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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철학의 세계 1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2장 가치론

3장 윤리학

4장 예술철학 또는 미학

5장 인식론

6장 존재론

 

 

철학을 알고 싶은 그대에게

앎의 즐거움은 지식의 본래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과 학문은 감각적 즐거움에서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으로 구성되며, 깨달음이란 타성적으로 굳어진 나의 껍질 하나를 벗겨버리는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앎이 즐거운 것은 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탈피하고 싶은 욕구와 결국 과거의 나를 떠나 새로운 나를 가지려는 자기 실현의 욕구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늘 속에 가려진 세계,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철학은 재미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단적으로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철학 자체는 재미가 없으나 내가 그것을 재미있게 느끼는 것이다.

서점에 가보면 재미있는 철학책들이 즐비하여 또한 철학 전공자인 나까지도 질릴 정도로 어렵고 딱딱한 철학 입문들도 상당한 숫자에 이른다. 사실 어려운 철학책은 철학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나체로 누운 철학인지도 모르며 재미있는 철학책은 온갖 현란한 옷과 코르셋으로 보기 좋게 치장한 철학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어려운 철학책조차도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쉽고 재미있는 철학책까지도 못 견딜 정도로 지루하게 여길 수도 있다. 앎의 즐거움이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능력과 관심과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며 나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흥미롭게 꾸며진 철학책은 본래적 철학(한마디로 철학자의 저술들)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철학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대다수의 대중들을 철학 쪽으로 한발 더 다가서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 가치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철학함, 즉 묻고 생각하는 활동에는 쉬운 책도 어려운 책 못지않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2년 전에 펴낸 '삶과 사랑을 위한 철학노트 196'은 어려운 철학을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가장 쉽고 흥미로운 형태로 희석시킨 것이다. 철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읽힌 결과 그 책에 대한 호응도는 놀라울 정도의 것이었다. 그것은 95%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철학책을 그렇게 쉽게 그리고 빨리 읽은 적이 없었다는 고백과, 생각과 삶의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는 고백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정작 철학을 전공하는 몇몇 교수님들은 그 책이 수준이 낮은 독자에게나 어울리며 대학생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는다는 식의 암시를 주기도 했다. 그런 말은 우리 대학생들의 수준과 그들이 철학에서 요구하고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론 그 자체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대학생은 아주 드문 편이며, 대다수가 그 이론이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데 어떤 도움을 주며 그 이론을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해서 누구나 중요한 철학 개념들을 초보자가 알아듣도록 쉽게 풀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나는 더욱 분발하여 '삶과 사랑을 위한 철학노트 196'보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철학 이론들을 소개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삶과 사랑을 위한 철학노트 196'을모두 이해한 독자를 본래적 철학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철학 세계의 다양한 지형을 구경하게 만드는 철학 개론을 구상하게 된 것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강의 이동 서비스를 한 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 동안에 강의해보지 않은 철학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선보이게 될 새로운 철학 개론은 기본적으로 '삶과 사랑을 위한 철학노트 196'의 개념 정의들을 토대로 하는 동시에 그동안에 쓴 강의 노트들과 독서한 책들을 총동원하여 될 수 있는 한 쉽고 흥미롭게 정리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나는 단지 광대한 철학의 별에 있는 몇 군데 산과 호수에 다녀왔을 뿐이고 나머지 부분에 대한 나의 지식은 다른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것이다. 보다 더 깊고 오랜 여행 그리고 다양한 지역의 직접적인 답사를 통해서 별 이야기를 쓴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창작욕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은 탓으로 부득이하게 이렇게 때이른 시기에 철학 소개서를 내게 되었다. 철학을 다 알고 철학책을 쓴다는 것은 정말 진지하고 고귀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물바깥에서 수영 연습을 완전히 끝내고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진지한 태도는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철학 만화를 비롯하여 그 동안에 국내에 출간된 철학 소개서가 다양하고 흥미롭지만 읽다 보면 쓰다 만 듯한 아쉬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철학 세계에는 너무나 다채로운 지형들이 존재하는 반면에 대개의 철학 입문들이 그 가운데 서너 개 정도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가 철학 영역 가운데 가장 어렵고 건조한 인식론과 존재론을 마치 철학의 중심이고 전부인 듯이 앞부분에 싣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의 중심이 인식론이나 존재론보다도 가치론이라고 생각한다. 인식론과 존재론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가치론의 보조도구에 불과하다. 가치야말로 우리 삶을 열어주고 인도하는 철학 세계의 열쇠인 것이다. 예를들면, 내가 사귈 이성의 눈, , 귀의 생김새나 몸매에 대한 인식보다도 그가 가진 외모나 성격이 내게 어떤 가치를 지니며 나를 얼마만큼 매료시키는가가 백 배 중요하다. 즉 그의 존재나 그에 대한 인식보다도 그의 가치가 내게 훨씬 더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악 미추를 다루는 가치론을 맨 앞에 두었고, 철학을 구체적 삶의 문제에 적용시킨 소위 응용철학을 다채롭게 구색을 맞추어 집어 넣었다. 즉 낙태, 안락사, 자살, 사형, 전쟁 등의 문제를 논하는 응용윤리를 비롯하여 역사적 과정에는 도달 목표가 있는가,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 등을 논의하는 역사철학, 종교와 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종교철학,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심리철학, 그리고 새롭게 부상되는 여성철학까지 간략하게 소개했다. 더 나아가 현대 유럽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분야로서 삶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인간을 해명하는 실존 철학, 인간과 동물의 비교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철학적 인간학, 타인의 영혼과 삶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해석학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철학을 집어넣을까 망설이다가 현재까지 전개된 사회철학이 마치 헤겔, 막스 철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인 듯이 착각하는 경향을 적지 않게 띠고 있고 그 때문에 나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하므로, 나의 실존적인 진심 그대로를 밀고 나가서 사회 철학을 넣지 않았다. '알기 쉬운 철학의 세계'는 철학의 맛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철학 소개서이기 때문에 난해하고 상세한 전문 철학적 내용은 될 수 있는 한 절제하여 다루었다. 글의 전체적인 형식은 철학에 대한 나의 기행문 또는 체험담이 되도록 구성하여 독자가생생한 실감을 갖도록 유도했다.

마지막으로 사십 살이 되도록 아직까지 나를 길러주시는 부모님께,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해주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과 잡초들에게, 그리고 유난히 한들거리는 내 곁에 작은 나무와 꽁지 빨간 번개새, 안개새, 천둥새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나를 가르쳐주신 여러 은사님들과 나를 격려해주시는 동료분들, 그리고 좋은 철학책을 쓰고 번역하여 이 책을 쓰는데 도움을 주신 여러 철학 교수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논의에 필요한 자료를 빌려주신 분께도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로의 좋은 지적 교류가 있기를 바란다.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A. 철학은 어렵다

 

철학은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에 철학은 뭔가 심오한 것, 비범한 것, 그리고 어쩌면 멋진 것이라고 상상하고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철학을 오랫동안 공부해본 나의 결론은 철학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매료시키고 철학하도록 자극하는 몇몇 철학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지 깊이 들어가면 어렵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새삼 철학의 어려움 때문에 철학을 회피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똑같은 소금이라도 농도에 따라 짠맛이 다르고 필요한 곳과 원하는 사람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철학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난해한 정도도 다르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종류도 달라진다. 싱거운 소금물도 소금물임에는 틀림없듯이 쉽게 풀어낸 철학, 예를 들면 개똥철학도 철학임에 틀림없다. 개똥철학은 무식한 촌할머니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철학은 그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취향과 삶의 상황에 따라 요구하는 철학이 달라진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은 플라톤(BC427~347, 영원한 이데아), 칸트(1724~1804, 도덕은 절대적 명령이다) 등의 합리주의 철학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자신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고 전혀 다른 자아상을 원한다면 쇼펜하우어(1788~1860, 삶은 권태와 비극의 연속이다), 니체(1844~1900, 자유정신) 등의 감성적인 철학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각자는 각자의 철학을 갖는다.

'당신의 철학은 당신이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그것은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변이다.'(열가지 주제로 읽는 철학 이야기 12)

나는 철학과에 입학한 아래 여자가 어떻게 철학을 하느냐는 질문을 꽤 많이 받았고, 심지어 어느 철학 교수에게서도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독일에서는 7년 동안 딱 한 번 그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문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었다. 사람들은 흔히 철학자 하면 남자를 떠올리며, 그것도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네를 생각한다. 철학은 엄격한 지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많은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하면 지성 또는 이성의 학문인 것이 사실이며, 철학에는 감성보다는 우선 지성이 우세하게 작용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개념 없는 철학은 있을 수 없으며 개념들은 지성의 작용에 의해 산출되고 질서지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념을 부정하는 동양의 도가철학(BC369~286, 도는 말할 수 없다)조차도 개념을 부정하기 위한 주장을 펼치기 위해 또 다른 개념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개념이나 지성은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경험과 지혜 또한 누구든지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철학자의 사상을 평생 동안 연구해도 완전한 이해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어렵지 않은 철학은 하나도 없다. 단지 어려움의 색깔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헤겔(1770~1831, 역사의 연출은 신이고 연기자는 인간이다)의 철학은 말끔한 문체로 쓰여졌지만 잠꼬대처럼 몽상적이라 이해하기 힘들다면, 칸트의 철학은 건조하며 현실적이지만 문체와 개념의 복잡성 때문에 접근하기 힘들다. 철학에는 어떤 학문보다도 더 강한 개성이 담겨 있다. 철학은 철학자 개인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철학자들은 모두 세계의 깊은 밑바닥까지 파헤쳐서 보편 타당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지만 그 진리, 즉 자신의 철학 이론에 자신의 개성과 기질이 은밀히 스며 들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개성과 같은 심리적 주관적 요소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철학은 한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서 길어올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객관적인 수학조차 주관적 관점을 탈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두 개의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유클리드적 기하학에 반대되는 비유클리드적 기하학을 생각해보라. 하물며 철학에 주관적 요소가 내포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주관적 인격적 요소가 배제된 철학, 그것은 과육을 제거당한 딱딱한 씨앗과 같이 메마르고 건조한 것이다. 그런 철학은 무의미한 기호의 나열에 불과하며 철학의 문앞에조차 설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인격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는 나 개인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 기독교적 플라톤주의)도 밖에서 헤매지 말고 네 안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너는 곧 우주라는 인도의 사상(만유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을 상기해보라.

중세의 스콜라철학(중세의 기독교적 철학. 신 존재증명)에서 철학은 머리를 구름 사이에 두고 손에 사다리를 든 아름다운 처녀로 묘사되었다. 철학은 구름너머 무한한 천상세계로 가는 사다리이다.(서양철학사 221) 철학은 '개인적 주관'이라는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우주의 깊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가 목표로 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이다. 철학자들이 남긴 철학에 대한 되새김질은 끝없는 과정이며 완결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철학은 미완성이며 모든 철학 소개서 또한 미완성이다.

 

B. 철학의 주제

 

소크라테스(BC 469~399, 대화를 통한 진리발견), 플라톤, 데카르트(1596~1650,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칸트, 사르트르(1905~1980, 인간은 자유이고 자유는 짐이다)...... 그 모든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얼굴과 개성을 가졌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고 서로 다른 철학적 주장을 펼쳤다. 수학에는 피타고라스의 공리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그러나 철학에는 만장일치의 전제나 이론이 없다. 철학사는 각기 서로 다른 주장들 간의 각축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일치된 대답이 전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덕은 습관이다)는 철학이란 지식의 총체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반면에 베르그송(1859~1941, 사회적 관습에 속박된 폐쇄사회와 그렇지 않은 개방사회)은 철학이란 자아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이라고 보았다.(철학 강의 28)

우리는 오늘날에도 '철학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고 처음부터 출발하여 완전히 새로운 해답을 구해야만 하고, 그렇게 할 권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비롯한 철학의 그 모든 문제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명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풀린 적이 없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는 학문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은 수학, 물리학, 심리학, 사회학......등 개별적인 학문들에게 떠맡겨졌고 철학 속에는 풀 수 없는 문제들만 남겨졌다. 반대로 개별 학문들의 탐구 과정 속에서 풀리지 않는 근본적인 물음들은 철학에게 떠맡겨진다. 현대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1882~1950, 낮은 존재일수록 강하다)은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풀리지 않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라고 불렀다. 어떤 학문이든지간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언제나 존재하므로 어떤 학문이든지간에 어느 정도는 형이상학적이면 철학적이기도 한 것이다.

'2+3=?'이라는 문제는 명확히 해결될 수 있으며 산과 알칼리를 섞으며 무엇이 생성되는지도 역시 명확하게 해결된다. 물이 생명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감기는 왜 걸리는가하는 문제도 현재의 과학 수준에서 큰 어려움 없이 대답될 수 있다. 그러나 2라는 수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 하는가? 물질이란 무엇이며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근본원리는 무엇인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이며 무엇이 행복인가?.......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풀리지는 않는다. 철학은 바로 예나 지금에나 변함없이 그런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2라는 수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는 언뜻보기에 수학자가 관심을 갖고 풀어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개의 수학자는 2라는 수가 의문의 여지 없이 존재한다고 믿고 전제하고서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는 물질의 존재를, 생물학자는 생명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수학자는 유리수와 무리수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며 물리학자는 원자의 구조에 괸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생물학자는 생명체의 종류와 생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는 다른 개별 학문들이 당연시하는 전제를 물고 늘어지며 그런 전제의 배후 세계로 한없이 파고들어간다. 또한 일상적 삶 속에서 누구나 전제로 하며 묻지 않는 것, 예를 들면 '내 앞에 서 있는 저 나무는 진정으로 존재하는가? 저 나무는 나에게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전연 다르게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생각한다.

 

인간은 철학적 동물이다

그러면 철학자는 왜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잡고 골몰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고양이는 쥐를 찾아다니며 쥐를 발견하면 그것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머리를 굴린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궁리하면 살아간다. 논밭에 무슨 씨를 뿌릴 것이며 거두어들인 곡식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그러나 인간은 생존과 관계된 그런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에서 파생된 질문을 던지며 거기에 대해 생각한다. 식물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가? 영혼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거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만큼은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이며 인간의 지적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인간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해결 될 수 있는 물음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물음까지도 제기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동물이다. 철학은 인간의 운명이다.

만일 철학에 결정적인 해답이 없다면 모든 철학적 주장이 오류이거나 아니면 모두가 타당한 것으로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문안으로 들어오면 누구나 어떤 주장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회의가 생길 수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세계에는 시간적인 시초가 없다는 주장과 시초가 있다는 주장이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양립하며, 이 세계의 공간적 한계가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이 양립한다. 그러나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확신, 즉 내면적 필연성에 따라 그리듯이, 철학자도 자기 주장을 펼칠 때 아무리 큰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해도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깊은 내면과 합치되는 주장을 펼쳐야 한다. 진리는 깊이 차고 들어갈수록 복잡하고 오묘하며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철학적 주장에서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앞뒤가 일치하고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C. 철학적 태도와 방법

 

철학적 태도

철학은 흔히 한 마디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된다. 우주에 대한 순수한 지적 갈망에서 출발하는 철학은 미신이나 선입견에 저항할 수밖에 없으며, 상황의 변화나 이해관계에 따라 옳다고 믿는 바를 버리고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한 시대를 지배하는 관습이나 상식, 그리고 통념은 언제나 철학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들이 일반 상식에 따라 살고 문화적 전통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안사람'이라면 철학자는 상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깊이 파헤쳐서 오류를 찾아내고 제거하는 '바깥 사람'이다. 아무튼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아무것이나 분별없이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떤 것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진정한 철학자라면 모두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 천동설이나 노예제도를 비판할 것이며 성차별이나 전쟁 또는 사형제도를 거부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철학자는 드물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제도나 여성 천시를 당연시했다. 전쟁을 뚜렷이 거부한 철학자는 지금까지 러셀(1872~1970, 언어와 실제는 대응된다.)한 사람뿐이었다. 철학사 속의 대철학자들까지도 진정한 의미의 철학자가 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철학한다는 것은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파헤치고 깊이 파고들어가서 그것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려고 하는 것이다.(철학의 길잡이 6) 철학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한다는 것, 또는 우리의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철학의 길잡이 6)

 

철학의 방법

자연과학자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자연을 탐구하지만, 우주와 영혼의 궁극적 본질을 파악하려는 철학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근본적 원리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은 있을 수 없으며 우주와 영혼의 본질에 대한 실험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삶이 가치가 있으며 행복이 무엇인지 실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자는 단지 살아가면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철학자에게도 실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유 실험이 될 것이다. 철학자의 탐구방법은 책상앞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학자들이 사고를 필요로 하지만 철학자처럼 사고를 유일한 방법으로 삼는 자는 없다.

철학자의 사고방법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직관과 분석을 들 수 있다. 직관은 어떤 것에 대한 직접적인 깨달음인 반면에 분석은 논리적 절차를 통한 추론과 논증이다. '생명은 고귀하다'는 것이 직관을 통해 파악된다면 분석은 이렇게 직관된 것을 풀어서 해명하며, 개념을 붙이고 결론을 내린다. '생명체가 가진 생명적 가치는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인 중대한 가치이다. 그러므로 생명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행위는 그릇되다' 직관은 의도에 따라 언제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먹구름 속에 갑자기 나타나는 달빛처럼 돌연히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반면에 분석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데까지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직관에서 분석으로 내려가는 길은 쉽지만 분석에서 직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렵다. 일단 얻어진 진리를 쪼개는 것은 쉽지만, 어떤 것을 아무리 쪼개도 진리가 얻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철학 내용의 수용 태도

철학에 있어서 철학하는 태도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이다. 칸트는 철학이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통찰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이 결과적으로는 생각의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자라면 이미 타인이 만들어 놓은 지식들을 벌레처럼 쏠아 먹을 수는 없으며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강물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자식에게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낚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욱더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헤겔은 철학함의 태도와 아울러 실제적인 진리 내용의 획득을 철학에서 중요한 것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철학은 본질적인 대상들에 대한 최고의 이성적인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의 보편과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되고 그러한 사상들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원히 내용 없이 찾기만 하는 추구와 방황은 .... 내용과 사상이 결여된 텅 빈 두뇌를 갖게 할 뿐이다.(주제별 철학강의 55) 사유방법의 날카로움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얻어지는 성과 또한 중요한 것이다. 매일같이 칼만 갈고 아무것도 요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철학자 야스퍼스(1883~1969, 교제는 사랑하는 싸움이다.)는 우선 철학사 속의 철학 이론들이 마치 진리인 듯이 복종적으로 따라가고 그런 다음에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것을 권장하고 있다. 스승보다 진리가 언제나 우위에 있다. 내가 진리로서 발견한 것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칸트의 주장과 어긋나더라도, 참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 진리가 있다거나 내가 인식한 것이 최고라는 독단과 자만은 철학의 진리사랑 정신에 위배된다. 우리는 방법론적으로 진리의 세계를 열린 세계로 간주하고 그 어떤 것에도 안주하고 정체됨이 없이 끝없이 더 나은 것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D. 철학의 영역 분류

사과 한 개를 쪼개서 분류한다면 붉은 껍질과 달콤한 속살, 그리고 씨로 나눠진다. 이제 사과를 그런 구체적인 방식이 아니라 좀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분류해보자. 그러면 사과는 사과라는 존재와 사과가 갖고 있는 가치로 분리된다. 껍질, 속살, 그리고 씨 모두를 다시 합친 것이 사과라는 존재라면 사과의 싱싱함, 생기, 아름다움....... 과 같은 것은 사과의 가치이다. 이 세계는 크게 보면 존재와 가치라는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존재와 가치 이외에 존재와 가치를 바라보고 파악하는 인간 주관이 있다. 물론 주관도 존재와 가치를 동시에 갖는다. 우리의 주관은 사과의 붉은 빛을 바라보고 매혹되며 그것의 싱싱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주관은 살아 있는 존재이며 생적 가치를 갖는다. 동시에 주관은 보고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이며 정신적 가치를 갖는다.

