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재미나는 수렵가(狩獵家)들
24. 수렵(狩獵) 관리인
25. 사자(獅子)와 소녀
26. 첫 대면
27. 황소 브리트
29. 사자(獅子) 킹
30. 목격(目擊)
31. 마사이족(族)
32. 질투(嫉妬)
33. 오륜가
34. 네팔의 살인귀(殺人鬼)
35. 생리기(生理期)의 범
36. 표범과 사투(死鬪)
37. 주가의 범
38. 아편 밀매자의 도망
39. 최후의 대결
40. 괴물 악어
41. 차보의 사자(獅子)
42. 마지막 대결
43. 아마존의 표범
44. 페시보드
45. 여난(女難)
23. 재미나는 수렵가들
헌터가 소속된 사페리랜드 회사 지배인과 헌터는 가끔 말다툼을 벌였다. 헌터가 싫어하는 귀족을 안내하는 일을 강요했다. 귀족 안내를 헌터가 싫어하는 걸 지배인도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시 유럽의 귀족사회에서는 아프리카 맹수사냥이 유행이었고, 살롱(객실)에 맹수 트로피가 없으면 경멸했다. 그래서 나이로비에는 세계 각국의 귀족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나이로비에서 가장 큰 사페리 회사인 사페리랜드의 좋은 고객이었다. 귀족들은 덮어놓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포수를 안내인으로 고용하는 것 또한 유행이었으므로 지배인은 다른 회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헌터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사냥터에서 짐승을 잡는 게 아니라 다른 일에 더 몰두하였으므로 직업 포수인 헌터는 귀족들의 안내를 기피했다. 헌터가 처음 안내한 프랑스 귀족은 트럭 30대를 동원하였는데 발전기, 냉장고, 목욕조까지 있었다. 천막을 치면 웬만한 마을이 되었고, 귀족이 거처하는 거대한 천막은 호텔 수준이었다. 귀족은 본국에서 데려온 요리사를 동원하여 7개 코스 정찬을 마련했고 댄스파티를 벌였다. 그들은 사냥에는 관심도 없었다. 헌터가 안내한 백작 부부는 탄약보다도 위스키와 포도주를 더 많이 싣고 왔다.
‘캡틴, 우리 집사람의 관심은 사냥이 아니라 술입니다. <가령, 오늘 잡은 사자는 굉장한 놈이니 축배를 듭시다> 라고 말하는 거죠.’
백작 부인의 충고였다. 그래서 헌터는 우선 사자를 한 마리 찾아냈다. 정말 훌륭한 갈기를 지닌 수컷이었다. 그러나 사자를 본 백작 부인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버렸고 백작은 부인에게 술을 주라고 고함을 치면서 헌터의 등 뒤에 숨어버렸다.
‘백작, 쏘아보시오. 거리가 좀 멀지만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백작은 헌터의 권유에 마지못해 총을 들었다. 술기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 손이 와들와들 떨었다. 백작은 한참 동안 겨냥을 하더니 헌터에게 말했다.
‘캡틴, 내가 만약 실수를 해서 저놈을 맞히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야, 사자가 덤벼들겠지요.’
‘뭐, 덤벼들어? 버릇없이 나에게 ….’
‘염려 마시오. 그렇게 되면 내가 쏘아죽이겠습니다.’
‘그래, 그렇구만. 그래도 자네도 실수를 한다면 ….’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백작.’
‘아니야,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어.’
백작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모험인데…, 온 파리에 소문이 퍼져나갈 큰 모험인데 …. 그러니 우선 한잔해야 되겠는 걸. 천막에 가서 우리 한잔하고 다시 오세.‘
천막에서는 그날 밤 사자 사냥의 전야제가 요란스럽게 벌어졌다. 백작 부인이 헌터에게 손수 술을 권했다. 술이 얼큰해지자 백작이 헌터의 어깨를 쳤다.
‘캡틴, 지금 막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자넨 직업 포수지?’
‘그렇지요,’
‘틀림없지. 그렇다면 내가 부탁하는 대로 해줘.’
캡틴, 자네는 내일부터 혼자 사냥터에 가서 사자나 코끼리를 잡아주게. 난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터이니. 그리고 자네가 잡아 온 짐승들을 가지고 파리에 가면 돼.
백작 부인이 손뼉을 쳤다.
‘여보, 역시 당신은 천재야. 그런 훌륭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했어.’
헌터도 그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이의가 없었다. 서툰 사냥꾼과 동행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 이튿날부터 백작은 사냥터에 나가지 않았다. 호텔처럼 호화로운 캠프에서 잡아 온 짐승고기로 요리를 해서 술을 마셨다. 헌터도 편했다. 혼자 밀림을 돌아다니다가 한두 마리 짐승을 잡아 캠프에 갖다주었다. 짐승을 잡아 캠프에 가져오면 의례히 백작 부인은 멋있는 사냥복을 입고 총을 들고 짐승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런저런 포즈로 수십 장 사진을 찍으면서도 백작 부인은
‘정말 멋있게 찍어졌을까? 총을 너무 들어 올린 것 같은데, 바보처럼 웃지 않았나?’
걱정을 했다. 그런 때면 헌터가 대답했다.
‘마담, 훌륭합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헌터를 좋아한 마담은 가끔 밀림을 산책했다. 어느 날 그들이 밀림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오고 있었을 때 초원에는 얼룩말들이 있었다. 헌터는 얼룩말무리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얼룩말 한 쌍이 교미를 하고 있었다. 귀부인에게 쑥스러운 광경이라 헌터가 등을 돌려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백작 부인이 움직이지 않고 얼룩말의 교미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도시 생활을 하는 백인들이 아프리카밀림에 오면 일상이 급격하게 변해서인지 머리가 돌아버리는 일이 가끔 일어났다. 특히 여자들이 더 심했다. 성적 방종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백작 부인도 그랬다. 나이 40이 넘은 점잖은 부인이었으나 그날은 눈에 이상한 빛을 띠고 정신없이 얼룩말을 보고 있었다.
‘캡틴, 저놈이 저렇게 커요?’
백작 부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점점 더 흥분되어갔다. 얼룩말의 동작이 빨라지자 백작 부인이 고함을 쳤다.
‘캡틴, 캡틴, 저것 봐요 저거 ….’
헌터는 아예 외면을 해버렸는데 그 태도가 부인을 더욱 도발시켰다. 부인이 갑자기 웃옷을 홀랑 벗어 던져버리고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미스터 헌터, 난 쓸쓸해요. 난 외로워요. 나는 저 얼룩말보다 더 불행한 여자예요.’
난처했다. 그래서 총을 들어 얼룩말에게 발포했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다시 두 발을 쏘았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얼룩말이 도망가도록 발밑을 쏘았다. 얼룩말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치자 부인도 뜨거운 열이 식어 도전행위를 중지했다.
‘마담 죄송합니다. 아무리 짐승이라 할지라도 저놈들이 고귀한 분의 면전에서 더러운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쫓아버렸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그 말에 부인이 이성을 되찾았다.
‘캡틴 당신은 … 좋아, 위트가 있어 좋아요. 물론 오늘 일은 백작에게 비밀로 해주겠지요?’
‘물론이죠, 마담.’
‘그렇지만 캡틴, 얼룩말들에게 미안한 일을 했어.’
그건 그랬으나 술주정꾼 백작에게 미안한 일을 안 한 것만은 다행이었다.
헌터가 도이치 남작 부부를 사냥터에 안내한 일이 있었다. 남작은 미모의 젊은 부인을 대동하였는데 병적인 의처증이 있었다. 그래서 도이치 육군 소령 출신을 고용하여 늘 부인을 감시했다. 풍문으로는 부인이 젊은 청년과 교제를 하는 걸 눈치채고는 싫어하는 부인을 강제로 아프리카로 데리고 왔다. 남작은 사냥에 취미가 없어 천막에서 늘 잠만 잤는데 부인이 사냥에 재미를 붙여 헌터를 대동하고 밀림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만 남작이 헌터를 의심하기 시작하여 소령에게 감시를 명령했다. 부인도 헌터도 소령을 싫어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감시하는 것도 싫었지만 사냥을 방해했다. 모처럼 몰아놓는 짐승을 소리를 내거나 기침을 하거나 총구 앞을 막아 사격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부인이 마지못해 좀 떨어져 있으라고 해도 남작의 명령에 따른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꾸했다. 사냥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부인이 남작에게 항의를 했다.
‘여보, 제발 저 바보 소령을 좀 치워주세요. 내일은 사자 사냥을 할 예정인데 저 바보가 따라오면 위험하답니다. 그렇지요, 헌터?’
헌터도 거짓말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사자가 숨어 있는 곳이 좁은 계곡인데 그 계곡은 두 사람 이상 걸어가기 힘든 곳입니다.’
남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령이 헌터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헌터군, 위험하든 말든 따라가겠소. 도이치 육군 소령을 모독하지 마시오.’
그 이튿날 새벽, 세 사람은 사자 계곡으로 출발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자는 없었고 대신 커다란 산돼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 부인이 그 산돼지를 잡겠다고 해서 헌터는 산돼지를 부인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훌쳐냈다. 그런데 별안간 부인이 펄펄 뛰며 고함을 질렀다.
‘헌터, 빨리 와, 빨리, 큰일 났어!’
헌터는 사자가 나온 줄 알고 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돌진했다. 헌터는 숲을 해치고 달려가다가 그만 기겁을 하고 총을 떨어뜨렸다. 남작부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순간, 헌터는 부인이 미친줄 알았으나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파했다. 부인은 죽을 힘을 다하여 자기 몸에 달라붙은 개미를 털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개미가 아니다. 사냥 개미였다. 몸이 2cm나 되고 펀치처럼 강력한 턱이 있었다. 놈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자나 호랑이도 습격하여 살을 뜯어 먹었다. 피부가 부드러운 사람고기를 특히 좋아했다. 헌터도 습격을 받아 몸을 홀라당 벗고 칼로 놈들의 머리를 밀어버렸는데 그놈들은 대가리가 잘려서도 살점을 물고 있었다. 헌터는 부인의 알몸을 꽉 껴안았다. 칼로 부인의 몸에 붙어 있는 개미를 칼로 저며냈다.
‘부인, 부인! 어디 계세요? 계시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남작에게 보고하겠소.’
부인이 헌터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손짓을 한 뒤 옷을 입었다.
‘헌터, 헌터! 당신도 보고하겠소. 숲속에서 뭘 하고 있소?’
소령이 씨근덕거리며 달려왔다.
‘여기서 두 분이 뭘 하고 계셨소?’
부인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산돼지를 놓쳐 화가 나서 이렇게 있는 거요.’
소령은 그 말을 믿지 않은 듯 부인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헌터는 가슴을 조였다. 부인이 옷을 입기에 급한 나머지 팬티를 미처 입지 못하고 돌돌 뭉쳐 손에 쥐고 등뒤에 감추고 있었다. 만약 소령이 그걸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때 신의 비호가 일어났다. 소령이 비명을 지르면서 길길이 뛰었다. 개미였다. 소령은 비명을 지르면서 옷을 벗었다. 알몸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미스터 헌터, 좀 살려주시오!’
헌터가 빙그레 웃었다.
‘소령, 이게 무슨 짓이요. 고귀한 부인 앞에서 그 꼴이 뭐요! 도이치 육군 소령의 체면을 지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남작에게 보고하겠소.’
도이치 육군 소령은 체면이 없었다. 그는 발가벗은 체 강으로 달려갔다. 그 일 이후 소령은 헌터를 원수로 여겼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때로는 결투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헌터는 좀 불안해졌다. 결투를 하겠다는 사람에게 등을 보이고 사냥을 하는 것이 위험스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헌터와 소령이 대결을 하게 되었다.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방금 지나간 듯한 코끼리 발자국을 발견하여 부인과 헌터가 뛰어갔다. 다리에 부상을 입어 약간 절름발이 소령이 뒤처졌다. 소령과 거리가 멀어져 헌터가 약간 주춤하는 사이 별안간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망쳐오는 부인과 부딪혔다. 부인은 총도 버리고 달려와서는 헌터의 목을 껴안았다. 그때 헌터는 바로 눈앞에 큰 뱀 같은 코끼리 코가 덮쳐드는 것을 보았다. 헌터가 부인을 안은 체 옆으로 뒹굴었다. 달려오던 코끼리는 관성으로 옆을 지나쳤다. 7, 8걸음 지나쳤다가 되돌아섰다. 그리고 돌진했다. 헌터도 부인을 밀쳐내고 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누운자세로 총을 발사했다. 코끼리는 앞다리를 꿇고 쓰러졌다. 헌터와 부인이 쓰러져 있는 코앞이었다.
‘헌터, 당신이 이겼어! 이겼어!’
이성을 잃어버린 듯 부인은 헌터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부인의 키스는 강렬했고 길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소령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아하, 드디어 잡았군. 부정의 증거를 잡았어!’
‘이놈 헌터! 증거를 잡았으니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테야. 도이치 육군 소령은 부정을 묵과하지 못해!’
소령이 헌터를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 얼굴에 살기가 가득했다.
‘소령, 미쳤어? 총을 거둬!’
헌터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령이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할 수 없이 헌터가 먼저 발사했다. 총탄은 소령의 총에 맞아 그 충격으로 총이 튀어 나갔다. 소령이 놀라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기습은 비겁해! 난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하겠다는 건데 ….’
‘좋아, 그럼 결투를 하지!’
헌터가 쌀쌀하게 말했다. 남작 부인의 총을 던져주며 말했다.
‘그 총을 갖고 저쪽 나무 밑으로 가시오. 서로 총을 쏘기로 합시다.’
소령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헌터의 총솜씨를 상기했다. 잡으려는 짐승의 어느 부분 어느 점까지를 겨냥하여 정확하게 맞추는 무서운 솜씨였다. 결투를 해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도이치 육군 소령이 결투를 신청해놓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자, 소령 싸웁시다. 나는 아직까지 사람을 죽여본 일은 없지만 이젠 할 수 없소.’
소령의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무슨 말인지 혼자 중얼거리며 총을 들었다. 그리고 한두 발 걸었다. 그러다가 멈췄다. 돌아다봤다. 애원의 표정이 역력했으나 헌터는 냉혹했다. 맹수를 향한 차디찬 표정이었다.
(아차, 이 사나이는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소령이 부인 쪽을 봤다. 부인의 표정에는 경멸과 연민이 교차되고 있었다.
‘마담, 저는 말하자면 ….’
소령이 중얼거리며 부인의 동정을 사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말이 막혔다.
‘마담, 난 그저 남작께서 너무 엄하게 지시를 하셨기 때문에 임무가 좀 지나쳤습니다.’
부인이 비꼬듯 대꾸했다.
‘그래요. 내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으니까 그대로 보고하세요. 만약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 ….’
죽는다는 말에 소령이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마담, 나는 부인의 부정을 목격한 일이 없습니다. 부인이 깨끗한 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아까는 그만 제정신이 좀 돌아서 …. 아시다시피 더위가 이렇게 심하면 머리도 도는 법이지요.’
‘그럼, 남작에게 그렇게 보고할 것입니까?’
‘아니요, 오늘 일은 일체 보고 안 합니다. 그 건 내 자신의 창피이니까. 도이치 육군 소령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만약 제가 살아남는다면 ….’
헌터도 그제야 노기가 풀렸다.
‘소령! 만약 소령이 결투 신청을 취소한다면 나도 이의가 없소. 이런 곳에서 결투를 한다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요.’
소령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미스터 헌터! 난 결투 신청을 취소하겠소!’
도이치 육군 소령은 남작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으며 헌터는 무사히 나이로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헌터는 귀족들의 사냥 안내를 기피했다.
헌터가 나이로비에 돌아오자 큰 사건이 터져 있었다. 미모의 부인을 데리고온 영국의 부호가 사냥터에서 변사를 했다. 그들을 안내했던 백인 사냥꾼은 밀렵자 포획으로 유명한 포수였는데 그가 부인만 데리고 나이로비에 돌아와서 남편이 노이로제에 걸려 권총 자살을 했다고 보고했다. 나이로비 경찰은 그 보고에 의심을 품었다. 헌터도 의심을 했다. 사실 애초에 그 부부는 헌터에게 안내를 의뢰했으나 헌터가 그 부인을 보고 거절을 했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너무 젊고 예뻤으며 뭔가 남편에게 불만족스러운 눈치가 보였다. 나이로비 경찰은 내사를 착수, 헌터에게 현장 안내를 부탁했다. 출발 3일 후 부호가 천막을 쳤던 곳을 발견했다. 백인 안내인은 천막 부근에 시체를 매장했다고 보고했으나 없었다. 경찰들이 긴장했다. 그러나 증거를 잡아야 했다. 헌터는 천막을 중심으로 발자국을 추적했다. 발자국만으로 추적이 어려웠으나 담배꽁초나 통조림 깡통들이 발견되었다. 늙은 부호는 술만 마셨고 10여 명의 포터들도 사냥은 별로 하지 않았다고 추측되었다. 천막에는 40여 개의 술병들이 나뒹글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냥은 부인과 백인 안내인이 했다고 결론지었다. 포터들이 증언했다.
‘그렇습니다. 죽은 노신사는 술만 마셨고, 부인은 백인 안내인과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토인 한두 사람을 데리고 사냥했으나 나중에는 단둘이서만 사냥을 나갔습니다.’
‘노신사가 죽은 날은?’
‘그날은 안내인과 토인 두 사람이 먼저 사냥터에 갔다가 돌아온 뒤 오후 3시경에 세 분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헌터는 세 사람이 사냥을 갔다는 방향으로 추적을 했다. 엽총 탄피가 발견되었다. 구경이 넓은 직업 포수의 총이었다. 헌터가 경찰과 포터들을 모두 불러 모아 반경 20m 안을 철저히 수색했다. 2시간의 수색 끝에 노부호의 안경이 발견되었다. 도수가 높은 안경이라 안경을 잃었다면 물체를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얼마 전에 패인 땅을 팠더니 노부호의 시체가 나왔다. 이마에 총상이 있었다. 자살했다던 권총이 아니라 구경이 넓은 사냥용 총이었다. 더구나 뒤에서 쏜 총상이었다. 남편에게 불만이었던 부인이 안내인과 정을 통하고 남편을 밀림으로 유인하여 죽인 것이다. 결론은 그렇게 지어졌으나 범인들은 잡지 못했다. 경찰이 호텔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그 후 헌터는 또 괴상한 귀족을 안내했다. 유럽의 작은 나라 왕족이었다. 40대의 왕족은 비서와 의사를 데리고 다녔는데 의사의 처방에 의해 왕족은 하루에 열두 번씩 약을 먹었다. 의사는 자기 처방을 따르면 정력감퇴를 막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양복 포켓 가득히 약병이나 환약을 가지고 다녔다. 한 무리의 물소가 발견되자 왕족이 발사했다. 물소들이 가시덤불 속으로 도피하였는데 왕족은 자기 총탄이 물소에게 맞았다고 주장했다. 비서와 의사도 틀림없이 맞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헌터는 맞지 않았다고 했다. 맞았을 때 픽! 하고 탄환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없었다.
‘그럼 내기를 하지. 탄환이 맞았다면 헌터에게 줄 보수를 주지 않고, 맞았다면 두 배를 주겠어.’
‘좋습니다, 각하! 그렇지만 물소들이 멀리 도망을 가버려서 확인할 방법이 없어 유감입니다.’
그때 비서와 의사가 발자국을 추적하면 된다고 참견했다. 그리고 스스로 추적을 했다. 그러나 10여 미터도 못 가서 추적을 멈췄다. 뜻밖에 물소가 아니라 코뿔소가 나타났던 것이다. 가시덤불 속에서 나타난 코뿔소가 의사와 비서에게 덤벼들었다. 코뿔소는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정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조용히 있었더라면 코뿔소도 그냥 지나 가버렸을 텐데 겁쟁이 의사가 코뿔소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 그만 히스테리에 걸린 여자처럼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비명 소리에 놀라 서 있던 비서 쪽으로 달아났다. 그렇게 하면 코뿔소가 자기를 그만두고 비서에게 달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비서가 대경실색했다. 그는 위험을 감지하자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면서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꺼져!’
라고 의사에게 고함을 쳤다. 그러나 의사는 비서의 꽁무니에 붙었다. 그런데 코뿔소는 비서를 도외시하고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의사를 따라다녔다. 의사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고함소리를 듣고 헌터가 총을 들었다. 그러나 곧 총을 내렸다. 코뿔소와 의사의 간격이 불과 1m 남짓이라 발사를 할 수가 없었고, 코뿔소가 의사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뿔소는 불과 1m 정도 간격으로 의사를 쫓으면서 뿔로 의사의 엉덩이를 슬쩍슬쩍 찌르고 있었다. 코뿔소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 그 날카로운 뿔로 사람을 걷어 올려 공중으로 띄웠다가 당에 떨어진 사람을 발로 짓뭉개버린다. 그런데 코뿔소는 장난을 했다. 의사가 뛰면 자기도 뛰고, 의사가 쉬면 자기도 멈췄다. 의사가 천천히 뛰면 빨리 뛰라고 엉덩이를 뿔로 툭! 툭! 쳤다. 드디어 의사가 기진맥진하여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코뿔소는 재미없으니 어서 일어나라는 듯 옆에서 기다렸다. 그래도 의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코뿔소는 어슬렁어슬렁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헌터는 사격을 멈추고 코뿔소와 의사의 술래잡기를 구경했다. 의사가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헌터에게 돌아왔다.
‘다친 데는 없소?’
‘그놈의 코뿔소, 쏘아 죽이려다가 그만 살려주었소, 의사는 살생을 싫어하니까.’
의사도 의사지만 왕족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물소를 추격하자고 우겼다. 혼쭐이 난 의사와 비서가 건강에 해롭다고 반대했으나 왕족은 끝내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물소들은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물소들이 보이지 않았으나 헌터는 퀴퀴한 냄새로 그들이 덤불 속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좋소, 캡틴. 당신이 반대편으로 돌아가 물소를 이쪽으로 몰아주시오.’
