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백정과 동학농민군
대한제국 고종 31년(1894년), 갑오경장의 정변이 일어났고 동학의 반란이 꿈틀거리던 해, 세상이 불안했다. 그 해 장안의 한 마을에서 잔치판이 벌어졌다. 장사로 거부가 된 집안이 벼슬하는 양반 사위를 맞은 날이다. 돈과 신분을 결합시키는 정략혼인이었는데 양가는 그걸 과시하기 위해 크게 잔치판을 벌였다. 몇 백 평이나 되는 넓은 마당에 차일을 치고 수백 명의 손님들이 버글거렸다. 그 잔치에는 소가 세 마리, 돼지 열 마리 그리고 닭은 쉰 마리를 잡았다. 푸짐한 안주에 몇 항아리의 술독이 비워졌다.
잔치판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한 사나이가 들어섰다. 키가 여섯 자나 되고 옷에는 피 같은 붉은 점들이 있었다. 무표정했으며 눈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성(無姓)이다!’
잔치판이 술렁거리고 수군댔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장안 백정 무성이다. 무성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슬슬 피해 길을 터줬다. 무성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그대로 두면 대감이 양반을 대접하고 있는 사랑채로 들어갈 것 같았다. 잔치판의 경호를 맡고 있었던~주먹깨나 쓰는 장돌뱅이들과 관아의 포졸들이 몇 달려 왔다. 그러나 그들도 무성이를 알고 있었다. 건드리면 안 된다. 건드려놓으면 큰일 난다. 무성이는 힘이 장사였다. 씨름판에서는 아무도 그와 겨루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 소를 잡을 때 사용하는 날이 시퍼런 칼을 품고 있었다. 그 칼은 사람을 잡는 데도 사용했다. 그는 그 칼을 던지거나 휘둘렀는데 마음먹기에 따라 죽이거나 상처만 내기도 했다. 귀가 절단되기도 하고 손가락이 잘려 나가기도 하고 더러는 목이 날아간다는 소문이었다. 관아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노비법이 폐지되어가는 마당에 누가 범의 코털을 건드리겠는가? 그를 건드리면 장안의 수천 명의 백정들이 칼을 들고 일어선다. 단결력이 강한 그들이 일어서면 물도 불도 모르고 덤빈다. 경호원들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길만 막았을 뿐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무성이 계속 걸어 들어가자 늙은 집사가 나섰다.
‘자네가 웬일인가? 볼 일이 있다면 은밀하게 만날 수도 있잖은가?’
‘거지처럼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까? 당치 않습니다. 백정은 거지가 아니외다!’
‘볼 일이 뭔가?’
‘이 천한 놈이 우리네 친척을 찾아왔소. 소나 돼지를 잡는 우리네 백정의 친척 말이요. 그 친척 좀 봅시다.’
소나 돼지를 잡는 건 백정의 전업이었다. 오랜 관례였고 백정 외에 다른 사람은 못 하게 되어있었다. 실수다. 도살비를 좀 아껴보려고 백정들 모르게 종놈들을 시켜 소와 돼지를 잡았는데 그게 무성에게 걸렸다. 백정들의 정보력은 거미줄 같았다.
‘종놈들이 모르고 한 일이네. 미안하네.’
‘천만에 …. 종놈들이란 본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법, 우리네 친척은 그걸 종에게 시킨 사람일 거요. 혹 집사 어른 당신이요? 아니면 이 집 주인 영감이든가.’
‘예끼, 이 사람!’
집사는 무성에게 살살 빌고 소 한 마리 값을 물어주었다. 그 이상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무성이 잔칫집에서 한 건 올리고 장안 서북쪽의 자기 집으로 돌아갔더니 멀리 전라도에서 온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정은 서민들과 떨어진 곳에 자기들만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살림이 궁색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천대를 받았으나 돈을 잘 벌었다. 백정 두목 무성의 집은 마을 한가운데 대지가 200여 평이나 되고 사랑채와 안채는 물론 행랑채까지 있다. 전라도의 손님들은 뒷마당의 별채에 있었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비밀방이었다. 손님은 평소에 형 아우로 지내는 전라도 백정 두목 곰보고 함께 온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다. 중년 사나이로 상투를 틀고 있는 걸로 봐 백정이 아니다. 날카로운 눈빛과 건장한 체구가 예사 사람은 아니다. 곰보가 그를 박주사로 부르며 존대했다. 무성은 뭔가 짐작을 하고 긴장했다. 손님은 조용조용하게 말하고 주인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동학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무성의 짐작은 옳았다.
박주사는 동학 수령의 최측근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동지의 규합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패한 사회의 피해자들을 모아 호소와 선동으로 동지로 포섭하는 임무다. 백정들은 그 대상이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살고 있는 그들은 세상을 저주했다. 그들을 규합하여 혁명의 맨 앞에 세우려고 했다. 칼은 그들의 생업이고 살육은 본업이다.
박주사는 전라도 백정을 포섭하여 동학에 편입시켰다. 곰보를 통해 장안의 백정을 포섭하고 두목을 포섭하여 전국의 백정을 끌어들일 셈이었다. 박주사는 곧 자기의 신분을 밝히거나 동학에 참여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목숨이 걸린 문제다. 혁명은 반역이고 반역은 국가 중죄다. 능지처참형을 당하고 삼족이나 구족이 화를 당한다. 또 반역은 불고지죄(不告知罪)다. 박주사는 상대를 그런 위험에 몰아넣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위험에 몰리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혁명에 동참하든가 아니면 고발을 하든가. 하지만 어느 것을 선택하든 죽음이 걸려있다.
무성이와 손님들은 오래도록 술을 마셨다. 값비싼 소주와 어느 부잣집 부럽지 않은 안주가 나왔다. 박주사는 세상 돌아가는 일만 얘기했다. 부패한 지베 계급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를 말했고 짓밟히고 있는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을 말했다. 무상도 가끔 곁들였으나 핵심적인 얘기는 서로 피했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의 의중을 알아차렸으나 반응은 없었다. 박주사는 자신의 계획에 차질을 느꼈다. 백정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다. 백정은 매일 끼니를 굶주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서민들과 달랐다. 일정한 생업이 있고 부지런히 생업을 하면 굶주리지는 않았다.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보릿고개 춘궁기도 겪지 않았다. 세금도 내지 않았고 군역의무도 없었다. 삶의 여유가 있었다.
백정은 서민이나 농민보다 자유로웠다. 관아에서는 서민이나 농민에게 주는 권리를 주지 않는 대신 과세나 병역의무도 없었고 굶주림도 없었으므로, 버림받은 사람들로서 사는 게 편했다. 박주사는 백정 마을에서 그걸 느꼈다. 백정은 혁명에 쉽게 가담할 것 같지 않았다. 착취를 당하고 압제를 당한 사람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는 절망감이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백정에게는 양반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양반과 관리들의 횡포를 증오했다. 드러내놓고 거침없이 욕을 퍼부었다. 일반 농민들이나 서민들에게 스며있는 두려움이나 굴복감이 없었다. 그건 혁명의 동기가 될 수 있다. 백정은 혁명대열의 앞줄에서 전사가 될 수 있다. 박주사는 계속 무성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나 무성은 끝내 아무 언질도 없었다.
‘며칠 동안 머물다 가시지요. 이왕 먼 길을 오셨으니 며칠 푹 쉬었다 가십시오.’
무성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백정사회에도 장로들이 있으므로 장로들과 상의를 해보겠다는 말이라고 곰보가 해석했다.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위험했다. 백정들이 혁명에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이 되면 어떻게 될까? 불고지죄를 모면하기 위해 관아에 고발을 할 것이다. 아니면 바로 반역 도당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럴 일은 없소. 백정은 그런 짓은 하지 않소. 찾아온 손님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소.’
곰보가 단호하게 박주사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박주사는 품에 품은 육혈포(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놓았다.
다음 날 아침, 비명소리에 박주사가 마당으로 나갔다. 무성의 집 사랑채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포졸들이 있었다.
(백정 놈이 배신을 했구나!)
무성의 집 옆에 도살장이 있고 비명은 돼지들의 소리였다. 도살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는데 그중에는 가마를 탄 고관들과 양반들이 있었으며 포졸들이 그들을 경호했다. 사람들은 소의 선혈을 마시려고 도살장으로 몰려들었다. 소의 선혈은 강장제다. 그래서 양반의 부인들도 왔다. 백정 두목 무성은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배신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사흘 동안 잘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무성은 그저 자기에 맡겨달라고만 했다. 그는 동학군이 서울에 쳐들어오면 협조하겠다고 암시했을 뿐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서 지겠다는 의도였다. 박주사는 무성을 믿었다. 백정은 천민 계급이었으나 정의감이 강했고 의리가 있었으며 천대를 받고 살아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강했다. 박주사는 곰보를 다시 전라도로 돌려보내고 혼자 함경도 함흥으로 갔다. 나흘 후 함흥 교외에 있는 허름한 주막에서 한 사람의 포수와 만났다. 밀령을 받고 미리 와서 기다리던 사람이다.
농민들의 수탈과 부패정치의 개혁을 부르짖은 동학은 힘에 의한 혁명을 계획했다. 합법 투쟁의 한계를 느껴 부패한 관리를 죽이고 중앙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서울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전봉준을 수령으로 한 동학군은 농민들이 주동이었으나 수뇌부는 농민 외에 백정을 가담시키기로 하는 한편 포수를 규합하기로 했다. 포수들도 천대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반사회에서 쫓겨나 산중에서 짐승들과 사는 사람들이었다. 포수들은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세력이나 협동심이 대단했으며 무기를 잘 다루었다. 산중생활에서 훈련된 사냥 솜씨는 어떤 병사들보다도 뛰어났다.
당시 조선의 포수들은 화승포를 가지고 있었다. 총신 안에 화약을 채워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폭발시키는 원시적인 총이었으나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활이나 창보다는 월등한 위력을 발휘했다.
흥선대원군은 양요가 일어나 백인들이 습격했을 때 강원도와 평안도 포수들을 동원하여 관군과 함께 싸웠는데 포수들은 오히려 관군보다도 더 월등한 전투 실력을 과시했다. 근대적인 총을 가진 백인들이 원시적인 화승포에게 쫓겨 달아났다. 동학의 수뇌부는 포수들에게 주목했다. 포수들이 혁명에 동참하면 관군을 이길 수 있다. 관군 편을 든 외국군대와도 싸울 수 있었다. 함경도 개마고원 일대에 살고 있는 포수 마을이 포섭대상이다. 그들은 일기당천의 용사들이다. 그들을 포섭하면 함경도 산중이 혁명의 근거지가 될 수도 있고 천연의 요새로써 관군은 그 산중에 들어가지 못했다. 또한 그곳은 국경지대였으므로 혁명이 불리하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 당시 포수 마을은 관아의 명령을 거부했다. 관아의 수령이 호피와 웅담을 공출하라고 지시했으나 포수는 수령의 지시를 무시했다. 수령은 상납할 물건을 확보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대노한 수령이 관군을 보냈으나 관군은 참패하고 돌아왔다.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포수들의 공격받아 거의 전멸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거의 다 죽었다. 박주사가 그런 상황에 함흥에 도착했다. 주막에서 기다린 젊은 포수는 전북 전주의 양반집 노비였는데 어린 누이가 양반 주인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하고 노리개가 되었고, 주인마님의 질투에 매를 맞아 죽자 주인집에서 탈출했는데 그 탈출을 도와준 것이 박주사였다.
종달이라는 그 사냥꾼은 벙거지를 쓰고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스님의 의장이었다. 키보다 큰 지팡이는 속에 칼이 들었다.
‘자네 옛 주인은 혁명군에게 처형되었어.’
박주사가 양반집을 습격할 때 혁명군을 지휘했다. 양반은 장돌뱅이, 부랑자를 수십 명 고용하여 집을 지키려고 했으나 밤중에 혁명군이 담을 넘어 들어가 양반을 끌어냈다. 양반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양반이 매질을 해서 죽인 소작인의 동생이 박주사가 말릴 틈도 없이 몽둥이로 내리쳐 죽였다. 집사도 죽였고, 양반보다 더 악독하다던 안주인은 옷을 벗기고 창으로 난자당했다. 박주사의 말을 들은 종달이가 엎드려 절을 했다. 종달은 박주사를 대동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동굴에 박주사를 남겨놓고 나갔던 종달이 돌아왔는데 옷에 피가 묻었다.
‘뒤를 밟고 있는 염탐꾼을 처치했습니다.’
관아는 염탐꾼을 동원하여 감시를 했다. 나라를 뒤집으려는 불온자를 감시했다. 포수도 주요 감시 인물이었다. 종달이에게 죽은 자는 종달이 주막에 머물 때부터 감시하고 있었다. 종달은 숨어서 뒤를 밟아오는 염탐꾼을 칼로 찔러 늑대 길에 던져버렸다. 다음날에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개마고원은 그런 곳이다. 첩첩산중에는 관아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달리 있었다. 축지 장군이다. 포수 마을 두령이 일대를 지배했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는데 산간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개마고원은 광활한 짐승들의 나라였으나 그래도, 아주 적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살았다. 짐승을 잡는 포수들, 불을 질러 숲을 태워 곡식을 심는 화전민들, 나무를 베거나 숯을 굽는 나무꾼, 산삼이나 약초를 캐는 심마니 그리고 암자를 짓고 수련하는 스님이나 무당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산을 가장 잘 알고 맹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포수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수를 따랐다.
종달이와 박주사가 다음날 밤에 어느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이 종달이를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화전민들은 포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기 어려웠다. 불을 질러 밭을 갈아 곡식을 심어놓으면 짐승들이 곡식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곰이나 멧돼지들이 화전민들이 일궈놓은 밭을 하룻밤 사이에 망쳐버리기 때문에 포수들이 짐승을 잡든지 쫓아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범, 표범과 늑대들이 가축을 잡아가고 사람도 잡아먹었다. 그러나 화전민들은 자기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고 포수들이 도와주어야 했다.
‘불곰이 돌아다니니 잡아주시오.’
‘멧돼지가 새끼를 데리고 있습니다.’
‘늑대가 돼지를 물고 갔어요.’
정보를 주면 포수들이 달려왔다. 지난해 포수들이 놓쳤던 표범이 산막을 짓고 사는 심마니를 잡아먹었다.
‘갑산 포수들이 쫓고 있지만 잡았다는 말이 없어요.’
갑산 포수들은 창과 활로 표범을 쫓는데 활과 창으로 잡기에 표범은 너무 어려운 맹수다. 아무래도 축지 장군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 종달이와 박주사는 화전민 마을을 떠나 험준한 산을 탔다. 개마고원은 2,000m나 되는 산들이 톱니바퀴처럼 이어졌다. 종달이는 붉은사슴 길을 걸었다. 붉은사슴은 추위를 피해 만주와 한국을 번갈아 넘어 다녔다. 산중에는 표지판이 있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의 지도다. 도끼로 나무둥치를 찍어 마을, 강이나 냇물, 산막으로 가는 길을 표시했다. 종달은 오후 늦게 그 표시로 바위틈새 동굴을 발견했다. 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마련했는데 박주사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중부터 범이 포효했다. 으엉! 으엉! 하는 폭발음이 온 산에 울려 퍼졌다.
‘여기서부터는 범의 영토입니다.’
범은 자기 영토를 선언했다. 영토에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박주사는 육혈포의 안잔 장치를 풀고 종달이도 지팡이의 덮개를 벗겼다. 그러나 사실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걸로 범에게 대항할 수 없다. 포효가 가까워지더니 으르릉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범이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다행히 날이 밝아지고 있어 범은 더 접근하지 않았다. 개마고원에는 범이 많았다. 대략 40km 넓이에 한 마리씩 서식했다. 다음날 박주사는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포효하는 범에게 대항하듯 개 들이 힘차게 짖었다. 포수 마을 개들도 나름대로 영토선언을 했다. 풍산개 대여섯 마리가 달려왔다. 개들이 사람의 주위를 포위했다.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보호다. 포수 마을은 산 중복에 통나무집 열서너 채가 모여있었다. 인근에 마을이 하나 더 있고 두 마을을 합치면 1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여기는 양반도 쌍놈도 없습니다.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축지 장군이 말을 꺼냈다. 반백의 보통 키에 깡마른 체구다.
‘군수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범 껍질을 바치라고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지.’
‘우리는 이렇게 산에 사는 산 사람입니다. 바깥사람들이야 어떻게 살든 우리는 우리대로 살지.’
그렇다. 백정이 양반이나 상민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살 듯 사냥꾼들도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달랐다. 마침 그때 사냥대가 곰을 잡아 왔는데 장로들이 곰을 마을 전체에 골고루 나눠주었다. 사냥에 참가했다고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촌장이라고 더 주지도 않았다. 다만, 촌장은 껍질과 웅담을 마을의 소유로 챙겼다. 중국 상인들에게 팔아 마을 기금으로 사용한다. 축지 장군이나 장로는 세상일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동학운동에 대하여도 관심 없었다.
‘관리나 양반들이 쌍놈이나 천민을 착취한다면 힘으로 때려 부셔야지.’
왜 그런 착취를 견디고 있느냐고 했다. 사람은 다 같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도 했다. 동학의 교리보다 더 명쾌했다. 유학이니 천도교가 다 뭐란 말인가? 박주사는 사흘 동안 포수 마을에 머물면서 동학운동에 참가하여달라고 호소했으나 축지 장군은 거절했다. 개마고원 첩첩산중에 사는 산마을 사람들은 평지의 사정에 관심 없었다.
‘평지에서 살지 못하게 되면 이리 오시오. 우리와 함께 삽시다.’
포수 마을에는 농민, 백정도 있고 평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 온 사람도 있었으나 마을에 들어와 다시 죄를 짓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 들어오면 모두 좋은 이웃이 되었다. 축지 장군은 개혁에 실패하면 산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종달이를 딸려 보냈다. 종달이는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알았다. 축지 장군의 이런 결론은 몇 달 후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박주사와 종달이는 전라도에 내려가 동학농민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전라도 수뇌부가 비밀리에 조직한 전국조직이 급격히 세가 늘어났다.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와 황해도에서도 농민군이 관아를 습격했다. 1894년 여름에는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장악하여 군정을 폈다. 압제 받았던 농민, 쌍놈, 노비와 사냥꾼들도 합세했다. 전라도를 장악한 농민군은 7월에 서울로 진격하기로 했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농민들이 서울로 쳐들어가 정권을 탈취하여 혁명을 완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이 문제였다. 서울에는 혁명의 주동 세력이 될만한 농민들이 없었다. 서울은 관아의 힘이 막강했고 관군이 엄중하게 경계를 했다. 농민군의 수뇌부는 간부들을 서울에 잠입시켰다. 혁명조직을 만들어놓았다가 전라도 주력부대나 경기 강원도부대가 진격하면 서울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호응하기로 했다. 박주사와 종달이도 서울로 잠입했다. 전라도 백정 두목 곰보와 같이 들어갔다. 장안 백정 두목 무성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관군이 지키고 경계가 심하여 간부들의 활동이 원만치 않았다. 조정에서 풀어놓은 수천 명의 밀정들이 돌아다니며 탐문을 했다. 거기에다 일본군이 주둔하며 관군을 도왔다. 농민군이 외세~특히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은 최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파견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일은 내가 할 테니까 여러분은 우리 집에서 나가지 마시오.’
백정 마을에도 포졸과 병졸들이 돌아다녔고 백정 중에도 밀정이 있을 수도 있다. 무성은 농민군이 진격하면 호응할 몇천 명의 백정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했다.
농민군이 서울에 들어오면 호응할 세력은 백정들만 아니라 천민, 노비들도 연락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하급 관리나 병졸 안에도 비밀조직이 결성되었다. 서울의 혁명 세력은 농민군이 서울에 입성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농민군은 9월이 되어도 서울에 들어오지 못했다. 전라도 주력부대도 경기 강원부대들도 들어오지 못했다. 보급 때문이었다. 주력부대는 그 병력이 몇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진격을 하려면 막대한 군수품과 양식이 필요했다. 추수기가 되지 않아 곡식이 부족했다. 농민군 주력부대의 진격이 늦어지자 관군이 정비되고 일본군이 가세를 했다. 일본 최신예군이 관병을 지휘하여 농민군을 공격했다. 경기 강원에서 진격해오던 농민군은 관군에게 격퇴당했다. 전라도 주력부대가 9월 초에 움직였으나 일본군에게 격퇴당했다. 서울의 혁명 세력은 초조하게 농민군을 기다렸으나 전세는 불리했다. 9월 말 전주의 주력부대 수뇌부에서 보낸 밀사가 무성의 집에 왔다. 박주사에게 밀서가 전달되었다. 농민군이 서울에 진격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혁명동지를 데리고 함경도 사냥꾼 마을로 피신하라는 지령이다. 수뇌부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수뇌부는 죽더라도 혁명지도자는 피해야 했다. 박주사는 지도자들을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무성은 지령을 받고 백정들에게 모두 원상 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백정 중에서 혁명을 모의한 자는 무성 자기 혼자로 제한하여 자기 외에는 희생자가 없도록 조치했다. 무성은 자기 처자를 함흥으로 보내 보호를 받도록 하고 자기는 서울을 탈출하는 혁명군 간부를 돕기로 했다.