사과의 존재, 사과의 가치, 그리고 사과의 존재와 가치를 파악하는 주관, 이 세 가지를 철학에 속한 몇 개의 영역에 적용시켜보자. 사과를 우주 전체라고 확대한다면 우주의 존재를 논하는 것이 존재론(형이상학)이고, 우주 속에 있는 사물들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가치론이다. 그리고 사물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하는 우리의 능력을 논하는 것이 인식론이다.

우리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 삶의 구석구석은 철학으로 가득하다. 거꾸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철학을 응용시킬 수 있다. 예술, 종교, 문화, 사회, 역사, 심신 문제.......에 철학을 적용시킨 것이 예술철학, 종교철학, 문화철학, 사회철학, 역사철학, 심리철학, 등과 같은 응용철학들이다.

사과의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친숙한 것이다. 사과를 바라보는 나의 두 눈, 그것은 나의 신체이기에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사과를 내가 어떻게 사과라고 인식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인식론은 마치 내가 나를 벗어나서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어려운 과정을 요구한다. '사과의 진정한 존재, 진정한 실체는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다루는 존재론 역시 무척 난해해 보인다. 반면에 사과의 가치는 비록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추상적인 것이지만 사과는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사과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논리를 따르는가, 라는 문제를 다루는 가치론은 인식론이나 존재론보다는 훨씬 쉽고 친숙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물의 색깔. 형태. 구조. 기능보다는 '그것에 우리가 만족하는가, 그것을 좋아하는가. 또는 싫어하는가'라는 가치평가이다. 가장 추상적으로 보였던 가치 영역이 실제로는 우리 삶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오며 가장 강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에서 제일 먼저 가치론을 다루려고 한다. 가치론에는 윤리학과 미학이 속한다. 가치론 다음으로는 존재론, 인식론을 차례로 다루고 현대 철학사에서 핵심이되는 실존 철학과 철학적 인간학, 그리고 해석학을 간략히 스케치할 계획이다.

그다음으로는 현대 기술문명의 발전과 사회의 복잡화로 발생된 구체적 윤리 문제를 논하는 응용윤리를 덧붙이고 끝으로 응용철학 가운데 종교철학, 역사철학, 심리철학, 여성 철학을 간단히 요약할 것이다.

 

철학 코미디 1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시끄러운 시장에서 청년들을 향해) 너 자신을 알라. 네가 다 안다고 우쭐대지 말고 네가 모른다는 것을 깨달으라.

한 청년 : 나 자신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지 정말 저는 모르겠어요.

소크라테스 : 그만하면 너는 됐다. 너는 너의 무지의 일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루종일 떠들어서 지치고 목이 쉰 채로 귀가한다.)

크산티페 : 이 게으름뱅이야, 그만 나돌아다니고 일 좀 해(소크라테스에게 물 한 동이를 끼얹는다.)

소크라테스 : 천둥이 치면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지.

크산티페 : 잘도 아는군. 이제 자기 자신만 잘 알면 되겠어. 자기가 집안 살림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지 말야.

 

철학 속담 1

철학은 정교한 건축이다.

 

 

2장 가치론

 

A. 가치 세계

 

현대화가 로드코의 그림 하나가 붉은색이라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붉은색 한 가지로 칠해진 그 그림이 아름답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할 수 있다. 색과 형태, 크기 등이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면 미추와 선악은 가치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의 영역은 오관의 감각적 지각으로 파악되는 세계이며, 가치의 영역은 감정과 느낌으로 느끼는 세계이다. 노랑이 사물의 물질적 성질 또는 속성이라면 아름다움은 그런 물질적 성질과는 다른 가치적인 성질이다.

가치에는 유용성의 가치, 즉 도구적 가치(책상, 연필, 자동차), 감각적 가치 (음식, 성적 쾌락), 생적 가치 (, 황소, 인간), 진선미의 정신적 가치 (, 선행, 예술작품), 그리고 종교적 가치(, 신성한 교회)가 있다. 가치에는 높낮이가 있다. 감각적 가치는 생적 가치보다 낮으며 정신적 가치는 생적 가치보다 높다. 이러한 가치의 높낮이에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가변적인 도덕과 예술양식과 같은 상대적 가치질서와 영원불변한 절대적 가치 질서가 있다. 절대적 가치 질서는 바로 위에 나열한 순서 그대로이다.

그러면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가치의 높낮이가 결정되는 것일까? 맛있는 생크림 케이크와 릴케의 시집을 비교해보자. 케이크가 제공하는 미각적 쾌락은 잠시 동안에 불과하지만 시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머리에 남아 있다.(지속성). 케이크는 세 사람이 나눠 먹으면 다 없어지는데. 시집은 쪼개지 않아도 여러 사람이 읽을 수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읽어도 닳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불가분리성). 케이크가 주는 즐거움은 그렇게 깊지 않지만 시가 주는 정신적 만족감은 아주 깊은 것이다(만족의 깊이). 이와 같이 가치의 지속성, 불가분리성, 만족의 깊이 등이 가치 높낮이의 기준이 된다.

이 기준은 현대의 가치론적 윤리학자 셸러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가치에 관한 철학적 탐구가 보다 진보된다면 얼마든지 다른 기준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B. 가치들 간의 관계

 

가치들 간에는 높낮이가 있을 뿐 아니라 상호 이끌림과 배척 관계가 있다. 물과 불이 서로 배척하고 물과 나무가 서로 조화를 이루듯이, 가치들도 그 종류와 성질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요구하기도 하며 상호 양립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윤리적 가치는 재화 가치의 토대 위에서 존립 가능하다. 만일 돈이나 보석이 무가치한 것이라면 돈이나 보석을 훔치는 절도 행위는 악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어려운 이웃을 위한 적선 행위도 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처럼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훔치는 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쓰레기처럼 무가치한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나 보석이 가치를 가짐으로 해서, 즉 재화가 가치를 가짐으로써 선악과 같은 윤리적 가치도 존립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 가치의 높낮이가 재화 가치의 높낮이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을 위해 똑같은 액수의 돈을 내놓더라도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더 선한 것이다.

나의 육체가 살아 있지 않다면 나는 수학 문제를 풀 수 없으며 소설책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정신과 인격은 육체를 토대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가치는 생적 가치의 토대 위에서 존립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대립되는 견해도 제시될 수 있다.

내가 정신을 가진 인간이므로 나의 육체는 다른 동물의 육체보다 높은 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정신적 가치를 토대로하여 생적 가치가 존립한다. 카뮈( 1913~1960,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가)의 소설 '이방인'이 무고한 자에 대한 살인을 묘사한다고 해서 예술적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 가치, 미적 가치는 선악 가치와 독립적인 것이다.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때에 따라서 건조하고 경직되며 냉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독일 사회는 원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이므로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지만 인간 간의 따뜻한 정이 부족하다. 반대로 한국 사회는 인간 간의 끈끈한 정이 흘러넘치지만 무질서하고 불안정하다. 이처럼 정의와 사랑은 동시에 양립하기가 힘들며 대부분 상호배척 관계에 놓여 있다.

 

C. 가치 객관주의와 가치 주관주의

 

장미꽃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인가? 장미꽃 속에 ''라는 가치가 스며 들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장미꽃은 미추를 떠나 있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보는 것뿐인가? 아름다운 것은 장미가 아니라 장미를 아름답게 느끼는 나의 눈과 영혼이 아닌가? 성적 욕구는 그 자체로 죄악인가? 아니면 성적 욕구는 선악의 차원과 무관한 자연적 생물학적인 것인데 단지 인간의 판단으로 볼 때 죄악으로 보이는 것은 아닌가? 장미의 붉음처럼 장미의 아름다움도 장미 속에 내재해 있다고 보는 입장은 가치 실재론이고 가치 객관주의이다. 반면에 장미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주관적 투사일 뿐이며 본래 미추와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가치 주관주의이다.

이것은 가치는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가치 주관주의는 가치가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개인적 주관의 차이에 따라 변화한다는 가치 상대주의로 흐르게 된다. 반면에 가치 객관주의는 가치가 영원불변하다는 가치 절대주의와 잘 조화될 수 있다.

 

가치 객관주의

가치가 단순히 주관적이거나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바깥에 참으로 실재하는 존재라는 가치 객관주의는 플라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지 간에 영원불변하는 가치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이데아의 세계 속에 들어있다.

무어(G.E.Moore, 죠지 E.무어, 1873~1958, 영국의 윤리학자 형이상학자) 역시 선은 황색과 같이 사물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성질이라고 보았다. 무어에 따르면 장님이 아니라면 황색을 지각할 수 있듯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자라면 가치를 지각할 수 있다. 셸러도 가치는 우리 바깥의 사물 속에 실재적으로 내재하는 성질이라고 본다.

이 세계에 가치 없는 사물은 한 개도 없다. 가치는 모든 사물 속에 침투되어 있다. 우리는 가치와 사물을 단지 논리적 인위적으로만 분리시켜 볼 수 있을 뿐이다. 하르트만은 수학 법칙과 같은 관념적 대상이 나름대로의 존재 방식, 즉 이념적 존재방식으로 존재하고 자체적 존재를 소유하듯이, 관념적 대상인 가치도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가치 주관주의

그와는 반대로 가치 주관주의는 가치가 본래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가치는 인간 의존적, 인식 의존적이며 욕구 의존적인 것이다. 홉스에 의하면 인간은 욕구하며 바라는 대상을 선으로 간주하고 혐오하는 대상을 악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 역시 어떤 것이 선이므로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어떤 것을 욕구하므로 그것이 선이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선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악은 인간의 주관적 투사에 불과하다. 도둑질이 본래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고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므로 악으로 취급된다. 니체나 노자, 장자도 선악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의 행위는 자연의 생성 변화와 같다. 천둥 번개를 선 또는 악이라고 평가하거나 칭찬 또는 비난할 수 없듯이 인간의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종합

셸러의 가치론을 수정한 하르트만은 가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가치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절충하려고 시도한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가치의 존재 그 자체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불변한 것이다. 반면에 가치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인식은 시대, 장소, 그리고 개인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다. 미의 이데아는 불변이지만 시대에 따라 미적 감각과 취향, 그리고 예술 양식, 유행 등이 변화하는 것이다.

가치 감각의 변화를 가치 그 자체의 변화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가치 자체와 가치를 보는 눈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 자체의 절대성과 가치 안목의 상대성은 서로 정면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양립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면 100원짜리 동전은 언제나 100원어치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긴급히 전화를 해야 되는 상황에서 100원짜리는 10만 원짜리 수표보다 더 긴요한 것으로 느껴진다. 상황에 따라 100원짜리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용기나 절제와 같은 윤리적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그 가운데 하나의 특정한 윤리적 가치가 요구되고 부각된다. 조선 시대에는 낯선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면 손을 도끼로 잘라낼 정도로 여자의 순결이 강조되고 부각되었지만, 현대에는 차츰 풍요로운 체험과 자유가 강조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어떤 가치는 부각되고 어떤 가치는 간과당한다. 그러나 가치를 취급하는 우리의 태도가 변하는 것이지 가치 자체가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D. 가치를 대하는 태도

 

10만 원짜리 수표로 코를 푸는 행위는 옳은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표가 가진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어떤 여자를 단지 감각적 쾌락을 얻기 위해서 사귄다면 그 행위는 옳은가? 한 인간은 단순한 감각적 가치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놓은 정신적 가치를 갖는다. 정신적 존재를 단순한 감각적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악하다. 마찬가지로 생명적 가치를 갖는 동식물을 식용, 약용으로 쓰는 것도 가치론적으로 따져보면 분명히 옪지 않다. 비록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깊이 빠져 있는 습관이고 거의 의식하지도 못하지만, 그것은 생명을 단순한 도구로 취급하는 악한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든 그것의 가치만큼 적합한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볼 것은 가치에 적합한 대접이라는 말이 보잘것없는 것은 발로 걷어차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 노약자, 무능한 자는 마구 학대하고 부자에게는 굽신거리는 것은 직관적으로 보아 그릇된 것이다. 가치를 초월하여 만물과 만인을 사랑하는 것(아가페)은 가치 등급에 따라 차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신성하기까지 한 것이다.

 

E. 가치 인식

 

레몬의 맛은 혀끝으로 느낄 수 있고 노란색은 시각으로 지각된다. 그러면 레몬이 발산하는 상큼한 매력은 우리 영혼의 어떤 기능에 이해 파악되는가? 어떤 것의 미와 매력은 결코 그것의 길이와 면적의 계산에 의해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가치는 감정적으로 직관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 인식은 직관이며, 직관 가운데 특히 감정적 직관의 작용이다.

감성에는 맛과 색,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감각뿐 아니라 기쁨, 슬픔 등의 감정 상태와 가치에 대한 느낌이 있고 사랑과 미움 같은 능동적 작용도 있다. 수학 공리 같은 증명 불가능한 기본 전제들은 지성적 사고가 아니라 감정적 직관으로 파악된다. 감각적 느낌은 감각적 가치를 느끼며, 생적 느낌은 생적 가치와 더불어 건강의 느낌, 늙음의 느낌을 느낀다. 정신적 느낌은 인식적 가치, 윤리적 가치, 그리고 미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를 느낀다. 가치 인식에는 개개의 가치에 대한 느낌뿐 아니라 두 가치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여 그 가운데 높은 가치를 선호하고 낮은 가치를 배척하는 가치 높낮이 감각(가치 선호와 가치 배척작용)도 있다.

사랑과 미움은 감정 영역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단순한 느낌은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반면에 사랑은 있는 가치뿐 아니라 대상이 가능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가치, 그리고 이상적 가치를 찾아내며 숨겨져 있는 가치도 발굴해낸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의 좋은 점을 자꾸 찾아내며 그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게 되고, 그의 결점도 마음속에서 잘 다듬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순한 수용작용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작용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을 갖는가에 따라서 내가 접촉하고 추구하는 가치 세계가 달라지고 나의 삶의 목표가 달라진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술가가 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된다. 사랑은 광대한 세계에서 내가 몰두할 인식영역을 섬처럼 떼내어준다. 사랑은 인식을 인도하고 인식을 생산한다. 사랑은 인식의 어머니이다.

 

F. 감정에 대한 편견

 

철학사에서 감정은 언제나 저급한 것으로서 천시당해왔다. 특히 플라톤을 비롯한 합리주의자들은 감정이 혼란한 사고와 같은 저급한 인식의 단계일뿐 아니라 윤리적 오류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에 의하면, 감정은 탄생 이전의 순수하던 영혼이 탄생 순간에 육체와 결합되면서 육체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다. 합리주의자들은 마치 감각이 감성의 전부인 듯이 착각하고 감성 가운데 가치 느낌이나 직관과 같은 탁월한 인식적 도덕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했다. 그런 합리주의와 반대로 파스칼은 수학 공리나 신의 존재까지도 가슴으로 느끼고 파악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파스칼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현대의 셸러의 감정론이다.

셸러에 의하면 감정과 이성의 관계는 마치 눈과 귀의 관계와 같다. 눈은 볼 수만 있고 들을 수는 없으며, 귀는 들을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느끼는 것을 이성이 이해할 수 없으며, 이성이 파악하는 것을 감정이 납득할 수 없다. 감정과 이성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 이성이 감정에 의해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이성이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감정이 이성에 의해 이해받을 수 없다고 해서 감정이 저급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감정은 이성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감정은 적어도 이성과 동등한 수준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은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감정만의 독특한 논리를 따른다. 그 누가 보아도 사랑스럽지 않은 어떤 남자를 어떤 여자가 사랑할 수도 있다. 이성은 볼 수 없고 감정만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치 세계이다. 이성과 전혀 이질적인 감정만의 논리는 바로 가치 질서와 가치법칙이다.

 

철학 코미디 2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대왕 : 대철학자여, 당신을 내 스승으로 모시고 싶소.

디오게네스 : 비켜주시오. 당신은 지금 내 앞의 태양을 가리고 있소. 난 지금 감기가 들어서 춥거든.

알렉산더 대왕 : 무슨 소리요? 선생님이 제 그림자를 함부로 깔아뭉개고 계시지 않소. 선생님이 비켜 앉으시오.

 

철학 속담 2

철학은 몽상의 딸이다.

 

 

3장 윤리학

 

A. 선악의 세계

 

선악은 가치에 속하며 모든 가치가 그렇듯이 선악은 항상 어떤 존재에 들어있게 마련이다. 선악의 가치는 어떤 존재에 붙어 있는 가치인가?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선 또는 악하다고 평가되는가? 또는 다음 명제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합당한가?

우주는 선하다, 나무는 선하다, 맹수는 악하다, 벌레는 악하다, 소크라테스는 선하다, 테레사 수녀는 선하다, 암과 같은 질병은 악하다.

윤리학이 아닌 일상 언어에서 이 모든 명제들은 타당한 것으로 통용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선악은 반드시 윤리학적 의미의 선악뿐만 아니라, 이익을 주거나 해를 끼친다는 보다 넓은 의미의 선악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맹수나 벌레, 질병은 윤리적 의미의 악은 아니지만 자연적인 악에 속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윤리학적 선악은 인간의 행위에만 국한되어 말해지는 것이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기로 하자. 추운 겨울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졸고 있었다. K씨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바쁘게 걸어가던 중이었다. 할머니를 발견한 그는 그냥 지나칠까 망설이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할머니의 가방에서 전화번호가 들어 있는 수첩을 발견하고 할머니의 친척에게 연락을 취했다.

여기에서 할머니의 치매나 할머니의 어려운 상황, 또는 세상이 악하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또는 K씨의 몸이나 상황이 선하다는 말도 할 수 없다. 선한 것은 오직 할머니를 도우려는 K씨의 의도와 돕는 행위뿐이다.

선하거나 악한 것은 인간의 의지와 행위이다. 자연적 사물이나 사건은 선도 악도 아니다. 동물세계에도 모성애가 있고 이웃사랑이 있지만 동물이 오직 본능에 의해서 행동하는 순수 생물학적 존재로 간주되는 한 동물 행위의 선악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론 앞으로 동물심리학이 고도로 발달해서 동물도 이성과 자유의지를 갖는 존재로 판명된다면, 그때에는 동물의 선악도 논의될 수 있고 동물윤리학도 새로 생겨나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나무나 벌레, 맹수 같은 동식물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개개의 의지와 행위만이 선악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악이 인간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개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가진 그 모든 것이 선악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신체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이 처하는 상황들도 선이나 악이 아니라 선악을 산출해내는 재료에 불과하다. 즉 인간은 상황에 알맞는 행위를 통해서 선을 만들어 내야 한다.