‘각하! 물소는 위험한 맹수입니다. 그놈은 사자나 호랑이보다도 ….’
‘염려 말아요. 우리 가문은 선조 대대로 무용으로 알려진 가문이요. 그리고 나는 총을 당신만큼이나 잘 쏘아요. 그렇지, 비서?’
비서가 모기 우는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그럼. 각하!’
할 수 없었다. 헌터는 숲을 크게 우회하여 물소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물소를 왕족이 있는 곳으로 훌칠 생각은 없었다. 그 건 너무 위험했다. 총을 쏘아 큰 놈 한 마리를 잡고 나머지는 엉뚱한 방향으로 훌쳐 버릴 작전이었다. 물소들은 열서너 마리였다. 헌터가 사격 준비를 끝냈을 때 두목이 헌터를 발견했다. 헌터가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에 바람을 타고 사람 냄새를 맡았다. 두목이 대뜸 돌진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물소의 사회에서는 두목과 몇 마리만 전투에 참가하고 나머지는 피신을 하는데 오늘은 열서너 마리의 물소 떼가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다른 물소들은 헌터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두목이 달려가는 걸 보고 같이 달린 것이다. 총탄은 두 발인데 물소는 30여 개의 뿔을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헌터가 선수를 쳐서 발포했다. 되든 안 되든 재장탄을 해서 선두의 네 마리를 쓰러뜨릴 심산이었다. 첫 탄과 다음 탄에 선두의 두 놈이 꼬꾸라졌으나 물소들은 계속 달려왔다. 헌터는 뒷걸음질 치면서 재장탄을 했다. 재장탄을 마치자 물소들이 2, 3미터 앞에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헌터는 자기 정면에서 달려드는 두 녀석에게 납덩어리를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장탄을 하면서 전진했다. 두 번째 총탄을 맞은 두 마리가 쓰러지면서 공간이 트였다. 나란히 달려오던 물소들은 쓰러진 물소와 충돌을 피하려고 간격을 넓혔던 것이다. 헌터는 그 공간에 들어섰다. 그 순간 뜨거운 열기와 부연 먼지가 몸에 덮쳤고 돌풍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헌터는 몸을 동그랗게 오므려 엎드렸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물소들이 헌터의 옆을 통과한 것이다.
(살았구나!)
헌터는 한숨을 쉬었으나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헌터를 지나쳤던 물소들이 되돌아서고 있었다.
(다시 오는구나!)
헌터는 위기 속에서 침착함과 기민성을 잃지 않는 사냥꾼이었다. 네 마리의 동료를 잃고 진열을 가다듬던 물소들이 동요하였다. 맨 앞에 있던 놈이 헌터의 시선과 총을 보더니 별안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뿔사!)
당황했다. 남쪽에는 왕족이 대기하고 있었다.
‘물소가 거기로 간다!’
고함을 치고는 달려갔다. 그러나 물소와 사람의 경주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총소리가 들렸다. 단 한 방.
(왜, 한 방만 쏘았을까?)
(두 발째를 쏠 여유가 없었을까?)
헌터가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람도 물소도 없었다.
(모두 다 죽었을까?)
헌터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고함을 쳤다.
‘각하! 각하!’
아무 소리가 없어서 물소 발자국을 추적하려는 찰라 어디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 비서 녀석 어디 있나? 날 내려주지 못해!’
‘예, 각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내려드릴 테니 ….’
그들은 모두 나무 위에 있었다. 왕족은 헌터가 물소를 몰러 나간 뒤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나무 위에 있다가 물소들이 몰려오면 나무 위에서 사격을 하려고 했다.
24. 수렵관리인
헌터가 마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나이로비지구 마킨즈 지방 행정관으로 추천되었다. 마킨즈는 마궈니 지방에서 남쪽 80km 지점이었는데 영국 정부가 수렵보호지로 지정했다. 헌터는 독립생활을 하는 아이들을 두고 부인 힐라 여사와 막내딸과 아들 그리고 무른베와 그의 세 마누라들과 철도관사에 입주했다. 마킨즈는 화성암 지대로 자동차로 하루가 걸리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헌터의 집에서 그 광대한 삼림이 보였고 밤이면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침 해가 뜨면 헌터는 보호자를 순찰했다. 삼림에는 길이 없었으나 헌터가 자동차로 길을 냈다. 먼저 자동차로 순찰을 하고 이상이 발견되면 도보로 순찰했다. 물론 충실한 조수 무른베가 따라다녔는데, 이상이란 독수리가 모여든다거나 얼룩말이 혼자 돌아다닌 것을 말한다.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은 죽은 짐승이 있다는 뜻이고, 얼룩말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병에 걸렸다는 걸 의미했다. 무서운 전염병이 퍼질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헌터는 얼룩말을 사살하여 피를 뽑아 나이로비의 병원에 보냈다.
어느 날 헌터는 숲속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비실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코끼리가 지나가도록 나무 뒤에 숨었는데 코끼리는 계속 헌터에게로 다가왔다. 그래서 코끼리를 위협하여 훌쳐 버릴 생각으로 공포를 한 방 쏘았다. 그러나 코끼리는 계속 걸어왔고 아마 병이 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헌터가 총을 들어 올렸는데 쏠 필요가 없었다. 코끼리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 몸부림치더니 숨져버렸다. 헌터는 코끼리의 몸을 조사했다. 코끼리의 배에 화살이 하나 꽂혀있었다. 화살은 그 두꺼운 코끼리의 가죽을 뚫고 20cm쯤 깊이 들어갔다. 무서운 활 솜씨였다. 화살 끝에 독이 발라져 있었다.
‘부와나, 그 건 와간바족 화살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코끼리를 죽일 수 있는 부족은 와간바뿐입니다.’
무른베가 말했다. 와간바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우수한 수렵족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활을 갖고 있었으며 그 화살은 침략족인 마사이족들이 갖고 있는 물소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뚫고 방패 뒤의 사람을 죽였다. 그 화살은 나무 위의 표범을 뚫고 나무에 박혀 표범도 화살을 맞으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다고 했다. 와간바들이 화살에 바르는 독약도 강력했다. 독약은 피그미족이 잘 만들지만 와간바족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무른베, 이 코끼리를 죽인 와간바를 잡아야 해. 이놈들을 놔두면 짐승들이 멸종하겠어.’
무른베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참 뒤 말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와간바는 이 밀림을 손바닥 보 듯 잘 알고 있고, 몸놀림이 재빠르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잡으려다가 도리어 우리가 잡힐 염려가 있고요.’
헌터는 이튿날부터 토인 조수를 데리고 밀림을 수색했다. 무른베가 말한 대로였다. 와간바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의 소리도 발자국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밀림을 계속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했다. 코끼리, 코뿔소 때로는 사자들을 죽인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소리도 흔적도 없이 밀림을 돌아다니면서 밀렵을 계속하고 있었다. 헌터는 화가 났다. 마치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 헌터는 커다란 성성이 한 마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성이는 껍질이 벗겨져 있었으며 아직 몸이 따뜻했다. 와간바가 가까이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헌터가 무른베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그러나 무른베는 거부했다. 무른베가 헌터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짐승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죽이는 것 보다 그들이 우리를 죽일 확률이 더 큽니다. 그들은 정지! 손 들어! 라는 경고를 하지 않습니다. 대뜸 활을 쏘아 죽이지요.’
헌터가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단독으로라도 수색을 하겠다고 나섰다. 토인 조수와 무른베가 하는 수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헌터가 100m 즘 걸어갔을 때 흭!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화살이 헌터의 귀를 스칠 듯 지나갔다. 헌터가 재빠르게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나는 수렵관리인이다. 대항하면 총을 쏘겠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헌터가 고함을 쳤으나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용한 밀림에는 살기가 떠돌고 있었다. 무른베의 경고대로였다. 와간바는 짐승과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헌터는 나무 뒤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와간바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먼저 움직이는 쪽이 상대의 표적이 될 것이다. 밀림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계속되었다. 한 시간이 지날 무렵 아까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소리가 났다. 헌터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발포했다. 화살이 날아왔다. 헌터가 발포를 한 뒤 몸을 수그리지 않았다면 헌터의 가슴에 꽂힐 화살이었다. 이번에 날아온 화살은 아까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와간바가 어느새 장소를 이동하였다. 분명 와간바는 헌터가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고, 헌터는 와간바가 있는 곳을 모르고 있었으며 정세가 불리했다. 그러나 더 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으며 떠돌고 있었던 살기도 사라졌다. 와간바 밀렵자들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이다. 헌터는 추적을 단념했다. 그러나 헌터와 와간바의 대결은 며칠 후에 또 벌어졌다. 우연한 일이였다. 헌터가 숲속에서 자그마한 잠복소를 발견했다. 땅을 파서 사람 서너 명이 들어갈 구멍을 만들고 위에 대나무를 걸쳐서 지붕을 만들었는데 헌터는 그속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가까이 갔다. 발소리를 들은 듯 잠복소에서 네 명의 사내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이미 화살을 당기고 있었다. 총과 화살이 거의 동시에 발사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무른베가 헌터와 밀렵자들 사이로 뛰어들며 고함을 쳤다.
‘염려 말라! 이 백인은 코끼리 밀렵자다. 너희들과 같은 밀렵꾼이니 안심하라!’
그 기민한 행동이 헌터의 목숨을 살렸다. 헌터가 총구를 내리니 그들도 활을 내렸다. 헌터는 와간바의 말로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사냥이 잘 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와간바의 말을 할 줄 아는 백인을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표범 한 마리와 물소 한 마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헌터가 그들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들은 담배를 받고 경계심을 풀었다.
‘백인 양반, 조심해야 돼. 최근에 고약한 수렵관리관이 와서 돌아다니니까. 그놈을 총을 잘 쏴. 아주 잘 쏴. 이것 봐.’
그들의 두목쯤 되는 노인이 모자를 벗어 보여주었다. 성성이 가죽으로 만든 모자에 총구멍이 났다.
‘며칠 전에 그놈과 싸웠는데 내가 그놈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한 술책으로 이 모자를 벗어 숲속에 던졌지요. 그놈의 총에 맞은 자국이요. 무서운 놈이었소.’
헌터가 웃었다. 노인의 술책에 넘어간 것이 스스로 우스웠다. 헌터가 두목 노인과 사냥 얘기를 했는데 이내 그 노인이 매우 숙련된 사냥꾼임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동물들의 습성을 헌터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와간바의 노인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였으나 몸이 근육질이었고 눈이 번쩍였다. 노인은 몸에 무수한 상처가 있었는데 사자, 표범, 물소, 코뿔소 등 모든 동물들이 한 번씩은 자기 몸에 상처를 냈노라고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몸에 상처를 낸 놈들은 한 놈도 살아나지 못했어.’
헌터는 노인의 말을 믿었다. 며칠 전에 헌터 자신을 희롱했던 솜씨로 봐서 노인에게 이길 짐승은 없을 것 같았다. 노인도 헌터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그는 헌터에게 영양을 한 마리 잡아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헌터가 노인을 따라갔다. 그리고 놀랐다. 노인과 그 부하들은 표범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들은 바람같이 밀림을 달렸다. 그들이 넓은 공터를 지나갔는데 코뿔소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저 미련한 놈을 잡아주리다.’
헌터가 코뿔소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좋소. 그럼 위협만 하지요.’
그들이 독을 묻힌 화살 대신 보통 화살을 꺼내 들었다. 헌터가 만류했다.
‘그럼, 훌쳐 버립시다.’
노인은 별로 힘들지 않게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코뿔소의 뿔에 명중했으며 코뿔소는 그 충격으로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잠시 후 피거품을 뿜으면서 숲속으로 도망쳤다. 헌터도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무서운 밀렵자들이었다. 그들은 활과 칼, 그리고 불을 일으키는 나무 조각만 가지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솜씨로 봐서 맹수에게 죽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노인이 헌터에게 사냥 방법을 물었다. 헌터는 백인의 사냥법을 말했다. 노인은 헌터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긴장했다. 헌터도 눈치를 챘다.
‘왜 그래, 노인 친구?’
헌터를 빤히 보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보통 사냥꾼이 아니야. 동물을 그렇게 잘 아는 사냥꾼은 별로 없어. 그리고 당신은 밀렵자도 아니야. 밀렵자는 그런 사냥을 하지 않아. 밀렵자는 동물을 마구 잡아 죽이고 팔아먹는 사람인데, 당신은 수렵관리인이야. 전에 나와 싸웠던 바로 그 사람!’
헌터가 사실을 고백했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가 됐어. 나는 당신을 잡지 않을 거요.’
헌터는 노인에게 자기 임무를 설명해주고 코끼리와 코뿔소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노인이 웃었다.
‘알았소, 코끼리와 코뿔소는 당신 것이요. 다른 짐승은 내 것이요.’
정부는 모든 수렵을 관리하기 때문에 노인의 주장은 틀린 말이었다. 그러나 헌터는 노인의 주장을 정면 반대하지 않고 다른 짐승도 가족의 식량을 위해 몇 마리씩 잡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나 팔려고 잡는 것은 안 된다고 노인을 설득했다. 그리고 두 사나이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와간바의 노인은 약속을 지켰다. 헌터와 노인이 다시 만난 것은 몇 달 후였다. 헌터는 무른베와 함께 백인 밀렵자를 수색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조인 밀렵자들은 뿔을 얻기 위해 코뿔소 열세 마리를 죽였다. 내버려 두면 그들은 그들의 륙색이 가득 찰 때까지 밀렵을 할 것이다. 전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뛰어갔는데 코뿔소가 죽어있었고 뿔은 없었다. 헌터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밀렵자들을 수색할 생각으로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큰 바위를 넘는데 화살이 날아와 헌터의 발밑에 박혔다. 와간바 노인었다. 노인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기어 왔다. 백인 밀렵자들 중에는 탈옥수가 있었고 그들은 헌터의 추적을 눈치채고 높은 곳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로 올라가면 밀렵자들의 저격을 받게 되므로 멀리 돌아서 뒤로 접근하라고 충고했다. 돌아서 가보니 밀렵자들이 나무 뒤에 숨어서 총을 겨누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총을 버려라!’
헌터는 유효사거리까지 접근하여 고함을 쳤다. 등 뒤에서 기습을 당한 밀렵자들은 당황했다. 젊은 두 놈은 체념하고 총을 버렸으나 탈옥범은 뒤돌아서면서 총을 겨냥했다. 순간 헌터가 발포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차마 사람을 쏠 수 없어 총신을 겨냥했다. 탄환이 총신에 맞고 탈옥범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버렸다. 중년의 탈옥범이 손을 들었다.
‘신사 여러분, 이렇게 내 구역에 오신 손님을 거칠게 대접해서 미안하오. 나는 밀림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할 생각은 없소. 여러분들이 신사적으로 대해주신다면 ….’
수렵관리인의 차가운 인사였다. 밀렵자들은 바위 뒤에서 나온 사람이 단둘이란 것을 보자 어리둥절했다.
(두 명 정도라면 ….)
눈신호가 오갔다.
‘왜 이래요. 우리는 관광 온 사람인데.’
시치미를 뗐다.
‘당신네들은 코뿔소를 마구 죽였소.’
‘우린 코뿔소를 죽이지 않았소. 증거가 있소?’
‘그 말은 재판소에서 하고 수갑을 받으시오.’
‘수갑? 무슨 권리로 우리를 구속하겠다는 거요. 증거를 대시오.’
분위기가 험악해졌으며 밀렵자들이 반항을 할 기세였다.
그때 와간바 노인과 부하 서너 명이 나타났다. 노인은 백인 밀렵자들이 코뿔소를 죽이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활을 들어 언제든지 쏠 자세를 했다. 수렵관리인과 와간바가 한 패인 걸 알자 밀렵자들은 기가 죽어 순순히 수갑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밀렵자들이 죽인 코뿔소시체를 보며 헌터가 노인에게 말했다.
‘저 시체를 그냥 둘 수 없으니 당신들이 처리해주시오.’
헌터와 약속에 따라 오래도록 큰 짐승고기 맛을 보지 못했던 노인에게 선심을 썼다. 와간바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헌터가 체포한 밀렵자들은 법정에서 징역형을 받고 탈옥범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백인 밀렵자들 중에서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악질이 있었다. 치타를 죽인 박스라는 포수였다. 감찰 포수였으나 수렵 금지된 치타사냥을 했다. 치타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었으나 온순하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박스는 치타를 사냥하여 껍질을 비싼 값에 팔다가 헌터에게 잡혔다.
‘치타가 습격하여 정당방위였다.’
고 주장하여 무죄를 받았다. 헌터는 계속 박스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박스가 밀림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얻었다. 박스가 와간바 마을에 와서 몰이꾼을 모집했다는 정보였다. 헌터는 와간바 마을을 방문하여 노인을 만났고 박스가 채용한 몰이꾼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버렸다. 며칠 후 박스가 치타 두 마리를 잡았다고 몰이꾼들이 알려주었다. 헌터가 출동하여 치타껍질을 차에 싣고 있던 박스를 만났다.
‘미스터 박스, 이번엔 유죄를 받아야겠소.’
꽃무늬처럼 아름다운 치타껍질을 만지면서 헌터가 말했다.
‘천만에, 이놈의 치타는 나만 보면 덤벼든단 말이요. 나하고 웬수 진 일도 없는데. 그래서 부득이 쐈소.’
박스는 이번에도 변호사를 내세워 정당방위라고 우겼다. 헌터가 몰이꾼을 증인으로 증언했으나
‘토인 같은 미개인은 증언 가치가 없다.’
고 반박했다. 헌터는 치타의 몸에서 뽑은 총탄을 제시했고, 과학연구소의 감정서를 제출했다. 치타가 덤벼들어 정당방위라는 거짓말도 13m 정도의 원거리 사격이었다는 증거도 제시했다. 이번에는 변호사의 웅변도 통하지 않았다. 박스는 막대한 벌금을 물었으나 실형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치타사냥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헌터의 관할지역이 아니었는데 그 게 불행이었다. 헌터의 관할지역에서는 동물이 보호받고 있었으므로 사람을 습격하지 않았으나 다른 지역은 사정이 달랐다. 박스는 와치리라는 지역에 잠입했다. 와치리는 바위가 많고 물도 없어 동물들이 살지 않았다. 박스는 수렵보호지역이라는 말만 듣고 동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몇 시간을 돌아다녔으나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고 보이는 것은 뱀뿐이었다.
‘야, 박스. 치타는 없어. 돌아가자.’
‘안 돼. 이곳은 수렵보호지란 말야. 틀림없이 있어.’
그날 오후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거야 이거. 틀림없이 치타발자국이야.’
그들이 치타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은 표범이었다. 박스 일행이 300미터나 따라갔을 때 발자국이 사라졌다.
‘박스, 이상한데. 발자국이 사라졌어.’
‘… ?’
박스가 불안하게 주위를 돌아보고 있을 때 주변 나무 위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박스가 그 소리를 듣고 그쪽을 향했을 때는 이미 일행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 위에서 밀렵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표범이 일행을 덮쳐 앞발로 얼굴을 할키고 목줄을 물었다. 목의 동맥이 끊겨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런데 하도 순식간의 일이라 박스는 멍! 하고 서 있기만 했다. 온순한 치타를 사냥했던 그는 표범의 이런 공격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정신을 잃고 있었던 박스는 표범이 목줄을 놓고 자기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발포를 했다. 산탄총이었기에 총탄이 표범에게 맞았다. 표범은 마치 시계의 태엽이 풀리는 듯 앙칼진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길길히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뛰어오르는 그대로 박스에게 덮쳤다. 제 2탄을 쏠 여유가 없어 표범과 같이 뒹굴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표범의 목을 쥐고 졸랐다. 표범은 앞발로 박스의 얼굴을 마구 할켰으나 중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목줄이 눌려 힘이 빠져 죽었다. 일행은 목줄이 끊기고 동맥이 드러나고 얼굴은 형태도 없었다. 박스는 일행의 시체를 업었으나 몇 발자국 걷다가 쓰러졌다. 그 자신도 출혈이 심해 힘이 빠졌고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박스는 방향을 알지 못해 그냥 일직선으로 걸었으나 걸어도 걸어3도 밀림이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고함쳤으나 그 밀림에서 그를 살려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박스는 기진맥진하여 나무 밑에 쓰러졌다. 박스 일행의 실종 소식은 그 이튿날 헌터에게 보고되었다. 헌터는 무른베와 함께 수색에 나섰다. 와치 삼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우선 가장 높은 지대에 올라가 삼림을 살폈다. 무른베가 헌터의 등을 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독수리 떼들이었다.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부와나, 사고가 났지요?’
‘그래, 그런 것 같아. 빨리 가보자.’
현지에 도착하자 헌터는 몸서리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10m나 되는 금사(뱀)가 다뱅이를 틀면서 뭔가를 삼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뱀의 아가리에 사람의 다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사람의 상체는 이미 뱀의 몸속에 들어가 버렸고. 더 기괴한 일은 뱀이 사람을 삼키고 있는 곳에서 불과 5, 6m 떨어진 곳에 표범 한 마리가 죽어있었고, 표범 옆에는 온통 피범벅이 된 사내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무른베가 뱀에게 총을 쏘았다. 총탄을 맞고도 뱀은 사람을 뱉어내지 않고 도망치려고 했다. 헌터와 무른베가 교대로 뱀에게 난사를 했다. 칼로 뱀의 배를 갈라 간신히 사람을 끄집어냈다.
‘부와나, 죽었어요. 이미 틀렸어요.’
자고 있는 사람은 박스였다. 그는 요란한 총소리에도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헌터가 박스를 흔들어 깨웠다. 첫마디는 물을 달라고 했다.
‘치타를 몇 마리나 잡았지?’
