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실존 철학
8장 철학적 인간학
9장 해석학 –정신적 대상의 이해-
10장 응용윤리
11장 종교철학
12장 역사철학
13장 심리철학 –육체와 영혼의 관계-
14장 여성 철학
7장 실존 철학
A. 현대철학
시간은 절대로 뒤돌아보는 일이 없다. 시간은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간다. 달리는 시간의 등 위에서 우리는 각자의 빈 상자를 가득 채워야 한다. 공허하고 빈곤한 삶은 얼굴 표정 위에 드러나 발각된다. 모든 일 가운데에서 글쓰기는 내게 가장 큰 충족감과 풍요의 느낌을 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책상 위에 원고가 두껍게 쌓이고 그것을 만지면 가슴이 뜨뜻해진다.
또다시 저녁해가 기운다. 저물어가는 햇살 속에 엉켜 있는 나무들이 포근해 보인다. 이제 산책할 시간이다. 살찐 나무들 사이에 간간이 서 있는 경직되고 퉁명스러운 표정의 죽은 나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곁을 지나가면 언제나 소름이 끼친다.
이제 가치론,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에 대한 스케치가 끝났다. 그 가운데에 몇몇 현대 철학자가 다루어지기는 했지만 주로 고대, 중세와 근대가 중심이 되었다. 이제 다양하고 복잡한 실존 철학과 철학적 인간학, 그리고 근대의 딜타이에서 비롯되어 오늘날의 가다머,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와 논쟁을 겪은 해석학을 간략히 다루기로 하겠다.
현대가 현대철학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현대철학이 현대를 만들었는가? 철학이 유행을 쫓지는 않지만 철학도 시대적 상황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커다란 과학적인 진보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현대철학은 다채로운 변화를 겪어왔다. 모든 자연현상이 엄밀한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근대의 기계론적 결정론과는 반대로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거기에 상응하여 철학에서도 절대적 지식이 있다는 믿음이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갔다. 이성에 대한 본격적인 회의는 19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일어난다. 20년대까지만 해도 인간 주관의 인식능력을 절대화한 후설의 현상학이 있었다.
현대철학은 극도로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현대철학의 특징을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데는 큰 무리가 있다. 다음에 제시되는 현대철학의 특징은 현대철학 전체가 아닌 몇몇 일부의 흐름에 들어맞는 것이다.
a. 감각 경험, 즉 지각된 사실만을 지식의 최종 근거라고 보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적 경향과 더불어 기계론적 자연관 및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적 경향(현상학, 해석학)
b. 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생성에 관심을 두는 현실주의(생 철학, 실존 철학)
c. 인간 중심주의나 주관주의 및 자연지배사상에 대한 비판적 경향(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시적 명상적 사유, 레비나스의 타자철학, 주관이 언어를 통해 형성된 결과에 불과하며 말의 그물에 갇혀 말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는 프랑스의 데리다, 푸코, 라캉 등의 반휴머니즘)
d. 인간의 특별한 존엄성을 강조하는 인격주의(사르트르 등의 실존 철학)
e. 칸트 식의 물 자체와 현상의 구분을 거부하고 실재 그 자체를 인간이 파악할 수 있다는 신념(현상학)
f. 종합(우주의 본질에 대한 풍부한 상상)보다는 분석(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현상의 분석) 지향(현대철학 53~54쪽)
현대철학에는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과학적 지식은 개인적 기호나 인격적 참여와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 형이상학과 반형이상학주의,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등 서로 대립된 경향들이 양립한다.
B.현상학과 분석철학
현대철학을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눠본다면 휴머니즘, 주관주의, 반과학주의의 특징을 갖는 현상학적 조류와 반휴머니즘, 객관주의, 반형이상학주의, 과학주의의 특징을 갖는 분석철학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니체와 키엘케고르, 그리고 생 철학으로부터 생성과 개체중심주의를 물려받은 실존 철학은 현상학적 주관주의와 합류했고 현상학적 방법(특히 본질직관)을 사용했다. 주어진 현상과 사실에 충실하려고 하르트만의 태도 역시 부분적으로 현상학적인 것이다. 비록 주관의 현상학에 대한 반동이기는 하지만 또다른 현상학이라고 볼 수 있는 타인의 현상학을 전개한 레비나스 역시 현상학 계열에 집어넣을 수 있다. 막스 셸러의 가치론, 감정주의 윤리학, 철학적 인간학 역시 현상학적 본질직관을 주요 방법으로 사용하는 현상학적 철학이다. 현상학은 형이상학적 이론을 직접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지만 플라톤의 이데아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는 본질의 존재를 인정하고 본질의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아직 전통철학과 형이상학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다.
현대의 영미 철학자 중심의 분석철학(종종, 영미철학. 과학철학, 언어철학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은 콩트(1798~1857, 인류 발전 3단계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과학적 단계), 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실증주의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철학의 흐름으로써 전통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개념 유희, 개념의 잘못된 사용으로 간주하고 거부한다. 분석철학은 감각적 지각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사실만이 지식의 최종 근거라는 실증주의에 입각해 있다. 그러므로 감각적 사실과의 대조를 통해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세계는 무한하다'와 같은 형이상학적 명제는 분석철학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된다. 분석철학, 특히 과학철학은 수학이 물리학의 도구이듯이 철학도 논리학을 도구로 하여 과학적 명제들의 논리적 정합성을 검토하는 일종의 과학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철학은 더이상 사이비 문제인 철학 문제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보조도구가 되어야 한다.
위와 같은 취지에서 언어 분석을 중심과제로 삼는 분석철학은 철학 내용을 빈곤하게 만들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검증 가능성의 원리(감각으로 확인 가능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려는 원리)는 모든 학문의 학문적 자격을 박탈시킬 위험도 있다. 즉 감각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한 명제만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철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도 거짓에 불과한 것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소금은 짜다'라는 간단한 명제조차도 그것이 '모든'이라는 주어를 가지고 있는 한 완전히 검증되기는 불가능하다. 이 세상의 모든 소금 맛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학, 물리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학문이 각자가 다루는 '모든' 대상에 공통적인 보편적 법칙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모든 학문이 영역에 검증 가능성에 원리를 충족시키지 못한 거짓말에 부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대개 학문들이 복합적 구조를 가진 복잡한 문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역시 간단한 검증이 불가능하다. 검증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앞의 저 포도가 검다.'와 같은 관찰 가능한 단순 문장들뿐이다.
분석철학의 핵심 인물인 카르납은 전쟁을 피해서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독일로 귀국하면서 과거의 급진적 견해를 철회하고 서양 형이상학에 대해 보다 관용적이고 유연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분석철학내에서 다시 심신의 문제, 윤리학 문제, 보편의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세계철학사 하권 479쪽). '도둑질은 악하다' 같은 윤리적 명제는 비록 감각적으로 검증될 수는 없으나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타당한 언어 사용으로 간주된다(세계철학사 하권 481쪽).
나는 인간으로서 운명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형이상학을 단지 언어유희나 사이비 문제로 보면서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만일 언어만을 물고 늘어지는 언어 분석을 철학의 과제로 삼는다면 그것은 철학의 주와 종을 혼동한 것이다. 언어분석은 철학의 가장 부차적인 마무리 작업에 불과하다. 그것을 유용하기는 하지만 철학적 두뇌 없이도 가능한 한 차원 낮은 작업이다. 건축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건축가가 집을 다 지은 뒤에 유리창의 얼룩을 지우고 바닥의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과 같은 것이다.
C. 인간이란 무엇인가
실존 철학의 이념
철학의 주요 관심사는 언제나 인간이었다. 가치론이 인간의 삶을, 인식론이 인간의 인식을 다루고 있다면 존재론은 인간 존재를 다른 존재와 더불어 다루고 있다. 자연 형이상학을 대신하여 현대에 나타난 새로운 형이상학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 관한 형이상학이다. 현대에서 인간에 관한 보다 체계적이고 심오한 탐구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본질을 주제로 하는 철학적 인간학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삶의 상황 속에서 느끼고 행위하는 개별적 인간을 주제로 하는 실존 철학이다.
비합리주의
플라톤을 비롯한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을 인간의 최고 기능으로 보고, 감정을 잘못된 인식과 악한 행위의 근원으로 취급하고 천시했다. 반면에 근세의 쇼펜하우어, 딜타이, 니체, 베르그송 등의 생철학자들은 거꾸로 지성보다는 감정과 의지를 우위에 두고 지성적 인식은 생의 종속적 도구에 불과하다고 본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지성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약자에 불과하며 거센 강자인 충동을 제압할 수 없다. 지성은 비록 밝은 눈을 가지고 있으나 다리 병신이고, 의지는 비록 눈이 벌었지만 튼튼한 다리를 가졌다. 의지의 등에 업혀서 다니는 지성이 의지에게 똑바로 가라고 아무리 명령해도 소용이 없다. 의지는 제멋대로 날뛴다. 딜타이에 의하면 칸트식의 순수이성은 달콤한 즙이 다 빠져버린 무색, 무미, 무취의 과일과 같다. 우리는 인간을 파악할 때, 이성뿐 아니라 감정과 의지를 더불어 가진 살아 있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주제화해야 한다.
개별자의 철학
실존 철학은 이러한 비합리주의적인 생철학의 기본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와 더불어 실존 철학은 개별적 개인을 전체와 다수보다 우선시하는 키엘케골의 사고를 근본적 토대로 삼는다. 키엘케골은 진리가 국가나 민족 같은 커다란 전체 속에서 실현되며 발전된다는 헤겔의 전체주의에 반대하여 개별적 개인이 진리를 담고 있으며, 개별적 개인이 구체적 개별적 상황 속에서 혼자만이 유일하게 느끼는 진리가 진정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키엘케골에 의하면 대중, 즉 다수결은 비진리이며 오히려 주체성이 진리이다. 타인과 비교하며 타인을 쫓아 행위하며 자신을 공통적 법이나 관습과 도덕에 비춰보는 윤리적 단계보다는 유일무이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실현하고 유일무이한 단독자로서 신 앞에 홀로서는 종교적 단계가 더 높은 경지에 속한다. 진정한 의미의 윤리는 자기 자신을 선택하며 자기 자신을 찾고 만나는 것이므로 종교적 단계야말로 윤리적 단계보다 한층 더 윤리적인 것이다.
본질주의의 거부
실존 철학은 개별자의 철학이며 개별적 인간에 대한 철학이다. 플라톤적인 이데아나 본질, 또는 보편자는 개별적인 인간실존 뒤에 오는 부차적인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유신론에서처럼 탄생 이전부터 신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개개인이 스스로 선택하여 채워넣어야 할 어떤 것이다. 유신론에 의하면 우리는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미리 불어넣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해야 한다. 그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실존주의, 특히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에 의하면 신은 거짓 환상이고 미리 규정된 인간의 본질 같은 것도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또는 내버려진 존재(사생아)이다. 인간의 몸이 먼저 이 세상 밖으로 내던져졌고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각 개인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연필의 제작자는 연필의 용도와 본질을 미리 알고서 거기에 따라 연필을 만들었다. 따라서 연필의 본질은 연필의 존재에 앞선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그런 사물적 존재와는 정반대로 인간의 실존과 존재가 인간의 본질에 앞선다. 실존 철학의 기본 정신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몸의 철학
실존 철학에서는 감정과 의지와 더불어 몸이 부각되어 주제화된다. 합리주의에서는 인간이란 한 마디로 이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개의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이란 한 마디로 살아있는 몸이다. 니체에 의하면 나는 몸이고 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생각, 느낌 등의 배후에 있는 자아가 다름 아닌 몸이다. 그리고 의식은 신체의 거울에 불과하며 신체야말로 의식을 좌우하는 주체이다(주체는 죽었는가 170쪽). 이러한 니체의 사상은 신체를 인간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던 포이에르바하나, 먹고 마시는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는 마르크스(무엇을 먹느냐가 어떤 인간인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인간을 정신적 존재라기보다는 신체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존재라고 본 키엘케골과도 상통한다(주체는 죽었는가 130~131쪽).
마르셀(가브리엘 마르셀, 1889~1973,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무엇인가 내 안에서 사고한다') 역시 몸은 영혼의 도구가 아니라 영혼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실존주의와 많은 점에서 상통하는 메를로 퐁티(1908~1961, 인간은 감각으로 저주받은 존재)도 인간은 무엇보다도 신체 주관이며, 신체 속에 들어있는 실체적인 속인간, 즉 영혼이 따로 없다고 주장한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4쪽). 이러한 신체철학은 심신의 상호 연관성과 불가분리성을 내세우는 심신일원론에 가깝다. 실존 철학자 가운에 아직도 전통적인 심신이원론을 고수하는 샤르트르는 육체를 사물과 같은 존재, 즉 즉자적 존재라고 보고 의식만이 자유로운 존재, 대자적 존재라고 보았다.
실존주의의 특징은 키엘케골을 시조로 하며 생철학과 연속 선상에 있다는 점, 본질철학과 합리주의에 대립된다는 점, 반면에 개체와 개인 중심적이며 실존을 본질보다 앞세운다는 점, 지성주의에 대립하여 의지 중심적이라는 점, 주관, 객관의 분열을 극복하고 세계와 일체가 되려고 추구한다는 점이다. 실존주의라는 말에 내포된 실존의 뜻은 영원한 본질에 대립되는, 지금 여기의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의미하며 그런 존재 가운데 특히 개별적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구체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느끼고 행위하는 감정과 의지와 육체를 지닌 인간이며, 불변적, 고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로운 능동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물질처럼 타성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상태를 벗어나고 초월하여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탈바꿈해가는 카멜레온이다.
D. 사르트르
장 콕토가 감독한 '게임은 끝났다.'라는 사르트르의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를 무척 좋아한 나는 대학시절부터 프랑스 문화원에 자주 들렀고 깊은 분위기와 미학이 넘쳐흐르는 그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노조운동을 하다가 길에서 암살당한 한 남자, 그리고 처제와 바람난 남편에 의해 독살당한 한 귀부인이 저 세상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서로 손을 잡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고 가슴도 뛰지 않는다. 한탄에 빠진 그들을 신은 이 세상으로 다시 살려서 보낸다. 그들의 과제는 24시간 안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합치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둘 다 저세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신분이 다른 그들 간에는 많은 오해가 있게되고 주위의 방해를 받게되어 결국 불화를 겪는다. 살아난 뒤 정확히 24시간 뒤에 그들은 가기 다른 장소에서 살해당한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죽음에 대한 묘사이다. 밤 12시가 땡땡 치면 그날 죽은 사람들이 이 세상 막다른 골목에 총집합하여 줄을 서서 신고하고 등록한다. 계단 밑 지하에 지상과 지하 사이의 통행을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다. 등록을 마친 죽은자들은 다시 이 세상으로 나와서 나 돌아다닌다. 죽은 자의 발걸음은 느릿하고 산사람은 빠르게 걷는다. 죽은자는 산 사람을 볼 수 있지만 산 사람은 죽은 자를 볼 수 없다. 거리는 그 옛날부터 죽은 사람들로 빽빽하다.
탁월한 문학가인 사르트르는 절대로 철학을 알기 쉽고 부드럽게 쓰지 않았다. 특히 그의 대표작은 '존재와 무'는 굉장히 난해하다. 사르트르의 실존 철학은 한 마디로 자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란 한 번 도달하면 언제나 머무를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노력하여 다시 도달하고 보전해야만 유지되는 상태이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존재 문제에 응용했다면 사르트르는 자유문제에 응용했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73쪽).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이 인간의 불변적 본질이 있다고 믿었다면, 사르트르는 그와는 반대로 인간의 정해진 본질은 없으며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하이데거가 인간중심주의, 즉 휴머니즘을 거부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면 사르트르는 휴머니스트로서 실존주의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았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73쪽).
사르트르에 의하면 만일 인간이 신, 자연, 또는 이성과 같은 선천적(경험 독립적으로 보편타당한 것을 지칭한다. 공리는 경험의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애초부터 보편타당하다) 원리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원고를 들고 대사를 외우는 무대 위의 배우에 불과하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74쪽). 그러나 신은 없으므로 인간의 본래 상태는 백지이고 이 백지 위에 각자가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여 그려야 한다. 자유가 권리이고 선택권이지만 자유는 절대로 날아갈 듯이 가볍고 즐거운 어떤 것이 아니다. 자유가 있다면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인간의 죄에는 인간을 잘못 만든 신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인간이 스스로를 선택하여 자신을 만들어가므로 각자는 각자의 행위와 삶에 대하여 100% 책임을 져야만 한다. 신은 없고 이 세상에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객관적 가치 기준이 없으며, 선택은 어느 상황에서나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안한 존재이다.
사르트르와 반대되는 입장, 즉 이 세상이 산이나 엄격한 자연법칙에 의해 작동되므로 인간의 자유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입장에서 인간은 불안감과 책임감으로 무거워질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는 그런 종류의 결정론적 변명(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 진행되고 결정된다.)을 하는 자를 자유로부터의 도피자, 겁쟁이, 그리고 쓰레기 인간이라고 비난한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81쪽).
사르트르는 비슷한 의미에서 프로이트(1856~1939,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성욕에 기초한다) 심리학도 비판한다. 우리의 의식과 의지가 무의식에 의해 지배된다는 프로이트심리학은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하는 책임 회피를 초래한다. 무의식 속에 숨겨진 것도 우리가 의도적 선택에 의해 숨긴 것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적 충동에 의한 행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숨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 그 무엇을 숨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0쪽). 뱀을 보고 기절하는 것까지도 의도적 행위라고 보는 사르트르에게는 무의식적 행위, 정신빠진 행위, 착각, 사랑과 미움, 질투...... 의 모든 것까지도 고의적인 것이고 선택이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에 속한다.
