 생성물이며, 그것이 비정상으로 고농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간장이나 비장, 또는 담낭의 기능이 좋지 않다는 위험 신호인 것이다. 신생아 황달인 경우, 신생아의 미성숙한 간장이 빌리루빈을 제거하는 속도가 늦기 때문에 뇌가 손상되고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1950년대 말, 영국의 어느 병원에서 눈치가 빠른 간호사는 햇빛이 드는 육아실의 창가에 눕혀 놓았던 신생아가 황달기운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간호원의 이러한 관찰의 보고를 받은 후에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유아의 전신 피부에 자외선 성분의 일광욕을 하면 빌리루빈을 배설 가능한 형태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아냈다. 신생아의 자외선 치료는 현재 황달을 예방하고 또는 치료하기 위한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콜레스테롤 수용체.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가라앉아서 생기는 심장 발작은 건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에게 일대 관심사이다. 달라스에 있는 텍사스대학 보건과학센터의 마이켈 S. 브라운 박사와 조셉 L. 골드스테인 박사는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콜레스테롤 수용체를 발견하여 1985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연구는 우수하고 숙련된 연구에 의해 신중하게 계획된 기초과학적인 연구임에 틀림없지만, 또한 세렌디피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브라운 박사는 회고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잘못된 가설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가족성 과콜레스테롤 혈증'(FH)이라는 어린이의 혈액 중 콜레스테롤 농도가 매우 높아지는 병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어떤 효소가 비정상적으로 콜레스테롤을 과잉 생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효소에는 문제가 없으며, 실제는 세포가 유지방 단백질로부터 콜레스테롤을 받는다(그리고 혈액 속에서 그것을 운반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곳에 수용체와 같은 것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전 세계 과학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브라운과 골드스테인은 FH 환자의 피부 배양 세포를 이용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 환자의 간장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후, 덴버 의사로부터 FH 환자의 이식 수술 시 떼어낸 간장이 있다고 전화로 알려와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기회였으나, 피부세포를 이용한 연구가 이미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브라운은 그 환자로부터 간장 대신에 피부를 조금 얻었다. 이 피부 세포를 사용하여 연구한 결과 브라운과 골드스테인은 FH 환자에게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을 체내의 세포로 운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저밀도 유지방 단백질'(LDL)을 돕는 기능적인 세포 표면 수용체가 결여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들 댈러스의 연구자들이 LDL수용체의 결여와 그 결과로 생기는 혈액 중의 LDL 과잉이 심장 질환을 초래하는 이유를 해명하려던 1973년에 마침 일본에서는 한 수의사가 LDL 수용체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는 세렌디피티적 발견을 했다. 코오베대학의 와타나베 요시오는 혈액 중 콜레스테롤 농도가 정상치의 10배나 높은 집토끼 한 마리를 반견했다. 와다나베는 이 토끼를 잘 번식시켜 혈액 중 높은 콜레스테롤 농도의 혈통을 지닌 집토끼들을 생산하였으나, 이들 집토끼는 모두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능적인 LDL수용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FH증세는 관상 동맥성 심장병 중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도이며, 아직까지 알 수 없는 것은 FH증세도 아니고 또 대량의 콜레스테롤을 섭취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높은 농도의 콜레스테롤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이러한 장애를 갖기 쉽다는 사실에는 유전적 인자가 관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인간이나 집토끼의 세포 수용체에 관한 연구에 의해서 이 문제의 해답을 지금까지 어느 정도 얻었으며 장래의 전망은 더욱 밝다. 원래 혈액 중의 높은 콜레스테롤 농도는 두 개의 요인에서 유래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간장의 콜레스테롤 과잉 생산이며 또 하나는 간장과 부신(콜레스테롤로부터 매우 중요한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만든다)의 콜레스테롤의 소비 부족인 것이다. 다행히도 현재는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콜레스티라민이라는 약이 LDL수용체의 수를 늘린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간장에서의 콜레스테롤 합성을 억제하는 새로운 약도 곰팡이로부터 추출되었다. 후자는 메비놀린(또는 로바스타틴)이라고 하며 상쿄의 엔도 아끼라 제약회사(현재 동경 농공대학)와 머크와 사프 그리고 돔 사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발견되었다. 머크 사는 이것을 메바코르(Mevacor)라고 이름지어 판매하였으며, 상쿄에서는 이보다 전에 개발되었던 유연물질인 프라바스타틴을 상품명 메바로틴으로 판매하고 있다. 브라운과 골드스테인은 위험할 정도로 높은 콜레스테롤 농도를 가진 사람들이 농도를 내리기 위하여 두 약을 동시에 사용하는 법을 시도해 봄직도 하다고 제안하였다.