박스는 고개를 흔들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울다가 곧 통곡했다. 박스는 밀렵을 하지 않았다. 아예 총을 들지 않았다. 헌터는 수렵관리인 임무를 매우 유능하게 수행했고 여러 번 표창을 받았다.
헌터가 수렵관리인이 된 지 1년 만에 엉뚱한 문제가 생겼다. 헌터의 영내에서 짐승들이 너무 많이 번식을 하여 피해가 많다는 진정서가 들어왔다. 과잉보호라는 말이었다. 헌터도 그런 사실을 시인했다. 과잉 번식을 한 맹수들은 보호지의 경계선을 몰랐다. 경계선 밖으로 나가 토인의 논밭을 짓밟고, 가축 피해, 인명피해까지 생겼다. 헌터는 경계반을 3조로 편성하여 순찰을 강화했고 경계선 밖으로 나온 맹수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맹수피해 진정서는 사라졌으나 이번에는 작은 짐승의 피해가 일어났다. 하이에나와 성성이였다. 사자나 코끼리가 번화가의 깡패라면 하이에나와 성성이는 뒷골목 악당이었다. 하이에나는 밀림의 청소부로 불리우는 것처럼 썩은 고기를 먹었으나 산 짐승도 잡아먹었다. 하이에나의 피해가 격심하다는 마을에 도착한 그 날밤에 헌터는 하이에나의 준동을 목격했다. 헌터가 천막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회중전등을 들고 나와보니 전등 불빛에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이 비췄다. 커다란 황소가 등에 하이에나를 태우고 달렸다. 황소는 공포로 눈이 뒤집어졌으며 등에 탄 하이에나는 황소를 물어뜯고 있었다. 네 다리가 못질을 한 것처럼 황소의 배에 박혀있고 여나문 마리의 하이에나가 황소를 쫓고 있었다. 헌터는 황소 등에 탈 수 있는 동물은 표범이나 사자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고 당황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큰 동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애송이 깡패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는 황소에게 화가 났지만 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하이에나에게 증오심이 일어났다. 헌터는 황소를 따라갔다. 100m쯤에 조그마한 초원이 있었다. 거기에서 황소의 우엉! 우엉! 하는 울음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곳에 전등을 비췄더니 황소가 넘어져 있었고 열 마리가 넘는 하이에나들이 숨도 끊어지지 않은 황소를 뜯어먹고 있었다. 아가리를 크게 벌려 고기를 한입 물고는 대가리를 흔들어 뜯었다. 하이에나 힘이 센 줄은 알고 있었으나 제 몸뚱이만 한 고깃덩이를 뜯어내는 걸 보고는 헌터도 놀랐다. 고기를 뭉텅뭉텅 잘라내서 거의 씹지도 않고 삼키던 하이에나들이 잔치판에 뛰어든 헌터에게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전투태세를 갖춘 놈들도 있었다.
(이 버릇없는 것들!)
헌터가 덩달아 두 발을 쏘아 전투태세를 갖춘 놈들을 쏘았고 앞으로 전진하며 재장탄을 했다. 간사한 놈들이라 후퇴를 하면 달려들 위험이 있었다. 하이에나들이 헌터의 기세에 눌렸다. 단 한 사람이지만 사자와 같이 용감한 적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다음 총탄으로 또 두 마리가 쓰러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이에나의 산개 전술이다.
(나리, 그것은 우리가 잡은 것이지만 나리께서 먼저 잡수시지요. 그리고 저희들에게도 좀 남겨주십시오.)
총소리를 듣고 무른베와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로부터 하이에나의 극악무도한 행패를 들었다. 하이에나는 소 여섯 마리, 돼지 네 마리, 닭 100여 마리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두 명이 희생되었다는 말이었다. 네 살 된 어린이와 여든두 살의 노인이었다.
‘할머니는 자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집 밖에 멍석을 펴놓고 자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놈들이 덮쳤다. 열서너 마리나 되는 놈들이 부근에 사람이 있었는데도 할머니를 물고갔어요,’
몇 분 후에 마을 사람들이 쫓아갔을 때는 할머니의 머리칼과 굵은 뼈만 남아 있었다. 하이에나가 사람을 잡아먹게 된 데는 토인들의 잘못도 있었다. 토인들은 온갖 쓰레기를 밀림에 버렸다. 밀림에 버린 쓰레기는 독수리, 개미, 하이에나들이 깨끗이 청소를 했다. 그런데 그 쓰레기에는 사람의 시체도 있었다. 사람이 병들어 죽으면 그렇게 장사를 치뤘다.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하이에나가 사람고기 맛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살인의 원인이 된 것이다. 헌터는 그곳에 적어도 200 마리 이상 하이에나가 있다고 말했다. 먼저 손쉬운 방법으로 병든 돼지를 한 마리 잡아 하루 종일 햇볕에 두었다가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사격의 방해물이 없는 들판에 던져두고 무른베와 함께 부근에 잠복했다. 한 시간도 못 되어 열서너 마리의 하이에나가 모여들어 돼지고기를 뜯었다. 연사를 했다. 7연발의 총탄을 다 쏘고 재장탄을 했는데 하이에나들이 다 도망쳐버렸다. 일곱 마리의 시체를 남겨두고. 이 방법으로 30마리를 죽였는데 돼지고기를 던져두어도 하이에나가 눈치를 채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는 독살 방법을 썼다. 독살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하이에나에게는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 노인이 한 사람 죽었다. 하이에나에게 물려 죽은 할머니의 남편이었다. 친척들은 할아버지도 하이에나를 죽이는 일이라면 자기 시체를 사용해도 마누라의 복수를 위해 허락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튿날 현장에 가니 열두 마리의 하이에나가 죽었다. 토인들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으나 헌터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른베, 여기를 봐. 여기 온 하이에나는 다 죽었는데 단 한 마리는 살아서 돌아갔어. 이 발자국을 봐.’
(어째서 이 한 마리는 살아서 돌아갔을까?)
무른베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무른베, 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까짓 한 마리를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에나의 생태를 연구해보고 싶었다.
‘부와나, 이놈은 사람고기를 한 보따리 물고 가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 그런데 그 녀석은 놈이 아니라 년인 것 같아.’
한참 가다가 무른베가 말했다.
‘이 년도 독이 오른 것 같아요. 발자국이 비틀거리고 있군요.’
그때에야 헌터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하이에나 중에는 새끼를 가진 암컷이 한 마리 있었는데 암컷은 최소한 자기 배를 채우고는 새끼들을 위해서 사람의 팔을 뜯어 물고 새끼가 기다리고 있는 굴로 돌아간 것이다. 큰 고목 뿌리 밑에 하이에나의 굴이 있었다. 잡초가 무성해서 그런 것에 하이에나의 글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곳이었다. 헌터가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구멍에 접근했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전등을 비춰보니 어미 하이에나와 네 마리의 새끼들이 죽어있었다. 옆에는 사람의 팔뼈가 뒹굴고. 독살 방법으로는 오십여 마리를 잡았다. 독살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헌터는 토인들을 시켜 수십 개의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에는 썩은 고기를 미끼로 두고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를 물면 우리가 자동으로 닫혔다. 첫날에 스무 마리가 잡혔고 다음 날에도 십여 마리씩 잡혔다. 모두 100여 마리를 잡았다. 이 방법도 하이에나가 눈치를 채서 차차 수확이 줄었으나 그 후부터는 하이에나가 잡히지 않았다. 하이에나는 멀리 도망을 간 것 같았다. 토인들은 대만족이었다. 하이에나가 없어져 안심하고 살 수 있었고, 하이에나의 고기도 한 집에 두 마리씩 배급되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하이에나의 고기는 천하진미라고 했다. 그러나 헌터는 고기 맛을 볼 용기는 없었다. 헌터는 그 마을에서 한 달가량 머문 뒤 다른 마을로 출동했다.
이번에는 성성이와 대결했다. 성성이는 사람과 같은 영장류에 속하는 동물이며 그만큼 영리했다. 성성이는 식물성이며 나무 열매, 나뭇잎, 감자, 고구마 때로는 곡물도 먹었다. 그래서 위험이 없는 동물이며 원숭이가 좀 커진 동물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 성성이는 위험한 동물이며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무서운 동물이다. 헌터가 찾은 보아 마을에서는 성성이 때문에 마을이 몰락, 아사자가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옥수수밭을 습격하고 감자밭을 짓밟았으며 때로는 가축도 죽였다. 헌터가 성성이가 짓밟은 감자밭에 가봤는데 참혹했다. 거의 삼십여 마리나 되는 성성이들이 대낮에 습격을 했는데 성성이 한 마리가 5kg 정도 먹고, 또 2kg 정도 가져가고, 사방 10m 정도의 밭을 짓밟아버렸다. 또 그들은 용감하고 영리했다. 그들이 습격을 할 때 그중 몇 마리는 부근의 나무에서 망을 본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경고 소리를 내서 두목이 앞장서는데 사람들의 수가 적으면 웍! 웍! 하며 오히려 위협을 한다. 달려온 사람이 여자, 어린이, 노인 같으면 아예 상대하지도 않고. 이럴 때 성성이는 맹수다. 깡패집단으로 보면 된다. 성성이는 표범 못지않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졌다. 보야 마을의 개 일곱 마리가 성성이에게 희생당했다. 서른 마리나 되는 성성이가 쳐들어왔는데 개들은 성성이를 얕보고 덤벼들었다. 개들이 몰려오자 성성이 두목이 앞장선 개에게 덮쳤다. 대뜸 목줄을 물어 날카로운 송곳니로 동맥을 끊어버렸다. 목줄이 끊어진 개의 양다리를 잡더니 무서운 힘으로 찢어버렸다. 그 무서운 광경을 본 개들이 도망치려고 했으나 성성이들은 개들을 포위하여 두목이 했던 것처럼 개들을 처치했다. 그래서 보야 마을의 개들은 전멸했고, 돼지 두 마리와 닭 열서너 마리가 희생됐다. 옥수수밭에 방사한 돼지는 성성이가 찢어 죽였고 닭들도 털이 뽑혀 죽었다. 그러나 성성이는 돼지와 닭은 먹지 않았다. 성성이의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사람들이 달아났거나 싸움을 피했기 때문이다. 어떤 토인이 성성이들이 여자를 포위하여 여자가 하반신에 걸친 헝겊을 찢어버리고 여자를 안으려고 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여자는 자기가 포위되었으나 비명을 지르자 성성이들이 도망갔다고 변명했다.
성성이들과 사람들의 싸움은 그 이튿날 벌어졌다. 성성이들이 옥수수밭을 습격했다는 말을 듣고 헌터와 무른베가 마을 사람 10여 명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헌터 일행이 옥수수밭 가까이 가자 보초가 킥! 킥! 경고를 했다. 폭풍우를 맞은 것처럼 파도치던 옥수수밭이 한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두목이 달려 나왔다. 사람만큼 키가 큰 놈이었는데 그놈은 첫눈에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했다. 대적을 하기에 사람의 수가 너무 많고 토인들이 활을 가지고 있었다. 두목이 도피 신호를 하자 모두 옥수수대 밑을 기어 도망갔다. 헌터가 발포했다. 높은 언덕 위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두목이 쓰러졌다. 두목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으나 또 쓰러져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헌터는 전장의 사령관을 떠올렸다. 용감하고 현명한 사령관이었다. 두목이 죽자 혼란이 일어났다. 우왕좌왕,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토인들이 활을 쏘았으나 옥수수대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적 전사 여섯 마리 아군의 피해는 경상 한 사람이었다. 놀라 달아나던 성성이가 토인을 뛰어넘으면서 어깨를 할퀴었다.
‘부와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성이의 시체를 확인한 무른베가 물었다.
‘뭐가?’
‘내가 여덟 발을 쏘았고 네 마리를 잡았다고 자신하는데 부와나가 그만큼 쏘았는데 명중률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헌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25. 사자와 소녀
수렵안내인은 꽤 취했다.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가장 고급 바(Bar)였으며 나는 아까부터 취한 체하면서 안내인에게 연거푸 술을 권했다. 미리 조사해두었던 그의 경력을 인용하면서 그의 환심을 샀다. 그는 감격했다.
‘이건 정말 영광인데요. 선생님 같은 유명한 수렵가가 저 같은 안내인을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다면 뭣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바로 그 말을 나는 사흘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색은 않고 가벼운 말투로 슬쩍 물었다.
‘사실 나는 <사자의 딸>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는 데를 알고 싶은데 ….’
아주 좋은 기회를 잡아 아주 자연스럽게 얘기했지만 그 말이 나오자 안내인의 낯 빛깔이 확! 달라졌다. 붉으스레 취했던 낯빛이 창백해졌다. 입 언저리의 웃음이 얼어붙어 일그러졌다. 술잔을 든 양손도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아차! 역시 뭣인가 있구나.)
나는 아프리카 수렵계 그것도 극히 한정된 전문 수렵가들 사이에서 귓속말로 오가던 풍문을 확인하려고 나이로비에서 무려 1주일간 돌아다녔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이름난 어느 수렵안내인을 술과 돈으로 매수한 결과 그 일이라면 A. Kanebski-러시아인 늙은 수렵안내인-바로 지금 나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가 잘 알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그래서 노름판에서 사내를 만나 사흘 동안 구슬려 절대로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만든 것인데 …. 바의 조명은 희미했고 냉방시설이 잘되어 있었으나 사내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뚜렷했고 이마에 땀이 솟고 있었다. 그는 뭣인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비밀이 바로 <사자의 딸>이라는 소녀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에 대한 의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노름꾼인 그는 노름판에서 돈과 시계까지 털려 울상이 되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영국 신사가 아무런 담보도 없이 돈을 꾸어주었고 코치까지 해줘 잃었던 돈의 두 배를 따게 해줬던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영국 신사는 노름 버릇 때문에 취소되었던 수렵 안내 허가증을 찾아주었고 이틀 동안 고급 바에서 술도 사주었다. 그런데 그 은인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다가 넌지시 말했다.
‘안, 꼭 지켜야 할 비밀 같으면 말 안 해도 좋소.’
이 말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내게 바짝 다가앉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갑자기 목이 쉬어 목소리가 갈렸다.
‘킬리만자로 남쪽 C 지구 국립공원 금렵구지요. 안내는 못 해드립니다. 내 신변이 위태로워요. 아니, 이미 위태로운 상태지만 ….’
그는 떨고 있었다. 나 자신도 공포를 느꼈다.
‘고맙소.’
더 이상 공포를 주지 않으려고 일어서려는데 그는 내 소맷자락을 쥐고 귓속말로 소곤댔다.
‘거기는 당신은 물론 어떤 수렵가도 들어가지 못하는 특수지역이니, 몇 년 전 어거지로 거기 들어갔던 관광객 서너 사람은 행방불명 되었소. 아시겠소?
‘맹수 때문이요?’
안내인의 입이 야릇하게 삐뚫어졌다.
‘위험은 사자뿐만이 아니죠. 그곳은 모든 것이 위험해요. 동물, 식물, 광물 그리고 사람도. 모두 위험하지요.’
‘사람도?’
‘좌우간 거기는 가지마시오. 알았습니까?’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호텔로 돌아왔으나 쉽게 잠들지 못했다. 풍문은 아프리카 어디에서 백인 소녀가 사자와 같이 살면서 다른 짐승을 습격하고 때로는 사람도 습격한다는 말이었는데 풍문이 사실이라니 ….도무지 믿지 못할 얘기였으나 가네프스키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사자의 딸>이라는 소문은 소년소녀 소설처럼 낭만적이 얘기가 아니라 기괴하고 음산했다. 위스키의 힘으로 불러들인 잠속에서도 상체는 사자고 하체는 소녀인 괴물이 춤을 추고 있었다. 희대의 사건을 마음속에만 품고 있을 수 없었다.
(오냐, 현지로 가자.)
나는 한 번 결심하면 죽어도 해야 하는 성미다. 거기에 들어가는 허가가 안 나올 것이라지만 나는 그 허가를 얻을 자신이 있었다. 나이로비의 수렵관리관 로엘과 친한 사이였다. 이때껏 내가 부탁해서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비서실에서 대기한 서너 명의 선객(先客)을 제쳐놓고 먼저 만나주었다.
‘켓썰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오카피요, 난쟁이하마요. 백색 뱀은 어떻소?’
‘아니요. 관광허가서입니다. 킬리만자로 남쪽 C 지구.’
사교성이 풍부한 관리관이 확답을 피했다. 커피를 권한 후 비서에게 금렵구역의 허가방침을 가져오라고 하여 보여주었다. 남쪽 C 지구는 붉은 글씨로 특명지구라고 기재되었다. 사자와 맹수들이 자연 상태로 살고 있어서 수렵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렇지만 관리관, 나는 총에 대해서는 ….’
‘알고말고요. 당신의 총솜씨는 프로 포수 이상이고 사자 소굴에 던져놓아도 사자에게 잡아먹힐 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러나 그곳에 관광객을 보낼 수 있는 허가서는 사실상 내가 발급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내 명의로 되어 있지만 ….’
나는 그 말투가 좀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파이프에 담배를 천천히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럼 넌 로보트야?)
눈치가 빠른 관리관이 좀 당황한 것 같았다. 문제가 된 지역의 관리관은 프랑스인 존 브리트라고 했다. 대담무쌍하고 정확한 속사로 이름난 사냥꾼이었으며 나도 그의 명성은 들었다. 그는 맹수를 근거리에 당겨놓고 첫 탄으로 쓰러뜨린 후 두 번째 탄환으로 숨통을 끊어버린다는 소문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아주 위험한 사냥방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사냥기법을 연구해보려고 한 일도 있었다. 나이로비의 중앙 수렵관이 그를 남쪽 C 지구에 임명한 것도 그의 사냥실력과 무관하지 않다. 브리트는 수렵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흠집이 있다면 성격이 너무 강하고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그는 한 번 결정하고 선언하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았다. 그가 안 된다고 한 것 중에 C 지구에 관광객이나 수렵가를 들이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는데 중앙수렵관 로엘이 만사에는 예외가 있다고 하면서 브리트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너 명의 관광객을 C 지구에 보냈다. 그런데 사고가 나서 그 후 로엘은 브리트의 자필서명 동의서가 없으면 C 지구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해명이었다. 해명이 아니라 창피를 무릅쓴 고백이었다.
‘그곳에 갔던 미국인 관광객들이 모두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
관리관이 얼굴을 붉혔다.
‘사실이 아닙니다. 너무 과장되었어요. 맨처음 그곳에 갔던 미국인 학생은 고용한 포터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 도주했기 때문에 되돌아왔습니다. 두 번째로 그곳에 들어간 미국의 여행 잡지 기자 두 사람은 숲속에서 마사이족을 만나 겁을 먹고 도망쳐 나왔고 세 번째는 사자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총솜씨가 훌륭했으나 사자들이 캠프를 습격해서 총을 쏠 겨를 없이 바른팔을 물려 절단했다고 합니다. 그를 안내했던 안내인도 경상을 입었는데 약간 정신이상이 되었고요.’
나는 그 안내인이 바로 러시아인 가네프스키임을 직감했다. 친구인 로엘씨를 더 괴롭히기 싫어 돌아섰다. 로엘씨는 킬리만자로지구 관리인에게 나의 여행 허가 여부를 정식으로 문의했으나 예상대로 <No!>였다. 로엘씨가 나의 사냥경력과 능력을 상세히 알리고 특별고려를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고집불통의 현지 관리인 황소 브리트가 상관의 부탁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무안을 당한 로엘씨는 브리트의 콧대가 높은 것은 성격이지만 영국의 귀족이고 아프리카에서 꽤 힘을 쓰는 처가가 배경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브리트의 부인 이름이 뭐더라?’
‘아마, 시빌일 겁니다. 키가 크고 ….’
(시빌.)
나는 웃었다. 잘만하면 허가서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랑스 사내란 원래 여자에게 약한 놈들이니까.
아프리카에 건너오기 전에, 그러니까 두 달 전이지만 파리에서 중학 동창생 한 친구와 며칠 같이 지냈는데 그 친구의 동거인 리즈 달보아 부인으로부터 시빌 부인의 얘기를 들은 것이다. 리즈부인과 시빌 부인은 여고 동창생이고 결혼식에서는 서로 들러리를 서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는 아메리카 화장품회사의 프랑스 대리점을 한 리즈 부인하고 극진하게 지냈다. 오래도록 아프리카에서 산 부인은 아프리카 얘기를 시작하면 밤을 새웠다.
나는 리즈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생생한 아프리카 현지 소식을 담은 편지였는데 편지 끝에 킬리만자로 C 지구에 들어갈 허가장이 나오도록 현지 관리관 부인인 시빌 부인에게 보낼 소개장을 부탁했다. 곧 답장이 왔으며 소개장을 시빌 부인에게 보냈다. 다시 며칠 뒤 로엘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C 지구에 들어와도 좋다는 서류가 왔습니다. 조건은 자위용 무기 외에는 휴대하지 말 것, 현지 관리관의 지시를 따를 것, 한 명 이상의 포터는 안 된다는 것 등입니다.’
지프 운전사 겸, 몸종 겸, 보호관 보고에게 C 지구로 갈 준비를 명령했다. 장총은 버리고 체코제 권총을 포켓에 넣었다. 사냥용 대형권총이기 때문에 맹수 서너 마리쯤은 처치할 수 있었다.
이튿날, 1930년 3월에 나이로비를 출발했다. 보고에게 자동차 길이 그려진 정밀지도를 주었으니 나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자는 일뿐, 비몽사몽의 몽롱한 의식 속에서 상체는 사자고 하체는 여자인 괴물이 어른거렸다.