자유는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불안이란 인간이 아무런 본질도 없는 허무적 존재로서 출발하여 스스로를 창조해나가는 자신의 존재를, 즉 자유를 의식하는 데서 온다. 인간은 불안을 회피하고자 하나 인간 존재 자체가 곧 불안이므로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현대철학 182쪽). 자유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시도 역시 타인의 자유와의 충돌과 투쟁에서 좌절된다(현대철학 183쪽). 즉자(즉자 존재: 타성적 수동적 물질, 필연성), 대자적 존재(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의식)라는 모순적 존재인 신이 되려는 인간의 시도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현대철학 184쪽). 결국 자기를 탈피하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좌절된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인간은 완전한 우연의 장난에 말려들고 내버려진 느낌,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존재인 듯한 느낌, 구토의 느낌 속에 놓여 있다. 인간은 내버려진 존재이며 사생아이다. 데카르트가'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사르트르에게는 '나는 쓸데없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어울린다.(즉자. 대자적 존재 : 신, 자유+필연성)
E. 하이데거
셸러의 문장은 너무도 명료하며 머리, 배 꼬리가 분명히 손에 잡힌다. 그러나 하이데거(1889~1976,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의 문장을 읽다 보면 머리가 잡힐 듯하면 꼬리가 없고, 긴 꼬리가 잡히는 듯하면 머리가 없다. 술어는 주어에 대해 뭔가 새로운 내용을 얘기하는 듯하다가도 결국 동어 반복이 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후설의 철학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기는 후설과 대동소이하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설레는 마음의 진동이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하이데거의 깊은 속마음을 읽어내고 쉬운 언어로 통역해주는 듯한 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겔벤의 '존재와 시간 입문서'('시간과 공간사' 출간)이다. 그 책은 매끈한 번역은 아니지만 내게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좋은 다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는 내앞의 책상을 단지 부피(연장)를 가진 물리적 물체로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우리가 거기에 앉아 책도 보고 일기도 쓰는 삶 속의 친숙한 도구로 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사실 하나만을 알아도 하이데거는 전통철학의 틀에 매이지 않는 아주 신선한 철학자, 그리고 친근한 철학자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존재와 시간'을 멍하니 들여다보면, 거기에 분명히 쓰여있어도 눈에 띄지도 않는다.
얼마 전에 서점에서 문학가 지망생인 듯한 한 여자가 오늘은 존재에 대해서 뭔가 꼭 알고 싶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뜯어말렸다. 철학을 이십 년 넘게 공부한 나도 그 책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녀가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현상과 현상학
후설은 모든 것이 현상으로 드러나며 나타나고, 현상 배후에 숨겨진 것은 없다고 본다. 나무 앞에 서서 나무를 볼 때 보이지 않는 뒷면은 나중에 뒤에 가서 관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현상은 대개 드러나 있지 않으며 감춰져 있다고 본다. 나무는 현상으로서 드러나 있지만, 나무의 존재(나무를 존재하게 만드는 보다 심오한 원리)는 감춰져 있는 현상이다. 하이데거 의미의 현상이란 드러난 현상뿐만 아니라 앞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현상까지도 포괄한다. 하이데거가 밝혀내려고 의도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대개 감춰져 있는 존재라는 현상이다.
후설의 현상학이 존재 문제룰 배제하고 존재를 인식하는 의식에 관심을 두는 의식의 현상학이였다면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강조점을 의식에서 존재로 이동시킨 존재의 현상학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기술하려고 시도한다면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숨겨져 있는 현상, 즉 존재를 볼 수 있도록 발굴해나가는 방법론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초지일관된 목표는 존재이고 존재론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실존 철학자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그의 철학이 실존 철학으로 보이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즉 하이데거는 존재를 탐구하는 통로로써 인간실존을 선택했다. 다시 말하면 실존이 삶 속에서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게 되었다.
인간실존을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드러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하면 인간은 불안해진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현재의 상황, 마주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 그때 이해란 정확한 과학적인 이해가 아니라 모호하고 어렴풋한 이해이다. 어쨌든 인간은 존재를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이 삶에서 체험하는 막연하고 불분명한 존재 이해를 개념적이고 존재론적인 이해로 바꾸는 작업을 하이데거는 해석이라고 부른다('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 해석학은 무엇인가 56쪽). 세계에 대한 인간 현존재의 전반성적(개념, 학문에 앞서는 선행단계)해석, 즉 세계에 대한 선이해를 반성적, 철학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곧 해석학적 순환(해석의 심화과정)이다. 하이데거의 존재 탐구의 의의는 존재라는 감춰진 현상의 발굴이며 그 구체적인 방법은 인간의 존대 이해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현상학은 곧 존재의 해석학이다. 현상학의 학(logie)이란 부분의 어원을 따져가면 '은폐된 존재자를 끄집어냄'이라는 뜻이 있다(현대철학 168쪽). 현상학이란 발견되지 않은 채 파묻혀 있는 현상을 끄집어내는 것, 즉 해석학이기도 하다(현대철학 168쪽).
인간존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것을 하이데거의 개념으로 바꿔서 표현하자면, 현존재의 존재는 무엇인가? 우선 인간은 또한 현재의 자신을 벗어버리고 무엇인가로 새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다. 한 개인의 과거가 어떤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를 창조해 나가는 사르트르적, 또는 실존주의적 인간상과 일치된다. 하이데거에서 각 인간 현존재는 이 우주에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각자성, Jemeinigkeit)이다. 하나의 사과는 이 세상 모든 사과들 전체를 대표하는 한 예이며 다른 사과로 대체될 수 있지만 현존재는 다른 현존재와 치환 불가능하며,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한 예일 수도 없다. 그러나 대개의 인간 현존재는 그러한 본래의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을 상실한 채 대중심리와 유행과 잡담에 휩쓸려서 살아간다. 즉 평균성에 안주하고 매몰되어서 비본래적인 상태 속에 머무는 것이다.
일상적 삶 속의 인간 현존재는 세계 속에는 살아가는 존재이다 현존재는 세계내 존재이다.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곧 자기 바깥에 있다는 것, 자기를 떠나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주체는 죽었는가 31쪽)
하이데거에서 인간은 내면적 영혼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안에 내던져진 존재, 세계 안에 있는 존재이다(주체는 죽었는가 31쪽). 많은 철학자들이 주관과 객관을 따로 분리하고, 따라서 인간이 세계의 사물들을 만나고 인식하려면 자기 바깥으로 나오는 과정, 즉 초월(바깥으로 건너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이데거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를 빠져나와 세계 속에 몸을 담그고 있고 이미 사물이나 타인과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근본 구조로서의 세계내 존재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며, '세계내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들 곁에 있는 존재로서, 세계 속에 이미 내던져져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밀 앞서서 기획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 해석학은 무엇인가 63쪽)
인간은 세계 속에서 사물을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며, 마주치는 인간을 가까이 또는 멀리하거나 무관심하게 지낸다. 일상적 현존재는 탄생과 죽음의 어느 한 지점에 존재하며 죽음을 의식하기를 회피하거나 망각하고, 죽음을 자신의 진정한 가능성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 있으면서 일상성과 평균성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가운데 왠지 모를 불안의 기분에 휩싸인다. 그것은 '이렇게 계속 살아도 좋은가. 이것이 본래의 나인가'라는 회의 때문이다. 불안이란 현존재가 만나는 모든 존재들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는 듯한 근원적인 기분이다.('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 해석학은 무엇인가 67쪽) 이런 불안은 현존재를 일상성 및 평균성으로부터 해방시키며 그를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개별화시키고 분리시킨다.('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 해석학은 무엇인가 66쪽) 현존재는 불안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미리 마주쳐 보고 양심과 죄의식을 되찾는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미리 계획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현존재의 일상적 세계가 침몰하고, 근원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닌 세계가 빛을 발하면서 태어나게 된다('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 해석학은 무엇인가 68쪽).
현존재가 세계내의 존재자들에 대해서 가지는 관심은 삼중의 시간성을 암시한다. 현존재는 내던져 있음, 빠져 있음, 기획 투사라는 세 개의 시간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을 앞으로 던짐은 미래를, 세계 속에 빠져 있음은 현재를, 내던져 있음은 과거를 지시한다. 세 개의 시간성 가운데 미래가 가장 중요하다. 현존재는 죽음에의 존재이기 때문에 본래적인 미래는 유한적이다.(현대철학 174쪽)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다. 현존재의 존재는 시간성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
하이데거는 그의 후기 사상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현존재를 통로로 한 존재의 탐구와 거꾸로 된 방향, 즉 존재에서 현존재로 내려오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여기서 인간 현존재는 존재의 부름을 수동적으로 따라간다. 존재는 마치 계시처럼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인간은 존재의 지배자나 인식자가 아니라 거꾸로 존재가 인간의 지배자이고 인식자이다. 존재를 드러내어주는 수단은 언어, 특히 시적인 언어놀이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산업기술사회에서 수량적으로 계산되는 객관화된 언어가 늘어나고 고대 그리스의 심오한 로고스(존재와 사유 간의 균형추)가 아니라 한낱 객관적 판단의 수단에 불과한 논리학이 배타적, 전면적으로 지배하여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57, 61쪽). 산업기술적 사유는 세계 만물을 주관에 대한 객관으로, 그리고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런 사유에 대한 치유책이 명상적 시적 사유이다. 시적 사유는 존재를 대상이나 도구로 삼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존재에 대한 비대상적, 비계산적, 비체계적 이해이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64쪽) 그것은 존재가 나를 부를 때 따라가서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고 동조하여 대답하는 것이다. '나무가 광합성을 통해서 엽록소를 만든다'는 과학적 사유보다는 '나무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헤라클레스이다'라는 시적 사유가 나무의 존재에 훨씬 더 가깝게 근접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자아가 실존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포괄하며, 따라서 철학의 모든 가능한 문제를 포괄한다.(존재와 시간 입문서 27쪽) 그리고 모든 학문적 탐구는 존재 이해를 전제로 한다.(존재와 시간 입문서 47쪽) 따라서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론을 모든 학문과 철학의 토대가 된다는 의미로 기초 존재론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인간학이 인간의 고유방식, 특수 법칙성을 탐구하는 가운데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등한시한다는 이유로 인간학을 거부한다. 즉 인간학과 존재론은 서로 방해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변함없이 존재 중심적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학은 아니지만, 실존 분석을 통해 인간의 존재 방식을 독특한 방식으로 조명했다고 볼 수 있다.
F. 메를로 퐁티
메를로 퐁티는 직접적으로 실존 철학을 전개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철학은 많은 점에서 실존 철학과 상통한다. 우선 메를로 퐁티는 현대 실증주의가 생생한 사실들의 생명성을 죽여버리고 조작한다고 보고 실증주의를 경멸한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2쪽). 이 점은 베르그송적인 생 철학과도 유사하고 반실증주의라는 측면에서 후설의 현상학이나 현상학의 후계자인 실존 철학과도 유사하다.
사르트르는 메를로 퐁티가 진정한 삶과 인간 고뇌, 그리고 일상적 삶을 중시했다고 평가한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3쪽).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 사고를 하는 합리적 존재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구체적인 세계와 삶 속에서 신체를 가지고 변화무쌍한 세계를 체험하는 존재이다. 똑같은 사과에서 아침에는 시큼한 맛을, 저녁에는 떫은 맛을 느낄 수도 있는 신체를 가진 인간은 우선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라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존재이다. 메를로 퐁티가 중시하는 지각세계는 후설 현상학의 후기에서 나타난 생활세계와의 연장 선상에 있고, 하이데거의 세계내 존재와도 쉽게 연결된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신체와 의식이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체 속에 영혼과 같은 또 하나의 실체적인 속인간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신체 주관이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4쪽) 메를로 퐁티는 내면적 사유 자아의 외향적 수행자로서의 신체 관념을 거부하고 의식은 근원적으로 몸으로 있다고 주장한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4쪽)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서 보면 신체는 순수과학적 개념으로 측정될 수 있는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 몸짓, 성행위, 그리고 대화를 통해서 세계에 나타나는 신비롭고 의미 있는 양식이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3쪽) 세계 또한 인간과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미 세계 안에 있으며, 또 오직 세계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안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04쪽) 비가 온 뒤 찬란한 태양을 바라볼 때 태양의 존재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가 명료하게 다가온다.
생활세계로서의 지각세계는 과학 세계에 앞서서 존재하며 과학 세계의 근원이기도 하다. 과학은 삶 속에 지각된 것을 기호를 통해 다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지각에 주어지는 세계는 모든 판단과 사유, 모든 학문과 과학의 근원이다('메를로 퐁티에 있어서의 <보는 것>의 의미', 사회과학의 철학 197쪽). 이러한 메를로 퐁티의 사상은 생활세계가 모든 과학의 근원이며 과학이란 생활세계에다 이념의 옷을 입힌 것뿐이라는 후설의 후기사상 그대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생활세계 속의 지각의 상대성을 깊이 파헤친 점에서 후설보다 일보 진전했다고 볼 수 있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지각세계는 일보 진전했다고 볼 수 있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지각세계는 우리 체험에 주어지는 세계이며, 겉보기에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차 있으나 나름대로의 질서와 법칙을 갖춘 세계이다.('메를로 퐁티에 있어서의 <보는 것>의 의미', 사회과학의 철학 203쪽이하) 사유가 자아 속에 있음이라면 지각은 세계 속에 있음이다.('메를로 퐁티에 있어서의 <보는 것>의 의미', 사회과학의 철학 207쪽)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사물 그 자체이고 본다는 것은 사물 그 자체와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아주 작은 나무도 그보다 훨씬 작은 잡초 옆에 서 있으면 커보이듯이 사물 그 자체를 접촉하는 지각세계는 언제나 착각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애매성의 세계이며 우연의 세계이다.('메를로 퐁티에 있어서의 <보는 것>의 의미', 사회과학의 철학 207~217쪽) 지각세계 속의 형태, 크기, 색깔, 그 어느 것도 확고부동하고 불변적일 수 없다. 어떤 사물이 놓이며 조명이 어떤가는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바로 지각세계의 그런 애매성과 우연성 속에 인간의 자유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메를로 퐁티에 있어서의 <보는 것>의 의미', 사회과학의 철학 217쪽)
사르트르나 하이데거가 후설의 순수의식을 버리고 구체적 실존을 주제로 했듯이, 메를로 퐁티도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과 현상학적 방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순수의식을 거부한다. 그 또한 의식에서 존재로 그것도 신체 존재로 이행했던 것이다. 지각하는 신체 또는 지각하는 주관은 생생하게 살아서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생명적 생적 주관이며,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단일체로써 삶을 체험하는 자유로운 실존적 주관이기도 하다. 사르트르가 인간을 자유롭도록 운명지어지고 저주받은 존재라고 보았다면 메를로 퐁티에게는 인간은 감각하도록 저주받은 존재라는 말이 어울린다. 메를로 퐁티는 사고보다 지각을 우선시했지만 그의 근본 의도는 지각과 사고의 불가분리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고 없는 지각이 존재하지 않듯이 지각없는 사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와 지각의 합일은 다양한 요소들의 합일체로서 의 인간의 근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철학 코미디 7
후설
후설 : 어떤 인간이든지 간에 순수 자아를 갖고 있지. 너와 나의 순수 자아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야. 그리고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불변한 것이지. 그러니까 내가 젊든 늙든 간에 나의 순수 자아는 언제나 변함없이 순수한 채로 있는 거야.
실존주의자 : 내가 순수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죠? 그리고 각자의 감정이 왜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지요?
후설 : 모두가 순수 자아를 갖고 있지만 마치 맑은 수정에도 진흙이 묻으면 흐릿해지듯이 순수 자아는 감정과 육체적 요소에 의해 흐릿한 것처럼 보이는 거야.
실존주의자 : 나의 순수 자아가 항상 흐릿하다면 차라리 순수 자아가 아니라 얼룩 묻은 자아가 나의 본래적 자아가 아닐까요?
철학 속담 7
여성 철학자가 적은 이유는 대개의 여성들이 철학을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 끝냈기 때문이다.
8장 철학적 인간학
석사과정에 갓 입학했을 때 무엇을 전공으로 선택할 것이지 뚜렷한 방향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철학의 어느 분야이든 일단 깊이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똑같은 진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강의를 듣고 있던 후설현상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매일같이 도서관에 앉아 건조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후설의 책을 읽었다. 평균 한 달에 한 권 정도를 독파했고 닥치는 대로 2차 서적들을 복사해두었다. 그 당시에 복사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까지도 손을 대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다. 석사 과정 2년 동안 후설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영혼은 바삭바삭하게 메말라갔다. 처음에는 생소하고 알아듣기 어렵던 후설의 사상은 날로 친숙해지고 개념들이 서 있는 맥락도 뚜렷하게 잡혀갔다. 그러나 후설이 바로 내가 안주해야 될 고향이라거나 더욱더 깊이 천착해야 될 신비롭고 풍부한 동굴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받고 독일 유학의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박사 과정에서 셸러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라는 셸러의 조그만 철학적 갈증을 해소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후설의 제자들이 왜 후설을 배반하고 나름대로의 길을 갔는지 너무도 이해가 잘되었다.
A. 철학적 인간학 개념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철학은 끊임없이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왔지만 인간의 본질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인간학이 성립된 것은 1928년에 셸러의 저서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가 출간된 다음부터였다.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는 미완성이고 아주 얇은 책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셸러는 자신에게 철학적 의식이 처음으로 싹틀 때부터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존재적 위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사로잡혔다고 위의 책 서문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 책에서 셸러는 그 동안의 생물학, 심리학 등의 여러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동물과 인간을 바교함으로써 양자간의 본질적 차이를 밝히고 있다.
셸러와 같은 쾰른대학교의 동료 교수 플레스너(1892~1985, 인간은 울고 웃을 수 있는 존재이다)는 셸러와 거의 동시에 '유기체의 단계들 그리고 인간'을 '철학적 인간학 입문'이라는 부제와 함께 출간한다. 플레스너는 셸러와 독립적으로 오랜 기간의 탐구를 통해 나름대로 철학적 인간학에 도달했던 것이다. 본래 생물학자였다가 철학으로 전환한 플레스너는 셸러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식물과 인간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플레스너의 저서는 두껍고 난해하기 때문에 셸러의 저서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보통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는 셸러로 알려져 있지만 플레스너 역시 공동 창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약 12년 뒤 겔렌(1904~1976, 인간은 결핍 존재다)은 셸러의 단초를 이어받아 인간과 동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비교한 '인간'이라는 저서를 내놓는다.