 

 

21. X, 방사선 그리고 핵분열.

 

뢴트겐의 X선 발견.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은 우연히 X선을 발견했다. 뢴트겐은 어느 정도 진공상태인 유리관 속에서 공기나 다른 기체를 통해 고전압의 전기를 방전시키는 다른 물리학자들이 했던 실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방전하는 동안 유리관의 기벽에 푸른빛의 인광이 생기는 것은 이미 1858년에 발견되었다. 1878년 윌리엄 크룩스 경은 이 인광을 일으키는 음극선을 튕겨나오는 분자의 흐름이라고 했으나, 현재 우리들은 음극선이 실제로 음극에서 발사되는 전자의 흐름이며 이들 전자가 유리관 벽에 충돌함으로써 인광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온사인이나 텔레비전 또는 형광등 따위는 이러한 실험에서 발전한 것이다. 형광등 안에는 형광물질이 칠해져 있으며 여러 가지 색과 짙고 옅은 빛을 발한다.

1892년 하인리히 헬츠는 음극선이 얇은 금속 은박지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2년 후에는 필립 레너드가 얇은 알루미늄 창이 있는 방전관을 만들었다. 이 창으로부터 음극선이 관 밖으로 나오게 되고, 인광물질로 형성된 스크린 위에서 발생하는 빛에 의해 검출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스크린은 자외선 검출에도 사용되었으나, 음극선인 경우 진공관 밖의 일반적인 대기압의 공기에는 2~3cm밖에 투과하지 못했다.

뢴트겐은 이 기술에 익숙해지기 위해 몇 가지 실험을 되풀이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크룩스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전체가 유리이며 알루미늄 창이 없는 진공관으로부터 음극선이 나오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아무도 음극선을 검출하지 못할 것이다. 뢴트겐은 검출할 수 없었던 원안으로 음극선관의 강한 인광이 검출 스크린의 약한 형광을 흐르게 하고 있기 떄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확인하려고 그는 검고 두터운 종이로 음극선관을 덮었다. 이 보호막의 효과를 조사하기 위해 방안을 어둡게 하고 나서 진공관의 고전압 토일에 전압을 넣었다. 검은 보호막이 실제로 진공관을 덮고 있으며 인광이 새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형광 스크린을 진공관 가까이의 멀고 가까운 여러 거리의 위치에 두기 위해 코일을 끊고 방안의 전 등을 키려고 하던 마침 그때였다.

그때 그는 암실 속의 진공관에서 1m쯤 떨어진 곳에서 약한 빛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 그는 진공관의 둘레를 덮고 있는 검은 마스크에서 역시 빛이 새어, 방안의 거울에서 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안에는 거울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음극선 관에 전압을 넣어 보았더니 또다시 같은 장소에서 빛이 보였다. 그 빛은 희미한 녹색의 구름 같았으며, 음극선 관의 진동하는 방전에 맞추어 흔들거리는 것이었다. 급히 성냥을 켜서 보니 놀랍게도 수수께끼의 빛의 근원은 작은 형광 스크린이었다. 그것은 검출기였으며, 보호막을 한 음극선관으로부터 1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작업대 위에 놓여있었다.

뢴트겐은 그 즉시 자신이 전혀 새로운 현상에 직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공관에서 1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형광 스크린에서 빛을 나오게 하는 음극선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후, 수주일 동안 뢴트겐은 마치 열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로지 이 새로운 형태의 방사 현상을 해명하기 의해 고심하였다. 그는 이 발견을 18951228일 뷔르츠부르크 발행의 '새로운 종류의 방사선에 관한 속보' 라는 표제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새로운 방사선의 성질 중, 기본적인 것은 거의 모두 정확하게 기술하였으나, 그 자신이 아직 그것들을 완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여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때로는 뢴트겐선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뢴트겐은 이 새로운 X선이 음극선과는 달리 자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했다. 음극선이 공기 중에서 미치는 거리는 불과 58cm에 지나지 않지만 X선은 1m 이상이나 관통할 뿐만 아니라 그의 논문을 인용하면, 정도는 제각기 다르지만, 모든 물체는 이 X선에 대해서 투명하다... 종이는 투명 바로 그 자체이다. 1,000페이지나 되는 책 뒷편에서 형광 스크린은 선명하게 빛났다... 두 벌의 카드 뭉치 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두꺼운 나무조각도 마찬가지로 투명했으며, 23cm의 소나무 판자는 아주 미약하게 빛을 흡수하였다. 15mm의 알루미늄판조차 매우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형광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 방전관과 스크린 사이에 손을 넣으면 손 자체의 희미한 영상 속에 뼈가 짙게 보였다.

그는 이 골격의 영상을 사진 필름에 기록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X선의 이러한 특성은 즉각 의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놀라울 정도의 짧은 기간에 X선은 전세계의 병원에서 일상적인 진찰에 사용하게 되었다. 과학 역사상 뢴트겐의 발견만큼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은 매우 드물었다. 그의 맨 처음 논문이 발표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X선에 관한 49가지의 책과 1,000권이 넘는 논문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X선 그 자체의 성질에 관해서 뢴트겐이 조사한 그 이상의 지식을 얻게 된 것은 20년쯤 후의 일이었다.