보통의 일상 언어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좋다, 나쁘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 자체, 인격 자체의 선악은 윤리학적으로 논의되기 힘들다. 한 인간의 행위는 겉으로 명확히 드러나지만 인격 자체는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대개 감춰져 있어서 인식하기 힘들다. 그리고 어떤 인간의 인격이 선하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진다고 해도 신에 의해서나 생물학적 유전에 의해서 부여받은 우연적 요소, 즉 내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내게 우연히 부여된 요소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선악을 논할 수 없다. 윤리학은 어떤 구체적 상황 속에서 형성되는 개인의 의지와 개개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우선적인 주제로 삼는다.

 

B. 선악의 개념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는 합리론에서는 선이란 이성에 의한 충동과 욕망의 지배 및 절제라고 생각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도덕적인 덕으로서의 중용의 본질은 실천적 행위영역에서 이성을 발휘하여 충동을 절제하는 것이다. 칸트에서도 역시 선이란 실천이성의 도덕법칙으로 충동을 제압하는 데서 성립한다.

반면에 감정 및 의지를 이성보다 우위에 놓는 비합리주의에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도덕적 인식과 도덕적 행위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1711~1776, 인과관계는 없다. 그것은 습관적 경험에 의한 믿음일 뿐이다.)은 도덕감을, 쇼펜하우어는 동정심을 선행의 근원이라고 보았으며, 셸러(1874~1928, 감정에도 나름의 눈이 있다)는 감정이 선악을 비롯한 모든 가치 인식의 근원이면 선한 의지와 행위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합리주의 이성주의적 윤리학과 비합리주의적 윤리학 간의 대립을 칸트와 셸러의 선 개념을 비교해봄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살펴보자.

 

C. 칸트의 법칙주의 윤리학

 

칸트적 의미의 선은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도덕법칙을 지키는 것이다. 도덕법칙은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와 같이 명령 형태로 되어 있다. 도덕법칙은 누구나 지켜야 할 의무이며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 절대적 명령이다. '건강하려면 좋은 것을 먹어라' 같은 가언명령은 그 명령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 행복 같은 다른 실제적 목적을 위한 명령이다. 반면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은 명령, 곧 도덕법칙 그 자체를 위한 명령이다.

도덕법칙은 선천적 실천적 종합판단이다. 도덕법칙이 선천적인 이유는 그것의 타당성이 경험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도덕법칙이 종합판단인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동어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지시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종합판단과 분석판단: '원은 둥글다'는 동어 반복이고, 그러므로 분석판단이다. 반면에 '영희 얼굴은 둥글다'는 영희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므로 종합판단이다.)

어떤 사람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을 꾹 참고서 살려두었다면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법칙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요구하는 선행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도덕법칙의 표면적인 준수, 즉 단순히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충족한 의미의 선행이 될 수 없다. 원수를 살려주려는 그의 자제심은 살인 행위 뒤에 오는 징벌이나 비난, 그리고 죄책감이 두려워서 생긴 것일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가족들이 불쌍해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비난이나 징벌에 대한 두려움 또는 동정심 같은 감정적 동기는 선행의 동기로서는 불충분하다. 보상이나 이로운 결과를 목적으로 한 선행도 진정한 선행이 아니다. 그가 만일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중심 때문에 살인을 삼가했다면 오직 그때만이 그의 행위가 진정으로 선한 것이다. 오직 도덕법칙에 대한 경외심, 존경심만이 어떤 행위를 선행으로 만들 수 있는 동기이다.

칸트는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행위의 동기만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므로 철저한 동기주의에 속한다. 독약을 치료약으로 잘못알고 사용했다 하더라도 동기가 살인이 아닌 치료였다면 그것은 악행이 아니라 여전히 선행인 것이다. 반대로 설탕을 독약인 줄 오인하고서 설탕을 살인에 이용했다면 그 행위는 여전히 분명한 악행인 것이다.

또한 칸트는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와 같은 행위의 실질적 내용을 도외시하고 오직 그 행위를 어떻게(어떤 태도로) 행했는가만을 따지기 때문에 칸트의 윤리학은 형식주의라고 불리운다.

모든 법칙주의 윤리학과 마찬가질 칸트의 윤리학도 도대체 도덕법칙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칸트는 이성에서 도덕법칙이 나온다고 했지만, 나의 이성과 너의 이성이 서로 다른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내세운다면 누가 옳은가 판단할 길이 없다.

 

칸트 윤리학에 대한 비판

법칙주의의 한계는 어떤 상황에서는 단 하나의 도덕법칙이 아니라 대립되는 두 개의 도덕법칙이 동시에 실현되기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만일 히틀러의 나치 독재 아래서 내가 유태인 친구를 집안에 숨기고 있다면 나는 그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칸트의 법칙주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예외없이 악하다고 주장한다. 이때 나는 도덕적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털어놓아서 친구를 죽게 하느냐, 아니면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느냐. '거짓말하지 말라''약속을 지켜라', 이 두 개의 도덕법칙이 대립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칸트는 예외없는 법칙준수를 요구하지만 나는 두 도덕법칙을 동시에 지킬 수 없다.

셸러는 칸트의 의무주의 윤리학에 대한 비판에서, 의무란 선에 대해 무지한 자를 위해서 설정된 것이며, 따라서 의무주의는 인간이 성숙하지 못함을 전제로 하여 인간을 불신한다고 비판한다. 셸러에 따르면 의무가 미리 존재하는 것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경험과 통찰을 방해할 수 있다. 또한 의무란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이며 부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다. 의무는 단순한 충동의 억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다른 것들도 억압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의 보편성에 대하여 반박하며 도덕명령은 정언명령이 아니라 가언명령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해도 좋은가, 라고 칸트처럼 묻는 대신에 모든 이가 나와 똑같은 상황이라면 그렇게 행위해도 좋은가, 라고 물어야 한다. 중요한 약속 때문에 통행금지 구역을 마구 달려간다고 하자.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통행금지 구역을 달려가도 좋은가, 라고 묻는 대신에 나처럼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 누구나 통행 금지 구역을 달려가도 좋은가, 라고 물어야하는 것이다.

 

D. 셸러의 감정론적 윤리학

 

우리 인생의 순간순간은 선택들의 연속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 여자냐 저 여자냐,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한순간도 선택함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자유에서 비롯된 선택권은 인생에의 입장권이나 다름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택권을 가지고 태어나며 죽는 순간까지 선택권을 행사해야만 한다. 앉거나 서거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그 모든 것이 선택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두 갈래 길이, 다른 상황에서는 세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어떤 길을 가느냐에 다라 실현되는 가치가 달라진다. 여가시간에 꽃밭을 가꾸느냐, 아르바이트를 하느냐, 독서를 하느냐에 따라 나는 다른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꽃밭을 가꾼다면 생적 가치를, 아르바이트는 돈이라는 도구적 가치, 독서는 정신적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이 세 갈래 길 가운데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나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셸러의 가치론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치들 가운데 보다 높은 가치를 택하는 선이고, 보다 낮은 가치를 택하는 것이 악이다. 그렇다면 독서는 선이고 아르바이트는 악이 될 것이다. 꽃밭 가꾸기는 독서보다는 악하지만 아르바이트보다는 선하다. 이처럼 살인을 해야 악하고 남을 도와야 선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나의 행위는 선하거나 악한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행위라도 상황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선행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면 그 가치의 높이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것이 더 높은 가치를 갖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바로 감정적 느낌이 가치와 가치높이를 우리에게 인식시켜준다.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법칙도 셸러에 의하면 하늘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은 귀중한 것이라는 가치느낌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가치 느낌은 본래적인 직관이고, 도덕법칙은 본래적으로 직관된 것에 개념의 옷을 입혀서 부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셸러의 감정주의 윤리학에서는 칸트와는 반대로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도덕 인식과 도덕실천을 주도하는 것이다.

 

셸러 윤리학에 대한 비판

보다 높은 가치의 실현이 선이라는 셸러의 감정주의 윤리학에도 역시 한계가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오직 높은 가치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수는 없다. 긴박한 현실 속에서 때로는 높은 가치를 버리고 낮은 가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고, 낮은 가치를 택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지식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하면서 눈앞에 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모른체할 수는 없다. 생명 가치는 정신적 가치보다 낮은 가치이지만 생명가치의 실현은 정신적 가치의 실현보다 긴급히 요구되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책이 밥보다 높은 가치라고 해서 우리는 며칠을 굶주린 채 책만 사서 볼 수는 없다. 우리는 몇 년씩 책 한줄 안 보아도 살 수 있지만 밥은 한 끼라도 굶고서는 견디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밥은 낮은 도구적 가치나 감각적 가치만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생명 보존을 위해서 보다 긴요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려운 개념으로 바꿔 말하면 낮은 가치는 강하다는 것이 된다(하르트만의 수정안).

 

E. 윤리적 가치의 세계

 

다양한 윤리적 가치들

윤리적 가치의 영역에는 선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가치들이 있다. 선은 가장 추상적이며 단순하며 광범위한 윤리적 가치이며 그것보다 구체적이고 복합적이며 포괄범위가 좁은 윤리적 가치들이 많이 있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가치에는 선 이외에 고귀, 순수, 성숙이 있다.

선이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보다 높은 가치의 지향이며, 고귀란 윤리적 현실 속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범하고 새로운 가치의 추구이다. 순수란 높은 긍정적 가치만을 바라보며 모든 낮고 부정적인 가치를 배척하는 태도이다. 성숙이란 높고 낮은 모든 가치의 포용이다. 노예를 부리던 시대에 노예해방을 외친 선구자나, 성차별의 시대에 남녀평등을 외치는 자는 고귀함의 윤리적 태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하고 좋은 것만 찾는 태도가 순수성의 태도라며, 그와는 반대로 흠집이 아무리 많더라도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으며 받아들이는 태도는 성숙의 태도이다.

그러한 근본적인 윤리적 가치들 이외에도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이웃사랑, 인격적 사랑, 미래인에 대한 사랑(원인애), 신뢰성, 믿음 등이 있다. 지혜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도 아니고 여우같이 꾀가 많음도 아니다. 지혜란 모든 가치들에 대한 깨어 있는 밝은 눈을 갖고 추구하는 태도이다. 용기란 모든 덕과 윤리적 가치의 실현에 필요한 원동력이며 실행하는 힘이다. 절제란 금욕과 방종의 중용으로서 욕망을 조화롭고 적절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욕망은 우리 삶의 재료로서 욕망의 완전한 근절은 삶의 빈곤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욕망의 절제는 금욕과 같은 부정적 단절이 아니라 욕망을 알맞게 키우는 생산적이며 건설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 정의란 공평성의 원리이며, 나와 타인의 권리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이웃사랑이란 나의 이웃이 될 수 있는 모든 인간에 대한 배려이며, 인격적 사랑이란 모든 인간이 아니라 내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랑이다. 원인애는 환경보호와 같이 나의 먼 이웃인 미래인에 대한 사랑이다.

 

F. 윤리적 가치들의 높낮이

 

서부극에서처럼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와 뒤통수를 관통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서 길을 가야 한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 정의가 없는 상태, 정의가 없는 사회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 길바닥에 엎드려서 구걸하는 걸인을 본 체만 체하고 지나가는 사회는 이웃사랑이 부족한 사회로서 조금 싸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의 없는 사회보다는 나은 사회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다 긴급히 요구되는 필수적인 윤리적 가치는 이웃사랑이 아니라 정의이다. 보다 긴급히 요구되는 가치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낮은 가치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이웃사랑보다 낮은 가치이다. 낮은 가치는 낮은 대신에 우리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높은 가치는 높은 대신에 그렇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공평하다. 무엇 한 가지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면에서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G.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쾌락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전적으로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 쾌락추구 행위는 윤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도덕법칙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법칙주의 윤리학은 쾌락추구는 자아실현의 의무에 위배되므로 악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가치론적(감정론적) 윤리학은 그가 쾌락추구 이외에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그의 쾌락추구는 옳지 않으며, 만일 그 사람 입장으로 쾌락추구가 유일한 선택이며 다른 것은 불가능하다면 그의 쾌락추구는 선할 수도 있다.

반면에 인생이나 우주의 궁극적 목적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목적론적 윤리학, 그 가운데서도 쾌락이나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보는 쾌락주의나 행복주의 윤리학에 따르면 쾌락추구는 의문의 여지 없이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쾌락주의자의 대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정 같은 정신적 쾌락을 이상으로 삼았다.

법칙주의 윤리학은 '살생하지 말라'와 같은 도덕 명령을 강조하는 반면에 가치론적 윤리학은 '생명은 귀중하다'는 본래적인 가치 감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살생하지 말라''생명은 귀중하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고, 똑같은 내용이 서로 다른 옷을 입은 것과 같다.

셸러의 가치론적 윤리학도 법칙주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선악의 기준을 행복과 같은 도덕 외적 목적에서 찾지 않고 도덕적 가치 영역과 질서 안에서 찾는다. 셸러도 칸트와 같은 동기주의이다. 그러나 목적론적 윤리학은 행위가 초래하는 쾌락이나 행복 같은 결과를 기준으로 행위의 선악을 판단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법칙주의나 가치주의에 비해 목적론적 윤리학은 좀더 느슨하다고 할 수 있다. 목적론적 윤리학의 대표적인 예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각기 고유의 존재 목적이 있고 각기 나름대로 추구하고 도달하려는 완전성이 있다(목적론적 우주론). 행복은 인생의 궁극 목적이다. 행복은 우리 자신의 본질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데 있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이성을 초고도로 발휘하는데 있다. 이성의 발휘에는 이성을 통한 욕정의 통제인 중용과 순수이성적 행위인 순수사유, 사색과 명상이 있다. 중용이 실천적인 덕이라면 후자는 지적인 덕이다.

도덕적인 덕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비이성적인 부분에 적용되며, 지적인 덕은 이성적인 부분이 갖추는 덕이다. 반면에 육체의 아름다움과 건강같이 도덕과 무관한 자연적인 덕은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비이성적인 부분에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가장 높은 덕은 도덕적 실천적인 덕이 아니라 지적인 덕이다. 지적인 덕은 다른 이질적인 것이 개입됨이 없는 순수이성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덕인 중용은 단 한번의 옳은 행위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과 습관에 의해 습득되는 인격적 특성이다. 몸에 배인 덕은 강제가 아니라 기쁨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철학의 쉬운 이해 120) 앞에서 인격의 선악은 논할 수 없다고 한 바 있으나, 이 경우와 같이 의도적 자발적 실천과 수양에 의해 습득된 중용을 갖춘 인격은 선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용은 한마디로 치우침의 극단적 결여이며 존재적 중간인 동시에 가치적으로는 제일 높은 극단에 서 있는 것이다. 중용은 또한 양극단이 가지지 못한 두 긍정적 가치를 종합해서 가진 상태이다. 예를 들면 용기는 비겁이 가지지 못한 대담성, 끈질감과 만용이 갖추지 못한 분별력을 함께 종합한 것이다.

양극단의 부정적 가치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보다 더 악한 것일 수 있으며, 중용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 지나치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음은 너무 적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한 사람만 죽여도 그것은 이미 지나친 행위이며 극단적인 치우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악의, 파렴치, 질투, 살인 절도 간음에는 중용이 성립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옳지 않은 것이다.

 

H. 감정과 이성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유럽인 여의사가 키니네를 구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말라리아로 병들어 죽은 포로들의 금니를 뽑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녀는 시체에 대한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냉정한 이성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영화 '파라다이스 로드'). 반면에 한 소년이 지하철에서 말벌을 밖으로 구출하기 위해 자기 몸에 붙은 위험한 말벌을 죽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간다면, 그 소년은 매우 다정다감한 감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앞의 두 사람의 상황을 바꿔놓는다면 소년은 절대로 시체의 금니를 뽑을 수 없을 것이고, 여의사는 전철칸의 말벌을 단번에 덮쳐서 때려죽일 것이다. 누가 더 좋은 사람인가? 감성적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이성적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저기에 대한 대답은 단번에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성이 우월한가, 이성이 우월한가? 그것은 간단하게 결론내릴 수 없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모두 감정이나 충동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감정에도 높고 낮은 단계가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적 사고에도 높낮이가 있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 이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이며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 코미디 3

칸트 윤리학

학생 : 거짓말하면 왜 안 되나요?

칸트 : 거짓말하지 말라는 도덕법칙이 있기 때문이지. 도덕법칙은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하는 절대적 명령이야.

학생 :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 자살할 것이 분명한 어떤 사람에게도 그의 질병에 대해 의사가 거짓말하면 안 되겠네요?

칸트: 물론이지.

 

철학 속담 3

철학은 한 인격의 밭에서 자란 나무이다.

 

 

4장 예술철학 또는 미학

 

A. 미의 세계

타락한 영혼 같은 네온 사인이 여기저기 졸고 있고 찌푸린 얼글의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골목길, 복면을 한 괴한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한 건물들....... 그 속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상상력을 다하여 창가에 촛불이 따뜻하게 흔들거리는 아담한 집과, 들꽃과 수풀이 우거진 향기로운 흙길을 떠올려보라. 그 속에서 우리는 좀더 맑고 고요한 영혼으로 숨쉴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아름다움과 같은 미적 가치는 우리의 생명 보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높이 고양시키며 풍요롭고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 지혜, 용기, 그리고 절제와 같은 윤리적 가치는 상황에 따라 그것이 요구되면 우리가 실현해야 될 의무의 일종이다. 의무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강요이며 압박감을 주는 것이다. 반면에 미적 가치는 의무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다. 내가 옷을 예쁘게 입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의무사항이 될 수 없다. 내가 허름한 차림으로 축제에 참여한다면 남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남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적절한 옷차림은 남의 지갑을 훔치는 일에 비교하면 전혀 심각한 일이 아니다. 괴상한 옷을 입든 벌거벗든지 간에 그것은 본래적으로 나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예술세계는 자유롭다. 예술가는 현실세계의 모습에 구애됨이 없이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있을 수 있는 세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는 현실을 뜯어고치고 현실에 필요한 어떤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압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즉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창틀이나 선반으로 이용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행위는 인명구조 행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예술가는 그렇게 자유롭지만 그 역시 현실 법칙은 아니지만 예술 세계를 지배하는 미적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

괴테의 소설이 인생의 깊은 진리를 알려주고 인식적 정신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책이 내 눈앞에 놓여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테레사 수녀가 선한 삶을 살았다는 것 역시 그녀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티 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 아름답다는 것은 오직 내가 그 그림을 직접 두 눈으로 지각할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같은 정신적 가치인 진이나 선과는 달리 미는 반드시 감각적 지각을 통로로 해서 느껴지는 가치이다.