철학적 인간학도 실존 철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단순한 지성적 존재나 인식 도구로 파악하지 않고 살아 숨쉬는 생적 존재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존 철학이 구체적 삶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개별적 인간의 영혼 구조를 밝히려고 한 반면에, 철학적 인간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타당한 인간의 보편적 본질을 목표로 한다. 실존 철학은 인간을 안으로부터 관찰한다면,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다른 존재자와 비교함으로써 인간을 밖으로부터 관찰한다.(철학적 인간학 50쪽) 대개의 실존 철학자들은 인간의 보편적 본질을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적대감을 품었다. 키엘 케골은, 인간은 모두 같으며 인간은 다른 인간을 흉내냄으로써 인간이 된다는 헤겔철학을 비판하고, 인간일반이 아니라 너, 나, 그, 즉 각각의 독립적인 인간을 강조한다.(철학적 인간학 50쪽) 야스퍼스(1883~1969, 진정으로 실존함은 초월하는 것이다) 역시 인간학은 인간을 고정시키고 대상화시킨다고 비판하다. 인간은 야스퍼스에 의하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열려져 있는 가능성이다.(철학적 인간학 51쪽)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화해나가는 개개의 인간을 그 무슨 개념으로도 고정시킬 수 없다는 인간학에 대한 비판은 부당하다. 실존 철학 역시 생성 변화 속의 개별 인간의 공통적 구조를 밝히려고 한다. 인간이 열려진 가능성이라는 야스퍼스의 견해 역시 인간을 일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며 어느 한 측면에서 고정시켜 파악한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똑같은 인간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보편적인 언급을 할 수 없다면 어떤 철학이나 어떤 학문도 성립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은 대상의 동일성을 어느 정도 전제로 함으로써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 철학적 인간학자들
앞서 언급한 셸러, 플레스너, 그리고 겔렌의 사상을 여기에서 간략히 요약해보겠다.
셸러
셸러는 다윈의 진화론이나 쾰러의 원숭이 지능 실험의 결과로서 인간과 동물을 연속적으로 파악되거나 인간이 완전히 동물 영역에 집어넣어지는 것에 완강히 반대한다. 비록 고등동물도 지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지능 이외에 정신도 가지고 있다. 정신은 인간이 갖고 있는 것으로 동물적인 충동의 억제 능력이고 영원한 본질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셸러는 이러한 정신의 본질을 세계 개방성(weltoffenheit)이라고 불렀다. 동물은 자신의 생물학적 환경(환계)에 갇혀 있고 충동적 자극과 반응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인간은 충동을 물리치고 열린 세계를 가질 수 있다.
플레스너
플레스너는 인간의 본질을 자신의 중심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바깥에서 볼 수 있는 능력, 즉 자기 자신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고 이것을 탈중심성(Exzentrizitat)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중심에서 이탈되어 영원한 불안과 영원한 진보로 판결내려진 존재이다. 플레스너는 인간학의 세 가지 근본 법칙을 제기한다. a. 첫째로, 자연스러운 인위성의 법칙에 의하면 인간은 직접적인 환경이라든가 자연적인 확실성과 안정(피난)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위물인 사물을 매개로 우회로를 거쳐야만 한다. 인간은 원래부터 인위적으로 살고 있다. 인간은 본래부터 인위적인 도구와 거주지. 즉 문화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다(철학적 인간학 85쪽). b. 둘째로, 직접성의 중개하는 법칙은 인간은 미리 주어진 것의 직접성에 의존하기는 하나 이 직접성은 그 자신의 인식행위 형성과 또 항상 새로운 발명과 발견에 의하여 중개되며 끊임없이 인위적 인간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철학적 인간학 85쪽). c, 셋째로, 유토피아적 입장의 법칙은 인간이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세계와 자기 자신을 무에서 경험하며 따라서 확고한 기반, 절대적 세계 근거인 하느님을 대망하는 것을 말해준다(철학적 인간학 85쪽).
겔렌
겔렌은 셸러가 말한 세계개방성이 인간의 우월성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의 부적응성을 암시한다고 본다. 세계 개방성이란 짐이며 부담이다. 그것은 세계에서 쓸데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인상들을 짊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세계 개방성이란 곧 (동물적인) 환경 결핍성이다. 동물은 언제나 자신의 환경에 완벽히 적응하고 환경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한다. 동물의 지각, 기억, 행태, 그 모두가 환경에 적응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날 때부터 신체적 공격 수단이나 방어 수단이 없고 제대로 된 본능도 없기에 주어진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 능력이 없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전문화된 기능이 없는 결핍 존재이다.(세계철학사 하권 417쪽) 두터운 털가죽, 날카로운 이빨이나 날개......, 그 어느 것도 인간은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인간이 만일 자연 환경 속에 그대로 방치되면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그러한 생물학적 결핍을 보충해주는 것은 바로 지성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지성을 발달시켰고 행동을 통해 자연을 개조했다. 인간은 집을 짓고 옷을 만들었으며 각종 기술과 법, 제도를 만들었다.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변화시킨 자연의 총괄 개념이 문화이다.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메워주고 자연을 개조하기 위해 행동하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다. 인간의 언어는 조상 대대의 경험과 문화를 간단히 전수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C. 셸러의 철학적 인간학
셸러는 생동력 넘치는 깊은 정신과 더불어 강한 정열을 가진 철학자이다. 그는 칸트의 엄격한 법칙주의 윤리학에 대립되는 감정론적 윤리학을 세웠고, 철학적 인간학뿐만 아니라 지식 사회학, 형이상학, 종교철학 등 다방면의 저술을 완성했다. 첫 번째 부인은 연상의 이혼녀였고 그들의 결혼은 연하의 여인과의 사랑으로 무너졌다. 부인은 이혼을 거부하고 이혼 조건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 가난했던 셸러는 곤란을 겪었으나 익명을 요구한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이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셸러는 다시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삼각관계를 견디지 못한 두 번째 부인은 스스로 물러난다. 셸러는 몇 개월 뒤에 마리아와 세 번째로 결혼하게 된다. 이 일화로 인해 셸러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철학계에 퍼져 있다. 그러나 바람둥이란 깊은 정열과 사랑 없이 이 꽃에서 저 꽃을 방황하는 사람이며, 셸러는 결코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셸러는 깊은 정열가였다. 후설은 셸러를 고도로 날카롭고 자립적이며 학문적으로 엄밀한 탐구자라고 평가했고,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셸러가 풍부한 문제의식으로 현상학을 크게 진보시켰다고 평가했다.
영혼의 단계들
고속 촬영기를 통해서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던 셸러는 힘차게 움직이는 식물에게도 영혼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식물의 영혼을 인정한 점에서, 셸러는 생명과 영혼을 동일시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와 일치한다. 셸러에 의하면 육체(생명)와 영혼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단일체이다. 인간에게서 영혼과 육체는 대립 관계가 아니라 불가분리적이다. 육체와 영혼 모두가 자연에 속한다. 자연을 초월해 있으며 자연과 대비되는 기능은 정신이다.
셸러는 우주 속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영혼을 4단계로 분류한다. 가장 낮은 단계의 영혼은 식물이 갖는 영혼인 감지적 충동이다. 감지적 충동은 느낌과 충동의 미분리상태로서 의식과 감각, 사고가 결핍된 상태이다. 식물에게는 빛을 향한 단순한 지향이나 회피만이 있을 뿐이다. 대상에 대한 막연한 (표상이 결핍된) 쾌락과 고통이 식물이 갖는 유일한 두 가지 상태이다. 감지적 충동은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인간도 갖고 있는 기능이다. 인간에게서 감지적 충동은 원초적 저항 체험, 즉 실재 체험의 근원이다(사물의 실재는 우리의 의지에 부딪혀오는 일종의 저항감으로써 느껴진다).
감지적 충동에서 파생된 두 번째 단계의 영혼은 본능이다. 새끼오리는 알에서 깨어 나오자마자 물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 본능은 선천적인 것으로써 학습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본능은 마치 신체 기관처럼 고정불변의 것으로서 어떤 훈련을 통해서도 바뀌어질 수 없는 것이다. 본능은 개체보다도 종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다.
본능에서 파생되었으나 본능보다 유연한 영혼의 단계가 연상기억이다.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울린다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어도 개는 침을 흘리게 된다(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 이처럼 과거 행위를 토대로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연상기억이다. 연상기억의 또다른 뒷면은 조건반사이다. 대개 충동적 욕구의 만족에 효과적이었던 행동이 반복되고 고정되어 습관으로 변화한다.
연상기억에서 생성된 새로운 형태의 영혼은 실천적 지성이다. 실천적 지성은 일종의 선택능력이다. 높은 곳에 매달린 바나나를 본 원숭이는 막대기를 도구로 사용하여 바나나를 딸 수 있다. 이처럼 미리 겪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의 예감과 갑작스런 통찰의 능력이 지성이다. 셸러에 의하면 생존과 생활의 필요에 봉사하는 자연과학은 아직 바나나를 따는 원숭이의 막대기와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정신
지성은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것인 반면에 정신은 동물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인간 특유의 것이다. 인간은 정신을 소유함으로써 동물과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한다. 정신이란 셸러에 의하면 이성을 포함한 이념적 사고, 본질직관, 호의, 사랑, 후회, 경외심, 행복, 절망, 자유 결단과 같은 의지적 감정적 작용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신의 특징은 우선 생명적 충동에서의 자유이며 따라서 환계에서의 해방, 즉 세계 개방성(=세계 소유성)이다. 정신은 사물을 대상화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 역시 대상화하고 인식할 수 있다. 동물은 보거나 듣지만 자신이 보고나 듣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정신은 또한 사물의 본질을 인식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아플 때 나의 지성은 '병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생각하는 반면에, 정신은 거리를 둔 명상적 자세에서 무엇이 고통의 본질인가를 사색할 수 있다. 석가는 한사람의 가난한 자와 병자, 죽은 자만을 보고도 고통이 세계의 본질적 속성임을 곧장 알아냈다.
우리는 보통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에 몰입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타당한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라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인식은 탈현실화를 전제로 한다. 탈현실화는 곧 속세적 불안의 제거이기도 하고 현실적 충동의 지양, 즉 금욕작용이기도 하다. 동물은 현실에 대해서 항상 긍정적이지만 인간은 충동을 부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이고 모든 현실에 대하영원한 반항자, 영원한 파우스트이다.
정신과 그 아랫 단계인 영혼(=생명=육체)은 서로 완전히 다른 본질을 갖지만 실제적 현실 속에서는 상호 의존적이다. 예술가가 아무리 뛰어난 착상을 갖고 있어도 물감과 붓,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손이 없다면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생명은 정신에게 힘을 부여한다. 정신 그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 하르트만의 존재론을 받아들인 셸러는 높은 존재일수록 무기력하며 정신이 가진 힘은 마치 기절 상태의 그것처럼 약한 것이라고 보았다. 생명은 정신에게 힘을 줌으로써 정신화되고, 정신은 생명에게서 힘을 부여받고 생명화된다.
셸러는 단계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고, 우주의 모든 존재 가운데 정신을 최고 단계의 존재로 보는 점에서 전통철학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신과 같은 정신의 자립성과 힘의 소유를 인정하는 전통철학과는 반대로 셸러는 정신의 무기력을 주장한다. 이때의 무기력이란 물리적 힘의 결핍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정신은 다른 존재보다 우월한 존재인가, 아니면 단지 이질적인 존재인가? 식물적 동물적 특징을 인간이 가지고 있고 거기에다가 정신까지 더불어 가지고 있다며 셸러의 인간학에서 인간이 만물 가운데 가장 우월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정말로 동식물적인 능력을 겸비하고 있는가? 인간이 식물처럼 엽록소를 산출해낼 수 있을까? 인간이 지진을 예감하는 동물처럼 정확한 본능적 지관을 가질 수 있을까? 오히려 우주의 각 단계단계는 나름의 개성과 장점을 갖는 동등한 것이 아닐까?
철학 코미디 8
칸트와 후설
칸트 : 인간은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고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법이야. 과학이 제아무리 발달해도 마찬가지야.
후설 : 그렇지 않아요. 우주의 모든 비밀은 언젠가는 겉으로 현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에요. 모든 것은 우리 앞에 나타나고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는 인식할 수 있지요.
칸트 : 그렇지 않아. 나타나는 것만 나타나고 나타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아. 현상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을 나는 어려운 말로 물 자체라고 불렀지.
후설 : 선생님은 무엇인가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조금도 인식할 수 없다면, 그것이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도 없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칸트: (마음속으로) 이 친구 앞에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겠어. 이 친구는 언제나 자기가 아는 것은 존재하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거든. 그러니까 이 친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철학 속담 8
철학을 즐기려면 철학을 떠나야 한다.
9장 해석학 ~정신적 대상의 이해~
A. 해석학 개념
세계 속의 모든 대상들은 인간이 만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자연과 문화로 간단히 분류된다. 문명이 발달해갈수록 자연은 줄어들고 문화가 늘어간다. 문화란 인간이 만든 것, 그것도 대부분 나 아닌 타인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손길에 둘러싸여 있다. 타인이 만든 집과 자동차, 타인이 만든 편지봉투와 책, 신문, 수표, 그리고 타인이 내뱉은 말들.....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감정과 사고를 내포하고 있다. 고딕식 성당과 마천루는 서로 다른 정신적 표현이다.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칵테일잔 역시 서로 다른 삶과 정서의 표현이다. 그림, 음악, 조각.....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신간들, 그리고 도서관에 빽빽이 꽂힌 책들은 작가의 정신을 담고 있다.
책과 연관해서 떠오르는 인간적인 그림 하나가 있다. 그것은 독일 화가 슈피츠벡의 '책벌레'라는 그림인데 머리가 하얗게 센 학자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려고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양손에 책을 들고 있고 팔꿈치에도 책을 끼고서 위태한 사다리 위에서 책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다.
산다는 것은 타인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을 필수적인 전제로 한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책을 읽지 않고서는 무사할 수 없고, 타인의 말과 타인들이 만든 표지판, 안내문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자연적 사실의 인식과 더불어, 정신적 내용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인식과 이해 개념을 넓게 쓰면 인식도 이해의 일종이고, 이해도 인식의 일종이다. 그리고 인식과 이해는 상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에서 인식과 이해 개념은 뚜렷이 구분된다. 인식은 자연대상, 자연법칙, 있는 그대로의 삶의 진리와 가치에 대한 파악이고, 이해는 타인이 자연과 삶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 것을 표현해놓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인식은 있는 그대로의 1차적 세계에 대하 파악이라며, 이해는 타인의 눈에 비친 세계, 즉 2차적 세계에 대한 파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감정과 사고와 의지는 겉으로 표면화될 뿐 아니라 종이 같은 매개체 위에 고정되어 누구나 볼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표면화와 대상화의 대표적인 예는 예술작품이나 학술서적이다. 그 이외에 발설된 말과 얼굴 표정, 그리고 몸짓도 있다. 종이 위에 씌여진 문학작품이나 악보, 돌 위에 새겨진 조각품같이 물질을 매개로 표현된 정신은 오랜 기간 동안 보존 가능한 반면에 말이나 표정은 곧바로 사라진다. 아무튼 겉으로 드러나 표현된 정신을 객관화된 정신이라고 부른다.
객관화된 정신의 이해를 주제로 삼는 철학의 분과는 해석학이라고 불리운다. 해석이란 보다 체계적인 이해를 가르킨다. 해석학(Hemeneutik)이라는 용어는 신의 말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신의 사자 헤르메스에서 파생되었다. 해석학의 출발점은 '성서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논의였다. 예를 들면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계시이므로 이성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해 있는 신앙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000년 전에 씌여진 성서의 의미는 2000년 전의 상황과 사고방식에 맞추어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대적 상황에 맞게 이해되어 우리 삶에 적용할 것인가?
B. 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는 성서 주석과 문헌학에 국한되어 있던 해석학을 확장하여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해석학으로 만들었다. 해석학은 이해와 해석의 기술론으로 된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해석에는 모든 접근 가능한 역사적 문헌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를 파헤치고 들어가는 문법적 해석과, 신비적 직관적 방법을 통해 저자의 독톡한 개성과 천재성을 탐색하는 심리적 해석이 있다.(해석학의 이해 33쪽) 해석학 이론들의 다양한 변화와 전개 가운데서도 거의 불변적으로 남아있는 해석의 원리는 해석학적 순환이다. 이것은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것이다. 예를 들면 해석학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외국어 문장 해석과 번역을 어렴풋하게 떠올린다. 이것이 이해의 출발점이 되는 불분명하고 어렴풋한 선이해이고 선입견이다. 나는 해석학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한다. 거기에 해석학이란 이해의 방법에 관한 이론이고 성서 해석의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씌여 있다. 그러면 이제 나는 맨처음에 떠올린 해석학 관념을 지우고 수정한다. 그리고 수정된 선이해를 가지고 해석학을 계속 공부하며 해석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이처럼 해석학적 순환이란 이해가 심화되는 과정을 도식화하는 개념으로서 어렴풋한 선이해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선이해의 수정으로, 수정된 선이해에서 보다 심화된 이해로 나가는 순환과정을 가리킨다. 대개 선이해는 어떤 것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과 이해이며, 이해는 한 부분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해석학적 순환은 전체에 대한 이해와 부분에 대한 이해 사이의 순환이기도 하다.