1901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가 최초의 노벨상을 수여하였을 때 물리학상에 선발된 사람은 뢴트겐이었다. 최초의 수상에 이토록 저명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선발할 수 있어서 아카데미는 퍽 만족스러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해설)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은 1845년 프로이센의 렌넵에서 태어났다. 뢴트겐이 3세 때 가족은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그래서 초등교육은 네덜란드에서 받았다. 유트레히트의 공업학교와 대학에서 조금 공부한 후 취리히에 있는 공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기계 기능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학보다도 기초 과학에 흥미를 갖게되어 수학과 물리학의 공부를 시작했다. 오거스트 쿤트한테서 배운후, 기체의 연구라는 학위논문으로 1869년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음해 쿤트와 함께 뷔르츠부르크대학으로 옮기고 그 후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처음 강사직을 얻었다. 1888년에는 뷔르츠부르크대학 물리학 교수 및 물리학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이 지위에는 12년간 머물렀고 그동안에 X선을 발견했다. 1900년에는 바바리아(바이에른) 정부로 불려가서 뮌헨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이 되고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1923, 뢴트겐은 73세로 사망했다. 만일 뢴트겐이 실험하는 동안 계속하여 보호막 없이 X선을 쬐어왔었다면 자기가 발견한 이 방사선 때문에 수명이 훨씬 짧아졌을 것이다. 다행이도 그는 실험실 안에 칸막이를 했었는데 그것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주간에 사진 현상의 편이성을 위한 것이었다. 뢴트겐의 시대에는 X선을 많이 쬐게 되면 치명적인 영향이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 아리 베그렐이 천연방사능을 발견한 것은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직후이며 그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베크렐은 음극선에 의해서 음극관의 유리에 인광이 나며, 동시에 투과력이 강한 새로운 방사선이 생긴다는 뢴트겐의 논문을 읽었다. 베크렐은 가시광선에 의해 인광을 발하는어떤 물질이 X선과 비슷한 투과력이 강한 방사선을 방출할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그것은 잘못된 가설이었으나 가치 있는 발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베크렐은 인광물질로서 우라늄의 화합물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사진의 건판을 검은 종이로 싸서 그 위에 우라늄 화합물의 결정을 놓고 그곳에 집중적인 일광을 쬐였다. 사진판을 현상해 보니 우라늄 화합물 결정의 상이 찍혀있었다. 주의 깊은 실험가인 베크렐은 미리 검은색 종이가 일광으로부터 사진 건판을 보호한다는 것을 확인했었기 때문에 건판을 감광시킨 것은 일광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가 있었다. 이 실험에서 베크렐은 자신의 추론이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때 어떤 자연 현상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우연한 사건이 발생하여, 그 결과 단순히 화학이나 물리학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있어서의 새 시대(원자시대 또는 핵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후 파리에서는 몇 일 동안 해가 나지 않았다. 베크렐은 우라늄 화합물의 결정을 활성화한 인광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광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날 때까지 실험을 중지하고 이 결정을 서랍 속에 안전하게 싼 사진 건판 위에 놓아두었다.

수일 후 베크렐은 우라늄의 결정과 함께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사진 건판을 현상했다. 우라늄 결정에 남아있었던 소량의 인광 때문에 결정의 상이 조금 나타날 것을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름의 상은 우라늄 결정과 함께 필름을 일광에 쬐였을 때와 같이 짙게 찍혀 있었다. 그래서 베크렐은 일광이 우라늄 결정을 인광성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일광의 효력은 밑에 둔 사진 건판을 감광시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이 감광은 설령 어두운 곳일지라도 우라늄 결정 그 자체에 의해서 생긴다라는 올바른 결론을 내렸다.

베크렐은 검은색 종이를 투과하여 사진 필름을 감광시키는 방사선이 나오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우라늄을 함유한 견본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사선은 분명 보통의 광선이 아니었다. 순수한 우라늄 화합물이건 불순한 우라늄 광물이건 우라늄을 함유한 것은 모두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방사선은 통과하는 공기를 전리시키기 때문에 검전기를 사용해서 방사선의 양을 계측할 수 있었다. 검전기의 작용은 같은 종류의 전하는 반발한다는 사실에 기초를 둔 것이다. 반발력은 기계적인 복원력을 물리치고 작용하는 탄력성 있는 도체가 휘는 정도로 관찰할 수 있다.