일행은 모두 서른 명이나 되었다. 피신을 위해 서울에 들어온 각도(各道)의 간부들을 집결시켰다. 일행 중에는 동학을 연구하는 학자, 지체 높은 양반, 농민군 거물급 간부들이 있었다. 모인 사람들의 신분과 연령들이 달랐다. 그들을 서울에서 함경도까지 산길로 안내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검문 검색도 심했고 감시의 눈도 많았다. 길로 갈 수는 없다. 북한산으로 들어가 광주산맥을 타고 동북쪽으로 빠져나가 태백산맥을 타고 개마고원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산길로 장장 1,500km였다. 서둘러야 했다. 곧 겨울이다. 일행은 한밤중에 서울 서북쪽의 백정 마을을 떠나 북한산으로 들어섰다. 백정들이 도와주어 무사히 빠져나왔다. 워낙 시간에 쫓겨 미숫가루, 마른고기 등 식량, 잠자리의 침구들이 부족했다. 천막 따위는 아예 없고 백정들이 소 돼지를 잡을 때 쓰는 기름먹인 광목베짯치는 밤이슬을 막아줄 유일한 침구다. 일행은 낮에는 동굴이나 바위틈에 숨고 밤에만 움직였다. 낮에 올라가기도 어려운 험준한 산을 밤에 올라갔다. 산길을 잘 아는 종달이가 일행보다 앞서가며 지형을 살폈는데 북한산에는 도처에 불빛이 보였다. 병졸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경비를 했다. 경비를 피해 다음날 수락산에 도착했다. 수락산 중복에 숯을 굽는 산막이 있었는데 영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주사의 지령을 받은 동지다. 영감이 아침밥과 잠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산길에 들어선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나 몰골들이 처참했다. 특히 고생을 하지 않은 양반들은 이미 지쳤다. 발이 부르터 피가 흐르고 고열로 신음했다. 어쩔 수 없었다. 못 가겠다는 사람은 두고 갈 수밖에 없다.
‘괜찮소. 나는 여러분과 끝까지 같이 갈 거요.’
발병이 난 성대감(大監)이 앞장을 섰다. 그는 농민군 두령 전봉준이 대원군을 만날 수 있게 주선했던 사람이었다.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났으나 재집권의 야심을 갖고 있었다. 성대감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였으나 개혁 의지가 강했다. 일행의 노비나 천민에게도 존대를 했다. 조선의 역사상 대감 칭호의 벼슬아치가 노비나 천민에게 존대를 한 일은 없었다. 몸살을 앓고 있었던 안동의 양반 김영감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동학 이론을 연구 보완하는 학자였다. 숯장이 영감이 숯을 많이 가지고 가라고 권유했다. 숯은 가벼워 많이 가지고 갈 수 있었으며 매우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일행이 추위를 막거나 요기를 하기 위해서는 불을 피워야 하는데 불을 피우면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불빛이 퍼져 은신하기가 어려웠으나 숯은 연기도 불빛도 없었다. 10월 말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해졌는데 숯은 치명적인 추위를 막아주었다. 일행은 그로부터 사흘 후 백운산을 넘어 강원도의 험준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종달이가 약초꾼들이 기거했던 산막을 찾아 쉬었는데 그때쯤 일행은 처참하게 변했다. 상투가 풀려 양반이나 쌍놈이나 모두 산발이 되었고, 수염이 자라 얼굴을 덮었다. 옷은 찢어지고 팔다리에는 피가 흘렀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므로 몸과 마음이 다 피폐로워져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열흘쯤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고 겨울 대비를 하기로 했다.
일행이 쉬는 동안 박주사는 혼자 산을 내려갔다. 농민군 혁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했다. 박주사가 산을 내려가자 무성이 지휘를 했다. 사냥꾼 종달과 식량 조달을 하기 위해 사냥을 했다. 산막 주변에 함정을 파고, 덫을 놓아 멧돼지, 사슴, 노루를 노렸으며 활과 비수匕首로 토끼, 오소리와 꿩을 잡았다. 무성은 늘 허리에 차고 다니는 비수를 던졌는데 10m 이내 거리면 종달이가 쏘는 화살처럼 정확했다. 매일 대여섯 마리의 토끼, 오소리와 꿩을 잡았으므로 식량에 보탬이 되었다. 더구나 종달이 설치한 함정에 120kg이나 되는 멧돼지가 걸려 푸짐한 멧돼지고기 파티가 벌어졌다. 농민 출신 대원은 주로 겨울 준비를 했다. 잡풀로 짚신을 만들고 이부자리 대용 거적도 만들었다. 기름먹인 유포와 같이 지붕도 되고 벽도 되었다. 밤이슬은 물론 웬만한 비바람도 막을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숯불을 피우면 겨울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열흘을 머물면서 대원들의 기력이 웬만큼 회복되었다.
박주사가 돌아왔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농민군 주력부대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해산했다. 몇몇 작은 부대들이 간헐적으로 항쟁을 했으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전봉준 장군도 피신 다니는 처지였다. 빨리 떠나야 한다. 11월이었으므로 곧 눈이 내릴 것이다. 그리고 개마고원의 무서운 눈바람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기 전에 한 발이라도 북쪽으로 가야 한다. 태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가야 한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였으나 나흘 후에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도경(道境) 연대봉에 도착했다.
‘저기 저 산 너머는 함경도입니다.’
일행은 좀 안심했다. 동학의 소용돌이가 함경도에까지 미치지는 않았으므로 경계가 없으리라 판단했는데 그건 오해였다.
싸움에 진 농민군이 함경도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청국으로 피신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당시 중앙정부는 민씨 일가가 쥐고 있었으나 사실은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군은 일본의 철수를 주장했다. 농민군이 외세배격을 외쳤는데 러시아나 청국을 지칭하지 않고 일본군만 적으로 간주했다. 일본 놈들부터 먼저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농민군을 철저하게 소탕했다. 농민군이 청국에 들어가 러시아나 청국과 접촉하는 걸 두려워했다. 당시에는 청일전쟁이 벌어졌으며 일본은 러시아하고도 대립했다.
박주사기 이끄는 농민군 일행이 강원도경을 넘어섰을 때 서너 명의 미행자들이 따라붙었다. 도처에 설치된 검문소를 피해 가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감시자였다. 종달이와 노비 출신 정서방, 백정 두목 무성과 그이 부하 밤 일꾼이 미행하는 감시자의 처치를 맡았다. 밤 일꾼은 그림자처럼 두목을 보호하는 무성의 경호원이다. 평소에는 두목의 행랑방에서 지내며 낮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밤에만 일을 했는데 소나 돼지를 잡는 일이 아니었다. 밤 일꾼은 뱀의 눈처럼 냉혹했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사람을 죽였으나 두목에게는 충성했다. 살인죄로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를 무성이 살려주었다. 미행자 처리 임무를 맡은 네 사람이 길목에 숨었다. 미행자들은 그걸 모르고 따라왔다.
미행자들은 모두 넷이었는데 험상궂은 모습이었으므로 그들의 신원이 드러나 있었다. 허리에 칼을 찼다.
‘한 놈씩 맡아!’
4 : 4다. 미행자들이 바로 앞에 왔을 때 소리 없이 덮쳤다. 백정은 길이 한 자의 소 잡는 칼로 공격했다. 포수는 창으로 공격했다. 평소에는 지팡이로 사용하며 칼날을 감춘 칼이다. 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다. 미행자들은 급습을 당해 외마디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더구나 상대는 모두 살육을 천직으로 삼는 살육전문가가 아닌가.
창에 찔린 미행자 한 놈이 계곡으로 떨어졌는데 낙하하면서 나뭇가지에 걸려 살아났다. 검문소까지 기어가서 알렸으므로 추격대가 편성되었다. 백여 명이나 되는 병력이 출동했다. 최신형 총을 가진 군관도 있었다. 추적대는 산정을 넘어서는 동학군을 발견했다.
‘저놈들이 산을 넘어가기 전에 잡아!’
군관이 지시했으나 산길이란 뻔히 보이면서도 멀다. 험준한 산에서 뛰는 것은 체력소모가 월등하다. 추적대가 계곡에 도착했을 때 날이 어두워졌고 동학군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군. 오늘 밤은 여기서 야영하고 내일 새벽에 추격하자.’
군관은 실전경험이 없었다. 더구나 험한 산에서 야영을 해 본 경험도 없었다. 추격대는 계곡에서 불을 피웠으나 세찬 바람에 연기만 오르고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불을 쬐는 얼굴이나 배는 뜨겁고 불이 없는 등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12월 초 태백산맥은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엄청났다. 추격대는 잠을 자지 못했으나 군관의 성화 같은 독촉에 밀려 새벽에 출발했다. 지휘를 하는 군관도 눈이 부어있었으나 추격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추격대는 그래도 동학군과 거리가 좁혀지는 걸 보고 용기를 냈으나 이틀 만에도 따라잡지는 못했다. 추격대가 다시 야영을 해야 했는데 불평이 터져 나왔다. 추위뿐만 아니라 굶주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 군관은 추격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병사들이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동학군을 발견하고도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돌아갔다.
‘이런 바보 같은 놈들을 봤나!’
보고를 받은 감사가 펄쩍 뛰었다. 동학군을 그대로 놔줄 수는 없었다.
함경도 감사는 무관 출신이었으며 군사를 안다고 자부했다. 토벌 작전의 어려움도 알고 있었다. 폭설과 폭풍이 불어닥치는 계절이고 동학군은 이미 낭림산맥의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감사가 정예군 150명을 선발했다. 그 부대는 영관 이비석이 지휘했다. 이비석은 일본군대의 훈련을 받았으며 휘하에 10여 명의 화포병이 있었으며 총은 무라다였는데 사정거리가 500m나 되었으므로 동학군의 화승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화승포는 고작 60m였으며 무라다처럼 연속 발사도 못했다. 감사는 보급부대원 100명을 배치했다. 일선 부대에 식량과 땔감을 보급하고 의무원도 배치했다. 토벌대장 이비석은 후한 대우를 조건으로 포수, 약초꾼과 나무꾼 등 산을 잘 아는 안내인 여덟 명을 모집했다.
‘너희들은 그 산을 잘 아느냐?’
‘녜, 좀 알고 있습니다.’
‘좀이라니 ….’
‘워낙 넓고 험한 산들이라 그 산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군대를 안내할 수 있느냐?’
‘안내는 하겠습니다만 산들이 워낙 험해서 ….’
‘네 이놈! 네 놈들이 들어갈 수 있는데 군대가 못 들어간단 말이냐?’
‘그런 말이 아니오라 ….’
‘이놈들!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지 말고 안내나 해!’
마대산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동서로 가르는 낭림산맥의 산이었는데 높지는 않았으나 산세가 험준했다. 정보에 의하면 동학군이 강원도로 북상해서 동북쪽 개마고원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정보였다.
‘역도들의 개마고원 길을 막아!’
토벌대는 안내인을 따라 마대산으로 진군했다. 산중의 추위는 매서웠다. 병사들은 누비옷을 입고 토끼털 방한모를 썼다.
토벌대가 해 질 무렵 산간마을에 도착했다. 이웃 마을까지 합하면 100여 채가 된다는 마을 촌장은 고분고분했다. 촌장은 따뜻한 온돌방에 이비석을 모시고 슬대접을 했고 제법 예쁜 여인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정찰로 보낸 병졸과 나무꾼이 돌아와 역도들의 발자국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30여 명 정도고 발자국이 흐트러지고 있었습니다.’
지쳤다는 뜻이다. 게다가 들것에 실려 가는 자들도 있었다.
‘거리는 얼마쯤인가?’
‘10리쯤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하오나 그다음 날 상오에는 추격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안내인으로 고용했던 포수 한 사람이 행방불명되었다.
‘겁을 먹고 도망간 것 같습니다. 그자는 처음부터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차라리 없는 것이 낫습니다.’
안내인은 여덟 명이나 되었으므로 한 명쯤 빠져도 지장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 포수는 낭림산맥이나 개마고원의 지세를 가장 잘 아는 자였다. 본디 산에는 두 얼굴이 있다. 봄, 여름과 가을의 얼굴 그리고 겨울의 얼굴이다. 북쪽에서 폭풍과 폭설이 몰아치는 겨울의 산은 지옥으로 돌변한다. 지옥의 산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포수다. 포수는 겨울에 활동을 하기 때문에 겨울 산을 안다. 그러나 나무꾼이나 약초꾼은 겨울에 일을 하지 않으므로 겨울 산을 모른다.
다음날 새벽 마을을 떠나면서 이비석이 촌장에게 후한 보수를 지급하겠으니 산을 잘 아는 마을 사람을 선발해주라고 부탁했다. 촌장은 자기 마을은 농사를 하기 때문에 산 너머 이웃 화전민 마을에 가서 구하라고 했다. 토벌대는 그날 하오 늦게쯤 역도들을 추격할 수 있을 것으로 알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새벽부터 험한 산에 들어선 토벌대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맞바람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토벌대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 마대산 너머의 화전민 마을에 도착했다. 화전민 마을은 처참했다. 흙돌과 잡풀에 덮힌 움막집들이 열서너 채 산중복에 흩어져있었다.
머리칼을 산발하고 수염이 더부룩한 화전민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촌장은 시무룩했다.
‘천민들이란 본디 버릇이 없습니다.’
부관이 이비석에게 말했는데 그들은 적의까지 보였다. 부관이 촌장을 꾸짖다가 뜻밖에 축지 장군이 며칠 전에 들렸다는 말이 나왔다. 이비석은 개마고원 일대에 포수 마을이 있고 두목이 축지 장군이라는 말은 듣고 있었으나 축지 장군이 어떤 자라는 건 그제서야 알았다. 축지 장군은 개마고원 일대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으며 자기 집 안마당처럼 돌아다닌다고 했다.
‘장군님은 나흘 전에 양식이 떨어진 마을에 들러 멧돼지 한 마리를 던져주고 갔습니다. 장군은 거저 주었지만 우리는 보리를 수확하면 한 가마니쯤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이비석은 그제야 개마고원 일대를 다스리는 사람이 함흥 감사가 아니라 축지 장군이라는 걸 알았다. 관아의 힘은 그런 첩첩산중에는 통하지 않았다. 군수가 호피를 공출하려고 했다가 관졸들이 쫓겨난 것도 알았다. 상황이 어렵게 되었으나 토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열 정(丁)이나 되는 무라다 총을 믿었다. 토벌대는 다음날 새벽 다시 역도를 추격했으나 정오께 중단했다. 폭풍과 폭설이 불어닥쳤다. 삼한사온, 날씨가 돌변했다. 사흘 동안은 날씨가 포근하다가 갑자기 매섭게 추워지는 한국의 날씨를 말한다. 앞에서 안내를 하고 있던 나무꾼과 약초꾼들이 되돌아왔다. 토끼털 방한모에 뚫어놓은 눈과 콧구멍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나리, 저기 보십시오.’
역도들이 넘어간 산마루에 검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짐승 털을 걸쳤으나 두 다리로 걷는 걸 보면 사람이다.
‘축지 장군과 그 부하들입니다.’
축지 장군이 역도들을 보호했다.
‘개마고원의 포수들은 몇 놈이나 되느냐?“
‘백 명이 넘습니다.’
‘그놈들은 이런 추위 속에서 어떻게 사는가?’
‘포수들은 겨울에 사냥을 합니다. 멧돼지, 사슴과 노루를 잡습니다. 범과 표범도 잡습니다.’
대여섯 명의 포수들이 산마루에서 관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옆 산마루에도 또 그만한 포수들이 있었다. 그때 산정의 포수가 고개를 내려왔는데 이비석은 크게 놀랐다. 포수는 눈가루를 날리며 내려왔는데 마치 바람처럼 빨랐다. 화전민들이 포수가 표범처럼 빠르다고 했는데 그는 표범보다 더 빨랐다.
‘나무 썰매(스키)를 탑니다.’
화포대의 병사들이 무라다 총을 들어 올렸으나 이비석이 말렸다. 무라다 총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승산이 없었다. 포수들은 썰매를 타고 바람처럼 달리는데 토벌대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에 갇혀 옴짝딸싹도 못했다. 이비석은 화전민 마을로 되돌아가서 함흥 감사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토벌군을 배로 늘리고 장비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감사의 지시를 기다렸다.
한편, 마대산을 넘어 동북쪽 개마고원으로 들어가던 동학군의 박주사 일행은 그때 어느 바위산에 머물렀다. 거대한 바위가 넓은 바위 위에 지붕처럼 얹어졌는데 포수들은 암수 바위로 불렀다. 암수 바위에는 넓은 동굴이 있고 포수들은 동굴을 사타구니 굴이라고 불렀다. 박주사 일행은 그 동굴 안에 머물렀다. 입구는 허리를 굽혀야 들어갔으나 안은 30여 명이 기거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화덕이 있고 모닥불을 피웠다. 노루고기를 꼬치에 끼워 구웠다. 일행이 마대산을 넘고 있을 때 나타난 포수들이 안내를 했는데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은 죽은 듯 누어버렸다. 노루고기를 뜯는 사람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폭풍과 폭설이 불어닥쳤다. 일행이 노루고기와 보리밥으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서너 명의 포수들이 들어왔다. 모두 짐승껍질을 들러 쓰고 있었는데 그중에 표범껍질을 쓴 중년 사내가 있었다. 깡마른 체구에 눈이 날카로웠다. 동학군들은 첫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종달이 무릎을 꿇었다.
‘두령님!’
두령 앞에 꿇고 있는 종달이가 눈물을 흘렸다. 개마고원 포수 마을의 두령과 부하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백정 두목 무성과 밤 일꾼의 관계와도 같았다. 두령을 존경하고 목숨을 바치는 관계였다. 축지 장군은 자기를 소개하려는 박주사를 말리며
‘난 산 사람이올시다. 워낙 무식해서 동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약속을 지키겠소. 여긴 포수들이 사는 곳이고 포수 나라입니다. 포수 나라에서는 찾아오는 손님을 잘 모십니다. 어떤 자도 우리가 모시는 손님을 해칠 수 없습니다.’
단호했다. 축지 장군은 당분간 눈바람이 멎을 때까지 일행이 동굴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으며 식량과 생활용품을 공급했다. 거센 눈바람도 포수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썰매를 타고 눈 위를 평지처럼 달렸다.
그러나 화전민 마을에 진을 친 관군은 어려움에 처했다. 영관급은 움막집을 징발하여 바람을 피하고 겨우 동사를 면했으나 병사들은 통나무를 잘라 벽을 치고 거적으로 바람을 가린 처지였기 때문에 추위를 막을 길이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화전민 마을에는 징발할 식량이 없었고 다른 마을도 비었다.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버렸다. 보급부대가 100리나 떨어진 읍내에 가서 식량을 조달했으나 눈이 쌓여 소달구지는 물론 운반할 방법이 없었다. 곤경에 빠진 이비석은 촌장을 포수 마을에 보내 동학 역도를 관군에 넘겨주면 포수들의 적대행위를 사면하고 개마고원 일대의 자치권도 보장하겠다고 제의했다. 축지 장군은 제안을 일축했다. 나라에서 자치권을 주거나 말거나 개마고원은 포수들의 나라였고 관군이 들어올 수도 없는 포수들의 영토였다.
무관 출신 함흥 감사가 격노했다. 하잘것없는 천민들이 감사에게 반항을 하다니 …. 감사는 서울에 급보를 보내고 조정은 일본군과 상의하여 일본군 20명을 현지로 급파했다. 니시 준위가 이끄는 정예 보병이다. 거기에 함흥 감사가 50여 명의 병력을 보강했다.
‘아니, 명색이 관군이라는 게 그까짓 포수 십여 명을 당하지 못하다니 ….’
현장에 도착한 니시 준위가 이비석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일본군은 야전용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웠다. 추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심했다. 그러나 오산이다.
12월 중순, 때는 한겨울이다. 일본군은 조선 북부 개마고원의 겨울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시베리아 강풍이 불어오는 극한지대라는 걸 몰랐다. 바로 그날 밤에 사고가 일어났다. 밤중에 거센 눈바람이 들이치자 천막이 날아가 버렸다. 밤이어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 혼란은 새벽 무렵에 수습이 되었으나 니시 준위는 신경질이 되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니시 준위는 사병출신 장교였으며 과격過고 오만했다. 그는 영관 이비석을 보좌하여야 하나 오히려 이비석에게 명령을 내렸다.
‘왜 우물거리고 있소? 적을 추격해야지.’
그래서 다음날 관군과 일본군이 추격을 시작했다. 200여 명이 동원된 군사작전이다. 그날은 추위가 눅어져 병사들은 마대산을 넘어 개마고원으로 들어갔다. 관군이 하오에 역도들이 머물렀던 동굴을 발견했으나 역도는 없었다.
‘추격해! 계속 추격해!’
역도들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50여 명이었다. 싸울 의지 없이 계속 북쪽으로 도망갔다. 백두산까지 갈 심산인지도 몰랐다.
‘이거 안 되겠는데 ….’
니시 준위는 퇴로를 막기로 했다. 발이 빠른 별동대를 편성해서 역도들의 앞길을 막기로 했다. 병사 30명을 선발했다. 무모한 작전이었으나 일본군은 훈련이 잘되어 있고 최신형 총을 가지고 있으며 그동안 동학군에게 쉽게 승리했다. 니시 준위가 이끄는 별동대는 지도를 보지 않고 지남철로 방향을 잡아 아주 빠르게 북쪽으로 직행했다. 밤늦게까지 행군을 하여 큰 산을 두 개 넘고 야영을 했다. 이미 역도들의 앞길을 막았다고 판단하고 산중복에 천막을 쳤다. 다음날 새벽, 별동대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주위를 살펴다가 크게 놀랐다. 거기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역도들이 있었다. 하루종일 추격을 했는데 거리가 줄지 않았다.