C. 딜타이
딜타이에 이르러서 해석학은 정신적 삶을 이해하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이 된다. 자연과학은 낙하 현상과 같은 개별적 현상을 보편적 자연법칙이 한 예로 취급하는 반면에 정신과학은 르네상스라는 개별적인 사실, 카프카의 작품 '변신' 등 개별성과 독자성에 관심과 가치를 둔다. 자연과학은 순수 지적 과정을 통해 현상을 분류 설명하고, 정신과학은 우리의 모든 주관적 능력의 협력을 통해서 이해하고 서술(기술)한다. 자연과학적 설명이란 자연적 안과관계에 대한 해명이고, 정신과학적 이해란 정신적 삶의 직접적(추리, 논증, 계산을 초월한) 파악이다.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자연과학의 인식이론적 기초를 세웠다면 딜타이는 역사 이성(시대를 초월하여 불변하는 보편적 인식 주관인 칸트의 순수이성에 대립하여 시대와 역사에 따라 변화하는 주관을 의미한다.) 비판을 통해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기초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D.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이해가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에서와 같은 단순한 학문의 방법론이 아니라, 학문 이전의 삶 속에 서 있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방식이라고 본다. 실존 철학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하이데거에서 인간 현존재의 본질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놓여 있다. 이해란 역사 속에서 개별적 삶을 살고 결단하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며 구성요소이다.(현대 해석학의 동향 157~176쪽)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현존재의 해석학, 즉 현존재란 무엇이며 현존재가 자신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를 이해하는 해석학이다.(현대 해석학의 동향 159쪽) 딜타이가 해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내면세계의 표현 또는 텍스트였다면, 하이데거의 해석의 대상은 은폐된 존재이며 더 나아가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124~125쪽)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가 작가가 의도한 작품의 의미 그대로에 대한 객관적 학문적 이해를 이상으로 삼았다면, 하이데거는 객관적 이해는 불가능하면 무의미하다고 본다. 후설은 자연과학적 실증주의를 거부했지만 아직도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엄밀성을 추구함으로써 과학주의적 향수에 젖어 있다. 딜타이도 마찬가지로 자연과학과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정신과학적 방법으로서 이해를 내세우지만, 이해의 객관성을 추구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과학주의의 영향권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그런 과학주의나 객관주의와 구분되는 뚜렷한 반과학적 태도를 보여준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186~187쪽)
딜타이가 해석자 자신의 주관적 관점을 배제한 무전제적 해석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하이데거는 그렇게 아무런 전제도 개입되지 않은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00쪽). 내가 릴케의 사랑의 시를 해석한다면, 내가 아주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사랑의 관념을 전제로 삼게 된다. 딜타이는 내가 가진 주관적 견해를 될 수 있으면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반대로 하이데거는 나의 주관적 견해를 배제하고 완전히 중립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릴케의 시를 이해함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내가 나를 떠나거나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해석은 텍스트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골동품 수집이나 우상 숭배적 태도를 탈피할 수 없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17쪽) 씌여진 작품을 넘어서서 그 안에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까지 나아가려면 폭력이 필요하고, 과학적 객관적 해석을 초월해야 한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31쪽) 텍스트에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텍스트 자체를 넘어서서 텍스트가 다루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는 것이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33쪽). 그리고 이해가 나의 존재방식이라면 이해를 위해 내 나름대로의 존재 방식을 벗어나거나 초월할 수 없는 것이며 초월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비극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사랑의 시든지 비극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의 시에 대한 비극적 이해가 나의 고유의 존재방식의 일부라면 그것이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다.
E. 가다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을 이어받은 가다머(1900~, 너와 내가 다르면 다를수록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이해를 저자, 텍스트, 해석자 간에 일어나는 존재 사건으로 파악한다. 가다머 해석학의 중심 문제는 객관적 이해를 위한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현상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해조건의 해명)이다. 하이데거에서와 같이 가다머의 해석학은 정신과학의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과정으로서의 이해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노력이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40쪽)
선입견의 긍정적 의의
딜타이와 같은 전통 해석학은 텍스트 저자가 의도한 의미 그대로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런 객관적인 이해를 위해서 해석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현대적 선입견을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자연과학적 실험에서 모든 외부적 우연적 영향이 차단된 실험실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물리학에서조차도 완전한 객관적 실험은 불가능하며 관찰자의 위치와 움직임과 시각에 의해 실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릴케의 시를 읽을 때 내가 가진 모든 주관적 관점을 버리고 마치 내가 릴케 자신이 된 듯이 릴케의 시를 읽을 수 있을까? 가다머는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내가 나를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나를 떠난 텍스트 자체의 이해는 나의 존재와 너무 동떨어진 것이므로 무의미하다 텍스트 자체 그대로의 이해는 골동품 수집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관점과 선입견은 텍스트 이해의 단순한 방해물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필수 도구이다. 우리는 아무런 관점도 가지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선입견은 우리가 배제해야 하거나 배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필수적 기반이 되는 것이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66쪽) 자연과학에서조차도 과학 이론에 대한 무전제적 이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무전제적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한 텍스트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일하게 타당한 해석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와 관계를 맺지 않은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해석은 결코 영원불변하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68쪽)
저자와 해석자의 간격의 긍정적 의의
전통 해석학은 저자와 해석자의 거리와 차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즉 양자가 동일하면 동일할수록 이해가 더 잘된다고 본다. 릴케의 시는 현대의 한국인보다도 당대의 독일인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텍스트의 이해를 위해서는 해석자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저자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저자와 동일시해야만 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그와는 반대로 산은 가까이 볼 때보다 먼 데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수록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듯이, 저자와 해석자의 거리가 크면 클수록 오히려 더 잘 이해된다. 저자와 해석자 간의 더 넓은 간격, 더 큰 시대적 차이가 더욱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게 만든다.
이해를 위해 내가 저자의 심리로 전화될 필요가 없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남아 있고 저자의 관점도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 동등하게 홀로 선 두 주체의 관점과 이해 지평이 서로 만나고 접촉해서 서로의 공통적 이해 지평이 부분적으로 겹치고 융합되는 것, 한 마디로 지평 융합이 곧 이해이다.
이해의 끝없음
고전 해석학에서 선이해와 이해, 전체와 부분 간의 해석학적 순환은 무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멈추고 해소된다. 객관적 해석에 도달하는 순간 해석학적 순환은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해석을 거부하고 해석이 인간의 존재방식이라고 보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에서 해석학적 순환은 정지됨이 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는 살아가면서 변화를 겪고 나의 관점과 지평도 변화한다. 그렇다면 릴케의 시에 대한 최종적 결정적 이해란 있을 수 없다. 나의 관점과 릴케의 관점은 끝없이 상호 교류하게 될 것이다.
텍스트의 이해란 해석자와 텍스트 간의 열린 대화, 즉 물음과 대답이다. 텍스트는 언제나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존재한다.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대답하려고 한 본래의 물음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91쪽) 해석학적 대화는 종결됨이 없이 무한히 지속된다. '모든 이해는 도중에 있다. 이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가다머의 해석학적 대화의 변증법 107~130쪽, 현대철학과 해석1 109쪽) 해석학적 대화 속에서 해석자는 변형을 겪는다. 해석자는 열린 마음으로 작품의 진리를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의식, 또는 영향사적 의식(해석을 통해 텍스트에 의해 영향받는 의식)은 독단성이 아니라 개방성이어야 한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82쪽)
가다머의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해석학을 이어받은 존재론적 해석학이고 해석을 인간 일반의 존재방식으로 확장시켜 보편적 현상으로 놓고 본 철학적 해석학이다. 또한 가다머의 해석학은 해석을 텍스트와 해석자간의 열린 대화로 본 대화론적 해석학이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적 의미의 변증법적 해석학이다.
가다머에 대한 비판
가다머가 이해의 필수조건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선이해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에 속한다. 선이해나 전통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한 가다머에 대하여 하버마스는 전통과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비판을 가한다. 가다머는 그에 대하여 권위, 전통, 선입견을 부정하는 계몽주의적 입장 역시 일종의 선입견이라고 반박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전통은 이해의 토대이고 전제이며 우리 사고의 바탕이고 사고의 지평이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67쪽) 전통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작용하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 그때 꼬집어서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계몽주의에서 전통과 권위는 이성과 합리적인 자유의 적으로 간주되었으나, 가다머에 따르면 이성은 항상 전통의 내부에 속하며 전통은 이성이 작용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성의 요구와 전통의 요구는 절대로 본질적 대립관계가 아니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68쪽)
가다머의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전통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적용하며 배제불가능하다고 해서 나쁜 전통까지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오류들, 무지한 대중들의 굳어져 있는 잘못된 전제들...... 그런 것들을 발각해내고 깨우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 아닌가? 전통이 단적으로 긍정적인 것이라면 과거에 속한 것이고 전통의 일부인 텍스트도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해도 텍스트와의 대화가 아니라 텍스트의 단순한 흡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F. 해석학적 논쟁들
해석학을 둘러싼 여러 가지 흥미로운 논쟁들이 있다. 우선 슐라이어마허 및 딜타이를 지지하며 객관적 해석을 강력히 옹호하는 베티(이탈리아의 법률사가)와 이해 현상 자체의 해명에 관심을 두는 가다머 간의 논쟁이 있다. 가다머는 객관적 해석이란 역사밖에 서서 무엇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모순된 전제 위에서 있다고 비판한다. 베티는 이에 대해 하이데거와 가다머가 해석학을 아무런 기준도 없는 상대성의 혼란 속에 집어넣는 파괴적 비판가라고 반박한다.(해석학이란 무엇인가 80쪽)
가다머가 이해를 지평 융합이라고 보면서 타자의 이해 가능성을 인정한 반면에 데리다(본래의 사물이 눈앞에 나타나는 형태를 궁극적 진리의 원천이라고 보는 서양형이상학 전체를 현전의 철학이라고 비판)는 이해의 통일이 아니라 이해의 차이에 강조점을 두면서 이해의 불가능성을 들고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다머도 새로운 이해, 다른 이해, 이해의 무한성을 인정하면서 이해의 차이를 긍정한다. 가다머는 그러나 이해의 다양성과 복수성이 곧 이해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데리다를 비판한다. 데리다는 텍스트의 고정된 본래적 의미가 결정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해석의 방법으로서 텍스트의 부정합성, 모순성, 이중성을 탐지하는 비판적 해독, 즉 해체와 산개를 제안한다.(현대사상의 대이동 79쪽) 푸코(1926~1984, 성의 역사)는 만일 텍스트의 의미가 결정 불가능하다면 사회적 정치적 차원의 진리로 결정 불가능하며 현재의 모순적 상태를 영속화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데리다를 비판한다.(현대 사상의 대이동 86~88쪽)
죄악과 오류의 비밀을 탐구하기 위해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방법을 전환한 리쾨르는(현대 해석학의 동향 93쪽) 딜타이 계열의 객관주의적 해석학과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존재론적 주관주의적 해석학의 대립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한다. 리쾨르(인간 존재는 항상 해석된 존재이다. 무전제란 없다.)에 의하면 '인간은 늑대이다.'라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Sense)는 확정 가능하고 고정적인 반면에 그 텍스트가 갖는 의의는 해석하는 주관에 따라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리쾨르에 있어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 211~230쪽) 즉 택스트이 의미는 저자에 의해 종국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객관적인 검증도 가능하다. 반면에 택스트의 의의는 텍스트를 읽는 독자의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된다.(리쾨르에 있어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 214쪽)
객관주의 해석학이 텍스트이 저자를 강조한다면, 주관주의 해서학은 텍스트를 수용하는 독자의 입장을 강조하고, 리쾨르는 그 중간적 입장에서 텍스트 그 자체를 강조한다.(리쾨르에 있어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 214쪽)
데리다는 텍스트 의미의 결정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나아가 모든 것이 텍스트라고 본다. 씌여 있는 글뿐만 아니라 독자도 텍스트이고 하늘, 나무 땅...... 그 모든 것이 텍스트이다. 해석이란 텍스트가 텍스트 간의 만남이다. 리쾨르는 그러한 텍스트 의미의 불확정서에 대한 데리다의 견해를 비판하고 텍스트를 쓰여진 담화, 글쓰기에 의해 고정된 담화라고 본다.(리쾨르에 있어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 220쪽) 텍스트 안에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명료하게 표현되어 고정되어 있다.(리쾨르에 있어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 223쪽) 리쾨르에 의하면 모든 것이 텍스트라는 데리다의 명제는 텍스트 절대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리쾨르에 있어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 221쪽)
철학 코미디 9
칸트
칸트 : 우리 마음은 사물을 비추는 평평한 거울이 아니라 사물에 관한 인식(저 나무는 푸르다)을 만들어 내는 틀을 가진 기계야. 우리는 인식에서 거울처럼 수동적이 아니라 기계처럼 능동적이지. 이것이 바로 내가 이룩한 인식론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야.
학생 : 그럼 이제 저 나무는 푸르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머리는 지금 푸른 나무를 만들어냈다.'라고 해야 되겠네요?
칸트 : 맞아, 바로 그거야.
학생 : 지금 제가 선생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선생님 얼굴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철학 속담 9
서양철학은 지상으로 내려오는 사다리이고, 동양철학은 천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다.
10장 응용윤리
"윤리에는 그렇게 끔찍한 주제밖에는 없나요?" 윤리강의를 듣던 어떤 학생의 질문이었다. 자살, 낙태, 전쟁, 안락사, 동물 실험, 불륜....... 나는 이런 문제가 한결같이 생명과 관계되므로 너무도 중대한데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쳐버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에 당연히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학생의 질문에도 일리는 있었다.
위의 주제들을 가지고 여러 번 강의해 본 결과 학생들이 당연시하는 많은 통념들이 너무도 위험한 것이어서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예를 들면 사회 부조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이나 살인도 정당하다는 생각이나, 내 몸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자살은 조금도 꺼릴 것이 안 된다는 생각, 또는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므로 낙태는 언제 어느 때나 문제가 되지않는 다는 생각 등이 그런 것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다룬 것 같은 선악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가 정통적인 이론윤리학의 주제라면 현대사회의 복잡화와 과학기술, 의료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초래한 다양한 윤리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응용윤리학이다. 응용윤리에는 생의 윤리(생명윤리+의료윤리), 법 윤리, 직업윤리, 환경윤리, 전쟁윤리......등이 속한다. 응용윤리는 이론윤리에 비해 보다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며, 특히 전통윤리가 다루지 못했던 공동체의 윤리를 주제화한다. 전통윤리가 개인 행위의 선악을 주제로 삼았다면 현대의 사회윤리는 사회 구조나 체제, 그리고 제도의 도덕성을 문제삼는다. 예를 들면 국내적 또는 국제적 부의 분배문제, 핵 저지 및 전쟁과 평화의 문제, 생태계 파괴 및 환경 문제는 어느 특정 개인의 행위와 양심을 문제 삼음으로써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도덕 의식이나 사회제도, 사회정책의 관점에서 해결 되어야 한다.(개방사회의 사회윤리 12쪽)
A. 낙태
백합씨는 백합인가, 아닌가? 씨앗은 아직 잎사귀도 뿌리도 달고 있지 않지만 어떤 백합꽃도 씨앗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에 터무니없는 비약은 없다. 씨앗, 시 뿌리, 떡잎......그 어떤 과정도 백합꽃이 피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태아는 인간인가, 아닌가? 수정난, 무정형의 태아, 성장한 태아, 출산 직전의 태아, 출산 직후의 유아, 2개월 된 유아....... 어느 것부터 인간이고 어느 것은 인간이 아닌가?
낙태는 스웨덴, 덴마크를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에서 불법이었다가 1967년부터 차츰 합법화되고 1973년 미연방에서는 임신 6개월 이내의 낙태가 허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태를 금하는 낙태죄를 형법으로 규정하고 있고, 1986년에 개정된 모자보건법에 낙태허용 조건을 명시하고 있다.(고뇌하는 현대인을 위한 윤리학 강의 284쪽) 그것은 다섯 가지 경우로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 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이루어진 임신, 임신의 지속이 모체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이다.(고뇌하는 현대인을 위한 윤리학 강의 284쪽)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행해지고 있는 낙태는 위에 규정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아 낙태나 자녀 숫자 조절, 미혼 임신의 경우가 대다수이다. 우리나라는 낙태 왕국의 오명을 아직까지도 씻지 못하고 있는 설정이다. 비록 법으로 허용된 경우의 낙태일지라도, 태어나지 못하고 생명을 제거당한 인간 생명체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인구조절 정책의 미명 아래 권장되기까지 하는 낙태는 생명경시 풍조를 부추길 위험이 적지 않다.
만일 신체에 특별한 질병도 없고 어느 정도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한 미혼 여성이 미혼모가 되기를 꺼려한다는 이유로 낙태를 한다면 그녀의 행위에 대해 어떤 도덕적 평가를 내려야 할까? 이런 경우 사람들은 흔히 행복을 평가 기준으로 들고 나오곤 한다. 아이가 그녀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가? 아이의 미래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미혼모와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실제적 삶의 난점 등을 들어서 사람들은 낙태를 권장까지 하며, 심한 경우에는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은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조장하는 것이므로 낙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윤리의 발생 근원에는 분명히 행복을 바라는 소망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행위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도둑질, 강도, 강간까지도 정당화될 위험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윤리라면 행위가 가져올 결과보다도 행위 자체의 선악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살인이란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간에 본래적인 악행이다. 사형이나 전쟁의 경우에서의 살인 역시 살인이 본래적으로 악한 것인 한 여전히 악한 것이다. 이미 일어난 과거와 연관된 어떤 이유든지 간에, 그리고 미리 내다본 미래와 연관된 어떤 이유든지 간에 살인은 악하다. 그리고 낙태가 살인의 일종인 한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악한 정도의 차이는 달라진다.