베크렐은 단 하나만을 제외한 나마지 모든 실험 재료에 방사선의 양과 화합물이나 광석 중의 우라늄 함유율이 정비례하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 제외된 하나는 피치블렌드라고 하는 광석으로 이것에서는 순수한 우라늄보다도 몇 배 강력한 방사선량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베크렐은 이 광석에 우라늄 이외에 그보다 훨씬 높은 방사선을 가진 무엇인가가 함유되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단계에서 방사능에 얽힌 사연으로 퀴리부부가 등장한다(방사선이라는 말도 마리 퀴리가 명명한 것이다). 베크렐 교수는 마리 퀴리에게 박사 학위의 연구 과제로서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 중에서 미지의 방사선 불순물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 볼 것을 제안했다. 마리는 남편인 물리학자 피에르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1.4m3의 피치블렌드 광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한꺼번에 18나 되는 광석을 주철 항아리 속에서 용해시키고는 철 막대로 젓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용감한 방법으로 마리와 피에르는 우라늄보다도 방사능이 강한 두 가지 새로운 원소를 피치블렌드에서 분리할 수가 있었다. 그 하나는 마리 퀴리의 조국인 폴란드와 이름을 연관지어 폴로늄이라고 명명하고, 또 하나는 방사선이라는 점에서 라듐이라고 이름 붙였다. 폴로늄은 우라늄의 60, 라듐은 400배나 방사능이 강했다. 라듐이 광석 중에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천만분지 1 정도였다. 퀴리부부는 베크렐이 자연 방사능을 발견한 지 겨우 2년 후인 1898년에 라듐과 폴로늄 발견을 발표했다.

마리와 피에르 퀴리는 베크렐과 함께 1903년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상의 절반을 베크렐에게 '천연방사능의 발견' 에 대하여 수여되고 나머지 절반은 퀴리부부에게 '앙리 베크렐 교수가 발견한 방사능에 관한 공동연구' 에 대하여 수여된 것이었다.

(해설) 앙투안느 앙리 베크렐은 고명한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의 부친과 조부도 저명한 과학자였으며 둘 다 파리의 자연역사박물관의 물리학 교수였다. 1852년에 태어난 앙리는 일반 초등 교육을 마친 후, 공과대학으로 진학하여 거기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프랑스 정부의 도로 교량국의 기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부친과 조부가 교편을 잡았던 박물관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89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부친과 조부의 뒤를 이어 박물관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1895년에는 공과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후 1년도 안 되어 그를 대단히 유명하게 한 이 발견을 했던 것이다. 1908년에 사망할 때까지 방사능에 관한 새롭고 중요한 연구를 계속했었다.

1911년 마리 퀴리는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피에르도 1906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만 않았으면 이 상을 함께 수상했을 것이다. 마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마리의 표창장에는 "파리의 마리 퀴리 교수에게 라듐과 폴로늄 양 원소의 발견과 라듐이 추출 및 이 놀라운 원소의 성질과 화학의 연구를 통한 화학 진보의 공헌에 대하여"라고 적혀 있다. 마리 퀴리는 1934년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그 원인을 분명히 그녀가 방사선을 많이 받을 결과였을 것이며, 그 위험성은 그의 죽음 훨씬 후에까지도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

 

인공 방사능과 핵분열. 베크렐에 의한 천연 방사능의 발견은 새로운 시대, 즉 원자력 시대 또는 핵 시대를 맞이하게 한 셈이지만 그것은 그 당시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천연 방사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베크렐과 퀴리부부가 발견한 방사능의 성질과 원인을 추리하여 그것들이 원자핵으로부터 방출되는 입자(알파 입자와 베타 입자)나 이 방출과 함께하는 고 에너지 전자파의 방사에 의한다는 것을 제창하기에 이르기까지는 러더포드와 소디를 비롯한 기타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통찰력이 필요했다. 원자 질량의 거의(99.9% 이상)가 그 중심에 모여 있으며 양성입자인 양자와 중성입자인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은 주로 러더포드였다. 그 후 거대한 핵 에너지를 해명하는 비밀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34년경이었다.

1934년 퀴리부부의 딸 이렌 퀴리와 그녀의 남편 프리데릭 졸리오는 인공방사능을 발견했다. 그들은 러더포드 경에 의해서 확인된 알파 입자가 천연 방사성 원소로부터 방출되는 원자핵의 일부이며, 이 알파 입자가 천연 방사사어 원소로부터 방출되는 원자핵의 일부이며, 이 알파 입자를 사용하여 비 방사성 원소에 충격을 주면 이들 원소가 방사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앨런 라이트만 교수는 'Science 84'라는 책에서 이 소립자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영구히 죽은 듯 가만히 있을 요량이던 안정된 어떤 원자핵이라도 소립자를 가하면 분명히 불안정하게 된다. 이 억지로 쑤셔넣어진 원자핵은 활성화 상태에 있으며 천연 방사성 원소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산산이 작은 조각으로 내뿜기 시작한다."