‘저놈들이 우리의 작전을 알고 피해 가는 것 같습니다.’
별동대는 은밀하게 움직였고 불도 피우지 않았는데 역도들은 별동대의 움직임을 훤히 알고 있었다.
‘젠장!’
니시 준위는 동북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별동대가 있는 힘을 다해 진격을 했는데 역도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
역도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별동대와 마주치게 되어있었다. 설사 별동대를 피해 우회하더라도 뒤를 따르는 관군 150여 명과 맞부딪치게 되어있었는데 총소리도 없었다.
별동대는 그날도 역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지도와 지남철만으로 역도들의 앞길을 막기에 개마고원은 너무 넓고 험준했다. 날이 또 어두워졌다. 사기충천했던 별동대도 지쳤다. 그리고 너무 추웠다. 그동안 건빵으로 연명했는데 건빵도 떨어졌다.
‘아니, 보급대원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야영지에 서너 명의 보급대원이 불빛을 보고 찾아왔다. 약간의 건빵과 말린고기를 가져왔으나 한 끼 식사 거리뿐이었다. 보급대원은 도중에 역도의 습격을 받아 보급품을 모조리 빼앗겨버렸다.
‘고노(이런), 바가야로(바보자식!’
니시 준위가 격노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역도들이 계획적으로 보급품을 노렸다. 지형을 잘 아는 포수들이 보급대를 노렸다. 특히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보급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포수들은 어둠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활을 쏘고 창을 날렸으므로 보급대는 저항다운 저항도 못했고 보급품을 빼앗겼으며 몇 명은 살아서 도망을 쳤다.
니시 준위는 역도들의 앞길을 차단하려고 했던 작전이 실패한 걸 알았다. 개마고원은 일본군대의 훈련을 무력화해버렸다. 그리고 그곳을 생활무대로 삼고 있는 포수들이 있었다.
니시 준위는 포수 두목 축지 장군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과연 그는 초인적인 인간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포수들은 어떤 군대도 따라갈 수 없었다. 포수들은 별동대를 포위하여 주변을 돌고 있었다. 별동대는 포수들의 반경 안에서 맴도는 상황이었다. 삼국지의 손오공 부처님 손바닥 꼴이다. 니시 준위는 퇴각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늦었다. 밤중에 북과 나팔 소리가 들렸다. 니시 준위는 그게 삼국지에 나오는 심리전이라는 걸 간파했으나 그 자신도 신경질이 되었다. 북소리 나팔 소리가 가까워지자 무턱대고 총을 쏘았다. 맞을 리가 없지만 총소리의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복과 나팔 소리가 야영지 주변을 돌고 있었다. 니시 준위는 다음날 새벽에 철수를 시작했으나 군대의 질서가 어지러워졌다. 병사들이 제멋대로 도망가고 뿔뿔이 흩어졌다. 고함을 질러 모으려고 했으나 모두 분산되어버렸다. 본부부대도 해산되었다. 니시 준위가 열서너 명 되는 병사들과 도망을 치는데 화살과 창이 날아왔다. 응사하려고 했으나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화살과 창은 흩어져있는 암벽과 바위 뒤에서 날아왔다. 총탄은 바위에 부딪혀 불꽃만 요란했으나 화살과 창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기도 하고 옆으로 휘어져서 날아왔다. 일본군은 혼란에 빠졌고 총을 버리고 달아났다.
포수들은 일본군이 가지고 있는 총을 노렸다. 무라다 회사에서 제조한 라이플인데 니시 준위는 미국제 최신형 라이플이었다. 500m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과년을 조준할 수 있었다. 일본군과 관군이 가지고 있는 총이 동학농민군의 혁명을 좌절시켰다. 활, 창, 곡괭이와 낫으로는 총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무모하게 돌격을 하다가 몰살되었다. 동학혁명은 실패했다. 일본군의 총에 의해 실패했다.
니시 준위는 그날 오후 늦게 한 무리의 포수를 발견했다. 그들은 도망가는 일본군의 앞길을 막았다. 나무 썰매를 탄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산 저 산을 넘나들었다.
‘저 사람이 축지 장군입니다.‘
길 안내를 하던 나무꾼이 포수들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항복을 하면 목숨은 살려준다! 일본 놈을 죽이거나 총을 갖고 오면 후한 포상을 주겠다!’
그 소리에 많은 관군들이 항복을 했고 일본군을 죽이거나 총을 가지고 도망갔다.
‘빨리, 본부로 후퇴해!’
고함을 질렀으나 별동대는 흩어져버렸고 자신이 이끄는 20여 명의 병사들도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래도 오후 늦게 본부가 진을 쳤던 곳에 도착했으나 본부는 이미 철수해버리고 없었다. 기습을 받고 도망친 것 같았다.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라구.‘
니시 준위는 본래 관군을 믿지 않았으나 200여 명의 병력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 도망을 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산에서 내려가!’
전면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또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가려고 했으나 방향을 잃었다. 내려가고 있는지 올라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20여 명이었던 병사도 반으로 줄었고 이제 남은 병사는 일본군뿐이었다. 관군은 도망칠 때 총을 가지고 갔다. 니시 준위의 미국제 라이플총도 없어졌다. 피곤해서 잠시 누워 깜박 졸았는데 그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길 안내를 했던 나무꾼이 가지고 도망친 것 같았다. 니시 준위는 새벽녘에 겨우 산을 내려와 관군을 만났다. 살아남은 병사는 겨우 여섯 명이었다. 관군은 일단 함흥으로 돌아가 재편성을 하기로 했으나 지지부진했다. 함흥 감사는 봄에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겨울에는 포수들과 싸울 수 없었다. 포수들은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동학군을 보호했다. 관군과 일본군에서 탈취한 총으로 무장을 하고 본부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산에서 내려가 싸우려고 대기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던 동학군이 패했고 본거지 전주와 광주에서도 패전했다. 그해 12월과 다음 해 1월에는 동학에 가담한 많은 농민, 서민과 천민들이 처형되었다. 전봉준 교주가 체포되었다. 개마고원의 동학 사람들은 만주 땅으로 넘어가 재기를 모색하기로 했다. 무성이와 백정들도 함께 가기로 했다. 축지 장군은 동학도를 멀리 두만강에까지 바래다주었다.
116. 마차코스의 반란 - Captin Morison
- 아프리카 원시 부족 마사이, 키쿠유와 와간바의 사냥 전쟁
아프리카 케냐지역 주둔부대에 근무했던 영국육군의 Captin Morison은 1932년 8월 갑자기 예비역으로 편입되는 동시에 케냐 행정관으로부터 마차코스 지역의 산림보안관으로 근무하라는 발령을 받았다. 그 지역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캡팀 모리슨이 적임자로 추천되었다. 캡틴은 그 지역 선무관으로 5년 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지역주민을 잘 알았다. 또한 그는 군대 사격대회에서 우승한 사격 교관이었고 군대나 정부 고관을 사냥터에 안내하는 노련한 사냥꾼이다.
마차코스는 케냐 중심도시 나이로비의 동남쪽에 있는데 초원, 삼림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땅은 관목灌木과 잡초가 어우러진 황무지다. 코끼리, 코뿔소, 표범과 독사들이 돌아다녔고 모기와 체체파리가 득실거리는 고약한 지역이다. 체체파리는 웬만한 벌만큼이나 큰 파리인데 그놈에게 물리면 살이 뚝! 뚝! 떨어져 나갔다. 소나 말에게 무서운 전염병을 전파시켰다. 모기는 말라리아를 전파했다. 대낮에도 시커멓게 몰려다니며 공격을 했으나 피할 방법이 없다. 또 코끼리 등 맹수는 늘 으르렁거렸다. 신경질이 된 그놈들은 움직이는 물체만 보면 달려들었다. 독사는 동물이 가까이 접근하면 경고를 하든가 대가리를 치켜들어 위협을 하고 그래도 적이 달려들면 반격을 하는데 그곳의 독사는 경고 절차를 생략했다. 우선 죽여놓고 보자는 놈들이다. 마차코스의 삼림이나 덤불에서는 짐승들 사이에 화해가 없다. 늘 신경질적이 되어 여유가 없었다. 짐승들뿐만 아니라 원주민들도 같았다. 혹독한 더위와 벌레 그리고 맹수들에게 시달림을 받아 서로 화해할 줄 몰랐다. 여러 부족이 늘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키쿠유, 마사이와 와간바가 문제를 일으켰다. 키쿠유는 농경족이며 교육 수준이 높고 평화적이었으며 호전적인 마사이족의 침략을 받았으나 직접 전투는 하지 않았다. 케냐행정청에 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키쿠유는 조직이 잘 되어 그 조직에서 선출한 대표를 행정당국에 보내 요청을 했다. 행정당국은 주민들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마사이의 침공을 방치하는가?> 라고 항의했다. 키쿠유는 겉으로는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순응하는 것 같았으나 그들은 은밀하게 독립투쟁을 하였으며 마을에는 독립투사들이 숨어있었다. 키쿠유는 지적 수준이 높아 힘보다 머리를 썼다.
마사이는 힘에 의존하는 종족이다. 그들은 유목민이었으나 종족의 역사를 보면 유목이 아니라 침략족이다. 마사이의 역사는 피로 물들어있고 자랑으로 삼았다. 자기들은 하늘의 은총을 받은 특별히 선택된 종족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긍지를 지니고 있어서 자기들에게 북종하지 않은 종족을 침략했다. 그들의 역사를 따라가면 이집트가 나왔다.
그런 마사이와 이웃을 하고 있는 와간바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마사이와 대항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수렵족으로써 활과 창으로 짐승을 사냥하여 살았다. 특히 와간바의 활이 문제다. 영국 정부는 아프리카에 자연보호지역을 설치하여 동물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와간바의 활이 그 정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와간바에게 활의 사용을 방치하면 아프리카의 동물이 멸종된다는 말이 돌았다. 그래서 캡틴은 암담했다.
보안과 사무실은 마치 쓰레기장 같았다. 전임 보안관은 우울증에 걸려 술만 마시다 사직서를 던지고 영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열서너 명의 직원들이 있었으나 할 일 없이 빈들거렸다. 군대 지프를 타고 관내를 순찰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지프가 고장이 나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뭐 염려할 것 없습니다. 형편에 맞춰 일을 하는 체하기만 하면 됩니다.’
백인 보좌관이 말했다. 영국에서 경찰을 했다는 중년 사내였는데 처신 덕택으로 배가 불룩했다. 캡틴은 그자를 해고하는 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캡틴은 부임한 날 오후 키쿠유 마을에 갔다. 지프가 고장났으므로 부하 세 명을 데리고 걸어갔다. 키쿠유 마을에 가려면 넓은 잡초지를 지나야 하는데 거기에 소 떼와 마사이 소몰이꾼 네 명이 있었다. 그 지역은 본래 와간바의 사냥터였고 삼림 당국도 인정했다.
‘마사이들이 힘으로 이곳을 점령했고 와간바가 쫓겨났습니다.’
마사이는 신임 보안관을 보고 있었다. 긴 창을 땅에 꽂아 넣고 몸을 기댄 자세로 캡틴을 보았는데 무표정이었으나 냉소가 어린 표정이었다. 캡틴을 따라가는 원주민출신 경비원들이 모두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했다. 마사이의 시선을 피했다. 백인의 노예로 일하는 경비원을 마사이는 경멸했다. 마사이는 보안관도 위협하려고 했으나 이번 보안관은 달랐다. 캡틴이 마사이에게 다가갔다.
‘여기가 마사이의 유보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마사이말이었다. 군대의 선무반에서 원주민 말을 배웠다.
‘우린 그런 건 모른다. 백인들이 맘대로 정한 것이다.’
‘소 떼를 몰고 돌아가!’
마사이는 못 들은 체했는데 별안간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소리에 놀란 소 떼가 도망쳤다. 마사이가 창을 들어 올렸으나 총구가 마사이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아직 연기가 나오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보안관의 눈빛이 차가웠고 저항을 하면 쏠 것 같았다.
‘창을 버려! 모두 창을 버려!’
마사이가 겁에 질렸다. 창을 버리고 소 떼를 몰고 돌아갔다. 캡틴은 날이 저물 무렵 키쿠유 마을에 도착했다. 키쿠유 마을에서는 나흘 전 마사이에게 습격당한 현장을 그대로 보존했다. 여덟 명이나 되는 희생자의 시신도 거적에 싸여 그대로 있었다. 시체 중에는 집단강간을 당한 여인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주민들이 생생한 증언을 했다. 마사이가 표범처럼 소리 없이 쳐들어와 죽이고, 겁탈하고, 강탈을 했다.
‘우리는 신임 보안관이 현장을 조사할 때까지 시신을 치우지 않을 것이요.’
키쿠유족 추장은 이 일대 마을을 모두 다스리는 총 추장이었는데 관례와 달리 아직 쉰이 넘지 않은 중년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추장은 대개 머리가 허연 영감들이다. 캡틴은 현장을 조사해서 기록하고 다음 날 마사이를 찾아갔다. 마사이 모란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모란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도의 훈련을 받았으며 맨손으로 사자 사냥을 했다. 수십 명의 마사이들이 창을 날리고 있었는데 약 30m 거리를 날아간 창은 정확하게 과녁을 맞추었다. 보안관에 대한 시위였는데 캡틴은 모른 체했다.
‘우린 그런 것 몰라. 우린 그런 짓을 하지 않아!’
마사이 추장이 시치미를 뗐다.
‘우리가 그랬다는 증거가 있어? 마을을 조사해봐!’
증거는 없을 것이고 찾기도 어려웠다. 근방에는 마사이 마을이 열서너 개나 있었는데 어느 마을에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다 조사할 수도 없었다. 하긴 모란은 그런 야비한 짓은 하지 않았다. 기습을 하지 않았고 부녀자를 겁탈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란은 나름대로 도덕관과 자존심이 있었다. 이집트 왕가의 후예라는 긍지가 있었다. 수사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캡틴은 다시 키쿠유 마을로 갔다. 수사상황을 알려주고 협조를 요청했다. 추장이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마사이 살육자를 기어히 잡으려는 의지가 없어요. 우리는 그걸 알고 있지.’
불신이었다. 더 이상 그들의 협력을 얻을 가능성이 없었다. 캡틴이 돌아섰을 때 추장이 등 뒤에서 말했다.
‘마사이를 잡겠다는 생각 따위는 버리고 와간바의 팜파라를 석방하시오.’
캡틴도 와간바의 팜파라를 알았다. 전설적인 사냥꾼이다. 팜파라는 코끼리를 밀렵한 죄로 며칠 전에 체포되어 나이로비의 감옥에 있었다. 캡틴이 되돌아섰다. 이상한 일이다. 와간바가 동족인 팜파라를 석방해주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나 키쿠유가 요구를 하다니 ….
추장이 말했다. 백인 보안관은 마사이를 두려워하지만, 팜파라는 마사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사이는 백인 보안관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마사이는 팜파라를 두려워한다. 팜파라가 와간바의 영토를 지키고 있으면 마사이는 와간바를 침범하지 못한다. 알만했다. 팜파라가 수감되자 와간바는 마사이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영토 일부에서 철수했고 마사이가 차지했다. 그리고 이웃에 있는 키쿠유를 침략했다. 캡틴은 다음날 와간바 추장을 만났다. 추장은 팜파라가 삼림 코끼리를 사냥한 경위와 전임 보안관이 팜파라를 체포한 경위를 해명했다.
마차코스의 삼림 코끼리는 성질이 나빴다. 넓은 초원에 사는 코끼리는 먹이가 풍부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성질이 온순했다. 덩치가 크고 피부가 부드러웠으며 상아도 길고 굵었다. 그러나 먹이가 부족한 삼림 코끼리는 먹이를 얻기 위해 가시덤불을 돌아다니고 잡초지에서 살아 덩치가 작고 피부가 거칠고 상아도 휘어져 볼품이 없다. 신경질이고 호전적이며 사나웠다. 삼림을 황폐화시키고 키쿠유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반년쯤 전에는 밭을 지키던 젊은이 두 명을 덮어놓고 코로 후려치고 발로 밟아 죽였다. 그래서 키쿠유 추장이 팜파라에게 살인 코끼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팜파라가 추장의 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돈이 아니라 살인 코끼리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사냥꾼의 자존심이었다.
팜파라는 그 살인 코끼리를 잘 알고 있었다. 늙은 떠돌이 수컷은 마스트병에 걸렸다. 마스트는 수컷들만 걸리는 병인데 마치 인간의 홍역처럼 모든 수컷은 한 번씩 마스트에 걸렸다. 그 병에 걸린 코끼리는 눈과 귀 사이에 있는 구멍에서 피 비슷한 염액이 흘러나오고 성질이 난폭해져 마구 살육을 했다. 마스트에 걸린 코끼리는 짧게는 며칠 많게는 3~4개월 미쳐서 돌아다니다가 자연히 나았다. 문제의 코끼리는 예외적으로 만성적 마스트에 걸려있었으며 놈은 삼림이나 관목림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살육을 저질렀는데 밝혀진 것만도 사람 세 명, 코뿔소 서너 마리, 열 마리의 가축 소가 희생되었다. 팜파라는 그 살인 코끼리를 잡으려고 독을 준비했다. 와간바는 어떤 비밀의 나무에서 껍질을 벗겨 독을 만들었다. 며칠을 삶아 찐득한 독을 뽑았는데 그 독액은 강력했으며 다른 부족에게도 비싼 값으로 팔았다. 와간바는 그 독액을 화살에 발랐는데 새 등 작은 짐승은 그 자리에서 죽었으며 물소나 코뿔소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와간바에서도 팜파라가 만든 독은 강력하고 효력이 오래갔다. 보통 독액은 검은색이었으나 팜파라가 만든 독액은 짙은 녹색이었다. 그 독은 팜파라 외에는 다루지 못했다. 잘못하다가는 감염이 되어 위험했다.
팜파라는 네 명의 부하를 데리고 살인 코끼리를 추적했다.
‘조심해, 이놈은 벌써 우리가 추적하는 걸 알고 있어.’
살인 코끼리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했으나 가끔 멈춰서서 뒤를 살폈다. 마스트에 걸렸다고 코끼리머리가 둔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민해졌다. 코끼리가 무서운 음모를 꾸몄다. 코끼리는 추적자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가시투성이 관목림으로 들어갔다. 관목이나 독초의 가시에 찔리면 목숨이 위험하다.
와간바의 사냥꾼들이 가시덤불을 지나갔는데 그들은 코끼리가 뚫고 간 길은 가지 않았다. 코끼리가 지나간 길은 터널처럼 길이 나 있었으나 위험천만한 길이다. 만약 코끼리가 되돌아서면 올데갈데없이 길에 서서 밟혀 죽는다. 사냥꾼들은 커다란 칼로 잡초를 치면서 새로운 길을 내며 전진했는데 그 일은 와간바가 아니면 하지 못했다. 와간바가 사용하는 칼은 1m가량이고 날이 위로 휘어졌으며 넓이가 10cm나 되었다. 칼날은 면도날처럼 예리했고 실제로 면도로도 사용했다. 코끼리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코끼리는 5~6톤이나 되는 몸무게 때문에 하루에 200kg을 먹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잠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먹어야 한다. 그날 하오에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무거운 발자국소리다. 팜파라가 멈췄다. 그는 코끼리의 발자국소리와 시큰한 냄새로 추적을 했는데 그게 사라졌다.
(이 새끼가?)
팜파라가 손을 들어 정지명령을 내렸다. 사냥꾼들이 몸을 숨기고 엎드려 숨을 죽였다.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아주 조심스러운 발자국소리였는데 그 소리가 사냥대의 등 뒤에서 들렸다. 간교한 살인 코끼리는 추적자를 눈치채고 어느새 추적자들의 등 뒤로 돌아가 도리어 추적을 했다. 팜파라가 부하들에게 피하라고 지시하고 혼자 남아 흙을 몸에 묻혀 냄새를 없앴다. 코끼리가 나타났다. 제 딴에는 사람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쥐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으나 근시인 그놈은 팜파라를 발견하지 못했다. 팜파라는 코끼리가 자기 앞을 지나가게 놔두었다가 엉덩이에 화살을 날렸다. 아주 가느다란 화살이었으므로 코끼리는 화살을 맞은 줄도 몰랐다. 팜파라가 웃었다. 코끼리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와간바의 비법이 효력을 낼 것이다. 다음날 코끼리를 추적했다. 코끼리는 아무 일 없이 가시덤불을 뚫고 나가 벌판을 지나 삼림으로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비틀거렸다. 단 한 방울의 독이 6t이나 되는 코끼리에게 주입되어 코끼리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와간바의 독은 신경독이었으므로 고통도 없었고 사체는 깨끗했다.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몰려왔으나 아직 죽음을 확인하지 못해 뜯어먹지 못했다. 팜파라가 불을 피워 연기를 올리자 키쿠유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남녀노소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로 고기를 얻어가려고 모여들었는데 그 소동을 알고 삼림보안관이 달려왔다. 팜파라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그 코끼리는 살인 코끼리였으며 원칙대로라면 보안관이 잡아야 할 코끼리였다. 보안관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보안관은 자기 대신 코끼리를 처치한 팜파라를 체포했다. 보안관의 허가 없이, 금지된 독을 사용하여 잡았다는 죄다. 팜파라는 징역 3년 형을 받고 나이로비 감옥에서 복역 중이었다.