인간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연속적인 것으로 본다면 태아도 인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태아가 그 형태와 기능으로 보아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을 주더라도 우리는 태아를 인간으로 대접하고 생명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임신이 모체 건강을 위협할 경우와 같이 허용된 낙태의 경우에도 낙태는 무죄한 태아의 살해이기에 당연시되어서는 안 되고 죄의식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B. 성도덕
어떤 책을 보니까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한 부부가 잠자리에서 서로의 몸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을 받지 못하고 무감각한 상태에서 다른 상대를 상상 속에서 떠올리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었다. 온 세상을 다 주고서라도 갖고 싶던 어떤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이 10년 동안 매일같이 그것을 가까이에 놓고 바라본다면 분명히 무감각함을 느낄 것이다. 물론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오랫동안 함께하는 동안에 정열이 사라지는 대신에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 끈끈한 정이 솟아날 것이다. 그리고 에로스적 정열 대신에 아가페적 인간애가 서로의 관계를 튼튼하게 받쳐줄 것이다. 에로스적 감정이 사라진다고 해서 부부관계가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다.
성행위의 자연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성행위에 임해야 하는가? 보수주의자나 기독교적 신학 쪽에서는 서의 목적을 번식이라고 본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이를 만들 수 없는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면 피임을 전제로 한 성행위는 자연의 순리에 위배되며 신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최근 동물행동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물들조차도 성행위를 단순한 번식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간의 유대를 위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 행위에 대한 관찰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타당한 사실로 나타난다. 물론 동물들이 그런 식으로 성행위를 하니까 인간도 그것을 당연한 순리로 여겨야 한다는 논리는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므로 동물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논리 역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과연 성행위를 번식에만 배타적으로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쾌락만을 위한, 또는 서로 간의 관계 도모만을 위한 성행위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일까? 성행위의 목적을 완전히 번식에만 국한한다면, 인간의 삶은 자칫 건조해질 수도 있다. 성이 주는 쾌락과 서로 간의 친밀감과 유대감을 도외시한다면 인간은 단지 종족 보존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며 개인으로서의 독특한 인격적 가치를 실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번식이 최고라면 번식이 가능한 모든 남녀 간의 성행위가 허용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성행위가 사랑의 동기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사랑이 없더라도 결혼이라는 의무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물론 서로 사랑하는 부부간의 성행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복잡다양하고 인간은 고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변화무쌍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상대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도 있음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혼이라는 약속을 어기고 사랑하는 다른 대상과 성행위를 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성행위를 할 것인가? 이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부딪힐 수 있는 실존적 고민일 것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 보다 성숙하게 되고, 부부관계를 새롭게 활력있게 다시 연결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일시적인 외도에서 돌아온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통해 부부관계가 더욱 친밀해진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C. 차별의 문제
이 세상에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흑백 차별이 없어졌으며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으나 남녀 간, 흑백 간의 평등은 단지 법적인 문서상의 평등에 불과하고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차별의식이 살아 있으며 그것은 행동으로 표면화되고, 차별 대우가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어느 것 두 개도 동일하지 않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본래적으로 같지 않고 완전한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 개개인뿐 아니라 집단 간에도 마찬가지로 기질과 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우열을 무슨 잣대로 잴 것인가도 문제이고 그것을 잴 수 있다고 해도 우수하다고 판정된 A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B 집단의 어느 누구보다도 우수하다고 해서 인격적인 차별을 둘 수는 없다. 나아가 우수 개인이나 집단에게 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인 불평등을 심화시킴은 부당하다.
어떤 사람이 흑인이나 백인, 또는 남성이나 여성이라고 하는 사실이 그의 지성, 정의감. 감정의 깊이 등에 대해 판단내리게 하여 불평등하게 대우할 명분을 주지는 않는다.(실천윤리학 39쪽) 오히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이익에 동등한 비중을 두어야 하며 동등한 이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불평등 대우, 즉 약자에 대한 우선적인 대우(=역차별 대우)를 감행해야 한다. 지진으로 부상당한 두 환자 A, B가운데 보다 더 위독한 A에게 더 많은 수혈을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은 불평등 대우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평등을 결과로 낳는다.(실천윤리학 45쪽)
단순한 기회 평등은 출신이나 능력이 좋은 자만을 앞서가게 만들므로 기회 평등은 고려의 평등으로 바뀌어야 하며, 능력이 아닌 필요와 기울인 노력에 따라서 교육과 고용에서, 그리고 임금에서 혜택을 주어야 할 것이다.(실천윤리학 59쪽)
D. 동물해방
새집에는 똑같은 것이 없다. 새의 종류에 따라서 재료와 형태와 위치가 가지각색이다. 어떤 새는 풀잎으로, 어떤 새는 나뭇가지로, 어떤 새는 진흙으로 집을 짓는다. 동물들은 그렇게도 서로 다른 겉모습과 개성, 그리고 생활 방식과 기교로 생존해나간다. 그들에게도 고통과 쾌락이 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날카로운 눈과 동료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 동물을 영혼 없는 단순한 기계로 본 데카르트는 지성의 억지 논리에 유혹되어 자명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윤리가 주로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이제 윤리는 그 영역과 지평을 확대하여 인간이 동물을, 그리고 더 나아가 식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흑인과 여성이 형식적으로나마 해방되었다며 이제 착취당해온 동물들이 해방될 차례이다.
인간이 육식이나 감금, 또는 동물 실험을 통해 동물을 이용하고 착취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무엇인가? 동물도 약육강식하듯이 강자인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다거나, 그것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인간의 특권이라는 주장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또는 동물도 같은 종족끼리는 협동생활을 하고 다른 종족은 공격하듯이 인간도 인간과 다른 종족인 동물을 공격할 수 있으며 인간과 비교할 때 지성과 능력과 기질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동물의 이익을 무시해도 좋다고 말한다.
지능이 저급한 존재는 무시되고 착취될 수 있다면 지능이 낮은 백치, 유아, 치매 노인의 생명권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누구든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을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의 옹호는 인간이기주의이고 인간종족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동물의 지능이 저급하다거나 심지어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동물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확인 불가능하며 그것은 우리의 감정 이입에 불과하다는 것도 억지 가설이다. 그런 논리로 나간다면 다른 인간의 고통도 엄밀하게 객관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아프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검증 없이 어떤 것을 당연시함은 잘못이지만 감정에 다가오는 원초적인 사실은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돼지의 목을 칼로 찌른다면 돼지가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다.
샴푸나 화장품의 자극성 실험 과정에서 실험동물의 반 이상이 죽임을 당한다. 여기에 대해 한 마리 동물에 대한 실험이 수천, 수만의 인간을 치유한다면 동물 실험은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해야 할 의무까지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동물 실험은 실제로 그런 정도의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실험을 통해 수만 명의 인간을 구할 수 있다면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은 고아에게 그런 실험을 해도 좋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실천윤리학 90쪽) 동물 실험은 무장하지만 같은 인간에 대한 실험은 잔인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인간중심주의적인 것이다. 인간과의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 생물들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인간의 종족이기주의인 것이다.(실천윤리학 127쪽)
끝으로 슈바이처의 생명에의 외경사상을 여기에 인용해본다. "윤리란 내가 나 자신의 살려고 하는 의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살려는 의지에 대하여 동일한 생명에의 외경을 실천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 속에서 도덕의 기본 원칙이 도출된다. 즉 삶을 지속시키고 소중히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삶을 파괴하고 멈추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능력이 닿는 한 모든 생명을 돕고 구하려고 할 때 그 인간은 참으로 윤리적이다. 그런 인간은 '이 존재나 저 존재가 동정받을 만한가, 얼마나 느낄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 인간에게는 생명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다. 그는 햇빛에 빛나는 얼음 결정을 깨뜨리지 않으며, 나무로부터 잎사귀를 훑지 않으며, 꽃을 꺾지 않으며, 걸을 때 벌레를 밟을까봐 조심한다. 여름밤에 등불가에서 일하며 벌레들이 날개를 태워 줄줄이 떨어지는 것을 보기보다는 오히려 창문을 닫고 답답한 공기를 호흡한다.(실천윤리학 130쪽) 벌레를 밟아 죽일까 봐 빗자루로 바닥을 쓸며 다니는 티베르의 승려나, 식물에게도 세례를 주었던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떠오르지 않는가!
E. 전쟁
전쟁은 우리와 무관하고 옛날 동화처럼 들릴지 몰라도 지금도 세계 곳곳에 민족 간 종교 간의 갈등으로 전투와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언제 핵전쟁으로 전멸하게 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전쟁에도 도덕적인 선한 전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전쟁이든지간에 재앙이고 죄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질문은 마치 '깨끗한 똥이 있는가'라는 질문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전쟁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전쟁이 죄악이라면 전쟁 지역 속에 들어있는 모든 인간이 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전쟁에는 침략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으며, 침략국 가운데에도 전쟁을 결정하고 명령한 자가 있고 그와 무관한 농부와 어린이가 있다. 전쟁 속에서 어떤 위치와 입장과 역할 속에 들어있는가에 따라 악한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침략전보다는 방어전이 덜 악한 것이지만 방어전 역시 그것이 비록 불가피하고 필요했을지라도 대량 살인의 결과를 낳는 한 악에서 탈피할 수는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의 주관과 개성이 제각각이지만 전쟁이 위대한 예술이라고 주장을 했던 러스킨(사회윤리의 제문제 353쪽)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아니면 그런 광란자가 대중 속에 많이 숨어 있다가 전쟁이 나면 즐겁게 총놀이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쟁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은 인간의 평가 능력의 부족을 깨닫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그런 입장이 전쟁을, 도덕을 초월해 있는 어떤 것으로서 정당화시키는 주장으로 잘못 빠져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핵전쟁은 전쟁이 아닌 상호 파멸이라는 램지의 주장(사회윤리의 제문제 353쪽) 역시 핵전쟁은 전쟁이 아니므로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핵전쟁은 상호 파멸이므로 전쟁보다 더 큰 재앙이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중세의 안셀 무스는 전쟁은 부정의이고 군에의 종사생활은 악한 생활이라고 말했다.(사회윤리의 제문제 335쪽) 그리고 수많은 비폭력주의자들도 있었다.
F. 비폭력주의
비폭력주의는 폭력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입장이다. 폭력의 양을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서 비폭력주의를 내세우는 입장을 전략주의적 비폭력주의라고 한다면 폭력 그 자체를 도덕적 금기로 보는 본래적 의미의 비폭력주의는 의무주의적 비폭력주의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폭력이 악이라면 방어를 위한 폭력도 악인가, 라고 누군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폭력적 공격에 대해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고, 폭력에 의해 권리 침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딜레마는 공격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선다면, 스스로도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폭력 일반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딜레마가 일어나는 것이다.
결과주의로 보면 때로 비폭력주의가 평화로운 세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폭력을 보다 날뛰게 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기주의로 보면 비폭력주의는 그 자체로 선이고 자기 희생이다. 물론 비폭력주의는 비현실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비폭력주의를 하나의 이상으로 삼고 최대한으로 폭력을 자제하는 길이 인류가 함께 공존하는 길이 될 것이다.
G. 사형제도
영화 '데드 맨 워킹'은 사형수의 고통과 불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오줌을 싸게 되므로 사형수들은 늘 기저귀를 차고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맨 끝 장면은 사형 집행이었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이든지 간에 가장 객관적인 판단은 만물을 사랑하는 신의 눈길로 바라볼 때 비로서 얻어질 수 있다. 사형이 못된 짓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다. 더구나 사형수에 의해 피해를 당한 당사자나 그의 가족의 입장으로 보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신의 눈길로 볼 때만이 이해관계에 의해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고 사형수와 가장 밀착된 거리에서 그를 알고 그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며 적합한 형벌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은 그것이 사회의 보호 목적이므로 정당하다거나, 사형이 가장 극악한 죄에 대한 아주 적절한 응징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제도는 복수 심리의 충족으로 잘못 사용될 수도 있으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생명권의 박탈이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극악한 범죄에 대한 적합한 응징은 같은 사람을 한 번이 아닌 세 번쯤 사형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원시적인 탈리오법칙을 현대의 문명인이 따를 수 있는 것인가이다. 그리고 사형제도가 있는 사회가 없는 사회보다 범죄율이 낮다거나 사형제도 폐지로 범죄율이 증가했다는 명백한 통계적 증거는 없다(사회윤리의 제문제 323쪽). 범죄자가 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범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최종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형제도는 국가에 의한 합법적인 살인으로서 생명경시 풍조를 자극할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사회윤리의 제문제 327쪽). 인간 생명의 박탈은 비록 국가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악하며, 사형은 일단 부여되면 취소 불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오판으로 무고한 자를 처형할 위험은 언제든지 존재한다.(사회윤리의 제문제 328쪽) 영화 '쇼생크 탈출'을 한 번 보고 생각해 보라.
진정한 의미의 윤리는 결과주의가 아니라 동기주의임을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사형이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것 자체가 살인이고 악한 것인 한 사형은 폐지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얼마 전에 사형제도를 주제로 한 논술시험을 채점한 일이 있다. 가차 없이 비판하고 감점한 나 자신은 얼마만큼 글을 잘 썼는지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H. 자살
죽음은 완전히 부정적인 현실인가, 아니면 긍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이 불사라면 200살 된 자신의 모습을 과연 가만히 눈뜨고 바라볼 수 있을까? 죽은 뒤에 새로운 내세가 기다리므로 죽음이 위안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죽음은 괴로운 삶이 끝이고 완전한 끝이므로 위안이라는 견해도 있다.
죽음은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에게 명백한 위협이 되며 해악으로 간주된다. 죽음은 삶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것들, 쾌락, 행복, 재산......등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재산이나 가족의 상실이 두려운 것이듯이 생명의 상실인 죽음은 당연히 두려운 것이다. 물론 뇌사 상태처럼 단순한 생명 보존은 한편으로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탄생전에 무한한 기간 동안에 부재상태였고 사후에 다시 무한한 부재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왜 탄생 전의 부재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사후의 부재에 대해서만 그렇게도 비탄하는가?
삶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짐과 고통과 불명예뿐이라면 자살은 하나의 비상 탈출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막대한 치료비를 요구하는 중병에 걸린 환자, 사랑하는 가족이나 재산을 상실한 자, 명예를 상실한 자들의 자살은 정당한가? 자살에는 도덕적인 자살도 있는가?
중세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보고, 로크는 인간의 생명은 신의 것이므로 함부로 제거할 수 없다고 했으며,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은 사회구성원이므로 자살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사회윤리의 제문제 431~433쪽) 반면에 공리주의자들은 자살의 결과가 타인에게 이익을 준다면 자살은 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중병 환자가 가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심지어 도덕적이라고 판단되는 자살 행위는 의무이며, 따라서 그런 자살의 회피는 죄이기도하다는 주장까지 있다. 그렇게 되면 자살방조 행위가 아니라 자살을 돕지 않는 것이 죄라는 극단적인 견해로 치닫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윤리학인 동기주의 입장에서 보면 자살의 결과에 따라 자살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부당하다. 자살은 생명경시 행위이고 생명손상 행위이므로 그 자체로 악한 것이다.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죄악인 것이다.
영혼이 자신의 소유라고 해서 제멋대로 된 영혼을 키우는 것이 잘못이듯 몸이 자신의 소유라고 해서 제멋대로 상처를 입히고 죽음을 유도하는 것도 명백한 잘못이다. 자기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타인의 생명과 행복 또한 가볍게 여길 것이다. 윤리의 핵심은 내가 남을 어떻게 다루는가보다도 내가 나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우선적으로 놓여 있다.
'생명이 그렇게 귀중한가?' 단순한 목숨 부지는 공허하지 않은가? 내가 괴로워서 내가 내 목숨 끊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라고 누군가 반문한다면 그는 이미 윤리를 부정하고 윤리영역 바깥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윤리적 설득도 그에게는 먹혀들어 가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 귀중하지 않다면 윤리도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윤리는 높은 덕을 주장하는 고차원적 윤리보다도 우선적이고 긴급히 요구되는 것이다. 생명이 귀중하지 않다면 살인도 비난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윤리 세계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철학 코미디 10
자살
한 청년 : (80세의 쇼펜하우어에게) 선생님은 인생은 권태와 고통뿐이므로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하시면서 왜 스스로는 자살하지 않고 그토록 오래 사셨나요?
쇼펜하우어 :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살하는 편이 살아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널리 알려주기 위해서였지.
청년 : 그러면 선생님은 자살보다는 자살론을 선택하신 것이고, 자살보다는 철학을 더 좋아하신 것이네요. 삶 속의 그 무엇인가를 좋아하신 선생님은 결국 삶을 사랑하신 분 같아요.
철학 속담 10
철학은 독한 엑시스와 같다. 고로 철학을 과식하면 위장이 상한다.
11장 종교철학
종교철학에 대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모으며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마침 FM에서 막스 부르흐(1838~19200의 첼로곡 '신의 날(골 니드라이)'이 울려퍼지고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크고 작은 흐름들이 정지되고 들끓던 열과 분노가 차갑고 차분하게 식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진정한 의미의 휴식과 평안의 한가운데에 내가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이곳은 본래 유대교회에서 속죄의 날에 부르는 찬송가였는데 부르흐가 변주시킨 환상곡이라고 한다.
A. 종교철학
윤리학이 선의 가치를, 미학(예술철학)이 미의 가치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면 종교철학은 성스러움의 가치를 주제로 삼는다. 따라서 종교철학에 관한 설명은 이 책의 맨 앞부분 가치론 뒤에 놓여져도 좋을 것이다. 개별학문들이 각기 맡은 대상에 관한 사실적 구조와 원리를 탐구한다면 철학은 언제나 본질을 탐구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종교철학도 종교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의 한분야라고 할 수 있다. 종교사가 종교의 역사적 발전을 탐구하고 비교종교학이 여러 다양한 종교들 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비교하며, 종교심리학은 인간의 영혼이 신을 경험하고 겪는 변화 과정을 논한다면, 종교철학은 종교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탐구한다.(가치론 312~313쪽)
종교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종교철학은 최근 들어서 비로소 정립되었다.(가치론 314쪽) 종교철학의 출현이 뒤늦은 이유는 인간이 처음에는 외적 감각적 사물에 관심을 가지며 차츰차츰 추상적 초감각적 대상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18쪽) 고대와 중세는 종교적 대상을 가졌으나 그것을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으며, 신의 본질 또는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으로 논의했을 뿐이었다.(가치론 315쪽) 즉 신학은 있었으나 종교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없었던 것이다. 종교철학은 칸트와 헤겔 등 독일관념론에서 대규모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칸트는 종교의식을 비판적으로 탐구했고 인간 행위에 대한 상벌이 끝까지 이루어지기 위해서 신이 요청된다고 보았다. 헤겔에서 종교는 철학의 아랫단계로 간주된다. 철학이 개념을 통한 진리의 적절한 표현이라면 종교는 상징을 통한 진리의 불완전한 표현이다.