당시 로마에 있었던 엔리코 페르미는 안정된 원소에 충격을 줌에 있어서 알파 입자 대신에 중성자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거대한 비방사성 안정 동위체의 우라늄 원자핵을 이 방법으로 실험하였다. 다분히 중성자 충격애 의해서 우라늄과 비슷한 무게를 가진 원소의 원자핵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오토 한과 프릿츠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의 중성자 충격에 의한 생성물 속에 크기가 우라늄의 절반 정도 되는 원소인 바륨 원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험에 사용한 재료에 바륨이 전혀 함유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우라늄 핵의 일부가 분명히 둘로 쪼개진 것이다.

193812월 한은이 예상 밖의 결과를 리이저 마이트너에게 편지로 알렸다. 마이트너는 30년에 걸친 한의 유능한 공동연구자였으나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5개월 정도 전에 나치 독일군을 피해 스웨덴으로 갔었다. 그녀의 조카인, 역시 물리학자인 오토 R. 프리시(코펜하겐에서 네덜란드의 위대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공동연구자가 되어 있었다)가 크리스마스에 마이트너를 방문했을 때 한의 편지에 관해서 의논했다.

그들은 눈 속을 생각에 잠겨 걸어가다가 보어의 이론을 생각해냈다. 1936년 보어는 원자핵 중의 입자군은 한 집단으로서 행동하므로 중성자와 같은 작은 입자가 충돌하면 그 구의 형태가 뒤틀릴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만일 핵내의 반발력이 끌어당기는 힘을 능가하면 핵은 둘로 나누어지면서, 고도의 속도로 튕겨져 나가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라는 것이다. 보어는 불안정한 무거운 원자핵과 흩어지는 물방울과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프리시는 며칠 후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때마침 스웨덴과 미국간의 정기운항선인 드로트닝흘름호로 뉴욕을 향해 출발하려던 보어를 간신히 붙들어서 이야기를 했다. 보어는 한에 의해서 관찰된 핵분열(프리시가 생물학에 있어서의 세포분열과의 유사성 때문에 명명한 말이다) 실험과 그것에 관한 그 자신의 물방울 모형을 포함한 마이트너와 프리시의 설명의 중요성을 바로 알았다. 그는 마침 출석하기로 되어 있던 워싱턴 DC에서의 이론 물리학회에서 마이트너와 프리시의 설명에 관해서 보고했다. 이어서 보어는 'Physical Review'지에 간단한 글로 핵분열의 물방울 모형 이론에 관한 요점을 발표했다.

핵분열은 그 후 바로 콜롬비아 대학의 레오 실라드에 의해 '연쇄 반응'으로 확인되었다. 그때 프린스톤대학에 있었던 보어는 연쇄 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천연 우라늄 중에 약 1%정도 밖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U-235라는 동위 원소뿐이라는 것을 산출하였다. 연쇄 반응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U-235를 농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미국 정부가 U-235의 농축에 채용한 두 가지의 과정 중 하나인 테플론의 사용에 대한 이야기는 27장에서 설명한다). 다행한 것은 이 농축은 독일보다도 미국에서 먼저 성공시켰다는 사실이다.

(해설) 193982일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페르미와 스질라드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극히 가까운 장래에 우라늄 원소가 새로운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그 결과 무섭도록 강력한 신형폭탄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고 경고했다.

원자력시대의 그동안의 행보는 잘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원자폭탄이 제조되어 이를 실제로 사용했다. 그리고 보다 강력한 형의 핵에너지인 핵융합이 발견되어 발전했다. 원자력이 평화적 이용인 발전소가 건설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에서는 당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핵폐기물의 처리가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기 때문에 석탄과 석유가 20세기의 주요한 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해왔다.

핵에너지가 극적으로 또한 불가피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은 전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무기가 등장할 때마다 옛 무기는 진부한 것이 되어왔다. 로마의 투석기, 영국의 장궁, 스위스의 쇠뇌, 화약, 니트로글리셀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단계적 발전은 보다 근대적인 통상의 병기에서 핵폭탄이나 핵미사일로의 큰 폭의 변화에 비하면 마치 소인국에서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에 관계한 과학자들의 모임인 원자력과 학자협화는 그 후 아메리카과학협회(FAS)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핵병기가 전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했다는 신념에서 핵군축을 그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베르타 폰 수트너와 그녀의 평화주의자 회의에 대해서 알프레드 노벨이 "당신네들의 회의보다 나의 공장이 전쟁을 빨리 끝나게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한 말이 상기된다(15장 참조).

노벨과 그 후계자들에 비해서 우리 세대의 핵에너지 운용이 전쟁을 추방하는 데 보다 큰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기원해 본다.

 

 

22. 아무리 달아도 살이 찌지 않는다.