캡틴은 부끄러웠다. 전임자의 일이었지만 관리로써 뿐만 아니라 영국인으로서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나흘 후 캡틴은 와간바 추장의 초대를 받았다. 원주민이 보안관을 초청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날이 어두워지자 모닥불이 밝혀지고 여기저기 무수한 횃불이 돌아다녔다. 마을에는 큰 잔치가 준비되고 키쿠유 장로들도 초청되었다.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시작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서너 명의 젊은이가 횃불을 들고 달려왔다.
‘온다! 팜파라가 온다!’
와간바의 영웅 팜파라를 환영하는 잔치였다. 나이로비의 감옥에 갇혀있었던 팜파라는 신임 보안관 캡틴의 긴급 신청에 의해 특별사면되어 마을로 돌아왔다.
팜파라는 전형적인 와간바였다. 키가 좀 크고 단련된 근육질에 다갈색 몽골계 모습이다. 이집트계 마사이와는 달랐다. 사자 이빨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화살통을 어깨에 멨으며 1m 길이의 칼을 허리에 찼다. 팜파라는 신임 보안관이 자기를 석방했다는 걸 알고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보안관은 앞으로 코끼리나 코뿔소를 잡을 때는 미리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건 다른 짐승은 팜파라 맘대로 잡아도 좋다는 승인이었다. 팜파라가 감옥에 간 후부터 와간바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냥터를 마사이에게 빼앗겨 사냥을 못했다. 돌아온 팜파라가 맨 먼저 한 일은 사냥터에서 마사이의 소 떼를 몰아내는 일이다. 팜파라는 부하를 데리고 다음 날부터 사냥터에 나가 소 떼를 발견하면 주저 없이 화살을 날렸고 소떼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소를 몰던 마사이가 달려왔으나 가슴에 사자 이빨 목걸이를 걸고 있는 와간바 사냥꾼을 발견하자 멈칫했다. 마사이 소몰이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그들은 소를 몰고 되돌아갔으나 그대로 있을 마사이가 아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사이 모란 30여 명이 달려왔다. 길이가 3m나 되는 창을 들고 있었는데 그 창은 30m 이내 같으면 수박만 한 과녁을 정확하게 뚫었다. 그러나 와간바는 그 창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마사이에게 창을 던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사이가 청을 잘 던지는 것처럼 와간바는 활을 잘 쏘았다. 와간바의 화살은 마사이의 창보다 훨씬 멀리 날아갔다. 마사이가 와간바를 추적하면 그 거리가 30m 이내로 줄지 않았다. 그 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어김없이 화살이 날아왔다. 그때도 마사이가 고함을 지르며 돌격했으나 와간바는 질서정연하게 물러서며 활을 쏘았다. 와간바는 마사이보다 수가 적었으나 싸움은 일방적이 되었다. 마사이는 창을 던져보지도 못하고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첫 번째 교전에서 마사이 네 명이 쓰러졌고 더 많이 부상을 당했다. 와간바는 사람과 싸울 때는 독을 바르지 않았으나 그래도 화살을 급소에 맞으면 치명상이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을 때 캡틴이 와간바 유보지(자치 구역)에서 일어나는 불빛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부하 여섯 명과 겨우 수리를 끝낸 지프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50여 명 가까운 마사이가 와간바 마을을 불태우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눈들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피에 굶주린 모습이었다. 상황으로 봐서 마사이가 승리한 것 같았으나 와간바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걸려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을 뿐 타격을 주지 못했다. 마사이는 와간바 마을을 점령했으나 텅 비어있었다. 마사이는 보안관에게 화풀이를 했다. 와간바가 먼저 소몰이꾼을 쫓고 소 떼를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봐, 여기는 와간바의 마을이고 너희들이 와간바에게 당했다고 하는 곳도 와간바의 유보지야. 너희들이 와간바의 유보지를 침략한 거야.’
마사이는 와간바와 전투에서 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다. 하늘이 선택한 마사이는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 캡틴은 내심 고소했다. 마사이가 철수했다. 보급선이 끊어져 배가 고팠다. 와간바는 전략적 공격으로 후방에서 무기와 식량이 보급되었으나 마사이는 무턱대고 돌진했기 때문에 보급선이 끊어졌다. 그날의 싸움은 그렇게 끝났으나 다음날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 마사이 대추장회의가 열렸다. 지금까지는 와간바와 접촉된 일부마을의 분쟁이었으나 종족 간 대전쟁상태가 되었다. 일단 마사이는 마사이의 자존심을 추락한 일부 추장의 지위를 박탈하고 와간바를 응징하려고 했다. 와간바가 사죄를 하고 유보지를 넘겨주지 않으면 와간바를 몰살시키기로 했다. 와간바는 마사이의 제안을 일축했다. 팜파라가 유보지에 들온 마사이는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 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키쿠유는 와간바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보안소에서는 경비원을 보강했다. 15명의 경비원을 영국식으로 훈련했다. 싸움이 벌어진 지 나흘째 되던 날 마사이들이 각 마을의 모란을 총집결시켜 전투부대를 편성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모란은 20세에서 25세까지였는데 대략 80여 명이었다. 마차 코스에 전쟁 기운이 돌았다. 캡틴은 새로 구입한 대형트럭에 경비원 15명을 싣고 마사이 종주 마을로 갔다. 마을에서는 대장간이 불꽃을 튀기며 살기가 돌았다. 모란들이 날카로운 창으로 훈련을 했다. 20m쯤 떨어진 과녁에 창을 던졌는데 사람 모양으로 만든 과녁의 심장에 어김없이 꽂혔다. 모란들은 캡틴과 경비원을 무시했다. 총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근거리에서 싸우는 걸 두려워하는 비겁자들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마사이가 총을 두려워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 노예로 팔 때 백인들의 앞잡이가 된 아랍인 노예 상인들이 쳐들어왔다. 아랍인들은 구식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총구에 화약을 넣어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마스케트 총이었다. 아랍 노예 상인들이 마사이를 쳐들어왔으나 마사이는 다른 아프리카 종족과는 달랐다. 마사이는 아랍인을 숲이나 덤불로 끌어들여 창을 날렸는데 창은 총보다 훨씬 정확했다. 아랍인들은 거의 전멸하고 물러났다. 마사이의 빛나는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가 문제였다. 마사이는 아랍과 전투에서 이기자 활이 총보다 더 훌륭한 무기라고 믿었다. 구식 총이라는 걸 간과했다. 마사이는 최신 자동 연발총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최신 자동 연발총을 갖고 있는 경비대를 무시했다.
‘와간바가 마사이를 죽였어. 적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백인이 뭐라고 하든 와간바를 죽인다. 빛나는 전통의 마사이가 와간바를 전멸시킬 것이다.’
마사이 추장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화해하는 방법을 찾자는 캡틴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이 거부했다. 캡틴은 마사이를 말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보안소에 돌아와 긴급전화로 100여 명을 파견해달라고 긴급 요청을 했다. 기대할 수는 없었다. 영국의 식민 통치 기구란 본래 비능률적이다. 기구가 복잡했고 상호 연결도 되지 않았다. 된다고 해도 한 달도 넘게 걸릴 일이다. 더구나 원주민의 싸움에는 관심도 없었다. 캡틴의 우려는 그날 밤에 현실로 나타났다. 마사이가 100여 명이나 되는 모란으로 와간바를 공격했다. 싸움의 양상이 달라졌다. 와간바의 활은 어둠 속에서는 무력했다. 과녁이 보이지 않았다. 모란은 밤눈이 밝아 접근해서 창으로 찔러 죽였다. 모란은 야간 훈련으로 밤에도 전투를 할 수 있었다. 횃불을 밝혀놓고 불빛에 드러나는 모란에게 화살을 날렸으나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피난을 하려고 했는데 미리 알아챈 모란들이 퇴로를 막았다. 날이 밝으면 열세가 된다는 걸 알고 밤에 끝장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와간바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영웅 팜파라가 이끄는 결사대 20여 명이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칼로 기습을 했다. 정글에서 사용하는 길이 1m, 넓이 10cm의 면도칼보다도 날카로운 만도(蠻刀)다. 그 예리한 만도에 걸리면 마사이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팜파라가 이끄는 결사대는 사냥꾼이다. 짐승을 사냥하는 그들은 날렵했고 용감했다. 양쪽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모란의 대장 세니카는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세니카는 마사이라면 누구나 아는 모란이었고 싸움에서 진 적이 없는 전사였다. 그런데 팜파라의 결사대는 보통 적이 아니다. 활만 잘 쏘는 걸로 알았는데 결사대의 칼은 모란의 창만큼이나 우수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전쟁터에 캡틴이 경비대를 태우고 트럭이 왔다. 숲은 처참했다. 시체가 뒹굴고 팔다리가 잘려 나간 부상자들이 기어 다녔다. 양족 다 본능적으로 싸웠다. 곤충이나 원시 동물처럼 자기 목숨은 염두에 두지 않고 적을 죽이려고만 했다. 캡틴은 트럭을 몰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트럭과 총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순간 싸움이 멈췄다.
‘싸움을 중지하라! 중지하지 않으면 총을 쏘아 죽인다. 어느 쪽이든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부상을 치료하던 모란이 창을 들어 올렸다. 캡틴을 겨냥하였는데 옆에 있던 세니카가 창으로 어깨를 후려쳤다. 모란들에게 부상자를 치료하고 시체를 치우라고 지시했다. 세니카는 백인들과 접촉을 했고 총이 무엇이라는 걸 알았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팜파라도 부상자를 돌보며 시체를 치웠다. 싸움에서 마사이는 네 명이 죽고 부상자가 일곱 명이고 와간바는 네 명이 죽고 여섯 명이 부상을 했다. 그 후 싸움은 다시 확대되었다. 호전적인 마사이가 집결했다. 400km가 넘는 마을에서도 모란을 파견했으며 병력이 약 500여 명이었다. 와간바도 2km쯤 떨어진 벌판에 진을 쳤는데 300여 명이 모였다. 키쿠유는 와간바를 지원했다. 캡틴이 긴급상황을 나이로비 행정청에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행정청은 군대에게 출동을 요청했고 군대는 거부했다. 군사령관이 군대가 출동하려면 영국에 있는 총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사령관은 그 정도의 싸움에 군병력을 출동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경찰력으로 해결하라고 했다. 행정청이 경찰력을 집결했다.
그러나 캡틴은 증원부대를 기다리기에는 사태가 너무 촉박했다. 마차코스 광야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사이가 연락을 하고 사기를 올리는 북소리인데 광야에 살기가 퍼졌다. 날이 어두워졌는데 마사이가 피워놓은 불빛은 대낮처럼 밝았다. 캡틴의 경고가 통하지 않았고 트럭은 모란의 제지를 받아 진영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당신들 백인은 싸움에 끼어들지 마라. 우리는 와간바를 공격할 것이고 누구든지 막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마사이 추장은 영국행정청 간부의 말과 같았다. <원주민끼리의 싸움에 왜 보안관이 나서느냐?>고 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북소리도 점점 요란해졌다. 자정께 북소리가 뚝! 그쳤다. 마사이가 공격을 시작한 것 같았으나 캡틴은 속수무책이다. 어둠 속에서 총은 무용지물이다. 새벽을 기다렸다. 날이 밝자 트럭을 몰았다. 풀밭이 벌겋게 물들고 열서너 구의 시체가 있었다. 마사이 시신이고 와간바의 시신은 없었다. 마사이가 와간바의 전술에 걸렸다. 와간바가 불을 피워놓고 마사이를 유인했다. 와간바는 모닥불 주위에 숨어있다가 불빛 속에 떠오르는 마사이를 활로 쏘아죽이고 신속하게 도망을 쳤다. 와간바는 맨발로 짐승을 쫓는 수렵족이었으며 짐승처럼 민첩한 사냥꾼들이었다. 마사이가 와간바를 추격했다.
‘몰아라! 몰아라! 토끼처럼 도망치는 적을 표범처럼 쫓아라!’
마사이의 군가다.
마사이는 표범처럼 용감했으나 와간바가 토끼처럼 비겁하지 않았다. 마사이응 후퇴하는 와간바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마사이는 작전을 바꿔 500여 명이나 되는 모란들을 동원해서 와간바를 포위했다. 많은 수로 포위된 와간바는 전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 정오께 마사이들의 일부가 전선에서 물러났다.
나이로비에 있는 행정청에서 캡틴에게 긴급 지시가 내려왔다. 마차코스역(驛) 남쪽에 있는 백인마을이 위험하니 빨리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마사이가 백인마을을 습격했다. 백인마을은 철도회사와 관광회사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파리 관광객을 위해 만든 위락시설이다. 10여 개의 커다란 천막을 치고 식당, 숙박시설, 간이골프장이나 목욕탕이 있었다.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지고 관광회사 경비원들이 경호를 했다. 마사이는 먼저 철로를 파괴해서 외부와 단절을 시켰다. 캡틴이 도착했을 때는 수백 명의 마사이가 천막촌을 포위했다. 천막촌 앞마당에 마사이 시신 다섯 구가 있었는데 남녀의 시신은 성병에 걸렸다. 매독에 걸린 남녀의 시신은 모두 하반신이 썩어가고 있었다. 백인 천막촌에서는 마사이 여인들이 서비스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성병에 걸렸다. 관광회사 직원들이 마사이 여인에게 매음을 시켰다. 성병에 걸린 여인들은 천막촌에서 쫓겨나 마을로 돌아갔는데 마사이 마을에 성병이 번졌다. 원주민은 치료를 할 수 없는 병이며 원주민들에게 외부의 병은 치명적이다. 장로들은 성병에 린림 남녀를 모두 죽였다. 그리고 그 시신을 천막촌으로 보냈다.
추악한 백인들의 행태다. 사파리 여행은 사냥을 하고 관광도 하며 백인사회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또 다른 재미를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관광회사는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원주민 남녀를 동원하여 춤을 추게 했는데 원주민은 대부분 나체다. 나체 춤판을 열어 호기심과 욕정을 자극시켜 놓고 매춘을 알선했다. 전통문화가 파괴되고 원주민여인들이 백인들의 변태성욕의 대상이 되었다. 매춘행위로 매독과 임질이 퍼졌다. 원주민마을에서는 불치병이다. 성병에 걸린 남녀를 감금하고, 성기를 잘라냈으나 치유가 되지 않아서 전염을 막기 위해 죽였다. 마사이는 분노했다. 캡틴이 도착했을 때 천막이 불탔다. 관광회사직원들이 비명을 지르고 경비원들은 총을 쏘았다.
‘총을 쏘지 말아!’
캡틴이 고함을 질렀으나 나이로비 행정청은 원주민이 위험한 짓을 하면 발포하도록 허가했다. 어떤 것이 위험한 짓인지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총을 쏘라는 밀이다. 원주민끼리의 싸움에는 개입하지 말라고 하고 원주민과 백인 간 싸움에서는 원주민을 사살해도 좋다는 허가였다. 캡틴은 그런 식민지정책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창으로 우리를 죽이는데 총을 쏘지 말라고요?’
경호원들이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전날 하오, 대여섯 명의 안내원과 경비원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마사이 마을에 도착했다. 정해진 스케듈에 따라 환영 잔치판을 벌였다. 마사이 전통춤을 추었다. 마사이 여인들은 원래 타 부족 남자들 앞에서는 춤을 추지 않는데 관광회사 안내원들이 나체로 춤을 추게 만들었다. 환영 춤판이 끝나자 관광객들을 마을에 분산시켜 잠을 잤다. 특별요금을 내고 마사이의 집에서 유숙하는 관광객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마사이 집에서 잠을 잔 관광객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경호원들이 수색을 했는데 창에 찔려 뒷마당에 죽어있었다. 백인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버스를 타고 마을을 떠났으나 마사이가 추격했다. 천막촌에 돌아와 보니 천막촌이 불타고 마사이 여인들의 시신이 있었다.
‘저 야만인들이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해!’
수백 명의 마사이가 천막촌을 포위했다. 마사이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
‘용감한 마사이 전사들에게 말한다. 나는 이 지역 삼림보안관인데 용감한 마사이 전사들과 말하고 싶다. 당신들의 말을 듣고 평화롭게 해결하자!’
마사이들이 캡틴이 마사이 말을 하는 걸 듣고 좀 놀란 것 같았다.
‘할 말이 있으면 총을 버리고 혼자 이리 와라. 우리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
피를 보고 날뛰고 있는 마사이들에게 총이 없이 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캡틴은 원주민의 군중심리가 어떤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 관광객들이 몰살될 위험에 있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캡틴은 마사이를 안다. 호전적이고 사나웠으나 거짓말은 몰랐다. 약속은 지켰다. 캡틴과 말을 한 마사이는 대추장이다. 대추장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아무도 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캡틴은 총을 버리고 혼자 걸어갔다. 마사이는 밤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명이 넘는 마사이가 밤 공격을 하면 백인들은 몰살당한다. 구원부대도 기대할 수 없다. 철로와 길을 끊었으므로 설사 온다고 해도 마을까지 들어오지도 못한다.
캡틴은 대추장을 안다. 환갑이 훨씬 넘은 영감인데 눈은 독수리처럼 날카롭고 몸은 표범처럼 날렵했다. 대추장 옆에 모란의 대장 세니카가 있었다. 와간바의 팜파라처럼 그도 마사이의 영웅이다. 대추장과 세니카가 있는 것으로 봐서 싸움 상대를 와간바에서 백인들로 바꾼 것 같았다.
‘용감한 마사이는 함부로 싸움을 하지 않는데 왜 백인을 죽이려고 하는가?’
‘우리는 함부로 싸움을 하지 않지만 먼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적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백인들은 당신들을 방문했는데 왜 찾아온 손님을 죽였는가?’
‘그놈은 나쁜 놈이다. 우리 마을에 병균을 뿌린 사악한 놈이다.’
문제는 전날 살해된 관광객이다. 그는 유명한 코끼리 밀렵자인데 품행이 좋지 않아 성병에 걸렸다. 그는 몇 달 전에도 마사이 여인과 동침했다.
몇 달 전에 코끼리 밀렵자는 동침한 여인에게 매독을 옮겼다. 그 연인은 다시 온 밀렵자를 알아봤다. 그 여인은 매독이 악화되어 곧 동족들에 의해 살해될 것이었는데 그 여인은 자기에게 병을 옮긴 백인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로 했다. 마사이 여인과 그 오빠가 밀렵자를 죽였다. 안내인도 죽이려고 했으나 눈치를 채고 도망갔다.
‘알았다. 당신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관광안내인을 우리에게 넘겨라. 백인들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보상하라.’
당연한 요구다.
‘나쁜 병에 걸린 마사이에게 보상을 하겠다. 죽은 사람에게는 소 열 마리를 주고, 병에 걸린 사람은 소 한 마리를 주고 병을 고쳐주겠다. 그 병은 불치병이 아니며 백인들은 그 병을 고칠 수 있다.’
마사이에게 소 열 마리는 수종한 재산이다. 또 백인들은 병을 잘 고친다. 대추장이 수락했다. 그러나 관광회사직원 두 사람을 넘기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쁜 놈들이었으나 마사이의 손에 죽게 할 수는 없다.
‘직원은 우리가 처벌한다. 체포하여 재판한다. 처벌을 받으면 오래도록 감옥에 갇혀 다시는 나쁜 짓을 못 한다.’
대추장이 수용하지 않아 평화교섭이 깨졌다. 캡틴이 천막에 돌아와 교섭 결과를 설명했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마사이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했으나 안내인과 일부가 그런 무례한 요구를 하는 마사이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총을 들고 나섰다. 백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보안관이 임무를 포기한다면 스스로 싸우겠다고 했으나 캡틴은 냉소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오’
두 명의 안내인과 밀렵자로 보이는 관광객 다섯 명이 총을 들고 나갔으나 약 30분 후 얼굴빛이 샛노랗게 질려 돌아왔다. 그들은 마사이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창이나 칼 따위를 들고 날뛰는 야만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자동 연발총으로 쉽게 격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총을 들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마사이에게 접근하여 총을 발사했다. 500m쯤 되었으므로 총알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총알이 거기까지 닿았는지도 알 수 없고 모닥불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어두워서 총을 겨눌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북소리는 처음에는 느리게 울리더니 점점 빨라졌다.
‘온다! 공격하고 있어!’
밀렵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관광객으로 위장을 했으나 사실은 안내인들과 짜고 밀렵을 했다. 코뿔소의 뿔, 코끼리 상아를 노리는 밀렵자였으며 원주민과 마찰을 빚는 것도 그들이었다. 창이 날아왔다. 세 개 중 하나가 밀렵자의 팔에 스쳤다. 밀렵자들은 체면을 버리고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요. 선량한 관광객이 야만인의 습격을 받아 피를 흘리는데 보안관은 그저 보고만 있는 거요?’
안내인이 캡틴에게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우리는 당신의 상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 당신의 목을 자를 거요.’
그 말이 캡틴의 비위를 건드렸다. 캡틴이 자기 멱살을 잡은 안내인의 손을 비틀어 안내인을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일어나 덤비려는 안내인의 가슴팍을 총대로 찍었다. 다른 안내인이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자 경비원이 후려쳐 눕혔다.
‘이놈들 모두 묶어!’
관광객에게 매춘을 알선하여 성병을 퍼뜨리고, 밀렵을 한 놈들이다. 마사이는 그놈들을 넘겨주라고 하고 있다.
캡틴이 천막촌 앞마당에 불을 피웠다. 모닥불빛 속에 꽁꽁 묶은 두 놈을 꿇어 앉혔다. 마사이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혼자 마사이를 찾아가 대추장을 만났다.