B. 종교개념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고 보았고, 첼러는 우리 주관이 신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으며, 지벡은 신의 존재에 대한 지성적 감성적 확신, 그리고 구원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라고 보았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30~31쪽) 종교의 어원을 찾아가보면, '다시 주워모은다, 집중한다(religio)'는 말이 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재결합(religare)'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풀이하면 종교란 신과 인간의 재결합을 의미한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31쪽)
예술이 개념적 이론적 작업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고 행위이듯이 종교도 마찬가지로 개념적 사고가 아니라 체험이며 삶 그 자체이다. 종교는 비합리적인 힘과의 직면이고 신비적인 어떤 것이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32쪽). 사고나 개념이 예술작업이나 예술작품 이해에 부차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듯 종교에서도 그러하다. 진정한 종교, 즉 실천적. 행동적. 생동적. 종교는 논리적 형이상학적 천착과는 거의 무관하며 그것은 삶이며 새로운 삶, 신 앞에서의 삶, 그리고 거듭남이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33쪽)
C. 종교와 철학
종교와 철학 모두가 보이며 나타나는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그 배후의 궁극적 근거를 추구한다. 철학사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철학에 영향을 주었고 반대로 철학도 종교에 영향을 주었다. 신은 철학에서 진리의 보증자로서, 우주의 최상의 존재로서 출현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 신학의 지배적인 핵심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철학은 근본적으로 비판적 사고이며 어떤 대상을 막론하고 의문 제기를 통해 진리 여부를 확인하는 태도를 근본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믿음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철학에서 저급한 단계의 인식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 대개의 철학자가 추측, 소문, 편견과 함께 믿음을 가장 저급한 인식으로 취급한다. 반대로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을 도구로 하는 철학은 인간적인 교만과 궤변에 불과한 것이며 오묘한 신을 인식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종교의 심리적 기원은 구원에 대한 욕구이며 종교의 목표도 구원이다. 종교의 대상은 초세계적인 것, 초지상적인 것, 신적인 것이고 종교적 인식의 원천은 신에 대한 비합리적 직접적 직관이다. 반면에 철학의 기원은 지식에 대한 욕구이며 철학의 목표는 세계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명이다. 철학의 대상은 세계이며 철학적 인식 원천은 현실에 대한 사고와 이성적 합리적 활동이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41쪽) 철학에서 논의되는 신 또한 종교적인 구원의 신이 아니며 단지 세계의 궁극적 근거이며 최고 인식 주체일 따름이다.
D. 종교적 경험
종교의 대상이 신적인 것, 성스러운 것이라면 종교적 경험은 신적인 것의 체험이 될 것이다. 종교적 체험으로는 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신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전율)과 주로 신약에서 나타나는 이끌림의 감정(매혹)이 있다. 전율은 인간과 절대적 거리를 갖는 존재에 대한 외경과 겸손의 감정적 반응이고 황홀적 신비감은 사랑과 신뢰, 그리고 동경의 감정적 반응이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165쪽)
직접적인 마주침으로서의 경험과 거리를 둔 파악으로서의 인식이 구분되듯이 종교적 경험과 종교적 인식도 서로 구분되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나 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서의 종교적 경험과는 구분된다. 신에 대한 인식은 감성과 지성을 통한 합리적인 인식이어야 한다는 아퀴나스적 입장이 있는가 하면, 신은 합리적으로 알려질 수도 없고 말로 표현될 수도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슐라이어마허 같은 신비주의 또는 직관주의적 입장(부정신학)도 있다. 후자에 따르면 우리는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서 정서적 느낌에 의해 신의 신성을 파악해야 한다.(종교철학 32쪽) 신을 우리의 능동적 작용에 의해 대상화시키는 합리적 인식은 신에 대한 부적절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자립적 존재로서의 신은 언제나 주체이지 대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종교적 작용에는 신의 존재함. 신의 전지전능에 대한 인식과 확신작용, 사랑. 신뢰. 희망. 용서. 예배들의 감정적인 존숭작용, 그리고 거룩한 존재와의 만남을 통한 인격적 윤리적 변화를 겪는 형성작용이 있다.(종교철학의 체계적 이해 236~237쪽)
종교적 경험은 나무에 대한 감각적 지각과는 달리 만인 공동적인 것은 아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똑같은 현상을 만나더라도 보는 이에 따라 그것이 종교적 의미를 갖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즉 종교적 경험은 종교에 따라, 그리고 주관적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E. 신 존재 증명
철학에서는 합리적 추론에 의해 신 존재를 증명하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이 세계를 최초로 만들어내고 작동시킨 최초의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것은 신이라는 주장도 있고, 신은 완전자이므로 존재를 결핍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 증명도 있었다. 데키르트는 내 안의 신 관념의 원인으로서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현대의 셸러는 사람들의 종교적 작용과 체험이 있는 것을 미루어볼 때 그 작용에 대응되는 대상인 신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입을 오물거리고 씹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분명히 입속에 음식이 들었다는 논리와 같다.
'신이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에서 '신이 있다'는 논리로 비약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신 존재 증명이 오류라는 이유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순히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어떤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증명 불가능성은 그것의 부재가 아니라 나의 능력 부족에서 기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 지성으로 신 존재증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F. 악의 문제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살인. 강도와 같은 악행이 그렇게도 자주 일어나고 귀머거리. 장님같은 불구, 갖가지 불치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신이 존재하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론, 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질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 신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더라도 동그란 정삼각형을 만들어 낼 수는 없듯이 자유의지를 갖는 동시에 죄를 조금도 짓지 않는 인간은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종교철학 166~167쪽) 신의 의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며 인간의 눈에 악으로 비친 것도 신의 관점에서는 선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G. 기적
성경을 보면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거나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들이 정말로 신이 개입해서 일으킨 불가사의의 기적인가, 아니면 앞으로 자연과학이 발달된다면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자연적 사건인가? 기적은 없다는 입장에서는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 밝혀질 수 없는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법칙을 확장시켜서 그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종교철학 274쪽) 그와는 반대로 기적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모순이며, 물이 물로 남아 있거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가운데 한 개만이 자연법칙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종교철학 274~275쪽) 즉 자연 법칙에는 예외가 있고, 자연과학이 아무리 진보해도 해명할 수 없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이 기적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신이 존재하고 기적을 일으킨다면 어째서 신이 세계대전에 개입하여 전쟁을 발리지 않았는가? 신은 왜 어떤 사건에는 끼어들고 어떤 사건은 지켜보고만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종교철학 296쪽)
H. 종교 다원주의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서 파생되기도 하고(유태교에서 기독교로), 두 개의 종교가 하나로 합치기도 한다.(이슬람교=유태교+기독교). 종교의식 간에는 유사한 점도 많고 교리 면에서도 많은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진정한 의미의 신을 가지며 다른 여타의 종교들은 허위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구원이 오직 하나의 종교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입장(배타주의)도 있고, 상이한 여러 종교에서도 구원과 해방이 가능하다는 입장(다원주의)도 있다. 다원주의에 따르면 신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이한 문화 속에서 출현 가능하며, 계시가 다양한 문화적 옷을 입고 표현될 수 있다.(종교철학 380쪽) 또한 종교의 중심은 교리가 아닌 인격이나 삶의 태도의 변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어떤 종교이든 진정한 종교가 될 수 있다.(종교철학 384쪽)
어쨌든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을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종교철학 380쪽) 즉 한 인간의 믿음에 대한 비판과 그 인간에 대한 인격적 대우는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종교에 대한 테러가 정당화될 위험이 있다. 중세의 유치한 마녀재판이 현대에서 반복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학 코미디 11
철학은 쓸모가 없다.
청년 : 철학은 쓸데없이 복잡하고 어렵기만 하고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철학자 : 그럼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학문은 어떤 것들인가?
청년 : 예를 들면, 기계를 만들어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기계공학이나 질병 치료를 통해서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는 의학 같은 것이지요.
철학자 : 생활이 편안하고 배도 부르고 아무런 고통도 없다면 너는 그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청년 : 저 같으면 실컷 여행하고 다니면서 삶을 즐길 거예요.
철학자 : 삶을 즐기는 것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
청년 : 바로 삶 그 자체에 도움이 되죠.
철학자 : 그렇다면 삶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청년 : 잘 모르겠어요.
철학자 : 삶은 혹시 철학적 사색 같은 보다 차원 높은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철학 속담 11
말이 적을수록 도를 더 많이 터득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도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2장 역사철학
중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제일 싫어하던 과목은 역사였다. 역사시간에 암기해야 했던 수많은 연도와 왕 이름들, 누가 누구를 정복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은 나를 몹시 괴롭혔다. 왕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언제 무슨 일을 했든지간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불만들이 자꾸 일어났다. 아마도 나는 우연적인 개개의 사실이 아닌 영원한 법칙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철학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도 역사 때문에 다시 애를 먹은 일이 있다. 학위를 마치고서도 강의를 구하지 못하고 낙담하고 있을 때였다. 개강을 며칠 앞두고 '역사와 철학' 강의가 내게 맡겨졌다. 제목만 들어도 무시무시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역사' 자만 붙은 책이면 무조건 사서 읽었다. 강의 노트에 잔뜩 써가서 필기도 해주고 발표까지 시켜가며 첫 강의에도 불구하고 멋을 부렸다. 몇 개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한 학기가 무사히 지나갔다. 학생들의 눈도 초롱초롱 빛났고 신선한 강의라는 칭찬까지 들여왔다. 그 뒤에도 연속을 매학기 '역사와 철학'을 담당했다. 어떤 학생이 기말 레포트 위에 쓴 낙서가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있다. '오, 너 역사철학이여! 너는 얼마나 지독하게 어려운 것인가! 내가 언젠가는 너를 기필코 정복하리라!'
A. 두 가지 역사철학
역사철학이란 무엇인가? 역사철학도 철학인 한 역사 속에서 무슨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벌어졌는가를 문제 삼지 않는다. 역사학이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면 역사철학은 역사 자체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철학은 나에게 역사보다 몇 배나 더 흥미롭다.
여기에 오렌지가 있다. 오렌지를 보고 그것이 주황색이고 향기롭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 오렌지를 어떻게 먹을 것인가, 그냥 깨물어 먹을 것인가, 주스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잼을 만들 것인가, 궁리해볼 수도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는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은 무엇이며 역사의 종국적 도달 목적은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을까, 역사의 탐구방법은 어떤 것이 좋은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역사의 본질과 법칙과 목적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 즉 역사 형이상학은 전통적(사변적) 역사철학이다. 반면에 역사를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즉 역사의 인식론은 비판적 역사철학이다. 비판적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 역사철학은 근거 없는 억측이고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거꾸로 전통적 역사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비판적 역사철학은 먹을 것은 내다 버리고 칼만 날카롭게 가는 격일 수도 있다.
B. 사변적 역사철학
역사에 관한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고찰들을 보면, 역사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진 구원계획을 가지고 흘러간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보사관도 있고, 동일한 과정이 역사에서 영겁 회귀되다는 고대 그리스의 순환사관도 있다.(새로운 역사 철학 4, 24쪽) 역사가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를 거쳐 이성 지배적인 인간의 시대로 간다는 비코( 1668~1744, 이탈리아 철학자, 종교는 사회보존의 원칙이다.)의 단계적 역사관도 있고, 만인자유의 시대가 역사의 도달 목표라고 보는 헤겔의 단계적 역사관도 있다.
역사 진행 과정의 배후에 숨겨진 목표가 실재한다는 역사철학에 대립하여 칸트는 역사의 목표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목표는 우리가 역사를 관찰할 때 투사하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목표는 역사 관찰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가 우연적 사건의 잡다한 집합이라면 역사는 정체 불명이고 파악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므로, 겉보기에 잡다한 사건들을 역사의 목표를 중심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역사철학 149쪽) 우리는 자연을 이해할 때 자연에 인과법칙을 투사하듯이, 역사를 이해할 때는 역사에 목적개념을 투사한다.
헤겔의 역사철학
역사는 인간들의 행위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성을 짓고 전쟁을 일으키며 음모를 꾸미고 권력을 잡는다. 이 모든 것이 다름아닌 행위이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의 의도와 행위는 역사의 겉모습일 따름이고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인간과 역사를 배추 조종하는 신(=이성=객관 정신=절대정신)이다. 신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인간과 함께 인간을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 신, 즉 이성의 본질은 자유이며 역사의 궁극 목적은 자유의 실현이다. 세계사는 한마디로 자유의식의 진보이다. 인간은 자유이면서도 자신이 자유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자신이 자유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세계사 초기에는 군주 한 사람만이 자유인 동양적 전제주의시대였고, 그다음은 소수 사람이 자유인 그리스 로마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만인 자유인 헤겔 당시의 프로테스탄트적 게르만시대이다. 여사의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서 신은 인간의 정열을 이용한다. 영웅은 자신의 정열에 불타올라서 세계를 정복하며 세계 정복의 의도가 순수한 영웅 개인의 의도였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것은 신의 의도이며 신의 조작이었다. 이것을 역사에서 이성의 간지(계락)라고 부른다.
하르트만의 역사철학
하르트만에 의하면 위로부터의 역사 고찰인 정신주의 역사관이나 아래로부터의 역사 고찰방식인 유물론적 역사관 모두를 비판한다. 전자는 낮은 존재 범주(물질 같은 것)일수록 강하다는 강도법칙에 위해되며, 후자는 높은 존재 범주(정신 같은 것)일수록 자유롭다는 자유 법칙에 위배된다. 역사는 오히려 여러 층의 존재자와 존재 요소들로 이루어지며 역사 과정의 구조는 극도로 복합적이다. 역사철학의 근본 문제는 대개의 철학 문제처럼 남김없이 풀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역사의 미래를 미리 예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C. 비판적 역사철학
개구리의 생태를 탐구하려면 개구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관찰하고 실험하면 된다. 그러나 제2차대전에 대한 실험은 있을 수 없다. 제2차대전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 우리가 참고로 할 수 있는 것도 기록가 유물들뿐이다. 자료 불충분으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전체적 서술은 불가능하다. 콜링우드는 역사 자료의 빈틈을 상상력을 통해 메우고 앞뒤가 논리적으로 일치하도록 재구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과거사건의 상상적 재건은 단순한 가위, 풀의 뜯어붙이기식의 역사가 아니라, 과거 행위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의 사고를 읽어내는 것이다.
역사적 설명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은 행위자의 사고와 의도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역사는 의도적이고 합리적인 요소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적, 비합리적, 무의식적, 감정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 월쉬는 역사적 사건은 행위자들의 목적과 사고에 의해 일어나므로 역사적 설명은 그 목적을 바탕으로 여러 사실들을 한데 묶어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총괄이다. 아이를 둘 가진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러 가지 곤경에 처하다가 결국 둘이 도망을 치며 나중에는 절망에 빠져 권총으로 자살한다. 삶에는 많은 일들이 복합적으로 엉켜져서 일어나며 언뜻 보기에 무질서하다. 소설가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한 가지 주제(금지된 사랑) 아래 통일적으로 정리한다. 그것이 소설이다. 역사적 설명도 그와 마찬가지로 복잡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커다란 주제 아래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통일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리
여기에 제2차대전에 관한 진술들이 있다. '제2차대전은 히틀러의 책임이다.' '제2차대전은 독일 국민의 반유대적 정서가 빚어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술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것의 진위는 사실과의 합치 여부에 달려 있다는 입장도 있고, 제2차대전에 관한 다른 진술들과의 논리적 합치 여부에 달려 있다는 입장도 있다. 역사적 사실이 자연적 대상처럼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한 역사적 진술을 사실과 일일이 대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전자의 입장은 난점에 부딪히게 된다. 후자의 입장은 역사적 사실은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과학도 시대에 따라 바뀌는 세계관인 것처럼 역사 또한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달리 재구성되고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르네상스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역사가가 여러 가지 사실을 한데 모아 거기에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제멋대로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인과관계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일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콜링우드는 의식적인 행위자의 고의적 행위가 역사적 사건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역사 과정에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단 한 개의 원인이 고립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언제나 선행 조건과 선행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제2차대전이 단지 히틀러 개인의 의도적인 범죄라고만 볼 수는 없으며 독일인이 가졌던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라는 사회적 정서적 요인 또한 중대한 원인이다. 역사적 사건의 원인 또한 어느 정도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존한다. 그것은 똑같은 교통사고를 놓고서도 운전자의 관점에서는 급커브가 사고 원인이며, 도시 검사관의 관점에서는 도로 노면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자동차 생산자의 관점에서는 자동차 설계에 문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역사철학 93쪽)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고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든지간에 언제나 역사 관찰자의 주관적 관점이 개입된다. 물론 없는 사건을 마음대로 지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관찰자는 자신의 눈을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눈의 필연성에 따라 사물을 보게 마련이다.
철학 코미디 12
직관
후설 : 나에게 명증적으로 직관되는 것이 진리야. 저 앞의 꽃은 나에게 명증적으로 직관되는 것이고, 꽃이 저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진리가 되지. 추상적인 진리도 마찬가지야.
학생 : 만일 나에게 선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것임이 명증적으로 직관되는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란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서 명증적으로 직관된다면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후설 : 그것이 바로 직관주의의 난점이야. 직관이란 증명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직관의 옳고 그름도 증명될 수 없어.
철학 속담 12
철학에서 재미를 구하는 것은 절간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이다.
13장 심리철학 ~육체와 영혼의 관계~
'나는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본다.'