여기에 대해 풀라톤이라면 반기를 들것이다 .풀라톤에 의하면 감각적으로 파악되는 구체적 사물들의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진정한 아름다움의 복제품일 따름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인 미의 이데아는 볼 수도 들을 수도, 그리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미의 이데아는 저급한 감각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장자(BC369~286, 쓸데없는 물건이 가장 유용하다.)도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장자에 의하면 천상의 음악은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미의 이데아에 이르는 단계 : 감각미에서 영혼의 미로, 영혼의 미에서 도덕에 대한 사랑으로, 도덕에 대한 사랑에서 인식에 대한 사랑으로, 인식에 대한 사랑에서 절대미 그 자체로...)

플라톤에 의하면 진리인 것은 선한 동시에 아름다운 것이다. 진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름답다. 학문은 아름답고도 선하다. 최고 선은 최고 미와 합치된다. 미를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동시에 선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에서 진, , 미는 각기 독립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칸트가 이미 미를 진, 선과 독립적인 것이라고 선언했고 하르트만도 마찬가지로 진, , 미가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라고 해명했다. 미적 가치를 갖는 예술작품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소재로 할 수도 있고 진리 아닌 허위를 묘사할 수도 있다. 진위나 선악은 예술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리나 선행이 아닌 어떤 것의 묘사가 예술을 진정한 예술로 만드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예술이 진리나 선행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예술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본질이거나 필수조건은 아니다.

 

B. 예술 개념

 

예술 개념의 변천사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 개념을 대변해주는 칸트의 예술 개념을 간단히 요약해보자.

a. 칸트는 학문이 단순한 앎이라면 예술은 앎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누군가 도자기 만드는 법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해도 그가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면 아직 도예가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멋진 도자기를 실제로 만들어 모일 때 비로소 그는 도예가이다.

b. 그와 더불어 칸트는 구두쟁이가 구두를 만드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담이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놀이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c. 벌이 집을 짓는 것이 본능에 의한 자동적 행위라면 그림을 그리는 예술 행위는 의지적 의도에 의한 행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술 개념이 정립된 것은 18세기에 와서 비로소 일어난 일이었다. 예술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시와 회화, 음악을 떠울리지만 예술사에서 그것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예술가로서 간주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그리고 중세에서 시는 법칙 없이 단순한 영감이나 환상을 쫓는 것이라고 하여 예술로서 인정되지 않았다. 작곡이나 연주 역시 예술에 들지 못하였고 화성이론만이 예술다운 음악으로 간주되었다. 회화나 조각 역시 육체 노동을 요구하는 저급한 것으로서 예술 분야에 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예술 개념의 역사 26~29)

18세기(1747년 프랑스인 샤를르 바뜨)에 이르러서 비로소 회화, 조각, 음악, , 무용, 건축, 웅변 등이 예술로서 인정되었다. 반면에 고대와 중세에서 예술로 취급받던 수공예나 과학은 오히려 예술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었다. '어떤 생각을 실현시키려고 특수한 수단과 합리적인 인식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고대의 예술 개념 대신에 '지각 있는 존재자가 작품을 통해 만든 모든 미의 제조품'이라는 예술 개념이 사전에 수록되게 되었다.(예술 개념의 역사 40~44)

, 음악, 회화 같은 예술의 본질적 의미 또한 많은 변천을 거쳐왔다.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보았다. 자연은 완벽한 이데아의 모방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자연의 모방인 예술은 모방의 모방이다. 플라톤은 예술 가운데 정서나 윤리적 태도를 모방하는 음악이 가장 모방적인 예술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현실보다 더 나은 것, 혹은 보다 못한 것의 창조, 즉 변형적 모방이라고 보았다.

18세기 낭만주의, 특히 톨스토이에서 예술은 내면적 감정의 표현으로 규정된다. 예술은 단순한 감정의 발산이나 욕설 퍼붓기가 아니라 특정한 매체와 수단을 통한 감정의 걸러진 표현이다.

예술의 본질에 관한 견해로는 모방설과 표현설 이외에 형식주의(유미주의)가 있다. 칸트의 형식주의 미학에 의하면 예술의 본질은 그것이 표현하는 내용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겉표면의 형태와 구조가 가진 아름다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예술은 진리의 전파나 도덕적 계몽, 또는 사회 개혁의 수단이 아니라, 예술은 단지 예술을 위한 예술일 뿐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예술 개념이나 예술의 정해진 본질은 거부된다. 그 대신에 '예술은 죽었다.' 또는 '모든 것이 예술이다'하는 구호가 나타난다.(예술 개념의 역사 85) 화가가 하얀 캔버스 위에 흰색 사가형 하나를 그려 넣는가 하면 (절대주의 화가 말레비치: 절대주의는 1913년 말레비치가 주창한 운동. 어떤 감정이나 연상을 배제하고 순수 미술 추구,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을 주로 사용), 변기를 갖다놓고 ''이라는 제목을 붙인다(마르셀 뒤샹 : 1887~1968, 다다이스트 화가, 예술에 기성제품 사용). 또는 아무 생각 없이 물감을 이리저리 뿌린다(폴록 : 미국화가, 행위 미술기법). 만일 화가가 그런 식으로 아무 생각 없이 물감을 칠함으로써 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면(자동기법), 그것은 벌이 벌집을 짓는 자동적 본능적 행위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독일의 미술가 요셉 보이스(1921~1986, 현대 독일 화가)는 자신의 예술의 목적을 감상자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2차대전 당시에 부상 당한 후 돼지기름을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보이스는 작품에 돼지기름을 많이 사용했다. 그는 그의 예술 때문에 괴전화를 자주 받아야 했고 그의 집 인터폰에서는 지나는 행인의 욕설과 비난이 마구 터져 나왔다.

 

C. 예술작품의 구조

 

예술의 중심은 예술가도 아니고 감상자도 아니라 예술작품이다. 미적 가치를 가진 미적 대상은 예술가도 감상자도 아닌 바로 예술작품뿐이기 때문이다. 수용미학이나 창작미학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감상자나 예술가를 주요 관심 대상으로 삼는다. 반면에 대상미학은 미적 대상인 예술작품에 강조점을 둔다. 근세의 인식론과 더불어 철학의 관심은 주관이었고 미학에서도 주관에 관심을 둠으로써 수용미학(예술 감상의 원리와 본질을 주제로 하는 예술철학)이 우세하였다. 여기에 대립하여 하르트만은 미학의 주인은 예술작품임을 선언하고 예술작품의 구조 분석에 몰두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더불어 갖는다. 예술작품은 물질 위에 정신세계를 그려넣어서 고정시키는 것이다 물질은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 예술작품의 영구보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회화는 물감을, 조각은 돌을, 음악은 악보를, 그리고 시는 종이를 통해 정신세계를 구현하고 보존한다. 예술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착상은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곧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런 예술적 이념을 물질 속에 담아놓아 보존하고 누구나 볼 수 잇도록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따라서 정신의 객관화이고 객관화된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작품이 담고 있는 정신적인 것들은 보통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원반 던지는 사람'은 살아 있는 듯한 생명성과 영혼, 그리고 얼굴에 나타난 감정 등 여러 개의 정신적인 층을 갖고 있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보는 것은 물질이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면 우선 색과 형태가 보인다. 그 다음에 색과 형태가 담고 있는 정신이 나타난다. 예술작품의 물질층은 전경이고 물질 뒤에 차례로 나타나는 여러 개의 정신층은 배경이다.

 

D. 예술적 창조와 수용

 

창조

예술적 창조는 영감에서부터 출발한다. 영감의 행복감은 육감적 쾌락보다 더 강하여 지속적이라는 말도 있다. 영감을 얻기 위해 모차르트는 큰 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고, 보들레르는 마약을 먹었으며, 발작은 커피를 마셨다. 나무 위에 새가 날아와도 새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새를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감은 누구에게나 떠오를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의 영혼을 주시하며 영감을 기다리는 예술가만이 떠오른 영감을 감지하고 잡아낼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예술가의 영감에는 뛰어난 것뿐 아니라 나쁜 것이나 그저 그런 것도 많으며, 예술가는 바로 끊임없이 떠오르는 가지각색의 영감 가운데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탁월한 것을 골라낼 줄 아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또한 끊임없는 창작 과정에서 뛰어난 작품을 골라내어 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발레리에 의하면 신이 첫 행을 주면 거기에 맞게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인간이다. 영감 하나만으로 예술작품이 완성되지 않으며 예술가는 부단히 노력을 통해 영감에 알맞은 표현을 찾아내야 한다.

예술적 창조의 비밀은 예술에 관한 어떤 것보다도 캐내기 힘들다. 예술가 자신도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술 창조는 하르트만에 따르면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라 변형이다.

a. 예술가는 언어, , 들을 통해 영혼적 인간적인 것을 영혼 아닌 것, 인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변형시킨다. 즉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색이 되고 돌이 된다.

b. 또한 예술가는 현실적 실제적인 것을 현실과 무관한, 또 다른 세계 속에 옮겨 놓는다. 예술은 탈현실화 작용이다.

c. 예술가는 삶 속에 숨겨져 있거나 무질서하게 여기저기 놓여 있는 진실을 질서정연하게 종합하여 안개같이 흐릿한 삶을 보이고 들릴 수 있게 만든다. 예술창작은 직관될 수 있는 것으로의 변형이다.

 

감상

예술적 창조가 정신적 내용을 물질 속에 집어넣어 고정시키는 것이라면 감상과 수용은 거꾸로 물질 속에서 정신적 내용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예술가는 평화를 표현하고자 거기에 알맞는 재료와 구조를 물색한다. 감상자는 예술작품의 겉에 드러나 있는 물질적 형태를 보고 그 안에 담긴 평화를 찾아낸다. 예술가는 정신에서 출발하여 물질로 향해가며, 감상자는 반대로 물질에서 출발하여 정신으로 향해서 간다. 물론 모든 감상자가 물질 속에 담긴 정신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는 '저것이 무엇에 쓰이며 얼마만큼 유용한가'이다 문을 열고 닫을 때 문의 모양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문이 아무 불편 없이 잘 열리고 닫히는가만이 중요하다. 그러나 미적 지각에서는 문의 용도가 아니라 문의 형태와 색깔이 주요 관심사로 등장한다. 일상적 삶에서 흔히 지나치게 되는 미세한 것들, 하찮은 것들이 미적 지각에서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 감상에서도 그림 위에 그려진 꽃병이 꽃을 잘 담을 수 있는 형태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붓자국 하나하나와 색채의 미세한 변화가 중 관심사가 된다.

 

E. 예술과 해탈

예술작품은 독특한 개성과 풍요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매료시키고 빠져들게 만든다. 그림을 보고나 음악을 듣는 것은 잠깐 바깥 세계를 잊게 만든다. 현실로부터의 떠남, 그것은 작은 의미의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칸트는 예술을 무관심적(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심의 개입이 없이 느끼는)만족이라고 보았다. 예술은 진위와 선악, 유용성과 무용성, 그리고 소유욕과 충동을 떠나서 존립하는 것이다. 베르그송도 예술을 유용성에서 초탈해 있고 생존적 관심을 초월해 있는 것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보았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 세계는 살려고 하는 의지들, 비합리적이고 무제한적인 충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생존의 투쟁속에서 어떤 개체도 평화와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욕구 총족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핍과 불만족에 시달린다. 욕구가 충족되는 희귀하고도 짧은 순간에 우리는 곧 권태를 느끼게 된다. 예술은 바로 이런 참담한 삶으로부터의 도피 수단이다. 예술이 표현하는 영원한 관념에 대한 명상을 통해 우리는 완전하고 영원하지는 않지만 잠정적이나마 해탈을 겪게 된다.(칸트판단력 비판연구 311)

 

F. 예술 장르

 

예술을 분류하는 아주 다양한 방식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건축, 조각, 회화, 문학, 음악으로 예술 장르를 압축하기로 하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기로 하자. 예술 가운데 감성적 재료를 쓰는 것은 건축, 조각, 회화, 음악이고 비감성적 재료를 쓰는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단지 종이 위에 씌여진 글씨로써 우리 앞에 제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인쇄된 글씨가 갖가지 환상을 불러일으켜서 상상속에서 보고 듣고 만지도록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술을 다시 내용을 표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한다면 표현예술에는 조각, 회화, 문학이 속하고, 비표현예술에는 음악과 건축이 속한다. 그러나 여기에 해서는 음악도 감정을 표현하면 건축도 어떤 정신적 분위기를 담을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피셔(1840~1857, 음악이론가)는 음악을 소리로 된 감정으로 보았고 음악을 음과 감정의 불가분리적 전체라고 보았다.(음악미학 77) 건축 역시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삶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계건축기행'을 쓴 어떤 건축가는 '건축과 도시는 인간의 역사를 증언하는 상형문자'라고 서술하고 있다.(세계건축기행 6) '피라미드에서 파라오의 무덤이 아닌 고대 이집트의 이상 도시를 보고, 고대 이집트인의 삶과 죽음의 형이상학과 조형 의지의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피라미드를 안다고 할 수 있다.'(세계건축기행 28)

플라톤은 시를 최고의 예술로, 헤겔 역시 철학에 가장 가까운 문학을 최고의 예술로 모았고, 쇼펜하우어는 거추장스러운 개념의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세계의 깊은 본질을 표현하는 음악을 최고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G. 음악 미학

 

미술이나 문학에 관한 알기 쉬운 이론서적들은 다양하지만 음악에 관한 이론 서적에는 대중적 접근이 수월한 것이 아주 드문 편이다.

여기에서 잠시 음악이 감정의 표현이라는 입장과 음악은 단지 음의 형식일 따름이라는 입장을 비교해보자.

바로크 시대(1600~1750, 팔레스트리나의 사후부터 바하까지의 시기)의 감정 이론에 따르면 음악은 감정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음악가들은 기쁨, 사랑, 고통 등을 표현하기 위해 그 감정들을 일정한 음형과 연결시켜서 작곡했다.(미학적 음악론 99) 음악의 목적은 격정과 정서를 순화시키고 내적 건강을 북둗우는 것이다. 격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음악은 단지 죽은 소리에 불과하다.(음악미학 30) 헤겔은 음악의 원리를 주관적 내면성이라고 보았다. 헤겔은 기악을 내용 없는 음악이라고 비판하고 성악 위주의 음악 미학을 전개했다.

18세기 중엽의 낭만주의 역시 음악을 통한 감정 표현을 옹호했다. 낭만주의는 형용 불가능한 것, 모호한 것, 시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예술 판단의 척도로 삼았다.(미학적 음악론 56) 그 결과 모호한 것의 표현이라고 간주된 기악이 성악보다 선호되었다. 호프만은 음악의 본질을 무한한 동경이라고 보았고, 이 동경은 지상의 것이 아니며 만질 수도 규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미학적 음악론 59) 바켄로더(1773~1798, 독일 낭만주의 문학가) 역시 음악은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향으로 사실화되는 저 세상, 꿈의 나라, 하늘 영혼들의 언어라고 보았다. 낭만주의는 현실 도피적이며 시간 초월적인 동경이다.

자연과학을 모델로 삼아 객관적 이론으로서의 음악미학을 추구했던 한슬릭(에두아르드 한슬릭, 1825~1904, 음악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다.)은 느낌, 감정보다는 이해와 사고를 중시했고, 감상(청중)보다는 작곡(악보)을 중시했다. 그리고 감정이 음악 미학의 일차적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음악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입장도 거부했다. 감정은 시대마다 개인마다 상대적이므로 감정을 가지고 음악미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으로서의 음악 미학은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음악적 감정에 의존할 수 없다. 음악에서 가장 불변적인 부분은 음 재료와 형식이다. 그러므로 한슬릭은 악보 중심의 음악 관찰을 주장하고 주관적 감정보다는 객관적인 음악 그 자체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감정은 음악이 자아낸 효과이며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슬릭은 음악과 시 또는 문학의 분리를 주장하고 음악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내세웠다. 그러므로 그는 음악 외적 요소인 줄거리가 섞인 성악을 기악에 비해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한슬릭에 의하면 음악의 내용은 가사나 제목이 아니라 '소리나며 움직이는 형식'이다.(미학적 음악론 103) 즉 음악의 내용이 음악 형식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형식이 곧 내용이다. 형식, 즉 음악적 관념이, 그리고 음 재료에서 현상하거나 실현된 내용이 곧 정신이다. 음악의 정신적 내용은 음구성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감정미학이 내용 미학이라면 한슬릭의 음악 미학은 형식주의라고 불리운다.

 

H. 쇼펜하우어의 예술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무생물은 한 자리에 머물려는 관성을 갖는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 우주 만물의 궁극적 본질은 의지이다. 이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 이념(이데아)이다. 무생물, 동식물 등 모든 개체는 각기 다른 종류와 다른 등급의 이념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에는 생존을 위한 것, 즉 의지를 위해 종사하는 것이 있고 반면에 생존적 관심사를 초월한 무관심적 인식이 있다. 전자에는 '나무는 땔감으로 유용하다'와 같은 장식이나 과학적 지식이 있다. 후자에는 나무를 하나의 순수한 미적 대상으로 보고 묘사하는 예술이 속한다. 예술이란 유용성과 무관하게, 즉 순수한 눈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이다. 과학적 지식은 나무로 불을 지피면 따뜻하다는 식의 인과 관계에 대한 이식(충족이유 율적 인식)인 반면에 예술은 의지와 자아를 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망아적 개체초월적 인식이다.

철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반면에 예술은 인간이 무엇인지 상징과 비유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해준다. 철학이 제공하는 이념의 직접적 인식과 예술이 제공하는 이념의 간접적 인식 가운데 후자가 더 쉽게 다가온다. 그것은 왜냐하면 예술이 안개(혼란스런 우연)를 걷어내고 순수 이념만을 추출하여 작품 속에 재생하기 때문이다.(미학사 313)

예술은 다양한 매체 속에 존재하며, 각 예술 장르는 이념(이데아) 가운데 특정 범위를 취하여 표현한다. 예술 가운데 음악은 이념의 모방이 아니라 의지 자체의 모방이다. 음악은 거추장스러운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 우주의 가장 깊은 본질인 어두운 의지를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음악은 어떤 철학보다도 깊은 형이상학이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음악론이 들어 잇는 저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그너에 의하면 악극에서 가사는 플라톤적 이데아(이념)을 구현하며 음악은 의지 자체를 표현한다고 보았다.(미학사 318)

 

I. 칸트에서 미적 판단

 

어떤 나부의 초상화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그 여인에 대한 성적 욕구나 소유욕과는 무관하게 내려진다. 미적 판단은 칸트에 있어서 이해관계나 사심을 초월한 순수한 판단이다. 식욕이나 성욕의 충족과 같이 대상이 존재했으면 하는 욕구, 즉 소유욕의 충족이 관심적 만족이라면 미적 판단은 무관심적 만족이다.(미학사 244) 미적 판단은 쾌, 불쾌에 관한 판단이나 선악에 관한 판단과는 달리 소유욕과 관심과 목표에서 초탈한 것이며 순수관조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다.(미학사 244~245)

미적 판단은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리라고 상정하게 된다. 나는 베토벤의 음악이 나에게 아름답게 들린다고 말하는 대신에 베토벤의 음악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미적 판단은 나의 사심을 떠나서 내려진 것이므로 보편성, 즉 만인의 동의를 요구한다. 미적 판단은 나 개인만의 판단이 아니라 내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내린 판단인 것이다.(칸트 판단력 비판 연구 57)상식이 지적 공통감각이라면 미적 판단은 미적 공통 감각인 것이다.