‘왜 그놈들을 데리고 오지 않나? 우리에게 넘겨라! 그러면 우리는 철수하겠다.’
‘백인들에게는 법이라는 게 있다. 백인들은 모두 그 법에 따라야 한다. 나쁜 놈들은 법에 따라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저놈들을 당신들에게 넘겨주지 못하지만 재판을 해서 처벌을 할 것이다.’
‘어떤 벌을 줄 것인가? 사형인가?’
‘사형을 할 수도 있고 평생 감옥살이를 할 수도 있다.’
‘저놈들을 사형하겠다고 서약할 수 있는가?’
‘사형을 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서약할 수 있다.’
마사이 반란이 수습되었다. 그날 밤 마사이는 의기양양하게 철수했다. 그들은 백인에게 항복을 받았다고 믿었다. 사실 항복이었다. 마사이가 밀렵자를 죽인 것은 묵인되었다. 백인 밀렵자를 죽인 범인은 성병에 걸린 여인의 오빠인데 그는 멀리 도피를 했으므로 잡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체포한 안내인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성병에 걸린 마사이는 집단 수용하여 백인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행정청은 캡틴의 건의를 수용하여 보상을 했다. 성병에 걸린 마사이들에게도 치료비와 위로금을 지불했다. 대추장과 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마지막으로 캡틴은 원주민 간의 분쟁을 수습하기 위해 대추장에게 와간바의 침략전쟁을 2~3일간 연기해주라고 요구했다. 캡틴은 마차코스의 반란을 수습하면서 야만스러운 미개인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본성을 발견했다. 마사이의 대추장과 참모들은 솔직했다. 의사를 감추거나 비비꼬와서 숨기지도 않았다. 문명인들은 속내를 드러내놓지 않고 유리하게만 말을 한다. 마사이는 그렇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고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약속을 지켰다. 감추거나 숨기지도 않았다. 솔직하고 단순했다. 믿음이 있었다. 마사이와 와간바의 살육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 대추장은 적어도 사흘 동안은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미 피를 본 부족 간의 증오심은 이성을 잃었다. 시기도 나빴다. 7~8월의 건기에는 대지가 말라붙고 사람의 마음도 말랐다. 성질이 거칠어지고 싸움을 했다. 상황이 더 나빴다. 바짝 마른 숲에 불이 번지고 있었다.
마사이, 와간바와 키쿠유 사이의 잡초지에 불이 났다. 키쿠유의 밭, 와간바의 사냥터와 마사이의 유목지가 불탔다. 원주민은 불을 천재지변으로 알고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캡틴이 키쿠유 마을로 갔다. 키쿠유들은 누렇게 익어 곧 수확할 옥수수밭에 불이 번지는 걸 보고 당황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총동원하시오.’
캡틴은 방화선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잡초를 잘라 폭 10m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 불이 옥수수밭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어 불은 방화선대를 넘어오지 못했다. 캡틴이 이번에는 와간바 마을로 달려갔다. 방화선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역시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불어 불이 방화선대를 넘지 않았다. 문제는 마사이 마을이었다. 바람이 마사이 마을로 불었는데 불은 바로 마을 앞까지 타들어왔다. 마을에는 첨 마리가 넘는 소떼와 더 많은 양 떼가 있었다. 캡틴의 트럭은 불길을 뚫고 마을로 들어갔다.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
‘내 말을 들으시오. 내 말을 믿고 시키는 대로 하시오!’
마사이가 총동원되어 방화선대를 만들었다. 남쪽만 막으면 불은 서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서쪽은 강이었다. 건기로 바짝 말라붙은 강이었으나 불이 강을 넘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길이 워낙 거셌다. 바람을 탄 불길이 남쪽 마사이 마을로 번져나갔다. 그때 마사이대 추장은 캡틴이 수백 명의 와간바와 키쿠유를 데리고 달려오는 걸 봤다. 방화선대를 만들어 자기 마을을 지켜낸 와간바와 키쿠유가 마사이 마을로 달려왔다.
캡틴이 불길을 막아낸 와간바와 키쿠유를 설득했다. 마사이의 불길을 잡지 못하면 불은 다시 마을로 번질 것이다. 마사이의 진화鎭 도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원수 같은 마사이를 돕는 걸 거부했다. 마사이 마을로 들어가면 신변이 위험하다고도 했다. 캡틴이 경비원을 동원해서 그들을 보호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이 마사이의 유보지에 들어서자 마사이가 흥분했다. 마사이는 진화작업을 팽개치고 창을 들고 덤볐다. 캡틴과 경비원들이 발포했다. 공포가 아니며 총알이 마사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저 사람들은 당신들을 돕기 위해 왔는데 죽이려는 것이냐?’
‘저놈들은 우리의 적이다. 적이 신성한 우리 땅에 들어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당신들의 적은 저 사람들이 아니라 저 산불이요. 산불이 당신들의 유보지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소. 당신들의 가족과 가축을 죽이려 하고 있지 않소?’
캡틴이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와간바나 키쿠유가 아니라 산불이라고, 힘을 합쳐 산불을 막아내야 한다고 외쳤다. 마사이 대추장이 결단을 내렸다. 마사이에게 힘을 합하여 산불을 진화하라고 명령했다. 대추장의 권위는 대단하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사상 최초로 대 협동작전이 벌어졌다.
산불과의 싸움은 연 이틀간 계속되었다. 오랜 건기로 대지가 말라붙어 불이 꺼진 듯 하다가도 다시 붙었다. 고비는 이튿날 아침이었다. 마사이 100여 명이 방화선대에서 필사적으로 불을 막아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위험했다. 불이 그들이 불에 포위되었다. 그들을 구해야 했다. 캡틴이 와간바와 키쿠유 200여 명을 선발하여 구출 작전을 벌였다. 포위된 마사이나 구출하려는 그들도 모두 위험했다. 구출대는 불속에 길을 내면서 마사이에게 접근하여 마사이를 구출했다. 연기에 그을리고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마사이를 모두 구출했다. 오후 늦게 산불이 완전히 진화되었다. 캡틴은 불길 속에서 사람들만 구한 게 아니라 불길에 갇혀 우왕좌왕하는 야생동물도 구했다. 그때 사람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야생동물들이 서로 협조를 했다. 포식동물, 초식동물과 원수 같이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죽이던 동물들이 서로 도왔다. 사자와 얼룩말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불길을 빠져나가고, 표범과 치타가 코끼리무리에 끼어 도망쳤다. 뱀이 영양의 뿔을 감아 피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마사이 마을 마당에 설치된 지휘 본부 앞에서 불이 멎었다. 나이로비에서 달려온 의료진 36명이 부상자를 치료했다. 불에 포위되었던 마사이가 돌아왔다. 부상이 심해 와간바에게 업혀오는 마사이도 있었다.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고맙소.’
부상한 마사이를 업고 온 와간바의 등을 대추장이 두드렸다. 자기 가슴에 걸린 목걸이를 젊은이의 목에 걸어주었다. 마사이 최고훈장을 원수 같았던 와간바에게 선물했다. 대추장은 와간바 추장을 껴안고 뺨에 입맞춤을 했다. 존경과 우정을 나타내는 인사다. 캡틴은 일이 끝나면 세 부족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평화회의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날밤 평화회의가 열렸다. 종족들의 추장들이 담배를 나눠 피우며 덕담을 했다. 와간바의 팜파라와 마사이의 세니카가 중대한 협상을 했다. 세니카가 자기 여동생을 팜파라에게 시집보내고 그 대신 팜파라도 사촌 여동생인 추장의 딸을 세니카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종족 간에 혼사가 이루어지면 평화뿐만 아니라 근친결혼으로 생긴 박약아도 사라진다.
117. 원시림의 방랑자
- 스파이의 사랑
백계러시아인 사냥꾼 서닌은 야영을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삼나무 원시림에서 혼자 모닥불을 피워놓고 삼나무 둥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북만주 헤이룽장(흑룡강, 黑龍江)성 소싱안링산맥 산중이다. 1925년 10월 초였으니까 한국으로 치자면 가을이다. 그러나 북만주 산림에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없었으므로 그때는 초겨울에 해당한다. 산림의 색깔이 녹색에서 황갈색으로 변하고 풀은 말라붙었으며 낙엽이 한 자나 쌓였다. 철새들도 다 떠났다. 날이 어두워지자 추웠다. 모닥불이 비치는 얼굴과 가슴은 뜨거웠으나 등에는 한기가 서렸다.
(안 되겠군.)
감기에 걸리면 뼈도 찾을 수 없는 시체가 된다. 늘 주변을 돌아다니는 이리들이 뼈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얼빈을 머릿속에 그렸다. 불야성의 도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환락. 서닌도 한 달 전에는 그곳에 있었다. 어느 카바레 밀실에서 마담 루신과 영국산 위스키를 마셨다. 그리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호텔로 갔다. 서닌은 마담 루신의 풍만한 육체의 포로였다.
서닌은 하얼빈이 그리웠다. 가고 싶었으나 이대로는 갈 수 없다. 소련 첩보원 Q를 만나야 한다. 그를 만나 헤이룽강 건너까지 안내를 해야 한다. Q가 누군지도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으나 어쨌든 그를 만나야 한다. 서닌은 소련 첩보원은 아니었으나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본국 코카사스에 있는 부친과 가족들이 살아난다. 소련의 비밀경찰은 부유한 지주였던 그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서닌은 부친의 편지를 봤고 살려달라는 여동생의 호소를 받았다. 서닌은 소련정보부의 협조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 만주에서 일본군의 군사기밀을 수집한 첩보원을 헤이룽강 너머에 있는 소련군 초소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는 게 서닌의 임무다. 그 일은 서닌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 서닌은 구舊 러시아 육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러시아 육군대학은 군사 지식을 가르치는 군사학교가 아니라 일반 교양학부를 모두 배우는 러시아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러시아의 엘리트 코스다. 서닌은 대학을 졸업한 후 북만주에 주둔한 러시아 육군 정보부대에서 근무했다.
서닌은 정보부대에서 러시아와 만주 사이에 있는 강과 산을 답사하여 군사지도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만큼 북만주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서닌은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군대에서 탈출하여 북만주에서 범, 표범과 곰 등 맹수를 사냥하면서 살았다. 정보장교로 근무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사냥을 했기 때문에 명포수로 알려졌다. 그래서 소련 정보기관이 그를 이용하기로 했고 그는 정보기관의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코카서스에 있는 가족을 살려야 했다.
서닌은 벌써 일주일 전에 소련 간첩 Q와 만나기로 되어있는 산막에 도착했으나 Q는 일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북만주의 산에는 맹수사냥을 한 백계 러시아 포수들이 여기저기 대피소를 만들어놓았는데 서닌은 지난해에 그 대피소를 이용했다. 그런데 그 대피소가 없었다. 일본군이 불태워버린 것 같았다. 서닌은 산막이 있었던 곳 일대를 일주일 동안 돌아다니며 Q를 기다렸으나 Q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Q를 버리고 돌아갈 수도 없다. 끝까지 기다리든지 Q를 만날 수 없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한다. Q가 일본군에 잡혔거나 맹수에게 먹혔다는 아니면 Q가 아예 오지도 않았다는 따위의 증거가 필요했다. 특히 곰의 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곰은 10월 초에는 악마로 변한다. 곧 첫눈이 내릴 시기였고 곰은 눈이 내리기 전에 동면하는 굴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데, 굴 안에서 봄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텨야 하기 때문에 굴로 들어가기 전에 닥치는 대로 먹는다. 그곳의 곰은 흑곰이라고 불렀으나 불곰이다. 무게가 400kg이나 되는 거물이므로 범도 덤비지 못한다. 곰이 오면 10여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 깡패 이리도 먹이를 내주고 도망간다.
서닌은 곰의 성질을 잘 알고 있으므로 곰의 발자국이 발견되면 멀리 피했다. 곰은 세력권이 좁았으므로 10km쯤만 도망가면 안심이다. 며칠 전에도 곰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피했다. 산을 두 개나 넘고 계곡에서 야영을 했는데 밤중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맹수 사냥꾼은 눈을 감고 있어도 완전히 잠들지 않는다. 곰이 제 딴에는 발자국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용히 다가왔으나 400kg이나 되는 몸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곰과 싸울 수는 없다. 어둠이라 곰이 보이지 않았고 소련과 국경이 가까운 그곳에는 일본군이 순찰을 했는데 총소리를 내면 일본군이 듣는다. 서닌은 기대고 있었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서닌이 5m쯤 올라갔을 때 곰이 덮쳤다. 곰은 어릴 적에는 나무를 잘 탔으나 몸이 무거워서 나무에 오르지 못했다. 먹이를 놓친 곰이 분노하여 나무를 마구 흔들었으나 서닌이 올라간 나무는 쉽게 부러질만한 나무가 아니었다. 곰이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서닌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으나 서닌은 곰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곰이 먹이를 포기하고 중얼거리 듯 으르렁거리며 떠났다. 서닌은 그렇게 곰을 피했으나 Q는 곰에게 잡아먹혔는지도 모른다. 서닌과 만나기로 된 지역이 곰의 세력권이다. 범도 위험하다. 그곳은 곰의 세력권은 동시에 범의 세력권이다. 북만주의 범은 100km가 넘는 세력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곰의 세력권과 영토가 겹친다. 곰은 범의 세력권 안에 세력권을 가지고 있다. 자치권이다.
매일 밤 범이 포효했다. 불과 30~40m 거리다. 암범이 자기 세력권을 과시하였으나 사실은 은근히 수컷을 유인하는 소리도 되었다. 범은 겨울에 교미를 한다. 암범의 포효에 서너 마리의 수범들이 호응했다. 한 마리도 위험한데 여러 마리가 몰려들었다. 전문 맹수 사냥꾼 서닌도 두려운데 간첩 Q가 범을 피할 수 있을까? 서닌은 계속 Q와 만나기로 한 장수의 주변을 돌았다. 그곳을 원점으로 원을 그리며 수색 범위를 넓혀나갔다. 1주일 후에는 직경이 10km나 되는 원이 되었다. 그렇게 수색을 했는데도 Q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Q가 죽은 것으로 단정되었다. 수색 8일째, 야영을 했다. 일본군에게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피웠다. 불빛을 보고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다. 이리들이 모닥불 주위를 맴돌았으나 습격할 용기는 없었다. 다음날, 서닌은 계곡의 바위틈에서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깨어났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으나 뭔가 느낌이 있었다. 서닌은 그 뭣의 정체를 알고 있다. 곰도 범도 아닌 사람이었다. 원시림에서는 사람이 제일 무서웠다. 일본군이 돌아다니고, 비적, 범죄자들이 들어왔다. 살인자나 강도들이 관헌에게 쫓겨 들어왔는데 그들은 비적보다 다 위험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간첩 Q는 아닌 것 같았다. 서닌은 간첩 Q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으므로 Q라면 경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서닌이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과녁을 찾기 위해 온 신경을 귀에 모았다. 뭔가 딱딱한 물체가 두껍게 쌓인 낙엽을 쿡쿡 찌르는 소리, 서닌은 그 소리를 듣고 총을 내렸다. 심마니가 독사나 표범을 쫓기 위해 일부러 내는 소리였다. 지팡이 끝에 쇠붙이를 붙여놓았기 때문에 소리가 났다.
‘안녕하시오, 영감!’
‘안녕하시오. 포수 양반.’
늙은 심마니는 언젠가 하룻밤을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낙엽이 두꺼운데 산삼을 찾아낼 수 있소?’
서닌이 구운 토끼고기를 내밀었다.
‘그래도 미련이 있어 마지막으로 돌아봅니다.’
서닌은 무서운 원시림을 혼자서 무기도 없이 돌아다니는 심마니를 존경했다. 독수리의 눈, 늑대의 코, 토끼의 귀를 가졌다. 삼국지의 영웅 같은 용기를 지녔다. 원시림을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의지를 갖춘 비범한 사람들이었다.
‘혹, 사람을 보았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숨을 거둔 시신은 보았지요.’
시신은 두 구였는데 이리들에게 뜯어먹혔다. 옷에 총구멍이 있었다. 싸우다 살해되었다. 심마니는 합장을 하고 물러났다. 속세의 일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서닌이 정오께 시신을 찾아냈다. 사복을 입었으나 일본 군인이었다. 소련 간첩을 잡으려고 돌아다니는 일본 정보부 요원이다. 발자국으로 봐서 일본군은 네 명이었는데 두 명을 빠르게 달려갔다.
일본군 정보원 두 명이 죽은 동료의 시신을 버려두고 적을 추적했다. 서닌도 시신을 버리고 발자국을 추적했다. 일본군에게 쫓기는 또 한 개의 발자국을 추적했다. 도망자는 피를 흘렸다. 핏자국을 조사한 결과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았다. 중상이다.
(누구일까?)
간첩 Q였다. 간첩 Q가 일본군에게 발견되어 추격을 받고 있었다. Q는 예사 인물이 아니다. 그는 네 명의 일본군 중 두 명을 죽이고 도망갔다. 일본군 정보요원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병사인데 총상을 입어 몸이 비틀거렸으나 도망갔다. 하오 늦게 총소리를 들었다. 대현 권총의 소리인데 대여섯 발이 연속으로 울렸다. 체코제 소형 권총의 응사도 들렸다. Q는 유효거리가 30m도 안 되는 총으로 두 명의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다. 서닌은 조용하게 접근했다. 표범처럼 발자국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본군은 서로 3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산중복에서 계곡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Q는 계곡의 큰 바위 뒤에 숨었는데 보이지는 않았다. Q는 일본군이 총을 쏘면서 접근하는데도 총을 쏘지 않았다. 총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간첩은 마지막 한 발은 남겨놓는다. 서닌이 100m까지 접근했다. 그는 최신형 반자동 연발총을 가지고 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총이다. 서닌은 받침대를 만들어놓고 겨냥을 했다. 그는 러시아군대에서 인정받은 명사수다. 서닌이 발사했다.
일본인 정보요원들은 산중복 큰 바위 뒤에 숨어있는 Q를 쏘고 있었으므로 뒤에는 무방비상태였다. 산정에 있었던 서닌은 그들의 등 뒤에 있었고 거리는 약 60여 미터다. 그런 과녁을 놓칠 서닌이 아니다. 정보요원이 고개를 떨어뜨린 뒤에 총성이 들린 것 같았다. 나머지 한 명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보요원이다. 그는 그 순간에도 총탄이 날아온 방향을 알아채고 아래로 몸을 던졌다. 1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다음 총탄을 발사했으나 낙엽에 파묻혀 아래로 구르는 과녁에 맞은 것 같지 않았다. 표범처럼 날렵하게 추적했다. 분홍색 선혈이 낙엽 위에 떨어져있었다. 내장은 검붉은 피가 나온다. 어깨에 맞은 것 같았다.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본디 총 맞은 맹수는 위험하다. 함부로 추격하면 안 된다. 몸을 숨기면서 계곡으로 내려갔다. 서닌은 우선 Q를 만나보기로 했다. Q가 숨어있던 바위로 다가갔다. 서닌은 자기 신분을 밝힐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Q도 아는 듯 총을 쏘지 않았다. 계곡에는 큰 비위들이 널려있었고 바위들 사이에 인기척이 있었다.
‘나는 범을 보았소.’
‘범이 아니고 표범이요.’
서닌이 놀랐다. 여자 목소리였다. 30대 초반의 백인이다. 여인은 팔에 붕대를 감고 권총을 쥐고 있었는데 그 위험한 사경에서도 단정한 매무새였다. Q가 권총을 내렸다. 그리고 쓰러졌다. 피로와 굶주림으로 탈진했다. 서닌이 Q를 업었다. 이상한 일이다. Q는 열흘 동안이나 일본군에게 쫓겨 다녔는데도 몸에서 야릇한 향기가 났다. 날이 어스름해졌을 때 동굴로 찾아들었다. 작년에 검은 곰이 동면을 했던 동굴이며 깊고 아늑했다. 불을 피워도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Q는 모닥불 옆에서 꼬박 24시간 잠을 잤다. 잠을 깬 Q가 서닌이 마련한 노루고기 수프를 먹었다.
‘됐어요. 자고 있을 때 상처를 봤는데 괜찮아요.’
‘일본 놈들은 어떻게 되었지요?’
‘그것도 걱정할 게 없소. 한 놈은 죽고 한 놈은 어깨에 상처를 입고 총을 버리고 도망쳤소.’
공격해오더라도 걱정할 게 없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동굴 밖에는 보초들이 있었다. 늘 사람을 먹이로 알고 따라다니는 이리들이 끙끙거리며 돌아다녔다. 일본군이 오면 그놈들이 먼저 으르렁거릴 것이다. 이리 외에도 동굴 밖 나무에는 부엉이들이 앉아있는데 그놈들도 날카로운 소리로 경고를 해줄 것이다. 오래도록 사냥을 한 서닌은 동물과 의사소통이 되었다. 여인은 다시 두꺼운 낙엽 위에 누웠다.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소련의 간첩에게는 여러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남녀관계에 대한 규칙도 있었다. 남녀관계는 금지되지 않고 오히려 활용되었다. 늘 긴장과 압박감 속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활력을 주었다. 수혈을 하는 효과다.