26. 첫 대면
토고에게 운전을 맡긴 지프가 사흘 후 킬리만자로에 도착했다. 그날 밤늦게 남쪽 C 지구에 들어가 지정된 방갈로에 묵었다. 아스팔트길, 자갈길, 모래길 그리고 험한 산길을 연사흘 동안 달렸기에 몸이 막대기처럼 뻣뻣했다. 방갈로에 들어서자 말자 대나무 침대에 곯아떨어졌다. 그건 잠이라고 하기보다는 혼수상태라고 하는 것이 알맞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보드라운 붓으로 얼굴에 간지럼을 태는 기분에 눈을 떴다. 원숭이였다. 갓난아기보다 작은놈이 머리맡에 앉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귀여운 모습이었고 윤기 나는 긴 털이 온몸에 덮여있었다. 얼굴은 도미노 가면 같았고 반짝이는 두 눈이 가면 속에서 반짝거렸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원숭이는 곧장 창문을 넘어 아침 안개가 자욱한 바깥으로 사라졌다. 내 방갈로는 짙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정면은 넓은 초원이었다.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두 번째의 방문객이 나타났다. 송아지만 한 영양이 천천히 그리고 수줍은 몸짓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새끼 영양은 곧장 내게 다가와 코로 내 손등을 비벼댔다. 나는 영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는데 그의 선량한 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양은 답례로 내 손등을 핥고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상상처럼 음침하고 무서운 곳이 아니라 평화롭고 조용했다. 아침 안개가 걷히자 지평선에 킬리만자로의 위용이 펼쳐졌다. 만년설에 덮힌 거봉이 눈앞에 전개됐다. 나는 방갈로를 나와 초원을 걸었다. 언덕을 넘자 대평원이 나타났다. 초록색 양탄자를 펼친 대초원에 수만 수십만 마리의 동물들이 있었다.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영양, 얼룩말, 기린, 코뿔소, 코끼리들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동물을 관찰하다가 좀 더 가까이 가려고 했을 때 또렷한 영어가 들렸다.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가면 안 됩니다.’
돌아보니 2~3m 떨어진 나무 그늘에 가냘픈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열두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칼이 이마를 가리고 토인처럼 검었다. 커다란 눈은 푸른색이었고 가냘픈 목덜미는 백인이었다. 소년은 나의 존재 따위는 무시하고 동물들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출입금지 구역이냐?’
소년이 머리를 끄덕였다.
‘틀림없지?’
‘물론이죠. 나 이상 금지구역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 금렵구의 관리관도?’
‘내 아버지? 아버지도 나만큼 몰라요.’
‘그러면, 너만 허락하면 금렵구에 들어갈 수도 있겠구나.’
‘안 됩니다.’
‘내가 이대로 들어가면 넌 아버지에게 말해서 쫓아내겠지?’
‘난 고자질은 하지 않아요.’
‘그럼 왜? 내가 동물들과 싸워 다칠까 봐?’
‘나는 아저씨가 총을 잘 쏘는 사냥꾼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허리에 찬 권총도 보통 총이 아니란 것도 알고요.’
‘나는 동물을 함부로 죽이는 사냥꾼이 아냐. 난 동물들과 친해지고 싶은 거야.’
‘동물들은 아저씨를 환영하지 않아요. 동물들에게는 지금이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아요.’
소년의 말은 단호했으며 나는 더 이상 금렵구에 들어가겠다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내가 실망하는 표정을 알고 동정하는 말로 달랬다.
‘미스터 켓셀, 실망하지 말아요. 기회를 봐서 내가 안내할 테니 ….’
나는 놀랐다.
‘너, 어떻게 내 이름을 … ?’
‘이름뿐만 아니지요. 난 아저씨가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아요. 니코라스와 신뻬린이 보고해주었어요.’
(니코라스, 신뻬린?)
‘원숭이와 영양입니다. 아까 인사를 했다면서요? 둘 다 내 친구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 이름까지?’
소년이 웃었다. 여성적인 웃음이었다.
‘이름은 보고에게서 들었습니다. 아저씨 운전사.’
‘보고가? 보고는 주인 얘기는 안 할 텐데 ….’
‘바보! 보고는 영어로는 얘기를 안 하지요. 토인 말로는 잘해요.’
‘토인 말을 하니?’
‘보고는 기구유족인데 난 기구유 말도 하고, 와간바 말도, 수와히리 말도 하고, 모든 토인 말을 할 줄 알아요. 그리고 동물 말도 ….’
‘동물을 잘 아느냐?’
‘모두 친구지요. 보세요, 저기 늪가에 있는 물소는 얼룩얼룩한 반점이 있지요?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반년이나 되었는데 낫지 않은 고질병입니다. 성미가 불같아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되어요.’
성질이 불같은 물소는 기분이 나쁘면 코끼리에게도 덤벼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불같은 물소가 몇 달 전에 피부병이 번져서 성질이 나 강가의 나무에 몸을 부비면서 뿔로 받고 발로 차고 미쳐 날뛰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큰 사자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사자는 배가 불러 별생각 없이 강가를 산책한 것이었으므로 물소들도 경의를 표하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는데, 그 미친 물소는 곁눈질로 사자를 힐끗 쳐다보고도 무시했다. 사자가 다가섰는데도 물소는 피하지 않았다. 둘의 거리는 20여 미터. 마침내 사자가 대노했다. 긴 갈기가 크게 흔들리고 꼬리를 쭉 뻗고 돌진했다. 사자가 공중에 도약하는 걸 보고 심술쟁이 물소가 당황하여 몸을 돌려 머리를 숙여 사자에게 맞섰다. 어처구니없는 만용이었다. 하긴 몸무게나 힘으로는 물소도 사자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싸움의 기술이다. 속도다. 사자는 매일 싸움으로 동물을 잡아 먹이로 삼는 프로선수고 물소는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아마추어 초식동물 아닌가? 바람을 차고 날아온 사자가 뿔을 내밀고 있는 물소의 머리를 앞발로 힘껏 내리쳤다. 500kg이나 되는 물소가 그 일격으로 나가떨어졌는데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떨어진 곳이 물이었다. 물소가 혼비백산하여 물속으로 줄행랑을 놓았는데 그 동작이 몇 초만 늦었으면 물소는 목줄이 끊어질 뻔했다.
‘그 후 저놈은 풀이 죽어 얌전해졌지요. 보세요. 옆에 있는 젊은 놈이 까불어도 가만히 보고만 있잖아요.’
소년의 얘기를 듣고 있는 사이에 해가 올랐다.
‘그런데 저 동물 중에는 사자나 표범 따위가 보이지 않는데 어찌 된 일이냐?’
소년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맹수들은 딴 곳에 있어요. 비밀장소에 …. 나중에 안내할게요.’
‘언제쯤 ….’
소년은 해가 올라온 것을 보고 놀라더니 내 물음에 대답 없이 가버렸다. 홱! 몸을 돌려 관목숲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방갈로에 돌아오니 원숭이가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니코라스.’
이름을 부르니 원숭이가 킥킥거리며 내 어깨로 올라왔다. 내가 내민 손바닥에 앉았다. 운전사 보고가 왔다.
‘부와나, 관리관 부인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아름다운 글씨로 <빨리 뵈었으면 한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관리사무소까지는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60평 정도의 관사는 가시덤불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맹수로부터 보호막이다. 키가 큰 금발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안경은 벗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일찍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바깥은 너무 덥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했다.
‘용서하세요. 이런 만지(蠻地)에서 살다 보니 예의를 잃어버렸답니다.’
부인은 소개를 한 리즈 달보아 부인의 얘기를 꺼냈다. 좀 당황스러웠다. 프랑스 파리 얘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닌데 ….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을 때 자동차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노크 없이 사람들이 들어왔다. 사람이라고 했지만 괴물 같았다. 절름발이 흑인은 한쪽 눈이 찌그러졌으며 몸에는 상처투성이였고 허리도 굽었다. 추악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허리의 권총에 손이 갔는데 부인이 제지했다. 부인은 그 흑인이 남편의 조수이며 키호로라는 와간바족 토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여기서 30여 년간 살고 있으며 남편과 함께 2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의 몸의 상처는 모두 맹수들과 싸움의 흔적입니다. 이젠 너무 고된 일은 못 하고 딸을 돌봐주고 있습니다.’
(딸?)
내 의아한 표장을 알아차린 부인이 해명했다.
‘우리 부부 사이에 딸이 있습니다. 13세의 파트리샤입니다. 아! 주인이 옵니다.’
‘어서 오시오!’
‘난 존 부리트입니다. 관리관이지요,’
거친 말투였으나 불쾌감을 주는 태도는 아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졌으며 손에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긴 채찍을 쥐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체구도 컸으나 행동은 민첩했다. 그는 나에게 위스키를 하겠느냐고 묻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위스키를 두 잔 들고 왔다.
‘사실은 오늘 새벽 모시러 가려고 했는데 금렵구에 수상한 통니들이 침입했다는 정보를 받고 현지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밀렵자들인가요?’
‘아니요. 오해였습니다. 마사이족이었습니다.’
마사이족이었다는 그 말투에는 마사이족은 한몫 봐준다는 뜻이 포함되는 것 같았는데 시빌 부인이 참견을 했다.
‘마사이는 동물을 죽여도 밀렵자로 간주하지 않나요?’
마사이에 대한 비꼬임과 혐오감이 묻어 있었다.
‘아니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부리트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마사이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호전적인 수렵족이다. 아프리카에는 수렵족, 농업족, 유목족, 전투족들이 있는데 마사이는 수렵족이며 전투족이다.
‘당신은 다른 부족이 금렵구에 들어오면 총을 쏘아 축출하지만 마사이에게는 관대하군요. 여기 동물을 가장 많이 죽이는데도.’
시빌 부인의 추궁이 날카로웠다. 손님이 있는데도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여보, 오늘은 큰 피해가 없었소,’
‘그래요? 피해가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보세요!’
시빌 부인이 히스테리컬하게 커튼을 걷고 들판의 하늘을 가리켰다. 독수리 떼들이 원을 그리면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대형 동물의 시체가 있다는 증거였다. 브리트가 당황했다.
‘별거 아니요. 병든 영양이나 한 마리 잡은 거겠지. 당신도 아다시피 마사이는 육식 부족이요. 식량을 하기 위한 사냥은 봐줘야지.’
부리트는 나를 보면서 보충 설명을 했다.
‘못된 밀렵자들은 백인의 앞잡이가 되어 코끼리 상아, 코뿔소 뿔을 팔기 위해 밀렵을 합니다. 사자의 껍질을 벗기고.’
이상한 부부였다. 말을 마친 부리트가 부인 곁으로 다가가더니 양팔로 우악스럽게 끌어안고 부인의 안경을 벗긴 뒤 창백한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부인은 반항을 하려고 했으나 힘에 눌려 안겼고 억센 포옹에 반항을 체념하고 남편의 두터운 품에 찰싹 붙었다.
‘여보, 파트리샤를 부릅시다. 손님에게 인사드리게.’
‘켓셀씨, 용서하세요. 저 사람은 거친 이곳 생활에 아직 적응을 못 해서 ….’
부인이 딸 파트리샤와 함께 들어왔다. 파트리샤는 목에 진주 레이스를 걸고 긴 원피스를 끌고 있었다. 우아한 의상과 단정한 몸가짐이었다.
(예쁜 소녀다!)
라고 한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파트리샤는 내가 아침에 본 야생 소년과 똑 닮았다. 가냘픈 목덜미, 푸른 눈과 짧은 머리카락은 아침에 만났던 소녀가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파트리샤입니다.’
아는 척하려다가 소녀의 예의 바르고 냉정한 인사에 점잖게 인사를 받았다.
‘미스 파트리샤. 엄마 닮아 예쁜데 ….’
시빌 부인이 미소 지었다. 어머니다운 자애 깊은 미소였다.
‘예, 고맙습니다. 나는 저 아이를 밀림의 숙녀로 키울 생각입니다. 그렇지 파트리샤!’
‘녜, 고맙습니다. 엄마.’
이 얌전한 소녀가 밀림을 뛰어다니는 야생 소년이라니. 나는 이 가족의 병적인 분위기가 숨 막힐 것 같아 작별했다.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는데 큰 나무 그늘에서 부리트가 막아섰다. 나는 2m가 넘는 키였는데 그는 나보다 30cm는 더 컸다.
‘켓셀씨, 하나만 묻겠는데 당신 차를 운전하는 친구는 토인들이 자는 방에서 자지 않고 차에서 자는 이유가 뭐요?’
항의조였다.
‘아니죠. 보고는 나와 오랫동안 여행을 했는데 도시의 호텔에서는 보고를 받아주지 않아 차에서 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현지 토인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험한 인상이 좀 풀렸다.
‘오늘 새벽 당신은 금렵구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따님이 얘기했어요?’
‘딸? 아까 나는 응접실에서 딸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애는 그런 고자질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금렵구에 간 걸 알지요? 난 거기가 금렵구인 줄 몰랐습니다. 금렵구인 줄 알았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되었나요?’
내가 화를 내자 브리트가 웃었다.
27. 황소 브리트
‘켓셀씨, 오해 마시오. 난 당신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까 새벽에 당신이 파트리샤와 금렵구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처에게 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처는 딸이 밀림을 돌아다니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알면 또 히스테리를 일으킬 것입니다.’
‘….’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왜 당신이 그것을 비밀로 해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따님을 만난 일은 우리끼리 비밀입니다. 이유는 그것뿐입니다.’
이 대답이 그를 만족시켰다.
‘켓셀씨, 당신은 시빌의 동무인 리즈 달보아 부인과 친하다고 하는데 ….’
‘정확하게 말하면 리즈부인의 비공식 남편인 화가의 친구지요. 나는 당신과 같이 사냥꾼이며 도시의 귀부인과는 사귀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묻겠는데, 리즈부인과 사귄다고 했으면 당신은 그 채찍으로 나를 칠 작정이었지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브리트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대부분 사냥 얘기였지만 얘기가 끝이 없었다. 얘기에 열중하다 보니 금렵구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나와 함께라면 금렵구는 없습니다.’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키호로가 나타났다. 브리트는 키호로가 들고 온 두 자루의 총에서 한 자루를 받아들었다. 구경이 넓고 긴 총이었으나 브리트의 커다란 손에는 마치 장난감 같았다.
‘아까 처에게 지적을 당했는데 요즘 마사이가 너무 설쳐 좀 단속을 해야겠습니다.’
총을 쥐고 밀림에 들어서자 브리트는 사람이 달라졌다. 그의 움직임은 동물과 같았다. 나무 뒤에 착 달라붙어 주위를 살피다가 바람 같이 전진했고 숲속에 납작 엎드리기도 했다. 밀림에서 일어나는 소리나 냄새도 놓치지 않았고 자신의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약 2시간 동안 밀림 속을 걸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밀생하고 자그마한 늪이 있는 곳에 이르자 우리는 큰 바위 위에 엎드렸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원숭이도 떠들지 않고 새 울음소리도 끊겼다. 5~6분 후 30~40미터 앞 나무 사이에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밀림의 무뢰한이며 앞길을 막는 것은 걸레처럼 찢어버리는 밀림의 깡패 물소들이었다. 눈이 충혈되어 살기를 띠고 있고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추격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물소들이 가까이 다가왔으나 브리트는 물소에게는 흥미가 없이 물소들의 등 너머 숲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랜 사냥 경험으로 나도 숲속에 요기가 있음을 느꼈다. 사자나 표범 같으면 요기는 한군데 몰려있는 법인데 지금의 요기는 숲 전체에 퍼져있었다. 물소들도 포위되었다고 알아차린 것 같았다. 리더가 주위를 살피더니 머리를 돌려 다른 놈을 봤다. 리더가 자신을 잃은 것이다. 앞으로 갈까? 뒤로 돌아갈까? 돌진을 할까? 리더가 머리를 숙이고 흔들었다. 돌진의 버릇이다. 그때 숲에서 창이 하나 솟아올랐다. 공격 신호다. 4~5명의 토인들이 나타났다. 온몸에 얼룩덜룩한 칠을 한 토인들이 창을 날렸다. 그중 두 개의 창이 리더의 어깨와 배를 찔렀다. 400kg이 넘는 거대한 물소가 타격으로 비실거리더니 털썩 쓰러졌다. 숲속의 토인들이 모두 몰려나와 물소에게 덤벼들었다. 물소가 토인들의 칼로 무참하게 도륙될 위기에 브리트가 공포를 한 방 쏘고 물소와 토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총구가 토인들을 향했다. 토인들은 휘두른 창을 던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토인들의 등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토인들의 등 뒤에 키호로가 나타났다. 토인들의 창이 밑으로 내려졌다. 그 바람에 물소들이 도망쳤다. 그러나 부상을 입은 물소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더니 반격을 시도했다. 물소는 엉뚱하게 브리트에게 덤볐다. 내가 권총을 빼들고 발사한 것과 동시에 브리트가 돌아서면서 발사했다. 물소에게 맞은 것이 확실한데 물소는 돌진했다. 그러나 브리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소가 돌진한 것은 뛰어오던 탄성이라는 걸 알았다. 과연 물소는 브리트의 발밑에 쓰러졌다. 브리트는 물소가 더 다가왔으면 황소처럼 물소와 육박전을 벌일 태세였다. 토인들 중에서 두목인 듯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몹시 흥분하여 브리트에게 따졌다. 입에 거품을 물고 창을 휘둘렀다. 브리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뱃속에서 올라오는 노여움을 폭발시켰다.
‘아니코!’
나쁜 놈이라는 토어(土語)였다. 길길이 날뛰던 두목이 놀란 듯 풀이 죽었다. 브리트는 분을 참지 못하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토인들은 브리트와 영양 한 마리를 잡기로 언약을 했는데 약속을 어겼다. 토인들은 변명을 하자가 나중에는 사과를 하고 끝내는 애원을 했다. 토인들은 영양을 한 마리 잡았으나 내일 벌어질 추장 생일잔치에 모자라 물소를 서너 마리 잡으려고 했노라고 애원했다. 브리트는 애원에 약했다. 죽은 물소를 추장잔치에 쓰라고 토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시빌이 내가 마사이에게는 약하다고 했는데 사실입니다. 이들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
우리는 마사이의 간청으로 초대받았다. 마을에는 영양 한 마리가 운반되어 있었는데 물소가 운반되자 환성이 터졌다. 내일 축제를 기다리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춤을 추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인사를 했고 악수를 했으며 아이들이 브리트의 어깨에 매달렸다. 아이들은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옷과 구두를 잡아당겼으며 브리트는 막느라고 애를 썼다. 그때 나는 그 아이들 사이에 아는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금렵구에 들어가지 말라>고 나에게 경고했던 소년~아니 얌전한 소녀 파트리샤였다. 놀라운 변신이었다. 남자 옷을 입은 토인 아이들과 똑같았다. 파트리샤는 아버지에게 달라붙은 아이들을 떼어내고 어깨 위로 기어 올라가 아버지의 다갈색 머리칼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야만인처럼 거친 동작이었으나 강력한 애정이 넘쳤다. 파트리샤가 흥분하여 고함을 지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나무에서 내려오듯 미끄러져 내려와 아이들 속으로 숨어버렸다.
‘저 숙녀는 좀 부끄러운가 봅니다.’
우리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방갈로로 돌아왔다. 위스키를 마시며 얘기가 시작되었다.
브리트의 부친은 아프리카에 근무하는 영국의 고급 관리였다. 브리트는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랐으며 열 살 때 이미 엽총으로 사냥을 했다. 열다섯 살 때는 이미 프로급 포수로 인정을 받았는데 부모는 사냥꾼이 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를 영국에 보내 학교에 넣으려고 했는데 그는 총 한 자루를 가지고 밀림으로 도망쳤다. 토인들은 그를 환영했다. 토인들과 어울려 살았던 그는 짐승의 습성을 잘 알았으므로 프로 포수가 되었다. 황소 브리트의 소문은 온 아프리카에 퍼졌다. 그는 상아를 얻기 위해 200여 마리의 코끼리를 죽였고 토인 마을에 팔기 위해 물소 300여 마리를 사냥했다. 사자와 표범도 100여 마리를 쏘았다. 그래서 돈을 벌었고 시빌 부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부인의 간청으로 관리가 되었으며 동물보호관이 되었다.
‘나는 동물을 잘 압니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습성도 알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동물을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알겠소?’
‘파트리샤!’
내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사냥을 하기 위해 동물의 습성을 연구했지만 그 애는 달라요. 그 아이는 동물의 친구지요,’
파트리샤는 동물의 말을 알아듣고 동물에게 말도 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엄마의 눈을 피해 동물들과 놀았는데 엄마는 그것 때문에 반 미친 상태요. 그 아이를 파리의 숙녀로 기르려고 하는데 맘대로 들판을 뛰어다니며 동물들과 어울리니 용납이 되겠소. 그래서 절름발이 키호로를 붙여두고 감시를 합니다. 오늘 새벽 당신이 금렵구에 있었다는 걸 키호로가 보고했소. 키호로는 총을 지니고 파트리샤를 미행하는데 감시가 아니라 보호지요. 내가 그 역할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상당히 취했으므로 브리트가 돌아간 뒤 침대에 누웠는데 운전수 보고가 들어왔다. 이런 경우 보고는 그냥 나가기로 되었는데 보고가 나가지 않았다. 램프에 비친 그의 얼굴에 공포가 어려있었다.
‘뭐야? 보고. 얘기해봐!’
‘부와나, 그 계집애. 파트리샤에 대한 얘기인데요.’
‘알았어. 너는 그 아이에게 내 얘기를 지껄였다지? 앞으로는 입을 다물어!’
‘아닙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고 그 아이에 대한 괴상한 소문입니다.’
‘소문? 무슨 소문인데.’
‘무서운 소문입니다. 이 부근 토인들은 다 알고 있지요. 그들은 파트리샤를 좋아하고 있지만 무서워해요.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해요.’
‘왜?’
보고는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관리인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뭣이 어째!’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누구란 소문이야?’
‘사자, 라이온이 그 애의 아버지랍니다.’