본래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 쓰이는 기능인 오성(표상들을 개념에 의해 통일시키는 능력)과 구상력(상상력, 잡다한 감각적 직관을 함께 모으는 능력)이 인식 활동을 하지 않고 대신에 서로 유희하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이다.(미학사 247) 인식 판단이 지각과 오성 개념의 결합이라면, 미적 판단은 지각과 쾌, 불쾌 감정의 결합이다. 꽃을 보며 쾌감을 느끼면 미라고 판단한다. 반면에 쓰레기를 보고 불쾌감을 느끼면 쓰레기를 추하다고 판단한다.

미적 판단은 인간의 선천적 조건과 기능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선천적이며 직관에다 쾌, 불쾌 감정을 덧붙이므로 종합적(새로운 내용을 제공함)이다.(가치론 279) 즉 미적 판단은 인식판단이나 도덕 판단과 마찬가지로 선천적 종합 판단이다.

칸트의 미학은 예술에서 진리나 선, 쾌락과 같은 내용을 도외시하고 다만 미가 주어지는 방식이나 형식. , 미가 내게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미적 경험만을 다루었다.(가치론 279) 예술에서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칸트 미학은 형식주의 미학이다. 형식주의 미학의 의의는 미적 영역을 진리나 도덕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 독립시켜서 미적 영역의 자율성을 확립한 데에 있다.(가치론 279)

 

J. 헤겔의 미학

 

독일에 있을 때 헤겔미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만큼은 아니지만 헤겔미학도 꽤 어려웠다. 그러나 강의 두 시간은 그 강의에 들어오던 멋진 남학생과 강의실 중앙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면 너무도 빨리 지나갔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헤겔에서도 예술은 철학보다 하위적 인식 단계이다 예술적 직관은 아직 태아 상태의 능력으로서 이성이 참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단지 혼잡한 방식으로 밖에는 파악할 수 없다. 철학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하나의 진리 표현이다. 그러나 철학이 관념적 사유를 통한, 즉 관념적 방식의 진리 표현인 반면에 예술은 감성적 형식을 통한, 즉 비관념적 방식의 진리 표현이다. 감성은 참된 이념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감성적 형식을 통한 진리 표현은 그것이 아무리 최고 단계라고 하더라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직접적 관념적 형식을 따른 진리 표현을 능가할 수 없다 감각적 요소는 진리가 유쾌한 방식을 지각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부적확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예술

헤겔은 예술이 세 개의 단계에 따라 전개된다고 본다. 그것은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로서 예술적 내용과 형식의 다양한 관계 맺음의 방식을 나타낸다. 이 단계들은 예술의 죽음이자 예술의 자기해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이 자기 나름의 완전성에 이르는 때조차도 자신이 이념에 대한 적확한 표현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고 종교나 철학에 비해 하위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징주의 예술에서는 이념이 너무 추상적이고 비규정적이므로 이념과 함께 결합될 형식 또한 구체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술적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외면적 관계에 불과하다. 상징주의 예술로는 백 개의 팔다리와 가슴을 가진 인도의 조형물을 들 수 있다.

고전주의 예술은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완전한 합치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가시적 통일을 보여주는 희랍조각에 잘 구현되고 있다.

낭만주의 예술은 예술에 의한 예술의 극복을 의미한다. 낭만주의 예술은 감각적 재료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며, 따라서 내적 세계가 우세하게 된다. 낭만주의와 함께 내면성은 외면성에 대한 승리를 구가하며, 따라서 낭만주의 예술은 내감의 예술, 감정의 예술이 된다.(미학적 인나 198) 낭만주의 예술의 이념은 고전주의에서보다 훨씬 구체적이므로 고전주의 예술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상징주의 예술에서처럼 내용과 형식이 분열되므로 미학적으로 고전주의보다 열등하다.(미학적 인간 198)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예술 장르를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로 나눈다면 상징주의 예술에는 건축이 대응되고 고전주의 예술에는 조각이, 그리고 낭만주의 예술에는 회화, 음악, 시가 대응된다. 건축이 가장 저급한 예술이라면 시는 가장 우월한 예술이다.

건축은 3차원적 공간 영역에서 전개될 뿐 아니라 이념의 표상을 위한 재료를 모두 비유기적 자연에서 빌어온다. 따라서 건축은 본래적 정신성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고, 따라서 상징주의적 예술의 단계에 상응한다.

조각은 건축과 마찬가지로 아직 삼차원성 속에서 움직이지만 감각적 재료를 기계적 방식으로 다루지 않고 거기에 생명성 및 개인성의 형식을 부여한다. 조각은 고전주의 예술의 이산에 완전히 일치한다.

회화와 음악과 시는 나름대로 감각성을 탈출한 탈예술적 예술로서 모두 낭만주의 예술 단계에 상응한다. 회화는 삼차원 공간의 구속을 넘어섬으로써 예술을 평면차원으로 환원 시키기 때문에 결국 예술을 감각적 공간성이나 물질적 지반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회화는 주관적 감정 및 내면성에 대한 접근 단계로서 감정, 표상, 목표 등 인간의 마음에 자리할 수 있는 것, 마음으로부터 솟아날 수 있는 것 모두가 회화의 다채로운 내용을 구성할 수 있다.

음악은 회화보다 내면성으로 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간다. 음악은 다른 어떤 미적 장르보다도 먼저 공간성을 벗어난다. 그러나 음악도 예술인 한 여전히 감각적이다. 건축 및 조각에서 회화로의 이행이 부피에서 평면으로의 이행이라면, 회화에서 음악으로의 이행은 선에서 점으로의 이행이다. 음악은 무한히 다양한 인간 영혼의 정념과 감정들의 표현에 진정으로 적합한 첫 번째 예술이다.

시는 회화나 음악과 더불어 낭만적 예술의 세번째 측면을 형성한다. 음악적 음향은 아직 감성에 연관되어 있고 내재적 감정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시에서의 소리는 그러한 정신화된 감성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시에서의 소리는 그러한 정신화된 감성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시에서의 소리는 의식내용과 분리되어 가치도 내용도 없는 즉자적 기호로 사용된다. 즉 음악에서의 음이 감각적 요소와 내면성을 함께 합쳐서 가지고 있지만, 시의 음에서는 감각적 요소와 내용이 서로 분리된다. 시는 절대적이고 진정한 정신적 예술이며 정신표현의 예술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고유한 내면 속에서 정신적으로 형성된 모든 것은 말을 통해서만 수용되고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는 내용적 측면에서 가장 풍부하고 무제약적인 예술이다. 시는 예술 가운데 가장 비감성적이며 가장 탈예술적으로서 예술 전개 과정의 마지막 지점이다.

예술은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며 감각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언어를 초월해서 다가갈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에 관한 철학적 이론은 개념이라는 단단한 벽돌로 쌓은 폐쇄적인 성과 같다. 미학도 철학적인 한 건조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다. 특히 꽃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선천적 종합판단'이니 '무목적적 합목적성'이니 '무법칙적 합법칙성'이라는 칸트의 미학은 쇼킹한 것이고 사람의 기를 죽이는 것이다.

 

철학코미디 4

니체

니체 : 난 살로메를 보는 순간 곧장 반해버렸어. 그리고 묘한 상상에 빠져보았지. 그것은 너와 나, 두 남자와 살로메가 함께 사는 장면이었지.

니체의 친구 : 너는 여자를 증오하는 줄 알았는데 너도 그럴 때가 있니? (마음속으로) 이것 큰일났군. 나도 그녀를 좋아하는데......

니체 : 그녀에게 가서 내 마음 좀 전해주렴. 난 도저히 용기가 안 나.

니체의 친구 : 나도 말을 잘 못 하는 편이지만 너를 한번 도와주고 싶구나.

니체의 친구 : (살로메의 집에서)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할까 생각하다가 용기를 냈어요. 그대를 사랑합니다.

 

철학 속담 4

운명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5장 인식론

 

A. 인식론

 

우리는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인식한다. 유아는 날 때부터 엄마 젖을 알아보고 빨아먹을 수 있다. 우리는 나무의 녹색과 향기를 인식한다. 나무가 저 앞에서 서 있으므로 나는 그것을 피해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타인의 마음과 의도를 읽는다. 나는 사랑이 불변적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무엇인지 차츰 깨닫는다......

인식에는 본능적 직감같이 선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있고, 경험과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인식에는 나무와 같은 개체에 대한 인식이 있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같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인식론은 한편으로 '우리가 나무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물음과 같이 인식 과정을 반성해보고 인식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다름 한편으로 인식론은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 방법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인식론은 또한 모든 학문의 학문으로서의 조건과 탐구방법, 그리고 학문들의 기본 개념 규정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물질, 생명 사회, 영혼, 인간, 역사, 종교......)

나무가 파릇하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다. 그런 체험에서 우리는 의식은 바깥으로 뻗어나가 있다. 그러나 나무가 파릇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인식은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사물의 인식에 대한 인식이다. 인식의 인식에서 우리 의식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굴절되어 들어온다. 사물에 관한 단적인 인식에 비해 인식의 인식, 즉 인식론은 한 차원 더 깊고 난해한 것이다.

 

B. 진리

 

'만물은 변화한다'는 말은 보통 진리라고 여겨진다. 만물의 변화는 언제 어디에서나 타당하고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보통 진리라고 불리우는 것은 영원불변하고 보편타당한 것이며 그와 더불어 '1+2=3'과 같이 뻔한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심오한 어떤 것이다. 철학에서 논의되는 진리는 일상적 의미의 진리와는 다른 것이고 철학자에 따라 각기 다르고 다양하게 규정되는 것이다.

진리는 찾기 어렵지만 어디엔가 존재할 것만 같고 존재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진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어떤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진리는 확실히 존재하는가? 이런 물음들을 철학적으로 묻기 시작하면 우리는 미궁으로 빠져들며 어떤 물음에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회의주의자는 진리는 없다, 진리가 있다고 해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고 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대개의 사람들은 만일 진리가 없다면 모든 학문 활동과 철학적 사고가 무의미해지고 삶은 혼란에 빠지게 되므로, 진리가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진리가 꼭 필요하니까 그것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식의 억지 주장이다. 그것은 내가 집에 갈 차비가 없으면 밤거리를 헤매게 되므로 차비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이다. 아무튼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압도적이고 지배적이다. 진리가 어쩐 형태인지 알지 못한다면, 진리의 존재 여부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없다.

여러 가지 진리관 가운데 a. '나무가 푸르다.'라는 명제는 나무가 정말로 푸를 때에만 진리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것은 사실과의 합치 여부가 명제의 진위를 결정한다는 대응설적 진리관이다. b. 그리고 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이 진리라는 정합설적 진리관이 있다. 'a>b, b=0, a<0'라는 세 가지 주장은 서로 맞지 않으므로 모두 다 진리가 아니다. c. 실용주의적 진리관은 보다 좋은 결과를 낳게 하는 명제가 진리라고 주장한다. 제주도까지 걸어서 간다, 배를 타고 간다, 비행기를 타고 간다, 이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엄청난 숫자의 인간들, 과학자, 철학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화가나 조각가까지도 자신이 믿는 세계의 참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했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몸은 각자가 세계를 내다보는 창과 같다. 게다가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태어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세계관과 지식을 획득하게 된다. 한 인간이 주장하는 진리는 단순한 지성적 사고에 의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과 인격과 시대의 흐름이 합쳐진 아주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C. 근세의 인식론

 

종교개혁, 르네상스, 그리고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권위와 관습이 타파되고 그 대신에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진리는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를 찾는 방법에 의존하여 추구되었다. 근세에서 우주 속의 인간의 지위는 중앙에서 주변으로 떨어지고 신 중심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우주의 존재 목적과 도달 목적은 신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는 우주관)이 쇠퇴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원인과 결과의 단순한 연쇄적 관계로 진행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우주가 특별히 정해진 목표 없이 단순히 우주 속에 내재하는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우주관)이 등장한다. 자연과학의 발달에 영향을 받은 기계론적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우세와 더불어 우리가 스스로 관찰하지 않은 것이나 수학적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은 배척된다. 그리고 관찰, 실험, 수학적 계산이 과학과 철학을 떠받치는 기둥이 된다. 세계를 알고 지배하려는 인간들의 욕구와 더불어 근세철학에서는 인식론이 우세하게 되었다.

인간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인식한 것이 어떻게 바깥 세계의 사실과 맞아 떨어질 수 있는가? 근세에서는 두 가지 인식론적 입장이 대립되었다. 경험론은 보고 듣고 만지는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한 경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고, 합리론은 인식의 근원은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성이라는 입장이다. 합리주의자에 의하면 우리의 오관은 착각할 수 있으므로 철학의 절대적으로 확실한 토대가 될 수 없다. 특히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물체는 부피를 가진다, 2+3=5, 사각형은 네 개의 변을 가진다.......'는 인식에 오관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성적 합리적 통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D. 데카르트

 

데카르트 하면 방법적 회의가 떠오른다. 과거의 나는 의심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찾아내려고 했던 데카르트철학을 의심할 능력이 없었다. 이제 데카르트가 의심스럽다. 모래를 모두 골라내면 금만이 남는다는 생각은 오로지 모래에 금이 섞여 있을 때만 옳은 것이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근세철학의 이상과 모범은 수학이었다. 데카르트도 철학은 일종의 수학, 즉 보편수학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수학이 기본적 공리에서 출발하여 일체의 것을 도출해내듯이, 철학도 하나의 근본개념에서 출발하여 엄밀한 연역적 방법을 통해서 일체의 것을 도출해낼 수 있다. 데카르트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아르카메데스 적인 점은 바로 자아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을 거쳐서 자아존재를 찾아내고, 이러한 자아 존재의 확실성에 근거하여 신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신 존재 증명을 통해 모든 지식의 확실성에 도달한다.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의 회의는 방법적 회의라고 불리운다. 데카르트는 우선 '감각 경험이 과연 세계 인식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하는 의심을 던진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불이 정말로 외부에 실재하는 불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꿈에 불과할 수도 있고 신이나 악마의 장난으로 인한 착각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불도 내 눈도 내 몸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수학적 계산이 오류인데도 불구하고 악마의 조작으로 인해 내가 그것을 진리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착각해도 의심하고 착각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 불가능하다. 자아는 존재한다. 자아는 사유하는 존재이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자아의 본성이 사유라는 것은 직각적으로 통찰 가능 체계가 그 위에 세워져야 할 필수불가결한 기반이다. 모든 진리의 인식은 반드시 자아를 통로롤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 존재 증명

자아 안에는 나무와 같이 바깥 사물에 의해 생긴 외래관념과 인어, 도깨비와 같이 인위적으로 지어낸 인위적 관념이 있는 반면에 마음 안에 저절로 생긴 관념, 오직 나의 생각하는 능력에서 유래하는 관념인 본유관념이 있다. 이러한 본유관념에는, 자아나 진리라는 관념, 물체의 관념 'a=b, b=c이면 a=c'라는 수학 공리, '원인=결과'라는 인과법칙, 신 관념 등이 포함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 관념(무한, 영원불변, 전지전능, 창조주)은 외부 사물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인위적 가공물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존재인 신으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파생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내 안의 신 관념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신 자신이다. 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 정신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 밑에 사인을 하듯이, 신은 내가 신의 피조물임을 표시해두기 위해 내 안에 신 관념을 남겨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내 속의 신 관념의 원인인 신이 존재함이 확실해진다.

나의 마음은 신이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나는 틀림없이 세계에 관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오류는 자유의지의 남용에서 비롯된다. 만일 내가 명석 판명하게 참으로 인식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완전자이므로 나로 하여금 거짓을 진리로 믿도록 나를 기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은 진리의 보증자이다.

 

정신과 물질

데카르트는 자아와 자아 아닌 것, 즉 정신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했다. 이 세계의 모든 실체는 정신이거나 물질이다. 정신은 물질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물질 또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정신은 연장(부피=물질의 본질)이 없는 사유 실체이며, 물체는 사유하지 않는 연장 실체이다. 이런 이원론은 종교적 신앙을 위한 정신 세계를 보장해주는 동시에 자연과학자의 탐구 원리를 인정하게 해준다. 신학자는 자연과학과 독집적으로 신과 정신에 관한 학설을 세울 수 있으며, 자연과학자는 신학과 독립적으로 자연에 관한 이름을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특히 자연계는 단순한 물질적 힘들의 기계적 체계이므로 신이나 천사조차도 물리학 법칙을 변경시키거나 방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탐구는 과학자에게 일임해야 한다. 신학자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주장을 할 수 없으며 자연과학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이것은 당시로서 대담한 견해이며, 이런 견해에 따른다면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거나 처형함은 당연히 부당한 일로 간주되어야 한다.

스피노자(1632~1677, 이 세상은 단 한 개의 실체로 되어 있다. 개개의 사물은 모두 한 실체의 부분일 뿐이다.)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이 순환논법이라고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자아의 본유관념에 근거해 신 존재를 논증하고 다시 신 존재와 신의 자비를 빌어 본유관념의 참됨과 이성사용의 정당성을 논증한다. 스피노자의 대안은 어떤 관념의 참됨을 보증받기 위해 신의 존재는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관념이 참됨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진리의 유일한 도달 방법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

 

E. 로크

 

로크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포괄적으로 다룬 최초의 근세 철학자이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을 거부하고 우리 영혼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와 같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비로소 인식을 갖게 된다. 로크에 의하면 경험이 모든 관념과 지식의 근원이면 경험적 지식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지식이다(근대철학사 140). 로크가 말하는 경험이란 한국어에서와 같이 지혜를 얻는 고차원적 과정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맛보는 오관의 감각 경험을 의미한다. 경험을 인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보는 이러한 경험론은 '감각 속에 없었던 것이 오성 속에 있을 수는 없다.'는 중세의 아퀴나스의 사상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

우리 바깥의 사물은 색, , 부피 등이 관념을 우리 안에 생겨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힘이 바로 사물의 성질들이다. 사물의 성질은 감각 경혐을 통해 우리 안에 관념이 생기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우리가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물의 힘과 마음의 능력이 함께 만든 것이다. 관념은 외부 대상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관념은 대상 자체를 닮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상 자체, 즉 실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사과의 빨간색과 신맛 그리고 향기..... 그 모든 성질들을 제거한다면 맨 끝에 사과의 실체가 남는다. 실체는 모든 성질들을 매달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어떤 것인지는 인간에게 인식 불가능하다.

 

F. 버클리

 

내가 지각한 푸른 나무는 푸른 나무로서 실재하는 것이고, 그 배후에 푸른 나무를 존재케 하는 그 무엇인가(로크의 실체와 같은 것)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푸른 나무는 내가 지각한 것들인 푸른색, 향기, 형태 등으로 합쳐진 덩어리와 같다.