서닌은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여인의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서닌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여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풀어주었다. 팔과 다리를 주물러주고 전신을 애무했다. Q는 눈을 감고 서닌의 애무를 받았다. 서닌의 손이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여인의 몸이 굳어지더니 곧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불덩이처럼 열이 달아올랐다. 감수성이 강하고 예민한 여인이었다.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 여인이 서닌의 손을 뿌리치고 뱀처럼 서닌의 몸을 감았다. 서닌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여인의 몸이 정상이고 남자를 받아들일 능력이 있다고 확인하자 서닌이 사나워졌다. 서닌이 여인의 몸을 세차게 압박했고 격렬하게 움직이자 여인이 숨을 할딱거리며 비명을 지르다가 외마디 절규를 하고는 실신한 듯 조용해졌다. 일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인의 몸이 풀렸다. 실신하듯 잠든 여인은 아침에 일어나더니 단장을 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듬고 화장을 했다. 여인의 작은 가방에는 권총과 함께 화장품이 있었다. 권총과 화장품은 모두 무기다. 여인의 미모는 권총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다. 본디 간첩은 경력이나 임무에 대해서는 함구했는데 여인은 사흘 동안 같이 지내 정이 들었는지 과거를 얘기했다. Q는 노라니라는 예명으로 하얼빈의 고급카 페에서 일을 했다. 노라니는 러시아 출신이며 프랑스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다. 노라니는 특급 여급이었으며 손님을 선택했다. 손님 중에 일본군 마사기 중좌가 있었다. 만주의 실권자며 모든 군사기밀을 다루었다. 마사기는 처와 아이들이 있었으나 노라니의 포로가 되었다. 매일 밤 카페에 왔고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 기밀이 노라니에게 넘어갔다.
마사기는 처음에는 자기 역량을 과시하느라고 기밀을 자랑했다. 노라니가 침대에서 자기의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점점 더 중요한 비밀을 얘기했다. 마사기가 노라니의 행적에 의심을 품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오랜 내사 끝에 일본 헌병대가 노라니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노라니는 이미 북만주 원시림으로 도망갔고 마사기는 총으로 자기 이마를 쏘아 죽었다.
‘그 얼빠진 중좌는 정말 당신을 사랑한 것 같은데 ….’
노라니는 웃기만 했다.
‘당신도 그 일본 군인을 사랑했소?'
노라니가 벌레를 씹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그놈과 침대에 들어가면 구역질이 났어요.’
마사기는 여인을 즐겁게 해줄 힘이 없어 변태 행동을 했다. 노라니는 무서운 여인이었다. 마사기 중좌와 자고 난 다음날에는 깨끗이 몸을 씻고 카페에서 일하는 중국인을 불렀다. 호텔에서 힘든 일을 하는 중국인이었는데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 는줄 아세요?’
노라니가 서닌의 목에 팔을 감고 그 눈을 들여다봤다.
‘나는 그 중국인의 강한 힘을 좋아했는데 그 중국인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을 만났어요. 몸뿐만이 아니라 그는 내 마음도 사로잡았어요.’
그건 간첩으로서는 금기다. 여간첩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정교를 할 수는 있어도 사랑은 금지다. 사랑을 느끼면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되었다. 위험했다. 서닌은 그 위험을 느꼈다. 그에게는 여복이 있고 여난도 있었다. 하얼빈의 유명한 점술사가 카페 마담과 같이 온 서닌을 보고 공들여 점을 봐줬다.
‘당신은 여자 때문에 덕도 보지만 화도 입는다. 치명적인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서닌에게 여복과 여난이 따라다닌다는 말은 점술사가 스스로 증명했다. 그녀는 점을 치고 난 다음 서닌을 고급카페로 초청을 했는데 서닌은 거기에서 점술사가 대접한 술을 마시고 의식불명이 되었다. 프랑스제 포도주가 의심스러웠다. 서닌은 꿈속에서 헤맸다. 정신이 몽롱했으나 감미로웠다. 다음 날 아침에 정신을 차렸는데 호화로운 침대에 누워있었고 옆에 점술사가 있었다. 둘 다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점술사의 몸에서는 야릇한 향기가 떠돌고 그 향기가 서닌의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서닌은 전신을 주무르는 점술사의 손에 이끌려 다시 몽롱하고 감미로운 꿈나라에 빠졌다. 그렇게 사흘 동안 지내다가 행방불명이 된 서닌을 찾는 마담 루신에 의해 구출되었다. 체중이 5kg이나 빠지고 얼굴이 창백했다. 서닌의 주위에는 늘 여자들이 있었다. 루신도 그 하나였는데 루신은 누나처럼 서닌을 보살폈다. 루신은 서닌에게 술값을 받지 않았다. 루신은 점술사처럼 사악한 방법으로 서닌을 잡지 않았다. 다정하게 대했으며 무리한 정사도 강요하지 않았다. 서닌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어도 질투하지 않았고 자기에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서닌은 다른 여자와 만나도 곧 루신에게 돌아갔다. 루신이 말했다.
‘난 그 점술사 년은 싫어. 나쁜 년이야. 그러나 그년이 당신에게 한 말은 참마인 것 같아. 당신에게 여복과 여난이 따라다닌다는 말 말야. 여복은 괜찮지만 여난은 좋지 않아. 나도 여자지만 여자는 무서운 동물이야. 조심해!’
점술가의 말은 옳았다. 서닌은 원시림에서 여인을 만났다. 사람을 파리목숨처럼 죽이는 공산국가의 정보원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 여인에게 빨려 들어갔다.
처음에 그들은 동굴에서 사흘만 쉬기로 했다. 노라니의 총상이 아물고 피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흘이 되자 그들은 이틀을 더 쉬기로 했다. 노라니가 아직도 몸에서 열이 난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둘 다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남녀관계도 그보다 더 강력할 수는 없엇다. 서닌은 많은 여자를 알고 있지만 그렇게 감미로운 여인은 없었다. 여자도 서닌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약속한 이틀이 또 지나자 노라니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이틀을 더 연장했다. 닷새가 지났다. 이젠 떠나야만 한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눈이 내리면 발자국이 남아 추적이 쉽다. 네 명의 일본군 정보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증원군을 데리고 올 것이다. 시간으로 봐서 일본군이 올 때가 됐다. 소련의 남녀 간첩은 야수처럼 몸을 숨기며 흑룡강으로 갔다. 아직 미행자는 없다.
‘추적자는 없어. 그러나 앞길에 잠복자이 있는 것 같아.’
그곳은 만주 범들의 세력권이었으나 범의 포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0월은 범의 발정기였고 범은 신경질이 되어있었는데 범들이 없었다. 범들이 도망을 갔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곳에 강력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주의 원시림에서 범을 쫓아내는 적은 사람뿐이다. 그것도 한두 사람으로서는 범을 쫓아내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군이다.
서닌은 원시림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하오에 멈췄다. 숲에 숨었다. 마른 낙엽 속에 들어가 숨소리를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원시림에서는 모든 동물들이 그런 수법으로 살아남았다. 어미와 떨어진 동물의 새끼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수법을 알았다. 산림 속에서는 움직이지 않아야 눈에 띄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발견하지 못한다. 숨어서 기다린 지 한두 시간 뒤 사람들이 나타났다. 열 명쯤 되는 일본군 순찰대다.
‘모두들 조심해야 돼. 수상쩍으면 덮어놓고 쏴. 그 계집은 덮어놓고 사람을 죽이는 년이니 수하(誰何) 따위는 소용없어!’
노라니는 그 사내를 알았다. 관동군 사령부 정보국 소속 마사기 중좌의 경호원 마쓰자 준위다. 관동군에서도 여간첩은 꼭 잡아야 할 인물이었다. 그녀는 관동군의 비밀을 수집했고 그 정보가 소련에 넘어가면 문제가 된다. 순찰대는 그들이 숨어있는 낙엽 더미를 불과 5~6m 옆을 지나가면서도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서닌은 날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 그곳을 떠났다. 북쪽으로 향하던 방향을 동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소련정보국의 지령은 북쪽으로 올라가 흑룡강가의 어느 중국 농부의 집에서 대기하고있는 정보국 요원과 만나기로 되어있었으나 불가능했다. 흑룡강을 건너갈 기회를 잡기로 했으나 그것도 위험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다. 흑룡강은 만주와 소련의 국경이었으므로 어디를 가나 양측의 초소가 있었고 엄중하게 감시했다. 강에서 어른거리다가는 양쪽에서 총격을 당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 간첩은 지령대로 하든지 아니면 죽어야 한다.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동쪽으로 뚫고 나갔다. 밤새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걸어 아침이 되자 일본군의 경비 지역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추웠다. 10월 중순이면 북만주는 겨울이었다. 토굴을 찾았다. 심마니들이 이용하는 토굴인데 겨우 두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불을 피울 수 없으므로 거적을 덮어쓰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건뎠다. 춥고 불편한 잠자리였는데도 노라니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10여 년간 간첩 생활을 한 노라니는 직업상 많은 남자들을 만났으나 행복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몸을 밀착시켰다. 암수의 범은 하루에 열서너 번 교미를 한다.
다음날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일본군이 특별경비를 하는 지역을 피해 동쪽으로 갔으므로 이제는 북쪽으로 흑룡강을 향해 국경으로 갈 계획이다. 지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으나 삼나무숲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날 하오에 흑룡강에 닿았다. 서닌이 망원경을 강 주변을 살폈는데 머리를 저었다. 강에는 일본군 초소들이 1km 간격으로 있었고 30여 명씩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대여섯 명의 순찰대가 30문 정도의 간격으로 끊임없이 초소 사이를 순찰했다. 사복 차림의 정보대도 가세하고 있었다. 또 강 주변에는 한두 병사가 들어갈 수 있는 잠복소들이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경비다. 강물 상태도 나빴다. 반쯤 얼었으므로 배를 타거나 헤엄을 칠 수도 없다. 냉철한 서닌도 좀 당황했다.
‘안 돼. 돌아가야겠어.’
그것도 아주 빨리 돌아가야 한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닌이 가장 두려워하는 날씨다. 눈이 내리면 발자국이 남아 쉽게 발견된다. 날이 어두워졌으나 계속 도망쳤다. 위험지대에서 벗어났다고 한숨을 돌리는데 뭔가 어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두 다리로 걷는 것은 곰과 사람뿐이다. 잠복소에서 교대를 한 병사들이다. 눈 위에 엎드렸다.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엎드린 두 사람을 발견을 하지 못했다.
일본군이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데 전혀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체온으로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다. 일본군이 간첩을 발견하고 총을 들어 올렸으나 총을 쏠 틈이 없었다. 간첩들은 표범처럼 달려들어 목을 감고 칼을 심장에 쑤셔 넣었다. 훈련받은 대로다. 일본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본군의 옷을 벗겨 입었다. 시체는 눈에 묻었다. 밤새 걸었다. 눈이 점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렸다. 소련의 간첩은 초인적인 체력과 의지, 인내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를 악물고 걷던 노라니가 쓰러졌다.
‘힘을 내!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날 버리고 가요. 저 가방 안에 기밀문서가 있으니 당신 혼자 도망가요.’
‘안 돼!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여인이 눈을 떠 사내를 보았다. 사내도 여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마주 보는 시선에서 힘이 생겼다. 자기뿐만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살아야 했다. 여인이 일어났다.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닌이 굵은 삼나무 둥치를 조사했다. 나무 밑둥에 도끼로 찍은 자국이 있었다. 이정표다.
북만주의 산 사람들은 이정표를 만들어 자기와 다른 산 사람들을 구했다. 서닌이 발견한 표시는 T와 →표다. T는 산막표시고 →표는 방향이다. 서닌과 노라니는 기호를 따라갔는데 힘이 쇠진하여 주저앉았을 때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개야, 고리드의 개야!’
고리드의 개는 하얀 색깔, 뻣뻣한 귀 그리고 위로 말려 올라간 꼬리로 구분되었다. 소형 개지만 훌륭한 사냥개였다. 온통 짐승껍질을 쓴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서닌은 그들을 알았다. 퉁구스계 소수민족이며 깊은 산중에서 사냥을 하며 사는 수렵족이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고리드는 발달한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평화를 사랑하고 다른 부족과 싸우지 않았다. 깊은 산림에 살고있는 그들은 찾아온 손님들에게 친절했으며 어려움에 처한 나그네에게 다정했다. 고리드 사냥꾼은 힘이 소진된 두 사람을 업고 마을로 갔다. 통나무로 지은 집들이 열 채쯤 이었고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살았다. 촌장이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은 이틀 동안 잠을 자고야 깨어났다. 나그네들이 깨어난 걸 보고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극진히 대접했다. 두 사람 다 총을 기지고 있었고 피투성이였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귀찮은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기 마을을 찾은 손님이었고 정성을 다해 모셨다. 촌장은 그들이 일본군을 피해 도망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나 그들을 보호했다.
‘이 산림은 신성한 곳입니다. 산신령님이 이곳을 다스리지요. 자비로운 분이지만 사악한 사람들에게는 엄한 벌을 내립니다.’
산신령은 일본군을 싫어했다. 산신령은 총과 화약을 싫어했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살육을 용서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총으로 마구 사람을 죽였다. 고리드는 일본군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삼림은 오직 산신령이 다스리는 신성한 곳이다. 고리드는 나라를 잃은 소수민족이었으나 삼림을 자기들의 나라로 삼고 사랑하며 관리했다. 삼림에는 도처에 맑은 물이 흘러나온 샘이 있고, 온갖 과일과 버섯, 약초가 있다. 사슴, 노루와 멧돼지가 뛰어다녔고 검은 곰도 많았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다. 특히 겨울에는 산신령님이 시련을 주었다. 서닌과 노라니가 촌장 집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10리쯤 떨어진 이웃 마을에서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첫눈이 내린 걸 보고 멧돼지사냥에 나섰던 사냥꾼들이 범의 습격을 받아 한 사람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 고리드 사냥꾼은 함부로 살육을 하지 않았다. 사냥을 할 필요가 있을 때 최소한의 사냥을 했다. 그 원시림은 자기들이 관리하는 나라고 그곳의 짐승들은 자기들이 관리하는 가축이다. 그때 사냥꾼들이 멧돼지 한 마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범이 등뒤에서 덮쳤다. 그 범은 국경 너머 러시아에서 넘어온 시베리아 수범이었다. 그곳에는 늙은 암범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범과 고리드는 서로의 세력권을 존중하며 평화를 유지했다. 그런데 러시아 수범은 고리드외 암범의 세력권을 침범했고 무엄하게도 사람을 죽였다. 그놈은 멧돼지를 추격하다가 사람들이 자기의 먹이를 가로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무튼 그 범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고리드는 고사를 지냈다. 불을 피워 화신(火神)을 불렀다. 고사는 강신(降神) 굿이었으며 주술사는 여러 신들을 불러내 계시를 받는다. 주술사는 화신의 도움으로 산신령을 불러내고 최근에 일어난 범의 비행(非行)을 보고했다. 그 범은 아무 잘못도 없는 고리드 사냥꾼을 공격하여 한 사람을 죽이고 또 한 사람에게는 부상을 입혔다고 주장하면서 고리드 사냥꾼들에게 그 범을 사냥할 권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산신령의 허가를 받아놓고 범을 사냥할 계획이었다. 산신령은 달리 평화적 방법이 없느냐고 난색을 표명했으나 결국 끈질긴 주술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고리드는 유능하고 용감한 사냥꾼이다. 수렵족인 그들은 오랫동안 사냥을 했으므로 창을 잘 날렸다. 20m 이내 같으면 정확하게 과녁에 명중했다. 그러나 고리드의 사냥꾼을 유명하게 만든 건 창 솜씨가 아니라 사냥개였다. 귀가 빳빳하게 서고 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간 그 사냥개는 동북아 사냥개의 대표다. 주인에게 충성하고 적에게 용감한 그 개는 열 배가 넘는 곰에게도 덤벼들었다. 그래서 고리드는 곰을 잡았다. 그러나 범은 달랐다. 곰은 무서운 힘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었으나 동작이 느렸다. 더구나 곰은 근시이기 때문에 고리드 개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고리드 사냥꾼들은 범 사냥에 개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광석화 같은 범의 공격을 받으면 어떠한 사냥개도 목숨을 지킬 수 없었다.
범 사냥은 위험했다. 범은 그리드의 창보다도 빨랐다. 창을 날리기 전에 범이 고리드를 덮쳤다. 열서너 명의 고리드가 범을 포위해놓고 창을 날렸다. 범은 날아오는 창을 앞발로 쳐냈다. 그리고 강한 뒷발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날뛰는 범을 창으로 찌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리드는 범과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떠돌이 범과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고리드마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장간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사냥대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웃으며 인사를 했으나 마지막인사였다. 여인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 서닌이 촌장을 만났다.
‘이거 또 염치없는 부탁을 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영토에 들어온 나그네가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지만 ….’
범 사냥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직업이 범 사냥꾼이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온 범을 잡아야겠다고 했다.
‘그건 안 되오. 그 범은 우리가 잡기로 이미 산신령에게 허가를 얻어 놓았소.’
그래도 서닌이 간청을 했다. 고리드가 유능한 사냥꾼이지만 범 사냥은 무리였다. 범에게 당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촌장은 서닌의 제의를 거부했다.
촌장은 서닌이 범을 잡겠다고 나선 이유를 알고 있었다. 범의 껍질이 욕심난 것이 아니다. 촌장은 서닌을 알고 있다. 일대에서는 유명한 범 사냥꾼이다. 이미 열 마리가 넘는 범을 잡았다. 서닌은 고리드 사냥꾼을 도우려고 했으나 고리드는 외부 사람과 사냥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고리드의 자존심이었다. 촌장은 그 일을 다른 장로들과 의논하지 않고 사냥날짜를 연기했다. 눈이 내리고 있으니 그칠 때까지 연기한다는 명분이었다. 눈이 내리면 사냥이 어려웠으나 서닌은 총을 들고 나섰다. 혼자서 사냥을 하려고 했으나 노라니가 따라나섰다.
‘나를 무시하면 안 돼. 내 권총은 장난감이 아니야.’
노라니는 권총 사격의 명수다. 노라니의 권총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근거리에서라면 범도 곰도 잡을 수 있었다. 여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표정이다. 간첩으로서의 사명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겠다는 여인의 집념이다. 새벽에 고리드마을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한 사람이 모르게 보고 있었다. 촌장은 러시아 사냥꾼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눈발이 앞을 가렸다.
서닌도 범 사냥이 무모하다는 걸 알았다. 범과 싸우기 전에 엄혹한 북만주의 겨울과 싸워야 한다. 눈의 장막에서는 범의 모습이 모이지 않았고 발자국도 찾을 수 없다. 폭풍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닌은 범 사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전문적인 범 사냥꾼이다. 그는 범의 행동반경뿐만 아니라 심리상태도 알았다. 왜 그 수컷 범은 고향 시베리아를 버리고 여기까지 왔을까? 번식기였다. 열대지방에서는 번식기가 따로 없었으나 추운 동북아시아에서는 1년에 한 번 번식기가 있었다. 겨울이다. 범은 혼자서 살아가는 짐승이다. 그러나 번식기만은 예외다. 사냥꾼들은 그걸 범의 잔치판이라고 했다. 많은 범들이 모여들어 성性의 잔치를 벌인다. 모여든 수범들은 서로 높은 곳을 차지하고 포효를 했다. 서닌이 노라니와 같이 구릉의 나무 뒤에 서 있었는데 소리가 들렸다. 폭풍 소리 사이에 소리가 들렸다. 시베리아에서 온 수범이 암범을 부르고 있었다. 허지만 암범은 쉽게 응하지 않는다. 더 많은 수범들이 모여들어 경쟁을 해야 가장 강한 수범이 선택받았다.
서닌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암범의 울음소리였다. 수범의 포효에 대답하는 암범의 사랑 노래다. 사닌은 그 소리를 깅야크의 사냥꾼에게서 배웠다. 깅야크도 중국 동북부 원시림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었으며 훌륭한 사냥꾼이다. 깅야크는 짐승의 울음소리 흉내를 잘 냈으며 짐승을 유인하여 잡았다. 서닌이 낸 울음소리에 이끌려 수범이 다가왔다. 포효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눈 때문에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검고 붉은 줄무늬가 어른거렸다. 30m, 20m … 15m가 되었다. 울음소리가 멈췄다. 수범이 가짜 울음소리를 간파했다. 범은 가짜에 속은 것을 알았으면서도 돌아가지 않고 도약했다. 서닌이 발사했다. 어른거리는 무늬를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명중된 듯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났으나 다시 도약했다. 서닌은 충격을 받았다. 범이 어깨를 친 것이다. 총이 날아갔다. 졌다. 범과의 싸움에서 지면 결과는 뻔했다. 그때 노라니가 권총을 발사했다. 노라니는 서닌 옆에 붙어있다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권총을 발사했다. 연속 세 발을 발사했다.
‘잡았어! 내가 범을 죽였어!’
노라니가 고함을 치며 서닌의 목을 껴안았다. 놀라운 여인이다.
서닌이 파이프 담배를 태워 물었을 때 총소리를 듣고 고리드가 달려왔다. 그들은 서닌 옆에 길게 뻗어있는 범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나그네가 선수를 쳐서 자기들이 잡으려고 했던 범을 잡았다. 고약한 나그네다. 신성한 삼림에서 총질을 했다. 신령님이 노할 것이다. 화약 냄새가 아직도 떠돈다. 사냥을 방해하고 사냥감을 가로챘다. 고리드가 분개했다. 그러나 조금 늦게 도착한 촌장은 놀라지 않았다. 범 사냥에서 한두 사람이 희생될 것이 예상되었으나 희생을 면免했다. 그러나 뭔가 그럴싸한 절차는 밟아야 한다. 촌장은 범의 시체를 마당에 옮겨놓고 굿판을 벌였다. 주술사를 제쳐놓고 촌장이 직접 굿판을 주도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기름을 부었다. 불꽃이 치솟았다. 놀라서 화신이 달려왔다.