무엇을 바라보는 나의 눈동자와 육체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물질이 공간 속의 일정한 한 장소를 점유하듯이 나의 육체는 이 순간 이 무한한 공간 속의 어떤 한 지점 위에 놓여 있다. 창가의 책상 앞에 나의 육체가, 그리고 육체의 한지점 위에 나의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고 그곳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창밖으로 향한다. 그리고 지각한다. '초록빛 잎사귀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진다'라고.
나의 육체와 눈꺼풀을 나는 언제라도 더듬어 만질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존재하며 내 옆에 동행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육체만큼이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나, 나의 의식, 나의 자아, 한 마디로 나의 영혼은 절대로 보거나 만질 수 없다. 나는 본다. 듣는다.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 내가 바라보는 빗줄기만큼이나 빗줄기를 바라보는 나의 영혼은 명료하게 존재한다. 영혼이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이고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영혼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지만 보고 듣고 느끼는 영혼의 작용은 너무도 분명하게 존재하며,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항할 것이다.
지금 나의 영혼이 빗방울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명료한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온갖 첨단 과학기계를 동원해서 두뇌에 갖다 대고 찾아보아도 빗방울을 보고 있는 나의 영혼은 포착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시신경이 움직인다는 것이 파악될 따름이다. 그 시신경이 하늘을 보는지 빗방울을 보는지는 과학 기계로 탐지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나의 영혼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하는지 절대로 탐지되지 않는다. 결국 내 영혼 속에 그렇게도 선명한 빗방울, 그리고 빗방울을 바라보는 나의 영혼을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영혼 속의 사고와 느낌을 컴퓨터로 찾아낼 수 있다면 수많은 재판이나 청문회 같은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여기 서두에서 우리는 일단 육체는 물질적이고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임을 밝히고 잠정적인 전제로 삼기로 한다.
비물질적인 영혼과 물질적인 육체는 서로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어떤 이는 육체는 배와 같고 영혼은 선장과 같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는 육체는 나무이고 영혼은 나무에 새겨진 글씨와 같다고 주장한다. 영혼과 육체의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고 보는 심신이원론이 있는가 하면 영혼이 육체적 현상에 불과하다거나 육체가 영혼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심신일원론이 있다. 심신일원론이든 이원론이든간에 일단은 영혼과 육체에 대한 분리된 개념 규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철학사를 통해 심신관계에 관한 몇 가지 입장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A. 플라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은 불멸하는 완전한 존재이고 육체는 사멸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육체는 오류적 인식과 죄악의 근원이다. 육체는 영혼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방해물이며 영혼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광선아래에 있는 나무에 대한 감각적 지각은 나무에 대한 진리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착각과 혼동만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한 시간전에 초록빛이던 나무가 해진 뒤에는 새까맣다. 현기증이 날 때 나무를 보면 조금 노랗게 보이고, 갈색 안경을 끼고 보니 나무는 갈색이다. 과연 우리의 눈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는가.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의 두 눈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착각하고 혼동하도록 만들 뿐이다. 우리의 감각은 사물의 영원불변한 진짜 모습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가상만을 제공할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저질스러운 욕망의 근원으로서 죄를 낳게 하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도둑질하게 되고 성욕이 일어나면 부당한 욕심을 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불멸하는 완전한 존재인 영혼이 어째서 불완전한 육체 속으로 들어왔는가? 완전한 존재인 영혼이 어째서 불완전한 육체의 방해를 받는가? 영혼이 진정으로 완전하다면 육체에 의해 혼동을 당하거나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육체를 바로잡고 완전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플라톤은 심신이원론의 대표자로서 육체의 존재를 경멸하는 사상으로 서양 사상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B. 버클리
근세의 유심론자 버클리는 나뭇잎의 초록빛은 바깥의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정신 속의 초록 감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인간 정신과 신의 정신)들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육체적 현상은 정신의 출현에 불과하며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에 의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백한 얼굴은 영혼의 공포의 표출이다.
C. 포이에르바하
유물론자인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버클리와는 반대로 영혼이 육체의 배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육체의 부대현상(표피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영혼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주관적 착각이다. 영혼을 따로 떼어내면 추상물에 불과하며 영혼은 육체에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육체의 표현이 될 수 있다.
D. 아리스토텔레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양분해서 생각했고 서로 본질이 다른 것임을 전제로 깔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인 정신을 추가하여 생각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생각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영혼과 육체는 도장 위에 새겨진 이름과 도장의 관계처럼 불가분리적으로 이름조차 따로 분리해서 불러도 안 된다. 내가 살아 있지 않다면 내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으며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이 있음으로써 나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생명이고 영혼이다. 영혼은 바로 육체를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의 원리이다. 유한한 존재인 영혼과는 달리 불멸하는 이성이 있다.
E. 셸러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 영혼, 이성의 삼분설을 이어받은 것이 현대 철학자 막스 셸러의 인간관이다. 셸러는 생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려고 했던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이다. 셸러 역시 육체와 영혼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불가분리적인 단일체라고 주장한다. 육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주체, 눈동자를 돌려서 빗줄기를 바라보는 주체가 곧 영혼이다. 셸러에 의하면 육체와 영혼은 자연에 속한 존재이다. 반면에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우주의 영원한 본질을 인식하고 충동을 제어하는 인간의 능력은 정신이다. 비록 육체, 영혼과 정신의 본질이 다르지만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정신은 육체적 충동, 즉 생명의 힘을 빌어서 자신의 이념과 의도를 실현하며, 충동은 정신의 이념의 실현에 참여함으로써 정신화된다.
F. 신체적 감각의 논리
플라톤 이래 현대의 셸러에 이르기까지 대개 육체는 영혼이나 정신에 비해 저급한 존재로 취급되어왔다.(이제부터의 논의에서 영혼은 정신을, 정신은 영혼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넓혀서 쓰기로 했다). 잘못된 인식이나 행동은 육체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그것은 마치 육체가 죽는다면 영혼은 완벽한 인식과 선한 의지만을 가질 것이라는 환상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죽은 뒤의 영혼, 육체 없는 영혼은 현실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일 영혼이 불멸이라도 현실세계에서 사는 우리로서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현재의 나 자신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육체를 대표하는 시각, 촉각, 미각, 후각, 청각 등 오관의 감각은 때로 혼동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내 손이 차면 책상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똑같은 물건도 큰 것 옆에 놓으면 작아 보이고, 작은 것 옆에 놓으면 커 보인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그리고 아무런 이유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혼동이나 착각에는 분명한 필연적인 원인과 배경이 있다. 물컵에 젓가락을 담가놓으면 꺾인 듯이 보인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착각이고 눈의 작용의 오류가 아니라 빛의 원리에 따라 젓가락은 꺾어져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컵 속에 꺾인 젓가락을 보면 우리는 구부러진 젓가락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속에 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젓가락이 꺾여져 보이는 것은 우리를 착각하도록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물이 컵 속에 들어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우리가 나날이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오관의 감각은 한시도 그런 주관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거기에는 순수한 객관적인 감각은 없다. 순수한 객관적 감각은 실험실의 현미경 아래에서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조차도 조명에 따라 대상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다른 색을 띠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육체 감각이 사물을 보는 시야를 가로막는 창살이 아니라 사물을 인식하도록 도움을 주는 유리창임을 인정해야 한다. 감각은 사물에 대한 완성된 인식을 한꺼번에 통째로 던져주지는 않지만 완전한 인식으로 가는 수많은 겹겹의 문들 가운데 맨거죽의 출입문 하나를 우리 앞에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G. 메를로 퐁티
현대철학(특히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에서 심신관계를 고찰할 때 정신과 육체의 이질성보다는 상호 간의 융합과 불가분리성이 강조된다. 정신적 사고에는 육체가 깃들어 있고 육체에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정신은 이미 육체화된 정신이고 육체는 이미 정신화된 육체이다. 내가 어떤 것을 생각함에는 이미 나의 육체가 깊숙이 관여되어 있고 나의 육체의 이런 저런 움직임에는 나의 정신이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 육체는 영혼에 아주 근접한 존재이고 영혼은 육체에 아주 근접한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의 초기 사상에서는 육체와 정신에 대한 뚜렷한 구분이 없어서 나의 팔뚝이 곧 나를 의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 비록 육체와 정신에 대한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 규정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사상이지만, 육체와 정신의 혼연 일체를 강조하는 점에서 마치 나의 팔뚝을 나의 영혼과 동일시했던 고대 그리스 사상으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H. 심신 상호작용
정신과 육체가 상호 혼융 일체임은 남녀 간의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구의 육체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원한다. 사랑이란 분명히 영혼의 진동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육체적 욕구를 동반하여 그 모든 것보다도 육체적 결합을 갈망하도록 만든다. 흔히 사랑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은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순수한 정신적 사랑, 소위 플라토닉 러브는 사랑이 필연적으로 부추기는 육체적 욕구를 인위적으로 배제하고 절제한 것이다. 대개의 자연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육체적 욕구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은 단순한 두 육체 간의 결합이 아니라 두 영혼 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심지어 사랑이 결여된 단순한 충동에서 이루어진 육체관계라고 할지라도 육체관계를 맺은 두 남녀의 영혼은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때로 영혼 혼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고 때로 육체 혼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갖기도 한다. 독서를 할 때면 육체는 정지되어 있고 영혼만이 깨어서 일하는 느낌을 주고, 음식을 먹을 때면 영혼은 정지되어 있고 육체만이 바삐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음식 맛은 다르게 느껴진다. 헤어진 연인을 생각한다면 입맛이 싹 달아나버릴 것이다. 나는 몸만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과 온 영혼은 식사를 한다. 그리고 독서를 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나의 영혼인 동시에 육체이다.
나는 나의 육체를 소유하다. 나는 나의 육체를 수단과 도구로 이용한다. 책을 읽기 위해 눈을 사용하며 장을 보기 위해 두 다리를 이용한다. 동시에 나의 육체는 나의 영혼을 수단과 도구로 이용한다. 육체는 보다 맛있는 것을 막기 위해 생각과 계산을 유도하며, 보다 편한 잠을 위해 어떤 침대가 더 나은지 머리를 굴리도록 만든다. 그리고 육체적 쾌락은 육체만이 느끼는 쾌락이 아니라 그것은 곧 영혼 전체가 느끼는 쾌락이기도 하다. 지적 즐거움이나 행복감 같은 순수한 정신적 쾌락은 육체의 특정 부위를 통해 느껴지지 않는 반면에 육체적 쾌락은 육체의 특정 부위를 통해 느껴진다.
아무튼 육체는 영혼의 단순한 일방적 도구만은 아닌 것이다. 육체는 영혼의 구체적 물질적 생물적인 뒷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셸러나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리를 주장했다면 이제 우리는 육체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성) 또한 불가분리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I. 동물과 인간의 육체
흔히 동물의 육체는 갖가지 우수하고 전문화된 능력을 갖춘 반면에 인간의 육체는 나약하고 무능하기 그지없다고들 말한다. 인간은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발톱도, 호랑이의 털가죽도, 날 수 있는 날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몸은 전문화되지 못한 원초적 골격의 상태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동물처럼 어느 특정한 한 방향으로 전문화되어 굳어지지 않음으로써 지구상의 어떤 동물보다도 많은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피아노를 잘 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동물과 인간의 육체의 우월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논외이고, 우리는 단지 인간의 육체가 결코 동물보다 뒤지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동물의 육체나 인간의 육체는 각자나름의 개성과 특기를 가지므로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인간의 우수한 지성은 인간의 육체를 필연적인 토대로 한다. 밋밋한 발톱과 털과 날개가 결여된 몸뚱이, 그것은 지성이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인 전제이다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자 아놀트 겔렌은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육체적 약점을 보완하고 생존해나가기 위해 발생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인간은 두터운 털가죽 없이도 생존하기 위해 지성을 발달시켜서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육체와 지성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개가 한꺼번에 발생되었다고 믿는 편이다. 육체가 약점투성이기 때문에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지성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가 지성을 담기에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었기에 그 안에 발달된 지성이 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지성이 발달할수록 우월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우리가 은연중에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듯이 지성의 발달은 그 반대편의 본능과 직관의 퇴보를 값으로 치루어야만 한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된 대신에 본능과 직관은 퇴보되었다. 동물은 반대로 고도로 정확한 본능과 직관을 소유하고 있다. 지성과 본능 가운데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지성은 멀리 내다보고, 본능은 가까운 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하고 목표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물과 인간의 동등성에 대한 암시를 얻게 되는 셈이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의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 개미는 개미의, 원숭이는 원숭이의, 인간은 인간의 다른 것으로 교환 불가능한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 인간은 신비스러운 존재이고 인간의 육체 또한 오묘하다.
인간의 육체는 정신 안에서 정신 위에서 정신을 위해서 활동하고 존재하기에, 그리고 좌표상에 있는 함수 곡선의 양끝이 양축에 닿을 듯 말 듯 한없이 다가가듯이 육체는 정신에 끝없이 근접해가는 존재이기에 더욱더 오묘하다. 현재의 단기적 시점에서 바라보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무한대의 시점에 바라보면 영혼은 육체에, 그리고 육체는 영혼에 점점 더 근접해가고 결국 하나가 된다.(13장은 한솔 청년지 97년 여름호에 실린 글 전체의 재인용임)
철학 코미디 13
운명 철학
철학자 : 점 보는 것이 무슨 철학이에요? 철학의 '철'자도 거기에 갖다붙이지 마세요. 점술이 플라톤이나 칸트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점쟁이 : 플라톤, 칸트는 아니지만 동양의 주역하고 깊은 연관이 있지요.
철학자 : 추억의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해 사유하고 탐구하는 것과 주역을 놓고 점치는 것은 서로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이제부터 제발 철학이라는 간판 좀 붙이지 마세요.
점쟁이 : 하지만 언어란 일단 굳어져서 누구나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아무런 흠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서 동양철학, 운명철학이라면 누구나 다 이해하잖아요.
철학자: 고집이 무척 세군요. 그럼 점술을 계속 '쇳덩이 철'자 철학이라고 부르세요. 우리가 하는 진짜 철학은 '금덩이 금'자 금학이라고 부를 테니까요.
철학 속담 13
철학이 알이라면 예술은 알에서 깨어난 새이다.
14장 여성 철학
A. 여성은 약자인가
여성은 약자라는 말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여성의 육체가 약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성의 육체의 어느 부분이 약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여성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인가?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도 있고 여자는 눈물을 잘 흘리는 존재라는 통념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약하면 지성도 떨어지게 마련이고 따라서 몸이 약한 여자는 지성도 남성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몸이든 정신이든 여자가 약하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약함은 본래적인 것인가, 아니면 성장과정에서 환경과 교육에 의해 조장된 결과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여자가 약하다면 모든 여자가 예외 없이 어떤 남자와 비교하더라도 힘에서 뒤진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일어난다.
남성의 근육의 힘은 여성의 근육보다 강하다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여성의 근육은 남성보다 더 유연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자는 장작패기를 잘할 수 있을 것이고 여자는 타자나 피아노를 더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근육의 우월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강도인가, 유연성인가? 혹시 피아노 치는 일 같은 고차적인 일을 잘해내는 여성의 근육이 장작패기 같은 막노동을 잘하는 남성의 근육보다 오히려 우월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얼마든지 훈련되어 길들여질 수 있다. 여자도 훈련을 통해 강한 근육을 가질 수 있고 남자도 훈련을 통해 유연한 근육을 가질 수 있다.
남자는 모체의 태내에서 여자보다 저항력이 뒤떨어지고 사망률도 높다고 한다. 남자의 수명도 보통 여자보다 짧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모든 남자의 수명이 짧다거나 모든 남자가 약하다는 성급한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키운다고 해서 남자보다 모질고 강하다고 딱잘라서 말할 수 없듯이, 남자가 무거운 짐을 잘 나른다고 해서 여자보다 강하다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이 여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약하고 열등하다거나, 남성이라고 무조건 강하고 우월하다는 편견은 성급하고 그릇된 결론이다. 몇 가지 표면적인 사실과 근거를 가지고 논리를 확대시키고 과장하는 것은 사려 깊은 사람이 할 일이 못 된다. 그러나 남녀 불문하고 모든 인류는 천박하고 경솔한 편견을 바탕으로 살아왔다. 지금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서도 여성이 약자라는 경솔한 판단이 판을 치고 있다.
학교에서 영어를 잘하고 수학은 못하는 친구도 있고, 수학은 잘하지만 체육을 못 하는 친구도 있다. 인간이 가진 능력들은 무한히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그런데 수학 한 과목만을 기준으로 인간 지성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편협한 것이고 불공평한 것이다. 대개의 여자들의 수학 능력이 뒤떨어진다고 해서 여성 일반의 지능이 열등하다고는 할 수 없다. 여성은 수학은 못 하지만 영어는 남자보다 더 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이와 성장 과정에서 남아는 수학을 잘하도록 조장 된다고 한다. 그런 불리한 교육환경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을 압도할 정도의 수학 실력을 가진 여자들도 드물지 않다. 어쨌든 남자의 지성이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근거가 빈약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이 할 짓이 못 된다.