로크와는 반대로 버클리는 사물로부터 지각 가능한 성질들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배후에 있다고 가정되는 실체와 같은 것은 없다. 지각되지 않는 어떤 것이, 즉 실체와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은 부당하다. 지각되는 것만이 실재하며, 반대로 실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각 가능하다. 존재하는 것은(정신)과 지각되는 것(관념)뿐이다. 관념과 정신 이외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신은 능동적, 생산적인 반면에 관념은 수동적, 타성적이다. 정신은 자립적 존재이고 관념은 정신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정신에는 신의 정신과 인간 개개인의 정신이 있다. 내가 눈을 감거나 뒤돌아서는 동안 신은 나 대신 푸른 나무는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G.

 

나는 난생처음 들판에 핀 새빨간 양귀비꽃을 본다. 나는 양귀비꽃이 붉다는 것을 인식한다. 흄은 뚜렷하고 생생한 지각인 인상을 인식의 가장 신뢰할 만한 원천이라고 보았다. 인상에 회부될 수 없거나 인상과 합치하지 않는 관념이나 지식(양귀비꽃은 보라색이다.)은 타당한 관념이나 지식이 될 수 없다. 감각 지각의 배후에 있다고 가정되는 실체나 자아, 인과관계 같은 것에 대응되는 인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실체, 자아, 그리고 인과관계는 허구에 불과하다. 내가 안 볼 때에도 저 나무가 저기에 지속적으로 있다는 믿음이나, 저 나무의 인상에 대응되는 나무가 저 바깥에 실재한다는 믿음, 그리고 저 나무의 실체가 있다는 믿음은 부당하다. 인상들은 경험의 최종적 소여(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이것들을 넘어서 보다 더 궁극적인 어떤 것으로도 나갈 수 없다.

흄에 의하면 자아에 해당되는 어떤 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자기 동일적 실체가 아니며 단지 빠른 속도로 변하며 붙잡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의식 내용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인간관계 역시 대응되는 인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므로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상호관계는 있으나 둘 사이에 선후 관계(원인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결과가 일어난다.)만 있을 뿐이고 인과관계(원인 때문에 결과가 일어난다)가 있는 것은 아니다. 먹구름과 비처럼 원인으로 간주되는 사건과 결과로 간주되는 사건을 인과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은 두 사건의 반복되는 관찰과 습관에 근거하는 것이다. 두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믿음과 주관적인 연결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먹구름도 보고 비도 맞지만 먹구름과 사이의 인과관계는 허구에 불과하다.

흄의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은 칸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칸트는 흄 때문에 독단의 선잠에서 비로소 깨어났고 사변 철학 연구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고 고백했다.(철학의 뒤안길 259)

흄은 형이상학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형이상학이란 인간지성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풀려고 버둥거리는 헛된 짓이고 사이비 철학이다.' 흄은 수학이나 경험적 학문 이외에 모든 여타의 것을 버릴 것을 요구했고 인간 지성이 초감성적 영역으로 탈선하여 방황하지 말고 엄격히 경험이 영역에만 머물 것을 요구했다.(철학의 뒤안길 256~257)

인상에 대응되는 것만이 진리라면, '인과관계에 대응되는 인상이 없다'는 것에는 대응되는 인상이 있는가? 나는 흄에게 묻고 싶다.

 

H. 칸트

 

칸트철학은 건조한 철학의 극치이다. 그러나 칸트철학은 철학사의 대종합으로서 철학하는 사람이 꼭 들러보아야 하는 정류장이다. 칸트의 문체는 아주 복잡한 것으로 기억된다. '태양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팡이를 든 구부정한 노인이 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다. 태양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다. 노인은 1900년 스위스 태생으로 농부의 아들이고 그는 20세부터 안경을 사용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인 태양이 악마처럼 붉게 타오르는 것을, 1900년 스위스 태생으로 농부의 아들인 지팡이를 든 구부정한 노인이 20세부터 착용한 안경을 끼고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넋을 잃고 보고 있었는데, 그 노인이 40세 때 사귄 둘도 없는 친구이며 1910년 독일 태생으로 교수의 아들인 건강한 백발의 노인이 지나가다가 지팡이를 든 구부정한 노인을 툭툭 쳤다.' 예를 들면 그런 식으로 칸트 문장은 꼼꼼하며 복잡하다. 마치 복잡한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칸트는 인간이 선천적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경험이 인식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다.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며, 인간 인식과 궁극적 실재가 대응된다는 것을 거부하는 점에서 칸트는 합리론을 일부 수정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 인식에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 형식이 개입되고 반영된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 형식의 구조에 의해 절대로 포착 불가능한 대상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우리의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경험론의 일부를 수정한다.(근대철학사 291)

 

감성과 오성, 이성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 불가결하다. 마치 횐떡을 뽑기 위해서는 쌀가루와 떡기계가 필요하듯이 인식에도 감성을 통해 바깥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식 재료와, 그 재료를 정리 결합하여 판단하는 오성(사유능력)의 기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감각 경험을 통해 인식 재료가 우리 안으로 들오올 수 없는 대상들(영혼, , 우주)에 대해서는 인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게 우리가 아무리 해도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은 물 자체의 세계라고 불리운다.

우리 감성의 선천적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고, 오성의 선천적 형식은 12개의 범주(오성 개념)이다. 기간과 공간은 상식처럼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경험할 때 대상에다 투입하는 우리의 인식틀이다. 12범주 가운데에는 흄이 단지 우리의 주관적 믿음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인과관계도 들어 있다. 인과관계가 흄에 있어서 생활에 유용한 착각과 믿음에 불과한 것이 있다면, 칸트에서 인과관계는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는 인식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인식 능력에는 감성과 오성과 이성이 있다. 진정한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며,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추구된다. 감성이 직관의 능력이고, 오성이 판단의 능력이라면 이성은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이다. 오성이 유한한 것을 취급한다면 이성은 무한한 것, 무제약적인 것을 추구한다.(세계철학사 하권 161) 이성은 감성과 오성을 초월하여 더 높은 단계로 넘어서서 인식을 종합 통일한다. 오성이 잡다한 감성적 수용물을 정리 정돈한다면, 이성은 오성 작용의 체계화를 위해 통제하고 지도한다.

이성은 인식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며 단지 오성이 어떻게 작용해야만 하는가 하는 규칙만을 제공하는 규제의 원리이다. 이성은 오성에게 명령한다. 마치 모든 심리 현상의 근저에 한 통일체인 영혼이 있는 듯이 심리 현상들을 상호관련지어야 한다거나, 마치 현상의 근저에 무제약적 통일체인 세계가 있는 듯이 생각하라, 그리고 마치 존재들의 제일 원인인 신적 창조자가 있는 듯이 생각하라고(세계철학사 하권 162), 이성은 신, 영혼, 우주 등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인식 욕구를 가짐으로써 우리의 인식을 촉진하며, 그런 의미에서도 이성은 인식 규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의 불가능성

칸트에 의하면 감성적 재료가 전혀 없는 신, 영혼, 우주 전체에 관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인식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다.(세계철학사 하권 160) 형이상학은 진정한 의미의 인식도 학문도 될 수 없다. 영혼론은 경험 한계를 초월해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 기능의 잘못된 적용이고 기만이다. '우주론은 세계의 시초가 있다, 세계의 시초가 없다'와 같이 놀리적으로 동시에 성립하기 어려운 결론을 도출한다(이율배반). 신학은 신 관념이 필연적인 것(유연적 존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것)이라고 해서 신존재도 필연적이라고 잘못 가정하는 것이고 착각이다.(근대철학사 306)

인간 이성은 자신이 알 수 있는 인식 한계를 넘어서 있는 대상, 즉 형이상학적 대상에 대해서까지 알고 싶어한다. 이것은 이성의 어쩔수 없는 운명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칸트 이전의 인식론들은 우리 영혼이 일종의 거울과 같이 바깥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고 보았다(모사설). 나무는 우리가 우리의 렌즈로 이렇게 저렇게 바꿀 수 없는 나름의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칸트는 이러한 인식론적 관점을 거꾸로 뒤집는다. 우리 영혼은 가만히 서 있는 거울이 아리나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인식을 찍어내는 기계와 같다. 바깥 대상은 우리의 인식작용을 받기 전에는 잡다하고 혼란하고 무질서한 상태이다 나무는 초록색, 직선, 곡선, 향기 등의 혼란한 뭉치에 불과하며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뚜렷한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무가 나름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 인식기능이 나름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칸트 인식론에서 주관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인식론적 전환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에 비유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리운다. 칸트에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입법자이며, 자연법칙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근대철학사 303)

 

순수이성 비판의 구조

1 선험적 감성론: 감성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영향을 수용하는 능력이고 직관은 개별 대상에 대한 직접적 표상 제공이다.

2 선험적 분석론(오성)~직관이나 지각을 분류 조직하는 지성적 작업이다. 감성이 제공하는 재료에 통일적 형식을 부여하며 그것을 개념단계로 고양시키고, 이 개념을 통해 판단 작용을 한다. ( 12는 수학, 물리학. 즉 선험적 지식이다.)

3 구상력~ 오서이 감성에 작용할 때, 즉 오성 개념을 감성적 직관에 적용할 때 오성 개념의 도식을 매개로 해야 한다. 이 도식을 그때 그때 적합하게 생산해내는 능력이 구상력이다. 즉 구상력은 범주의 시간화, 또는 시간의 범주화를 위한 도식을 형성한다.

4 선험적 변증론~ 어떤 직관도 없을 경우의 지성적 활동~형이상학(선험적 지식이 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5 선험적 판단력~오성이 12범주 가운데 어떤 범주를 개개의 직관에 적용해야 할 것인가를 오성에게 알려준다.

a) 규정적 판단력: 보편(범주)이 미리 주어지고 알려진 상태에서 그 보편 아래 개별을 포섭시키는 판단력(이론적 인식판단, 실천적 도덕적 인식판단)이다.

b) 반성적 판단력: 보편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에 대해 반성해봄으로써 개별에 적합한 보편을 찾아가는 판단력(미적 판단)이다.

 

선험적 변증론

1 합리적 심리학에 대한 비판: 순수 이성의 오류 추리

a '영혼은 단순하다'에서 영혼의 비물질성을 추론한다.

b '영혼은 단순하다'에서 영혼의 비파괴성(불멸성)을 추론한다.

c '영혼은 통일적이다.'에서 영혼의 인격성을 추론한다.

d '영혼과 공간내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영혼이 육체와 관계함을 추론한다.

2 합리적 우주론에 대한 비판: 우주론의 이율배반

a 세계는 시간상의 시초를 가지며 공간에 의하여 한계지어져 있다(정립). 세계는 시간상의 아무런 시초도 없으며 공간적으로 무한하다(반정립).

b 세계의 모든 결합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으로부터 성립하며, 세계는 단순한 것과 단순한 것에서 결합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정립). 세계에는 단순한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반정립).

c 세계의 현상에는 자연 법칙에 따른 인과율 이외에 자유를 통한 인과율이 있다고 상정된다(정립).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른 인과율에 의해 일어나며 자유는 없다(반정립).

d 세계에는 세계의 원인으로서의 필연적 존재가 존재한다(정립). 세계 원인으로서의 필연적 존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반정립).

3 합리적 신학에 대한 비판: 순수이성의 가상

a 존재론적 증명(안셀무스, 데카르트): 신 개념에서 신 존재를 도출한다. 완전자인 신에게서 존재가 결여될 수 없다.

b 우주론적 증명: 세계의 무조건적이며 절대적 원인, 즉 창조자가 존재한다.

c 물리적, 목적론적 증명: 합목적적인 세계 질서를 발생하게 한자인 신이 존재한다.

 

I. 후설의 현상학

 

후설은 모순율('이 꽃은 붉다''이 꽃은 붉지 않다'가 동시에 타당함은 불가능하다는 원리)같은 논리학 법칙이 단지 심리적 필연성의 느낌에 불과하다거나, 그것이 보편타당한 것이 아니라 인간만이 받아들이는 법칙이라는 심리주의를 비판하고 나선다. 후설은 논리 법칙을 비롯한 모든 다른 법칙의 보편 타당성, 영원성, 절대성을 옹호한다. 후설의 현상학은 영원한 본질의 인식을 목표로 하는 본질주의로 초지 일관한다. '현상학'이라는 말에 내포된 현상 개념도 저 나무와 같은 개별적 대상과 나무의 보편적 본질 같은 보편적 대상 모두를 포괄하지만 후설의 강조점은 본질에 놓여 있다.

 

본질 직관

본질 인식의 방법은 본질 직관, 또는 개체에서 형상(본질, 이데아)으로 전환한다는 의미에서 형상적 환원이라고 불리운다. 직관이란 증명, 계산, 추리, 결론 등의 중간 매개 과정 없이 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어떤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본질 직관은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파악이다. 본질 직관은 특수한 방법이 아니라 일상적 삶이나 학문적 활동에서 누구나가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칠판 위에 원을 그리면서 우리는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원, 즉 이데아로서의 원 또는 원의 본질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며 직관하고 있는 것이다. 빨간 딸기를 빨갛다고 부른다면 우리는 빨강이 본질을 알고 있는 것이며 직관하고 있는 것이다.

후설은 데카르트를 이어받은 현대의 합리주의자로서 데카르트와 유사한 회의의 길을 통해 아르키메데스 점으로서의 순수의식을 찾아낸다. 후설이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의식은 모든 존재에 대한 존재 믿음, 존재 판단(나무가 높다, 나무가 존재한다)을 정지함(괄호침=에포케)으로써 획득된다. 현상학은 '나무가 이렇다, 저렇다'라는 판단을 유보하고 나무를 보고 있는 나의 의식을 관심 대상으로 주제화한다.

 

순수의식

순수의식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관계를 추월해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어떤 것이며, 세계의 대상들에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계를 존재케 하는 어떤 것이다.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관념론). 순수의식은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어떤 것도 그 속으로 들어가거나 나갈 수 없으며 아무런 시간, 공간적 연관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인과관계적 영향을 받을 수 없으며, 어떤 사물에게도 인과관계적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날씨나 기분 그리고 나아가 순수의식을 변질시킬 수 없으며, 반대로 순수의식이 나이나 날씨를 바꿀 수 없다.

칸트가 인식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해놓고 인식될 수 없는 것을 물 자체라고 불렀다며, 후설은 인식의 한계는 없으며 물 자체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가 인식할 수 있다. 칸트 인식론에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지각은 잡다하고 무질서한 것인 반면에 후설에서 그런 지각은 나름의 객관적 질서와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후설 의미의 주관은 칸트에서보다는 덜 능동적이다. 칸트 의미의 주관은 무질서를 다스려야 하는 반면에 후설 의미의 주관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학자였던 후설은 철학으로 전환하여 현대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했다. 그의 강의는 마치 동어 반복처럼 들렸고 매우 지루했다고 한다. 후설의 저술 역시 길고 지루하며 이 책과 저 책의 확연한 구분점도 찾기 힘들다. '이 책은 짙은 파랑이고 저 책은 그것보다 여린 파랑이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은 시퍼런 색이다.' 그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식론이라는 단 하나의 색깔로 되어 있다.

 

J. 하르트만의 인식론

 

하르트만은 내가 보기에 철학자 가운데에서 가장 잘생기고 가장 기품있는 사람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그의 눈동자는 티없이 맑고 정직하면 예의바른 모습이다. 그는 철학자보다는 과학자처럼 보인다. 내가 만일 철학자들 가운데 연애하고 싶은 사람을 고른다면 하르트만을 고를 것이다. 하르트만의 문체 역시 선명하고 깔끔하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이제까지의 철학은 모든 존재가 인식 가능하다거나 또는 물 자체는 전적으로 인식 불가능하다는 극단론으로 흘렀다. 하르트만은 그 중도적 입장으로서 존재자가 부분적으로 인식 가능한 동시에 그 나머지의 무한한 부분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현재로서 인식된 부분과 아직 인식되지 않은 부분의 경계선을 객관화 경계이다. 여태까지 인식되지 못한 것이 인식된다면 객관화 경계는 그 만큼 이동하는 것이다. 반면에 인식이 아무리 진보해도 인간으로서 인식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 인식 가능한 영역과 인식 불가능한 영역 사이의 경계선은 객관화 가능성의 경계선이다. 인식 불가능한 것은 초지성적인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즉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바깥의 인식 대상이 완전히 무질서하며 인식 주관은 대상을 나름대로 조작하고 구성한다는 칸트류의 주관주의나, 주관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후설의 주관주의에 맞서서, 하르트만은 우리의 주관이 어떤 것을 인식하기 이전에 인식 대상은 이미 나름의 독립적이며 자체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객관주의, 실재론). 그러므로 인식 주관은 바깥 세계를 의도대로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작용 가운데에는 의식 바깥으로 나아가 거기에 있는 자체적 존재자를 파악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초월작용과 비초월작용이 있다. 전자에는 인식작용이 속하고 후자에는 의식 내의 지향적 대상을 재료로 하는 사고작용, 표상작용, 상상작용이 속한다.

인식작용은 초월작용 가운데 가장 투명하고 순수하며 객관적이다. 초월작용에는 감정적 초월작용이 있고 비감정적인 초월작용이 있다. 인식은 초월작용 가운데 유일하게 비감정적인 것이다.

 

감정적 초월작용

감정적 초월작용에는 경험이나 체험 같은 감정적 수용작용과 불안, 기대, 희망 같은 감정적 예기적작용, 그리고 갈망, 의지, 동작, 행위 같은 감정적 자발적 작용이 있다. 감정적 수용작용 속에서 실재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가장 직접적인 무게로 주어진다. 여기서 주관은 아주 특정한 당면성의 형태로 실재의 저항과 고통을 겪고 경험을 한다. 믿었던 누군가의 배신은 나에게 하나의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서, 하나의 운명으로서 경험된다. 경험은 어떤 사건과의 부딪힘이며, 불가피하고 가차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인식이 사건에 의해 다치지 않고 사건과 독립적으로 마주서서 사건을 포착하는 것이라면, 경험은 사건에 의해 갇히고 포착당하는 것이다. 반면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해 미리 영향력을 행사하여 실재를 산출하는 능동적 대처작용이 감정적 자발적 작용이다.

 

K. 지식과 사회

 

지식의 단계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다는 편견과 과학적 심리학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전자는 근거 없는 추측에서 비롯된 저급한 단계의 인식이고, 후자는 원인과 근거를 밑바탕으로 누구나 인정 가능한 주장을 하므로 훨씬 더 높은 단계의 인식이다. 인식과 지식에는 이와 같이 높고 낮은 단계가 있다.