‘사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 아이는 사자와 같이 살고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동물을 사냥한답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이로비의 그 소문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임마! 그런 엉터리 같은 얘기가 어디 있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애는 동물에게 마술을 걸 줄 알아요. 오늘 새벽에 봤던 그 원숭이는 그 애 말을 알아듣고 심부름을 해요. 컵에 물을 따라 가지고 오는 것을 내 눈으로 봤어요. 그리고 그 애가 커다란 수사자하고 같이 다니는 것은 본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애가 사자 등에 타고 가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공포의 기색을 보이기 싫어 보고를 내쫓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날 밤 나는 또 상체는 사자고 하체는 소녀인 괴물의 꿈을 꾸었다. 이튿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악몽과 보고의 바보 같은 얘기를 털어버렸다. 적어도 털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래서 아무 목적도 없이 보고를 데리고 나섰다. 벌판을 지나 금렵구라고 써 붙인 게시판을 무시하고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혹시 파트리샤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밀림은 울창했다. 밑에는 60cm 정도의 잡초가 무성하고 위는 150m가 넘는 거목들이 하늘을 가렸다. 그 밀림을 얼마나 걸었을까? 아무 말 없이 따라오던 보고가 말했다.
‘부와나, 돌아갑시다. 위험해요.’
위험한 일이었다.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이런 밀림을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뒤돌아섰다. 그때 나무들 사이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사람 그림자가 움직였다.
‘누구야? 이리 나와!’
허리의 권총을 빼 들고 고함을 쳤다. 토인 두 사람이 나왔다. 권총 따위야 안중에도 없는 듯 천천히 걸어왔다. 첫눈에 마사이인 줄 알았다. 아프리카에는 엔부족, 간바족, 기구유족 등 여러 종족이 있었으나 마사이는 독특하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춤추듯 가벼웠고 임금님처럼 자존심이 넘쳤다. 머리를 치켜들고, 어깨에는 붉은 천을 걸치고, 키보다 긴 창을 들었다. 가늘었으나 날카로웠고 그들은 그 창을 30m 안에서는 어김없이 적중시켰다. 마사이는 옛 이집트인의 후손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들의 유목과 농경을 경멸하고 오로지 수렵을 천직으로 살았다. 배가 고파도 구걸은 하지 않고 약탈을 했다. 나타난 마사이는 늙은이와 젊은이였는데 둘 다 모라네(전사)다. 마사이들 중에서 사냥과 전투를 하는 무사며 귀족이다. 젊은 병사가 공을 세우면 모라네가 되는데 모라네는 무기를 연마하고 몸치장에만 전념한다. 모라네는 머리칼로 식별한다. 동아프리카의 종족은 남녀 구분 없이 대부분 머리를 박박 깎는데 다만 모라네만은 그 곱슬머리를 깎지 않으며 긴 머리를 땋아 소기름으로 붙인다. 그리고 그 위에 붉은색 진흙을 두껍게 발라 굳히는데 마치 투구처럼 된다.
보고에게 통역을 하라고 명령했다. 보고는 낯빛이 창백해지고 떨고 있었다.
‘부와나, 이 사람은 마사이입니다. 나는 기구유고요.’
아프리카의 모든 종족들은 마사이를 겁냈으며 특히 농경을 하는 기구유는 마사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린이가 울음을 멈춘다. 기구유는 수백 년간 마사이들에게 식량을 약탈당하고 집이 불살라졌으며 여자들이 잡혀갔다. 보고를 타일렀다.
‘겁내지 마라. 내가 있지 않은가. 내 권총은 7연발이야.’
보고가 나를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권총은 믿는다.
‘구아헤리(인사).’
보고가 인사를 했다. 붉은 천을 두른 마사이가 서양 양복을 입은 보고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훑어봤다.
‘구아헤리.’
내가 권총을 집어넣고 인사했다.
마사이 노인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보통 놈은 아니다.)
‘구아헤리.’
모라네들은 창을 내려 땅에 꽂고 몸을 기댔다. 보고를 통해 내가 관리인의 친구라고 말했다. 내가 이름을 물었다.
‘나는 오륜가, 젊은 친구는 올갈이다. 당신들은 여기서 뭘 하오?’
‘나는 동물을 구경하러 왔지. 너희들은 뭘 하나?’
‘가족 등의 캠프를 칠 장소를 찾고 있어. 우리가 이 밀림의 주인이야. 관리인도 그건 알고 있어.’
그런 건 나와 관계없었으나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들의 창에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피 묻은 창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노인이 웃었다.
‘도중에 표범을 만났어. 허벅다리에 창을 맞은 표범이 입으로 창을 빼고 도망갔어,’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작별을 하자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29. 사자 킹
오후 늦게 시빌 부인으로부터 정중한 만찬회 초청을 받았다. 히스테리 상태의 부인을 만나기 꺼렸으나 파트리샤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초처에 갔다. 시빌 부인은 가슴이 깊게 패인 비단 야회복을 입었다. 고독에 시달린 시빌 부인의 욕구가 이상(異常) 상태로 분출된 것 같았다. 만찬회는 영국의 상류 가정 만찬회처럼 주전자, 설탕 그릇, 우유 그릇, 포크, 나이프 등이 모두 은제였다. 브리트도 하얀 다기시드(예복)를 입고 머릿기름을 발랐다.
‘이렇게 훌륭한 자리를 ….’
시빌 부인은 나의 인사에 만족한 듯 자리를 권했다. 격식대로 하얀 의복을 입은 하인들이 시중을 들었다. 식탁 의자가 네 개였는데 하나가 비어 있었다. 시빌 부인은 빈 의자를 보면서 초조한 듯 남편의 얼굴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여보, 보면 알지 않소. 바깥은 아직 밝지 않소.’
‘곧 어두워질 것 같은데요.’
부인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손님인 나를 의식해서 억지로 웃음을 지며 말했다.
‘과자 드십시오. 영국에서 가져온 과자입니다.’
나는 그 비싼 과자보다도 물소고기를 먹었다. 어색한 만찬이었다. 셋 다 화제를 잃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시빌 부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듯 말했다.
‘난 오늘 마사이를 두 명 만났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마사이로부터 보고를 받았지요,’
브리트가 말을 받았는데 부인의 히스테리가 폭발했다.
‘그만두어요. 그만둬!.’
‘난 그들을 잘 알아요. 벌거숭이고 눈이 미친 것처럼 뒤집어진 친구들이지요. 그런 야만인들과 살아야 하니 미칠 것 같아요. 여긴 지옥이야.’
브리트가 일어섰다. 시빌 부인이 발작을 멈추었다. 부인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여보. 파트리샤가 아직도 오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불평을 해서 미안합니다.’
브리트가 얌전히 앉았다. 분위기는 조용해졌으나 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여보, 손님에게 우리들이 처음 만났을 때 얘기를 해드려요.’
‘그렇지, 그걸 얘기하지.’
브리트가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호소하는 듯한, 한탄하는 듯한 동물의 울음이 울렸다. 거리는 30m 이내였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알았다. 뱃속에서 뿜어내는 사자의 포효였다.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시빌 부인은 공포가 떠올랐고 브리트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여보, 날이 어두워졌는데 빨리 나가서 파트리샤를 찾아와요, 제발!’
‘음, 그러지. 내가 나가보지.’
브리트가 문으로 가다가 되돌아섰다. 문이 열리고 파트리샤가 들어섰다. 하양 칼라, 커프스가 달린 하늘색 옷을 입고 하얀 스타킹에 에나멜 구두를 신었다. 머리에는 하얀 리본을 묶었다. 파트리샤는 빈틈없는 숙녀의 예의로 나에게 눈인사를 하고 부모에게는 키스를 한 다음 의자에 사뿐히 앉았다.
‘자, 이제 우리 예쁜 숙녀가 오셨으니 재미나게 놉시다.’
브리트가 웃었다. 시빌 부인은 반은 웃고 반은 우는 표정으로 파트리샤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킹이 늦었습니다. 킹은 늦었으면서도 기어이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우겼지요. 킹의 소리를 들었지요?’
‘물론이지. 킹의 소리를 듣고 나는 안심했어.’
브리트가 딸의 말을 가볍게 받았는데 그게 또 부인을 미치게 했다.
‘킹, 킹이 어쨌다고?’
‘미스터 켓셀, 킹이 누군지 아십니까? 보이 프렌드도 아니고, 하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닙니다. 사자랍니다. 진짜 맹수 말입니다.’
시빌 부인이 울음을 터뜨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올 것이 왔다.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몸이 떨렸다. 소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에게 가봐요. 지금 엄마는 아빠가 필요합니다. 엄마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빠뿐이니까요.’
단호한 명령이었다. 브리트는 그 말에 따랐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는 게 무서워 집에서 나왔다. 방갈로에 돌아오니 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는 나의 지시를 받아 주변 토인 마을을 돌아다니며 파트리샤와 사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첫 번째 정보, 양치기는 재작년 무리에서 떨어진 양을 찾으러 양의 발자국을 따라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가다 보니 양의 발자국이 증발되었다.
‘… ?’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양의 발자국이 없어진 곳에서 다른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쟁반만 한 큰 발자국, 사자 발자국이었다. 핏자국도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양치기는 10m쯤 되는 바위에 커다란 사자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걸 봤다. 양치기는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노려보고 있던 사자가 눈을 껌벅거리다가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양치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자야, 사자. 사자가 양을 죽였어!’
마을에는 소동이 벌어졌다. 마을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서 다음 날 토벌대가 출동하기로 했는데 출동을 하지 못했다. 파트리샤가 나타나 토인들이 좋아하는 양주를 세 병이나 가져와서 마을 장로들에게 선물했다. 큼직한 양도 한 마리 주면서 사자 사냥을 중지하라고 했다. <그 사자는 이미 금렵구 안으로 도망갔으니 사냥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미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므로 중지할 수 없다>고 했더니 파트리샤가 차디차게 웃으면서
‘금렵구에 들어가서 사자 사냥을 하면 아버지가 절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니 할 테면 해보라.’고 했다. 그 협박에 토인들이 졌다.
두 번째 얘기는 더 이상했다. 사자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밀렵 토인이 밀림에서 그 사자를 보았다. 그 사자는 다른 사자 보다 몸집이 더 크고 갈기가 훌륭했기 때문에 잘 못 본 건 아니다라고 했다. 밀렵자들은 여덟 명이었으며 모두 와간바족 사냥 명수들이었다. 와간바는 마사이 다음으로 용맹한 부족이고 활 솜씨는 따라올 부족이 없었다. 마사이의 창과 와간바의 활은 대등하게 평가되었다. 와간바의 화살촉에는 맹독이 발라져서 코끼리가 맞아도 백 보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엄청난 크기의 사자 발자국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았다. 사자는 금렵구 동쪽 바위산으로 갔다. 그들이 바위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두목이 놀란 표정으로 발자국을 가리켰다. 발자국을 본 동료들도 크게 놀랐다. 도저히 설명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자발자국 옆에 사람 발자국이 있었으며 사자와 사람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핏자국도 없고 그렇다고 싸운 흔적도 없이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가는 게 아닌가? 토인들이 그 사태를 이해하려고 떠들었으나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 발자국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의 발자국으로 결론이 났다. 악마의 발자국은 사람의 발자국보다 작았으며 백인처럼 신을 신었다. 추적을 해야 하느냐 중단해야 하느냐 격론이 벌어졌는데 리더가 추적을 지시했다. 추적을 시작하려고 출발하려는데 등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돌아다보니 정말 악마가 있었다. 한쪽 눈이 없고 절름발이고 온몸이 상처투성이 흑인이었다. 총구가 리더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으며 여차하면 발포할 기세였다. 와간바는 그 악마를 알고 있었다. 키호로-지금은 그들 곁을 떠났지만 한때 용감무쌍한 그들의 두목이었다. 두목이 인사했다.
‘형님, 오랜만이요. 설마 우리를 쏠 생각은 아니지요?’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
키호로가 쌀쌀하게 말했다. 키호로의 냉정한 표정을 보고 와간바는 얼어붙었다.
‘키호로,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이상한 것을 발견해서 ….’
‘듣기 싫어, 여기는 금렵구야!’
‘난 금렵구에 들어온 사람은 모조리 사살할 권리를 갖고 있어. 내가 바로 발포를 하지 않는 것은 너희들이 모두 옛 친구이기 때문이야.’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어 사냥대는 사자와 사람 발자국의 의문을 풀지 못하고 돌아왔다. 돌아서는 등 뒤에서 사자의 포효가 드렸다. 휘파람 소리도 들렸으나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얘기는 더 무서운 얘기였다. 이곳의 수렵관이며 관광안내인 가네프시키가 미국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와 와간바 두 명이 조수 일을 했다. 이틀 후 미국인은 켐프를 금렵구 경계로 이전했다. 그날 밤 미국인은 경비원에게 통조림과 양주를 대접했다. 경비원이 아침에 눈을 뜨자 해장술을 권해 경비원은 대낮부터 곯아떨어졌다. 경비원이 곯아떨어지자 미국인은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총을 들고 나섰다. 불법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토인들은 상당한 보수를 받고 따라나섰다. 얼마 안 가서 사자 발자국을 발견했다. 금방 지나간 발자국이었다. 미국인들은 총에 장탄을 하고 토인들은 창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들이 추적하는 사자의 발자국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사자 발자국을 발견했다. 엄청나게 큰 발자국이었다. 토인은 큰 발자국을 알고 있었다. 토인이 <이 사자는 무서운 사자니 추적을 포기하자>고 경고했으나 백인은 웃었다. 백인은 큰 사자는 우연히 목표 사자를 가로질러 갔으므로 염려 없다고 우겼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이번에는 큰 사자가 목표 사자를 우회하는 발자국이 나타났다. 미국인들이 좀 당황했다. 큰 사자가 목표 사자가 도망치는 걸 보호하려고 추적자를 위협하는 것 같았다. 백인은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포효가 울렸다. 참지 못해 폭발하는 무서운 노호였다. 되돌아가라는 경고였다.
‘저 녀석이 우리에게 도전을 하고 있어. 미국 서부 사나이는 도전을 받으면 물러서지 않지.’
토인들이 이것은 사자의 술책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반대했으나 백인은 막무가내였다.
‘…?’
아무 일도 없었다. 사자도 노호도 없었다. 발자국을 따라갔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노호가 터졌다. 어느새 사자가 등 뒤로 돌아온 것이다. 사자의 트릭을 알고 미국인들은 기겁을 했으나 가네프스키는 대담했다. 사자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사자는 없었다. 사자에게 조롱당한 가네프스키가 자기는 그 자리에 머물고 미국인들에게 반대편으로 가라고 했다. 사자는 발견될 수밖에 없었다. 양쪽에서 협공이었다. 그러나 사자는 없었다. 가네프스키가 주변을 살폈다. 3~4백미터 아래 개울이 흐르고 양쪽에 숲이 무성했다. 사자가 좋아하는 서식지다. 가네프스키와 미국인들이 일렬횡대로 숲에 들어섰다. 토인들이 뒤따라오면서 돌멩이를 숲에 던졌다. 사자는 숨어 있다가도 돌멩이가 옆에 떨어지면 참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법인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여기도 없는 것일까?)
백인들이 실망과 안도감을 느꼈는데 그때 비극이 일어났다. 사자가 그들의 등 뒤에서 덮쳐든 것이다. 돌멩이 세례를 받고도 사람들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가만히 엎드려있다가 사람들이 지나가자 뒤에서 덮친 것이다. 사자는 앞발로 총을 든 미국인의 팔을 후려쳤고 돌아서는 가네프스키의 총도 후려쳤다. 그리고 놀라 멍하니 서 있는 미국인에게 덮쳤다. 경악한 미국인이 엉겁결에 엎드렸는데 사자는 미국인의 몸을 타 넘고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가네프스키가 허둥지둥 일어나 총을 찾아들었으나 사자는 이미 사격권을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사자에게 습격을 당한 미국인의 상처는 뼈가 드러났다.
‘그놈의 사자, 정말 신들린 놈이었나?’
가네프스키가 중얼거렸다.
네 번째 얘기는 더 황당했다. 와간바 토인들이 몰래 장치한 덫을 보려고 밀림에 들어갔다. 그들은 맹수의 습격도 습격이려니와 관리인이 두려워 몰래 행동했다. 큰 나무, 바위, 숲 등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밀림을 순회하다가 묘한 물체를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긴 것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뱀인 줄 알았으나 표범의 꼬리였다. 표범은 앞을 응시하느라고 뒤에 사람들이 있는 걸 알지 못했다.
(뭘 노리는 걸까?)
표범의 앞 4~50미터 바위 그늘에 사람이 있었다. 소녀인지 소년인지 분간이 안 가는 백인이었다.
(앗!)
토인들이 깜짝 놀라는 사이 표범이 도약했다. 단거리에서 표범을 능가할 동물은 없다. 표범의 달리기는 달리는 게 아니라 날아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표범이 아이에게 막 덮치는 순간, 큰 동물이 표범에게 덮쳤다. 갈기를 세운 사자였다. 사자가 공중에 뜬 자세로 표범에게 앞발치기 일격을 했는데 표범이 야구 방망이에 타격을 당한 야구공처럼 뱅그르르 굴러떨어졌다. 일어나자 말자 도망쳤다. 사자는 표범을 쫓지 않았다. 그까짓 표범보다 더 맛 좋은 먹을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토인들은 판단했다. 표범의 습격을 피한 아이는 사자의 밥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바위 아래서 일어난 아이는 사자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다. 강아지에게 하듯 손을 내밀면서 사자에게 다가갔다.
(미친 아이인가?)
토인들은 머리끝이 쭈뼛했다. 사자가 백인 아이의 주변을 천천히 돌더니 아이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자와 아이는 나란히 바위 뒤로 사라져버렸다.
이 얘기를 전달한 보고가 목격자들이 두 손을 하늘에 올리고 <자기들의 얘기는 거짓이 없다고 맹세했다>고 말했다. 나도 그 얘기가 사실, 적어도 근거가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토인들이 본 사자는 킹이고 아이가 파트리샤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30. 목격
늦잠을 잤다. 나를 깨운 것은 원숭이 니콜라스가 아니고 운전사 보고였다.
‘식사 준비가 됐습니다.’
‘벌써 아침밥인가?’
‘아니요, 점심밥입니다. 지금은 정오가 지났지요.’
모래를 씹는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는데 현관에서 맑은 소녀의 말이 들렸다. 들어가도 되느냐고 보고에게 묻는 소리였다.
파트리샤는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으나 어머니와 같이 있었을 때의 예의가 배어 있었다. 원숭이 니코라스는 어깨에 그리고 영양 신베린이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선생님의 체류 기간이 오늘로 끝이나 연기조치가 되어 있으니 원하는 대로 머물러도 좋다고 말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요.’
‘고맙소. 두 분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나는 좀 더 체류할 예정입니다.’
사무적인 얘기를 끝내고 말했다.
‘파트리샤,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더 머무르겠다는 거,’
‘왜 출발을 연기했지요?’
‘킹 때문이지. 나는 너와 친구 킹을 만나보고싶어. 우린 친구지? 친구의 친구는 친구고.’
‘그렇지만, 킹의 의사를 물어봐야 합니다.’
파트리샤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고에게 위스키를 한 잔 가져오라고 하면서 파트리샤에게 뭘 좀 마시라고 했다.
‘보고, 레모네이드가 있을까 몰라?’
보고는 파트리샤가 오자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다가 파트리샤가 말을 걸자 펄쩍 뛰었다. 더듬더듬
‘아가씨, 그건 없지만 소다수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소다수도 좋아. 설탕을 많이 타고 레몬을 넣어주면 …. 그래주면 내가 레모네이드를 만들지요.’
파트리샤는 칵테일을 정성들여 만들었다.
‘오늘도 금렵구에 갔나?’
‘아니요. 오전에는 어머니 곁에서 공부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불쌍해요. 내가 공부를 하면 아주 기뻐하지만 …. 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파트리샤는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수재지요. 학교 다닐 때는 늘 우등생이었고. 역사, 지리, 수학 등 뭣이든 다 잘해요. 나도 공부를 하려고 하면 잘해요. 이건 비밀이지만, 전에 제 아버지가 나를 나이로비에 보내 억지로 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나는 거기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잘했지만 밀림에 오고 싶어 못한 체했어요. 시험지에 아무것도 기입하지 않았으니까 낙제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쫓겨나 되돌아왔습니다.’
우리들은 같이 웃었다. 소녀의 깜찍한 발상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이 파트리샤의 감정에 영향을 주었다.
‘아까, 킹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지요? 보고에게 자동차 출발 준비를 시키세요. 빨리빨리!’
파트리샤는 니코라스를 어깨에서 내려 신베린의 등에 태우고 신베린의 엉덩이를 가볍게 치면서 지시했다.
‘둘 다 돌아가, 집으로 가!’
신베린이 니코라스를 등에 태우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나 혼자 같으면 걸어가는데 아저씨는 걷지 못할테니 ….’
파트리샤가 휘파람을 불며 차에 올랐다. 보고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엉거추춤 서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내가 기구유말로 말했다. 보고가 또 펄쩍 뛰었다. 공포로 일그러져 고함을 쳤다.
‘안 됩니다. 안 돼! 나는 그 밀림에 절대로 들어가기 싫어요!’
‘임마, 잔소리 말아! 넌 가자는대로 가면 돼!’
고함을 질러 보고를 제압했는데 그때 또 말썽이 일어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절름발이 키호로가 한 손으로 차를 잡고 있었다. 키호로는 관리인 브리트로부터 파트리샤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언제 어디서나 파트리샤를 따라다녔으므로 차에 동승하려고 한 것이다.
‘파트리샤, 우리 키호로도 데리고 가자. 차를 타고 싶은 거야.’
가장 불만은 보고였다. 주인의 엄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기는 했으나 밀림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운 일인데 곁에 괴상한 와간바족 한 놈이 앉아있는 것은 더 무서웠다. 와간바족은 마사이 외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무서운 부족이다. 전쟁을 좋아하고 약탈을 일삼는 부족이다. 그러나 키호로는 얌전한 기구유 따위야 별 관심이 없었지만 비밀리에 아가씨를 보호해야 하는데 정체를 드러내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인 켓셀도 불안했다. 그래서 울상이었다.