 

세 가지 대표적인 인공 감미료는 모두 우연하게 발견된 것들이다. 최초의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을 100년 이상 전에 발견되었으며,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이 사용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이것은 19세기에 그 유명한 미국의 화학자인 아이러 렘센의 연구실에서 발견되었다. 렘센은 1846년에 뉴욕에서 태어났다. 독일의 뮌헨, 괴팅겐, 튀빙겐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여 미국으로 돌아와서 윌리엄즈대학 교수와 그 다음에 존스 홉킨즈대학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화학과를 만들어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그 후 미국의 화학을 이끌어갈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렘센은 후에 존스 흡킨즈대학의 총장이 되기도 했다. 렘센의 제자 중에는 나의 학문상 고조부격인 E.P. 쾰러가 있다. 쾰러의 제자에 제임스 B. 코난트가 있고 또 그 제자에 루이스 F. 피져, 그 제자가 찰스 프라이스, 그리고 그 제자에 본인, 즉 로이스톤 M. 로버츠가 있는 것이다. 가끔 나는 학생들에게 나의 학문상의 조상이 유기화학의 선조라고 불리는 뵐러(9장 참조)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즐겨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렘센이 루돌프 피티히의 제자이며 피티히가 프리드리히 뵐러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1879, 렘센의 연구실 안의 한 사람이 당시 진행 중인 이론적 연구계획의 일부로서 할당된 테마를 추구하고 있었다. 팔베르크라는 이름의 이 연구실원은 연구 중에 자기가 만든 어떤 물질이 우연히 손에 묻게 되자 무심코 맛을 보았는데 그것이 매우 달다는 것을 알았다(그 무렵의 화학자는 자기가 만든 약품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하는 데 있어 지금처럼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팔베르크가 이 물질의 공업적 합성법을 개발하여 1885년에는 그 특허를 얻은 것으로 보아 그는 이 새로운 감미 물질의 중요한 가능성을 간파했던 것 같다. 그가 이 물질에 붙인 이름은 라틴어로 설탕을 뜻하는 사카룸(saccharum)에서 딴 사카린(saccharin)이었다.

1937년 일리노이대학의 오드리스 교수 밑에서 연구하고 있던 한 대학원생이 단맛과는 관계없이 약리학상 흥미 있는 성질이 있다고 예상되는 일련의 설파민산이라는 물질을 합성하고 있었다. 미켈 스베더라고 하는 한 학생이 실험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그 담배에 강력한 단맛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근원을 더듬어 본 결과 그가 합성하고 있던 물질인 시클로헥실 설파민산나트륨이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칼슘염에도 단맛이 발견되었다. 시클로헥실 설파민산의 나트륨과 칼슘염은 모두 인공 감미료로 사용되지만 저나트륨 식용으로서는 칼슘염이 유용했다. 이것들은 대용 설탕으로 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미국에서는 1970년에 동물실험 결과에 따라 미국 식품의약품국(F.D.A)에 의해서 사용이 금지되었다. 시클로헥실 설파민산나트륨의 단맛이 처음 발견된 후 다수의 비슷한 걸타민산류가 합성되어 시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스베더에 의해서 처음 발견된 것만큼 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클로헥실 설파민산나트륨(시클러메이트)이라고 하는 감미료는 사카린과 섞어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둘을 함께 사용하면 더 한층 달게 되어 뒤에 남는 쓴맛도 감소되기 때문이었다.

3의 중요한 인공 감미료인 아스파르템(aspartame)도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다. 아스파르템의 정식 화학명은 L-아스파르틸-L-페닐알라닌메틸에스네르라고 한다. 여기에 메틸에스테르가 붙은 것으로 보아 L-아스파르틸-L-페닐알라닌이라는 디펩타이드(dipeptide)와 화학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의 체내에서 단백질을 섭취하면 가수분해되어 아미노산 성분으로 되는데 디펩타이드라는 것은 이 아미노산 두 개가 합쳐진 것이다. 이 디펩타이드의 메틸에스테르는 시를 사의 화학자가 4중 펩타이드(아미노산 네 개를 이은 것)를 합성하는 과정에 중간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4중 펩타이드는 항 종양제 개발계획에 관련하여 생물학적 표준물질로서 필요했다.