플라톤은 오관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적 지식과 이성을 통해 인식되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구분했다. 가변적인 감각적 지식과는 반대로 이성지는 불변적이고 우월한 것이다. 스피노자 역시 플라툰과 유사한 분류를 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지식에는 감각에 기초한 혼란하고 단편적인 속견의 단계와 사물의 공통적 특색에서 공통 관념을 형성하는 과학의 단계, 그리고 모든 존재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진리인 직관지가 있다. 직관지에는 이 우주에 실체는 오직 신 하나뿐이라는 것과 모든 사건이 필연적 법칙에 따른다는 것에 속한다. 이러한 직관지를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직관지는 우리를 더 이상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이 일부인 타인과의 투쟁이나 미신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셸러는 지식(Wissen)과 인식(Erkenntnis)을 구분한다. 지식(=)은 두 존재 간의 관계이며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무가 푸르다는 지식은 나라는 존재가 나무의 푸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인식은 본래적으로 직관된 것(=지식)과 개념의 합치를 의미한다. 즉 인식이란 직접적으로 직관된 것을 개념으로 바꾸어 논리화, 체계화한 것이다. 존재들 간의 관계인 지식에는 진위가 있을 수 없는 반면에 인식에는 직관과 개념의 일치 여부에 따라 진위가 성립된다. 앎은 무엇을 아는 것이고 인식은 무엇을 무엇으로서 아는 것이다. 앎은 나무의 푸름을 아는 것이고, 인식은 나무의 푸름이 일정한 파장의 길이임을 파악하는 것이다.

 

지식의 종류

지식에는 높고 낮은 단계가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지식들이 있다. 셸러는 과학적 귀납적인 지식을 자연 지배를 위한 지식(세계지)으로, 철학적 지식을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지식, 즉 본질지로 보았고, 절대자에 관한 지식을 속세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구원자라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지식을 유도하고 인도하는 세 가지 관심에 따라 세 가지 지식 형태가 산출된다고 보았다. 자연에 대한 예측과 통제에 대한 관심에서 경험적 분석적 과학이 산출되고, 사회 속의 개인들 간의 의사소통과 의미 이해에 대한 관심에서 역사학적 해석학(타인의 정신의 산물인 저술이나 작품, 행위 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논하는 철학분야)적 학문이 산출되며 지배 및 권력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획득하려는 관심과 의지에서 비판 이론이 산출된다.(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177)

 

지식과 사회의 관계

시대와 문화에 따라 지식은 변천을 겪는다. 중세 암흑기에는 천동설이 지배적이었고, 르네상스기에는 지동설이, 그리고 현대에는 상대성 이론이 지배적이다. 과학뿐만 아니라 예술도 세계를 보는 눈과 양식에 따라 변화한다. 르노와르 같은 인상파 화가와 피카소 같은 입체파 화가의 세계관은 서로 다른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문화권내에서도 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세계관이 다르고 믿고 있는 지식이 다를 수 있다. 사회적 문화적인 제반 조건에 따라 지식이 달라지지만 역으로 지식의 변화에 따라 사회나 문화도 변화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전적으로 경제적 빈부 정도 및 경제 계급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식은 일방적으로 경제적 조건에 의해 결정당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셸러나 막스 베버(1864~1920, 독일 사회학자, 경제학자)는 단지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만 지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사회적, 문화적, 인구적 조건에 의해서도 한 사회의, 또는 한 계층의 지식이 달라진다고 보았다.

셸러에 의하면 '마르크스적 유물론의 오류는 지식이 전적으로 물질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데 있고, 관념론의 오류는 사회적 제도나 지식 체계를 모두 순수한 정신의 산물로 보는 데 있다. 그는 이러한 관점들의 독단성을 지양하여, 지식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물질적 요인(실질 요소)과 정신적 요소(이념 요소) 모두를 인정한다.(지식 사회학 69) 셸러에 의하면 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생물학적 요소가 이념적 지식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이념적 지식은 그러한 사회적 제반조건과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전개되고 발전될 수도 있다. 막스 베버 역시 마르크스의 경제 결정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의 비경제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지식과 이념이 영향받는다는 것을 시사했다.(지식 사회학 81)

이렇게 사고와 지식의 사회적 기원을 밝히고, 지식의 배후에 존재하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검토함으로써 사고 체계의 필연적 존재 이유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지식 사회학이다. 우리는 어떤 지식과 사회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그 지식의 편파성을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철학 코미디 5

데카르트

데카르트 :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면 의심을 해야 돼. 내 앞에 춧불이 실재한다는 것...... '2+3=5'라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의심을 해야 돼.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야.

학생 : (일주일 뒤에 나타나서) 선생님이 그 방법적 회의를 수학시험에 이용해보았는데 잘되지 않더군요, 문제가 안 풀려서 그 문제에 관한 온갖 것을 다 의심해 보았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어요,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 문제가 어렵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 그것이 진리구나' 생각하고 해답에다 '이 문제는 어렵다'라고 적었어요. 결국 틀렸지요.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진리라는 것도 한 번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철학 속담 5

철학은 무지의 대양 위에 뜬 작은 조각배와 같다.

 

 

6장 존재론

 

A. 존재론과 형이상학

 

얼마 전에 나는 그랜드캐니언 계곡을 촬영한 비디오를 보았다. 그곳은 마치 지구가 아니라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집 한채도, 인간 발자국 한 개도 없는 계곡은 순수 자연 그 자체였다. 그곳은 신의 자궁에서 갓 떨어져 나온 유아적 자연 같았다. 여기저기 고여 있는 물은 양수 같기도 하고 정액 같기도 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주먹만큼 컸고 하늘의 둥근 창문으로 짙푸른 빛을 마구 쏟아붓고 있었다.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론과 형이상학은 철학사에서 거의 같은 분과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의 하르트만 같은 철학자는 존재론을 형이상학 영역에서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는 문제 영역이고, 반면에 형이상학은 풀릴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보아 둘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그의 제자가 정리하면서 무제로 된 형이상학 부분을 물리학 부분 다음에 끼워놓고 마땅한 이름을 찾다가 '물리학 뒤에 놓인 것(ta meta physika)', 즉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에 형이상학은 '물리학 뒤에'가 아닌 '물리학을 초월한'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상징화되었다. 즉 형이상학은 물리학보다 한 차원 더 깊이 들어가서 자연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원리를 탐구하는 분과이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인식론, 가치론, 윤리학 등 모든 철학적 탐구를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출발했다. 탈레스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을 물이라고 보았고, 피타고라스는 수로,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보았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 , 공기 등 4원소라고 보았고, 데모크리토스는 불가분리적인 원자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자연철학은 그 충부한 상상력을 통해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인식 욕구를 발산했고, 그 이후의 발달된 자연과학의 추진력과 모태가 되었다. 철학과 과학이 미분리 상태에서 자연철학은 아직 철학에 귀속되었지만, 엄밀한 의미로 보면 그것은 원시과학과 원시철학의 중간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서양철학의 특징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찾아서 그것이 우주 전체에 작용한다고 보는 환원론적 사고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일한 원리가 자연 전체에 퍼져 있다는 자연의 동질성과 제일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 하나를 찾으면 우주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면 그것을 모든 영역에 확장시켜서 적용시키는 오류가 서양 철학에 빈번히 나타난다. 따라서 정신이 물질로 환원되거나(유물론), 물질이 정신으로 환원되며(관념론), 생명이 물질로 환원되거나(게계론), 또는 정신이 생명으로 환원되기도 한다(생기론).

 

B.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BC536?~470?, 영원한 생성의 철학)는 사물이 본질이 활성력 없는 견고한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불이라고 보았다. 만물은 불에서 탄생하면 불로 되돌아간다. 불에서 나오고 불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사물들 간의 마찰과 대립이 빚어지면 그것은 더 큰 변화를 야기한다. 만물은 어떤 순간에도 영속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은 흐른다. 계속해서 다른 물이 흘러오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불은 동시에 로고스(이성)로서 세계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 정신은 이성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파르메니데스(BC540?~480?, 영원한 존재의 철학)는 감각적 경험의 세계가 수시로 변호하는 가상세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감각세계는 세계의 참된 본질이 아니다. 참된 존재는 생성 소멸하지 않으며 무한불변이고 분할 불가능한 것(일자)이다.(서양철학사 43)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를 만물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는 있을 수 없으며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착각에 불과하다. 세계는 불변한다. 어떤 것도 완전히 새롭게 생겨나지 않으며(무에서 나오지 않으며), 어떤 것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무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C. 플라톤의 이데아론

 

서양철학사 전체는 플라톤 철학에 주석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영원불변의 것에 대한 추구는 다양한 철학속에 한결같이 스며들어가 있으며, 모든 인간의 사유습관이기도 한다. 플라톤 철학에는 아무런 체계도 없고 자유로운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후대 철학자들은 이러한 플라톤 철학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고 거의 모두가 체계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플라톤의 철학은 곧 영원불변하고 완전한 이데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황소의 이데아는 모든 황소의 본질임과 동시에 완벽한 이상적인 황소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 세상의 모든 구체적 사물들은 각각의 이데아에 대응되며 선,, 용기 등과 같은 추상적 개념에도 각각의 이데아가 대응된다. '이데아는 개념적 보편성의 원형이며 순수하고 객관적인 유개념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의 사물들에는 그러한 이데아, 예컨대 말, 나무, 책상, 집 등의 이데아가 존재한다. 개별적인 감각적 사물들에 대립되는 이데아는 어떤 감각적 성질도 소유하지 않으면 비공간적 비물질적이다.(서양철학사 67)

우리가 보고 듣는 감각세계는 이데아세계의 모방물에 불과하다. 감각적 세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가상의 세계이고 착각과 편견을 일으키는 세계이다. 반면에 이데아 세계는 영원불변하는 참된 존재의 세계이며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만 인식되는 세계이다. 감각 세계가 이데아 세계를 닮은 이유는 이 세계의 제작자인 데미우르고스가 세계를 창조할 때 완벽한 이데아를 표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세계는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실재적이며 진실한 세계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감각세계는 플라톤에 의하면 가상에 불과하며 하나의 어두운 동굴과 같다. 쇠사슬에 묶인 수인과 같은 사람들이 캄캄한 동굴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비춰진 사물들을 보고 있는데 그것은 사물의 참모습(이데아)이 아니라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동굴 속에서 어떤 한 사람(철학자)이 사슬을 꾾고 밖으로 나아가 눈부신 태양 아래 나타난 이데아를 바라본다. 이것이 동굴의 비유이다.

플라톤의 다른 비유에 따르면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이전에는 모든 것을, 그리고 이데아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혼이 지상세계로 건너올 때 레테라는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모든 것을 잊게 된다. 또는 영혼이 천성에서 지상의 육체 속으로 추락하면서 그 충격으로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다는 비유도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미의 이데아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플라톤에서 인식이란 새로운 것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이전에 알았던 것의 다시 떠올림(상기, anamnesis)이며 생산이 아닌 재생산이다.

이데아의 세계에는 높고 낮음이 있다. 이데아들 가운데 선의 이데아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선의 이데아는 모든 이데아를 포괄하며 능가하고 지배한다.(서양철학사 64) 선의 이데아는 신과 동일하며 모든 존재에게 완전함을 추구하도록 자극한다.

과연 플라톤은 이데아가 진정한 세계이고 감각세계는 가상이라고 개인적으로도 믿고 있었을까? 플라톤은 매일 먹는 빵과 포도주를 가상이라고 믿었을까? 플라톤은 완전한 이데아가 정말로 있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이데아를 본보기로 삼고 목표로 인간 영혼을 다듬고 사회를 변혁시키자고 제안한 것이다.

 

D.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18세 때부터 아테네로 가서 20년 동안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답게 스승보다는 진리를 보다 더 사랑했고 플라톤의 철학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플라톤의 주장처럼 이데아만을 따로 떼내어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데아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경험세계와 전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데아는 사물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데아는 사물 속에서 사물을 나타나게 하고 사물에게 사물이 본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아는 이 세계의 피안에 정지해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이 세계의 동적인 힘이며 구성원리이다.(서양철학사 77)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형상이 지시하고 목적하는 바대로 질료를 변화시키면서 모든 사물은 움직이고 변화한다. 만일 형상이 사물에 있어서 운동을 부여하는 움직이는 원리라며 질료는 움직이지 않는 움직여진 원리이다.(서양철학사 78) 질료는 전적으로 수동적임에 반하여 형상은 능동적이다.(서양철학사 79) 질료와 형상은 상호의존적이다. 즉 질료가 없으면 형상은 현상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반대로 형상이 없으면 질료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없다.(서양철학사 78) 질료와 형상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구체적 사물은 있을 수 없다.

질료 속에서 형상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상태는 가능태이고 형상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는 현실태이다. 그러나 가능태와 현실태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다. 씨앗의 관점에서 보면 어린 싹은 현실태이지만, 성장한 나무의 관점에서 보면 어린 싹은 가능태이다. 씨앗은 어린 싹을 도달해야 할 형상 또는 목적으로 삼지만, 어린 색은 성장한 나무를 도달해야 할 형상 또는 목적으로 삼는다. 모든 개별적 사물들은 끊임없이 보다 놓은 형상을 받아들이고 보다 높은 목적을 추구한다. 전체세계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목적의 왕국을 형성하며 전체세계 역시 나름대로 보다 더 높은 형상과 목적을 향해 쉬지 않고 발전하다.(서양철학사 79) 모든 세계 사건의 목표는 질료로부터의 가장 완전한 해방이며 순수한 형상의 형성이요, 모든 존재자를 완전히 정신화하는 것이다.(서양철학사 80)

이 세계가 미리 주어진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이론을 목적론적 우주론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꿈 같은 세계관은 근대의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바뀐다. 이것은 세계 안에 내재한 법칙에 따라서 사물들이 맹목적으로 움직인다는 건조한 세계관이다.

 

E.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중세 암흑기의 철학은 신학적 교리에 밑바탕을 두거나 신학적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철학은 거의 언제나 신학 밑에 위치하는 신학의 도구였다. 아랍세계로 넘어갔다가 역수입되어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신학의 옷을 입고 중세에서 크게 번성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을 수정한 것이므로 중세철학 속에 은연중에 플라톤의 철학이 함께 작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세철학은 초기의 교부철학과 그 이후의 스콜라철학으로 구성된다. 교부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관한 종교적 도덕적 사상이었고(2세기~8세기), 스콜라철학은 중세학원(스콜라)에서 논의된 신학적 철학이다(800~1500). 스콜라철학은 진리의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이미 불가침의 진리라고 인정된 것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중세 초기에는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이 대립된 것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철학에 대해 회의적인 교부가 많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기독교적 근본 교리가 철학적으로 체계화되고 그리스철학과 통일을 이루게 된다. 스콜라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대폭 수용하여 아퀴나스(1225~1274, 믿음을 통해서만 신을 인식할 수 있다.)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근대에서 스콜라철학은 비과학적이고 백해무익한 것, 또는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평가되고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된다. 스콜라철학에서는 특히 이데아 같은 보편자가 실재하는가, 아니면 편의상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가에 대한 논쟁, 즉 보편 논쟁이 철학의 중심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적 전통을 이어받아 플라톤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함께 종합시킨다.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의 존재만은 확신 가능하다는 주장(설렁 내가 오류를 범할지라도 나는 존재한다, Si fallor sum)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사상의 원형이 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가 주관적 개인적인 것이라는 회의론을 반박하고, 이데아는 우리가 발견하기에 앞서서, 그리고 우리가 발견하든 안 하든 거기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불변적 실재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편으로 내면으로 들어가라, 내면세계에 진리가 들어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내면적 진리보다 우월한 진리인 신적 진리를 추구했다. 인식 대상은 전적으로 우리 인식 작용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유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현실, 즉 신적 질서가 있다. 신은 양적으로 무한하고 질적으로 지극히 선한 자로서 인간으로서는 인식 불가능하다. 신은 단지 신의 언어를 통해서만 계시될 따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자를 성부에 종속시키는 이론을 반박하고 신적 실체는 성부, 성자, 성령인 삼자적 위격체내에 존재하며 현현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원래 죄가 없는 자유 상태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만이 자유이고 죄없이 태어났으며 아담의 죄악으로 인하여 어떤 인간도 더 이상 자유일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은 모든 인간이 아니라 특정한 선택되고 예정된 인간에게만 은총을 준다. 인간의 안목으로는 현재만이 현실적인데 반해 신의 안목으로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까지도 현재적이다. 시간이란 세계가 있고 변화가 있는 곳에만 존재한다. 세계는 시간과 함께 동시에 창조되고 발생되었다.

 

아퀴나스

신은 인간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서 가장 깊숙한 곳에 은닉해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부정신학(철학의 뒤안길 119)에 반대하여 아퀴나스는 종교적 진리가 초이성적,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의 힘에 의해 인식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신의 존재는 이성에 의해 입증 가능하다. 신은 모든 운동의 최초 원인으로서, 그리고 모든 자연 사물의 목표 설정자로서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신은 믿음을 창조했고 동시에 이성도 창조했으므로 다 같이 신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성과 신앙은 서로 일치한다.(철학의 뒤안길 140) 그러면서도 아퀴나스에서 자연적 이성의 진리는 믿음의 진리 아래에 놓인다.(철학의 뒤안길 141)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적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감관속에 있지 않았던 것은 정신 속에 있지 않다고 보았다. 즉 형상은 오직 자연세계 속에 들어 있는 형상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다. 신에 대한 인식도 결코 과학적 현실적 방법을 떠나서는 얻어질 수 없다. 신은 자연적 지식에 근거하여 인식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가시적 세계가 질료와 형상의 합성 실체라고 본다. 모든 합성실체는 생성 소멸하며 나름의 존재 목적을 지닌다. 낮은 것은 보다 높은 존재를 위해 존재하며 피조물 전체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세계는 죽은 사물,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천사 등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불멸의 정신을 가진 점에서 동식물과 구분되며 천사 또한 순수정신이다. 신은 순수 형상이며 순수한 정신이다. 세계 전체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었는 추구 속에 있다.(철학의 뒤안길 143)

아누구스티누스에서 영혼과 육체는 플라톤적으로,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며, 그것들이 실체적인 단일체가 아니라 단지 상호 작용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반면에 아퀴나스는 영혼과 육체가 한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두 개의 원리라고 보았고, 그것들이 실체적인 단일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영혼은 아퀴나스에서 육체의 형상이며 육체를 지배하는 원리이다.(철학적 인간학 28~29)

 

F. 보편 논쟁

 

철학사는 치고받는 싸움터와 같다. 중세에는 보편자의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나무라는 보편자가 세계 창조 이전에 있었고 그 보편자로부터 내 눈앞에 서 있는 나무가 생기게 된 것일까? 아니면 먼저 나무들이 존재했고 편리상 그것들에 나무라는 명칭을 우리가 붙인 것일까?

중세의 보편 논쟁은 보에티우스(470~525)가 포르퓌리오스(233~304)의 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논리적 범주가 단지 논리적 의미만을 갖는다, 아니면 존재론적 의미도 가지는가를 논의)'을 주역하면서 시작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유와 종이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가, 아니면 우리 마음속에서만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인간, , ......등의 보편개념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 문제의 해답은 기독교 신조에 즉각적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 논쟁은 맹렬하게 진행되었다. 만물의 제일 원인이며 창조자인 신은 곧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 대응된다. '신은 모든 변화 가운데서 영원히 살아 있는 원리요, 결코 변하지 않는 모형이다' 그는 모든 형사, 모든 이데아의 통일이다.(열가지 주제로 읽는 철학 이야기 32) 그러므로 영원한 형상, 보편자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은 곧 영원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보편 실재론은 중세 초기와 중기에 지지되었고, 중세 암흑기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보편이 이름뿐이며 인위적 산물이라는 유명론이 강세를 보였다.