‘저 꼴 좀 보세요. 우리 속의 원숭이들 같지요?’
파트리샤가 키호로와 보고의 벌레 씹은 것 같은 표정을 보며 깔깔거렸다. 동정이 갔다.
‘키호로는 왜 저렇게 상처투성이야?’
‘모두 금렵구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금렵구로 지정했을 때 동물들에게 통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마음대로 금렵구를 지정했으나 동물들은 그걸 몰랐어요. 그래서 자기들을 보호하려는 키호로에게 덤벼들었어요.’
‘키호로, 너 얘기 좀 해봐!’
키호로의 목소리는 마치 뱃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부와나, 다리의 상처는 물소에게 물린 것이고, 허리뼈가 아스러진 건 라이노(코뿔소)가 밀어부쳐서 생겼습니다. 브리트나리가 총을 쏘지 않았다면 나는 ….’
‘얼굴의 상처는 표범의 짓인 것 같은데 ….’
‘녜, 내가 잘못 쏘았지요. 가슴팍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그 악착같은 놈이 덤벼들었습니다. 그놈은 발톱으로 나를 할퀴고 나는 칼로 그놈을 찌르고, 결국 그놈은 죽고 나는 살았습니다.’
파트리샤가 만세를 불렀다.
‘키호로는 정말 용감해요. 그렇지요, 아저씨?’
‘그래, 그러나 네 아버지는 더 용감해!’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파트리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건 달라요. 아버지는 용감한 게 아니라 잔인했어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최신제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백인들은 모두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토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동물과 싸우지만 백인들은 단순히 재미로 동물들을 죽이지요. 난 백인 사냥꾼들은 모두 싫어요!’
파트리샤는 마구 고함을 지르다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고 있는 나를 보더니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아저씨는 예외고 우리 아빠도 예외입니다. 아버지는 이제 동물을 보호하고 있으니까. 예전에는 좀 잔인한 일을 했지만 지금은 동물을 사랑합니다. 아저씨도 그렇지요?’
‘물론!’
‘우리 킹도?’
‘그럼.’
파트리샤가 바위 앞에서 차를 정지시켰다. 뒤를 따라오라고 한 뒤 숲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통과하지 못할 가시덤불로 들어갔다. 나는 가시에 옷이 찢어지며 따라갔다. 뒤를 따라오던 키호로는 사라졌다. 앞서가던 파트리샤가 멈추며 속삭였다.
‘아저씨 권총을 버려요. 내가 얘기를 할 때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말아요. 내 말을 꼭 지켜야 합니다!’
파트리샤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권총을 버리고 기다렸다. 적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더운 시기에 깊은 숲속에 홀로 서 있었다.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불덩어리처럼 타고 있었고 사방은 불붙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만에 땀을 비 오듯 흘렸고 현기증이 일어나고 경련이 일어났다. 그때 기쁨에 넘치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수많은 은방울이 한꺼번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에 응답하듯 울린 또 하나의 소리는 나를 경악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건 웃음소리였다. 분명히 웃음소리였으나 사람의 피를 말리는 무서운 소리였다. 사실 그건 웃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소리였는데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성량이 풍부한 소리와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함께 울렸다. 웃음의 합창이 끝났을 때 파트리샤가 나를 불렀다. 나는 미끄러지고 비슬거리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잔디가 자란 공터가 나타났고 가지와 잎이 방사형으로 퍼져 마치 우산을 펴놓은 것처럼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그늘 아래 파트리샤가 앉아있었고 파트리샤 옆에는 커다란 사자가 누워있었다. 털이 반짝이고 갈기가 아름다웠다. 파트리샤는 사자에게 등을 기대고 있었으며 사자의 목털을 만지작거렸다. 킹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왕의 기품이 보였다. 사자가 나를 봤다. 드르르! 목을 굴리고 꼬리를 쳤다. 눈에 누런빛이 일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공포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미친 소녀와 사자. 파트리샤가 억양 없이 낮은 소리로 명령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더 기다려요.’
파트리샤가 쥐고 있던 사자의 목털을 힘껏 잡아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용해! 킹. 저 사람은 우리의 친구야. 친구라니까, 친구!’
사자가 목털을 당기는 힘에 끌리듯 누웠다.
‘아저씨, 한 발 앞으로 나와요.’
나는 한 발 전진했다. 사자는 움직이지 않았으나 눈은 여전히 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 한 발.’
조심스럽게 또 한 발 전진했다. 파트리샤가 시키는대로 한 발 또 한 발 전진했다. 거리가 5m가 되었는데도 사자는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깜박이지도 않고 노려보는 노란 눈빛에 나는 몸이 마비되는 걸 느꼈다. 다만 기계적으로 파트리샤의 명령을 쫓을 뿐이었다. 그 순간에는 파트리샤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유일하게 사는 길이었다. 설사 미친 소녀라 하더라도 나는 계속 전진했다. 이젠 손을 내밀면 사자가 닿는 거리까지 왔다. 사자가 시선을 돌리더니 슬그머니 일어서려고 했다.
‘앉아! 킹, 앉으라니까!’
파트리샤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 소리에는 굉장한 자신과 위엄이 서렸다. 사자도 그 소리에 눌려 머리를 흔들면서 주저앉더니 아예 누워버렸다.
‘자, 여기에 손을 얹어요.’
파트리샤의 말대로 나는 손을 사자의 머리에 얹었다.
‘쓰다듬어요.’
나는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대체 무슨 짓인가?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다니? 허허! 웃었다. 긴장이 풀렸다.
‘킹은, 처음에는 아저씨를 두려워했으나 이젠 수줍어하고 있어요. 아까 일어나려고 했던 것은 수줍어서 피하려고 했던 것이야요.’
사자는 수줍어하지도 않고 머리를 나에게 밀어붙이면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이제 다 알았다는 듯 크게 하품을 하고는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이젠 됐어요. 아저씨도 친구가 됐어요.’
파트리샤도 긴장이 풀린 듯 웃었다.
‘무서웠어요?’
‘지금도 무서워.’
나는 통쾌하게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너무 높았던지 사자가 나를 나무라듯 쳐다보았다. 파트리샤가 또 목털을 잡아당겼다. 사자는 안심한 듯 앞발을 쭉 뻗고 눈을 감았다.
‘됐어요. 킹이 아저씨를 알았어요. 냄새도 음성도 모든 것을 알았어요. 뭣 보다도 아저씨가 자기를 해치지 않는 친구라는 것을 ….’
나도 안심하고 킹 옆에 앉았다. 사자는 눈을 떠 나를 빤히 보면서 점검했다. 나의 얼굴, 옷, 손을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나는 무섭지 않았다. 나는 사자의 눈에 뜬 친애감을 보았다. 킹의 눈 속에는 호기심과 더불어 강자가 약자에게 보이는 관대함이 있었다.
(이 사람아, 이제는 겁낼 것 없네.)
파트리샤는 자신의 연출에 크게 만족했다. 킹의 배에 기대 양 다리를 쭉 뻗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원시의 숲과 사자 그리고 인간. 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목털을 가볍게 당겼다. 킹은 나를 보며 입을 반쯤 벌렸다. 굵고 날카로운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봐요. 킹이 아저씨를 보고 웃고 있어요.’
나는 파트리샤의 말을 믿었다. 사자는 정말로 웃고 있었다.
‘난 아저씨를 킹에게 소개하기 위해 택일을 했어요. 오늘은 킹이 한가로운 날이고 또 맛있는 먹이를 포식해서 기분이 좋아요.’
그 소리에 나는 내 처지를 떠올렸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포식동물 옆에 앉아있다. 이 짐승의 포효에 모든 동물들이 벌벌! 떠는데.
‘파트리샤, 파트리샤는 어떻게 킹의 친구가 되었어?’
파트리샤가 한동안 침묵했다.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 있다고 판단했다.
‘듣고싶어요? 그럼 얘기를 해주겠지만 비밀입니다. 어머니는 이 비밀이 밖에 새어나가 나이로비나 파리, 런던에 퍼지면 아마 자살할 것입니다. 유력한 명문 출신의 자기 딸이 사자와 같이 어울린다는 소문 말입니다.’
‘절대로 비밀은 지키겠다.’
‘키호로가 킹을 나에게 대려다주었을 때 킹은 젓먹이였지요. 굶주림과 병 때문에 겨우 숨만 붙어있었어요.’
파트리샤는 어머니가 성장한 아이의 과거를 회상하듯 자상한 눈으로 킹을 보면서 말했다. 키호로는 아버지의 조수였는데 관리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듣고 가보니 태어난 지 이틀 정도의 새끼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째서 사자 새끼가 거기 있었을까?’
두 가지의 경우지요. 사자의 어미가 금렵구로 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을 경우, 어미가 새끼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버렸을 경우였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맞을 거예요. 처음에는 큰 쥐만 했다. 뼈와 가죽뿐 몸에는 털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가엾어서 시빌 부인이 먼저 살려보자고 제의했다. 그 제안이 나중에 치명적인 상황으로 발전하는 건 몰랐다. 당시 열 살이었던 파트리샤는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자 새끼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모의 용인 아래. 파트리샤는 형제도 친구도 없는 외톨이였기에 외롭게 자란 소녀는 사자 새끼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우유를 먹였더니 의외로 힘차게 우유병의 고무젖꼭지를 빨았다. 살아날 가능성이 보였다. 어머니의 조언대로 규칙적으로 우유를 먹이고 간식으로 오트밀도 먹였다. 사자 새끼를 품에 안고 잤다. 사자 새끼는 파트리샤의 품을 파고들었다. 사흘 후에는 피부에 기름기가 돌고 보드라운 털도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온몸에 털이 났다. 어디를 가거나 파트리샤를 졸졸 따라다녔고 손을 핥았다. 파트리샤의 열한 번째 생일에 키호로도 지켜보는 앞에서 파트리샤는 열한 개의 촛불을 껐고 사자 새끼도 한 개의 촛불을 껐다. 사자 새끼를 킹이라고 명명했고 뽀뽀를 했다. 사자 새끼는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한 달 만에 고양이만 했고 두 달에는 개만큼 컸다. 그리고 넉 달째에는 파트리샤가 등에 타도 끄떡없이 돌아다녔다. 파트리샤는 킹과 붙어살았다. 달리기도 하고 응접실에서 뒹굴었다. 이때부터 시빌 부인의 표정에 우려의 빛이 보였다. 시빌 부인이 파트리샤에게 말했다.
‘파트리샤, 내일부터는 킹을 바깥에서 재워라!’
‘엄마, 킹은 아직 새끼인데 ….’
‘아냐, 이젠 다 큰 사자야.’
킹이 바깥에서 자게 되었어도 파트리샤와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시빌 부인은 점점 우울해졌다. 다 큰 사자와 껴안고 뒹구는 꼴이 보기 싫었고 불안했다. 6개월이 되자 시빌 부인의 불안은 공포로 변했다. 킹이 어른 사자가 된 것이다. 킹은 당당한 수사자였다. 야생사자보다도 몸집이 월등하게 크고 힘도 셌다. 그러나 파트리샤에게는 어린 사자처럼 졸졸 따라다니고 파트리샤의 눈치를 봤고 파트리샤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어린 시절과는 달리 파트리샤에게 상처를 입힐 염려가 있어 밀거나 때릴 때는 각별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시빌 부인은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시빌 부인에게 킹은 다른 사자와 똑같이 보였고 위험했다. 야만인처럼 사자와 어울린다는 일 자체가 모욕이었다. 그래서 딸에게 킹하고 어울리는 걸 금지시켰다. 파트리샤는 엄마의 명령에 복종했다. 파트리샤는 킹과 놀지 않았다. 적어도 시빌 부인이 볼 수 있는 낮에는. 어느 날 시빌 부인은 밤 2시께 잠이 깨어 마당으로 산책을 나갔다. 달밤이었으므로 사자 우리에 사자가 아닌 그림자를 보고 대경실색했다. 사자가 가축을 잡아 온 것으로 여겨 키호로를 깨워 가축을 구조했는데 사자 우리에서 나온 것은 가축이 아니라 파트리샤였으므로 부인은 기절했다. 이튿날부터 시빌 부인은 남편 브리트에게 덤벼들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에 브리트도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숲에 사는 사자는 숲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시빌 부인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킹을 트럭에 태워 밀림에 방면하는 날 파트리샤는 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킹이 그냥 있지 않았다. 밀림 깊숙이 방면된 킹이 집 부근을 돌아다니면서 밤새 슬프게 울었다. 낮에는 사라졌다가 밤이 되면 되돌아왔다. 시빌 부인은 사자 소리가 들릴 때마다 히스테리가 폭발했는데 일주일이 지나자 사자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제 되었어. 우리 집에 평화가 왔어.)
시빌 부인이 기뻐했으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트리샤가 자기 몰래 밀림에 들어가 사자와 밀회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뭇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으로?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 시빌 부인이 파트리샤에게 진상을 추궁을 했으나 소녀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시빌 부인이 지쳤다. 그래서 상대가 남편으로 바뀌었다. 브리트는 표면적으로는 모른 체하였으나 딸 편이었다. 브리트는 딸도 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이를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극성스러운 부인의 히스테리에 이기지 못해 딸을 나이로비의 학교에 보내는 데 동의했다. 파트리샤는 어머니의 처사에 침묵으로 대항했다. 나이로비로 떠나던 날 파트리샤는 프랑스식 우아한 치장을 하였으나 엄마에게는 물론 아빠에게도 작별의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로비 기숙사에 들어간 뒤에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물론 공부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흥미를 보인 것은 동물학이었는데 동물학도 시험 때는 다른 학과와 마찬가지로 한 문제도 쓰지 않아 영점이었다. 학교에서 더 이상 받아드릴 수가 없어 권고 퇴학을 시켰다. 파트리샤는 킬리만자로에 돌아왔는데 돌아온 날 벌써 킹을 만났다. 킹은 1년 만에 파트리샤를 만나자 미친 듯이 날뛰며 기뻐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따라붙었다.
‘친구를 다시 찾았어요. 매일 킹과 만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요.’
‘그래도 사자가 혹시 굶주린다거나 화가 났을 때는 위험하지 않을까?’
나의 반문이 파트리샤를 화나게 만들었다.
‘아저씨, 보세요!’
소녀는 갑자기 공중에 뛰어올라 사자의 등에 떨어졌다. 그리고 두르르 굴러내렸는데 사자가 얼핏 앞발로 소녀의 몸을 잡았다. 소녀가 다시 재빨리 일어나더니 양 주먹으로 힘껏 사자의 배를 후려쳤다. 그리고 사자의 등에 올라타고 갈기를 잡아 흔들었다.
‘자, 덤벼라! 이 녀석, 덤벼!’
사자가 아픈 듯 머리를 흔들더니 옆으로 누워 소녀가 덤벼들지 못하게 앞발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큰 입을 쫙 벌렸다.
(이크, 큰일 났구나!)
난 기겁을 했다.
(키호로, 키호로. 어디 있어 키호로. 총을 쏘아!)
속으로 외쳤는데 딱 벌어진 사자의 입에서 굵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웃음이었다. 파트리샤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소녀는 계속 공격했다. 이번에는 사자도 응수를 했다. 거대한 두 앞발을 내밀어 소녀가 접근하는 것을 교묘하게 막았다. 발톱을 감춘 부드러운 앞발은 소녀의 몸을 슬금슬금 밀어내면서 자기 몸을 방어했다. 소녀는 사자의 방어에 더욱 약이 올랐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돌진했다. 사자는 앞발로 소녀의 머리를 잡을 수 없어 돌격을 허용했다. 한 덩어리가 된 사자와 소녀는 난타전을 벌였다. 소녀의 일반적인 승리였다. 이 놀이가 끝나자 소녀는 사자의 배에 기대 누웠다.
‘아저씨, 이제 킹과 접견은 끝났어요. 이후에는 킹을 겁낼 필요가 없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소녀는 나에게 돌아가는 길을 가르켜준 다음 사자의 등에 타고 사라져버렸다.
31. 마사이족
파트리샤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줄을 지어 행진하는 마사이족을 만났다. 마사이는 수렵족이므로 빈번하게 주거지를 옮겼다. 한 장소에서 사냥을 하고 살다가 사냥감이 없어지면 가재도구를 이고 이사를 했다. 집은 나무와 풀로 만들었고 가재도구라야 냄비 몇 개였으므로 그들은 수시로 이사를 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난에 시달린 표정이나 비굴한 표정은 전혀 없었고 남녀노소 모두가 자존심으로 충만한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이들처럼 마음이 풍부한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으리라. 차의 속도를 늦추고 그들 옆을 지나가면서 <구와헤리(안녕)>라고 인사를 했다. 노인과 아이들은 정답게 인사를 받았다. 차는 행렬을 앞질러 약 5km 정도 나갔다. 그때 앞 숲에서 번쩍이는 창을 봤고 마사이가 서너 명 숲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보고가 설명했다. 그들은 선발대이며 정찰을 하고, 야영 장소를 찾고, 그날 먹을 양식을 사냥한다. 모라네(전사)라고 부르는 그들은 옛날 같으면 다른 부족을 약탈하였는데 지금은 사냥만 한다. 차를 정지했다. 그리고 단신 선발대가 움직이는 숲으로 갔다. 모라네는 그물을 던지는 방식으로 동물이 있을 만한 숲을 포위한다. 차츰 포위망을 압축시켜 조여들면 포위된 동물들이 탈출을 기도하는데 그때 모라네들이 던지는 창에 잡혔다. 그날의 사냥은 포위망이 20m 이내로 압축되었으나 키가 큰 잡초와 바위 그리고 나무들이 있어 사냥에는 최악의 장소였다. 모란은 내가 접근하는 것을 봤으나 지휘자 노인-언젠가 숲에서 인시를 했던 올가루가 눈짓으로 제지하자 모두 모른 체하고 몰이에 열중했다. 올가루는 오랜 경험으로 내가 별로 환영할 사람은 아니나 적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라네가 포위한 숲에서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심상찮은 요기가 떠돌았다. 사냥꾼만은 그 요기를 느낄 수 있다. 맹수의 냄새, 맹수의 숨소리 그리고 깊은 침묵이 요기의 본질이다. 사람의 코는 냄새를 맡는데 빈약한 감각기관으로 퇴회했다. 그러나 대형 맹수가 가까이 있을 때는 희미하게나마 맹수 특유의 시큰한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맹수의 숨소리도 고막에 전달된다. 깊은 침묵이란 맹수가 있으면 새, 원숭이 등 소동물들이 모두 달아나버리기 때문에 생긴다. 나는 그때 그 요기를 느꼈다. 숲 한가운데 자그마한 바위 부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란들의 시선도 거기에 집중되었다. 모란들이 모두 일어섰다. 완전히 포위했으므로 숨을 필요가 없었다. 포위망이 압축되고 리더가 긴 창을 던졌다. 휘루르! 소리를 내며 날아간 창은 숲 가운데 떨어졌다. 일부러 위협을 하기 위해 만든 창이었다. 창이 떨어지자 부근의 숲이 파도처럼 울렁거리며 움직임이 있었다. 표범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나는 순간 아찔했다. 표범을 사냥하기에 모라네의 수가 너무 적었다. 저녁거리를 사냥하려다가 맹수를 만났다. 그러나 모라네는 표범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리더의 신호를 따라 <이어이! 이어이!> 괴성을 지르며 포위망을 압축했다. 그때 숲에서도 크윽! 하는 표범의 포효가 터졌고 표범이 뛰어올랐고 모라네의 창들이 날았다. 그러나 표범은 잽싸게 바위틈에 숨었으며 창들은 바위 위에 불꽃을 내며 떨어졌다. 표범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무공처럼 탄력있게 바위틈에서 튀어나와 모라네의 정면 즉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모라네가 표범에게 덤벼들었다. 모라네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표범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미 공중을 날던 표범이 모라네에게 덮쳤다. 모라네는 왼팔을 굽혀 내밀면서 오른손에 쥔 칼을 표범을 향해 내리쳤다. 표범의 앞발이 모라네의 왼팔을 할퀸 것과 모라네의 칼이 표범의 어깨를 친 것이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모라네와 표범이 동시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는데 일어서는 동작은 표범이 빨랐다. 늦게 일어나 싸움의 자세를 잡지 못한 모라네에게 표범이 덤볐다. 찰라, 내가 권총을 발사했다. 불과 6~7m였으므로 권총 탄환이 표범의 가슴을 뚫었다. 표범이 다시 쓰러졌고 뛰어든 모라네들에게 난도질을 당했다. 리던 올가루 노인이 고함을 쳐 난도질을 제지시켰다. 나는 얼핏 그 용감한 모라네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모라네는 진흙과 기름이 두껍게 발라진 헝겊이 둘둘 말려있었기 때문에 상처가 깊지 않았다. 모라네는 올가루 노인과 같이 있었던 오륜가였다. 오륜가는 분노에 찬 얼굴로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으나 올가루 노인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주춤했다. 그리고 차디찬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는 내가 총을 쏘아 표범을 쓰러뜨린 것이 불만이었다.
(왜? 남의 사냥을 방해했느냐?)는 태도였다. 그러나 영리한 올가루 노인은 나의 총질이 오륜가를 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짓으로 죽은 표범을 반으로 나누어 갖고 가든지 껍질을 가져가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의 손짓 몸짓을 겨우 알아차리고 다 가지라고 하고 돌아섰다. 방갈로에 돌아와 피곤하여 꿈도 꾸지 않고 잤다.
이튿날, 요란스러운 소녀의 웃음소리에 잠이 깼다.
‘빵! 빵! 빵!’
소녀는 손으로 권총 모양을 하며 고함쳤다.