‘화신님께 바나이다. 마을에 큰일이 일어났으니 산신령님께서 오셔야겠습니다. 산신령님과 친한 화신님께서 산신령을 모셔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산신령이 왔다. 아주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아마도 총소리 때문에 단잠을 깨서 그런 것 같았다.
‘산신령님께 아룁니다. 총을 쏜 사람은 고리도가 아니고 러시아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만 나그네가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나그네는 엄벌을 받아야 한다. 죽음으로 다루어야 할 죄다.
‘산신령님, 러시아 떠돌이를 처벌해야겠지만 너무 가혹한 처벌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죽은 범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 범은 고리드 세력권 안으로 들어와 고리드를 해쳤다. 또한 그 범은 러시아인들에게 먼저 덤볐다가 사살되었다.
고리두 추장은 처음에는 화신과 산신령에게 총을 쏘아 범을 죽인 러시아인을 고발하고 나중에는 변호했다. 죽은 범도 잘못했다는 것이다. 초저녁에 시작된 굿판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모두 지치고 졸고 있었다. 하기는 그때쯤 화신도 산신령도 지쳤다. 촌장은 그걸 알아차리고 굿판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고리드는 러시아인들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마을에서 추방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추방을 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산신령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촌장은 고발을 하고, 변론도 하고, 판결까지 내렸다. 화신이나 산신령의 의도가 어쩌든 촌장의 굿판은 끝났다. 촌장은 굿판에서 내린 판결을 즉시 집행했다. 러시아인들을 마을 밖으로 추방했다. 촌장은 추방한 러시아인을 마을에서 1km 떨어진 삼림으로 데리고 갔는데 움막집이 있었다. 땅 밑 3m에 두꺼운 낙엽이 깔렸다. 겨우 두 사람이 누을 정도였으나 화덕도 있었다. 촌장은 숯과 식량을 공급했다. 촌장이 그런 조치를 한 것은 바로 다음 날 나타났다. 다음날 한 무리의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사복 차림의 관동군 정보국 소속 준위가 열서너 명의 헌병을 지휘했다. 자살한 마사기 중좌의 심복 부하였는데 기어코 노라니를 잡으려는 집념이었다.
‘촌장, 어제 이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렸는데 누가 총을 쏘았나? 거짓말을 하면 바로 사살하겠다.’
준위가 총구를 들이댔다.
‘우리도 그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근을 수색했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폭풍과 폭설이 퍼붓고 있었으니까요. 아마도 사냥꾼이 쏜 것 같아요.’
일본군은 고리드 촌장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폭풍과 폭설이 퍼붓는 날 사냥을 하는 사냥꾼은 없어. 넌 뭘 숨기고 있어!’
‘그렇지 않아요. 백계 러시아인들은 그런 날에도 범 사냥을 합니다. 그 총소리는 백계 러시아 사냥꾼이 쏜 것입니다.’
고리드 마을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촌장, 잘 들어. 이 일대에 소련의 스파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남자와 여자야. 그들은 중대한 군사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꼭 잡아야 해. 그들을 숨기면 총살이야. 그들을 검거하는데 협조하면 몇 달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주겠어.’
일본군이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으나 협력할 고리드가 아니다. 고리드는 손님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 토굴에서 머물고 있어요. 소련 땅으로 넘어갈 기회가 있을 거요. 그때까지 참아요.‘
불편했지만 행복했다. 마치 신혼여행 같았다. 고리드는 모든 시중을 들었다. 고리드는 엄청난 대가를 받았다. 서닌이 범을 고리드에게 주었는데 범을 팔면 고리드 1년 치 식량이 된다. 닷새가 지났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리드에 왔다. 소련 땅에 사는 고리드인들이었다. 촌장 부부에게 큰절을 했다. 촌장의 딸을 데리러 온 사윗감이었다. 목숨을 걸고 신부를 데리러 왔다.
어렸을 때 소꿉친구로 양가가 맺어준 약혼이었다. 본디 신랑은 고리드 이웃에 살았으나 러일전쟁이 일어나 소련땅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신랑 신부가 갈라졌는데 그들 사이에는 흑룡강이라는 국경이 있었고 일본이 정예精銳부대를 동원하여 지키는 무서운 국경을 목숨을 걸고 몰래 넘어왔다. 젊은이는 신부를 데리고가겠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우리는 국경을 지키는 소련군대장을 알고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기 때문에 술을 주고 매수했습니다. 일본군이 지키는 지역만 통과하면 문제없습니다.’
촌장은 망서렸으나 신부가 단호하게 따라가겠다고 했다. 고리드 여인들은 남편 밑에서 고분고분 살았으나 딸은 달랐다.
‘좀 기다려봐. 며칠만 마을에서 쉬어.’
촌장은 그렇게 결정했으나 무작정 미룰 수는 없다. 곧 달이 오르기 때문이다. 밤에 탈출을 하는데 달이 있는 밤에는 탈출을 못 한다. 흑룡강은 달빛이 얼음판에 반사되어 토끼 한 마리도 못 건넌다. 촌장은 이틀 후에 그들을 보내기로 했다. 직접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보다 더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서닌과 노라니도 함께 가기로 했다.
‘난 당신과 헤어지기 싫어.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노라니가 서닌의 품 안에서 속삭였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여섯이었다. 달도 별도 없었다. 촌장은 손바닥에 하얀 회칠을 하고 앞장서서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신호를 하며 일행은 안내했다. 그 원시림에도 길이 있었다. 사슴 떼가 오랜 세월 오가며 만든 짐승 길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일본군 초소가 있다. 악착같은 일본군대는 겨울에도 초소를 지키며 순찰병들이 돌아다녔다. 촌장은 초소의 위치와 순찰 시각도 알았다. 초소를 멀리 돌아 피했다. 다음날 새벽 사냥꾼이 만들어놓은 산막에 도착했다. 가장 북쪽의 움막이다. 멀리 흑룡강이 보였다. 움막에서 강까지 2km, 강폭이 1km였다. 거기까지는 촌장이 안내를 했고 이제부터는 서닌이 맡았다. 망원경을 관찰한 결과 일본군 경비대는 빈틈이 없었다. 100m 간격으로 초소가 있고, 20m 간격으로 다고쓰보(문어 항아리)가 있었다. 다쓰고보는 두 명이 들어가는 움막이다. 그 외에 특별순찰대를 돌렸다.
‘저거야. 저 특별순찰대야.’
서닌은 특별순찰대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순찰대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순찰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뒤에 공백이 있었다. 순찰대도 자기들의 뒤는 감시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날씨가 변덕을 부렸으나 오히려 유리했다. 폭풍과 폭설은 경비와 순찰을 어렵게 했다. 눈속에 머리를 묻고 숨을 죽였다. 순찰대는 일행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 무슨 경축일이기 때문에 본부에서 술과 떡이 배급되었다는 말을 지껄이며 바쁘게 지나갔다. 사실 순찰대대장은 오랜만에 맛 보는 술과 떡 생각에 좀 들떠있었다. 그는 초소에서 손을 흔들어 당번의 보고를 생략했고 다고쓰보에서는 아예 보고를 차단했다. 서닌 일행은 그 순찰대의 뒤를 따라갔다. 10m쯤 거리를 두고 소리 없이 미행했다. 순찰대는 가끔 전등으로 뒤를 비춰보기도 했는데 설마 자기들 뒤를 미행하는 자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순찰대는 두 개의 초소와 세 개의 다고쓰보를 통과하고 본부로 갔다. 서닌일행도 경비를 통과하고 흑룡강둑에 도착했다. 강한 서치라이트가 흑룡강을 교차하였다. 이별할 때다. 고리드 신랑 신부가 촌장에게 큰절을 했다. 노라니는 아무 말 없이 서닌의 목을 껴안고 흐느꼈다. 서닌이 다시 만나자고 했으나 자기 자신도 그게 헛말이라는 걸 알았다. 노라니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고리드인들이 흑룡강가로 내려서자 노라니도 더 어쩔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일행은 하얀 두루마기를 입었으나 강에는 얼음이 얼지 않은 곳이 있었다. 서치라이트에 움직이는 것이 포착되면 아군이건 적이건 구분하지 않고 기관총탄 세례를 받는다. 일행이 강의 중간까지 기어갔다. 서닌과 촌장이 약간 마음을 놓았다. 거기서부터는 소령영토다. 그런데 일본군 초소에서 군인들이 뛰어나왔다. 강쪽으로 달려가며 총을 쏘았다. 일본군이 탈출자를 발견했다. 돌아오라고 고함을 쳤다. 탈출자들이 일어나 뛰었다. 그들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뿔뿔이 흩어져 뛰었다. 집중사격을 받아 몰살되지 않으려는 작전이다. 일본군이 사격을 했다 소련군이 일본군에게 집중사격을 했다. 일본군이 후퇴하면서도 총을 쏘았다. 한 사람이 총에 맞았다. 서닌은 노라니라는 걸 알았다. 노라니가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서닌, 잘 있어요.’
가늘가늘한 소리였다. 노라니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닌을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노라니의 소식을 들었다. 노라니는 서닌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다고 했다. 시체는 소련군이 수습하였으며 기밀문서는 소련군에게 접수되었다.
118. 페루의 퓨마
어두웠다. 대낮이었는데도 손전등을 켜지 않으면 바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남미 페루 우카얄리강에서 가지를 친 세류 유역이다. 페루사람들은 아마존을 우카얄리라고 불렀는데 아마존의 상류고 발원지다. 한 손에 손전등을 들고 다른 손에 산탄총을 든 세밀이 뒤를 돌아다봤다. 뒤를 따라오던 제니퍼가 머리를 끄덕였다. 긴장한 표정이었으나 겁을 먹은 건 아니다. 세밀은 미국인 동물학자고 제니퍼는 식물학자인데 그들은 벌써 3년 전부터 우카얄리강 지류 우르방강의 강가에 있는 원주민마을에 연구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르방강 상류의 세류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다. 원주민은 그곳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어둠의 나라고 죽음의 나라고 알려졌다. 그 원시림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렸고 몸길이가 10m나 되는 뱀들이 똬리를 틀고 먹이를 기다렸으며 이름도 모르는 괴물들이 사람을 덮친다고 했다. 식인종도 있다고도 했다. 세밀은 오래 전부터 거기에 가고 싶었으나 아무도 안내해줄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거절당했다. 실제로 1년 전에 그곳에 들어간 스페인 선교사 세 명과 안내인 다섯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무장을 했고 유능한 원주민 안내인이었는데 맹수의 습격을 받았는지 식인종에게 잡아먹혔는지 알 수 없었다.
1934년 8월, 세밀 부부는 그 아마존 오지에 들어가기로 했다. 지리적으로는 연구소에서 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제니퍼는 신종 약초를 수집하려고 했다. 제니퍼는 미국의 대학 연구기관의 위촉을 받아 아마존 오지에서 약초를 채집했다. 가치 있는 약초가 많았고 부부는 연구비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특히 한 달 전에 보낸 약초는 대단한 평가를 받았고 연구기관에서는 그 약초가 나온 주변을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르방강 세류 일대다. 세밀 부부가 그 죽음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또 하나의 이유는 파이터 때문이다. 부부가 기르는 퓨마가 한 달 전부터 소식이 없었다.
퓨마 파이터는 3년 전, 세밀 부부가 삼림에 천막을 치고 일을 하고 있을 때 천막으로 들어왔다. 생후 3개월쯤 되는 수컷인데 어미를 잃은 것 같았다. 퓨마 새끼는 제니퍼가 준 우유를 먹었다. 집고양이만 했는데 맑은 눈동자가 예뻤다. 제니퍼는 퓨마가 마을 개에게 덤비는 걸 보고 파이터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지 않았다. 퓨마는 제니퍼의 침대에서 자고 늘 제니퍼를 따라다녔다. 제니퍼는 파이터에게 목줄을 걸지 않았다. 하루 한 번 먹이를 주었다. 생후 1년이 지나자 파이터는 바깥나들이를 했고 점점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 한 번 먹이를 먹기 위해 집에 들어왔다. 생후 3년이 되자 퓨마는 건강한 수컷이 되었다. 야생 퓨마보다 더 크고 당당한 수컷이 되었다. 이제는 거의 야생화되어 며칠에 한 번씩만 집에 들어왔다. 사냥이 잘 안 되거나 비가 오는 날 슬그머니 집에 들어와 제니퍼의 방 앞에서 하품을 했다. 파이터가 한 달째 소식이 없었다. 마을 주변에도 보이지 않았고 발자국도 찾지 못했다. 마을 장로가 어둠의 나라에 들어갔을 거라고 했다. 파이터가 당당한 수컷이기 때문에 짝을 찾으려고 삼림 깊숙이 들어갔을 거라는 말이다. 삼림에는 다른 퓨마들이 살고있었다. 대여섯 마리가 있었는데 파이터의 가족이거나 친척일 수도 있다. 파이터의 고향이다. 그러나 그곳은 위험했다. 그곳에는 퓨마뿐만 아니라 재규어가 살았다. 북미에 사는 재규어와 남미에 사는 퓨마가 함께 사는 건 드문 일이었으나 함께 살면서 서로 으르렁거렸다.
퓨마는 변화하는 자연에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학술상으로 퓨마는 남미의 아르헨티나에서 캐나다 북부까지 살았다. 퓨마는 삼림 지역, 산악지역, 강변 늪지대 그리고 반(半)사막지대에서도 살았다. 표범처럼 나무에도 올라갔다. 예민한 눈과 귀와 코를 갖고 있었으며 1km나 되는 거리에서도 다른 동물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퓨마는 먹이를 잡을 때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학자들은 고양이과 동물 중에서 은신술이 가장 뛰어난 동물이 표범이라고 하지만 퓨마와 같이 살아본 세밀 부부는 표범이 아니라 퓨마라고 단정했다. 퓨마는 노련한 사냥꾼이다. 은밀하게 먹이에게 접근하고도 결코 성급한 공격은 하지 않는다. 먹이가 자기에게 접근해올 때까지 기다린다. 숲속에 몸을 엎드리고, 바위 뒤에 숨고, 나무에도 올라간다. 세밀은 퓨마가 6m나 되는 나무 위에서 나무 밑으로 지나가는 페카리(멧돼지)를 덮쳐 잡는 걸 보았다. 퓨마는 훌륭한 달리기 선수다. 시속 70km 이상 뛴다. 평지에서는 치타보다는 못하지만, 산악지대에서는 치타를 능가한다. 퓨마의 도약력은 높이 3~4m, 너비는 13m다. 서 있는 자리에서 3m쯤은 가볍게 뛰어올랐다. 퓨마는 고양이과 동물 중에서 가장 사냥을 잘한다. 치타를 능가한다. 파이터는 킬트라는 새를 자주 잡아 왔다. 꿩의 일종인데 꿩 보다 크고 고기 맛이 좋아 제니퍼가 좋아했다. 주인이 좋아하는 걸 알고 자주 잡아 왔다. 파이터가 킬트를 잡는 건 기가 막히는 솜씨다. 킬트가 풀밭에서 풀씨를 쪼고 있었는데 파이터가 소리 없이 기어갔다. 킬트는 멍청한 새가 아닌데도 그걸 몰랐다. 파이터는 3~4m까지 접근해서 일부러 소리를 냈다. 소리에 놀란 킬트가 후다닥 날아올랐는데 파이터는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무거운 킬트가 공중에 떠오르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 파이터는 여유가 있었다. 파이터는 완벽한 도약의 자세를 취하고는 킬트가 날아가는 방향을 가늠하여 가볍게 뛰어올랐다. 높이 3m나 되는 공중에서 킬트의 발을 물어 잡았다. 세밀은 그런 파이터를 믿었다. 쉽게 죽을 퓨마가 아니다.
그러나 기분 나쁜 원시림이다. 어둡기도 했지만 소리도 없었다. 새나 토끼, 다람쥐도 없었다. 어둠의 나라고 죽음의 나라다.
세밀은 그날 하오에 포효를 들었다. 인디아의 정글에서 들었던 범의 포효다. 그런데 남미의 정글에 범이 있을 리 없다. 남미 정글의 왕 재규어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고양이과 동물들이 있는데 오직 세 종류만 포효를 했다. 포효는 자기 위치를 일부러 들어내서 과시하는 일이다. 무서운 것이 없는 맹수만 할 수 있다.
제니퍼는 불안했다. 원시림을 돌아다니는 모험가였으나 재규어의 포효를 듣고는 공포를 느꼈다. 포효가 가까워졌다. 세밀은 손전등을 제니퍼에게 넘기고 총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총은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뒷걸음질을 쳤는데 발밑이 질퍽거렸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는데 방향을 잘못 잡았다. 잘못하다가는 강의 세류가 거미줄처럼 뻗은 늪으로 빠진다. 포효는 그쳤으나 더 위험했다. 포효 대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재규어가 따라왔다. 다행히 제니퍼가 방향을 바로 잡았다. 식물학자인 그녀는 발에 밟히는 수초나 풀을 보고 숲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았다. 마른 땅이 나왔다. 세밀이 멈췄다. 재규어한테서 도망갈 수가 없다. 세밀이 배짱을 부렸다. 도망가지 않고 모닥불을 피웠다. 그래도 재규어는 물러가지 않았다. 포효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멈췄으나 불빛이 보였다. 모닥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 속에 두 개의 푸른 불빛이 명멸했다. 재규어는 자기 영토를 침범한 인간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분노했으며 침입자를 기어코 찢어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3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재규어가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 거리쯤은 서너 번의 도약으로 타 넘을 수 있다. 세밀이 총을 발사했다.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두 개의 파란 눈을 겨냥했으나 맞을 리가 없다. 어둠 속에서는 빛이 굴절하기 때문에 과녁이 되지 않았다. 위협이었다. 섬광과 굉음이 재규어를 놀라게 했다. 재규어의 눈빛이 사라졌다. 조용했다. 그런데 또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을 밟는 소리다. 세밀이 총을 들어 올렸는데 제니퍼가 그 손을 잡았다.
‘안 돼! 저 건 파이터야. 파이터가 오고 있어!’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파이터의 인사다. 모닥불빛에 파이터가 나타났다. 파이터는 변했다. 덩치가 커지고 연한 적갈색이 흑갈색으로 변했다. 피부도 거칠어졌다. 상처가 있었다. 다른 짐승들과 싸운 상처인데 왼쪽 눈밑의 상처가 깊었다. 파이터는 제니퍼 옆에 앉았다. 자기를 키워준 제니퍼를 더 좋아했다.
‘총소리를 들었어, 총소리를 듣고 우리를 찾아왔어. 우리를 지켜주려고 해.’
파이터가 주변을 살폈다. 재규어는 멀리 사라진 것 같았다.
‘파이터가 우리 옆에 있는 걸 보고 재규어는 도망갔어.’
제니퍼가 자랑스럽게 말했으나 세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동물학자인 그는 재규어가 퓨마에세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퓨마에게 겁을 먹을 재규어가 아니다. 재규어와 퓨마는 앙숙이다. 페루 아마존강 지류 지역 원시림에서 함께 살고 있었으나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재규어는 고양이과 동물 중에서 사자, 범 다음으로 크다. 몸무게가 100kg이나 된다. 큰 대가리와 굵은 발을 가졌다. 그에 비해 퓨마는 몸이 할 둘레 작았으며 60kg 전후다. 동물학적으로도 퓨마는 대형 고양이과에 들어가지 않았다. 재규어는 엄청난 힘을 가졌고 퓨마는 번개처럼 빨랐다.
파이터는 그날 밤 옛 주인 옆에서 밤을 보냈다. 파이터는 어른이 되었는데 제니퍼가 목덜미를 긁어주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고양이처럼 목을 굴렸다. 날이 밝자 파이터는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킬트를 물고 왔다. 킬트를 제니퍼 옆에 내려놓고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제니퍼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돌아가려고 했는데 제니퍼가 한 줌 풀을 내밀며 신종 약초라고 했다. 제니퍼는 머물면서 풀을 채취하겠다고 했다. 동물학자인 세밀도 아마존 습지의 식물이 이상한 효능이 있다고 알았다. 그곳에 사는 동물, 특히 카피파라, 파카 등 설치류는 도시동물원에 수용하면 원인 모를 병에 걸리는데 고향의 수초를 먹이면 치료가 되었다. 그래서 제니퍼는 계속 남아 신종 수초를 채집하겠다고 했는데 그녀의 주장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연구소에 돌아가기 싫었다. 세밀에게 연구비를 제공하는 대학박물관장 루이스여사가 연구소를 방문하기로 되어있었다. 루이스 여사는 재산이 많은 과부인데 오래전부터 세밀과 결혼을 하려고 했다. 루이스 여사는 현지에서 제니퍼와 같은 젊은 여류학자와 함께 일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밀을 대학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정식교수로 임명하여 강좌까지 마련했으나 세밀은 귀국을 늦췄다. 그래서 루이스 여사가 연구소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이미 도착했을 것이다. 하여튼 제니퍼는 머물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으므로 세밀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위험했다. 원주민도 들어가지 않는 원시림이고 천연고무를 채취하려고 원주민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간 많은 백인들이 죽었다. 선교사들도 실종되었다. 개미나 독충은 모닥불을 피우거나 두꺼운 옷을 입고 피했다. 역시 위험은 재규어였다. 파이터는 매일 찾아와 주인을 보호하려고 했으나 재규어를 막지 못했다. 퓨마는 만능의 짐승이었으나 한 가지 재규어에 미치지 못하는 게 있었다. 물이다. 모든 고양이과 동물은 물을 싫어하고 헤엄을 치지 못했다. 재규어는 반대로 물을 좋아하고 헤엄을 잘 쳤다. 아마존은 물의 나라다. 습지에 들어가면 재규어의 위협을 받았다. 재규어는 카이만 악어를 잡아먹었다.