보편이 실재한다는 보편 실재론에 의하면 보편은 개별적 사물들에 앞서서 그 사물들의 원형으로서 신의 정신 속에 미리 존재해 있었다. 이데아는 신이 정신 속에 들어있고 신은 그것을 모델로 하여 질료를 다듬는다. 보편은 개별적 사물의 유무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인간이 없더라도 언제나 현존한다. 이런 입장의 대표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제자 안셀무스(1033~1109, 최고 완전자인 신이 존재를 결핍할 수는 없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는 존재론적신 증명)이다.

반면에 유명론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 사물들 뿐이며 보편은 이름에 불과하다. 유와 종, 보편은 사물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물의 본성으로서 사물 속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보편은 오직 사물 뒤에 사물이 명칭으로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보편이란 인간이 지적 활동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명론의 대표자는 로스켈리누스(1050~1120)W. 오캄(1285~1349)이다.

오캄에 의하면 보편은 우리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불분형한, 그리고 불충분한 기호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즉 감각 경험 없이는 보편에 관한 어떤 지식도 불가능하다.(서양철학사 293이하) 둔스 스코투스(1266~1308)는 한발 더 나아가 인간 이성은 감각으로 접촉한 대상을 초월해 있는 대상을 인식할 수 없으며, 철학은 가시적 세계의 분석에 축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서양철학사 289이하)

유명론은 신앙과 지식간의 유대를 단절시키고 스콜라철학을 붕괴시켜 신앙, 과학, 철학 등 모든 분야에 미증유의 활력을 부여했다. 모든 권위를 거부한 유명론은 오직 자연에 대한 직접적 경험과 관찰만을 중시하는 새로운 철학과 과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세계철학사 하권 15) 보편 실재론과 유명론의 중간적 입장에는 보편이 사물에 앞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물 속에 내재한다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실재론자는 물론이고 가장 독설적인 유명론자까지도 신의 존재를 누구도 거부한 적이 없다.

 

G.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대학 시절에 욕설과 독설이 심한 후배를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옆에 앉았던 다른 후배가 스피노자의 사상을 빌어서 나를 마구 반박했다. 그때 그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스피노자는 내게 잊혀지지 않는 철학자가 되었다. 내가 그때 받은 비난은 자아을 우주와 일치되도록 크게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우주 전체를 한 덩어리라고 보며 나와 우주가 합치되어 나를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최고로 행복한 상태라고 본다.

스피노자는 전통적 목적론적 우주관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세계 창조주로서의 신 관념을 배격한다. 그 때문에 스피노자는 갖은 박해와 비난을 받고 암살과 추방의 대상이 된다. 스피노자는 그 결과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모욕을 받은 사상가가 되었다.(철학의 뒤안길 197)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필연적인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동식물 같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 의지, 감정, 심지어 신까지도 자연 법칙의 지배 아래에 있다. 신은 곧 자연이기도 하다.

신은 영원 무한하고 분할 불가능하며 연속적인 충만 상태이고, 자신의 고유법칙만을 따르는 존재, 즉 자유 존재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신은 창조주도 아니고 인격 신도 아니다. 신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 즉 유일한 독립적 존재자, 자기 원인적 존재자(자기 아닌 다른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존재)이다. 바꿔 말하면 세계는 하나의 실체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개체로 알고 있는 사물이나 인간들은 독립적 신체들이 아니라 신이라는 실체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이라는 한 나무에 나란히 매달린 잎새들이다. 인간 간의 투쟁은 한 나무의 잎새들 간이 투쟁처럼 무의미하고 모순적인 것이다.

무한 실체인 신의 두 가지 속성은 사유와 연장이다. 신의 일부인 일체의 것들도 마찬가지로 사유와 연장으로 되어 있다. 'x의 제곱+ y의 제곱=1(사고 대상)''(물체)'의 관계처럼 동일한 한 존재가 연장이기도 하고 사유이기도 하다. 생명 없는 바위도 예외가 아니다. 한 사물을 또는 한 인간을 연장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사유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연장과 사유는 마치 한 동전이 양 측면과도 같다. 영혼과 육체는 인간의 두 측면이다. 인간을 영혼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100% 영혼이고, 인간을 육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100% 육체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

신을 포함한 모든 자연은 사유와 연장 이외에도 무수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 한계내에서는 오직 사유와 연장 두 개만이 인식 가능할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는 반대로 목적론적 자연관을 되살린다. 당시 철학은 목적 개념에 중심을 둔 아리스토텔레스와 기계론적 인과율에서 시작하고 있는 데카르트 사이에 놓여 있었다.(철학의 뒤안길 212) 라이프니츠는 목적론과 기계론의 종합을 시도한다.(철학의 뒤안길 213) 우주의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는 법칙이 있는 동시에 우주 전체의 조화는 신에 의해 예정된 것이다.(철학의 뒤안길 222)

데카르트가 정신을 사유 실체로, 물질을 연장 실체라고 보고, 스피노자는 연장과 사유를 한 실체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보았다면, 라이프니츠는 실체는 불가분리적인 것이므로 언제나 쪼개질 수 있는 연장은 실체일 수 없고 정신만이 실체라고 보았다.

불가분리성을 본질로 하는 정신적 실체가 바로 단자(Monad)이다. 단자는 기하학적 점과 같이 부분이 없는 단순실체이다. 단자는 부분이 없으므로 나뉘어질 수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다. 단자는 밖에서 오는 영향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으로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힘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단자들도 되어 있다. 단자는 각자 완전히 자기 독립적이며 다른 단자들과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소위 단자에는 창문이 없다. 우주는 무수한 단자들의 계층 체계이다. 최고의 정신적 실체, 최고의 단자는 신이고 그 밑에 이성적 마음들, 감각과 욕망을 소유한 동물적 의식, 식물의 영혼, 희미한 지각을 가진 무생물적 영혼이 있다.

단자들은 밖을 내다보는 창이 없으며 단지 자신 안에 내재하는 원리에 따라서 움직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단자들 간에는 어긋남과 충돌이 없고 조화롭다. 꽃이 피면 나비가 날아든다.

라이프니츠는 존재론적 신 증명 이외에 진리의 근원으로서, 우주의 근거로서, 그리고 예정조화의 원인으로서 신이 실재함이 분명함을 증명했다. 또한 단자의 근원으로서도 신은 반드시 실재한다고 보았다.(철학의 뒤안길 223~224)

과연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조화롭기만 한가? 신이 있다면 왜 전쟁과 범죄가 있고 불구자와 백치가 있는가?

 

H. 베르그송

 

불어를 유난히 좋아하던 나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계속 베르그송 강의를 들었었다. 노장 교수의 강의였고 이미 교수가 된 그 교수의 제자들이 언제나 구름처럼 몰려와 비좁은 연구실을 가득 메웠다. 몇 시에 끝날지 모르는 긴긴 강의 끝에는 언제나 술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강의보다는 술자리가 더 좋았다.

근대에 생겨난 생 철학은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반발적이며 낭만주의와 친화적인 생동감이 넘치는 철학이다. 생 철학은 이론적 사고만으로는 포착 불가능한 생동적 삶을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비합리주의적인 생 철학에 의하면 이성은 단지 삶의 도구에 불과하고 삶의 중심은 이성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 철학에서는 개념이나 법칙보다는 직접적 관조나 체험이 우위에 있다.(세계철학사 하권 351) 그리고 우리는 인식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인식한다.

베르그송은 생 철학자로서 생명과 자유, 그리고 직관의 철학을 전개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물질은 타성과 필연성에 물들어 있는 반면에 생명은 예견할 수 없는 자유로운 운동에 의해 창조하고 진화한다.(베르그송의 철학 124) 모든 생명은 의식인 동시에 정신적 에너지이다. 식물은 태양에너지를 비축하는 방향으로 가고, 동물은 반대로 태양에너지를 소모하는 방향으로 간다.(베르그송의 철학 130~133) 생명의 비약의 세 방향은 무감각 상태의 식물과 본능, 그리고 지능이다 본능이 무의식인 경우가 식물이고, 본능이 의식을 갖춘 경우가 동물이다. 본능 진화의 정상은 막시류의 곤충이고, 지능 진화의 정상은 인간이다(베르그송의 철학 156). 인간의 본능은 부정확하므로 지능의 도움이 필요하다.(베르그송의 철학 159)

본능은 사물에 연관된 선천적 인식이고, 지능은 선천적인 관계 인식이다. 본능이 내용 인식이라면 지능은 형식 인식이다. 본능이 무의식적 발견이라면 지능은 의식적 모색(찾음)이다.(베르그송의 철학 162~163) 본능과 지능이 모두 생존을 위한 실용적 목표를 갖는 반면에 직관은 비실용적인 것을 지향한다. 본능과 직관이 생명과 호흡을 같이한다면 지능은 생명보다 물질을 가까이 하며 물질을 관리하는 능력이다(베르그송의 철학 170). 지성은 사물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동질성과 유사성에만 관심을 갖는다.(베르그송의 철학 165) 지성은 본능이 가진 공감력과 생명력을 상실한 대가로 자유를 갖는 반면에 본능은 생명력과 공감력을 갖는 대신에 부자유인 것이다.(베르그송의 철학 185) 직관은 자유와 동시에 공감력과 생명력을 갖춘 것이다.

본능 하면 애벌레의 몸에 침을 놓아 잠을 재우고 애벌레의 몸속에 알을 낳는 벌이 생각난다. 어떤 외과의사도 할 수 없는 일을 벌이 해내는 것이다. 애벌레의 몸 어느 한 점을 정확히 찔러서 애벌레를 잠재우면 애벌레는 썩지 않고 싱싱하게 보존되어 새끼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이 예는 베르그송이 그의 책 '창조적 진화'에서 언급한 것이다.

지성을 통해서는 삶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성은 질적인 것을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자유로운 것에서 결정적인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서양철학사 410) 삶의 세계는 단지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철학과 예술은 사물을 생존에 필요한 유용성이 관점에서 독립해서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직관의 세계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살아 있는 것은 지성이 우리를 기만하듯이 그렇게 불연속이 아니라 흐름이다. 삶은 궁극적으로 개성적인 것이며 영원히 변형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아무것도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철저한 자유 속에 있다.(서양철학사 410) 베르그송에서 고정된 동일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동일한 지속적인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지성에 의해 스스로 기만당한 결과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영원한 생성의 변화의 철학이다.(서양철학사 410)

 

I. 하르트만

 

칸트처럼 공정하고 솔직하게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만함이 없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바깥 대상이 실재함도 인정하며 세계 현상을 경험에 비춰지는 그대로 세밀히 분석하려고 했던 철학자다운 철학자, 그가 바로 하르트만이다.

 

형이상학 개념

하르트만은 세계, 영혼 그리고 신과 같은 초월적 대상을 완전히 파악 가능하다고 믿고 사변을 통해 완결적 체계를 구축한 과거의 형이상학, 즉 사변적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그 대신에 그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독단적 이론을 내세움이 없이 구체적 현상과 사실에 의존하는 비판적 형이상학을 지향한다. 형이상학이란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는 인간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철학의 흐름과 문제들 101) 인식 주관에 의해 완전히 파악됨이 불가능한 비합리적인 것(=풀 수 없는 것)을 내포하는 대상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이때 형이상학적 탐구 대상의 파악 불가능성, 비합리성은 그 대상의 존재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인식 주관의 능력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르트만은 고대나 중세 형이상학처럼 보편자나 신 같은 최고 원리에서 낮은 원리들을 연역해내고 도출해내는 목적론적 사고방식이나 연역적 방법을 거부한다. 그 대신에 주어진 것에 대한 세밀한 파악과 비판적 분석적 방법을 기조로 한다.

 

존재론의 의미

존재론은 형이상학의 대상들 가운데 인식 가능한 것(=합리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존재론 역시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비판적 태도와 방법에 토대를 둔다. 존재론을 형이상학으로 나가기 위한 토대로서 형이상학의 문제 가운데 풀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풀어냄으로써 형이상학의 영역을 축소하려는 과제를 지닌다.

하르트만은 존재론의 탐구에서 칸트의 비판적 태도를 계승하여 독단주의를 배제하며 그와 동시에 무분별한 회의주의도 배척하고 단지 인식 한계만을 명확히 설정하려고 시도한다. 존재론의 방법은 위로부터가 아닌 밑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주어진 현상들을 충분한 토대로 하여 존재자의 특수성에서 원리와 근거로 나아가는 경험주의, 실증주의를 채택한다. 존재론이 구체적 탐구 대상은 존재자의 존재 방식, 존재 구조, 존재 양상, 그리고 존재 범주들 간의 관계 등이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전통철학은 일원론적 통일 욕구에서 한 영역의 범주(존재 원리)를 다른 이질적인 영역에 옮겨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런 예로는 인간 공동체나 우주적 체계 및 모든 존재자를 유기론적으로 해석하는 생물학주의나, 정신 세계를 심리 상태나 심리적 과정에 의해 설명하려는 심리주의, 물질계에 적용되는 범주를 가지고 생명계와 정신계까지 포착하려는 유물론, 그리고 역으로 정신계에 해당되는 범주를 가지고 물질계를 파악하려는 유심론 및 관념론이 있다. 이것은 하르트만은 범주적 한계 위반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존재층의 범주들을 정확히 검사하지 않고서 보다 높거나 낮은 층으로 옮기는 오류이다. 하르트만은 그런 오류를 엄밀한 비판적 분석으로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하르트만의 비판적 존재론에 의하면, a 실재성과 구체성은 다른 것이다. 구체적이지 않은 것도 실재할 수 있다. 즉 인간 운명이나 역사적 사건 같은 것은 구체성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실재적인 것이다. b 또한 모든 실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생성 속에 놓여 있다. c 어떤 존재론이라도 우리가 끝까지 인식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d 정신, 심리 현상, 생명체의 층, 물리적 현상의 층 등 모든 존재 단계가 상이하며 분명히 차등적이다.

 

하르트만의 존재론이나 형이상학, 그리고 가치론에서 신의 문제는 풀 수 없는 것으로서 배제된다. 만일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신이 있다면 우리는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자유는 우리의 도덕적 결단과 책임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신이 없을 수 있으면 없어도 무방하다(Also kann und darf es keinen Gott geben). 이것은 칸트가 도덕성립 조건으로서 요청했던 유신론(영원한 심판자로서의 신이 있어야 도덕이 의의가 있다)과 방향이 거꾸로 뒤집어진 것이며, 도덕성립 조건으로서 무신론을 요청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존재 계기, 존재 방식, 존재 양상

(a) 존재 계기~ 사과는 붉다. 사과의 붉음은 아가 볼 같은 붉음이다. 붉음은 사과에 붙어 있는 존재이다. 아가 볼 같은 붉든 존재는 기본적인 줄기와 그 줄기와 그 줄기에 붙어 있는 부속적인 줄기로 되어 있어서 마치 나뭇가지와도 같다. 존재의 기본적인 줄기 그것은 어려운 개념으로 정재(Dasein)라고 한다. 정재와 상재의 관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사과의 붉음은 사과와의 관계에서는 상재이지만, 아가 볼 같은 붉음에 비하면 정재이다. 상재와 정재는 존재의 두 가지 계기이다.

(b) 존재 방식~ 실재하는 사과(정재)는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상상 속의, 관념 속의 사고는 먹을 수 없다. 실재하는 붉음(상재)은 붉다. 관념속의 붉음도 똑같이 붉다.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 방식에는 실재적인 존재 방식과 이념적 존재 방식이 있다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시간속에 있으면 생성 변화한다. 반면에 이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불변이다. 실재적 존재는 일회적이면 이념적 존재는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잇다. 실재하는 사과는 단 한번 존재한 뒤 인간이나 동물에게 먹히거나 썩어버린다. 반면에 이념 속의 사과는 어제도 오늘도 생각 속에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보편자, 수학, 법칙, 가치, ...... 등은 이념적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념적 존재가 영원하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적 존재보다 반드시 우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적 존재는 실재적 존재이고 이념적 존재는 허공을 떠돌아 다니는 실체없는 존재, 존재 무게가 결여된 절반 존재이다.

(c) 존재 양상~ 언덕 위에서 돌 하나가 굴러떨어진다. 돌은 언덕 위에 그대로 놓여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던져서 허공을 통해 낙하할 수도 있다. 그 많은 가능한 일들 가운데 어떤 것 하나가 현실로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그것이 일어날 만한 필요한 조건과 원인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언덕은 비탈이 져 있으며 미끄럽다. 다람쥐 한 마리가 돌을 밟는다. 돌이 떨어지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으며 낙하되는 필연적 조건을 모두 갖춤과 동시에 현실적으로도 낙하되었다. 이처럼 존재양상에는 현실성, 가능성, 그리고 필연성이 있다.

 

존재 원리

이 세상에는 생명이 없는 것도 있으며 생명이 있는 것도 있다.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존재에 똑같이 적용되는 존재 원리가 있다. 그것이 곧 범주이다. 범주들 간에는 다시 의존하고 결합하는 일정한 법칙들이 있다. 그것은 범주의 범주이다.

예를 들면 높은 존재는 낮은 존재보다 자유롭다. 그러나 반대로 낮은 존재는 높은 존재보다 강하다. 정신은 바위보다 자유롭다. 하지만 바위로 그 어느 것에도 의존함이 없이 바위로서 존재할 수 있다. 반면에 정신이 존재하려면 살아있는 육체가 있어야 하며 육체를 구성하는 무기체 또한 있어야 한다. 육체 없는 정신은 있을 수 없다. 즉 정신은 의존적이며, 따라서 약하다.

이 세상은 공평하다. 돌멩이는 무식한 대신에 강한 존재력이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돌멩이보다는 자유롭지만 다른 것을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철학은 높은 정신적인 존재이지만 삶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철학 없이도 우리는 한평생 탈없이 살수 있다. 빵은 정신적 가치를 갖지는 않지만 그것은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이다. 굶주린 채 누구도 사흘을 잘 넘길 수 없다.

 

철학 코미디 6

버클리

버클리 : 저기 서 있는 저 나무는 정말로 저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맺힌 상일 뿐이야. 즉 나의 푸른 감각에 불과할 뿐이지. 내가 눈을 감으면 저 나무는 나의 시각에서 사라질 뿐 아니라 정말로 없어지는 거야.

학생 : 그럼 선생님이 다시 눈을 뜨시면 저 나무가 다시 선생님의 시각에 나타나겠지요. 저 나무는 선생님이 눈을 감으신 동안 어디 가서 놀다 왔을까요?

버클리 : 그동안에는 하나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있었던 거야.

학생 : 그럼 하나님도 바깥에 실재하는 나무가 아니라 푸른 감각에 불과할 뿐인 나무를 머릿속에 갖고 계신가요? 완전자인 하나님이 왜 그런 헛것을 머릿속에 담고 계실까요?

 

철학 속담 6

철학은 무지의 대양 위에 뜬 작은 조각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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