B. 성차별의 역사적 배경
여자가 약하고 열등하다는 편견은 경험이나 사실적 근거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조장된 것이다. 기독교는 신 앞의 만인의 평등을 내세우지만 그때 인간의 평등이란 신분과 빈부 차이를 초월한 평등일 뿐이지 남녀의 진정한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를 보면 예수가 교회의 머리이듯이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라거나,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것은 결국 그 어떤 우둔한 남자라도 어느 뛰어난 여자보다 더 우수하다는 이야기가 된다.(여성론 68쪽) 유교 역시 동양사회에서 성차별의 완전히 제거 불가능한 악 성적 뿌리가 되었다. 유교는 음양 원리에 기초하는 우주론에 기반을 두고 남성의 우월성 및 지배권 그리고 여성의 열등성 및 예속성을 불멸의 자연법칙으로 고정화시켰고, 그런 자연 법칙을 기반으로 해서 사회 질서와 인간관계의 조화를 유지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성차별적인 사회 질서 및 사회 제도를 영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동양의 전통사상과 한국적 여성철학의 전망 '한국 여성철학' 12쪽)
과거의 모권제 사회는 공산제이며 만민 평등의 사회였으나, 부권의 발흥은 사유재산의 지배와 더불어 여성의 예속과 억압을 초래했다.(여성론 39쪽) 경제 상태가 아주 낮은 차원이었을 때는 남녀간의 삶의 차이가 없었으나, 분업과 도구의 발달에 따라 경제가 발전되고 도구와 기계를 차지한 남자들이 경제적 강자가 되었다.(여성론 34쪽) 남성 지배와 더불어 여성은 모든 공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결혼은 매매혼으로 바뀜과 동시에 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철저한 정절과 순결이 요구되었다.(여성론 38쪽)
여자가 순결을 깨뜨린다는 것은 아내가 남의 자식을 자기재산의 상속자로 집에 들어놓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남자들의 입장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여성론 40쪽) 남자들은 어떤 계율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자를 취할 수 있었으나, 여자들은 극도의 구속을 받았고 간통죄를 범한 여자는 생명과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로 팔려갈 수도 있었다.(여성론 45쪽)
여성이 재화 생산에 직접 관여한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평등하게 인정받았으나, 농경사회에서는 토지, 경제적 잉여 및 정치 권력이 남성의 손에 집중됨으로써 여성의 생산 참여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지위는 하락했다.(성의 사회학 134쪽) 산업화 이전에는 재화 생산이 가족내에서 이루어지고 여성의 가사노동은 생산체계의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 생산제도는 가족에서 공장으로 이전되고 여성의 가사노동은 평가 절하당하게 되었다.(성의 사회학 135쪽) 현재 여성의 가사노동은 주57시간의 노동에 13,000달러 치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위나 직업으로도 인정되지 않는다.(성의 사회학137쪽)
봉건제의 붕괴와 더불어 근대국가가 건립되고 그에 따라 가부장제가 강화되고 보편화되었다.(성의 사회학 206~207쪽) 국왕이 국민의 아버지처럼 국가를 다스리는 가부장제 국가의 기본 단위는 역시 가부장제 가족일 수밖에 없고, 가부장제 가족 제도는 국가에 의해 권장되었다.(성의 사회학 206~207쪽)
C. 여성해방 남성해방
빈부 격차가 지금까지 늘 존재해왔고 변경 불가능하다는 견해는 마치 빈부 격차가 필연적이며 정당하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녀관계에서의 억압과 종속에 대해 그것이 지금까지 늘 그래왔으므로 영원히 그러하리라는 주장은 무지와 부정직에서 기인되는 부당한 허위적 주장이다.(여성론 16쪽) 역사에는 언제나 그럴 만한 필연성과 타당성이 있으므로 여성차별도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라거나, 여성차별이 역사적으로 깊이 뿌리 내린 것이므로 변경되기 힘들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여성차별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까지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지성인의 도리가 아니다. 신분 철폐와 노예해방 그리고 흑인해방이 뿌리깊은 오류의 역사에 대한 과감한 거역과 항거였듯이 성차별의 철폐 또한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성차별의 피해자는 여성뿐인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부담감과 가장으로서의 임무를 평생 짊어져야 하는 남성들에게도 해당되기에 성차별은 더더욱 기필코 제거되어야 할 악인 것이다.
D. 여성과 남성성
여성은 해부학적으로 볼 때 여성적 신체를 가지며 남성은 남성적 신체를 갖는다. 여성은 자궁과 여성 성기를 갖고 있으며 남성은 남성적 골격과 수염 그리고 남성 성기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나아가 여성은 여성적 신체뿐만 아니라 여성적 영혼을 가지며, 남성은 남성적 신체뿐만 아니라 남성적 영혼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영혼은 신체에 의존하여 존재하여, 따라서 신체가 다르면 영혼도 다르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견해라고 추측된다. 흔히 여성적 영혼, 즉 여성성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친절하며 감각과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특징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남성적 영혼, 즉 남성성은 대담하고 대범하며 강직하고 지성이 우월하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여성성과 남성성이 진실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에 도달하도록 사회에 의해 권장되는 이상적 모습에 불과한가? 즉 여성성과 남성성은 선천적인 본질이며 신체적 유전적 요인에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교육과 성장 환경에 의해 습득된 후천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경험론자 로크는 인간 영혼의 타고난 상태는 아무런 지성이나 관념도 담고 있지 않은 백지 상태라고 보았다. 이러한 로크의 이론이 아무런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로크 이론이 옳다면 우리 영혼은 선천적으로 아무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선천적인 감정적 기질, 나아가서 아무런 선천적인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선천적으로 어떤 종류의 지성적 감정적 기질과 능력을 타고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느 범위까지 그런 것인가? 더 나아가 선천적인 영혼적 성향과 기질들은 성적 요소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느 범위까지 결정되는 것인가?
여성과 남성의 영혼이 선천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소위 본질주의는 보통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강력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으므로 대개의 여성 해방론자들에 의해 달갑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본질주의를 선택하더라도 남녀의 다름이 곧 우열관계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우열, 특히 개인차를 무시한 남성과 여성 간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쉽게 얻어질 수도 없으며, 만일 그런 기준이 얻어지더라도 그것을 구체적 사례에 간단하게 적용되기 힘들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면, 본질주의는 여성해방론에 대한 단순한 방해물이나 대립물로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본질주의가 사실에 부합하는 진리라면 그것은 당장에 미칠 수 있는 결과에 관계없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만 본질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만 본질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초래한 오류적 결과들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앞으로 그런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람들의 남녀에 관한 오류적 평가를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의 생물학적 조건
여성은 여성적 유전인자 XX와 여성적 신체를 가지며, 따라서 여성 호르몬을 분비하고 난자를 보유하며 여성적인 생리과정(월경과 출산)을 겪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X와 Y염색체를 하나 이상 갖고 있거나 남성기와 여성기를 동시에 갖고 있어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중간적 존재들도 있다. 성염색체가 XX이면서도 X염색체에 TDF라는 정소결정 유전자가 붙어있음으로 해서 남성적 특징을 보이는 여성도 있고, 반대로 성염색체가 XY이면서도 Y염색체에 정소결정 유전자가 결여됨으로써 여성적 특징을 보이는 남성도 있다.(성의 불가사의 62쪽) XY성염색체를 갖는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X염색체상에 Tfm이라는 제2차 성징결정 요소가 결여되면 성기가 여성화되어 난소도 자궁도 없이 질만 존재하는 기묘한 중간적 존재가 나타난다.(성의 불가사의 64쪽)
정상적인 여성 또는 남성이 성립하려면 유전자가 정상일뿐만 아니라 두뇌 또한 남성 또는 여성으로 정상적으로 분화되어야 한다. 만일 태아가 남성 호르몬 안드로젠을 부족하게 가지면 비록 염색체가 남성이더라도 뇌는 여성 뇌를 갖게 된다.(성의 불가사의 93쪽) 반대로 염색체가 여성이더라도 안드로젠의 양이 정상을 초과하면 남성 뇌를 갖게 된다.(성의 불가사의 94쪽) 뇌의 성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성 또는 남성으로서의 자기 인식이나 성적 행동이 정상에서 이탈되기 쉽다. 예를 들면 유전적으로 폐니스를 가진 남성이며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대상으로는 남성을 선택하게 되거나, 또는 반대로 해부학적으로 여성이면서 행동은 남성이며 성적 대상으로 여성을 선택하게 되는 비극에 직면하게 된다.(성의 불가사의 94쪽)
태내에 있는 수정란이 자라서 남녀로 분리되는 것은 임신후 약 56일 정도부터이다. 이때부터 남성 태아의 몸에 정소가 나타나며, 이 정소는 형성된 직후부터 Y염색체에 쓰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안드로젠을 분비하여 뇌에 끼얹는다. 이 안드로젠의 작용으로 뇌의 각 부위가 변화하여 남성 뇌가 형성되며, 남성 뇌의 지령에 따라 남성의 몸이 만들어진다.(성의 불가사의 94쪽) 반면에 여성 태아의 뇌는 모친의 태내에서 여성 호르몬을 듬뿍 받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매개과정이 없이도 이미 전부 여성형이다.(성의 불가사의 93쪽) 수정해서 8주째의 여성 태아는 이미 60만 개의 난자를 가지고 있으며, 20주째가 되면 난자의 수는 680만 개에 달하게 된다.(성의 불가사의 74쪽) 뇌의 성욕중추 가운데 하나인 성적 2형핵의 크기로 보면 남성이 여성의 두 배이다. 만일 남성이면서도 성적 2형핵의 크기가 작으면 동성애자가 되기 쉽다. 성적 2형핵의 크기가 작은 원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임신 중 스트레스로 인한 태아 성감염을 들 수 있다.(성의 불가사의 96쪽)
이렇게 보면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고 성욕을 느끼며 성행위를 하는 것이나, 여성이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고 성욕을 느끼며 성행위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물적 생리적 조건을 전제로 함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성간의 성적 접촉 과정에서도 그때 그때 알맞는 호르몬의 분비에 따라 행위가 조종된다.
'남녀 간의 눈맞기는 손에 약간의 땀이 나고 머리부터 혈관에 이르는 충전 현상을 일으킨다. 이성 간에 이끌림이 있고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에 암페타민이라는 각성제가 분비된다. 암페타민에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페닐레틸아민 등 세 가지 분비물을 포함한다. 도파민은 신경활동에 필수적인 아민이고, 노르에피네프린은 아드레날린 신경말단부의 중추신경계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생성되는 신경전달 물질로써 혈관 수축, 혈압 항진, 기관지 팽창 등에 작용한다. 세 번째로 중요한 분비물인 페닐레틸아민(PEA)은 사랑하는 이성을 만났을 때 가슴이 설레게 하는 역할을 한다. PEA는 보통 2~3년 간 연속적으로 작용한다. 즉 한 이성에 대한 성적 이끌림은 2~3년이 지나면 식기 시작한다.'(카오스와 문명 118쪽)
남녀 간의 서로 손대기 단계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엔도르핀으로서, 이것은 모르핀과 유사한 것으로 마음이 즐겁고 기쁠 때 뇌로 흘러들어가서 마음의 평온과 안정을 준다.(카오스와 문명 118쪽)
'세 번째 단계로서 남녀 간의 서로 껴안기 단계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옥시토신이다. 옥시토신은 자궁 수축 호르몬으로서 뇌하수체후엽에서 만들어진다. 여자의 경우 옥시토신은 뇌신경을 자극시켜서 출산 시나 젖을 낼 때 근육 수축을 돕는 역할을 하며, 성행위 시에 오르가슴을 돕는 역할을 한다. 성적만족 후에 근육을 이완시켜 휴식을 취하는 데까지 옥시토신은 돕고 있다.'(카오스와 문명 119쪽)
여기서 우리는 남녀 간의 갈망 또는 넓은 의미의 사랑까지도 호르몬이라는 선천적으로 구비된 요소에 의해 일으켜짐을 알 수 있다. 갈망, 설레임, 그리움, 사랑이라는 감정적 정신적 작용에까지 선천적 요소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서로 해서 인간 영혼 전체가 선천적 요소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다. 이성에게 이끌린 다음부터 호르몬의 지배에 따라 심신이 변화한다고 해도, 여러 이성들 가운데 어떤 이성에게 이끌리고 그리워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영혼적 기질 가운데 여성적 기질을 결정짓는 선천적 요소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또한 그런 선천적 요소 가운데 성적 요소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소위 여성성과 남성성은 전적으로 성적 요인에 의해 구성되며 결정되는가?
성의 문화적 지성적 조건
남녀의 기질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남자들은 개발과 모험, 야외 활동과 육체적으로 힘든 직업, 기계류와 공구류, 과학적 물리적 현상 그리고 발명, 사업과 상업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철학적 인간학 95쪽) 반면에 여자들은 가사일, 미적 대상, 미에 관련된 직업, 집안에서 수행하는 작업, 어린이나 불우한 이를 돕는 직업을 선호한다. 나아가 남자들이 강한 자기 주장과 공격성을 보이며 매너, 언어, 정서에서 보다 억세고 굳건한 태도를 보인다면 여자들은 인정과 동정심이 많고, 겁이 많고 세밀한 것에 신경을 쓰며, 감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보다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철학적 인간학 95쪽) 여성과 남성의 이러한 영혼적 차이는 광범위한 사물과 인간에 관한 지적 감정적 관심 방향과 태도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의 차이는 모든 남녀에 대해 예외없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차이가 어느 정도 실제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성염색체와 성호르몬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체 안에 어떤 분비물이든지 간에 몸 전체로 퍼져 나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성호르몬 역시 신체 전체, 그리고 두뇌에까지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호르몬은 두뇌의 적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두뇌의 작용에 따라 성호르몬의 분비가 조절되기도 하여, 몸 안의 분비물에는 성호르몬이 유일한 성분을 이루는 것도 아님, 성호르몬이 압도적으로 작용하더라도 인간은 성호르몬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정신적 전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성호르몬과 성염색체 그리고 생식기의 존재가 성적 관심 방향을 넘어서서 어느 정도까지 사물에 대한 관심과 일에 대한 취향, 취미의 방향까지 결정하며, 어느 정도까지 세계에 대한 행동과 태도 그리고 지능 지수와 지성적 능력의 방향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해명은 인간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광범위한 과학적 연구가 요구될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밖에 제기되는 의문은 예를 들면, 남자가 공격적이고 여자가 배려가 깊고 세심한 것이 신체적 성적 요소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성장 환경과 교육에서 만들어진 후천적인 것인가, 또는 여성과 남성의 영혼은 생물학적 여성성 또는 남성성에 의해서 어느 정도까지 지배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욕구,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욕구조차도 전적으로 생물학적 요인(여성 신체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페로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애정소설이나 영화 같은 지적 요소에 의해 자극받아 일어날 수도 있다. 하물며 인간의 지성적 관심 방향과 능력이 다양한 신체 조건 가운에 일부분에 불과한 성적 요인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남녀의 심적 기질은 상당한 정도로 문화적 영향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문화권에 따라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근육의 힘도 강하고 보다 공격적일 수도 있다. 성 염색체나 성 호르몬이 정상적인 여성의 것을 소유한 여성이라고 해도 선천적으로 강한 공격적인 기질을 타고날 수도 있고, 거꾸로 정상적 신체의 남성 역시 선천적으로 보다 세심한 배려의 기질을 타고날 수도 있다.
인간이 가지는 보다 차원 높은 심적 영혼적 기질뿐만 아니라 성적 행위의 능력도 정신적 문화적 요인에 의존하여 갖추게 된다. 성행위는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언어나 개념의 이해능력 없이는 실천 불가능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태어나서 12세까지 인간 문화와 아무런 접촉도 가지지 못했던 야생아 빅톨은 의사들의 필사적인 언어교육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 그는 성욕을 느끼면서도 어떤 성적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남녀 구별을 못한 자신이 남자라는 인식 그리고 상대가 여자라는 인식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언어 습득이 되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 두뇌의 전두엽은 언어를 기초로 하여 성적 관심을 갖게 하는 곳인데, 언어적으로 남녀 구별이 안 된다면 내면으로부터 타오르는 성적 에너지가 있어도 이성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성의 불가사의 114쪽)
인간의 두뇌가 성호르몬을 조정하는 반면에 두뇌 속에도 성호르몬이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두뇌와 생식기, 지성과 성은 필수적으로 상호 연결되고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 생식기가 전적으로 두뇌의 능력과 활동을 지배한다거나 성이 지성을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식의 일방적 결정론은 아무튼 타당하지 못한 것이다.
성에 대한 평가문제
여성적 영혼과 남성적 영혼, 여성성과 남성성이 만일 선천적 유전적을 특히 신체의 성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것은 모든 남녀에 예외없이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상적 여성으로서 공격적인 여성도 있고, 정상적 남성으로서 세심한 남성도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성 남성성은 선천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이상적인 남녀상일 가능성이 많다. 만일 선천적 본질로서의 여성성 남성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접근 방법에 의해 탐색되어야 할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추가한다면 만일 여성이 선천적으로 열등한 지성을 갖는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와 같은 여성 차별도 계속해서 정당화될 수 있으며 존속될 수 있는 것인가? 만일 현재 김이라는 30세 여성이 성적 요인에서 기인한 선천적으로 불리한 지성적 조건을 극복하고 천재가 되었고, 박이라는 30세 남성은 성적 요인에서 기인한 선천적으로 유리한 지능 조건에도 불구하고 청소부로 전락했다면 누구를 보다 지성적이고 우월하다고 불러야 하는가? 김이라는 여성이 여타의 다른 선천적. 신체적. 생리적. 유전적 조건이 아니라 성적 요인 때문에 본래의 지능이 낮다는 것은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E. 여성 철학의 과제
아직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여성 철학이 앞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는 역사, 사회, 문화적 배경에 의해 일그러진 여성관을 바로잡고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본질과 가치를 객관적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철학은 지금까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어온 학문 세계에서 부지불식간에 개입된 남성 중심적 편견을 찾아내고 지적하여 불편 부당한 학문 탐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철학 코미디 14
남과 여
남 : 몸이 약한 여자들은 지성도 열등할 수밖에 없어요. 신체와 영혼은 밀접한 연관이 있거든요. 몸이 건강하면 영혼도 건강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 : 그럼 몸이 강한 남자는 몸이 약한 남자보다 언제나 더 똑똑한가요? 전신 불구인 과학자 스티븐 호킹은 왜 그렇게 똑똑한가요?
철학 속담 14
철학이 태풍이라면 예술은 산들바람이다.
맺는말
여기에 그대만의 언어로, 색채로 그리고 음악으로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에 대한 철학을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철학 개념이 닿을 수 없는 그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그곳이 철학보다 훨씬 더 깊고 철학보다 훨씬 더 철학적인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