화학자 한 사람이 우연히 중간체 디펩타이드에스테르의 맛을 보고 그 강력한 단맛이 발견되었던 것이었다. 아스파르템의 단맛은 그 성분인 두 개의 아미노산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는 지극히 단조로운 맛이며 또 하나는 쓴맛이 있다. 이 둘이 합쳐져서 메틸에스텔로 변환됨으로써 강렬한 단맛이 생겨났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아스파르템- 그 생리학과 생화학(1984)'이라는 책송에 화학자 제임스 M. 슐라터는 아스파르템을 발견한 실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6512월 나는 머주르 박사와 함께 위액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의 하나인 가스트린의 C 말단 4중 펩타이드를 합성하고 있었다. 주로 중간체를 합성하고 그것을 정제하는 일이었다. 196512월의 어느 날에는 특별하게도 모주르 박사가 합성해서 나에게 준 아스파르틸페닐알라닌메틸에스테르(아스파르템)를 재결정하고 있었다. 플라스크 속의 메탄올에 아스파르템을 넣고 가열하고 있을 때 그 혼합물이 끓어오르면서 플라스크 바깥으로 넘쳐흘렀다. 그 결과 약간의 분말이 내 손가락에 묻었다. 잠시 후에 종이를 집어 올리다가 손가락을 햝았을 때 매우 강한 단맛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날 아침에 설탕이 손에 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손을 씻었기 때문에 금방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손에 묻은 분말의 근원을 더듬어서 아스파르틸페닐알라닌메틸에스테르의 결정을 넣어 두었던 용기를 찾아냈다. 이 디펩타이드가 유독성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으므로 맛을 보았더니 이것이야말로 손가락에 묻어있던 그 물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대로 배설되는 사카린이나 시클러메이트(cyclamate)와는 달리 아스파르템은 두 개의 천연 아미노산으로 신진대사가 이루워지며, 다시 그것들은 통상의 인체 경로에 의해 더욱 활발하게 신진대사가 된다. 슐라터는 펩티드의 대사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담하게 플라스크 밖으로 흘러 나온 것을 맛볼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카린과 시클러메이트의 안정성에 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거듭되어왔다. 사카린은 80년 이상 동안이나 아무런 건강 장애도 없이 사용되어왔으나 1970년대에 들어서서 대량의 사카린을 투여한 쥐에서 방광종양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식품의약품국(F.D.A.)이 제안한 사용금지 조치는 추가의 동물 실험결과가 나올 때까지 연기되었다. 시클러메이트는 미국에서 1970년에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어떤 물질의 단맛의 정도를 숫자로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미 알려져 있는 온갖 물질 중에서 사카린이 가장 강력한 감미료라고 하는 점은 일치되고 있는데, 평균적으로 자당(sucrose)에 비해 이것의 당도는 약 300, 시클러메이트는 약 30, 아스파르템은 약 200배이다.

전세계에서는 여기에 기술한 세 가지 이외에도 다른 쳔연 또는 합성의 비영양성 감미료가 사용되어 왔으나 가장 널리 사용되는 곳은 미국이다. 세 가지 모두 우연히 발견된 것이지만 맛이라는 것이 원래 주관적인 것이며 예상하기가 어려우니만큼 이와 같은 세렌디피티의 예는 다른 경우에서처럼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사카린, 시클로메이트, 아스파르템의 분자구조는 전혀 닮지 않았다(그림 22-1). 사카린과 시클러메이트는 모두 6개의 탄소원자 고리 하나와 유황원자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아스파르템은 전혀 다르며 분자 구조상으로도 다른 둘과의 공통점은 전혀 없다.

단맛을 가진 다른 물질도 화학 합성과 분자구조는 다종다양하다. 분자 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분자구조와 생리학적 기능과의 불일치에 관해서 잘 알고 있으며 이 차이의 이해에 대해서 최근 겨우 진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가까운 장래에 이 분야에서 큰 진보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23. 깨질 때 파편이 흩어지지 않는 안전유리.

 

안전유리가 우연히 발명된 것은 자동차가 발명되어 프론트유리가 사용되기 시작한 직후이며, 바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때였다. 자동차는 마차에 비해서 훨씬 제동이 어렵고 충돌하기 쉽기 때문에 깨진 프론트유리에 의해 승차자가 크게 부상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흑요석과 같은 천연유리는 지구가 탄생했을 때부터 존재했었다. 흑요석이나 다른 형의 천연유리는 지각을 형성하는 원소가 화산의 강력한 열과 뒤이어 일어난 급랭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서 그 구성이나 색 그리고 형태 등이 변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최초의 합성유리의 기원은 고대의 전설을 더듬어 가야 한다. 퍽 유명한 전설의 하나는 A.D. 1세기에 살고 있었던 플리니우스에 의해서 쓰여져 있다. 로마의 학자이자 역사가이기도 했던 플리니우스는 박물지37권을 저작했다. 그는 서기 79년 베수비어스 화산이 분화할 때 위험이 닥쳐오는 지역의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로마함대를 지휘하여 폼페이 근처의 해안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때 화산재에 묻혀서 사망했다.