‘아저씨는 권총의 명수라고 해요. 마사이는 장총을 쏘는 것은 봤으나 권총 쏘는 것은 처음 봤으며 권총이 연달아 발사되는 것을 보고 놀랐답니다. 아버지는 죽은 표범의 몸을 조사하고 세 발의 총탄이 모두 표범의 심장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고 있어요. 아저씨 권총 솜씨가 훌륭하다고 칭찬했어요.’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파트리샤, 너는 내가 표범을 죽였는데도 비난하지 않니?’
‘그건 정당방위입니다. 그리고 나는 표범이 싫어요.’
‘파트리샤, 오늘은 나에게 구경시켜줄 게 없느냐?’
파트리샤의 큰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움직이더니 자신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마사이로부터 초청이 왔어요. 마사이 마을에 갑시다. 그들은 오늘 새 정착지로 이사를 했어요.’
마사이 마을로 차를 몰았다. 키호로가 어느새 나타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금렵구 내 나무들이 없는 벌판에 올가루 노인이 새 정착지를 만들고 있었다. 마사이는 초원에 마을을 조성했고 부근에 마실 물을 확보했다. 우리들의 뒤를 보고와 키호로가 따라왔는데 마음이 심란하다고 얼굴에 씌어있었다. 보고는 마사이와 접촉을 꺼렸고 기구유는 수백 년 동안 마사이의 침략을 받았다.
‘아저씨, 보고는 겁을 먹고 있지만 키호로는 와간바며 와간바는 마사이에게 대항한 부족입니다. 마사이는 창을 잘 쓰고 와간바는 활을 잘 쏩니다. 아프리카에서 마사이에 대항하는 부족은 와간바뿐입니다. 키호로는 마사이에 겁을 먹지 않습니다. 단지 싫을 뿐입니다.’
마사이 마을에 들어서자 환영을 받았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의 백인에게만 인사를 했다. 보고는 인사 따위는 관심 없고 언제나 내 등 뒤에 섰다. 키호로는 마사이를 외면했다. 마을은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가시덤불에 둘러싸이고 지붕을 만들 소똥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코를 싸쥐었으나 파트리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사이는 영리합니다. 소똥으로 집을 만드니까요.’
서너 명의 사내들이 나뭇가지로 집의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가시덤불로 아치형 지붕을 만들었다. 올가루 노인의 지휘에 따라 남녀 모두가 달려들어 소똥을 지붕 위에 발랐다. 찐득찐득한 소똥은 강한 햇볕에 금방 말랐다. 소똥을 다시 한번 더 지붕에 발랐다.
‘2~3일 지나면 소똥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집니다. 냄새도 없어지고.’
모라네의 생활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모라네들이 소 우리에 있었다. 모두 젊고 건강했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려 뽑은 용감한 젊은이들이며 용사고 귀족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미혼입니다. 마사이의 여자는 열두서너 살 되면 시집을 가지만 몇몇은 시집을 가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장차 모라네들과 결혼할 특수층입니다. 가장 예쁘고 부지런한 귀부인들인데 모라네의 수양이 끝나기를 기다려 결혼을 합니다.’
‘수양?’
‘일종의 수도생활입니다. 잠자리, 먹는 것에서부터 엄격한 규율에 따라야 합니다. 옛날에는 창과 칼로 사자를 한 마리 죽이기 전에는 수양이 끝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완화되어 사냥에서 훌륭한 공적을 세우면 수양이 끝나지요.’
모라네는 우리들이 접근해도 모른 척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거나 당황해서는 안 되는 규율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소에게 접근해서 창끝으로 소의 목덜미에 작은 상처를 내고 피를 빨아먹었다.
‘그들은 아침에는 소피를 마시고 저녁에 우유를 마시는 것 외에 수양 기간 동안에는 어떤 것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건강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특히 오륜가의 몸은 훌륭했다. 오륜가는 내 옆을 지나가면서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가슴을 펴고 유유히 지나갔다.
‘그는 이 마을의 영웅입니다. 그는 이미 몇 번의 공적을 세웠으나 사자를 한 마리 죽이기 전에는 수양을 계속하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가장 용감하나 가장 위험한 사내입니다.’
마사이 마을 구경을 끝내자 다시 차를 몰았다. 파트리샤는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차가 파트리샤의 명령에 의해 한참 달려가더니 언젠가 가보았던 바위산 앞에 정지했다. 높은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니 서쪽에 강이 있었고 그 부근에 수천 마리의 동물들이 몰려있었다. 코끼리, 얼룩말, 영양, 기린 등등.
‘지금은 식사가 끝나고 물을 마시는 시간입니다.’
동물들은 평화롭고 행복했다. 파트리샤가 키호로에게 지시했다. 키호로가 들판으로 걸어가더니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저쪽 숲에서 커다란 사자가 뛰어나와 전속력으로 키호로에게 덮쳐들었다. 킹이라는 걸 알았으나 무서운 속도에 겁을 먹었다. 사자는 키호로 바로 앞에서 멈췄고 키호로는 사자의 커다란 머리를 양손으로 껴안았다.
‘킹은 키호로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키호로가 킹을 데리고 왔다. 킹은 흥흥거리고 내 주변을 돌면서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들고 쳐다보며 아는 체했다.
‘킹이 사냥을 해야 합니다.’
‘사냥해야 할 때?’
‘그럼요. 킹도 먹어야 살아갈 것 아닙니까? 우리는 킹의 사냥을 도와줍니다.’
어떻게 킹의 사냥을 돕는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키호로가 숲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짐작했다. 키호로는 서아프리카의 유명한 몰이꾼이었다. 파트리샤는 킹의 갈기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약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서너 마리의 들소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키호로는 표범처럼 빠르게 달리며 들소를 우리가 숨어 있는 곳으로 몰아넣었다. 20m쯤 거리가 좁혀지자 파트리샤가 킹을 놓아주었다. 휘파람을 불며 킹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킹은 대포알처럼 돌진했다. 킹은 들소들 중에서 가장 큰 놈을 노렸다. 들소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사자를 보자 방향을 바꿔 달아났다. 코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발굽으로 힘차게 땅을 찼으나 사자가 들소보다 빨랐다. 사자의 발굽은 딱딱한 들소의 발굽에 비해 고무처럼 탄력이 있었으며 공처럼 공중에 튀어 올라 도약했다. 사자가 들소와 간격이 좁혀지자 무서운 힘으로 들소의 등에 뛰어올랐다. 들소가 휘청거렸으나 넘어지지 않고 달렸다. 사자의 발톱이 들소의 가죽을 뚫고 박혔으므로 들소는 떨어지지 않았다. 달리는 중에 사자는 자기 무게로 들소에게 중압을 가하면서 들소의 목덜미를 물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목덜미를 깊이 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들소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킹은 쓰러진 들소의 목줄-동맥과 식도를 물어뜯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끝났어요.’
파트리샤의 차가운 말투였다. 킹이 들소를 추격하자 소녀는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추격을 보고 있었다. 야생의 살육자와 같은 눈빛이었다. 킹이 들소의 목덜미를 물었을 때는 잔인한 미소가 떠돌았다. 나는 옆에 있는 소녀가 무서워졌다.
‘파트리샤, 난 저런 구경은 싫어. 저런 구경을 사절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구경을 보고 싶다.’
‘왜요?’
차가웠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순진한 소녀의 눈동자였다.
‘파트리샤, 넌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예.’
‘그래서 킹도 사랑하는 거지. 그러나 킹에게 잡아먹힌 저 들소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저 들소도 동물이고 살아갈 권리가 있어. 동물을 사랑하는 우리는 들소도 보호해야 하고. 그러나 넌 들소를 킹에게 몰아줬다.’
‘아저씨, 그건 자연입니다. 킹도 다른 맹수처럼 들소사냥을 할 권리가 있고 저 들소는 그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
32. 질투
방갈로에 돌아와 뜨거운 목욕물에 오래도록 몸을 담궜다. 그때 브리트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쇠똥 냄새가 몸에 스몄을 것입니다.’
그의 굵은 목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우리가 베란다에 나가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때 10여 명의 토인들이 경비원과 같이 왔고 키호로도 달려왔다. 키호로가 토인들을 대변하듯 뭔가 호소했는데 몹시 흥분했다. 그들은 와간바 대표들인데 마사이가 그들의 소를 훔쳐갔다고 떠들었다. 키호로도 와간바였기 때문에 그들의 편을 들고. 브리트가 현지에 가서 조사를 하기로 했다. 브리트, 나, 키호로 그리고 대표 3명이 랜드로버를 타고 마사이 마을로 달렸다. 브리트는 잡초와 바위투성이, 요철이 심한 그 험한 길에서도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는데 믿을만한 운전 솜씨였다. 마사이들의 쇠똥집은 거의 말라 냄새가 심하지는 않았다. 가장 큰 쇠똥집에 부락장 올가루 노인이 있었다. 올가루 노인은 이사를 하고 일을 하다가 넘어져 옛날 사자와 싸워 다친 가슴이 벌어져 벌겋게 피가 배어 나왔다.
‘우리들이 소속 불명의 소들을 끌고 온 것은 인정하나 그 소가 누구의 것이며 몇 마리인지는 모르니 소들이 있는 목초지까지 같이 가자.’
목초지에는 그 정체불명의 소가 두 마리 있었고 부근의 나무 그늘에 모라네 세 명이 쉬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말썽쟁이 오륜가였다. 그들은 일행을 보고도 모른 체했다. 오만불손한 태도였다. 올가루 노인이 오륜가를 보고 말했다.
‘저 소는 네가 끌고 온 것이지?’
오륜가는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아니다!)
라는 뜻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브리트가 화를 냈다.
‘소 두 마리를 끌고 오지 않았다고? 마사이 중에서 거짓말한 놈은 처음인데 ….’
‘우리들이 끌고 온 소는 두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야.’
오륜가가 경멸하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와간바들이 고함을 지르며 욕을 했다. 모라네는 대꾸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하늘만 쳐다보았다. 와간바 따위하고는 말도 하지 않겠다는,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브리트가 와간바의 소를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와간바들이 기뻐하며 소를 몰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오륜가가 창을 던졌다. 너무 순간적으로 민첩한 행동이었으므로 제지할 시간도 없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소의 심장을 찔러 소가 쓰러져 죽었다. 위기에서 브리트가 냉정하게 움직였다. 브리트가 와간바와 마사이 사이에 들어가 고함을 쳤다.
‘키호로! 그 총 내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내가 발사한 권총은 오륜가의 다음 동작을 제지시켰다. 오륜가는 첫 번째 창을 던진 후 두 번째 창을 뽑아 던지려다가 뿅! 하고 자기 발밑에 퉁기는 권총 탄환에 놀라 멈칫했다. 오륜가의 심장을 노렸던 키호로도 총구를 내렸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사라졌다. 창을 내린 오륜가는 다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브리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올가루 노인이 나섰다. 올가루 노인은 <와간바 놈들에게 사과를 할 수 없으나 백인 손님들에게는 정중하게 사과한다>고 말한 다음 <보호관이 와간바에게 죽은 소값을 변상해주면 마사이가 보호관에게 보상하겠다>고 덧붙였다. 보상금을 주더라도 직접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브리트는 올가루 노인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됐소. 이의 없지요? 노인은 그 상처를 빨리 치료하시오.’
랜드로버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파트리샤를 만났다. 우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 아저씨에게 금렵구 밀림을 구경시켜드려요. 아버지의 영토 구석구석까지.’
밀림을 대부분 구경했기 때문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잘못이었다. 내 생각이 잘못이라고 느꼈을 때 나는 매우 즐거웠다. 나의 착각은 먼저 랜드로버에 대한 인식이었다. 대형 지프 정도로 여겼던 랜드로버는 강력한 엔진을 달고 있었으며 차체가 강판이었다. 두 번째는 브리트의 운전 솜씨였다. 차가 출발하자 파트리샤가 아버지의 옆에 딱 붙어있었는데, 차는 길이 없는 밀림으로 돌진했고, 키보다 큰 잡초를 통과하고, 뒷다리로 일어서는 말처럼 높은 지대를 오르고, 작은 개울을 뛰어넘었다. 아찔한 산정에 올랐다가 계곡으로 내려왔고 넓은 들판을 달렸다. 들판에는 많은 짐승들이 있었는데 랜드로버는 뛰어오르고 빙빙 돌며 짐승들을 덮쳤다. 기겁을 한 짐승들은 달아나다가 서로 부딪혀 쓰러지고 넘어졌다.
‘아! 저 얼룩말은 빨라요. 영양을 보세요. 얼마나 높이 뛰는가.’
파트리샤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브리트는 다른 인간들이 동물을 놀라게 하면 화를 내지만 자기 자신은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보호해주는 권리일까? 야성의 발로일까? 어느 정도 즐기자 브리트와 파트리샤가 서로 눈짓을 했다. 브리트가 파트리샤에게 뭔가를 속삭이자 파트리샤의 눈에 웃음기가 가득 찼다.
‘좋아요! 아버지, 좋아요. 그리로 갑시다!’
차가 더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세 마리의 코뿔소가 있는 10m쯤에서 차는 속도를 줄였다. 주위를 빙빙 돌았다. 코뿔소는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머리를 들고 차를 따라 돌았다.
‘저놈들은 난폭해서 코끼리에게도 덤벼듭니다. 아버지, 코뿔소와 코끼리가 싸운 얘기를 해드리세요.’
몇 년 전, 브리트와 시빌 부인이 높은 바위에서 망원경으로 금렵구를 살피다가 코뿔소와 코끼리가 정면 대결을 하는 걸 봤다. 코뿔소는 지독한 근시였고 코끼리도 그다지 눈이 밝지 않았는데 밀림에서는 둘 다 절대로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부랑 코끼리~무리에서 쫓겨나 혼자 살아가는 코끼리로써 무엇이든 보면 짓밟는 무서운 놈이었는데 길을 터주지 않자 성미 급한 코뿔소가 머리를 흔들며 위협을 하더니 슬금슬금 코끼리에게 다가갔다. 코끼리가 코를 쳐들어 코뿔소의 어깨를 쳤다. 그 타격으로 코뿔소가 서너 발 물러섰다. 브리트는 그것으로 싸움이 끝난줄 알고 망원경을 내렸는데 <둘이 싸운다!>고 시빌 부인이 소리쳤다. 코뿔소가 돌격을 했다. 그러나 코끼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긴 코로 무모한 도전자를 응징했다. 타격이 커서 코뿔소는 무릎을 꿇었으며 후퇴했다.
(이젠 끝났겠지?)
예상은 틀렸다. 코뿔소가 다시 돌진을 했다. 또 코끼리의 코에 맞았으나 또다시 돌진했다. 코끼리가 코를 코뿔소의 가슴에 대고 돌진을 막으려고 했으나 코뿔소가 코끼리의 배를 들이받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코끼리가 두서너 발 후퇴했는데 배가 찢어져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코끼리가 아픔과 노여움에 떨며 고함을 지르더니 코로 코뿔소의 앞다리를 감아 잡아당기자 코뿔소가 넘어졌다. 코끼리는 증오에 미친 듯 코뿔소를 짓밟았다. 밟고 또 밟아 코뿔소의 내장이 쏟아졌다. 코뿔소는 응징을 받았으나 코끼리도 중태였다. 그대로 놔두면 분노 때문에 온 밀림을 쑥대밭으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브리트가 달려가 사살했다. 얘기를 할 동안 천천히 코뿔소 주위를 맴돌던 랜드로버가 코뿔소를 향해 돌진했다. 코뿔소도 흥분했다. 돌진하는 랜드로버에게 정면에서 돌진했다. 랜드로버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코뿔소를 피했다. 마치 스페인의 투우사처럼.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던지 나는 코뿔소의 입김과 냄새를 맡았다. 이에 다른 두 마리가 돌진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세 마리가 돌진했다. 랜드로버는 울퉁불퉁한 지면에서 두 바퀴로 뛰어오르고 뱅뱅 돌며 코뿔소와 숨바꼭질을 했다. 만약 랜드로버가 고장이 나거나 코뿔소와 충돌이라도 하면 우리는 모두 죽는 몸이었는데 브리트는 웃으면서 죽음의 놀이를 즐겼다. 코뿔소가 랜드로버보다 먼저 지쳤다. 배를 씰룩거리며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입에서 허연 거품이 쏟아졌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그래도 그 날카로운 뿔만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브리트는 차를 초원으로 몰았다. 영양, 얼룩말, 타조들이 수백 마리 뛰놀고 있었다.
‘아빠, 스톱!’
파트리샤가 천천히 동물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동물들은 파트리샤를 보면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영양은 파트리샤 주위를 빙빙 돌면서 반기는 것 같았다. 파트리샤는 영양의 머리를 쓰다듬고 풀을 뜯어 얼룩말에게 주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동물들은 쉴 새 없이 파트리샤 주위에 몰려왔다. 얼마 후에 파트리샤는 수십 마리의 동물들에게 둘려싸였다. 마치 사인 공세를 받는 인기 여배우 같았다.
‘아빠, 저 꼬리 끝이 잘린 얼룩말은 병에 걸렸어요. 그리고 저 영양은 아기를 가졌고.’
‘알았어. 키호로에게 약을 주지.’
우리는 다시 넓고 넓은 초원을 달렸다.
‘아빠, 어디로 가지?’
얼마쯤 달렸을 때 브리트가 딸의 어깨를 치며 전방을 가리켰다. 밀림 속에 까만 점이 보였다. 그 점이 움직이고 점점 커졌다.
‘킹이다, 아빠. 킹이야!’
‘킹이 틀림없어.’
‘킹이 왜 이곳에?’
‘킹은 어젯밤에 바위산에서 여기로 이사를 했어. 경비원에게 보고를 받았지.’
사자는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고 날았다.
‘아빠, 킹에게 좀 운동을 시킵시다.’
브리트가 차를 돌리면서 킹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차가 처음에는 천천히 가다가 차츰 속력을 높혔다. 차가 전속력이 되자 킹도 전속력으로 달렸다. 무서운 속도였다. 차와 사자의 경주는 3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사자의 입에 거품이 허옇게 나오자 차의 속력을 줄였다. 사자는 뒷다리로 벌떡 일어서 브리트의 어깨에 앞다리를 걸쳤다. 코를 브리트의 얼굴에 비볐다. 사자의 붉은 털과 브리트의 머리칼이 뒤엉켰다.
‘마치 두 마리 사자 같아요.’
‘어느 쪽이 강한지 싸움을 해볼까?’
‘덤벼라!’
브리트가 사자에게 명령했다. 사자는 브리트의 자세를 보더니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간파했다. 하늘을 보며 한 번 울부짖었다, 가소롭다는 듯. 브리트가 사자에게 덤벼들었다. 사자가 뒷발로 일어서 앞발로 브리트의 어깨를 짚어 넘어뜨리려고 했다. 브리트는 사자의 허리를 껴안고 몸을 틀어 넘기려고 했다. 사람과 사자의 씨름이 좀체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사자에게는 장난이었다. 또 사람의 약점을 알고 있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사자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브리트가 속임수를 써서 허리를 잡고 있던 손으로 사자의 뒷다리 하나를 힘껏 잡아챘다. 사자가 나가떨어졌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하늘을 보며 입을 벌렸다. 그 꼴을 보고 사람들도 웃었다. 그러나 키호로는 웃지 않았다. 저쪽 밀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브리트는 키호로의 그런 태도에 주목했다.
(뭘까?)
파트리샤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듯 사자에게 덤벼들었다. 키호로가 파트리샤의 팔을 잡았고 동시에 무서운 포효가 들렸다. 노기에 찬 위협이었다. 두 마리의 암사자였다. 노여움에 머리를 흔들면서 이빨을 드러냈다. 암컷 뒤에 서너 마리의 새끼가 있었다. 암사자는 킹의 마누라들인 것 같았다. 남편이 사람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질투에 불타있었다. 나는 파트리샤를 보았다. 소녀는 어떤 사태인지 알아차렸다. 파트리샤의 얼굴이 가면처럼 얼어붙었다. 킹도 사태를 안 것 같았다. 그는 암사자를 보다가 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킹은 입장이 곤란한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파트리샤의 눈치를 살피면서 천천히 암사자들에게로 걸어갔다. 파트리샤는 입술을 깨물고 보고 있었다. 브리트가 딸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말했다.
‘허어, 그 녀석. 초청장도 보내지 않고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어.’
브리트의 조크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차가 아까 암사자들이 나왔던 밀림 부근을 달리고 있을 때 파트리샤가 고함을 쳤다.
‘차 세워주세요!’
브리트가 딸의 말을 못 들은 체했는데 파트리샤가 신경질을 냈다.
‘차를 세워달라고 하지 않아요. 세우지 않으면 뛰어내리겠어요.’
파트리샤는 거의 발작 상태였다. 파트리샤가 차에서 내리며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나를 보더니 생각을 바꾼 듯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따라와도 괜찮아요. 아저씨는 ….’
브리트가 나에게 따라가라고 눈짓을 했다. 파트리샤와 나는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키호로도 미행을 할 것이다.
‘보세요. 저기 숲이 있지요? 저기는 사자들의 영토입니다. 아저씨는 여기서 기다리세요.’
나를 큰 나무 밑에 남겨두고 파트리샤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에 들어간 파트리샤가 손을 나팔처럼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두 개의 짤막한 울부짖음이 대답했다. 증오가 터져 나오는 노호였다. 목털을 곤두세운 암사자 두 마리가 숲에서 튀어나와 아가리를 벌리고 파트리샤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더 크고 더 무서운 노호가 터졌다. 킹은 두서너 번의 도약으로 암사자와 파트리샤 사이에 뛰어들었다. 우우우! 하며 암사자들에게 경고했다. 암사자들이 앙칼진 소리를 내며 킹을 밀치고 파트리샤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킹이 대노했다. 앞발의 발톱을 세워 암사자를 목덜미를 쳤다. 목덜미에서 피가 흘렀으며 암컷은 아픔과 분노로 앙칼지게 울며 물러섰다. 또 한 마리 암컷은 겁을 먹고 숲으로 사라졌다. 싸움을 보고 있던 파트리샤가 휘파람을 불었다. 킹이 빠르게 파트리샤에게 왔다. 소녀가 사자를 쓰다듬었다. 킹이 누웠다. 소녀는 사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소녀는 암사자들이 있는 숲을 적의에 찬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던 암사자들이 단념한 듯 숲이 조용해졌다. 팔자 탓이라고 체념했을까? 암사자들과 파트리샤의 싸움에서 파트리샤가 승리했다. 소녀는 만족스러운 듯 킹의 앞다리를 베고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나느 소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자리를 떴는데 금속성 소리에 멈추었다. 창끝이었다. 불과 3~5m 떨어진 나무 뒤에 누군가 숨어서 사자와 파트리샤를 보고 있었다.