세밀과 제니퍼가 수초를 채취하고 있을 때 상류에서 물이 절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규어가 몸길이 7m나 되는 아나콘다와 싸우고 있었다. 아나콘다는 대가리가 농구공만 했는데 배는 쌀통처럼 부풀었다. 부풀어 오른 옆구리가 터져 영양의 뿔이 삐어져 나왔다. 재규어가 아나콘다를 공격했다. 세밀은 아나콘다가 가여워서 재규어를 쏘려고 했는데 어느새 도망쳐버렸다. 아나콘다를 안락사시켰다.
세밀과 제니퍼는 사흘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신종 약초를 찾지 못했으나 더 물자고 했다. 루이스 여사가 연구소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포기할 루이스 여사가 아니다. 야영을 한 지 나흘째 되던 날 총소리가 들렸다. 연달아 대여섯 발을 쏘았다. 불길했다. 총소리가 난 곳으로 갔다. 루이스 여사가 세밀을 찾아 원시림으로 들어왔다. 경호를 맡은 스페인 포수와 안내인 네 명을 데리고 왔다. 총소리는 포수가 어른거리는 짐승을 보고 쏘았다고 했다.
‘어떤 짐승이었지요?’
‘잘 모르겠어요. 표범인지 치타인지 구분이 안 되었어요.’
제니퍼가 발자국울 살폈다. 퓨마였다. 루이스 여사는 어리둥절했다. 자기를 환영해줄 줄 알았던 세밀이 퓨마를 걱정했다. 루이스 여사가 세밀에게 연구소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제니퍼는 남아 파이터를 찾겠다고 했다. 부상한 퓨마는 죽는다. 상처가 곪거나, 부상 때문에 목이를 얻지 못하거나 다른 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제니퍼가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세밀도 갈 수 없었고 루이스 여사도 야영을 하기로 했다.
‘미스 제니퍼가 야영을 하는데 내가 못 할 리가 없어요. 난 미국사격협회 회원이고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한 경험도 있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야영 장비도 있으니까.’
스페인계 백인 안내인도 특급안내인으로 자처했다.
‘특급안내인이 야생 짐승과 사육 퓨마를 구분하지 못했어요? 빨간 목걸이를 달고 있었는데 보지 못했어요?’
제니퍼가 날카롭게 항의했다. 두 여인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비록 숙녀의 품위상 욕을 하지는 않았으나 주고받는 말에는 독을 품었다. 루이스 여사는 제니퍼가 모닥불 옆에 쳐놓은 모기장을 보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붕만 덮은 간이천막은 두 사람이 눕기에도 좁았다. 아무리 야영이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저런 천막 안에서 함께 잠을 잤느냐는 힐난이었다. 가만히 있을 제니퍼가 아니다.
‘미국이나 영국에는 숙녀들이 많은데 그 숙녀들 중에는 꼴불견이 더러 있어요. 사이가 좋은 남녀를 보면 공연히 질투를 하는 여자들이 있고 그중에는 정식결혼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남의 남자의 부인 행세를 하려고 하는 여자들이 있지요.’
세밀은 그날 밤에는 모닥불 옆에서 잠을 잤다. 제니퍼의 모기장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루이스 여사의 천막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세밀의 그런 행동은 두 여인을 더욱 격분시켰다. 여인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파이터가 돌아오지 않았다.
파이터는 앞발을 쓰지 못했다. 어깨에 총탄을 맞았다. 상처를 그대로 두면 화농(化膿)한다. 열대지방에서는 작은 상처가 치명상이 된다. 파이터는 야영장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들어오지 않았다. 낯선 천막이 있고 낯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자기를 쏜 사람이 있었다. 사람에게 사육된 파이터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접근을 했는데 안내인 심슨이 총을 쏘았다.
‘파이터는 스스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리가 찾아야겠어요.’
발자국을 추적했다. 파이터가 삼림으로 들어갔다. 하오에 파이터가 들개와 싸운 흔적을 발견했다. 대여섯 마리의 들개들이 파카(대형 설치류)를 잡아 뜯어먹고 있었는데 파이터가 빼앗아 먹으려고 했다. 무모한 짓이다. 재규어도 들개무리에게는 덤벼들지 못한다. 굶주린 것 같았다. 파이터는 들개들에게 쫓겨 하는 수 없이 나무 위로 피했다.
세밀은 하오 늦게 파이터가 페카리(들돼지)의 시체를 먹은 곳을 발견했다. 오래된 시체였다. 퓨마는 식성이 까다로와 썩은 고기는 먹지 않았다. 발자국으로 봐서 가까이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기를 쏜 사람과 어울리는 주인들이 못 미더웠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요. 파이터를 기다려요.’
그건 안 되는 말이다. 모기장도 없이 잘 수 없었다. 수천 수만 마리의 공격을 받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어떤 짐승의 공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재규어가 달려들 수도 있다. 식인종도 두려웠다.
‘그래도 야영을 해야 해요.’
제니퍼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무기도 야영 장비도 없는 여인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세밀이 손도끼로 나뭇가지를 쳐내 움막을 지었다. 네 개의 기둥울 세우고 잡초로 지붕과 벽을 쳤다. 모기를 막아낼 수 있을지는 몰랐으나 사방에 모닥불을 피웠다. 모기가 움막에 들어오려면 화염과 연기를 뚫어야 한다. 움막은 겨우 두 명이 몸을 붙이고 누울 수 있었다. 잠자리가 만들아지자 제니퍼가 맨 먼저 하려는 일은 사랑 행위였다. 제니퍼가 집요하게 요구했다. 전날 밤 제니퍼는 그걸 하지 못했다. 루이스 여사가 견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밀에게 가지도 못했다. 또한 루이스 여사가 세밀에게 가지 못하게 해야 했기 때문에 잠도 자지 못했다. 루이스 여사와 치열한 신경전 때문에 신경질이 되었는데 우선 급하게 그걸 풀어야 했다.
‘난 말리지 않아요. 그 돈 많은 과부와 천막에서 함께 자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함께 잠을 자든 결혼을 하든 미국에 돌아가 대학교수가 되든 나는 말리지 않아요.’
전날밤, 루이스여사가 몇 번이나 천막을 나와 밖에서 잠을 잔 세밀을 유혹했으나 세밀은 응하지 않았다. 모기장 천막에 혼자 있었던 제니퍼도 잠을 자지 않고 감시했다. 세밀이 웃었다. 제니퍼의 말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으나 세밀은 그걸 막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제니퍼는 싫다 싫다 하면서도 행동은 그 반대였으며 결국 환희에 찬 고함을 질렀다. 세밀은 그런 제니퍼를 좋아했다. 야성의 본능이 살아있는 여인이었으며 원시림의 생활에 딱 맞는 여인이었다. 세밀과 제니퍼가 기진맥진하여 밖으로 나오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파이터야, 파이터가 돌아왔어!’
제니퍼가 소리를 치자 어둠 속에서 파이터가 기어 나왔다. 파이터는 그곳에 다른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까이 왔다. 어깨에 피가 말라붙었는데 화농이 되었다. 파이터는 아랫배 껍질이 배에 붙었다. 우선 음식을 먹였다. 파이터의 식사가 끝나자 수술을 했다. 강한 소독 냄새와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행히 탄환이 어깨의 일부를 관통했기 때문에 수술이 간단했다.
신기했다. 파이터는 제니퍼가 감아준 붕대를 풀지 않았다. 어깨와 겨드랑이에 감겨있는 붕대가 불편할 텐데 파이터는 그 붕대가 왜 감겼는지를 아는 것 같았다. 우리 안에 가둘 필요도 없었다. 늘 제니퍼를 따라다녔다. 식욕도 왕성했다. 세밀이 늪에서 메기를 잡아 구웠는데 잘 먹었다. 신종 수초가 발견되었다. 강한 향이 나고 혀끝을 찌르는 맛이 났다. 제니퍼는 켐프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신종 수초의 집념과 연적에 대한 증오가 겹쳤다. 밤중에 파이터가 일어났다. 으르렁거렸다.
‘총소리야, 총소리가 들려!’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캠프가 있는 곳이다. 날이 밝자 캠프로 돌아갔는데 캠프는 비어있었다. 장비는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들이 없었다. 주변에 재규어의 발자국이 있었고 핏자국도 발견되었다.
재규어는 총질로 상처를 입었고 뒷다리를 쓰지 못하여 비틀거리면서 달아났는데 심슨일행이 추격을 했다.
‘이런 나쁜놈 같으니 ….’
재규어가 캠프장 주변을 돌아다닌 것은 사람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폈을 뿐이다. 고양이과 동물들은 호기심이 많았으며 캠프장 가까이 와서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심슨이 총질을 했다. 어둠 속이라 과녁이 분명하지도 않은데 무턱대고 난사를 했다. 세상에는 총질을 하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사냥꾼들이 있었는데 심슨이 그런 사냥꾼이었다. 날이 밝자 심슨이 피를 흘리며 도망가는 재규어를 추적했는데 루이스 여사와 원주민들도 따라갔다. 루이스 여사는 이틀 동안이나 세밀과 제니퍼가 돌아오지 않아 신경질이 되어있었다. 그 못된 여자가 세밀을 놓아주지 않았다. 심슨이 총에 맞은 재규어가 멀리 가지 못한다고 했으나 재규어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면서도 습지 안으로 도망갔다. 발목까지 빠지는 습지에서는 거머리가 달라붙었다. 대낮이었는데도 모기떼가 덤벼들었고 진드기가 옷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독사들이 있었고 악어도 있는 것 같았다. 루이스 여사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려고 했으나 심슨이 곧 재규어를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오 늦게 심슨은 재규어의 발자국을 놓쳤다. 더 이상 추격을 할 수 없었다. 심슨은 캠프로 되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자기들의 발자국마저 놓쳐버렸다. 그들은 왔던 길을 잃어버리고 늪지를 헤맸다. 루이스 여사는 당황했다. 아마존의 습지가 어떤 곳이라는 걸 알았다.
나침판을 사용하려면 현재 자기가 서 있는 곳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심슨을 그걸 몰랐다. 덮어놓고 남동쪽으로 갔는데 가도 가도 늪이었다.
‘안 되겠어.’
심슨은 나침판을 던져버리고 물이 얕은 방향으로 빠져나왔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마른 땅으로 나왔는데 앞서가던 원주민이 겁에 질려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발자국이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인데 맨발이고 열서너 명쯤 되었다. 그 원시림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발자국이 있었다. 식인종이 산다는 소문이다. 소문뿐만 아니라 습격을 받은 원주민도 있었다. 백인 선교사들이 실종된 적도 있었다. 원주민들이 공포에 질렸고 심슨도 안절부절이었다. 루이스 여사는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도망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어두워서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심슨이 손전등을 켰는데 원주민이 제지했다. 식인종들에게 소재를 알려주는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와서 잡아먹으라는 말과 같았다. 모닥불도 피울 수 없었다. 심슨 일행은 어느 숲속에 주저앉았다. 숲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울고 있는 루이스 여사는 모기떼에 뜯기는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식인종들이 불쑥 나타날 것 같았다. 심슨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똑똑한 원주민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 30m 높이에서 멀리 불빛이 보였다. 그러나 식인종이 피워놓은 불이라면 ….
심슨 일행은 일어나지 못했다. 숲속에 죽은 듯이 엎드려 밤을 보냈다. 상대가 짐승이라면 나무 위로 올라가 피신할 수 있었지만 사람이라면 자살행위다. 공포속에서 밤을 지샜다. 루이스 여사도 울다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울려 퍼지는 총소리에 잠을 깼다.
‘식인종이야, 식인종이 우리를 포위했어!’
나무들 사이에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고 심슨이 총을 쏘았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몸도 마음도 지쳤으나 살려는 일념으로 걸었다. 식인종들이 따라왔다. 수십 명인데 칼과 창을 들고 있었다.
‘놈들이 우리를 포위했어요.’
원주민의 말대로 식인종들이 앞길을 막았다. 심슨이 미친 듯이 총을 쏘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식인종은 총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세밀이야, 세밀이 우리를 구하러 오고있어.’
세밀과 제니퍼가 나타났다. 파이터가 같이 왔는데 파이터는 심슨을 보자 으르렁거렸다. 심슨이 파이터에게 총을 들어올렸다.
‘그 총 내려! 내리지 않으면 네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주겠다!’
세밀은 정말로 총을 쏠 생각이었다.
‘앞으로는 내 허락없이 총을 쏘지 마! 네 놈이 함부로 총을 쏘아 일이 이렇게 되었어, 알아?’
심슨이 머리를 끄덕였다. 루이스 여사는 매무새를 고쳤다. 몰골이 처참했다. 진흙투성이에 옷이 찢어지고 숙녀로서 말이 아니다.
퓨마 파이터도 마음을 놓았다. 세밀의 호령에 심슨이 꼬리를 내린 걸 알아차렸다.
‘파이터, 집으로 돌아가자!’
제니퍼의 말에 파이터가 앞장을 섰다.
‘안 돼! 거기는 늪지대야!.’
심슨이 참견을 하자 세밀이 입을 다물라고 고함을 쳤다. 퓨마에게는 사람의 몇 배나 되는 후각이 있다. 위험을 감지하는 천생적(天生的) 능력이 있다. 삼림에서 약초를 채집하는 제니퍼는 언제나 파이터를 앞세우고 원시림을 돌아다녔다. 파이터를 따라가면 안전하다. 재규어나 독사를 피했다. 강이나 늪지대도 피할 수 있었다. 파이터는 늪지대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습지대로 들어갔다. 뭔가 조심스럽게 살폈다. 들개들이었다. 대여섯 마리의 들개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는데 파이터는 그놈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재규어가 있었다. 들개들은 재규어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재규어는 이미 저항력을 잃고 있었다. 재규어는 심슨의 총질에 총상을 입었다. 총상을 입지 않았다면 들개 따위는 감히 재규어에게 덤벼들 수 없었는데 재규어는 전신이 피투성이였으며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 그래도 재규어는 눈을 뜨고 들개들의 접근을 막았으며 다가오는 퓨마를 보았다. 퓨마는 밀림의 적수다. 파이터는 재규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파이터는 재규어의 처리를 들개들에게 맡기고 돌아서서 사람들을 안내했다. 그날 하오 습지대를 벗어나자 세밀은 불을 피웠다. 식인종을 무시했다.
식인종들은 계속 미행을 했으나 일행의 수가 여덟 명이나 되었으므로 성급한 공격을 미루었다.
‘다들 모른 체해! 총을 내려놓아!’
세밀이 모닥불을 피우자 식인종들이 움직였으나 공격은 하지 않았다. 30 명에서 50 명 쯤 되었다.
‘저들을 자극시키면 안 돼! 그들은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야.’
식인종들은 자기들 영토에 들어온 침입자들의 동태를 살피려고 했다. 병력은 얼마냐? 뭘 하느냐? 목적이 무엇인가? 세밀은 3년 동안 밀림에서 살면서 식인종들의 소문처럼 두려운 종족이 아니다. 우선 그들은 수가 많지 않다. 광대한 밀림에 드문드문 흩어져 사는데 주민들의 수효는 100여 명을 넘지 않았다. 마을은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단결하는 경우는 드물다. 마을은 세력권을 형성하였으므로 단결보다는 오히려 세력권에 더 관심이 있다. 세력권 다툼이 전쟁이 되어 죽은 시체를 구워 먹는 경우도 있었다. 수백 수천 명이 단결하여 전쟁을 한다는 건 과장이다. 백인들만 보면 죽인다는 소문도 헛소문이다. 스페인 고무 채취인들이 행방불명 된 것도 괜한 두려움에 선제공격을 했다가 죽은 것 같았다. 식인종들은 그들의 영역을 해골을 나무에 매달아 표시했는데 백인들이 무시했기 때문에 죽었다.
백인들은 영역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총질을 했다. 사냥을 했고 독사나 악어들에게도 총질을 했다. 총소리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식인종들이 백인을 보면 달아났는데 백인은 달아나는 사람을 쏘아 죽였다.
세밀은 모닥불을 피우고 약 한 시간쯤 쉬다가 걸어갔는데 식인종들이 포위를 하였으나 공격은 하지 않았다. 세밀은 그날 늦게 마을에 도착했다. 원시림의 입구에 있는 마을인데 평화적인 사람들이며 세밀과 친했다. 식인종들은 세밀이 마을로 들어가자 미행을 멈췄는데 돌아가지 않고 동정을 살폈다. 세밀 일행이 마을에 들어서자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창과 활을 들고 달려 나왔다. 루이스 여사가 비명을 질렀고 심슨이 또 총을 들었으며 세밀이 심슨을 꾸짖었다. 마을 사람들은 세밀을 환영하려고 나온 것이다.
식인종 공포에 걸린 루이스 여사와 심슨은 선량한 원주민과 식인종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벌거벗고 창과 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모두 식인종으로 보였다. 추장과 세밀은 반갑게 포옹을 하고 중대한 논의를 했다. 우선 식인종과 싸움을 말려달라고 했다. 평화협정이 되면 냄비나 도끼 등 철제품을 주겠다고 했다. 두 번째는 연구소를 이 마을로 옮기겠다고 했다. 제니퍼가 수초를 채집하는데 늪지대와 연구소 거리가 멀어 불편했다. 마지막으로 퓨마 파이터를 해치지 말라고 했다. 파이터는 자기들 기른 애완동물이며 목에 빨간색 목걸이를 걸고있어 야생 퓨마와 구별 할 수 있으므로 함부로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다. 파이터는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장은 그 문제를 식인종 추장과 의논하겠다고 했다. 식인종 추장과 잘 아는 사이였고 서로 평화협정을 맺고 있었다. 추장이 식인종들에게 돌아가라고 했고 식인종들이 돌아갔으며 추장과 회담은 다음 날 열기로 했다. 추장은 세밀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백인들이 좋아하는 자라 요리를 내오고 신선한 과일과 술과 담배도 나왔다. 솥뚜껑만한 자라는 노란 알이 가득 차 있었고 고소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파이터를 염려했다. 파이터는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낯선 사람들과 개들을 피하려고 했다. 그날밤 제니퍼는 세밀과 추장과 함께 삼림으로 들어갔다. 위험했으나 말릴 수가 없었다. 불을 피웠다. 파이터를 기다렸다. 한밤중에 파이터가 나타났다. 조심스러운 파이터는 모닥불 주위를 돌아보고 위험스럽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파이터는 자기를 해치는 사람과 보호해주는 사람을 직감적으로 구별했다. 추장을 약간 경계했으나 제니퍼가 안심시키자 경계심을 풀었다. 상처는 잘 아물고 있었다. 붕대를 풀어도 될 것 같았다. 치료를 받고 음식을 얻어먹은 뒤 숲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정오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식인종 추장이 왔다. 이쪽 추장이 새 우는 소리를 내며 숲으로 갔다. 잠시 후 돌아온 추장은 협상이 성공했다고 했다.
‘나와 함께 추장을 만나러 갑시다. 혼자 가야 하고 총은 두고 가야 합니다.’
제니퍼가 반대했다. 사람을 먹는 식인종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면서 그들이 이 마을로 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항의했다. 사실상 위험했다. 세밀이 잠시 생각하더니 총을 내려놓고 냄비와 도끼를 가지고 추장을 만나러갔다. 제니퍼가 배웅을 하며 추장 몰래 호신용 소형 권총을 주었다.
삼림에서는 식인종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추장과 장로 세 사람이었다. 손을 들어 무기가 없다는 걸 표시하고 담배를 권했다. 그들에게는 살기나 적의가 없었으나 좀 어색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식인종들에게는 의심증이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종족이었으므로 자기들도 상대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세밀이 웃으며 담배를 받아들자 금방 표정이 달라졌다. 추장과 추장이 친구고 추장의 친구는 자기들의 친구라는 단순한 주장이다. 세밀이 선물한 냄비와 도끼는 그들에게 최상의 선물이다. 석기를 사용하는 그들에게 철기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식인종 추장은 가지고 온 술로 대접을 했다. 과일주인데 달콤했으나 강했다. 들닭을 구웠는데 연하고 구수했다. 맛과 멋을 알았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정성을 다했다.
‘좋아요. 우리 영토에서 약초를 캐시오. 사냥도 하시오. 퓨마를 봤는데 당신이 기르는 것입니까?’
식인종들에게는 퓨마를 기른다는 것이 신기했다.
‘좋아요, 우리는 퓨마를 해치지 않겠소.’
하기는, 원주민들은 재규어사냥은 해도 퓨마는 잡지 않았다.
‘못된 재규어는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지만 퓨마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도 퓨마를 해치지 않아요.’
이제는 파이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재규어가 죽었으므로 천적이 사라졌다. 그 원시림은 재규어와 퓨마의 서식 한계선이다. 루이사 여사는 자금을 더 기부하기로 했다. 제니퍼와 싸움을 포기했다. 세밀도 포기했다. 불과 1주일의 체류였지만 원시림의 생활은 충격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천운이었다. 제니퍼와 세밀은 부부보다도 더 강했다.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생사를 같이 했다. 루이스 여사는 다음날 조용히 원시림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