플리니우스는 페니키아의 상인들이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을 때 우연히 유리를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리용의 냄비를 천연 소다석(아마도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탄산나트륨의 광석) 위에 놓고 이를 데우려고 밤새껏 불을 땠다고 한다. 아침에 보니 놀랍게도 천연 소다 덩어리와 모래의 실리카(이산화규소)가 불에 녹아서 생긴 유리가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 우연한 발견과 그 연대(기원전 40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를 증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기원전 1500년에는 이집트인이 유리로 만든 병을 사용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후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겪고나서 로마인들이 창문에 유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속의 고정된 장소에서는 유리를 청동으로 된 작은 창틀 속에 넣어 사용하였으며, 더욱이 마차와 같은 운송 수단의 자그마한 창에도 사용되었다. 그것은 원래 깨지기 쉬운 것인기는 해도 위험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자동차의 출현으로 프론트유리와 같은 창 유리가 부상의 원인이 될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1903년 에드워드 베네딕투스라는 이름의 프랑스 화학자가 단단한 바닥 위에 유리 플라스크를 떨어뜨렸다. 플라스크는 깨졌지만 놀랍게도 유리 파편이 흩어져 튀지 않고 금만 간 상태였다. 자세히 조사해 본즉 플라스크의 안쪽에 필름이 있어서 유리의 파편이 그것에 붙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필름은 플라스크에 넣어 두었던 콜로디온(면과 질산으로 만든 질산셀룰로오스)의 용액이 증발하여 생긴 것이었다(콜로디온과 관련된 세렌디피티에 관해서는 제15장 및 제16장에서도 설명되어 있다). 플라스크에 마개를 덮지 않고 두었던 때문에 용매가 증발하고 폴로디온의 필름이 플라스크의 안쪽에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베네딕투스는 플라스크에 붙어 있는 라벨에 이 사실을 메모했는데, 그때는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이 일이 있은 후 베네딕투스는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한 소녀가 깨진 유리 때문에 중상을 입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몇 주일 후 또다시 비슷한 사고에 의한 다른 피해 기사를 읽은 그는 실험실에서 유리 플라스크를 떨어뜨린 일이 갑자기 떠올랐으며, 문제가 해결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몹시 서둘러 실험실로 가서 라벨이 붙어 있는 플라스크를 찾은 그는 어떤 방법으로 유리를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를 줄곧 생각하면서 그날 밤을 실험실에서 보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인쇄기를 이용해서 그 이튿날에는 벌써 한 장의 안전유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안전유리는 그 소재의 디자인과 관련하여 3중이라는 뜻을 가진 '트리플랙스(triplex)'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두 장의 유리 사이에 한 장의 질산셀룰로오스를 끼워 넣어 합계 '3'의 투명한 판을 열로 밀착시키는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공장생산까지의 과정에는 수년이 소요되었다. 그 때문에 베네딕투스가 새로운 안전유리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얻은 것은 1909년이었다.

베네딕투스가 안전유리를 발명한 것은 자동차의 프론트유리로부터 부상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 새로운 얇은 층으로 이루워진 유리가 최초에 실용된 것은 다른 용도였는데 그것은 제1차세계대전 때의 가스마스크의 렌즈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동차의 수와 그 스피드가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자 유리로 인한 부상이 문제가 되어 안전유리가 미국 자동차의 표준이 되었다.

(해설) 독자 중에는 옛날 자동차의 프론트유리가 오래되면 누렇게 변색하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안전유리용의 유리를 샌드위치하는 데에 사용한 플라스틱이 질산셀룰로오스로서 이것이 햇볓을 받고 오래되면 노랗게 변색하기 때문이다.

1933년 접착제는 질산셀룰로오스에서 초산셀룰로오스로 바뀌었으나 그것의 경우 햇볓에 의해서는 잘 변색되지 않았으나 넓은 온도 변화에서의 저항력이 낮았으며 잘 흐려졌다. 질산셀루로오스와 초산셀룰로오스는 모두 셀룰로오스로 만들어지며 그 원료는 목재나 기타의 천연재료였다. 플라스틱 재료를 더욱더 찾는 과정에서 완전한 합성고분자인 폴리비닐부티랄수지가 초산셀룰로오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알았다. 1939년부터는 이것이 자동차, 항공기 기타 강하고 투명한 재료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겹유리의 표준이 되었다.

안전유리의 다른 형태로는 가운데 플라스틱을 끼워 얇은 층을 이룬 형태가 아닌 강화유리가 있다. 이것은 깨질 때 잘 다치지 않는 파편이 되는 것으로 자동차의 옆과 뒤의 창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기타 몇 나라에서 자동차 앞 유리는 겹유리를 상용하게 되어있다.

항공기의 창에는 온도나 압력의 양 극단을 견딜 수 있는 큰 강도와 고 속의 상태에서 새와 충동해도 이상이 없는 탄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여 여러 층의 유리와 플라스틱을 겹친 복합체로 된 아주 특별한 유리창이 실용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자동차의 프론트유리가 깨졌을 때에 중심의 플라스틱에 붙어있는 파편에 의해 생기는 피부의 열상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 3층 유리의 안쪽에 제2의 플라스틱층을 사용하게 되었다. 1987년에는 특정한 차에 시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결과는 만족스러운 편이다. 정면 충돌사건으로 안측에 열상 방어용 플라스틱 코팅을 한 프론트유리에 부인이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으나 타박상과 충격이 있었을 뿐으로 얼굴이나 머리에 열상은 없었다.

강화유리를 제외한 이들 모든 안전유리의 원리는 베네딕투스가 1903년에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다. , 유리의 파편을 플라스틱의 필름으로 흩날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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