33. 오륜가
마사이 용사 오륜가였다. 검은 대리석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잠자는 파트리샤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보고 있는 나에게는 전혀 무관심이었다. 내가 일부러 라이터에 불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으나 보지 않았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무렵 파트리샤가 일어났다. 소녀는 만족스러운 듯 킹을 돌려보내고 말했다.
‘돌아갑시다.’
약 4시간 이상 걸었다. 나는 몸도 정신도 피로했으나 파트리샤는 휘파람을 불었다.
‘아저씨, 봤지요? 킹의 충성심을 …’
소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오륜가에 골몰했다. 왜 거기에 있었을까? 사자를 잡으려고 따라왔을까?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걸까? 오륜가에게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잠이 들기 전까지 오륜가를 생각했다. 킬리만자로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파리에서 중요한 일로 친구를 만날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출발을 연기했다. 동물관리관 브리트, 그의 처 시빌 부인, 딸 파트리샤와 소녀의 친구 킹. 이들과 별도지만 올가루 노인, 오륜가 등 그들의 관계에 뭣인가 결말이 날 것 같았으며 그 결말을 보고 싶었다. 이튿날 나는 좀 늦잠을 잤는데 신베린이 베란다에 있다가 다가왔다. 신베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베란다 구석에 앉아있는 파트리샤를 보았다. 신선한 우유를 나에게 권했다.
‘파트리샤, 난 어젯밤 잠을 못 잤어. 넌 몰랐지만 오륜가가 너와 킹이 함께 있는 걸 보았어.’
‘알아요. 오륜가는 우리 뒤를 따라왔어요. 지금도 저 숲에 있어요.’
‘뭐라?’
‘아저씨, 우리 가서 그를 만나볼까요?’
파트리샤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숲으로 갔다. 과연 오륜가가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여전히 가면 같은 모습이었다. 파트리샤가 토인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오륜가도 빠른 어조로 대꾸했다.
‘이 사람은 내가 그 사자의 딸이나 아니면 마술쟁이냐를 알고싶다는 겁니다.’
‘뭐라고 했니?’
‘수수께끼라고 했어요. 그리고 저 사람은 ….’
파트리샤가 허리를 비틀며 웃었다.
‘저 사람은 내게 청혼을 했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 눈이 동그래졌다.
‘넌 아직 열세 살인데 ….’
‘마사이들은 열 살이 넘으면 결혼을 해요.’
‘그건 그렇고, 넌 뭐라고 대답했지?’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런데 저 사람이 자기와 결혼하면 보호해주고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나에게는 친구인 킹이 있으니 보호받을 필요가 없고 외롭지도 않다고 했지요.’
그때 오륜가가 또 뭐라 고함을 질렀다. 사자 킹하고 담판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파트리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으나 한편 조롱하는 웃음 같기도 했다. 파트리샤는 오륜가에게 킹을 만나고 싶으면 숲으로 가되 창이나 무기를 소지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심술궂게 덧붙였다.
‘당신은 맨손으로 사자와 만날 용기가 있느냐?’
오륜가의 눈에 분노가 일어났다. 마사이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오륜가는 <만나겠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되면 오륜가와 킹은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몇 시간 뒤 오륜가가 킹을 만나러 왔다. 나와 파트리샤는 킹하고 놀고 있었다. 킹하고 친구가 되어 갈기를 만자며 놀고 있었는데 오륜가가 나타나 걸어왔다. 사자가 으으렁거렸다. 경계와 혐오가 눈에 나타났다.
‘조용히 해, 조용히!’
오륜가는 7~8m 떨어진 나무에 기대 킹을 보고 있었다. 파트리샤가 킹을 데리고 오륜가에게 접근했다. 사자는 마사이에게 본능적인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오륜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경멸하는 눈초리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에 기댄 몸이 가늘게 떨렸다. 파트리샤가 놀리듯 사자와 같이 접근했다가 물러서고 또 접근했다. 사자는 가까이 가면 아가리를 벌리고 위협을 했다. 네 번을 반복하자 오륜가가 화를 냈다.
‘나는 놀림감이 아니다. 그따위 사자는 겁나지 않는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지만 다음에는 창을 갖고 와 대결하겠다.’
고함을 쳤다. 오륜가가 돌아간 뒤에도 사자는 분노에 떨었다. 파트리샤가 앞발에 누워 머리를 가슴에 비벼대니까 그제서야 안정된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날 오후 늦게 시빌 부인이 방갈로에 찾아왔다. 신경쇠약증세는 없었고 솔직하고 침착했다. 시빌 부인은 내가 내민 술잔을 받으며 천천히 얘기를 했다.
‘인간은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렇습니다.’
‘내가 지푸라기가 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되어드리겠습니다.’
시빌 부인이 웃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가족은 킹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내가 도시문화만 동경하는 들뜬 여자고 아프리카나 동물 세계는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증오하는 히스테리증 여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파트리샤는 내가 킹을 미워하고 그 사자와 같이 살고 있는 딸까지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늘 사자와 같이 있는 것만을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론 부친까지 <사자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주의를 하면 부모가 합심해서 사자와 자기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을 하면 내가 남편에게 화를 냅니다. 딸을 야만인으로 만들 작정이냐고. 부인은 흥분하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우리 셋은 늘 싸움만 합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지요. 서로 상대편이 마음이 상하면 후회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도 해결책을 몰랐다.
내 생각으로는 파트리샤가 여기를 떠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인데 …. 시빌 부인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파트리샤가 당신을 신뢰합니다. 그 아이에게 충고해줄 수 없나요?’
시빌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부인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갔다. 부인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트리샤가 왔다. 흥분했다. 소녀는 킹이 제 마누라와 자식을 버려두고 자기와 놀았다고 말하면서 킹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 얘기했다. 마음대로 말하게 두었다가 슬그머니 얘기를 꺼냈다.
‘파트리샤 난 곧 여기서 떠나. 알고 있지?’
파트리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알아요. 그 게 인생이란 거죠.’
‘그런데 난 너와 헤어지기가 싫어. 나와 같이 파리에 가볼 생각은 없나?’
‘얼마 동안?’
‘거기서 새로운 친구와 사귈 때까지.’
그 순간 소녀가 돌처럼 굳어졌다.
‘엄마하고 똑같은 얘기야! 당신은 누구 편이지요?’
‘언제나 네 편.’
소녀는 나를 쏘아보았다.
‘난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아요. 절대로!’
그때 보고가 뛰어들었다. 마사이의 장로 올가루 노인이 죽었다는 얘기였다. 마사이는 후계자로 현명한 인품의 와이나라나를 결정하고 장례식과 축하연을 같이 연다는 정보였다. 손님으로 브리트 부부와 딸 파트리샤 그리고 나도 초대를 했다. 즉시 브리트를 만나 같이 가도 되겠는가 물었다.
‘물론 가야지요. 초대에 가는 건 예의입니다. 연회가 정오에 시작될 것이니 같이 갑시다.’
‘요즘 건강이 좀 회복되어서 산책 겸 가기로 했습니다.’
가면서 브리트가 설명했다. 올가루 노인은 추장다운 귀족이었으며 귀족다운 죽음이었습니다. 사자 발톱에 할퀸 상처가 덫이 났으나 죽기 직전까지도 마을 일을 했습니다. 몇 년 전 올가루 노인이 사자 사냥을 했을 때 브리트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모라네가 사자를 몰아넣고 사자의 퇴로를 막았다. 사자는 퇴로가 막힌 것을 보자 정면으로 튀어나와 모라네에게 덤볐다. 창이 날아가 사자의 어깨에 꽂혔으나 사자는 정면의 모라네에게 덤벼들어 앞발로 방패를 쳤다. 물소가죽으로 만든 방패가 걸레처럼 찢기자 사자는 모라네의 팔을 물었다. 그리고 넘어진 모라네의 배에 올라타고 목줄을 더듬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두목이었던 올가루 노인이 사자와 모라네 사이에 끼어들어 방패로 사자의 몸을 막았다. 사자가 선 자세가 되자 모라네들이 덤벼들어 칼로 난도질을 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사자는 1분 후에 죽었다. 가죽도 쓸모가 없었다. 브리트가 부상 당한 모라네를 치료했는데 올가루 노인의 상처가 가장 컸고 피를 많이 흘려 살기 어려웠으나 강인强忍한 그는 살아났다. 마사이마을 부근에서 파트리샤가 차를 세웠다.
‘아저씨, 좀 있다가 마을에 가요. 지금 가봐야 지루한 인사를 늘어놓고 연회는 아직 멀었어요,’
‘바로 말하자면 마사이는 내게 귀찮은 질문을 할 거라 피했어요. 오륜가가 나와 사자가 같이 있는 걸 봤으니까 필경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렸을 겁니다. 굉장히 과장을 해서 ….’
약 한 시간 후에 마을에서 북소리, 노랫소리,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됐어요. 갑시다.’
파트리샤는 북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파트리샤가 마을에 들어서자 북소리와 노래가 딱 멈췄다. 수많은 시선들이 파트리샤에게 집중되었다. 여자들은 공포가 어렸고, 남자들은 존경의 표정이었다. 주연이 시작되었다. 여자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손목에는 은팔찌를 찼다. 남자는 벌거숭이였다. 원형의 잔치판 가운데 모라네들이 사자의 갈기를 머리에 쓰고, 창을 들고 칼을 차고 방패를 들고 춤을 추었다. 몸을 흔들고 하늘로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스탠딩 점프인데 높이가 1m 가까이 되었다. 북소리가 빨라지자 광기가 폭발했다. 미친 듯이 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춤이 아니라 히스테리 환자 같은 경련이었다. 노래라기보다는 짐승의 괴성이었다. 껑충껑충 뛰는 높이도 엄청났다. 모라네의 지휘자는 오륜가였다. 브리트와 시빌 부인은 추장 옆의 표범 가죽에 앉았다.
‘파트리샤에게 여기를 떠나라 권고했나요?’
‘녜. 그러나 ….’
시빌 부인이 얼핏 검은 안경을 썼다.
마사이의 춤이 고조에 달했다. 땅을 굴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고, 손발을 더 심하게 떨고, 동체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마치 집단열병을 앓는 사람들 같았으며 열병은 주위의 마사이들에게도 전염됐다. 구경꾼들이 남녀 구별 없이 일어나 고함을 지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돌연 한 무리의 소녀들-열서너 살 정도의 소녀들이 튀어나와 모라네들처럼 몸을 비틀고 괴상한 고함을 지르면서 춤을 추었다. 열병은 파트리샤에게도 전염된 듯 소녀는 입술이 떨고 신음 소리를 냈다. 시빌 부인의 히스테리가 발작되었다.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겠어요. 너무 불유쾌해요. 저 계집아이들 좀 보세요. 불결해요.’
‘시빌, 참아요. 그런 소리는 실례야. 우린 초대받은 손님이 아닌가?’
‘못 참겠어요. 난 가겠어.’
이때 파트리샤가 소리쳤다.
‘부탁입니다. 좀 조용히 하세요. 춤은 지금부터 클라이맥스인데 ….’
‘여보, 파트리샤 좀 보세요.’
브리트는 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여보. 여보. 내 말이 안 들려요?’
마침 그때 오륜가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브리트에게 호소를 했다. 브리트는 마사이 말을 잘 몰라 새 추장 와이나라나가 완벽하게 영어로 통역했다. 파트리샤를 자기 처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시빌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손발이 와들와들 떨렸다. 브리트가 시빌 부인의 어깨에 선을 얹고 달랬다.
‘염려 말아요. 이건 모욕이 아니라 젊은이는 자기들의 풍습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뿐이니 ….’
브리트가 오륜가에게
‘오륜가는 아직 모라네이니 결혼할 자격이 없어. 파트리샤도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아니야. 결혼문제는 양쪽 모두 자격을 얻었을 때 고려해본다.’
남편의 침착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시빌 부인이 발작을 일으켰다.
‘파트리샤, 일어나! 그 꼴이 뭐냐? 야만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안 돼. 일어나!’
파트리샤가 어머니 표정을 보더니 얌전히 일어났다. 오륜가는 일어선 파트리샤를 불타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더니 갑자기 머리에 쓴 사자의 갈기를 벗어던지고 창을 치켜들면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보, 우리 여기를 떠납시다.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아요.’
시빌 부인이 애원하듯 말했다.
‘응, 이제 일어날 때지.’
차 속에서 시빌 부인이 물었다.
‘그 젊은 모라네가 마지막에 고함친 말은 뭐라고 한 거야?’
‘어머니, 난 그 소리를 잘 듣지 못했어요.’
파트리샤가 거짓말을 했는데 오륜가가 친 고함은 <이제 곧 사자하고 싸움을 하여 승리한 다음 결혼 자격을 얻어 너를 데리러 간다>라는 말이었다. 오륜가가 킹과 싸움을 작정한 것 같아 불안했다. 마사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마사이의 모라네는 겁이란 걸 몰랐고 한 번 한다 하면 반드시 하는 사내들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킹이 살고 있는 바위산으로 갔다. 랜드로버를 천천히 몰면서 주위를 돌았다. 운전사 보고가 이상한 표정으로 봤으나 명령대로 하라는 내 핀잔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점심도 거기서 먹었다. 불을 피워 빵과 야채수프를 먹고 있을 때 파트리샤가 나타났다.
‘오늘 아침에는 착한 아이가 되었어요. 엄마 시중도 들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엄마도 기분이 좋아졌고,’
‘그 건 잘한 일인데 ….’
‘그런데, 아저씨는 왜 여기에 ….’
‘집에 있기 답답하고, 킹하고 만나고 싶고 ….’
‘엄마는 또 파리에 가라고 했어요. 파리의 놀이터와 극장 얘기를 해주었는데. 나는 여기가 제일 행복해요. 하늘과 나무들을 보세요.’
그때 들판에 점이 나타났다. 킹은 우리를 못 보고 들판을 돌아다녔다. 소녀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결국 킹이 우리를 발견했다. 킹은 기쁨에 넘치는 포효를 한 다음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파트리샤 곁에 벌렁 누웠다. 앞발을 내밀었다. 파트리샤 보고 품에 안기라는 뜻이다. 파트리샤가 불안한 표정으로 킹의 요구를 묵살하고 들판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킹이 슬그머니 소녀의 허리를 쳤다. 장난을 하고 싶은 것이다. 소녀는 굳은 표정으로 킹의 앞발을 뿌리쳤다. 그게 장난인 줄 알고 킹이 다시 앞발로 소녀를 건드렸으나 소녀가 화를 냈다. 킹을 밀어내고 주먹으로 때렸다.
(웬일이지?)
킹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러서더니 코를 소녀의 뺨에 부볐다. 소녀는 코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놀란 킹이 머리를 흔들더니 뒤돌아섰다.
‘안 돼! 지금 가면 안 돼!’
소녀가 사자의 갈기를 잡고 끌어왔다.
‘파트리샤, 누가 오느냐?’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원을 가리켰다. 잡목림에 사자 갈기를 쓰고 방패와 창을 든 오륜가가 나타났다. 그는 킹과 대결하여 죽이고 파트리샤를 아내로 맞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하려고 왔다. 파트리샤와 킹이 일어섰다. 킹은 예전부터 파트리샤의 행동이나 표정을 읽고 소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다가오는 마사이를 적으로 판단했다. 나는 그 비극적인 싸움을 말리려고 킹과 오륜가의 사이에 들어갔다. 오륜가가 나에게 경고했다. 방해하지 말라는 고함이었다. 파트리샤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 비켜주세요. 아저씨가 비키지 않으면 아저씨를 찌르겠다고 했어요.’
투지로 가득 찬 오륜가를 제지할 수 없었다. 권총으로 쏘아죽이는 것 외에는 …. 오륜가가 5~6m까지 다가왔다. 킹이 적의를 느끼고 나지막이 그러나 피가 얼어붙는 소리로 목을 굴렸다.
‘조용히, 킹, 조용해!’
파트리샤가 오륜가에게 말을 하려는 순간 오륜가가 괴상한 고함을 지르며 창을 든 손을 쳐들었다. 창이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킹의 어깨에서 피가 분출했다. 파트리샤가 비명을 지르며 꽉 잡고 있었던 킹의 목덜미를 놓았다.
‘킹! 덤벼, 덤벼!’
킹이 공중을 날아 육중한 몸으로 오륜가를 덮쳤다. 오륜가는 방패로 몸을 가리고 어느새 칼을 빼 들었다.
‘죽여! 죽여. 그놈을 죽여버려!.’
오륜가가 쥐고 있는 방패는 물소껍질로 만들었으나 킹의 앞발치기에 걸려 걸레가 되어버렸다. 나는 다음에 일어날 비극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버렸다. 킹의 노호와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브리트의 랜드로버가 10m쯤 떨어진 곳에 급정차했다. 브리트가 키호로에게 명령했다.
‘킹을 쏘아라!’
키호로가 머리를 흔들었다. 킹과 한 덩어리가 되어 싸움을 하고 있어서 쏠 수 없었을까? 차마 킹을 쏠 수 없었을까? 그 순간에 싸움은 결말이 나고 있었다. 사람과 함께 살아온 킹은 오륜가의 칼을 교묘하게 피할 줄 알았다. 킹은 앞발로 창을 든 오륜가의 팔을 누르고 또 한 발로는 가슴팍을 눌렀다. 오륜가는 머리와 어깨에 일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나 그래도 마지막 기력을 다해 자유로운 한 손으로 사자의 목을 받쳐 들어 사자가 목줄을 물지 못하도록 막았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났다. 그때 브리트가 고함을 치며 키호로의 총을 빼앗아 들었다. 총을 든 브리트는 1초의 몇 분의 1 정도 망설였다. 그러나 그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킹이 오륜가의 손을 뿌리치고 목을 물려는 찰라 총을 발사했다. 황소 브리트의 총은 정확하게 사자의 심장을 뚫었다. 그 충격으로 킹이 벌렁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노여움이 아닌 놀라움의 소리를 질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놀라움이었다.
(브리트가 나를 쏘다니!)
그러나 그 소리가 아직 사라지기 전에 2탄이 발사되었다. 유명한, 브리트의 속사였다. 갑자기 초원이 침묵에 싸였다. 파트리샤는 화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
브리트가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파트리샤, 파트리샤!’
소녀는 킹만 보고 있었다. 사자는 옆으로 누워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킹, 킹!’
소녀는 사자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머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킹,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소녀는 사자의 머리를 치며 울부짖었다. 브리트가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아버지가 킹을 죽였어요. 아버지가. 킹이 그렇게 아버지를 따르고 사랑했는데 아버지가 킹을 쏘았어요.’
‘파트리샤, 그러나 ….’
‘듣기 싫어요! 아버지는 친구를 죽였어요. 친구와 함께 딸도 죽였어요.’
그때 보다 못해 내가 참견을 했다.
‘파트리샤, 그런 말을 하면 ….’
‘파트리샤, 너도 괴롭지만 아버지도 괴로운 줄 모르겠니? 죽은 킹만 보지 말고 아버지도 봐. 아버지도 ….’
브리트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녀는 그래도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브리트가 다가서자 달아나 키호로에게 안겼다.
‘키호로, 넌 총을 쏘지 않았어. 넌 킹의 친구야. 넌 착한 사람이야.’
늙은 키호로는 상처투성이 얼굴에 무한한 연민을 담아 소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때 오륜가가 신음을 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숨이 붙어있었다. 상처를 살폈는데 절망적이었다. 사자의 일격은 그의 두개골을 분쇄했고 어깨의 상처도 치명상이었다.
‘그 사람 죽었어요?’
파트리샤가 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대로 순진하고 용감했어요. 그러나 ….’
이상한 논리였다. 사자에게 도전을 하여 비극의 원인을 만든 오륜가에게는 원한이 없고 킹을 쏜 아버지만 미워했다.
모든 일이 끝났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비극이 일어나면 모여드는 독수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브리트가 독수리에게 화가 났다. 연사를 퍼부었다. 파트리샤는 킹의 갈기를 쥐고 울고 있었다. 소녀는 모성애, 우정, 질투를 오직 킹을 통해 느꼈고 지금은 죽음의 의식까지도 사자를 통해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파트리샤, 이게 죽음이다.’
‘아저씨 나를 데리고 가주세요. 이젠 아버지 얼굴 보는 게 싫어요. 그리고 이 초원, 나무들도 싫어요.’
‘오냐, 네 말대로 하마. 어디로 갈까?’
‘나이로비에 가겠어요. 전에 있던 학교 기숙사에.’
그날 밤, 나와 파트리샤, 보고는 나이로비로 향하는 랜드로버를 탔다. 파트리샤는 부모에게 <굿 바이!>,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브리트와 시빌 부인은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딸과 작별했다.
‘넌 부모님께 너무 했어!’
‘괜찮아요. 어머니는 이렇게 된 걸 은근히 좋아하고 아버지는 위스키를 마시면 잊어버려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위로하면서 슬픔을 잊을 거예요.’
‘넌 어떻게 할 건데?’
파트리샤가 캄캄한 킬리만자로 평원을 응시했다. 멍한 시선이 가끔 긴장한 것은 사자 킹의 환상을 본 것일까?